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현종실록17권, 현종 10년 1669년 10월

싸라리리 2025. 12. 12. 0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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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일 신유

신덕 왕후를 태묘에 부묘하고, 대신을 보내 제사를 섭행케 했다. 중외에 사면령을 내리고 백관을 가자하였다. 백관들이 전(箋)을 받들어 축하했다.

 

중외에 내린 교서에서 일렀다.
"선대 조상을 뒤미쳐 부묘하는 의식을 거행하느라 태묘(太廟)에 일이 있었는데, 온 나라와 경사를 함께 하는 뜻을 각 지방에 고하노라. 본래 인정의 편안한 바에 따라 한 것이니 정말 천도(天道)는 반드시 회복될 때가 있도다.
우러러 생각하면 옛 우리 왕후께서는 실로 나라를 세우신 어지신 왕비이다. 중궁의 자리 바르게 가지시어 천자의 명을 빛나게 받으셨고, 동방의 모후(母后)로 임어하시어 풍화의 기틀 맨 먼저 천명하셨느니라. 비록 세대가 몇 차례 바뀌었으나 아직 덕스런 말씀 쟁쟁하고, 경계하고 간하신 말씀들 뒤미쳐 생각하니 성조(聖祖)의 애닯은 비통 깊게 느껴지노라. 산릉(山陵)을 공경히 받들었으니 헌묘(獻廟)069)  의 효성 지극히 갖추어짐이니라. 배향해 잡수시는 것 끝내 세실(世室)에서 빠지고 천향(薦享)할 재실(齋室)마저 마련되지 못했는데, 잘못된 의견은 조정의 신료들에게서 처음 발의된 것이었지 선왕의 뜻은 참으로 아니었다. 대개 한 왕후로부터 기인된 옛 제도를 마침내 여러 조정이 인습하게 되었다. 살아서는 짝이 되시는 높은 자리에 올라 명호(名號)까지 이미 정해졌건만 돌아가셔서는 궤연을 함께 해 흠향하지 못했으니 떳떳한 법도에 흠결이라 하리로다. 종묘와 관계되어 참으로 막대한 일이기는 하지만 신령이 의탁할 곳 없으니 어찌 인정이나 예절에 편안할 수 있겠느냐. 우선 능묘에 의장들을 닦아 세우고 기록들을 다시 전적(典籍)에서 고증했노라. 한제(漢帝)가 대의(大義)를070)   깊게 고민한 것은 세상이 함께 칭송하는 바요 송후(宋后)가 원풍(元豊) 연간에 비로소 승부(陞袝)된 것071)  은 때를 혹 기다렸던 듯하다. 큰 효도는 뜻을 잘 이어받는 것을 귀중한 것으로 생각하고 마땅하게 변통하는 것을 더욱 귀중히 여기고 있다. 선유(先儒)들도 부묘하자는 논의가 있었으니 어찌 시간의 전후가 용납될 수 있겠는가. 이는 진실로 나의 큰 책무이니 더욱이 지엄한 윤리와 관계됨에 있어서랴. 이미 이달 29일에 책보를 올리고 존호를 더하여 순원 현경 신덕 왕후(順元顯敬神德王后)라 하고 10월 초하루 종묘에 부묘하여 제향하였다. 종묘 모습 바라보니 광채 더욱 일어나고 예스런 의절 펴노라니 감회가 절로 인다. 돌아가신 영령 여기에 모이셨으니 하늘에 계신 조상님들 마음에 위안이 있을 것이고, 사람들의 마음에서도 읽을 수 있으니 온 나라 신민의 바람에 응답함이리라. 감춰졌던 광채 다시 빛을 발하니 3백 년 사이에 어두어지지 않았음이 다행이요, 떳떳한 법도 이에 빛나니 천만세 후대까지 거의 얘깃거리로 전해지리라. 전에 없던 성사로 기억되리니 어찌 아래에 미치는 큰 은혜를 빠뜨리랴. 이달 초하루 새벽 이전의 잡범으로 사형죄 이하에 해당하는 온갖 범죄들을 모두 용서해주고, 벼슬에 있는 자들은 각기 한 자급씩을 올려주되, 급을 더 이상 올릴 수 없는 자들은 대신 가자하도록 하라. 아, 이 먼 조상을 추념하는 정성을 미루어 백성들의 풍속이 두터워지기를 은근히 기대하며, 이어 살리기를 좋아하는 덕을 펴 모든 백성들과 더불어 유신(維新)을 도모코져 하노라. 이런 까닭에 교시하는 바이니 잘 알 줄로 아노라."
사신은 논한다. 신덕 왕후께서 고명(告命)을 받고 중궁의 자리에 올라 한 나라의 모후(母后)로 계셨으니, 신의 왕후(神懿王后)072)  와 적서(嫡庶)의 구분이 없었다. 그런데 방번(芳番)의 난으로 인해 마침내 깎아내려야 한다는 의논이 생겨났으니, 그 당시 의논을 제기했던 신료들의 죄를 이루 다 꾸짖을 수 있겠는가. 능묘를 버려둔 채 돌보지 않았고 제사드리는 예절을 빠뜨리고 거행치 않은 지 거의 3백 년이 되었다. 바른 논의가 한번 제기되자 중외가 똑같이 주장하여 능묘를 수축하고 정자각을 건축하는 일들을 차례차례 거행하고, 마침내 종묘 제향까지 윤허하여 다시 인륜이 바로잡히니, 3백 년 동안 신령이며 백성들이 가졌던 분한 마음을 풀어준 일로서 천하 후세에 전해질 것이다. 식자들은 사직의 장구함이 반드시 이 일에서 힘입을 것이라고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7책 17권 31장 B면【국편영인본】 36책 647면
【분류】왕실-종사(宗社) / 사법-행형(行刑) / 인사-관리(管理) / 역사-편사(編史)


