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현종실록21권, 현종 14년 1673년 4월

싸라리리 2025. 12. 17. 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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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일 경자

박세당을 사간으로 삼았다.

 

상이 춘당대에 임하여 무사를 모아 무예를 시험하고, 시신(寺臣)들에게 시사(試射)를 명했다. 그리고 각 기예에서 한 번 이상을 맞춘 자에게 차등있게 상을 내렸다.

 

4월 2일 신축

상이 대신 및 주사(籌司)의 여러 재신을 인견하였다. 상이 주서(注書)에게 명하여 영림 부령(靈林副令) 이익수(李翼秀)를 불러오게 하여 묻기를,
"상소한 것 이외에 또 말할 것이 있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신이 봉심할 때에 참봉이 말하기를 ‘기해년008)   국장(國葬) 때 감동관(監董官)이 병환 중이라서 보토(補土)하는 일을 제 기간 안에 하지 못할 형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밤에도 흙을 다져 쌓았으며 공역을 서둘러 나무 조각을 사용하여 막았는데, 오래 되자 나무 조각이 썩어 날이 갈수록 점점 기울어지고 무너진다.’고 하였습니다. 또 들으니, ‘전일에 능관(陵官)이 빗물이 고인 정상을 예조에 보고하니 수일 뒤에 처음으로 와서 살펴보았는데, 그때 고였던 물이 이미 말랐으므로 속였다 하여 능관을 도태시켜 버렸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대사헌 김휘가 아뢰기를,
"나무 조각으로 메우고 채웠다는 말은 일이 매우 놀랍습니다. 이 말이 진실이라면 감동관을 효시(梟示)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일은 서서히 처리하고, 능관을 도태시켜 버렸는지의 여부를 자세히 조사하도록 하라."
하였다. 익수가 아뢰기를,
"틈이 가장 큰 곳은 그 안이 매우 넓어서 목척(木尺)으로 헤아려 보면 막힘없이 깊이 들어간다고 합니다."
하니, 좌상 김수항이 아뢰기를,
"외면의 회(灰)를 걷어 버리고 틈안의 깊이와 너비 및 청석(靑石)이 많은지 적은지를 일일이 조사해야 되겠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대신, 정경(正卿), 삼사(三司)의 장관은 익수와 함께 가서 살펴 보라."
하였다. 김휘가 나아와 아뢰기를,
"공릉 차제 감찰(恭陵差祭監察)이 조사서를 올리기를 ‘헌관(獻官) 안경(安鏡)이 남여를 타고 안향청(安香廳)에서 홍문(紅門)까지 갔고 향배 서리(香陪書吏)로 하여금 말을 타게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능침(陵寢)은 지극히 공경해야 할 곳인데 어찌 감히 이렇게 했단 말입니까. 매우 무식합니다. 안경을 파직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안경을 잡아다 심문하여 처치하라."
하였다.

 

