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4일 임진
호조 판서 원두표(元斗杓)가 상소하기를,
"아, 오늘날 조정의 폐단을 말로 하자면 끝이 없어서 수없이 많은 폐단을 일일이 열거하기 어렵습니다. 다만 위망을 취하게 될 매우 중요한 것만을 골라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조정이나 사부(士夫)들 사이에는 풍습이 무너지고 지취(志趣)가 더러워져서 직무(職務)는 관계 없는 일인양 버려 두고 오직 분경(奔競)만을 일삼으므로 사의(私意)가 공공연히 행해지고 염치는 완전히 없어졌습니다. 중외의 관직에 있는 대소 신료들이 단지 제몸의 이익만을 알 뿐 공의(公議)는 생각지 않아 모든 시정(施政)과 조치(措置)에 있어서도 한결같이 일신의 사욕만을 따를 뿐이므로 국가의 온갖 일이 사적으로 하지 않으면 이루어지지 않는 형편입니다.
사람 등용하는 일을 가지고 말할 것 같으면, 관직 한 자리를 제수하는 데에도 집정자의 사인(私人)이 아니면 고관의 청탁에 따라 제수하기 때문에 빈 자리가 하나 생기면 온갖 청탁이 모여들어서 정관(政官)도 취사(取捨)하기가 곤란하여 먼저 그 청탁한 자의 지위의 고하와 자신과의 친분을 따져 주의(注擬)의 등급을 정합니다. 안으로 모든 관사의 여러 관직에서부터 밖으로 주현(州縣)의 수령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이와 같고 청현직의 의망에는 경쟁이 더욱 크고 사를 쓰는 것이 더욱 심하니, 인재를 얻지 못하여 백직(百職)이 제대로 수행되지 않는 것은 괴이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래도 탐오(貪汚)에까지는 이르지 않은 자들을 들어 말씀드린 것입니다. 염치없이 이익만 좋아하는 무리들로 말할 것 같으면 뇌물을 바치는 무리들이 문을 가득 메우는데 뇌물의 다소에 따라 벼슬자리가 좋아지기도 하고 나빠지기도 합니다. 처첩이나 자제가 전형(銓衡)의 권한을 멋대로 휘두르면서 각기 제 욕심을 채우는 데 전혀 기탄하는 바가 없습니다. 아, 어떤 자는 사의(私意)로써 공도(公道)를 무시하고 어떤 자는 뇌물로써 욕망을 이루는 데에만 급급하니 어느 겨를에 현재(賢才)를 찾아 나라를 위하여 인재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저 현덕(賢德)과 재능을 가지고서 깊이 은거하며 자신을 지키고 있는 자들이 어찌 이런 무리가 끌어낸다 해서 나오겠습니까. 사(私)를 행하여 나라를 병들게 한 것이 이토록 극에 도달하였습니다.
또 붕당의 화가 깊이 뿌리를 내린 지가 이미 60∼70년이나 되었으니 오늘날의 고질적인 폐단은 이보다 심한 것이 없습니다. 아, 선비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한 조정에 함께 있으면서 한 임금을 함께 섬긴다면 모든 정신(廷臣)의 도리는 임금을 아비처럼 섬기고 동렬(同列)을 형제처럼 보아 동료끼리 서로 공경하고 화합하여 한몸의 이해는 돌아보지 않고 밤낮으로 국사에 전념해야 마땅한 것인데, 어찌하여 사심을 버리지 못하고서 붕당의 색목(色目)을 세워 서로 미워하고 훼방하여 나라를 결단내고 백성을 병들게 하면서 전혀 걱정도 하지 않는단 말입니까. 그들 또한 어질지 못하다고 하겠습니다.
한번 붕당이 갈라져 파벌이 생긴 이후로 모두 명색(名色)이 있어 대대로 자기 당의 의논을 전하였으므로 위로 공경(公卿) 서료(庶僚)에서부터 아래로 민간의 선비들에 이르기까지 당을 갖지 않은 자가 없습니다. 그래서 자기와 당이 같은 자는 도와주고 당이 다른 자는 배척하여 일의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고 오직 자기 편을 무조건 돕고 반대 편은 무조건 공격하기만을 일삼습니다. 이러므로 온 조정 안의 사람들이 오로지 저희 편끼리 어울리기만을 힘쓰고 나랏일은 생각지 않습니다. 비록 재주와 식견이 뛰어난 자가 있다 하더라도 저희 당이 아니면 온갖 방법으로 배척하여 용납할 수 없게 하고, 비록 성품과 행실이 용렬하고 비굴한 자라 하더라도 저희 당에 붙으면 모두 함께 추켜세워 반드시 높은 벼슬에 오르게 합니다. 같은 패거리를 모아 직무는 돌아보지 않고 밤낮으로 붕당만을 일삼습니다. 전형(銓衡)을 맡은 관원이 이 당에서 나오면 저 당이 기가 죽고 저 당에서 나오면 이 당이 상심합니다. 그래서 온갖 방법으로 틈을 파고들어 악착같이 계획하는 것이 오직 상대 당을 억누르고 자기 당이 올라서는 데 있을 뿐이고 국가가 위태로워지거나 백성들이 고생하는 것은 전혀 자기들과 관계없는 일로 여깁니다. 이것은 온 세상 사람이 보고 들은 바이니 어찌 신이 자세히 말한 뒤에야 알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일찍이 선조(先朝)에서도 이 붕당의 폐단을 매우 미워하여 힘써 타파하려고 엄한 말씀과 중한 벌이 계속되었으나 그 폐단이 여전히 남아 있으니, 신은 삼가 한스럽게 여깁니다. 사(私)만을 따르는 해와 붕당의 폐단이 서로 이어져서 풍교(風敎)를 파괴하고 있으니, 우뚝하게 뛰어난 선비가 아니라면 누가 이런 풍습을 벗어나 물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인심이 날로 비하(卑下)하고 점점 나약해져서 구차하게 작위만을 보전하고 스스로 떨치지를 못합니다. 아비가 자식을 가르치고 형이 아우를 권면하는 데에도 오직 유속(流俗)에 휩쓸리고 세상의 온갖 더러움과 타협하여 시속(時俗)을 거스리지 않는 것으로 처신(處身)의 묘계(妙計)로 삼도록 하니, 비록 패륜의 행동과 사나운 행위가 눈앞에 펼쳐지더라도 전혀 이상하게 여기지 않고 으레 그런 것으로 생각하며, 심지어 스스로 청류(淸流)라고 하는 무리들까지 권문 세가에 붙으면서도 부끄러움으로 여기지 않기 때문에 조정에는 강직한 말이 들리지 않고 아래에는 주저하는 작태가 이루어졌습니다. 간혹 고지식한 사람이 있어 조금이라도 모난 행동이 드러나면 많은 사람이 떼 지어 비난하고 배척하는 소리가 떠들썩합니다. 대체로 바른 말과 곧은 의논은 고금에 듣기 어려운 바이니 상을 주어가며 말하게 하더라도 오히려 어려울 것인데, 하물며 그 벼슬을 깎아서 기를 꺾는 데이겠습니까. 설령 조정이 불행하여 정권을 훔치려는 크게 간악하고 교활한 자가 있다 하더라도 누가 옛날 광형(匡衡)이나 급암(汲黯)처럼 거리낌없이 말하려 하겠습니까. 예로부터 나라를 다스리는 도는 강직한 기상을 배양하는 것으로써 우선을 삼았으니, 조정에 강직한 말이 없는 것은 국가의 복이 아닙니다. 생각이 이에 미치자 한심한 생각이 간절합니다.
선비들의 풍습이 사치와 안일에 빠져서 곧은 기상이 없어지면 이익을 좋아하고 재물을 좋아하는 것은 인정의 본연인데 다시 무엇을 꺼려 탐욕스럽고 비루한 짓을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사대부들 사이에 사치가 풍속을 이루어 좋은 옷 입고 맛난 음식 먹으며 술잔으로 세월을 보내면서 오로지 재물만을 숭상하여 남에게 뒤지는 것을 부끄러워합니다. 혹 장엄하고 화려한 궁실이 한 마을 전체에 뻗쳐 있고 넓은 땅을 점령한 전원(田園)이 주현(州縣)에 두루 차 있으며 진기한 보화가 창고에 가득하기도 합니다. 신하의 사치와 부(富)가 이에 이르렀는데 이것을 어느 곳에서 취하였겠습니까. 백성의 고혈을 짜서 저희 집으로 실어들인 것이라는 것은 따져보지 않고도 알 수 있습니다. 뇌물 짐을 수레나 배에 싣고 와서 진취(進取)의 길을 도모하는 번진(藩鎭)이나 읍재(邑宰)들이 날마다 세력가의 문으로 모이니 백성들이 어찌 수척해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권세 있는 집안이 더욱 부자가 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참으로 가슴 아픈 일입니다.
신이 위망(危亡)의 단서가 진실로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나 다만 이 몇 가지만을 서둘러 말한 것은, 오늘의 폐단 중에 이보다 큰 것이 없고, 변혁(變革) 경장(更張)할 기틀이 오로지 오늘에 있기 때문입니다. 맹자(孟子)의 말에 ‘아무리 지혜가 있어도 형세를 타는 것만 못하다.’ 하였고, 《서경(書經)》에 또 ‘새로 천명을 받았으니 덕을 새롭게 하라.’ 하였으니, 천명이 위에서 돌보아주고 인심이 아래에서 기원해 향모(向慕)하는 지금이야말로 바로 전하께서 크게 분발하시어 형세를 타고 훌륭한 정치를 하여 인심을 경동(驚動)시키고 천명에 보답할 때입니다. 만약 구습을 따라 고식적으로 세월만 보내면서 기회를 놓친다면 모든 일이 흐트러지고 분란스럽게 되어 날로 위망으로 치달아 후회해도 미칠 수 없고 다시 어찌해 볼 수 없어 아무리 분발하여 떨쳐 일어나고자 해도 끝내 될 수 없을 것인데, 어떻게 백성들의 바람을 위로하고 하늘의 도움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전하께서는 놀라고 두려운 마음으로 한번 세도(世道)를 변혁하시어 훌륭한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마소서.
이른바 크게 훌륭한 일을 한다는 것이 어찌 아득하여 헤아릴 수 없는 곳에서 기이한 술책을 찾는 것이겠습니까. 시의(時宜)에 적합한 중요한 도를 찾아서 힘써 행하는 데 불과할 뿐입니다. 조정에서 현사(賢邪)를 분별하고 시비를 밝게 분별하여 선한 무리가 그 뜻을 펴게 하고 소인들이 간악함을 행하지 못하게 하면 됩니다. 그 현사 시비를 살펴 고르는 방법은 그 언행(言行)을 살펴서 취사(取捨)하는 것뿐입니다. 벼슬을 맡아 직분을 다하고 멸사 봉공하여 한결같은 마음으로 왕실을 섬겨 죽고 사는 것도 개의치 않는 자는 양신(良臣)인데, 이런 사람은 시세에 붙좇는 무리에게 미움을 받는 것이 당연한 형세이니 비록 참소하는 자가 있더라도 전하께서는 믿고서 의심치 마소서. 아첨으로 잘보여 임금의 뜻만을 따르고 자신의 의사는 굽히고 남의 비위만을 맞추어 시망(時望)016) 을 구하는 자는 비부(鄙夫)인데, 이런 사람은 시속(時俗)에 잘보인 것이 예로부터 그러하였으니 비록 칭찬하는 자가 있더라도 물리치고 등용하지 마소서.
탐욕스럽고 더러워 이익만을 좋아하여 남의 말은 돌아보지도 않고 오직 제몸 살찌우기만을 일삼는 자와 의리도 없고 행동이 나빠 뻔뻔스럽게 부끄러움을 모르고 감히 멋대로 악을 하는 자는 사람들이 다 알고 있을뿐더러 드러난 사실을 은폐하기 어려우니 분별하기가 무엇이 어렵겠습니까. 사람의 충사(忠邪) 선악에 대해 이미 그 내용을 자세히 아셨다면 거취(去就)와 종위(從違)를 흑백을 분별하듯이 용단을 내려 조금도 우물쭈물하심이 없이 하여,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모두 선을 좋게 여기고 악을 미워하는 전하의 성심을 우러러서 감히 간사한 마음을 품고 전하의 총명을 속이지 못하게 하며 전하의 강의(剛毅) 영렬(英烈)을 알아 감히 나약하게 남에게만 미루고 고식적으로 옛것만을 따르는 풍습을 따르지 않게 하여, 마음을 가다듬고 생각을 바꾸어 각기 맡은 직분을 다하게 하소서. 그러면 앞에서 거론한 사를 따르는 풍습이 거의 개혁될 것이며 탐욕스런 풍습과 주저하는 폐단도 족히 걱정할 것이 없게 될 것입니다.
붕당의 화는 고질적인 폐단이 된 지 이미 오래여서 실로 제거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 역시 임금이 선악을 밝히고 시비를 분별하는 데에서 벗어나지 않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 선악 시비를 변별하는 요령에 대해서는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전하께서 진실로 뛰어나게 자임(自任)017) 하시어 지치(至治)에 이르기를 기약하신다면, 아래에서 받들어 따르는 신하들도 감히 다시 전일의 상규(常規)나 잘못된 풍습을 따르지 않고 새로운 정치에 호응하여, 각각 자신을 갈고 닦아 깨끗한 일념으로, 묘당에 있는 자는 묘당의 책임을 다하고 대각(臺閣)에 있는 자는 대각의 임무를 다할 것이고, 백료(百僚)나 서관(庶官)까지도 각각 힘써 자신의 힘을 다할 것이며, 재주나 덕이 없어 직임(職任)을 감당할 수 없는 자는 장차 직임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일을 망치어 형벌을 받게 될 것을 두려워하여 감히 전에 하던 것처럼 엽관 운동이나 권문에 붙는 짓을 하지 못할 것입니다. 제 한 몸을 건사하기에도 오히려 이러한데, 어느 겨를에 패거리를 모아 자격도 없는 자를 함부로 천거해서 스스로 죄에 빠지려 하겠습니까.
진실로 이렇게 된다면 현인은 나오기를 기대하지 않아도 스스로 나아올 것이고 소인은 물러나기를 기약하지 않아도 스스로 물러갈 것인데 붕당의 풍습이 무슨 걱정이 되겠습니까. 어질고 재능있는 자들이 조정에 많이 모여 절로 하나의 당이 된다면 이것이 바로 이른바 군자의 당은 많은 것을 걱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 한갓 붕당의 명색을 미워하여 힘써 제거하고자 해서 이 당과 저 당 사이에 억누르기도 하고 떠받쳐 올리기도 하여 양쪽 모두가 성해지지 못하게 할 뿐이라면, 비록 성상의 심려를 갑절로 수고롭혀 밤낮으로 부지런히 힘쓰시더라도 끝내 효과는 조금도 없고 도리어 그 형세만을 격렬하게 할 뿐입니다. 궁내(宮內)를 엄히 다스리고 척리(戚里)를 멀리하여 먼저 왕가(王家)를 바르게 함으로써 조정을 바르게 하는 것은 예로부터 밝은 임금들이 힘쓴 바입니다. 바야흐로 단본 정시(端本正始)018) 하는 날을 당하여 이런 문제들까지 염려할 것은 없겠습니다만, 그러나 인정이란 쉽게 이끌리고 가까운 사람들은 막기가 어려우니 경계를 엄하게 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이 몇가지 일들은 세도(世道)를 일신하기 위하여 지금껏 해오던 바를 따르지 않으려는 것인데 세속에서는 처음 봄으로 반드시 괴이하게 여겨 분분히 옛것을 고치려는 것이라고 지목할 것입니다. 그러나 신은 그렇게 생각지 않습니다. 요(堯) 순(舜)은 대성(大聖)으로서 읍양(揖讓)으로 선위(禪位)하고 받았으니 변개(變改)할 바가 없었을 듯한데도 거조(擧措) 사이에 경장(更張)한 것이 많았습니다. 그중에서 큰 것을 가지고 말할 것 같으면, 팔원(八元)과 팔개(八凱)를 등용한 것과 사흉(四凶)을 제거한 것인데, 이는 모두 요가 미처 등용하거나 제거하지 못했던 바이니, 이들을 등용하고 제거했다 해서 계승의 의리에 무슨 혐의가 되겠습니까. 따르고 개혁한 것과 덜고 보탠 것은 시세(時勢)가 그러했기 때문입니다. 또 신이 옛 성현의 말씀을 듣건대, 정치를 하는 도는 반드시 근본이 있으니 성학(聖學)을 강명(講明)해서 먼저 근본을 세운 뒤에야 정령(政令)과 시조(施措)가 사리에 맞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먼저 근본을 세우지 않고서 한갓 사업을 하는 말(末)에 간절해 하는 것은 정치를 아는 의논이 아닙니다. 그러나 신은 이에 대해 본래 어두우므로 감히 망령되이 진술하지 못하겠습니다. 다만 수천 리나 되는 우리 나라에 어찌 글을 읽어 학문이 밝은 선비가 없겠습니까. 전하께서는 그 사람을 맞아다가 그와 더불어 강론하신다면 반드시 깊이 터득한 효과가 있어 신의 말로는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닐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시대의 병폐를 논한 것과 근본을 다스리는 도가 모두 절실하니 깊이 유념치 않을 수 있겠는가. 경은 계속 상소하여 이런 풍습을 구제하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특별히 호피(虎皮)를 주어서 가상히 여겨 장려하는 뜻을 표하라."
6월 8일 병신
예조 참판 허계(許啓)가 상소하기를,
"대행 대왕의 시호에 강상(綱常)을 세우고 이륜(彛倫)을 펴고 명분을 바루고 민지(民志)를 안정시킨 등의 자의(字義)가 없으니 존호(尊號)를 추상(追上)하소서."
하니, 상이 묘당에 내려 의논하게 하였다. 좌의정 이경석(李景奭) 등이 아뢰기를,
"묘호인 인(仁)자가 의(義)·예(禮)·지(智)의 덕을 포함하여 모든 선이 빠짐없이 갖추어 있는 뜻을 겸하고 있으며, 또 헌문 열무(憲文烈武) 네 글자가 실로 난리를 평정하여 바른 세상으로 되돌린 중흥(中興)의 공에 부합하기 때문에 묘호와 시호를 이미 이것으로 의논해 정한 것입니다. 존호와 시호가 산 분과 죽은 분에게 올리는 것은 비록 다르지만 휘칭(徽稱)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시호 위에 존호를 더 올리는 것은 아마도 옛예가 아닐 듯합니다."
하고, 영돈녕부사 김상헌(金尙憲)이 아뢰기를,
"대행 대왕께서 시종 겸양하신 덕이 신하들을 감동시켰으니 감히 휘칭 올리기를 청할 수 없습니다. 이런 내용을 사책(史冊)에 기록하는 것이 어찌 몇 글자를 추상하는 아름다움보다 크게 빛이 나지 않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신자의 정으로는 진실로 최선을 다하지 않아서는 안 되나, 생각건대 이미 선조(先朝)의 뜻이 아니니 계술(繼述)의 도에 어그러짐이 있을까 두렵다. 어떻게 해야 정례(情禮)에 맞겠는가? 다시 대신들에게 물으라."
헌부가 아뢰기를,
"허계가 일찍이 2품 이상이 모여 시호를 의논하던 날에는 존호를 추상해야 한다는 말을 하지 않고서 감히 소장(疏章)을 올려 존호를 추가해 올리기를 청하여 현연히 분수 밖의 것을 바라는 뜻이 있으니 사부(士夫)의 마음가짐이 어찌 이러해서야 되겠습니까. 파직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여럿이 의논할 때에는 미처 생각이 나지 않았는지도 모를 일이니 용서할 만한 도리가 없지 않다."
우참찬 조경(趙絅)이 차자를 올리기를,
"신이 어제 건양문(建陽門) 밖에서 장막 등 여러 도구를 길 옆에 늘어놓은 것을 보고서 물어 보았더니 소격동(昭格洞)에서 대행 대왕을 위한 굿을 하기 위하여 궁중에서 미리 여러 도구를 운반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신은 이 말을 듣고 경탄(驚歎)을 금치 못하였습니다. 무당은 바로 세 가지 나쁜 풍속 중의 하나입니다. 선왕의 정사는 귀신을 가탁하여 사람들을 의혹시키는 자는 모두 반드시 주벌하셨으니 어찌 선왕의 법을 따르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신은 이 일이 환관이나 궁첩(宮妾)들이 여염의 나쁜 풍속을 귀에 젖도록 들었기 때문에 당연한 것으로 여겨 승하하신 뒤에 망령되이 행하고자 함이라는 것을 잘 압니다.
신이 생각건대 우리 조종의 가법(家法)이 지극히 엄정(嚴正)하여 불교·도교 및 영단(靈壇)·음사(淫祠)를 모두 물리쳐 텅 비게 하셨고, 더구나 우리 대행 대왕께서는 재위(在位)하신 27년 동안 한마음으로 정도만을 행하시어 한 번도 복을 받기 위해 기축(祈祝)한 일이 없으셨는데 지금 만약 무당들로 하여금 미치광스러운 짓을 멋대로 하게 한다면 어찌 크게 선왕을 속이는 데 가깝지 않겠습니까. 대체로 임금이 미워해야 할 것 중에는 총명을 가리는 것보다 더 미워할 것이 없고, 시작을 바르게 하는 도는 또 의리를 밝히고 신간(神姦)을 끊어버리는 데 있으니 어찌 전하께서 삼가 경계할 바가 아니겠습니까. 근습(近習)들이 전하께서 거상중(居喪中)에 계신 때를 타서 다시 두려운 줄 모르고 감히 바르지 않은 일을 멋대로 자행하니 어찌 그 조짐이 자라나지 않는다고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이 일을 작은 일로 여기지 마시고 급히 밝은 분부를 내려 통렬히 배척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임금을 사랑하는 경의 정성이 매우 가상하니 어찌 마음을 열고 받아들이지 않겠는가. 비록 내 뜻대로 할 수 없는 일이 있더라도 조용히 처리하겠다."
헌부가 아뢰기를,
"전함(前銜)019) 3품 이하는 백의(白衣) 백립(白笠)으로써 성복(成服)하는 것이 유생(儒生)·생도(生徒)들과 다름이 없으니, 이것이 비록 《오례의(五禮儀)》에 실려 있는 바이기는 하지만 정례(情禮)로써 헤아려 볼 때 매우 부당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전함에 있던 사람이 복직한 뒤의 복색(服色)도 미리 의논해 결정해야 하는데, 해조가 아직까지 계품(啓稟)하지 않으니 물의가 매우 미안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도의 감사가 진향(進香)하는 것이 이미 전례(典禮)에 실려 있으니 반드시 이미 행한 규례(規例)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갑자기 도사(都事)가 대행(代行)하게 하는 것은 역시 구차한 듯하니 사관으로 하여금 명종(明宗)·선조(宣祖)의 두 실록에서 상고해 내도록 하여 정식으로 삼으소서."
예조가 아뢰기를,
"우리 나라가 길흉의 예에 있어서 반드시 《오례의(五禮儀)》를 준용(遵用)하는 것은 시왕(時王)의 일정(一定)한 제도이므로 성인이 예를 제작한 본의에 크게 거스리지 않으면 감히 경솔히 변경하거나 함부로 고쳐서는 안 된다는 이유에서입니다. 성복할 때 전함이 유생과 동일하게 백립(白笠) 백대를 하였다면 비록 복직하더라도 감히 최복(衰服)으로 변경하지 못하는 것은 대개 이미 입은 복을 뒤에 변경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실록을 상고하건대, 예종조(睿宗朝) 때 정원에 분부하기를 ‘상복은 추후에 만들지 않는 것이니 지금 새로 관직에 제수된 자는 흰 옷을 입고 출근하라.’ 하였고, 무신년 국상 때 집의 이경전(李慶全)이 당초에 죄폄(罪貶) 중이어서 최복을 입지 못했는데 뒤에 봉묘(封墓)의 예를 행하려 할 때 백의로서 일을 행할 수 없다하여 인피하자, 삼공인 이원익(李元翼)·이항복(李恒福)·심희수(沈喜壽) 등이 ‘산릉에 일을 행하는 데는 복색에 상관없이 집의가 봉묘하는 것이 바로 예문(禮文)이니 백포(白袍)로 예를 행하더라도 방해되는 바가 없을 듯하다.’고 하였습니다. 또 을해년 등록을 상고해 보건대, 전함으로서 복직한 자는 백모(白帽)·백단령(白團領)·숙마대(熟麻帶)로써 공무를 본다고 하였습니다. 선조 때 이미 행한 제도와 《오례의(五禮儀)》에 실려 있는 예문을 따르소서.
그리고 진향(進香)하는 예는 마지막 길을 전송하고 애통해 하는 신자의 지극한 정성에서 나온 것이니 어찌 내외와 원근의 차이가 있겠습니까마는 다만 번신(藩臣)이 맡고 있는 임무가 지극히 중하기 때문에 감영(監營)을 떠나 멀리 올 수 없을 뿐입니다. 실록을 상고하건대, 명종·선조 양조(兩朝) 실록에는 진향 절목(進香節目)이 기록되어 있지 않고, 무신년에는 충청 감사가 장계하였으나 대신들이 건의하여 감사가 친히 오지 못하게 하였으며, 임신·을해년에도 역시 그렇게 하였습니다. 그러니 지금 진향하는 데 있어 경기 감사, 개성 유수, 강화 유수만이 친히 와서 올리게 하고 기타 여러 도는 전례대로 대행하게 하소서."
예조가 아뢰기를,
"《오례의(五禮儀)》를 상고하건대 졸곡이 지난 뒤 일을 보실 때의 복장은 백포(白袍)·익선관(翼善冠)·백립(白笠)·오서대(烏犀帶)·백피화(白皮靴)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백관의 복장에 대해 선묘조(宣廟朝) 때 민순(閔純)의 건의를 받아들여 졸곡이 지난 뒤에는 백모(白帽)·포과대(布裹帶)로 바꾸는 것이 이미 제도로 정해졌습니다. 이에 의거해 논하건대 전하의 익선관도 소관(素冠)으로 바꾸고 오서대도 포과대로 바꾸며, 왕세자의 서연(書筵) 복색인 백단령, 포과대, 공정책(空頂幘)도 백포로 바꾸고 쌍옥도(雙玉導)도 아잠(牙簪)으로 바꾸어야 마땅하니 이에 따라 개정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그러나 세자가 강서(講書)할 때는 본래 공정책을 쓰지 않으니 다시 의논해 아뢰라."
하였다. 다시 아뢰기를,
"세자가 강서할 때 공정책을 쓰지 않는다면 백세포(白細布)로 두 동계(童髻)를 싸고 소대(小帶)의 끈을 두가닥으로 뒤로 늘어뜨리는 것이 마땅하니 이렇게 개정하소서."
이때 양사의 관원들이 대부분 체직되었다. 이조가 아뢰기를,
"공제(公除) 이후에 정사(政事)를 하시겠다고 분부하셨으나 대관(臺官)은 여느 관원과 다르기 때문에 다시 여쭙니다."
하니, 원상(院相)과 상의하라고 명하였다. 원상 김자점(金自點)은,
"공제가 멀지 않았으니 이때를 기다려 인사(人事)를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고, 이경석(李景奭)은,
"정사는 임금의 큰 권리이고 대간은 임금의 이목이니 큰 권리를 오래도록 포기해서는 안 되고 이목을 오래도록 비워두어도 안 됩니다. 근자에 양사가 모두 비었으니 사체가 미안합니다. 무신년 국상 때에는 27일 전에 대간을 차출하였습니다. 감히 무신년 《정원일기(政院日記)》를 등사해 올리오니 이미 행한 예(例)를 따르소서."
하니, 답하기를,
"다시 며칠을 기다린 뒤에 차출하겠다."
전 승지 김집(金集), 전 지평 송준길(宋浚吉)·송시열(宋時烈), 전 자의(咨議) 권시(權諰), 전 사부 이유태(李惟泰)가 함께 소명을 받고 서로 뒤를 이어 조정으로 달려왔다. 이때 권시·이유태는 직명(職名)이 없었으므로 정원이 군직(軍職)에 제수할 것을 아뢰자 시와 유태가 상소하여 돌아가기를 비니, 상은 두터운 은혜가 담긴 비답을 내리고 윤허하지 않았다. 유태가 어미의 병을 이유로 돌아가기를 비니, 답하기를,
"소(疏)를 보고 서운함을 금치 못하겠다. 겨우 사은 숙배가 끝났는데 갑자기 어미의 병을 이유로 돌아가기를 비니, 어찌 나의 심사(心事) 때문에 차마 강제로 만류하겠는가. 그러나 의리에 있어서 어떨지 모르겠으니 모름지기 선조(先朝) 때의 은권(恩眷)을 생각하여 진퇴를 요량해 처리하라."
상이 정원에 분부하기를,
"듣건대 송시열과 이유태의 어미가 병이 있다 하니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특별히 미찬(米饌)과 약물(藥物)을 주게 하여 나의 근심하고 그리워하는 정을 펴도록 하라."
하였다. 또 분부하기를,
"부호군(副護軍) 김집, 부사정 권시·이유태 등이 외방에서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으므로 생각건대 여저(旅邸)020) 에 군색한 걱정이 없지 않을 듯하니, 해조로 하여금 특별히 미찬을 주게 하라. 그리고 앞으로 소명을 받고 오는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시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김집·이유태가 상소하여 사양하니, 상이 답하기를,
"준 것은 지극히 작은데 사양하는 바가 너무 지나치니 부끄러운 마음 말할 수 없다. 이것은 군신 사이에 곤란을 도와주는 당연한 일이니 안심하고 받으라."
6월 9일 정유
처음으로 정사를 하여 김집을 발탁해서 예조 참판에 제수하였다. 이조가 예부(禮部)의 관원에는 반드시 문신 중에서 등용해야 한다고 하며 법전에 실려 있는 것을 예로 들어 아뢰니, 답하기를,
"옛것을 상고하고 글을 읽은 사람을 부른 것은 장차 등용하기 위해서이니, 상규(常規)에 얽매일 것이 아니다."
병조가 이유태를 익위사 시직(翊衛司侍直)으로 주의(注擬)하니, 분부하기를,
"이 사람을 이전 직임에 쓰는 것은 마땅하지 않을 듯하다."
정경 부인(貞敬夫人) 김씨(金氏)를 봉하여 영가부 부인(永嘉府夫人)으로 삼았다. 김씨는 고 우의정 문충공(文忠公) 상용(尙容)의 딸이고 왕비의 어머니이다. 숙안군 주(淑安郡主)와 숙명군 주(淑明郡主)를 봉하여 공주(公主)로 삼고, 부위(副尉) 홍득기(洪得箕)를 익평위(益平尉)로 삼았다.
상이 이조와 병조에 분부하기를,
"명현(明賢)·충신·효자·청백리(淸白吏)의 자손을 먼저 수용(收用)하여 표장(表章)의 소지(素地)로 삼으라. 그리고 대간은 국가의 치란에 관계되고 수령은 백성의 고락에 관계되니 더욱 신중히 선택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 더구나 처음으로 정사를 하는 날이니 반드시 사정을 버리고 힘써 공도(公道)를 따라 국인의 기대에 부응하기 바란다."
하고, 또 분부하기를,
"대간은 더욱 신중히 고르지 않아서는 안 되니 경박하고 조급하여 앞을 다투는 무리는 절대로 주의하지 말라."
하였다.
헌부가 아뢰기를,
"근년 이래로 온갖 폐단이 함께 일어나서 안으로 백사(百司)에서부터 밖으로 열읍에 이르기까지 고치기 어려운 병폐가 굳어져서 구제할 수 없으니, 이제 사복(嗣服)021) 하신 처음을 당하여 크게 개혁하여 한번 폐습을 씻어내지 않는다면 어찌 온 나라 신민들의 바람을 위로할 수 있겠습니까. 반드시 병폐가 일어나게 된 원인을 자세히 알아야 병폐 구제책을 행할 수 있으니, 안에서는 각사(各司)의 관원이 함께 모여 상의하여 각각 본사(本司)의 병폐를 진술하게 하고, 밖에서는 열읍(列邑)이 고을 사람들을 모아 각각 본도의 병폐를 진술하게 하며, 그리고 병폐를 진술한 밑에 병폐를 구제할 수 있는 방책까지 진술하여 조정의 채택에 대비하게 하소서. 그리고 이것을 세 권의 책으로 만들어 한 권은 상께 상주(上奏)해서 묘당으로 내려보내어 잘 헤아려 변통하게 하고, 두 권은 양사에 각각 한 권씩 보내어 병폐를 규명 적발하여 논계(論啓)하게 하면 폐정(弊政)을 개혁하는 데 반드시 얼마의 도움이 있을 것입니다. 이런 내용으로 중외에 밝게 고하시어 작신(作新)022) 하는 조가(朝家)의 뜻을 알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6월 10일 무술
허적(許積)을 평안 감사로 삼았다.
정언 유계가 상소하여 체직되었다. 도승지 김남중(金南重)이 아뢰었다.
"유계가 처음으로 간직(諫職)에 제수되었으므로 스스로 예를 잘못 논했던 전일의 실수를 논열(論列)한 것인데 갑자기 체직을 윤허하시니 대간을 대우하는 도리에 자못 미진함이 있습니다. 체직시키지 말라고 명하소서."
예조 참판 김집이 상소하기를,
"신이 나이가 많고 병이 중하여 맡은 일에 힘을 펼 수 없는 사정을 앞서 올린 소(疏)에 대략 진술하고서 여저(旅邸)에 엎드려 삼가 견책이 내리기를 기다렸는데, 뜻밖에 오늘 천은(天恩)을 내리시어 광영스럽게 순서에 의하지 않은 발탁을 더하시고 옛것을 고증하고 글을 읽은 사람이라고 포장하시어 파격적으로 제수하시니, 신은 황공하고 부끄러워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신은 본래 범상한 인품과 용렬한 재주로 한갓 선신(先臣)023) 의 비호를 입어 허명(虛名)을 얻었으나 사실은 경박하고 거치니 어찌 절문(節文)024) 과 의칙(儀則)025) 의 상변(常變)026) 을 의논하는 데 낄 수 있겠습니까.
설령 신을 장구(章句)를 대략 익히고 도수(度數)027) 를 약간 안다고 한다면, 조만간 하문(下問)이 계실 때 스스로 헌체(獻替)028) 의 정성을 다할 것이니, 이는 애당초 관자(官資)의 고하나 직명(職名)의 유무와는 관계없는 일입니다. 옛말에 ‘임금을 섬기는 자가 큰 말이 받아들여지면 큰 이익을 바라고 작은 말이 받아들여지면 작은 이익을 바란다.’고 하였습니다. 대체로 임금께 진언하면서 자신의 이익을 바라는 것은 임금을 섬기는 도리가 아닌데, 더구나 신은 한 마디 말도 받아들여지기 전에 갑자기 큰 이익을 얻었으니, 신이 아무리 늙어 노망해서 정신이 어둡다 하더라도 어찌 염치를 무릅쓰고 요행을 바라는 것이 부끄러움이라는 것을 모르겠습니까.
더구나 춘관(春官)029) 의 관직에는 반드시 문관(文官)을 등용하는 것이 바로 금석(金石)의 전장(典章)입니다. 그런데 처음으로 즉위하시어 바야흐로 성헌(成憲)030) 을 살펴 허물을 짓지도 않고 잊지도 않으시는 이때, 노쇠하여 쓸모 없는 신을 위해 유사의 건의를 물리치고 불역(不易)의 법을 고치시어 사방의 이목을 놀라게 하고 조정의 정사 체모를 잃으시는 것은 작은 일이 아닙니다. 삼가 바라건대 위로는 가벼이 무너뜨릴 수 없는 조종(祖宗)의 전장(典章)을 생각하시고 아래로는 결코 제배(除拜)를 받아들이기 어려운 신의 분의(分義)를 생각하시어 특별히 개차(改差)를 윤허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경은 어찌 나를 돌아보지 않는 것이 이와 같은가. 이 직임에 경을 버리고 누구를 앉히겠는가. 진실로 그 자리에 알맞은 사람을 얻었다면 무엇 때문에 과명(科名)에 구애될 필요가 있겠는가. 모든 일에 그 이름만 있고 내용이 없는 것은 진실로 옳지 않은 것이지만, 지금 경은 그 내용도 있고 이름도 있으니 무슨 해로움이 있겠는가. 생각건대 조종께서 마련하신 법전(法典)의 뜻도 이러한 데 있지 않을 것이니 속히 관직에 나와서 나의 지극한 소망을 따라주기 바란다."
하였다. 김집이 사직소를 계속 세 번 올리었으나 상은 은혜가 담긴 비답으로 윤허하지 않았다. 집이 또 소를 올려 고하니, 상이 분부하기를,
"하고자 하지 않는 것을 억지로 시키는 것도 현자를 대우하는 도리가 아니므로 억지로 경의 뜻을 따르겠으나 참으로 한탄스럽다."
하였다.
간원이 【헌납 홍처량(洪處亮), 정언 허열(許悅).】 아뢰기를,
"신들이 듣건대 선묘조(宣廟朝) 때는 졸곡(卒哭) 전에 경연을 열었다 하고 또 주자(朱子)의 차사에도 ‘마땅히 수황(壽皇)031) 께서 이미 행하신 법을 따라 역월(易月)032) 한 뒤에는 포의(布衣)·포관(布官)으로 조회를 보고 정사를 청단(聽斷)하소서.’ 하였으니, 이로써 보건대 졸곡 전에 경연을 열어 신료들을 접견하여 치도(治道)를 강론하는 것을 조금도 늦춰서는 안 됩니다. 대개 임금의 상례가 필부(匹夫)와 같지 않은 것은 종사와 신민을 위한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공제(公除)가 지난 지도 수일이 경과하였으니 속히 조회를 보고 정사를 청단하는 의식을 거행하소서.
그리고 관방(官方)033) 이 문란하여 식자들이 한심해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상께서 새로 왕위에 오르시어 신료들과 접촉하지 않아 사람들의 현부(賢否)에 대해서 극진히 살피지 못하심이 있기 때문에 진퇴(進退)하는 사이에 반드시 막힘이 많으실 것이니 상참(常參)·윤대(輪對)를 조종조의 고사에 따라 거행하소서. 그리고 산림(山林) 천택(川澤)의 이익을 백성들과 함께 하는 것이 왕자의 정사입니다. 그런데 만약 큰 세력이 그 이익을 빼앗는다면 백성들이 어찌 안심하고 살 수 있겠습니까. 근래 여러 궁가(宮家) 및 재상가(宰相家)의 입안(立案)이 없는 곳이 없어서 서울 밖엔 한 조각의 공한지(空閑地)도 없습니다. 금표(禁標) 안에는 감히 손도 댈 수 없기 때문에 땔나무를 할 수 있는 길이 막혀 도성의 백성들이 원망하며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외방(外方)의 산택도 마찬가지로 점유(占有)하여 사장(私庄)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금하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해변의 경우에는 아무 궁가 아무 재상가의 염분(塩盆)·어전(魚箭)이라 칭하여 소금기 있는 척박한 땅까지 모두 불법 점유하여 절수(折受)034) 라 하면서 앞다투어 이익을 망라하므로 연해의 백성들은 모두 어염의 이익을 잃어 생활할 수 있는 이익이 날로 더욱 곤궁해져서 원망이 나라로 돌아오고 있으니, 새로 즉위하시어 폐단을 제거하는 데에는 이것을 우선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러니 여러 도의 감사들에게 일일이 조사해 아뢰게 하여 불법 점유한 땅을 혁파하소서. 그리고 도성 10리 이내는 역시 한성부로 하여금 엄히 과조(科條)를 세워 일체 금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졸곡 전에 상참하는 것과 경연을 여는 것은 인정으로 보나 예의로 보나 차마 할 수 없는 바이니 경솔히 의논하지 말라."
