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현종실록21권, 현종 14년 1673년 8월

싸라리리 2025. 12. 17. 15:29
반응형

8월 2일 기해

명선 공주(明善公主)가 졸하였다.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연달아 참통한 상(喪)을 만나니 심사가 막히고 혼미하다. 다만 생각하건대 이 초상은 명혜 공주의 초상과 같지 않다. 맹만택(孟萬澤)의 위호(尉號)는 그대로 두는 것이 좋을 듯하다. 해조로 하여금 의논하여 아뢰게 하라."
하니, 우의정 김수흥(金壽興)이 의논드리기를,
"《예기(禮記)》 증자문(曾子問)에 있기를 ‘길일(吉日)을 정해 두고 여자가 죽으면 어찌해야 합니까?’ 하니,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사위[婚]는 자최복으로 조상을 하고, 장사지낸 후 복을 벗는다.’ 하였으며, 해석한 자는 말하기를 ‘일찍이 청기(請期)019)  를 했기 때문에 자최복으로 조상한다. 그러나 아직 아내가 되지 못했기 때문에 장사를 지내고 나서는 벗는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말한다면 명선 공주는 삼간택(三揀擇)을 한 뒤에 부마(駙馬)를 봉작(封爵)했을 뿐만 아니라 납채(納采)·납폐(納幣)·명복(命服)을 들여오고 내가며 친영(親迎)하는 등의 길일을 아울러 모두 미루어 택하고 가례청(嘉禮廳)도 배설했으니 이는 바로 예문(禮文)에 이른바 ‘혼인의 날짜를 알린[告期] 사위는 자최복을 입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미 자최복을 입었다고 한다면 전날의 명혜 공주(明惠公主)의 상(喪)과는 차이가 있는 듯하나, ‘아직 아내가 되지 못했다.’고 하는 경우는 똑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위호(尉號)에 관한 한 가지 일은 실로 의거할 만한 전례가 없으니 신의 천박한 지식으로는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삼가 성상께서 결단하소서."
하니, 하교하기를,
"이미 길일을 정하고 또 가례청을 설치하였으니, 단지 혼인 날짜만 알린 것과는 차이가 있다. 작호는 그대로 두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사간 윤형성(尹衡聖) 등이 내관(內官) 윤완(尹完)을 【윤완은 산릉 감동 중사(山陵監董中使)로 죄를 입은 자이다.】  특별히 서용한 명을 도로 거두어 들이라고 청하였다. 두 차례 아뢰자 그대로 따랐다.

 

유시(酉時)에 왕세자(王世子)가 경덕궁(慶德宮)에 옮겼다.

 

8월 3일 경자

정원에 하교하기를,
"신안위(新安尉)의 작호를 이미 그대로 두었으니, 위(尉)와 우승지 맹주서(孟胄瑞)로 하여금 들어와서 상사(喪事)를 보게 하라."
하였다. 【맹만택(孟萬澤)은 주서(胄瑞)의 아들이다.】

【태백산사고본】 21책 21권 27장 B면【국편영인본】 37책 43면
【분류】인사-관리(管理) / 왕실-의식(儀式)

ⓒ 한국고전번역원

 

8월 4일 신축

예조가 아뢰기를,
"맹주서가 말하기를 ‘상사를 들어와 볼 때에 곡림(哭臨)하는 절차를 마땅히 강정한 뒤에 거행해야 하고 신안위의 자최복을 장례지낸 후에 즉시 벗는 한 절목은 변통하는 것이 마땅할 듯하다.’고 하였습니다. 맹주서는 외청(外廳)에서 입곡(入哭)하는 것이 마땅할 듯하고, 신안위는 비록 공주가 아직 아내가 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이미 작호(爵號)를 허락한 바에야 장례를 마친 후 복을 벗는 것은 일이 변례(變禮)에 관계된 것입니다. 대신에게 의논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따랐다.

 

