7월 1일 임진
집의 신명규, 사간 박증휘(朴增輝) 등이 합계하였는데, 그 대략에,
"지금 신덕 왕후를 부묘하라는 논의를 삼사가 번갈아가며 계청한 지 벌써 몇 달이 지났는데 전하께서는 들은 체하시지도 않고 계십니다. 인자하시고 효성스러운 전하께서 어찌하여 이처럼 지나치게 망설이고 신중히 여기십니까. 삼가 생각건대 신덕 왕후께서 생존시에 이미 한 나라의 국모로 계셨다면 승하하신 뒤에 백세토록 종묘에 모시는 것은 변경할 수 없는 정론인 것입니다. 다만 당시 의논드린 신하들의 식견이 잘못된 것으로 인하여 마침내 이러한 지경에 이르게 되었는데, 이것이 어찌 한스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예를 중시하였던 태조(太祖)께서는 성대한 예를 갖추어 보책(寶冊)을 바치도록 하고 능침을 높이 봉축하게 하였는가 하면, 효성이 지극하신 태종(太宗)께서는 제사를 공경히 받들고 향축(香祝)을 친히 전하였습니다. 아, 생존시에 사랑하시고 승하하신 뒤에 받드시기를 시종 이와 같이 하였으니, 유독 제때에 부묘하지 못했던 이 일이 어찌 조종들의 본뜻이었겠습니까.
다행스럽게도 우리 성상께서 조종을 받드는 성의가 깊으시므로 송구스러운 감회를 느끼시어 왕후의 산릉을 옛모습 그대로 복구하셨습니다. 그러나 태묘에 배향하는 의식만은 아직 하지 않고 계시는데 이것이 어찌 흠전(欠典)이 아니겠습니까. 아, 이 논의가 선묘조(宣廟朝) 때에 처음 제기되었는데 지금은 선묘께서 망설이던 것을 이미 모두 윤허하셨습니다. 부묘하는 한 가지 일에 있어서만 이처럼 고집하시는 것은 과연 무슨 뜻이십니까. 전하께서 진정 결단을 내리시어 부묘하는 성대한 의식을 속히 거행하신다면, 지하에 계신 모후의 억울함을 풀어드리는 것일 뿐만 아니라 하늘에 계신 조종의 영령도 반드시 기뻐하실 것입니다. 속히 예조로 하여금 부묘하는 예를 의논하여 정하도록 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따르지 않았다.
윤집(尹鏶)을 대사헌으로, 정화제를 정언으로, 김석주(金錫胄)를 부교리로, 심재(沈梓)·오시수(吳始壽)를 승지로, 장선징을 병조 참판으로, 김징을 전라 감사로 삼았다.
7월 2일 계사
승지를 전옥서에 보내어 죄가 가벼운 죄수들을 석방하게 하고, 형조에 명하여 죄수들을 너그럽게 처결하여 혹심한 더위에 옥에 갇혀 있는 폐단이 없게 하라고 하였다.
교리 이규령(李奎齡), 수찬 이선(李選) 등이 상차하여 신덕 왕후를 부묘하는 예를 속히 거행할 것을 청했는데, 상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7월 3일 갑오
태학 유생 조상우 등이 상소하여 신덕 왕후를 부묘하자는 청을 다시 아뢰었는데,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대신 및 비국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였는데 평안 병사 성익(成釴)도 입시하였다. 영의정 정태화가 나아가 아뢰기를,
"호조 판서 김좌명(金佐明)이 올린 차자를 비국에 계하(啓下)하였습니다. 충청 수사 신여철(申汝哲)은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잘못이 있으므로 파직시키고 그 대임자를 속히 뽑아야겠습니다."
하니, 상이 그리하라고 하였다. 정태화가 또 아뢰기를,
"새로 사관(史官)에 천거된 자들 가운데 수망(首望), 부망(副望)으로 뽑힌 자가 사고가 있을 경우 말망(末望)으로 뽑힌 사람들이 응강(應講)하지 않으려고 하는데 이것은 잘못된 규례입니다. 자신들 내부의 천거 차례는 조정이 알 바가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에도 새로 천거된 자들 중에 수망, 부망으로 뽑힌 사람이 파산(罷散)되어 있거나 향리에 내려갔을 경우 말망으로 뽑힌 사람을 취재하여 응강하게 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옛 규례입니다. 그런데 요즈음 나이가 젊은 사람들이 멋대로 행동하여 습관화가 되었으니 매우 놀라운 일입니다. 이후로는 수망, 부망으로 뽑힌 사람이 파산되어 있거나 외지에 있을 경우 말망으로 뽑힌 자들 중 사고가 없는 사람을 응강하게 하고, 이것으로 길이 정식을 삼게 하소서."
하니, 상이 그리하라고 하였다. 상이 납[鉛]을 굽고 삼(蔘)을 캐는 일을 금지하고 양곡을 비축하는 일에 대해서 성익에게 당부하자, 성익이 아뢰기를,
"성심껏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영남에 혹심한 수재가 났다고 하는데, 매우 놀랍고 우려된다."
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안동의 수재는 참으로 큰 변고입니다. 지금 듣건대 읍내의 수십리 땅에 퍼붓듯이 비가 내렸는데 강물은 넘치지 않았으나 북문 밖에 있는 작은 시냇물이 잠깐 사이에 홍수로 변하여 성을 무너뜨리고 흘러 들어와 객사(客舍)가 무너졌는가 하면, 판관(判官)이 죽을 뻔하다가 겨우 살아났고 영장(營將)도 화를 입었다고 하니, 이것이야말로 괴변인 것입니다."
