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현종실록21권, 현종 14년 1673년 7월

싸라리리 2025. 12. 17. 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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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일 무진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상이 침을 맞았다. 박천영(朴千榮)을 복과(復科)하라고 명하였다. 그전에, 천영의 시권(試券) 속에 한두 글자를 고친 곳이 있었는데 대간(臺諫)이 간사한 계책이 있는가 의심해서 방목(榜目)에서 빼내자고 계청했었다. 그런데 이에 이르러 약방 제조 장선징, 승지 심재가 똑같이 말하기를,
"천영을 방목에서 빼버린 것을 사람들이 다들 억울하게 여기고 있으며, 요즈음 가뭄이 든 것이 반드시 여기에서 연유되지 않았다고는 못 합니다."
하고, 우상 김수흥(金壽興)도 그를 방목에서 빼버린 것은 억울한 일이라고 말하였다. 그러므로 이러한 명이 있게 된 것이다.
삼가 살피건대, 천영을 방목에서 빼버린 것과 복과(復科)시켜 준 것 모두 공정하지 못한 처사이다. 왜냐하면 책문(策問)에서 한두 글자를 고친 것은 애당초 의심할 것이 못 되며 또 관계될 바가 없는 것인데, 대신(臺臣)이 흠을 잡아 반드시 간사한 계획이 있을 것이라고 물고 늘어져 방목에서 빼내버렸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천영이 그의 당이 아니기 때문이었으니, 그를 방목에서 빼버린 것을 공정하다 할 수 있겠는가. 또 천영은 방목에서 빼버림을 당한 뒤에 형세있는 사람을 분주히 찾아다니며 복과될 발판을 만들려고 논의할 때에 아부하는 태도가 현저하였다. 이에 여러 재신들이 다투어 아뢰면서 억울한 일이라 매우 힘써 일컫고, 방목에서 빼내버린 지 이미 오래되었는데 마침내 복과를 시켰으니, 이는 자기들에게 당부(黨附)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그 복과를 또한 공정하다 할 수 있겠는가. 아, 저 천영의 반복한 행위야 뭐 나무랄 가치가 있겠는가마는 여러 재신들이 자기편을 좋아하고 다른편을 싫어하며 공을 등지고 사를 따름이 이와 같으니 나랏일이 어찌 한심하지 않겠는가.
○上受鍼。 命朴千榮復科。 初千榮試券中, 有一二字點改處, 臺諫疑其有奸計, 啓請拔榜, 至是藥房提周張善瀓、承旨沈梓一口言: "千榮之拔榜, 人皆稱冤, 近日旱災, 未必不由於此。" 右相金壽興, 亦言其拔榜之冤, 故有是命。
【謹按千榮之拔榜, 與復科, 皆非公也。 何者, 策問之一二字點改, 初非可疑, 亦無所關, 而臺臣吹毛覓疵, 謂必有奸計, 論執而拔之榜, 無他。 以千榮之非其黨也, 其拔榜, 可謂公乎? 千榮拔榜之後, 奔走形勢之塗, 以爲復科之階, 論議之間, 顯有諂附之態。 於是諸宰競奏, 稱冤甚力, 終至復科, 於拔榜旣久之後, 以其黨附於己也。 然則其復科也, 亦可謂之公乎? 噫! 彼千榮之反覆, 顧何足誅, 諸宰之好同惡異, 背公循私如此, 國事豈不寒心哉?】

【태백산사고본】 21책 21권 23장 B면【국편영인본】 37책 41면
【분류】인사-관리(管理)

 

김수흥이 아뢰기를,
"연로한 조관(朝官)들에게 가자(加資)하라는 명이 계신 것은 매우 성대한 은전이십니다. 그중에 이구원(李久源)·구인기(具仁墍)는 나이가 가장 많은데 더해준 자급(資級)이 정헌(正憲)에 지나지 않으니 변품(變品)해 주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그리고 정두경(鄭斗卿)은 비록 이미 죽었더라도 자헌(資憲)에 추증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모두 따랐다.

 

7월 2일 기사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윤지선(尹趾善)·정도성(鄭道成)을 정언으로, 윤진(尹搢)을 헌납으로, 이합(李柙)을 집의로, 유연(柳㝚)을 장령으로, 박태상(朴泰尙)을 지평으로, 신정(申晸)을 대사성으로, 이훤(李藼)을 교리로, 김석주(金錫胄)를 부교리로 삼았다.

