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현종실록21권, 현종 14년 1673년 6월

싸라리리 2025. 12. 17.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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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일 경자

우상 김수흥, 예조 판서 조형(趙珩), 산릉 도감 제조 민희(閔熙), 관상감 제조 민유중(閔維重)이 청대(請對)하여 아뢰기를,
"산을 보는 데는 차례로 거행하는 예가 있는데, 도감 당상 및 예조·관상감 등의 관청에서 먼저 가서 간심(看審)한 뒤에 총호사(摠護使)가 가서 혈을 잡는 것이 바로 고사(故事)입니다. 그런데 지금 의논하는 자들은 모두 홍제동이 길하다고 하니 그곳에 정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신 수흥은 직임이 총호사가 아닙니다. 직임을 대행하는 것이 구차할 뿐만 아니라, 만약 차례대로 갔다오자면 날짜가 점차 연기되어 여러 일이 제때 미치지 못할 걱정이 있습니다. 신들이 간심하러 가는데 그 길로 혈까지 잡는 것이 편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고사가 이와 같더라도 일이 이미 급하게 되었으니 이번 행차에 혈을 잡고 오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좌상 이경억(李慶億)이 병으로 면직되자, 이어 총호사를 체직하여 우상 김수흥이 대행하게 하였다.

 

6월 3일 신축

홍처량(洪處亮)을 이조 판서로 삼았다.

 

6월 5일 계묘

홍문 제학 정두경(鄭斗卿)이 졸하였다. 두경의 자(字)는 군평(君平)이요 호(號)는 동명(東溟)이다. 성품이 호탕하고 술을 즐겼다. 그래서 자신을 검속하지 못했고 농담을 잘하였다. 문장은 사마천(司馬遷)을 법으로 삼았고, 시는 두공부(杜工部)에 가까웠다. 그 문장과 시는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는 것이 많았다. 조정에 벼슬한 지 40여 년이었지만 끝내 문형(文衡)을 맡지 못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애석하게 여겼는데, 이때에 졸하니 나이 77세였다.

 

6월 6일 갑진

정익(鄭榏)을 도승지로, 이규령(李奎齡)을 발탁하여 동부승지로, 김석주(金錫胄)를 헌납으로, 박상형(朴相馨)을 정언으로, 신정(申晸)을 대사간으로, 강백년(姜栢年)을 이조 참판으로, 김익경(金益炅)을 이조 참의로, 이상진(李尙眞)을 우참찬으로, 이경억(李慶億)을 지중추부사로, 이합(李柙)을 집의로 삼았다.

 

대교 목창명(睦昌明)이 상소하기를,
"설서 윤지완(尹趾完)은 일찍이 사관(史官)의 천거를 받았으나 상신(相臣)의 상피에 구애되어 오랫동안 취재(取才)되지 않았었습니다. 지금은 이미 상피할 일이 없으니 자연히 응강(應講)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오늘 정사에서 정언에 의망되어 천점(天點)을 받았으니 신은 전조(銓曹)의 뜻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사국(史局)의 천거를 받은 뒤에는 다른 길로 승출(升出)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것이 이미 조정의 법령으로 되어 있는데 전조가 6품으로 나가게 허락한 것은 참으로 전례를 어긴 것입니다. 전래한 옛 규정이 신에 이르러 무너지게 되었는데 감히 얼굴을 들고 사국에 뻔뻔스럽게 있을 수 없습니다. 체직하소서."
하니, 이에 상이 그 소를 내렸다. 해조가 복계하여 아뢰기를,
"신의 조(曹)에서 전규가 있는 것을 알지 못하고 의망(擬望)하여 수점(受點)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지완에게 제수된 관직은 서관(庶官)과 다른 점이 있으니, 신의 조에서 감히 마음대로 못하겠습니다. 상께서 재결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전규에 의하여 시행하라."
하였다.
○待敎睦昌明上疏曰:
說書尹趾完, 曾被史薦, 拘於相臣相避, 久未經取才。 今則旣無相避, 自當應講。 而今日政, 擬正言望, 受天點, 臣竊未曉銓曹之意也。 史局被薦之後, 不許他蹊之升出, 已有朝家法令, 則銓曹之許出六品, 誠違例也。 流來古規, 至臣而壞, 不敢抗顔冒居史局, 請遞。                                    上乃下其疏。 該曹覆啓言: "臣曹不知有前規, 至於擬望受點。 趾完所授之職, 與庶官有異, 臣曹不敢擅便。 上裁何如?" 上曰: "依前規施行。"

【태백산사고본】 21책 21권 18장 B면【국편영인본】 37책 39면
【분류】인사-관리(管理) / 인사-선발(選拔) / 정론-정론(政論) / 사법-법제(法制)

 

6월 7일 을사

이홍연(李弘淵)을 경기 감사로, 김휘(金徽)를 병조 참판으로 삼았다.

 

총호사 김수흥 등이 홍제동에서 돌아왔다. 상이 소견하고 빈청에 모여 택일을 하라고 하였다.

 

총호사 김수흥 등이 빈청에 모여 아뢰기를,
"영릉(英陵)이 계신 홍제동 자좌(子坐) 오향(午向)의 언덕에 대해 올해 길한 달과 날 및 능을 옮길 길한 날을 여러 지관들과 상의하여 꼽아 보니 구릉을 파묘하는 날은 9월 29일이 길하고 신릉에 현궁(玄宮)을 내리는 날은 10월 7일이 길하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알았다"
고 하였다.

 

장령 임상원(任相元), 지평 박태상(朴泰尙)이 아뢰기를,
"병조 참지 이세익(李世翊)은 조정에 벼슬한 이래로 본래 취할 만한 실속이 없었으며 여러번 주군(州郡)을 맡았었으나 삼가지 않는다는 데 대한 꾸지람이 많이 있었습니다. 대간의 비평을 받고 은대(銀臺)에서 체직되어 곧바로 이 직책에 제수되었는데 세익은 탄핵을 무릅쓰고 출사를 하여 아무렇지 않게 행공(行公)하고 있으니 매우 염치가 없는 행동입니다. 체직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6월 9일 정미

정도성(鄭道成)을 정언으로 삼았다.