[註 069] 헌묘(獻廟) : 태종의 능호.[註 070] 한제(漢帝)가 대의(大義)를 : 이는 한 고조(漢高祖)의 비인 여후(呂后)와 박희(薄姬)에 대해, 광무제(光武帝)가 박희를 정비로 인정해 종묘에 그 신주를 올려 모시고 여후를 한나라를 위태롭게 한 황후라 하여 종묘에서 끌어내려 원(園)으로 따로 모신 것을 이른 말인 듯하다. 박희는 한나라의 3대 왕인 효문제(孝文帝)의 모후(母后)이다. 《후한서(後漢書)》 광무제기(光武帝紀) 중원(中元) 원년조(元年條).[註 071] 송후(宋后)가 원풍(元豊) 연간에 비로소 승부(陞袝)된 것 : 이는 송(宋)나라 신종 황제(神宗皇帝)가 원풍 6년에 종묘에 배향되지 못하고 별묘(別廟)에 모셔져 있던 선대 황후들을 종묘에 배향한 것을 이른다.《송사(宋史)》 신종기(神宗紀) 원풍(元豊) 6년조.[註 072] 신의 왕후(神懿王后) : 태조의 첫 왕비.
사신은 논한다. 신덕 왕후께서 고명(告命)을 받고 중궁의 자리에 올라 한 나라의 모후(母后)로 계셨으니, 신의 왕후(神懿王后)072)  와 적서(嫡庶)의 구분이 없었다. 그런데 방번(芳番)의 난으로 인해 마침내 깎아내려야 한다는 의논이 생겨났으니, 그 당시 의논을 제기했던 신료들의 죄를 이루 다 꾸짖을 수 있겠는가. 능묘를 버려둔 채 돌보지 않았고 제사드리는 예절을 빠뜨리고 거행치 않은 지 거의 3백 년이 되었다. 바른 논의가 한번 제기되자 중외가 똑같이 주장하여 능묘를 수축하고 정자각을 건축하는 일들을 차례차례 거행하고, 마침내 종묘 제향까지 윤허하여 다시 인륜이 바로잡히니, 3백 년 동안 신령이며 백성들이 가졌던 분한 마음을 풀어준 일로서 천하 후세에 전해질 것이다. 식자들은 사직의 장구함이 반드시 이 일에서 힘입을 것이라고 하였다.

 

장령 변황(卞㨪)과 지평 이명익(李溟翼)이 제향에 쓴 소가 살찌지 않은 죄를 논계해 전생서(典牲署)의 해당 관원을 파직하자고 청하니, 상이 따랐다.

 

이때 공주들의 저택 짓는 일이 여전히 진행되자 양사가 또 제도를 정하기 전까지는 짓는 일을 잠시 중지해야 한다고 간쟁했다.

 

10월 3일 계해

밤에 천둥과 번개가 쳤다.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신료들을 인견하였다. 옥당과 헌부에서도 각기 한 사람씩 입시하였다. 영의정 정태화가 나아가 상의 병세를 물으며 핵환(核患)은 어떠하냐고 하니, 상이 이르기를,
"상당히 줄어들고 있다. 평상시와 같지 못한 것은 음식 먹는 일이다."
하였다. 상이 삼을 캐는 사람들의 일을 묻자, 정태화가 대답하기를,
"수령이 효시를 청하였으니 법대로 베는 것이 옳겠으나, 그들의 정상이 크게 죄를 저지른 것과는 다르고 또 사형의 법을 엄히 세워 금지시킨 일도 없었으니, 이 사람들에게는 우선 일반적인 법으로 죄를 다스리고 이 뒤로는 결단코 용서해 주지 않는 것으로 정식을 삼아야 할 것입니다. 머리를 깎고 감옥을 넘어 도망친 사람에 대해서는 불가불 베어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이때 평안 감사가 범죄인을 붙잡아 장계로 효시를 청하였는데, 그중 한 사람은 머리를 깎고 감옥에서 도망쳤다가 붙잡힌 자였기 때문에 정태화의 말이 이랬던 것이다. 강화 유수 김휘(金徽)가 나아가 아뢰기를,
"서필원(徐必遠)이 유수로 있을 때 본부의 군사를 세 부대로 만들고 중부는 파총(把摠)을 두어 거느리게 했습니다. 지금 별장(別將)을 이미 혁파했으니 이전처럼 파총을 차출하여 군사를 관장케 하소서."
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김휘가 아뢰기를,
"본부의 나룻배가 세월이 오래되자 썩어 쓸 수가 없습니다. 바꾸었으면 하는데 본부의 물력으로는 마련해 낼 길이 없습니다."
하자, 정태화가 아뢰기를,
"모곡(耗穀)은 유수가 쓰게 되어 있는데 서필원이 모두를 회록(會錄)한 까닭에 유수가 손쓸 방도가 없어진 것입니다. 약간의 곡식을 떼어주어 바꾸게 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본부의 모미(耗米) 4백 섬을 내주라고 명하였다. 정태화가 아뢰기를,
"평안도의 시재 무사들에게 이미 직부 전시(直赴殿試)할 수 있는 자격을 주셨는데, 고사(故事)에 직부 전시는 식년시(式年試)에 응시하도록 허락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들에게는 이번 정시(庭試)의 전시(殿試)에 응시케 하라."
하였다. 예조 판서 박장원(朴長遠)이 아뢰기를,
"정릉(靖陵)의 정자각(丁字閣) 수리를 이미 끝냈으니 경릉(敬陵)의 정자각을 앞서 의논해 결정한 대로 중건해야겠는데, 추운 겨울철이 임박하여 형편상 일을 시작하기가 어렵습니다. 내년 봄까지 기다렸으면 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공조 판서 민정중(閔鼎重)이 아뢰기를,
"안민(安民)에 창고를 만들면서 그 조운 절목(漕運節目)에 ‘4월 30일로 기한을 정해 기한 전에 원산(元山)에서 파견된 관리로부터 점고(點考)받은 것은 경강(京江)으로 바로 보내고, 기한을 넘겨 원산에 도착된 것은 안민에 보관시켜 그것을 차례로 조운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올 여름에 조운했던 일로 본다면 기한이 급박한 듯하니 조금 물려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5월 10일까지로 기한을 개정하라고 명하였다. 민정중이 아뢰기를,
"안민 창고 근방에 있는 고을들은 육로로 운송해서 본 창고에 바로 들여놓는 것이 사목이지만 백성들이 불편하게 여깁니다. 배를 삯내어 경창(京倉)에 바로 들여 놓으려는 자들에게는 또한 마땅히 소원대로 해주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승지 박세견(朴世堅)이 아뢰기를,
"판부사 송시열의 상소가 들어온 지 이미 오래되었는데 지금까지 내려지지 않고 있기에 감히 아룁니다."
하니, 상이 답하지 않았다. 박세견이 아뢰기를,
"제주 목사 이인(李𡐔)이 바다 밖에서 임무를 수행하다가 죽었으니, 생각해 주어야 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의 상여가 지나는 도(道)로 하여금 담군을 차출해 호송하게 하라."
하였다. 박장원이 아뢰기를,
"이단상(李端相)이 죽은 뒤 그의 처자식들이 굶주림에 시달려 장례를 지내지 못하니 구휼해 주시는 은정이 있어야 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해조로 하여금 장례에 드는 물품을 지급하라고 하였다. 이조 판서 조복양(趙復陽)도 이단상의 발인 때 담군을 지급할 것을 청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부제학 이민적(李敏迪)이 나아가 아뢰기를,
"신이 가까운 곳에서 모시고 있으니 감히 생각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상께서 병을 앓으시는 것에 대해서 바깥 사람들은 섭생(攝生)에 삼가지 못한 결과가 아닌가 하는 근심이 없지 않습니다. 옛 사람이 말하기를 ‘있으면 고치고 없으면 더욱 노력한다.’고 했습니다. 전하께서는 유의하소서."
하였다. 장령 변황이, 공주의 저택 짓는 일을 우선 중지하고 이은상(李殷相) 등을 조사할 것과 서필원을 삭탈 관작할 일들을 연계하였으나, 상이 모두 따르지 않았다. 유혁연(柳赫然)이 도감의 군사들에게 나누어 줄 환도(環刀)를 장식할 동철 6백 근을 해조에서 가져다 쓸 수 있게 해달라고 청하자, 상이 따랐다.

