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일 을축
3월 2일 병인
이날 시호에 대해 의논할 일이 있었다. 영의정 허적이 패(牌)를 받고 대궐 밖에 나와 있었으나 아직까지 사은 숙배하지 않았기 때문에 감히 들어오지 못하였다. 그러자 상이 승지 윤심(尹深)을 보내 부른다는 명을 전하면서 일렀다.
사은사 김수항 등이, 역관 김시징(金時徵)으로 하여금 먼저 가 장계를 올리게 하였는데 그 대략에,
"오삼계(吳三桂)가 북쪽으로 되돌아 가지 않으려고 사신을 붙잡아 놓고는 군사를 일으켜 반기를 들었습니다. 그러자 오삼계의 아들인 오응웅(吳應熊)이 일찍이 순치제(順治帝)의 매부(妹夫)가 되어 북경에 머물면서 벼슬하고 있었는데 청나라 사람이 대궐 안에 가두어 두었다가 뒤에 결국 목졸라 죽였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서산(西山)에 주씨(朱氏) 성을 가진 사람이 숭정제(崇禎帝)의 셋째 아들이라고 자칭하면서 1만여 명의 무리를 모아 12월 23일에 북경성 안에다 불을 질러 난을 일으키려고 꾀하였다가 일이 발각되자 도망갔는데, 사방으로 군사를 나누어 보내 그 당류들을 체포하는 대로 죽이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다하소홍왕(多夏所紅王)을 대장으로 삼아 10여 만의 병력을 거느리고 가 오삼계를 토벌하게 하였는데, 왕은 옛 팔왕(八王)의 손자이고 황제에게 재종(再從)이 되는 친척입니다. 그의 용맹과 지략이 보통 사람들보다 뛰어났으므로 청나라 사람들이 의지해 중히 여기고 있다 합니다. 또 오삼계가 섬서 제독(陝西提督) 왕보신(王輔臣)에게 은밀히 편지를 보내 함께 반기를 들자고 하니, 왕보신이 편지를 가지고 온 사람을 붙들어 놓고 그의 아들을 보내 이 사실을 아뢰면서 그 편지도 아울러 올리자, 황제가 칙지를 내려 칭찬하였다고 합니다."
3월 3일 정묘
3월 4일 무진
총호사 김수흥이 아뢰기를,
"지난해 능을 옮길 때에 재신(宰臣)의 건의로 인해 구워서 만든 지석(誌石)을 아울러 사용했었습니다. 두 가지를 아울러 사용하는 것은 예문(禮文)에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만 오래도록 마멸되지 않은 데 있어서는 구워서 만든 것이 더 좋을 듯하다고도 합니다. 오직 성명께서 결정하시는 데 달려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돌에 새겨 사용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지난해 능을 옮길 때 사용했던 도구들 가운데 새것이나 다름없는 것이 많이 있는데, 가져다가 사용해도 괜찮을 듯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도감의 단자 가운데에 재가하겠다."
3월 5일 기사
3월 6일 경오
3월 8일 임신
3월 12일 병자
3월 14일 무인
간원이 아뢰기를,
"진향(進香) 때에 종친부 이하 안팎 관사와 궁가들로 하여금 제물의 가짓수를 일체 정부에서 진향하는 규식에만 따라서 하게 하고 혹시라도 너무 풍성하게 하지 말도록 하소서. 그리하여 사치스럽게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검소한 예가 좋다는 의의에 따르게 하소서."
3월 16일 경진
대사헌 남용익(南龍翼) 등이 고부사를 보내지 말 것을 연이어 아뢰니, 답하기를,
"요즈음 일들은 실속없이 형식적인 것만 숭상하고 있으니 매우 한심스럽다."
3월 17일 신사
3월 20일 갑신
영의정 허적이 사정을 아뢰면서 영의정 직을 체면해 주기를 청하니, 따랐다. 이때 시릉관(侍陵官) 김여건(金汝楗)이 중풍이 나 매우 위독하자, 상이 다시 차출해야 할 것인지의 여부에 대해 대신에게 의논을 물어보라 하였는데, 허적이 처음에는 의논을 드리지 않다가 재차 묻자 대답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상이 그 까닭을 물으니, 허적이 대답하기를,
"신이 올라오면서 마음 먹기로는 공제(公制)한 뒤에는 돌아가려 하였는데, 뜻밖에 약방의 직책을 맡게 되었고 불행히 또 상이 편찮으시고 중전의 병세마저도 위중한 날을 당하였으므로 감히 곧장 돌아가지 못하다가 어느덧 오늘날까지 이르렀습니다만, 조정의 정사에 있어서는 신이 어떻게 감히 대신으로 자처하여 간여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이 시골에 있으면서 늘 죄를 진 사람으로 자처하고 있으니, 내 마음이 얼마나 불안하겠는가. 선대 조정의 원로들이 거의 다 세상을 떠나고 현재 노성한 대신으로는 경 한 사람만 남아 있다. 내가 경 말고 누구를 의지하겠는가. 비록 불안한 정세는 있으나 나랏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고 내 병세도 이와 같으니 경은 이때에 물러가서는 안 된다. 영상 직책을 꼭 그대로 맡고 싶지 않다면 정의가 서로 통하는 사이이므로 소청을 들어주는 것도 어렵지 않으니, 경은 원임(原任)으로 도성에 그대로 머물러 있으면서 나의 부족한 점을 도와주어야 할 것이다."