 

집의 이합이 인피하며 아뢰기를,
"이세익이 기성(騎省)을 사양하지 못하고 끝내 행공하기에 이르렀으니, 서로 규계하는 논의야 그를 누가 옳지 않다고 하겠습니까. 다만 그 탄핵한 글에 ‘평소 취할 만한 실속이 없었고 삼가지 못한다는 꾸지람이 많이 있었다.’는 등의 말은, 평생을 잘라 단정하는 것으로 조금도 여지가 없는 말입니다. 신이 비록 세익에 대하여 익숙히 알지는 못하더라도 그가 여러번 주군을 맡았을 적에 강명하게 잘 다스렸다는 말을 익히 들었습니다. 그리고 베껴 올릴 전초(前草)가 신의 본뜻이 아닌데 임의대로 함부로 깎아내고 고치는 것도 할 수가 없는 일입니다. 체직하소서."
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지평 박태상이 인피하며 아뢰기를,
"신이 세익에 대하여 논핵한 것은 그의 명론이 본래 가벼웠기 때문에 청요(淸要)의 관직에 두는 것이 마땅하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세익이 전후하여 역임한 고을이 모두 큰 곳이었는데 평소 청렴하다는 칭찬은 없었고 사람들의 말이 파다했었습니다. 그런데도 갑자기 청반(淸班)에 자리하게 되었으므로 물정(物情)이 해괴하게 여긴 것입니다. 그러나 세익은 탄핵한 글에 먹물이 마르기도 전에 뻔뻔한 얼굴로 다시 출사하였으니 그가 구차하게도 벼슬을 잃을까 걱정한 작태는 심하였습니다. 그런데 생각잖게 이합이 그를 위해 올린 분소(分疏)가 이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는 신이 병으로 들어가 미처 연계(連啓)하지 못해서 시끄러운 꼬투리가 일어난 것입니다. 체직하소서."
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장령 임상원도 이를 이유로 인피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장령 김수오(金粹五)가 인피하며 아뢰기를,
"신의 의견이 이합과 같아서 이미 처치할 수 없으며 또 연계하는 것도 마땅치 않습니다. 체직하소서."
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응교 이선(李選), 수찬 이당규(李堂揆)가 이합에 대해 처치하기를,
"의견에 다름이 있으면 구차하게 동의할 수 없는 것이 대간의 체모입니다. 출사하게 하소서."
하고, 박태상·임상원에 대해 처치하기를,
"너무 심하게 사람을 논박하였고 말에 실상을 잃은 것이 많으므로 물의가 모두 그르게 여깁니다."
하고, 김수오에 대하여 처치하기를,
"애당초 논핵에 참여하지 않았으면 처치하는 것이 마땅한 일인데 억지로 인피를 하였으니 자못 타당성이 없습니다. 아울러 체직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집의 이합이 또 인피하며 말하기를,
"이미 동료들의 논척을 당했으니 그대로 무릅쓰고 있을 수 없습니다. 체직하소서."
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정언 정도성(鄭道成)이 탑전(榻前)에서 처치하기를,
"이합이 처음에 이미 분소를 했으니 구차함을 면할 길 없는데, 재차 인피하기에 이르렀으니 임금을 번거롭게 한 죄를 면하기 어렵습니다. 체직시키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6월 12일 경술

성호징(成虎徵)·윤형성(尹衡聖)을 장령으로, 윤진(尹搢)을 지평으로 삼았다.

 

상이 대신과 비국의 여러 신하 및 양 도감 당상을 인견하였다. 민유중(閔維重)이 아뢰기를,
"구릉의 정자각(丁字閣)은 철훼하지 말고 재궁(梓宮)을 봉안하고, 영악전(靈幄殿)도 새로 짓지 않는 것이 편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옳다고 하였다. 총호사 우상 김수흥이 아뢰기를,
"지문(誌文)도 마땅히 고쳐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원문 말단에 천개(遷改)한 곡절을 첨입하는 것이 좋다고 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다른 돌에 별도로 기록하여 이전의 것과 아울러 쓰는 것이 마땅하다고 합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앞의 말을 따르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문을 첨입하는 것과 다시 짓는 일에 대하여서는 송시열(宋時烈)에게 물어보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민유중(閔維重)이 아뢰기를,
"광릉(光陵)·영릉(英陵)에는 병석(屛石)을 설치하지 않았는데 제도가 매우 좋을 뿐만 아니라 비록 천만 년이 가더라도 반드시 걱정이 없을 것이 보장됩니다. 그리고 신릉(新陵)은 영릉과 같은 산 안에 썼으니 의물(儀物)도 영릉과 틀리게 해서는 안 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의 뜻도 그렇게 여길 뿐만 아니라 선조(先朝)께서도 광릉의 석물(石物) 제도가 좋다고 하교하셨으니, 이제 그것에 따라 하도록 하라."
하였다.

 