하였다. 정태화가 아뢰기를,
"세자의 회강(會講)에 대해서 번거롭게 계속 아뢰게 할 것이 아니라 언제 하라는 기한을 정하여 분부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11세가 된 뒤에 취품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7월 5일 병신
신덕 왕후를 부묘하는 일을 합계하였는데, 상이 따르지 않았다.
태학 유생 조상우 등이 세 번째 상소하여 전의 일을 다시 아뢰었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7월 6일 정유
합계하여 부묘하는 일을 다시 아뢰었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이때부터 끊임없이 연계하였다.
대사헌 윤집이 추감(推勘)이 완결되지 않았다는 것으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7월 7일 무술
이경억(李慶億)을 예조 판서로, 이상진(李尙眞)을 대사헌으로, 정륜(鄭錀)·민점(閔點)을 승지로, 정창도(丁昌燾)를 장령으로, 이동현(李東顯)을 충청 병사로, 신류(申瀏)를 경상 좌병사로, 홍만종(洪萬鍾)을 봉교로, 신익상(申翼相)을 검열로, 민정중(閔鼎重)을 동지사로, 권상구(權尙矩)를 부사로, 신경윤(愼景尹)을 서장관으로, 김만기(金萬基)를 부제학으로 삼고, 이관징(李觀徵)을 종성 부사(鍾城府使)로 승진 제수하고, 이훤(李藼)을 문학으로 삼았다.
양사의 여러 관원이 대궐에 나아와 뵙기를 청하였는데 이때 상의 몸이 좋지 않았으므로 의견들을 써서 올리게 하였다. 여러 관원들이
"성상의 옥후가 회복되기를 기다려 다시 와서 뵙기를 청하겠습니다."
라고 아뢰고 물러갔다.
호서 지방에 전염병이 크게 번졌다.
7월 11일 임인
헌부가 아뢰기를,
"지난번 본부가 개좌(開坐)했을 때 상제로서 주진기(朱震機)란 사람이 자기 친형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매달리다시피 서장을 올렸는데, 그 서장 내용을 살펴보니 정상이 매우 애처로웠습니다. 그래서 형조의 전후 작성해 놓은 문서를 가져다가 살펴보았는데 이 옥사를 조사해온 지 벌써 3년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상께서 ‘이 옥사는 보통 살인 사건에 비할 수 없으니 철저히 조사하여 속히 자복을 받도록 하라.’는 분부를 내리시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런데 추관(推官)들이 유념하지 않을 뿐더러 끝까지 조사하여 결말을 지으려는 조처가 전혀 없었는 데다가 또 죄수로 하여금 옥에서 공공연히 나와 멋대로 행동하게 하였습니다. 그 태만스럽고 소홀히 여겨 옥사를 처리하는 데 있어 엄하게 하지 않은 정상이 매우 놀랍습니다. 전후 추관들을 모두 파직시키소서. 그리고 당시 감사는 제대로 단속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 무겁게 추고하도록 하고, 본도로 하여금 강직하고 영명한 사람을 별도로 뽑아 이 옥사를 속히 처결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따랐다. 또 거제 현령(巨濟縣令) 허징(許徵)이 일찍이 남해 현감(南海縣監)으로 있으면서 본 고을에 유배된 역적 역관 형장(馨長)의 딸을 몰래 간통한 일을 논하여 사판에서 삭제시킬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파직만 시키라고 하였다가 세 번째 아뢰자 따랐다.
이조 판서 박장원(朴長遠)이 다섯 번째 사직소를 올려 체직시켜 줄 것을 청하자 상이 허락하였는데, 박장원이 전에 본직에 있을 때 탄핵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이경억을 이조 판서로, 박장원을 예조 판서로, 강백년을 대사간으로, 이선을 북평사(北評事)로 삼았다.
7월 12일 계묘
봉산(鳳山)·안악(安岳)·신천(信川)·재령(載寧)·문화(文化)·연안(延安) 등 16고을의 세선(稅船)이 3월 22일에 바다에서 파선되어 47명이 익사하였고 3천 1백 24석의 세곡이 침몰되었는데, 호조의 계사에 따라 모두 탕감하도록 하였다.
7월 13일 갑진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대신 및 비국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였는데 삼사가 청대하여 입시하였다. 영상 정태화가 나아가 아뢰기를,
"신들은 요즘 삼사가 논계한 일을 상께서 필시 윤허하실 것이라 여겼기 때문에 지금까지 기다리면서 미처 아뢰지 않았습니다. 신덕 왕후를 부묘하는 일은 선묘조 때에 수년간 논계하여 비록 윤허를 받지 못했습니다만, 지금은 사세가 이전과 다릅니다. 이미 능침을 봉축하고 정자각을 건립하였는데 부묘하는 한 가지 일만 망설이고 계시니 여러 사람이 간절히 기대하고 조야(朝野)가 같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 양사가 합계하고 빈청이 계사를 올리며 백관이 정청(廷請)하는 일이 잇따라 일어날 것인데 상께서는 하필 이런 일이 있은 뒤에야 따르시겠습니까."
하고, 좌상 허적은 아뢰기를,
"신이 당초 의논드릴 때 능침을 봉축하고 정자각을 건립하는 것은 강력히 주장하였지만 부묘하는 일에 대해서는 곤란하게 여겼으므로 상께서 이처럼 망설이게 되었으니 이것은 신의 죄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따르지 않는 것은 참으로 일이 중대하기 때문이다. 아래에서 논집하는 것이나 내가 망설이는 것이나 모두 각기 소견이 있는 것이다."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상께서 망설이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일은 의리가 매우 분명하고 여러 사람의 논의가 모두 동일합니다. 조종조 때 처치한 것의 옳고 그름에 대해서는 말할 것 없이 속히 따르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망설이며 미루는 것은 단지 일이 중대하므로 경솔히 거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자, 정태화가 아뢰기를,
"지금 따르신다 하더라도 경솔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였다. 상이 묻기를,
"지난번 삼사가 청대한 것은 무슨 일 때문이었는가?"
