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8일 병인
인조 대왕(仁祖大王)이 창덕궁(昌德宮) 정전(正殿)에서 승하하고 5일 뒤에 세자가 즉위하였다. 왕의 휘(諱)는 호(淏)이고 인조 대왕의 둘째 아들이다. 어머니는 인열 왕후(仁烈王后) 한씨(韓氏)로서 만력(萬曆)기미001) 5월 22일 갑진에 한성(漢城) 경행방(慶幸坊) 사제(私第)에서 왕을 탄생하였는데, 이날 저녁에 흰 기운이 침실로 들어와서 오래 있은 뒤에 흩어졌다.
왕은 어려서부터 기국과 도량이 활달하여 우뚝하게 거인(巨人)의 뜻이 있어 장난하며 노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행실이 보통 사람들과는 달랐다. 타고난 천성이 매우 효성스러워 채소나 과일 같은 하찮은 것일지라도 반드시 먼저 인조께 올린 뒤에야 먹으니 인조가 항상 효자라고 칭찬하여 사랑과 기대가 특별히 높았다. 다섯 살 때 비로소 글 공부를 시작했는데 글 읽기를 잠시도 멈추지 않았고, 지난 역사에서 제왕(帝王)들의 골육 사이의 변란을 볼 적마다 책을 덮고 탄식하였다.
천계(天啓)계해년002) 에 인조 대왕이 반정(反正)하였으므로 병인년003) 에 봉작(封爵)을 받아 봉림 대군(鳳林大君)이 되었다. 숭정(崇禎)을해년004) 에 인열 왕후께서 돌아가시자 예법에 지나칠 정도로 슬퍼하였다. 병자 호란 때 인조 대왕은 남한 산성으로 피난하고 왕은 강도(江都)로 가서 있었는데 밤낮으로 그리워하며 식음을 전폐하고 눈물로 날을 보냈으며, 여러 차례 결사대를 모집하며 행재소(行在所)에서 지냈다.
정축년005) 에 소현 세자(昭顯世子)를 따라 인질로 심양(瀋陽)에 들어갔을 때 소현 세자와 한 집에 거처하며 정성과 우애가 두루 지극하였으며, 난리를 만나 일을 처리함에 있어 안팎으로 주선한 것이 모두 매우 적절하였다. 연경(燕京)으로 들어간 뒤 청인(淸人)들이 금옥(金玉)과 비단을 소현과 왕에게 주었으나 왕은 홀로 받지 않으며 포로로 잡혀온 우리 나라 사람들을 대신 돌려주기를 바란다 하니 청인들이 모두 탄복하며 허락하였다. 또 어떤 관상장이가 왕을 보았는데 자기들끼리
"참으로 왕자(王子)이다."
하였다. 왕이 일찍이 방에 있는데 오색빛이 벽에 어리며 매우 큰 영귀(靈龜)가 나타났다. 왕은 마음속으로 이상하게 여겼다. 얼마 뒤 우리 나라로 돌아왔는데 행장이 매우 검소하여 연도에서 이를 본 백성들이 칭찬해 마지 않았다. 이때 소현 세자가 이미 죽었으므로 중외의 기대가 모두 왕에게 쏠렸다.
이 해 5월에 인조 대왕은 나라에 장성한 대군(大君)이 있는 것은 사직의 복이라 하여 대신과 경(卿)들에게 물어 드디어 왕을 책립(策立)하여 세자로 삼았다. 왕이 이 명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고사하니, 인조 대왕이 답하기를
"내 마음에 먼저 결정되었고 여러 사람들의 의논도 모두 같으니 너는 고사하지 말고 삼가 도심(道心)을 지키라."
하였다.
5월 9일 정묘
소렴(小斂)하였다. 소렴은 3일 만에 하는 것이지만 한창 더울 때라서 원칙만을 고수할 수 없으므로 대신, 예관(禮官), 양사(兩司)에 하문하여 이 날에 거행한 것이다.
함릉군(咸陵君) 이해(李澥)를 수릉관(守陵官)으로 삼았다.
양사가, 염빈(斂殯)할 때 대신(臺臣)·승지(承旨)·사관(史官)·양사의 장관을 입참(入參)시키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대사헌은 조익(趙翼)이고, 대사간은 이행우(李行遇)이다.】
양사가 어의(御醫) 이형익(李馨益) 등을 치죄(治罪)할 것을 청하니, 따랐다.
정원이, 국조 고사(國朝故事)에 따라 대신으로 원상(院相)을 삼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원상은 영의정 김자점(金自點)과 좌의정 이경석(李景奭)이다.
5월 12일 경오
대렴(大斂)하였다.
5월 13일 신미
성복(成服)하였다.
대신(臺臣)·예관(禮官)·삼사가 왕위(王位)에 오르기를 청하였으나 왕은 목놓아 울면서 듣지 않았다. 대신이 백관을 거느리고서 누차 청하자 비로소 허락하고서 이날 즉위하였는데 슬퍼하는 용모가 좌우를 감동시켰다. 이리하여 왕비 조씨(趙氏)를 높여 왕대비(王大妃)로, 빈(嬪) 장씨(張氏)를 책봉(冊封)하여 왕비로, 왕세손(王世孫)을 왕세자로 삼고, 대사령(大赦令)을 내리고서 이어 중외에 교서를 반포하였다.
