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현종실록21권, 현종 14년 1673년 11월

싸라리리 2025. 12. 17. 1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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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일 병인

조형(趙珩)을 겸 판의금부사로, 박순(朴純)을 정언으로 삼았다.

 

11월 2일 정묘

의금부가 정치화(鄭致和)에게 태사(太社)의 구단(丘壇)을 훼손한 법률을 적용하니, 상이 재결하였다.
"이같이 막중한 죄는 비율(比律)037)  하여 조단(照斷)할 수 없는 것은 분명하다. 산릉(山陵)의 역사를 감독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책임인데, 좌우의 부석(浮石)과 석물(石物) 및 지정(地正)038)   등의 일에 있어서 제도가 이같이 다르단 말인가. 그런데 당상(堂上)의 신분으로 한결같이 살펴보고 검사하지 않아서 오늘날 천릉(遷陵)의 일이 있게 되었으니, 국법으로 논한다면 어찌 죽음을 면할 수 있겠는가. 다만 치화는 왕릉을 봉축(封築)하는 일을 마치기 전에 병조의 일이 많았기 때문에 곧바로 먼저 들어왔으니, 이 점을 참작하여 죄를 결정하지 않을 수 없다. 사형을 감하여 안치(安置)하라."

 

금부에 갇혀 있는, 죄수 신명규(申命圭)·이정기(李鼎基)의 공사(供辭)에 대해서, 상이 재결하였다.
"산릉의 역사를 감독하는 일은 매우 중요한 임무인데, 그것을 맡은 신분으로 있으면서 공장(工匠)의 손에 맡겼을 뿐만 아니라, 수고로움을 꺼려하여 좌우의 석역(石役)이 정밀한지 아니한지, 지정(地正)이 굳은지 아니한지를 돌아보지 않고 다만 빨리 일을 끝마치는 계획을 취하였다. 이것을 차마 할 수 있다면 무엇을 차마 하지 못하겠는가. 국법으로 논하자면 그 죄는 죽음으로도 용납할 수 없으니 신명규·이정기를 모두 일죄(一罪)039)  로 논죄하여 처단하라."

 

좌승지 심재(沈梓), 우승지 정석(鄭晳), 동부승지 윤심(尹深), 부교리 정유악(鄭維岳) 등이 면대를 청하여 아뢰기를,
"삼가 금부의 초기(草記)에 대한 비답을 보니, 정치화를 ‘감사 안치(減死安置)’하라고 재결하였습니다. 신들은 삼가 변변치 못하게 품고 있는 생각이 있어 감히 이렇게 진달합니다. 치화는 기해년에 산릉 도감 당상으로 있다가 곧 병조 판서에 임명되었습니다. 그의 직무가 긴요하고 중대하여 왕래하며 역사를 보살폈기 때문에 다만 흙으로 땅을 메우는 일만 주관하였을 뿐, 석물(石物)을 배치하여 늘어놓는 일은 감독하지 않았습니다. 이번 천릉(遷陵)하게 된 것은 석역(石役)을 조심성있게 하지 않은 것에 연유하였고 보면 치화를 감죄(勘罪)한 것이 너무 무겁지 않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병조 판서에 임명된 날짜와 반월형(半月形)으로 능을 봉분한 날짜를 정원에서 상고하여 아뢰라."
하였다. 심재 등이 또 아뢰기를,
"신명규(申命圭) 등이 감독을 신중하게 하지 않았으니 그 죄가 실로 무거우나, 그 실정은 일부러 범한 것이 아닙니다. 마땅히 정법(情法)을 참작하여 거기에 해당하는 법률을 적용해야 하니, 사형으로 논단(論斷)하는 것은 너무 지나치지 않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만약 일부러 죄를 범했다면 마땅히 종사(宗社)를 훼손하려고 꾀한 법률로 논단해야 한다. 이미 장사(匠事)의 감독을 맡아 놓고는 전적으로 공인(工人)의 손에 맡겨둔 채 몸소 감독하지 않았으니 그 실정이 비록 고의로 범한 것은 아니지만 그 죄는 죽음으로도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
하였다. 심재 등이 물러나와 《정원일기(政院日記)》를 상고해 보니, 산릉의 석물(石物)을 배치하여 늘어 놓은 날에 마침 도목정(都目政)이 있었는데, 치화가 병조 판서로 나와 참석하였다. 심재 등이 곧 아뢰니 상이 정치화의 죄 등급을 감하여 아산현(牙山縣)에 유배시키도록 명하였다.