하니, 집의 신명규가 아뢰기를,
"신들이 접때 상께서 편찮으신 것을 알지 못하고 청대하였는데 그때 청대한 것도 역시 이 일 때문이었습니다. 이 일은 선조조 때와는 다릅니다. 이미 능침을 봉축하고 정자각을 건립한 이상 신주를 만들지 않을 수 없고 신주를 만든 이상 부묘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당시 예를 의논한 신하들은 ‘한 임금에게는 한 왕비를 배위로 한다.’는 말 때문에 이러한 잘못이 있게 된 듯합니다. 지금 원릉(園陵)의 여러가지 의식을 차례로 거행하고서 유독 부묘하는 일에 대해서만 망설이며 미루시는데, 이것은 아마도 전하께서 여러 사람의 마음을 통촉하지 못하셨기 때문에 그런 듯싶습니다."
하고, 지평 신정(申晸)은 아뢰기를,
"천리(天理)와 인정(人情)에 부합하고 삼사가 이처럼 쟁집하는데 아직도 한 마디 윤허를 내리지 아니하시니, 전하의 뜻이 아무리 신중을 기하는 데 있다 하더라도 이처럼 망설이는 것은 부당한 듯합니다."
하고, 교리 이규령은 아뢰기를,
"능침을 봉축하고 정자각을 건립한 뒤에 부묘하는 예를 거행하는 것은 결국 순서에 따라 해야 할 일입니다. 지금까지 망설이고 계시는 것은 너무 지나치게 신중히 여기시는 것인 듯싶습니다."
하고, 신명규·신정이 또 아뢰기를,
"대신과 삼사가 일제히 아뢰고 있으니 오늘 따르신다 하더라도 경솔히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백성들의 여론을 여기에서 알 수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제신들이 아뢴 것에 대해서 모두 알았다. 그러나 나의 의견을 갑자기 고치는 것도 또한 쉬운 것이 아니다."
하였다. 이규령이 아뢰기를,
"조종들이 거행하지 않았던 것이므로 어렵게 여기시는 것이지만 만일 따르신다면 실로 조종들에게 영광이 있을 것입니다."
하고, 신명규는 아뢰기를,
"신덕 왕후께서 일국의 국모로 계신 지 5년이었으니 참으로 부묘하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옛날 ‘한 임금에게 한 왕비를 배위로 한다.’는 예가 있었기 때문에 당시 조정 신하들이 들은 말에 집착하여 이 예를 인용했던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환조(桓祖) 이상은 배위가 각각 한 분이었으니 아마 그 당시 예가 그러했던 것 같다."
하였다. 상이 장소가 좁다는 이유로 계사가 끝나자 삼사의 관원 1명씩만 남아 있게 하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나가게 하였다. 신명규가 신덕 왕후를 부묘하는 일에 대해서 합계로 아뢰자 따르지 않았고, 또 공주들이 집짓는 일에 대해 논하였으나 역시 따르지 않았다. 신명규가 자신의 소회를 아뢰려고 하자 상이 중지시키면서 이르기를,
"간원의 계사가 끝난 뒤에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정언 어진익(魚震翼)이 공주의 집짓는 일에 대해서 연계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신명규가 아뢰기를,
"이 일에 대해서 양사가 쟁집한 지 벌써 3개월이 지났는데 신들만 지루할 뿐 아니라 상께서도 지루하게 여기실 것입니다. 공의(公議)가 제기된 이상 중지할 수 없으니 시원스럽게 한 마디 윤허를 내려주시는 것이 신들의 소망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일은 그렇지 않다. 대간의 논계가 정지된 뒤에 부마들이 각자 소를 올리기는 하였으나 독촉에 못견디어 들어가 거주하였다면 어찌 명을 받든 것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지금 관아의 집을 철거하여 옮기려고 하는 것은 실로 민가를 철거해야 하는 폐단 때문이다. 대간이 다시 지어주지 못하게 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나는 그러한 것이 옳은지 모르겠다."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이번에 공주의 집을 철거하여 옮기는 일이 어찌 성상께서 하고 싶어 하시는 것이겠습니까. 참으로 어쩔 수가 없어서 하시는 것입니다. 사리로 말할 경우 선왕께서 지어주신 집에 살 수 없는 상황이라면 상께서 다른 집을 마련해 주시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신의 생각에는 재력을 적당히 대주는 것도 무방할 듯합니다. 대간의 계사를 따르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재력을 대주는 것은 부조해 주는 것뿐이다. 어찌 다시 지어줄 수 없겠는가."
하였다. 강화 유수 김휘(金徽)가 나아가 아뢰기를,
"철곶 첨사(鐵串僉使)와 정포 만호(井浦萬戶)를 농사 일이 끝난 뒤에 본진에 도로 이속시켜야 하는데 일이 곤란한 점이 많습니다."
하니, 홍중보(洪重普)가 아뢰기를,
"선왕조 때 승천부(昇天府)에 별장(別將)을 두었었는데 철곶으로 진을 옮긴 뒤에 또 별도로 철곶에 별장을 두었습니다. 승천부와 철곶의 거리는 그다지 멀지 않습니다. 따라서 첨사를 본진으로 다시 돌아가게 할 경우 별장을 그대로 둘 필요가 없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별장을 줄이도록 하라."