 

평안도의 시재(試才)에 입격한 무사 73인에게 모두 직부 전시(直赴殿試)할 수 있는 자격을 주라고 명하였다.

 

박증휘(朴增輝)를 사간으로, 이민서(李敏敍)를 사인(舍人)으로, 강호(姜鎬)를 원양 감사(原襄監司)로 삼았다. 강호는 청렴하다는 명성이 있었으나 사무에는 서툴렀다.

 

경기에 소 돌림병이 크게 퍼졌다. 9월 28일에 우박이 떨어져 각종 곡식이 손상되었다.

 

전라도의 갯가에 사는 백성 입이(立伊) 등 21명이 2월 28일에 표류하여 유구국(琉球國)에 도착하였다가 유구국으로부터 일본에 보내졌는데, 이때에 대마도주가 차왜(差倭)를 보내 거느리고 왔다.

 

10월 4일 갑자

천둥이 치고 우박이 내렸다.

 

좌의정 허적이 상차하여 체직을 빌었는데,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10월 5일 을축

밤 5경에 화성이 태미원(太微垣)의 단문(端門) 안으로 들어갔다.

 

정원이 아뢰기를,
"순전히 음만 있고 양은 사라져 모든 동물이 겨울잠에 드는 이 때에 천둥과 비가 갑자기 일어나 우르릉 소리를 냈습니다. 하늘이 보이는 위엄이 여기에 이르렀으니, 어찌 큰 재변이 아니겠습니까. 삼가 생각건대, 전하께서도 공경과 두려움으로 하늘을 대하시며 마음에 놀라움을 일으키는 것이 반드시 평일의 배는 되실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이란 잡고 놓는 것이 일정하기 어려워 변고를 만난 초기에는 두려워하다가도 조금 지나게 되면 그 마음이 차츰 해이해져 으레 그러려니 하면서 편안해 합니다. 그러다 마침내는 위험과 어지러움에 빠져 구원할 수 없게 되니, 경계해야 할 바가 아니겠습니까. 전하께서는 지금의 마음을 간직하여 재앙을 만난 처음처럼 끝까지 해이됨이 없도록 하십시오. 번개가 치는 것으로 인해 두려워한 것이 도리어 복이 되느냐는 바로 여기에 달려 있습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재앙을 만난 근심 때문에 앉으나 누우나 편치 않다. 지금 아뢴 말을 보건대 경계와 가르침이 간절하기 그지없으니 내 마음이 매우 기쁘다. 마음에 두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때 상이 여러 달째 건강이 좋지 못했는데 재변이 속출하였으므로 여러 사람들이 걱정하고 두려워하였다.

 

이산군(理山郡)의 국경을 넘나든 죄인 김유례(金有禮)를 국경에서 효시하였다. 미처 배소에 보내기도 전에 감옥을 탈출해 도망쳐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가 붙잡혔기 때문이다.

 

예조가 아뢰기를,
"신덕 왕후의 부묘례를 이미 마쳤습니다. 왕후의 부모들을 추봉(追封)하는 의전과 본관의 호를 승급시키는 등의 일을 해조로 하여금 품지하고 거행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또 아뢰기를,
"이번 신덕 왕후의 부묘례는 수백 년이 지난 뒤에 거행된 것입니다. 이미 진하례도 치루었고 사면령도 반포하였으니, 과거를 보여 선비들을 뽑음으로써 온 나라와 경사를 함께 하는 뜻을 보여야 할 것입니다. 예전의 제도를 상고해 보니 혹 다른 경사와 합해서 별시(別試)나 증광시(增廣試)를 보인 경우도 있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번에도 다른 경사와 합쳐 시행하라고 하였다.

 

헌납 이휴징(李休徵)이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계사의 초본을 고쳐 물의를 빚었기 때문이다.