하였다.
의금부가 죄인 조기준(趙箕俊)의 죄가 십악(十惡)035) 에 해당하지만 졸곡 이전에 성국(省鞫)하는 것은 부당하다 하여 대신들에게 의논하게 하기를 청하였다. 좌의정 이경석 등이 아뢰기를,
"27일 공제 이후에 형벌을 쓰는 것이 예조 등록(謄錄)에 실려 있으나 이것은 각사(各司)가 상용(常用)하는 형벌을 가리킨 것입니다. 《오례의(五禮儀)》에는 ‘졸곡 전에는 짐승 도살을 금한다.’ 하였는데 하물며 사람을 형벌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성국은 졸곡이 지난 뒤에 거행하라. 그리고 《오례의(五禮儀)》로써 보건대 졸곡 이전에 각사에서 형벌을 쓰는 것도 옳지 않으니 대신들에게 의논하라."
하였다. 경석 등이 아뢰기를,
"옥송(獄訟)은 나라의 큰 정사입니다. 등록에 공제 이후에 형벌을 쓰라고 한 것은 옥송이 많이 적체(積滯)되고 간사한 짓이 그치지 않아 장차 다스림을 잘 돕지 못하게 될까 염려해서입니다. 구례에 따라 형벌을 사용하소서."
하니, 따랐다.
6월 12일 경자
전에, 시강원이 졸곡 전에 고사에 따라 왕세자의 서연을 열기를 청하니, 예관에게 물으라고 답하였다. 또 분부하기를,
"세자가 졸곡 전에 서연을 연 것이 어느 때의 고사인가?"
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강원에 물어보건대 무신년 3월에 올린 본원(本院)의 계사(啓辭) 속에 졸곡 전에 서연을 열어 때에 미쳐 도와 인도하라는 말이 있다 하고, 또 듣건대 선조(宣祖)께서는 명묘(明廟)의 졸곡 전에 경연을 열었다고 합니다. 이미 경연을 열었다면 세자의 서연을 열지 않아서는 안 될 듯합니다."
하고, 예조가 아뢰기를,
"왕세자께서 강학(講學)을 중지한 지가 오래되었으니 국상이 난 달이 지난 뒤에는 서연을 여는 것이 합당합니다. 듣건대 선조께서 졸곡 전에 경연에 거둥하셨다 하니, 그렇다면 서연을 여는 것은 더욱 의심할 것이 없습니다."
하니, 따랐다. 이어 서연할 때의 복색(服色)을 강론해 결정하라고 명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직령의(直領衣)와 상투를 싸서 드리우는 두 가닥의 띠는 모두 약간 세밀한 생포(生布)를 사용하고, 요대(腰帶)는 약간 가볍고 세밀한 생마(生麻)를 사용하고, 신은 백피(白皮)를 사용하며, 강관은 최복(衰服)으로 입시하는 것이 마땅하니 사부에게 물어보소서."
하니, 따랐다. 세자부(世子傅) 이경석이 아뢰기를,
"세자를 도와 인도하는 일은 하루가 급합니다. 해조가 정한 바의 복색을 사용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마는 다시 노숙한 덕을 가진 원임(原任) 및 예를 아는 신하들에게 물으소서."
하였다. 영돈녕 김상헌이 아뢰기를,
"왕세자의 강학이 과연 하루가 급하지만 재궁(梓宮)이 빈소에 계신데 한 쪽에서 개강(開講)하는 것은 인정으로 보나 예문으로 보나 온당하지 않습니다. 요(堯) 순(舜)의 도는 효제(孝悌)를 근본으로 삼는 것이니 왕세자께서 어린 나이에 익힐 바는 더욱 효제를 우선으로 삼아야 마땅합니다. 그렇다면 산릉에 장사 지내기 전에는 우선 정강(停講)하였다가 졸곡이 지난 뒤에 비로소 서연을 열어 학문의 도에 이르게 하는 것이 예에 합당할 듯합니다."
하고, 김집·권시·이유태 등이 아뢰기를,
"왕세자께서 졸곡 전에 비록 평일처럼 서연을 열 수는 없지만 옛 사람들이 상중(喪中)에는 상례(喪禮)를 읽은 뜻에 의거하여 강학(講學)을 폐하지 않는 것이 합당할 듯합니다. 그리고 복색은 해조가 정한 바를 따르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분부하기를,
"영돈녕이 올린 의논을 보고는 재삼 음미해 마지않았다. 경(經)은 만세의 상도(常道)이기 때문에 일시의 연고로 권도(權道)를 쓸 수 없는 것인데 하물며 효제의 도이겠는가. 나는 말세에서 순전히 권도만을 쓰는 것을 미워한다. 영돈녕의 의논에 따라 시행하라."
하였다.
6월 13일 신축
상이 정원에 분부하였다.
"근래 제수된 수령들을 내가 불러보지 못했으니, 양사(兩司)로 하여금 서경(署經)할 때 현부(賢否)를 자세히 살펴 규핵(糾劾)하게 하라."
풍덕군(豊德郡)을 올려 부(府)로 만들었다. 왕비 장씨(張氏)의 가계(家系)가 풍덕에서 나왔기 때문에 읍호(邑號)를 올린 것이니, 고사이다.
6월 15일 계묘
상이 빈전(殯殿)에서 망제(望祭)를 행하였다.
헌부가 【집의 김홍욱(金弘郁), 장령 이석(李晳).】 상차하여 시폐(時弊)를 논하였는데, 그 대략에,
"신들이 보기에 조정에 크게 근심스러운 것이 있으므로 거리낌없이 다 말하겠습니다. 조신(朝臣)들의 분당(分黨)이 이미 고치기 어려운 고질이 되었는데 몇년 전부터는 또 훈신(勳臣)들조차 분당했다는 설이 있습니다. 이른바 훈신이란 분들이 거의 다 죽고 지금 생존해 있는 이가 몇이나 되기에 공의(公義)는 생각지 않고 한갓 사의(私意)만을 품는단 말입니까. 무슨 일 때문에 흔단이 일어나서 각자 문호(門戶)를 세웠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마는, 더욱 서로 시기하고 의심하여 국사를 담당하는 데에까지 모순이 많으니, 마침내 어지러워지는 환난을 불러 전하의 국사를 무너뜨릴까 두렵습니다.
삼가 듣건대 호조 판서 원두표의 소(疏) 중에 논한 바는 모두 나라 사람들이 함께 말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이 소가 초야(草野)에서 나왔다면 공(公)이라 할 수 있지만 훈신에서 나왔으니 지적한 바가 또한 질투하는 여자의 말에 가깝지 않겠는지요. 또 그의 상소에 조정에 있는 신하들을 모두 권세에 붙좇아 작록을 취한다고 하였으니 오늘의 사류(士類)들에게 어찌 모욕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무리가 얼마나 많기에 이런 무리를 미워한 나머지 온 세상의 사류들을 모두 의심한다는 말입니까. 더구나 그도 각각 친한 바가 있어 서로 붕당을 짓고 있으니, 이것으로써 저것을 비웃는 것이 같이 벗고 목욕을 하면서 벌거벗었다고 상대를 비난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영돈녕부사 김상헌은 곧 삼조(三朝)036) 를 거친 국가의 원로이니 비록 나이가 많아 물러가 있으나 전하께서 지성으로 부르셔야 합니다. 한 번 불러서 오지 않을 경우, 두세 번 불러 마지않으시면 어찌 오지 않을 리가 있겠습니까. 가령 그가 조정으로 나아올 경우 반드시 자문(咨問)에 도움이 있어 사기(士氣)가 배가(倍加)되고 인정이 흡족해 할 것이니 어찌 초정(初政)에 크게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귀양살이 하고 있는 아이에 대해서는 바로 전하의 집안 일이니 신들의 말이 아니더라도 반드시 진념(軫念)하고 계실 줄로 압니다. 대행 대왕께서는 그 아이들이 혹시라도 병으로 요절할까 염려하시어 조심해 간호하지 않은 궁인(宮人)의 죄를 다스리셨으니, 이것은 바로 세 아이를 무죄하다고 여겨 끝까지 보전시키고자 하신 것입니다. 하물며 형의 자식 보기를 내 자식처럼 보라고 분부하셨으니 전하께서 반드시 지금 깊이 생각하고 계실 줄로 압니다. 그러나 저 세 아이가 병이라도 걸린다면 전하께서 아무리 후회해도 미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선조(先朝) 때 먼 곳으로 귀양 보낸 신하 중에도 용서할 만한 정상이 없지 않습니다. 이경여(李敬輿)는 죄명(罪名)이 본디 중대하지 않고, 이응시(李應蓍)·심노(沈𢋡)·홍무적(洪茂績) 등은 모두 말을 잘못한 죄로 멀리 귀양간 지가 이미 오래니, 전하께서는 또한 삼가고 보살폈던 선조(先朝)의 인자하심을 본받아 큰 은택을 베푸소서."
하니, 답하기를,
"앞부분에 매우 염려되고 근심스러운 단서를 말하였으니, 임금을 사랑하는 정성과 일을 염려하는 원대한 생각이 매우 간절하다. 마음속에 깊이 담아두겠다. 이경여 등을 즉시 석방하지 않는 것은 생각이 있어서이니, 양찰(諒察)하기 바란다. 조정의 진신들의 분당이 이미 고치기 어려운 고질이 된 것을 근심한다고 하였는데 사람마다 모두 이것을 근심하며 각각 노력한다면 이 병을 고치기 어려움이 무엇이 걱정되겠는가."
하였다.
6월 16일 갑진
김익희(金益熙)·박장원(朴長遠)을 승지로,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을 시강원 진선으로, 선우협(鮮于浹)을 성균관 사업으로 삼았다. 【협은 평양 사람으로 기자(箕子)의 후손이다. 조행(操行)이 있고 역학(易學)에 종사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칭송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책 1권 14장 B면【국편영인본】 35책 371면
【분류】인사-임면(任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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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의 김홍욱(金弘郁), 장령 이석(李晳)이 인피하기를,
"영의정 김자점은 원훈 대신(元勳大臣)으로 선조(先朝)의 지우(知遇)를 입어 총애가 비할 데 없었으니 힘과 충성을 다해 보답하기를 생각해야 마땅한데도 공의(公義)의 중함을 생각지 않고 오로지 사리 사욕만을 꾀해 저택의 크고 화려함이 참람하게도 공궁(公宮)에 비길 만하며, 전장(田庄)이 온 나라 안에 널려 있고 뇌물이 그 문으로 폭주하며, 대단한 권세로 조정을 유린하여 관원들을 마치 노예처럼 꾸짖고 모욕합니다. 국가를 저버리고 거리낌없이 방자한 그의 짓거리를 사람들이 모두 좋지 않은 눈으로 보고 있는데도 오히려 존귀한 수상(首相)의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맑고 깨끗한 정치에 누를 끼치고 있으니 여정(輿情)이 분해하며 침을 뱉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공의(公議)가 있으면 탄핵해 논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신들이 서로 의논하여 서간을 보내서 내일 한번 모여 아뢰기로 하였습니다. 이 의논에 대해 양사가 모두 이론이 없었습니다. 다만 대사헌 조경이 현재 휴가중에 있기 때문에 신이 가서 말했더니 그의 생각도 같았으나 병 때문에 출사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한번 모이자는 내용으로 여러 동료들에게 서간을 보냈더니, 사간 조빈(趙贇)이 굳이 장관이 나오기를 기다리자고 하면서 결정하지 못하고 미루려는 뜻을 보였습니다. 이것은 모두 신들의 말이 신임을 얻지 못해서 그런 것이니, 신들을 체직하소서."
하고, 장령 유준창(柳俊昌), 지평 임중(任重), 헌납 홍처량(洪處亮), 정언 허열(許悅)이 인피하기를,
"신들의 생각도 김홍욱 등과 같았습니다. 홍욱이 이미 의논이 일치되지 않은 것으로 인피하였으니 신들 또한 어찌 감히 편안히 직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 신들을 체직하소서."
하고, 사간 조빈이 인피하기를,
"방자하고 탐욕스러운 김자점의 죄는 온 나라 사람이 다 알고 있는데 신이 어찌 홀로 모르겠습니까. 두 번째 간통(簡通)을 받고서 ‘이 논핵(論劾)은 말 수 없다.’고 답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결정을 못하고 미루는 뜻이겠습니까. 그러나 양사에 모두 장관이 없고 일 처리는 주밀하게 하는 것을 귀히 여기는 것이니 논핵을 서두를 것이 뭐 있겠습니까. 신이 장관이 나오기를 기다리자고 한 것은 사체(事體)를 보존하고자 한 것에 불과한데 지금 많은 관원들의 배척을 입었으니 그대로 관직에 있을 수가 없습니다. 신을 체직하소서."
하고, 지평 김이경(金以鏡)이 인피하기를,
"김자점은 바로 신의 동성(同姓) 6촌 형이지만 법에 있어서는 이미 상피(相避)할 것이 없고 동료의 간통 중에 죄의 경중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신은 풍파 일으키는 것을 꺼려 처음에는 ‘잘 알았다.’고 썼습니다. 그러나 생각건대 대행 대왕께서 승하하신 지 얼마 되지 않아 갑자기 선조(先朝)의 수상을 논핵하는 것은 아마도 서두르는 뜻이 있는 듯하기에 이를 동료에게 면대해 말했습니다. 조빈이 장관이 나오기를 기다리자고 하여 결정을 미룬 바가 있는데 신의 뜻도 조빈과 같았으며, 또 김자점과 절친한 혐의가 있으니 결코 편안히 직에 있을 수 없습니다. 신을 체직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홍욱 등이 모두 물러나 물론을 기다렸다. 옥당이 【부제학 여이징(呂爾徵), 교리 심지한(沈之漢)·이회(李禬), 부교리 이천기(李天基)·이정영(李正英), 부수찬 김중일(金重鎰)·홍처대(洪處大).】 차자를 올리기를,
"양사가 모두 인혐하고서 물러갔습니다. 오늘의 이 의논이 비록 시기에 적절하지는 않지만 대간의 풍채는 귀히 여기는 바가 감언(敢言)에 있습니다. 장관을 기다리자고 한 것은 뜻이 주밀에 있었고 재삼 왕복한 것이 본래 결정을 미루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김이경은 이미 잘 알았다고 쓰고 나서 또 변명하고자 하여 앞뒤의 말이 구차하였습니다. 모두 출사하게 하고 김이경은 체차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선왕께서 승하하신 지 얼마 되지 않아 갑자기 선조의 대신을 논핵하는 것이 이미 매우 불가한데 하물며 공적이 한 시대에 뛰어난 사람이겠는가. 모두 출사시키라는 요청은 실로 뜻밖이다. 김홍욱·이석을 체차하라."
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임금이 말을 듣는 도는 다만 논한 바가 옳고 그른 것만 볼 뿐, 갑작스럽게 말이 나왔다 해서 배척해서는 안 됩니다. 옥당이 누구는 체차하고 누구는 출사시키라고 한 것이 모두 공론에서 나온 것인데 전하께서 위에서 독단(獨斷)하시어 급히 감언(敢言)한 사람을 체차하시니 사방에서 듣는다면 어느 누가 실망하지 않겠습니까. 이는 선왕의 뒤를 이어 새롭게 펴시는 정치에 소망했던 바가 아닙니다."
하니, 답하기를,
"영상(領相)은 훈구 대신으로 국가와 휴척(休戚)을 함께하는 사람인데 어찌 이럴 리가 있겠는가. 시비(是非)는 양존(兩存)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체차하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장령 유준창, 지평 임중, 헌납 홍처량, 정언 허열 등이 김홍욱·이석을 체직시켰다는 이유로 상소하여 체직시켜 주기를 비니, 상이 그 상소를 해조로 내려보냈다. 이조가 【판서 심액(沈詻).】 회계하기를,
"대간은 임금의 이목입니다. 양사가 함께 모여 대신을 탄핵하는 것이 얼마나 중대한 일입니까. 많은 관원들이 함께 의논해서 논핵하려 했다가 엄하신 분부 밑에 스스로 기가 꺾여 우물쭈물하고 후퇴하여 쓸데없는 말만을 거론하였습니다. 성상께서 슬픔과 괴로움 중에 계시는 때를 당하여 혹은 피혐하기도 하고 혹은 정사(呈辭)하기도 하고 혹은 상소하기도 하여 어지러움이 이에 이르렀으니, 대간의 풍채가 어찌 이와 같을 수 있습니까. 그들의 직을 체차하소서."
하니, 따랐다. 사간 조빈도 상소하여 사직을 청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6월 18일 병오
대사헌 조경이 인피하기를,
"김홍욱 등이 상께서 즉위하신 처음에 언관의 직책에 있으면서 권세 있는 자를 두려워하지 않고 꺼림없이 할 말을 다하였으니, 그 강직하고 날카롭고 맑은 풍도는 높여주어야지 막아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의 기대 밖에 특별히 체직하라는 명을 내리시니, 신은 오늘부터 언로(言路)가 좁아질까 염려됩니다. 신은 헌부의 장관으로 있으면서 홍욱의 말을 들었고, 양사가 한바탕 수선을 피운 것도 실로 신이 병 때문에 출사(出謝)를 늦게 한 소치이니 어찌 감히 편안하게 직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 신의 직을 체차하소서."
하고, 정언 이무(李袤)가 인피하기를,
"신은 언관의 자리에 있으면서 이미 김자점의 죄를 바르게 배척하지 못하였으니 나약하고 용렬함이 심합니다. 지금 비록 회합에는 참여하지 않았으나 소견은 같은데 어찌 감히 편안한 마음으로 처치할 수 있겠습니까. 신의 직을 체차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모두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옥당이 차자를 올리기를,
"조경과 이무가 모두 인피하고서 물러갔습니다. 병으로 출사가 늦어 함께 진퇴하지 못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사정이었으니 별로 잘못이 없습니다. 소견이 이미 같다면 시비를 분간하기가 뭐 어렵겠습니까. 그런데도 억지로 인혐하는 것은 일을 회피하려는 자취가 있습니다. 대사헌 조경은 출사하게 하고, 정언 이무는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6월 19일 정미
조익(趙翼)을 우참찬으로, 이시방(李時昉)을 판윤으로, 심대부(沈大孚)를 집의로, 송시열(宋時烈)을 장령으로, 조복양(趙復陽)을 지평으로, 심세정(沈世鼎)을 정언으로, 최온(崔蘊)을 사업으로, 엄정구(嚴鼎耉)를 응교로 삼았다.
대사간 김경여(金慶餘)가 상소하기를,
"지난번에 유신(儒臣)이 상소하여 묘호(廟號)를 논했는데 성상의 분부가 자못 화평하지 못하셨으니 신은 적이 애석하게 여깁니다. 시호를 의논하는 법은 지극히 엄중한 것이어서 공의(公議)가 한 번 정해지면 영원히 고치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미 누차 고치는 실수를 범하였고 또 조종의 묘호를 거푸 사용하는 실수를 범했으니, 이 일을 논한 신하는 진실로 생각이 있으면 반드시 아뢰는 의리에 잘못됨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잘난 체하는 안색으로 사람을 천리 밖에서 막으셨으니 언로에 해로움이 있고 성덕에 누가 되는 것이 어찌 적다 하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깊은 정성이 있지 않다면 어찌 임금을 향해 귀에 거슬리는 말을 하려 하겠는가. 모름지기 선조(先朝)의 옛 은혜를 생각하여 속히 올라와서 나의 미치지 못함을 도와 달라."
하였다.
6월 20일 무신
김집(金集)을 공조 참판으로, 이지항(李之恒)을 대사성으로, 유계(兪棨)를 헌납으로, 장응일(張應一)을 장령으로, 이경휘(李慶徽)를 지평으로, 권대운(權大運)을 정언으로 삼았다.
6월 21일 기유
헌부가 【대사헌 조경, 집의 심대부, 지평 조복양.】 아뢰기를,
"근일 양사의 많은 관원들이 혹 인피하기도 하고 상소하기도 한 것은 대개 함께 일을 한 사람이 홀로 특체(特遞)되었기 때문입니다. 사체에 있어 감히 출사할 수 없으면 서로 잇달아 인혐하고 들어가는 것은 당연한 사세입니다. 사직소(辭職疏)를 해조에 내리신 것도 대각을 우대하시는 성대한 뜻에서 나온 것인데 이조가 무슨 의견이 있어서 감히 장황한 말로 조금도 돌아보거나 꺼림 없이 대관을 배척하여 후일에 무궁한 폐단이 생겨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는다는 말입니까. 해조 당상과 낭청을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6월 22일 경술
함경도에 여역이 크게 성하여 사망하는 사람이 많으니, 상이 내국(內局)에 명하여 약물을 보내어 구제하라 하였다.
내시 김광택(金光澤)을 잡아다가 치죄하라 명하였다. 전에 소현 세자(昭顯世子)의 세 아들을 제주에 안치하고서 광택을 보내어 보호하게 하였는데 얼마 되지 않아 두 아이가 잇달아 병으로 죽으니, 상은 광택이 잘 보양(保養)하지 않았기 때문이라 하여 이 명을 내렸다. 그리고 잠시 있다가 세째 아이를 남해현(南海縣)으로 옮겨 안치하라 명하고, 또 함양군(咸陽郡)으로 옮기게 하였다.
형조가 감옥에 가두어 둔 죄수의 숫자를 보고하니, 상이 분부하였다.
"여름철에 적체된 죄수가 이처럼 많으니 해조로 하여금 속히 처결하게 하라."
도목정(都目政)을 하고서 이조, 병조에 분부하였다.
"아무리 미관(微官)이라 할지라도 신중히 선택해서 제수하고, 전후에 공로가 있었던 사람을 모두 수용(收用)하라."
양사가 【대사헌 조경, 집의 심대부, 장령 장응일(張應一), 지평 조복양·이경휘, 사간 조빈, 헌납 유계, 정언 심세정·권대운.】 합계(合啓)하기를,
"영의정 김자점은 본래 보잘것없는 작은 인물로서 외람되이 정승의 자리에 있으면서 은택을 입은 지가 여러 해 되었는데, 그 공훈과 존귀함을 믿고서 사치와 방자를 멋대로 하였고, 꾀하는 바는 부시(婦寺)의 충성에 불과하고 즐기고 힘쓰는 바는 오로지 토목(土木)의 정교함 뿐이었으며, 심지어 상방(尙方)의 직조(織組)까지도 극도로 사치스럽게 하기를 힘썼으니 선왕께서 위임하신 뜻을 저버린 죄 진실로 큽니다. 더구나 사치와 화려함이 극에 달한 넓은 저택을 세우고 기름진 전지가 팔방에 널려 있고 종들을 풀어 교만 방자한 짓을 하게 하는 등 많은 불의를 행하였으니, 이는 바로 한(漢)나라 때의 전분(田蚡)037) 입니다. 선왕의 뒤를 이어 즉위하신 처음을 당하여 사방의 백성들이 귀를 기울여 듣고 목을 늘이어 바라보면서 상위(象魏)038) 에 헌장(憲章)이 선포되고 어진이를 구하여 정승을 삼기를 생각지 않는 자가 없는데 어찌 용렬하고 하찮은 사람으로 하여금 여전히 수상의 자리에 있으면서 기강을 의논하고 치도를 논하게 해서야 되겠습니까. 인심이 답답해 하고 공실(公室)이 신장되지 못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그리고 선왕께서 승하하시던 날에 있었던 자점의 행위는 더욱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만족시키지 못하였습니다. 선왕께서 명초하지도 않았는데 자기 멋대로 밖에 있는 훈신(勳臣)들을 불러들여 장차 함께 고명(顧命)을 받으려 했던 것은 임금으로 세우기를 희망한 자가 있어서인 듯합니다. 그래서 궁노(宮奴)를 시켜 옹주(翁主)039) 를 업고 큰 길을 뚫고 곧장 궁중으로 들어가게 했습니다. 젊고 명망있는 원두표(元斗杓), 이시방(李時昉)을 놓아두고 늙고 고질병이 있는 이해(李澥)로 수릉관(守陵官)을 삼았으며 홍주원(洪柱元)이 고부사(告訃使)를 사직하여 체차된 것을 분하게 여겨 자신을 수망(首望)에 추천하고 또 홍주원을 말망(末望)에 추천하였습니다. 이런 일은 실로 불학 무식한 소치이지만 대신의 체통을 무너뜨린 것으로 논하면 그 율법 또한 가볍지 않으니 결코 하루라도 백관의 장 자리에 있을 수 없습니다. 파직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 내가 보위(寶位)를 이은 지 겨우 한 달이 지났는데 선조(先朝)의 대신을 탄핵하는 소장(疏章)이 갑자기 이에 이른 것은 오로지 나의 성효(誠孝)가 미덥지 못한 소치이다. 더구나 지금 재궁(梓宮)이 빈전(殯殿)에 계시므로 당시 훈신(勳臣)들을 대우하시던 정의를 생각하매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르는데 경들은 어찌하여 선조 때 시비를 논변(論辨)하지 않고 오늘에서야 발론(發論)하며 경들 몇사람의 소견이 수일 전보다 얼마나 노성(老成)해졌길래 갑자기 수일 뒤에 이 논변을 하는가. 내가 영상을 주석(柱石)처럼 의지하고 정이 골육 같으므로 결코 윤허하여 따를 수 없으니 속히 정지하고 번거롭게 굴지 말라. 그리고 그중 한 조항040) 은 문자에 드러내어 이목을 번거롭힐 일이 아닌 듯하다. 그런 문자를 대하고 보니 나도 모르게 놀라워 가슴이 선뜩해진다."
하였다. 양사가 죄명(罪名)을 누차 보태어 멀리 귀양보내기를 청하였으나 따르지않자 연계(連啓)하기를, 【대사간 김경여(金慶餘), 집의 송준길(宋浚吉), 장령 이상일(李尙逸), 정언 오핵(吳翮)·심세정(沈世鼎).】 "나라를 그르친 자점의 죄는 전후의 논열(論列)에 대략 갖추어졌습니다마는 지금 다시 그 대강을 들어 말해보겠습니다. 재물을 탐함은 원재(元載)041) 와 같고, 저택이 사치스럽고 참람함은 양기(梁冀)042) 와 같으며, 내외를 체결한 것은 한탁주(韓侂胄)043) 와 같고, 나라를 저버리고 사욕만을 꾀한 것은 가사도(賈似道)044) 와 같습니다. 저 소인들은 한 사람만으로도 생민을 도탄에 몰아 넣고 종사(宗社)를 전복시키기에 충분했는데, 하물며 한 몸에 저 소인들의 악을 모두 가지고서 위권(威權)을 절취하여 위복(威福)을 멋대로 부리고 흉악 음흉한 마음을 품은 것이 저 몇 명의 간신이 미칠 수 없는 데이겠습니까. 그리고 변방의 무관 수령에 자기의 친한 사람을 차견(差遣)하여 사방에서 수레에 실어 보낸 뇌물 짐이 그 집 문전으로 폭주하며, 이익을 즐겨 붙좇는 사부(士夫)들까지 모두 이끌어 벼슬에 오르게 하여 혹은 청반(淸班)에 허통(許通)하기도 하고 혹은 방면(方面)에 제수하기도 하여 밖으로는 민원이 날로 깊어가고 안으로는 관방(官方)045) 이 날로 문란해지니 전하의 나라가 어찌 잘못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멀리 귀양보내소서." 하고, 탄핵하기를 더욱 강력히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다가 경인년 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중도 부처(中道付處)를 명하여 홍천현(洪川縣)에 유배하였다. 이때 서울 안에는 자점이 죄를 입은 뒤로 노중(虜中)과 은밀히 내통하여 저들의 힘을 빌어 우리 조정을 위협할 계획을 한다는 등의 말들이 많이 나돌았다. 그런데 청나라 사신이 조사할 일이 있다는 핑계로 세 무리가 잇따라 출발하여 압록강도 건너기 전에, 장차 즉위한 처음에 구신(舊臣)을 축출한 이유를 힐문(詰問)하려 한다는 헛소문이 먼저 퍼지니, 사태가 매우 위급하여 조야(朝野)가 흉흉해서 분개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상도 자점을 의심하였으나 다만 그의 두 자식 연(鍊)과 식(鉽)을 내쳐 외읍(外邑)에 보임해서 그 모계(謀計)를 막았을 뿐이었다. 그런데 막상 청나라 사신이 서울에 와서는 단지 우리 나라가 성을 쌓은 일만을 물었을 뿐이었다. 그러자 혹자는, 자점이 스스로 계획이 실패되어 탄로될 것을 알아차리고서 도리어 이형장(李馨長)을 시켜 청나라 사신에게 미봉책을 썼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여름에 양사가 다시 자점의 죄를 탄핵하여 절도(絶島)에 안치(安置)시키기를 청하며 누차 아뢰어 마지않으니 곧 멀리 귀양 보내라 명하여 광양현(光陽縣)에 유배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책 1권 16장 A면【국편영인본】 35책 372면
【분류】사법-탄핵(彈劾)
[註 037] 전분(田蚡) : 한 효경제(漢孝景帝)의 왕후(王后) 전씨(田氏)의 동생으로 무제(武帝) 때 승상에까지 올라 권력을 남용하여 온갖 불의를 자행한 척족(戚族). 《한서(漢書)》 권52 전분전(田蚡傳).[註 038] 상위(象魏) : 법령을 게시(揭示)하는 궁궐의 문.[註 039] 옹주(翁主) : 김자점의 손자 세룡(世龍)의 아내가 된 효명 옹주(孝明翁主). 인조의 서녀(庶女)로 옹주에 봉해졌으나 뒤에 세룡이 복주(伏誅)되자 옹주의 작호(爵號)가 깎이었다.[註 040] 한 조항 : 양사가 합계(合啓)한 계사(啓辭) 중의 ‘임금으로 세우기를 희망한 자가 있어서인 듯하다.’는 말을 이름이다.[註 041] 원재(元載) : 당(唐)나라 때 간신으로 권력을 멋대로 부려 자제를 풀어 놓아 뇌물을 거두어들이고 충신을 배척하는 등 불의를 자행하였다. 《당서(唐書)》 권145(卷百四十五) 원재전(元載傳).[註 042] 양기(梁冀) : 한 순제(漢順帝)의 왕후 양씨의 오라비로 순제와 충제(沖帝)가 죽은 뒤 질제(質帝)를 세워 정권을 멋대로 하다가 질제가 발호 장군(跋扈將軍)이라고 지목하자 질제를 독살하고 다시 환제(桓帝)를 세워 20여년 동안 온갖 사치와 참람을 자행하였다. 《후한서(後漢書)》 권34 양기전(梁冀傳).[註 043] 한탁주(韓侂胄) : 송 영종(宋寧宗) 때의 간신. 송 고종 헌성 자열 황후(宋高宗憲聖慈烈皇后)의 여동생의 자식으로 헌성 황후에게 잘보여 벼슬이 태사(太師)에 올라 평원 군왕(平原郡王)에 봉해졌는데 전횡(專潢)이 극에 달하여 온갖 나쁜 짓을 다하다가 복주(伏誅)되었음. 《송사(宋史)》 권474 한탁주전(韓侂胄傳).[註 044] 가사도(賈似道) : 송 도종(宋度宗) 때의 간신. 송 이종(宋理宗)의 귀비(貴妃)가 된 누이 덕으로 좌승상이 되고 도종이 즉위하여서는 태사 평장군 국사(太師平章軍國事)로 위국공(魏國公)에 봉해졌는데, 크고 작은 정사는 모두 관객(舘客)에게 맡기고 자신은 날마다 뭇첩들과 유희만을 즐겼음. 뒤에 귀양지에서 피살되었음. 《송사(宋史)》 권474 가사도전(賈似道傳).[註 045] 관방(官方) : 벼슬아치의 기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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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그르친 자점의 죄는 전후의 논열(論列)에 대략 갖추어졌습니다마는 지금 다시 그 대강을 들어 말해보겠습니다. 재물을 탐함은 원재(元載)041) 와 같고, 저택이 사치스럽고 참람함은 양기(梁冀)042) 와 같으며, 내외를 체결한 것은 한탁주(韓侂胄)043) 와 같고, 나라를 저버리고 사욕만을 꾀한 것은 가사도(賈似道)044) 와 같습니다. 저 소인들은 한 사람만으로도 생민을 도탄에 몰아 넣고 종사(宗社)를 전복시키기에 충분했는데, 하물며 한 몸에 저 소인들의 악을 모두 가지고서 위권(威權)을 절취하여 위복(威福)을 멋대로 부리고 흉악 음흉한 마음을 품은 것이 저 몇 명의 간신이 미칠 수 없는 데이겠습니까. 그리고 변방의 무관 수령에 자기의 친한 사람을 차견(差遣)하여 사방에서 수레에 실어 보낸 뇌물 짐이 그 집 문전으로 폭주하며, 이익을 즐겨 붙좇는 사부(士夫)들까지 모두 이끌어 벼슬에 오르게 하여 혹은 청반(淸班)에 허통(許通)하기도 하고 혹은 방면(方面)에 제수하기도 하여 밖으로는 민원이 날로 깊어가고 안으로는 관방(官方)045) 이 날로 문란해지니 전하의 나라가 어찌 잘못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멀리 귀양보내소서."
하고, 탄핵하기를 더욱 강력히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다가 경인년 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중도 부처(中道付處)를 명하여 홍천현(洪川縣)에 유배하였다. 이때 서울 안에는 자점이 죄를 입은 뒤로 노중(虜中)과 은밀히 내통하여 저들의 힘을 빌어 우리 조정을 위협할 계획을 한다는 등의 말들이 많이 나돌았다. 그런데 청나라 사신이 조사할 일이 있다는 핑계로 세 무리가 잇따라 출발하여 압록강도 건너기 전에, 장차 즉위한 처음에 구신(舊臣)을 축출한 이유를 힐문(詰問)하려 한다는 헛소문이 먼저 퍼지니, 사태가 매우 위급하여 조야(朝野)가 흉흉해서 분개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상도 자점을 의심하였으나 다만 그의 두 자식 연(鍊)과 식(鉽)을 내쳐 외읍(外邑)에 보임해서 그 모계(謀計)를 막았을 뿐이었다. 그런데 막상 청나라 사신이 서울에 와서는 단지 우리 나라가 성을 쌓은 일만을 물었을 뿐이었다. 그러자 혹자는, 자점이 스스로 계획이 실패되어 탄로될 것을 알아차리고서 도리어 이형장(李馨長)을 시켜 청나라 사신에게 미봉책을 썼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여름에 양사가 다시 자점의 죄를 탄핵하여 절도(絶島)에 안치(安置)시키기를 청하며 누차 아뢰어 마지않으니 곧 멀리 귀양 보내라 명하여 광양현(光陽縣)에 유배하였다.
6월 23일 신해
신천익(愼天翊)을 전한으로, 권시(權諰)·이유태(李惟泰)를 공조 좌랑으로 삼았다. 앞서 대신이 6품직에서 발탁해 서용하자고 계청하였기 때문에 이 명이 있었다.
양사가 【집의 김홍욱(金弘郁), 사간 조빈(趙贇), 장령 유준창(柳俊昌)·이석(李晳), 지평 임중(任重)·김이경(金以鏡), 헌납 홍처량(洪處亮), 정언 허열(許悅).】 합계(合啓)하기를,
"이형익(李馨益)은 다만 하나의 요술을 하는 사람으로 대행 대왕께서 몸이 편찮으신 10년 동안 연줄을 타고 권세에 붙어 감히 그 괴상한 마술을 불경하게도 기탄하는 바 없이 멋대로 행하였고, 병세가 위독하시던 날에 미쳐서는 모든 의원을 배척하고서 여러 혈(穴)에 함부로 침을 놓아 마침내 망극(罔極)한 애통을 만나게 했으니 어느 누가 원한에 사무쳐 그를 반드시 현륙(顯戮)하기를 바라지 않겠습니까. 온 나라 사람이 모두 죽여야 한다고 말하면서 대중의 감정이 날로 더욱 격렬해지고 있으니 속히 나라의 형전(刑典)을 바르게 시행하여 죽은 분과 산 사람들의 분을 풀어주소서."
하니, 답하기를,
"어찌 당시의 사정은 헤아리지 않고 갑자기 극률(極律)로써 논하는가. 지금 만약 그를 죽인다면 선조(先朝)의 뜻을 거스를 염려가 있다."
하였다. 누차 아뢰어 마지않으니 아주 먼 변방에 귀양 보내라고 명하여 경원부(慶源府)에 유배하였다.
6월 24일 임자
헌부가 【대사헌 조경, 집의 심대부, 장령 장응일, 지평 조복양·이경휘.】 아뢰기를,
"호조 판서 원두표가 공제(公除)한 뒤에 장문의 소를 올렸는데, 그 중요한 뜻을 보면 조정의 붕당을 분하게 여겨 깊은 한을 품고서 한 말인데 크게 포장(褒奬)하고 찬미하시는 성상의 은총을 입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나 신들이 보기에는 원두표의 마음이 크게 공정한 데서 나오지 못하여 도리어 성상을 기망(欺罔)한 듯합니다. 근일 낙당(洛黨), 원당(原黨)046) 의 설에 대해서는 온 세상 사람이 입이 있으면 모두 말하고 귀가 있으면 다 듣고 있는 실정이니 두표도 이미 그 범주에서 스스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막 즉위하시어 새로운 교화를 펴시는 처음에 스스로 깨끗한 체하고 진언(進言)하면서 자신의 일은 생각지 않고 분당(分黨)의 잘못만을 따져 말했으니 바르지 못한 말을 꾸며 간신의 실정을 드러낸 죄를 어찌 면할 수 있겠습니까. 신하의 경계 중에는 임금이 머리를 끄덕여 허락함을 만났을 적에 우리 임금이 은미한 것을 살피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으니 그 죄를 방치할 수가 없습니다. 파직하시어 그 기만한 죄를 응징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원두표는 공로가 있는 구신(舊臣)인데 어찌 그럴 리가 있겠는가."
하였다. 누차 계청하니 따랐다.