4월 3일 임인

헌납 어진익(魚震翼), 정언 홍만종(洪萬鍾)이 아뢰기를,
"동부승지 이세익(李世翊)은 제배된 처음에도 이미 물의가 있었는데 구차하게 무릅쓰고 있으니 어리석고 더럽기가 그지없습니다. 체직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지평 조창기가 상소하고 사직하였는데, 그 대략에 아뢰기를,
"거듭 시휘(時諱)에 저촉되었으므로 물리쳐 폐기당함을 달게 여겼었는데 중비(中批)의 특제(特除)가 외람되게 미신(微臣)에게까지 미치어 시끄러운 단서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정관(政官)까지 죄를 받게 되어 사람들의 시비가 배나 더하여 야기되었으니, 비록 힘써 반열에 나가고자 하더라도 위로 전하의 사랑을 욕되게 함에 있어서는 어찌해야 합니까. 천하의 공론은 저절로 그 진실이 있는 것이며 인심은 지극히 신령스러워 시비를 속이기 어려운 것이므로 신은 여러 말을 하여 스스로 변명해서 거듭 전하의 위의를 더럽히고 싶지 않습니다. 다만 생각건대, 지금 안팎의 근심거리로 인하여 온갖 위태로움이 도사리고 있어, 나라의 형세가 날로 쇠약해 가고 백성들은 고생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비상한 근심은 온 백성이 함께 염려해야 하는데 집사(執事)를 맡은 자들이 이것은 걱정하지 않고 다만 얼굴을 붉히면서 한 오활한 언사(言事)의 신하를 떠들썩하게 배척하는 일로 해를 넘기며 오래도록 중지하지 않고 있으니, 이 어찌 치세(治世)의 일이겠으며 또 조정 신하들에게 바라는 것이겠습니까."
하니, 상이 답하기를,
"그대가 전에 올린 상소의 뜻은 참으로 개연한 의지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런데 요즘 세도(世道)는 색목(色目)에 대해 오직 부식(扶植)하는 것에만 일삼고 있으면서 남보다 못 미칠까 염려한다. 그러면서도 만약 색목에 대해 말하면 매우 듣기 싫어하면서 반드시 남몰래 죄에 걸리게 하기를 생각하고 있다. 그대에게 무슨 혐의가 있겠는가? 사직하지 말고 속히 직무를 살피라."
하였다.
○持平趙昌期上疏辭職, 其略曰:
重觸時諱, 自甘屛廢, 中批特除, 濫及微臣, 轉成鬧端。 罪及政官, 惹人齒舌, 又加一倍, 雖欲黽勉就列, 其如上辱天眷, 何哉? 天下公論, 自有其眞, 人心至靈, 是非難誣, 臣不欲呶呶自明, 重瀆 宸威。 而但念當今外警內憂, 虞危百端, 國勢日靡, 民生倒懸, 非常之憂, 億兆同慮, 而爲執事者, 不此之憂, 顧乃動色譁然, 斥一迂闊言事之臣, 經年閱歲, 久猶未巳, 此豈治世之事, 而亦豈所望於廷臣者哉?                                    上答曰: "爾之前疏之意, 實出於慨然之志。 而近日世道之於色目, 全事扶植惟恐不及, 而若言色目之說, 聞之甚惡, 必思其陰中。 爾何爲嫌? 勿辭從速察職。"

【태백산사고본】 21책 21권 12장 A면【국편영인본】 37책 36면
【분류】인사-임면(任免) / 정론-간쟁(諫諍)

 

4월 4일 계묘

헌납 어진익(魚震翼), 정언 홍만종(洪萬鍾)이 아뢰기를,
"지평 조창기의 상소 뜻이 아름답지 않아서 물의에 비난을 받았고, 그래서 오래도록 청반(淸班)에 의망되지 못했었습니다. 그런데 저번 헌직(憲職)에 제배되었던 날에는 전관(銓官)을 파직 추고하라는 명이 있기까지 했습니다. 삼사의 신하들이 모두 도로 거두기를 청하였으니 여론이 어디에 있는지를 이에 의거하여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창기는 마땅히 두렵고 부끄러워 움추리고 엎드려 있으면서 스스로 탄핵하기에 겨를이 없어야 할 터인데도 감히 사직 상소를 올려 장황하게 스스로를 변명하면서 ‘천하의 공론과 시비는 속이기 어렵다.’는 등의 말까지 하여 자기의 견해를 옳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안팎의 근심거리를 걱정하지 않는다는 등의 말을 하여 조정 신하들을 기롱하고 배척하였습니다. 이것이 어찌 대관(臺官)으로서 허물을 인책하고 면직을 비는 도리라 하겠습니까. 공론을 이기려고 맞서서 스스로 반성하기를 생각하지 않고 있으니, 염치에 있어 어찌 이와 같을 수 있겠습니까.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고 이르기를,
"남몰래 죄에 걸리게 한다고 한 것은 대체로 그대와 같은 부류를 두고 한 말이다. 뜻이 매우 아름답지 못하다."
하였다. 여러번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대신, 재신(宰臣), 삼사(三司)가 영릉(寧陵)을 봉심하는 일로 나갔다. 상이 소견(召見)하고 일렀다.
"능 위의 12면을 얇은 유지(油紙)에다 도형(圖形)을 만들고 크고 작은 틈을 하나하나 자로 재어 그려가지고 오라."

