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일 병신
김우형(金宇亨)을 도승지로, 정중휘(鄭重徽)를 집의로, 홍만종(洪萬鍾)을 장령으로, 민암(閔黯)을 지평으로, 이인환(李寅煥)을 부수찬으로, 이동명(李東溟)을 사간으로, 이원정(李元禎)을 병조 참판으로, 이훤(李藼)을 이조 정랑으로, 이집(李鏶)을 남병사(南兵使)로 삼고, 이단석(李端錫)·조원기(趙遠期)를 당상의 품계로 올렸다. 【단석은 곧 현궁 봉폐관(玄宮封閉官)이었고, 원기는 산릉 도감 도청(山陵都監都廳)이었다.】
12월 2일 정유
비국이 아뢰기를,
"도성 백성이 이미 큰 역사를 겪었고 또 흉년을 만났으니 이치상 구제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앞으로 얼음을 채취하여 빙고(氷庫)에 저장하는 역사에는 으레 호미(戶米)를 징수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 수는 4, 5백 석에 불과합니다만, 예전에는 흉년을 당하면 진청에서 헤아려 처리하였습니다. 지금 또한 특별히 호미(戶米)를 감하고, 진휼청으로 하여금 예전처럼 미포(米布)를 지급하여 조금이나마 은혜를 베푸는 바탕으로 삼으소서."
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사서(司書) 조종저(趙宗著)가 상소하기를,
"세자께서 돌림병에 구애되어 오랫동안 서연(書筵)을 폐하였으니, 궁관(宮官)으로 하여금 진강(進講)하여 권면하여 이끄는 방법을 다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직책이 춘방(春坊)에 있어 가르치는 도리에 대해 방법을 자세히 진술하니, 너의 부지런하고 간곡한 뜻을 내가 가상히 여긴다."
하였다.
12월 3일 무술
호조 판서 김휘(金徽)가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전례에 따라 관리를 골라 등용하는 것은 전조(銓曹)의 책임이요, 가려 뽑아 승진시키는 것은 임금의 권한입니다. 상례(常例) 이상의 은혜는 비록 사람마다 가볍게 베풀 수는 없지만, 만일 그 인물이 쓸 만하고 그 재주가 일을 맡길 만한데도 당겨서 끌어주고 천거해 주는 세력이 없어 침체하고 낙오되어 스스로 말 못 하는 사람이 있다면, 임금이 혹 가망(加望)하게 하거나 혹 특별히 임명하는 것이 어찌 정사에 손상이 되며 인물을 신중히 뽑아 쓰는 데 무슨 해가 되겠습니까. 그런데도 유연(柳㝚)은 반드시 전하로 하여금 그 쓸 만한 사람을 보고도 쓰지 못하게 하고, 전조(銓曹)에만 전적으로 맡기고 이것을 어기지 못하게 하니 이 또한 무슨 뜻입니까?
지금 국외인(局外人)으로서 전형을 거치지 않고 관원을 임명하는 임금의 특지에 의하여 선발 승진된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는 새벽 별과도 같이 드문 일입니다. 만일 유연의 말대로 시행된다면 조정은 장차 혼연일색(渾然一色)이 되어서, 자기와 다른 사람은 한 사람도 그 사이에 발을 붙이지 못하게 될 것이니, 조정에서 사람을 쓰는 것이 어찌 이럴 수가 있겠습니까. 궁중을 왕래하며 남몰래 결탁하기까지 하니 국가에 있어 얼마나 어지러운 꼬락서니이며 사대부로서 얼마나 추한 행실입니까. 말을 할 수 있는 지위에 있으니 만일 들은 바가 있으면 마땅히 곧바로 지적하고 분명하게 가리켜야 하는데도 속에는 함정의 기틀을 감추어 두고 겉으로는 범범하게 말하여, 위로는 임금의 마음을 현혹시키고 아래로는 신하들을 의심하고 두려워하게 하니 그 의도를 알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만일 조정의 신하들로 하여금 왕실을 위하여 힘을 다하고 국사에 마음을 다하되 마치 허적(許積)을 배척할 때처럼 한다면 온갖 일을 다 잘할 수 있을 것입니다만, 안타깝게도 이 무리가 밤낮으로 골똘히 생각하는 것은 다만 자기와 다른 편을 물리쳐 내는 것에 있지, 백성을 근심하고 나라를 위한 계책에는 소홀하여 유의하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신이 한밤중에도 근심하고 탄식하며 이어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또 근일에 대관(臺官)이 이숙을 삭탈 관작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기를 청하는 장계에서 심지어 ‘풍채가 이와 같다.’는 등의 말로써 말하기까지 했습니다. 이숙이 논핵한 세 사람은 모두 이숙과 당파가 다른 사람들이기 때문에 다른 당파를 공격한다는 이름을 피하기 위하여 논핵이 조형(趙珩)에게까지 미쳤으니, 조형은 어찌 그리 운수가 사납습니까. 그 마음씀이 한쪽으로 치우치는 것은 사대부로서 수치스럽게 여기는 것인데도 도로 거두어 달라는 청을 여러 달 동안 그치지 않았습니다. 대관(臺官)은 이목(耳目)을 맡은 신하인데 공의(公議)를 돌아보지 않고 같은 편끼리 당을 짓는 것이 이와 같으니 사사로운 뜻이 횡류하고 국세가 날로 쇠퇴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였다. 이보다 앞서 장령 유연이 상소하여, 임금이 특지로 가망(加望)하게 하는 것은 온당치 않음을 진술하고, 또 광해(光海) 때에 궁중을 왕래하며 비밀리 결탁한 폐단을 인용하여 말을 하였기 때문에 김휘의 소가 이와 같았다. 이때에 당론(黨論)이 날로 고질화되어 갔는데 유연 같은 자는 시배(時輩)들의 응견(鷹犬)048) 이 되어 당파가 다른 자는 공격하고 당파가 같은 자는 옹호하니, 김휘가 분하고 원통함을 이기지 못하여 갑작스럽게 상소한 것이다. 말이 비록 사리에 맞지 않았으나 진실로 세상을 개탄하는 뜻에서 나왔는데도 저들은 도리어 좋은 자리를 엿보고 희망하는 것이라 의심하고, 남의 약점을 고해 바치고 슬프게 하소연하는 것이라 모욕하니, 너무 심하지 않은가. 이인환(李寅煥)이, 함부로 당론(黨論)을 만든다고 김휘를 배척하였으니 참으로 가소롭다.
○戊戌/戶曹參判金徽, 上疏略曰:
循例調用, 銓曹之責, 簡拔陞擢, 人主之柄。 格外之恩, 雖不可人人而輕施, 如有其人可用, 其才可任, 而乏板援吹噓之力, 沈淪汨沒, 不能自達, 人君或令加望, 或用特除, 何損於政理, 何害於愼簡? 而柳㝚必欲使殿下, 見其可用, 而不能用, 一任銓曹之注擬, 而莫之違者, 抑獨何意? 卽今局外之人, 以中批陞擢, 不無其人, 而稀踈單〔孑〕 , 落落如晨星。 若使㝚說, 得行朝廷, 將渾然一色, 異己之人, 無一廁跡於其間, 朝家用人, 豈容如是? 至於交通宮禁, 締結幽陰, 在國家何等亂象, 在士夫何等醜行? 居可言之地, 如有所聞, 卽宜直斥明指, 而中藏機弩, 外若泛論, 上以熒惑君心, 下以疑懼臣隣, 其意有難知矣。 若使廷臣, 戮力王室, 盡心國事, 如排擯許積之爲, 則百事可做, 惜乎! 此輩之晝宵耿耿, 只在於斥去異己, 民憂國計, 漫不留意。 此臣所以中夜憂歎, 繼之以流涕者也。 且近日臺官, 還收李䎘削奪之啓, 至以風采如是等語爲辭。 䎘之所論三人, 皆與䎘異己之人, 故欲避伐異之名, 因論及趙珩, 爲趙珩者, 何其厄哉? 其用意之傾側, 士夫所羞, 而還收之請, 累月不止。 臺官, 耳目之臣也, 不顧公議, 黨同如此, 宜乎, 私意橫流, 國勢之日就陵夷也。 先是, 掌令柳㝚, 疏陳中批加望之未安, 又擧光海時, 交通宮禁, 締結幽陰之弊, 爲言, 故徽疏如此。 時黨論日痼, 如柳㝚者, 以時輩鷹犬, 摶擊異己, 扶植同黨, 金徽不勝憤忿, 猝然投疏。 言雖不中, 實出慨世之意, 而彼輩反以窺覘希望疑之, 告訐哀號辱之, 豈不已甚哉? 李寅煥斥徽, 以恣爲黨論, 良可笑也。
【태백산사고본】 21책 21권 48장 A면【국편영인본】 37책 54면
【분류】정론-정론(政論) / 사법-탄핵(彈劾) / 사법-치안(治安) /
12월 4일 기해
상이 비국의 여러 신하를 인견하였다. 경상 감사 이관징(李觀徵)의 장계로 인하여 백성의 역(役)을 의논하여 감하였다. 삼남 지방 중 재해를 극심하게 입은 고을은 미포(米布)의 반을 감하고, 그 다음은 삼분의 일을 감하고, 여러 도(道)는 모두 월과미(月課米)를 중지하거나 감하였다.