 

헌납 김석주가 아뢰기를,
"국가가 불행하여 선릉(先陵)의 토석에 틈이 생겨서 군신 상하가 다들 걱정하고 두려워하여 빨리 천릉할 계획을 정하여 시일을 이미 잡아 놓았고 공장의 일을 이미 해놓았습니다. 조금이라도 충간(忠懇)한 마음을 품고 의분(義分)을 아는 자가 있으면 마땅히 두려워 하면서 마음을 합하고 뜻을 아울러서 각자 스스로 교산(喬山)이 만대토록 전할 꾀를 다해야 옳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때를 틈타 천리 밖에서 상소를 전달하여 반대당에 원망을 씌우고 시기하고 원수를 갚으려는 뜻을 풀려고 하니, 그들이 남의 불행을 다행하게 여기고 남의 재앙을 즐겁게 생각하여 온 세상 사람들을 모두 예측할 수 없는 위태롭고 몹쓸 곳에 몰아넣으려 하는 것이야 말로 참으로 무섭고도 놀랄 만한 일입니다. 그들의 뜻이 군부(君父)의 마음을 돋우어 격노하게 하는 데 있기 때문에 태상(太上)을 기롱하고 욕하면서도 조금도 용서하지 않고 계책이 군신의 사이를 벌어지게 하기에 서둘러 감히 허망함을 날조하면서도 기탄하는 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다행하게도 우리 성명께서 여지없이 통촉하심을 힘입어 정상을 숨길 수 없게 되었으므로 한때의 간사한 무리들의 간담을 깨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처럼 만약 독기를 남겨두고 화의 싹을 남겨둔다면 마침내 반드시 조신(朝紳)에게 화란(禍亂)의 뿌리가 될 것인데, 관작을 삭탈하고 내쫓는 벌이 너무 가볍게 감하여 저 한없이 참소하는 자를 북방에 던져 버리는 의리에 어긋나고 있습니다. 장응일을 빨리 먼 지방으로 귀양보내라고 명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조정에 일이 있으면 삼사(三司)가 통의(通議)하는 것이 바로 항례입니다. 저번날 장령 성호징(成虎徵)이 응일을 논핵할 적에도 옥당과 더불어 상의하여 율명(律名)을 가늠하여 결정했는데 마침내 율이 가볍다고 진차를 해서 사람으로 하여금 중도에서 낭패를 보게 하여 따라갈 바가 없으니, 말하고 논의하는 자리에서 특별한 절조가 없어서는 안 됩니다. 진차한 옥당의 관원을 아울러 체직하소서. 그리고 성호징은 연이어 대각(臺閣)에 있으면서 전후하여 처리한 거조에 대해 번번이 기롱하는 논의를 당하고 있으니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모두 따랐다.

 

7월 3일 경오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우상 김수흥이 청대(請對)하여 아뢰기를,
"천릉(遷陵) 때의 복제(服制)는 우제(虞祭)를 올리고 나서 벗고 그후 3개월을 지나 끝내면 예(禮)에 어긋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복을 벗은 뒤에 흰옷을 입고 3개월을 지나 끝마치는 것은 반쯤 올라가다가 떨어지는 점이 있는 듯합니다. 이는 바로 막중한 예이니 외방에 있는 유신(儒臣)에게 물어 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7월 4일 신미

장령 김수오(金粹五)가 장응일(張應一)을 멀리 귀양보내라고 계청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양사가 반 년 동안 다투어 논집하였지만 끝내 윤허를 받지 못하였다.