 

4월 5일 갑진

상이 영릉을 봉심한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좌상 김수항이 도형을 올리며 아뢰기를,
"그전에 봉심할 적에는 비록 틈이 있어도 대단하지 않았는데, 지금은 전과 크게 다릅니다. "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난해와 크게 다르던가?"
하자, 수항이 그렇다고 하였다. 형조 판서 민유중(閔維重)이 아뢰기를,
"능 위의 물이 반드시 흘러 들어갈까 걱정이 됩니다."
하고, 수항이 아뢰기를,
"다른 능은 지대석 아래에 반드시 엄석(掩石)을 설치했는데, 영릉은 애당초 엄석을 배설하지 않았습니다."
하고, 대사헌 김휘(金徽)가 아뢰기를,
"석역(石役)이 견실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같은 지경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하고, 수항이 아뢰기를,
"참봉을 도태시켰다는 말은 상고할 만한 문서가 없어서 본능에 물어보니 이것 때문에 죄를 받은 사람이 없다고 하였으며, 나무 조각으로 메우고 흙을 채운 일에 있어서는 능졸(陵卒)들이 모두 알지 못한다고 하여 자세히 조사해내기가 어려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여러 신하들은 각기 의견을 말하라."
하니, 모두 대답하여 아뢰기를,
"능 위의 석물(石物)은 고쳐야만 합니다. 천봉하는 일은 중대하여 의논하기 어렵고 조종조에서도 일찍이 개봉한 일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조용하게 강론하여 결정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였다. 병조 판서 김만기, 교리 이당규(李堂揆)가 아뢰기를,
"불행하게 능 위의 석물이 이와 같이 되었으니, 조종조에서 비록 개봉했던 일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재궁(梓宮)을 옮기게 된다면 더욱 미안할 듯합니다. 선조조(宣祖朝) 신해년 때 북도(北道)에서 능을 개봉한 일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때에 이항복(李恒福), 이덕형(李德馨)이 다 생존해 있었으니 반드시 강구하여 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신해년의 일과 영릉(英陵)을 천봉(遷奉)했던 이유를 사관(史官)을 시켜 강도(江都)에 보관한 실록을 상고해 오게 하라. 능 위의 사면 팔방이 한 곳도 완전한 곳이 없으니, 그때 일을 감독한 신하가 마음을 써서 감독했더라면 어찌 이와 같은 걱정이 있겠는가. 그때의 도감 당상 이하를 아울러 잡아다 문초하라."
하였다. 승지 신정(申晸)이 아뢰기를,
"기해년의 산릉 도감 당상으로는 다만 판부사 정치화(鄭致和)가 생존해 있습니다만, 대신을 직접 잡아다 추고한 일은 일찍이 전례가 없습니다. 어떻게 합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우선 잡아다 문초하지 말고 결말을 기다려라."
하였다.

 

4월 6일 을사

기해년 산릉 도감의 낭청 신명규(申命圭), 감조관(監造官) 이정기(李鼎基)·한시중(韓時重)·송지렴(宋之濂)·이최만(李最晩), 차지 내관(次知內官) 윤완(尹完) 등을 법을 맡은 관리에게 내렸다.

 

헌납 어진익, 정언 홍만기가 엄한 비답 때문에 패초에도 나오지 않아 전례에 따라 체직되었다.

 

4월 8일 정미

이하진(李夏鎭)을 필선으로, 윤형성(尹衡聖)을 헌납으로, 서문상(徐文尙)·이당규(李堂揆)를 정언으로 삼았다.

 

