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현종실록22권, 현종 15년 1674년 2월

싸라리리 2025. 12. 18.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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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일 병신

장령 안후태(安後泰)가 아뢰기를,
"형조의 죄인 전업실(田業實)에게 공초를 받아 결안(結案)을 작성한 다음에 사형에 처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결안이 없이 처단하는 것 역시 전례가 있는데 안 될 게 뭐가 있겠는가."
하였다. 처음에 김수흥이 상에게 아뢰기를,
"능을 옮길 적에 쓸 여사군(轝士軍)을 뽑을 때 남부의 하급 아전들이 뇌물을 받으며 난잡한 짓을 하였다는 이야기가 떠돌고 있었기 때문에 이미 해조로 하여금 사실을 조사해 처리하라고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엄하게 조사하여 바로 효시하라."
하였다. 형조가, 전업실이 그의 동네 백성에게 은 7냥을 사사로이 받은 사실을 찾아내, 간사한 짓을 하였다는 것으로 결안한 공초를 받으려고 하였으나 전업실이 억울하다면서 서명하지 않자, 엄하게 형신하여 실정을 받아낸 다음에 사형할 것을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전에 품정한 대로 효시하라."

 

 

 

 

 

 

 

 

 

 

 

2월 8일 계묘


 

상이 뜸질로 인해 부스럼이 나 침을 맞았다. 약방 도제조 김수흥이 나아가 아뢰기를,
"상께서 이처럼 심하게 부스럼이 나 계시고 또 듣자니 가는 길에 아직도 마마 돌림병이 깨끗이 가시지 않았다고 하니, 영릉(寧陵)의 참배를 가을로 물려 행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앞서 정한 날보다 조금 물려서 정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김수흥이 또 아뢰기를,
"선재 어사(船材御史)가 왕복하자면 두어 달이 소요될 것인데, 농사철이 차차 가까워지고 있으므로 필시 백성들에게 폐단을 많이 끼치게 될 것이니, 보내지 말라는 대각의 의논이 옳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가을을 기다려서 보내게 뒤로 물려라."

 

 

 

 

 

우의정 김수흥이 아뢰기를,
"신에게 소회가 있는데 감히 아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대부들 사이에 상(喪)을 당한 사람이 있으면 부의하는 것이 비록 명목이 있는 선사라고 하나, 신이 지난번 당한 상은 10여 세된 어린 아이를 잃은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충청 병사 박진한(朴振翰)은 심지어 군비용 포목 한 동을 부의했습니다. 이 사람이 아첨하기 위해 한 짓이 아니면 필시 의향을 떠보려고 한 것입니다. 신이 참으로 놀랐으며 또 그의 행위가 가증스러웠지만 받지 않은 이상 깊이 죄주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을 치죄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뒷일을 징계할 수 있겠습니까. 유사로 하여금 법을 상고해 죄를 정하게 하소서."

 

2월 10일 을사


 

2월 12일 정미

집의 김석주, 장령 이하진이 아뢰기를,
"신릉(新陵)에 거둥하실 때 연도에서 제공할 천막 등 여러 도구들을 너무나 호화롭게 하지 말며, 도로의 모든 일을 지나치게 다듬지 말게 하소서. 그리고 묘당으로 하여금 군정(軍政)을 변통할 방안을 강구하게 하여 국내에 신역(身役)을 치러야 할 자들로 하여금 먼저 본병(本兵)의 액수를 보충한 다음에 다른 역사에 쓰도록 하여, 쌓인 폐단을 제거해 백성을 보호하고 허위적인 습관을 개혁하여 군량을 완비하게 하소서."

 

2월 13일 무신


 

상이 뜸질로 인한 부스럼 때문에 침을 맞았다. 우상 김수흥이 아뢰기를,
"능에 거둥할 날짜를 다시 가려 잡으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런데 3월 20일 경에는 농사철이 이미 임박해 있는 때일 뿐만 아니라 여주·이천 사이에 마마가 한창 극성을 부리고 있으며 또 뜸질로 난 부스럼도 완전히 아물기를 기대하기가 쉽지 않으니 이번에 거둥하실려면 불편한 점이 여러 가지 있습니다. 그러니 효성을 애써 억제하시어 가을로 물려 행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8월 중으로 날을 가려 잡는 것이 좋겠다."

