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일 경오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아, 내가 왕위에 오른 뒤로 수재·한재·풍재·상재가 없는 해가 없었다. 경자년·신축년에 대기근을 만난 후에 불쌍한 우리 백성들이 참혹하게 오갈 데 없이 죽었던 것에 대해서 참으로 차마 말할 수 없었다. 지난해 농사도 풍년이 들지 않아서 백성이 채 소생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지금 여름철을 당하여 달포나 비가 오지 않고 간혹 조금씩 빗발이 있기는 하지만 햇빛이 쨍쨍하여, 망종(芒種)이 이미 지났는데도 파종(播種)의 적기를 잃고 있다. 경작을 하여야 거두는 것이 자연의 이치인데 파종하지 못했으니 추수를 어떻게 바라겠는가? 말이 이에 미침에 오장이 불에 타는 듯하여 차라리 죽고 싶다. 아, 백성은 먹을 것에 의지하는 것이고 나라는 백성에 의지하여 존재하는 것인데, 백성에게 먹을 것이 없으면 나라가 무엇을 의지하여 나라꼴이 되겠는가. 조용히 그 허물을 생각해보니 진실로 나의 몸에 있는데 불쌍한 우리 백성들이 대신 재앙을 받고 있다. 백성의 부모인 내가 마땅히 어떤 생각을 하여야 하는가. 오늘부터 정전(正殿)을 피하고 더욱 수성의 도를 더하여 조금이라도 하늘의 꾸지람에 답하겠으니, 승지는 나를 대신하여 교서(敎書)를 초(草)해서 널리 직언을 구해 부족한 점을 보충하게 하라. 생각해 보건대 오늘날의 재해를 오게 한 것은, 실로 덕이 부족한 나의 잘못이 너무 무거운 데에서 말미암은 것이나 여러 신하들도 어찌 책려할 도가 없겠는가? 아, 여러 신하들은 나의 지극한 뜻을 몸받아 치우치거나 편당을 하지 말고 동료간에 공경하고 협동하여 나라를 위해 뭇 원망을 해소하는 일에 진심을 다하고, 부족한 나의 과실 및 시정의 이익과 병폐를 죄다 말하여 허물을 고치고 착한 데로 옮기는 바탕으로 삼게 하라. 그리고 인재를 선발함에 이르러서는 나라를 운영하는 급선무이다. 그러므로 전후하여 내린 교지에 정녕하게 반복한 것인데 끝내 실효가 없으니 참으로 한심스럽다. 묘당으로 하여금 사의를 참작 결정하여 중외에 신칙해서 실효가 있게 하라. 감선(減膳)과 금주(禁酒) 등의 일에 있어서도 해조로 하여금 일체 거행하게 하라."
하니, 승지가 왕의 말씀으로 직접 중외에 반포하기를 여러번 청하자, 상이 따랐다.
상이 대신·삼사 및 금부 당상을 인견하고 죄수를 심리하였는데, 대벽(大辟)을 제외하고는 다 경중을 나누어 결단하였다. 신명규(申命圭)를 박천(博川)에, 이정기(李鼎基)를 영암(靈巖)에, 송지렴(宋之濂)을 장흥(長興)에, 이최만(李最晩)을 경원(慶源)에, 한시중(韓時重)을 장흥에 유배하고, 정지화(鄭知和) 등은 삭직(削職)하여 방송(放送)하였다.
상이 정원에 하교하였다.
"오늘 심리할 때 산릉 도감 낭청 등은 이미 처결하였으니 당상 정지화는 관작을 삭탈하고 문외 출송(門外黜送)하라. 그리고 영릉을 봉심한 제신들도 모두 처결하였으니 정치화(鄭致和)·김수항(金壽恒)은 그 관작을 깎아라."
5월 2일 신미
유성(流星)이 나타났는데 빛이 땅을 비쳤다.
상이 대신 및 삼사·형조 당상을 인견하고 죄수를 심리하였는데 중벽(重辟)을 제외하고 경중을 나누어 처결하였다.
5월 3일 임신
양구(楊口) 등 세 고을에 우박이 내렸다. 강릉에서는 우박이 내렸는데 짐승들이 다 맞아 죽었다고 도신이 보고하였다.