4월 11일 경술

부수찬 조위봉(趙威鳳)이 상소하기를,
"신이 삼가 듣건대, 영릉을 봉심한 공경(公卿)·대시(臺侍)가 돌아와 이익수의 상소가 빈말이 아닌 사실에 대해 주달했습니다. 그리고 상께서 능 위에 사면 팔방이 한 곳도 완전한 곳이 없다고 하교하셨습니다. 영릉을 봉안한 지가 이제 15년이 지났는데 이와 같은 지경에 이르렀으니, 만세를 전할 능침을 보전할 걱정을 어찌 다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옛날 송 인종(宋仁宗)의 영소릉(永昭陵) 장사 때에 황당(皇堂)의 기둥이 손상되자 여러 사람은 그 일을 엄폐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자 한기(韓琦)가 정색하면서 말하기를 ‘기둥이 손상되었으면 마땅히 바꿔야 한다. 장사의 기간을 어기거나 비용이 많이 드는 것에 대해서는 그 책임을 오히려 감당할 수 있다. 만약 구차하게 엄폐했다가 후에 무너져서 임금의 의심을 불러온다면 신하가 무엇으로 책임을 감당하겠는가.’ 하였다고 합니다.
아, 그때 감독하던 신하들은 후에 무너질 우려가 있는 것은 생각하지 않고 일을 끝마치는 것만 힘썼으니 한기의 말과 비교해 볼 때 어떠합니까. 감역관(監役官)에게 참으로 죄가 있습니다.
복토(復土)와 배석(排石)에 이상이 있다는 보고가 있은 뒤에 전후로 봉심한 신하들이 틈난 곳에 회를 바르는 것만 일삼았고 능 위의 사방 팔면에 걱정될 만한 형세가 있는 것에 대해서는 상께 아뢰지 않았습니다. 살펴보고도 몰라서 그랬다면 그래도 괜찮겠지만 만약 그런 형편을 알면서도 아뢰지 않았다면 그 죄가 사실 감동관보다 더합니다. 능침을 봉심하는 일이 국가에 얼마나 중대한 일인데 전후의 눈치를 살피면서 사실대로 보고하지 않는단 말입니까. 이러한 것을 자라게 하면 비록 건원릉[長陵]의 흙을 가져가는 자가 있더라도 전하께서 듣지 못하실까 신은 두렵습니다.
전하의 효도를 생각하는 마음을 몸받지 않고 감히 방자하게 속인 행위가 이것보다 더 큰 것이 또 있겠습니까. 능의 역사가 완전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나타난 지 이미 오래 되었는데도 양사(兩司)가 아무 말없이 있으면서 전후로 봉심한 것이 부실했던 잘못을 논거하지 않았으니, 이는 무슨 의도입니까. 어리석은 신은 하찮은 정성을 이길 수 없어 감히 분간없는 말을 올립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그대의 상소를 살펴 보니, 개연한 뜻과 나라에 충성하고 임금을 사랑하는 정성이 내용에 흘러넘치니, 매우 가상하고 탄복스럽다. 지금 선왕(先王)의 만세토록 전해야 할 능침의 의물(儀物)이 완전한 곳이 없어서 앞으로 부득이한 거조가 있게 되었으니 나의 마음이 어떠하겠는가. 전후 봉심했던 신하가 만약 있는 사실을 없다고 하고 큰 것을 작다고 하였다면 그 죄는 참으로 피하기 어렵다. 내가 마땅히 실상을 자세히 조사하여 처리할 것이다. 요즘 대각의 신하에 앞뒤 눈치를 살피는 자가 많으니 누가 나라를 위하여 분발해서 이런 말을 하려 하겠는가. 참으로 개탄스럽고 한스럽다."
하였다.
삼가 살피건대, 조위봉(趙威鳳)의 상소는 말뜻이 준엄하고 정직하여 범할 수 없는 것이 있었다. 이전에 일을 감독한 신하와 당년에 봉심한 재상이 이 상소를 본다면 부끄러운 마음이 없을 수 있겠는가. 성상의 비답에 ‘요즘 대각의 신하에 앞뒤로 눈치를 살피는 자가 많은데 누가 나라를 위하여 분발해서 이런 말을 하려 하겠는가.’ 하였으니, 또한 신하를 아는 것은 임금만한 이가 없다고 할 만하다. 조경(趙絅)이 신축년009)  에 직언소(直言疏)를 올렸다가 시의(時議)에 크게 거슬리고 폐기 금고되어 일생을 마쳤는데, 지금 그 아들이 영욕(榮辱)을 돌아다 보지 않고 이 상소를 올렸으니 또한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고 할 만하다.
○庚戌/副修撰趙威鳳上疏曰:
臣伏聞, 奉審寧陵公卿、臺侍, 還奏翼秀疏不窾。 上有陵上四面八方, 無一完全之敎。 奉安寧陵, 今十五歲, 而乃致如此, 則萬世橋山之慮, 寧有極乎? 昔宋 仁宗 永昭之葬, 皇堂棟損, 諸使欲掩。 韓琦正色曰: ‘損當易之。 若違葬期, 侈所費, 此責猶可當。 若苟且掩之, 後有壞而致人主疑心, 臣下何以當責。’ 惜乎! ‘其時監董諸臣, 不顧後壞之患, 惟以竣事爲務, 其視韓琦之言何如耶? 董役之官, 固有罪也。 自有復土、排石報異之後, 前後奉審之臣, 只事塗灰罅隙, 而不以四方八面, 可虞之勢, 啓于上。 審視而不知, 則猶或可也, 若知而不啓, 則罪實浮於監董之官也。 奉審陵寢, 是國家何等重事, 而瞻顧前後, 不以實聞? 長此不已, 則雖有取長陵一抔土者, 臣恐殿下不得聞也。 不體思孝, 敢肆欺誣, 復有大於此者乎? 陵事無完之實, 著目見已久, 而兩司默默不擧, 前後奉審不實之非, 是何意耶? 愚臣不勝愚忱, 敢進瞽說。            上答曰: "省覽爾疏, 慨然之志, 忠愛之誠, 溢於辭表, 深用嘉歎。 今者先王萬世陵寢儀物, 未有全完之處, 將有不得已之擧, 其在予心, 當作何如? 前後奉審之臣, 若以有爲無, 以大爲小, 則罪誠難逃矣。 予當覈得實狀而處之。 近日臺閣之臣, 瞻前顧後者多矣, 誰肯爲國奮發, 爲此等說耶? 誠可慨恨也。"  【謹按威鳳之疏, 辭意埈正, 有不可犯者。 伊日董事之臣, 當年奉審之宰, 見此疏, 能無愧乎? 聖批曰: "近日臺閣之臣, 瞻前顧後, 誰肯爲國奮發, 爲此說?" 亦可謂知臣莫如君矣。 趙絅於辛丑, 進直言疏, 大忤於時, 廢錮而終, 今其子, 不顧榮辱, 投進此疏, 亦可謂有是父而有是子矣。】