 

부제학 이민적(李敏迪), 응교 남이성(南二星) 등이 재이를 인해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올해 제도의 해일과 양남(兩南)의 수재는 또한 작은 재변이 아니었는데, 더군다나 10월에 천둥 번개가 번쩍번쩍하며 조용하지를 않습니다. 하늘은 진노해 있고 백성들은 괴로워하며, 어진 보필들은 산속으로 도망쳐버리고 언로(言路)는 꽉 막혀있습니다. 그런데도 게으르고 태연히 지내며 두려워하고 경계하는 뜻이 없어 토목 공사를 한창 일으키고 있으니 너무도 태평한 기상입니다. 내 쪽에서 마음을 닦고 잘못을 성찰함이 이와 같고 보면 능히 상제와 귀신들로 하여금 위엄과 노여움을 거두어들이게 하여 화기(和氣)로 되돌릴 수 있겠습니까.
근래 옥후가 편치 못하여 오랫동안 조회를 보지 않으셨습니다. 신이 지난번 입시하여 우러러 옥용(玉容)을 뵈오니 크게 수척하여 옛날과 매우 달랐습니다. 신자(臣子)된 자의 근심이 어느 곳인들 미치지 않겠습니까. 어리석은 소견에 치미는 바가 있어 외람되게도 섭생을 삼가시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보잘것 없는 천한 정성이지만 성상께서는 유념해 주소서. 신들이 가까운 자리에 있으면서 스스로 생각하기를, 한가로이 계실 때 모시면서 때로 좋은 말씀을 드리게 된다면 반드시 환관이나 궁첩(宮妾)들보다는 나은 점이 있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혹 틈나는 대로 인견해 주신다면 전하를 돕는 효과가 또한 적지 않을 것입니다.
《전(傳)》에 이르기를 ‘베로 걷는 역(役), 곡식으로 걷는 역, 인력을 동원하는 역이 있는데 군자는 그중 한 가지만 쓰고 두 가지는 풀어주어야 한다. 두 가지를 아울러 시행하면 굶주려 죽은 백성이 있게 되고 세 가지를 아울러 시행하면 부자(父子)가 흩어지게 된다.’고 했습니다.
지금 수만의 군사를 선발하고 양도에서 양전(量田)하는 일을 한꺼번에 시행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비록 어쩔 수 없는 정사이겠지만 두 가지 큰 역을 한꺼번에 실시하니, 백성들이 어떻게 소요스럽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처럼 하늘이 노여워하고 백성이 원망하며 재변이 거듭되는 시기를 당해서는 더욱 백성의 힘을 아끼고 축적시켜 인심을 수습해야 되는 것입니다. 어찌 이기기나 좋아하고 자랑이나 늘어 놓는 일을 마음껏 행하며 국민을 위하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호서(湖西)의 수재와 해서(海西)의 해일은 모두가 등한히 볼 재앙이 아닙니다. 우선 양전하는 일을 중지시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인 듯합니다.
또 군사를 선발하는 일에 대해서 논하겠습니다. 당초에 묘당의 의논은 본시 경병(京兵)이란 오랫동안 군역(軍役)에 종사해야 하는 곤란한 점이 있기 때문에 정원이 줄어도 채우지 않으면서 번상(番上)하는 제도로 변통코자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연례의 포수(砲手) 정원을 줄이지 않은 채 별도로 뽑아 채우려 하여 또 다시 시끄러워졌습니다. 이는 실상 두 가지를 아울러 함께 존속시키는 것이니 어찌 이것이 오랜 군역을 변통시켜 번상하게 한 본뜻이겠습니까. 신들의 어리석은 의견으로는 별도로 뽑아 채우는 것을 그만 둘 수 없을 것 같으면 연례의 포수 정원을 그대로 보충시켜선 안 될 것이라 여깁니다."
하니, 상이 관대하게 비답하였으나 끝내 채택해 시행하려는 뜻은 없었다.

 

좌의정 허적이 차자를 진달하여 먼저 내국 제조(內局提調)를 체직하여 줄 것을 바랐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황해도 장련(長連) 등의 고을에 9월 29일 우박이 내려 곡식이 손상되었다.

 

10월 7일 정묘

정시(庭試)를 보여 한태동(韓泰東) 등 7명을 급제시켰다.

 

평안도 창성(昌城)에 우박이 내려 늦곡식이 모두 손상되었다.

 

10월 8일 무진

장령 변황은 동료를 기다리지 않고 지레 먼저 계문(啓文)을 전달했다는 이유로, 장령 이세화(李世華)는 처치한 것이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았다는 이유로 모두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10월 9일 기사

정언 김덕원(金德遠)을 체직하였다. 상소가 들어간 지 석 달이 되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특별히 체직한 것이다.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니, 약방이 들어와 진찰하였다. 도제조 허적이 나아가 상의 병세를 묻고 여러 의원들로 하여금 진맥케 할 것을 청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의관들이 차례로 들어와 진맥하였는데, 허적이 팔꿈치 끝에 뜸을 뜨자고 청했다. 허적이 아뢰기를,
"9월의 천둥도 극히 염려스러운 것인데 10월의 큰 천둥이 심상하지 않은데다 겸하여 우박의 재변까지 있으니, 공구 수성(恐懼修省) 이외에는 우러러 아뢸 말씀이 없습니다. 신처럼 보잘것 없는 사람이 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니, 옛일에서처럼 책임을 지워 면직시킴으로써 하늘의 견책에 답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허물은 실상 나에게 있다. 어찌 경들에게서 연유된 것이겠는가."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지금 현재 다른 것은 논할 것 없고 상께서 임금의 굳건함을 떨치지 못하고 계시므로 죄를 두려워하여 직책을 다하는 신하가 없으니, 이것이 참으로 민망스러운 것입니다."
하였다. 홍중보(洪重普)가 나아가 아뢰기를,
"근래 외방이 한정(閑丁)을 찾아내는 일로 인해 매우 소란합니다. 강도(江都)와 광주(廣州)에서 수군(水軍)으로 이속시킬 인원이 4백여 명에 이를 것입니다. 경기도 내의 약간 고을에서 일시에 채우기에는 그 형세가 어렵습니다. 변통하는 방법이 있어야겠습니다."
하니, 상이 3년을 기한으로 채우게 하라고 하였다. 승지 홍만용(洪萬容)이 나아가 아뢰기를,
"정언 김덕원(金德遠)의 말이 비록 앞뒤가 없고 신중치 못했으나 일반 관원과는 다릅니다. 특별히 체직하는 데까지 이른 것은 언로에 방해되는 점이 있습니다."
하니, 상이 한참이 지나도록 답하지 않았다.

 

영의정 정태화가 겨울 천둥으로 인해 차자를 올려 면직을 청하니, 상이 답하기를,
"재변이 생긴 허물은 실상 나에게 있다. 경이 사직할 것이 뭐 있겠는가. 안심하고 속히 출사하여 나라 일을 구제하도록 하라."
하였다.

 

판부사 송시열의 사직 상소가 들어온 지 한 달이 되었는데 이때 이르러 상이 비로소 너그러운 비답을 내리고 사관(史官)을 보내 유시하였다.

