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일 정유
상이 총호사(摠護使) 김수흥(金壽興)을 인견하고 재궁(梓宮)을 여는 것이 합당한지의 여부를 물으니, 대답하기를,
"사체(事體)가 중대하니 아마도 재궁을 움직이면 안 될 듯합니다."
하였다. 도승지 이원정(李元禎)이 아뢰기를,
"재궁 안의 의대(衣襨)031) 가 비록 약간 줄어들었더라도 사방 네 귀퉁이는 반드시 옷이 꽉 채워져 있을 것이니 시신(屍身)이 움직일 리는 없을 듯합니다. 또 일이 매우 중대하니 재궁은 열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말은 일리가 있다. 매우 잘 말하였다."
하였다. 수흥이 아뢰기를,
"송시열의 뜻도 열면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의 뜻은 전부터 이와 같았다."
하였다. 수흥이 아뢰기를,
"그렇다면 재궁을 열지 않는다는 것으로 결정할 것입니까?"
하니, 상이
"그렇다"
고 답하였다. 대사헌 장선징이 아뢰기를,
"재궁에 설사 불행한 일이 있다 하더라도 성상께서 몸이 편치 않으면 결코 능에 가기가 어렵습니다. 더구나 지금 재궁에 아무 일이 없고 옥후(玉候)도 편치 않으며 또 마마가 도성 안에서 기승을 부리고 있으니, 명백한 분부를 내려 구릉(舊陵)에 가는 행차를 빨리 멈추소서."
하였다. 이원정이 아뢰기를,
"병이 비록 조금 낫더라도 마땅히 더욱 삼가해야 하니, 봄이 되어 온화하고 따뜻해지면 신릉(新陵)에 거둥하셔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애통하고 망극한 심정으로는 재궁을 찾아 뵙는 예절을 차마 폐할 수 없었기 때문에 약방(藥房)이 누차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던 것이다. 병세가 차도가 없고 경들의 간절함이 여기에 이르렀으니, 날씨가 온화하고 따뜻할 때를 기다려 신릉에 가서 성묘(省墓)하겠다."
하였다.
10월 2일 무술
영의정 허적이 상소하여 면직을 청하기를,
"죄를 진 더러운 신하로서 어찌 감히 막대한 예(禮)를 주선하여 일을 맡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답하기를,
"불행히도 병 때문에 스스로 슬피 사모하는 망극한 회포를 펴지 못하여 오장 육부가 베이는 것 같아 다만 슬피 울 뿐이다. 경이 굳이 사양하는 것은 비록 편안히 여기기 어려운 뜻에서 나왔지만, 이처럼 막중한 예(禮)를 당해서 현궁(玄宮)을 봉분해 닫는 일을 예(禮)에 맞게 하지 못한다면 경의 마음에도 어떠하겠느냐. 속히 거행하여 미진한 근심이 없도록 하여 나의 지극한 소망에 부응하라."
하고, 사관(史官)을 보내어 타일렀다.
10월 3일 기해
밤에 유성이 왕량성(王良星) 위에서 나왔는데 모양이 말[斗]과 같았다.
평안도 가산(嘉山) 등 세 고을에 천둥이 쳤다.
10월 4일 경자
재궁이 구릉(舊陵)에서 출발하였다.
10월 5일 신축
총호사 김수흥이 치계하였다.
"오늘 오시에 대여(大轝)가 무사히 신릉에 도착하였습니다."
10월 7일 계묘
사시(巳時)에 하관(下棺)하였다고, 총호사가 치계하였다.
10월 8일 갑진
정원에 전교하기를,
"구릉(舊陵)의 토지를 적간(摘奸)할 차지 내관(次知內官)은 마땅히 떠나고, 역군(役軍) 3백 명을 양주 목사(楊州牧使)로 하여금 거느리고 가서 부역하라는 뜻으로 경기 감사에게 분부하라."
하고, 또 정원에 하교하기를,
"지금 총호사와 승지의 치계를 보니, 재궁을 현궁(玄宮)에 봉입(奉入)할 즈음에 안팎의 격목(隔木)이 치수가 맞지 않아 봉입할 수 없어 재궁을 도로 꺼내는 일이 있게 되었다니 매우 놀랍다. 본전(本殿)032) 의 당상과 낭청을 모두 잡아다 심문하여 처치하고, 목수(木手)의 우두머리도 똑같이 잡아다 심문하라."
하였다.
지평 이인환(李寅煥)이 아뢰기를,
"장응일(張應一)의 죄상에 대해서는 성상께서 통촉한 바이며, 나라 사람들도 다같이 분하게 여기는 바입니다. 그런데 전 사서(司書) 김환(金奐)은 자신의 사견(私見)으로 한창 들끓는 여론을 막고자 하였다가 배척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하루도 못 되어 청반(淸班)에 의망되었으니, 거의 시비를 분별한 뜻이 없는 것입니다. 이조의 당해 당상과 낭청을 모두 무겁게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받아들이지 않다가 누차 아뢰자 따랐다.