하였다.
이조 판서 이경억이 소를 올려 체직시켜 주기를 청했는데 전에 사신갔을 때의 일로 논핵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7월 14일 을사
집의 신명규, 지평 신정이 입계하는 공문에 도장을 찍지 않았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좌참찬 송준길(宋浚吉)이 상소하여 병의 정상을 아뢰면서 겸임하고 있는 성균 좨주, 선공·전의감 제조를 체직시켜 주기를 청했는데, 상이 답하기를,
"한번 헤어진 뒤 그리운 마음이 어찌 끝이 있겠는가. 전의감 제조에 대해서는 이미 경의 뜻에 부응하였으니 안심하고 사직하지 말아, 나의 뜻을 저버리지 말라."
하고 사관을 보내어 전유하도록 하였다.
황해도에 돌림병이 크게 번졌다.
사학 유생 성지선(成至善) 등 2백여 명이 상소하여 신덕 왕후를 부묘하는 예를 거행하라고 청했는데, 상이 따르지 않았다.
7월 15일 병오
이유(李秞)를 집의로, 이광적(李光迪)을 장령으로, 이민채(李敏采)를 지평으로, 신정(申晸)을 문학으로 삼았다.
호조의 홍산(鴻山) 세선(稅船) 3척이 원산(元山)에서 점검을 받지 않고 떠나왔는데, 상이 사공·격군(格軍)의 정죄 점목(定罪粘目)에 대하여 판부(判付)하였다.
"원산에서 점검을 받지 않고 제멋대로 떠나왔으니, 파선시킨 감관(監官)과 사공·격군들은 주모자를 가려내어 사목(事目)에 의해 처단하고, 파선시키지 않은 감관·사공·격군들은 주모자만 형추한 뒤 전가 사변(全家徙邊)시키도록 하고 그 밖의 사공·격군들은 유배시키되, 전례로 삼지는 말라."
안동(安東)에 홍수가 져서 여염집이 떠내려가고 19인이 익사하였는데, 상이 휼전(恤典)을 거행하라고 하였다.
7월 16일 정미
대사간 강백년(姜栢年), 정언 어진익·정화제 등이, 전 승지 심재(沈梓)가 경상 감사로 있을 때 전 상주 목사(尙州牧使) 이초로(李楚老)의 체직되고자 하는 소원을 따라주느라고 파출할 것을 계청한 것에 대해 논핵하며 추고를 청하고, 이어 체직되기를 도모한 이초로의 죄를 논핵하며 파직시키고 서용하지 말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이조 판서 이경억이 재차 소를 올려 체직시켜 주기를 청했는데,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6월 25일에 제주의 공마선(貢馬船)이 침몰되어 세공마 25필이 죽었는데, 차사원(差使員)인 정의 현감(旌義縣監) 최국성(崔國成)이 이 일로 파직되었다.
7월 17일 무신
어의를 보내어 송시열의 병을 간호하게 하였다. 이때 송시열이 청주에 있으면서 이질에 걸렸기 때문이었다.
7월 18일 기유
합계하였다.
이조 판서 이경억이 세 번째 상소하여 사직하였는데, 상이 답하였다.
"지금은 태평 시대가 아니니, 신하들이 자신의 염치와 지조만을 지키기 위하여 물러가 있을 때가 아니다. 나의 뜻을 생각해서 속히 나와 직무를 수행하라."
예조 판서 박장원이 금천(衿川)에 가 있으면서 상소하여 사직하였는데, 상이 답하기를,
"굳이 사양하는 것이 너무 잦다. 어찌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는가. 경은 올라와서 직무를 수행하라."
하였다. 박장원이 이미 전형(銓衡)의 직임을 사직하고 또 이 직임을 사양하였으므로 상의 비답이 이러하였다.
형조 판서 정지화가 상소하여 사직하자 상이 윤허하였다.
7월 19일 경술
헌부가, 충청 병사 이동현(李東顯)이 전에 부정을 저지른 죄가 있으므로 곤수(閫帥)의 직임을 다시 맡길 수 없는 정상을 논핵하며 파직시킬 것을 청했는데, 여러 번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부응교 남이성 등이 여덟 번째 차자를 올려 부묘하는 예를 속히 거행할 것을 청했는데, 상이 따르지 않았다.
좌의정 허적 등이 헌릉(獻陵)을 봉심하고 돌아와 아뢰기를,
"서리가 내려 풀잎이 시들었을 때에 다시 봉심하여 개사(改莎)를 해야 할 것인지의 여부를 결정하도록 하소서. 사대(沙臺)·상석(裳石) 등에 회를 바른 곳이 떨어지기는 하였으나 대단치 않으니 훗날 개사할 때 다시 바르도록 하소서. 그리고 서남쪽 난간 주석(欄干柱石)의 하대석이 꺼져 밀려나 주석도 따라서 밀려났는데, 이것도 훗날 한꺼번에 수리하여 고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황해도에 이달 4일부터 10일까지 세찬 바람이 불고 많은 비가 내렸으므로 목화 등 여러 가지 곡식이 모두 피해를 입었다.
7월 20일 신해
신정을 지평으로, 박세당(朴世堂)을 수찬으로, 김만중을 부수찬으로, 윤심(尹深)을 헌납으로 삼았다.