【태백산사고본】 21책 21권 13장 A면【국편영인본】 37책 36면
【분류】정론-정론(政論) / 왕실-종사(宗社) / 역사-고사(故事)
上答曰: "省覽爾疏, 慨然之志, 忠愛之誠, 溢於辭表, 深用嘉歎。 今者先王萬世陵寢儀物, 未有全完之處, 將有不得已之擧, 其在予心, 當作何如? 前後奉審之臣, 若以有爲無, 以大爲小, 則罪誠難逃矣。 予當覈得實狀而處之。 近日臺閣之臣, 瞻前顧後者多矣, 誰肯爲國奮發, 爲此等說耶? 誠可慨恨也。"
【謹按威鳳之疏, 辭意埈正, 有不可犯者。 伊日董事之臣, 當年奉審之宰, 見此疏, 能無愧乎? 聖批曰: "近日臺閣之臣, 瞻前顧後, 誰肯爲國奮發, 爲此說?" 亦可謂知臣莫如君矣。 趙絅於辛丑, 進直言疏, 大忤於時, 廢錮而終, 今其子, 不顧榮辱, 投進此疏, 亦可謂有是父而有是子矣。】

【태백산사고본】 21책 21권 13장 A면【국편영인본】 37책 36면
【분류】정론-정론(政論) / 왕실-종사(宗社) / 역사-고사(故事)

 

4월 12일 신해

영의정 정태화가 병으로 사직하여 면직되었다.

 

4월 15일 갑인

상의 턱 밑에 몽오리가 생겨 곪았으므로 침을 놓아 고름을 터트렸다.

 

함경도에 전염병이 심하게 번져 죽은 자가 2백여 명이나 되었고 가뭄이 또 심하여 보리, 밀이 누렇게 말랐으므로, 영남 지방의 곡식 7천 곡을 옮겨 안변(安邊) 등 고을의 굶주린 백성을 구휼했다.

 

4월 16일 을묘

여성제(呂聖齊)를 대사간으로, 정태화(鄭太和)를 영중추부사로 삼았다.

 

4월 17일 병진

상이 정원에 전교하기를,
"영릉을 전후로 봉심한 문서 속에 갈라진 틈의 분수(分數)를 기록한 곳이 매우 많다. 본능과 해조에 혹 근거할 만할 문서를 남겨 둔 곳이 있는가 물어보아서 아뢰어라."
하니, 정원이 아뢰기를,
"예조는 전부터 문서를 비치하는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지난해 4월 16일 본능의 석물에 회를 바를 때에 당상(堂上)이 사사로이 틈난 곳과 회로 메운 깊이를 기록하여 가지고 왔는데 이것은 찾아 들여왔습니다. 그리고 본능의 문서는 지금 바야흐로 이문(移文)하여 조사 신문하고 있습니다."
하니, 상이
"알았다"
고 하였다.

 

예조가 아뢰었다.
"본능에 물어보니 문서는 이미 다 잃어버렸고, 무신년010)  부터 신해년011)  까지 참봉이 보고한 서목 속에 분수를 기록한 것이 5장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첨부하여 들여 보냈습니다."