 

좌참찬 송준길이 예를 의논하는 상소를 올리면서 겸하여 경계하고 깨우치는 뜻을 아뢰었다. 그 상소가 들어온 지 여러 날이 되었는데 이때 이르러 상이 답하기를,
"경계하고 깨우쳐주는 말들이 절실해서 내 깊이 감탄했다. 성찰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부알(袝謁)하는 예는 이미 차자의 말대로 시행하였다. 나의 병이 심해 부묘례를 직접 행할 수 없었으니, 마음의 불안을 말로 다할 수 있겠는가. 경은 나의 뜻을 몸받아 속히 마음을 바꾸어 지극한 바람에 부응하도록 하라."
하고, 사관을 보내 유지를 전하게 하였다. 이때 상의 병이 깊어 소장에 바로 비답을 내리지 못했는데, 인하여 관례가 되어버렸으므로 여러 신료들의 마음이 더욱 해이해졌다.

 

정원이 김덕원을 특별 체직하라는 명을 도로 거둘 것을 청하며 아뢰기를,
"말이 쓸 만하면 채용하고 쓸 만하지 않으면 제쳐놓아 너그러움을 보여 주는 것이 바로 언로를 넓히는 방법입니다."
하니, 상이 이것은 치지 도외하는 뜻이라고 답하였다. 대관이 또 간쟁했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대사간 이익(李翊)이 직임을 띤 채 고향에 내려갔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우박 피해가 매우 심한 평안도의 고을에 급재(給災)하였다. 감사 민유중(閔維重)의 청을 따른 것이다.

 

평안도 철산(鐵山)에 9월 26일 우박이 내려 늦곡식이 많이 손상되었다.

 

10월 11일 신미

이조가 아뢰기를,
"신덕 왕후 어머니의 성씨가 나타나 있는 곳이 없습니다. 《실록》을 상고해 보아야 그 성향(姓鄕)을 찾을 수 있을 듯합니다. 《실록》을 상고해 내어 봉증(封贈)을 거행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원양도(原襄道) 영월(寧越) 등 고을과 경기 여주(驪州) 등 여섯 고을에 이달 4일에 우박이 내려 곡식이 손상되었다.

 

10월 12일 임신

밤 5경에 유성이 낭위성(郞位星) 아래에서 나와 대각성(大角星) 위로 들어갔다.

 

영의정 정태화의 첫 번째 올린 사직소에 불윤 비답을 내렸다.

 

10월 13일 계유

장선징(張善瀓)을 대사간으로, 이하(李夏)·정중휘(鄭重徽)를 장령으로, 박세당(朴世堂)을 헌납으로, 이후징(李厚徵)을 지평으로 삼았다.

 

고 판삼사사(判三司事) 강윤성(康允成)에게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상산 부원군(象山府院君)을 추증하였다. 신덕 왕후의 아버지였다. 신덕 왕후의 성향 곡산군(谷山郡)을 승격시켜 부사(府使)로 삼았다.

 

예조 정랑 강복선(姜復先)을 보내 이종학(李種學)·유희춘(柳希春)·박순(朴淳) 등의 서원에 사액(賜額)하고 치제(致祭)하였다.

 

영의정 정태화의 두 번째 올린 사직소에 상이 불윤 비답을 내렸다.

 

10월 14일 갑술

홍문관이 물의 힘으로 돌아가게 만든 혼천의(渾天儀)와 자명종(自鳴鐘)을 올렸다. 앞서 상이 이민철(李敏哲)에게 명해 물의 힘으로 돌아가는 혼천의를 만들게 하고 홍문관으로 하여금 맡아 감독케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이민철이 만들어 올린 것이다. 또 송이영(宋以穎)에게도 자명종을 만들어 올리게 하였던 것이다. 상이 이르기를,
"두 사람이 몸과 마음을 기울인 공로가 결코 적지 않다. 해조로 하여금 참작해 논상토록 하고, 장인들에게도 해조로 하여금 미포(米布)를 지급하게 하라."
하니, 이민철은 가자하고 송이영은 실직을 제수하였다.

 

10월 15일 을해

영의정 정태화의 세 번째 올린 사직소에 상이 불윤 비답을 내렸다.

 

좌의정 허적이 새로 제수된 자들의 참알(參謁) 때 상의원 정(尙衣院正) 심구(沈玖)가 단자(單子)만 올리고 나오지 않은 것을 들어, 그를 파직하여 태만을 징계하기를 청하였다.

 

행 대사간 장선징이 인피하며 아뢰기를,
"신이 지난해에 본 직책에 있으면서 망령스런 논의를 드렸었는데, 요사이 조정의 의논이 그 허실을 의심해서 해를 넘긴 지금에 비로소 조사케 하고 있습니다. 신의 말이 믿음을 얻지 못하고 있는 정상이 이미 드러났으니, 감히 다시 대각에 들 수 없음이 분명합니다."
하고, 또 지금 추고받는 중에 있음을 이유로 사직하니, 처치하여 체직시켰다.

 

충청도에 소 돌림병이 크게 번졌다.

 

10월 17일 정축

능창 대군(綾昌大君)의 집에 선온(宣醞)하고 일등 풍악(一等風樂)을 내렸다. 영시연(迎諡宴)을 거행하기 때문이었다.

 

영의정 정태화가 네 번째 사직소를 올리자 안심하고 조리하라고 전교하였다.

 

도망쳐 돌아온 최길(崔吉)을 청나라로 압송하였다.

 

사간 박증휘(朴增輝), 지평 이후징(李厚徵)·이명익(李溟翼)이 모두 일로 인해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10월 18일 무인

천둥이 쳤다.

 

동지정사(冬至正使) 민정중(閔鼎重), 부사 권상구(權尙矩), 서장관 신경윤(愼景尹)을 청나라에 보냈다.

 

10월 19일 기묘

전라도 남원(南原)·고부(古阜) 등 고을에 9월 29일과 30일에 우박이 내려 밭의 각종 곡식들이 많이 손상되었다.

 

개성부에 소 돌림병이 크게 번졌다.

 

10월 20일 경진

밤에 천둥과 번개가 쳤다.