상이 양심합(養心閤)에 나아가자 약방이 들어와 진찰하였는데, 영부사 이경석(李景奭)도 입시하였다. 좌상 허적이 나아가 상의 안부를 물은 뒤에 의관들로 하여금 진찰하게 할 것을 청하였다. 의관들이 나아가 응어리가 진 곳을 진찰하고 나서 각자의 소견을 진술하고 약에 대해서 의논하였다. 이경석이 나아가 아뢰기를,
"지금 국가가 염려스러운 일들이 많으므로 짧은 시간에 다 아뢸 수는 없으나, 매우 한심스러운 것은 조정의 기강이 해이해지고 임금의 명령이 시행되지 않는 것인데, 이러하고서 무슨 일인들 할 수 있겠습니까. 정사(政事)에 대해서 말하더라도 도목정(都目政)을 하는 데 있어 전에도 간혹 날짜를 물린 적은 있었지만 오늘날처럼 한 적이 없었습니다. 비단 사체(事體)에 있어 부당할 뿐만 아니라 온갖 직무가 폐지되어 어떠한 일도 해나갈 수 없습니다. 신이 기대하는 것은 전하께서 스스로 진작(振作)하시는 데 있습니다. 명령을 내리고 친정(親政)을 하여 정관(政官)들에게 날짜를 정하여 시행하도록 분부하신다면 누구인들 스스로의 편리만 취하여 물러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품계가 높은 중신들은 줄곧 사퇴할 수 없는 것인데 요즈음 염치만 중하게 여기는 풍습이 생겨, 사체를 손상시키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습니다. 옛날 인조조(仁祖朝) 때에는 휴가를 늘려주었을 경우 소를 올리지 못했고 죄를 입었다가 다시 서용된 사람도 사퇴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염치를 가지고 지나치게 서로 책망하여 사퇴하지 않을 경우 사람들이 반드시 염치가 없다고 비난하기 때문에 시속이 그러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하고, 허적이 아뢰기를,
"오늘날처럼 도목정을 물린 적은 없었습니다. 사람으로서 염치가 없을 수 없는 것이지만, 늘 염치를 내세워 국사를 돌보지 않는 것도 옳지 않은 것입니다."
하였다. 이경석이 또 아뢰기를,
"사람들이 모두들 염치를 말하고 있으나 풍속이 날로 나빠지고 있으니, 염치란 것이 유익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하고, 허적이 아뢰기를,
"이경억이 논핵을 받은 일에 있어서 신들은 그것이 논할 만한 것이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정계한 뒤에는 출사해야 하는 것인데 아직도 출사하지 않고서 자신의 염치와 지조만을 지키려고 하니, 매우 옳지 않습니다. 패초(牌招)하여 출사하지 않으면 추고하고서 다시 부르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도목정이 점점 미루어지는데 한결같이 물러가 있는 것은 옳지 않다. 이경억을 즉시 패초하여 직무를 수행하게 하라."
하였다. 허적이 제주(濟州)에 새로 부임해 갈 사람이 오래 지체되어 폐단이 많다는 것을 아뢰자, 상이 참의 혼자서 정사를 하여 차출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허적이 또 아뢰기를,
"예조 참판 정두경(鄭斗卿)은 문장을 잘한다는 명성이 세상에 알려진 사람으로서 국가에서 추대해 주어야 할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본시 세상일에 마음을 갖지 않는 사람인 데다가 나이가 70세가 넘어 병이 있으므로 직무를 수행하기 어렵습니다. 앞으로 북로(北路)에 지릉(智陵)의 개사(改莎)와 순릉(純陵)을 다시 봉축할 일로 봉심할 일이 있으니, 지금 우선 개차시키고 사고가 없는 사람을 차출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합계하였다. 이날부터 하루에 두 번씩 아뢰는 것으로 규례를 삼았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이조 판서 이경억이 패초하였는데 출사하지 않고 이어 상소하여 벌을 내리고 체직시켜 주기를 청했는데,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7월 22일 계축
예조 정랑 조치중(曹致中)을 보내어 지릉의 사초를 갈게 하였다.
대사헌 이상진(李尙眞)이 사직하고 오지 않자, 체직시켰다.
평안도에 홍수가 져서 많은 사람이 익사하였는데, 상이 본도에 휼전(恤典)을 거행하도록 명하였다.
전 대장 이완(李浣)을 특별히 서용하였다.
7월 23일 갑인
이시술(李時術)을 이조 참판으로, 김만기(金萬基)를 이조 참의로, 정지화를 대사헌으로, 이민서(李敏敍)를 사인으로, 이익상을 이조 정랑으로, 박세당을 좌랑으로, 이윤조(李潤朝)를 검열로, 이완을 포도 대장으로, 민응건(閔應騫)을 경상 병사로, 구문치(具文治)를 통제사로, 노정(盧錠)을 제주 목사로 삼았다. 이윤조는 이은상(李殷相)의 아들이다. 이때 사천(史薦)을 받은 사람은 조근(趙根)·오정창(吳挺昌)·이윤조 세 사람이었는데, 조근·오정창은 모두 강에 응하지 않았으므로 대신이 경연에서 이윤조로 하여금 순서를 뛰어넘어 강에 응하게 할 것을 아뢰어, 사관의 직임에 제수되었다.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좌상 허적이 나아가 아뢰기를,
"훈련 신군(訓鍊新軍) 가운데 소속되기를 자원하는 자가 많은데, 저들은 그 군제(軍制)가 어영의 군제와 똑같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기꺼이 들어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저들은 훈련 도감이란 명칭만 들어도 영낙없이 죽는 곳으로 여기니 형편상 군대를 모집하기 어렵습니다. 다른 호칭으로 바꾸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기뻐하는 기색을 띠면서 이르기를,
"신초 별대(新抄別隊)라 호칭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자, 유혁연(柳赫然)이 아뢰기를,
"훈련이란 두 글자를 붙여 ‘훈련 별대’라고 호칭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그리하라 하였다. 병조 판서 홍중보(洪重普)가 정초청(精抄廳)의 별장 및 낭청을 차출하고 인신(印信)을 만들어 줄 것을 청하자 상이 따랐고, 호조 판서 김좌명(金佐明)이 수어청의 인신도 만들어 줄 것을 청했는데 상이 윤허하였다. 당시 민폐를 끼치는 일로 인하여 훈련 도감의 둔전 별장을 파했었는데, 이때에 허적이 아뢰기를,
"별장을 파한 뒤에 둔전의 백성들이 모두 흩어졌습니다. 백성들이 소장을 올려 별장을 차출할 것을 청하고 있는데, 오래 전에 혁파한 일을 다시 설치할 수는 없으나 군사들에게 상을 줄 때 재물을 마련하기 어려우니, 주관하는 사람에게 물어보아 조처하소서."