영중추부사 정태화(鄭太和)가 죽었다.
사신은 논한다. 태화의 자는 유춘(囿春)이다. 재주와 지혜가 넉넉하고 총명하고 민첩함이 남보다 뛰어났는데, 일에 앞서 생각하여 일을 그르친 적이 없었다. 집에 있을 때에도 법도가 있어 자제들에게 번화하고 화려한 것을 숭상하지 말고 붕당(朋黨)을 결성하지 말도록 신칙하였다. 의정부에 출입한 지 25년이 되었으나 세력을 부리지 않았다. 그러나 세상이 돌아가는 대로 행동하고 국사를 제대로 담당하려고 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자못 뇌물을 받는다는 기롱도 있어 사람들이 이를 단점으로 여겼다. 향년 72세로서 다섯 명의 자식을 두었다. 하나는 공주(公主)에게 장가들었고, 하나는 명관(名官)이 되었으며, 나머지는 모두 음사(蔭仕)를 하였으므로, 조복(朝服)이 집에 가득하였다. 동생 정치화(鄭致和)와 더불어 번갈아 정승의 자리에 있었으므로 사람들이 이르기를 ‘복록(福祿)이 온 세상에 비할 바가 없다.’고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21책 21권 40장 B면【국편영인본】 37책 50면
【분류】역사-사학(史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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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은 논한다. 태화의 자는 유춘(囿春)이다. 재주와 지혜가 넉넉하고 총명하고 민첩함이 남보다 뛰어났는데, 일에 앞서 생각하여 일을 그르친 적이 없었다. 집에 있을 때에도 법도가 있어 자제들에게 번화하고 화려한 것을 숭상하지 말고 붕당(朋黨)을 결성하지 말도록 신칙하였다. 의정부에 출입한 지 25년이 되었으나 세력을 부리지 않았다. 그러나 세상이 돌아가는 대로 행동하고 국사를 제대로 담당하려고 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자못 뇌물을 받는다는 기롱도 있어 사람들이 이를 단점으로 여겼다. 향년 72세로서 다섯 명의 자식을 두었다. 하나는 공주(公主)에게 장가들었고, 하나는 명관(名官)이 되었으며, 나머지는 모두 음사(蔭仕)를 하였으므로, 조복(朝服)이 집에 가득하였다. 동생 정치화(鄭致和)와 더불어 번갈아 정승의 자리에 있었으므로 사람들이 이르기를 ‘복록(福祿)이 온 세상에 비할 바가 없다.’고 하였다.
○領中樞府事鄭太和卒。
【史臣曰: "太和字囿春。 才智有餘, 聰敏過人, 先事而慮, 未嘗僨敗。 居家有法度, 勑子弟勿尙紛華, 不交結朋黨, 出入黃扉二十五年, 亦無薰灼之勢焰, 然與世浮沈, 未嘗擔當國事。 且有頗通饋遺之誚, 人以此短之。 得年七十二, 有子五人。 一尙公主, 一爲名官, 餘皆蔭仕, 袍笏滿堂。 與弟致和, 迭居台鼎, 人謂福祿擧世無比。"】
【태백산사고본】 21책 21권 40장 B면【국편영인본】 37책 50면
【분류】역사-사학(史學)
10월 9일 을사
정원에 전교하였다.
"구릉(舊陵) 차지 내관(次知內官)이 지금 막 떠났으니, 천릉 도감 당상 한 사람과 일을 아는 낭청 한 사람이 비록 들어오지 않았지만 곧장 구릉으로 가도록 분부하고, 우승지도 떠나도록 하라."
10월 10일 병오
천릉 도감 당상 김휘(金徽)와 우승지 심재(沈梓)가 치계하기를,
"구릉을 철거해 보니 묘·인·축방(卯寅丑方)부터 미·오방(未午方)까지 습기가 있고, 기와 두 조각, 나무 여섯 조각이 있었으며 잡석(雜石)이 매우 많았습니다. 상석(裳石) 사이에는 벌레와 뱀이 다닌 흔적이 있었습니다."