 

행 판중추부사 송시열이 상소하여 지문(誌文)을 지어 올리라는 명을 사양했는데, 그 대략에,
"이익수(李翼秀)의 상소가 있은 뒤로 삼가 물의(物議)를 들어 보니, 신의 몸에 죄를 돌리기를 매우 중하게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신이 대략 황공한 뜻을 지난날 사관(史官)이 돌아갈 때에 올렸었습니다. 계속하여 또 들으니, 외방에 있는 사람의 상소가 마침내 올려졌는데 크게 불충하다는 죄목으로 더하였다고 하니, 신은 실로 왕법(王法)이 용서하지 못할 죄인입니다. 어떻게 감히 붓을 잡고 글을 써서 성상의 명령을 받들기를 죄없는 사람이 하듯이 무릅쓰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너그러운 비답을 내리고 허락하지 않았다.
○行判中樞府事宋時烈上疏, 辭誌文製進之命, 其略曰:
自有翼秀疏以來, 竊聞物議, 歸罪於臣身甚重。 故臣略進惶恐之意, 於頃日史官之歸矣。 繼又聞, 方外之疏遂上, 加之以大不忠之目, 臣實是王法罔赦之罪人也。 何敢握管行墨, 冒承明命, 有若無罪者然哉?                                    上優批, 答之不許。

【태백산사고본】 21책 21권 24장 B면【국편영인본】 37책 42면
【분류】정론-정론(政論) / 사법-탄핵(彈劾) / 왕실-종사(宗社)

 

좌윤 조수익(趙壽益)이 상소하여 사직하고, 또 말하기를,
"신의 가정에 있었던 참혹한 변은 실로 윤상(倫常)에 관계된 것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의 잘못을 증명하는 일이 이미 흉악한 자취가 다 드러난 뒤에 있었으니, 엄형(嚴刑)으로 정죄(正罪)를 하는 것밖에는 결단코 신문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재판이 지연되어 한 해가 지났는데도 끝이 날 기약이 없이 부자간으로 하여금 서로 송사하게 하려는 듯하니, 법망(法網)이 매우 전도되었습니다. 이는 신의 말이 신용을 받지 못하고 세상에서 버림을 받은 소치이니 오히려 누구를 허물하겠습니까. 이 재앙의 흔단을 생각할 때 다만 엎드려 있어야 마땅하고, 더구나 숨이 가물가물하여 전혀 힘을 내어 조정에 나갈 희망도 없습니다."
하니, 상이 너그럽게 비답을 내리고 허락하지 않았다. 삼가 살피건대 조수익(趙壽益)은 한 때의 명망있던 재상으로 불행하게 가정의 변을 만나 아버지가 아들의 일을 증언하는 것으로 본도(本道)에 정장(呈狀)하였으니, 죄인들의 정상은 묻지 않더라도 알 수 있다. 수익이 신축년017)  에 올린 한 통의 상소로 하여 시의(時議)에 크게 거슬렸기 때문에 전후 방백(方伯)과 추관(推官)이 수익을 미워하는 자의 뜻을 받아 노망(老妄)으로 핑계하고 그 사이에 의심을 두어 해가 지나도록 해결하지 않았다. 윤기(倫紀)와 법강(法綱)이 이에 이르러 땅을 쓴 듯이 없어졌으니 어찌 통탄스럽지 않겠는가.
○左尹趙壽益上疏, 辭職且言: "臣家變之慘, 實是倫常之所關。 以父證子之擧, 旣在於兇迹畢露之後, 則嚴刑正罪之外, 斷無可問。 而滯獄經年, 究竟無期, 有若使父子相訟者然, 法綱之顚倒極矣。 此無非臣言不見信, 爲世所棄之致, 尙誰咎哉? 顧此釁孽, 只合屛伏, 況奄奄氣息, 頓無作力造朝之望者哉。" 上優批不許。
【謹按壽益, 以一時名宰, 不幸遭家變, 以父證子, 呈狀于本道, 則罪人等情狀, 不待問而可知。 而壽益以辛丑一疏, 大忤於時議, 前後方伯, 及推官, 承望惡壽益者之意, 諉以老妄, 致疑於其間, 經年而不決。 倫紀、法綱, 於是乎掃地矣, 豈不痛矣哉?】

【태백산사고본】 21책 21권 24장 B면【국편영인본】 37책 42면
【분류】인사-임면(任免) / 사법-재판(裁判) / 가족-친족(親族) / 윤리-강상(綱常)

 

7월 5일 임신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정언 윤지선(尹趾善)이 본원의 논계에 혐의가 있어 감히 동참하지 못한다는 것으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그것은 장응일(張應一)이 상소하여 대신을 공박했는데 정치화(鄭致和)가 바로 지선의 외삼촌이었기 때문이다.