충청 감사 맹주서(孟胄瑞)가 조정을 하직하니, 상이 불러서 면려(勉勵)하고 활과 화살을 하사하였다.
12월 5일 경자
이합을 집의로, 유명현(柳命賢)·김총을 지평으로, 한태동(韓泰東)·임상원(任相元)을 정언으로, 박세당(朴世堂)을 응교로, 조형(趙珩)을 좌참찬으로, 장선징을 우참찬으로 삼았다.
12월 10일 을사
이무(李堥)를 집의로, 신익상(申翼相)을 부교리로, 유상운(柳尙運)을 수찬으로 삼았다.
12월 12일 정미
정면(鄭勔)·유상운(柳尙運)을 장령으로, 이헌을 헌납으로, 조사석(趙師錫)을 이조 좌랑으로, 심수량(沈壽亮)을 검열로 삼았다.
12월 13일 무신
상이 친히 나아가 서울과 지방의 사형수를 일차 심리하였다. 장령 유상운이 아뢰기를,
"근래 인심이 좋지 못하고 행위가 날로 교묘하여, 기회를 타서 남의 헛점을 들추고 좋은 자리를 엿보고 희망하는 자가 전후로 잇따라 일어나고 있습니다. 지금 김휘(金徽)가 올린 소는 유연이 진달한 것을 공격하고 대간이 논한 것을 배척하여 허다한 말들이 매우 바르지 못합니다. 유연이 이른바 ‘궁중을 왕래하며 비밀리 결탁한다.’는 것이 신은 그 가리키는 뜻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으나, 김휘가 여기에 대하여 갑자기 불평을 품고 앞장서서 변명하는 것은 또한 무슨 뜻입니까? 임금이 특지로 관직을 제수하는 일은 예로부터 간혹 있었지만, 뒷날에 가서는 반드시 폐단이 있기 때문에 옛사람들도 비난하는 의논이 많았습니다. 지금 김휘의 생각은 오히려 특지로 제수하지 않을까 두려워한 나머지 조급히 서둘러 많은 말을 하여 인증(引證)한 다음, 도리어 가려 뽑는 권한을 전적으로 특지로 제수한 데다 돌리고 있으니 이 어찌 신하로서 감히 권하여 인도해야 할 일이겠습니까. 더구나 ‘혼연일색(渾然一色)’이니 ‘낙낙신성(落落晨星)’이니 하는 등의 말은 곧 남의 나쁜 일을 고발하는 것 같고 또 슬프게 하소연하는 것 같아 마음가짐이 구차스럽고 정상이 가증스럽습니다.
이숙의 경우에 있어서는 언사(言事)로 죄를 얻고 있는 참인데 또 이어서 억지로 억측을 해 죄안(罪案)을 얽어 만들었고, 대간들이 환수를 청한 계사는 실로 공의(公議)를 따르는 것인데 문자(文字)를 들춰내어 공공연히 비방하였으니 넘보려는 꾀와 희망하는 작태가 분명해서 엄폐하기 어려우니 호조 참판 김휘를 삭탈 관작하고 성문 밖으로 내쫓으소서."
하니, 상이 파직하라고만 명하였다.
12월 14일 기유
밤에 달이 동정(東井)에 들어갔다.
12월 17일 임자
유성이 문성(文星) 위에서 나왔다.
주인을 살해한 죄인 생금(生金)이 사형되었다.
형판(刑判) 권대운(權大運), 공판(工判) 이정영(李正英)에게 비국 제조(備局提調)를 겸하게 하였다.
12월 18일 계축
상이 흥정당(興政堂)에 나아가 서울과 지방의 사형수를 삼차 심리하였다. 무릇 11인 중에 사형으로 결정된 자는 9인이었다. 사형수 중에 어부(御府)049) 의 백사(白絲)를 훔친 자가 있었는데 상이 이르기를,
"지극히 어리석고 무지하여 이 지경까지 이르렀으니 사형으로 처단하기에는 원통하다. 사형을 감하여 정배(定配)하라."
하였다. 또 밤에 남의 집에 들어가서 체포에 항거하는 법을 범한 자가 있었다. 상이 이르기를,
"흉년에 벼 두 속(束)을 훔친 것은 목숨을 구하려는 계책에서 나온 것이니, 그 정상이 참으로 불쌍하다. 그가 칼을 빼어 체포에 항거한 것은 다만 스스로를 구하려는 것이지 상대를 해치고자 하는 뜻에서 나온 것은 아니다. 또한 정배하라."
하였다. 삼차 심리를 파한 뒤에 상이 대신(大臣) 및 비국의 여러 재신을 인견하였다. 우의정 김수흥이 아뢰기를,
"호서(湖西)의 유생들이 상소하여 대동미(大同米)를 더 바치기를 원하였습니다. 당초에 호서의 백성들에게 대동법의 편리 여부를 묻고자 했던 것은 대개 민심을 알지 못한 데에서 나온 것이었으나, 지금 이 소를 보니 민심을 또한 알 수 있습니다. 만약 변통하지 않는다면 선혜청은 결코 지탱하기 어렵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신임 감사가 내려갈 때에도 변통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으로 말하였다."
하였다. 호조 판서 민유중(閔維重)이 아뢰기를,
"청주(淸州)의 백성은 가장 완악하고 사납다 합니다. 그러나 대동법을 시행한 뒤로 제반의 공물(貢物)은 대동(大同)에서 나오니, 비록 청주의 백성이라도 대동법을 혁파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니, 교리 이인환(李寅煥)이 아뢰기를,
"신은 막 호서에서 왔습니다. 듣건대 더 납부하겠다는 청은 부득이한 데서 나온 것인데, 만약 더 납부하게 한다면 실로 혁파하는 것과 별로 다를 것이 없습니다."