"왕은 말하노라. 불쌍한 이 소자(小子)가 덕도 없으면서 외람되이 세자의 자리에 있은 지가 이제 5년이 되었다. 늘 근심스럽고 두려운 마음으로 천명(天明)을 저버리게 되지나 않을까 염려하였는데, 하늘이 돕지 않으시어 재앙을 이 몸에 내리지 않고 아버지께 내리시어, 위독하신 지 열흘도 못 되어 세상을 떠나셨다. 땅을 치며 붙잡고 통곡한들 어찌 미칠 수 있겠는가. 고생하시며 길러주신 은혜를 어느날에나 갚겠으며, 아버지의 자식을 가르치시는 말씀을 다시 어디에서 듣겠는가. 이것은 모두 못난 이 몸의 효도가 하늘을 감동시키기에 부족하고 정성이 신을 감동시키기에 부족했기 때문이다. 종묘 사직의 신령이 나에게 이르지 않으시고 나라에 의지하고 있는 산천의 귀신들도 나를 도와 주지 않아 구령(九齡)의 꿈이야기를 나누던 문고(文考)로 하여금 갑자기 저승으로 돌아가시게 하였으니007) , 이것이 천운인가 시운인가. 아, 애통하다.
돌아가시어 빈소가 이미 마련되었으니 용안(龍顔)을 다시 뵐 수가 없어 사모하는 자식의 심정,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 같다. 거상(居喪)할 날은 매우 짧고 아버지를 대신한 아픔은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데, 옥보(玉寶)와 화곤(華袞)을 내 어찌 차마 편히 여길 수 있겠으며 여러 신료들의 하례하는 말을 내 어찌 차마 들을 수 있겠는가. 더구나 상복을 입는 이날이 어찌 즉위에 마땅한 때이겠는가. 그러나 자전께서 간곡하게 우리 나라의 예로써 권면하시고 주위의 모든 신료들이 번갈아 간하여 기어이 나의 지정(至情)을 빼앗으려 하니 내가 참으로 어찌할 수가 없다.
생각건대 계승의 도는 예로부터 유국자(有國者)가 소중히 여긴 바이니 열성(列聖)들께서 슬픔을 누르고 즉위식을 거행했던 것이 어찌 아무 뜻이 없이 하신 것이었겠는가. 정사는 백성을 위한 것이니 하루도 임금이 없을 수 없고 만기(萬幾)는 하루도 폐할 수 없는 것이다. 오늘날 내가 어찌 감히 이전 선조께서 주기(主器)를 처음 세웠던 도를 어기겠는가. 아버지의 일을 계승하여 끝까지 잘 해나가느냐 못하느냐 하는 것이 바로 오늘에 달려 있다. 이에 금년 5월 13일 신미일에 인정문(仁政門)에서 즉위하고, 왕비 조씨를 높여 왕대비로, 빈 장씨를 왕비로, 왕세손을 왕세자로 삼았다. 화려한 이 의식을 돌아보건대 비통한 마음만이 더할 뿐이다.
내 깊이 생각건대 우리 돌아가신 임금께서는 난을 평정하여 태평으로 되돌려 놓으신 공이 실로 이전의 임금들보다 훌륭하시다. 막혔던 인륜이 다시 신장(伸張)되고 위태로웠던 종사(宗社)가 다시 편안해졌으며 끊겼던 백성들의 생명이 다시 이어졌다. 이 빛나는 교훈을 보답하여 널리 드러내는 일은 바로 후손들이 해야 할 일인데, 보잘것 없는 이 몸이 어찌 감당하겠는가. 이에 왕위를 물려받은 처음에는 반드시 허물을 씻어주는 교화를 행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였다. 이달 13일 새벽 이전에 지은 죄 중에서 모반 대역(謀反大逆)한 자, 모반(謀叛)한 자, 자손으로서 조부모나 부모를 모살(謀殺)하거나 구타하거나 모욕한 자, 처첩으로서 남편을 모살한 자, 노비로서 주인을 모살한 자, 고의로 사람을 죽인 자, 염매(魘魅)나 고독(蠱毒)으로 사람을 저주하거나 죽인 자, 국가의 강상에 관계된 자, 장오죄(贓汚罪)를 지은 자, 강도나 절도를 범한 자를 제외하고 잡범(雜犯)으로서 사죄(死罪) 이하에 해당하는 자는 모두 용서해 준다. 감히 유지(宥旨) 이전에 있었던 일을 가지고 고언(告言)하는 자가 있으면 그 죄로써 죄주겠다. 관직에 있는 자는 1급씩 가자(加資)하고 자궁자(資窮者)는 대가(代加)한다.
상이 특명으로 외방(外方)에서 봉진(封進)하는 방물(方物) 및 물선(物膳)을 파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왕위를 이어받은 처음에 곧 이런 분부를 내리시어 검소함을 따르고 백성을 구휼하는 뜻이 말에 넘쳤으니 보고 듣는 사람치고 어느 누가 감격하지 않겠습니까. 다만 신민이 진상하는 의례는 흠결(欠缺)이 있어서는 안 되며 더구나 즉위를 하례하는 봉진은 사체가 더욱 중대하여 철따라 생산되는 물건을 으레 올리는 것과는 다르니, 신들은 감히 명을 받들 수 없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내가 무슨 마음으로 이 방물을 받겠는가. 아울러 전에 내린 분부에 따라 봉진하지 말게 하라."
5월 14일 임신
대신을 보내어 종묘·영녕전(永寧殿)·숙녕전(肅寧殿)·사직에 사위(嗣位)를 고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국가에 일이 있을 때 종묘에 고하는 것이 예입니다. 더구나 대통(大統)을 이어 위(位)를 계승하는 일이 얼마나 큰 예입니까. 그런데 《오례의(五禮儀)》에 실려 있지 않으니 소루(疏漏)한 듯합니다. 《대명회전(大明會典)》을 가져다가 상고해 보건대, 사황등극의(嗣皇登極儀)에 ‘관원을 보내어 천지·종묘·사직에 삼가 고한다.’는 구절이 있었으니, 사위를 종묘에 고하는 일은 아니할 수 없음이 분명합니다. 지금 만약 《오례의(五禮儀)》에 실려 있지 않다는 이유로 즉시 행하지 않았다가 졸곡(卒哭)이 끝난 뒤 제사지내는 축문(祝文)에 갑자기 사왕(嗣王)이라고 고한다면 더욱 미안합니다. 날을 골라 거행하소서."