공조 참판 김집(金集)이 상소하기를,
"전하께서는 선왕의 상례를 당하여 대사(大事)에 스스로의 힘을 다하기를 생각하여 애통해 하는 심정이 지성에서 나와서 예에 맞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는데도, 절문(節文) 사이에 혹시라도 맞지 않는 것이 있을까 염려하시어 초야에 있는 신하들을 모두 불러 지당하게 처리되기를 추구하고자 하셨으니, 아, 전하의 뜻이 지극하고 극진하셨습니다. 신이 생각건대 천서(天叙), 천질(天秩)에 스스로 전(典)과 상(常)이 있는 것은 고경(古經)에 자세히 실려 있고 국제(國制)에 갖추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절목이 매우 번다하고 인혁(因革)047) 이 계속되었기 때문에 예를 의논하는 사람을 취송(聚訟)048) 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 단지 《오례의(五禮儀)》만을 따르고 정(程) 주(朱) 이상의 논의는 다 버리고자 한다면 정문(情文)049) 으로 헤아려 볼 때 아마도 미진한 바가 있을 듯합니다. 신은 학식이 엉성하고 견문이 천박하므로 의논의 득실을 증명해서 반드시 정성스럽고 신중히 하시려는 성상의 뜻을 우러러 본받을 수 없습니다만, 참람함도 잊고 감히 좁은 소견을 올려 조금이나마 보답할까 합니다.
대체로 《오례의(五禮儀)》는 개원(開元)050) 때의 예를 채용한 것인데, 단상(短喪)의 오류에 구애되어 첨삭(添削)하는 사이에 빠뜨린 것이 매우 많아 혹 작은 것은 들고 큰 것은 빠뜨리기도 하고 형식에 급한 나머지 내용을 등한시 하기도 하였으므로 예를 강론하는 사람들이 심한 병통으로 여긴 지가 오래입니다. 얼마 전 초종(初終) 때에는 급해서 잘못된 예를 준용(遵用)한 실수를 면하지 못하였으나 이미 지난 일이라서 후회해도 소용없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추가로 보충할 만한 것이 있으니 앞으로의 변제(變除)051) 에 관한 절문(節文)은 조용히 강구해서 자세히 살펴 처리할 수 있습니다.
옛날에 송 효종(宋孝宗)은 몸소 통상(通喪)052) 을 집행하여 복고(復古)에 뜻을 두었으나 조정의 신하들이 그 뜻을 받들어 따르지 못했는데, 주자(朱子)가 못내 한스럽게 여겼습니다. 지금 우리 전하께서는 지성(至性)하신 분으로서 효성이 마음에서 우러나와 정문(情文)을 극진히 하고자 하시면서, 도리어 옛 제도를 인습하고 견제되어 더러운 관례를 개혁해서 한 번 고례(古禮)로 회복하지 못하여 다시 식자들의 비난거리를 남긴다면 어찌 거듭 한스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고례와 《오례의(五禮儀)》 중의 초종(初終)에서부터 상제(祥祭)·담제(禫祭)까지의 조목을 나란히 기록하고서, 아무 조목은 같고 아무 조목은 다르며 아무 조목은 빠지고 아무 조목은 더 첨가된 말이라고 기록하고, 간혹 찌지에 그 개요를 대략 논하여서 한 권의 책으로 묶어 소(疏)와 함께 올리는 바이오니 전하께서 마음에 두시고 헤아리시어 대신과 해조로 하여금 상고해 올리게 하여 신의 말이 전거가 있어 지금 세상에도 행할 수 있다고 생각되시거든 재가(裁可)하시고 특별히 지휘하시어 한 시대의 정제(定制)로 삼아 천고에 잘못된 구습을 영원히 씻어버리소서.
이어 생각하건대 대행 대왕께서 나라를 다스리신 20여년 동안 덕택이 사람들에게 입혀졌으므로 모든 사람들은 화갑(華甲)을 넘기시는 높은 수명 누리시기를 축원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승하하시니 울부짖으며 슬퍼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다만 시호를 의논해 정하는 한 가지 일만이 숭배해 받드는 신하의 정성을 조금이나마 바칠 수 있을 뿐입니다. 이름을 바꾸는 전례는 지극히 엄중한 것이어서 구차하게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니, 근일에 있었던 유신(儒臣)의 차자는 뜻이 우연한 것이 아니었는데도 전후의 성비(聖批)에 한결같이 물리치셨습니다. 신은 성상의 뜻이 어버이를 높이는 데 간절하여 다른 것을 돌아볼 겨를이 없어서라는 것을 잘 압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의 생각이 흡족해 하지 않고 언로(言路)가 막히는 것 같으니 아마도 성대(盛代)의 아름다운 일이 아닌 듯합니다.
신이 생각하건대 시법의 허다한 글자 중에 어찌 성덕(聖德)을 형용할 만한 다른 글자가 없기에 반드시 열성의 시호를 겹쳐 사용하는 것을 꺼리지 않으려 하십니까. 하물며 공이 있으면 조(祖)라 하고 덕이 있으면 종(宗)이라 하는 것은 반드시 조가 종보다 더한 것이 아니고 종이 조보다 덜한 것이 아닌 데이겠습니까. 신이 바라건대 전하께서 큰 도량을 넓게 여시어 여러 신하들과 함께 자세하고 명확하게 연구하여 잘 조처하시면 아마도 알맞게 될 것입니다. 국가 대사는 진실로 신이 입을 놀릴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마는, 즉위하신 초기에 뭇사람들의 마음을 흡족하지 않게 해서는 마땅치 않기에 인심의 소재를 진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생각건대 전하께서 조종의 부탁을 받으시어 어려운 시운을 만나셨으니, 책임이 지극히 무겁고 지극히 어렵습니다. 《서경(書經)》에 ‘갓 태어난 아이와 같아 교도(敎導)하는 것이 그 초기에 있지 않음이 없다.’ 하였고, 또 ‘지금 우리의 초복(初服)에서 알 수 있다.’ 하였으니 삼가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아, 지금의 국사는 안으로는 조정이 편안하지 못하여 기강이 문란하고, 밖으로는 변방이 날로 시끄러워 백성들이 근심하고 있습니다. 충현(忠賢) 중에는 복심처럼 믿고 맡길 만한 사람이 없고 변방의 장수 중에는 간성(干城)의 재목이 없으니, 이 몇가지만 보아도 그 나머지는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그 폐단을 구제하고 회복을 도모하는 방법을 찾아야 할 것을 일일이 거론하자면 어찌 말로 이루 다 할 수 있겠습니까. 신이 참람되이 어리석은 소견을 올려 성덕의 만분의 일이나마 도울까 합니다.
천하의 큰 근본이 하나가 있으니 전하의 한 마음[一心]이고, 오늘의 급무(急務)가 여섯이 있으니 덕량(德量)을 넓히고, 기강을 진작시키고, 궁위를 엄히 단속하고, 현량(賢良)를 등용하고, 백성의 고통을 구휼하고, 실효를 책성(責成)하는 것입니다.
이른바 전하의 한 마음이 천하의 큰 근본이 된다고 한 것은, 천하의 온갖 일과 온갖 변화에 털끝만큼이라도 사사로움이나 간사한 잘못이 없은 뒤에야 청명한 덕이 몸에 있고 변화하는 지기(志氣)의 미묘함이 신(神)과 같아, 명령을 내리고 시행함이 모두 자연의 법칙에 맞고 사람을 등용하고 일을 처리함이 번번이 사람들의 마음에 흡족하여, 내외 대소가 기대했던 뜻에 크게 호응하여 왕도(王道)가 완성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학문을 강습(講習)하여 밝히고 공경을 지켜 보존해야 합니다. 그 처음에는 공부하기가 비록 생소한 것 같지만 계속 행하여 중지하지 않으면 반드시 그 효과를 보게 될 것입니다.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천덕(天德)과 왕도(王道)는 다만 근독(謹獨)에 있을 뿐이다.’ 하였으니, 바라건대 전하께서 이 정자의 말씀을 진부하고 고루한 말로 여겨 싫증을 내어 버리지 않으시면 종사에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이른바 덕량(德量)을 넓히는 것이 오늘의 급무라고 한 것은, 임금의 덕량이 넓지 않으면 바른 말이 귀에 거슬려 아첨하는 사람이 모이게 되고 바른 선비를 가까이하기 어려워 요행을 바라는 신하들이 나오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만으로도 임금의 누(累)가 되기에 충분한데, 하물며 작은 것을 얻고서 큰 것으로 여기고 적은 것을 보고서 많은 것으로 여겨 자신의 능력과 장점을 자랑하여 자신만을 추켜세우고 남을 억누르며 굽힐 줄 모르는 임금의 자만이 극에 도달해서 뭇 선인(善人)들이 모이지 않게 되는 경우이겠습니까. 그러므로 ‘마음이 크면 온갖 일이 모두 통하지만 마음이 적으면 온갖 일이 모두 병든다.’ 하였으니, 이야말로 참으로 절실한 말입니다. 그런데 도량이 넓지 못한 것이 비록 기질의 편벽됨이기는 하나 또한 사심을 이겨내지 못한 데에서 말미암기도 합니다. 대체로 하늘과 사람은 한가지 이치여서 다시 구별이 없으나 사람이 사사로움에 가리워져서 너와 나의 한계를 세워 천지처럼 큰 도량을 갖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 힘써 사욕을 버리시고 덕량을 넓히시면 종사에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이른바 기강을 진작시키는 것이 오늘의 급무라고 한 것은, 임금이 한 세상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기강뿐이기 때문입니다. 기강이 서면 상하가 서로 통하는 것이 마치 몸이 팔을 부리는 것과 같고 대소가 서로 돕는 것이 마치 팔이 손가락을 부리는 것과 같아 모든 일에 시종의 조리가 있어 문란하지 않지만, 기강이 서지 않으면 일체 이와 반대여서 마치 중풍(中風)에 걸린 사람이 팔 다리와 머리가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아 걸음이 비틀거려지고 몸을 움직이려 해도 움직일 수 없으며 다른 병이 조금만 침입해도 즉시 사망하는 것과 같으니, 어찌 위태롭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기강은 절로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임금이 먼저 마음을 공변되게 하여 털끝만한 사의도 마음속에 섞여 있지 않아야 합니다. 그런 뒤에 공 있는 자는 상을 주고 죄 있는 자는 반드시 벌을 주면 대중이 듣고서 미혹하지 않고, 어진 사람을 등용하고 사악한 자를 물리치면 대중의 뜻이 모두 복종하여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없을 것이니, 바라건대 전하께서 먼저 성심(聖心)을 바르게 하시어 기강을 세우시면 종사에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이른바 궁위를 엄히 단속하는 것이 오늘의 급무라고 한 것은, 예로부터 정사를 해치는 꼬투리가 반드시 궁위를 엄히 단속하지 않은 데서 비롯되었기 때문입니다. 대개 외척(外戚)의 무리들은 모두 보잘것 없고 대체(大體)를 모르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통행증(通行證)을 발급받아 궁중을 마음대로 출입하며 외람되이 두터운 은총을 믿고서 들어가서는 밖의 말을 아뢰고 나와서는 안의 말을 퍼뜨리는데, 상의 뜻에 미워하는 바가 있다는 거짓말을 전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하기도 하고 아랫사람의 생각에 거역하는 바가 있다는 터무니 없는 말을 고하여 임금의 마음을 시험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심지어 친속(親屬)의 부녀들까지 공공연히 출입하며 궁중을 근거지로 삼습니다. 스며드는 참소가 오래 계속되매 어진 사람들이 조정에 편히 있을 수 없고 원인(援引)의 결탁이 깊어지매 간사한 무리들이 믿는 바가 있어, 점차 정치가 잘못되고 혼란의 조짐이 날로 생겨나니 어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반드시 궁중의 출입을 엄히 금하고 군신에게 분사(分賜)하는 법식(法式)으로 후한 은전만을 베풀고 왕래하며 말을 통할 수 있는 길을 막은 뒤에야 고질적인 폐단을 제거하고 조정을 맑게 할 수 있습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 연연해 하시는 마음을 끊으시어 궁위를 엄히 단속하시면 종사에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이른바 현량을 등용하는 것이 오늘의 급무라고 한 것은, 정사를 하는 것이 인재를 얻는 데 달렸으니 어진 사람을 등용하지 않고서 잘 다스린 이는 아직까지 없기 때문입니다. 대체로 하늘이 한 세상 사람을 내는 데는 자연 한 세상 일을 처리하기에 충분하도록 내는 것이니, 오직 임금이 능히 등용하지 못하는 것이 걱정될 뿐입니다. 옛날 송 신종(宋神宗)이 인재가 없다고 탄식하자 정명도(程明道)가 얼굴을 붉히며 ‘폐하께서는 어찌하여 천하의 선비들을 가벼이 여기십니까.’ 하니, 신종이 ‘짐이 어찌 감히 그렇게 하겠는가.’라는 말을 두세 차례 하였습니다. 대체로 사람의 사정(邪正)을 비록 알기 어렵다고는 하지만 그 사람의 말과 기색을 관찰하고 또 그 행하는 바를 자세히 살피면 그 사람이 사정을 어찌 숨길 수 있겠습니까. 사람의 재주와 인품은 천차 만별이지만 재주와 덕이 다 아름다운 자가 상등이고, 덕이 넉넉하고 재주가 부족한 자가 다음입니다. 재주와 덕이 다 아름다운 자를 임용(任用)하여 의심하지 않으면 나라를 다스리는 데 무슨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덕이 넉넉하고 재주가 부족한 자는 비록 적용(適用)할 만한 재주는 없지만 그 사람됨이 선을 좋아하니 선한 무리가 함께 나아오는 길사(吉事)를 이룩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조신(朝臣)들은 그다지 선악의 차이가 없지만 색목(色目)이 이미 나뉘어졌고 시비가 서로 뒤섞였습니다. 그러나 모색인(某色人)은 다 옳다 하여 그들만 나오게 하고 모색인은 다 그르다 하여 다 물리쳐서는 안 됩니다. 오직 그들의 일의 시비와 마음의 사정을 보아 용사(用舍)를 바로하고 승출(陞黜)을 분명히 하면 사람들이 모두 감화되어 선을 행하여 조정이 분열되는 걱정이 절로 없어질 것입니다. 아첨하여 뜻을 순종하는 사람은 순후하다는 이름을 얻기 쉽고 정직하여 임금이 싫어하는데도 불구하고 간하는 선비는 항상 비방의 죄를 받습니다. 그러나 도냐 도가 아니냐에서 찾아보시면 간쟁하는 현신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임금을 기쁘게 하기 위해 아첨하여 겉을 꾸미는 무리는 대부분 정치를 잘한다는 명예가 있고 강직 명민하여 국사에 진력하는 사람은 반드시 뜻밖의 견책을 받습니다. 그러나 진정이냐 거짓이냐의 한계를 잘 살피시면 자목(字牧)의 양신(良臣)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유(類)를 미루어 끝까지 하면 인재를 얻기 어렵지 않으니, 바라건대 전하께서 성감(聖鑑)을 밝히시어 현량을 등용하시면 종사에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이른바 백성의 고통을 구휼하는 것이 오늘의 급무라고 한 것은, 임금과 백성은 서로서로 의지하는 것이나 백성이 근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옛날의 철왕(哲王)들도 백성의 고통 구휼하는 것으로 우선을 삼지 않은 이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백성의 마음은 삶을 좋아하고 죽음을 싫어하며 부를 좋아하고 가난을 싫어하지 않음이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한갓 백성의 고통만 구휼하고자 하고 그들이 좋아하는 바를 좋아하지 않거나 그들이 싫어하는 바를 싫어하지 않는다면 어질다는 소문은 비록 퍼질지 모르겠으나 백성들의 고통에는 아무 도움이 없습니다. 어질지 못한 임금도 모두 백성의 고통을 구휼하고자 하지만 백성들이 구휼되지 않는 것은 어째서이겠습니까. 기욕(嗜慾)과 사사(邪私)를 이기지 못하여 임금이 이익을 좋아하고 백관들이 의리를 망각하여 반드시 백성을 해치고 나라를 망치는 데 이르기 때문입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마음을 맑게 하고 욕심을 적게 하여 사치를 버리고 검소를 숭상하는 것으로 백성의 고통을 구휼하는 근본으로 삼으시면 종사에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이른바 실효를 책성하는 것이 오늘의 급무라고 한 것은, 천하의 근심 중에 이름만 있고 실상이 없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한갓 이름만 있고 그 실지가 없으면 무슨 일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정자(程子)가 ‘사람의 도리는 오직 충신(忠信)에 있을 뿐이니 만약 충신이 없으면 어찌 다시 물(物)이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우리 나라가 항상 다스려지기를 바랐으나 지금까지 다스려지지 않은 것은 바로 실지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오늘의 계획으로는 상께서 지난날의 법도를 고치고 전철(前轍)을 바꾸어 착실하게 힘을 써서 용감하게 밀고 나아가 반드시 그 효과를 기약하기를, 먹는 자가 배부르기를 구하고 여행자가 집으로 달려오듯이 하여, 학문을 하는 데는 성현이 되기를 희망하여 한갓 허문(虛文)만을 일삼지 말고 정치를 하는 데는 요순이 되기를 기약하여 반드시 실효에 힘을 쓰는 것만한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미세한 한 생각이나 한 가지 일에까지도 정성을 다하지 않음이 없으면 행하는 것이 물이 흐르듯 통하지 않음이 없을 것입니다. 오늘날 말하는 자들이 모두 자강(自强)을 오늘의 첫번째 의리로 삼는 것은 대개 근래 진신 사이에는 안일에 젖어 직무를 게을리하는 것이 풍속이 되고 병진(兵陣) 사이에는 겁을 내는 것이 풍습이 되었으므로 지금 경화(更化)053) 하는 날을 맞이하여 서둘러 유념해야 할 것이 이를 버리고는 다른 계책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강의 길은 일조 일석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또한 마치 공을 차듯이 한 번 차서 이룩할 수 있는 것도 아니어서 행하는 데 순서가 있고 시행하는 데 때가 있는 것입니다. 반드시 성상의 심신(心身)으로부터 시작하여 미루어 사위(事爲)054) 의 말에 이르기까지 모두 성의를 다하여 최선의 경지에 이르기를 힘쓰지 않음이 없은 뒤에야 일에 모두 질서가 정연하여 어지럽지 않는 것이 마치 그물이 벼리에 끌리고 갖옷이 깃고대에 끌리는 것과 같아 안으로는 조정이 존엄해져서 백료(百僚)가 서로 공경 합심하는 아름다움이 있고, 밖으로는 변방이 날로 견고해져서 윗사람을 친애하고 상관을 위해 죽는 기풍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간사한 무리가 무엇이 걱정되며 외적이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그러나 만약 한갓 자강의 이름만 있고 자강의 실상은 없이 고상한 담론으로 자강 타령만 할 뿐이라면 화를 부르기에 알맞을 뿐, 적을 막는 데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구천(句踐)은 보잘것 없는 오랑캐의 추장(酋長)이었는데도 수십년 동안 진력하여 마침내 오(吳)나라를 멸망시킨 공적을 이룩하였는데 하물며 구천을 허여(許與)하지 않는 사람이겠습니까.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형식적인 것을 버리시고 실효를 책성(責成)하신다면 종사에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이상에서 열거한 몇가지는 모두 오늘에 가장 급한 것으로서 조금도 늦출 수 없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큰 근본이 먼저 선 뒤에야 이 몇가지를 차례로 거행할 수 있습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고 정령(政令) 사이에 힘쓸 뿐이라면 어지럽고 번잡하여 더욱 무너져 어찌해 볼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선후 본말의 순서를 잃지 마시고 굳게 지키고 힘써 행하시어 오래도록 게을리하지 않으시면 비록 더딘 것 같지만 실은 도움되기가 쉽고 비록 느린 것 같지만 효과를 얻는 것이 도리어 빠를 것입니다. 이것은 신의 말이 아니라 일찍이 사부(師父)를 모시고 대략 들은 선유(先儒)들의 의논입니다.
신이 다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지난번 대신(臺臣)이 여러 왕손(王孫)055) 의 방환(放還)을 청하였을 때 즉시 윤허하지 않으신 데에는 신이 비록 어리석지만 성상의 생각이 따로 있어서라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일에는 경중 완급이 있는 것이니, 저 장기(瘴氣)와 해무(海霧)는 백성들도 오히려 견디지 못하는데 하물며 유약(幼弱)한 기질로서 어찌 무병을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밖으로 수토병(水土病)이 침입하고 안으로 영양이 소모되어 마침내 치료할 수 없는 데 이른다면 후회한들 어찌 미칠 수 있겠습니까. 소현 세자의 혈육이라고는 단지 이들만이 있을 뿐인데 만에 하나라도 불행하게 된다면 어찌 식자들만이때를 놓쳤다고 후회할 뿐이겠습니까. 우애하시는 전하의 정성도 다할 방법이 없게 될 것이 염려스러우니 바라건대 전하께서 다시 생각해 헤아려 주시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신은 지나치게 발탁해주심을 입어 두터운 은총이 날로 융성하였으나 신은 늙은 나이에 근력이 이미 다하였으니 스스로 헤아려 보건대 전혀 근사하지도 않아 위로는 새로운 교화를 장식하여 지치(至治)에 이르게 할 수 없고 아래로는 재력(才力)를 펴 벼슬에 나아가서 크나큰 성은에 보답할 수 없으므로 오직 벼슬에서 물러나 여생을 바치기만을 생각할 뿐입니다. 그러나 성은에 감격하여 물러나지도 못하고 국록(國祿)만을 축내며 여저(旅邸)에 머물러 있자니 충성을 바칠 생각이 간절하여 감히 고루한 말씀을 올려 작은 정성을 바칩니다. 사람이 시원찮다 하여 말까지 버리지 않으시고 시행에 옮기신다면 신이 비록 물러가더라도 좌우에 있는 것과 같을 것이니,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유념하시어 건의를 받아들이소서."
하니, 답하기를,
"경이 올린 일곱 가지 일은 진실로 오늘날에 먼저 서둘러야 할 일들이니 그 절실함에 탄복하여 깊이 유념할 것이다. 그러나 모두 문제만 제기하고 구체적인 해답이 없으니 경은 분명하게 나를 가르쳐 달라. 감히 본받아 행하여 조종께서 부탁하신 중대한 것을 보존하지 않겠는가. 말단의 한 조항은 나도 일찍이 마음속에 두고 잊지 못해 하던 바이다. 그러나 미루고 있는 것은 따로 생각이 있어서이니, 뒤에 잘 헤아려 처리하겠다. 《상례이동(喪禮異同)》 한 권은 내용이 지극히 해박하고 갖추어졌으니 제쳐놓아서는 안 될 듯하므로 예관과 대신으로 하여금 깊이 강론하여 처리하게 하였다. 경이 또 공조를 사직하니 나는 놀라워 무어라고 깨우쳐야 할지를 모르겠다. 예조의 직임은 근거가 있어서 그러하였지만 지금은 무슨 근거가 있어서 또 사직하는가. 한사코 사직하지만 말고 속히 나와 공무(公務)를 보아 나의 지극한 바람에 부응하라. 원소(原疏)는 좌우에 두고 항상 관람하려고 내리지 않는다."
하였다.
올린 책자(冊子)를 예조에 내렸는데, 그 책자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각 조항마다 먼저 고례(古禮)를 위주로 하고 다음에는 국제(國制)인 《오례의(五禮儀)》를 언급하고, 끝에는 자신의 의견을 붙여 정정(訂正)하고, 혹은 다른 예서(禮書)를 상고해 선택해서 첨가 보충하기도 하였다.】 "1. 고명(顧命)056) . 주서(周書)에, ‘4월 재생백(哉生魄)057) 에 왕이 병이 나서 편치 못하였다. 갑자일에 왕이 손과 얼굴을 씻으니 부축하는 자가 면복(冕服)을 입히자 왕은 옥궤(玉几)에 기대어 태보(太保), 예백(芮伯), 동백(彤伯), 필공(畢公), 위후(衛侯), 모공(毛公), 사씨(師氏), 호신(虎臣), 백윤(百尹), 어사(御事) 들을 불렀다. 왕이 말하기를 「아, 병이 더욱 심해져서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렀는데 병이 하루하루 더해만 가니 나의 뜻을 계승하게 할 서언(誓言)058) 을 발표하지 못하게 될까 두렵노라. 그래서 내가 자세히 훈계하여 그대들에게 명하노라.」 하였다.’ 【고명(顧命).】 하였습니다. 《오례의(五禮儀)》에, ‘상이 병이 나서 편치 못하시면 사정전(思政殿)에 장막과 병풍을 설치하고서 내시가 상을 부축하여 수레에 모시고 나와 장막 안에 거둥하여 궤에 기대어 앉게 한다. 왕세자와 대신 등이 함께 고명 받기를 마치고는 대신 등은 물러나와 전위 유교(傳位遺敎)를 작성한다.’ 하였습니다. 신이 상고하건대 단궁(檀弓)에, ‘임금을 부축하는 데는 복인사(卜人師)가 【복(卜)은 복(僕)이다.】 오른쪽을 부축하고 사인사(射人師)가 왼쪽을 부축하는 것이므로 임금이 죽었을 때에도 이들이 시신을 들어 옮기게 한다.’ 하였고, 그 주(註)에, ‘임금이 병을 앓을 때에 복인(僕人)의 장이 우체(右體)를 부축하고 사인의 장이 좌체(左體)를 부축하는데, 이 두 사람은 모두 평소에 복장과 위치를 바로하도록 돕는 사람이기 때문에 임금이 죽어 시신을 옮길 때에도 그대로 이 사람들을 사용하는 것이다.’ 하였고, 그 소주(小註)에, ‘임금이 노침(路寢)059) 에서 죽지 않으면 정당하게 죽지 않은 것이 되기 때문에 임금이 병을 앓을 때에는 노침과 조정에서 복장과 위치를 바르게 하도록 도우며 시종하는 자가 부축하는 것이다. 임금에게 병이 있으면 외정(外庭) 사람이 함께 그 병을 알고 임금이 죽으면 외정 사람이 함께 그 상을 치루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오례의(五禮儀)》에 이른바 내시가 부축하여 수레에 오르게 한다는 것은 아마도 정종(正終)060) 의 의리가 아닌 듯합니다. 또 신이 듣건대 지난번 습염(襲斂)하는 제반사를 모두 내척(內戚)이 관장하여 후회스러운 일이 많았다 하니, 외정 사람이 함께 상을 치루는 의리가 아닌 듯합니다. 2. 복(復)061) . 《의례경전(儀禮經傳)》062) 에, ‘소신(小臣)이 복(復)을 하는데 복하는 자가 조복을 입고 동쪽 처마로 올라가 지붕의 중앙부 용마루에 서서 북쪽을 향해 세 번 부른 다음 옷을 말아 앞으로 던지면 사복(司服)이 받는다. 그런 다음 복한 자는 서북쪽 처마로 내려온다.’ 【상대기(喪大記).】 하였고, ‘복한 옷으로 염하지 않는다.’ 【상대기.】 하였고, ‘천자(天子)를 복하는 데는 「천자 복하소서.」 하고, 제후를 복하는 데는 「모보(某甫) 복하소서.」 한다.’ 【잡기(雜記).】 하였습니다. 《오례의(五禮儀)》에는, ‘내시가 평상시에 입던 상의 옷을 왼쪽 어깨에 메고 전면 동쪽 처마로 올라가 지붕의 용마루를 밟고 서서 왼손으로는 깃고대를 잡고 오른손으로는 허리를 잡고서 북쪽을 향해 세 번 부른 다음 옷을 앞으로 던지면 내시가 함(函)으로 받아가지고 들어가서 대행(大行)하신 왕의 시신을 덮는다. 지붕으로 올라가 복한 자는 후면 서쪽 처마로 내려온다.’ 하였습니다. 신이 상고하건대 고례에는 소신이 복하고 사복이 받는다고 하였는데, 《오례의(五禮儀)》에는 모두 내시를 사용한다고 하였으니 고례를 정례(正禮)로 삼아야 할 듯합니다. 3. 시사전(始死奠)063) . 《의례경전(儀禮經傳)》에, ‘사사(司士)와 작사(作士)가 일을 관장한다.’ 하였습니다. 《오례의(五禮儀)》 【염습 뒤에 있다.】 신이 상고하건대, 시사전이 《오례의(五禮儀)》에는 염습한 뒤에 있는데 고례에는 복한 뒤에 즉시 설치하였다가 소렴(小斂)한 뒤에 비로소 철수한다 하였습니다. 대개 사람이 죽으면 혼기(魂氣)가 흩어지기 때문에 즉시 전(奠)을 설치하여 혼백이 의지하도록 하는 것이 자식의 정에 당연한 것이니 아마도 고례를 정례로 삼아야 할 듯합니다. 4. 계신민(戒臣民). 《의례경전(儀禮經傳)》에, ‘임금이 죽은 처음에 대복(大僕)이 계고(戒鼓)를 울려 사방에 전달한다.’ 하였고, ‘대종백(大宗伯)이 상상(上相)이 된다.’ 하였고, ‘호분씨(虎賁氏)가 왕문(王門)을 지킨다.’ 하였고, ‘대사도(大司徒)가 만민을 왕문으로 모아 부절(符節)이 없는 자는 천하를 돌아다니지 못하게 한다.’ 하였고, ‘천자가 죽으면 7일 동안 항시(巷市)064) 하고 제후가 죽으면 5일 동안 항시한다.’ 【단궁(檀弓).】 하였습니다. 《오례의(五禮儀)》 【대략 이와 같다.】 신이 상고하건대, 《오례의(五禮儀)》에는 졸곡(卒哭) 후에 가취(嫁娶)를 허락하여 3일 동안 차길(借吉)065) 한다 하여 조금도 차등이 없습니다. 살피건대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혼인에 관한 한 가지 일에 대해서 국상이 난 한 달 뒤에는 군민(軍民)에게, 세 달 뒤에는 사리(士吏)에게, 복토(復土)한 뒤에는 선인(選人)에게, 부묘(祔廟)한 뒤에는 승의랑(承議郞) 이하에게, 소상 뒤에는 조청 대부(朝請大夫) 이하에게, 대상 뒤에는 중대부(中大夫) 이하에게 혼인을 허락하여 각각 3일 동안 차길하고, 대중 대부 이상은 모두 담제(祭禫)를 지낸 뒤에 길례(吉禮)를 행하게 한다. 관계(官階)는 낮으나 차견(差遣)된 직사(職事)가 높은 자는 높은 쪽을 따르고, 벼슬을 옮긴 자는 새 관계를 따르고, 관계가 깎인 자는 옛 관계를 따른다.’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하면 고례와도 어그러지지 않고 금례(今禮)와도 방해됨이 없어 거의 시행할 수 있으니, 지금 이에 따라 대략 구별을 하는 것이 정례(情禮)에 합당할 것 같습니다. 5. 천시(遷尸)066) ·설치(楔齒)067) ·철족(綴足)068) ·유당(帷堂)069) . 《의례경전(儀禮經傳)》에, ‘사인(射人), 복인(僕人)이 천시한다.’ 하였고, ‘옥부(玉府)가 각사(角柶)070) 를 이바지한다.’ 하였고, ‘시신을 상(牀)으로 옮기고 염할 이불로 덮고 죽을 때 입었던 옷을 버리고서 소신(小臣)이 각사를 사용하여 상하의 이(齒)가 다물어지지 않도록 쐐기를 끼워놓는다. 