하고, 수흥이 아뢰기를,
"이 또한 청주의 의론입니다. 【인환은 본디 청주 사람이기 때문이다.】 또한 인환은 나이가 젊고 사세(事勢)를 몰라서 이런 말을 한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인환의 말 때문에 오랫동안 망설이다가, 대신(大臣)들이 여러번 청하자 마침내 대동미를 더 징수하게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대동법은 비록 토지에 따라 공물을 정하는 선왕의 뜻은 아니지만, 백성에게 편리하고 나라를 풍족하게 하는 후세의 정치로 이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 진실로 제도를 조절하여 수입을 헤아려 지출한다면 자연 부족할 염려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않아 연이어 가뭄이 들어 헐벗은 백성에게 세금을 더 거두어 들이고자 하니, 이 어찌 민심이 원하는 것이겠는가. 그렇지 않으면 또 장차 이미 시행되고 있는 훌륭한 법을 혁파하여 거듭 이 백성을 고달프게 한 채 돌아보지 않을 것이니, 나라를 도모하는 방도가 잘못되었다고 하겠다. 대저 공부(貢賦)는 일정하고 용도(用度)는 무한하니, 진실로 절도있게 쓰지 않는다면 비록 해마다 공부(貢賦)가 증가하더라도 넉넉할 수 있겠는가. 인환은 다만 민심이 원하지 않는 것만 말하고 용도를 절약하여 백성을 사랑해야 한다는 말을 가지고 반복 개진하여 임금과 재상의 마음을 깨닫게 하지 못했으니, 수흥이 곧 인환을 연소하다고 업신여겨 모욕한 것은 대개 인환 자신이 그런 말을 듣게끔 행동한 것이다. 상이 또 전라 좌수사의 장계를 가지고 여러 신하들에게 묻기를, "통영(統營)에도 격군(格軍)에게 줄 곡식이 없는가?" 하니, 훈련 대장 유혁연(柳赫然)이 대답하기를, "통영에도 줄 곡식이 부족합니다. 신은 일찍이 한 가지 계책을 생각하였는데, 만약 여러 포(浦)에 제방을 쌓아 밭을 만든 뒤 토병(土兵)으로 하여금 들어가 경작하도록 하고 그 포(布)를 거두어 격군에게 주면 가장 편리할 것입니다." 하니, 민유중이 아뢰기를, "영남은 조수(潮水)가 멀리 올라가지 않기 때문에 제방을 쌓은 곳이 적습니다. 그러나 호남의 형세는 신이 본 바로는 1, 2백 석(碩) 혹은 3, 4백 석이 생산되는 개간한 땅을 많이 갖고 있습니다. 혹은 승군(僧軍) 및 연군(煙軍)050) 을 써서 제방을 쌓기도 하는데, 10년이 못 되어 모두 좋은 밭이 됩니다. 이와 같이 하면 군량이 넉넉하고 바다의 방비도 굳건하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수흥이 아뢰기를, "바다를 방어하는 일은 관리를 보내어 살피지 않은 지 거의 30여 년이 되어 실로 소략하게 되었으니, 지금 마땅히 별도로 어사(御史)를 보내야 합니다." 하니, 상이 그렇겠다고 하였다. 또 아뢰기를, "배를 만드는 목재를 기르는 곳과 말을 먹여 기르는 장소를 애초에 구별하지 않아 서로 해가 되었습니다. 이것도 마땅히 형세를 살펴서 변통을 해야 합니다." 하니, 드디어 어사를 삼남(三南)에 보내기로 결정하여 ‘선재 적간 어사(船材摘奸御史)’라고 호칭하고, 이어 사복시의 관원과 함께 가도록 명하였다. 유중이 아뢰기를, "왜역(倭譯) 한시열(韓時說)을 바야흐로 붙잡아 가두어 두었으니, 마땅히 중률(重律)로 처치하여 그 나머지 사람들을 경계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우두머리 역관을 처참(處斬)하면 반드시 지난날과 같은 일은 없을 것이니 마땅히 이로써 율(律)을 정하도록 하라." 하였다. 수흥이 아뢰기를, "시열의 문목(問目)051) 안에는 마땅히 ‘교통(交通)’이란 한 조목을 넣어야 합니다." 하니, 김만기(金萬基)가 아뢰기를, "교통(交通) 한 조목은 그 내막이 비록 의심스럽지만 자취로 드러난 바가 없어 문목(問目)으로 삼기는 어려울 듯싶습니다. 그리고 처참으로 율(律)을 삼는다면 앞으로 왜인(倭人)이 들어주기 어려운 청을 만약 계속하여 해 올 경우 그때마다 우두머리 역관을 참할 수 없으며, 이미 법을 정하고서 참하지 않으면 나라의 체모에 손상이 될 것입니다." 하고, 수흥이 아뢰기를, "죄가 비록 경중(輕重)이 있으나 왜역(倭譯) 김근행(金謹行)도 그대로 둘 수 없으니 똑같이 잡아다 심문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당시의 의논은 왜관을 옮겨 달라는 왜로(倭虜)들의 청이 역관의 무리가 몰래 사주한 데서 나왔다고 여겼기 때문에 분통해 하지 않은 이가 없었으나, 한시열의 무리들은 끝내 죽음을 면하였다. 이 때문에 장령 유상운(柳尙運)이 이전 일을 논계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교리 이인환(李寅煥)이 나아가 아뢰기를, "김휘(金徽)의 소는 함부로 당론(黨論)을 만들었으니,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가 남의 약점을 찌르는 작태는 심히 가증스럽습니다. 통렬히 배척하고 깊이 징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조정에서 스스로 처치할 방도가 있다." 하였다. 인환이 아뢰기를, "예로부터 바르지 못한 논의는 반드시 군부(君父)에게 아첨하고 빌붙었습니다. 앞으로의 근심이 어찌 다만 김휘 한 사람뿐이겠습니까." 하니, 상이 답하지 않았다. 우승지 심재(沈梓)가 나아가 아뢰기를, "조정이 불행하여 나이 많은 원로들이 매우 적습니다. 정2품 이상은 나이 70이 된 사람이 없으며, 기로소 당상은 다만 이구원(李久源) 1인 뿐인데 역시 외방(外方)에 있습니다. 신은 일찍이 듣건대, 선조조(宣祖朝)에서 대신(大臣)의 진달로 인하여 종2품 중에 일찍기 선조(先朝) 시종(侍從)을 지내고 나이 70이 넘는 사람은 특별히 기로소에 입참(入參)을 허락한다고 하였다니, 매우 성대한 일입니다. 지금 종2품 중에 세 조정의 시종을 지낸 자로서 적임자가 없지 않으니, 대신이 입시(入侍)하면 당부(當否)를 물어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고, 수흥도 상에게 허락하도록 청하자, 드디어 이조 참판 강백년(姜栢年)을 기로소 당상으로 삼았다.
【태백산사고본】 21책 21권 49장 A면【국편영인본】 37책 54면
【분류】왕실-행행(行幸) / 정론-정론(政論) / 정론-간쟁(諫諍) / 재정-공물(貢物) / 외교-왜(倭)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인사-관리(管理) / 사법-재판(裁判) / 사법-행형(行刑) / 사법-탄핵(彈劾) / 역사-사학(史學) / 군사-병참(兵站) / 군사-군역(軍役) / 군사-관방(關防) / 군사-특수군(特殊軍)
[註 049] 어부(御府) : 궁중 창고.[註 050] 연군(煙軍) : 민가에서 출역(出役)하는 인부.[註 051] 문목(問目) : 죄인을 심문하는 조목.
ⓒ 한국고전번역원
사신은 논한다. 대동법은 비록 토지에 따라 공물을 정하는 선왕의 뜻은 아니지만, 백성에게 편리하고 나라를 풍족하게 하는 후세의 정치로 이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 진실로 제도를 조절하여 수입을 헤아려 지출한다면 자연 부족할 염려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않아 연이어 가뭄이 들어 헐벗은 백성에게 세금을 더 거두어 들이고자 하니, 이 어찌 민심이 원하는 것이겠는가. 그렇지 않으면 또 장차 이미 시행되고 있는 훌륭한 법을 혁파하여 거듭 이 백성을 고달프게 한 채 돌아보지 않을 것이니, 나라를 도모하는 방도가 잘못되었다고 하겠다. 대저 공부(貢賦)는 일정하고 용도(用度)는 무한하니, 진실로 절도있게 쓰지 않는다면 비록 해마다 공부(貢賦)가 증가하더라도 넉넉할 수 있겠는가. 인환은 다만 민심이 원하지 않는 것만 말하고 용도를 절약하여 백성을 사랑해야 한다는 말을 가지고 반복 개진하여 임금과 재상의 마음을 깨닫게 하지 못했으니, 수흥이 곧 인환을 연소하다고 업신여겨 모욕한 것은 대개 인환 자신이 그런 말을 듣게끔 행동한 것이다.
상이 또 전라 좌수사의 장계를 가지고 여러 신하들에게 묻기를,
"통영(統營)에도 격군(格軍)에게 줄 곡식이 없는가?"
하니, 훈련 대장 유혁연(柳赫然)이 대답하기를,
"통영에도 줄 곡식이 부족합니다. 신은 일찍이 한 가지 계책을 생각하였는데, 만약 여러 포(浦)에 제방을 쌓아 밭을 만든 뒤 토병(土兵)으로 하여금 들어가 경작하도록 하고 그 포(布)를 거두어 격군에게 주면 가장 편리할 것입니다."