대신이 빈청에 모여 아뢰기를,
"김상헌(金尙憲)은 덕망이 있는 원로로서 병든 몸으로 달려와 곡을 하였습니다. 사람들이 바야흐로 그에게 의지하여 중하게 여기고 있는데 곧 물러나 돌아가려 하니, 그대로 머물러 있으면서 시호를 의논하는 데 동참하게 하소서. 그리고 참의 김집(金集) 및 송준길(宋浚吉)·송시열(宋時烈)·권시(權諰)·이유태(李惟泰) 등도 모두 글을 읽은 사람들이니, 도신(道臣)에게 분부하시어 역말을 태워 올려보내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하교하기를,
"이들은 모두 선조(先朝)에서도 불러들이기 어려웠던 사람들인데 어찌 나를 위하여 오려 하겠는가. 더구나 송시열은 지난날 나의 사부(師傅)였으므로 그리운 생각이 마음속에 간절하니 이런 내용을 갖추어 서술하여 최온(崔蘊)과 함께 부르라."
헌부가 아뢰기를,
"영돈녕 김상헌은 지금의 대로(大老)입니다. 사복(嗣服)한 초기에 의당 조정에 있어야 전례(典禮)나 정령(政令)의 의심스러운 것을 물을 곳이 있고 공경 대부들도 존경하여 본받을 곳이 있을 것입니다. 특별하신 분부로 간곡히 만류하여, 현자를 공경하고 덕 있는 이를 좋아하는 성의를 보이소서."
하니, 답하기를,
"나의 생각도 진실로 이와 같다. 그러나 현자를 공경하는 성의가 남들을 미덥게 하지 못하였으니 그를 만류할 수 없을까 걱정이다. 특별히 승지를 보내어 나의 지극한 뜻을 전하도록 하겠다."
예조가 아뢰기를,
"《오례의(五禮儀)》 복제조(服制條)에 ‘국상(國喪) 졸곡(卒哭) 이후에는 백관이 백의(白衣)를 입고 흑각대(黑角帶)를 띠고 오사모(烏紗帽)를 쓴다.’고 하였는데, 명종 때 대신(臺臣) 민순(閔純)이 고례(古禮)를 이끌어 전거(典據)로 삼아 백모(白帽)를 쓰고 베로 각대를 싸서 띠고 3년을 마치는 것으로 고쳐 드디어 정식(定式)으로 삼았습니다. 전함 3품 이하 생원(生員)·진사(進士)·생도(生徒)는 백립(白笠)을 쓰고 백의를 입고 흑대를 띠는 것이 《오례의(五禮儀)》에 실려 있지만 전후의 국상 때에 모두 백대(白帶)를 사용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만약 《오례의(五禮儀)》만을 따라 백모를 쓰고 검은 띠를 맨다면 아마도 예제(禮制)에 어긋날 듯하니 백대로 상을 마치게 하소서."
5월 15일 계유
대행 대왕(大行大王)의 시호를 올려 헌문 정무 인명 순효(憲文定武仁明純孝)라 하고, 【선한 사람을 상주고 악한 사람을 치는 것이 헌(憲)이고, 자애로운 은혜로 백성을 사랑하는 것이 문(文)이며, 백성을 편안하게 한 큰 사려(思慮)가 정(定)이고, 대위(大位)를 안보(安保)하여 공을 이룬 것이 무(武)이며, 인을 베풀고 의를 행한 것이 인(仁)이고, 사방을 조림(照臨)한 것이 명(明)이다.】 묘호(廟號)를 열조(烈祖)라 하고, 【덕을 지키고 업(業)을 높인 것이 열(烈)이다.】 전호(殿號)를 영사(永思)라 하고, 능호(陵號)를 장릉(長陵)이라 하였다. 【능호는 옛것을 그대로 따랐다.】
어압(御押)은 정(正)자로 하였다. 대신, 정부의 동서벽(東西壁), 육조 2품 이상, 관각 당상이 빈청에 모여 함께 의논해서 아뢰었다.
5월 16일 갑술
예조가, 구례(舊例)에 따라 국상 발인(發引) 전에 백관이 빈전에서 조알(朝謁)을 행하되 통례원(通禮院)으로 하여금 주관하여 거행하게 하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조알(朝謁)은 바로 숙배(肅拜)이다.