철족에 연궤(燕几)071) 를 사용하는 것은 임금이나 대부나 동일하다.’ 【상대기(喪大記).】 하였고, ‘막인(幕人)이 유막(帷幕)과 평장(平帳)과 장막을 묶는 끈을 이바지한다.’ 하였습니다. 《오례의(五禮儀)》 【없다.】 신이 상고하건대, 이상의 네 조항은 모두 절실하여 없어서는 안 될 것들인데 우리 나라 제도에는 없으니 아마도 첨가해 보충해야 마땅할 것 같습니다. 6. 목욕 도구 설치[陳沐浴], 명의 입히기[襲明衣], 죽은 사람의 입에 쌀·구슬 따위를 넣는 것[飯含], 얼음을 담는 소반[氷盤] 등의 도구. 《의례경전(儀禮經傳)》에, ‘창인(鬯人)이 흔창(興鬯)072) 을 이바지한다.’ 하였고, ‘울인(鬱人)이 사기(肆器)073) 를 이바지한다.’ 하였고, ‘전사(典絲)가 실, 솜, 무늬 있는 비단 등의 물건을 이바지한다.’ 하였고, ‘공(公)을 염습하는 데는 권의(卷衣)074) 한 벌, 현단복(玄端服) 한 벌, 조복(朝服) 한 벌, 소적(素積) 한 벌, 훈상(纁裳) 한 벌, 작변(爵弁) 두 벌, 현면(玄冕) 한 벌, 포의(褒衣) 한 벌과 주록대(朱綠帶)이고, 다시 대대(大帶)를 몸 위에 걸쳐 놓는다.’ 【잡기.】 하였고, ‘임금의 금모(錦冒)075) ·보쇄(黼殺)076) 는 옆으로 일곱 군데를 묶는데, 모질(冒質)077) 의 길이는 손과 가지런하고 쇄(殺)078) 는 석 자[尺]이다. 【상대기.】 하였고, ‘저고리에는 반드시 치마가 있으니 그것을 한 벌이라 한다.’ 하였고, ‘능인(凌人)이 얼음을 채운 이반(夷盤)을 이바지한다.’ 하였고, ‘임금은 대반(大盤)을 설치하여 얼음을 채우고 상 위의 자리를 걷어 내고 베개만 둔다.’ 【상대기.】 하였고, ‘전서(典瑞)가 반옥(飯玉)079) 과 함옥(含玉)을 이바지한다.’ 하였고, ‘사인(舍人)이 반미(飯米)080) 를 이바지한다.’ 하였고, ‘천자는 구패(九貝)를 입에 넣고 제후는 칠패(七貝)를 넣는다.’ 【잡기.】 하였고, ‘함(含)하는 상(牀) 하나, 염습하는 상 하나, 시신을 당(堂)으로 옮기는데 또 하나의 상이 있는데 모두 베개와 자리가 있다. 이것은 임금이나 대부가 동일하다.’ 【상대기.】 하였고, ‘명의(明衣)의 치마는 막포(幕布)081) 로 만들고 소매는 온 폭(幅)으로 하고 길이는 무릎 밑까지 내려오며, 앞뒤 치마가 있는데 주름을 잡지 않고 길이는 발등까지 내려온다.’ 하였고, ‘포건(布巾)은 길이와 너비가 같다.’ 하였습니다. 《오례의(五禮儀)》 【사용하는 도구의 명목이 같지 않다.】 신이 상고하건대, 국제(國制)의 염습하는 도구 중 수관(首冠)에 대한 주(註)에 ‘만드는 것이 감두(頭)와 같은데 바로 복건(幅巾)이다.’ 하였으니, 감두는 우리 나라 세속에서 만드는 복건입니다. 온공(溫公)082) 과 주자가 쓴 복건의 형제(形制)가 같지 않은데 지금 합하여 한 물건으로 여기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리고 곤룡포를 입은 시신의 머리에 복건을 씌우는 것은 더욱 서로 어울리지 않으니, 만약 곤룡포를 사용한다면 고례를 따라 작변(爵弁)이나 현면(玄冕)을 사용하는 것이 타당할 듯하고 만약 꼭 복건을 사용하고자 하면 심의(深衣)를 사용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심의가 지금은 비록 야인(野人)의 옷이지만 황제(黃帝)로부터 이미 입었고, 그 뜻이 매우 깊어 규(規)·구(矩)·승(繩)·권(權)·형(衡) 등 다섯 가지 법이 들어 있기 때문에 성인께서도 입으셨고 선왕들께서도 귀하게 여겼습니다. 지금 염습하는 데 이미 복건과 대대(大帶)를 사용하였으니, 심의를 입히는 것도 불가함이 없을 듯합니다. 그리고 질쇄(質殺)는 바로 옛 제도로서 죽은 사람을 보호하는 데 매우 온당하고도 절실한 것인데 국제에는 그것이 없으니 첨가해 보충함이 마땅할 듯합니다. 7. 습(襲)083) ·반함(飯含)084) . 《의례경전(儀禮經傳)》에 ‘증자(曾子)가 말하기를 「부인의 옷으로 습하지 않는다.」 하였다.’ 【잡기(雜記).】 하였고, ‘제후는 일곱 벌, 공(公)은 아홉 벌이다.’ 하였고, ‘대축(大祝)이 반함(飯含)을 돕는다.’ 【춘관(春官).】 하였고, ‘태재(太宰)가 함옥(含玉)을 돕는다.’라고 한 주(注)에, ‘왕을 도와 하는 것이다.’ 【천관(天官).】 하였고, 《의례(儀禮)》의 ‘포건(布巾)은 길이와 너비를 같게 한다.’라고 한 주(注)에, ‘대부 이상은 빈(賓)이 한다.’ 하였는데, 그 소(疏)에 ‘대부 이상은 신하가 있으니 신하가 빈이 된다. 빈이 반함하는 것은 악취가 나올 것을 꺼리기 때문에 포건으로 얼굴을 덮고 입 부위에 구멍을 뚫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오례의(五禮儀)》 【반함은 습전(襲奠) 뒤에 있는데 내시가 거행한다.】 신이 상고하건대, 예에 ‘반함하는 것은 죽었다 하여 차마 입을 비게 하지 않는 것이다.’ 하였으니 봉양의 뜻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례에는 혹 왕이 친히 하기도 하고 빈이 하기도 하였는데 지금은 내시를 사용하여 시키니 매우 설만(褻慢)한 듯합니다. 왕이 친히 하는 것이 실로 정례(情禮)에 부합됩니다. 8. 환질(環絰)085) 을 갖추는 것. 《의례경전(儀禮經傳)》에 ‘소렴을 마치고는 머리에 질(絰)을 두르는데 공과 대부가 동일하다.’라고 한 소(疏)에, ‘어버이가 죽으면 효자는 갓을 벗는다. 그러나 소렴 때에 이르러서는 머리에 수식(首飾)이 없을 수 없다. 사(士)는 흰 위모(委貌)086) 를 쓰고 대부 이상은 소변(素弁)을 쓰니 귀천이 모두 머리에 환질(環絰)을 두를 수 있다.’ 하였는데, 구씨(丘氏)는 ‘이것을 살펴보면 수질(首絰) 밑에 반드시 건모(巾帽)가 있어 수질을 받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위모와 작변(爵弁)의 종류가 지금 세상에는 없으니 백포건(白布巾)을 사용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고, ‘환질은 삼[麻] 한 가닥으로 감는 것이다.’ 하였고, ‘염이 끝난 뒤에는 소관(素冠)을 벗어 버린다.’ 【상소기(喪小記)의 주(註).】 하였습니다. 《오례의(五禮儀)》 【없다.】 신이 상고하건대, 처음 죽었을 때에는 시체가 복식(服飾)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효자가 머리를 풀어뜨리고 상사에 임하지만 소렴을 하는 데 이르러서는 시체에 이미 복식을 하였으므로 효자도 수식이 없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환질과 소변(素弁)을 갖추는 것인데 국제(國制)에는 없으니 고례로써 첨가해 보충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9. 대렴(大斂). 《의례경전(儀禮經傳)》에, ‘임금은 장차 대렴하려 할 때에 아들은 소변 위에 수질을 두르고서 동서(東序) 남단의 자리로 나아가고, 경대부는 당(堂)의 모서리 기둥 서쪽 자리로 나아가 북쪽을 향하는데 동쪽을 상(上)으로 하고, 부형(父兄)은 당 밑에서 북쪽을 향하고, 부인(夫人)·명부(命婦)는 시체의 서쪽에서 동쪽을 향하고, 외종(外宗)은 방 안에서 남쪽을 향하고, 소신(小臣)은 자리를 펴고, 상축(商祝)은 교금(絞紟), 금(衾)087) , 옷 등을 펴놓고, 사(士)는 소반 위에 있는 물에 손을 씻고서 시신을 들어다가 염(斂)하는 곳에 옮겨놓는다. 염이 끝난 다음 태재(太宰)가 염이 끝났음을 고하면 아들이 시신에 기대어 곡용(哭踊)하고 부인도 동쪽을 향하여 역시 그렇게 한다.’ 【상대기.】 하였습니다. 《오례의(五禮儀)》 【대략 같은데 전(奠)이 있고, 또 질쇄(質殺)가 이때에 와서 비로소 사용된다.】 신이 상고하건대, 고례에는 대렴과 성빈(成殯)을 합쳐 한 번의 전을 올리는데 빈을 한 뒤에 비로소 전을 베푼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국제에는 대렴과 성빈에 각기 전을 베푸니 아마도 고례를 따르는 것을 정례(正禮)로 삼아야 마땅할 듯합니다. 그리고 또 질쇄는 바로 시체에 옷을 입힐 때 사용하는 것인데 국제에는 이때에 와서 비로소 사용하니 아마도 고례의 뜻이 아닌 듯합니다. 10. 성복(成服). 《의례경전(儀禮經傳)》에, ‘임금의 상에는 3일 뒤에 아들과 부인이 장(杖)을 짚고 5일 뒤 빈소를 마치고서 대부, 세부(世婦)에게 상장을 준다.’ 【상대기.】 하였고, ‘천자가 죽으면 3일 만에 축(祝)이 먼저 복을 입고, 5일 만에 관장(官長)이 복을 입고, 7일 만에 국중(國中)의 남녀가 복을 입고, 석달 만에 천하가 복을 입는다.’ 【단궁(檀弓).】 하였고, ‘사사(肆師)가 외내(外內) 명남녀(命男女)의 상복이 법에 맞지 않는 자를 금한다.’ 【춘관(春官).】 하였고, 주자가 말하기를, ‘참최 3년은 아비와 임금을 위하여 입는 복이다. 그 복은 포관(布冠), 포삼(布杉)에 벽령(辟領), 부판(負版)을 단 최복(衰服)과 엄임(掩衽), 친삼(襯杉), 포군(布君)을 입고 마(麻)로 만든 요질(腰絰), 수질(首絰), 마대(麻帶)를 두르고 짚신을 신고 죽장(竹杖)을 짚는데 천자로부터 서인에 이르기까지 신분의 귀천으로써 증손(增損)하는 바가 없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임금과 신하의 복이 같으나 약간의 구별을 하여 상하를 분별한다. 13개월 만에 연복(練服)을 입고서 소상(小祥)을 지내고 25개월 만에 난복(襴襆)을 하고서 담제(禫祭)를 지내고 27개월 만에 조복을 입고서 상을 벗는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초상(初喪) 때는 마땅히 고례에 따라 상복을 지어 입고서 상에 임하고, 따로 포(布)로 복두(幞頭), 공복(公服), 혁대(革帶)를 만들어 착용하고서 조회하는 것이 예에 합당하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예에 임금의 상사에 달관(達官)의 장(長)들은 죽장(竹杖)을 짚는다 하였는데, 이른바 달관이란 일을 전담하여 임금께 주달(奏達)할 수 있는 관원을 이름이다. 오늘에 있어서는 안으로 성(省)·조(曹)·시(寺)·감(監)의 장관과 밖으로는 감사·군수 등으로서 모든 사(司)의 장과 일찍이 시종(侍從) 이상의 관직을 역임하여 전담해서 일을 주달했던 이들이 바로 달관이다. 그러므로 지금 상장을 짚지 않는 제도를 요좌(僚佐) 이하에게 시행한다면 가하지만 심지어는 그 장관들로 하여금 아랫사람과 함께 상장을 짚지 않게 하고 있는데, 비록 지난날 정승과 장수를 지낸 사람이 벼슬하지 않고 집에 있다 할지라도 다른 것이 없게 한다면 어찌 박하지 아니한가.’ 하였고, 또 말하기를, ‘전에 보니 효종(孝宗)께서는 장사를 지낸 뒤에도 오히려 백포의관(白布衣冠)으로 조회를 보셨으니 이는 매우 성대한 덕이다. 전세에는 임금이 스스로 복을 입지 않았기 때문에 고례를 행할 수 없었던 것이지만, 당시에는 이런 좋은 기회가 있었는데도 유신(儒臣)과 예관(禮官)이 이룩해 밝혀서 1대의 제도로 만들지 못하여 드디어 임금은 위에서 복을 입는데 신하들은 아래에서 복을 벗게 하여 잘못을 인습하였으니 매우 통한스럽다.’ 하였습니다. 《오례의(五禮儀)》에는, ‘종친과 문무 백관은 단령의(團領衣)에 베[布]로 싼 사모를 쓰고 마대(麻帶)를 매고 백피화(白皮靴)를 신었다가 졸곡(卒哭) 뒤에는 백의(白衣)에 오사모(烏紗帽)를 쓰고 흑각대(黑角帶)를 띤다. 모든 상사에는 최복을 입고 연제(練祭) 때에는 연포(練布)로 사모를 싼다.’ 하였습니다. 신이 상고하건대, 《오례의(五禮儀)》의 복제(服制)는 매우 윤서(倫緖)가 없습니다. 대체로 임금과 아비는 일체인데 어찌 아비에 대해서는 순전히 상복을 사용하고 임금에 대해서는 조복의 제도를 섞어 사용하여 반은 높이고 반은 낮추는 의전(儀典)이 있겠습니까. 그리고 또 전함(前銜)은 지금은 비록 관직이 없다 하더라도 그의 이름이 이미 사적(仕籍)에 있으니 실로 관직에 있는 자와 조금도 다를 것이 없는데 사인(士人)과 함께 백의를 입는 제도는 더더욱 옳지 않습니다. 일찍이 상고하건대 송 영종(宋寧宗) 초기에 천자는 칠사천황복(漆紗淺黃服)을 입었는데 신하들은 이미 역월(易月)했다 하여 복을 입지 않으니, 주자가 차자를 올려 이미 지난 실수는 뒤에 와서 고칠 수 없거니와 앞으로 계빈(啓殯)088) 하여 발인(發靷)할 때는 마땅히 다시 초상 때의 상복을 착용해야 된다고 하였습니다. 지난해에 지평 민순(閔純)이 헌의(獻議)하여 《오례의(五禮儀)》를 고치어 너무 심한 것을 약간 제거하였으니, 신이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신의 이 건의를 예관에게 내리시어 한결같이 주자가 손익한 제도를 따라 속히 지휘하여 백관으로 하여금 미리 최복을 준비하였다가 발인할 때에 입고서 들어와 임하도록 하고, 지금 입고 있는 단령은 그 끝을 꿰매어 입고 포모(布帽)와 포로 싼 각대(角帶)와 백화(白靴)로써 일을 볼 때 입는 복장으로 삼게 하소서. 그리고 전함들에게도 이때 다시 성복(成服)하게 하면 사의(事宜)에 합당할 것 같습니다. 11. 조석전(朝夕奠). 《의례경전(儀禮經傳)》에, ‘사복(司服)이 전(奠)드릴 때 입는 의복을 이바지한다.’ 【춘관.】 하였습니다. 《오례의(五禮儀)》 【배례(拜禮)가 없다.】 신이 상고하건대, 고례는 다만 대개만을 들었을 뿐, 배례(拜禮)의 절목은 말하지 않았습니다. 《주자가례(朱子家禮)》에 성복(成服) 전의 대소렴전(大小斂奠)에는 모두 효자(孝子)의 배례를 말하지 않고 성복 후에서야 비로소 주인 이하의 재배를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국제에는 없으니 아마도 주자의 설을 따르는 것이 무방할 듯합니다. 12. 진조조전(陳朝祖奠)089) 《의례경전(儀禮經傳)》에, ‘내수(內竪)는 상기(喪紀)의 일이 있을 때이면 내인(內人)들을 벽제(辟除)한다.’ 하였고, ‘세부(世婦)가 여궁(女宮)을 거느리고서 자성(粢盛)을 씻어 제기(祭器)에 담는다.’ 하였습니다. 《오례의(五禮儀)》 【조조(朝祖)와 전(奠)이 없다.】 신이 상고하건대, 예(禮)에 ‘상구(喪柩)를 조상의 종묘로 옮겨 망인(亡人)이 조상을 뵙게 하는 것은 망인의 효심을 따르는 것이니 망인의 처지에서 보면 평소 거처하던 침실을 떠나는 것이 슬프다. 그러므로 조고(祖考)의 종묘에 가서 결별하고서 떠나는 것이다.’ 하였으니, 이는 진실로 예의 큰 절목으로서 폐할 수 없는 것인데 국제에는 없으니 아마도 강구해 행해야 될 듯합니다. 그리고 이어 정제(定制)로 삼으시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13. 계(啓). 《의례경전(儀禮經傳)》에, ‘상축(喪祝)이 계한다.’ 하였고, ‘장부(丈夫)는 문(免)090) 하고 부인은 복머리[髽]를 하고 산대(散帶)091) 를 드리우고서 자리로 나아간다.’ 하였고, ‘계하는 새벽에는 외내가 모두 곡하지 않는다.’ 【기(記).】 하였습니다. 《오례의(五禮儀)》 【변복(變服)하는 절차가 없다.】 신이 상고하건대, 계빈(啓殯)은 시구(尸柩)를 뵙는 것이므로 소렴 때처럼 변복하는 것입니다. 이는 큰 절목인데 국제에는 없으니 고례를 따르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14. 조전(祖奠)092) . 《의례경전(儀禮經傳)》에, ‘조전에 깔 건석(巾席)을 걷고서 서쪽에서 기다리면 주인은 허리를 굽히고서 올라가고 부인은 뛰면서[踊] 내려간다. 주인이 단(袒)하면 상축(商祝)이 상구(喪柩)를 실은 수레를 어거하여 출발해 조금 가다가 멈춘다. 주인은 뛰면서 단했던 옷소매를 바르게 입고서 상구를 실은 수레 앞으로 가서 상구의 남쪽을 수레에 묶고, 부인은 내려와서 섬돌 사이의 위치로 나아간다. 떠나가는 데는[祖] 순서가 있기 때문에 수레는 방향을 틀지만 음식을 차려놓았던 그릇은 방향을 돌리지 않는다. 축(祝)이 명(銘)093) 을 가져다가 자리[菌]094) 위에 놓으면 두 사람이 중(重)095) 의 왼쪽을 돌아 나아가서 자리를 펴고 조전을 앞서와 같이 행한다. 그러면 주인은 허리를 굽히고서 말을 바치기를[薦馬] 앞서와 같이 한다. 빈(賓)이 나아가면 주인이 전송한다.’ 하였고, 《예기(禮記)》에, ‘뜰에서 조전을 행한다.’ 【상례의(喪禮儀)에 자세히 보인다.】 하였고, ‘상구를 실은 수레가 출발하여 조금 가다가 멈추는데 수레의 방향은 돌리지만 위치는 바뀌지 않고, 곁에서 네 사람이 피(披)096) 를 잡는다.’ 【본경(本經)의 기록이다.】 하였고, ‘축(祝)이 조전의 제찬(祭饌)을 주인의 남쪽에 있는 수레[輅] 앞에 북쪽을 상(上)으로 하여 차려 놓고서 보자기로 덮는다.’ 【상동(上同).】 하였습니다. 《오례의(五禮儀)》 【대략 같다.】 신이 상고하건대, 국제(國制)에 비록 이 의전(儀典)이 있으나 이미 조조(朝祖)에 관한 절목이 없으므로 이 의전을 빈전(殯殿)에서 시행하고서 그대로 발인하니 매우 먼 길을 가는데 가까운 데서부터 점진적으로 나아가는 뜻이 아닙니다. 고례에는 조조의 의전이 있고, 이어 조전(祖奠)을 묘정(廟庭)에서 행하고, 이튿날 새벽에 견전(遣奠)을 행하고서 발인합니다. 발인 절차는 《의례(儀禮)》에 자세히 나타나 있습니다. 15. 우(虞)097) 《의례경전(儀禮經傳)》에, ‘제후는 칠우(七虞)이다.’ 하였습니다. 《오례의(五禮儀)》 【반우의(返虞儀)가 있다.】 신이 상고하건대, 예에 ‘정오에 우제(虞祭)를 지낸다. 길이 먼 경우에는 무덤에서 우제를 행한다.’ 하였으니, 반우(返虞)한다는 글에 구애될 필요가 없을 듯합니다. 16. 반곡(返哭)098) 《의례경전(儀禮經傳)》에, ‘반곡하는 사람은 서계(西階)로 올라가 동쪽을 향하고 주인은 당하(堂下)에서 동쪽을 향해 서는데 북쪽을 상(上)으로 한다. 부인은 들어가고 대부는 뛰면서[踊] 조계(阼階)로 올라간다. 주부는 실내(室內)099) 로 들어간다.’ 하였습니다. 《오례의(五禮儀)》 【없다.】 신이 상고하건대, 예에 ‘반곡하여 조문(吊問)하는 것은 슬픔이 지극한 것이다. 돌아왔으나 어버이는 이미 죽어 없어져서 어버이를 잃었으니 이때를 당하여 슬픔이 지극하다.’ 하였고, 주자가 말하기를, ‘반곡하려고 당(堂)으로 오르는 것은 돌아간 어버이가 평소 예를 행하였던 곳으로 돌아가는 것이고, 주부가 실(室)로 들어가는 것은 죽은 어버이가 평소 궤양(饋養)했던 곳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 의사를 안다면 이른바 그가 밟던 자리를 밟고 그가 행하던 예를 행하는 등의 일이 자연스럽게 행해져서 바야흐로 계지(繼志)·술사(述事)의 일을 알게 될 것이다.’ 하였습니다. 이 한 절목을 빠뜨려서는 안 될 것 같은데 국제에는 없으니 고례를 따르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17. 조석전(朝夕奠)을 파함. 신이 상고하건대, 이 한 절목은 초우(初虞) 뒤에 있어야 하는데 《의례경전(儀禮經傳)》이나 국제에 나오는 글이 없으므로 신이 삼가 《가례(家禮)》에서 따다가 보충하였습니다. 18. 부(祔)100) 《의례경전(儀禮經傳)》에, ‘명일(明日)101) 에 신주(神主)를 소목(昭穆)의 반차(班次)에 따라 종묘에 모신다.’ 【사우(士虞).】 하였고, ‘명일 조부(祖父)의 신주를 다른 사당으로 옮기고 새로 죽은 이의 신주를 조부의 신주가 있던 곳에 모신다. 상제(喪祭)가 변하여 길제(吉祭)로 가고 부묘(祔廟)하는 데는 반드시 하루를 띄우지 않고 이 날에 접속해서 행한다.’ 【예기.】 하였고, ‘부제(祔祭) 때는 상장(喪杖)을 짚고서 당(堂)102) 에 오르지 않는다.’ 【상소기(喪小記).】 하였고, 주자가 말하기를, ‘선왕(先王)께서 예를 제정한 것은 본래 인정에 따른 것이니 길흉의 사이에 변하는 것이 순서가 있다. 그러므로 처음 죽었을 때는 오로지 생존한 분을 섬기는 예를 쓰고 졸곡(卒哭)과 부묘(祔廟)를 마친 뒤에야 신(神)으로 섬긴다. 그러나 차마 다 변경할 수 없기 때문에 신주를 다시 정침(正寢)으로 모셔다가 생존한 분을 섬기는 예로 섬기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오례의(五禮儀)》 【없다.】 신이 상고하건대, 주자가 말하기를 ‘새로 죽은 분을 조부의 사당에 부(祔)하는 것은 조부에게 다른 사당으로 옮긴다는 것을 고하고 새로 죽은 분에게 이 사당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고하는 순서이다. 그런데 지금은 공실(公室)이나 사가(私家)의 묘(廟)에 모두 한 사당 안에 감실(龕室)103) 만을 달리하고 서쪽을 상(上)으로 하는 제도만이 있고 다시 좌소(左昭), 우목(右穆)의 반차(班次)가 없다. 그러므로 체천(遞遷)할 경우가 생기면 모든 감실을 다 옮기고 새로 죽은 이가 그 아버지가 있던 감실로 들어간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예의 큰 절목으로서 고례와 같지 않다. 그런데 예를 하는 자들이 오히려 조부가 있던 사당에 부(祔)한다는 예문을 고집하는 것은 의의가 없는 듯하다. 그렇다고 마침내 예를 고쳐서 아버지 사당에 부한다면 또 애례존양(愛禮存羊)104) 의 뜻이 아닐 것이다.’ 하였으니, 이에 의거해 보면 이것은 폐할 수 없는 큰 절목인데 국제에는 없으니 아마도 강정해 행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태백산사고본】 1책 1권 17장 B면【국편영인본】 35책 373면
[註 047] 인혁(因革) : 옛것을 따름과 개혁함.[註 048] 취송(聚訟) : 서로 시비하여 결말이 나지 아니함.[註 049] 정문(情文) : 내용과 형식.[註 050] 개원(開元) : 당 현종(唐玄宗)의 연호.[註 051] 변제(變除) : 변복(變服) 공제(公除).[註 052] 통상(通喪) : 상하가 통행하는 상례로 삼년상을 이름.[註 053] 경화(更化) : 정치와 교화를 고치어 새롭게 함.[註 054] 사위(事爲) : 사업.[註 055] 여러 왕손(王孫) : 소현 세자(昭顯世子)의 세 아들. 인조 25년에 당시 강빈 사건(姜嬪事件:소현 세자의 음식에 독을 넣어 죽였다는 무고 사건)이 문제가 되어 그의 소생인 왕손 3형제를 제주도에 귀양보냈는데, 이때 장자 석철(石鐵)은 12세, 차자 석린(石麟)은 8세, 삼자 석견(石堅)은 4세였다.[註 056] 고명(顧命) : 임금이 죽을 때 후사를 부탁하는 유명(遺命).[註 057] 재생백(哉生魄) : 음력 16일.[註 058] 서언(誓言) : 유언.[註 059] 노침(路寢) : 정전(正殿).[註 060] 정종(正終) : 정전에서 죽음.[註 061] 복(復) : 초혼(招魂). 사람이 죽은 몇 시간 뒤에 망인이 입던 옷을 가지고 지붕에 올라가서 왼손으로 깃을 잡고 오른손으로 허리를 잡고서 아무(何某)는 복하라고 세 번 외친 다음 그 옷으로 시신을 덮음.[註 062] 《의례경전(儀禮經傳)》 : 주자(朱子)가 찬(撰)한 《의례경전통해(儀禮經傳通解)》로 원집(原集)이 37권이고 속집이 29권임.[註 063] 시사전(始死奠) : 고복(皋復)이 끝난 뒤에 올리는 전.[註 064] 항시(巷市) : 골목에서 시장을 보는 것. 국상이 나면 애도의 뜻으로 시장을 철거하기 때문에 필요한 생필품을 골목에서 구함.[註 065] 차길(借吉) : 상제의 몸으로 길례(吉禮) 때에 특별히 길복(吉服)을 입는 것.[註 066] 천시(遷尸) : 왕이 죽어 소렴, 대렴을 마친 뒤에 왕의 시신을 당(堂)으로 옮기는 것.[註 067] 설치(楔齒) : 반함(飯含)을 하기 전에 먼저 뿔 숟가락을 아래 위의 이(齒) 사이에 끼워 입이 다물어지지 않게 하는 것.[註 068] 철족(綴足) : 시신의 발이 뒤틀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발을 의자의 다리에 묶어 놓는 것.[註 069] 유당(帷堂) : 당상(堂上)에 유막(帷幕)을 설치한 상막(喪幕).[註 070] 각사(角柶) : 뿔로 만든 숟가락.[註 071] 연궤(燕几) : 편안한 의자.[註 072] 흔창(興鬯) : 왕의 시신을 목욕시키는 울창주(鬱鬯酒).[註 073] 사기(肆器) : 너비가 8척, 길이가 12척, 깊이가 3척인 얼음을 채운 통. 하절기에 시체의 부패를 방지하기 위하여 얼음을 채운 이 통을 시신에 넣어둠.[註 074] 권의(卷衣) : 곤룡포.[註 075] 금모(錦冒) : 시체를 싸는 비단 자루 습(襲) 이후와 소렴 이전에 시체를 싸둔다.[註 076] 보쇄(黼殺) : 시체를 싸는 도끼 무늬의 수를 놓은 천. 위를 싸는 것을 보라하고 아래를 싸는 것을 쇄라함.[註 077] 모질(冒質) : 금모(錦昌)의 윗부분이다..[註 078] 쇄(殺) : 금모의 아래 부분이다.[註 079] 반옥(飯玉) : 염할 때 죽은 사람의 입에 구슬을 물리는 것.[註 080] 반미(飯米) : 염할 때 죽은 사람의 일에 쌀을 물리는 것.[註 081] 막포(幕布) : 장막을 만드는 거친 베.[註 082] 온공(溫公) : 사마광(司馬光).[註 083] 습(襲) : 죽은 사람에게 좌임포(左衽袍)를 입히는 것.[註 084] 반함(飯含) : 염할 때 죽은 사람의 입에 쌀을 물리는 것.[註 085] 환질(環絰) : 성복 때 상제가 건(巾) 위에 덧씌워 쓰는 수절(首絰).[註 086] 위모(委貌) : 관명(冠名).[註 087] 금(衾) : 홑이불.[註 088] 계빈(啓殯) : 발인(發靷)할 때 출란(出棺)하기 위하여 빈소를 여는 것.[註 089] 진조조전(陳朝祖奠) : 발인할 때 죽은 사람이 종묘로 가서 마지막으로 조상을 보이고 하직 인사를 올리게 하고 곁들어 전을 올리는 것.[註 090] 문(免) : 갓을 벗고 한 치 너비의 베로 머리를 묶고 뒤로 늘어 뜨리는 것.[註 091] 산대(散帶) : 띠의 끝을 꼬지 않고 흐트려 놓은 것.[註 092] 조전(祖奠) : 발인에 앞서 출발을 알리는 전. 조는 행신(行神)을 뜻함.[註 093] 명(銘) : 명정.[註 094] 자리[菌] : 관 밑에 까는 자리로서 관과 함께 묻는다.[註 095] 중(重) : 우제(虞祭) 이전에는 신주가 없으므로 나무를 깎아 뜰 중앙에 세워 놓고 죽은 이의 혼신이 임시로 이 나무에 의지하게 하고 또 죽은 이의 필요한 물건들을 이 나무에 매달아 놓는다.[註 096] 피(披) : 관을 끄는 끈.[註 097] 우(虞) : 장사를 지내고 돌아와서 빈궁(殯宮)에 지내는 제사. 망인의 시체는 땅으로 돌아갔으나 정기(精氣)는 정처 없이 방황하므로 우제를 올려 혼신을 안정시킴.[註 098] 반곡(返哭) : 장사를 마치고 돌아와서 종묘에서 곡을 하며 슬픔을 다하는 것.[註 099] 실내(室內) : 종묘 안.[註 100] 부(祔) : 졸곡(卒哭)이 끝난 다음날, 새로 죽은 이의 신주(神主)를 소목(昭穆)의 서차에 따라 종묘에 모시는 것.[註 101] 명일(明日) : 졸곡(卒哭) 다음날.[註 102] 당(堂) : 사당.[註 103] 감실(龕室) : 종묘 안에 신주를 모셔 놓는 장.[註 104] 애례존양(愛禮存羊) : 예를 아껴 구례(舊禮) 또는 허례(虛禮)를 버리지 않고 보전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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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명(顧命)056) .
주서(周書)에, ‘4월 재생백(哉生魄)057) 에 왕이 병이 나서 편치 못하였다. 갑자일에 왕이 손과 얼굴을 씻으니 부축하는 자가 면복(冕服)을 입히자 왕은 옥궤(玉几)에 기대어 태보(太保), 예백(芮伯), 동백(彤伯), 필공(畢公), 위후(衛侯), 모공(毛公), 사씨(師氏), 호신(虎臣), 백윤(百尹), 어사(御事) 들을 불렀다. 왕이 말하기를 「아, 병이 더욱 심해져서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렀는데 병이 하루하루 더해만 가니 나의 뜻을 계승하게 할 서언(誓言)058) 을 발표하지 못하게 될까 두렵노라. 그래서 내가 자세히 훈계하여 그대들에게 명하노라.」 하였다.’ 【고명(顧命).】 하였습니다.
《오례의(五禮儀)》에, ‘상이 병이 나서 편치 못하시면 사정전(思政殿)에 장막과 병풍을 설치하고서 내시가 상을 부축하여 수레에 모시고 나와 장막 안에 거둥하여 궤에 기대어 앉게 한다. 왕세자와 대신 등이 함께 고명 받기를 마치고는 대신 등은 물러나와 전위 유교(傳位遺敎)를 작성한다.’ 하였습니다.
신이 상고하건대 단궁(檀弓)에, ‘임금을 부축하는 데는 복인사(卜人師)가 【복(卜)은 복(僕)이다.】 오른쪽을 부축하고 사인사(射人師)가 왼쪽을 부축하는 것이므로 임금이 죽었을 때에도 이들이 시신을 들어 옮기게 한다.’ 하였고, 그 주(註)에, ‘임금이 병을 앓을 때에 복인(僕人)의 장이 우체(右體)를 부축하고 사인의 장이 좌체(左體)를 부축하는데, 이 두 사람은 모두 평소에 복장과 위치를 바로하도록 돕는 사람이기 때문에 임금이 죽어 시신을 옮길 때에도 그대로 이 사람들을 사용하는 것이다.’ 하였고, 그 소주(小註)에, ‘임금이 노침(路寢)059) 에서 죽지 않으면 정당하게 죽지 않은 것이 되기 때문에 임금이 병을 앓을 때에는 노침과 조정에서 복장과 위치를 바르게 하도록 도우며 시종하는 자가 부축하는 것이다. 임금에게 병이 있으면 외정(外庭) 사람이 함께 그 병을 알고 임금이 죽으면 외정 사람이 함께 그 상을 치루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오례의(五禮儀)》에 이른바 내시가 부축하여 수레에 오르게 한다는 것은 아마도 정종(正終)060) 의 의리가 아닌 듯합니다. 또 신이 듣건대 지난번 습염(襲斂)하는 제반사를 모두 내척(內戚)이 관장하여 후회스러운 일이 많았다 하니, 외정 사람이 함께 상을 치루는 의리가 아닌 듯합니다.
2. 복(復)061) .
《의례경전(儀禮經傳)》062) 에, ‘소신(小臣)이 복(復)을 하는데 복하는 자가 조복을 입고 동쪽 처마로 올라가 지붕의 중앙부 용마루에 서서 북쪽을 향해 세 번 부른 다음 옷을 말아 앞으로 던지면 사복(司服)이 받는다. 그런 다음 복한 자는 서북쪽 처마로 내려온다.’ 【상대기(喪大記).】 하였고, ‘복한 옷으로 염하지 않는다.’ 【상대기.】 하였고, ‘천자(天子)를 복하는 데는 「천자 복하소서.」 하고, 제후를 복하는 데는 「모보(某甫) 복하소서.」 한다.’ 【잡기(雜記).】 하였습니다.
《오례의(五禮儀)》에는, ‘내시가 평상시에 입던 상의 옷을 왼쪽 어깨에 메고 전면 동쪽 처마로 올라가 지붕의 용마루를 밟고 서서 왼손으로는 깃고대를 잡고 오른손으로는 허리를 잡고서 북쪽을 향해 세 번 부른 다음 옷을 앞으로 던지면 내시가 함(函)으로 받아가지고 들어가서 대행(大行)하신 왕의 시신을 덮는다. 지붕으로 올라가 복한 자는 후면 서쪽 처마로 내려온다.’ 하였습니다.
신이 상고하건대 고례에는 소신이 복하고 사복이 받는다고 하였는데, 《오례의(五禮儀)》에는 모두 내시를 사용한다고 하였으니 고례를 정례(正禮)로 삼아야 할 듯합니다.
3. 시사전(始死奠)063) .
《의례경전(儀禮經傳)》에, ‘사사(司士)와 작사(作士)가 일을 관장한다.’ 하였습니다.