하고, 이어 별단(別單)으로 아뢰기를,
"묘방(卯方)의 상석 아래에는 현저하게 물이 샌 흔적이 있어 유회(油灰)가 아직도 젖어 있고, 난간의 받침돌 아래에도 물자국이 있는데 기와 조각 두 개가 틈을 막고 있습니다. 묘·인간(卯寅間)의 상석 아래에는 빗물이 고였던 형상이 있고, 상석(裳石)과 지대(地臺)가 서로 접한 곳에는 회(灰)를 채웠는데 넓이는 두 치였고, 남은 회도 습기가 있었습니다. 인방(寅方) 상석 아래에는 청잡석(靑雜石)으로 채워져 막아 놓은 것이 매우 많았는데, 인(寅)부터 자·축간(子丑間)까지는 습기가 똑같았고 해·자간(亥子間)은 조금 말랐으며 해방(亥方)은 습기가 있어 인(寅)과 묘(卯)와 같았습니다. 술·해간(戌亥間)의 상석은 물기가 없었으나 청소석(靑小石)이 잔뜩 쌓여 거의 한 말이나 되었습니다. 술방(戌方) 상석 아래에는 나무 한 조각이 있었고, 유·술간(酉戌間)의 상석이 맞닿은 사이에는 청잡석(靑雜石)이 거의 서너 말이나 되었고, 또 나무 한 조각이 있었습니다. 유방(酉方) 상석 아래에는 큰 나무 한 조각이 있었고 또 잡석이 잔뜩 쌓여 있는데 흙으로 메꾸지 않았기 때문에, 그 사이가 텅 비어 벌레와 뱀이 다닌 흔적이 있었습니다. 신·유방(申酉方)에는 청소석(靑小石)이 잔뜩 쌓여 거의 한 말이나 되었고, 신방(申方) 상석 아래에는 나무 네 조각이 있었고 유회(油灰)에는 자못 습기가 있었습니다. 미·신간(未申間) 상석 아래에는 잡석이 거의 두 말이나 되었고, 묘(卯)부터 건(乾)까지는 회(灰)를 쌓고 지대(地臺)를 놓았으나 건(乾)부터 미(未)까지는 회를 쌓지 않고 지대를 놓았기 때문에 왼편에 벌어진 것이 심하였습니다. 해(亥)·자(子)·축(丑) 세 방향의 지대석(地臺石)이 서로 접한 곳에 구멍이 있었는데 깊이가 네 자, 너비는 두 자였습니다. 그 사이가 마르고 젖은 것에 대해서는 모두 헐어버린 뒤에 알 수 있었습니다. 대개 하지대(下地臺)와 정지대(正地臺)의 사이에는 돌을 깎아 오목하게 만들어 상석(裳石)을 끼워 넣었기 때문에 위아래가 지탱하여 물러나는 근심이 없었는데, 왼편은 전체 모두가 돌을 깍아 오목하게 만들지 않았기 때문에 상석이 쉽게 물러나 틈이 벌어지게 되었고 또 사면(四面)에는 모두 엄석(掩石)이 없었습니다."
하였다.
○丙午/遷陵都監堂上金徽、右承旨沈梓馳啓曰: "舊陵撤毁, 則自卯、寅、丑方, 至未、午、方, 有水濕之氣, 有瓦二片木六片, 雜石甚多。 裳石之間, 有蟲蛇往來之跡。" 仍以別單書啓曰:
10월 11일 정미
천릉 도감 당상 김휘(金徽), 우승지 심재(沈梓)가 별단(別單)으로 서계(書啓)하였다.
"인·묘방(寅卯方) 병풍석(屛風石)을 철거해 보니, 물자국이 아직 마르지 않았고 또 나무 한 조각이 있었습니다. 인정(引錠)이 물고 있던 정지대(正地臺)의 돌이 끌려서 파열되었는데 그 길이가 두 자나 되고, 축·인간(丑寅間) 정지대의 돌도 깨져 갈라졌는데 그 길이가 두 자나 되었으며, 두 돌 사이에는 청잡석(靑雜石)과 진흙이 많이 채워져 있었습니다. 자·축간(子丑間) 병풍석을 철거해 보니, 물자국은 한결같았고 두 돌이 서로 접한 곳에는 청잡석과 진흙이 채워져 있어 축·인간(丑寅間)과 같았습니다.
왼편의 병풍석을 철거해 보니, 다만 인정(引錠)이 물고 있던 정지대(正地臺)의 돌이 물러나 벌어져 틈이 생겼고 나머지는 흠이 있는 곳이 없었습니다. 자방(子方) 하지대(下地臺) 아래의 물자국은 다른 곳에 비해 현저하게 안쪽으로 흘러든 형상이 있었고, 가마솥을 엎어 놓은 형상으로 회(灰)를 쌓은 곳은 종횡으로 터지고 갈라져서 완전한 곳이 없었습니다. 능 위의 흙을 채운 곳은 건방(乾方)부터 손방(巽方)까지 가운데가 벌어져 있었고, 자·축간(子丑間)도 터져 갈라져서 ‘정(丁)’ 자 모양과 같았습니다. 건방(乾方)부터 오른편은 하지대(下地臺) 아래에 회를 쌓아 단단하였고, 왼편은 조금 회를 뿌린 흔적이 있었는데 단단하지 않았습니다. 왼편 지대석(地臺石) 아래의 널려진 잡석은 간간이 연기에 그을린 돌석(堗石)이 있었습니다."
