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현종실록22권, 현종 15년 1674년 1월

싸라리리 2025. 12. 18.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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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일 병인

정언 한태동(韓泰東)이 아뢰기를,
"김휘(金徽)처럼 음험 방자한 사람에게 단지 파직하는 벌로 끝내고 마니 시비가 정해졌다고 할 수 없습니다. 보잘것없는 신으로 말미암아 성명께서 대각을 대하시는 체통을 손상시켰으니, 신 또한 무슨 마음으로 성스러운 시대의 대각 인물이라 여기겠습니까. 체차해 주소서."

 

 

1월 2일 정묘

상이 민신(閔愼)의 일에 대해 사실 전말을 조사해 올린 공사 문건을 형조에 내리면서 이르기를,
"아비와 자식은 인륜 중에서도 큰 인륜이다. 만일 한 번 어긋나게 되면 사람이 사람 구실을 할 수 있겠는가. 민세익(閔世翼)이 만일 완전히 실성하지 않았는데 그의 아들이 대신해서 할아버지 복을 입었다면, 아무리 조문객의 지시에 못이겨 그렇게 하였다 하더라도 민신이 어떻게 그 죄를 면할 수 있겠는가. 이 조사 문건은 세익을 추고 문책하지 않아 관례에 크게 어긋날 뿐 아니라 모호하기가 짝이 없어 매우 터무니없다. 다시 자세히 조사하여 아뢰라."
하였다. 처음에 교관(敎官) 민업(閔嶪)이 죽었는데 그의 아들 세익이 미친 병이 있었다. 전 장령 박세채(朴世采)가 ‘아들이 몹쓸 병이 들었으면 손자가 아버지를 대신해서 할아버지 복을 입어야 한다.’ 하니, 그의 집에서 따랐고, 민정중(閔鼎重)·송시열(宋時烈)도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자 사람들이 매우 놀라면서 민신은 살아 있는 자기 아비를 죽은 것으로 취급한 셈이라고 하였다. 부원군 김우명(金佑明)이 입시하였을 때 이 일을 아뢰자, 상이 이르기를,
"이는 인륜의 변고 중에서도 큰 변고이다. 어찌 이 사람으로 하여금 도성 안에 살게 할 수 있겠는가."
하고, 상을 치른 자초지종을 조사해 밝히라고 명하였다. 이에 박세채는 형조에서 오래도록 명을 기다렸으나 처결이 내리지 않았고, 송시열도 교외에 있으면서 도성으로 들어오지 못하였다. 우의정 김수흥(金壽興)이 아뢰기를,
"변칙적인 의례에 대해 강론해 묻는 것은 사대부 집안에서 흔히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지금 민신의 일로 인해 시열이 불안해 하고 있으며, 세채 역시 유일(遺逸)로 뽑혀 등용된 사람인데 여러 달 동안이나 명을 기다리고 있으니 보고 듣기에 불미스럽습니다."

 

1월 3일 무진

남용익(南龍翼)을 대사헌으로, 어진익(魚震翼)을 사간으로, 이하진(李夏鎭)을 장령으로, 권적(權迪)을 지평으로, 이무(李堥)를 헌납으로, 이인환(李寅煥)을 정언으로 삼았다. 그리고 우의정 김수흥이 어영 도제조(御營都提調)를 겸임하게 하고 숭선군(崇善君) 이징(李澂)이 사옹 도제조(司饔都提調)를 겸임하게 하였다. 이조가 처음에 대신으로 의망하자, 상이 이르기를,
"사옹 도제조를 대신으로 의차하는 것은 법규로 정해진 일이 아닌데, 무슨 이유로 또 대신을 의망에 넣었는가?"

 

상이 흥정당(興政堂)에서 대신 및 비국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우상 김수흥이 아뢰기를,
"선재 어사(船材御史)에 대하여 대간의 계사로 인해 품의해 처리하라는 분부가 계셨습니다. 조정에서 내린 이 조치는 의도가 있었고 또 머물러 있으면서 할 일도 없습니다. 어찌 대간이 아뢴 내용처럼 폐단을 끼치기야 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 그전에 결정한 대로 보내야 할 것이다."
하였는데, 그 뒤에 대간이 다시 계사를 올려 간쟁해 마지않는데다가 농사철도 바싹 다가와서 보내지 못하였다. 김수흥이 또 아뢰기를,
"변방 수령을 문관으로 보낼 경우 으레 대간이나 시종을 지냈던 사람을 써왔기 때문에 더러 적합한 인재가 있어도 이 관례에 구애되어 의망하지 못한 적이 있었습니다. 앞으로는 문신 가운데 목사의 추천을 받은 자도 모두 의망에 넣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1월 4일 기사