 

7월 6일 계유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구릉(舊陵)을 파묘하는데 길한 시간을 묘시(卯時)로 고쳤다.

 

장령 김수오·유연이 아뢰기를,
"황해 감사 황준구(黃儁耉)가 일찍이 의주 부윤이 되었을 때 군량(軍糧)과 은화(銀貨)를 많이 덜어내어 사사로이 부유한 상인에게 꾸어주고 그들에게 판매를 맡겨 그 이익을 나누었다는 말이 원근에 전파되었으며, 그가 체직되어 돌아오던 날에는 가지고 온 좋은 노새가 세 마리나 되었습니다. 준구처럼 삼가하지 못하는 사람이 오래도록 재화가 모이는 지방에 있었으니, 그가 차지한 물건이 이것에만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이 한 가지 일만 가지고 보더라도 그가 청렴하지 못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본직을 제수함에 미쳐서도 이미 사람들의 말이 있으니, 관리의 정(正)·부정(不正)을 염탐하여 관풍(官風)을 깨끗하게 하는 직책을 이와 같은 비부에게 주어서는 안 됩니다. 파직하고 서용하지 마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다가 여러번 아뢰자 곧 따랐다.

 

7월 7일 갑술

산릉 도감이 아뢰기를,
"신중히 해야 하는 도리에 있어 구릉을 파묘하는 일과 현궁(玄宮)을 내리는 날은 더욱 길일을 가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지관 반호의(潘好義) 등으로 하여금 가리게 하니, 모두 10월 25일 오시(午時)가 매우 좋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우선 이 날로 정해 놓고 앞으로의 사세를 보아 날짜를 앞당기거나 뒤로 미루어야겠습니다."
하니, 상이
"좋다"
고 하였다.

 

7월 8일 을해

김우석(金禹錫)·이혜(李嵆)를 승지로, 이우정(李宇鼎)·이유(李濡)를 정언으로, 김석주(金錫胄)를 이조 좌랑으로 삼았다.

 

7월 9일 병자

상이 안질 때문에 침을 맞았다.

 

7월 10일 정축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박상형(朴相馨)을 장령으로, 유송제(柳松齊)를 지평으로, 민종도(閔宗道)를 승지로, 최후상(崔後尙)을 부응교로, 박태상(朴泰尙)·임상원(任相元)을 교리로, 조사석(趙師錫)·신익상(申翼相)을 부교리로, 이인환(李寅煥)을 수찬으로, 홍만종(洪萬鍾)을 부수찬으로, 김석주를 이조 정랑으로, 이훤(李藼)·윤진(尹搢)·이당규(李堂揆)를 이조 좌랑으로, 송규렴(宋奎濂)을 헌납으로, 윤창형(尹昌亨)을 충청 수사(忠淸水使)로 삼았다.

 