○丁未/遷陵都監堂上金徽、右承旨沈梓, 以別單書啓曰:
상이 정원에 하교하였다.
"구릉(舊陵)의 능 위에 있는 석물(石物)을 이미 철거하고 살펴보았다. 그때의 도감(都監) 당상과 낭청의 죄를 법에 의하여 처벌하지 않을 수 없으니, 모두 해부(該府)에 명하여 즉시 잡아 가두도록 하라."
10월 12일 무신
행 판중추부사 송시열이 상소하기를,
"신은 이같은 종적(蹤跡)으로 성은(聖恩)을 입어, 외람되이 여러 신하들의 뒤를 따라, 망극한 슬픔을 조금이나마 펼 수 있었으니 지금 비록 죽더라도 한스러울 것이 전혀 없습니다. 생각건대, 구릉(舊陵)의 신혈(神穴)033) 이 매우 평안하였으니 이것은 비록 음양의 기운이 순조롭고 일백 신(神)이 상서(祥瑞)를 모은 소치이지만, 또한 어찌 성상의 효성이 돈독하고 지극하여 영응(靈應)이 저절로 이르러 그렇게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다만 생각하건대, 주자(朱子)는 부친의 무덤을 두 번 옮겼으나 산릉(山陵)034) 에 대해서는 경동(驚動)할까 염려된다는 경계를 하였으니, 제왕가(帝王家)의 사체가 범인(凡人)과 스스로 달라서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당초 능의 흙을 한 자쯤 파헤친 뒤에 무덤 안에 이상이 없음을 알았지만 일을 맡은 여러 신하들이 망극(罔極)한 사람들의 말을 두려워한 나머지 그대로 봉하자는 의논을 끝내 내놓지 못하였습니다. 신릉(新陵)이 길하다는 것은 옛부터 일컬어 온 바이지만 어찌 지극히 편안한 땅에 그대로 모시는 것만 하겠습니까. 신의 어리석은 의견은 이미 경자년035) 헌의(獻議)하던 날에 모두 말씀드렸지만 여러 대신들의 반대로 시행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한 몸의 위태로움이 나무 끝에 앉은 새보다 심한데다 또 국구(國舅)에게 중한 죄를 얻었기 때문에 넋을 잃고 몸이 떨려 감히 한 마디 말도 그 사이에서 낼 수 없게 되었으니, 신이 선왕을 저버린 죄는 만 번 죽어도 속죄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표석(表石) 한 조목에 대해서는 미안한 점이 있습니다. 전하께서는 간원에 내린 비답에서 이러한 말을 하지 않는 것은 국가에 복이 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는데, 국구가 아뢴 말은 곧 신을 배척하는 말이고, 표석에 관한 일도 그 중에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표석을 정지하고 쓰지 말라는 명은 듣지 못했으니, 이는 전하의 마음에 실은 이것을 그르다고 여기면서도 억지로 행하시는 것입니다. 아마도 ‘상사(喪事)에 성신(誠信)으로 하면 후회가 없다.’는 도리가 아닌 것 같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다시 조정의 신하들에게 물어 그 가부를 자세히 살펴보고 시행 여부를 결정하소서. 그래야만 사리에 맞고 명분도 바르게 될 것이니, 다시는 우물쭈물하고 구차하게 하여 사람들의 비방하는 말이 오지 않게 하였으면 합니다.
또 신은 성상의 뜻을 깨닫지 못할 점이 있습니다. 성상께서 신에게 전후로 위로하고 타이른 말씀이 지극히 간절하였습니다. 신은 성은을 머금고 감격하였습니다만 몸이 문드러지고 가루가 된다 해도 어떻게 보답하겠습니까. 그러나 성상의 의도는 신의 하는 일이 국가에 해가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간원에 회답한 비답이 이렇듯 엄하였던 것 같습니다. 성상의 뜻이 과연 이와 같다면 또한 마땅히 자세히 말씀하시고 분명하게 가르쳐서 신처럼 천성이 어리석고 사리에 어두운 자로 하여금 깨달아 스스로 처신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실로 하늘은 덮어주고 땅은 실어주는 것과 같은 마음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한편으로 신을 논핵하지 않는 것은 국가의 복이 아니라고 하시면서 한편으로는 신을 죄가 없는 사람처럼 여기고 있다는 것을 보여 신을 나오도록 하여 면유(面諭)하려고까지 하시니, 어리석은 신은 의혹이 더욱 심합니다.
