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현종실록22권, 현종 15년 1674년 6월

싸라리리 2025. 12. 18.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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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일 을미


 

6월 3일 병신


 

 

 

6월 4일 정유

신시에 인선 왕후를 영릉(寧陵)에다 장사지냈다. 행 판중추부사 김수항이 지문(誌文)을 지어 올렸는데, 그 글은 다음과 같다.
"인선 왕후께서 승하하신 5월에 능을 다 다듬고 나자, 전하께서 서술하신 행록(行錄)을 내리면서 신 수항을 명하여 현궁(玄宮)의 지문을 지어 올리라고 하시었다. 신이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받아 읽고는 말씀드리기를 ‘오, 지극합니다. 우리 성후(聖后)와 같은 덕을 성상께서 기록하시니 참으로 아무런 이의가 없습니다. 이미 사양하지 못했으니 감히 행록에 의거하여 차례로 엮어 서술해야겠습니다.’ 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왕후의 성은 장씨(張氏)이고 선조는 장순용(張順龍)인데 본디 중국 사람이었다. 원나라 때에 선무 장군(宣武將軍) 진변 총관(鎭邊摠管)으로서 공주를 따라 동쪽으로 왔다가 고려에 벼슬하여 여러번 문하 찬성사를 지냈으며 덕수현을 채지(采地)로 받았는데 자손들이 그곳을 관향으로 삼았다. 우리 조정에 와서 장핵(張翮)이란 분이 한성부 판윤을 지냈고, 그뒤 4대에 이르러 장옥(張玉)이란 분이 문장에 능해 일찍이 장원으로 뽑혀 승문원 판교까지 지냈고 이조 참판의 증직을 받았는데, 이분이 왕후의 5대조이다. 고조의 휘는 임중(任重)이니 장례원 사의였고, 증조의 휘는 일(逸)이니 목천 현감이었고, 할아버지의 휘는 운익(雲翼)이니 형조 판서를 지냈으며 역시 장원을 하여 일찍부터 드러났는데 뒤에 보조 공신 영의정 덕수 부원군의 증직을 받았고, 아버지의 휘는 유(維)이니 우의정 신풍 부원군 문충공이다. 공은 인조의 인정을 받았고 정사훈에 녹훈되었으며 문장과 덕행이 세상에 크게 알려졌다. 그의 배필은 영가 부부인(永嘉府夫人) 김씨(金氏)로 안동의 명망 있는 집안인 충신 우의정 문충공 휘 김상용(金尙容)의 따님인데, 한때 문벌에 대해 말하는 자들이 첫째나 둘째로 손꼽았다. 만력(萬曆)006) 무오년007)   12월 경진에 왕후가 탄생하였다. 태어나면서부터 단정하고 얌전하여 함부로 장난치며 놀지 않았다. 