3월 21일 을유
3월 22일 병술
총호사 김수흥이 면대를 청하니, 영부사 허적과 같이 입시하라고 명하였다. 농사철에 관원을 바꾸면 폐단이 있다 하여, 애책 서사관(哀冊書寫官) 남구만(南九萬)을 체차하여 관북(關北)에 그대로 머물러 있게 하고, 청평위(靑平尉) 심익현(沈益顯)으로 대신하게 하였다. 상이 두 정승에게 이르기를,
"발인 시기가 한창 더울 때이다보니 여사군(轝士軍)의 사상자가 필시 많을 것이다. 수로(水路)로 상여를 운반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니, 김수흥이 아뢰기를,
"수로로 상여를 운반하는 데 대해 외부 의논 역시 대부분 편리할 것이라고 하기 때문에 신이 허적과 의논해 말씀드리려고 하던 중이었는데, 상께서 먼저 이에 대해 물으시니 매우 다행입니다. 수로는 강물이 불어오르더라도 상여를 편안하게 운반할 수 있을 것이므로 육로로 운반하는 것보다 나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육로로 가는 것은 정상적인 방법이고 수로로 가는 것은 정상적인 방법이 아니므로 변통하는 데 대해서 신은 감히 책임지지 못하겠습니다. 그리고 물을 거슬러 올라가자면 배가 흔들리지 않을 수가 없으므로 의물(儀物)들이 뒤섞이지 않으리라고 반드시 보장하기 어렵습니다. 이 때문에 더러 불편하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발인 시기가 한창 더울 때인 데다가 대여(大轝)가 매우 무거우며 칸수도 몹시 좁아서 여사군이 마음대로 발을 움직이지 못할 것이니 만약 한쪽에서 발을 잘못 디뎌 넘어지기라도 한다면 사세상 전체가 넘어지고야 말 것이다. 그러면 사상자가 필시 1백 명 가까이 날 것이니 어찌 우려스럽지 않겠는가."
하자, 허적이 아뢰기를,
"요즈음 외부에서 육로를 이용하는 것이 편리할 것이라고도 하며 수로를 이용하는 것이 편리할 것이라고도 하는 등 결정이 나지 않고 분분하게 말하고들 있습니다만, 신은 본디 수로에 대해 익히 알고 있으므로 만일 장마를 만나게 되면 수로가 반드시 나을 것이라고 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발인할 때쯤 날이 가물어 수심이 얕아지면 어찌할 것인가?"
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수심이 얕으면 여울을 올라가기가 매우 어려울 것이므로 육로보다는 물론 불편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울을 파헤치고라도 배를 운행할 수는 있습니다. 만일 장마를 만나 교량이 죄다 허물어지는 날에는 육로의 난처함이 수로보다 배나 될 것입니다. 이로 말한다면 두 길이 다 염려스러우나 육로의 우려가 더 심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여사군은 해당 부서로 하여금 그 수를 헤아려 정하게 하고 배도 해조로 하여금 새로 만들어 놓고 대기하게 해야 할 것이다."
3월 25일 기축
김수흥이 아뢰기를,
"신이 도감의 당상과 함께 지금 수로의 형세를 살피러 가려고 합니다만, 광진(廣津)에서 여주까지의 사이에 무릇 스물여섯 군데의 여울이 있는데 그중 가장 험한 곳은 양근(楊根)의 대탄(大灘)입니다. 두 바위 사이에 물살이 거센데다가 좁기까지 하므로 불가불 새로 만든 빈 배로 미리 시험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그렇겠다고 하였다. 김수흥이 또 아뢰기를,
"지금 변경의 우려가 이와 같으므로 인재를 모아들이는 것이 가장 서둘러서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므로 무장 가운데 성익(成釴)·이중신(李重信) 같은 자는 모두가 쓸 만한 사람들인데 일을 그르친 연고로 죄적(罪籍) 가운데 들어있으니 불가불 거두어 써야 하겠습니다."
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비국의 신하들과 의논하여 명단을 모두 기록해 들여 재가를 기다리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3월 26일 경인
대사헌 강백년, 집의 서문상 등이 아뢰기를,
"조정에서 유신들을 대우하는 예가 본디 각별합니다. 그런데 지난번 이유태(李惟泰)가 대궐 문 밖에 와서 소를 올릴 때에 정원이 그전에 올린 상소도 들어가지 않았다고 핑계대면서 기각하고 받아들이지 않아 낭패한 채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임금의 명을 알리고 아랫사람의 의견을 보고하되 성심껏 해야 하는 도리를 이와 같이 해서는 안 됩니다. 해당 승지를 추고하소서."
3월 27일 신묘
3월 28일 임진
3월 29일 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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