신이 또 듣건대, 성명께서 김만중(金萬重)이 상신(相臣)을 공격하고 배척한 일은 믿는 데가 있어서 한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바깥에서 왁자지껄 전하기를, 만중이 믿는 사람은 곧 신이라고 합니다. 아, 만중이 비록 지극히 어리석다 하더라도 어찌 신의 종적(蹤跡)이 제 몸 하나 구하는데도 겨를이 없다는 것을 모른 채 오히려 신에게 기대하였습니까. 성교(聖敎)의 가리키는 바가 과연 신에게 있다면 성명께서 신의 정적(情跡)을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또한 만중의 사람됨을 살피지 못한 것입니다. 일전에 전하께서는 매양 군신(君臣) 사이는 서로 뜻이 통하여 잘 아는 것이 귀하다는 분부를 하였는데, 어찌 오늘날 밝은 성상의 알아주심을 입지 못하여 이 지경까지 이를 줄을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신은 다시 성상을 가까이 할 면목이 없습니다. 이 때문에 신이 머뭇거리며 끝내 감히 나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신은 신릉(新陵)에 곡을 하고 하직함에 슬픔은 끝이 없고, 영영 전하곁을 떠나게 되어 심사(心事)가 아득하므로 감히 한 편의 소를 올려 전하의 명을 어긴 죄를 기다립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재량하여 처리하소서. 또 제사를 지낼 때의 축사(祝詞)에 청나라의 연호(年號)를 사용하지 말도록 하소서."
하였다. 상이 답하기를,
"경의 상소를 살펴보고 나도 모르게 놀라고 의아하였다. 경이 선조(先朝)에서 받은 은혜는 보통 사람보다 훨씬 많았으므로 내 생각에는 선릉(先陵)에 대한 일에 경이 물불을 가리지 않을 줄 알았다. 그런데 오늘의 일은 경에게 바랬던 바에 크게 어긋났을 뿐만 아니다. 능 안에 빗물이 스며들어서 고여 있는 형상과 석물(石物)에 흠이 생긴 일은 경도 보고 들어서 잘 알 것이다. 현궁(玄宮)에 흠이 없는 것은 겉모양만 보고 알 수 있는 일이 아닌데, 어찌 그대로 봉하자는 의논을 용납하겠는가. 이 점이 나에게는 의혹되어 경의 뜻을 이해할 수 없다.
오늘날 천릉(遷陵)하는 일은 풍수설(風水說)에 현혹되어 하는 것이 아닌데, 경의 상소에서는 이로 말미암아 그렇게 하는 것처럼 여기는 내용이 있으니 더욱 놀랍고 의혹되어 경의 뜻을 이해할 수 없다.
간원에 회답한 비답은 최후상(崔後尙)에게 일의 체례를 가지고 책망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어찌 조금이라도 경을 논핵하지 않은 것을 그르다고 하는 뜻이 있었겠는가. 더구나 만중의 말은 무례함이 심하여 내가 놀라고 분하게 여겼다마는 지금 생각해 보아도 만중이 경을 믿고 하였다는 말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으니, 이것은 아마도 경에게 전하는 사람이 어떤 의도가 있어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니겠는가. 경의 상소의 내용은 모두 불평한 말이 아닌 것이 없고, 도리어 나의 말을 이토록 심하게 의심하였다. 이는 나의 성의가 경에게 믿음을 주지 못한 소치이므로 나는 부끄럽고 한스러울 뿐이다. 다시 무슨 말을 많이 하겠는가. 경은 양해하라."
하였다.