예조가 또 아뢰기를,
"김수흥(金壽興)이 의논드리기를 ‘부마 작호를 그대로 두느냐의 여부에 대해 물으실 때에 실로 전에는 근거할 만한 일이 없었으므로 다만 《예기》 증자문에 있는 ‘자최복을 입고 조상한다.’는 한 조목을 들어 우러러 대답한 것인데, 더구나 작호를 그대로 둔다는 명이 있었고 또 대궐에 들어와 상사(喪事)를 보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미 작호를 그대로 두고 일체 예문을 따라 자최복으로 조상하게 하였으니, 대궐에 들어와 상사를 봐야 하는 것은 자연히 그 속에 있는 것입니다.
다만 생각하건대, 자최복을 입는 것은 혼인날을 알렸으나 아직 아내가 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장례를 마치고 복을 벗는다는 것으로 예문의 본의를 대체로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작호를 그대로 두는 것으로 변통한다면 이는 실로 예문에 없는 예이니, 신의 어리석은 식견으로는 억측하여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신은 이 일에 대해 구구한 소회가 있습니다. 제왕가(帝王家)의 예절은 사대부가의 예절과 다른 것이니, 작호의 한 가지 일은 마침내 부딪치는 곳마다 불편한 바가 있을 것입니다. 성상이 비록 참통(慘痛)하신 중에 차마 못하는 바가 있어 작호를 그대로 두라는 명이 계셨으나 앞으로 난처한 일이 한둘에 그치지 않을 텐데 성상께서 역시 이것까지 생각하셨습니까. 이러한 변례는 충분히 강론하고 결정하여 후세의 기롱하는 의논이 없게 해야 하니, 밖에 있는 대신들에게 문의하여 잘 처리하는 것이 실로 사의에 합당합니다. 삼가 상께서 재결하소서.
그리고 지금 이 공주의 초상은 천만 뜻밖에 나온 것이므로 상께서 비통하신 중에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시어 신안위(新安尉)의 작호를 그대로 두고 대궐에 들어와 상사를 보도록 하라고까지 하였으니, 이는 실로 차마 못하는 바가 있는 데서 나온 것입니다. 예문(禮文)에 이른바 자최복을 입고 조상을 한다고 한 것은 대개 혼인 날짜는 알리고 아직 성례(成禮)는 올리지 못한 경우를 위한 것입니다. 지금은 혼인 날짜를 채 알리지 못하고 의외에 초상이 있었으니, 자최복으로 조상하는 것은 혹 괜찮지만, 작호를 그대로 두는 것은 이후의 일을 사사건건 불편하게 만들 것입니다. 대신이 헌의한 중의 내용은 대체로 이에서 나왔습니다. 또 성상께서 변고를 처리하는 도리에 있어서도 마땅히 전 공주의 상사와 다르게 함이 없어야 합니다. 자세히 생각을 하시어 사의(事宜)에 잘못됨이 없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미 대신에게 물어보았고 또 처분이 있었는데, 본조(本曹)가 수의(收議)하는 말단에 자기 견해를 첨가해 넣은 것은 실로 상조(常調)가 아니니, 자못 놀랍다. 당해 당상(堂上)을 중법에 따라 추고하라. 그리고 이미 작호를 그대로 두었으니 장사를 지내고 즉시 복을 벗는 것은 부당한 일이다. 이로써 거행하라."
하였다.

 

홍문관 응교 윤심(尹深), 교리 이훤(李藼)·임상원(任相元), 수찬 홍만종(洪萬鍾) 등이 상차하여 신안위 작호를 그대로 두라는 명을 환수하길 청하였는데, 그 대략에,
"살아서는 서로 만나보지도 못하고 죽자마자 복을 입는 것은 바로 정 아닌 정(情)이 되는 것이며, 길한 때는 미치지 못하다가 흉하게 되자 친히 하는 것은 바로 예 아닌 예(禮)가 되는 것입니다. 이를 이끌어 밀고 나가면 입후(立後)를 하고 동폄(同窆)까지 해야 되니, 어찌 사사건건 해로움이 있지 않겠습니까."
하였고, 우의정 김수흥(金壽興)도 상차하여 논집하였으나 상이 아울러 따르지 않았다.
○弘文館應敎尹深、校理李藼ㆍ任相元、修撰洪萬鍾等上箚, 請還收新安尉爵號仍存之命, 略曰:
生不相覿, 死而遂服, 是爲非情之情, 吉則不及, 凶而得親, 是爲非禮之禮。 引而推之, 至於立後同窆, 豈不節節有妨乎?                                    右議政金壽興, 亦上箚論執, 上竝不從。

【태백산사고본】 21책 21권 28장 B면【국편영인본】 37책 44면
【분류】인사-관리(管理) / 정론-간쟁(諫諍) / 왕실-비빈(妃嬪)

 

8월 6일 계묘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8월 8일 을사

안후(安垕)를 정언으로, 박세당(朴世堂)을 집의로 삼았다.

 

 

8월 8일 을사

장령(掌令) 박상형(朴相馨)·유연(柳㝚)도 신안위(新安尉) 작호를 그대로 두는 일을 환수하라고 쟁집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양사가 여러 달 쟁집을 하자, 비로소 따랐다.