 

 

 

 

 

2월 17일 임자

대사헌 남용익, 집의 김석주, 지평 민암이 아뢰기를,
"호서 지방은 신축년003)   이래로 재앙과 흉년이 계속되어 전결(田結)이 날로 줄어들고 있으며, 또 온양에 거둥하신 뒤로 춘추로 거두어 들이는 쌀을 은전으로 인해 감해주기도 하고 재앙으로 인해 감해주기도 하였기 때문에 해청(該廳)에 상납하는 게 많이 삭감된데다 본도에 비축된 것도 점차로 소비되고 있는데, 갑자기 다시 경술·신해년의 큰 흉년을 만나 안팎이 바닥나 수습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현재 호서에서 호조·기청(畿廳)·진휼청·상평청에게 차용한 것을 계산해 보면, 베는 1천여 동, 쌀은 3만여 석, 은은 4천여 냥에 이르고 있는데, 이것들에 대해 모두 문안대로 상환받되 채무 이행을 꼭 시켜야 한다는 의논이 있었습니다. 신이 그 수량을 계산해 보니, 지금 비록 온 도에 부세를 더 매기고 1년 내내 받아들인 것을 모두 쓸어잡는다 해도 채무를 충당할 수 없습니다.
애당초 진휼청에서 각종 재물과 곡식을 모아둔 것은, 바로 이러한 흉년과 재앙을 당한 곳을 구제하기 위한 것인데, 지금 물량을 따져 받아들이고자 하니 혜택을 베풀어 환란을 돌봐주는 도리에 사실 어긋납니다. 상평청의 경우 모곡(耗穀)으로 이자를 놔 경상비 이외 수용 자본을 마련하는 곳이니, 이 역시 어떻게 빌려준 것이라고 하여 추심할 수 있겠습니까. 진휼청·상평청으로 하여금 즉시 호서에서 쓴 은과 쌀의 수량을 모두 깨끗이 면제해주게 하소서. 그리고 호조·기청에서 빌려준 쌀과 베에 대해서도 해당 아문으로 하여금 경비를 헤아려서 반을 감해주거나 소량을 감해주게 하여 좋은 법을 폐지하지 않고 애처로운 백성을 크게 위로하는 소지로 삼으소서."
하니, 답하기를,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라."

 

또 아뢰기를,
"신들이 삼가 듣건대, 창덕궁 안에서 한창 전각(殿閣)을 수리하는 일이 벌어져 나무와 돌을 실어나르는 등 자못 큰 공사를 하고 있다 합니다. 이야기하는 자 중에 더러 ‘거기에 드는 비용은 내탕고(內帑庫)에서 내다 쓸 것이니 외부(外府)가 걱정할 일이 아니며, 한 달 남짓 일을 하면 끝날 것이니 많은 백성이 수고하지는 않을 것이다.’고 합니다. 그러나 당연히 아껴야 할 재물이라면 내외가 다를 게 뭐가 있겠으며, 시기에 맞지 않는 일이라면 오래 걸리느냐 빨리 끝나느냐를 논할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신들이 일찍이 들어보니 편전(便殿)의 지반이 한쪽으로 기울어서 고치지 않고는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부득이한 일을 제외하고 기타 집을 더 늘리는 등의 일은 모두 즉시 중지하게 하여 검소한 덕을 드러내고 영구한 계획을 생각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전각을 수리한 일은 내가 신중히 경계하지 못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나의 병이 완쾌할 때가 없어서 신료들을 항상 소합(小閤)에서 만나고 있는데 소합이 자전께서 거처하시는 방과 다만 벽 하나 사이이므로 마음에 항상 미안하게 여겨 왔으나, 다만 현재 거처하고 있기 때문에 변통하지 못했었다. 그런데 지금 틈을 타 저것을 뜯어다 여기에다 세우게 되었는데, 8칸 의 집으로 이미 들보를 얹었다. 이 밖에 무엇을 더 짓는 일이 있겠는가. 지금 계사를 보고, 부득이한 일이었지만 마음에 매우 미안하게 여긴다."