○戊申/行判中樞府事宋時烈上疏曰:
臣以此蹤跡, 得蒙 聖恩, 猥隨諸臣之後, 少伸窮天之痛, 今雖夕死, 萬無所恨矣。 惟是舊陵神穴, 極其安寧, 雖是二氣效順, 百神奏祥之致, 而亦豈非聖孝篤至, 靈應自臻而然耶? 第念朱子再遷父墳而至於山陵, 則有驚動之戒, 豈帝王家事體, 與凡人自別者耶? 當初啓土尺許之後, 已審〔隧〕 內之無故, 而任事諸臣, 恐懼於罔極之人言, 仍爲改封之議, 終不敢出焉。 新陵之吉, 雖自昔所稱, 而豈若仍安於至安之地哉? 臣之愚見, 巳竭於庚子獻議之日, 而遭被諸大臣防塞, 未蒙施行。 至於今日, 則蹤跡之危, 不翅集木, 而又獲重罪於國舅, 故魄奪身靑, 不敢出一言片辭於其間, 臣之孤負先王之罪, 萬死難贖矣。 抑臣於表石一款, 有所未安也。 殿下於諫院之批, 旣以如此不言, 謂非國家之福, 國舅之言, 卽斥臣之言, 而表石之事, 亦在其中矣。 然而尙未聞停止勿用之命, 是 殿下之心, 實以此爲非, 而强而行之也。 恐非誠信勿悔之道也。 伏乞聖明, 更詢於廷臣, 詳審其可否, 而決其行罷。 然後理得而名正矣, 幸望勿復依違苟且, 以來人言也。 抑臣又有所未諭於聖明之意也。 聖明於臣, 前後慰諭, 不翅懇惻。 臣之銜恩, 感激, 糜粉何報? 然竊恐聖意, 以臣之所爲, 有害於國者, 故其答諫院之批, 如此其嚴。 聖意果如此, 則亦當詳言明敎, 使愚迷之性, 有所開悟, 而使之自處。 是實天地覆燾之心也。 今則不然。 一邊以不論臣, 謂非國家之福, 而一邊以臣, 爲若無罪者然, 至欲以進臣而面諭焉, 愚臣之惑, 滋甚焉。 臣又竊聞, 聖明, 以金萬重之攻斥相臣, 有待而發, 外間喧傳以爲, 萬重所待者, 卽臣也。 噫! 萬重雖至愚, 豈不知臣之蹤跡, 自救不暇, 而猶有待於臣哉? 聖敎所指, 果在於臣, 則不惟聖明不諒臣之情跡, 而亦不察萬重之爲人也。 日前殿下, 每以君臣之間, 貴相知心爲敎矣。 豈料今日不蒙聖明之知, 乃至此耶? 臣更無顔面。 冒近天威, 此臣所以低佪前却, 終不敢進者也。 臣哭辭新陵, 哀隕〔罔〕 極, 永隔天陛, 心事茫然, 敢進一疏, 以待違命之罪。 伏乞聖明, 裁處焉。 又請於享祀祝詞, 勿用僞淸年號。 上答曰: "省覽卿疏, 不覺驚訝也。 卿受恩先朝, 〔夐〕 出尋常, 予以爲, 先陵之事, 則卿必不避水火矣。 今日之事, 不但大違所望於卿者。 陵內雨水滲漏停留之狀, 石物執頉之事, 卿聞見之熟矣。 玄宮無欠, 非外面可知, 何容改封之議耶? 此予所以疑惑, 而未曉卿意也。 今日遷陵之擧, 非惑於風水之說, 而卿疏有若由此而然, 尤爲驚惑, 未曉卿意也。 至於答諫院之批, 不過責後尙, 以體例間事而已。 有何一毫以不論卿爲非之意耶? 況萬重之言, 無狀甚矣, 予用駭憤、而到今思之, 待卿之說, 全未憶得, 無乃傳播於卿者, 有意而然耶? 卿之疏辭, 無非不平之語, 而反疑予言, 至此之極。 實出於予之誠意, 不能相信之致, 愧恨而已。 更何多誥? 卿其諒哉。"
【태백산사고본】 21책 21권 41장 B면【국편영인본】 37책 50면
【분류】정론-정론(政論) / 왕실-종사(宗社) /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
10월 13일 기유
이규령(李奎齡)을 우부승지로, 박세당(朴世堂)을 사간으로, 정중휘(鄭重徽)를 헌납으로, 정유악(鄭維岳)을 정언으로, 권두기(權斗紀)를 지평으로, 이합(李柙)을 응교로, 이훤(李藼)을 교리로, 조원기(趙遠期)를 수찬으로 삼았다.
상이 우의정 김수흥을 인견하고 이르기를,
"송 판부사(宋判府事)의 소 안에 ‘능의 흙을 한 자쯤 파헤친 뒤에 무덤 안에 이상이 없음을 알았지만, 일을 맡은 여러 신하들이 망극한 사람들의 말을 두려워하여 그대로 봉하자는 의논을 끝내 감히 내놓지 못하였다.’고 하였는데, 나는 총호사에게 묻고자 한다. 그 당시에 과연 이런 의논이 있었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신들은 이런 의논이 없었습니다. 설혹 현궁(玄宮)이 무사하다 하더라도 이 단계에 이르러 어찌 감히 그대로 봉하자는 의견이 있었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설령 광중(壙中)이 무사하더라도 능을 판 뒤에는 그대로 봉할 수 없다. 더구나 현궁을 열기도 전에 질척질척한 기운이 네 귀퉁이의 돌 밑에까지 이르렀다고 하는데, 어찌 그 속이 무사할 줄을 알아 주자(朱子)가 산릉(山陵)을 경계한 일을 인용하여 말할 수 있으며, 사람이 한 일이 이 지경인데 어찌 열어보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대례(大禮)가 무사히 지나갔는데도 이같은 말이 있으니 마음이 매우 편안치 못하다. 표석(表石) 한 조목에 대해서 내가 우물쭈물 구차하게 썼다고 한다만, 그 일을 행할 수 없었다면 내가 어찌 판부사의 말을 구차하게 따랐겠는가. 지난번 우상(右相)의 물음에 내 뜻을 다 말했었는데 판부사가 어찌 듣지 못했겠는가."