여섯 살이 되자 할머니인 박씨 부인이 데려다 길렀는데, 일찍이 할머니를 따라 수원 부사로 있던 계부(季父)의 관아에 갔다가 가끔 남몰래 부모 생각이 나 눈물을 짓곤 했다. 할머니가 눈치를 채고 물으면 대뜸 눈물을 씻고 다른 일 때문이라고 대답하여 걱정을 끼치지 않게 하니 할머니가 기특히 여기고 더욱 사랑하였다. 왕후에게 언니가 있었는데 얼굴에 종기가 나 고생하고 있었다. 더러 어린 아이의 오줌이 가장 효험이 있다고 말하자 김부인이 일부러 손을 더럽히고 싶지 않다고 하면서 왕후의 뜻을 떠보니 왕후가 즉시 손수 발라 주면서 싫어하는 기색이 없자, 문충공이 매우 기뻐하며 기특히 여기었는데, 대개 그의 지극한 정성이 어려서부터 그러하였다. 숭정(崇禎)008) 경오년009) 효종께서 봉림 대군(鳳林大君)으로 있었을 때, 인조께서 친히 그의 배필을 간택하시면서 법도있게 행동하고 대답하는 왕후를 보고 매우 어질게 여기셨으므로 드디어 왕후로 선발하였다. 신미년 가을에 가례(嘉禮)를 치르고 풍안 부부인(豊安府夫人)으로 봉하였다. 대궐로 들어온 후에는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조심하여 어김없이 효도와 공경을 하니 인열 왕후께서 가장 사랑하시었다. 4년이 지나자 대궐에서 나와 사저에서 살았는데 가정 일을 조리있게 잘 처리하면서도 집안 일이 크고 작든 간에 감히 마음대로 하지 않았다. 인열 왕후의 언니가 일찍 과부가 되어 곤궁하게 살고 있었는데, 왕후가 도와주어 곡진한 은혜가 있었다.
병자년 겨울에 난리로 인해 강도로 들어갔는데 그 이듬해 정월에 적병이 바다를 건너 온다고 하자, 궁중(宮中)이 발칵 뒤집혀 너나없이 울부짖으며 당황하였으나 왕후만은 차분한 모습으로 말이나 행동이 평상시와 조금도 틀리지 않으니 사람들이 모두 왕후의 지킴이 있는 데 대해 탄복하였다. 효종께서 소현 세자와 함께 볼모로 심양에 가게 되자 왕후도 따라갔다. 타향에서 험난한 생활을 9년 동안이나 하면서도 그의 처사가 평상시의 법도를 잃지 않았으며 두 궁(宮) 간에 틈이 난 말이 없었다. 을유년에 비로소 귀국하였는데 소현 세자가 세상을 떠났으므로 효종께서 인조의 명을 받아 세자의 자리로 오르고 왕후를 세자빈으로 삼았다. 왕후께서 더욱더 스스로를 낮추고 조심하며 예로 몸을 단속하고 정성으로 위를 섬겼으며 색다른 음식물이 생기면 반드시 먼저 인조께 드렸다. 기축년에 인조께서 승하하시자 효종께서 왕위에 올랐다. 왕후께서 중전이 되자 내교(內敎)가 더욱 드러났다. 내직(內職)을 처리하고 빈어(嬪御)들을 거느리되 따뜻이 하여 친목하게 하고 엄히 하면서도 은혜를 베풀었으므로 문왕 후비의 풍화에 가까웠다. 그러나 항상 공경하고 근신하면서 몸을 유순하게 가졌다. 항상 말씀하시기를 ‘부인이 스스로 잘난 체하면 가정이나 나라에 해를 끼치지 않는 경우가 드물었으니 「암탉이 새벽에 울어서는 아니된다.」