5월 5일 갑술
강백년(姜栢年)을 대사간으로, 이규령(李奎齡)을 집의로, 임상원(任相元)을 장령으로, 박태상(朴泰尙)을 지평으로, 서문상(徐文尙)을 정언으로 삼았다.
상이 우의정 김수흥, 예조 판서 조형, 참판 이은상, 참의 이혜를 인견하고 산릉의 개봉(改封)과 천봉(遷封)에 따른 편부에 대해 물으니, 모두 대답하기를,
"기울고 무너진 곳만을 보충해서 오늘의 변이 있게 된 것입니다. 비록 개축하더라도 반드시 견고하지 못할 것입니다. 일이 이미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길지를 정하여 천봉을 하는 것 이외에는 다시 다른 계책이 없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예관이 지관 및 사대부 중에 지술에 정통한 사람을 거느리고 먼저 가서 산을 정하고 관상감 제조도 함께 가라."
하였다.
5월 11일 경진
집의 이규령, 장령 김수오가 아뢰기를,
"신급제(新及第) 윤방헌(尹邦憲)이 본부에 정장(呈狀)하여 말하기를 ‘아버지 윤자(尹滋)는 고 사간(司諫) 이필행(李必行)과 더불어 산송(山訟)이 있었는데 필행의 외손 이만봉(李萬封)이 혐의로 인하여 사관(四館)에 말하기를 「방헌의 아버지 외고조(外高祖)는 매우 미천한 사람이다.」 하고, 또 말하기를 「방헌이 자기 서모(庶母)를 때려 죽였으니 그 죄는 윤기(倫紀)를 범한 것이다.」 하여, 이런 따위의 말로 정거(停擧)거리로 삼았다.’ 하였습니다. 윤방헌이 정장한 말이 옳다면 만봉이 혐의로 인하여 남을 죄에 빠뜨렸으니 그에 대한 정률이 자연 있을 것이요, 만봉의 말이 옳다면 방헌의 대대로 더럽고 추악한 행동이 다만 사부의 반열에 끼지 못할 뿐 아니라 서모를 타살한 죄 또한 다스리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그러하오니 방헌과 만봉을 아울러 잡아다 심문하여 사실을 밝혀내고 죄를 주어야 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5월 12일 신사
성호징(成虎徵)을 장령으로, 김석주(金錫胄)를 교리로 삼았다.
5월 13일 임오
상이 대신 및 비국의 여러 재신을 인견하였다. 우상 김수흥이 아뢰기를,
"종성 부사(鍾城府使) 정창도(丁昌燾)가 지술(地術)에 정통하니 간산(看山)하는 데 동참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허락했다. 수흥이 아뢰기를,
"창도가 아직 부임하지 못했으니 새로 준 가자(加資)는 어찌해야 합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대로 주라."
하였는데, 뒤에 대계(臺啓)로 인하여 도로 거두었다.
5월 14일 계미
동래부 동면 해운대 동변에 큰 반석 하나가 있는데, 바다 가운데서 굴러나와 바닷가 기울어진 돌 위에 걸쳐져 있었다. 돌의 너비가 4척, 길이가 5척, 높이가 2척 반이었고, 사방의 둘레가 12척으로, 빛깔은 청백색이었다. 그런데 그 반은 흙에 묻혀 있던 흔적이 있고 그 반은 물에 닳은 형상이 있었다. 일이 변이에 관계되므로 도신이 보고하였다.
5월 15일 갑신
이정영(李正英)을 공조 판서로 삼았다.