하니, 민유중이 아뢰기를,
"영남은 조수(潮水)가 멀리 올라가지 않기 때문에 제방을 쌓은 곳이 적습니다. 그러나 호남의 형세는 신이 본 바로는 1, 2백 석(碩) 혹은 3, 4백 석이 생산되는 개간한 땅을 많이 갖고 있습니다. 혹은 승군(僧軍) 및 연군(煙軍)050) 을 써서 제방을 쌓기도 하는데, 10년이 못 되어 모두 좋은 밭이 됩니다. 이와 같이 하면 군량이 넉넉하고 바다의 방비도 굳건하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수흥이 아뢰기를,
"바다를 방어하는 일은 관리를 보내어 살피지 않은 지 거의 30여 년이 되어 실로 소략하게 되었으니, 지금 마땅히 별도로 어사(御史)를 보내야 합니다."
하니, 상이 그렇겠다고 하였다. 또 아뢰기를,
"배를 만드는 목재를 기르는 곳과 말을 먹여 기르는 장소를 애초에 구별하지 않아 서로 해가 되었습니다. 이것도 마땅히 형세를 살펴서 변통을 해야 합니다."
하니, 드디어 어사를 삼남(三南)에 보내기로 결정하여 ‘선재 적간 어사(船材摘奸御史)’라고 호칭하고, 이어 사복시의 관원과 함께 가도록 명하였다. 유중이 아뢰기를,
"왜역(倭譯) 한시열(韓時說)을 바야흐로 붙잡아 가두어 두었으니, 마땅히 중률(重律)로 처치하여 그 나머지 사람들을 경계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우두머리 역관을 처참(處斬)하면 반드시 지난날과 같은 일은 없을 것이니 마땅히 이로써 율(律)을 정하도록 하라."
하였다. 수흥이 아뢰기를,
"시열의 문목(問目)051) 안에는 마땅히 ‘교통(交通)’이란 한 조목을 넣어야 합니다."
하니, 김만기(金萬基)가 아뢰기를,
"교통(交通) 한 조목은 그 내막이 비록 의심스럽지만 자취로 드러난 바가 없어 문목(問目)으로 삼기는 어려울 듯싶습니다. 그리고 처참으로 율(律)을 삼는다면 앞으로 왜인(倭人)이 들어주기 어려운 청을 만약 계속하여 해 올 경우 그때마다 우두머리 역관을 참할 수 없으며, 이미 법을 정하고서 참하지 않으면 나라의 체모에 손상이 될 것입니다."
하고, 수흥이 아뢰기를,
"죄가 비록 경중(輕重)이 있으나 왜역(倭譯) 김근행(金謹行)도 그대로 둘 수 없으니 똑같이 잡아다 심문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당시의 의논은 왜관을 옮겨 달라는 왜로(倭虜)들의 청이 역관의 무리가 몰래 사주한 데서 나왔다고 여겼기 때문에 분통해 하지 않은 이가 없었으나, 한시열의 무리들은 끝내 죽음을 면하였다. 이 때문에 장령 유상운(柳尙運)이 이전 일을 논계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교리 이인환(李寅煥)이 나아가 아뢰기를,
"김휘(金徽)의 소는 함부로 당론(黨論)을 만들었으니,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가 남의 약점을 찌르는 작태는 심히 가증스럽습니다. 통렬히 배척하고 깊이 징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조정에서 스스로 처치할 방도가 있다."
하였다. 인환이 아뢰기를,
"예로부터 바르지 못한 논의는 반드시 군부(君父)에게 아첨하고 빌붙었습니다. 앞으로의 근심이 어찌 다만 김휘 한 사람뿐이겠습니까."
하니, 상이 답하지 않았다. 우승지 심재(沈梓)가 나아가 아뢰기를,
"조정이 불행하여 나이 많은 원로들이 매우 적습니다. 정2품 이상은 나이 70이 된 사람이 없으며, 기로소 당상은 다만 이구원(李久源) 1인 뿐인데 역시 외방(外方)에 있습니다. 신은 일찍이 듣건대, 선조조(宣祖朝)에서 대신(大臣)의 진달로 인하여 종2품 중에 일찍기 선조(先朝) 시종(侍從)을 지내고 나이 70이 넘는 사람은 특별히 기로소에 입참(入參)을 허락한다고 하였다니, 매우 성대한 일입니다. 지금 종2품 중에 세 조정의 시종을 지낸 자로서 적임자가 없지 않으니, 대신이 입시(入侍)하면 당부(當否)를 물어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고, 수흥도 상에게 허락하도록 청하자, 드디어 이조 참판 강백년(姜栢年)을 기로소 당상으로 삼았다.
상이 대신(大臣)에게 이르기를,
"구릉(舊陵) 안의 일은 능을 파고 나서 비로소 알았으니, 영림 부령(靈林副令) 이익수(李翼秀)에게는 상이 없을 수 없다."
하니, 김수흥이 아뢰기를,
"오직 상의 재량에 달려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가자(加資)를 명하고, 이어 승지에게 이르기를,
"다만 가자만 하고 아무런 말이 없으면 또한 분명하지 않다. 구릉을 열 때 놀란 마음이 봉심(奉審)하던 날보다 배나 되니, 만약 천릉의 공을 논한다면 익수가 첫째가 되어야 한다. 이로써 내용을 만들어 가자해야 한다."
하였다.
부교리 신익상(申翼相)이 일찍이 사관(史官)을 맡았을 때 역사를 수찬하는 일을 마치지 못하였다고 상소하여 면직을 청하고, 이어 시사(時事)를 논하였다. 그 대략에,
"국가가 비록 백성을 보호하는 마음을 가졌다고는 하나 정사에는 백성을 보호하는 실상이 없습니다. 연이어 기근이 들어 백성의 목숨이 끊어지려 하는데도 무릇 세금을 독촉해 거두는 것은 모두 백성을 못살게 하는 정치입니다. 어린아이를 군적에 올려 세금을 부과하는 아약 첨정(兒弱簽丁)과 죽은 사람에게 군포를 받는 백골 징포(白骨徵布)와 족속에게 대신 거두는 일족 침학(一族侵虐)의 폐단에 있어서는 실로 천하의 심한 고통이며 재앙을 불러오는 큰 뿌리입니다. 조사하여 그릇된 것을 바로잡아서 어린이와 죽은 자에 대해 모두 탕척하고 도망자의 부자·형제 외에 먼 일가를 침학하는 폐단을 모두 없애소서."
하였다. 또 아뢰기를,
"조정이 백성들의 일을 두루 생각하고 환자[還上]를 감하여 받아들이도록 한 명령은 어느 해고 없던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토호(土豪)는 세금을 독촉하여 거두어도 아무렇지 않는데 백성들은 심지어 전답을 팔아 빚을 갚고는 밤낮으로 원통하다고 울부짖고 있으나 하소연할 곳이 없습니다. 백성을 구휼하는 은택이 오막살이 집에까지 미치지 못하니 통탄스러움을 금할 수 있겠습니까. 1, 2년간 바치지 못한 것을 골라내어 모두 탕감하고 민심을 위로하소서."
하였다. 또 아뢰기를,
"백성의 기쁨과 슬픔은 수령에게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수령을 정밀하게 선발하는 것이 오늘의 절실한 일인데 자주 수령을 바꾸니 진실로 큰 폐단입니다. 비록 시종(侍從)에서 외직으로 나온 자라도 3년 안에는 체직하여 바꾸지 않도록 한다면 백성들이 입는 은혜가 적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사론(士論)이 둘로 나뉘고 색목(色目)도 여러 갈래로 갈린 지 지금 백 년이 되었으나 화합될 날이 없습니다. 전하께서 이 습속을 타파하고자 한 마음이 어찌 한량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붕당을 타파하는 데는 요령이 있습니다. 진실로 마음을 비워 처리하고 자기를 바르게 하여 솔선 수범하며 남북동서의 다름을 모두 잊고 다만 사정(邪正)·시비(是非)의 나뉨을 분명히 한다면 오늘날 뭇 신하들이 누가 마음과 뜻을 깨끗이 하여 전하를 우러러 본받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의 현부(賢否)와 일의 시비를 도무지 성찰하지 않고 한갓 당을 미워하는 마음만을 가슴 속에 간직하고 사람마다 의심하고 일마다 억측하십니다.