 

좌의정 허적, 관상감 제조 민희(閔熙), 예조 참의 이준구(李俊耉)와 정랑 조치중(曺致中), 선공봉사(繕工奉事) 안찬(安燦) 등을 보내 헌릉(獻陵)을 봉심(奉審)하고 떼를 갈아 입혔다.

 

간원이, 금중(禁中)에 들어간 위졸(衛卒)을 곤장으로 때린 내관(內官)을 붙잡아다가 다스리자고 여러 달 동안 굳게 논계했으나 상이 끝까지 따라주지 않았는데, 이때에 이르러 정계하였다. 상이 내시를 편파적으로 비호하는 것이 이같았다.

 

평안 감사 민유중(閔維重)이 치계하여 아뢰기를,
"강가의 백성들이 국경을 넘어가 삼(蔘)을 캐는 것은 큰 이익이 있어서입니다. 사람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금령(禁令)을 범하며 만분지 일의 요행을 바라는 계책을 내고 있으니 참으로 한심스럽습니다. 그러나 신이 삼가 삼 캐는 것을 금지하는 절목을 보건대, 부질없이 번거롭고 가혹하게만 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편안히 본업에 종사할 수 없게 하고, 죄를 범한 것이 발각된 뒤에 미쳐서는 또 모두를 법대로 다스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백성들이 본업을 잃고 주림과 추위에 시달리게 되면 무슨 짓을 하지 않겠으며, 국법이 엄하지 않으면 간계와 악행이 징계될 바 없는 것이니 무슨 죄를 범하지 않겠습니까. 만일 국경을 넘어가는 일을 막아 없애고자 한다면 그 요점은, 백성들을 권해 농사에 힘쓰게 해서 그들의 생활을 풍족하게 해주며 죄를 범했을 때는 법대로 시행해 그 금법(禁法)을 엄하게 하는데 달려 있을 따름입니다.
농사철을 빼앗지 않는 것은 왕도 정치에서 최우선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강가의 각 고을들이 4월부터 9월까지 매달 여섯 번씩 관문(官門)에 모여 점고하고 또 차사원(差使員)이 불시에 벌이는 별도의 점검이 있습니다. 백성들이 농사철에 닥쳐 있으면서도 도로에 바쁘게 오가는 것이 거의 빈 날이 없으니, 비록 농사를 짓고 싶어도 실상 겨를이 없습니다. 이 때문에 밭을 갈아두고서도 파종치 못하는 사람도 있고 파종하고서도 김을 매지 못하는 자가 있어, 가을이 된 뒤에는 밭에 풀만 무성해 수확이 드문 형편입니다. 그래서 굶주림에 먹을 것을 얻지 못하며 추위에 옷마저 얻지 못하고 보면, 비록 국경을 넘어 삼을 캐는 일이 반드시 죽는 일이란 것을 알면서도 극도의 추위와 굶주림에 어쩔 수 없이 법을 범하지 않을 수 없으니, 그 정상이 또한 애처롭습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이후로는 5일에 한 번씩 점고하는 규정을 바꿔 매달에 세 번씩만 점고하도록 하여 오가는 폐단을 없애 농사에 전력할 수 있게 해주고, 또 수령들로 하여금 농사를 특별히 권장케 하여 그들이 의식(衣食)의 근본이 어디에 있는가를 알게 하소서. 그리고 파수꾼을 둔 곳에도 늘 엄히 단속시켜 법을 범하는 채 국경을 넘어 삼을 캐는 자가 있으면 그때마다 바로 계문해서 국경에 효시케 하소서. 또 그 마을의 이장(里長)이며 통장(統長)들을 엄한 형벌로 무겁게 다스려서 많은 백성들을 경계시킨다면, 거의 본업에 안주하고 살아가는 것에 재미를 붙여 전처럼 자신을 내팽개치고 죽음의 길을 밟는 데까지는 이르지 않을 것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염려되는 것은 국법이 비록 엄하더라도 상이 없으면 시행되지 않는 점입니다. 무릇 국경을 넘는 자들을 붙잡아 아뢰는 사람들에게는 수령과 변장(邊將)과 군교(軍校)를 막론하고 그중 공이 으뜸인 자를 뽑아 상전을 내리되 사나운 큰 도적을 붙잡은 것과 같게 하소서. 그러면 상과 형벌이 밝아지고 금령이 저절로 엄숙해져 간특한 백성이 반드시 국경을 넘지 못할 것이고, 혹 국경을 넘는다 할지라도 감추어 주는 폐단이 없어질 것입니다. 묘당에 내려 헤아려 시행하소서."
하니, 상이 비국에 내렸다. 비국이 의논해 아뢰기를,
"국경을 넘어 삼을 캐는 것을 금지시킨 것이 엄하고 분명하지만 큰 이익이 있기 때문에 죽음을 무릅쓰고 금령을 범하는 것이니 탈을 내는 환란이 십분 염려스럽습니다. 이번에 민유중이 순시 길에 강가에 도착해서 일의 형세를 목격하고 조목조목 이렇게 아뢰었으니, 이 뒤로는 각 수령들로 하여금 특별히 농사를 권장케 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농사에 힘써야 한다는 것을 알게 하고, 파수하고 기찰하는 일들도 십분 엄히 단속하여 법을 범하지 않게 해야 할 것입니다. 5일에 한 번씩 점고해도 오히려 틈을 보아 강을 넘어가는데, 지금 만일 10일로 정한다면 어리석은 백성들이 조정의 농사를 권장하려는 본뜻은 모르고 도리어 사행심을 가질 것이니, 종전의 규례를 갑자기 바꾸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이러한 뜻을 병사(兵使)들에게 아울러 분부토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의주 부윤 이동직(李東稷)이 장계를 올려 보고하였다.
"배[梨]·잣[栢]·꿀[淸]을 가지고 갔던 차사원(差使員) 인산 첨사(麟山僉使) 김득선(金得善)과 청역(淸譯) 최후원(崔厚元)이 돌아와 소문을 전하기를 ‘심양의 성중에 따로 성(城) 하나를 쌓고 있는데, 모양은 봉화대처럼 생겼고 높이는 대여섯 길쯤이며 위에는 가시덤불로 둘러쳐져 있다. 그 까닭을 물어보았더니 청나라 사람이 말하기를 「몽고는 옛날부터 제어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기미책을 쓸 심산으로 일찍이 황제의 딸을 그 나라 왕에게 시집보내 처로 삼아주었다. 그래서 몽고 왕은 순치 황제(順治皇帝)의 친매부(親妹夫)였다. 그 뒤로 몽고의 왕은 제후의 법도를 지키지 않았고 순치 황제가 죽었을 때도 북경에 조문오지 않아, 청에서는 노여움을 쌓아둔 채 속으로 참아온 것이 오래였다.
지난해에 몽고 왕의 처가 죽었는데 화장할 때 그 나라의 풍속은 으레 평생 옷가지며 보물들을 불태워 왔는데 이 왕비의 것은 불태우지도 않았고, 또 북경의 장가들라는 허락을 기다리지도 않고서 그 죽은 형의 처를 후처(後妻)로 삼았다. 그리고는 전처의 옷가지며 보물들을 그대로 그에게 주었으므로 이로 인해 더욱 분노를 샀다. 올 6월에 계책을 써 북경으로 초치했는데, 처음에는 남쪽에다 안치시키려 했었으나 이른바 황태후란 분의 간청으로 중지하고, 별도로 심양에다 감옥을 만들어 수금(囚禁)시키고 그 아들을 봉해 몽고 왕으로 삼았다. 8월 사이에 그 아들과 몽고의 다른 왕 너댓 사람이 술이며 안주를 싣고 삼양에 함께 왔었는데, 지키는 장수가 서로 만나는 것을 허락해 주지 않았다. 그러자 그의 아들이 화를 내며 돌아가면서 수많은 공갈을 했다. 이로 인해 심양이 웅성거리고 있다. 반드시 무사하지 않을 것이다.」 운운하다.
또 말하기를 「북경 대신(北京大臣) 속사하(束沙河)와 반부을어궁(半夫乙於弓)이 박두리궁(薄豆里弓)과 틈이 있었는데, 지난해 가을 박두리궁이 두 사람을 참소하여 죽였다. 속사하의 부자(父子) 세 사람이 그때 동시에 죽임을 당했는데, 그 가운데 하나는 서평왕(西平王) 오삼계(吳三桂)의 사위였다. 오삼계가 딸에게서 그 자세한 내막을 듣고서는 두 번씩이나 소장을 올렸으나 번번이 박두리궁에게 저지당했다. 그래서 오삼계가 따로 계책을 생각해 내어 올 7월에 치계하기를 『신의 지방에 장수에 합당한 자가 있으니, 원컨대 황상(皇上)께서 불러다 보시고서 진퇴를 결정하소서.』 하니, 그의 말대로 불러다 만났다. 그러자 그 사람이 품속에서 오삼계의 밀소(密疏)를 꺼내 직접 바치고, 속사하 등이 참소를 입고 원통하게 죽은 사유를 낱낱이 말하는 한편 또 박두리궁이 전후 상소를 막은 상황을 호소하니, 바로 정예의 군대로 박두리궁의 집을 애워싸고 붙잡아 왔다. 처음에는 그를 죽이려 하였으나 그의 선대에 공훈이 있었기 때문에 죽음을 감면하여 안치(安置)시켰다. 그 두 아들은 모두 죽임을 당했으며 그밖에 관련되어 죽은 대신이 4명이다. 또 올해부터 군사의 훈련이 전과 훨씬 달라졌다.」고 운운했다.’ 하였습니다. 김득선은 우리 나라에서 포로로 잡혀가 몽고에서 중이 된 사람과, 우리 나라에서 포로로 잡혀간, 이름이 최정립(崔貞立)이란 사람에게 들었고, 최후원은 요동의 호송(護送) 군사에게 들었다 했습니다."