하고, 김좌명은 전결의 수가 많은 곳에 우선 별장을 차출하기를 청하자, 상이 윤허하였다.
이때 둔전은 각 고을의 큰 폐단이었다. 별장의 유무는 그다지 관계가 없었는데, 단지 주관하는 사람이 자기와 친한 사람에게 별장의 직임을 제수시키기 위하여 이미 혁파한 뒤에 다시 설치할 것을 청했으니, 그 말이 옳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상이 이 점을 깨닫지 못했으므로 이러한 명령을 내렸던 것이다.
우참찬 조복양이 상소하여 홍산(鴻山) 세선의 사공·격군·감관·색리들을 모두 효시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을 극언하였고, 또 해서(海西)의 수군(水軍)을 강령도(康翎島)에서 합동으로 조련시키는 일의 잘못을 말했는데, 상이 여러 날 동안 비답을 내리지 않았다. 이때 이르러 조복양이 입시하여 상소의 내용에 대해 언급하자, 상이 이르기를,
"경의 생각만 그러할 뿐 아니라 나의 생각도 그러하였으므로 이미 개정하도록 하였다."
하니, 조복양이 아뢰기를,
"방금 호조의 초기(草記)를 보았는데 죽을 사람이 살 수 있게 되었으니, 살리기를 좋아하시는 은덕에 대해서 누구인들 감격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그리고 수군을 조련시키는 일에 대해서 아뢰었는데, 상이 그 이유를 물었다. 조복양이 전에 올린 상소의 내용을 반복하여 아뢰기를,
"지금은 날짜가 임박하여 변경할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평안 감사에게 대통관(大通官) 이일선(李一善)·김거군(金巨軍) 등이 무역한 피물(皮物)을 수송하도록 명했다. 이일선 등은 우리 나라 사람으로서 청(淸)나라의 통관이 되어 전적으로 우리 나라 일을 담당하면서 자기들의 희로(喜怒)에 따라 온갖 폐단을 부렸다. 조정에서도 그들을 두려워하여 그들의 요청을 들어주지 않을 수 없었다.
사학 유생 성지선 등이 재차 상소하여 전에 청한 것을 다시 아뢰었는데, 상이 따르지 않고 관학이 그들을 옹호했다는 이유로 대사성 이민적을 특별히 추고하였다.
개성부의 생원 이익겸(李益謙) 등 24명이 상소하여 부묘하는 일을 청하였는데, 상이 따르지 않았다.
호조가 아뢰기를,
"홍산현 세선의 감관·색리·사공·격군들을 논죄하는 데 있어서는 판부하신 것에 따라 시행해야 되겠습니다만, 감관·사공·격군들 중 주동자는 판부하신 대로 정죄하고 좇아 행동한 자들은 차율(次律)을 적용해야 합니까? 배마다 색리들이 있는데 색리들은 판부하신 내용에 들어있지 않습니다. 이들은 어떻게 처리해야 합니까? 그리고 배에서는 사공이 모든 일을 주관하고 격군은 그들의 부하로서 배를 운행하고 정지하는 것이 모두 사공에게 달려 있습니다. 배를 침몰시키지 않은 격군들에게 모두 차율을 적용하는 것은 너무 중한 벌인 것 같습니다. 이번에 판부하신 내용은 훗날 정해진 법이 될 것이니, 하나하나 정식이 되게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주동자를 사목에 따라 처단할 경우 감관 이하 사공들에게는 모두 전가 사변의 율을 적용하고, 주동자에게 전가 사변의 율을 적용할 경우 이하 사람들에게는 정배시키는 율을 적용하라. 격군들은 간악한 짓을 한 자 외에는 모두 도년의 율을 적용하고, 색리들은 감관들과 똑같이 논죄하라."
하였다.
함릉 부원군(咸陵府院君) 이해(李澥)가 봄가을로 하사하는 미곡을 사양하였다. 애초에 이해가 여러 번 치사(致仕)할 것을 청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이에 이해는 정상으로 주는 녹도 받지 아니하여 기어이 치사할 뜻을 보이자 대신이 상에게 아뢰어 봄가을로 쌀과 콩을 주도록 하였다. 이해가 치사한 뒤 조정에서 봉조하(奉朝賀)의 정3품 녹을 주게 하였다. 이때 이르러 창고의 관리가 쌀 10석과 콩 5석을 이해의 집으로 싣고 가자, 이해가 말하기를,
"지금 이 봄가을로 주는 쌀과 콩은 치사의 윤허를 받기 이전에 녹을 사양했을 때 있었던 것인데 지금은 이미 치사의 윤허를 받았고, 또 봉조하의 녹도 받고 있으니, 봄가을로 특별히 하사하는 미곡을 결코 겹쳐 받을 수 없다."