요사이 일로써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송준길(宋浚吉)은 산림의 학덕(學德) 높은 선비인데, 죽음에 임하여 소회를 다 말씀드린 것이 무슨 당론에 관계되었다고 의심하기를 너무 심하게 하고 대우하기를 너무 박하게 하신단 말입니까. 생전에 한 자의 비답도 내리지 않고 제때에 의원을 보내어 병을 묻지도 않아 인조와 효종께서 스승으로 높이 받들던 신하로 하여금 충심을 말하게 하지 못하고 황천에서도 한을 품게 하였습니다. 이상(李翔)은 말을 가려서 할 줄 몰라 광망(狂妄) 경솔(輕率)한 것에 불과한데도 중죄(重罪)에 처했고, 이민적(李敏迪)은 마음에 품고 있는 것을 대략 진술한 것으로서 결단코 다른 생각은 없었는데 한 번 폐해져서 죽음에 이르렀고, 기타 견책을 받은 조정의 신하가 전후로 잇달았습니다. 전하의 처분은 이미 지극한 공정성을 잃었으니, 남의 약점을 들춰낸 김휘의 상소가 있게 된 것은 괴이하게 여길 것조차도 없습니다. 민희(閔熙)에게 조금이라도 청렴하고 근신하는 절조가 있었다면 이숙의 논핵은 일어나지도 않았을 것이며, 권력이 상에게 있지 않다는 말이 대신(大臣)에게서 나오지 않았다면 김만중의 말도 나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지금 시비의 근원은 따지지 않고 반드시 당파가 다른 사람을 공격한다는 죄로 말하는 사람의 입을 다물게 하려고 하니, 이것이 어찌 맑은 조정의 아름다운 일이겠습니까."
하였다. 또 아뢰기를,
"전하께서 민정중을 죄준 것은 이미 정도가 지나친 거조였으니, 성호징이 간쟁한 것은 직분상 당연합니다. 그런데도 아침에 간하는 글을 올리고서 저녁에 먼 변방으로 귀양을 갔습니다. 국가에서 언관(言官)을 두는 것은 허물을 듣고자 함인데 허물이 있는데도 말을 하지 않는다면 그 죄는 무겁습니다. 어찌 언어와 문자로 죄를 삼아 나라 사람들에게 언로(言路)가 넓지 못함을 보여야 되겠습니까.
지난번 청풍 부원군 김우명이 마음에 품고 있는 생각이 있으면 반드시 말한다는 뜻을 핑계하여 상소하고 면대를 청하였는데 거조가 부산하였습니다. 그 말의 옳고 그름을 따질 것 없이 국구(國舅)가 정사에 간여한 것이 전하로부터 시작되어 해와 달의 밝음 속에서 조정을 높힐 수 없고, 말세의 위태롭고 어지러운 조짐을 열어 놓게 되었으니, 보고 듣는 자가 놀라고 탄식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신은 저으기 국가를 위하여 걱정합니다.
전하는 선왕께서 동기(同氣)처럼 여기라는 분부를 생각하여 복창군(福昌君) 이정(李楨) 등을 보통 사람보다 훨씬 더 총애하였습니다. 정 등은 마땅히 몸을 단속하여 행실을 닦고 겸손하게 자신을 유지하여 세상에 드문 큰 은혜에 보답해야 마땅한데, 이런 생각은 하지 않고 도리어 교만을 기르고 성상의 일시적인 총애를 빙자하여 자기의 방종하고 사치한 발판으로 삼았습니다. 공자(公子)는 국가의 간성이니 이와 같이 하는 것은 마땅치 않습니다. 또, 숭선군(崇善君)이 집을 짓는데 국가에서 명례궁(明禮宮) 터를 떼어주어 동산을 넓히게 하였습니다. 정해진 제도를 따르지 않고 그 집을 넓히게 했으니, 이미 밝은 세상의 훌륭한 법에 어긋난 것이며 또 예로써 사랑하는 도리도 아닙니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조정에 시비가 분명하지 않고 흑백이 정해지지 않아 현사(賢邪)가 섞여 있습니다. 신은 이상진(李尙眞)과 정유악(鄭維岳)의 일에 대해서 괴이하게 여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정유악이 이상진을 논핵한 것은 관리들이 서로 규계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상진이 과연 선릉(先陵)을 봉심할 때에 병을 핑계대었다면 파직은 가벼운 처벌이며, 유악의 말과 같이 영화를 탐하여 염치가 없으며 거만하게 위를 속였다면 폐하여 내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그렇지 않은 점이 있습니다. 상진이 유악을 천히 여기고 미워함은 모든 사람들이 아는 바입니다. 이에 유악이 선수를 쳐서 사람을 제압하는 술수로써 한번 찔러 꿰뚫는 계교를 부리고자 종이 가득히 이말 저말을 주워 모았으니 사람을 해치려는 작태를 감추기 어렵습니다. 그런데도 삼사(三司)·시종(侍從)의 반열에 끼어 있게 하였으니, 지난번에 가령 유악이 진실로 공평된 마음과 곧은 말로써 조정을 바르게 하여 무너진 기강을 진작시켰다면, 장차 무슨 상으로 대우할 것입니까?
지난번 신경윤(愼景尹)이 김익훈(金益勳)을 논핵할 때에 그 당시 논자들은 경윤을 그르다고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수 년이 못되어 익훈은 탄핵을 견뎌내고 발탁이 되어 중임(重任)을 맡았으나, 경윤은 외읍(外邑)으로 쫓겨나 다시는 청반(淸班)에 끼이지 못하였습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신 ‘굽은 사람을 들어 쓰고 모든 정직한 사람을 버려둔다.’는 말이 바로 이것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신은 저으기 조정을 위하여 수치스럽게 여깁니다.
김익렴(金益廉)의 간사함은 사람들이 모두 타기할 뿐만 아니라 전하께서도 통촉한 바입니다. 그런데도 지난번 전조(銓曺)가 공론을 돌아보지 않고 연달아 사유(師儒)의 관직에 의망하였으니 공평하게 전형하여 뽑는 의의가 어디에 있습니까. 잘못된 것이 적지 않은데 대각(臺閣)에서는 바로잡으려고도 하지 않으니, 저 전관(銓官)들이 무엇을 꺼려하여 신중히 하겠습니까. 그 당시 대관(臺官)들은 허수아비로 앉아 있었다고 말하더라도 괜찮습니다.
박천영(朴千榮)의 과거시험 답안지에 이미 보태고 고친 흔적이 있으니 대계(臺啓)가 그를 삭제하자고 청한 것은 다만 국법을 엄하게 하고 뒷날의 폐단을 염려하는 데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천영을 위해 신구(伸救)하는 소장으로 인하여 대신(大臣)과 연신(筵臣)이 되풀이해 말을 해 기어이 다시 합격시키고야 말려고 하였으니, 과장(科場)의 중한 법을 문란하게 해서야 되겠습니까.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조금이라도 기강이 있었다면 이런 말은 필시 임금의 귀에까지 들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번 천릉의 변고야말로 예전에 없었던 일로써 역사를 감독했던 여러 신하들은 그 죄를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다만 생각건대, 정치화(鄭致和)는 일찍이 대신을 지냈는데 어찌 반드시 감옥에서 욕을 보인 후에야 처벌할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치화를 대우함이 너무 박한데 ‘어찌 사형을 면할 수 있겠는가.’라는 분부는 더욱 대신에게 할 말이 아닙니다. 신명규(申命圭)·이정기(李鼎基) 등에 대해서는 전하께서 여러 사람의 의논을 물리치고 반드시 베려고 하시는데, 오늘 간쟁하는 것이 어찌 감히 두 사람을 애석히 여겨서 하는 말이겠습니까. 바로 천지와 같이 살리기를 좋아하는 전하의 덕에 누가 될까 염려해서입니다. 지금 전하께서 비록 명규 등으로 하여금 머리를 나란히 하고 죽음에 나가게 하더라도, 땅속의 귀신들이 슬피 부르짖으며 눈물을 흘리면서 임금과 어버이를 영원히 이별하는 형상을 생각한다면 어찌 전하의 마음 속에 불쌍한 느낌이 들어 척연히 후회하는 생각이 있지 않겠습니까."