6월 14일 임자

전 참의 장응일(張應一)이 구언 전지에 응하여 상소하기를,
"신은 나이가 80에 가까우며 병들어 죽게 된 몸으로 세상 일을 까맣게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삼조(三朝)를 섬겨온 신은 나라를 걱정하는 일념뿐입니다. 늦게야 들었습니다만, 영릉의 석물에 틈이 생긴 변이 있다고 하니 이것이 정말입니까? 신은 사사로이 생각하건대 국가의 대변에 이보다 더한 것이 없다고 여깁니다. 만세토록 보존되어야 할 선왕의 능침(陵寢)인데 어찌 이런 이치가 있단 말입니까? 채운 흙이 다져지지 않고 사람들의 꾀가 착하지 못해서 그런 것입니까? 택조(宅兆)가 이롭지 못하고 신도(神道)가 편안하지 못해서 그런 것입니까? 우러러 삼가 성상의 놀라신 심정을 생각함에 어떻게 안정하셔야 합니까? 소문으로 처분하신 것을 듣고는 밤낮으로 우울히 지냈습니다만, 전후의 비망기(備忘記)를 보고서야 감독한 제신과 봉심한 대신들이 함께 죄를 받았고 천릉(遷陵)의 일을 성상의 뜻으로 결단하셨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는 참으로 불행 중의 다행으로 나라의 복입니다.
다만 하늘이 오래 비를 내리지 않으므로 죄수를 심리하라는 명령이 계셨고, 심지어는 봉심한 대신들의 불경 불충한 죄까지도 아울러 모두 용서해 주셨습니다. 전하가 대신을 대우함에 있어서는 지극하다고 하겠습니다만, 선왕을 섬기는 도리에 있어서는 어떨는지 모르겠습니다. 오르고 내리는 선왕의 신령이 명명(冥冥)한 속에서 노여워하지 않겠습니까? 이른바 심리라고 하는 것은 그 죄가 비록 무거우나 그 정상이 용서할 만함을 말하는 것인데, 지금 봉심한 대신은 불경 불충한 죄가 있는데도 전하께서는 혹 용서할 만한 정상이 있다고 보십니까? 불경 불충은 신하의 대죄로서 왕법에서 용서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지금 전하께서는 법을 굽혀가면서 용서해 주셨으니, 신은 천심을 감동시켜 비를 오게 하기에는 부족할까 두렵습니다. 능침을 봉심하는 것이 얼마나 중대한 일입니까. 더구나 영릉이 어떠한 능침인데 한두 대신이 상의 뜻을 몸받지 않고 인정에만 구애되어 명을 받들어 봉심하고도 사실대로 보고하지 않아, 전하께서 이제야 비로소 변이 있는 줄을 아실 수 있게 하였단 말입니까? 보통 사람의 인정으로 말한다면 마땅히 원수로 대하기에 겨를이 없이 하여 온전하게 풀어주는 일은 결코 없었을 것이온데, 모르겠습니다만 성인의 마음이라서 보통 사람의 인정과 다름이 있으셔서 그런 것입니까?
전하께서 차라리 제약을 받는다는 이름을 얻을지언정 감히 대신을 상하게는 하지 않겠다는 마음이십니다. 그러나 비록 이런 마음이 계시더라도 우선 은인하시고 신릉의 역이 마치기를 기다린 뒤에 곡진히 처리하는 근거로 삼으셔도 오히려 늦지 않을 것입니다. 어찌 급급히 죄수를 심리하는 거조를 하시되 조위봉(趙威鳳)의 말에 책임을 때우려는 듯하시어 나라 사람들에게 웃음거리를 남겨 주십니까? 아, 필부도 어버이 장사지내는 데는 오히려 온 정성을 다하는 것인데, 천승(千乘) 나라의 임금으로 선왕(先王)을 장사지내되 도리어 필부만도 못한단 말입니까? 삼가 들으니 능자리를 정하는 당초에 사부(士夫)로 지술(地術)을 아는 자들은 모두들 ‘수원산이 가장 길하다.’고 하였다는데 누가 반드시 영릉(寧陵)에 써야 한다는 의논을 주장하여 우리 전하로 하여금 마침내 영원히 망극한 변을 만나게 하였단 말입니까?
애석합니다. 윤선도(尹善道)의 상소에 산을 논한 것이 매우 자세하였는데 그 상소를 정원에서 불에 태워, 마침내 상께서 보시지 못했습니다. 지금 만약 하문하시면 선도가 올린 상소 속의 뜻을 다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런 다음에 전하께서 영릉이 제왕의 장지가 아니라고 당초에 이미 운운한 설이 있었음을 환히 아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영릉에 꼭 써야 한다는 의논을 주장한 자는 분명히 전하의 가사(家事)를 패하게 하려는 것으로 선왕에 불충함이 큽니다. 길에 떠도는 소문에 의하면 다시 봉분을 쌓자는 말을 탑전에 진달한 자가 있다고 하는데 과연 이 말과 같다면 그의 마음씨가 흉참하니 그 죄가 봉심한 신하보다 더합니다. 어찌 한심스럽지 않습니까?
전하의 좌우 여러 신하들을 믿을 수 없는 것이 이와 같으니 어떻게 후일 천릉할 때에 영릉(寧陵) 같은 걱정이 없기를 보장하겠습니까. 재궁(梓宮)을 이봉(移奉)하는 일에 이르러서는 더욱 대신에게만 맡겨서는 안 되니, 삼가 전하께서 친히 신구(新舊)의 두 릉에 거둥하시어 반드시 정성스럽고 신실한 효도를 다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너의 상소의 내용을 보니 오장 육부가 끊어지고 찢어지는 듯하여 나도 모르게 통곡하고 흐느낄 뿐이다. 다만 감동(監董)한 사람의 죄범이 무거운 것은 상소의 뜻도 옳기는 하나, 그 외의 기타 사건들은 그 곡절이 각각 다른데 떠도는 소문이 실지와 틀려서 그런 것인가? 수원산에 대한 언급에서 대신에게 맡기지 말라는 말에 대해서는 내가 매우 해괴하게 여긴다. 그러니 구언(求言)을 이유로 그런 말까지 수용하지는 않는다."
하였다.
○壬子/前參議張應一, 應旨上疏曰:
臣年迫八十, 病將死矣, 其於世事, 有同聾瞽。 而三朝餘喘, 一念憂國。 晩聞 寧陵石物釁隙之變, 此說誠然乎哉? 臣私自以爲, 國家大變, 無過於此。 先王萬世陵寢, 寧有此理? 補土不密, 人謀不〔臧〕                        而然耶? 宅兆不利, 神道不寧而然耶? 仰惟聖懷震惕, 何所底止? 側聽處分, 日夜憂鬱, 及觀前後備忘記, 知監董諸臣、奉審大臣, 俱被罪譴, 遷陵之擧, 斷自聖衷。 此實不幸之幸, 國家之福也。 第以天久不雨, 有審理之命, 至於奉審大臣, 不敬、不忠之罪, 而竝皆宥免。 殿下之待大臣, 則可謂至矣, 其於事先王之道, 未知何如也。 先王陟降之靈, 得無怫然於冥冥中耶? 夫所謂審理云者, 其罪雖重, 其情可恕之謂也, 今此奉審大臣, 有不敬、不忠之罪, 殿下以爲, 其情容有可恕者耶? 不敬、不忠, 人臣之大罪, 王法之所不赦。 而今殿下枉法宥之, 臣恐不足以感天心, 而致天雨也。 擧審陵寢是何等重事? 況又寧陵, 是何陵寢, 而一二大臣, 不體上意, 只拘人情, 承命奉審, 不以實聞, 使殿下, 到今始知有變? 以常情言之, 固宜讎遇之不暇, 而全釋之必無也, 未知聖人之心, 與常情有異否乎? 殿下寧得受制之名, 而不敢傷大臣。 雖有此念, 姑且隱忍, 待新陵畢役後, 曲爲之地, 猶未晩也。 何乃汲汲爲審理之擧, 有若塞責, 趙威鳳之言者, 以貽笑國人耶? 噫! 匹夫而掩其親, 猶且自盡, 以千乘之君, 而葬先王, 反不如匹夫乎? 竊聞卜 陵之初, 士夫之解地術者, 咸曰: "水原之山最吉云。" 而孰主必用寧陵之議, 使我殿下, 竟遭終天罔極之變乎? 惜乎。 尹善道之疏, 論山甚備, 而焚其疏於政院, 終不入於 睿覽。 今若下問, 則可悉善道疏中之意。 夫然後, 殿下曉然知寧陵非帝王葬地, 而當初已有云云之說矣。 然則主寧陵必用之議者, 明是敗殿下家事, 而大不忠於先王者也。 道路傳聞, 有以改封築之說, 進於榻前者云, 果若此說, 則其用意凶慘, 罪浮於奉審之臣。 豈不寒心哉? 殿下左右大小之臣, 有不可信者, 如此, 安知後日遷陵之際, 保無寧陵前日之患也? 至於梓宮移奉, 尤不可委之於大臣, 伏願殿下, 親臨新舊兩陵, 以盡必誠必信之孝焉。                                    上答曰: "覽爾疏辭, 五內摧裂, 自不覺痛泣而已。 第監董之人, 罪犯之重, 疏意亦可, 而其他事件, 曲折各異, 流傳爽實而然耶? 至於水原山一款, 不可委之等說, 予甚駭之。 不以索言而取之也。"