 

8월 13일 경술

좌의정 송시열이 상소하여 면직을 구하니, 허락하였다.

 

8월 14일 신해

안진(安縝)을 동부승지로, 송시열을 행 판중추부사로, 박세채(朴世采)·성호징(成虎徵)을 장령으로, 윤지선(尹趾善)을 정언으로 삼았다.

 

대사간 이숙, 사간 윤형성(尹衡聖), 헌납 어진익(魚震翼)이 아뢰기를,
"김포 사람 허정(許炡)이 반노(叛奴)에게 해를 당하여 거의 죽었다가 소생되었고, 온 집안 식구가 거의 다 피살되었습니다. 포도 대장 유혁연(柳赫然)이 비밀리 정읍현(井邑縣)에 공문을 보내어 반노(叛奴)를 잡아서 전주에 옮겨 가두었는데, 대략 이미 죄상을 자백하자 정읍 향소(井邑鄕所) 유진형(柳振亨) 등이 현(縣)을 혁파하는 폐단이 있을까 두려워 영하(營下)에 뇌물을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옥사를 느긋이 해서 반노의 무리가 탈옥하여 달아나 5 인이 도망하였는데 겨우 3인이 잡혔습니다. 마땅히 진작 계문하여 법대로 시행해야 했었는데 그때 감사가 도로 본현에 가두게 하였고, 진형 등이 공주(公州) 사람을 시켜 반노의 본래 주인이라고 자칭하여 송사의 단서를 야기하고 세월을 끌며 결단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듣는 자들이 놀라며 분하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해도(該道)로 하여금 반노를 기찰하여 잡아서 형률에 의해 처단하시고, 진형 및 형리·옥졸을 잡아 경옥(京獄)에 송치하여 각별히 엄형을 하시고 그때의 감사도 파직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그러나 감사의 파직에 대해서는 따르지 않았다.
삼가 살피건대, 허정이 나그네로 떠돌면서 타인의 종을 협박하여 자기의 종이라고 하였으니, 죽인 자는 참으로 죽여야 하지만 그가 화를 만난 것은 괴이하게 여길 것이 못된다. 유혁연이 망령되게 일을 알지도 못하면서 서둘러, 종이 주인을 시해한 것으로 다스려서 대계(臺啓)가 격발하게 만들고 마침내 강상의 옥사를 만들어 현을 혁파하기에 이르렀다. 이숙처럼 어리석고 무식한 사람에 있어서는 진실로 나무랄 것도 없지만 유혁연의 처사에 대해서는 참으로 가슴아픈 일이다.
○大司諫李䎘、司諫尹衡聖、獻納魚震翼啓: "金浦人許炡, 爲叛奴所害, 幾殊而甦, 一家被殺殆盡。 捕盜大將柳赫然秘關于井邑縣, 收捕叛奴, 移囚全州, 略已就服, 井邑鄕所柳振亨等, 恐有革縣之弊, 行賂營下。 故緩其獄, 以致叛奴輩脫逃, 五人在逃, 堇捕三人。 所當趁卽啓聞行法, 而其時監司, 只令還囚本縣, 振亨等敎誘公州人, 自稱叛奴之本主, 惹起訟端, 遷延不決。 聞者莫不駭憤, 請令該道, 譏捕叛奴, 依律照斷, 振亨及刑吏獄卒, 拿致京獄, 各別嚴刑, 其時監司, 亦罷職。" 上從之。 不從監司罷職事。
【謹按許炡, 羈旅周行, 欲脅他奴, 爲己奴戕殺者, 固可誅也, 其取禍也 無足怪者。 赫然酸妄不曉事, 遽以奴弑主治之, 以致臺啓激發, 終成綱常之獄, 至於革縣。 如䎘之愚迷無識, 固不足責, 而赫然之事, 良可痛也。】

【태백산사고본】 21책 21권 28장 B면【국편영인본】 37책 44면
【분류】사법-치안(治安) / 사법-탄핵(彈劾) / 윤리-강상(綱常) / 신분-천인(賤人)

 