는 경계를 신중히 지키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기해년에 효종께서 병이 위중하시자 왕후가 하늘에 빌며 자신의 목숨으로 대신해 주라고 청하였으며, 승하하시자 예에 벗어날 정도로 곡하며 슬퍼하셨다. 그러나 마지막 보내는 일에 대해 시신을 씻기고 손톱과 발톱을 자르는 것부터 비록 하찮은 일이라 하더라도 반드시 몸소 하시면서 책임자에게 맡기지 않고 애써 정성을 다 들이셨다. 졸곡(卒哭) 전에는 미음만 드셨으므로 우리 전하께서 수라를 드시라고 눈물지으며 청하니 왕후께서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면 정말 지나친 짓이다만 그렇다고 억지로 밥을 먹으면서까지 살려고 하는 것은 내 차마 못하겠다.’고 하셨다. 우리 전하께서 즉위하시자 왕후를 왕대비로 높였으며, 신축년에는 효숙(孝肅)이란 휘호를 올렸다. 책보(冊寶)를 올릴 때에 왕후께서 안 나오려고 하시었는데 우리 전하께서 지성으로 굳이 청하시자 왕후께서도 평소 효종께서 분부하신 말씀을 몸받아 눈물지으면서 허락하시었다. 예를 치르는 날에 슬퍼하시어 주위 사람들을 감동시켰고 하례(賀禮)는 끝내 받지 않으셨다. 재이를 만날 때마다 근심과 두려운 빛을 띠시고 우리 전하에게 ‘내 마음에도 이러한데 네가 소홀히 해서야 되겠느냐.’며 일깨워 주셨으니, 그 경계와 가르침이야말로 매우 간절하였다. 왕후께서 기축년에 큰 슬픔을 당한 후로 지나치게 야위어 병이 났는데 드디어 고질이 되고 말았다. 일찍이 여러번 호서의 온양에 거둥하여 온천에 목욕하니 조금 효험이 있었다. 갑인년 2월에 병이 갑자기 심해져 24일 무오에 경덕궁 회상전에서 승하하시니 춘추는 57세였다. 유사가 시호를 의논하였는데, 시호의 법에 사랑을 베풀고 의로운 일을 행하는 것을 인(仁)이라 하고, 어진 소문이 두루 난 것을 선(宣)이라 하므로 드디어 인선이란 시호를 올려 높였으며, 또 그 위에 경렬 명헌(敬烈明獻)이란 휘호를 덧붙였다. 이에 앞서 효종의 능소에 사고가 있어서 계축년 겨울에 이르러 여주 홍제동(弘濟洞) 자좌오향(子坐午向)으로 된 자리에다 옮겼는데, 이때 이르러 왕후의 유언에 따라 6월 4일에 그 밑에다 장사지냈다. 같은 산 줄기인데다 가깝기 때문에 영릉이라고 불렀다. 왕후의 타고난 성품이 곧고 차분한데다 또 법도있는 가문의 교훈을 받았으므로 몸가짐이나 말씀하신 것이 모두 다 모범이 될 만하였다. 비록 병중이나 사적인 여느 때에도 반드시 예절을 스스로 지키고 자손들을 대해서도 나태한 기색을 보인 적이 없었으며, 사가의 친척에게 두루 두루 매우 화목하게 지냈으나 도리에 벗어난 요구는 절대로 들어주지 않았으므로 안팎의 한계가 분명하였다.