【태백산사고본】 21책 21권 19장 B면【국편영인본】 37책 39면
【분류】정론-정론(政論) / 정론-간쟁(諫諍) / 왕실-종사(宗社) / 사법-탄핵(彈劾) / 사법-치안(治安) /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

 

6월 16일 갑인

이유상(李有相)을 집의로 삼았다.

 

6월 17일 을묘

김해일(金海一)을 장령으로, 홍만종(洪萬鍾)을 정언으로 삼았다.

 

대사간 신정(申晸)이 아뢰기를,
"전 참의 장응일(張應一)의 상소는 장황하게 이랬다저랬다 기탄없이 말을 하였으니 참으로 그 마음이 있는 곳을 모르겠습니다. 국가가 불행하여 선릉(先陵)에 변이 있고 오늘에 이르러 천릉하는 일이 있게 되었으며, 전하께서 봉심한 제신들에게 죄를 준 것은 그 일을 중대하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속이거나 숨기는 데 마음을 쓴 정상이 없다는 것을 전하께서 통촉하고 계신 바이니, 원정(原情)을 심리하는 날에 용서하신 것이 어찌 전하께서 대신을 상할까 하여 사사로이 처리한 것이겠습니까? 그런데 ‘대신을 대우하심이 지극하다고 할 만합니다만, 선왕(先王)을 섬기는 도리에 있어서는 어떠한지를 모르겠다.’고 한 것은, 아,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비록 군부(君父)를 협박하여 대신들에게 죄를 씌우고자 한다 하더라도, 이것이 어찌 신하로서 마음을 먹고 입으로 발설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그리고 수원을 버리고 영릉에 쓴 데 대하여 당초 산을 논한 신하에게 죄를 돌리려는 뜻에서 심지어 ‘전하의 가정 일을 낭패시킨 것이며 선왕에 대해서는 매우 불충하다.’고 말하였으니 신은 여기에 대하여 슬픔을 이길 수 없습니다. 수원의 산은 처음에 이미 결정했었으나 고 정승 이시백(李時白) 등 여러 사람이, 경기 지방의 거진(巨鎭)이므로 추후에 생겨날 다섯 가지 걱정을 가지고 여러 차례 상소하여 중지하기를 간하였고, 송시열(宋時烈) 또한 이 문제로 헌의를 하여 영릉으로 다시 정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시백 등 여러 사람이 과연 모두 전하의 가정 일을 낭패하도록 하고 선왕에 대해 크게 불충한 것이겠습니까? 이는 그 속셈이 다름 아니라 곧, 그때 헌의하였던 여러 신하들이 이젠 다 죽었고 유독 시열만이 생존해 있는데 함해(陷害)하고자 하는 것이 반드시 이미 백골이 된 자에게 있지 않으니, 그 마음 씀씀이가 또한 참혹합니다.
그리고 그 상소에 이른바 ‘정원이 불에 태웠다.’는 상소의 일에 대해서는 신은 일찍이 자세히 알지 못하였는데 지금 비로소 들어보니 ‘그때에 정원이 품계하여 받아 들이니, 상께서 엄한 말씀으로 물리치신 뒤에 옥당의 진달로 인하여 그 상소를 가져다가 삼공(三公)에 두루 보이고서 불에 태웠다.’고 합니다. 이미 받아 들여 예람(睿覽)을 거친 것이라면 ‘끝내 들여 보내지 않았다.’고 말한 것은 무슨 의도이겠습니까? 그가 기회를 틈타 무함을 꾸며 못하는 짓이 없음을 이에서 또한 볼 수 있습니다.
지난번 봉심한 제신들을 인견하실 때에 김만기(金萬基)·이당규(李堂揆)가 봉분을 개축하자고 말씀을 올린 것은 갑자기 큰 일을 만나 어찌해야 좋을지를 몰라 자기들의 의견대로 진달한 것일 따름인데, 그가 이른바 ‘마음 씀씀이’라고 한 것은 무슨 일이며, ‘흉참(凶慘)하다.’라고 지목한 것은 또 어떤 마음에서입니까? 심지어 여러 신하들을 믿어서는 안 된다고 하여 전하의 마음을 격동시키고 성총(聖聰)을 의혹케 하였으니, 틈을 엿보아 시험을 해보고 생황(笙簧)을 고동하여 소리를 내듯 교묘한 말을 지껄이어 사람의 마음을 현란케 해서 군신의 만남에 시끄러운 단서를 야기시키게 하고 상하 사이에 오가는 성의를 막으려는 그 작태는 진실로 소인이 남의 국가를 어지럽게 하는 데 늘 사용하는 태도인 것입니다.
그리고 구릉을 파묘하여 이봉(移奉)하는 날에 전하께서 친림(親臨)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정한 일이 있었습니까? 만약 그렇지 않다면 응일이 어찌 전하께서 꼭 친행(親行)하지 않으시리라는 것을 헤아려서 이런 지레 짐작의 말을 했단 말입니까? 그의 마음씀이 매우 험하니 신은 이에 대해 더욱 통탄스럽고 분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 선왕의 능침에 사고가 있는 것은 참으로 국가의 불행한 일입니다. 그런데 이를 빙자하여 간교를 부리려는 계책으로 삼습니다. 근래 진언(進言)하는 무리들이 한편으로는 ‘건원릉[長陵]의 흙을 한 줌 파내가도 전하께서 모르게 될까 두렵다.’ 하고 또 한편으로는 ‘말이 이른 것을 감히 글에 싣지 않았다.’ 하고 해서 전하로 하여금 놀라고 의심하여 편안한 마음을 가지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뒤이어 응일의 상소가 있어 그들과 한기운으로 서로 전해져서 말의 뜻이 음험하고 참혹하여, ‘제약을 받았다.’, ‘책임만을 메꾸었다.’, ‘보통 사람의 인정과 다름이 있다.’는 등의 말로 방자하게 기롱하되 조금도 주저하거나 꺼리는 바가 없으니, 무릇 혈기가 있는 사람이라면 누가 팔을 걷어 올리고 통탄해 하지 않겠습니까? 신은 전하께서 의혹된 바가 계시어 진실과 허위를 밝게 살피지 못하셔서 국가에 무궁한 환란이 닥칠까 두렵습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상소의 말뜻이 우연이 아님을 내가 어찌 모르겠느냐?"
하였다.
○大司諫申晸上疏曰:
前參議張應一之疏, 張皇闔闢, 下語無忌, 實未曉其心之所在也。 國家不幸, 先陵有變, 至于今日, 有遷陵之擧, 殿下之罪奉審諸臣者, 所以重其事也。 其實無用意欺蔽之狀, 亦殿下之所洞燭, 則原情恕宥, 於審理之日, 豈殿下恐傷大臣而曲爲之地哉? 然則待大臣, 可謂至矣, 事先王之道, 未知何如云者, 嘻嘻! 此何言也? 雖欲脅持君父, 勒罪諸臣, 此豈臣子所可生心而發口者哉? 且以舍水原, 取寧陵, 欲歸罪於當初論山之臣, 至謂敗殿下家事, 而大不忠於先王, 臣於此, 不勝慨然之至。 水原之山, 初旣卜定, 而故相臣李時白諸人, 以畿輔巨鎭, 日後五患, 累疏諫止, 而宋時烈亦, 以此獻議, 改卜寧陵。 則時白諸人, 果皆欲敗殿下家事, 而大不忠於先王者哉? 此其計無他, 其時獻議諸臣, 今皆不在, 獨時烈在耳, 所欲陷害者, 必不在於旣骨之人, 則其所用意, 吁亦慘矣。 且其所謂政院焚疏之事, 臣之曾所未詳, 而今始聞之, 其時政院, 稟啓捧入, 則自上嚴辭退却之後, 因玉堂陳達, 取其疏, 周示三公, 而焚之云。 旣已捧入, 登徹睿覽, 則謂之終不入云者, 是何意耶? 其乘機構誣, 無所不至, 此亦可見矣。 至於頃日奉審諸臣, 引見之時, 金萬基、李堂揆, 進改封築之說, 此不過猝逢大事, 莫知適可, 隨其意見, 有所陳達而已, 其所謂用意者, 何事, 而目之以凶慘者, 抑何心哉? 至以大小之臣, 爲不可信, 恐動天心, 疑惑聖聰, 其伺釁嘗試, 簧皷眩亂, 使君臣之際, 惹起鬧端, 上下之間, 沮閼誠意者, 此誠小人亂人國家之常態也。 且破舊陵移奉之日, 殿下以不親臨, 有所議定之事乎? 如其不然, 則應一何以揣殿下必不親行, 而爲此臆逆之言也? 用意之深險, 臣於此, 尤有所痛惋者矣。 噫! 先王陵寢之有事, 固是國家之不幸。 而藉以爲售奸之計, 近來進言之徒, 一則曰, 取長陵一抔土, 而恐 殿下將不知之, 一則曰, 語之至者, 不敢載之於書, 使殿下驚疑不寧。 而繼有應一之疏, 一氣相傳, 語意陰慘, 其曰受制, 其曰塞責, 其曰與常情有異等語, 恣意譏玩, 無所顧忌, 凡有血氣, 孰不扼腕而痛歎也? 臣恐殿下有所疑惑, 不能明燭情僞, 以致國家無窮之患也。                                    上答曰: "疏辭意非偶然, 予豈不知也?"