이숙 등이 또 아뢰기를,
"도승지 정익은 재능이 없는데 지나친 제수를 받으니 물정이 놀라고 있으며 판의금 조형(趙珩)은 비록 유선(柔善)하다고 일컬어졌으나 본디 강직함과 과단성이 부족하여 죄수를 다스리는 임무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모두 체차하소서."
하고, 또 논하기를,
"형조 판서 민희(閔熙)가 일찍이 강화 유수가 되었었는데, 탐욕스럽고 야비하여 소를 잡아 팔고 어부들의 이익을 빼앗아서 모두 독점하였습니다. 또 소 10마리와 수레 5바리를 갖추어 서울 집에 보내면서 기인(其人)의 땔나무[柴木]를 실어 보내어 품삯을 많이 받아 자기의 자산을 살찌웠습니다. 파직하고 서용하지 마소서."
하니, 상이
"윤허하지 않는다"
고 답하며, 하교하기를,
"유선한 것이 일을 매우 해롭게 하지는 않는데 반드시 괴이하고 독한 다음에야 일을 맡길 수 있다는 것인가? 정익의 일에 대해서는 더욱 놀랍다. 만약 같은 편이면 당이 되고 다른 편이면 공벌하는 너희들의 뜻을 가지고 논한다면 과연 불만족스러울 것이다. 이와 같은 논의는 참으로 통탄스럽고 싫어하는 것이었는데 지금 또 그런 광경을 보게 되니, 놀랍다."
하였다.

 

8월 15일 임자

이숙 등이 인피하였는데 대략에,
"근일 조정에는 공의(公議)가 실행되지 않아서 명기(名器)가 크게 어지럽습니다. 신들이 규핵한 것은 공의를 격양하려는 데 뜻이 있었던 것인데 전하께서 바로 자기와 같은 자에 편들고 자기와 다른 자를 공격한다고 의심하시어 크게 성색(聲色)을 더하시고 조금도 용서하지 않으시니, 모두 신들이 임금을 섬김에 형편이 없어서입니다. 그러나 만약 두 신하가 그 임무를 감당할 수 있다고 여겼다면 신들이 어찌 고의로 이의(異議)를 함부로 세워 반드시 위로 군부의 뜻을 거스리고 아래로 여러 사람의 노여움을 범하겠습니까.
아, 호월(胡越)이 한배를 타더라도 오직 함께 건널 것으로 마음을 삼을 뿐인데, 신들이 비록 매우 어리석다고 하더라도 또한 지각이 있는데 이때가 어떠한 때이기에 감히 상대 당을 배격하고, 공경하고 협동하는 의를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근래 전하께서 쓰는 사람을 보니, 부드럽고 박력없는 사람이 아니면 참람되고 교활한 사람들이니, 귀와 눈으로 책임을 진 자가 어찌 입을 다문 채 말하지 않고 답답한 자들과 함께 돌아갈 수 있겠습니까. 설령 신들로 하여금 자기와 다른 자를 공격하는 마음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힘없고 잔약한 한낱 정익을 체직하라고 청한 것이 무슨 손실이나 이익됨이 있겠습니까. 이미 엄한 유지(諭旨)를 받았으니 결코 그대로 무릅쓰고 있을 수 없습니다. 체직하소서."
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상이 답하기를,
"공의가 펴지지 않고 명기가 과람됨이 많은 것은 주로 너희들에게서 연유된 것이니, 청요(淸要)한 관직을 훔치고 당론에만 힘쓴 데서 이루어진 소치이다. 나는 차라리 부드럽고 박력없거나 참람되고 교활한 무리를 쓸지언정 기필코 너희같이 괴이하고 독한 형편없는 무리를 쓰지 않겠다. 근래 너희들이 하는 것을 보니, 호월(胡越)에도 훨씬 못 미친다. 어느 겨를에 같은 배로 함께 건너는 의를 논하겠는가. 일이 매우 통탄스럽다. 우선은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오늘 인피하는 태도가 이와 같이 느긋하니 이것이 곧 엄지(嚴旨)를 받고서 황공한 뜻에서 나온 것인가? 아니면 분한 마음이 극에 달하여 방자한 뜻에서 나온 것인가? 들어와 인피하는 대관(臺官)에게 물어보고 아뢰어라."
하니, 승지 안진이 아뢰기를,
"즉시 하교하신 뜻으로 대사간 이숙 등에게 물어보니 말하기를 ‘성문 열기를 기다려서 들어와야 하므로 대(臺)에 나아가 계(啓)를 전하는 때가 자연 늦어집니다. 군신의 사이는 부자간과 같은 것인데 아버지가 노(怒)하셨다고 하여 아들이 공경하지 않을 리는 없을 것입니다. 신들이 비록 매우 형편이 없으나, 어찌 감히 분한 마음이 군부 앞에서 싹텄겠습니까? 물어보아 아뢰라는 분부를 듣고 즉시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하자,
"알았다"
고 답하였다.