 

4월 18일 정사

상이 정원에 하교하였다.
"전후로 봉심한 문서를 상고해 보니 영릉 석물에 틈이 생긴 뒤부터 다소간 모두 대신 이하가 봉심을 했다. 그런데 정미년012)   봄과 가을 두 차례를 봉심할 때에는 해조에서 다른 의견을 내어 다른 능의 예를 끌어대고 본조 당상만을 보내어 봉심하게 하였다. 그 마음을 논해 보건대 대신이 나가는 것은 중하게 여기고 능 위의 사체는 도리어 가볍게 여긴 것이니, 어찌 이런 이치가 있단 말인가. 영릉의 봉심을 다른 능과 비교하여 한 가지로 여기는 것인가? 다른 능이 어찌 일찍이 이와 같은 변이 있었는가. 참으로 극히 통탄스럽고 해괴하다. 당해 당상 낭청을 아울러 잡아다 국문하고 엄히 물어 처치하라."

 

최일(崔逸)을 승지로, 민정중(閔鼎重)을 대사헌으로, 조원기(趙遠期)를 집의로, 최문식(崔文湜)·김수오(金粹五)를 장령으로, 윤지선(尹趾善)을 지평으로, 홍처후(洪處厚)를 경기 감사로 삼았다.

 

식년 문과로 이익(李榏) 등 34인, 무과로 이돈(李敦) 등 28인을 취하였다. 경상 감사 이관징(李觀徵)이 사조하니, 상이 인견하고 면려하였다. 그리고 궁시(弓矢)를 하사하였다.

 

4월 19일 무오

상이 예조 판서 조형(趙珩), 참판 이은상(李殷相), 참의 이혜(李嵆)를 불러 일렀다.
"실록을 상고해 보고 나서 개봉(改封)한 규례가 없다면 영릉을 그대로 봉안할 수 없다. 산자리를 정하여 천봉하는 일에 대해서는 해관(該官)만으로 결정할 수 없다. 구릉(舊陵)을 파묘할 길년을 먼저 알고 싶으니 물러가 지사(地師)에게 물어 의논하라."

 

4월 22일 신유

이원정(李元禎)을 도승지로 특배하고, 이홍연(李弘淵)을 대사간으로, 권유(權愈)·정유악(鄭維岳)을 정언으로, 이규령(李奎齡)을 집의로, 홍주국(洪柱國)을 교리로, 이당규(李堂揆)를 수찬으로 삼았다.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지금 영릉을 전후로 봉심한 문서을 보니, 참봉이 보고한 것은 혹은 분수를 쓰기도 하고 혹은 좀 크다거나 미세하다고도 하여 분명하고도 명백한 곳이 없는데 봉심한 것도 대략 서로 비슷하다. 10년 이상 틈난 것은 또한 요즘 틈난 것과 같지 않으니, 비록 ‘어떤 것은 작고 어떤 것은 큰데, 별로 더해진 것이 없다.’고 하였더라도 전후로 봉심하는 동안에 세월이 이미 멀리 떨어지고 또 조금도 의거할 만한 것이 없으니 이것으로 속였다는 죄를 더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나 그 중에 신해년013)   8월에 봉심한 서계(書啓)는 아주 형편없다. 그 내용에 ‘인묘간(寅卯間)·축인간(丑寅間)·술해간(戌亥間)·해자간(亥子間)의 가석(駕石) 및 인방(寅方)의 병풍석(屛風石) 등처의 틈에 발랐던 회가 아울러 모두 떨어졌으나 전에 비해 더 벌어진 틈은 별로 없다.’고 되어 있다. 그러므로 물러나 신해년 이전의 서계를 상고해 보니 봉심한 일이 없었고 무신년014)   3월에 와서야 비로소 봉심한 문서가 있으나, 또한 분수(分數)를 기록한 곳은 없었다. 무신년 3월부터 신해년 8월까지 통계하면 44개월이다. 이미 3년을 지난 뒤인데도 전에 비해 증가된 것이 없다면 어찌 점점 틈이 벌어지는 걱정이 있겠는가. 발랐던 회가 이미 떨어졌고 또 분수를 기록한 곳이 없다면 길이와 너비를 어떤 것을 따라 근거로 하여 별로 더 벌어진 틈이 없다고 했는가. 지금 예조가 추가로 들여보낸 문서를 보니, 이 다섯 방위의 탈이 있는 곳을 잡아 비로소 지난해 4월에 고치고 그때 분수를 써 넣었는데, 금번에 봉심한 분수에 비교해 보면 틈이 더 벌어진 것이 1치 남짓이거나 4, 5푼 정도였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면 1년 안에 더 벌어진 틈이 이같이 넓은데, 3년이 지난 후 봉심했을 때에 더 벌어진 틈이 없다고 한 것은 더욱더 놀라운 일이다. 그때 봉심했던 여러 신하들을 모두 잡아다가 신문하여 정죄하라."
하니, 정원이 아뢰기를,
"그때의 봉심한 문서를 갖다 상고해 보니, 대신은 바로 지금 판부사 정치화(鄭致和)이고, 선공 제조(繕工提調)는 지금 좌상 김수항(金壽恒)입니다. 대신에 대해서는 먼저 직첩(職帖)을 거두고 뒤에 잡아 가두는 것이 전례인데,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먼저 그 직책을 파하고 우선 죄명을 기다리게 하라."
하였다.