【태백산사고본】 21책 21권 20장 B면【국편영인본】 37책 40면
【분류】정론-정론(政論) / 왕실-종사(宗社) /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

 

6월 20일 무오

장령 성호징(成虎徵)이 아뢰기를,
"장응일이 교지에 응한다는 핑계로 틈을 타서 상소를 올려 능침을 가탁하여 장황히 협박했습니다. 그리하여 위로는 봉선(奉先)의 도리를 다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군부를 기롱하였고 아래로는 불경 불충의 죄를 신료에게 씌우는 등 마음씀이 음험하고 말한 것이 형편없으니 그가 사람을 무함하고 군신간을 이간하려는 의도입니다. 아, 역시 참혹합니다. 일을 담당했던 제신들의 마음을 헤아려 보건대 누군들 능침에 정성을 다하고자 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일이 불행하게 되어 본의 아니게 죄를 짓게 된 것인데, 응일이 기필코 무함하고 날조하여 단련해서 죄안(罪案)을 첨가하고자 하는 것은 무슨 의도란 말입니까? 수원산과 영릉을 취사(取舍)할 적에는 훈구로서 충직한 신하들이 모두 지성어린 우국의 말로 인사(人事)와 지술(地術)의 설을 참작하여 헌의(獻議)하였으며 나중에는 또 전하의 성충(聖衷)으로 결단하신 것인데, 응일은 곧 말하기를 ‘영릉을 반드시 써야 한다는 의논을 주장한 자는 분명히 전하의 가사를 낭패하게 하고 선왕에게 불충을 저지른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임금이 의지하여 중하게 여기고 국가가 의지하고 믿는 것이 대신말고 그 누구이겠습니까? 그런데 응일이 말하기를 ‘좌우 여러 신하들을 믿지 못할 것이 이와 같으니, 천릉할 즈음에 재궁을 이봉하는 일은 더욱 대신에게 맡겨서는 안 된다.’고 하였으니, 말에 조리가 없음이 어찌 이런 지경에 이르렀단 말입니까? 이런데도 버려두면 장차 참소하고 간사한 말을 끊어버리고 후일의 폐단을 막을 길이 없을 것이니 응일을 삭탈 관작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응교 이선(李選)이 상소하여 아뢰기를,
"근래 인정이 흉흉하고 두려워함이 큰 화가 조석간에 발생할 것처럼 하고 있습니다. 이는 대체로 장응일의 상소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방자한 생각으로 격동시켜 두렵게 하는 말로 전하를 협박하여 조정의 신하들을 무함하였습니다. 성상께서 위에 계시면서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을 흔쾌히 보여 재앙이 싹트는 것을 끊어 버리기를 기대하였는데 도리어 비답으로 하유하여 동조하시니 이는 무슨 까닭입니까? 장응일이 윤선도(尹善道)의 상소를 제기하여 그것이 쓰여지지 못했음을 애석하게 여기고, 정원에게 불태워져 끝내 예람에 들어가지 못했다고 말하기까지 하였습니다. 당초 선도의 상소에 대해서는 상께서 통촉하시고 특별히 금부에 내려 방축하셨으며 상소를 불에 태우라는 명도 예람한 뒤에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응일은 곧 예람에 들지도 못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는 성명께서 반드시 알고 계신 것인데도 오히려 이처럼 속이는데 기타 거짓을 얽어 날조함이야 또한 어찌 논할 것이 있겠습니까?
아, 흉인들이 한결같이 사림(士林)에게 뜻을 펴려고 한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종적통(宗嫡統)에 대한 설로 당초 화를 옮기는 칼자루로 삼아 윤선도가 앞에서 부르고 조경이 뒤에서 화답하였습니다. 계속하여 사당에 고하고 죄를 청하자는 글과 오로지 부판(附板)을 공격하는 상소를 하되 미상불 군부(君父)에 차중(借重)하고 극지(極地)로 죄를 주려고 하였으나 다행히도 성상의 뜻이 굳게 정해졌음에 힘입어 간사한 계책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10년을 보존하고 아무 일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에 이르러 또 원침(園寢)의 일로 인하여 얼굴을 바꾸고 나와서 반드시 마음에 상쾌하게 하고자 하고 있으니, 어찌 통탄스럽지 않을 수 있습니까.
비록 그러나 이것이 어찌 영외(嶺外)에 엎드려 있는 정신 흐린 80세 늙은 몸으로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글을 보내어 유도해서 아직 체온이 식지 않은 시체에서 이름을 빌려 임금의 의도를 시험해 보는 선봉으로 삼은 것임이 분명하여 엄폐하기 어려우니, 이산해(李山海)와 이이첨(李爾瞻)이 오늘날에 다시 생길 줄을 어찌 알았겠습니까. 간사하고 흉악한 무리가 밤낮으로 기원하여 바라는 것은 오로지 영릉의 광중(壙中)에 물이 고여 있는 데 있습니다. 재궁(梓宮)에 틈이 나 있는 것이 만일 조금이라도 의심스러운 점이 있게 되면 반드시 서로 앞장서고 일어나서 끝내 조정을 패란시킨 다음에야 그만두려 할 것이니, 성명이 임어하시는 데에 이럴 리 없을 것이라고 누구도 말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국가가 불행하여 사림(士林)의 화가 전후로 서로 찾아들었으니 기묘년의 사화(士禍)와 을사년의 옥사(獄事)는 참혹했다고 말할 만합니다. 예로부터 소인들은 으레 중대한 일을 빌려서 교묘하게 얽어놓기 때문에 비록 현성(賢聖)한 임금이라도 한때 가려짐을 면치 못하고 그들의 협박에 제어되어 부득불 그들의 뜻을 잘못 따르는 경우가 있으니 두렵게 여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일찍이 중종조 때에 문익공(文翼公) 정광필(鄭光弼)은 희릉 총호사(禧陵摠護使)로서 광중에 돌이 있는 것을 보고 즉시 계품(啓稟)을 하고 나서 비로소 대례(大禮)를 완성했으니 광필에게 죄가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희릉을 옮길 때에 이르러서 간신 김안로(金安老)가 그것을 죄안(罪案)으로 삼아 반역죄로 감정하여, 광필은 겨우 죽음을 면하고 유배되었습니다. 