 

상이 뜸을 떴다. 그때에 약방 도제조 김수흥(金壽興)에게 이르기를,
"정익은 과연 도승지에 적합하지 않은가? 나름대로 공변된 시비가 있을 것이니, 경은 말하라."
하니, 대답하여 아뢰기를,
"일찍이 도승지를 지낸 사람 중에 어찌 정익만 못한 자가 없겠습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국가가 대관(臺官)을 둔 것은 정직하게 말하고 숨기지 않게 하고자 한 것인데, 근일의 탄핵은 모두 당론에서 나온 것이다. 이와 같이 한다면 어찌 대간(臺諫)을 쓰겠는가? 이는 모두 이숙이 한 행위인데 인피한 말은 감히 자취를 혼돈케 하려 하고 있으니 내가 어찌 모르겠는가? 이숙이 경상 감사를 고사하고 있는 것은 그 계획이 다름이 아니고 요로(要路)를 차지하여 당론을 자행하려고 하는 것이다."
하였다. 김수흥이 아뢰기를,
"말씀을 하필 이와 같이 하십니까."
하고, 승지 이혜가 아뢰기를,
"신이 이 하교를 듣고 또한 두려운 마음이 그지 없습니다. 대관이 듣는다면 과연 어떤 마음을 가지겠습니까?"
하니, 상이 답하지 않았다.

 

8월 16일 계축

이유(李濡)를 수찬으로, 이훤(李藼)을 지평으로 삼았다.

 

수찬 홍만종(洪萬鍾) 등이 상차하여 이숙 등을 처치하기를,
"규탄하고 탄핵하는 논의에 있어서는 언책을 저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비록 엄한 유지를 받았더라도 인혐할 필요는 없으니, 아울러 출사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입론(立論)이 공평하지 못하고 처사가 무심하고 소홀했으니 아울러 체차하라."
하였다.

 

8월 18일 을묘

판부사 송시열(宋時烈)이 시골에서 들어오자, 상이 소견하였다. 우의정 김수흥(金壽興), 호조 판서 민유중(閔維重)에게도 입시하라고 명하였다. 상이 송시열에게 묻기를,
"지문(誌文) 속에 다섯 공주(公主)와 부마(駙馬)의 작호(爵號)를 다 쓰지 않았는데 어떨지 모르겠다."
하니, 대답하여 아뢰기를,
"만약 공주로 귀중(歸重)한다면 마땅히 공주의 이름을 써야 하는데 이는 곧 임금 앞에서는 신하의 이름을 부르는 의리입니다. 옛날에는 남편이 아내의 작호를 따르는 의리가 없었습니다. 이미 공주의 작호를 썼으니, 이름을 쓰지 않으면 안 되는데 모르기는 하지만 어렵지 않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선원록(璿源錄)》에도 이름을 썼는데 여기에 이름을 쓰는 것이 어찌 안 될 것이 있겠는가."
하니, 시열이 아뢰기를,
"신이 전대(前代) 제왕 능묘(帝王陵墓)를 보니 이미 표석(表石)이 없어서 그 자취가 명백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국운이 한창 성대하니 흥폐(興廢)의 일에 대해서는 신자(臣子)가 감히 의논할 바가 아닙니다. 그러나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인생은 끝이 없는 것이나 국가는 반드시 흥폐의 이치가 있는 것이다.’ 하였는데, 흥폐의 일을 숨기고 그 도리를 다하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신릉(新陵)의 표석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여러 능에도 모두 세워야 한다."
하였다. 시열이 아뢰기를,
"성상의 하교가 지당하십니다. 그러나 일에는 완급이 있는 것이오니 먼저 신릉에 세우는 것이 옳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시열이 또 백관(百官)에게 관질최상(冠絰衰裳)의 복제(服制)를 행하게 하자고 청하니, 따르지 않았다. 수흥이 시열에게 월봉(月俸)을 주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8월 20일 정사

정윤(鄭錀)을 승지로, 윤심(尹深)을 집의로, 최후상(崔後尙)을 교리로 삼았다.

 

8월 23일 경신

이혜를 대사간으로, 최후상(崔後尙)을 사간으로, 윤진(尹搢)을 헌납으로, 서문상(徐文尙)을 정언으로, 윤증(尹拯)을 집의로, 심재(沈梓)를 승지로, 이선(李選)을 응교로, 김만중(金萬重)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밤에 서리가 내렸다.

 

8월 24일 신유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8월 25일 임술

상이 뜸을 떴다.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8월 28일 을축

권대운(權大運)을 형조 판서로, 박세당(朴世堂)을 사간으로, 윤심(尹深)을 응교로, 윤지선(尹趾善)을 교리로, 유연(柳㝚)을 장령으로 삼았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