행장찬집청(行狀纂集廳)을 설치하였다.【조경(趙絅)·조익(趙翼)·김육(金堉)·오준(吳竣)·김광욱(金光煜)·여이징(呂爾徵)·신면(申冕)·이행진(李行進)·조수익(趙壽益)을 찬집관(撰集官)으로, 유계(兪棨)·홍명하(洪命夏)·이정영(李正英)·홍처량(洪處亮)을 낭청으로 삼았다. 이조가 초계한 것이다.】
앞서 대행 대왕이 병이 위독할 때에 가뭄을 근심하여 억울한 옥사를 심리(審理)하라고 특명하였는데 미처 행하지 못하였다. 이 때에 와서 간원이 선왕의 뜻을 따라 유사(有司)로 하여금 아뢰어 처리하게 하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5월 18일 병자
대사헌 조익(趙翼)이 차자를 올렸는데, 그 대략에,
"당초 장릉(長陵)을 의논해 결정한 것은 지사(地師) 이간(李衎)이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지사 김백련(金百鍊)은 그 곳이 좋지 않다고 강력하게 말하고, 또 듣건대 그 뒤에 그 곳이 좋지 않다고 말하는 술사(術士)들이 많다고 합니다. 지금 만약 길흉도 분간되지 않고 의혹도 풀리지 않았는데 그대로 그 자리에 능을 모신다면 무궁한 후회가 있을까 염려됩니다. 술사들을 모아 다시 살펴보고 각각 소견을 진술하게 하면 그 길흉을 판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상이 해조로 하여금 의논하게 하니, 예조가 아뢰기를,
"장릉을 처음 정할 때 이론(異論)이 있었다는 말을 듣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이런 의논을 들었으니, 널리 물어 길흉을 판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러 대신들로 하여금 모여 의논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총호사(摠護使) 이경석(李景奭)이 아뢰기를,
"당초 장릉을 정할 때 지사(地師)들로 하여금 각각 소견을 진술하게 했는데, 김백련이 산세를 논하는 중에 그 자리의 좋음을 대단히 칭찬한 것이 다른 술사들보다 더욱 심하였습니다. 만약 저 김백련이 전후에 말을 달리하는 자라면 그 말은 본디 믿을 만하지 않거니와, 만약 믿을 만하다고 한다면 입으로 말한 것을 직접 손수 기록하여 등록(謄錄)에 실려 있는 것이 신빙(信憑)할 수 있는 실지의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지금 백련이 죽고 나자 와전에 와전을 거듭하여 사람들의 귀를 그르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더구나 대행 대왕께서 널리 여러 사람들의 의논을 보아서 결단해 정하시어 사후(死後)에 묻힐 자리로 삼으셨으니 지금 길지(吉地)를 구하고자 한다면 아마도 이만한 자리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체가 중대하니 널리 대신, 육경(六卿), 삼사(三司)에 물어 처리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산릉은 바로 선조(先朝)에서 정하신 바로서 이미 사후에 묻히시겠다는 말씀을 남기셨다. 더구나 자손이 번성하고 조금도 해로운 것이 없다. 다만 다시 술사에게 묻기로 한 것은 조금이라도 미진한 곳이 있으면 인력(人力)으로 보강하여 미진한 염려가 없게 하려는 것일 뿐이다. 비록 널리 묻는다 해도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기어 정하는 것은 결단코 할 수 없다."
하였다. 이때 사람들의 의논이 모두 조익을 허물하고, 옥당도 체직시킬 것을 논하려 하다가 그만두었다. 조익은 이 때문에 불안하여 재차 차자를 올려 면직시켜 주기를 빌면서 다시 지난번의 말을 되풀이하였다. 상은 조익이 논한 바가 성심에서 나왔다 하여 우대하는 말로 비답하고 사직을 윤허하지 않았다. 조익이 또 이로써 인피하니, 상이 답하기를,
"누차 사직하는데도 윤허하지 않는 것은 진실로 조신(朝臣)들이 이로 인하여 말을 하지 않을까 염려해서이다. 품고 있는 생각을 다 진술하면 헤아려 채택하는 것은 임금에게 달린 것이니 무엇이 불가함이 있겠는가."
5월 20일 무인
이경여(李敬輿)의 위리(圍籬)를 철거하라 명하였다.
5월 23일 신사
대행 대왕의 묘호(廟號)를 개정해서 올리기를 인조(仁祖)라 하고, 시호를 헌문 열무 명숙(憲文烈武明肅)이라 하였다. 【몸을 바르게 하여 아랫사람을 다스리는 것이 숙(肅)이다. 나머지는 모두 위에 나타났다.】 대신 이하가 아뢰기를,
"시호를 의논하던 날에 뭇사람의 의논이 모두, 공이 있는 분을 조(祖)라 하고 덕이 있는 분을 종(宗)이라 하는 것이 고례(古禮)인데 대행 대왕께서는 공은 조종(祖宗)을 빛내시고 덕은 온 누리에 입혔으니 높혀 조(祖)라 하는 것이 실로 고례에 부합하며 시법에 열(烈)자에 대한 해석이 셋이 있는데 그 중에 덕을 지켜 업을 높였음을 일컫는 것으로 정하는 것이 묘호에 마땅하다고 하였습니다. 모든 사람들의 의견이 같았으므로 열자로 의논해 정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듣건대, 의논하는 자들이 남당(南唐)의 임금 서지고(徐知誥)가 이 호칭을 사용하였으므로 지금 대행왕에게 이 글자를 쓰는 것은 합당하지 않을 듯하다고 하였습니다. 신들이 여러 재상들과 널리 상의하였더니 어떤 이는 ‘시법에는 글자는 같아도 뜻이 각각 다르니 위로 소열(昭烈)009) 의 열자에 비교할 것이지 하필이면 아래로 남당의 열자에 비교하는가.’ 하고, 어떤 이는 ‘이미 합당하지 않다는 의논이 있으니 즉시 여쭈어 고치는 것이 마땅하다. 조종조 때에도 시호 가운데 고쳐야 할 글자가 있으면 여쭈어 고친 전례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다시 의논하여 아뢰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또 아뢰기를,
"신들이 다시 시법을 상고하여 반복해 헤아려 보았습니다. 뭇사람들의 의논이 모두, 헌(憲)자가 묘호로 합당하니 시호 중의 문(文)자 위에 있는 헌자는 빼고 대신 경(景)자로 고치고 무자 위에 열(烈)자를 쓰는 것이 마땅하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개정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전에 정한 묘호를 그대로 쓰는 것이 무방할 듯하니 다시 의논해 아뢰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열조(烈祖) 두 글자는 《시경(詩經)》과 《서경(書經)》에서 칭한 바와 한소열(漢昭烈) 묘호의 자의(字義)를 취한 것으로 진실로 대행 대왕의 공덕에 부합됩니다. 그러나 말하는 자들은 남당(南唐)이 참람한 묘호를 사용하여 국운(國運)을 재촉했기 때문에 지금 이 시호를 쓸 수 없다고 합니다. 생각건대 인(仁)자가 대행 대왕 묘호로 가장 합당합니다. 삼가 《통전(通典)》을 상고하건대 역대 제왕의 시호에 부자가 호칭이 같은 이도 간혹 있었으니, 우리 나라 세종과 세조의 호칭도 어찌 이에서 근본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명나라 제도를 상고하건대 이미 인조(仁祖)가 있는데 또 인종(仁宗)이 있었습니다. 근거할 만한 고금의 전례(典禮)가 이미 이와 같을뿐더러 주공(周公)의 군부(君父)와 같은 시호를 쓴다고 한 것이 더욱 후세의 본보기가 될 만하니, 이로써 결단하여 의논하건대 오늘의 묘호로는 이 인자를 버리고는 달리 쓸 글자가 없으니 인자로 고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또 아뢰기를,
"묘호를 이미 인자로 고쳤으니 시호 가운데 인명(仁明) 두 글자를 명숙(明肅)으로 고치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는 바로 만세의 공론이므로 내가 감히 사사로이 할 수 없다. 정신(廷臣)의 정성이 재차 삼차에까지 이르렀으니 감격스러운 생각이 마음속에 간절하여 절로 눈물이 흐를 뿐이다."