하고, 거절하며 받지 않았다. 호조가 아뢰기를,
"이해가 오늘날 미곡을 받지 않는 것은 사리에 있어 또한 옳은 듯합니다. 이후로는 실어보내지 말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7월 24일 을묘
영중추부사 이경석, 영의정 정태화, 좌의정 허적, 행 판중추부사 정치화 등이 2품 이상의 관원을 거느리고 빈청에 모여 아뢰기를,
"신덕 왕후를 부묘하라고 계청한 것은 바로 온 나라 사람의 공론입니다. 삼사의 신하들이 전례를 인용하여 쟁집하고 선비들이 경전에 의거하여 진언하는 것은, 생존시에 일국의 국모로 계셨으니 승하하신 뒤에 백세토록 종묘에 모시는 것이 바로 천지의 떳떳한 법이고 고금의 공통된 의리일 뿐더러 종묘에 관계되는 일이므로 조금도 늦출 수 없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이러한 이치는 태양과 별처럼 환한 것으로서 아무리 어리석은 남녀일지라도 모두가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영명하신 전하께서 천리(天理)에 맞는 것이고 인정(人情)이 들어있는 것임을 통촉하시지 못할 리가 있겠습니까만, 지금까지 미루어 오신 것은 관계되는 것이 중대하여 경솔히 거행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하오나 신들의 생각은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중대한 일일수록 더욱 속히 거행해야 하는 것이지 시일을 끌면서 천리를 어기고 인정을 거슬려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신 정태화, 신 허적이 지난번 어전에서 이 일에 대해 모두 아뢰었고, 삼사가 합사하여 연계한 지 벌써 오래되었습니다. 윤허를 내려주시기를 날마다 기다리고 있었으나 아직까지 아무런 소식이 없으니, 신들은 이에 대해 더욱 민망스러움을 견딜 수 없어, 여러 재신들과 함께 빈청에 나와 일제히 아뢰는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여러 사람의 말을 시원스럽게 따라주소서."
하였는데, 상이 따르지 않으면서 이르기를,
"경들의 소청이 이러할지라도 나의 생각은 그렇지 않다."
하였다.
헌부가, 전생서 주부 김만직(金萬直)은 문벌이 비천하여 본직에 합당치 않다고 논핵하면서 도태시킬 것을 청했는데, 여러 번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김만직은 어의였는데 상이 의관들을 지나치게 대우하였으므로 대간의 계청을 끝내 따르지 않은 것이다.
장령 송창(宋昌)이 피혐하며 아뢰기를,
"지금 듣건대 전 참판 이은상(李殷相)·오정위(吳挺緯)의 일에 대해서 대신이 아뢴 것에 따라 사실을 조사하라는 분부가 있었다고 하는데, 신은 이에 대해 미안한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당초 논핵한 것이 직접 목격한 것이 아닌 이상, 사실을 변핵할 만한 단서가 있으면 그 일을 논핵한 신하들도 소문에 대해서 자신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국가에서 풍문을 가지고 일을 논핵할 수 있도록 허락한 이상 소문에 따라 논핵하는 것은 바로 대간의 직책인 것입니다. 거짓과 진실을 구분하는 것은 공론이 있는 것이니, 지금 조사하게 하는 것은 국가의 체모를 손상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신은 당시 논계에 참여했던 사람입니다. 논계한 일이 조사를 받게 되었으니 지금 대간의 자리에 얼굴을 들고서 다시 논열할 수 없습니다. 체직하소서."
하였는데, 출사하도록 처치하였다.
금부가 이은상·오정위 등의 일에 대한 조사 건을 형조에 이송하여 거행하기를 청했는데, 상이 따랐다.
상이 조종조 때 세자가 어린 나이로 입학할 경우 《소학(小學)》의 제사(題辭)를 강하게 했는데 매우 온당한 일이었다고 시강원에 하교하였다. 강원이 상이 하교한 내용을 사(師)·부(傅)·빈객(賓客)에게 문의할 것을 청하였다.
7월 25일 병진
영의정 정태화, 좌의정 허적, 영중추부사 정치화 등이 2품 이상의 관원을 거느리고 빈청에 모여 전에 계청한 것을 다시 아뢰자, 상이 답하였다.
"어제의 비답에 이미 유시하였다."
8월 24일에 왕세자가 문묘(文廟)에 작헌례(酌獻禮)를 거행할 것을 정하였다.
좌의정 허적이 아뢰기를,
"호조 판서 김좌명, 예조 판서 박장원을 정릉(靖陵) 정자각의 중건청(重建廳) 당상으로 삼아 그들로 하여금 왕래하면서 공역(工役)을 감독하게 하소서. 그리고 그들이 왕래할 때 정릉(貞陵) 중건청의 예에 따라 각 고을로 하여금 나와 대접하지 말도록 하고 선혜청(宣惠廳)에서 쌀이며 찬대를 지급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따랐다.
7월 27일 무오
영의정 정태화 등이 2품 이상의 관원을 거느리고 빈청에 모여 전에 계청한 것을 다시 아뢰었고, 삼사가 연계·연차하였으나, 상이 모두 따르지 않았다.