 

홍문관 교리 윤지선(尹趾善) 등이 차자를 올리기를,
"신들이 삼가 생각건대, 모든 관료가 해이해져 온갖 일들을 잗달은 채로 그럭저럭 넘기고 있어 마치 계속 밑으로 흘러가기만 하는 물처럼 되어버렸습니다. 전하의 이목(耳目)과 같은 직책을 위임받은 자는 진작시킬 수 있는 방안을 진실로 다 강구해야지 먼저 자신만 편하려는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이번에 간원의 관리들이 이유없이 인혐하고 들어가 공무를 한 사람도 보지 않고 있으니, 신들은 실로 그 까닭을 알 수 없습니다. 무릇 사직하려는 자는 비록 병이 있다 하더라도 불편한 사정이 있다면 단자(單子)나 소를 올리는 것은 사세상 아니할 수 없고, 보는 사람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런데 간원의 신하들은 털끝만큼도 혐의스러운 일이 없는데도 한결같이 정고(呈告)한 채 수일 동안 직무를 유기하고 있으니 사체에 있어서 매우 거북스럽습니다. 대사간 이혜, 사간 이명, 헌납 이무를 모두 체차하라 명하소서."

 

2월 19일 갑인


 

관학 유생 김만길(金萬吉) 등 2백 50명이 소를 올려, 송나라 양시(楊時)·나종언(羅從彦)·이통(李侗)과 본조(本朝)의 이이(李珥)·성혼(成渾)을 문묘에 배향할 것을 청하니, 답하였다.

 

2월 20일 을묘


 

자전의 병환이 한 달이 넘게 끌다가 이때에 이르러 더욱 심해지자, 밤 2경에 상이 사현합(思賢閤)으로 나아갔다. 약방 도제조 김수흥 등이 창성군(昌城君) 이필(李佖), 집의 김석주, 장령 정유악과 입시하여 약에 대해 의논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자전의 병환은 10년 전부터 있었는데 지금과 같은 중세가 있을까봐 항상 깊이 염려해 왔었다."
하니, 창성군 필이 아뢰기를,
"이는 담화(痰火)의 증세 같으니 빨리 탕제(湯劑)를 드셔야 합니다. 그리고 배꼽을 뜸질해도 괜찮습니다."

 

2월 21일 병진

약방이 아뢰기를,
"여의(女醫) 정옥(正玉)이 여러 해 동안 약 시중을 들었으나 반드시 맥에 대해 확실히 알지는 못할 것입니다. 창성군 필은 왕실의 가까운 친족이므로 조정의 신하들과는 다릅니다. 그로 하여금 들어가 진찰하여 맥이 어떤가 자세히 알게 한다면 도움이 없지 않을 것이므로 감히 아룁니다."

 

2월 22일 정사

자전이 백회혈(百會穴)에 뜸을 떴다. 상이 도제조에게 분부하기를,
"지금 자전의 병환이 한결같이 위독하니, 애타는 심정에 여러모로 정성을 들여봐야겠다. 종묘·사직·산천(山川)에 기도하는 일을 조속히 거행해야겠으니 각처로 중신(重臣)을 나누어 파견하라. 내일 새벽에 기도하는 제사를 지낼 것이다."

 

 

 

 

 

2월 23일 무오


 

 

 

 

 

 

 

 

 

 

 

2월 24일 기미

묘시에 소렴(小斂)을 하였다. 상이 우상 김수흥에게 분부하기를,
"자전의 옥체가 보통 때에도 여느 사람과 달랐다. 더구나 약물을 많이 복용하였는데 말할 것이 있겠는가. 봉심한 사람들마다 부기가 점점 심해진다고 하니, 만일 예문에 따라 3일 뒤에 소렴을 한다면 필시 의외의 걱정이 있을 것이므로 변통하는 도리가 없어서는 안 되겠다. 내일 소렴을 하고 싶은데 경의 뜻은 어떠한가?"
하니, 김수흥이 대답하기를,
"기축년 인조의 상에 효종께서도 이러한 일로 대신에게 물었습니다. 신의 할아버지 김상헌(金尙憲)이 아뢰기를 ‘2일 후에 소렴을 한다는 것은 예로 보아 거북스러운 점이 있습니다만 일에는 정법과 변법이 있으므로 어느 하나를 고집하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하였고, 양사의 장관들도 그렇다고 하여 그 다음날 소렴을 하였습니다. 이왕 선조에서 행한 예가 있으니 변통해서 안 될 것은 없습니다. 예관으로 하여금 삼사의 장관에게 물어본 다음에 다시 품의하여 거행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자, 행 대사헌 남용익(南龍翼), 대사간 이익상(李翊相) 등이 아뢰기를,
"3일에 소렴을 하는 것은 예전에 기록되어 있고, 기축년에 한 일은 그때 마침 여름철을 당했기 때문이니, 그 일을 끌어다 예로 삼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이에 양사가 소렴의 예에 따를 것을 합계(合啓)하였다. 이윽고 상이 분부하기를,
"지금은 부기가 매우 심하므로 부득이 소렴을 하고 있다."