 

11월 3일 무진

금부가 아뢰기를,
"방금 삼가 신명규·이정기 등을 사형으로 논단하라는 분부를 받고 신들은 놀라움과 두려움을 매우 금할 수 없습니다. 명규 등은 석역(石役)을 감독하는 벼슬에 있던 몸으로서 정밀하게 다스리지 못하여 이 지경까지 이르렀으니 그 죄는 진실로 큽니다. 그러나 생각건대, 무릇 사람이 지은 죄가 혹은 의도적인 것도 있고, 혹은 무의식적인 것도 있습니다. 의도적으로 지은 죄는 비록 작더라도 용서할 수 없지만, 무의식 중에 지은 죄는 비록 크더라도 용서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성인께서 호종(怙終)040)  과 생재(眚災)041)  를 분별하여 죄를 주는 것입니다. 지금 명규 등의 지은 죄가 비록 중하더라도 정법(情法)으로써 참작해 볼 때 사형으로 논단하는 것은 결코 법에 맞지 않습니다.
정치화의 경우에 있어서도 비록 비율(比律)이라고 말하지만 실상 가볍게 처벌한다는 뜻과 어긋남이 없습니다. 그런데 법을 벗어나 죄를 심리 처단하고 사형을 감하여 안치하였으니 이는 형장(刑章)의 합당함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장차 뒷날의 폐단에 관계됩니다. 신들은 외람되이 죄를 의논하는 지위에 있으니 법을 집행하는 것 이외는 전하의 뜻을 이어받을 수 없어, 황공하게도 감히 아룁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이 초기(草記)를 보니 너무 놀랍고 해괴하다. 만약 해당 법률보다 더 무겁게 적용했다면 법을 집행하는 신하들이 마땅히 간쟁했을 것이니 옛 사람에게 구해 보아도 또한 그러한 자가 있었다. 지금 명규 등의 죄에 해당되는 법률이 없어서 죄를 참작하여 법령을 정하였으니 이는 바로 관사에서 받은 임금의 교명과 같은 유이다. 유사(有司)가 어찌 감히 그 사이에 간여할 수 있겠는가. 고사(古事)로써 따져보아도 결코 이와 같이 해서는 안 된다. 당해 당상을 무겁게 추고하라."
하였다.

 

집의 이단석, 장령 유연이 아뢰기를,
"옥사를 판결하는 방법은 오직 실정을 캐내어 그 죄를 정하는 데 있습니다. 지금 신명규·이정기 등이 범한 바는 산릉에 관계된 일이므로 그 죄를 진실로 경미하게 의논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명규 등도 사람인데 어찌 산릉의 역사를 감독하는 것이 막중 막대한 일임을 모르고, 수고롭고 고달픈 것을 꺼려하여 소홀히 한 바가 있어서 그렇게 된 것이겠습니까. 만약 정법(情法)의 여하를 구명하지 않고 갑자기 사형으로 논단하다면 이 어찌 생재(眚災)를 분별하여 형장(刑章)을 신중히 쓰는 도리이겠습니까.
우리 국가는 인후(仁厚)한 정신으로 나라를 세웠기 때문에 가볍게 사형으로써 사람을 처단한 적이 없었습니다. 희릉(禧陵)042)  을 옮길 때와 효릉(孝陵)043)  의 석물(石物)이 벌어진 변고가 있었을 때에도 감독한 신하들의 죄는 귀양보내는 데 그쳤으며 큰 형벌을 가했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이게 어찌 성상께서 깊이 생각하고 불쌍하게 여겨 용서해 줄 근거가 아니겠습니까. 신명규 등을 사형으로 논단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고 이르기를,
"명규 등의 일을 생재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만약 산릉의 변고를 고의적으로 꾀했다는 것으로 논하였다고 한다면 너희들의 말이 옳다. 오늘의 일은 3백 년 이래로 없었던 일인데, 어떻게 희릉(禧陵)과 효릉(孝陵)의 일을 끌어다 비교할 수 있는가. 명규 등이 만일 조금이라도 공경하고 삼가하며 정성을 다하는 뜻이 있었다면, 열두 방향을 좌우로 나누어 석물(石物)과 지정(地正)의 제도를 이처럼 현격히 다르게 해 놓고도 조금도 놀라지 않는단 말인가. 그 죄를 논한다면 어찌 죽음을 면할 수 있겠는가. 도로 거두라는 청은 나도 모르게 한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하였다.