응교 심대부(沈大孚)가 상소하기를,
"신이 듣건대, 대행 대왕의 묘호를 조(祖)자로 의정(議定)해 올려 이미 품재(稟裁)를 거쳤다고 합니다. 신자(臣子)의 숭배해 받드는 생각에서는 진실로 최선을 다하지 않는 바가 없어야 하는 것이고 보면 이 조자로 의정한 것이 마땅하다 하겠습니다마는 혹시 의리에 맞지 않고 정론에 부합하지 않는 바가 있을까 염려스럽습니다. 대행 대왕의 성대한 공덕으로 볼 때 이 명호(名號)를 받으신 데 대하여 아마 비의(非議)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이 들은 바는 이와 다름이 있습니다.
예로부터 조(祖)와 종(宗)의 칭호에 우열(優劣)이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창업한 군왕만이 홀로 조(祖)로 호칭되었던 것은 기업(基業)을 개창(開創)한 1대(代)의 임금이어서 자손이 시조(始祖)로 삼았기 때문이었으니, 역대의 태조(太祖), 고조(高祖)의 유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 밖의 선대의 뒤를 이은 군왕들은 비록 큰 공덕이 있어도 모두 조로 호칭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예로부터 지금까지 깨뜨릴 수 없는 정리(定理)입니다. 오직 한(漢)나라의 광무(光武)는, 먼 종실(宗室)의 후예로 왕망(王莽)이 찬역(簒逆)한 뒤 도적떼가 봉기한 때에 난리를 평정하고 잃었던 나라를 광복(光復)하여 한나라를 하늘에 배향(配享)해 제사지내어, 이름은 비록 중흥(中興)이지만 실지는 창업과 같기 때문에 위로 압존(壓尊)되는 바가 없어서, 스스로 대통(大統)을 전하는 시조(始祖)가 되어 조(祖)로 호칭하였으니, 그 이치 또한 실로 당연합니다. 저 명나라의 태종(太宗)같은 이도 비록 건문(建文)의 난리010) 를 평정하였으나 실은 고황제(高皇帝)의 뒤를 이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조라고 호칭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가정(嘉靖) 17년에 와서 성조(成祖)로 추호(追號)하니 당시에 식자들의 비난이 많았습니다.
우리 나라의 세조 대왕은 친히 노산(魯山)011) 의 선위(禪位)를 받아 위로 문종(文宗)의 계통을 이었는데도 오히려 묘호를 조(祖)라고 호칭한 것에 대해서는 신의 견문으로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선조 대왕(宣祖大王)께서는 나라를 빛내고 태평을 이룩한 치적(治績)이 하늘에까지 알려진 큰 공이 있었으되 묘호를 의논하던 날에 조자로써 의정(擬定)하려 하자 윤근수(尹根壽)가 의례(義例)가 없다는 이유로 차자를 올려 그 의논이 중지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뒤 허균(許筠), 이이첨(李爾瞻) 등의 무리가 없는 사실을 엮어 만들어 공을 나라를 빛낸 공에 비기어 존호(尊號) 올리기를 광해(光海)에게 청했습니다. 광해는 혼자 담당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여 다시 조로 호칭하는 의논을 일으켰는데, 당시에는 문헌(文獻)에 밝고 경력이 많은 사람으로서 나라를 위해 말을 다 하기를 윤근수처럼 할 만한 자가 없었으므로 드디어 그 의논이 시행되었습니다. 이것은 모두 의리로 보아 옳지 않은 일입니다. 신은 일찍이, 당시의 군신들이 의리에 밝지 못하여 한갓 숭배해 받드는 것만이 높임이 되는 줄만 알고 위로 성대하신 덕에 누를 끼침이 된다는 것을 모르고서 전례가 없는 이런 예를 만들어 낸 것에 대하여 가슴 아프게 여겼습니다. 저 오대(五代) 남북의 임금들 중에는 혹 아들로서 아비를 잇고 아우로서 형을 이은 자들까지도 대부분 조라고 호칭하여, 예를 더럽히는 혐의는 생각지 않고 구차하게 일시의 호칭만을 분에 넘게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나 어지러운 세상에서 함부로 한 일에 대하여 논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이러므로 선대를 이어받은 임금은 비록 공덕이 있어 영원히 체천(遞遷)하지 않는 묘가 된다고 하더라도 모두 종(宗)이 되는 것이지 조(祖)가 되지 못합니다. 