하니, 상이 답하기를,
"과인에게 경계하는 말을 끊임없이 해 주니 매우 가상하다. 그 중에 의논해서 처리할 만한 한두 가지는 마땅히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의논해 처리하도록 하겠다만, 그 밖의 말들은 심히 추켜세우거나 깎아내려는 의사가 있으니 나는 그것이 온당한 줄을 모르겠다. 역사를 편수하는 것은 국가의 막중한 일인데 재촉한 뒤에도 지금까지 지체되고 있다. 위촉이 온편치 않다 하여 사직하는 것은 더욱 안 될 말이다."
하였다.
12월 19일 갑인
조형(趙珩)을 예조 판서로, 신정(申晸)을 대사성으로, 이동로(李東老)를 집의로, 박세당(朴世堂)을 사간으로, 이휘진(李彙晋)을 장령으로, 강석구(姜碩耉)·박원도(朴元度)를 지평으로, 윤지선(尹趾善)를 헌납으로, 이단석(李端錫)을 승지로 삼고, 영림 부정(靈林副正) 이익수(李翼秀)에게 명선계(明善階)052) 를 가하고 특별히 도정(都正)에 임명하였다. 【소를 올려 능을 옮긴 공 때문이다.】 전동흘(全東屹)을 함경 남도 병사로 삼았다.
전강(殿講)에서 1등한 진사 남천상(南天祥)에게 2분수를 주고, 그 아래 3인에게는 각각 1 분수를 주었다.
우의정 김수흥이 상차하여 아뢰기를,
"일찍이 박천영(朴千榮)의 재합격을 논열할 때에 거듭 신익상의 배척을 받았으니, 신의 직을 체직시켜 공론에 답하소서."
하니, 상이 관대하게 비답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이조 참판 강백년(姜栢年), 참의 김익경(金益炅)이 또한 상소하여 사면(辭免)했는데 이는 일찍이 김익렴(金益廉)을 관관(館官)에 의망했기 때문이었다. 상이 모두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교리 정유악이 상소하기를,
"신이 이상진(李尙眞)을 논핵하기 전에 상진이 신을 천히 여기고 미워하였다는 말을 신은 듣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상진이 일찍이 이조 판서로 있을 때 신을 청현(淸顯)에 의망하였는데 두루 거치지 않는 데가 거의 없었습니다. 상진의 마음 속에 비록 혹 천히 여기는 것이 평소에 있었더라도 이미 사람들에게 말한 일이 없었고 또 정사(政事)를 취사하는 사이에 보이지 않았으니, 신이 어찌 상진의 마음을 헤아려 원망하고 유감으로 여겨서 이같이 보복할 계책을 했겠습니까."
하였다. 또 아뢰기를,
"요사이 대관(臺官)은 비록 논핵할 만한 일을 보아도 조금이라도 세도가 있는 곳에는 후환을 염려하여 서로 경계하고 조심스레 피합니다. 그런데 우매한 신만은 한갓 직책만 생각한 채 함부로 재상을 논핵하였으니 오늘 엎어지고 자빠지게 된 것을 어찌 면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정유악은 신익상의 배척을 당하였기 때문에 상소하여 변명하기를 이와 같이 하였다.
12월 21일 병진
비국이 대신의 뜻으로 아뢰기를,
"도목 대정(都目大政)은 반드시 기한 안에 행해야 하는데 이조의 세 당상이 모두 인피하고 들어갔으니 설을 쇤 뒤로 연기해서 행할 수 밖에 없습니다. 각 고을의 수령(守令) 자리가 비게 되는 폐단이 더욱 염려스러우니, 모두 즉시 패초(牌招)하여 기한 안에 도목 정사를 보게 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
고 하였다.
대사간 이혜가 신익상의 상소 안에 ‘대관(臺官)이 허수아비처럼 앉아 있다.’는 배척이 있었기 때문에 인피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헌부가 처치하여 출사시키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전라 감사 이동직(李東稷)이 치계하기를,
"무주현(茂朱縣)의 적상 산성(赤裳山城)은 천 길이나 되는 견고한 벽이 깍아지른 듯이 사면에 서 있으니 진실로 천연의 요새라고 할 만합니다. 더구나 호서·호남·영남의 세 도가 접하는 곳에 자리잡고 있으니, 만약 양곡을 비축하고 병사를 훈련하여 큰 진(鎭)을 만들면 혹시 위급한 일이 있더라도 산군(山郡) 일대는 거의 적에게 함락당하는 환란을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본현(本縣)은 금산(錦山)의 안성면(安城面)과 경계가 서로 접해 있고 길도 가까우므로 의논하는 자들이 이르기를 ‘이곳을 떼어붙여 현(縣)을 승격시켜 부(府)로 만들고, 현감을 승진시켜 부사로 만들어 명위(名位)를 중하게 하여 큰 진(鎭)을 이루면 두메 산골의 백성들이 여기에 의지하고 방어도 매우 견고하게 될 것입니다.’라고 합니다. 이것은 크게 개혁하는 일과 관련되니 비록 감히 경솔하게 의논할 수 없으나, 본현의 임무는 무겁지만 지위가 가벼워 호령이 속읍에 시행되지 않고 있습니다. 만약 요사이 장성(長城)053) 의 예에 따라 부사(府使)로 승격시키면 체면이 절로 각별해져서 일도 마땅함을 얻을 듯싶습니다."
하였다. 김수흥이 상에게 아뢰기를,
"무주는 영호남에 위치한 요충지이니 마땅히 유의할 곳입니다. 금산의 안성면은 산성(山城)에서 가장 가까우니 떼어주는 것이 편리합니다. 무주를 부(府)로 승격시키고 안성면을 거기에 떼어주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12월 22일 정사
천안군(天安郡)을 강등하여 현(縣)으로 삼았다. 이는 주인을 살해한 죄인 생금(生金)이 살던 고을이기 때문이었다.
대사헌 홍처량(洪處亮)이, 안찬(安燦) 등을 수령에 임명한 일 때문에 거듭 추감(推勘)을 입었다는 이유로 인피하고 체직을 청하니, 상이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고 이어 추고한 것을 지워주라고 명하였다.
유담후(柳譚厚)를 정언으로 삼았다.
12월 23일 무오
헌납 윤지선(尹趾善)이 본원의 지난번 계사에 혐의가 있어 참가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인피하고, 대사간 이혜는 병으로 부름에 따르지 못했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모두 체직되었다.
12월 24일 기미
지평 강석구(姜碩耉)가 병으로 소명을 따르지 못했다고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12월 25일 경신
비국이 우의정의 뜻으로 아뢰기를,
"도목 대정에 이조의 세 당상을 패초(牌招)하여 개정(開政)할 일은 지난번 계품하였으나, 참판과 참의가 모두 부름에 따르지 않고 한결같이 인피하고 들어갔으니 결코 기한 안에 행하기는 어렵습니다. 수령의 빈 자리는 내일 도목정에서 우선 차출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
고 하였다.
12월 26일 신유
밤에 유성이 천원성(天苑星) 아래에서 나왔는데, 꼬리는 길고 색깔은 붉었다.
상이 흥정당(興政堂)에 나아가 침을 맞았는데 안질(眼疾) 때문이었다. 우의정 김수흥이 약방 도제조로서 입시하여 나아가 아뢰기를,
"인재가 부족한 근심은 요즘보다 심한 적이 없어, 위로 대관(大官)으로부터 아래로 낮은 관료에 이르기까지 모두 의망(擬望)을 채울 수가 없습니다. 지금 세초(歲抄)가 장차 내려올 것이니 특별히 관대한 은전을 베풀어 인재를 등용하는 길을 넓혀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참찬은 차출할 수 없고, 판윤(判尹) 또한 비어 있으니 모두 종2품을 차출하되 대신에게 문의하여 의망해야 한다."