만약 군부(君父)가 인성(仁聖)하지 못했다면 광필의 목숨은 보전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를 논죄할 때에 반드시 안로를 충신이라고 하고 광필을 죄인이라고 하였을 것입니다만, 지금와서 본다면 안로가 과연 나라를 위한 충성이 있었으며 광필이 과연 나라를 저버린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영릉 석물에 틈이 생긴 것에 대해서 본래 이익수(李翼秀)가 먼저 말한 것은 아닙니다. 전후로 개봉(改封)하기를 청한 것이 이미 유현(儒賢)의 의논과 간신(諫臣)의 상소 및 중신들이 탑전에 아룀이 있었습니다. 그 뒤에 여러 신하들이 다시 품달하지 못한 것은 그 사체가 아주 중대하기 때문인 것에 불과한 것이지 어찌 일찍이 일을 숨기고 속이려는 마음이 있었겠습니까?
그리고 천릉(遷陵)하는 일이 국가의 큰 다행이라면 익수의 첫번 상소는 그 뜻이 충성스러운 듯합니다. 그러나 말을 자세히 살펴보면 속에 숨긴 뜻이 나타나 있으니, 사람들이 그것을 보면 염려가 없지 못할 것입니다. 재차 상소를 올림에 그가 남의 사주를 받고 대신 서술한 것이라는 사실이 정원이 대변(對辯)하던 날에 마침내 드러났습니다. 심지어 조위봉(趙威鳳)의 상소가 익수의 첫 상소 뒤를 따라 잇달아 툭튀어 나왔으니, 상께서 놀라실 때에 기회를 타서 교묘히 맞추는 말이었는데도, 도리어 가상하게 여겨져 칭찬하는 비답을 받게 되자 속으로 서로 기뻐하고 다행하게 여겨 스스로 자기의 계획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성명께서 처분(處分)이 계신 뒤에 제신들이 입은 죄가 오히려 여러 소인들이 바라던 것에 성이 차지 않았으므로, 이제 응일의 상소가 또 천리길 멀리서 온 것입니다. 시기상 앞뒤가 안 맞는 연왕(燕王)의 상소와 같아서 허다한 내용의 뜻이 사실상 서로 조응(照應)이 되어 한 사람의 손에서 나온 것과 같습니다. 이는 김안로가 능침의 일을 빌려다가 충직하고 현량한 신하를 함해하던 발자취로서 전후가 같은 방법인데, 전하께서는 그것을 깨닫지 못하십니까? 진실로 혹시 모르고 있으면 할 수 없겠지만 알고 있으면서도 오히려 뒤돌아보고 꺼려서 밝게 분변하고 통렬하게 배척하지 못한다면 장차 참소하는 적신의 입을 막을 길이 없어 점점 그들의 술책에 빠지고 말 것입니다. 삼가 전하께서는 깊이 유념하시어 빨리 응일의 죄를 다스려서 간흉들의 계책을 그치게 하시면 국가에 대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하니, 상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집의 이유상(李有相)도 상소하여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을 분명하게 보이시고 빨리 응일의 죄를 바루라고 청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應敎李選上疏言:
近來人情, 洶懼, 有若大禍朝夕垂發者然。 蓋以有張應一之疏也。 其恣意恐動之語, 無非脅持君父, 傾陷廷臣。 聖明在上, 庶幾快示好惡, 以絶禍萌, 乃反批諭, 與之酬酢, 此何故也? 應一提起尹善道之疏, 惜其不能見售, 而至謂見焚政院, 終不入睿覽云。 當初善道之疏, 自上洞燭, 特下放逐, 焚疏之命, 又在睿覽之後。 而應一乃以不入睿覽爲言。 此則聖明之所必知, 而猶且誣罔如此, 其他構捏, 亦何足論哉? 噫! 兇人之欲一逞志於士林久矣。 宗嫡統之說, 初爲嫁禍之欛柄, 善道唱於前, 趙絅和於後。 繼有告廟, 請罪之章, 全攻附板之疏, 未嘗不借重於君父, 擬罪於極地, 而幸賴聖志堅定, 奸計莫售, 保十年無事矣。 式至今日, 又以園寢之事, 換面而出, 必欲甘心, 豈不痛哉? 雖然, 此豈身伏嶺外, 八十昏毦者, 所能自爲乎? 飛書敎誘, 假名未冷之屍, 以爲嘗試之先鋒者, 灼然難掩, 不料山海、爾瞻, 復生於今日也? 奸兇之徒, 日夜所祈望者, 專在於壙中之有水。 梓宮之成隙, 萬一有一毫之疑似, 則必將相率而起, 終至於敗亂朝廷而後已, 莫謂 聖明臨御, 無是理也。 國家不幸, 士林之禍, 前後相尋, 己卯之禍、乙巳之獄, 可謂慘矣。 自古小人, 例必假借重事, 巧爲羅織, 故雖賢聖之君, 亦未免爲一時所蔽, 爲其脅制, 有不得不曲循其意者, 可不懼哉? 曾在中廟朝, 文翼公 鄭光弼, 以禧陵摠護使, 見壙中有石, 卽爲啓稟而後, 始完大禮, 則光弼之無罪, 可知。 而及至遷陵之時, 奸臣金安老, 以此爲其罪案, 擬之以叛逆之律, 而僅得減死流竄。 若非 君父之仁聖, 則光弼之保全性命, 難矣。 當其論罪之時, 則必以安老爲忠, 光弼爲罪, 到今觀之, 則安老果有爲國之忠, 而光弼果爲負國之人乎? 今此寧陵石物之生隙, 本非翼秀首言之也。 前後改封之請, 已有儒賢之議, 諫臣之疏, 及重臣榻前之啓。 而其後諸臣之不能更稟者, 不過以其事體之至重故也, 曷嘗有掩覆之事, 欺隱之心乎? 遷陵之擧, 實爲國家之大幸, 則翼秀初疏, 其意似忠。 而觀其措語之間, 顯有含蓄之意, 人之見之者, 不能無慮。 及其再疏, 而畢露其被嗾借述之情態, 於政院對辨之日。 至於趙威鳳之疏, 躍然繼出, 於翼秀初疏之後, 自上驚動之際, 乘機巧中之說, 反蒙嘉奬之批, 潛相喜幸, 自以爲得售己計。 及其 聖明處分之後, 諸臣所被之罪, 猶不滿群小之所望, 故今此應一之疏, 又自千里而至。 有同十日燕王之書, 許多造意, 實相照應, 若出於一人之手。 此與安老藉重陵寢之事, 陷害忠良之跡, 前後一套, 殿下其不之覺耶? 苟或不知則已, 知之而猶且顧忌, 不能明辨痛斥, 則將無以杜讒賊之口, 而駸駸然墮其術中。 伏願殿下, 深留睿思, 亟治應一之罪, 以戢奸兇之輩, 國家幸甚。                                    上不納。 執義李有相亦上疏, 請明示好惡, 亟正應一之罪。 上不從。