 

6월 5일 무술

약방이 아뢰기를,
"고기 반찬 없이 수라를 드신 지 오래되었습니다. 지금은 이미 장례를 치렀으니 여느 때처럼 수라를 드소서."

 

6월 6일 기해

인선 왕후의 혼을 맞아 서울로 들여왔다. 진시에 상이 흥인문 밖으로 나가 신연(神輦)을 맞아 경사전(敬思殿)에 모셔 놓고 몸소 재우(再虞)의 제사를 지냈다. 상이 초헌례(初獻禮)를, 왕세자가 아헌례(亞獻禮)를, 숭선군이 종헌례(終獻禮)를 행하였는데, 제사가 끝나기 전에 폭우가 내려 수행한 신하들 중에 의관이 젖은 자가 많았다. 이날 상이 정원에 분부하기를,
"대제(大祭)를 지낼 시각이 바싹 다가왔는데도 정돈하지 못한 채 곧바로 제사를 지내자고 청하였으며, 혼전(魂殿)과 가까운 곳에서 떠드는 소리가 많이 났는데도 단속하지 못하였다. 예조 판서 강백년(姜栢年), 예방 승지 정석(鄭晳)을 모두 잡아다 추고하라."
하였다. 이튿날 도승지 오시수(吳始壽)가 아뢰기를,
"나라의 기강이 해이해져 수습하지 못하게 된 지 오래되었습니다. 신이 6년 동안 외부에 있다가 다시 도승지로 들어왔습니다만, 어느 곳이나 자세가 느긋하고 흐트러져 그전보다 훨씬 못하였습니다. 거둥하실 때 시위하는 보검(寶劍)의 인원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것과 연(輦)을 호위하는 금군이 사람을 시켜 말을 끌고 가게 하는 것들은 그전에 없었던 일입니다. 양사는 거둥하시고 난 뒤 조용히 자체에서 해야 할 도리를 생각지 않아 의절의 결함을 면치 못하였으며, 해조는 금침(禁鍼)을 가지고 직접 돌아다니며 단속해야 한다는 규칙을 몰라 떠들게 하고 말았으니 무릇 이 두어 가지 일만 하더라도 어찌 한심스럽지 않습니까. 이번에 예판과 승지를 잡아다가 추고한 것은 필시 분발시키고 책려하는 뜻에서 한 것이겠습니다만, 처벌이 죄와 걸맞지 않으니 어떻게 인심을 승복시킬 수 있겠습니까.
강백년은 예조 판서로서 상께서 친히 전을 드릴 시각이 이미 바싹 다가왔는데도 여러 집사들을 정돈하지 못하였으며, 정석은 예방 승지의 직책에 있으면서 역시 소란스러움을 금지하지 못하였으니, 지은 죄가 적다고 한다면 몰라도 어떻게 죄가 없다고 할 수야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시각이 조금 지연된 것은 그럴 만한 곡절이 있습니다. 대궐 뜰 안은 외부 신하들이 마음대로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닌데다가 수복(守僕)이 ‘안에서 의물을 갖추지 못하였으니, 집사들은 천천히 하라.’고 하였습니다. 정석은 시각이 바싹 다가오자 민망하여 독촉에 독촉을 거듭하였으며, 신 역시 대궐 문 밖에까지 몸소 나아가 재삼 거듭 주의시켰으나 수복의 대답이 여전하여 일이 생기고 말았습니다만 이는 그때의 실상입니다. 재신과 측근의 신하가 추고받는다는 것은 체면으로 보아 매우 중대합니다. 만약 사정을 참작하여 죄를 정하지 않는다면 어찌 예우해 주는 도리에 흠이 되지 않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제사의 사체는 중대하고 재신과 측근의 신하가 추고받는 체면은 가볍다. 그런데 본원에서 아뢴 것은 무슨 뜻인가? 자못 타당하지 못하다. 금군이 사람을 시켜 말을 끌고 가게 한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니 해조로 하여금 잘못을 조사하게 하라."
하였다. 이윽고 부제학 이단하(李端夏) 등이 차자를 올렸는데 그 대략에,
"제사를 거행할 때 여러 집사들을 정돈하는 것은 원래 예조가 맡은 일이 아니며, 상께서 친히 제사를 지낼 때에는 예조 판서가 으레 찬례(贊禮)와 봉인(奉引)의 역할을 하면서 예를 거행할 뿐이고 예를 거행할 것을 계청하는 것은 통례원(通禮院)의 책임입니다. 그런데 지금 두 건의 의식을 잘못한 것을 강백년의 죄로 돌리니 억울하지 않습니까. 더구나 강백년은 나이 70이 넘었으므로 법에 구금을 면제받아야 할 자인데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어제 의주(儀註)를 상고해 보고 나서 비로소 예의 거행을 청하는 것이 찬례의 책임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하고, 방면하라 명하였다. 며칠 뒤에 영부사 허적이 들어와 아뢰기를,
"제사를 거행할 때 예방 승지가 일을 두루 잘 살피지 못한 잘못이 없지는 않습니다만, 살피고 단속하지 못했다는 것에 있어서는 그의 죄가 아닙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집례(執禮)가 곧바로 두 번째 우제(虞祭)라고 창(唱)하였는데도 예방 승지는 그 절목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알아듣지 못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자, 이단하가 아뢰기를,
"이는 다급한 사이에 무심코 일어난 실수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정석은 파직하고 내보내라."