 

10월 21일 신사

강백년(姜栢年)을 대사간으로, 이민서(李敏叙)를 부응교로, 홍주국(洪柱國)을 부수찬으로, 신명규(申命圭)를 사간으로, 유상운(柳尙運)을 정언으로, 윤지선(尹趾善)·홍만종(洪萬鍾)을 지평으로 삼았다.

 

10월 23일 계미

영의정 정태화가 일곱 번째 사직소를 올리자, 상이 승지를 보내 도타이 유시하였다.

 

충청도 각 고을에 이달 4일에 우박이 내려 곡식이 손상되었다.

 

평안도 위원(渭原)의 내노(內奴) 예현(禮玄)의 집에 정문(旌門)을 세워주었다. 예현의 아비 일립(日立)이 곰에게 물리자 15세인 예현이 몽둥이로 곰을 후려치니 곰이 그 아버지를 버리고 예현을 물었다. 여러 사람들의 구원으로 죽음은 면했으나 이로 인해 병이 나 결국 죽었다. 감사 민유중(閔維重)이 아뢰어 정표(旌表)하도록 명한 것이다.

 

10월 24일 갑신

헌부가 이은상(李殷相) 등을 조사할 것을 굳게 논계한 지 4개월이 지났으나 상이 대신의 말을 받아들여 끝내 따라주지 않자, 이때에 이르러 정계하였다.

 

영평(永平) 유생 이우휘(李遇輝) 등이 상소하여 문충공(文忠公) 박순(朴淳)의 서원에 액호(額號)를 청하자, 상이 해조에 내려 시행하게 하였다.

 

충청도 은진현(恩津縣)에서 암탉이 변해 수탉이 되었다.

 

장령 정중휘(鄭重徽)와 지평 홍만종(洪萬鍾)이, 선산 부사(善山府使) 홍성구(洪聖龜)가 아비의 잘못을 변명코자 군상을 속이었고 본직이 제수되자 염치없이 부임한 죄를 논계하며 파직하고 서용치 말 것을 청했다. 여러 차례 아뢰었으나 상이 끝내 따르지 않았다. 또 새로 임명된 장연 부사(長淵府使) 한명원(韓明遠)을 논계하여, 사람과 벼슬이 걸맞지 않으며 보내고 맞이하는 폐단이 있으니 전임 양덕 현감(陽德縣監)에 다시 제수하자고 청했다. 여러 차례 아뢰자 따랐다.

 

10월 26일 병술

승지를 보내 영의정 정태화를 도타이 유시하였다. 정태화가 상소하여 면직을 빌자 상이 허락하지 않고 다시 사관을 보내 전유(傳諭)하였다.

 

10월 27일 정해

평안도 정주(定州)·곽산(郭山)에 이달 17일 천둥 번개가 쳤다.