 

사간 조원기(趙遠期)가 아뢰기를,
"신명규·이정기 등은 이미 감독하는 반열에 있었으니 진실로 마땅히 힘을 다하고 정성을 바쳐 털끝만큼이라도 미진한 점이 없도록 했어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 전혀 그렇게 되어 있지 않아 천릉(遷陵)의 일이 있기까지 하였으니, 분수와 대의로 헤아려 보면 만 번 죽어도 할 말이 없습니다. 다만 생각건대, 명규 등도 사람의 마음을 갖고 있는데 어찌 감히 수고로움을 꺼려하여 차마 대충 끝내려는 계책을 가졌기야 했겠습니까. 대개 기일이 촉박하고 공역(工役)이 급하여 상세히 검사하지 못하고 밤낮으로 살피지 못하여, 이런 것들이 이리 얼키고 저리 얼켜서 스스로 뜻밖의 죄에 빠진 줄도 몰랐을 것입니다. 이른바 그 형적을 따져보면 죄를 피할 바가 없으나 그 실정을 캐보면 이치상 용서할 만한 점이 있습니다. 지금 대신 이하 삼사(三司)의 신하들이 교대로 간쟁하지 않음이 없으니, 이 어찌 명규·정기를 위하여 아끼고 보호하는 바가 있어서 그런 것이겠습니까. 다만 죄가 법에 걸맞지 않아서 조종(祖宗)의 어질고 두터운 은택을 어기고 성상의 살리기를 좋아하는 덕에 누가 되기 때문입니다. 신명규 등을 사형으로 논단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고 이르기를,
"아, 국가의 어질고 두터운 은택과 선왕(先王)을 잊지 못하는 뜻으로 말하건대, 오늘날 여러 신하 중에 선릉(先陵)의 역사를 감독하는 자가 어찌 이처럼 보잘것이 없단 말인가. 털끝만큼도 공경하고 삼가하며 정성을 다하는 뜻이 없을 뿐만 아니라, 좌우의 석물(石物)과 지정(地正) 등의 역사에 있어서 조금도 뜻을 두지 않고 오직 빨리 끝내려고만 하였다. 일기(日期)와 공역(工役)은 원래 정해진 기한의 규례가 없으니, 그 마음의 소재를 어찌 속여서 숨길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감독했던 사람이 어찌 죽음을 면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우의정 김수흥도 상차하여 사형은 너무 중하다고 힘써 말하니, 상이 답하기를,
"경의 뜻은 다만 그가 죽는 것을 불쌍히 여겨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내가 시험삼아 말하겠다. 산릉(山陵)은 이 얼마나 중요한 역사이며, 낭청(郞廳)의 감조관(監造官)은 이 얼마나 낮은 관원인가. 낮은 관원으로서 막중한 역사를 감독하면서도 조금도 뜻을 두지 않아 왼편 여섯 방향이 한 곳도 견고하게 힘쓴 일이 없었다. 아, 필부라도 제 부모를 장사지내는 데는 반드시 견고하고 또 정밀하게 하고자 할 것이니 인심(人心)을 가진 자라면 모두 그렇지 않은 이가 없을 것이다. 더구나 신하로서 임금을 장사지내는 데에 도리어 필부만도 못하게 하였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도리이니, 국조(國朝) 3백 년 이래로 일찍이 없었던 큰 변고이다. 정해진 법이 없다고 해서 어찌 구차스럽게 비율(比律)을 따라서 쓰겠는가. 혹 한때의 수교(受敎)를 인하여 준행(遵行)할 것으로 삼는다면 오늘은 바로 조종(祖宗)을 본받고 후세를 가르쳐야 할 때이니, 결코 사대부라고 해서 용서할 수 없다. 정치화에 관한 일은 장차 조사한 것을 보아 처치하겠다."