 

6월 10일 계묘


 

6월 11일 갑진

청나라 사신이 갑자기 온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서울 안에 유언 비어가 들끓었다. 상이 즉시 대신과 비국의 신하들을 불러 의논하였다. 영상 김수흥이 아뢰기를,
"이번에 북쪽 사신이 오는 것은 우리에게 군사 지원 요청을 하기 위해서라고도 하며, 황후가 죽었다는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라고도 합니다만, 인심이 술렁이며 두려워하고 있으니 자못 민망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혹시라도 군사 지원을 요청하거나 군량 지원을 요청하는 일이 있으면 어떻게 처리해야 하겠는가?"
하자, 김수흥이 아뢰기를,
"군사를 징발해 달라고 요청한다면 참으로 거절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주씨(朱氏)의 후손을 다시 세운다는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병사 한 명도 보내기 어렵습니다."
하였다. 좌상 정지화(鄭知和)가 아뢰기를,
"신이 지나친 생각인지 모르겠습니다만 혹시 수군을 요청하여 정경(鄭經)을 치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는 고부사(告訃使)가 그곳에 가 잘못 대답하여 이 사신이 오게 되었는지 염려된다."
하자, 김수흥이 아뢰기를,
"그들이 강을 건넌 뒤라야 무슨 일로 나오는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겠다."
하였다. 부제학 이단하가 아뢰기를,
"신이 일찍이 대사성으로 있을 때 석전제(釋奠祭)에 참석한 적이 있었습니다. 《오례의(五禮儀)》의 도식(圖式)에는 대성(大聖)011)  과 사성(四聖)012)  의 신위마다 예제(醴齊)·앙제(盎齊)·명수(明水) 등 여섯 개의 술동이를 놓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다섯 신위마다 사기 동이 한 개만 진설해 놓고 있습니다. 성묘(聖廟)의 제사 의절을 이처럼 미비하게 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지금 재력이 바닥나 놋쇠 동이를 갑자기 마련하기는 어렵겠습니다만 각 신위마다 여섯 개의 사기 동이로 진설하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문선왕(文宣王)013)  의 신위에 먼저 여섯 개의 놋쇠 동이를 진설하고 배향 신위에는 당분간 사기 동이로 진설하되, 점차 놋쇠 동이로 바꾸어 갖추어야 할 것이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일찍이 태묘(太廟) 제사와 경모전(敬慕殿) 제사에서 보니 덮었던 보자기를 집준(執尊)014)  이 걷는 절차가 있었다. 그런데 지금 경사전(敬思殿) 제사에서는 수준(獸尊)을 사용하면서 뚜껑만 있었고 보자기로 덮지 않아 그전과 달랐다. 판부사 김수항은 오랫동안 승지로 있었으므로 알 수도 있을 것이며, 그 외 이전에 경묘전의 제관을 지냈던 사람에게 예관이 물어서 아뢰라."

 

의주 부윤이 치계하였다.

 

 

 

6월 12일 을사


 

6월 13일 병오


 

상이 대신과 비국의 당상을 불러 입시하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사신에 대해 운운했던 이야기는 결국 헛되이 놀라서 한 말이었구나."
하니, 영상 김수흥이 아뢰기를,
"고부사 유창이 장선징에게 사적으로 보낸 편지에 ‘5월 3일에 황후의 상이 났으며, 북경에 별다른 급박한 일은 없다.’고 하였으며, 또 하나의 문자를 보냈는데 파자(破字)한 것이었습니다. 합하여 보니 ‘여기서 떠도는 말로는 섬의 정(鄭)을 걱정하고 있다.’고 하였으며, 그 밑에 또 ‘아울러 우리에게도 미치고 있다.[幷及於我]’는 네 글자가 있었는데, 대개 청나라가 정경을 걱정하고 있으며 또한 우리도 의심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유창의 편지에 또 ‘아역(衙譯)의 무리가 와서 말하기를 「관중(舘中)의 운귀(雲貴)가 반란을 일으킨 뒤로 여러 진(鎭)과 각성(各省)에서 모두 사신을 보내 위안의 말씀을 드리고 있는데 너희 나라에서만 빠진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기에, 외따로 멀리 떨어져 있어서 미처 못 들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고 대답하였으며, 한중(漢中)에서 한 차례 승리를 거두었다는 이야기에 있어서는 그들이 군민에게 선포해 보인 글로 보아 과연 헛된 일이 아니었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사간 정재희가 아뢰기를,
"산릉의 큰 역사로 인해 양주·광주·여주·이천의 백성이 자신들만 유독 괴로웠다는 한탄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보리 벨 시기가 지났는데도 아직까지 거둬 들이지 못하고 있으니, 이번 칙사가 올 때에는 병참의 역사를 감해 주소서."
하자, 김수흥이 아뢰기를,
"경기 안에서는 네 고을이 가장 큰데, 만일 네 고을에 해당되는 역사를 다른 고을에다 넘긴다면 병참의 모든 일이 형편없을까 염려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신으로 하여금 의논해 처리하게 하라."