이를테면 주(周)나라의 무왕(武王)은 창업하여 대통(大統)을 전했는데도 단지 세실(世室)만을 만들었을 뿐이니 이것이 곧 종이 된다는 증거이며, 당나라 태종은 집안을 나라로 만들었으되 묘호를 종이라 칭하였으니 이것이 곧 조가 될 수 없다는 증거입니다. 한 문제(漢文帝)는 여씨(呂氏)의 난리를 평정하고, 당 현종(唐玄宗)은 위온(韋溫)의 난리를 평정하였으며, 진 원제(晋元帝)와 송 고종(宋高宗)은 혼란한 뒤에 나라를 부흥시켰으니 역시 한 시대를 중흥시켰다고 할 만한데도 그 신하들이 모두 감히 조(祖)의 호칭을 쓰지 않은 것은 의례(義例)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무(尤袤)가 ‘고종이 비록 중흥한 공이 있지만 아들로서 아버지인 휘종(徽宗)의 대통을 이었으니 묘호를 종이라 칭해야 마땅하지 광무(光武)와 같이 조로 칭해서는 부당하다.’고 하였는데, 이 말은 다만 당시의 정론(正論)일 뿐만 아니라 만고(萬古)의 정론(定論)으로 고종의 성덕(盛德)에 훼손되는 바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차례로 지난 역사를 상고해 보면, 그러한 흔적을 징험할 수 있으니 이른바 공이 있으면 조라 칭하고 덕이 있으면 종이라 칭합니다만 그 뜻이 이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함께 체천하지 않는 종묘에 모셔진 것이라면 종이라 해서 조보다 낮아지는 것이 아니고 조라고 해서 종보다 높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태종(太宗)·중종(中宗)·세종(世宗)·고종(高宗)은 묘호를 모두 종이라 칭하였으나 체천하지 않는 묘가 되는 것은 진실로 같습니다. 그러니 어찌 예를 어기는 혐의를 무릅쓰고 계통(繼統)의 의리를 어지럽히면서 호칭해서는 안 될 조(祖)의 호칭을 쓴 뒤에야 비로소 체천하지 않는 종묘가 되어 성대한 덕에 빛을 더하는 것이 되겠습니까.
우리 대행 대왕께서는 탄생하신 처음부터 유달리 귀여워하시는 성조(聖祖)012) 의 사랑을 많이 받아 나라를 부탁하여 맡기려는 뜻이 이미 이름을 지어주시던 날에 드러났습니다. 마침내 화란을 평정하여 다시 윤기(倫紀)를 바로잡고 자전의 분부를 받들어 드디어 왕위에 오르시어 낳아주신 부모를 추존하는 전례(典禮)를 이미 거행하셨으니, 아들로서 아버지를 이은 계통이 절로 있는 것입니다. 묘를 체천하지 않고 묘호를 종이라 칭하는 것이 어찌 성상께서 어버이를 드러내시는 효도와 신하들이 임금을 높이는 의리에 부족한 바가 있겠습니까. 만약 지금 의리도 헤아리지 않고 옛것을 본받지 않고서 예(例)를 무시한 전례를 따라 그대로 조(祖)의 호칭을 사용한다면 일이 경(經)에 의거한 것이 아니어서 예의 뜻과 크게 어긋날 뿐만이 아니라 원종(元宗) 이상 열성(列聖)의 묘에 대해 능멸하고 억압하는 혐의를 면할 수 없어 하늘에 계시는 대행 대왕의 혼령께서 저승에서 불안해 하실까 두렵습니다. 이렇게 된다면 높이고 드러내는 것이 다만 대행 대왕께 비례(非禮)를 씌워 백세의 비난을 부르는 것이 될 뿐이니 어찌 애석하지 않겠습니까. 중종 대왕께서는 연산(燕山)의 더러운 혼란을 깨끗이 평정하시고 다시 문명의 지극한 정치를 열으셨으되 조라고 호칭하지 않고 단지 종이라 호칭하였으니 이것이 오늘날 우러러 본받아야 할 바가 아니겠습니까.
미천한 신은 식견이 고루하여 관직도 낮고 말도 천박한데 상께서 상중(喪中)에 계시는 이때에 이미 결정된 막중한 의논을 재론하여 주제넘게 말씀을 올렸으니 죄가 만번 죽어 마땅합니다. 그러나 생각건대 빈전(殯殿)에 책명(冊命)을 올릴 날이 머지 않았는데 이때를 놓치고 말하지 않았다가 나중에 후회해도 소용이 없게 되면 선왕(先王)께 보답하고 전하께 충성할 직분을 시행하지 못하여 평생 한(恨)을 안게 될 것이니, 외람되이 시끄럽게 떠드는 것이 미안함이 되는 정도일 뿐이 아닐 것입니다. 며칠 동안 상소문을 올리려 하다가는 다시 말곤 하였으나 끝내 말 수가 없었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예로부터 통행하던 전례(典禮)이니 자신의 소견만을 고집하여 함부로 망령된 의논을 내지 말라."