 

 

 

상이 정원에 분부하기를,
"재궁에 맞을 만한 판자를 빨리 준비하라고 대신과 장생전 제조에게 이미 일렀다. 정원도 이 뜻을 알 것이니 반드시 오늘밤 안으로 준비할 것을 각별히 주의시켜라."

 

2월 27일 임술


 

예조가 아뢰기를,
"신들이 어제 복제(服制)의 절목 가운데 대왕 대비께서 입을 복제에 대해 기년복으로 헤아려 정해 재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가례복도(家禮服圖)》 및 시왕(時王)의 제도에 며느리의 복은 기년복과 대공복(大功服)의 구분이 있었으며, 기해년 국상 때에도 대왕 대비께서 기년복을 입으셨습니다. 이로 본다면 이번 복제는 대공복이라는 게 의심할 것이 없는데, 다급한 사이에 자세히 살피지 못하여 이처럼 경솔히 하다 어긋나게 한 잘못이 있었으니 황공함을 금하지 못하겠습니다. 원래 절목 가운데다 대공복으로 고치는 표지를 붙여 올리겠다는 뜻으로 감히 아룁니다."
하니, 알았다고 답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기해년의 복제를 처음 정할 때 송시열이 의논을 수렴하면서 국가의 복제는 기년이라고 핑계대었는데, 그 뜻은 사실 가공언(賈公彦)의 주소(注疏) 중 서자를 세워 후사를 삼았을 경우에 대한 설을 위주로 한 것이었다. 이때에 이르러 예조가 애초에 국가의 복제는 기년이라고 작정해 올리자, 당시 선비의 이름으로 행세하며 송시열에게 편당지은 자들이 송시열의 의논과 크게 차이가 나는 것을 미워해 옥당 사람들에게 편지를 보내 위협하니, 예조 판서            조형 등이 당시 여론에 죄를 얻을까 두려워서 대공복으로 고쳐서 올렸다.

【태백산사고본】 22책 22권 7장 A면【국편영인본】 37책 61면
【분류】왕실-의식(儀式) / 왕실-비빈(妃嬪) / 역사-사학(史學)

ⓒ 한국고전번역원

 

상이 정원에 분부하기를,
"대왕 대비의 복제가 과연 이러하다면 어찌하여 지금에야 표지를 붙여 들인단 말인가?"
하니, 정석(鄭晳)이 아뢰기를,
"예조에 물었더니 ‘복제 단자가 계하된 뒤에야 비로소 마련을 잘못한 점을 깨닫고 지금 비로소 표지를 붙였기 때문에 지체되었다.’ 하였습니다."
하고, 이어 예조의 당상과 낭청을 추고하기를 청하니, 상이 답하기를,
"복제 문제 때문에 내일 성복(成服)하려면 제때에 못할 우려가 있을 듯하다. 예조의 당상과 낭청을 모두 잡아다 신문하여 처리하라."

 

 

 

2월 28일 계해


 

양사가 아뢰기를,
"여러 어의들이 여러 해 동안 약을 의논해 온 사람들인데도 처음에는 어떤 증상인지 분변하지 못하였고 나중에도 그 증세에 맞는 약제를 드리지 못하여 갑자기 이러한 지경에 이르고야 말았으니 그 죄를 어떻게 면할 수 있겠습니까. 모두 나국하여 죄를 정하소서."

 

 

 

 

 

 

 

2월 29일 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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