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일 을미
대사헌 강백년이 입시한 김에 아뢰기를,
"헌부의 추고 공사 가운데 김만중(金萬重)을 당초에 특별히 추고한 것에 대해 아직도 대조하여 살피지 않았는데, 이미 귀양보낸 뒤에 뒤따라 법에 의거해 죄를 결정한다는 것은 거북스러운 점이 있기에 감히 여쭙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게 특별히 추고한 것이니 그대로 법에 의거해 죄를 정해야 할 것이다."
하자, 도제조 허적이 아뢰기를,
"김만중의 일에 대해 신이 일찍이 말씀드리려다가 못했습니다만, 강백년이 이왕 말을 끄집어냈으니 신 또한 소회를 말씀드리겠습니다. 김만중이 신을 꾸짖은 말이 신에게 들어맞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채용할 만한 말이 아닐 경우 버리면 되는데 귀양보내기까지 하시니, 어찌 성스런 덕에 누가 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김만중은 그의 어미와 떨어져 있으니 정리상 측은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김만중의 말이 너무나 이상하였기 때문에 처음에는 멀리 귀양보내려고 하였으나, 그때 대신들의 아룀으로 인해 가까운 곳에다 귀양보냈던 것이다."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신이 비록 못났습니다만, 또한 하나의 늙은 신하입니다. 어떻게 감히 마음에 없는 헛된 일로 아뢸 수 있겠습니까. 이는 사실 진심에서 한 말입니다. 만일 은혜를 입어 석방된다면 성스러운 상의 덕이 머지않아 회복될 것이며 개인적인 신의 마음도 조금은 편해질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이 이처럼 누누이 말하니, 경의 뜻을 편히 해 주기 위해 석방하겠다."
하였다. 강백년이 아뢰기를,
"김만중이 석방되었으니 추고 공사를 어떻게 할 것입니까?"
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본죄를 이미 용서해 주었으니, 추고에 대해서 거론하지 않아야 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법에 의거해 죄를 정하지 말라."
4월 3일 정유
간원이 아뢰기를,
"도감이 골회(骨灰)를 사용하기 위해 백성에게 소 도살을 허용하였는데, 신들은 슬픈 생각이 듭니다. 지난해 소 역병이 지나간 뒤로 새끼가 번식되지 않았으니, 농사를 중히 하는 도리에 있어서 엄금하기에 겨를이 없어야 할 것인데 도살을 허가할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국상 때엔 도살을 금지한다고 법전에 기록되어 있는데 말할 게 있겠습니까. 만일 골회를 얻기 어려워서 사세상 할 수 없었다고 한다면 당당한 국가로서 어찌 소 몇 마리 마련하지 못해서 도살을 바로 허가한단 말입니까. 소를 도살하라는 명을 빨리 중지하소서."
총호사 김수흥이 수로를 살펴보고 여주에서 돌아오니, 상이 인견하였는데, 영부사 허적, 좌부승지 윤심도 입시하였다. 수흥이 아뢰기를,
"상류에 있는 여울들은 그리 어려운 곳은 없습니다만, 대탄(大灘)이 가장 거슬러 올라가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러므로 수로로 상여를 운반하는 데 대한 의논을 쉽게 결정할 수 없습니다."
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무릇 일이란 반드시 널리 중지를 모아야 하므로 2품 이상 및 삼사로 하여금 의논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하고, 윤심이 아뢰기를,
"만약 수로로 상여를 운반한다고 하면 반드시 빨리 결정을 지어야만 모든 일을 제때에 준비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지난해 능을 옮길 때에 넘어져 죽은 여사군이 많았으므로 마음에 매우 측은히 여기고 있다."
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뭇 신하들이 이 분부를 듣고 누가 감동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김수흥이 아뢰기를,
"비록 미처 회의는 못하였지만 수로를 통해 발인했으면 한다는 뜻으로 명백하게 분부하시어 여러 사람의 마음을 석연하게 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4월 4일 무술
행 대사간 김우형(金宇亨), 헌납 윤지선(尹趾善), 정언 이익태(李益泰)가 차자를 올렸는데 그 대략에,
"수로를 이용할 수 없는 점이 여섯 가지인데, 대탄의 형세가 가장 큰 문제입니다. 큰 바위 하나가 강 가운데 가로질러 있어서 뱃길이 매우 비좁은 데다가 상여를 실은 배도 그 규격이 보통 배보다 커서 여울을 순조롭게 올라간다고 보장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육로로 가다가 비를 만나게 되어도 병참에서 쉬면서 길바닥에 물이 줄어지기를 기다려 차분히 운반하면 조금도 안 될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위험한 길로 가면서 시험해서는 아니될 곳에서 만분의 일밖에 안되는 안전을 바라는 것보다야 낫지 않겠습니까."
하였는데, 답하기를,
"이는 매우 중대한 일인데 사세는 돌아보지 않고 이처럼 망령되이 논하니, 실로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겠다."
4월 5일 기해
상이 분부하였다.
우상 김수흥이 아뢰기를,
"강화에 돌이 생산되는 곳은 사대부들 집에서 마음대로 채취했기 때문에 이미 남아 있는 것이 없습니다. 앞으로는 엄중하게 금지하는 뜻으로 본부에 분부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4월 7일 신축
우의정 김수흥이 아뢰기를,
"김만중이 이왕 은혜를 입어 사면되었으니, 동시에 죄를 입은 신하들이 죄명은 다르다 하더라도 이처럼 인재가 부족한 때를 당하여 변통하는 은전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성호징(成虎徵)의 경우는 애당초 실정도 없는 일로 인해 먼 변방으로 귀양보냈으니 더욱 지나치게 중한 벌을 준 것 같습니다."