하였다. 양사(兩司)가 한 해가 넘도록 논계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그 뒤에 가뭄으로 인하여 죄수들 중에 억울한 자가 있는가의 여부를 살펴서, 명규 등을 사형을 감하여 제주(濟州)에 귀양보내었다.
삼가 살펴보건대, 명규 등은 직무가 장인(匠人)들을 감독하여 인산(因山)044)  에서 역사를 감독하는 데 있는데도 최선을 다할 생각은 하지 않고 감히 대충 끝내려는 계책을 내었으니 그 죄를 이루 다 꾸짖을 수 있겠는가. 좌우의 석역(石役) 제도는 의당 똑같아야 할 것인데 명규가 오른쪽의 제도를 쓰지 않고 움푹 패인 곳을 깍아버려 서로 유지하지 못하고 무너지게 했으니, 이게 어찌 고의가 없이 망령되이 하여 그런 것이겠는가. 진실로 공경하고 조심하지 않은 소치에 연유한 것이니 사형으로써 다스리는 것이 법률에 합당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도 삼사(三司)와 정원(政院)이 번갈아 글을 올려 간쟁하니, 그 가려서 보호하고 속여 꾸며대는 형상은 분명하여 덮을 수 없다. 수흥(壽興)은 대신(大臣)의 반열에 있는 신분으로서 또한 상차하여 그들을 변명하여 구해 내어 끝내 용서할 수 없는 죄를 귀양보내는 정도로 그치게 하였다. 조정의 기강이 무너져 이 지경까지 이르렀으니 또한 통탄스럽지 아니한가.
○司諫趙遠期啓曰: "申命圭、李鼎基等, 旣在監董之列, 固當竭力盡誠, 俾無一毫之未盡。 而今大不然, 至有遷陵之擧, 揆以分義, 萬死無辭。 而但念命圭等, 亦有人心, 豈敢憚其勞苦, 忍萌苟完之計哉? 蓋其迫於期日, 急於工役, 不能詳細着檢, 不能晝夜致察, 因緣轉輾, 不知自陷於不測之誅, 所謂論其迹, 則罪無所逃, 原其情, 則理有可恕者也。 卽今大臣以下, 三司之臣, 無不交口爭執, 是豈爲命圭、鼎基, 有所愛護而然哉? 只以罪不當律, 而違祖宗仁厚之澤, 累 聖上好生之德故也。 請還收申命圭等, 一罪論斷之命。" 上不從曰: "噫! 以國家仁厚之澤, 先王不忘之義, 言之, 今日諸臣, 監董先陵之役者, 豈可如是無狀? 不但無一毫敬謹盡誠之意而已, 左右石物、地正等役, 一不致意, 惟取速完, 日期工役, 元非定限之規, 則其心所在, 何可欺隱乎? 然則監董之人, 安得免死哉?" 右議政金壽興, 亦上箚力言, 一罪太重。 上答曰: "卿意無乃只憐其死而然耶? 予試言之, 山陵, 是何等重役? 郞廳監造官, 是何等微末之官? 以微末之官, 監莫重之役, 而一不致意, 左邊六方, 無一處堅固致力之事。 噫! 以匹夫言之, 葬其父〔母〕        , 必欲堅固且精者, 無非人心之所同然。 而況以臣子, 而葬其君父, 反不如匹夫者, 是必無之理, 國朝三百年來, 所未有之大變也。 謂之無定律, 而豈可苟且, 循用比律? 或因一時受敎, 以爲遵行之地, 則今日正欲法祖宗, 而詔後世, 決不可以士夫而恕之也。 鄭致和事將欲觀其査考, 而處之," 兩司經年論啓, 而上不從。 其後因旱慮囚, 命圭等減死, 流竄濟州。
【臣謹按命圭等, 職在敦匠董役因山, 而不思自盡之義, 敢生苟完之計, 其罪可勝誅哉? 左右石役, 其制宜同, 而命圭不用右邊舊制, 削去其凹, 不相維持, 以致傾頹, 此豈無情妄作而然? 實由於不敬不謹之致, 則繩以一罪, 可謂當律。 而三司、政院, 交章爭執, 其遮護欺誣之狀, 昭不可掩。 壽興身居大臣之列, 而亦陳箚伸救, 竟使罔赦之罪, 止於投竄。 朝綱之陵夷至此, 不亦痛哉?】

【태백산사고본】 21책 21권 45장 A면【국편영인본】 37책 52면
【분류】정론-간쟁(諫諍) / 왕실-종사(宗社) / 사법-탄핵(彈劾) / 사법-행형(行刑)

 

11월 4일 기사

충청도 공산(公山) 등의 고을에 천둥과 번개가 쳤다.