 

6월 14일 정미

우의정 이완이 죽었다. 이완이 병이 위독해지자 입으로 불러 주어 소를 엮었는데 미처 올리지 못하고 죽었다. 그의 서자인 이인걸(李仁傑)이 즉시 그 소를 봉해 올렸는데 그 소에,
"신이 실낱 같은 목숨이 다하게 되어서 다시는 상의 은혜를 갚을 길이 없게 되었습니다만 항상 잊지 못하고 있는 일념만은 오직 국사에 있습니다. 신이 전하께 바라는 것은, 곧은 말을 힘써 받아 들이되 말을 채용하지 않더라도 죄주거나 물리치지 마시며, 공도(公道)를 넓혀 이쪽이니 저쪽이니 따지지 말고 오직 훌륭한 인재만을 쓰시라는 것입니다. 현재 필요치 않은 병사가 너무나 많으므로 그 가운데서 정예병만 뽑고 나머지는 도태시켜야 합니다. 그리고 기타 각종 군병 신역의 폐단도 전혀 감당하기 어려우니 만일 변통하지 않으면 결코 보존할 수 없는 형세이므로 신의 뜻에는 받아 들이는 각종의 베를 5년으로 한정해 전부 견감해 주되, 또한 반드시 여러 도와 각 고을로 하여금 늙었거나 도망갔거나 죽은 사람에 대해 사실대로 문안을 만들어 올리게 한 다음, 죽었거나 늙었는데도 아직 대신 신역이 정해지지 않은 자와 10세가 채 못 된 아이들을 모두 구분해 내어 조목에 따라 견감해 주면 괴로워서 원망하는 일이 없을 것이고 다만 수용(需用)이 줄어드는 걱정만 있을 것입니다.
이 점에 있어서는 팔도에서 농사를 지으려고 들어오는 유민들의 수가 굉장히 많으니 어느 아문의 둔전(屯田)에 속해 있든 따지지 말고 한 명마다 베 한 필씩 받아 들인다면 수용의 수량을 넉넉히 충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5년 사이에 신역을 정하지 못한 자는 대신 정해지게 될 것이고 나이가 차지 않은 자는 나이가 차게 되어 자연히 역에 응해 용도가 넉넉해질 방도가 있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하고서도 부족할까 염려되면 농사를 지으려고 들어오는 유민에게 다시 베를 받아 들이되, 다만 10년 사이에 두 번만 받게 한다면 그들이 필시 크게 곤궁한 데까지 이르지는 않을 것이며, 각종 신역의 폐단도 차츰차츰 덜어질 것이니, 군정에 있어서 보탬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신이 말씀드리고 싶은 소견이 이뿐만이 아닙니다만 정신이 엇갈려 두서없이 말하였습니다. 성명께서는 양찰하소서."
하였는데, 답하기를,
"올린 유소(遺疏)를 보건대, 충심이 북받쳐 말이 매우 절실하였으므로 그지없이 애도하면서 나라를 위한 충성이 죽음에 이르러서도 더욱 돈독한 데 대해 더욱더 감탄하였다. 아, 그 사람은 이미 떠났지만 그의 말은 여전히 남아 있다. 허리띠에다 써놓고 보면서 유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6월 16일 기유