경상 감사 이관징(李觀徵)이 치계하였는데 그 대략에,
"모든 군사 및 각사(各司)의 노비와 장인들 가운데 신해년 이전에 죽은 자에게는 신역을 전부 면제해 주라고 조정에서 분부한 바가 있었습니다. 다만 이 무리들이 일가붙이가 없어서 입안(立案)을 주지 못한 자가 있는가 하면 일가붙이가 있다 하더라도 사방으로 흩어져 즉시 알리지 않음으로 인해 입안을 주지 못한 자도 있는데, 지금에 와서는 시체를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만약 사목을 준수하여 반드시 시체를 확인한 다음에 사망 확인 입안을 줄 경우 인족(隣族)에게 대신 징수하는 폐단이 그칠 때가 없을 것이니 변통하는 방도가 없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러니 즉시 각 고을 수령으로 하여금 명확히 조사하여 사망으로 분명히 확인된 자에게는 시체 확인을 할 수 없더라도 사망 확인 입안을 주게 한다면 비록 이번에 전부 면제해 주는 은혜는 입지 못하더라도 뒷날 베를 징수하는 폐단은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신해년부터 계축년까지 도망갔거나 죽은 자의 각종 신역에 대해서는 이미 깨끗이 면제받았습니다만, 갑인년 정월 이후 방군 번포(防軍番布)에 대해 만일 변통하지 않을 경우 사세상 인족에게 베를 징수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삭방군(朔防軍)에게 배당할 일정한 수량이 있는데 다른 데서 보충해 지급할 길이 없으니 매우 난처한 일입니다."
하니, 비국에 계하하였다. 김수흥이 탑전에서 아뢰기를,
"사망 확인 입안을 지급하라고 허락한다면 허실(虛實)이 뒤섞이게 되어 허위 사실을 막기 어려울 것이고, 허락하지 않을 경우 인족이 해를 입는 것은 정말 감사가 말한 바와 같습니다."
하였다. 병조 판서 김만기(金萬基)가 아뢰기를,
"도망갔거나 죽은 군사에 대해 타인으로 대신 정하라고 허락한다면 그 폐단을 막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하자, 김수흥이 아뢰기를,
"삭방군에게 배당할 것은 한 명이라도 빠져서는 안 되는데, 조정에서 매양 대신 지급하기도 어렵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사망한 자들은 다시 조사해 변통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상이 승지에게 이르기를,
"주서(注書)가 《일기(日記)》를 편수하지 않는 폐단이 요즘 들어 더욱 심하다. 앞으로는 실주서(實注書)나 가주서(假注書) 할 것 없이 《일기》를 편수하지 않는 자에게는 6품의 승진을 허락하지 말고 외직의 임명도 허락하지 말며, 이미 6품에 승진된 자에게도 거두어 서용하지 말 것을 승전(承傳)을 받들어 시행하게 하라."
하였다. 【대개 상이 정원에 명하여 모월 모일의 《일기》를 가져오라고 한 적이 있었는데, 미처 수정하지 못했다고 대답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분부를 하였다.】  상이 또 이르기를,
"시정기(時政記)를 수정하지 않은 한림(翰林)에 대해서도 이와 같이 해야 할 것이다."
하니, 김수흥이 아뢰기를,
"이 일은 이미 승전이 있었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이미 승전이 있었으면 신익상(申翼相)이 어떻게 6품으로 승진되었단 말인가. 정원은 상고하여 아뢰라."
하였다. 정원이, 익상이 승서(陞叙)로 인하여 6품으로 승진한 사유를 상고하여 아뢰자, 상이 이르기를,
"승전을 이처럼 분명하게 받들었으면 비록 승서하라는 명이 있었더라도 해조에서는 여쭈어 본 다음에 거행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관례만을 따라 승진시켰으니 매우 부당하다. 해당 부서의 당상과 낭청을 먼저 추고하고, 익상은 6품을 바르게 고쳐라."

 

1월 5일 경오

상이 정원에 하교하였다.