부수찬 유계(兪棨)가 상소하기를,
"대행 대왕께서는 공렬(功烈)이 하늘에까지 알려지고 지극하신 인(仁)이 천하에 덮이시어 온 백성이 우러러 받든 지가 거의 30년인데, 뜻밖에 승하하시니 궁벽한 시골에 사는 백성들까지 달려와 비통히 울부짖지 않는 자가 없었습니다. 오늘날 신민으로서 망극한 성은에 보답하는 길은 오직 성덕(聖德)을 찬양하여 만세에 전하는 것뿐이니, 묘호 휘칭(廟號徽稱)을 의논할 때에 어찌 털끝만큼이라도 미진함이 있게 하여 천하 후세에 뒷말이 있게 해서야 되겠습니까. 지난날 묘당과 관각의 신하들이 거듭 의논을 올려 아름다운 호(號)를 정하였는데 그 글자가 포함하고 있는 뜻이 광대하니 지극하다고 할 만하고, 대행 대왕의 성대하신 공업에도 거의 부합하니 신민의 기쁨이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신의 어리석은 소견에는 의심이 없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인이 시법을 만든 것은 추모하는 효자 충신의 지극한 정성을 다하게 한 것이니, 혹시라도 정문(情文) 사이에 조금이라도 혐의가 있거나 구애되는 바가 있으면 선왕의 뜻을 받들어 선양(宣揚)하고 선왕의 뜻을 추모하여 효도를 지극히 하는 뜻이 아닐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조종에 이미 인묘(仁廟)가 계시는데 오늘날 묘호에 다시 인(仁)자를 쓴다면, 비록 전성(前聖)과 후성이 도가 같고 헤아림이 같다고는 하지만 어찌 혐의를 분별하는 뜻이 없어서야 되겠습니까.
시법이 생긴 이후로 주(周)·한(漢)·당(唐)·송(宋) 등 거의 수천 년이 지났지만 묘호가 중첩되어 나오는 예는 없었습니다. 만약 조손(祖孫)이 덕이 같을 경우 아울러 같은 글자를 사용하여도 의리에 해가 되지 않는다면 주(周)나라 이하 역대 왕조에 같은 종묘 안에 있는 현군 성군 중에 어찌하여 전왕과 후왕의 시호가 같은 분이 하나도 없겠습니까. 오직 명나라 순제(淳帝)와 소황(昭皇)013) 만이 한 글자를 같이 사용하였는데 어떤 근거에서 그렇게 한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마는, 당시 삼양(三楊)014) 의 무리가 의논한 바의 전례(典禮)가 실로 후인들의 비난을 많이 받았으니 이 또한 이들이 발의(發議)한 것이 아니라고 어찌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상께서는 번거롭게 되풀이하는 것을 혐의스럽게 여기지 마시고 다시 조정의 의논을 물어 사리에 맞게 처리하시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어제 응교 심대부가 상소하여 조와 종의 호칭을 의논하였는데 성상의 비답이 매우 엄하시어 논의를 허용하지 않으셨습니다. 대부는 근밀(近密)한 곳에 있는 사람이니 생각이 있으면 반드시 아뢰는 것이 진실로 그의 직분입니다. 하물며 그가 논한 바가 전거(典據)가 없지 않은데이겠습니까. 그 설명은 이미 대부의 원소(原疏)에 갖추어져 있으니 신이 감히 다시 되풀이하지 않겠습니다. 그가 말한 ‘종이라 해서 조보다 낮은 것이 아니고 조라 해서 종보다 높은 것이 아니다.’는 것은 대부의 말이 아니라 이미 옛사람 중에 그렇게 말한 분이 있었습니다. 예는 중도를 얻는 것이 귀함이 되고 논의는 강명(講明)을 싫어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니 이처럼 엄하게 비답을 내리신 것은 옳은 일이 아닌 듯합니다. 즉위한 초기라서 중외의 사람들이 주목(注目)하고 있는데 이러한 왕의 말씀이 한번 나왔으니 실망스러움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신은 진실로 성상의 뜻이 어떠한지를 알고 있습니다. 성상께서는 막중 막대한 예를 사람마다 경솔히 의논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셨고 또 성상께서도 말씀하기 어려운 바가 있으므로 그렇게 하지 않으실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국가의 일은 대소를 막론하고 논의해야 될 것이 있으면 뭇신하들이 소견에 따라 숨기거나 꺼림없이 할 말을 다하는 것이 바로 성세(盛世)의 일입니다. 가령 이보다 큰 논의가 있을 경우 신하들이 모두 관망만 하고 말을 하지 않는다면 어찌 조정의 복이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공의(公議)가 이미 정해졌으니 어지럽히지 말라."
