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현종실록22권, 현종 15년 1674년 5월

싸라리리 2025. 12. 18.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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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일 갑자

판부사 김수항이 차자를 올려 지문(誌文) 쓰는 것을 사양하였다. 영의정 김수흥이 아뢰기를, "능을 옮길 때의 지문은 송시열이 짓기도 하고 쓰기도 하였습니다만, 지금 김수항 한 사람에게 짓고 쓰라고 한다면 일이 너무나 소략합니다. 청평위 심익현은 서법(書法)이 자못 좋으니 그로 하여금 써서 올리게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5월 2일 을축

우의정 이완이 재차 소를 올려 사직하니, 상이 답하였다.

 

5월 4일 정묘


 

 

 

5월 7일 경오

상이 정원에 분부하였다.

 

좌의정 정지화, 우의정 이완이 모두 네 차례나 사직하는 상소를 올리니, 답하기를,
"나랏일이 위급한데 경들은 왜 헤아리지 않는가? 내 여러 말을 안 하겠으니 빨리 나와 공무를 수행하여 조정과 재야의 기대에 부응하라."

 

상의 병환이 오래도록 낫지 않자, 내의 도제조 허적, 제조 남용익, 부제조 이원정(李元楨)이 여러 어의와 함께 들어가 진찰하였다. 상이 지리학 교수 박진문(朴振門)의 소를 꺼내어 허적에게 보이면서 이르기를,
"이 소는 어떠한가?"
하니, 허적이 다 읽고 나서 아뢰기를,
"그의 말이 옳습니다. 애당초 여러 지관(地官)들이 모두 4일이 길일(吉日)이라고 하였습니다만, 발인 날짜를 3일로 정하였기 때문에 하관하는 날을 할 수 없이 7일로 정했던 것입니다. 지금 발인 날짜를 이달 28일로 고쳐 정하였으니 4일에 하관하면 촉박한 걱정이 없을 듯합니다. 그러나 이는 참으로 큰 일이므로 신이 감히 혼자 의논하지 못하겠으니 이 소를 도감에 내려서 의논하여 품정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신이 듣건대, 정치화가 산릉 당상으로 있을 때에 감독과 독려를 매우 애써 하였다는데, 필경에는 죄를 받아 귀양가고 말았으니 매우 원통한 일입니다. 신이 서울에 들어온 뒤에 이완을 만나 보았더니 ‘이처럼 어려운 때를 당해 정치화 같은 자를 오래도록 유배지에 두어서는 안 된다.’고 하였고, 용익과 원정도 그렇게 말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당초에 죄를 감해 유배로 정한 것도 정상을 감안하여 한 것이었다. 지금 이미 해가 지났으니 방면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총호사 김수흥이 아뢰기를,
"수로로 상여를 운반하는 것이 정상적인 방법은 아니지만 편리한 점은 있습니다. 그런데 외부 의논들은 대부분 ‘물가 영악전에다 상여를 받들어 올리고 내리는 즈음에 여러 차례 동요될 것이니 이점이 미안하다.’고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여러 차례 동요되는 점에 있어서는 육로에서도 불가피한 일이다. 그러나 출렁이는 파도 위에서 밤을 지낸다는 것은 매우 미안하므로 영악전을 짓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김수흥이 또 아뢰기를,
"대탄에 험한 바위가 있어서 배에 장애가 됨은 그전부터 걱정거리였습니다. 그런데 낭청 정동설(鄭東卨)이 말하기를 ‘지금 수심이 얕아졌으니 배를 타고 들어가 철장으로 그 돌을 깨뜨려 버린다면 큰일 치르기에 유리할 뿐만 아니라 뒷날 조세 곡물을 수송하는 데에도 영구히 힘입게 될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이 사람에게 계획이 있는 듯하니 그로 하여금 깨뜨려 버리게 할까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성공할 수만 있다면 어찌 다행이 아니겠느냐."
하자, 김수흥이 아뢰기를,
"좌상과 우상을 모두 제수하셨으니 그지없는 다행입니다. 이완은 비록 무신이긴 하나, 그러한 사람도 쉽사리 얻을 수 없으니 오늘날 정승에 제수된 것은 실로 여러 사람의 기대에 흡족합니다."