 

11월 9일 갑술

예조가 아뢰기를,
"천릉(遷陵) 뒤에 백의(白衣)를 입고 3개월을 마친 뒤 복을 벗는 것에 대하여 이미 계하(啓下)하였으나, 복을 벗을 때에 별도로 회곡(會哭)하는 예가 없습니다. 그리고 각전(各殿)045)  의 흰 옷을 입는 의식은 이달 그믐에 끝날 것이니 12월 초하루에 비로소 복을 벗고 이어 평상시 의복을 입습니다. 백관도 똑같이 거행하고 외방에도 이 뜻으로 기일에 앞서 미리 알려 주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정윤(鄭錀)을 우승지로, 임상원(任相元)을 장령으로, 윤지선(尹趾善)을 정언으로, 조사석(趙師錫)을 부교리로 삼았다.

 

11월 12일 정축

밤에 목성(木星)이 저성(氐星) 안으로 들어갔다.

 

11월 13일 무인

여성제(呂聖齊)를 좌부승지로 삼았다.

 

원양도(原襄道) 원주(原州)에 천둥이 치고 비가 내렸다.

 

날씨가 추워 옷이 얇은 군사에게 해조로 하여금 유의(襦衣)를 지급하도록 하였다.

 

11월 16일 신사

신후재(申厚載)를 헌납으로, 박상형(朴相馨)을 정언으로 삼았다.

 

충청도 생원 김민도(金敏道) 등이 상소하기를,
"대동법(大同法)을 혁파하지 마소서. 원컨대 호남·경기의 예(例)에 따라 두 말을 더 납부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이때 호서(湖西)에서 거둔 대동미로는 경상 비용이 부족했으나 조정에서는 더 부과하기가 어려워 바야흐로 혁파할 것을 의논하였다. 때문에 김민도 등이 상소하기를,
"대동법이 실시되기 전에는 1년에 1결(結)당 부과되는 것이 무려 8, 9십 말[斗]이 되었으나, 지금 대동법은 1년에 부과되는 것이 다만 1결당 10말입니다. 원컨대 호남·경기의 예에 따라 쌀 두 말을 더 납부하겠으니 그 법을 혁파하지 마소서."
하였는데, 비국(備局)의 회계에 의거하여 그 말을 따랐다.
○忠淸道生員金敏道等上疏, 請勿罷大同, 願依湖南, 京畿例, 加納二斗。 上許之。 時湖西大同, 經用不足, 朝廷難於加賦, 方議革罷。 故敏道等上疏, 以爲:
大同未設之前, 一年一結之賦, 多至八九十斗, 卽今大同之法, 一年所賦, 只一結十斗。 願依湖南、京畿例, 加納二斗米, 而勿罷其法。                                    因備局回啓而從之。

【태백산사고본】 21책 21권 46장 A면【국편영인본】 37책 53면
【분류】정론-정론(政論) / 재정-공물(貢物) / 재정-전세(田稅)

 

11월 18일 계미

비변사가 아뢰기를,
"안동 부사 신후재를 헌납으로 옮겨 제수하였는데, 지금은 수령이 바로 적곡(糴穀)을 거두고 역(役)을 징발해야 할 때이니 옮겨 이동하면 안 됩니다. 금년은 흉년인데 안동(安東)이 가장 심합니다. 앞으로의 구휼 정사를 또한 마땅히 헤아려 처리해야 합니다. 신후재가 비록 간관(諫官)으로 옮겼지만 마땅히 변통하는 방도가 있어야 합니다. 여타 수령도 내년 보리 수확 때까지는 옮기지 마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신후재도 그대로 재임하도록 하였다.

 

11월 19일 갑신

예조가 아뢰기를,
"오는 12월 초하루에 백의(白衣)를 벗도록 이미 품의하여 결정했으나 무단히 옷을 갈아입어서는 안 됩니다. 그날 이른 아침에 상께서는 별전(別殿)에 납시어 백의를 벗은 다음 길복(吉服)으로 갈아입고, 조정의 신하들 중2품 이상은 대궐 안에 모여서 복을 벗은 뒤에 이어 문안을 드리고, 그 나머지 백관들은 각기 해사(該司)에 일제히 모여 옷을 갈아입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11월 20일 을유

밤에 달이 헌원(軒轅)의 왼편 각성(角星)을 침범하였다.