하고, 윤심이 아뢰기를,
"성호징은 한때 망령된 말을 했다고 하여 멀리 귀양보내는 죄까지 주었고 귀양간 지도 오래되었습니다. 요즈음 죄입은 대간 중에 성호징처럼 너무 지나치게 죄를 입은 자가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성호징을 사면해야 할 것이다."
4월 8일 임인
4월 9일 계묘
4월 10일 갑진
4월 13일 정미
4월 14일 무신
4월 16일 경술
4월 17일 신해
총호사 김수흥이 대궐에 나아가 대면을 청하니, 답하기를,
"요사이 목구멍의 병증세가 더 심해져서 인견하지 못하겠다. 만일 여쭈어 정해야 할 일이 있으면 내관에게 말하여 그로 하여금 구두로 전하게 하라."
하자, 김수흥이, 지문(誌文)을 아직도 짓지 못하고 있으며, 애책문(哀冊文)과 시책문(詩冊文)은 이미 지어 올렸으나 지금까지 재가가 내리지 않고 있으므로 글자를 새기는 일이 기한 내에 끝나지 못하게 될지 염려된다는 등의 말로 품달하니, 답하였다.
4월 19일 계축
약방이 정유악으로 하여금 그대로 머물러서 약을 의논하는 데 동참하게 할 것을 청하니, 상이 일렀다.
4월 21일 을묘
총호사 김수흥이 아뢰기를,
"발인할 때에 소요될 배가 합계해 보니 1백 50척이고 예선군(曳船軍)은 도합 3천 6백 90명입니다. 진휼청으로 하여금 한 사람당 한 말의 쌀을 지급하여 식량으로 삼게 하소서."
4월 22일 병진
송준길(宋浚吉)의 큰손자인 송병문(宋炳文)이 상중에 있으면서 소를 올려 송준길의 유소(遺疏)를 진달하였는데 그 대략에,
"삼가 생각건대, 전하께서 경연에 드물게 납시므로 학문이 진전되지 않고, 아랫사람을 거느리거나 정사에 임해서도 오직 지략과 계교로 억측하려고만 하십니다. 설사 억측이 자주 적중한다 하더라도 이미 공자가 허여하지 않은 바인데, 더구나 적중하지 않아 자칫하면 사의에 어긋나고 있으니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자사(子思)가 말하기를 ‘가장 은밀하여 보이지 않는 것이 더 잘 나타나고 가장 미세하여 보이지 않는 사물이 더 잘 드러나기 때문에 군자(君子)는 혼자 있을 때에 근신한다.’ 하였으니, 실로 천고 동안 성현들이 서로 전해 온 요지 중에서 이보다 더 절실한 것은 없습니다.
그러니 전하께서는 이 두어 마디 말씀을 더욱더 체험하시어 아침이나 저녁이나 반드시 성실히 하고 공경히 하소서. 그러면 맑고 밝은 덕이 몸에 있으면서 지기(志氣)가 신(神)처럼 되어 일에 대해 마땅히 해야 될 것인가 해서는 아니될 것인가가 마음과 눈 사이에서 낱낱이 훤히 드러날 것입니다. 따라서 자연히 경연에 자주 납시게 될 것이며 학문도 힘쓰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모든 일들이 마치 그물의 큰 줄을 들면 가는 줄들이 펼쳐지듯이 되어 옛날의 천명을 이을 수 있을 것이며 새로운 경사가 모두 이를 것입니다. 그렇지 아니하고 오직 거친 마음과 속된 생각에다가 치우치고 사사로운 뜻과 당류를 비호하는가 하는 의심까지 뒤섞인 채 어진지 어질지 않은지를 분변하여 버리거나 취하려 하신다면, 신은 사특과 정직이 더욱 뒤섞이고 조정이 갈수록 어지러워져 멸망하는 데 이르고야 말까 염려됩니다. 아, 전하의 타고난 자품이 아깝고 국사도 아직은 해볼 만하니 스스로 포기하거나 스스로 업신여기지 마시고 마땅히 선대왕께서 뜻을 가다듬고 용기를 분발하셨던 것으로 유업을 계승 발전할 도리로 삼으시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4월 23일 정사
상이 대행 대비의 행록(行錄)을 써서 정원에 내리니, 정원이 아뢰기를,
"지문 제술관에 실지로 차출된 사람은 송시열입니다. 그런데 전일에 사관이 이 내용을 전유하자고 청한 서계에 대한 비답이 아직도 없습니다. 방금 행록을 내리셨으므로 제술할 일이 매우 시급한데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니, 답하기를,
"예비로 차출한 김수항으로 하여금 지어서 들이라고 하라."
4월 24일 무오
4월 25일 기미
우의정 김수흥이 차자를 올리기를,
"삼공(三公)이 제 인원수를 구비하지 못한 지 지금 몇 해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신만 그대로 있으므로 항상 부끄러워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빈전에서 관을 들어내고 능을 쌓는 지금, 삼공이 각각 맡아서 해야 할 일이 있는데도 아직까지 선발하라고 명하지 않으시니 신은 참으로 딱하고 답답하여 성상의 뜻이 어디에 계신지 모르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한번 위급한 병에 걸리자 지금 5년이 되도록 한 해도 평안한 적이 없는 데다가 갑자기 한없는 슬픔을 당하였으니 오늘날까지 부지해 오리라고는 정말 스스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이처럼 병이 들었으니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는가. 여기까지 생각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기가 막힌다. 여쭐 만한 일이 있으면 경이 들어와 직접 물어 보라."
4월 26일 경신
4월 29일 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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