【태백산사고본】 21책 21권 21장 B면【국편영인본】 37책 40면
【분류】정론-정론(政論) / 정론-간쟁(諫諍) / 왕실-종사(宗社) / 사법-탄핵(彈劾) / 사법-치안(治安) / 변란-정변(政變)

 

상이 총호사 김수흥 및 도감 당상(都監堂上)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신릉(新陵)의 석물(石物)은 영릉(英陵)의 제도를 보아 그와 똑같이 해야 한다. 자성(慈聖)의 뜻도 이와 같다. 신릉은 쌍분(雙墳)을 쓸 수 있는가? 기해년에도 자성의 하교로 쌍분으로 정했었다."
하니, 민유중(閔維重)이 아뢰기를,
"만약 쌍분으로 쓴다면 정혈(正穴)이 가운데에 있어 비어버리게 됩니다. 지관들이 모두 말하기를 ‘아래 혈(穴)도 아주 길(吉)하다.’고 합니다. 만약 상·하혈에 쓴다면 정리상 쌍릉과 다름이 없을 것입니다."
하자, 상이 그렇다고 하였다. 수흥이, 응일이 상소하여 지척한 것으로 상직(相職)과 총호사(摠護使)의 직책을 사면하니, 상이 허락하지 않고 이르기를,
"어찌 그것을 가지고 인혐하는가."
하였다. 수흥이 아뢰기를,
"장응일의 상소에 다시 봉분을 쌓자고 진언한 것을 가지고 흉참하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것을 말거리로 삼은 것은 그의 생각에 길한 땅으로 옮기지 않고 불길한 땅에다가 봉분을 다시 쌓자고 한 것을 옳지 않다고 생각하여 흉참하다고 지목한 것일 것이다."
하였다. 수흥이 아뢰기를,
"이 일에 대해서는 또 성명께서 통촉하지 못한 곳이 있으십니다. 경자년016)   이후로 항간의 말들이 한결같은 것은 아니지만 다들 송시열을 죄인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 하나는 예(禮)를 의논한 일 때문이고, 하나는 현궁(玄宮)에 합판(合板)을 쓴 일 때문이며, 하나는 영릉(寧陵)을 쓰자고 주장한 일 때문인데 이것은 응일이 상소한 내용과 같은 것입니다. 현궁에 합판을 쓴 일은 국조(國朝)이래로 없었던 일이오나 창졸간에 일을 만나서 뜻밖에 나온 것으로 할 수 없이 합판을 썼던 것뿐입니다.
그런데 지금 말거리로 삼고 있는 자들은 지금 능을 옮기는데 재궁에 탈이 있게 되면 시열이 반드시 중죄(重罪)를 입을 것이므로 고의적으로 그를 엄호해 줄 계획을 하여 감히 봉분을 다시 쌓자는 말을 올렸다고 하고 있는데, 응일이 이른바 흉참하다고 한 것은 그 주된 뜻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을 들으니 비로소 그 말이 흉참한 것을 알겠다. 우상은 이미 그 떠도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알 수 있었을 따름이다."
하였다.