 

4월 23일 임술

정언 정유악(鄭維岳)이 아뢰기를,
"지난번에 대신·육경·양사·옥당을 따로 보내어 영릉을 봉심하던 날에 이조 판서 이상진(李尙眞)은 다릿병이 있다는 핑계로 태연히 집에 있으면서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상진이 높은 벼슬이나 작위를 받을 때에 병 때문에 받지 않은 적이 없었으며 친구간 오고가는 일에 있어서도 병 때문에 빠진 적이 없었는데, 임금 앞에 입시하는 일에만 병을 핑계하였으니 참으로 오만스럽게 자기만 편하려는 데서 나온 행위임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군신의 사이는 부자(父子)와 같은 것입니다. 만일 상진의 부모 무덤이 무너졌다면 상진이 다릿병을 핑계하고 직접 가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산릉에 일이 있을 때에 병을 핑계하고 봉심의 행렬에 나오지 않은 것은 도리로 헤아려 보건대 아주 근거없는 행위입니다. 파직하소서."
하고, 또 도승지 이원정을 탄핵하기를,
"재상의 반열에 오른 후 청현(淸顯)을 거치지 못했는데 뜻하지 않게 중비(中批)의 제배가 갑자기 전주(銓注) 밖에서 나오니 물의가 다 놀랍게 여깁니다.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그리고 이르기를,
"대체로 사람을 논함에 있어서는 그 실정을 얻지 못하면 반드시 사람들의 이목(耳目)을 놀라게 하고, 사람의 이목을 놀라게 하면 임금도 그 마음을 의심하게 된다. 왜냐하면 원정은 일찍이 대시(臺侍)를 지냈고 은대(銀臺)에서부터 승자(陞資)되었으니, 이력을 상고하건대 논핵할 만한 일이 아니다.
지금의 물의는 당론(黨論)을 선무로 삼고 공도(公道)를 다음으로 여기고 있다. 만약 당론으로 따진다면 원정이 인망에 맞지 않은 지가 오래되었으나, 공도로 논한다면 원정이 여러 신하들에 비해 미치지 못할 리가 없다. 또 만약 지난날의 풍파를 가지고 고집하여 말한다면 군읍에서 해를 보내는 동안 뭇 치설(齒舌)을 잠재울 만하였는데 지금 어찌 급급하게 구는가. 중비(中批)로 특별히 제배한 것은 본디 떳떳한 격식은 아니나, 일체 해조의 정체(政體)에만 의존하여 해야 한단 말은 듣지 못했다. 그대들의 말은 매우 바르지 못하다."
하고, 여러번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4월 24일 계해

맹주서(孟胄瑞)를 우승지로, 여성제(呂聖齊)를 우부승지로 삼고, 김수흥(金壽興)를 우의정으로 특배하고, 조형(趙珩)을 판의금(判義禁)으로 탁배하고, 이규령(李奎齡)을 교리로, 홍주국(洪柱國)을 수찬으로 삼았다.