 

 

 

5월 10일 계유


 

5월 11일 갑술

죄수를 관대하게 처결하라고 명하였는데, 오랫동안 비가 오지 않고 가물었기 때문이다. 영상 김수항, 영부사 허적, 판부사 김수흥, 지의금 장선징, 동지의금 민점(閔點), 형조 판서 권대운(權大運), 참판 정익(鄭榏), 참의 목내선(睦來善), 우부승지 이단석(李端錫) 등이 사현합에 입시하여, 죄의 경중에 따라 도배하거나 삭직하거나 방면하였는데 92인이었다. 그러나 저주나 절도 등의 죄는 거론하지 않았다. 장선징이 죄수의 문안을 가지고 차례로 넘기며 읽었는데, 신명규(申命圭)·이정기(李鼎基) 등에 이르자, 상이 이르기를,
"이 사람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신이 이 사람들의 일에 대해 말씀드리려고 했으나 감히 못했습니다. 막중한 임무를 받고는 막대한 변고를 초래하였으니, 상께서 반드시 최고의 형벌로 처단하려고 하신 것은 물론 당연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실정을 따져 보면 필시 고의로 잘못을 저지른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변방으로 보내어 죽을 때까지 놔두는 것이 괜찮을 듯합니다."
하고, 김수흥이 아뢰기를,
"신이 전일에 이 일에 대해 말씀드렸다가 엄한 분부를 받기까지 하였습니다만 허적의 말이 옳습니다. 신명규 등이 비록 매우 보잘것없으나 어찌 능을 쌓을 때 태만한 마음이야 가졌겠습니까."
하고, 김수항이 아뢰기를,
"차례로 물으시는데 신만 어떻게 감히 침묵을 지키겠습니까. 신의 의견에는 그들이 고의였건 고의가 아니였건 간에 이같은 죄명은 본디 법에 맞지 않다고 여깁니다. 만약 한때 분부를 받은 것으로 인하여 최고의 벌로 처단한다면 온당치 않을 듯합니다."
하고, 민점이 아뢰기를,
"오늘날 죄인을 너그러이 처벌하는 것은 오로지 비가 오기를 기도하기 위해서이고 보면 일반적으로 사면을 받을 수 없는 사람이 사면을 받는다 하더라도 하나의 도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사람이 지은 죄상에 대해 내 매우 미워하고 있는데 장인들에게 속임을 받았다는 것은 이치에 가깝지도 않은 말이다. 12면 중에 6면의 상석(裳石)은 법대로 오목하게 만들었으나 6면은 처음에 오목하게 만들었다가 다시 두들겨 깨버렸다. 낭청이 지성껏 일을 감독하였더라면 장인이 어떻게 이처럼 할 수 있었겠는가. 신명규 등의 죄는 한(漢)나라 법으로 볼 때 ‘크게 불경하다.[大不敬]’는 것으로 논해야 할 것이다."
하자, 허적이 아뢰기를,
"신중히 하지 못한 점은 있습니다만 그렇다고 최고의 형벌로 논한다는 것은 너무나 지나친 듯합니다. 만약 사형만은 면해 주고 그들로 하여금 바다 가운데 섬에서 여생을 마치게 한다면 상의 어질고 두터운 덕이 빛날 뿐 아니라, 또한 후일 징계의 본보기도 넉넉히 될 것입니다."
하였다. 김수흥 역시 거듭 청해 마지않자, 상이 묵묵히 한참 있다가 이르기를,
"내 뜻에는 꼭 죽이고 싶었다만, 여러 대신이 이와 같이 말하므로 사형만은 면해 주겠으니 영구히 방면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하고, 이어 명하기를,
"신명규 등에게 사형을 면해 주고 외딴 섬으로 귀양보내되, 신명규는 대정현(大靜縣)으로, 이정기는 정의현(旌義縣)으로 귀양보내라."

 

5월 12일 을해


 

 

 

영돈녕 김우명(金佑明)이 소를 올렸는데 그 대략에,
"봄부터 여름까지 오랫동안 가물어서 큰 강물이 마치 허리띠처럼 가늘어지고 얕은 여울은 밑바닥이 드러날 정도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대행 대비의 발인 날짜는 어느덧 바싹 다가왔으니 배로 물길을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은 매우 염려스럽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성명께서는 묘당에 물어보소서. 그리하여 신의 말이 의논에 붙여볼 만하다고 한다면 병을 참고서라도 입시하여 쌓여 있는 소견을 다 말씀드릴까 합니다."
하였는데, 상이 대신들에게 소를 내리면서 이르기를,
"지금 강물의 형세가 어떠한가?"
하니, 김수흥이 아뢰기를,
"가뭄이 너무나 심해 강물이 날로 줄어들고 있으니 매우 염려됩니다."
하고, 허적이 아뢰기를,
"별도로 만든 배는 둔하고 두꺼워서 운행하기가 어렵답니다. 용산의 여울은 그리 얕지 않은데도 끌어올리기가 어려웠다고 하니, 수로로 상여를 운반하다가 낭패를 초래하지나 않을까 염려됩니다."
하였다. 김수흥이 이날 용산으로 나가 별도로 만든 배를 살펴보고 돌아와 아뢰기를,
"귀로 들은 것이 직접 눈으로 본 것보다 못하니, 허적이 들은 것이 잘못되었습니다. 별도로 만든 배의 길이는 65자 다섯치이고 두께는 두 치 9푼이었는데, 신이 그 배에 올라 수심이 얕고 깊은 곳을 시험삼아 운행해 보니 앞으로 가문다 하더라도 필시 끌어올리지 못할 리는 없을 것입니다. 만일 차분하게 끌어올린다면 상여 운반의 편리함이 육로로 운반하는 것과는 비교가 안 될 것입니다만, 염려되는 바는 상류에 얕은 여울이 많아서 여울 바닥을 파내자면 많은 인력이 든다는 점입니다."
하였다. 이에 수로로 운행하느냐 육로로 운행하느냐에 대한 시시비비의 의논이 점점 가라앉았다. 김수흥이 또 아뢰기를,
"송시열이 도중에서 되돌아간 것은 사실 창증(脹證)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올린 소를 입계한 지 이미 오래되었는데 아직까지 비답을 내리지 않고 계시니 신은 성상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그리고 듣자니, 저번날 영남 선비 곽세건(郭世楗)이 올린 소는 병조에서 기각되어 올리지 못하였다고 하였습니다만, 소의 말들이 매우 음험 참혹하였다 하니, 송시열의 정세가 불안한 것도 당연합니다."