 

경기 여주(驪州) 등의 고을에 천둥과 번개가 쳤고, 수원부(水原府)에는 천둥이 치고 우박이 내렸다.

 

11월 21일 병술

안후(安垕)를 장령으로, 조사석(趙師錫)을 헌납으로 삼았다.

 

전 사간 이무(李袤)가, 그의 조부 고(故) 상신(相臣) 이산해(李山海)가 이선(李選)의 소(疏)에서 헐뜯음을 당했다고 상소하여 사정을 말하며 변명하였다. 그 대략에,
"이선은 소 안에서 무단히 신의 할아버지 이름을 들먹이면서 성씨와 벼슬은 적지 않고 이첨(爾瞻)046)  과 아울러서 언급하였습니다. 이첨은 죄인이고 신의 할아버지는 이름난 재상이므로 보는 자가 한심스럽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는데, 더구나 신의 마음에 어찌 통탄스럽고 원통하지 않겠습니까. 신은 분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의 조부 산해는 명묘조(明廟朝)에 과거 급제하였고, 선묘(宣廟)를 섬기게 되어서는 지우(知遇)가 세상에 흔하지 않은 것이었고 뜻이 서로 잘 맞았습니다. 광국(光國)·평난 공신(平難功臣)에 모두 봉해졌고 이조 판서와 영의정을 30년 가까이 하였습니다. 이조 판서로 있을 때에는 윤대관(輪對官) 김응생(金應生)이 신의 조부를 두고 제마음대로 결단하여 행한다고 배척하였으나, 선조께서는 친히 글을 지어 정원에 전교하기를 ‘이판(吏判)의 사람됨은 말을 신중히 하고 행동을 조심스럽게 하여 한 덩어리의 진실한 기운이 혼연히 가슴 속에 가득 쌓여 언뜻 보아도 군자라고 일컬을 만한 사람임을 결단코 알 수 있다. 자기의 의견대로 조정의 정사를 멋대로 하는 일은 비록 상을 주더라도 하지 않을 터인데, 저 응생(應生)이란 자가 머리를 쳐들고 혀를 놀려 이간질하고 판단을 흐리게 하여 이렇게 극도에까지 이르렀으니 무슨 까닭인가?’라고 하였습니다. 10줄 남짓한 말씀이 완연히 어제 일 같으니 만일 전하께서 보셨다면 또한 신의 조부가 어떠한 사람인지를 아실 것입니다. 이 어찌 뒤에 태어난 신진(新進)의 무리들이 쉽게 짓밟을 수 있는 분이겠습니까. 그리고 신은 고(故) 상신(相臣) 이후원(李厚源)과 【즉 이선의 아버지이다.】  더불어 늙으막에 서로 친하여 때때로 서로 방문하였습니다. 신의 조부에 대한 말이 나오면 문득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의 석담유기(石潭遺記)047)   중의 ‘이조 판서의 일을 잘했다.’라는 말을 거론하며 훌륭한 재상이었다고 찬미하였었는데, 오늘 이같은 말이 이선의 입에서 나올 줄은 생각지도 못하였습니다. 어디에서 들었기에 옛 신하를 백세(百歲)의 뒤에서 모욕한단 말입니까. 전하께서 즉위하신 지 이미 오래되어 마치 해가 하늘 한 가운데에 떠 있는 것처럼 인간의 물정(物情)을 어두운 곳이라도 비추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죄없는 사람을 모함한 데 대해 사리를 가려 밝히는 일을 어찌 신의 한두 마디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그리고 소(疏) 끝에 백성들의 사정을 아울러 진술하오니, 대동법 같은 훌륭한 법을 혁파하지 마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소(疏)의 내용을 잘 알겠다. 소 끝의 일은 내 마땅히 유의하겠다."
하였다.
○前司諫李袤, 以其祖父故相臣山海, 爲李選疏詆, 上疏陳辨。 其略曰:
李選疏中, 無端擧臣祖名, 不書姓爵, 竝爾瞻言之。 爾瞻罪人也, 臣祖名相也, 見者莫不寒心, 況於臣心, 寧不痛且冤哉? 臣不得不辨焉。 臣祖父山海, 擢科明廟朝, 逮事宣廟, 知遇不世, 契合昭融。 光國、平難, 俱封兩勳, 掌銓、首揆, 迨三十年。 當在銓長時, 輪對官金應生, 斥以專擅, 宣廟親製宸翰, 傳于政院曰: "吏判之爲人, 言若不出口, 身若不勝衣, 一團眞實之氣, 渾然充積于中, 一見決知其君子人也。 任己見, 專朝政, 雖賞之不爲, 彼應生者, 乃仰首饒舌, 離間熒惑, 至於此極, 抑何故也? 十行綸音, 宛然如昨, 如入睿覽, 亦可知臣祖之爲何如人也。 此豈後生新進輩, 所可容易蹴踏者乎? 且臣與故相臣李厚源                            【卽選之父也。】                        晩而相善, 有時參訪。 語及臣祖, 輒擧文成公 李珥 《石潭遺記》中, 善秉銓之語, 贊之以賢宰相, 不圖今日如此之言, 乃發於李選之口也。 於何聽聞, 而侮辱舊臣, 於百歲之下哉? 殿下臨御旣久, 大明中天, 人間物情, 無幽不燭。 辨釋誣枉, 何假臣一二言也? 且於疏末, 兼陳民情, 請勿罷大同良法。                                    上答曰: "疏辭知道。 疏末事, 予當留意焉。"