하니, 김수흥이 아뢰기를,
"이것은 필시 상의 뜻을 알지 못하여 이런 말을 한 것일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양주(楊州)·여주(驪州)는 특별히 넉넉하게 보살펴야 하겠다."
하니, 수흥이 그렇다고 하였다. 상이 금년 봄의 대동미(大同米)를 모두 감해주도록 명하였다. 수흥이 아뢰기를,
"죽산(竹山)·음죽(陰竹)·지평(砥平)·용인(龍仁)·양지(陽智) 등의 읍도 대동미 두 말을 감해주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수흥이 아뢰기를,
"적곡(糴穀)도 마땅히 법식을 정하여 거두어 들여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예전에 나누어 준 것은 다만 삼분의 일만 받고, 새로 나누어 준 것은 일정 기준에 의해 받아들여라."
하였다.
집의 이단석, 장령 유연이 아뢰기를,
"국가가 불행하여 연이어 흉년을 만나 지금 백성들의 목숨이 곧 끊어지게 되었습니다. 더욱이 경기의 여러 읍에 있어서는 또 천릉(遷陵)의 역사를 겪어 벌겋게 탄 어깨는 잠시도 쉬지 못했는데, 환곡을 갚으라는 명령을 재촉하여 경술·신해 2년간의 포흠(逋欠)을 일시에 납부하도록 독촉한다면 맨몸밖에 남지 않은 백성은 진실로 목숨을 부지하기 어렵습니다.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장점을 좇아 품의하여 처리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이미 의논하여 정하였다."
하였다.
10월 16일 임자
홍처량(洪處亮)을 대사헌으로, 유명현(柳命賢)을 정언으로, 이헌을 헌납으로, 정유악(鄭維岳)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성균관 진사 여필세(呂必世) 등 60인이 상소하여 송시열을 머물게 하도록 청하면서 시열을 위해 원통함을 호소하고 국구(國舅) 김우명이 어진이를 무고하였다고 한결같이 배척하였다. 그리고 민신(閔愼)을 위해 변명하면서 따져 신문하지 말도록 청하였다. 상이 답하기를,
"조정의 시비는 저절로 돌아갈 바가 있으니, 실로 너희들이 간여할 일이 아니다. 너희들은 물러가 학업을 닦으라."
하였다.
10월 19일 을묘
대마주(對馬州)의 차왜(差倭)가 아직도 부산관(釜山舘)036) 에 머물고 있으면서 관(舘)을 옮겨 달라고 강력하게 청하였으나 조정에서 허락하지 않았다. 차왜 등이, 청한 바를 굳게 막아버린 우리 조정의 서계(書契)를 보고는 성을 내고 펄쩍 뛰면서 서울에 올라가겠다고 큰소리를 쳤다. 행구(行具)를 준비해 달라고 간절히 청하면서 떠나려고 하는 기색이 있었는데도, 조정에서는 역시 금지하지 않고 하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차왜 등은 별 수 없다고 생각하고, 하루는 접위관(接慰官) 조사석(趙師錫)을 찾아보고 말하기를,
"비록 다대(多大)·초량(草梁) 등의 포(浦)에라도 옮기도록 허락해 주었으면 합니다."
하니, 사석이 이 말을 조정에 아뢰었다. 조정의 의논이 웅천(熊川)은 결코 허락할 수 없고 초량(草梁)은 허락해도 무방하다고 하였다. 상이 비로소 허락해 주라고 명하고 차왜로 하여금 스스로 다대(多大)·목장(牧場)·초량(草梁) 중 한 곳을 택하도록 하여 뒷말이 없도록 하였다. 차왜가 초량항(草梁項)으로 옮기기를 원하자 허락하였다.
10월 20일 병진
우의정 김수흥이 상차하여 면직을 청하고, 재주가 없고 병이 심하여 직무를 맡을 수 없는 상황을 진술하니, 상이 답하기를,
"경이 국가를 위해 부지런히 수고한 지 거의 반 년이 되었다. 천릉(遷陵)의 큰 역사는 이제 겨우 예(禮)를 끝냈는데, 불행히도 금년 농사가 또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무릇 백성이 부담할 역사를 의논해서 처리할 것이 매우 많다. 국가가 불행하여 연이어 사고(事故)가 많은데도 삼공(三公)의 인원수를 채우지 못한 지가 오래 되었다. 경만 홀로 공무를 보았는데 이때에 또 병을 핑계하고 들어가면 국가의 일은 어떻게 할 것인가. 모름지기 나의 지극한 뜻을 체득하여 빨리 나와서 공무를 보아 시국의 어려움을 구하라."