《오례의(五禮儀)》 【염습 뒤에 있다.】 신이 상고하건대, 시사전이 《오례의(五禮儀)》에는 염습한 뒤에 있는데 고례에는 복한 뒤에 즉시 설치하였다가 소렴(小斂)한 뒤에 비로소 철수한다 하였습니다. 대개 사람이 죽으면 혼기(魂氣)가 흩어지기 때문에 즉시 전(奠)을 설치하여 혼백이 의지하도록 하는 것이 자식의 정에 당연한 것이니 아마도 고례를 정례로 삼아야 할 듯합니다. 4. 계신민(戒臣民). 《의례경전(儀禮經傳)》에, ‘임금이 죽은 처음에 대복(大僕)이 계고(戒鼓)를 울려 사방에 전달한다.’ 하였고, ‘대종백(大宗伯)이 상상(上相)이 된다.’ 하였고, ‘호분씨(虎賁氏)가 왕문(王門)을 지킨다.’ 하였고, ‘대사도(大司徒)가 만민을 왕문으로 모아 부절(符節)이 없는 자는 천하를 돌아다니지 못하게 한다.’ 하였고, ‘천자가 죽으면 7일 동안 항시(巷市)064) 하고 제후가 죽으면 5일 동안 항시한다.’ 【단궁(檀弓).】 하였습니다. 《오례의(五禮儀)》 【대략 이와 같다.】 신이 상고하건대, 《오례의(五禮儀)》에는 졸곡(卒哭) 후에 가취(嫁娶)를 허락하여 3일 동안 차길(借吉)065) 한다 하여 조금도 차등이 없습니다. 살피건대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혼인에 관한 한 가지 일에 대해서 국상이 난 한 달 뒤에는 군민(軍民)에게, 세 달 뒤에는 사리(士吏)에게, 복토(復土)한 뒤에는 선인(選人)에게, 부묘(祔廟)한 뒤에는 승의랑(承議郞) 이하에게, 소상 뒤에는 조청 대부(朝請大夫) 이하에게, 대상 뒤에는 중대부(中大夫) 이하에게 혼인을 허락하여 각각 3일 동안 차길하고, 대중 대부 이상은 모두 담제(祭禫)를 지낸 뒤에 길례(吉禮)를 행하게 한다. 관계(官階)는 낮으나 차견(差遣)된 직사(職事)가 높은 자는 높은 쪽을 따르고, 벼슬을 옮긴 자는 새 관계를 따르고, 관계가 깎인 자는 옛 관계를 따른다.’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하면 고례와도 어그러지지 않고 금례(今禮)와도 방해됨이 없어 거의 시행할 수 있으니, 지금 이에 따라 대략 구별을 하는 것이 정례(情禮)에 합당할 것 같습니다. 5. 천시(遷尸)066) ·설치(楔齒)067) ·철족(綴足)068) ·유당(帷堂)069) . 《의례경전(儀禮經傳)》에, ‘사인(射人), 복인(僕人)이 천시한다.’ 하였고, ‘옥부(玉府)가 각사(角柶)070) 를 이바지한다.’ 하였고, ‘시신을 상(牀)으로 옮기고 염할 이불로 덮고 죽을 때 입었던 옷을 버리고서 소신(小臣)이 각사를 사용하여 상하의 이(齒)가 다물어지지 않도록 쐐기를 끼워놓는다. 철족에 연궤(燕几)071) 를 사용하는 것은 임금이나 대부나 동일하다.’ 【상대기(喪大記).】 하였고, ‘막인(幕人)이 유막(帷幕)과 평장(平帳)과 장막을 묶는 끈을 이바지한다.’ 하였습니다. 《오례의(五禮儀)》 【없다.】 신이 상고하건대, 이상의 네 조항은 모두 절실하여 없어서는 안 될 것들인데 우리 나라 제도에는 없으니 아마도 첨가해 보충해야 마땅할 것 같습니다. 6. 목욕 도구 설치[陳沐浴], 명의 입히기[襲明衣], 죽은 사람의 입에 쌀·구슬 따위를 넣는 것[飯含], 얼음을 담는 소반[氷盤] 등의 도구. 《의례경전(儀禮經傳)》에, ‘창인(鬯人)이 흔창(興鬯)072) 을 이바지한다.’ 하였고, ‘울인(鬱人)이 사기(肆器)073) 를 이바지한다.’ 하였고, ‘전사(典絲)가 실, 솜, 무늬 있는 비단 등의 물건을 이바지한다.’ 하였고, ‘공(公)을 염습하는 데는 권의(卷衣)074) 한 벌, 현단복(玄端服) 한 벌, 조복(朝服) 한 벌, 소적(素積) 한 벌, 훈상(纁裳) 한 벌, 작변(爵弁) 두 벌, 현면(玄冕) 한 벌, 포의(褒衣) 한 벌과 주록대(朱綠帶)이고, 다시 대대(大帶)를 몸 위에 걸쳐 놓는다.’ 【잡기.】 하였고, ‘임금의 금모(錦冒)075) ·보쇄(黼殺)076) 는 옆으로 일곱 군데를 묶는데, 모질(冒質)077) 의 길이는 손과 가지런하고 쇄(殺)078) 는 석 자[尺]이다. 【상대기.】 하였고, ‘저고리에는 반드시 치마가 있으니 그것을 한 벌이라 한다.’ 하였고, ‘능인(凌人)이 얼음을 채운 이반(夷盤)을 이바지한다.’ 하였고, ‘임금은 대반(大盤)을 설치하여 얼음을 채우고 상 위의 자리를 걷어 내고 베개만 둔다.’ 【상대기.】 하였고, ‘전서(典瑞)가 반옥(飯玉)079) 과 함옥(含玉)을 이바지한다.’ 하였고, ‘사인(舍人)이 반미(飯米)080) 를 이바지한다.’ 하였고, ‘천자는 구패(九貝)를 입에 넣고 제후는 칠패(七貝)를 넣는다.’ 【잡기.】 하였고, ‘함(含)하는 상(牀) 하나, 염습하는 상 하나, 시신을 당(堂)으로 옮기는데 또 하나의 상이 있는데 모두 베개와 자리가 있다. 이것은 임금이나 대부가 동일하다.’ 【상대기.】 하였고, ‘명의(明衣)의 치마는 막포(幕布)081) 로 만들고 소매는 온 폭(幅)으로 하고 길이는 무릎 밑까지 내려오며, 앞뒤 치마가 있는데 주름을 잡지 않고 길이는 발등까지 내려온다.’ 하였고, ‘포건(布巾)은 길이와 너비가 같다.’ 하였습니다. 《오례의(五禮儀)》 【사용하는 도구의 명목이 같지 않다.】 신이 상고하건대, 국제(國制)의 염습하는 도구 중 수관(首冠)에 대한 주(註)에 ‘만드는 것이 감두(頭)와 같은데 바로 복건(幅巾)이다.’ 하였으니, 감두는 우리 나라 세속에서 만드는 복건입니다. 온공(溫公)082) 과 주자가 쓴 복건의 형제(形制)가 같지 않은데 지금 합하여 한 물건으로 여기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리고 곤룡포를 입은 시신의 머리에 복건을 씌우는 것은 더욱 서로 어울리지 않으니, 만약 곤룡포를 사용한다면 고례를 따라 작변(爵弁)이나 현면(玄冕)을 사용하는 것이 타당할 듯하고 만약 꼭 복건을 사용하고자 하면 심의(深衣)를 사용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심의가 지금은 비록 야인(野人)의 옷이지만 황제(黃帝)로부터 이미 입었고, 그 뜻이 매우 깊어 규(規)·구(矩)·승(繩)·권(權)·형(衡) 등 다섯 가지 법이 들어 있기 때문에 성인께서도 입으셨고 선왕들께서도 귀하게 여겼습니다. 지금 염습하는 데 이미 복건과 대대(大帶)를 사용하였으니, 심의를 입히는 것도 불가함이 없을 듯합니다. 그리고 질쇄(質殺)는 바로 옛 제도로서 죽은 사람을 보호하는 데 매우 온당하고도 절실한 것인데 국제에는 그것이 없으니 첨가해 보충함이 마땅할 듯합니다. 7. 습(襲)083) ·반함(飯含)084) . 《의례경전(儀禮經傳)》에 ‘증자(曾子)가 말하기를 「부인의 옷으로 습하지 않는다.」 하였다.’ 【잡기(雜記).】 하였고, ‘제후는 일곱 벌, 공(公)은 아홉 벌이다.’ 하였고, ‘대축(大祝)이 반함(飯含)을 돕는다.’ 【춘관(春官).】 하였고, ‘태재(太宰)가 함옥(含玉)을 돕는다.’라고 한 주(注)에, ‘왕을 도와 하는 것이다.’ 【천관(天官).】 하였고, 《의례(儀禮)》의 ‘포건(布巾)은 길이와 너비를 같게 한다.’라고 한 주(注)에, ‘대부 이상은 빈(賓)이 한다.’ 하였는데, 그 소(疏)에 ‘대부 이상은 신하가 있으니 신하가 빈이 된다. 빈이 반함하는 것은 악취가 나올 것을 꺼리기 때문에 포건으로 얼굴을 덮고 입 부위에 구멍을 뚫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오례의(五禮儀)》 【반함은 습전(襲奠) 뒤에 있는데 내시가 거행한다.】 신이 상고하건대, 예에 ‘반함하는 것은 죽었다 하여 차마 입을 비게 하지 않는 것이다.’ 하였으니 봉양의 뜻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례에는 혹 왕이 친히 하기도 하고 빈이 하기도 하였는데 지금은 내시를 사용하여 시키니 매우 설만(褻慢)한 듯합니다. 왕이 친히 하는 것이 실로 정례(情禮)에 부합됩니다. 8. 환질(環絰)085) 을 갖추는 것. 《의례경전(儀禮經傳)》에 ‘소렴을 마치고는 머리에 질(絰)을 두르는데 공과 대부가 동일하다.’라고 한 소(疏)에, ‘어버이가 죽으면 효자는 갓을 벗는다. 그러나 소렴 때에 이르러서는 머리에 수식(首飾)이 없을 수 없다. 사(士)는 흰 위모(委貌)086) 를 쓰고 대부 이상은 소변(素弁)을 쓰니 귀천이 모두 머리에 환질(環絰)을 두를 수 있다.’ 하였는데, 구씨(丘氏)는 ‘이것을 살펴보면 수질(首絰) 밑에 반드시 건모(巾帽)가 있어 수질을 받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위모와 작변(爵弁)의 종류가 지금 세상에는 없으니 백포건(白布巾)을 사용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고, ‘환질은 삼[麻] 한 가닥으로 감는 것이다.’ 하였고, ‘염이 끝난 뒤에는 소관(素冠)을 벗어 버린다.’ 【상소기(喪小記)의 주(註).】 하였습니다. 《오례의(五禮儀)》 【없다.】 신이 상고하건대, 처음 죽었을 때에는 시체가 복식(服飾)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효자가 머리를 풀어뜨리고 상사에 임하지만 소렴을 하는 데 이르러서는 시체에 이미 복식을 하였으므로 효자도 수식이 없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환질과 소변(素弁)을 갖추는 것인데 국제(國制)에는 없으니 고례로써 첨가해 보충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9. 대렴(大斂). 《의례경전(儀禮經傳)》에, ‘임금은 장차 대렴하려 할 때에 아들은 소변 위에 수질을 두르고서 동서(東序) 남단의 자리로 나아가고, 경대부는 당(堂)의 모서리 기둥 서쪽 자리로 나아가 북쪽을 향하는데 동쪽을 상(上)으로 하고, 부형(父兄)은 당 밑에서 북쪽을 향하고, 부인(夫人)·명부(命婦)는 시체의 서쪽에서 동쪽을 향하고, 외종(外宗)은 방 안에서 남쪽을 향하고, 소신(小臣)은 자리를 펴고, 상축(商祝)은 교금(絞紟), 금(衾)087) , 옷 등을 펴놓고, 사(士)는 소반 위에 있는 물에 손을 씻고서 시신을 들어다가 염(斂)하는 곳에 옮겨놓는다. 염이 끝난 다음 태재(太宰)가 염이 끝났음을 고하면 아들이 시신에 기대어 곡용(哭踊)하고 부인도 동쪽을 향하여 역시 그렇게 한다.’ 【상대기.】 하였습니다. 《오례의(五禮儀)》 【대략 같은데 전(奠)이 있고, 또 질쇄(質殺)가 이때에 와서 비로소 사용된다.】 신이 상고하건대, 고례에는 대렴과 성빈(成殯)을 합쳐 한 번의 전을 올리는데 빈을 한 뒤에 비로소 전을 베푼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국제에는 대렴과 성빈에 각기 전을 베푸니 아마도 고례를 따르는 것을 정례(正禮)로 삼아야 마땅할 듯합니다. 그리고 또 질쇄는 바로 시체에 옷을 입힐 때 사용하는 것인데 국제에는 이때에 와서 비로소 사용하니 아마도 고례의 뜻이 아닌 듯합니다. 10. 성복(成服). 《의례경전(儀禮經傳)》에, ‘임금의 상에는 3일 뒤에 아들과 부인이 장(杖)을 짚고 5일 뒤 빈소를 마치고서 대부, 세부(世婦)에게 상장을 준다.’ 【상대기.】 하였고, ‘천자가 죽으면 3일 만에 축(祝)이 먼저 복을 입고, 5일 만에 관장(官長)이 복을 입고, 7일 만에 국중(國中)의 남녀가 복을 입고, 석달 만에 천하가 복을 입는다.’ 【단궁(檀弓).】 하였고, ‘사사(肆師)가 외내(外內) 명남녀(命男女)의 상복이 법에 맞지 않는 자를 금한다.’ 【춘관(春官).】 하였고, 주자가 말하기를, ‘참최 3년은 아비와 임금을 위하여 입는 복이다. 그 복은 포관(布冠), 포삼(布杉)에 벽령(辟領), 부판(負版)을 단 최복(衰服)과 엄임(掩衽), 친삼(襯杉), 포군(布君)을 입고 마(麻)로 만든 요질(腰絰), 수질(首絰), 마대(麻帶)를 두르고 짚신을 신고 죽장(竹杖)을 짚는데 천자로부터 서인에 이르기까지 신분의 귀천으로써 증손(增損)하는 바가 없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임금과 신하의 복이 같으나 약간의 구별을 하여 상하를 분별한다. 13개월 만에 연복(練服)을 입고서 소상(小祥)을 지내고 25개월 만에 난복(襴襆)을 하고서 담제(禫祭)를 지내고 27개월 만에 조복을 입고서 상을 벗는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초상(初喪) 때는 마땅히 고례에 따라 상복을 지어 입고서 상에 임하고, 따로 포(布)로 복두(幞頭), 공복(公服), 혁대(革帶)를 만들어 착용하고서 조회하는 것이 예에 합당하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예에 임금의 상사에 달관(達官)의 장(長)들은 죽장(竹杖)을 짚는다 하였는데, 이른바 달관이란 일을 전담하여 임금께 주달(奏達)할 수 있는 관원을 이름이다. 오늘에 있어서는 안으로 성(省)·조(曹)·시(寺)·감(監)의 장관과 밖으로는 감사·군수 등으로서 모든 사(司)의 장과 일찍이 시종(侍從) 이상의 관직을 역임하여 전담해서 일을 주달했던 이들이 바로 달관이다. 그러므로 지금 상장을 짚지 않는 제도를 요좌(僚佐) 이하에게 시행한다면 가하지만 심지어는 그 장관들로 하여금 아랫사람과 함께 상장을 짚지 않게 하고 있는데, 비록 지난날 정승과 장수를 지낸 사람이 벼슬하지 않고 집에 있다 할지라도 다른 것이 없게 한다면 어찌 박하지 아니한가.’ 하였고, 또 말하기를, ‘전에 보니 효종(孝宗)께서는 장사를 지낸 뒤에도 오히려 백포의관(白布衣冠)으로 조회를 보셨으니 이는 매우 성대한 덕이다. 전세에는 임금이 스스로 복을 입지 않았기 때문에 고례를 행할 수 없었던 것이지만, 당시에는 이런 좋은 기회가 있었는데도 유신(儒臣)과 예관(禮官)이 이룩해 밝혀서 1대의 제도로 만들지 못하여 드디어 임금은 위에서 복을 입는데 신하들은 아래에서 복을 벗게 하여 잘못을 인습하였으니 매우 통한스럽다.’ 하였습니다. 《오례의(五禮儀)》에는, ‘종친과 문무 백관은 단령의(團領衣)에 베[布]로 싼 사모를 쓰고 마대(麻帶)를 매고 백피화(白皮靴)를 신었다가 졸곡(卒哭) 뒤에는 백의(白衣)에 오사모(烏紗帽)를 쓰고 흑각대(黑角帶)를 띤다. 모든 상사에는 최복을 입고 연제(練祭) 때에는 연포(練布)로 사모를 싼다.’ 하였습니다. 신이 상고하건대, 《오례의(五禮儀)》의 복제(服制)는 매우 윤서(倫緖)가 없습니다. 대체로 임금과 아비는 일체인데 어찌 아비에 대해서는 순전히 상복을 사용하고 임금에 대해서는 조복의 제도를 섞어 사용하여 반은 높이고 반은 낮추는 의전(儀典)이 있겠습니까. 그리고 또 전함(前銜)은 지금은 비록 관직이 없다 하더라도 그의 이름이 이미 사적(仕籍)에 있으니 실로 관직에 있는 자와 조금도 다를 것이 없는데 사인(士人)과 함께 백의를 입는 제도는 더더욱 옳지 않습니다. 일찍이 상고하건대 송 영종(宋寧宗) 초기에 천자는 칠사천황복(漆紗淺黃服)을 입었는데 신하들은 이미 역월(易月)했다 하여 복을 입지 않으니, 주자가 차자를 올려 이미 지난 실수는 뒤에 와서 고칠 수 없거니와 앞으로 계빈(啓殯)088) 하여 발인(發靷)할 때는 마땅히 다시 초상 때의 상복을 착용해야 된다고 하였습니다. 지난해에 지평 민순(閔純)이 헌의(獻議)하여 《오례의(五禮儀)》를 고치어 너무 심한 것을 약간 제거하였으니, 신이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신의 이 건의를 예관에게 내리시어 한결같이 주자가 손익한 제도를 따라 속히 지휘하여 백관으로 하여금 미리 최복을 준비하였다가 발인할 때에 입고서 들어와 임하도록 하고, 지금 입고 있는 단령은 그 끝을 꿰매어 입고 포모(布帽)와 포로 싼 각대(角帶)와 백화(白靴)로써 일을 볼 때 입는 복장으로 삼게 하소서. 그리고 전함들에게도 이때 다시 성복(成服)하게 하면 사의(事宜)에 합당할 것 같습니다. 11. 조석전(朝夕奠). 《의례경전(儀禮經傳)》에, ‘사복(司服)이 전(奠)드릴 때 입는 의복을 이바지한다.’ 【춘관.】 하였습니다. 《오례의(五禮儀)》 【배례(拜禮)가 없다.】 신이 상고하건대, 고례는 다만 대개만을 들었을 뿐, 배례(拜禮)의 절목은 말하지 않았습니다. 《주자가례(朱子家禮)》에 성복(成服) 전의 대소렴전(大小斂奠)에는 모두 효자(孝子)의 배례를 말하지 않고 성복 후에서야 비로소 주인 이하의 재배를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국제에는 없으니 아마도 주자의 설을 따르는 것이 무방할 듯합니다. 12. 진조조전(陳朝祖奠)089) 《의례경전(儀禮經傳)》에, ‘내수(內竪)는 상기(喪紀)의 일이 있을 때이면 내인(內人)들을 벽제(辟除)한다.’ 하였고, ‘세부(世婦)가 여궁(女宮)을 거느리고서 자성(粢盛)을 씻어 제기(祭器)에 담는다.’ 하였습니다. 《오례의(五禮儀)》 【조조(朝祖)와 전(奠)이 없다.】 신이 상고하건대, 예(禮)에 ‘상구(喪柩)를 조상의 종묘로 옮겨 망인(亡人)이 조상을 뵙게 하는 것은 망인의 효심을 따르는 것이니 망인의 처지에서 보면 평소 거처하던 침실을 떠나는 것이 슬프다. 그러므로 조고(祖考)의 종묘에 가서 결별하고서 떠나는 것이다.’ 하였으니, 이는 진실로 예의 큰 절목으로서 폐할 수 없는 것인데 국제에는 없으니 아마도 강구해 행해야 될 듯합니다. 그리고 이어 정제(定制)로 삼으시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13. 계(啓). 《의례경전(儀禮經傳)》에, ‘상축(喪祝)이 계한다.’ 하였고, ‘장부(丈夫)는 문(免)090) 하고 부인은 복머리[髽]를 하고 산대(散帶)091) 를 드리우고서 자리로 나아간다.’ 하였고, ‘계하는 새벽에는 외내가 모두 곡하지 않는다.’ 【기(記).】 하였습니다. 《오례의(五禮儀)》 【변복(變服)하는 절차가 없다.】 신이 상고하건대, 계빈(啓殯)은 시구(尸柩)를 뵙는 것이므로 소렴 때처럼 변복하는 것입니다. 이는 큰 절목인데 국제에는 없으니 고례를 따르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14. 조전(祖奠)092) . 《의례경전(儀禮經傳)》에, ‘조전에 깔 건석(巾席)을 걷고서 서쪽에서 기다리면 주인은 허리를 굽히고서 올라가고 부인은 뛰면서[踊] 내려간다. 주인이 단(袒)하면 상축(商祝)이 상구(喪柩)를 실은 수레를 어거하여 출발해 조금 가다가 멈춘다. 주인은 뛰면서 단했던 옷소매를 바르게 입고서 상구를 실은 수레 앞으로 가서 상구의 남쪽을 수레에 묶고, 부인은 내려와서 섬돌 사이의 위치로 나아간다. 떠나가는 데는[祖] 순서가 있기 때문에 수레는 방향을 틀지만 음식을 차려놓았던 그릇은 방향을 돌리지 않는다. 축(祝)이 명(銘)093) 을 가져다가 자리[菌]094) 위에 놓으면 두 사람이 중(重)095) 의 왼쪽을 돌아 나아가서 자리를 펴고 조전을 앞서와 같이 행한다. 그러면 주인은 허리를 굽히고서 말을 바치기를[薦馬] 앞서와 같이 한다. 빈(賓)이 나아가면 주인이 전송한다.’ 하였고, 《예기(禮記)》에, ‘뜰에서 조전을 행한다.’ 【상례의(喪禮儀)에 자세히 보인다.】 하였고, ‘상구를 실은 수레가 출발하여 조금 가다가 멈추는데 수레의 방향은 돌리지만 위치는 바뀌지 않고, 곁에서 네 사람이 피(披)096) 를 잡는다.’ 【본경(本經)의 기록이다.】 하였고, ‘축(祝)이 조전의 제찬(祭饌)을 주인의 남쪽에 있는 수레[輅] 앞에 북쪽을 상(上)으로 하여 차려 놓고서 보자기로 덮는다.’ 【상동(上同).】 하였습니다. 《오례의(五禮儀)》 【대략 같다.】 신이 상고하건대, 국제(國制)에 비록 이 의전(儀典)이 있으나 이미 조조(朝祖)에 관한 절목이 없으므로 이 의전을 빈전(殯殿)에서 시행하고서 그대로 발인하니 매우 먼 길을 가는데 가까운 데서부터 점진적으로 나아가는 뜻이 아닙니다. 고례에는 조조의 의전이 있고, 이어 조전(祖奠)을 묘정(廟庭)에서 행하고, 이튿날 새벽에 견전(遣奠)을 행하고서 발인합니다. 발인 절차는 《의례(儀禮)》에 자세히 나타나 있습니다. 15. 우(虞)097) 《의례경전(儀禮經傳)》에, ‘제후는 칠우(七虞)이다.’ 하였습니다. 《오례의(五禮儀)》 【반우의(返虞儀)가 있다.】 신이 상고하건대, 예에 ‘정오에 우제(虞祭)를 지낸다. 길이 먼 경우에는 무덤에서 우제를 행한다.’ 하였으니, 반우(返虞)한다는 글에 구애될 필요가 없을 듯합니다. 16. 반곡(返哭)098) 《의례경전(儀禮經傳)》에, ‘반곡하는 사람은 서계(西階)로 올라가 동쪽을 향하고 주인은 당하(堂下)에서 동쪽을 향해 서는데 북쪽을 상(上)으로 한다. 부인은 들어가고 대부는 뛰면서[踊] 조계(阼階)로 올라간다. 주부는 실내(室內)099) 로 들어간다.’ 하였습니다. 《오례의(五禮儀)》 【없다.】 신이 상고하건대, 예에 ‘반곡하여 조문(吊問)하는 것은 슬픔이 지극한 것이다. 돌아왔으나 어버이는 이미 죽어 없어져서 어버이를 잃었으니 이때를 당하여 슬픔이 지극하다.’ 하였고, 주자가 말하기를, ‘반곡하려고 당(堂)으로 오르는 것은 돌아간 어버이가 평소 예를 행하였던 곳으로 돌아가는 것이고, 주부가 실(室)로 들어가는 것은 죽은 어버이가 평소 궤양(饋養)했던 곳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 의사를 안다면 이른바 그가 밟던 자리를 밟고 그가 행하던 예를 행하는 등의 일이 자연스럽게 행해져서 바야흐로 계지(繼志)·술사(述事)의 일을 알게 될 것이다.’ 하였습니다. 이 한 절목을 빠뜨려서는 안 될 것 같은데 국제에는 없으니 고례를 따르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17. 조석전(朝夕奠)을 파함. 신이 상고하건대, 이 한 절목은 초우(初虞) 뒤에 있어야 하는데 《의례경전(儀禮經傳)》이나 국제에 나오는 글이 없으므로 신이 삼가 《가례(家禮)》에서 따다가 보충하였습니다. 18. 부(祔)100) 《의례경전(儀禮經傳)》에, ‘명일(明日)101) 에 신주(神主)를 소목(昭穆)의 반차(班次)에 따라 종묘에 모신다.’ 【사우(士虞).】 하였고, ‘명일 조부(祖父)의 신주를 다른 사당으로 옮기고 새로 죽은 이의 신주를 조부의 신주가 있던 곳에 모신다. 상제(喪祭)가 변하여 길제(吉祭)로 가고 부묘(祔廟)하는 데는 반드시 하루를 띄우지 않고 이 날에 접속해서 행한다.’ 【예기.】 하였고, ‘부제(祔祭) 때는 상장(喪杖)을 짚고서 당(堂)102) 에 오르지 않는다.’ 【상소기(喪小記).】 하였고, 주자가 말하기를, ‘선왕(先王)께서 예를 제정한 것은 본래 인정에 따른 것이니 길흉의 사이에 변하는 것이 순서가 있다. 그러므로 처음 죽었을 때는 오로지 생존한 분을 섬기는 예를 쓰고 졸곡(卒哭)과 부묘(祔廟)를 마친 뒤에야 신(神)으로 섬긴다. 그러나 차마 다 변경할 수 없기 때문에 신주를 다시 정침(正寢)으로 모셔다가 생존한 분을 섬기는 예로 섬기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오례의(五禮儀)》 【없다.】 신이 상고하건대, 주자가 말하기를 ‘새로 죽은 분을 조부의 사당에 부(祔)하는 것은 조부에게 다른 사당으로 옮긴다는 것을 고하고 새로 죽은 분에게 이 사당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고하는 순서이다. 그런데 지금은 공실(公室)이나 사가(私家)의 묘(廟)에 모두 한 사당 안에 감실(龕室)103) 만을 달리하고 서쪽을 상(上)으로 하는 제도만이 있고 다시 좌소(左昭), 우목(右穆)의 반차(班次)가 없다. 그러므로 체천(遞遷)할 경우가 생기면 모든 감실을 다 옮기고 새로 죽은 이가 그 아버지가 있던 감실로 들어간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예의 큰 절목으로서 고례와 같지 않다. 그런데 예를 하는 자들이 오히려 조부가 있던 사당에 부(祔)한다는 예문을 고집하는 것은 의의가 없는 듯하다. 그렇다고 마침내 예를 고쳐서 아버지 사당에 부한다면 또 애례존양(愛禮存羊)104) 의 뜻이 아닐 것이다.’ 하였으니, 이에 의거해 보면 이것은 폐할 수 없는 큰 절목인데 국제에는 없으니 아마도 강정해 행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태백산사고본】 1책 1권 17장 B면【국편영인본】 35책 373면
[註 047] 인혁(因革) : 옛것을 따름과 개혁함.[註 048] 취송(聚訟) : 서로 시비하여 결말이 나지 아니함.[註 049] 정문(情文) : 내용과 형식.[註 050] 개원(開元) : 당 현종(唐玄宗)의 연호.[註 051] 변제(變除) : 변복(變服) 공제(公除).[註 052] 통상(通喪) : 상하가 통행하는 상례로 삼년상을 이름.[註 053] 경화(更化) : 정치와 교화를 고치어 새롭게 함.[註 054] 사위(事爲) : 사업.[註 055] 여러 왕손(王孫) : 소현 세자(昭顯世子)의 세 아들. 인조 25년에 당시 강빈 사건(姜嬪事件:소현 세자의 음식에 독을 넣어 죽였다는 무고 사건)이 문제가 되어 그의 소생인 왕손 3형제를 제주도에 귀양보냈는데, 이때 장자 석철(石鐵)은 12세, 차자 석린(石麟)은 8세, 삼자 석견(石堅)은 4세였다.[註 056] 고명(顧命) : 임금이 죽을 때 후사를 부탁하는 유명(遺命).[註 057] 재생백(哉生魄) : 음력 16일.[註 058] 서언(誓言) : 유언.[註 059] 노침(路寢) : 정전(正殿).[註 060] 정종(正終) : 정전에서 죽음.[註 061] 복(復) : 초혼(招魂). 사람이 죽은 몇 시간 뒤에 망인이 입던 옷을 가지고 지붕에 올라가서 왼손으로 깃을 잡고 오른손으로 허리를 잡고서 아무(何某)는 복하라고 세 번 외친 다음 그 옷으로 시신을 덮음.[註 062] 《의례경전(儀禮經傳)》 : 주자(朱子)가 찬(撰)한 《의례경전통해(儀禮經傳通解)》로 원집(原集)이 37권이고 속집이 29권임.[註 063] 시사전(始死奠) : 고복(皋復)이 끝난 뒤에 올리는 전.[註 064] 항시(巷市) : 골목에서 시장을 보는 것. 국상이 나면 애도의 뜻으로 시장을 철거하기 때문에 필요한 생필품을 골목에서 구함.[註 065] 차길(借吉) : 상제의 몸으로 길례(吉禮) 때에 특별히 길복(吉服)을 입는 것.[註 066] 천시(遷尸) : 왕이 죽어 소렴, 대렴을 마친 뒤에 왕의 시신을 당(堂)으로 옮기는 것.[註 067] 설치(楔齒) : 반함(飯含)을 하기 전에 먼저 뿔 숟가락을 아래 위의 이(齒) 사이에 끼워 입이 다물어지지 않게 하는 것.[註 068] 철족(綴足) : 시신의 발이 뒤틀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발을 의자의 다리에 묶어 놓는 것.[註 069] 유당(帷堂) : 당상(堂上)에 유막(帷幕)을 설치한 상막(喪幕).[註 070] 각사(角柶) : 뿔로 만든 숟가락.[註 071] 연궤(燕几) : 편안한 의자.[註 072] 흔창(興鬯) : 왕의 시신을 목욕시키는 울창주(鬱鬯酒).[註 073] 사기(肆器) : 너비가 8척, 길이가 12척, 깊이가 3척인 얼음을 채운 통. 하절기에 시체의 부패를 방지하기 위하여 얼음을 채운 이 통을 시신에 넣어둠.[註 074] 권의(卷衣) : 곤룡포.[註 075] 금모(錦冒) : 시체를 싸는 비단 자루 습(襲) 이후와 소렴 이전에 시체를 싸둔다.[註 076] 보쇄(黼殺) : 시체를 싸는 도끼 무늬의 수를 놓은 천. 위를 싸는 것을 보라하고 아래를 싸는 것을 쇄라함.[註 077] 모질(冒質) : 금모(錦昌)의 윗부분이다..[註 078] 쇄(殺) : 금모의 아래 부분이다.[註 079] 반옥(飯玉) : 염할 때 죽은 사람의 입에 구슬을 물리는 것.[註 080] 반미(飯米) : 염할 때 죽은 사람의 일에 쌀을 물리는 것.[註 081] 막포(幕布) : 장막을 만드는 거친 베.[註 082] 온공(溫公) : 사마광(司馬光).[註 083] 습(襲) : 죽은 사람에게 좌임포(左衽袍)를 입히는 것.[註 084] 반함(飯含) : 염할 때 죽은 사람의 입에 쌀을 물리는 것.[註 085] 환질(環絰) : 성복 때 상제가 건(巾) 위에 덧씌워 쓰는 수절(首絰).[註 086] 위모(委貌) : 관명(冠名).[註 087] 금(衾) : 홑이불.[註 088] 계빈(啓殯) : 발인(發靷)할 때 출란(出棺)하기 위하여 빈소를 여는 것.[註 089] 진조조전(陳朝祖奠) : 발인할 때 죽은 사람이 종묘로 가서 마지막으로 조상을 보이고 하직 인사를 올리게 하고 곁들어 전을 올리는 것.[註 090] 문(免) : 갓을 벗고 한 치 너비의 베로 머리를 묶고 뒤로 늘어 뜨리는 것.[註 091] 산대(散帶) : 띠의 끝을 꼬지 않고 흐트려 놓은 것.[註 092] 조전(祖奠) : 발인에 앞서 출발을 알리는 전. 조는 행신(行神)을 뜻함.[註 093] 명(銘) : 명정.[註 094] 자리[菌] : 관 밑에 까는 자리로서 관과 함께 묻는다.[註 095] 중(重) : 우제(虞祭) 이전에는 신주가 없으므로 나무를 깎아 뜰 중앙에 세워 놓고 죽은 이의 혼신이 임시로 이 나무에 의지하게 하고 또 죽은 이의 필요한 물건들을 이 나무에 매달아 놓는다.[註 096] 피(披) : 관을 끄는 끈.[註 097] 우(虞) : 장사를 지내고 돌아와서 빈궁(殯宮)에 지내는 제사. 망인의 시체는 땅으로 돌아갔으나 정기(精氣)는 정처 없이 방황하므로 우제를 올려 혼신을 안정시킴.[註 098] 반곡(返哭) : 장사를 마치고 돌아와서 종묘에서 곡을 하며 슬픔을 다하는 것.[註 099] 실내(室內) : 종묘 안.[註 100] 부(祔) : 졸곡(卒哭)이 끝난 다음날, 새로 죽은 이의 신주(神主)를 소목(昭穆)의 서차에 따라 종묘에 모시는 것.[註 101] 명일(明日) : 졸곡(卒哭) 다음날.[註 102] 당(堂) : 사당.[註 103] 감실(龕室) : 종묘 안에 신주를 모셔 놓는 장.[註 104] 애례존양(愛禮存羊) : 예를 아껴 구례(舊禮) 또는 허례(虛禮)를 버리지 않고 보전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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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상고하건대, 시사전이 《오례의(五禮儀)》에는 염습한 뒤에 있는데 고례에는 복한 뒤에 즉시 설치하였다가 소렴(小斂)한 뒤에 비로소 철수한다 하였습니다. 대개 사람이 죽으면 혼기(魂氣)가 흩어지기 때문에 즉시 전(奠)을 설치하여 혼백이 의지하도록 하는 것이 자식의 정에 당연한 것이니 아마도 고례를 정례로 삼아야 할 듯합니다.
4. 계신민(戒臣民).
《의례경전(儀禮經傳)》에, ‘임금이 죽은 처음에 대복(大僕)이 계고(戒鼓)를 울려 사방에 전달한다.’ 하였고, ‘대종백(大宗伯)이 상상(上相)이 된다.’ 하였고, ‘호분씨(虎賁氏)가 왕문(王門)을 지킨다.’ 하였고, ‘대사도(大司徒)가 만민을 왕문으로 모아 부절(符節)이 없는 자는 천하를 돌아다니지 못하게 한다.’ 하였고, ‘천자가 죽으면 7일 동안 항시(巷市)064) 하고 제후가 죽으면 5일 동안 항시한다.’ 【단궁(檀弓).】 하였습니다.
《오례의(五禮儀)》 【대략 이와 같다.】 신이 상고하건대, 《오례의(五禮儀)》에는 졸곡(卒哭) 후에 가취(嫁娶)를 허락하여 3일 동안 차길(借吉)065) 한다 하여 조금도 차등이 없습니다. 살피건대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혼인에 관한 한 가지 일에 대해서 국상이 난 한 달 뒤에는 군민(軍民)에게, 세 달 뒤에는 사리(士吏)에게, 복토(復土)한 뒤에는 선인(選人)에게, 부묘(祔廟)한 뒤에는 승의랑(承議郞) 이하에게, 소상 뒤에는 조청 대부(朝請大夫) 이하에게, 대상 뒤에는 중대부(中大夫) 이하에게 혼인을 허락하여 각각 3일 동안 차길하고, 대중 대부 이상은 모두 담제(祭禫)를 지낸 뒤에 길례(吉禮)를 행하게 한다. 관계(官階)는 낮으나 차견(差遣)된 직사(職事)가 높은 자는 높은 쪽을 따르고, 벼슬을 옮긴 자는 새 관계를 따르고, 관계가 깎인 자는 옛 관계를 따른다.’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하면 고례와도 어그러지지 않고 금례(今禮)와도 방해됨이 없어 거의 시행할 수 있으니, 지금 이에 따라 대략 구별을 하는 것이 정례(情禮)에 합당할 것 같습니다. 5. 천시(遷尸)066) ·설치(楔齒)067) ·철족(綴足)068) ·유당(帷堂)069) . 《의례경전(儀禮經傳)》에, ‘사인(射人), 복인(僕人)이 천시한다.’ 하였고, ‘옥부(玉府)가 각사(角柶)070) 를 이바지한다.’ 하였고, ‘시신을 상(牀)으로 옮기고 염할 이불로 덮고 죽을 때 입었던 옷을 버리고서 소신(小臣)이 각사를 사용하여 상하의 이(齒)가 다물어지지 않도록 쐐기를 끼워놓는다. 철족에 연궤(燕几)071) 를 사용하는 것은 임금이나 대부나 동일하다.’ 【상대기(喪大記).】 하였고, ‘막인(幕人)이 유막(帷幕)과 평장(平帳)과 장막을 묶는 끈을 이바지한다.’ 하였습니다. 《오례의(五禮儀)》 【없다.】 신이 상고하건대, 이상의 네 조항은 모두 절실하여 없어서는 안 될 것들인데 우리 나라 제도에는 없으니 아마도 첨가해 보충해야 마땅할 것 같습니다. 6. 목욕 도구 설치[陳沐浴], 명의 입히기[襲明衣], 죽은 사람의 입에 쌀·구슬 따위를 넣는 것[飯含], 얼음을 담는 소반[氷盤] 등의 도구. 《의례경전(儀禮經傳)》에, ‘창인(鬯人)이 흔창(興鬯)072) 을 이바지한다.’ 하였고, ‘울인(鬱人)이 사기(肆器)073) 를 이바지한다.’ 하였고, ‘전사(典絲)가 실, 솜, 무늬 있는 비단 등의 물건을 이바지한다.’ 하였고, ‘공(公)을 염습하는 데는 권의(卷衣)074) 한 벌, 현단복(玄端服) 한 벌, 조복(朝服) 한 벌, 소적(素積) 한 벌, 훈상(纁裳) 한 벌, 작변(爵弁) 두 벌, 현면(玄冕) 한 벌, 포의(褒衣) 한 벌과 주록대(朱綠帶)이고, 다시 대대(大帶)를 몸 위에 걸쳐 놓는다.’ 【잡기.】 하였고, ‘임금의 금모(錦冒)075) ·보쇄(黼殺)076) 는 옆으로 일곱 군데를 묶는데, 모질(冒質)077) 의 길이는 손과 가지런하고 쇄(殺)078) 는 석 자[尺]이다. 【상대기.】 하였고, ‘저고리에는 반드시 치마가 있으니 그것을 한 벌이라 한다.’ 하였고, ‘능인(凌人)이 얼음을 채운 이반(夷盤)을 이바지한다.’ 하였고, ‘임금은 대반(大盤)을 설치하여 얼음을 채우고 상 위의 자리를 걷어 내고 베개만 둔다.’ 【상대기.】 하였고, ‘전서(典瑞)가 반옥(飯玉)079) 과 함옥(含玉)을 이바지한다.’ 하였고, ‘사인(舍人)이 반미(飯米)080) 를 이바지한다.’ 하였고, ‘천자는 구패(九貝)를 입에 넣고 제후는 칠패(七貝)를 넣는다.’ 【잡기.】 하였고, ‘함(含)하는 상(牀) 하나, 염습하는 상 하나, 시신을 당(堂)으로 옮기는데 또 하나의 상이 있는데 모두 베개와 자리가 있다. 이것은 임금이나 대부가 동일하다.’ 【상대기.】 하였고, ‘명의(明衣)의 치마는 막포(幕布)081) 로 만들고 소매는 온 폭(幅)으로 하고 길이는 무릎 밑까지 내려오며, 앞뒤 치마가 있는데 주름을 잡지 않고 길이는 발등까지 내려온다.’ 하였고, ‘포건(布巾)은 길이와 너비가 같다.’ 하였습니다. 《오례의(五禮儀)》 【사용하는 도구의 명목이 같지 않다.】 신이 상고하건대, 국제(國制)의 염습하는 도구 중 수관(首冠)에 대한 주(註)에 ‘만드는 것이 감두(頭)와 같은데 바로 복건(幅巾)이다.’ 하였으니, 감두는 우리 나라 세속에서 만드는 복건입니다. 온공(溫公)082) 과 주자가 쓴 복건의 형제(形制)가 같지 않은데 지금 합하여 한 물건으로 여기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리고 곤룡포를 입은 시신의 머리에 복건을 씌우는 것은 더욱 서로 어울리지 않으니, 만약 곤룡포를 사용한다면 고례를 따라 작변(爵弁)이나 현면(玄冕)을 사용하는 것이 타당할 듯하고 만약 꼭 복건을 사용하고자 하면 심의(深衣)를 사용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심의가 지금은 비록 야인(野人)의 옷이지만 황제(黃帝)로부터 이미 입었고, 그 뜻이 매우 깊어 규(規)·구(矩)·승(繩)·권(權)·형(衡) 등 다섯 가지 법이 들어 있기 때문에 성인께서도 입으셨고 선왕들께서도 귀하게 여겼습니다. 지금 염습하는 데 이미 복건과 대대(大帶)를 사용하였으니, 심의를 입히는 것도 불가함이 없을 듯합니다. 그리고 질쇄(質殺)는 바로 옛 제도로서 죽은 사람을 보호하는 데 매우 온당하고도 절실한 것인데 국제에는 그것이 없으니 첨가해 보충함이 마땅할 듯합니다. 7. 습(襲)083) ·반함(飯含)084) . 《의례경전(儀禮經傳)》에 ‘증자(曾子)가 말하기를 「부인의 옷으로 습하지 않는다.」 하였다.’ 【잡기(雜記).】 하였고, ‘제후는 일곱 벌, 공(公)은 아홉 벌이다.’ 하였고, ‘대축(大祝)이 반함(飯含)을 돕는다.’ 【춘관(春官).】 하였고, ‘태재(太宰)가 함옥(含玉)을 돕는다.’라고 한 주(注)에, ‘왕을 도와 하는 것이다.’ 【천관(天官).】 하였고, 《의례(儀禮)》의 ‘포건(布巾)은 길이와 너비를 같게 한다.’라고 한 주(注)에, ‘대부 이상은 빈(賓)이 한다.’ 하였는데, 그 소(疏)에 ‘대부 이상은 신하가 있으니 신하가 빈이 된다. 빈이 반함하는 것은 악취가 나올 것을 꺼리기 때문에 포건으로 얼굴을 덮고 입 부위에 구멍을 뚫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오례의(五禮儀)》 【반함은 습전(襲奠) 뒤에 있는데 내시가 거행한다.】 신이 상고하건대, 예에 ‘반함하는 것은 죽었다 하여 차마 입을 비게 하지 않는 것이다.’ 하였으니 봉양의 뜻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례에는 혹 왕이 친히 하기도 하고 빈이 하기도 하였는데 지금은 내시를 사용하여 시키니 매우 설만(褻慢)한 듯합니다. 왕이 친히 하는 것이 실로 정례(情禮)에 부합됩니다. 8. 환질(環絰)085) 을 갖추는 것. 《의례경전(儀禮經傳)》에 ‘소렴을 마치고는 머리에 질(絰)을 두르는데 공과 대부가 동일하다.’라고 한 소(疏)에, ‘어버이가 죽으면 효자는 갓을 벗는다. 그러나 소렴 때에 이르러서는 머리에 수식(首飾)이 없을 수 없다. 사(士)는 흰 위모(委貌)086) 를 쓰고 대부 이상은 소변(素弁)을 쓰니 귀천이 모두 머리에 환질(環絰)을 두를 수 있다.’ 하였는데, 구씨(丘氏)는 ‘이것을 살펴보면 수질(首絰) 밑에 반드시 건모(巾帽)가 있어 수질을 받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위모와 작변(爵弁)의 종류가 지금 세상에는 없으니 백포건(白布巾)을 사용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고, ‘환질은 삼[麻] 한 가닥으로 감는 것이다.’ 