예조가 아뢰기를,
"이번 천릉할 때에 각전(各殿)의 복색(服色)은 마땅히 예문(禮文)에 의거해서 삼년복을 입어야 하는 사람은 시마복을 입어야 합니다. 대왕 대비께서는 기해년 초상(初喪) 때에 이미 기년 복제를 행하였으니 지금은 성복(成服)할 예가 없으며 대신들의 뜻도 이와 같습니다."
하니, 상이
"옳다"
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천릉할 때의 시마복은 경오년의 경우 정원의 계사(啓辭)로 인하여 대신들에게 의논하여 우제(虞祭)를 지낸 뒤에 시마복과 백의를 아울러 벗었습니다. 지금 복을 벗는 한 조목에 있어서도 마땅히 경오년의 예에 의거하여 거행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미 전례가 있으니 그에 의하여 거행하는 것이 마땅할 듯하다. 그러나 일은 자세하고 신중한 것이 귀한 것이니 예관(禮官)으로 하여금 다시 송 판부사(宋判府事)와 의논을 하여 아뢰게 하라."
하였다. 행 판부사(行判府事) 송시열이 의논드리기를,
"기억하건대, 경오년에 천릉하고 복을 벗은 뒤에 신의 스승 김장생(金長生)이 《의례(儀禮)》 및 주자설(朱子說)를 따르지 않은 것을 의심하여 편지로 장유(張維)에게 질문하였는데 그 답서(答書)에 ‘조정의 의논이 일치되지 못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이미 자사(子思)의 설(說)이 있으니 오늘 행한 것도 근거가 없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으로 보면 유선(儒先)의 논의를 볼 수 있고 장유(張維)가 좌우했던 은미한 뜻도 볼 수 있습니다. 신이 이미 스승에게 사사받은 바가 있는데 다시 무슨 다른 의논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염려스런 것은 오늘 찬궁(欑宮)을 열고 현궁(玄宮)에 내리기까지가 6, 7일간뿐인데 상복을 입자마자 금방 벗는다는 것은 신자가 군부를 높이는 도리가 아닐까 염려됩니다. 성상께서 진선 진미(盡善盡美)하도록 재량하여 처리하는데 달려있는 것이니 전례가 어떠하건간에 다시 구애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어서 삼가 생각하건대 기해년 초상날에 신과 고 참찬 송준길(宋浚吉)이 헌의(獻議)하기를 ‘《의례(儀禮)》와 주자설(朱子說)을 따라서 관(冠)·질(絰)·최(衰)·상(裳)으로 성복을 하되 따로 시사복(視事服)을 만들어 입고 사진(仕進)하는 것이 마땅하겠다.’고 청했는데 성상(聖上)께서도 불가하다고 하지 않으시고 그 헌의를 정신(廷臣)에 내렸고, 바깥 의논들도 ‘고례(古禮) 및 주자설을 오늘에 행해야 마땅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조정 의논이 한결같지 않았기 때문에 마침내 전례를 따르고 말았으므로 식자들은 지금까지 한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면례(緬禮)를 인하여 만약 예문(禮文)에 의거하여 세포(細布)와 숙마(熟麻)로 시마복을 만들어 입고 흠위(廞衛) 및 제사를 모시고 따로 소단령(素團領)·오사모(烏紗帽)·오각대(烏角帶)의 차림으로 일을 본다면 군부(君父)를 위하여 슬픔을 다하는 의리에 합당한 듯하고 또 따라서 고례(古禮)를 회복하는 조짐이 되기도 할 것입니다. 대개 국가의 전례(典禮)는 모름지기 인정과 예문에 들어 맞은 다음에야 사람 마음에 서운함이 없는 것입니다. 신의 망령된 견해가 정의(定議)에 합하지 않을까 두려우나 이미 생각한 바가 있기에 감히 무릅쓰고 진달하는 바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3개월을 따르는 제도를 의논에 의하여 시행하라."
하였다.

 

7월 12일 기묘

이지익(李之翼)을 황해 감사로, 최관(崔寬)을 승지로, 윤심(尹深)을 응교로, 이유(李濡)를 교리로, 박태상(朴泰尙)을 북평사(北評事)로, 안후(安垕)를 정언으로 삼았다.

 

7월 13일 경진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김휘(金徽)를 대사간으로, 윤심(尹深)을 사간으로, 어진익(魚震翼)을 헌납으로 삼았다.

 

상이 대신 및 비국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우상 김수흥(金壽興)이 아뢰기를,
"각도 수령이 적곡(糴穀)을 허위로 기록한 문서(文書)를 지금 이미 다 보내왔습니다. 그러나 그 수가 매우 많아서 일체 논죄하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 1천 석 이상은 잡아다 심문하고, 1백 석 이상은 파직하여 추고하고, 11석 이상은 추고하고, 10석 이하는 논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호조 판서 민유중(閔維重)이 아뢰기를,
"봉릉(封陵)의 제도는 어느 능의 제도를 따라야 합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모두 광릉(光陵)의 제도를 따르라."
하였다.

 

7월 14일 신사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경상도(慶尙道)에 가뭄이 너무 혹심하였다. 동래(東萊)의 해운대(海雲臺)에 해석(海石)이 굴러나왔던 곳에서 또 작은 돌 하나가 나와서 여러 돌 속에 기대어져 있다고 도신(道臣)이 보고하였다.

 

7월 15일 임오

안진(安縝)을 승지로, 윤지선(尹趾善)을 정언으로 삼았다.