하였다.
남이성(南二星)을 대사간으로, 홍만종(洪萬鍾)을 헌납으로, 신완(申琓)을 지평으로 삼고, 이은상(李殷相)을 발탁하여 판윤으로 삼고, 강백년(姜栢年)을 우참찬으로 삼았다.
12월 27일 임술
상이 흥정당에 나아가 침을 맞았다. 우상 김수흥이 아뢰기를,
"호조·예조의 참판도 마땅히 차출해야 하는데 종2품으로는 의망을 채울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당상으로 의망하도록 하라."
하였다. 수흥이 아뢰기를,
"듣건대, 영동(嶺東) 지방에 자못 도둑의 걱정거리가 있는데 심지어 인명을 살상하기까지 한다 합니다. 원양도(原襄道)의 토포사(討捕使)는 춘천(春川)에만 있는데, 길이 너무 멀어 형세상 탐문하여 체포하기가 어렵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삼척(三陟)의 영장(營將)이 겸임하게 하라."
하였다. 수흥이 아뢰기를,
"철원(鐵原)은 북관(北關)을 왕래하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으니 또한 토포사를 겸임시키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
고 하였다.
이비(吏批)가, 본조에서 참판으로 의망할 사람이 적다는 이유로 외방의 관직에 있는 자도 아울러 의망하자고 계청하니, 상이 당상으로 의망할 것을 명하였다. 김익경(金益炅)을 발탁하여 예조 참판으로 삼고, 심재(沈梓)를 호조 참판으로, 이유태(李惟泰)를 이조 참판으로 삼았다.
12월 28일 계해
정언 유담후(柳譚厚)가 병 때문에 부름에 따르지 않았다고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12월 29일 갑자
상이 흥정당에 나아가 침을 맞았다. 우의정 김수흥이 아뢰기를,
"어제 서용(敍用)의 대상자가 많았으니 인재가 부족한 때에 참으로 매우 다행스럽습니다. 그런데 전 판서 정지화(鄭知和)는 다만 직첩만 돌려받고 거두어 서용하라는 명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정경(正卿)에 인재가 더욱 부족하여 황공스럽게도 감히 아룁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세초(歲抄)에 반드시 거두어 쓰라는 명을 내릴 필요는 없다."
하였다.
대사헌 홍처량(洪處亮)이 병 때문에 부름에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12월 30일 을축
승지를 전옥서(典獄署)에 보내어 죄질이 가벼운 죄수 21인을 석방하였다.
승지를 전옥서(典獄署)에 보내어 죄질이 가벼운 죄수 21인을 석방하였다.
정언 한태동(韓泰東)이 김휘의 일을 연달아 아뢰었다. 또 아뢰기를,
"정경(正卿)의 반열은 조정이 덕이 있는 사람에게 내리는 벼슬이니, 결코 사람마다 경솔하게 줄 수 없습니다. 이번에 이은상(李殷相)을 월등하게 발탁하신 명은 사람의 생각 밖에서 나온 것입니다. 은상이 비록 문명(文名)은 있으나 평소에 품행이 방정하지 않았는데, 어찌 성세(聖世)에서 인재를 선발하여 등용하는 거조를 이같은 사람에게 시행할 수 있겠습니까. 새로 판윤에 임명한 것을 개정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고 이르기를,
"김휘의 일은 매우 가소롭다. 여파(餘波)를 수습하여 무슨 상을 받으려고 하는가. 너의 이 논의는 김휘와 같은 투이니 너무 심하다는 말은 바로 자신을 두고 하는 말이다."
하였다.
영중추 송시열이 죄를 진 몸으로 감히 천릉(遷陵) 상격(賞格)의 명을 감당할 수 없다고 스스로 여겨 소를 올려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상이 답하기를,
"경의 사양한 소를 보니 ‘부죄(負罪)’라고 적혀 있어 내 매우 미안하게 여겼다. 지난번의 말은 내가 품은 생각을 말했을 뿐인데 경은 어찌하여 이같이 인책하는가. 마음이 부끄럽고 탄식스럽다. 지금 이 상격(賞格)은 진실로 옛날 규례를 따른 것인데 경은 어찌하여 사양하는가."
하고, 이어 사관을 보내 유시를 전하였다.
예빈시 정 도거원(都擧元)이 상소하고, 진법(陣法)에 관한 책자를 올렸다. 대개명나라 남씨(藍氏)의 팔진(八陣)·변진(變陣)·호령(號令)·풍후(風后)·악기진(握奇陣)과, 척계광(戚繼光)의 뇌굉진(雷轟陣)·원문 노인(轅門老人)·팔문 구성(八門九星) 등의 도(圖)와, 자신이 지은 도해(圖解) 및 초창(草創)·거패(車牌) 등의 제도를 합하여 한 책자로 만든 것이다. 상이 비답을 내려 관대하게 답하였다.
함경 감사 남구만(南九萬)이 상소하여 북도(北道) 관방(關防)의 변통에 대한 일을 자세히 아뢰었는데 수천 마디나 되었다. 그 내용에,
"삼수(三水)와 갑산(甲山)은 첩첩 고개와 큰 산맥 밖에 있어 거리가 매우 멀고 잔로(棧路)가 험악하지만 길주(吉州)의 서북쪽 보(堡)에는 사냥꾼이 왕래하는 길이 있어 갑산(甲山)에 통할 수 있는데 근 2백여 리쯤 되고 도로가 매우 평이합니다. 삼수(三水)에서 압록강을 따라 서쪽으로 70리를 내려가면 후주(厚州)의 옛 땅이 있습니다. 어느 해에 설치되었다가 어느 해에 철폐되었는지 모르지만 그 땅은 강의 남쪽에 있어서 본디 우리 땅입니다. 들녘이 광활하고 토지가 비옥하여, 울퉁불퉁하며 척박한 삼수·갑산과는 크게 다르고 지세(地勢)가 점차 낮아져서 기온이 자못 따뜻하여 또한 삼수와 갑산의 모진 추위보다 나은데, 서리 내리는 것이 가장 늦어서 오곡이 모두 익으니 진실로 살 만한 지역입니다. 지금 만약 다시 후주(厚州)를 설치하면 삼수와 갑산에 대해서는 서로 의지하여 원조가 되고 함흥(咸興)에 대해서는 울타리를 굳게 하는 격이 되어, 밖으로는 밤에 적이 몰래 쳐들어 오는 근심이 없고 안으로는 떠돌아 다니다가 들어오기를 바라는 백성이 있을 것입니다. 아침에 영을 내리면 저녁에 고을을 이룰 수가 있는데 무엇을 꺼려하여 만들지 않는단 말입니까. 또 여연(閭延) 등 폐지된 사군(四郡)도 모두 넓은 들인데다가 비옥한 토지입니다. 지금까지 폐기되어 있으니 진실로 매우 애석합니다. 조정이 만약 일시에 여러 군을 모두 회복하기 어렵다고 여긴다면 우선 먼저 별해(別害)에 【보(堡)의 이름이다.】 군(郡)을 설치하고 후주(厚州)에 진(鎭)을 두어 백성들이 점차 모이는 것을 기다려 차례로 다시 설치해도 혹 늦지는 않을 것입니다. 무릇 이 세 조목은 진실로 변방의 대단한 처치에 관계되니 신은 도본(圖本)을 만들어 올립니다. 무릇 도내 각 고을의 도리(道里)의 원근과 관방(關防)의 요해처를 다 기록하지 않은 것이 없으니, 만약 상께서 보신다면 무릇 그 편부(便否)와 이해(利害)를 반드시 분명하게 알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밝으신 성상께서 유념하여 살피소서."