 

1월 6일 신미

동부승지 이단석(李端錫)이 아뢰기를,
"사기 수정을 끝마치지 못한 채 바로 6품으로 나간 사관은 신익상 한 사람뿐만이 아닙니다. 이조 참의 신정(申晸), 정랑 이훤(李藼), 수찬 이유(李濡)도 모두 미처 수정하지 못하고 6품으로 나갔는데, 익상의 품계만 개정한다면 벌을 사용하는 도리가 고르지 못할 듯합니다. 그리고 익상이 일을 말한 지 얼마 안 되어 갑자기 이러한 조치를 당하면 듣고 본 자들이 의혹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폐단이 있을까 봐서 그런 것이지 다른 뜻은 없다. 네 사람을 다 개정할 수는 없으니, 모두 현직을 해임하고 서반에도 보내지 말되, 수정이 끝날 때를 기다려 서용해야 할 것이다."

 

1월 7일 임신


 

 

 

1월 9일 갑술

용강현(龍岡縣)에 적통제(赤筒堤)가 있는데 백성의 논 수천 두락을 물댈 수 있었다. 그런데 숙휘 공주(淑徽公主)의 집에서 떼어받아 적통제를 헐고 전답을 만들려고 하자, 관찰사가 아뢰었다. 이 일을 해조에 회부하니, 해조가 복계하기를,
"예로부터 방죽을 축조한 것은 본디 백성에게 이익을 주기 위해 한 것이므로 공주의 집에 떼어줄 수 없습니다. 파하게 하소서."

 

1월 11일 병자


 

1월 12일 정축


 

1월 15일 경진


 

영중추부사 송시열(宋時烈)이 상소하기를,
"신은 지은 죄가 무거우므로 입을 다물고 부끄러워하다가 죽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어질고 자애하신 상께서 이미 성심을 펴시어 하찮은 신을 깨우쳐 주셨으니 신이 어떻게 감히 끝끝내 침묵만 지키어 우리 성스런 상의 덕을 저버릴 수 있겠습니까.
대개 구릉(舊陵)의 변고는 경자년부터 생긴 것인데, 훼손된 데만 수리하여 14년이란 오랜 세월에 이른 것은, 외면은 이와 같지만 안의 석회는 단단하여 전혀 염려할 것이 없다고 여기어 그런 것이 아니었겠습니까. 주자(朱子)가 석회의 효능에 대하여 논하기를 ‘해가 오래될수록 응결하여 쇠나 돌처럼 된다.’고 하였습니다. 대체로 쇠나 돌처럼 된다면 틈으로 새는 것쯤이야 걱정할 것이 뭐가 있겠느냐고 여기었는데, 한 자 남짓 파헤쳐 보니 단단하고 완고한 것이 과연 주자의 말과 같았습니다. 그런데도 일을 중지하고 상께 여쭈어 보지 않았던 것은 일을 담당한 신하들의 의도가 필시 있었을 것입니다만, 보잘것없는 신 역시 남의 말이 두려워서 팔장을 끼고 묵묵히 보고만 있었으니, 신의 죄가 도리어 크지 않겠습니까.
아, 전하께서 이미 재궁(梓宮)001)  에 침해된 말을 하였다고 신하들을 꾸짖으셨습니다만 신은 참으로 성상의 효성이 여느 사람보다 뛰어났기 때문에 엄숙 공경한 마음이 어디에나 간절하여 그런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신 역시 능을 팔 때의 상황을 그대로 말씀드리지 못하겠습니다. 다만 일찍이 정자(程子)가 소릉(昭陵)에 대해 논한 상소를 보니 ‘인종(仁宗)의 유골과 유해로 하여금 큰 돌 밑에서 부서지게 한다.’고 하였습니다. 정자는 대현(大賢)이므로 임금을 공경히 대해야 한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을 것인데도 이렇게 말한 것은 어쩌면 신하의 애타는 마음을 차마 제대로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신 역시 그때 애탔던 마음으로 대략 한두 가지 일을 진술하여 그전에 올렸던 상소에서 자신도 모르게 기휘(忌諱)를 범하게 된 이유를 드러내야 하겠습니다.
대개 9월 29일에 신이 지난 일로 마음이 불안하여 능의 일을 시작할 때엔 감히 참석하지 못하였는데, 그날 저녁 무렵에 이르러 측근의 신하가 상의 뜻을 전해 왔기 때문에 다음날 새벽에 염치를 무릅쓰고 능 앞에 이르러 급히 총호사(摠護使) 김수흥(金壽興)에게 묻기를 ‘어제 일을 시작할 때 흙 색깔이 어떠하던가?’ 하니, 김수흥이 말하기를 ‘상하석(裳下石)의 틈이 있는 곳에 물이 흘렀던 흔적이 있었으나 한 자 남짓 파헤쳐 보니 건조하고 단단하였다.’ 하였습니다. 신이 이내 들어가 보니 바야흐로 퇴광(退壙)을 파헤치고 있었기 때문에 훈김처럼 나오는 기운만 보였습니다. 이어 퇴광을 철거한 뒤에 다시 일꾼을 불러 현궁(玄宮)을 향해 일을 시작했는데, 사용했던 석회가 매우 단단하게 굳어서 괭이가 부딪치면 때로 불꽃이 튀겼습니다. 그때에 신은 마음이 철썩 내려앉고 아파서 실로 가슴과 배에 괭이를 내려치는 듯하였습니다. 만일 전하께서 친히 지켜 보았다면 어떻게 지휘하셨을지 모르겠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어질고 밝은 상께서는 굽어 양찰하시어 위에 진술한 구릉의 사건에 대해 만일 사실과 어긋나는 것이 다시 있으면 거듭 조사해서 나라의 형법을 밝히소서."