하였고, ‘염이 끝난 뒤에는 소관(素冠)을 벗어 버린다.’ 【상소기(喪小記)의 주(註).】 하였습니다. 《오례의(五禮儀)》 【없다.】 신이 상고하건대, 처음 죽었을 때에는 시체가 복식(服飾)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효자가 머리를 풀어뜨리고 상사에 임하지만 소렴을 하는 데 이르러서는 시체에 이미 복식을 하였으므로 효자도 수식이 없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환질과 소변(素弁)을 갖추는 것인데 국제(國制)에는 없으니 고례로써 첨가해 보충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9. 대렴(大斂). 《의례경전(儀禮經傳)》에, ‘임금은 장차 대렴하려 할 때에 아들은 소변 위에 수질을 두르고서 동서(東序) 남단의 자리로 나아가고, 경대부는 당(堂)의 모서리 기둥 서쪽 자리로 나아가 북쪽을 향하는데 동쪽을 상(上)으로 하고, 부형(父兄)은 당 밑에서 북쪽을 향하고, 부인(夫人)·명부(命婦)는 시체의 서쪽에서 동쪽을 향하고, 외종(外宗)은 방 안에서 남쪽을 향하고, 소신(小臣)은 자리를 펴고, 상축(商祝)은 교금(絞紟), 금(衾)087) , 옷 등을 펴놓고, 사(士)는 소반 위에 있는 물에 손을 씻고서 시신을 들어다가 염(斂)하는 곳에 옮겨놓는다. 염이 끝난 다음 태재(太宰)가 염이 끝났음을 고하면 아들이 시신에 기대어 곡용(哭踊)하고 부인도 동쪽을 향하여 역시 그렇게 한다.’ 【상대기.】 하였습니다. 《오례의(五禮儀)》 【대략 같은데 전(奠)이 있고, 또 질쇄(質殺)가 이때에 와서 비로소 사용된다.】 신이 상고하건대, 고례에는 대렴과 성빈(成殯)을 합쳐 한 번의 전을 올리는데 빈을 한 뒤에 비로소 전을 베푼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국제에는 대렴과 성빈에 각기 전을 베푸니 아마도 고례를 따르는 것을 정례(正禮)로 삼아야 마땅할 듯합니다. 그리고 또 질쇄는 바로 시체에 옷을 입힐 때 사용하는 것인데 국제에는 이때에 와서 비로소 사용하니 아마도 고례의 뜻이 아닌 듯합니다. 10. 성복(成服). 《의례경전(儀禮經傳)》에, ‘임금의 상에는 3일 뒤에 아들과 부인이 장(杖)을 짚고 5일 뒤 빈소를 마치고서 대부, 세부(世婦)에게 상장을 준다.’ 【상대기.】 하였고, ‘천자가 죽으면 3일 만에 축(祝)이 먼저 복을 입고, 5일 만에 관장(官長)이 복을 입고, 7일 만에 국중(國中)의 남녀가 복을 입고, 석달 만에 천하가 복을 입는다.’ 【단궁(檀弓).】 하였고, ‘사사(肆師)가 외내(外內) 명남녀(命男女)의 상복이 법에 맞지 않는 자를 금한다.’ 【춘관(春官).】 하였고, 주자가 말하기를, ‘참최 3년은 아비와 임금을 위하여 입는 복이다. 그 복은 포관(布冠), 포삼(布杉)에 벽령(辟領), 부판(負版)을 단 최복(衰服)과 엄임(掩衽), 친삼(襯杉), 포군(布君)을 입고 마(麻)로 만든 요질(腰絰), 수질(首絰), 마대(麻帶)를 두르고 짚신을 신고 죽장(竹杖)을 짚는데 천자로부터 서인에 이르기까지 신분의 귀천으로써 증손(增損)하는 바가 없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임금과 신하의 복이 같으나 약간의 구별을 하여 상하를 분별한다. 13개월 만에 연복(練服)을 입고서 소상(小祥)을 지내고 25개월 만에 난복(襴襆)을 하고서 담제(禫祭)를 지내고 27개월 만에 조복을 입고서 상을 벗는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초상(初喪) 때는 마땅히 고례에 따라 상복을 지어 입고서 상에 임하고, 따로 포(布)로 복두(幞頭), 공복(公服), 혁대(革帶)를 만들어 착용하고서 조회하는 것이 예에 합당하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예에 임금의 상사에 달관(達官)의 장(長)들은 죽장(竹杖)을 짚는다 하였는데, 이른바 달관이란 일을 전담하여 임금께 주달(奏達)할 수 있는 관원을 이름이다. 오늘에 있어서는 안으로 성(省)·조(曹)·시(寺)·감(監)의 장관과 밖으로는 감사·군수 등으로서 모든 사(司)의 장과 일찍이 시종(侍從) 이상의 관직을 역임하여 전담해서 일을 주달했던 이들이 바로 달관이다. 그러므로 지금 상장을 짚지 않는 제도를 요좌(僚佐) 이하에게 시행한다면 가하지만 심지어는 그 장관들로 하여금 아랫사람과 함께 상장을 짚지 않게 하고 있는데, 비록 지난날 정승과 장수를 지낸 사람이 벼슬하지 않고 집에 있다 할지라도 다른 것이 없게 한다면 어찌 박하지 아니한가.’ 하였고, 또 말하기를, ‘전에 보니 효종(孝宗)께서는 장사를 지낸 뒤에도 오히려 백포의관(白布衣冠)으로 조회를 보셨으니 이는 매우 성대한 덕이다. 전세에는 임금이 스스로 복을 입지 않았기 때문에 고례를 행할 수 없었던 것이지만, 당시에는 이런 좋은 기회가 있었는데도 유신(儒臣)과 예관(禮官)이 이룩해 밝혀서 1대의 제도로 만들지 못하여 드디어 임금은 위에서 복을 입는데 신하들은 아래에서 복을 벗게 하여 잘못을 인습하였으니 매우 통한스럽다.’ 하였습니다. 《오례의(五禮儀)》에는, ‘종친과 문무 백관은 단령의(團領衣)에 베[布]로 싼 사모를 쓰고 마대(麻帶)를 매고 백피화(白皮靴)를 신었다가 졸곡(卒哭) 뒤에는 백의(白衣)에 오사모(烏紗帽)를 쓰고 흑각대(黑角帶)를 띤다. 모든 상사에는 최복을 입고 연제(練祭) 때에는 연포(練布)로 사모를 싼다.’ 하였습니다. 신이 상고하건대, 《오례의(五禮儀)》의 복제(服制)는 매우 윤서(倫緖)가 없습니다. 대체로 임금과 아비는 일체인데 어찌 아비에 대해서는 순전히 상복을 사용하고 임금에 대해서는 조복의 제도를 섞어 사용하여 반은 높이고 반은 낮추는 의전(儀典)이 있겠습니까. 그리고 또 전함(前銜)은 지금은 비록 관직이 없다 하더라도 그의 이름이 이미 사적(仕籍)에 있으니 실로 관직에 있는 자와 조금도 다를 것이 없는데 사인(士人)과 함께 백의를 입는 제도는 더더욱 옳지 않습니다. 일찍이 상고하건대 송 영종(宋寧宗) 초기에 천자는 칠사천황복(漆紗淺黃服)을 입었는데 신하들은 이미 역월(易月)했다 하여 복을 입지 않으니, 주자가 차자를 올려 이미 지난 실수는 뒤에 와서 고칠 수 없거니와 앞으로 계빈(啓殯)088) 하여 발인(發靷)할 때는 마땅히 다시 초상 때의 상복을 착용해야 된다고 하였습니다. 지난해에 지평 민순(閔純)이 헌의(獻議)하여 《오례의(五禮儀)》를 고치어 너무 심한 것을 약간 제거하였으니, 신이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신의 이 건의를 예관에게 내리시어 한결같이 주자가 손익한 제도를 따라 속히 지휘하여 백관으로 하여금 미리 최복을 준비하였다가 발인할 때에 입고서 들어와 임하도록 하고, 지금 입고 있는 단령은 그 끝을 꿰매어 입고 포모(布帽)와 포로 싼 각대(角帶)와 백화(白靴)로써 일을 볼 때 입는 복장으로 삼게 하소서. 그리고 전함들에게도 이때 다시 성복(成服)하게 하면 사의(事宜)에 합당할 것 같습니다. 11. 조석전(朝夕奠). 《의례경전(儀禮經傳)》에, ‘사복(司服)이 전(奠)드릴 때 입는 의복을 이바지한다.’ 【춘관.】 하였습니다. 《오례의(五禮儀)》 【배례(拜禮)가 없다.】 신이 상고하건대, 고례는 다만 대개만을 들었을 뿐, 배례(拜禮)의 절목은 말하지 않았습니다. 《주자가례(朱子家禮)》에 성복(成服) 전의 대소렴전(大小斂奠)에는 모두 효자(孝子)의 배례를 말하지 않고 성복 후에서야 비로소 주인 이하의 재배를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국제에는 없으니 아마도 주자의 설을 따르는 것이 무방할 듯합니다. 12. 진조조전(陳朝祖奠)089) 《의례경전(儀禮經傳)》에, ‘내수(內竪)는 상기(喪紀)의 일이 있을 때이면 내인(內人)들을 벽제(辟除)한다.’ 하였고, ‘세부(世婦)가 여궁(女宮)을 거느리고서 자성(粢盛)을 씻어 제기(祭器)에 담는다.’ 하였습니다. 《오례의(五禮儀)》 【조조(朝祖)와 전(奠)이 없다.】 신이 상고하건대, 예(禮)에 ‘상구(喪柩)를 조상의 종묘로 옮겨 망인(亡人)이 조상을 뵙게 하는 것은 망인의 효심을 따르는 것이니 망인의 처지에서 보면 평소 거처하던 침실을 떠나는 것이 슬프다. 그러므로 조고(祖考)의 종묘에 가서 결별하고서 떠나는 것이다.’ 하였으니, 이는 진실로 예의 큰 절목으로서 폐할 수 없는 것인데 국제에는 없으니 아마도 강구해 행해야 될 듯합니다. 그리고 이어 정제(定制)로 삼으시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13. 계(啓). 《의례경전(儀禮經傳)》에, ‘상축(喪祝)이 계한다.’ 하였고, ‘장부(丈夫)는 문(免)090) 하고 부인은 복머리[髽]를 하고 산대(散帶)091) 를 드리우고서 자리로 나아간다.’ 하였고, ‘계하는 새벽에는 외내가 모두 곡하지 않는다.’ 【기(記).】 하였습니다. 《오례의(五禮儀)》 【변복(變服)하는 절차가 없다.】 신이 상고하건대, 계빈(啓殯)은 시구(尸柩)를 뵙는 것이므로 소렴 때처럼 변복하는 것입니다. 이는 큰 절목인데 국제에는 없으니 고례를 따르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14. 조전(祖奠)092) . 《의례경전(儀禮經傳)》에, ‘조전에 깔 건석(巾席)을 걷고서 서쪽에서 기다리면 주인은 허리를 굽히고서 올라가고 부인은 뛰면서[踊] 내려간다. 주인이 단(袒)하면 상축(商祝)이 상구(喪柩)를 실은 수레를 어거하여 출발해 조금 가다가 멈춘다. 주인은 뛰면서 단했던 옷소매를 바르게 입고서 상구를 실은 수레 앞으로 가서 상구의 남쪽을 수레에 묶고, 부인은 내려와서 섬돌 사이의 위치로 나아간다. 떠나가는 데는[祖] 순서가 있기 때문에 수레는 방향을 틀지만 음식을 차려놓았던 그릇은 방향을 돌리지 않는다. 축(祝)이 명(銘)093) 을 가져다가 자리[菌]094) 위에 놓으면 두 사람이 중(重)095) 의 왼쪽을 돌아 나아가서 자리를 펴고 조전을 앞서와 같이 행한다. 그러면 주인은 허리를 굽히고서 말을 바치기를[薦馬] 앞서와 같이 한다. 빈(賓)이 나아가면 주인이 전송한다.’ 하였고, 《예기(禮記)》에, ‘뜰에서 조전을 행한다.’ 【상례의(喪禮儀)에 자세히 보인다.】 하였고, ‘상구를 실은 수레가 출발하여 조금 가다가 멈추는데 수레의 방향은 돌리지만 위치는 바뀌지 않고, 곁에서 네 사람이 피(披)096) 를 잡는다.’ 【본경(本經)의 기록이다.】 하였고, ‘축(祝)이 조전의 제찬(祭饌)을 주인의 남쪽에 있는 수레[輅] 앞에 북쪽을 상(上)으로 하여 차려 놓고서 보자기로 덮는다.’ 【상동(上同).】 하였습니다. 《오례의(五禮儀)》 【대략 같다.】 신이 상고하건대, 국제(國制)에 비록 이 의전(儀典)이 있으나 이미 조조(朝祖)에 관한 절목이 없으므로 이 의전을 빈전(殯殿)에서 시행하고서 그대로 발인하니 매우 먼 길을 가는데 가까운 데서부터 점진적으로 나아가는 뜻이 아닙니다. 고례에는 조조의 의전이 있고, 이어 조전(祖奠)을 묘정(廟庭)에서 행하고, 이튿날 새벽에 견전(遣奠)을 행하고서 발인합니다. 발인 절차는 《의례(儀禮)》에 자세히 나타나 있습니다. 15. 우(虞)097) 《의례경전(儀禮經傳)》에, ‘제후는 칠우(七虞)이다.’ 하였습니다. 《오례의(五禮儀)》 【반우의(返虞儀)가 있다.】 신이 상고하건대, 예에 ‘정오에 우제(虞祭)를 지낸다. 길이 먼 경우에는 무덤에서 우제를 행한다.’ 하였으니, 반우(返虞)한다는 글에 구애될 필요가 없을 듯합니다. 16. 반곡(返哭)098) 《의례경전(儀禮經傳)》에, ‘반곡하는 사람은 서계(西階)로 올라가 동쪽을 향하고 주인은 당하(堂下)에서 동쪽을 향해 서는데 북쪽을 상(上)으로 한다. 부인은 들어가고 대부는 뛰면서[踊] 조계(阼階)로 올라간다. 주부는 실내(室內)099) 로 들어간다.’ 하였습니다. 《오례의(五禮儀)》 【없다.】 신이 상고하건대, 예에 ‘반곡하여 조문(吊問)하는 것은 슬픔이 지극한 것이다. 돌아왔으나 어버이는 이미 죽어 없어져서 어버이를 잃었으니 이때를 당하여 슬픔이 지극하다.’ 하였고, 주자가 말하기를, ‘반곡하려고 당(堂)으로 오르는 것은 돌아간 어버이가 평소 예를 행하였던 곳으로 돌아가는 것이고, 주부가 실(室)로 들어가는 것은 죽은 어버이가 평소 궤양(饋養)했던 곳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 의사를 안다면 이른바 그가 밟던 자리를 밟고 그가 행하던 예를 행하는 등의 일이 자연스럽게 행해져서 바야흐로 계지(繼志)·술사(述事)의 일을 알게 될 것이다.’ 하였습니다. 이 한 절목을 빠뜨려서는 안 될 것 같은데 국제에는 없으니 고례를 따르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17. 조석전(朝夕奠)을 파함. 신이 상고하건대, 이 한 절목은 초우(初虞) 뒤에 있어야 하는데 《의례경전(儀禮經傳)》이나 국제에 나오는 글이 없으므로 신이 삼가 《가례(家禮)》에서 따다가 보충하였습니다. 18. 부(祔)100) 《의례경전(儀禮經傳)》에, ‘명일(明日)101) 에 신주(神主)를 소목(昭穆)의 반차(班次)에 따라 종묘에 모신다.’ 【사우(士虞).】 하였고, ‘명일 조부(祖父)의 신주를 다른 사당으로 옮기고 새로 죽은 이의 신주를 조부의 신주가 있던 곳에 모신다. 상제(喪祭)가 변하여 길제(吉祭)로 가고 부묘(祔廟)하는 데는 반드시 하루를 띄우지 않고 이 날에 접속해서 행한다.’ 【예기.】 하였고, ‘부제(祔祭) 때는 상장(喪杖)을 짚고서 당(堂)102) 에 오르지 않는다.’ 【상소기(喪小記).】 하였고, 주자가 말하기를, ‘선왕(先王)께서 예를 제정한 것은 본래 인정에 따른 것이니 길흉의 사이에 변하는 것이 순서가 있다. 그러므로 처음 죽었을 때는 오로지 생존한 분을 섬기는 예를 쓰고 졸곡(卒哭)과 부묘(祔廟)를 마친 뒤에야 신(神)으로 섬긴다. 그러나 차마 다 변경할 수 없기 때문에 신주를 다시 정침(正寢)으로 모셔다가 생존한 분을 섬기는 예로 섬기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오례의(五禮儀)》 【없다.】 신이 상고하건대, 주자가 말하기를 ‘새로 죽은 분을 조부의 사당에 부(祔)하는 것은 조부에게 다른 사당으로 옮긴다는 것을 고하고 새로 죽은 분에게 이 사당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고하는 순서이다. 그런데 지금은 공실(公室)이나 사가(私家)의 묘(廟)에 모두 한 사당 안에 감실(龕室)103) 만을 달리하고 서쪽을 상(上)으로 하는 제도만이 있고 다시 좌소(左昭), 우목(右穆)의 반차(班次)가 없다. 그러므로 체천(遞遷)할 경우가 생기면 모든 감실을 다 옮기고 새로 죽은 이가 그 아버지가 있던 감실로 들어간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예의 큰 절목으로서 고례와 같지 않다. 그런데 예를 하는 자들이 오히려 조부가 있던 사당에 부(祔)한다는 예문을 고집하는 것은 의의가 없는 듯하다. 그렇다고 마침내 예를 고쳐서 아버지 사당에 부한다면 또 애례존양(愛禮存羊)104) 의 뜻이 아닐 것이다.’ 하였으니, 이에 의거해 보면 이것은 폐할 수 없는 큰 절목인데 국제에는 없으니 아마도 강정해 행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태백산사고본】 1책 1권 17장 B면【국편영인본】 35책 373면
[註 047] 인혁(因革) : 옛것을 따름과 개혁함.[註 048] 취송(聚訟) : 서로 시비하여 결말이 나지 아니함.[註 049] 정문(情文) : 내용과 형식.[註 050] 개원(開元) : 당 현종(唐玄宗)의 연호.[註 051] 변제(變除) : 변복(變服) 공제(公除).[註 052] 통상(通喪) : 상하가 통행하는 상례로 삼년상을 이름.[註 053] 경화(更化) : 정치와 교화를 고치어 새롭게 함.[註 054] 사위(事爲) : 사업.[註 055] 여러 왕손(王孫) : 소현 세자(昭顯世子)의 세 아들. 인조 25년에 당시 강빈 사건(姜嬪事件:소현 세자의 음식에 독을 넣어 죽였다는 무고 사건)이 문제가 되어 그의 소생인 왕손 3형제를 제주도에 귀양보냈는데, 이때 장자 석철(石鐵)은 12세, 차자 석린(石麟)은 8세, 삼자 석견(石堅)은 4세였다.[註 056] 고명(顧命) : 임금이 죽을 때 후사를 부탁하는 유명(遺命).[註 057] 재생백(哉生魄) : 음력 16일.[註 058] 서언(誓言) : 유언.[註 059] 노침(路寢) : 정전(正殿).[註 060] 정종(正終) : 정전에서 죽음.[註 061] 복(復) : 초혼(招魂). 사람이 죽은 몇 시간 뒤에 망인이 입던 옷을 가지고 지붕에 올라가서 왼손으로 깃을 잡고 오른손으로 허리를 잡고서 아무(何某)는 복하라고 세 번 외친 다음 그 옷으로 시신을 덮음.[註 062] 《의례경전(儀禮經傳)》 : 주자(朱子)가 찬(撰)한 《의례경전통해(儀禮經傳通解)》로 원집(原集)이 37권이고 속집이 29권임.[註 063] 시사전(始死奠) : 고복(皋復)이 끝난 뒤에 올리는 전.[註 064] 항시(巷市) : 골목에서 시장을 보는 것. 국상이 나면 애도의 뜻으로 시장을 철거하기 때문에 필요한 생필품을 골목에서 구함.[註 065] 차길(借吉) : 상제의 몸으로 길례(吉禮) 때에 특별히 길복(吉服)을 입는 것.[註 066] 천시(遷尸) : 왕이 죽어 소렴, 대렴을 마친 뒤에 왕의 시신을 당(堂)으로 옮기는 것.[註 067] 설치(楔齒) : 반함(飯含)을 하기 전에 먼저 뿔 숟가락을 아래 위의 이(齒) 사이에 끼워 입이 다물어지지 않게 하는 것.[註 068] 철족(綴足) : 시신의 발이 뒤틀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발을 의자의 다리에 묶어 놓는 것.[註 069] 유당(帷堂) : 당상(堂上)에 유막(帷幕)을 설치한 상막(喪幕).[註 070] 각사(角柶) : 뿔로 만든 숟가락.[註 071] 연궤(燕几) : 편안한 의자.[註 072] 흔창(興鬯) : 왕의 시신을 목욕시키는 울창주(鬱鬯酒).[註 073] 사기(肆器) : 너비가 8척, 길이가 12척, 깊이가 3척인 얼음을 채운 통. 하절기에 시체의 부패를 방지하기 위하여 얼음을 채운 이 통을 시신에 넣어둠.[註 074] 권의(卷衣) : 곤룡포.[註 075] 금모(錦冒) : 시체를 싸는 비단 자루 습(襲) 이후와 소렴 이전에 시체를 싸둔다.[註 076] 보쇄(黼殺) : 시체를 싸는 도끼 무늬의 수를 놓은 천. 위를 싸는 것을 보라하고 아래를 싸는 것을 쇄라함.[註 077] 모질(冒質) : 금모(錦昌)의 윗부분이다..[註 078] 쇄(殺) : 금모의 아래 부분이다.[註 079] 반옥(飯玉) : 염할 때 죽은 사람의 입에 구슬을 물리는 것.[註 080] 반미(飯米) : 염할 때 죽은 사람의 일에 쌀을 물리는 것.[註 081] 막포(幕布) : 장막을 만드는 거친 베.[註 082] 온공(溫公) : 사마광(司馬光).[註 083] 습(襲) : 죽은 사람에게 좌임포(左衽袍)를 입히는 것.[註 084] 반함(飯含) : 염할 때 죽은 사람의 입에 쌀을 물리는 것.[註 085] 환질(環絰) : 성복 때 상제가 건(巾) 위에 덧씌워 쓰는 수절(首絰).[註 086] 위모(委貌) : 관명(冠名).[註 087] 금(衾) : 홑이불.[註 088] 계빈(啓殯) : 발인(發靷)할 때 출란(出棺)하기 위하여 빈소를 여는 것.[註 089] 진조조전(陳朝祖奠) : 발인할 때 죽은 사람이 종묘로 가서 마지막으로 조상을 보이고 하직 인사를 올리게 하고 곁들어 전을 올리는 것.[註 090] 문(免) : 갓을 벗고 한 치 너비의 베로 머리를 묶고 뒤로 늘어 뜨리는 것.[註 091] 산대(散帶) : 띠의 끝을 꼬지 않고 흐트려 놓은 것.[註 092] 조전(祖奠) : 발인에 앞서 출발을 알리는 전. 조는 행신(行神)을 뜻함.[註 093] 명(銘) : 명정.[註 094] 자리[菌] : 관 밑에 까는 자리로서 관과 함께 묻는다.[註 095] 중(重) : 우제(虞祭) 이전에는 신주가 없으므로 나무를 깎아 뜰 중앙에 세워 놓고 죽은 이의 혼신이 임시로 이 나무에 의지하게 하고 또 죽은 이의 필요한 물건들을 이 나무에 매달아 놓는다.[註 096] 피(披) : 관을 끄는 끈.[註 097] 우(虞) : 장사를 지내고 돌아와서 빈궁(殯宮)에 지내는 제사. 망인의 시체는 땅으로 돌아갔으나 정기(精氣)는 정처 없이 방황하므로 우제를 올려 혼신을 안정시킴.[註 098] 반곡(返哭) : 장사를 마치고 돌아와서 종묘에서 곡을 하며 슬픔을 다하는 것.[註 099] 실내(室內) : 종묘 안.[註 100] 부(祔) : 졸곡(卒哭)이 끝난 다음날, 새로 죽은 이의 신주(神主)를 소목(昭穆)의 서차에 따라 종묘에 모시는 것.[註 101] 명일(明日) : 졸곡(卒哭) 다음날.[註 102] 당(堂) : 사당.[註 103] 감실(龕室) : 종묘 안에 신주를 모셔 놓는 장.[註 104] 애례존양(愛禮存羊) : 예를 아껴 구례(舊禮) 또는 허례(虛禮)를 버리지 않고 보전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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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상고하건대, 《오례의(五禮儀)》에는 졸곡(卒哭) 후에 가취(嫁娶)를 허락하여 3일 동안 차길(借吉)065) 한다 하여 조금도 차등이 없습니다. 살피건대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혼인에 관한 한 가지 일에 대해서 국상이 난 한 달 뒤에는 군민(軍民)에게, 세 달 뒤에는 사리(士吏)에게, 복토(復土)한 뒤에는 선인(選人)에게, 부묘(祔廟)한 뒤에는 승의랑(承議郞) 이하에게, 소상 뒤에는 조청 대부(朝請大夫) 이하에게, 대상 뒤에는 중대부(中大夫) 이하에게 혼인을 허락하여 각각 3일 동안 차길하고, 대중 대부 이상은 모두 담제(祭禫)를 지낸 뒤에 길례(吉禮)를 행하게 한다. 관계(官階)는 낮으나 차견(差遣)된 직사(職事)가 높은 자는 높은 쪽을 따르고, 벼슬을 옮긴 자는 새 관계를 따르고, 관계가 깎인 자는 옛 관계를 따른다.’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하면 고례와도 어그러지지 않고 금례(今禮)와도 방해됨이 없어 거의 시행할 수 있으니, 지금 이에 따라 대략 구별을 하는 것이 정례(情禮)에 합당할 것 같습니다.
5. 천시(遷尸)066) ·설치(楔齒)067) ·철족(綴足)068) ·유당(帷堂)069) .
《의례경전(儀禮經傳)》에, ‘사인(射人), 복인(僕人)이 천시한다.’ 하였고, ‘옥부(玉府)가 각사(角柶)070) 를 이바지한다.’ 하였고, ‘시신을 상(牀)으로 옮기고 염할 이불로 덮고 죽을 때 입었던 옷을 버리고서 소신(小臣)이 각사를 사용하여 상하의 이(齒)가 다물어지지 않도록 쐐기를 끼워놓는다. 철족에 연궤(燕几)071) 를 사용하는 것은 임금이나 대부나 동일하다.’ 【상대기(喪大記).】 하였고, ‘막인(幕人)이 유막(帷幕)과 평장(平帳)과 장막을 묶는 끈을 이바지한다.’ 하였습니다.
《오례의(五禮儀)》 【없다.】 신이 상고하건대, 이상의 네 조항은 모두 절실하여 없어서는 안 될 것들인데 우리 나라 제도에는 없으니 아마도 첨가해 보충해야 마땅할 것 같습니다. 6. 목욕 도구 설치[陳沐浴], 명의 입히기[襲明衣], 죽은 사람의 입에 쌀·구슬 따위를 넣는 것[飯含], 얼음을 담는 소반[氷盤] 등의 도구. 《의례경전(儀禮經傳)》에, ‘창인(鬯人)이 흔창(興鬯)072) 을 이바지한다.’ 하였고, ‘울인(鬱人)이 사기(肆器)073) 를 이바지한다.’ 하였고, ‘전사(典絲)가 실, 솜, 무늬 있는 비단 등의 물건을 이바지한다.’ 하였고, ‘공(公)을 염습하는 데는 권의(卷衣)074) 한 벌, 현단복(玄端服) 한 벌, 조복(朝服) 한 벌, 소적(素積) 한 벌, 훈상(纁裳) 한 벌, 작변(爵弁) 두 벌, 현면(玄冕) 한 벌, 포의(褒衣) 한 벌과 주록대(朱綠帶)이고, 다시 대대(大帶)를 몸 위에 걸쳐 놓는다.’ 【잡기.】 하였고, ‘임금의 금모(錦冒)075) ·보쇄(黼殺)076) 는 옆으로 일곱 군데를 묶는데, 모질(冒質)077) 의 길이는 손과 가지런하고 쇄(殺)078) 는 석 자[尺]이다. 【상대기.】 하였고, ‘저고리에는 반드시 치마가 있으니 그것을 한 벌이라 한다.’ 하였고, ‘능인(凌人)이 얼음을 채운 이반(夷盤)을 이바지한다.’ 하였고, ‘임금은 대반(大盤)을 설치하여 얼음을 채우고 상 위의 자리를 걷어 내고 베개만 둔다.’ 【상대기.】 하였고, ‘전서(典瑞)가 반옥(飯玉)079) 과 함옥(含玉)을 이바지한다.’ 하였고, ‘사인(舍人)이 반미(飯米)080) 를 이바지한다.’ 하였고, ‘천자는 구패(九貝)를 입에 넣고 제후는 칠패(七貝)를 넣는다.’ 【잡기.】 하였고, ‘함(含)하는 상(牀) 하나, 염습하는 상 하나, 시신을 당(堂)으로 옮기는데 또 하나의 상이 있는데 모두 베개와 자리가 있다. 이것은 임금이나 대부가 동일하다.’ 【상대기.】 하였고, ‘명의(明衣)의 치마는 막포(幕布)081) 로 만들고 소매는 온 폭(幅)으로 하고 길이는 무릎 밑까지 내려오며, 앞뒤 치마가 있는데 주름을 잡지 않고 길이는 발등까지 내려온다.’ 하였고, ‘포건(布巾)은 길이와 너비가 같다.’ 하였습니다. 《오례의(五禮儀)》 【사용하는 도구의 명목이 같지 않다.】 신이 상고하건대, 국제(國制)의 염습하는 도구 중 수관(首冠)에 대한 주(註)에 ‘만드는 것이 감두(頭)와 같은데 바로 복건(幅巾)이다.’ 하였으니, 감두는 우리 나라 세속에서 만드는 복건입니다. 온공(溫公)082) 과 주자가 쓴 복건의 형제(形制)가 같지 않은데 지금 합하여 한 물건으로 여기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리고 곤룡포를 입은 시신의 머리에 복건을 씌우는 것은 더욱 서로 어울리지 않으니, 만약 곤룡포를 사용한다면 고례를 따라 작변(爵弁)이나 현면(玄冕)을 사용하는 것이 타당할 듯하고 만약 꼭 복건을 사용하고자 하면 심의(深衣)를 사용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심의가 지금은 비록 야인(野人)의 옷이지만 황제(黃帝)로부터 이미 입었고, 그 뜻이 매우 깊어 규(規)·구(矩)·승(繩)·권(權)·형(衡) 등 다섯 가지 법이 들어 있기 때문에 성인께서도 입으셨고 선왕들께서도 귀하게 여겼습니다. 지금 염습하는 데 이미 복건과 대대(大帶)를 사용하였으니, 심의를 입히는 것도 불가함이 없을 듯합니다. 그리고 질쇄(質殺)는 바로 옛 제도로서 죽은 사람을 보호하는 데 매우 온당하고도 절실한 것인데 국제에는 그것이 없으니 첨가해 보충함이 마땅할 듯합니다. 7. 습(襲)083) ·반함(飯含)084) . 《의례경전(儀禮經傳)》에 ‘증자(曾子)가 말하기를 「부인의 옷으로 습하지 않는다.」 하였다.’ 【잡기(雜記).】 하였고, ‘제후는 일곱 벌, 공(公)은 아홉 벌이다.’ 하였고, ‘대축(大祝)이 반함(飯含)을 돕는다.’ 【춘관(春官).】 하였고, ‘태재(太宰)가 함옥(含玉)을 돕는다.’라고 한 주(注)에, ‘왕을 도와 하는 것이다.’ 【천관(天官).】 하였고, 《의례(儀禮)》의 ‘포건(布巾)은 길이와 너비를 같게 한다.’라고 한 주(注)에, ‘대부 이상은 빈(賓)이 한다.’ 하였는데, 그 소(疏)에 ‘대부 이상은 신하가 있으니 신하가 빈이 된다. 빈이 반함하는 것은 악취가 나올 것을 꺼리기 때문에 포건으로 얼굴을 덮고 입 부위에 구멍을 뚫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오례의(五禮儀)》 【반함은 습전(襲奠) 뒤에 있는데 내시가 거행한다.】 신이 상고하건대, 예에 ‘반함하는 것은 죽었다 하여 차마 입을 비게 하지 않는 것이다.’ 하였으니 봉양의 뜻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례에는 혹 왕이 친히 하기도 하고 빈이 하기도 하였는데 지금은 내시를 사용하여 시키니 매우 설만(褻慢)한 듯합니다. 왕이 친히 하는 것이 실로 정례(情禮)에 부합됩니다. 8. 환질(環絰)085) 을 갖추는 것. 《의례경전(儀禮經傳)》에 ‘소렴을 마치고는 머리에 질(絰)을 두르는데 공과 대부가 동일하다.’라고 한 소(疏)에, ‘어버이가 죽으면 효자는 갓을 벗는다. 그러나 소렴 때에 이르러서는 머리에 수식(首飾)이 없을 수 없다. 사(士)는 흰 위모(委貌)086) 를 쓰고 대부 이상은 소변(素弁)을 쓰니 귀천이 모두 머리에 환질(環絰)을 두를 수 있다.’ 하였는데, 구씨(丘氏)는 ‘이것을 살펴보면 수질(首絰) 밑에 반드시 건모(巾帽)가 있어 수질을 받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위모와 작변(爵弁)의 종류가 지금 세상에는 없으니 백포건(白布巾)을 사용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고, ‘환질은 삼[麻] 한 가닥으로 감는 것이다.’ 하였고, ‘염이 끝난 뒤에는 소관(素冠)을 벗어 버린다.’ 【상소기(喪小記)의 주(註).】 하였습니다. 《오례의(五禮儀)》 【없다.】 신이 상고하건대, 처음 죽었을 때에는 시체가 복식(服飾)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효자가 머리를 풀어뜨리고 상사에 임하지만 소렴을 하는 데 이르러서는 시체에 이미 복식을 하였으므로 효자도 수식이 없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환질과 소변(素弁)을 갖추는 것인데 국제(國制)에는 없으니 고례로써 첨가해 보충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9. 대렴(大斂). 《의례경전(儀禮經傳)》에, ‘임금은 장차 대렴하려 할 때에 아들은 소변 위에 수질을 두르고서 동서(東序) 남단의 자리로 나아가고, 경대부는 당(堂)의 모서리 기둥 서쪽 자리로 나아가 북쪽을 향하는데 동쪽을 상(上)으로 하고, 부형(父兄)은 당 밑에서 북쪽을 향하고, 부인(夫人)·명부(命婦)는 시체의 서쪽에서 동쪽을 향하고, 외종(外宗)은 방 안에서 남쪽을 향하고, 소신(小臣)은 자리를 펴고, 상축(商祝)은 교금(絞紟), 금(衾)087) , 옷 등을 펴놓고, 사(士)는 소반 위에 있는 물에 손을 씻고서 시신을 들어다가 염(斂)하는 곳에 옮겨놓는다. 염이 끝난 다음 태재(太宰)가 염이 끝났음을 고하면 아들이 시신에 기대어 곡용(哭踊)하고 부인도 동쪽을 향하여 역시 그렇게 한다.’ 【상대기.】 하였습니다. 《오례의(五禮儀)》 【대략 같은데 전(奠)이 있고, 또 질쇄(質殺)가 이때에 와서 비로소 사용된다.】 신이 상고하건대, 고례에는 대렴과 성빈(成殯)을 합쳐 한 번의 전을 올리는데 빈을 한 뒤에 비로소 전을 베푼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국제에는 대렴과 성빈에 각기 전을 베푸니 아마도 고례를 따르는 것을 정례(正禮)로 삼아야 마땅할 듯합니다. 그리고 또 질쇄는 바로 시체에 옷을 입힐 때 사용하는 것인데 국제에는 이때에 와서 비로소 사용하니 아마도 고례의 뜻이 아닌 듯합니다. 10. 성복(成服). 《의례경전(儀禮經傳)》에, ‘임금의 상에는 3일 뒤에 아들과 부인이 장(杖)을 짚고 5일 뒤 빈소를 마치고서 대부, 세부(世婦)에게 상장을 준다.’ 【상대기.】 하였고, ‘천자가 죽으면 3일 만에 축(祝)이 먼저 복을 입고, 5일 만에 관장(官長)이 복을 입고, 7일 만에 국중(國中)의 남녀가 복을 입고, 석달 만에 천하가 복을 입는다.’ 【단궁(檀弓).】 하였고, ‘사사(肆師)가 외내(外內) 명남녀(命男女)의 상복이 법에 맞지 않는 자를 금한다.’ 【춘관(春官).】 하였고, 주자가 말하기를, ‘참최 3년은 아비와 임금을 위하여 입는 복이다. 그 복은 포관(布冠), 포삼(布杉)에 벽령(辟領), 부판(負版)을 단 최복(衰服)과 엄임(掩衽), 친삼(襯杉), 포군(布君)을 입고 마(麻)로 만든 요질(腰絰), 수질(首絰), 마대(麻帶)를 두르고 짚신을 신고 죽장(竹杖)을 짚는데 천자로부터 서인에 이르기까지 신분의 귀천으로써 증손(增損)하는 바가 없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임금과 신하의 복이 같으나 약간의 구별을 하여 상하를 분별한다. 13개월 만에 연복(練服)을 입고서 소상(小祥)을 지내고 25개월 만에 난복(襴襆)을 하고서 담제(禫祭)를 지내고 27개월 만에 조복을 입고서 상을 벗는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초상(初喪) 때는 마땅히 고례에 따라 상복을 지어 입고서 상에 임하고, 따로 포(布)로 복두(幞頭), 공복(公服), 혁대(革帶)를 만들어 착용하고서 조회하는 것이 예에 합당하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예에 임금의 상사에 달관(達官)의 장(長)들은 죽장(竹杖)을 짚는다 하였는데, 이른바 달관이란 일을 전담하여 임금께 주달(奏達)할 수 있는 관원을 이름이다. 오늘에 있어서는 안으로 성(省)·조(曹)·시(寺)·감(監)의 장관과 밖으로는 감사·군수 등으로서 모든 사(司)의 장과 일찍이 시종(侍從) 이상의 관직을 역임하여 전담해서 일을 주달했던 이들이 바로 달관이다. 그러므로 지금 상장을 짚지 않는 제도를 요좌(僚佐) 이하에게 시행한다면 가하지만 심지어는 그 장관들로 하여금 아랫사람과 함께 상장을 짚지 않게 하고 있는데, 비록 지난날 정승과 장수를 지낸 사람이 벼슬하지 않고 집에 있다 할지라도 다른 것이 없게 한다면 어찌 박하지 아니한가.’ 하였고, 또 말하기를, ‘전에 보니 효종(孝宗)께서는 장사를 지낸 뒤에도 오히려 백포의관(白布衣冠)으로 조회를 보셨으니 이는 매우 성대한 덕이다. 전세에는 임금이 스스로 복을 입지 않았기 때문에 고례를 행할 수 없었던 것이지만, 당시에는 이런 좋은 기회가 있었는데도 유신(儒臣)과 예관(禮官)이 이룩해 밝혀서 1대의 제도로 만들지 못하여 드디어 임금은 위에서 복을 입는데 신하들은 아래에서 복을 벗게 하여 잘못을 인습하였으니 매우 통한스럽다.’ 하였습니다. 《오례의(五禮儀)》에는, ‘종친과 문무 백관은 단령의(團領衣)에 베[布]로 싼 사모를 쓰고 마대(麻帶)를 매고 백피화(白皮靴)를 신었다가 졸곡(卒哭) 뒤에는 백의(白衣)에 오사모(烏紗帽)를 쓰고 흑각대(黑角帶)를 띤다. 모든 상사에는 최복을 입고 연제(練祭) 때에는 연포(練布)로 사모를 싼다.’ 하였습니다. 신이 상고하건대, 《오례의(五禮儀)》의 복제(服制)는 매우 윤서(倫緖)가 없습니다. 대체로 임금과 아비는 일체인데 어찌 아비에 대해서는 순전히 상복을 사용하고 임금에 대해서는 조복의 제도를 섞어 사용하여 반은 높이고 반은 낮추는 의전(儀典)이 있겠습니까. 그리고 또 전함(前銜)은 지금은 비록 관직이 없다 하더라도 그의 이름이 이미 사적(仕籍)에 있으니 실로 관직에 있는 자와 조금도 다를 것이 없는데 사인(士人)과 함께 백의를 입는 제도는 더더욱 옳지 않습니다. 일찍이 상고하건대 송 영종(宋寧宗) 초기에 천자는 칠사천황복(漆紗淺黃服)을 입었는데 신하들은 이미 역월(易月)했다 하여 복을 입지 않으니, 주자가 차자를 올려 이미 지난 실수는 뒤에 와서 고칠 수 없거니와 앞으로 계빈(啓殯)088) 하여 발인(發靷)할 때는 마땅히 다시 초상 때의 상복을 착용해야 된다고 하였습니다. 지난해에 지평 민순(閔純)이 헌의(獻議)하여 《오례의(五禮儀)》를 고치어 너무 심한 것을 약간 제거하였으니, 신이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신의 이 건의를 예관에게 내리시어 한결같이 주자가 손익한 제도를 따라 속히 지휘하여 백관으로 하여금 미리 최복을 준비하였다가 발인할 때에 입고서 들어와 임하도록 하고, 지금 입고 있는 단령은 그 끝을 꿰매어 입고 포모(布帽)와 포로 싼 각대(角帶)와 백화(白靴)로써 일을 볼 때 입는 복장으로 삼게 하소서. 그리고 전함들에게도 이때 다시 성복(成服)하게 하면 사의(事宜)에 합당할 것 같습니다. 11. 조석전(朝夕奠). 《의례경전(儀禮經傳)》에, ‘사복(司服)이 전(奠)드릴 때 입는 의복을 이바지한다.’ 【춘관.】 하였습니다. 《오례의(五禮儀)》 【배례(拜禮)가 없다.】 신이 상고하건대, 고례는 다만 대개만을 들었을 뿐, 배례(拜禮)의 절목은 말하지 않았습니다. 《주자가례(朱子家禮)》에 성복(成服) 전의 대소렴전(大小斂奠)에는 모두 효자(孝子)의 배례를 말하지 않고 성복 후에서야 비로소 주인 이하의 재배를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국제에는 없으니 아마도 주자의 설을 따르는 것이 무방할 듯합니다. 12. 진조조전(陳朝祖奠)089) 《의례경전(儀禮經傳)》에, ‘내수(內竪)는 상기(喪紀)의 일이 있을 때이면 내인(內人)들을 벽제(辟除)한다.’ 하였고, ‘세부(世婦)가 여궁(女宮)을 거느리고서 자성(粢盛)을 씻어 제기(祭器)에 담는다.’ 하였습니다. 《오례의(五禮儀)》 【조조(朝祖)와 전(奠)이 없다.】 신이 상고하건대, 예(禮)에 ‘상구(喪柩)를 조상의 종묘로 옮겨 망인(亡人)이 조상을 뵙게 하는 것은 망인의 효심을 따르는 것이니 망인의 처지에서 보면 평소 거처하던 침실을 떠나는 것이 슬프다. 그러므로 조고(祖考)의 종묘에 가서 결별하고서 떠나는 것이다.’ 하였으니, 이는 진실로 예의 큰 절목으로서 폐할 수 없는 것인데 국제에는 없으니 아마도 강구해 행해야 될 듯합니다. 그리고 이어 정제(定制)로 삼으시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13. 계(啓). 《의례경전(儀禮經傳)》에, ‘상축(喪祝)이 계한다.’ 하였고, ‘장부(丈夫)는 문(免)090) 하고 부인은 복머리[髽]를 하고 산대(散帶)091) 를 드리우고서 자리로 나아간다.’ 하였고, ‘계하는 새벽에는 외내가 모두 곡하지 않는다.’ 【기(記).】 하였습니다. 《오례의(五禮儀)》 【변복(變服)하는 절차가 없다.】 신이 상고하건대, 계빈(啓殯)은 시구(尸柩)를 뵙는 것이므로 소렴 때처럼 변복하는 것입니다. 이는 큰 절목인데 국제에는 없으니 고례를 따르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14. 조전(祖奠)092) . 《의례경전(儀禮經傳)》에, ‘조전에 깔 건석(巾席)을 걷고서 서쪽에서 기다리면 주인은 허리를 굽히고서 올라가고 부인은 뛰면서[踊] 내려간다. 