 

부제학 이민적(李敏迪) 등이 상차하기를,
"번쩍이는 천둥 번개가 두 번씩이나 10월에 발생했는데 이어서 또 들리는 소문에 은진현의 암탉이 수탉으로 변하는 변괴가 있었다 합니다. 하늘의 재앙과 사물의 이변이 일시에 발생하니, 국가에 어떠한 위험과 낭패가 있기에 하늘이 이렇게까지 꾸짖음을 보이는 것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옛 어진 제왕들이 재앙을 만나 덕을 닦기를 상상(祥桑)과 운한(雲漢)073)  처럼 한 일은 그 이상일 수 없는 최고의 경지입니다만, 근래 임진074)   연간에 암탉이 수탉으로 변하는 변괴가 있자 효종 대왕께서도 크게 놀라시어 바로 대신과 삼사의 2품 이상 신하들을 불러 재앙을 늦추게 할 방도를 물으셨는데 옥음이 애처로워 지진이나 일식이 전하로부터 비롯된 것처럼 하였습니다. 또 을미075)   연간에 흰 무지개가 해를 꿰뚫는 변고가 발생하자 바로 만수전(萬壽殿)의 역사를 중지시켰습니다. 하늘을 대하는 정성과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뜻이 마음에서 발로되어 정사로 시행되는 것이 이같았습니다. 《시경》에 ‘마음을 조심하여 공경으로 상제를 받든다.’고 했는데, 우리 선왕께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지금 건강이 좋지 못해 조용히 조섭하시는 중이라지만, 뉘우치는 말씀이 조정에 들리지 않고 근심하고 두려워하는 정사가 백성들에게 내리지 않아 위아래가 안일에 빠져 있는 모습이 평일과 다름이 없으니, 이같은 기상으로 하늘의 노여움을 돌리고 하늘의 마음을 감동시킬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만수전의 역사까지도 우리 선왕께서는 오히려 정지시켰는데, 제도를 넘게 짓고 있는 공주들의 저택 문제에 있어 끝까지 양사의 청을 따라주지 않고 계십니다. 하늘의 변괴를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들의 말도 돌아보지 않는 것이 한결같이 이에 이르고 있으니, 이 한 가지 일만 보더라도 또한 어찌 두려워하는 뜻이겠습니까."
하고, 또 아뢰기를,
"궁금(宮禁)이 엄숙치 못한 조짐이 있고 환관들이 교만 방자한 조짐이 있으며 사민(四民)이 본업을 잃을 조짐이 있고 유사가 취렴(聚斂)할 조짐이 있으며, 옛 제도가 붕괴될 조짐이 있고 여러 정사가 번잡해질 조짐이 있습니다. 무릇 이들 몇 가지 조짐들을 처음 보았을 때는 누가 위태하고 염려스러울 일이라고 생각하겠습니까. 그러나 은미했던 것이 훤히 드러나고 작은 것이 쌓여 큰 것이 이루어지면 필경에는 사방으로 터져나와 구원치 못할 지경에 빠지고 맙니다. 작았을 때 조심하면서 조기에 대처해 낼 수 있는 바를 생각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하고, 또 아뢰기를,
"신들이 앞서 천둥의 변고로 인해 몇 가지 일들을 대략 말씀드렸습니다. 성상께서 이미 의논해 조처하겠다고 답하시고서 차자를 안에 놓아 두신 채 아직 처분이 없으시니, 그른 것을 거절하는 성인의 뜻이 아닌 듯하니 언로의 기구함을 또한 알 수 있습니다. 군사의 선발과 양전(量田)은 일시에 함께 행할 수 없기 때문에 양전을 중지시켜 농사가 조금 풍년이 들 때를 기다리라 청하고, 또 새로운 포수와 별대(別隊)를 둘 다 독촉해 채우려 함으로써 인심이 소란해지고 백성들이 명을 견뎌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새로운 포수의 충정을 중지시켜 묘당의 본 뜻이 살아나게 하라고 청했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전하께서는 대수롭게 보시고 방치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널리 발생된 재해와 백성들의 고달픈 삶은 이목이 미치는 곳마다 근심스럽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해서(海西)의 고을들은 태반이 바다에 인접해 있고 호서(湖西)는 반은 바다와 인접하고 반은 강과 접해 있습니다. 농사가 잘된 지역은 어느 곳도 없으므로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나며 하루하루를 도모할 겨를도 없습니다. 진휼을 의논해야 할 이런 때에 막대한 역사를 시작하고자 하니, 신들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올해의 군액(軍額)은 여느 해에 비겨 배나 많으니, 연례적으로 채우는 것은 결코 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초군(精抄軍) 한 부대를 더 늘리고 별대(別隊)를 또 한 부대 더 늘렸으며, 신포보(新砲保)가 또 그대로 한 부대입니다. 양정(良丁)은 한정이 있는데 군액만 갑자기 불리니, 이들을 장차 어느 백성으로 채울 것입니까. 또 별대를 설치한 것은, 단지 어영(御營)의 규모처럼 포수(砲手)는 차츰 채우지 않으면서 별대를 차츰 채우고자 했던 것이지, 애당초 양군(兩軍)을 함께 두고자 했던 것이 아니고 또 일시에 함께 채우려 했던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조정의 조처는 처음의 의견을 크게 어기고서 포보(砲保)를 채운 뒤 또 별대를 채워 저쪽에 불어난 인원만큼 이쪽에서 줄어들지 않으니 이점 또한 신들이 이해할 수 없는 바입니다.
청컨대 신들의 전후 두 차자를 내리시어 속히 대신과 유사로 하여금 의논해 조처케 하소서."
하였다. 차자가 들어간 지 나흘 만에 비답이 내려졌다.

 

10월 28일 무자

눈이 내렸다. 신시(申時)에 무지개가 동쪽에 나타났다.

 

상이 설사병을 앓았다.

 

어사 권격(權格)을 수원(水原)에 보내 무사들을 유엽전(柳葉箭)·기추(騎蒭)·조총(鳥銃)으로 시재(試才)케 하였다. 입격한 장수와 제 부대의 군인들에게는 전일 강도와 남한 산성의 시재에서 내린 상격처럼 미포(米布)와 궁전(弓箭)을 차등있게 지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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