【태백산사고본】 21책 21권 46장 B면【국편영인본】 37책 53면
【분류】정론-간쟁(諫諍) / 사법-탄핵(彈劾) / 사법-치안(治安) /

 

11월 22일 정해

상이 정원에 하교하였다.
"영부사(領府事)는 원로 대신으로서 선왕(先王)에게 세상에 드문 후한 대우를 받았기에 내가 주석(柱石)보다 더 의지하고 믿었다. 그런데 불행히 한 번 병이 들어 갑자기 서거하니, 나랏일을 생각함에 나도 모르게 기력이 약해지고 마음이 아프다. 요사이 나의 병이 낫지 않고 오래 끌어 곧바로 내 생각을 표하지 못하고 있으므로 마음이 항상 서운하였다. 해조로 하여금 별도로 3년치 봉급 및 제수(祭需)를 넉넉하게 지급하도록 하여 내 뜻을 표하라." 【영부사는 즉 정태화(鄭太和)이다.】

【태백산사고본】 21책 21권 47장 A면【국편영인본】 37책 53면
【분류】인사-관리(管理) / 왕실-사급(賜給)

ⓒ 한국고전번역원

 

11월 24일 기축

지평 이인환(李寅煥)이 아뢰기를,
"지평 권두기(權斗紀)는 공공(公共)의 의논을 고려하지 않고 회피하는 형적이 분명하게 있어, 대간의 체통을 떨어뜨리고 손상하였으니 체직하소서. 법을 지위가 높은 사람의 측근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은 기강을 세우고 금령(禁令)을 엄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청풍 부원군(淸風府院君) 김우명(金佑明)은 지난번 자기 종이 법을 어긴 것으로 인하여 드디어 사헌부 이속(吏屬)의 범법 행위를 따지고 며칠 동안 가두어 두었는데 그 의도가 본때를 보이는 데 있었습니다. 심지어 스스로 목을 매었다가 살아났다는 소문이 항간에 퍼지기까지 하였습니다. 법금(法禁)에 관계된 일이어서 마땅히 근신해야 하는데도 옛 사람이 남긴 경계를 생각지 않고 자못 스스로 조심하지 않고 있으니 추고하라 명하소서.
충청 병사 박진한(朴振翰)은 군정(軍政)을 닦지 않고 오직 자기 이익만을 일삼아 뇌물을 실은 수레가 끊이지 않았으므로 비방하는 말이 자자합니다. 형장(刑杖)을 남용하여 사람의 목숨을 많이 끓어지게 하였으며, 널리 응련(鷹連)을 걷어내느라 위벌(威罰)이 낭자하였고, 열읍(列邑)을 수탈하여 포악한 짓을 하고 사욕을 채우기 위해 폐를 끼쳤으니 파직하고 서용하지 마소서."
하니, 상이 모두 따르지 않았다.