사간 조빈(趙贇)이 상소하기를,
"신이 듣건대, 지난번에 묘호에 관해 진언한 자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 진언자의 말에 ‘조(祖)의 호칭이 타당하지 않다.’고 한 말이 있습니다. 한(漢)·당(唐)·송(宋)의 계세(繼世)한 임금 중에는 모두 조(祖)의 호칭이 없고 오직 광무(光武) 한 사람 뿐이며, 송 고종(宋高宗)의 시호를 의논할 때 조정이 모두 조로 칭하고자 하였으나 유독 우무(尤袤)만이 ‘한 광무(漢光武)는 위로 계승한 바가 없지만 지금 대행(大行)하신 황제는 휘종(徽宗)의 대통(大統)을 이었으니 조로 호칭할 수 없다.’고 반대하였는데, 저 효종(孝宗)이 어찌 효성이 부족해서 단호하게 우무의 설을 따랐겠습니까. 의리에 크게 옳지 않음이 있어서였을 것입니다. 진언자의 말에 ‘인(仁)자가 미안하다.’고 한 것은 조손(祖孫)이 같은 글자를 거푸 시호로 쓰는 것이 과연 타당하지 않다는 뜻에서였을 것입니다. 삼가 생각건대, 성조(聖祖)의 묘호에 이미 세종(世宗)이 있는데 또 세조(世祖)가 있으므로 오늘날 논하는 자들이 이를 전거로 삼고 있는 듯합니다. 신이 감히 알 수 없습니다마는, 세조 대왕의 시호를 의논할 때 누가 이를 주장했습니까. 과연 후세에 비난이 없겠습니까. 옛사람도 일찍이, 조종조의 훌륭했던 정치는 준수하지 않으면서 잘못했던 정령(政令)을 가지고 선왕의 고사라고 고집하는 잘못에 대해서 논한 적이 있습니다. 신이 감히 알 수 없습니다마는, 세조 때의 훌륭했던 정치를 지금 다 거행하고 있는지요? 무엇 때문에 전혀 적당하지 않은 묘호만을 서둘러 먼저 따르고자 하십니까? 그렇다면 지금 말하는 자들의 심정은 생각이 있으면 반드시 아뢰어 잘못되는 거조가 없기를 바라는 데 불과할 뿐입니다. 전하께서 만약 언로(言路)를 생각하신다면, 쓸 만하지 못한 말일 경우 그냥 버려두는 것이 옳은데, 한 마디 말에 기를 꺾고 배척하심이 너무 심하시니, 신이 감히 알 수 없습니다마는 그렇게 하시는 것이 공심(公心)입니까, 사심(私心)입니까? 우리 태묘에 이미 조(祖)의 묘호를 가지신 분이 셋이 있는데 지금 또 조로 호칭할 경우 한 종묘 안에 네 분의 조(祖)가 있어 위로 존속(尊屬)인 선왕을 핍박하고 서로 압제(壓制)하게 될 것이니 매우 미안한 일입니다. 이것은 세조의 시호를 논해 정한 자들의 잘못입니다. 선조(宣祖)를 조로 칭한 것은 당시 소인들의 아첨에서 나온 것인데, 지금 어찌 다시 그 전철을 밟아서야 되겠습니까. 신의 생각에는 전하께서 공사(公私)의 사이를 정미롭게 살피지 못하시어 호오(好惡)하시는 바가 도리어 사(私)에 이끌려 그러하신 듯하니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반드시 자신을 반성하여 오직 공(公)만을 힘쓰소서.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공(公)은 인(仁)의 이치이다.’고 하였으니, 이는 인이 반드시 공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전(傳)에 말하기를 ‘임금이 되어서는 인에 그친다.’ 하였으니, 지금 전하께서 어렵고도 큰 왕업을 받으시어 억조의 백성을 어루만져 다스리시면서 인을 덕으로 삼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인을 하고자 하시면 공을 버리고 다른 데서 구할 수가 없습니다. 전하의 오늘날의 일이 비록 관과지인(觀過知仁)015) 이라고 할 수 있으나 정치 교화를 새롭게 하시는 이때에 병통됨이 크니,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두려워하여 삼가소서. 오늘날 세도(世道)는 사의(私意)만이 세상에 가득하고 공도(公道)는 메아리마저 끊겼으니 전하께서 비록 공도로 아랫사람을 다스려도 오히려 미치지 못할까 두려운데 하물며 일신의 호오로써 경시하고 중시하는 바가 있어서야 되겠습니까. 신은 전하를 위하여 매우 애석하게 여깁니다.
신이 인(仁)에 대한 설을 부연하여 전하를 위해 올리겠습니다. 주자(朱子)는 ‘인은 천리(天理)의 공변됨을 온전히 하고 일호의 사사로운 인욕(人欲)도 없는 것이다.’고 하였고, 정자(程子)는 ‘인의 도는 요컨대 하나의 공(公)이라고 말할 수 있다. 공을 사람이 체득하기 때문에 인(仁)이 된다.’ 하였는데, 섭채(葉采)가 해석하기를 ‘인자(仁者)는 천지 만물을 하나로 여기니 그 이치가 공(公)일 뿐이다. 능히 지공 무사함을 사람에게 체득시키면 관평(寬平), 부박(溥博)한 속에서 절로 측달 자애(惻怛慈愛)의 뜻이 있게 된다.’고 하였으니, 그렇다면 공하면 인하고 사(私)하면 불인한 것입니다. 진실로 인하면 사물을 접할 때 항상 관평 보박한 마음이 보존되어 시행하는 사이에 측달 자애의 뜻이 성하게 생겨나서 절로 갑자기 좋아하거나 미워하는 병통이 없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자가 말하기를 ‘공하면 상대와 나를 모두 비출 수 있기 때문에 인은 서(恕)할 수도 있고 애(愛)할 수도 있다.’ 하고, 또 말하기를 ‘드넓고 크게 공하면 오는 사물을 그 사물의 실정에 맞게 순응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된다면 어찌 희로(喜怒)가 중도를 지나쳐서 바르게 되지 않음이 있겠습니까. 임금의 덕은 반드시 관평 보박으로 근본을 삼고 측달 자애로 용(用)을 삼기 때문에 절로 기울어 위태롭거나 넘쳐 흐르게 되지 않는 것입니다. 공사의 구분은 관계되는 바가 크니, 시비가 천리의 공(公)에서 어긋나고 호오(好惡)를 일신의 편견(偏見)에 따른다면 국가의 치란이 여기에서 결정될 것인데 비록 백명의 대간이 있더라도 장차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그대가 언로(言路)를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을 하니 탄식스럽고 다시 매우 두렵다. 나를 병들었다 하여 말하지 않을 생각을 말고 힘써 병을 치료할 수 있는 방도를 진술하라."
상이 탄신일(誕辰日)에 정부와 육조가 봉진(封進)하는 소선(素膳)을 받지 않았다. 예조가 상께서 비록 거상중(居喪中)에 있다 하더라도 향상(享上)하는 의식을 폐할 수는 없다하여 소선을 간략하게 올리기를 청하였다. 그러나 역시 윤허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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