 

대사간 김휘(金徽)가 아뢰기를,
"장응일(張應一)이 전지에 응한다고 핑계대면서 천리 밖에서 봉소(封疏)를 하였으나 일이 사실과 틀린데다가 말이 두서도 없으니 죄를 청하는 논의를 마땅히 늦추어서는 안 됩니다. 다만 응일의 상소가 자기 견해를 나름대로 제기한 것이라면 죄가 그 몸에만 그치는 것이 참으로 당연합니다. 그러나 만약 편지를 보내어 봉소를 올리도록 유인을 하였다면 반드시 그 배후의 사람이 있을 것이니 그렇게 하도록 유인한 자의 죄는 응일의 죄에 비해 더욱 무겁습니다. 군부(君父)를 비난하고 대신을 성토하여 죄주는 것이 어떠한 일인데 속으로 무함할 마음을 품고 겉으로는 형적(形跡)의 혐의를 피하면서 발자취를 감추고 얼굴을 바꾸어 자신의 계책을 펴려고 하니, 그 마음 씀씀이로 장차 무슨 짓인들 하지 못하겠습니까? 그 죄는 귀양보내는 정도로 그쳐서는 안 될 듯합니다.
신의 견해로는 먼저 응일을 의금부에 내려 그런 뜻을 조작해 낸 사람을 끝까지 심문한다면 성상의 위엄 아래에서 반드시 감히 실상대로 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니, 그런 다음에 죄를 주어도 늦지는 않을 것입니다. 진실로 유인한 사람이 없는데 응일이 스스로 하여 나온 것이라면 어찌 어둡고 간사하다는 이름을 죄없는 사람에게 씌워서 군신 상하로 하여금 의심하고 멀리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신의 견해가 이와 같기 때문에 귀양보내자는 논의에 대해 구차하게 동의하기는 곤란하니, 체직하소서."
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장령 박상형(朴相馨)·유연(柳㝚)이 처치하기를,
"다른 의견을 내어 억지로 인피하고 있으니 구차함을 면할 수 없습니다. 체직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7월 16일 계미

김환(金奐)을 정언으로, 이헌을 교리로, 서문상(徐文尙)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사간 윤심(尹深)이 아뢰기를,
"장관이 인피하며 올린 말에, 장응일의 일을 논의함에 있어 우선 잡아다가 신문하지 않고 곧바로 멀리 귀양보내자는 청은 잘못된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신의 망령된 생각으로는 비록 그를 유인하여 상소하도록 한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미 확실하게 보고 적발하지 않았으니, 지레 짐작만 가지고 샅샅이 조사하자는 논의를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양일간의 연계(連啓)에서도 전초(前草)만을 사용하였습니다. 지금 장관이 뒤섞여 더한 의심을 변론하고자 하여 구차하게 동의하기 곤란함이 있다고 말을 하였는데, 신이 어찌 감히 자신의 의견을 옳다고 여겨 편안히 앉아 있을 수 있겠습니까, 체직하소서."
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헌납 어진익(魚震翼)도 이 때문에 인피하니, 처치하여 모두 출사하게 하였다.

 

7월 18일 을유

김휘(金徽)를 호조 참판으로, 이숙(李䎘)을 대사간으로, 강시경(姜時儆)을 정언으로, 윤형성(尹衡聖)을 사간으로, 윤지선(尹趾善)을 부수찬으로, 윤심(尹深)을 부응교로 삼았다.

 

7월 19일 병술

사간원이 아뢰기를,
"정창도(丁昌燾)의 가자(加資)를 개정(改正)하소서."
하였는데, 이때 이르러 따랐다.

 

7월 20일 정해

호조 판서 민유중(閔維重)이 들어와 아뢰기를,
"연경(燕京)에 가는 자에게 금지하는 법제 중에 우리 나라가 금지하는 것은 은화(銀貨)만한 것이 없는데 지금은 공공연하게 싣고 들어가고 모피(毛皮) 등의 물건은 본래 법전(法典)으로 금지한 것이 아니지만 요즘 칙사(勅使)의 행차가 빈번하면서 끝없이 빼앗아 가므로 상신(相臣) 정치화(鄭致和)가 진달하여 금지하였습니다. 범하는 자가 있으면 번번이 빼앗아 국가의 창고에 들였는데 해가 지나도록 창고에 두었으므로 좀먹고 찢어져 끝내는 쓸 수 없게 되어버립니다. 우리 나라에서 쓰는 것이라곤 이 모피뿐인데 통행할 수 없으니, 금지하지 않는 것이 합당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7월 21일 무자

윤증(尹拯)을 집의로, 이당규(李堂揆)를 이조 정랑으로, 이합(李柙)을 응교로 삼았다.