영상과 좌상 및 영부사 허적을 불러 입시하라고 명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황후를 위해 복을 입는 것은 예에 없는데 이번 조칙한 자문(咨文)에 상복을 입으라는 말이 있으니 이게 난처한 것 같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하자, 영상 김수흥이 아뢰기를,
"백포(白袍)로 대용하는 것이 괜찮을 듯합니다."
하였다. 상이 허적이 돌아보면서 이르기를,
"졸곡(卒哭)이 지나더라도 영부사는 돌아가면 아니될 것이다."
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소신의 자취는 결코 오래 머물러 있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때마침 상께서 편찮으셨기 때문에 이렇게 잠시 지체하였으니 또한 매우 염치가 없고 구차하다 하겠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경이 만일 시골로 내려간다면 내 어찌 경을 한직에다 두겠는가. 경에게 정승 직책을 제수할 것이다. 정승 직책은 오래 비워둘 수 없으니 경의 마음이 편안하겠는가. 그러니 그대로 머물러 있느니만 못할 것이다."
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바로 가까이 하늘과 같은 위엄을 모시고 있어서 신이 감히 심정을 다 아뢰지 못하겠습니다. 물러가서 소를 갖추어 사정을 말씀드리겠습니다."
하였다. 김수흥이 아뢰기를,
"나라 운수가 불행하여 이완이 갑자기 죽으니 애석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산릉의 일을 보다가 몸을 상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더욱더 아픔을 견디지 못하겠다."
하자, 【이완은 식재 궁관(拭梓宮官)으로 산릉에 갔었다.】 김수흥이 아뢰기를,
"모두가 명입니다. 어찌 이 일 때문이겠습니까."

 

6월 17일 경술


 

 

 

예조 판서 강백년이 차자를 올리기를,
"삼가 듣건대, 자문에 ‘곡(哭)할 때 상복을 입는다.’는 말이 있어서 상(喪)을 발표한 날로부터 4일이 된 날에 상복을 차려 입기로 품정해 계하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신의 생각에는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황후의 상을 발표한다는 것이 《오례의》에 실려 있지 않았고 보면, 계묘년에 천담복(淺淡服) 차림으로 상을 발표한 것은 이미 예에 없는 예를 행한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계묘년에 행하지 않았던 예를 행해서야 되겠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다시 묘당에 물어서 어떻게 하면 잘 처리할 수 있는가를 생각해 보소서. 그러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하였다. 강백년이 또 영상 김수흥, 호조 판서 민유중과 함께 직접 뵙고 성복해서는 옳지 않다는 데 대한 의의를 말씀드리겠다고 청하였다. 민유중이 아뢰기를,
"오늘 칙사가 전하기를 ‘너희 나라 모든 관원들이 복장을 바꾸어 입는 것은 내 이미 보았다. 이 다음 예절은 어떠한지 알아보고 돌아가 황제에게 보고하려 한다.’ 하였습니다. 이 일을 여쭈어 정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신 역시 뵙기를 청하였던 것입니다."
하였다. 김수흥이 아뢰기를,
"이왕 성복할 수 없으니 지금 바꾸어 입은 복장으로 날수를 정하여 27일 만에 벗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황제의 상과 같이 복을 입을 수는 없다."
하였다. 민유중이 아뢰기를,
"13일 동안 입으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괜찮겠다."
하였다. 다음날 민유중이 들어와 아뢰기를,
"어제 정한 13일의 제도에 대해 청나라 사신이 듣고 ‘매우 합당하다.’ 하였고, 부사는 ‘내 또한 글을 읽어서 아는 바가 있는데 이 제도가 가장 알맞게 되었다.’고 하였답니다."
하고, 김수흥이 또 아뢰기를,
"전일 상이 났다는 소식을 알리는 자문이 북경에 전달되지 않았기 때문에 저들이 처음에 고부사가 들어간다는 말을 듣고 위로를 드리려 오는 줄로 여기고 매우 기뻐하다가 상이 났다는 소식을 알리러 왔다는 말을 듣고는 황제도 무료하게 여겼다고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떠돌아다니는 말을 믿을 수 없다. 미처 진위사를 보내지 못하였다고 칙사에게 말해야 할 것이다."