주인이 단(袒)하면 상축(商祝)이 상구(喪柩)를 실은 수레를 어거하여 출발해 조금 가다가 멈춘다. 주인은 뛰면서 단했던 옷소매를 바르게 입고서 상구를 실은 수레 앞으로 가서 상구의 남쪽을 수레에 묶고, 부인은 내려와서 섬돌 사이의 위치로 나아간다. 떠나가는 데는[祖] 순서가 있기 때문에 수레는 방향을 틀지만 음식을 차려놓았던 그릇은 방향을 돌리지 않는다. 축(祝)이 명(銘)093) 을 가져다가 자리[菌]094) 위에 놓으면 두 사람이 중(重)095) 의 왼쪽을 돌아 나아가서 자리를 펴고 조전을 앞서와 같이 행한다. 그러면 주인은 허리를 굽히고서 말을 바치기를[薦馬] 앞서와 같이 한다. 빈(賓)이 나아가면 주인이 전송한다.’ 하였고, 《예기(禮記)》에, ‘뜰에서 조전을 행한다.’ 【상례의(喪禮儀)에 자세히 보인다.】 하였고, ‘상구를 실은 수레가 출발하여 조금 가다가 멈추는데 수레의 방향은 돌리지만 위치는 바뀌지 않고, 곁에서 네 사람이 피(披)096) 를 잡는다.’ 【본경(本經)의 기록이다.】 하였고, ‘축(祝)이 조전의 제찬(祭饌)을 주인의 남쪽에 있는 수레[輅] 앞에 북쪽을 상(上)으로 하여 차려 놓고서 보자기로 덮는다.’ 【상동(上同).】 하였습니다. 《오례의(五禮儀)》 【대략 같다.】 신이 상고하건대, 국제(國制)에 비록 이 의전(儀典)이 있으나 이미 조조(朝祖)에 관한 절목이 없으므로 이 의전을 빈전(殯殿)에서 시행하고서 그대로 발인하니 매우 먼 길을 가는데 가까운 데서부터 점진적으로 나아가는 뜻이 아닙니다. 고례에는 조조의 의전이 있고, 이어 조전(祖奠)을 묘정(廟庭)에서 행하고, 이튿날 새벽에 견전(遣奠)을 행하고서 발인합니다. 발인 절차는 《의례(儀禮)》에 자세히 나타나 있습니다. 15. 우(虞)097) 《의례경전(儀禮經傳)》에, ‘제후는 칠우(七虞)이다.’ 하였습니다. 《오례의(五禮儀)》 【반우의(返虞儀)가 있다.】 신이 상고하건대, 예에 ‘정오에 우제(虞祭)를 지낸다. 길이 먼 경우에는 무덤에서 우제를 행한다.’ 하였으니, 반우(返虞)한다는 글에 구애될 필요가 없을 듯합니다. 16. 반곡(返哭)098) 《의례경전(儀禮經傳)》에, ‘반곡하는 사람은 서계(西階)로 올라가 동쪽을 향하고 주인은 당하(堂下)에서 동쪽을 향해 서는데 북쪽을 상(上)으로 한다. 부인은 들어가고 대부는 뛰면서[踊] 조계(阼階)로 올라간다. 주부는 실내(室內)099) 로 들어간다.’ 하였습니다. 《오례의(五禮儀)》 【없다.】 신이 상고하건대, 예에 ‘반곡하여 조문(吊問)하는 것은 슬픔이 지극한 것이다. 돌아왔으나 어버이는 이미 죽어 없어져서 어버이를 잃었으니 이때를 당하여 슬픔이 지극하다.’ 하였고, 주자가 말하기를, ‘반곡하려고 당(堂)으로 오르는 것은 돌아간 어버이가 평소 예를 행하였던 곳으로 돌아가는 것이고, 주부가 실(室)로 들어가는 것은 죽은 어버이가 평소 궤양(饋養)했던 곳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 의사를 안다면 이른바 그가 밟던 자리를 밟고 그가 행하던 예를 행하는 등의 일이 자연스럽게 행해져서 바야흐로 계지(繼志)·술사(述事)의 일을 알게 될 것이다.’ 하였습니다. 이 한 절목을 빠뜨려서는 안 될 것 같은데 국제에는 없으니 고례를 따르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17. 조석전(朝夕奠)을 파함. 신이 상고하건대, 이 한 절목은 초우(初虞) 뒤에 있어야 하는데 《의례경전(儀禮經傳)》이나 국제에 나오는 글이 없으므로 신이 삼가 《가례(家禮)》에서 따다가 보충하였습니다. 18. 부(祔)100) 《의례경전(儀禮經傳)》에, ‘명일(明日)101) 에 신주(神主)를 소목(昭穆)의 반차(班次)에 따라 종묘에 모신다.’ 【사우(士虞).】 하였고, ‘명일 조부(祖父)의 신주를 다른 사당으로 옮기고 새로 죽은 이의 신주를 조부의 신주가 있던 곳에 모신다. 상제(喪祭)가 변하여 길제(吉祭)로 가고 부묘(祔廟)하는 데는 반드시 하루를 띄우지 않고 이 날에 접속해서 행한다.’ 【예기.】 하였고, ‘부제(祔祭) 때는 상장(喪杖)을 짚고서 당(堂)102) 에 오르지 않는다.’ 【상소기(喪小記).】 하였고, 주자가 말하기를, ‘선왕(先王)께서 예를 제정한 것은 본래 인정에 따른 것이니 길흉의 사이에 변하는 것이 순서가 있다. 그러므로 처음 죽었을 때는 오로지 생존한 분을 섬기는 예를 쓰고 졸곡(卒哭)과 부묘(祔廟)를 마친 뒤에야 신(神)으로 섬긴다. 그러나 차마 다 변경할 수 없기 때문에 신주를 다시 정침(正寢)으로 모셔다가 생존한 분을 섬기는 예로 섬기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오례의(五禮儀)》 【없다.】 신이 상고하건대, 주자가 말하기를 ‘새로 죽은 분을 조부의 사당에 부(祔)하는 것은 조부에게 다른 사당으로 옮긴다는 것을 고하고 새로 죽은 분에게 이 사당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고하는 순서이다. 그런데 지금은 공실(公室)이나 사가(私家)의 묘(廟)에 모두 한 사당 안에 감실(龕室)103) 만을 달리하고 서쪽을 상(上)으로 하는 제도만이 있고 다시 좌소(左昭), 우목(右穆)의 반차(班次)가 없다. 그러므로 체천(遞遷)할 경우가 생기면 모든 감실을 다 옮기고 새로 죽은 이가 그 아버지가 있던 감실로 들어간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예의 큰 절목으로서 고례와 같지 않다. 그런데 예를 하는 자들이 오히려 조부가 있던 사당에 부(祔)한다는 예문을 고집하는 것은 의의가 없는 듯하다. 그렇다고 마침내 예를 고쳐서 아버지 사당에 부한다면 또 애례존양(愛禮存羊)104) 의 뜻이 아닐 것이다.’ 하였으니, 이에 의거해 보면 이것은 폐할 수 없는 큰 절목인데 국제에는 없으니 아마도 강정해 행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태백산사고본】 1책 1권 17장 B면【국편영인본】 35책 373면
[註 047] 인혁(因革) : 옛것을 따름과 개혁함.[註 048] 취송(聚訟) : 서로 시비하여 결말이 나지 아니함.[註 049] 정문(情文) : 내용과 형식.[註 050] 개원(開元) : 당 현종(唐玄宗)의 연호.[註 051] 변제(變除) : 변복(變服) 공제(公除).[註 052] 통상(通喪) : 상하가 통행하는 상례로 삼년상을 이름.[註 053] 경화(更化) : 정치와 교화를 고치어 새롭게 함.[註 054] 사위(事爲) : 사업.[註 055] 여러 왕손(王孫) : 소현 세자(昭顯世子)의 세 아들. 인조 25년에 당시 강빈 사건(姜嬪事件:소현 세자의 음식에 독을 넣어 죽였다는 무고 사건)이 문제가 되어 그의 소생인 왕손 3형제를 제주도에 귀양보냈는데, 이때 장자 석철(石鐵)은 12세, 차자 석린(石麟)은 8세, 삼자 석견(石堅)은 4세였다.[註 056] 고명(顧命) : 임금이 죽을 때 후사를 부탁하는 유명(遺命).[註 057] 재생백(哉生魄) : 음력 16일.[註 058] 서언(誓言) : 유언.[註 059] 노침(路寢) : 정전(正殿).[註 060] 정종(正終) : 정전에서 죽음.[註 061] 복(復) : 초혼(招魂). 사람이 죽은 몇 시간 뒤에 망인이 입던 옷을 가지고 지붕에 올라가서 왼손으로 깃을 잡고 오른손으로 허리를 잡고서 아무(何某)는 복하라고 세 번 외친 다음 그 옷으로 시신을 덮음.[註 062] 《의례경전(儀禮經傳)》 : 주자(朱子)가 찬(撰)한 《의례경전통해(儀禮經傳通解)》로 원집(原集)이 37권이고 속집이 29권임.[註 063] 시사전(始死奠) : 고복(皋復)이 끝난 뒤에 올리는 전.[註 064] 항시(巷市) : 골목에서 시장을 보는 것. 국상이 나면 애도의 뜻으로 시장을 철거하기 때문에 필요한 생필품을 골목에서 구함.[註 065] 차길(借吉) : 상제의 몸으로 길례(吉禮) 때에 특별히 길복(吉服)을 입는 것.[註 066] 천시(遷尸) : 왕이 죽어 소렴, 대렴을 마친 뒤에 왕의 시신을 당(堂)으로 옮기는 것.[註 067] 설치(楔齒) : 반함(飯含)을 하기 전에 먼저 뿔 숟가락을 아래 위의 이(齒) 사이에 끼워 입이 다물어지지 않게 하는 것.[註 068] 철족(綴足) : 시신의 발이 뒤틀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발을 의자의 다리에 묶어 놓는 것.[註 069] 유당(帷堂) : 당상(堂上)에 유막(帷幕)을 설치한 상막(喪幕).[註 070] 각사(角柶) : 뿔로 만든 숟가락.[註 071] 연궤(燕几) : 편안한 의자.[註 072] 흔창(興鬯) : 왕의 시신을 목욕시키는 울창주(鬱鬯酒).[註 073] 사기(肆器) : 너비가 8척, 길이가 12척, 깊이가 3척인 얼음을 채운 통. 하절기에 시체의 부패를 방지하기 위하여 얼음을 채운 이 통을 시신에 넣어둠.[註 074] 권의(卷衣) : 곤룡포.[註 075] 금모(錦冒) : 시체를 싸는 비단 자루 습(襲) 이후와 소렴 이전에 시체를 싸둔다.[註 076] 보쇄(黼殺) : 시체를 싸는 도끼 무늬의 수를 놓은 천. 위를 싸는 것을 보라하고 아래를 싸는 것을 쇄라함.[註 077] 모질(冒質) : 금모(錦昌)의 윗부분이다..[註 078] 쇄(殺) : 금모의 아래 부분이다.[註 079] 반옥(飯玉) : 염할 때 죽은 사람의 입에 구슬을 물리는 것.[註 080] 반미(飯米) : 염할 때 죽은 사람의 일에 쌀을 물리는 것.[註 081] 막포(幕布) : 장막을 만드는 거친 베.[註 082] 온공(溫公) : 사마광(司馬光).[註 083] 습(襲) : 죽은 사람에게 좌임포(左衽袍)를 입히는 것.[註 084] 반함(飯含) : 염할 때 죽은 사람의 입에 쌀을 물리는 것.[註 085] 환질(環絰) : 성복 때 상제가 건(巾) 위에 덧씌워 쓰는 수절(首絰).[註 086] 위모(委貌) : 관명(冠名).[註 087] 금(衾) : 홑이불.[註 088] 계빈(啓殯) : 발인(發靷)할 때 출란(出棺)하기 위하여 빈소를 여는 것.[註 089] 진조조전(陳朝祖奠) : 발인할 때 죽은 사람이 종묘로 가서 마지막으로 조상을 보이고 하직 인사를 올리게 하고 곁들어 전을 올리는 것.[註 090] 문(免) : 갓을 벗고 한 치 너비의 베로 머리를 묶고 뒤로 늘어 뜨리는 것.[註 091] 산대(散帶) : 띠의 끝을 꼬지 않고 흐트려 놓은 것.[註 092] 조전(祖奠) : 발인에 앞서 출발을 알리는 전. 조는 행신(行神)을 뜻함.[註 093] 명(銘) : 명정.[註 094] 자리[菌] : 관 밑에 까는 자리로서 관과 함께 묻는다.[註 095] 중(重) : 우제(虞祭) 이전에는 신주가 없으므로 나무를 깎아 뜰 중앙에 세워 놓고 죽은 이의 혼신이 임시로 이 나무에 의지하게 하고 또 죽은 이의 필요한 물건들을 이 나무에 매달아 놓는다.[註 096] 피(披) : 관을 끄는 끈.[註 097] 우(虞) : 장사를 지내고 돌아와서 빈궁(殯宮)에 지내는 제사. 망인의 시체는 땅으로 돌아갔으나 정기(精氣)는 정처 없이 방황하므로 우제를 올려 혼신을 안정시킴.[註 098] 반곡(返哭) : 장사를 마치고 돌아와서 종묘에서 곡을 하며 슬픔을 다하는 것.[註 099] 실내(室內) : 종묘 안.[註 100] 부(祔) : 졸곡(卒哭)이 끝난 다음날, 새로 죽은 이의 신주(神主)를 소목(昭穆)의 서차에 따라 종묘에 모시는 것.[註 101] 명일(明日) : 졸곡(卒哭) 다음날.[註 102] 당(堂) : 사당.[註 103] 감실(龕室) : 종묘 안에 신주를 모셔 놓는 장.[註 104] 애례존양(愛禮存羊) : 예를 아껴 구례(舊禮) 또는 허례(虛禮)를 버리지 않고 보전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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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상고하건대, 이상의 네 조항은 모두 절실하여 없어서는 안 될 것들인데 우리 나라 제도에는 없으니 아마도 첨가해 보충해야 마땅할 것 같습니다.
6. 목욕 도구 설치[陳沐浴], 명의 입히기[襲明衣], 죽은 사람의 입에 쌀·구슬 따위를 넣는 것[飯含], 얼음을 담는 소반[氷盤] 등의 도구.
《의례경전(儀禮經傳)》에, ‘창인(鬯人)이 흔창(興鬯)072) 을 이바지한다.’ 하였고, ‘울인(鬱人)이 사기(肆器)073) 를 이바지한다.’ 하였고, ‘전사(典絲)가 실, 솜, 무늬 있는 비단 등의 물건을 이바지한다.’ 하였고, ‘공(公)을 염습하는 데는 권의(卷衣)074) 한 벌, 현단복(玄端服) 한 벌, 조복(朝服) 한 벌, 소적(素積) 한 벌, 훈상(纁裳) 한 벌, 작변(爵弁) 두 벌, 현면(玄冕) 한 벌, 포의(褒衣) 한 벌과 주록대(朱綠帶)이고, 다시 대대(大帶)를 몸 위에 걸쳐 놓는다.’ 【잡기.】 하였고, ‘임금의 금모(錦冒)075) ·보쇄(黼殺)076) 는 옆으로 일곱 군데를 묶는데, 모질(冒質)077) 의 길이는 손과 가지런하고 쇄(殺)078) 는 석 자[尺]이다. 【상대기.】 하였고, ‘저고리에는 반드시 치마가 있으니 그것을 한 벌이라 한다.’ 하였고, ‘능인(凌人)이 얼음을 채운 이반(夷盤)을 이바지한다.’ 하였고, ‘임금은 대반(大盤)을 설치하여 얼음을 채우고 상 위의 자리를 걷어 내고 베개만 둔다.’ 【상대기.】 하였고, ‘전서(典瑞)가 반옥(飯玉)079) 과 함옥(含玉)을 이바지한다.’ 하였고, ‘사인(舍人)이 반미(飯米)080) 를 이바지한다.’ 하였고, ‘천자는 구패(九貝)를 입에 넣고 제후는 칠패(七貝)를 넣는다.’ 【잡기.】 하였고, ‘함(含)하는 상(牀) 하나, 염습하는 상 하나, 시신을 당(堂)으로 옮기는데 또 하나의 상이 있는데 모두 베개와 자리가 있다. 이것은 임금이나 대부가 동일하다.’ 【상대기.】 하였고, ‘명의(明衣)의 치마는 막포(幕布)081) 로 만들고 소매는 온 폭(幅)으로 하고 길이는 무릎 밑까지 내려오며, 앞뒤 치마가 있는데 주름을 잡지 않고 길이는 발등까지 내려온다.’ 하였고, ‘포건(布巾)은 길이와 너비가 같다.’ 하였습니다.
《오례의(五禮儀)》 【사용하는 도구의 명목이 같지 않다.】 신이 상고하건대, 국제(國制)의 염습하는 도구 중 수관(首冠)에 대한 주(註)에 ‘만드는 것이 감두(頭)와 같은데 바로 복건(幅巾)이다.’ 하였으니, 감두는 우리 나라 세속에서 만드는 복건입니다. 온공(溫公)082) 과 주자가 쓴 복건의 형제(形制)가 같지 않은데 지금 합하여 한 물건으로 여기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리고 곤룡포를 입은 시신의 머리에 복건을 씌우는 것은 더욱 서로 어울리지 않으니, 만약 곤룡포를 사용한다면 고례를 따라 작변(爵弁)이나 현면(玄冕)을 사용하는 것이 타당할 듯하고 만약 꼭 복건을 사용하고자 하면 심의(深衣)를 사용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심의가 지금은 비록 야인(野人)의 옷이지만 황제(黃帝)로부터 이미 입었고, 그 뜻이 매우 깊어 규(規)·구(矩)·승(繩)·권(權)·형(衡) 등 다섯 가지 법이 들어 있기 때문에 성인께서도 입으셨고 선왕들께서도 귀하게 여겼습니다. 지금 염습하는 데 이미 복건과 대대(大帶)를 사용하였으니, 심의를 입히는 것도 불가함이 없을 듯합니다. 그리고 질쇄(質殺)는 바로 옛 제도로서 죽은 사람을 보호하는 데 매우 온당하고도 절실한 것인데 국제에는 그것이 없으니 첨가해 보충함이 마땅할 듯합니다. 7. 습(襲)083) ·반함(飯含)084) . 《의례경전(儀禮經傳)》에 ‘증자(曾子)가 말하기를 「부인의 옷으로 습하지 않는다.」 하였다.’ 【잡기(雜記).】 하였고, ‘제후는 일곱 벌, 공(公)은 아홉 벌이다.’ 하였고, ‘대축(大祝)이 반함(飯含)을 돕는다.’ 【춘관(春官).】 하였고, ‘태재(太宰)가 함옥(含玉)을 돕는다.’라고 한 주(注)에, ‘왕을 도와 하는 것이다.’ 【천관(天官).】 하였고, 《의례(儀禮)》의 ‘포건(布巾)은 길이와 너비를 같게 한다.’라고 한 주(注)에, ‘대부 이상은 빈(賓)이 한다.’ 하였는데, 그 소(疏)에 ‘대부 이상은 신하가 있으니 신하가 빈이 된다. 빈이 반함하는 것은 악취가 나올 것을 꺼리기 때문에 포건으로 얼굴을 덮고 입 부위에 구멍을 뚫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오례의(五禮儀)》 【반함은 습전(襲奠) 뒤에 있는데 내시가 거행한다.】 신이 상고하건대, 예에 ‘반함하는 것은 죽었다 하여 차마 입을 비게 하지 않는 것이다.’ 하였으니 봉양의 뜻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례에는 혹 왕이 친히 하기도 하고 빈이 하기도 하였는데 지금은 내시를 사용하여 시키니 매우 설만(褻慢)한 듯합니다. 왕이 친히 하는 것이 실로 정례(情禮)에 부합됩니다. 8. 환질(環絰)085) 을 갖추는 것. 《의례경전(儀禮經傳)》에 ‘소렴을 마치고는 머리에 질(絰)을 두르는데 공과 대부가 동일하다.’라고 한 소(疏)에, ‘어버이가 죽으면 효자는 갓을 벗는다. 그러나 소렴 때에 이르러서는 머리에 수식(首飾)이 없을 수 없다. 사(士)는 흰 위모(委貌)086) 를 쓰고 대부 이상은 소변(素弁)을 쓰니 귀천이 모두 머리에 환질(環絰)을 두를 수 있다.’ 하였는데, 구씨(丘氏)는 ‘이것을 살펴보면 수질(首絰) 밑에 반드시 건모(巾帽)가 있어 수질을 받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위모와 작변(爵弁)의 종류가 지금 세상에는 없으니 백포건(白布巾)을 사용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고, ‘환질은 삼[麻] 한 가닥으로 감는 것이다.’ 하였고, ‘염이 끝난 뒤에는 소관(素冠)을 벗어 버린다.’ 【상소기(喪小記)의 주(註).】 하였습니다. 《오례의(五禮儀)》 【없다.】 신이 상고하건대, 처음 죽었을 때에는 시체가 복식(服飾)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효자가 머리를 풀어뜨리고 상사에 임하지만 소렴을 하는 데 이르러서는 시체에 이미 복식을 하였으므로 효자도 수식이 없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환질과 소변(素弁)을 갖추는 것인데 국제(國制)에는 없으니 고례로써 첨가해 보충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9. 대렴(大斂). 《의례경전(儀禮經傳)》에, ‘임금은 장차 대렴하려 할 때에 아들은 소변 위에 수질을 두르고서 동서(東序) 남단의 자리로 나아가고, 경대부는 당(堂)의 모서리 기둥 서쪽 자리로 나아가 북쪽을 향하는데 동쪽을 상(上)으로 하고, 부형(父兄)은 당 밑에서 북쪽을 향하고, 부인(夫人)·명부(命婦)는 시체의 서쪽에서 동쪽을 향하고, 외종(外宗)은 방 안에서 남쪽을 향하고, 소신(小臣)은 자리를 펴고, 상축(商祝)은 교금(絞紟), 금(衾)087) , 옷 등을 펴놓고, 사(士)는 소반 위에 있는 물에 손을 씻고서 시신을 들어다가 염(斂)하는 곳에 옮겨놓는다. 염이 끝난 다음 태재(太宰)가 염이 끝났음을 고하면 아들이 시신에 기대어 곡용(哭踊)하고 부인도 동쪽을 향하여 역시 그렇게 한다.’ 【상대기.】 하였습니다. 《오례의(五禮儀)》 【대략 같은데 전(奠)이 있고, 또 질쇄(質殺)가 이때에 와서 비로소 사용된다.】 신이 상고하건대, 고례에는 대렴과 성빈(成殯)을 합쳐 한 번의 전을 올리는데 빈을 한 뒤에 비로소 전을 베푼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국제에는 대렴과 성빈에 각기 전을 베푸니 아마도 고례를 따르는 것을 정례(正禮)로 삼아야 마땅할 듯합니다. 그리고 또 질쇄는 바로 시체에 옷을 입힐 때 사용하는 것인데 국제에는 이때에 와서 비로소 사용하니 아마도 고례의 뜻이 아닌 듯합니다. 10. 성복(成服). 《의례경전(儀禮經傳)》에, ‘임금의 상에는 3일 뒤에 아들과 부인이 장(杖)을 짚고 5일 뒤 빈소를 마치고서 대부, 세부(世婦)에게 상장을 준다.’ 【상대기.】 하였고, ‘천자가 죽으면 3일 만에 축(祝)이 먼저 복을 입고, 5일 만에 관장(官長)이 복을 입고, 7일 만에 국중(國中)의 남녀가 복을 입고, 석달 만에 천하가 복을 입는다.’ 【단궁(檀弓).】 하였고, ‘사사(肆師)가 외내(外內) 명남녀(命男女)의 상복이 법에 맞지 않는 자를 금한다.’ 【춘관(春官).】 하였고, 주자가 말하기를, ‘참최 3년은 아비와 임금을 위하여 입는 복이다. 그 복은 포관(布冠), 포삼(布杉)에 벽령(辟領), 부판(負版)을 단 최복(衰服)과 엄임(掩衽), 친삼(襯杉), 포군(布君)을 입고 마(麻)로 만든 요질(腰絰), 수질(首絰), 마대(麻帶)를 두르고 짚신을 신고 죽장(竹杖)을 짚는데 천자로부터 서인에 이르기까지 신분의 귀천으로써 증손(增損)하는 바가 없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임금과 신하의 복이 같으나 약간의 구별을 하여 상하를 분별한다. 13개월 만에 연복(練服)을 입고서 소상(小祥)을 지내고 25개월 만에 난복(襴襆)을 하고서 담제(禫祭)를 지내고 27개월 만에 조복을 입고서 상을 벗는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초상(初喪) 때는 마땅히 고례에 따라 상복을 지어 입고서 상에 임하고, 따로 포(布)로 복두(幞頭), 공복(公服), 혁대(革帶)를 만들어 착용하고서 조회하는 것이 예에 합당하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예에 임금의 상사에 달관(達官)의 장(長)들은 죽장(竹杖)을 짚는다 하였는데, 이른바 달관이란 일을 전담하여 임금께 주달(奏達)할 수 있는 관원을 이름이다. 오늘에 있어서는 안으로 성(省)·조(曹)·시(寺)·감(監)의 장관과 밖으로는 감사·군수 등으로서 모든 사(司)의 장과 일찍이 시종(侍從) 이상의 관직을 역임하여 전담해서 일을 주달했던 이들이 바로 달관이다. 그러므로 지금 상장을 짚지 않는 제도를 요좌(僚佐) 이하에게 시행한다면 가하지만 심지어는 그 장관들로 하여금 아랫사람과 함께 상장을 짚지 않게 하고 있는데, 비록 지난날 정승과 장수를 지낸 사람이 벼슬하지 않고 집에 있다 할지라도 다른 것이 없게 한다면 어찌 박하지 아니한가.’ 하였고, 또 말하기를, ‘전에 보니 효종(孝宗)께서는 장사를 지낸 뒤에도 오히려 백포의관(白布衣冠)으로 조회를 보셨으니 이는 매우 성대한 덕이다. 전세에는 임금이 스스로 복을 입지 않았기 때문에 고례를 행할 수 없었던 것이지만, 당시에는 이런 좋은 기회가 있었는데도 유신(儒臣)과 예관(禮官)이 이룩해 밝혀서 1대의 제도로 만들지 못하여 드디어 임금은 위에서 복을 입는데 신하들은 아래에서 복을 벗게 하여 잘못을 인습하였으니 매우 통한스럽다.’ 하였습니다. 《오례의(五禮儀)》에는, ‘종친과 문무 백관은 단령의(團領衣)에 베[布]로 싼 사모를 쓰고 마대(麻帶)를 매고 백피화(白皮靴)를 신었다가 졸곡(卒哭) 뒤에는 백의(白衣)에 오사모(烏紗帽)를 쓰고 흑각대(黑角帶)를 띤다. 모든 상사에는 최복을 입고 연제(練祭) 때에는 연포(練布)로 사모를 싼다.’ 하였습니다. 신이 상고하건대, 《오례의(五禮儀)》의 복제(服制)는 매우 윤서(倫緖)가 없습니다. 대체로 임금과 아비는 일체인데 어찌 아비에 대해서는 순전히 상복을 사용하고 임금에 대해서는 조복의 제도를 섞어 사용하여 반은 높이고 반은 낮추는 의전(儀典)이 있겠습니까. 그리고 또 전함(前銜)은 지금은 비록 관직이 없다 하더라도 그의 이름이 이미 사적(仕籍)에 있으니 실로 관직에 있는 자와 조금도 다를 것이 없는데 사인(士人)과 함께 백의를 입는 제도는 더더욱 옳지 않습니다. 일찍이 상고하건대 송 영종(宋寧宗) 초기에 천자는 칠사천황복(漆紗淺黃服)을 입었는데 신하들은 이미 역월(易月)했다 하여 복을 입지 않으니, 주자가 차자를 올려 이미 지난 실수는 뒤에 와서 고칠 수 없거니와 앞으로 계빈(啓殯)088) 하여 발인(發靷)할 때는 마땅히 다시 초상 때의 상복을 착용해야 된다고 하였습니다. 지난해에 지평 민순(閔純)이 헌의(獻議)하여 《오례의(五禮儀)》를 고치어 너무 심한 것을 약간 제거하였으니, 신이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신의 이 건의를 예관에게 내리시어 한결같이 주자가 손익한 제도를 따라 속히 지휘하여 백관으로 하여금 미리 최복을 준비하였다가 발인할 때에 입고서 들어와 임하도록 하고, 지금 입고 있는 단령은 그 끝을 꿰매어 입고 포모(布帽)와 포로 싼 각대(角帶)와 백화(白靴)로써 일을 볼 때 입는 복장으로 삼게 하소서. 그리고 전함들에게도 이때 다시 성복(成服)하게 하면 사의(事宜)에 합당할 것 같습니다. 11. 조석전(朝夕奠). 《의례경전(儀禮經傳)》에, ‘사복(司服)이 전(奠)드릴 때 입는 의복을 이바지한다.’ 【춘관.】 하였습니다. 《오례의(五禮儀)》 【배례(拜禮)가 없다.】 신이 상고하건대, 고례는 다만 대개만을 들었을 뿐, 배례(拜禮)의 절목은 말하지 않았습니다. 《주자가례(朱子家禮)》에 성복(成服) 전의 대소렴전(大小斂奠)에는 모두 효자(孝子)의 배례를 말하지 않고 성복 후에서야 비로소 주인 이하의 재배를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국제에는 없으니 아마도 주자의 설을 따르는 것이 무방할 듯합니다. 12. 진조조전(陳朝祖奠)089) 《의례경전(儀禮經傳)》에, ‘내수(內竪)는 상기(喪紀)의 일이 있을 때이면 내인(內人)들을 벽제(辟除)한다.’ 하였고, ‘세부(世婦)가 여궁(女宮)을 거느리고서 자성(粢盛)을 씻어 제기(祭器)에 담는다.’ 하였습니다. 《오례의(五禮儀)》 【조조(朝祖)와 전(奠)이 없다.】 신이 상고하건대, 예(禮)에 ‘상구(喪柩)를 조상의 종묘로 옮겨 망인(亡人)이 조상을 뵙게 하는 것은 망인의 효심을 따르는 것이니 망인의 처지에서 보면 평소 거처하던 침실을 떠나는 것이 슬프다. 그러므로 조고(祖考)의 종묘에 가서 결별하고서 떠나는 것이다.’ 하였으니, 이는 진실로 예의 큰 절목으로서 폐할 수 없는 것인데 국제에는 없으니 아마도 강구해 행해야 될 듯합니다. 그리고 이어 정제(定制)로 삼으시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13. 계(啓). 《의례경전(儀禮經傳)》에, ‘상축(喪祝)이 계한다.’ 하였고, ‘장부(丈夫)는 문(免)090) 하고 부인은 복머리[髽]를 하고 산대(散帶)091) 를 드리우고서 자리로 나아간다.’ 하였고, ‘계하는 새벽에는 외내가 모두 곡하지 않는다.’ 【기(記).】 하였습니다. 《오례의(五禮儀)》 【변복(變服)하는 절차가 없다.】 신이 상고하건대, 계빈(啓殯)은 시구(尸柩)를 뵙는 것이므로 소렴 때처럼 변복하는 것입니다. 이는 큰 절목인데 국제에는 없으니 고례를 따르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14. 조전(祖奠)092) . 《의례경전(儀禮經傳)》에, ‘조전에 깔 건석(巾席)을 걷고서 서쪽에서 기다리면 주인은 허리를 굽히고서 올라가고 부인은 뛰면서[踊] 내려간다. 주인이 단(袒)하면 상축(商祝)이 상구(喪柩)를 실은 수레를 어거하여 출발해 조금 가다가 멈춘다. 주인은 뛰면서 단했던 옷소매를 바르게 입고서 상구를 실은 수레 앞으로 가서 상구의 남쪽을 수레에 묶고, 부인은 내려와서 섬돌 사이의 위치로 나아간다. 떠나가는 데는[祖] 순서가 있기 때문에 수레는 방향을 틀지만 음식을 차려놓았던 그릇은 방향을 돌리지 않는다. 축(祝)이 명(銘)093) 을 가져다가 자리[菌]094) 위에 놓으면 두 사람이 중(重)095) 의 왼쪽을 돌아 나아가서 자리를 펴고 조전을 앞서와 같이 행한다. 그러면 주인은 허리를 굽히고서 말을 바치기를[薦馬] 앞서와 같이 한다. 빈(賓)이 나아가면 주인이 전송한다.’ 하였고, 《예기(禮記)》에, ‘뜰에서 조전을 행한다.’ 【상례의(喪禮儀)에 자세히 보인다.】 하였고, ‘상구를 실은 수레가 출발하여 조금 가다가 멈추는데 수레의 방향은 돌리지만 위치는 바뀌지 않고, 곁에서 네 사람이 피(披)096) 를 잡는다.’ 【본경(本經)의 기록이다.】 하였고, ‘축(祝)이 조전의 제찬(祭饌)을 주인의 남쪽에 있는 수레[輅] 앞에 북쪽을 상(上)으로 하여 차려 놓고서 보자기로 덮는다.’ 【상동(上同).】 하였습니다. 《오례의(五禮儀)》 【대략 같다.】 신이 상고하건대, 국제(國制)에 비록 이 의전(儀典)이 있으나 이미 조조(朝祖)에 관한 절목이 없으므로 이 의전을 빈전(殯殿)에서 시행하고서 그대로 발인하니 매우 먼 길을 가는데 가까운 데서부터 점진적으로 나아가는 뜻이 아닙니다. 고례에는 조조의 의전이 있고, 이어 조전(祖奠)을 묘정(廟庭)에서 행하고, 이튿날 새벽에 견전(遣奠)을 행하고서 발인합니다. 발인 절차는 《의례(儀禮)》에 자세히 나타나 있습니다. 15. 우(虞)097) 《의례경전(儀禮經傳)》에, ‘제후는 칠우(七虞)이다.’ 하였습니다. 《오례의(五禮儀)》 【반우의(返虞儀)가 있다.】 신이 상고하건대, 예에 ‘정오에 우제(虞祭)를 지낸다. 길이 먼 경우에는 무덤에서 우제를 행한다.’ 하였으니, 반우(返虞)한다는 글에 구애될 필요가 없을 듯합니다. 16. 반곡(返哭)098) 《의례경전(儀禮經傳)》에, ‘반곡하는 사람은 서계(西階)로 올라가 동쪽을 향하고 주인은 당하(堂下)에서 동쪽을 향해 서는데 북쪽을 상(上)으로 한다. 부인은 들어가고 대부는 뛰면서[踊] 조계(阼階)로 올라간다. 주부는 실내(室內)099) 로 들어간다.’ 하였습니다. 《오례의(五禮儀)》 【없다.】 신이 상고하건대, 예에 ‘반곡하여 조문(吊問)하는 것은 슬픔이 지극한 것이다. 돌아왔으나 어버이는 이미 죽어 없어져서 어버이를 잃었으니 이때를 당하여 슬픔이 지극하다.’ 하였고, 주자가 말하기를, ‘반곡하려고 당(堂)으로 오르는 것은 돌아간 어버이가 평소 예를 행하였던 곳으로 돌아가는 것이고, 주부가 실(室)로 들어가는 것은 죽은 어버이가 평소 궤양(饋養)했던 곳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 의사를 안다면 이른바 그가 밟던 자리를 밟고 그가 행하던 예를 행하는 등의 일이 자연스럽게 행해져서 바야흐로 계지(繼志)·술사(述事)의 일을 알게 될 것이다.’ 하였습니다. 이 한 절목을 빠뜨려서는 안 될 것 같은데 국제에는 없으니 고례를 따르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17. 조석전(朝夕奠)을 파함. 신이 상고하건대, 이 한 절목은 초우(初虞) 뒤에 있어야 하는데 《의례경전(儀禮經傳)》이나 국제에 나오는 글이 없으므로 신이 삼가 《가례(家禮)》에서 따다가 보충하였습니다. 18. 부(祔)100) 《의례경전(儀禮經傳)》에, ‘명일(明日)101) 에 신주(神主)를 소목(昭穆)의 반차(班次)에 따라 종묘에 모신다.’ 【사우(士虞).】 하였고, ‘명일 조부(祖父)의 신주를 다른 사당으로 옮기고 새로 죽은 이의 신주를 조부의 신주가 있던 곳에 모신다. 상제(喪祭)가 변하여 길제(吉祭)로 가고 부묘(祔廟)하는 데는 반드시 하루를 띄우지 않고 이 날에 접속해서 행한다.’ 【예기.】 하였고, ‘부제(祔祭) 때는 상장(喪杖)을 짚고서 당(堂)102) 에 오르지 않는다.’ 【상소기(喪小記).】 하였고, 주자가 말하기를, ‘선왕(先王)께서 예를 제정한 것은 본래 인정에 따른 것이니 길흉의 사이에 변하는 것이 순서가 있다. 그러므로 처음 죽었을 때는 오로지 생존한 분을 섬기는 예를 쓰고 졸곡(卒哭)과 부묘(祔廟)를 마친 뒤에야 신(神)으로 섬긴다. 그러나 차마 다 변경할 수 없기 때문에 신주를 다시 정침(正寢)으로 모셔다가 생존한 분을 섬기는 예로 섬기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오례의(五禮儀)》 【없다.】 신이 상고하건대, 주자가 말하기를 ‘새로 죽은 분을 조부의 사당에 부(祔)하는 것은 조부에게 다른 사당으로 옮긴다는 것을 고하고 새로 죽은 분에게 이 사당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고하는 순서이다. 그런데 지금은 공실(公室)이나 사가(私家)의 묘(廟)에 모두 한 사당 안에 감실(龕室)103) 만을 달리하고 서쪽을 상(上)으로 하는 제도만이 있고 다시 좌소(左昭), 우목(右穆)의 반차(班次)가 없다. 그러므로 체천(遞遷)할 경우가 생기면 모든 감실을 다 옮기고 새로 죽은 이가 그 아버지가 있던 감실로 들어간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예의 큰 절목으로서 고례와 같지 않다. 그런데 예를 하는 자들이 오히려 조부가 있던 사당에 부(祔)한다는 예문을 고집하는 것은 의의가 없는 듯하다. 그렇다고 마침내 예를 고쳐서 아버지 사당에 부한다면 또 애례존양(愛禮存羊)104) 의 뜻이 아닐 것이다.’ 하였으니, 이에 의거해 보면 이것은 폐할 수 없는 큰 절목인데 국제에는 없으니 아마도 강정해 행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태백산사고본】 1책 1권 17장 B면【국편영인본】 35책 373면
[註 047] 인혁(因革) : 옛것을 따름과 개혁함.[註 048] 취송(聚訟) : 서로 시비하여 결말이 나지 아니함.[註 049] 정문(情文) : 내용과 형식.[註 050] 개원(開元) : 당 현종(唐玄宗)의 연호.[註 051] 변제(變除) : 변복(變服) 공제(公除).[註 052] 통상(通喪) : 상하가 통행하는 상례로 삼년상을 이름.[註 053] 경화(更化) : 정치와 교화를 고치어 새롭게 함.[註 054] 사위(事爲) : 사업.[註 055] 여러 왕손(王孫) : 소현 세자(昭顯世子)의 세 아들. 인조 25년에 당시 강빈 사건(姜嬪事件:소현 세자의 음식에 독을 넣어 죽였다는 무고 사건)이 문제가 되어 그의 소생인 왕손 3형제를 제주도에 귀양보냈는데, 이때 장자 석철(石鐵)은 12세, 차자 석린(石麟)은 8세, 삼자 석견(石堅)은 4세였다.[註 056] 고명(顧命) : 임금이 죽을 때 후사를 부탁하는 유명(遺命).[註 057] 재생백(哉生魄) : 음력 16일.[註 058] 서언(誓言) : 유언.[註 059] 노침(路寢) : 정전(正殿).[註 060] 정종(正終) : 정전에서 죽음.[註 061] 복(復) : 초혼(招魂). 사람이 죽은 몇 시간 뒤에 망인이 입던 옷을 가지고 지붕에 올라가서 왼손으로 깃을 잡고 오른손으로 허리를 잡고서 아무(何某)는 복하라고 세 번 외친 다음 그 옷으로 시신을 덮음.[註 062] 《의례경전(儀禮經傳)》 : 주자(朱子)가 찬(撰)한 《의례경전통해(儀禮經傳通解)》로 원집(原集)이 37권이고 속집이 29권임.[註 063] 시사전(始死奠) : 고복(皋復)이 끝난 뒤에 올리는 전.[註 064] 항시(巷市) : 골목에서 시장을 보는 것. 국상이 나면 애도의 뜻으로 시장을 철거하기 때문에 필요한 생필품을 골목에서 구함.[註 065] 차길(借吉) : 상제의 몸으로 길례(吉禮) 때에 특별히 길복(吉服)을 입는 것.[註 066] 천시(遷尸) : 왕이 죽어 소렴, 대렴을 마친 뒤에 왕의 시신을 당(堂)으로 옮기는 것.[註 067] 설치(楔齒) : 반함(飯含)을 하기 전에 먼저 뿔 숟가락을 아래 위의 이(齒) 사이에 끼워 입이 다물어지지 않게 하는 것.[註 068] 철족(綴足) : 시신의 발이 뒤틀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발을 의자의 다리에 묶어 놓는 것.[註 069] 유당(帷堂) : 당상(堂上)에 유막(帷幕)을 설치한 상막(喪幕).[註 070] 각사(角柶) : 뿔로 만든 숟가락.[註 071] 연궤(燕几) : 편안한 의자.[註 072] 흔창(興鬯) : 왕의 시신을 목욕시키는 울창주(鬱鬯酒).[註 073] 사기(肆器) : 너비가 8척, 길이가 12척, 깊이가 3척인 얼음을 채운 통. 하절기에 시체의 부패를 방지하기 위하여 얼음을 채운 이 통을 시신에 넣어둠.[註 074] 권의(卷衣) : 곤룡포.[註 075] 금모(錦冒) : 시체를 싸는 비단 자루 습(襲) 이후와 소렴 이전에 시체를 싸둔다.[註 076] 보쇄(黼殺) : 시체를 싸는 도끼 무늬의 수를 놓은 천. 위를 싸는 것을 보라하고 아래를 싸는 것을 쇄라함.[註 077] 모질(冒質) : 금모(錦昌)의 윗부분이다..[註 078] 쇄(殺) : 금모의 아래 부분이다.[註 079] 반옥(飯玉) : 염할 때 죽은 사람의 입에 구슬을 물리는 것.[註 080] 반미(飯米) : 염할 때 죽은 사람의 일에 쌀을 물리는 것.[註 081] 막포(幕布) : 장막을 만드는 거친 베.[註 082] 온공(溫公) : 사마광(司馬光).[註 083] 습(襲) : 죽은 사람에게 좌임포(左衽袍)를 입히는 것.[註 084] 반함(飯含) : 염할 때 죽은 사람의 입에 쌀을 물리는 것.[註 085] 환질(環絰) : 성복 때 상제가 건(巾) 위에 덧씌워 쓰는 수절(首絰).[註 086] 위모(委貌) : 관명(冠名).[註 087] 금(衾) : 홑이불.[註 088] 계빈(啓殯) : 발인(發靷)할 때 출란(出棺)하기 위하여 빈소를 여는 것.[註 089] 진조조전(陳朝祖奠) : 발인할 때 죽은 사람이 종묘로 가서 마지막으로 조상을 보이고 하직 인사를 올리게 하고 곁들어 전을 올리는 것.[註 090] 문(免) : 갓을 벗고 한 치 너비의 베로 머리를 묶고 뒤로 늘어 뜨리는 것.[註 091] 산대(散帶) : 띠의 끝을 꼬지 않고 흐트려 놓은 것.[註 092] 조전(祖奠) : 발인에 앞서 출발을 알리는 전. 조는 행신(行神)을 뜻함.[註 093] 명(銘) : 명정.[註 094] 자리[菌] : 관 밑에 까는 자리로서 관과 함께 묻는다.[註 095] 중(重) : 우제(虞祭) 이전에는 신주가 없으므로 나무를 깎아 뜰 중앙에 세워 놓고 죽은 이의 혼신이 임시로 이 나무에 의지하게 하고 또 죽은 이의 필요한 물건들을 이 나무에 매달아 놓는다.[註 096] 피(披) : 관을 끄는 끈.[註 097] 우(虞) : 장사를 지내고 돌아와서 빈궁(殯宮)에 지내는 제사. 망인의 시체는 땅으로 돌아갔으나 정기(精氣)는 정처 없이 방황하므로 우제를 올려 혼신을 안정시킴.[註 098] 반곡(返哭) : 장사를 마치고 돌아와서 종묘에서 곡을 하며 슬픔을 다하는 것.[註 099] 실내(室內) : 종묘 안.[註 100] 부(祔) : 졸곡(卒哭)이 끝난 다음날, 새로 죽은 이의 신주(神主)를 소목(昭穆)의 서차에 따라 종묘에 모시는 것.[註 101] 명일(明日) : 졸곡(卒哭) 다음날.[註 102] 당(堂) : 사당.[註 103] 감실(龕室) : 종묘 안에 신주를 모셔 놓는 장.[註 104] 애례존양(愛禮存羊) : 예를 아껴 구례(舊禮) 또는 허례(虛禮)를 버리지 않고 보전하는 것.