하고, 사관을 보내어 타일렀다.
교리 윤지선(尹趾善)·이유(李濡) 등이 면대를 청하여 아뢰기를,
"겨울에 천둥이 치는 변고가 또 어젯 밤에 일어났는데 아직 두려워하고 반성하는 거조가 있다는 말을 듣지 못했으니, 신은 답답함을 금할 수 없습니다. 경기 고을의 대흉년은 경술(庚戌)·신해(辛亥)년과 다름이 없고 또 천릉의 역사를 거치면서 민사(民事)가 이미 극한 지경에 이르렀으니, 백성을 구제하고 살리는 계책을 급히 강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지난번 경연에서 경기 고을의 구적(舊糴)은 삼분의 일만 받아들이라고 허락하셨는데, 신들의 생각으로는 만약 기한을 늦추어 받아들이지 않으면 백성들이 지탱하기 어렵다고 여깁니다."
하니, 상이 기한을 늦추어 받아들이라고 일렀다. 윤지선이 또 아뢰기를,
"금년 적곡(糴穀)은 이자를 면제해 주라는 분부가 있어서 백성들이 모두 덕스러운 뜻에 감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외방(外方)에는 이따금 이자까지 받아들이는 자도 있다고 합니다. 만일 호조에서 반포했는데도 수령이 조정의 뜻을 체득하지 않고 있다면 매우 해괴하고 놀라운 일입니다."
하니, 상이 자세히 조사하라고 하였다. 이유가 아뢰기를,
"요사이 여러 신하들이 벌을 받고 있는 것이 도를 지나쳐서 삼사(三司)가 간쟁하였으나, 전하의 마음을 돌리지 못하였습니다. 군신(君臣) 상하가 정의(情意)가 미덥지 못하니 국사의 우려할 만한 것이 이보다 더 큰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지난번 경연에서 상께서 ‘내가 선왕의 위엄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신하들도 선대 조정의 신하만 못하다.’는 분부가 있었습니다. 이것은 전하께서 시들고 약해진 습속을 제거하고자 하여 깨달은 바가 있어서 말한 것이니 이보다 더 다행한 일은 없습니다. 그러나 선대 조정에서는 죄있는 자에게는 죄를 주고, 등용할 만한 사람은 등용하였기 때문에 뭇 신하들이 모두들 일에 달려들어 공을 세우려고 하였습니다. 전하께서는 그렇지 않으니, 한 번 성상의 뜻에 거슬리면 대뜸 버리고 등용하지 않는가 하면 살인자와 장리(贓吏) 같은 죄가 중한 자의 경우에는 시일만 끌다가 끝내 법을 적용하여 처벌하지 않으니 죄가 있는 자를 어떻게 징계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장리의 경우에 만약 죄가 명백하지 않은데 급하게 법을 적용하면 원통함이 이보다 큰 것이 없다. 그러므로 사실을 조사하고자 했으나 끝내 자세한 것을 얻을 수 없었으므로 법을 적용받은 사람이 하나도 없는 것이다."
하였다. 이유가 아뢰기를,
"근래 궁금(宮禁)을 엄히 단속하지 않아 바깥 사람들이 궁궐 안을 출입하여 안의 말이 밖에 나가기까지 하였으니, 모름지기 엄히 막아서 금지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병조로 하여금 단단히 타일러 경계하도록 하였다.
10월 25일 신유
상이 날씨가 혹독하게 춥다고 하여 옷이 얇은 군사 등에게 해조로 하여금 유의(襦衣)를 나누어 주도록 하였다.
우의정 김수흥이 다시 상차하여 병을 진술하고 면직을 청하니, 상이 허락하지 않고 내의(內醫)를 보내어 병을 살펴보게 하였다.
개성부(開城府)에 천둥이 쳤고,전라도 담양(潭陽) 등 고을에 천둥이 치고 우박이 쏟아졌으며 무지개가 나타났다. 김제(金堤)·고부(古阜)·해남(海南)·정읍(井邑) 등 고을에 천둥이 쳤다.
10월 26일 임술
유성(流星)이 하늘 가운데의 엷게 낀 구름 사이에서 나왔는데, 색깔은 희고 빛이 땅을 비추었다.
10월 27일 계해
우의정 김수흥이 겨울에 천둥이 치는 변고로 인하여 상차하여 송시열(宋時烈)·이유태(李惟泰) 등에게 예를 두텁게 하고 견책받은 여러 신하들을 석방하도록 청하였으나, 상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10월 28일 갑자
밤에 번개가 쳤다.
10월 28일 갑자
이혜(李嵇)를 대사간으로, 신정(申晸)을 대사성으로, 최후상(崔後尙)을 부수찬으로, 맹주서(孟胄瑞)를 충청 감사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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