 

1월 17일 임오

상이 정원에 하교하였다.

 

 

 

상이 여주(驪州)에 가 영릉(寧陵)002)  을 참배하려고 하자, 우상 김수흥이 아뢰기를,
"능을 참배한 뒤에 조종조의 고사에 따라 여주에서 과거를 설치할 일에 대해서 그전에 이미 아뢰었습니다만, 문과와 무과의 합격자 발표 시간이 같지 않으므로 반드시 먼저 여쭈어 정해 놓아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중종 조에 여주에서 과거를 설치할 때의 모든 절목과 당시 과거보는 사람에 있어서 본 고을 사람만 허용하였는지 혹은 일도 전체의 사람에게 허용하였는지의 여부에 대해 춘추관으로 하여금 실록을 상고해낸 다음 여쭈어 정하게 하라."

 

1월 21일 병술

상이 흥정당에 나아가 뜸을 떴다. 우상 김수흥이 아뢰기를,
"장차 능에 거둥하실 때에 남한 산성에서 유숙해야 되겠는데, 성안에 온조왕의 사당이 있으니 제사를 지내셔야 할 것 같고, 험천(險川)과 쌍령(雙嶺) 모두가 병자년에 전쟁한 곳이니 거가(車駕)가 지날 때에 또한 제사를 지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겠다. 유사에게 말하라."

 

1월 22일 정해


 

1월 23일 무자

상이 뜸을 떴다. 병조 판서 김만기가 입시하여 아뢰기를,
"거둥하실 때 거가를 따라갈 병사의 숫자를 미리 정해 놓아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런 농사철을 당해 경기 고을의 군사를 징발한다면 폐단이 있을 것이니, 어영군 및 훈국(訓局)의 별대(別隊)만 수행하게 하고 금군(禁軍)의 수도 3백 50명이 넘지 않게 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우상 김수흥이 아뢰기를,
"수라 찬거리도 미리 경기 고을에 나누어 배정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본도에선 토산품만 진상하게 하되 열 가지를 넘지 않도록 하고 선혜청(宣惠廳)에서 물품에 대한 값을 계산해 주어야 할 것이다."

 

 

 

1월 24일 기축


 

1월 25일 경인

우상 김수흥이 아뢰기를,
"통제사의 재직 기한을 1년으로 개정하였던 것은 대개 풍토병 때문이었습니다. 신이 이완(李浣)의 말을 들어 보니, 통영이 요즘 와서 매우 피폐해지고 있다 하였습니다. 1년 만에 교체하면 수습할 겨를이 없을 뿐만 아니라 신임자와 구임자를 맞이하고 보내는 데 따른 폐단 또한 적지 않습니다. 그러니 부임자 중 병이 심한 자에 있어서는 임기가 차지 않았다 하더라도 임시 변통해도 되겠습니다만, 지금 통제사로 있는 노정(盧錠)은 현재 병이 없으니 그대로 맡게 하고 앞으로는 통제사의 재직 기한을 2년으로 정하는 게 어떠하겠습니까?"

 

 

 

 

 

1월 26일 신묘


 

 

 

1월 29일 갑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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