 

정언 정유악(鄭維岳)이 인피하며 아뢰기를,
"신이 이원정에 대해 논핵한 것은 다만 관방(官方)의 체례였는데 도리어 마음이 의심스럽다고 하시니, 이는 모두 신이 임금 섬기기를 형편없이 하여 신임을 받지 못한 소치인 것입니다. 체직하소서."
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리니, 장령 김수오(金粹五)가 처치하기를,
"뜻밖의 성교(聖敎)를 꼭 혐의로 삼을 것은 없습니다. 출사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4월 27일 병인

명혜 공주(明惠公主)015)  가 죽었다.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지금 명혜 공주가 뜻밖에 죽으니, 애통한 나머지 다른 일은 생각할 겨를이 없다. 다만 부마(駙馬)에 대하여 생각하면 비록 위호(尉號)를 정했으나 아직 납채(納采)의 예를 행하지 않았으니 이미 정혼하여 길례(吉禮)를 행한 것과는 다른 점이 있다. 고사(故事)의 유무와 위호(尉號)를 그대로 두느냐의 여부를 즉시 예조에게 물어서 아뢰라."
하니, 예조가 회계(回啓)하기를,
"이는 국조(國朝)에 없었던 변례이고 또 상고할 만한 문적이 없습니다. 《예기(禮記)》 증자문(曾子問)에 ‘장가드는 데는 반드시 길일을 정하는데 여자가 죽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니, 공자가 말하기를 ‘사위가 자최복으로 조상을 하고 장사지내고는 벗는다.’고 하였습니다. ‘길일을 정한다.’고 한 것은 납채(納采)할 날을 정하는 것을 말하는데, 지금 명혜 공주는 납채한 일이 없었으니 길일을 정한 것과는 차이가 있어야 마땅할 듯합니다. 그러나 부마가 봉작(封爵)이 이미 정해진 뒤라서 여러 차례 금중(禁中)에 드나들었으니, 또한 고례(古禮)와 다른 점이 있습니다. 이처럼 더없이 중대한 변례를 신들이 감히 경솔하게 정할 수 없으니 유신(儒臣)을 시켜 전례(典禮)를 널리 상고하게 하여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즉시 전례를 상고하여 품의하라."
하였다. 홍문관이 아뢰기를,
"《예기》의 증자문 한 조목은 근거할 수 없는 예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예경(禮經)》을 두루 상고해 보아도 이번 경우와 근사한 것이 없었습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다시 예관(禮官)을 시켜 품처(稟處)하게 하라."
하였다. 예조가 대신에게 의논하기를 청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좌상 이경억(李慶億)이 의논드리기를,
"제왕가의 혼례가 비록 사대부의 혼례와 다른 점이 있다고 하더라도 합근(合巹)을 하고 방을 함께 쓴 다음에 비로소 부부의 의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혼례를 행하지 않았으면 부부가 될 수 없는데, 이는 귀천에 따라 다른 것이 아닙니다. 더구나 이번 공주의 죽음이 육례(六禮)를 행하기 전에 났으니, 부마의 봉작은 그대로 둘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사체가 중대하므로 병들고 정신이 혼미한 신의 견해로는 단정하지 못하겠으니 삼가 상의 재결을 바랍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미 위호를 정한 뒤라 은의(恩義)가 있었으므로 그 봉작을 환수하려 하니 참혹하고 애통함을 견디기 어렵다. 다만 생각건대 오륜(五倫) 속에 부부(夫婦)가 한 조목을 차지했다. 그러므로 자사(子思)가 말하기를 ‘군자의 도는 부부에서부터 시작된다.’고 하였다. 지금 불행하게도 공주의 초상이 뜻밖에 났는데, 고기(告期) 등의 예를 미처 행하지 못했으니 예에 이른바 ‘아내가 되지 못했다.’는 것과 다름이 없게 되었다. 그리고 부마에 대해서 그대로 위호를 두어 죽을 때까지 부부간의 즐거움을 갖지 못하게 하는 일은 인정으로 볼 때 더욱 차마 못할 일이다. 의논에 따라 시행하라."
하였다. 부마는 바로 동안위(東安尉) 신요경(申堯卿)인데 신정(申晸)의 아들이다.

 

4월 29일 무진

정언 권유(權愈)가 병으로 패초해도 나아가지 못한 것으로 인피하니, 전례대로 체직되었다.

 

4월 30일 기사

김익경(金益炅)을 대사간으로, 이유(李濡)·최후상(崔後尙)을 정언으로, 민유중(閔維重)을 호조 판서로 삼았다.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가뭄이 갈수록 심하니 백성의 일을 생각하면 기가 막히고 마음이 아프다. 심리 등의 일은 비록 겉치레라고 하지만 요즈음 급병과 상환(喪患)으로 인하여 미처 하지 못하고 있으니 우려에 잠긴 내 마음이 어찌 끝이 있겠는가. 빨리 해부(該府)로 하여금 심리 문서(審理文書)를 수정하여 들여오게 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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