 

7월 22일 기축

장령 박상형·유연 등이 아뢰기를,
"전조(銓曹)의 선발이 공정하지 않은 것이 근래의 고질적인 폐단이 되고 있는데 이번의 대정(大政)은 상당히 심합니다. 제수의 정목(政目)이 내려지기도 전에 이지(李墀)는 안음 현감(安陰縣監)으로, 안찬(安燦)은 순안 현령(順安縣令)으로 삼는다는 소문이 사부(士夫) 사이에 전파되었는데, 제배(除拜)할 때에 과연 사람들의 말과 같이 되었습니다. 설령 이지 등의 재능과 기국이 십분 합당하다고 하더라도 미리 정사가 있기 전에 자자한 소문이 있어서 사람들의 의혹을 가져 왔다면 정관(政官)이 사정을 따랐다는 것을 이에 의거하여 알 수 있으니 결코 그대로 부임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안음 현감 이지, 순안 현령 안찬을 체차하고 이조 당상 낭청은 중법으로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7월 23일 경인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신정(申晸)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약방 제조(藥房提調) 등과 여러 승지가 청대하고 들어와 아뢰기를,
"들으니, 명선 공주(明善公主)의 병 증세가 분명히 두역(痘疫)이라고 합니다. 상께서도 빨리 피하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공주도 마땅히 궐 밖으로 내어다 두고 치료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오늘 안으로 마땅히 경덕궁(慶德宮)으로 옮기겠다. 왕세자(王世子)와 세자빈(世子嬪)을 먼저 가게 하라."
하고, 저녁에 상이 경덕궁으로 옮겼다.

 

7월 26일 계사

허적(許積)을 영의정으로, 이숙(李䎘)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사간 윤형성(尹衡聖), 헌납 어진익(魚震翼)이 아뢰기를,
"전 현령(縣令) 유필(柳㻶)은 일찍이 형조 낭관을 맡았을 때에 송자(訟者) 이환(李煥)이 들여 보낸 문서로 본조에 봉해 두었던 것을 몰래 꺼내다가 달을 넘긴 다음 본조에 되돌려 놓았습니다. 그렇게 하고는 그 문서를 송척(訟隻)018)  에게 전하여 보여 주었으니 일이 매우 놀랍습니다. 잡아다 국문하여 죄를 결정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7월 29일 병신

약방 제조 등이 아뢰기를,
"삼가 듣건대 세자빈의 병환도 두역이라고 하니, 상께서 세자를 거느리고 속히 피하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일 증세를 보아 어의동 본궁(於義洞本宮)으로 옮겨야겠다."
하였다.

 

7월 30일 정유

원임(原任) 우의정 이경억(李慶億)이 졸(卒)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형제가 같은 해에 등과하여 청현직을 두루 거쳤고 번갈아 가며 서로 전조(銓曹)를 관장하였었는데 당시 사람들은 경휘(慶徽)를 낫게 여겼다. 경억이 입상(入相)한 지 두 달이 못 되어 졸하니 나이가 54세였다. 자못 영걸하고 총예하여 동배(同輩)들에게 중망을 받았으나 국량이 넓지 못하니 재상의 그릇은 아니었다.

【태백산사고본】 21책 21권 27장 B면【국편영인본】 37책 43면
【분류】역사-사학(史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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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은 논한다. 형제가 같은 해에 등과하여 청현직을 두루 거쳤고 번갈아 가며 서로 전조(銓曹)를 관장하였었는데 당시 사람들은 경휘(慶徽)를 낫게 여겼다. 경억이 입상(入相)한 지 두 달이 못 되어 졸하니 나이가 54세였다. 자못 영걸하고 총예하여 동배(同輩)들에게 중망을 받았으나 국량이 넓지 못하니 재상의 그릇은 아니었다.
○丁酉/原任右議政李慶億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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