상이 대신과 비국의 여러 재신을 인견하였다. 우상 김수흥이 아뢰기를,
"한재가 이와 같아서 나라의 회계가 엉망입니다. 그리고 지금 신민들이 모두 천릉(遷陵)하는 일로 염려를 하고 있어서 여간의 물건에 대해서는 생각할 겨를이 없습니다. 호조의 여러 상사(上司)에 수응하는 물건은 긴급하거나 긴급하지 않거나 따지지 말고 일체 정파하고, 상방(尙方)에서 직조하는 물건도 정파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수어사(守禦使) 이완이 나아가 아뢰기를,
"남한(南漢)에 소속된 마전(麻田)·가평(加平)·적성(積城) 등 고을의 군사는 거리가 멀어서 갑자기 변란이 있게 되면 호령하기 어렵습니다. 용인(龍仁)·양지(陽智)의 군사는 남한성 밑에 있고, 용인에는 또 수어청의 둔전(屯田)이 있으니 본현이 관할하도록 하면, 수령이 또한 반드시 둔전의 일에 유의할 것입니다. 그러니 총융청(摠戎廳)과 편의에 따라 서로 바꾸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는데, 광주 부윤 이세화(李世華)가 진달한 것도 이와 같았으며 수흥도 편리하겠다고 하니, 상이 따랐다. 이완이 아뢰기를,
"남한에는 이미 민병(民兵)의 법을 만들었습니다. 남한에 소속된 춘천(春川)·철원(鐵原) 등의 군사를 본진(本鎭)에 환급하고, 철원에는 영장(營將)을 설치하여 무신을 차견(差遣)하고 이 군사를 조련하여 후일 철령(鐵嶺)을 막는 발판으로 삼는다면 또한 편리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5월 17일 병술
민유중(閔維重)을 총융사(摠戎使)를 겸하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남원(南原) 지방의 습속이 아름답지 않다는 것은 홍석기(洪錫箕)의 원정(原情)으로 알 수 있다."
하니, 김수흥이 아뢰기를,
"남원 지방의 사부들은 사사로운 일을 가지고도 관인(官人)을 형신(刑訊)하고 있으며 적곡과 전세(田稅)도 바치지 않는 자가 많습니다."
하고, 유중이 아뢰기를,
"풍토가 아름답지 않아서 사람마다 다 염피하므로 수령들이 자주 갈립니다. 제대로 수습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지금 군수는 누구인가?"
하니, 수흥이 아뢰기를,
"이광진(李光鎭)입니다."
하였다. 상이 사람됨이 어떠한가 물으니, 대답하기를,
"남보다 뛰어난 것이 없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광진의 임기가 차기를 기다리지 말고 즉시 바꾸어 차임하라. 당상과 당하를 막론하고 일찍이 대시(臺侍)를 지낸 꼿꼿한 사람을 특별히 가려서 차견하여 토호(土豪)를 엄하게 단속하여 피폐된 고을을 수습하게 하라."
하고, 이어 누가 가합한가를 물으니, 유중이 이세익(李世翊)으로 대답하였다.
5월 20일 기축
이혁연(李赫然)을 한성부 판윤으로, 유연(柳㝚)을 장령으로 삼았다.
명천(明川) 등지에 재[灰]가 쏟아져서 도신이 보고하였다.
5월 21일 경인
사헌부가 교지에 응하여 상차했는데, 뜻을 확립하고, 학문을 부지런히 하고, 간언을 받아들이고, 궁궐 단속을 엄히 하고, 용병(冗兵)을 파하고 출척(黜陟)을 분명히 하라고 반복하여 진계하였다. 상이 가납하였다.
5월 24일 계사
황해도 감사가 치계하기를,
"은율(殷栗) 품관(品官) 황윤헌(黃胤憲) 등 50여 인은 6세(世)가 한 마을에서 함께 살고 있으니 참으로 쇠세(衰世)에 없었던 일입니다. 마땅히 포상의 은전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복호(復戶)해 주라고 명하였다.
5월 26일 을미
임상원(任相元)을 장령으로, 최후상(崔後尙)을 교리로 삼았다.
산릉 도감 당상 조형·민유중 등이 산을 본 뒤에 돌아와 아뢰기를,
"여러 지관(地官)이 모두 말하기를 ‘영릉(英陵) 안의 홍제동(弘濟洞)이 가장 좋다.’고 하였는데, 건원릉(健元陵)에 비하는 자도 있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흙을 보충한 곳이 없었는가?"
하자, 유중이 아뢰기를,
"곡장(曲墻) 밖에 조금 있었습니다."
하였다.
5월 28일 정유
심재(沈梓)를 승지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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