 

6월 21일 기미

병조 판서 김만기(金萬基)가 장응일(張應一)이 상소로 배척한 것을 이유로 상소를 진달하여 허물을 끌어대며 죄를 청하고 이어 체직을 청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삼가 상고하건대, 장응일은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의 아들이다. 가정의 교훈을 이어받아 사우(士友)들의 추대를 받았고 청현(淸顯)의 관직을 두루 역임했는데 사건을 만나면 할말을 다하니 영남(嶺南)의 인사들이 모두들 선생이 아들을 잘 두었다고 하였다. 한번 김상헌(金尙憲)·송시열(宋時烈)을 소척하면서부터 요직에 있는 무리에게 크게 거슬려서 다시는 청로(淸路)에 들어가지 못했고, 또 산직(散職)에도 거론되지 않은 지가 거의 20년이 되었다. 고향에 물러가 살면서 벼슬에 생각을 끊었으나 나라를 걱정하고 임금을 사랑하는 정성은 늙을수록 더욱 돈독하여 물러가 있다고 하여 차이가 있지 않았다. 국릉(國陵)에 변이 있다는 말을 듣고 강개한 마음으로 분발하여 한 통의 상소를 썼는데, 논의가 준엄하고 격렬하여 망설임이 없었다. 자제들이 간하여 그만두게 하고 붕우들이 만류하여 못하게 하였으나 끝내 듣지 않고 올렸다. 그 말이 사리에 적중하지 못하고 또 사실과 틀리는 것이 있어서 미워하는 자들에게 집언(執言)의 꼬투리를 잡힌 것은 있으나, 고지식하고 곧은 기개는 사람들이 미치지 못할 바가 있었다. 일을 감독한 신하와 능을 봉심한 관리들이 그 상소를 보고, 어찌 가슴이 찢어지고 넋이 빠지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아, 시열에게 편을 들고 대신에게 아부하는 자들이 일제히 일어나서 공격하였으나 마침내 도배(徒配)로 그친 것은 또한 성명께서 그에게 다른 뜻이 없음을 살핀 데 힘입은 것이다.
○己未/兵曹判書金萬基, 以張應一疏斥, 陳疏引咎, 請罪, 仍乞遞職。 上不許。
【謹按應一, 旅軒先生張顯光之子也。 承訓家庭, 見推士友, 歷敭淸顯, 遇事敢言, 嶺之人士, 皆曰先生有子矣。 一自疏斥金尙憲、宋時烈, 大忤於當路輩, 不復入淸路, 亦不擧論於散職者, 二十年幾矣。 屛居鄕井, 念絶仕宦, 而憂愛之誠, 老而冞篤, 不以退伏而有間也。 聞有國陵之變, 慷慨奮發, 構得一疏, 論議峻激, 無復顧藉。 子弟諫而止之, 朋友挽而泥之, 終不聽而投進。 其言雖有不中不適, 且爽實者, 爲所惡者, 執言之端, 而其狂愚戇直之氣, 自有人所不及者。 董事之臣, 奉審之官, 見其疏, 能不破膽而榹魄也哉? 噫! 黨時烈, 阿大臣者, 齊起而攻之, 終止於徒配者, 亦賴聖明之察其無他耳。】

【태백산사고본】 21책 21권 23장 A면【국편영인본】 37책 41면
【분류】정론-간쟁(諫諍) / 사법-탄핵(彈劾) / 사법-치안(治安) / 왕실-종사(宗社)

 

6월 24일 임술

정재숭(鄭載嵩)을 병조 참지로, 서문상(徐文尙)을 정언으로 삼았다.

 

상이 판부사 송시열에게 유시하기를,
"저번 사관(史官)의 회계(回啓)에서 경의 말을 보니, 불안한 말이 많이 있었는데 그 자세한 곡절을 모르겠다. 저번에 장응일의 상소는 말 뜻이 조리가 없고 속으로 사람을 죄에 빠뜨리려고 하였다. 수원산에 대한 말에 이르러서는 그 마음이 더욱더 흉참하여 놀랐다. 이에 근시(近侍)를 보내어 나의 뜻을 유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천릉(遷陵)하는 일은 실로 망극한 변이니 어찌 불행한 정도만 되는가. 간사한 사람이 틈을 타서 망극한 말을 만들고 있으니, 성효(誠孝)가 형편이 없어 오늘의 일을 있게 한 것이므로 가슴을 어루만지며 통곡해 울고 있을 따름이다. 다시 무슨 말을 하겠는가. 상하의 의리를 흩어지게 해서 혼란하게 하고 남의 국가를 낭패시키려는 계획을 하는 행위는 전대의 역사를 상고해 보아도 두려운 일이다. 아, 흉인이 꾀를 쓰는 것이 비록 간교하다고 하더라도 이 일에 이르러서는 조금도 근사하지 않으니, 경에게 무슨 불안해 할 이치가 있는가. 멀리 떠나려는 마음을 빨리 돌리고 속히 올라와서 천릉하는 의례에 대해 주선을 하여 선왕(先王)께서 특별하게 대우해 주었던 은혜에 보답한다면 지극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6월 25일 계해

예조가 아뢰기를,
"오늘은 바로 입추절(立秋節)입니다. 정전(正殿)에 환어(還御)하시어 상선(常膳) 등의 일을 전례대로 거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옳다"
하였다.

 

장령 성호징(成虎徵)이 아뢰었다.
"신의 생각으로는, 이것이 비록 장응일이 스스로 한 것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죄인을 잡는 데 이미 그 계책이 없으니 또한 가명(假名)한 것이라고 해서 그대로 버려둘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선 말감(末減)의 율에 따랐던 것인데 지금 옥당이 올린 차자를 들으니 죄가 무거운데 형률이 가벼운 것은 잘못이라고 하였다 합니다. 신을 체직하소서."
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정언 홍만종(洪萬鍾)·박상형(朴相馨) 등이 아뢰기를,
"옥당의 차자 속에 장응일은 죄가 무거운데 형률이 가볍다는 것으로 말을 하고 있으니 여론이 있는 곳을 이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잠잠히 말을 하지 않은 잘못을 진실로 면하기 어렵습니다. 더구나 헌부의 관리가 이 일 때문에 인피하였으니, 신들은 마땅히 스스로를 탄핵하는데 겨를이 없어야 할 것인데 어찌 감히 편안히 처치할 수 있겠습니까. 체직하소서."
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리니, 옥당이 처치하여 모두 체직시켰다.

 

6월 29일 정묘

이숙(李䎘)을 대사간으로, 이유(李濡)를 정언으로, 김수오(金粹五)를 장령으로, 나이준(羅以俊)을 수찬으로, 이지익(李之翼)을 승지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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