 

장령 이우정(李宇鼎) 등이 전업실(田業實)에 대해 결안(結案)하여 공초를 받은 뒤에 사형시킬 것을 잇따라 아뢰니, 상이 답하기를,
"신하가 임금을 섬기면서 간사한 꾀를 마음에 조금이라도 가져서는 아니될 것이다. 그런데 이번 전업실의 사건과 신명규 등의 사건을 서로 표리로 삼아 이일을 빙자해 저일을 해결하려고 꾀하였기 때문에 내 엊그제 경연에서 형편없다고 말하였는데도 모른 체하고 오늘 감히 태연스럽게 와서 아뢰니 매우 놀랍다."

 

5월 16일 기묘


 

유생 나석좌(羅碩佐)·조현기(趙顯期) 등이 서로 잇따라 소를 올렸는데 그 대략에,
"오삼계(吳三桂)가 이미 남방을 차지하자, 몽고도 북경과 가까이 하지 않고 있으니 천하의 사세 변화가 눈앞에 바싹 다가왔습니다. 이 기회를 틈타 군사를 훈련하고 식량을 저축한다면 크게는 원수를 갚아 수치를 씻을 수 있을 것이고 작게는 나라를 편안히 하고 백성을 보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영의정 김수흥이 아뢰기를,
"듣건대 대탄의 바위를 이미 깨내어 여울의 넓이가 지금은 36척이나 된다고 합니다. 이는 앞으로 다가오는 대사에 큰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이는 상류의 물자를 수송하는 길이므로 사실 만세토록 무궁한 이익이 될 것입니다. 정동설의 공이 참으로 적지 않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요사이 청나라 사람이 비행을 적발한다는 구실로 계속 뒤따라 나오고 있다 하는데, 신의 뜻에는 우리 나라를 의심하여 그런 것인가 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 엊그제 나석좌·조현기 두 사람이 올린 소가 소문이 날까 봐서 내 짐짓 답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자, 김수흥이 아뢰기를,
"고부사가 돌아오기 전에는 반드시 근신해야 할 것입니다."

 

 

 

5월 19일 임오


 

5월 21일 갑신


 

5월 22일 을유

부제학 이단하 등이 차자를 올렸는데 그 대략에,
"신명규 등의 죄는 사형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이 바로 온 세상의 공론이므로 대관이 청한 의논을 윤허하지 않는다면 그치게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전업실의 일이 신명규 등의 일과 무슨 관계가 있기에 전하께서는 이 일을 짐짓 간쟁하여 저쪽을 구하는가 의심하신단 말입니까. 전하께서 대관을 추측하시는 게 너무나 지나치지 않으십니까. 엊그제 대간이 진향(進香)을 너무나 풍성하게 한다고 간한 뜻은 전례를 따르고자 한 것입니다. 그런데 엄하게 기를 꺾어 조금도 봐주지 않은 채 조종의 전책(典冊) 규식을 버리고 온갖 그릇의 가짓수가 지나쳤던 등록(謄錄)을 따르게 하셨으니 이미 정해진 법도를 지키는 데 있어서 정도를 잃고 잘못된 대로 인습하고야 말았습니다. 애석한 마음을 금할 수 있겠습니까. 또 이때에 토목의 일을 하고 있으므로 거듭 성명을 위해 애석히 여기고 있습니다."
상이, 답하기를,
"내가 덕이 박한 탓으로 신명(神明)에게 죄를 얻어 우리 백성으로 하여금 이런 망극한 재앙을 당하게 하였으니 항상 이를 생각하면서 잠시도 편안하지 않았다. 차자에서 말한 일들은 내 마땅히 마음을 써 깊이 살피겠다만, 전업실 사건 및 진향의 일에 대해서는 온당한지 내 이해가 안 간다."

 

5월 23일 병술


 

5월 25일 무자


 

5월 28일 신묘


 

5월 30일 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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