헌부가 아뢰기를,
"지난번 경연에서 대신이 진달한 것에 따라 전 참판 이은상·오정위 등의 일에 대해서 다시 사핵하라고 분부하셨습니다. 대체로 대간이 논계한 것이 간혹 사실과 틀린 것이 있을 경우 그 진실은 여러 사람의 의논에서 자연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시 사핵하게 하는 것은 국가의 체모를 손상시키는 것이고, 또한 훗날의 무궁한 폐단이 있게 하는 것으로서 국조(國朝)에 없었던 일입니다. 더구나 대각의 신하들이 일을 논하는 데 있어서 들은 소문에 따라 논할 수 있게 허락하였는데, 논한 것을 일일이 조사하게 한다면 이것은 송사하는 자리에서 논쟁을 벌이는 것과 같은 것으로서, 공론을 엄하게 여기고 대각을 중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정이 모두가 옳지 않다고 하니, 사핵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였는데, 상이 따르지 않았다. 여러 달 쟁집하였으나 끝내 따르지 않았다. 충청 병사 이동현(李東顯)을 사직시키는 일에 대해서 여러 날 쟁집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는데, 이때 이르러 정계하였다. 이동현은 부정한 짓을 하여 죄를 입어 오랫동안 버림을 받았는데, 본직에 제수되자 대간의 논계가 다시 일어났다. 이동현은 여러 곳을 찾아다니며 촉탁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놀랍게 여겼는데, 상이 따르지 않았다. 이에 대간이 또 정계한 것이다.
정언 어진익이 영해 부사(寧海府使) 정승명(鄭承明)을 논핵, 사직시킨 일에 있어서 사실과 틀리게 했다는 것으로 인피하였고, 대사간 강백년, 사간 박증휘, 정언 정화제 등이 일을 논함에 있어 사실과 틀리게 했다는 것으로 인피하였는데, 모두 체직되었다.
중화(中和)의 교생(校生)인 김애격(金愛格)의 아내 봉생(奉生)의 마을에 정문(旌門)을 세우도록 명하였다. 김애격이 남의 무함을 입어 살인죄로 사형을 당했는데 살해되었다는 그 사람은 실제로 죽지 않았었다. 봉생이 자기 남편이 억울하게 죽은 것을 슬퍼하여 기어이 복수하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남자의 옷차림을 하고 산사(山寺)와 들과 마을을 찾아다닌 지 14년 만에 끝내 원수를 찾아내어 관아에 고발하여 죽이게 함으로써 남편의 원한을 깨끗이 씻었다. 원근의 이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모두 감탄하면서 전고에 없었던 일이라고 하였는데, 감사 민유중(閔維重)이 이 사실을 아뢰자 이 명을 내렸다.
7월 28일 기미
영의정 정태화 등이 2품 이상의 관원을 거느리고 빈청에 모여 전에 계청한 것을 다시 아뢰었는데 상이 따르지 않았다.
집의 이유, 장령 이광적, 지평 신정·이민채 등이, 이동현이 여러 곳에 촉탁을 도모한 정상을 논계했다가 곧바로 정계하여 물론의 비난을 받았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시강원이 아뢰기를,
"왕세자가 입학할 때 《소학》의 제사(題辭)를 진강하는 일에 대해서 전교하신 대로 사(師)·부(傅)·빈객들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사 영의정 정태화의 의논은 ‘근래에 왕세자가 입학할 때 으레 《대학(大學)》의 경 1장(經一章)을 진강하였지만, 《소학》의 제사도 조종조때 진강한 사례가 있으니 지금 그대로 하는 것도 무방할 듯하다.’라고 하였고, 좌빈객 박장원, 우빈객 조복양의 의견도 사의 의논과 같았습니다. 우부빈객 민정중의 의논은 ‘옛날 예법에 《소학》과 《대학》은 가르치는 것이 각각 달랐다. 대학에 들어간 사람에게는 궁리(窮理)·정심(正心)·수기(修己)·치인(治人)의 도리를 교육시켰는데, 천자의 원자(元子)로부터 국가의 책임을 맡을 사람들에게 모두 이러한 도리를 교육시켰다. 지금 왕세자가 입학하는 의식에 있어서 역시 이 예법을 준행해야 할 것이다. 이미 대학에 들어갔는데 《소학》에서 가르치는 것을 진강하는 것은 옛 사람이 수기·치인하는 도리를 교육시킨 뜻에 어긋나는 것이다. 더구나 왕세자는 나이가 비록 어리긴 해도 학업이 이미 진보된 상황에 있으니만큼, 입학하는 날 《대학》의 경 1장을 수강하게 하는 것이 옳을 듯싶다.’라고 하였습니다. 부 송시열은 외지에 가 있고 사와 빈객의 의논이 이러하므로 아룁니다."
하였는데, 상이 사의 의논대로 시행하라고 하였다.
도목정이 있었다. 윤문거(尹文擧)를 우부빈객으로, 이익(李翊)을 대사간으로, 이정기(李廷夔)를 대사성으로, 민정중을 공조 판서로, 이원정(李元禎)을 공조 참판으로, 조성보를 사간으로, 오정창을 설서로, 조사석(趙師錫)을 겸 설서로, 이규령을 수찬으로, 정재숭을 동부승지로, 민점을 병조 참의로, 오시수(吳始壽)를 참지로, 신명규를 집의로, 경최를 장령으로, 정중휘·이후징을 지평으로, 이단하를 응교로, 나이준(羅以俊)을 교리로, 김덕원(金德遠)·이단석(李端錫)을 정언으로, 정륜(鄭錀)을 황해 감사로 삼았다.
평안도·황해도에 해일이 있었다.
7월 29일 경신
영의정 정태화 등이 2품 이상의 관원을 거느리고 빈청에 모여 전에 계청한 것을 다시 아뢰었고, 부응교 남이성 등이 열한 번째 차자를 올려 청했는데, 상이 따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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