하니, 상이 그 소와 도본을 탑전에서 대신과 비국의 여러 재신들에게 보였다. 우의정 김수흥이 아뢰기를,
"차유령(車踰嶺) 밖은 토지가 비옥한 것이 과연 사실입니다만, 옛적에는 호인(胡人)들이 들어와 살던 땅입니다. 군을 설치한 뒤로 만약 다시 침탈해 오면 일이 매우 난처할 것입니다. 그러나 저들이 철거한 지 거의 5, 6십 년이 되었으니 지금 어찌 다시 침입할 리가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곳은 본래 우리 땅이니 적이 오면 피하고, 적이 떠나면 거처함이 당연한 것이다. 저들이 이미 강을 한계로 하였으니 비록 장성(長城)055) 의 밖이라도 두만강(豆滿江) 안쪽은 저들 또한 자기 땅이 아닌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군을 설치하는 것은 우선 서서히 의논하고, 무산(茂山)·양영(梁永)의 만 호로 하여금 때때로 순시하도록 하고, 매년 봄·가을 삼(蔘)을 캐는 절기에는 삼을 캐는 것을 금지한다고 핑계대고 항상 강변(江邊)에 머물러 주둔하면서 저들의 뜻을 떠보고, 수 년 뒤에 이어서 그 땅에 진(鎭)을 설치하면, 저들의 의심도 일으키지 않고 군을 설치하는 일도 점차 이룰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수흥이 아뢰기를,
"길을 내는 조목은 마땅히 그 청을 허락해 주어야 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험한 땅에 길을 개척하는 것은 병가(兵家)에서 크게 꺼리는 것이다. 그러나 형세가 편리하고 마땅하다면 어찌 험하다고 해서 길을 트지 않겠는가. 저들은 모두 기병이고 보졸(步卒)이 없으니 개척하는 길은 마땅히 대략 베어내어 사람과 말만 겨우 다닐 수 있도록 하고 넓게 만들지 말라. 요해처에는 1, 2개의 진보(鎭堡)를 설치하여 지키고 조금 아래의 여러 진보 가운데에서 긴요하지 않은 것은 이곳으로 옮겨 설치하도록 하고 반드시 새 보(堡)를 별도로 설치할 필요는 없다."
하였다. 수흥이 아뢰기를,
"후주(厚州)를 설립하는 일은 청을 허락하기가 어려울 듯합니다."
하니, 훈련 대장 유혁연(柳赫然)이 아뢰기를,
"신이 일찍이 관서(關西)에 있을 때 듣기로는, 후주의 토지는 기름지고 비옥하여 백성들이 이사하고자 하는 자가 많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온 가족을 데리고 들어가 사는 것을 허락한다면 아침에 영을 내려 저녁에 이룰 것입니다."
하고, 병조 판서 김만기(金萬基)가 아뢰기를,
"삼남(三南)은 인물(人物)이 번성하니 토지가 좁은 것이 걱정입니다. 그러나 서북(西北)에 있어서는 넓게 개척할 필요가 없고 다만 형세가 편리하고 마땅하며 토지가 비옥하다면 또한 어찌 버려두겠습니까."
하고, 수흥이 아뢰기를,
"이것은 대단한 변통에 관계되니 경솔하게 의논할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그렇다"
고 하였다. 이에 이르러 비국이 상의 분부로써 복계(覆啓)하기로 회이(回移)하였다.
부교리 윤진(尹搢)이 상소하여 돌아가기를 청하고 이어서 품고 있는 생각을 아뢰었다. 그 대략에,
"색목(色目)의 설은 그 유래가 대체로 오래되어 당나라 말기의 우승유(牛僧孺)와 이종민(李宗閔)의 말습(末習)보다 더 심합니다. 이이(李珥)가 이른바 ‘동서(東西) 두 글자가 끝내는 반드시 나라를 망하게 하는 화근이 될 것이다.’라고 했으니 충신과 지사들이 심히 걱정하고 길이 탄식한 지가 어제 오늘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 전하께서는 통렬히 금지시키고자 하여 뿌리와 줄기를 결단코 끊어버리고 사심을 품고서 편벽된 의논을 고집하는 자로 하여금 일어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전하의 이런 마음이야말로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왕도입니다.
다만 어리석어 죽을 죄를 지은 신의 생각으로는 당쟁을 금지하시는 방책이 그 요령을 얻지 못했을까 걱정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지금 언로가 심하게 막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행히도 한두 신하가 분발하여 자신을 돌보지 않고 감히 논한 바가 있게 되면, 전하께서는 말의 시비(是非)와 일의 당부(當否)를 따지지 않고, 문득 ‘자기와 같으면 당(黨)을 하고 자기와 다르면 공격한다.’는 형벌로 덮어씌워 삭직을 시키거나 파직한 다음 귀양보내는 일이 전후로 끊이지 않았습니다. 조정의 신하 중에 조금 두각을 나타내는 자는 모두 밝은 때에 버림받은 인재가 되었으니, 모르겠습니다만 이 무슨 조치입니까?
아, 붕당이 생긴 이래로 사대부로서 이 틈바구니를 벗어난 자가 없었으니 저 중용을 지키고 홀로 우뚝 선 선비가 어느 곳에서 와 국사를 함께할 것입니까. 가령 혹시 전하의 일념(一念)이 먼저 ‘거붕당(去朋黨)’ 세 글자에 주안해서 뭇 신하들로 하여금 형적(形跡)이나 보존하는 데 힘써 붕당의 혐의를 조심해 피하도록 할 뿐이라면, 장차 사람들이 자신을 안전하게 할 것이나 생각하여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 풍조가 되고 조금이라도 붕당에 관계되는 일이 있다면 아무리 국가의 존망에 관계된 것이라 하더라도 또한 감히 논하지 않을 것이니, 이것이 어찌 국가의 복이겠습니까.
주자(朱子)가 유정(留正)에게 보낸 편지에 ‘붕당이 환란이 되는 것은 고금에 공통되는 병이니 진실로 임금으로서 마땅히 깊이 미워할 바이다. 그러나 그 현부(賢否)와 충사(忠邪)를 살피지 않고 오직 붕당을 없애는 데만 힘쓴다면 제몸 돌보는 데 교묘한 저 소인배들은 필시 자기의 형적을 가리는 반면에, 공평된 마음과 곧은 도를 믿어 흔들리지 않는 군자는 도리어 소인에게 배척된다.’고 하였으니, 주자의 이 말씀은 오늘날에 약석(藥石)이 아니겠습니까."
하였다. 또 흉년이 들어 백성이 곤궁한 상태와 세초(歲抄), 조적의 폐단에 대하여 다 말하니 상이 관대하게 비답하였다.
아, 당론(黨論)이 사람의 심술(心術)을 무너뜨린 지 오래되었다. 신익상(申翼相)과 윤진은 그 무리 중에는 바른 소리 하는 자라 할 만하다. 그들이 하는 말도 공(公)을 위하여 사(私)를 멸하는 것이라 스스로 여겼을 것이다. 그런데 신익상이 신명규(申命圭)의 용서할 수 없는 죄를 극력 구하려고 하였으나 해명할 만한 말이 없자, 심지어 ‘유명(幽明)간에 슬피 울부짖고 피눈물을 흘리는 것을 생각하신다면…….’ 등의 말을 하여 상의 마음을 감동시켜 흔들려고 하였으니, 그 마음씨와 태도는 가증스럽다. 그리고 윤진은, 상께서 시배(時輩)들이 자기와 같으면 당을 삼고 자기와 다르면 공격하는 것을 통렬히 미워하는 마음을 헤아려, 이에 이 소를 올렸다. 분발하여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 것으로써 그 무리들의 당을 위해서 죽는다는 의논을 허여하고, 입을 다무는 것이 풍조가 된다는 것으로써 성조(聖朝)의 언로가 막히는 것을 근심하였으나, 자신이 당을 위하여 상을 속이는 죄에 빠지는 줄은 알지 못했다. 이는 그 심술(心術)이 이미 무너져 그 바름을 얻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한국사 공부 > 조선왕조실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 효종실록1권, 효종 즉위년 1649년 5월 (0) | 2025.12.19 |
|---|---|
| 현종실록22권, 현종 15년 1674년 8월 (0) | 2025.12.18 |
| 현종실록22권, 현종 15년 1674년 7월 (0) | 2025.12.18 |
| 현종실록22권, 현종 15년 1674년 6월 (0) | 2025.12.18 |
| 현종실록22권, 현종 15년 1674년 5월 (1) | 2025.12.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