 

 

 

6월 18일 신해


 

영상 김수흥, 호조 판서 민유중이 뵙기를 청하여 아뢰기를,
"진위사를 보내야 할 것인지 말 것인지에 대해 통역관으로 하여금 칙사에게 의향을 떠보게 하였더니 가부간에 대답이 없었다 합니다. 보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겠다."
하였다. 김수흥이 또 아뢰기를,
"옥당이 요전에 연명하여 올린 차자 내용은, 수륙재를 설치한 일은 부시(婦寺)들이 한 짓일 것이고 물론 전하께서 숭봉(崇奉)하신 것이 아닐 것이라는 뜻이었는데, 전하께서 윤허하지 않으실 뿐만 아니라 숭봉이니 신봉이니 하는 말을 썼다고 삼사를 책망하시니 신은 애석히 여기고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봉(奉) 자를 쓴 것이 이상하다. 꼭 이기려 하였기 때문이다."
하자, 김수흥이 아뢰기를,
"신이 일찍이 들은 일입니다. 명종 때 벽송정(碧松亭)에다 신사(神祀)를 설치하자 성균관 유생들이 쫓아버렸습니다. 문정 왕후께서 크게 노하시므로 명종께서 그들을 찾아내 치죄하려 하자 유생들이 모두 피하고 나오지 않았는데 이목(李穆) 혼자만 자수하니 명종께서 가상히 여겨 격려해 주셨으므로 지금까지 이목의 기개를 칭찬하고 명종의 덕을 찬미해 마지 않고 있습니다. 이번 숭봉 두 글자는 말을 만들다 우연히 나온 말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고, 민유중이 아뢰기를,
"말이 과격하다 하더라도 상께서 받아들이고 용서해야 됩니다."

 

춘방(春坊)이 아뢰기를,
"왕세자의 학문 강론이 하루가 시급하므로 졸곡이 이미 지났으니 즉시 서연을 열자고 청했어야 당연합니다. 그런데 엊그제 도성 안에 기피해야 할 질병이 많이 떠돌아서 궁관이 반드시 재숙한 다음에 시강해야 하므로 빈객(賓客)이 드리는 강론도 이 때문에 폐지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마을에 떠도는 질병이 깨끗이 가셨으니 관례에 따라 강론을 드리게 하소서."

 

 

 

6월 19일 임자

영상 김수흥이 뵙기를 청하여 아뢰기를,
"북경성 안에서 일어난 화재 사건에 대해서는 저쪽 통역관 무리들이 꺼리지 않고 말하였으나 남쪽 일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말하려 하지 않았으며 정경(鄭經)에 대해서는 전혀 모른다고 하였다는데, 역관들이 전한 바가 대체로 같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고부사가 보낸 파자(破字)의 말이 자못 이상스럽다."

 

6월 21일 갑인


 

영상 김수흥이 뵙기를 청하여 입시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사신을 보내 위안을 할 것인가에 대해 밖에서 서로 의논해 보았는가?"
하니, 김수흥이 아뢰기를,
"허적 역시 ‘사세상 보내지 않을 수 없으나 혹시 이로 인해 군사 지원을 요청하는 일이 있을까 염려된다.’고 하였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만일 이러한 일을 요청하려면 진위사를 기다리지 않고 했을 것이다."

 

6월 22일 을묘


 

6월 23일 병진


 

6월 26일 기미

경상 감사 이관징(李觀徵)이 아뢰었다.

 

6월 27일 경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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