 

11월 25일 경인

밤에 유성이 헌원성(軒轅星) 위에서 나왔는데, 꼬리는 길고 색깔은 붉고 빛이 땅을 비추었다.

 

천릉(遷陵) 때의 총호사 이하 여러 집사(執事)에게 차등있게 상을 주었다.
애책(哀冊)을 받들고 옥백(玉帛)을 준 영의정 허적(許積)에게 숙마(熟馬)를 하사하고, 지문제술 서사관(誌文製述書寫官) 판중추 송시열(宋時烈)과 총호사 우의정 김수흥(金壽興)에게 각각 안구마(鞍具馬)를 하사하고, 지방 서사관(紙牓書寫官) 김우형(金宇亨)과 도감 제조 민유중(閔維重)·김휘(金徽)와 도청(都廳) 이유상(李有相)·홍주국(洪柱國)에게 모두 가자(加資)하였다.

 

우의정 김수흥이 상차하여 천릉에 관한 일을 말하니, 【대개 송시열의 소에 대한 비답 중에 온당치 않은 분부가 있었기 때문에 차자를 올린 것이다.】  상이 답하였다.
"오늘 국가의 일이 과연 경의 말과 같이 몹시 위태하다. 차자 중의 다른 일은 이미 전에 하유했고, 상소에 대한 비답의 이야기는 내 진실로 놀랍다. 다만 내 생각을 말하고자 한 것뿐이었는데, 어찌 간사한 자들이 말썽을 일으킬 구실이 될 만한 것이 있겠는가. 지난번 경연에서 경의 상소을 보니 또 말을 주고받았다는 이야기기 있었는데 경의 말이 이와 같으니 다른 것은 말할 것조차 있겠는가. 아, 지금 이 천릉의 일은 참으로 자식으로서는 애통하고 망극한 일이다. 만일 조금이라도 재궁을 움직이지 않을 방법이 있다면 마땅히 충분히 상의하여야 미진한 일이 없게 될 것이다. 만약 마땅히 그대로 봉해야 하는데도 그대로 봉하지 않거나, 풍수설에 미혹되어 경솔하게 재궁을 움직이게 했다고 한다면 나의 몸둘 바 없는 회포를 말로 형용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한 번도 회포를 말하지 않아 참으로 이런 일이 있었던 것처럼 하였으니 이 어찌 인정상 할 수 있는 일이겠는가. 아마도 내가 병 중에 정신이 혼미하여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경은 한번 생각해 보라. 어찌 책망할 뜻이 있겠는가. 경은 공사(控辭)하지 말고 속히 공무를 보라."

 

11월 27일 임진

익평위(益平尉) 홍득기(洪得箕)가 죽었다.

 

11월 28일 계사

새벽에 유성이 하늘 한가운데에서 나왔다. 모양은 병(甁)과 같고 꼬리는 길며 색깔은 하얗고 빛이 땅을 비추었다.

 

경평군(慶平君) 이륵(李玏)이 죽었다. 【선조 대왕의 아들이다.】

【태백산사고본】 21책 21권 47장 B면【국편영인본】 37책 53면

ⓒ 한국고전번역원

 

우의정 김수흥이 또 상차하여 면직을 청하였다. 그 대략에,
"군국(軍國)의 여러 일을 폐지한 것이 신의 첫번째 죄입니다. 진대(具貸)의 계책을 한 번도 강구하지 않은 것이 신의 두 번째 죄입니다. 전하께서 편찮으신데도 문안을 드리는 데 참여하지 못한 것이 신의 세 번째 죄입니다. 함부로 빈말을 올려 성덕(聖德)에 보탬이 없는 것이 신의 네 번째 죄입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속히 출사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으로 이미 남김없이 말하였으니 안심하고 공무를 보라."
하고, 이어 사관(史官)을 보내어 타일렀다.
○右議政金壽興, 又上箚乞免, 略曰:
軍國諸務, 一切廢閣, 臣罪一也。 賑貸之策, 無一講究, 臣罪二也。 玉候違豫, 不參起居, 臣罪三也。 妄進空言, 無補聖德, 臣罪四也。                                    上答曰: "不可不速出之意, 已悉無餘矣, 安心行公。" 仍遣史官諭之。

【태백산사고본】 21책 21권 47장 B면【국편영인본】 37책 53면
【분류】인사-임면(任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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