ⓒ 한국고전번역원
신이 상고하건대, 국제(國制)의 염습하는 도구 중 수관(首冠)에 대한 주(註)에 ‘만드는 것이 감두(頭)와 같은데 바로 복건(幅巾)이다.’ 하였으니, 감두는 우리 나라 세속에서 만드는 복건입니다. 온공(溫公)082) 과 주자가 쓴 복건의 형제(形制)가 같지 않은데 지금 합하여 한 물건으로 여기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리고 곤룡포를 입은 시신의 머리에 복건을 씌우는 것은 더욱 서로 어울리지 않으니, 만약 곤룡포를 사용한다면 고례를 따라 작변(爵弁)이나 현면(玄冕)을 사용하는 것이 타당할 듯하고 만약 꼭 복건을 사용하고자 하면 심의(深衣)를 사용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심의가 지금은 비록 야인(野人)의 옷이지만 황제(黃帝)로부터 이미 입었고, 그 뜻이 매우 깊어 규(規)·구(矩)·승(繩)·권(權)·형(衡) 등 다섯 가지 법이 들어 있기 때문에 성인께서도 입으셨고 선왕들께서도 귀하게 여겼습니다. 지금 염습하는 데 이미 복건과 대대(大帶)를 사용하였으니, 심의를 입히는 것도 불가함이 없을 듯합니다. 그리고 질쇄(質殺)는 바로 옛 제도로서 죽은 사람을 보호하는 데 매우 온당하고도 절실한 것인데 국제에는 그것이 없으니 첨가해 보충함이 마땅할 듯합니다.
7. 습(襲)083) ·반함(飯含)084) .
《의례경전(儀禮經傳)》에 ‘증자(曾子)가 말하기를 「부인의 옷으로 습하지 않는다.」 하였다.’ 【잡기(雜記).】 하였고, ‘제후는 일곱 벌, 공(公)은 아홉 벌이다.’ 하였고, ‘대축(大祝)이 반함(飯含)을 돕는다.’ 【춘관(春官).】 하였고, ‘태재(太宰)가 함옥(含玉)을 돕는다.’라고 한 주(注)에, ‘왕을 도와 하는 것이다.’ 【천관(天官).】 하였고, 《의례(儀禮)》의 ‘포건(布巾)은 길이와 너비를 같게 한다.’라고 한 주(注)에, ‘대부 이상은 빈(賓)이 한다.’ 하였는데, 그 소(疏)에 ‘대부 이상은 신하가 있으니 신하가 빈이 된다. 빈이 반함하는 것은 악취가 나올 것을 꺼리기 때문에 포건으로 얼굴을 덮고 입 부위에 구멍을 뚫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오례의(五禮儀)》 【반함은 습전(襲奠) 뒤에 있는데 내시가 거행한다.】 신이 상고하건대, 예에 ‘반함하는 것은 죽었다 하여 차마 입을 비게 하지 않는 것이다.’ 하였으니 봉양의 뜻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례에는 혹 왕이 친히 하기도 하고 빈이 하기도 하였는데 지금은 내시를 사용하여 시키니 매우 설만(褻慢)한 듯합니다. 왕이 친히 하는 것이 실로 정례(情禮)에 부합됩니다. 8. 환질(環絰)085) 을 갖추는 것. 《의례경전(儀禮經傳)》에 ‘소렴을 마치고는 머리에 질(絰)을 두르는데 공과 대부가 동일하다.’라고 한 소(疏)에, ‘어버이가 죽으면 효자는 갓을 벗는다. 그러나 소렴 때에 이르러서는 머리에 수식(首飾)이 없을 수 없다. 사(士)는 흰 위모(委貌)086) 를 쓰고 대부 이상은 소변(素弁)을 쓰니 귀천이 모두 머리에 환질(環絰)을 두를 수 있다.’ 하였는데, 구씨(丘氏)는 ‘이것을 살펴보면 수질(首絰) 밑에 반드시 건모(巾帽)가 있어 수질을 받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위모와 작변(爵弁)의 종류가 지금 세상에는 없으니 백포건(白布巾)을 사용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고, ‘환질은 삼[麻] 한 가닥으로 감는 것이다.’ 하였고, ‘염이 끝난 뒤에는 소관(素冠)을 벗어 버린다.’ 【상소기(喪小記)의 주(註).】 하였습니다. 《오례의(五禮儀)》 【없다.】 신이 상고하건대, 처음 죽었을 때에는 시체가 복식(服飾)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효자가 머리를 풀어뜨리고 상사에 임하지만 소렴을 하는 데 이르러서는 시체에 이미 복식을 하였으므로 효자도 수식이 없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환질과 소변(素弁)을 갖추는 것인데 국제(國制)에는 없으니 고례로써 첨가해 보충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9. 대렴(大斂). 《의례경전(儀禮經傳)》에, ‘임금은 장차 대렴하려 할 때에 아들은 소변 위에 수질을 두르고서 동서(東序) 남단의 자리로 나아가고, 경대부는 당(堂)의 모서리 기둥 서쪽 자리로 나아가 북쪽을 향하는데 동쪽을 상(上)으로 하고, 부형(父兄)은 당 밑에서 북쪽을 향하고, 부인(夫人)·명부(命婦)는 시체의 서쪽에서 동쪽을 향하고, 외종(外宗)은 방 안에서 남쪽을 향하고, 소신(小臣)은 자리를 펴고, 상축(商祝)은 교금(絞紟), 금(衾)087) , 옷 등을 펴놓고, 사(士)는 소반 위에 있는 물에 손을 씻고서 시신을 들어다가 염(斂)하는 곳에 옮겨놓는다. 염이 끝난 다음 태재(太宰)가 염이 끝났음을 고하면 아들이 시신에 기대어 곡용(哭踊)하고 부인도 동쪽을 향하여 역시 그렇게 한다.’ 【상대기.】 하였습니다. 《오례의(五禮儀)》 【대략 같은데 전(奠)이 있고, 또 질쇄(質殺)가 이때에 와서 비로소 사용된다.】 신이 상고하건대, 고례에는 대렴과 성빈(成殯)을 합쳐 한 번의 전을 올리는데 빈을 한 뒤에 비로소 전을 베푼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국제에는 대렴과 성빈에 각기 전을 베푸니 아마도 고례를 따르는 것을 정례(正禮)로 삼아야 마땅할 듯합니다. 그리고 또 질쇄는 바로 시체에 옷을 입힐 때 사용하는 것인데 국제에는 이때에 와서 비로소 사용하니 아마도 고례의 뜻이 아닌 듯합니다. 10. 성복(成服). 《의례경전(儀禮經傳)》에, ‘임금의 상에는 3일 뒤에 아들과 부인이 장(杖)을 짚고 5일 뒤 빈소를 마치고서 대부, 세부(世婦)에게 상장을 준다.’ 【상대기.】 하였고, ‘천자가 죽으면 3일 만에 축(祝)이 먼저 복을 입고, 5일 만에 관장(官長)이 복을 입고, 7일 만에 국중(國中)의 남녀가 복을 입고, 석달 만에 천하가 복을 입는다.’ 【단궁(檀弓).】 하였고, ‘사사(肆師)가 외내(外內) 명남녀(命男女)의 상복이 법에 맞지 않는 자를 금한다.’ 【춘관(春官).】 하였고, 주자가 말하기를, ‘참최 3년은 아비와 임금을 위하여 입는 복이다. 그 복은 포관(布冠), 포삼(布杉)에 벽령(辟領), 부판(負版)을 단 최복(衰服)과 엄임(掩衽), 친삼(襯杉), 포군(布君)을 입고 마(麻)로 만든 요질(腰絰), 수질(首絰), 마대(麻帶)를 두르고 짚신을 신고 죽장(竹杖)을 짚는데 천자로부터 서인에 이르기까지 신분의 귀천으로써 증손(增損)하는 바가 없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임금과 신하의 복이 같으나 약간의 구별을 하여 상하를 분별한다. 13개월 만에 연복(練服)을 입고서 소상(小祥)을 지내고 25개월 만에 난복(襴襆)을 하고서 담제(禫祭)를 지내고 27개월 만에 조복을 입고서 상을 벗는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초상(初喪) 때는 마땅히 고례에 따라 상복을 지어 입고서 상에 임하고, 따로 포(布)로 복두(幞頭), 공복(公服), 혁대(革帶)를 만들어 착용하고서 조회하는 것이 예에 합당하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예에 임금의 상사에 달관(達官)의 장(長)들은 죽장(竹杖)을 짚는다 하였는데, 이른바 달관이란 일을 전담하여 임금께 주달(奏達)할 수 있는 관원을 이름이다. 오늘에 있어서는 안으로 성(省)·조(曹)·시(寺)·감(監)의 장관과 밖으로는 감사·군수 등으로서 모든 사(司)의 장과 일찍이 시종(侍從) 이상의 관직을 역임하여 전담해서 일을 주달했던 이들이 바로 달관이다. 그러므로 지금 상장을 짚지 않는 제도를 요좌(僚佐) 이하에게 시행한다면 가하지만 심지어는 그 장관들로 하여금 아랫사람과 함께 상장을 짚지 않게 하고 있는데, 비록 지난날 정승과 장수를 지낸 사람이 벼슬하지 않고 집에 있다 할지라도 다른 것이 없게 한다면 어찌 박하지 아니한가.’ 하였고, 또 말하기를, ‘전에 보니 효종(孝宗)께서는 장사를 지낸 뒤에도 오히려 백포의관(白布衣冠)으로 조회를 보셨으니 이는 매우 성대한 덕이다. 전세에는 임금이 스스로 복을 입지 않았기 때문에 고례를 행할 수 없었던 것이지만, 당시에는 이런 좋은 기회가 있었는데도 유신(儒臣)과 예관(禮官)이 이룩해 밝혀서 1대의 제도로 만들지 못하여 드디어 임금은 위에서 복을 입는데 신하들은 아래에서 복을 벗게 하여 잘못을 인습하였으니 매우 통한스럽다.’ 하였습니다. 《오례의(五禮儀)》에는, ‘종친과 문무 백관은 단령의(團領衣)에 베[布]로 싼 사모를 쓰고 마대(麻帶)를 매고 백피화(白皮靴)를 신었다가 졸곡(卒哭) 뒤에는 백의(白衣)에 오사모(烏紗帽)를 쓰고 흑각대(黑角帶)를 띤다. 모든 상사에는 최복을 입고 연제(練祭) 때에는 연포(練布)로 사모를 싼다.’ 하였습니다. 신이 상고하건대, 《오례의(五禮儀)》의 복제(服制)는 매우 윤서(倫緖)가 없습니다. 대체로 임금과 아비는 일체인데 어찌 아비에 대해서는 순전히 상복을 사용하고 임금에 대해서는 조복의 제도를 섞어 사용하여 반은 높이고 반은 낮추는 의전(儀典)이 있겠습니까. 그리고 또 전함(前銜)은 지금은 비록 관직이 없다 하더라도 그의 이름이 이미 사적(仕籍)에 있으니 실로 관직에 있는 자와 조금도 다를 것이 없는데 사인(士人)과 함께 백의를 입는 제도는 더더욱 옳지 않습니다. 일찍이 상고하건대 송 영종(宋寧宗) 초기에 천자는 칠사천황복(漆紗淺黃服)을 입었는데 신하들은 이미 역월(易月)했다 하여 복을 입지 않으니, 주자가 차자를 올려 이미 지난 실수는 뒤에 와서 고칠 수 없거니와 앞으로 계빈(啓殯)088) 하여 발인(發靷)할 때는 마땅히 다시 초상 때의 상복을 착용해야 된다고 하였습니다. 지난해에 지평 민순(閔純)이 헌의(獻議)하여 《오례의(五禮儀)》를 고치어 너무 심한 것을 약간 제거하였으니, 신이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신의 이 건의를 예관에게 내리시어 한결같이 주자가 손익한 제도를 따라 속히 지휘하여 백관으로 하여금 미리 최복을 준비하였다가 발인할 때에 입고서 들어와 임하도록 하고, 지금 입고 있는 단령은 그 끝을 꿰매어 입고 포모(布帽)와 포로 싼 각대(角帶)와 백화(白靴)로써 일을 볼 때 입는 복장으로 삼게 하소서. 그리고 전함들에게도 이때 다시 성복(成服)하게 하면 사의(事宜)에 합당할 것 같습니다. 11. 조석전(朝夕奠). 《의례경전(儀禮經傳)》에, ‘사복(司服)이 전(奠)드릴 때 입는 의복을 이바지한다.’ 【춘관.】 하였습니다. 《오례의(五禮儀)》 【배례(拜禮)가 없다.】 신이 상고하건대, 고례는 다만 대개만을 들었을 뿐, 배례(拜禮)의 절목은 말하지 않았습니다. 《주자가례(朱子家禮)》에 성복(成服) 전의 대소렴전(大小斂奠)에는 모두 효자(孝子)의 배례를 말하지 않고 성복 후에서야 비로소 주인 이하의 재배를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국제에는 없으니 아마도 주자의 설을 따르는 것이 무방할 듯합니다. 12. 진조조전(陳朝祖奠)089) 《의례경전(儀禮經傳)》에, ‘내수(內竪)는 상기(喪紀)의 일이 있을 때이면 내인(內人)들을 벽제(辟除)한다.’ 하였고, ‘세부(世婦)가 여궁(女宮)을 거느리고서 자성(粢盛)을 씻어 제기(祭器)에 담는다.’ 하였습니다. 《오례의(五禮儀)》 【조조(朝祖)와 전(奠)이 없다.】 신이 상고하건대, 예(禮)에 ‘상구(喪柩)를 조상의 종묘로 옮겨 망인(亡人)이 조상을 뵙게 하는 것은 망인의 효심을 따르는 것이니 망인의 처지에서 보면 평소 거처하던 침실을 떠나는 것이 슬프다. 그러므로 조고(祖考)의 종묘에 가서 결별하고서 떠나는 것이다.’ 하였으니, 이는 진실로 예의 큰 절목으로서 폐할 수 없는 것인데 국제에는 없으니 아마도 강구해 행해야 될 듯합니다. 그리고 이어 정제(定制)로 삼으시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13. 계(啓). 《의례경전(儀禮經傳)》에, ‘상축(喪祝)이 계한다.’ 하였고, ‘장부(丈夫)는 문(免)090) 하고 부인은 복머리[髽]를 하고 산대(散帶)091) 를 드리우고서 자리로 나아간다.’ 하였고, ‘계하는 새벽에는 외내가 모두 곡하지 않는다.’ 【기(記).】 하였습니다. 《오례의(五禮儀)》 【변복(變服)하는 절차가 없다.】 신이 상고하건대, 계빈(啓殯)은 시구(尸柩)를 뵙는 것이므로 소렴 때처럼 변복하는 것입니다. 이는 큰 절목인데 국제에는 없으니 고례를 따르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14. 조전(祖奠)092) . 《의례경전(儀禮經傳)》에, ‘조전에 깔 건석(巾席)을 걷고서 서쪽에서 기다리면 주인은 허리를 굽히고서 올라가고 부인은 뛰면서[踊] 내려간다. 주인이 단(袒)하면 상축(商祝)이 상구(喪柩)를 실은 수레를 어거하여 출발해 조금 가다가 멈춘다. 주인은 뛰면서 단했던 옷소매를 바르게 입고서 상구를 실은 수레 앞으로 가서 상구의 남쪽을 수레에 묶고, 부인은 내려와서 섬돌 사이의 위치로 나아간다. 떠나가는 데는[祖] 순서가 있기 때문에 수레는 방향을 틀지만 음식을 차려놓았던 그릇은 방향을 돌리지 않는다. 축(祝)이 명(銘)093) 을 가져다가 자리[菌]094) 위에 놓으면 두 사람이 중(重)095) 의 왼쪽을 돌아 나아가서 자리를 펴고 조전을 앞서와 같이 행한다. 그러면 주인은 허리를 굽히고서 말을 바치기를[薦馬] 앞서와 같이 한다. 빈(賓)이 나아가면 주인이 전송한다.’ 하였고, 《예기(禮記)》에, ‘뜰에서 조전을 행한다.’ 【상례의(喪禮儀)에 자세히 보인다.】 하였고, ‘상구를 실은 수레가 출발하여 조금 가다가 멈추는데 수레의 방향은 돌리지만 위치는 바뀌지 않고, 곁에서 네 사람이 피(披)096) 를 잡는다.’ 【본경(本經)의 기록이다.】 하였고, ‘축(祝)이 조전의 제찬(祭饌)을 주인의 남쪽에 있는 수레[輅] 앞에 북쪽을 상(上)으로 하여 차려 놓고서 보자기로 덮는다.’ 【상동(上同).】 하였습니다. 《오례의(五禮儀)》 【대략 같다.】 신이 상고하건대, 국제(國制)에 비록 이 의전(儀典)이 있으나 이미 조조(朝祖)에 관한 절목이 없으므로 이 의전을 빈전(殯殿)에서 시행하고서 그대로 발인하니 매우 먼 길을 가는데 가까운 데서부터 점진적으로 나아가는 뜻이 아닙니다. 고례에는 조조의 의전이 있고, 이어 조전(祖奠)을 묘정(廟庭)에서 행하고, 이튿날 새벽에 견전(遣奠)을 행하고서 발인합니다. 발인 절차는 《의례(儀禮)》에 자세히 나타나 있습니다. 15. 우(虞)097) 《의례경전(儀禮經傳)》에, ‘제후는 칠우(七虞)이다.’ 하였습니다. 《오례의(五禮儀)》 【반우의(返虞儀)가 있다.】 신이 상고하건대, 예에 ‘정오에 우제(虞祭)를 지낸다. 길이 먼 경우에는 무덤에서 우제를 행한다.’ 하였으니, 반우(返虞)한다는 글에 구애될 필요가 없을 듯합니다. 16. 반곡(返哭)098) 《의례경전(儀禮經傳)》에, ‘반곡하는 사람은 서계(西階)로 올라가 동쪽을 향하고 주인은 당하(堂下)에서 동쪽을 향해 서는데 북쪽을 상(上)으로 한다. 부인은 들어가고 대부는 뛰면서[踊] 조계(阼階)로 올라간다. 주부는 실내(室內)099) 로 들어간다.’ 하였습니다. 《오례의(五禮儀)》 【없다.】 신이 상고하건대, 예에 ‘반곡하여 조문(吊問)하는 것은 슬픔이 지극한 것이다. 돌아왔으나 어버이는 이미 죽어 없어져서 어버이를 잃었으니 이때를 당하여 슬픔이 지극하다.’ 하였고, 주자가 말하기를, ‘반곡하려고 당(堂)으로 오르는 것은 돌아간 어버이가 평소 예를 행하였던 곳으로 돌아가는 것이고, 주부가 실(室)로 들어가는 것은 죽은 어버이가 평소 궤양(饋養)했던 곳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 의사를 안다면 이른바 그가 밟던 자리를 밟고 그가 행하던 예를 행하는 등의 일이 자연스럽게 행해져서 바야흐로 계지(繼志)·술사(述事)의 일을 알게 될 것이다.’ 하였습니다. 이 한 절목을 빠뜨려서는 안 될 것 같은데 국제에는 없으니 고례를 따르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17. 조석전(朝夕奠)을 파함. 신이 상고하건대, 이 한 절목은 초우(初虞) 뒤에 있어야 하는데 《의례경전(儀禮經傳)》이나 국제에 나오는 글이 없으므로 신이 삼가 《가례(家禮)》에서 따다가 보충하였습니다. 18. 부(祔)100) 《의례경전(儀禮經傳)》에, ‘명일(明日)101) 에 신주(神主)를 소목(昭穆)의 반차(班次)에 따라 종묘에 모신다.’ 【사우(士虞).】 하였고, ‘명일 조부(祖父)의 신주를 다른 사당으로 옮기고 새로 죽은 이의 신주를 조부의 신주가 있던 곳에 모신다. 상제(喪祭)가 변하여 길제(吉祭)로 가고 부묘(祔廟)하는 데는 반드시 하루를 띄우지 않고 이 날에 접속해서 행한다.’ 【예기.】 하였고, ‘부제(祔祭) 때는 상장(喪杖)을 짚고서 당(堂)102) 에 오르지 않는다.’ 【상소기(喪小記).】 하였고, 주자가 말하기를, ‘선왕(先王)께서 예를 제정한 것은 본래 인정에 따른 것이니 길흉의 사이에 변하는 것이 순서가 있다. 그러므로 처음 죽었을 때는 오로지 생존한 분을 섬기는 예를 쓰고 졸곡(卒哭)과 부묘(祔廟)를 마친 뒤에야 신(神)으로 섬긴다. 그러나 차마 다 변경할 수 없기 때문에 신주를 다시 정침(正寢)으로 모셔다가 생존한 분을 섬기는 예로 섬기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오례의(五禮儀)》 【없다.】 신이 상고하건대, 주자가 말하기를 ‘새로 죽은 분을 조부의 사당에 부(祔)하는 것은 조부에게 다른 사당으로 옮긴다는 것을 고하고 새로 죽은 분에게 이 사당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고하는 순서이다. 그런데 지금은 공실(公室)이나 사가(私家)의 묘(廟)에 모두 한 사당 안에 감실(龕室)103) 만을 달리하고 서쪽을 상(上)으로 하는 제도만이 있고 다시 좌소(左昭), 우목(右穆)의 반차(班次)가 없다. 그러므로 체천(遞遷)할 경우가 생기면 모든 감실을 다 옮기고 새로 죽은 이가 그 아버지가 있던 감실로 들어간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예의 큰 절목으로서 고례와 같지 않다. 그런데 예를 하는 자들이 오히려 조부가 있던 사당에 부(祔)한다는 예문을 고집하는 것은 의의가 없는 듯하다. 그렇다고 마침내 예를 고쳐서 아버지 사당에 부한다면 또 애례존양(愛禮存羊)104) 의 뜻이 아닐 것이다.’ 하였으니, 이에 의거해 보면 이것은 폐할 수 없는 큰 절목인데 국제에는 없으니 아마도 강정해 행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태백산사고본】 1책 1권 17장 B면【국편영인본】 35책 373면
[註 047] 인혁(因革) : 옛것을 따름과 개혁함.[註 048] 취송(聚訟) : 서로 시비하여 결말이 나지 아니함.[註 049] 정문(情文) : 내용과 형식.[註 050] 개원(開元) : 당 현종(唐玄宗)의 연호.[註 051] 변제(變除) : 변복(變服) 공제(公除).[註 052] 통상(通喪) : 상하가 통행하는 상례로 삼년상을 이름.[註 053] 경화(更化) : 정치와 교화를 고치어 새롭게 함.[註 054] 사위(事爲) : 사업.[註 055] 여러 왕손(王孫) : 소현 세자(昭顯世子)의 세 아들. 인조 25년에 당시 강빈 사건(姜嬪事件:소현 세자의 음식에 독을 넣어 죽였다는 무고 사건)이 문제가 되어 그의 소생인 왕손 3형제를 제주도에 귀양보냈는데, 이때 장자 석철(石鐵)은 12세, 차자 석린(石麟)은 8세, 삼자 석견(石堅)은 4세였다.[註 056] 고명(顧命) : 임금이 죽을 때 후사를 부탁하는 유명(遺命).[註 057] 재생백(哉生魄) : 음력 16일.[註 058] 서언(誓言) : 유언.[註 059] 노침(路寢) : 정전(正殿).[註 060] 정종(正終) : 정전에서 죽음.[註 061] 복(復) : 초혼(招魂). 사람이 죽은 몇 시간 뒤에 망인이 입던 옷을 가지고 지붕에 올라가서 왼손으로 깃을 잡고 오른손으로 허리를 잡고서 아무(何某)는 복하라고 세 번 외친 다음 그 옷으로 시신을 덮음.[註 062] 《의례경전(儀禮經傳)》 : 주자(朱子)가 찬(撰)한 《의례경전통해(儀禮經傳通解)》로 원집(原集)이 37권이고 속집이 29권임.[註 063] 시사전(始死奠) : 고복(皋復)이 끝난 뒤에 올리는 전.[註 064] 항시(巷市) : 골목에서 시장을 보는 것. 국상이 나면 애도의 뜻으로 시장을 철거하기 때문에 필요한 생필품을 골목에서 구함.[註 065] 차길(借吉) : 상제의 몸으로 길례(吉禮) 때에 특별히 길복(吉服)을 입는 것.[註 066] 천시(遷尸) : 왕이 죽어 소렴, 대렴을 마친 뒤에 왕의 시신을 당(堂)으로 옮기는 것.[註 067] 설치(楔齒) : 반함(飯含)을 하기 전에 먼저 뿔 숟가락을 아래 위의 이(齒) 사이에 끼워 입이 다물어지지 않게 하는 것.[註 068] 철족(綴足) : 시신의 발이 뒤틀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발을 의자의 다리에 묶어 놓는 것.[註 069] 유당(帷堂) : 당상(堂上)에 유막(帷幕)을 설치한 상막(喪幕).[註 070] 각사(角柶) : 뿔로 만든 숟가락.[註 071] 연궤(燕几) : 편안한 의자.[註 072] 흔창(興鬯) : 왕의 시신을 목욕시키는 울창주(鬱鬯酒).[註 073] 사기(肆器) : 너비가 8척, 길이가 12척, 깊이가 3척인 얼음을 채운 통. 하절기에 시체의 부패를 방지하기 위하여 얼음을 채운 이 통을 시신에 넣어둠.[註 074] 권의(卷衣) : 곤룡포.[註 075] 금모(錦冒) : 시체를 싸는 비단 자루 습(襲) 이후와 소렴 이전에 시체를 싸둔다.[註 076] 보쇄(黼殺) : 시체를 싸는 도끼 무늬의 수를 놓은 천. 위를 싸는 것을 보라하고 아래를 싸는 것을 쇄라함.[註 077] 모질(冒質) : 금모(錦昌)의 윗부분이다..[註 078] 쇄(殺) : 금모의 아래 부분이다.[註 079] 반옥(飯玉) : 염할 때 죽은 사람의 입에 구슬을 물리는 것.[註 080] 반미(飯米) : 염할 때 죽은 사람의 일에 쌀을 물리는 것.[註 081] 막포(幕布) : 장막을 만드는 거친 베.[註 082] 온공(溫公) : 사마광(司馬光).[註 083] 습(襲) : 죽은 사람에게 좌임포(左衽袍)를 입히는 것.[註 084] 반함(飯含) : 염할 때 죽은 사람의 입에 쌀을 물리는 것.[註 085] 환질(環絰) : 성복 때 상제가 건(巾) 위에 덧씌워 쓰는 수절(首絰).[註 086] 위모(委貌) : 관명(冠名).[註 087] 금(衾) : 홑이불.[註 088] 계빈(啓殯) : 발인(發靷)할 때 출란(出棺)하기 위하여 빈소를 여는 것.[註 089] 진조조전(陳朝祖奠) : 발인할 때 죽은 사람이 종묘로 가서 마지막으로 조상을 보이고 하직 인사를 올리게 하고 곁들어 전을 올리는 것.[註 090] 문(免) : 갓을 벗고 한 치 너비의 베로 머리를 묶고 뒤로 늘어 뜨리는 것.[註 091] 산대(散帶) : 띠의 끝을 꼬지 않고 흐트려 놓은 것.[註 092] 조전(祖奠) : 발인에 앞서 출발을 알리는 전. 조는 행신(行神)을 뜻함.[註 093] 명(銘) : 명정.[註 094] 자리[菌] : 관 밑에 까는 자리로서 관과 함께 묻는다.[註 095] 중(重) : 우제(虞祭) 이전에는 신주가 없으므로 나무를 깎아 뜰 중앙에 세워 놓고 죽은 이의 혼신이 임시로 이 나무에 의지하게 하고 또 죽은 이의 필요한 물건들을 이 나무에 매달아 놓는다.[註 096] 피(披) : 관을 끄는 끈.[註 097] 우(虞) : 장사를 지내고 돌아와서 빈궁(殯宮)에 지내는 제사. 망인의 시체는 땅으로 돌아갔으나 정기(精氣)는 정처 없이 방황하므로 우제를 올려 혼신을 안정시킴.[註 098] 반곡(返哭) : 장사를 마치고 돌아와서 종묘에서 곡을 하며 슬픔을 다하는 것.[註 099] 실내(室內) : 종묘 안.[註 100] 부(祔) : 졸곡(卒哭)이 끝난 다음날, 새로 죽은 이의 신주(神主)를 소목(昭穆)의 서차에 따라 종묘에 모시는 것.[註 101] 명일(明日) : 졸곡(卒哭) 다음날.[註 102] 당(堂) : 사당.[註 103] 감실(龕室) : 종묘 안에 신주를 모셔 놓는 장.[註 104] 애례존양(愛禮存羊) : 예를 아껴 구례(舊禮) 또는 허례(虛禮)를 버리지 않고 보전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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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상고하건대, 예에 ‘반함하는 것은 죽었다 하여 차마 입을 비게 하지 않는 것이다.’ 하였으니 봉양의 뜻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례에는 혹 왕이 친히 하기도 하고 빈이 하기도 하였는데 지금은 내시를 사용하여 시키니 매우 설만(褻慢)한 듯합니다. 왕이 친히 하는 것이 실로 정례(情禮)에 부합됩니다.
8. 환질(環絰)085) 을 갖추는 것.
《의례경전(儀禮經傳)》에 ‘소렴을 마치고는 머리에 질(絰)을 두르는데 공과 대부가 동일하다.’라고 한 소(疏)에, ‘어버이가 죽으면 효자는 갓을 벗는다. 그러나 소렴 때에 이르러서는 머리에 수식(首飾)이 없을 수 없다. 사(士)는 흰 위모(委貌)086) 를 쓰고 대부 이상은 소변(素弁)을 쓰니 귀천이 모두 머리에 환질(環絰)을 두를 수 있다.’ 하였는데, 구씨(丘氏)는 ‘이것을 살펴보면 수질(首絰) 밑에 반드시 건모(巾帽)가 있어 수질을 받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위모와 작변(爵弁)의 종류가 지금 세상에는 없으니 백포건(白布巾)을 사용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고, ‘환질은 삼[麻] 한 가닥으로 감는 것이다.’ 하였고, ‘염이 끝난 뒤에는 소관(素冠)을 벗어 버린다.’ 【상소기(喪小記)의 주(註).】 하였습니다.
《오례의(五禮儀)》 【없다.】 신이 상고하건대, 처음 죽었을 때에는 시체가 복식(服飾)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효자가 머리를 풀어뜨리고 상사에 임하지만 소렴을 하는 데 이르러서는 시체에 이미 복식을 하였으므로 효자도 수식이 없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환질과 소변(素弁)을 갖추는 것인데 국제(國制)에는 없으니 고례로써 첨가해 보충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9. 대렴(大斂). 《의례경전(儀禮經傳)》에, ‘임금은 장차 대렴하려 할 때에 아들은 소변 위에 수질을 두르고서 동서(東序) 남단의 자리로 나아가고, 경대부는 당(堂)의 모서리 기둥 서쪽 자리로 나아가 북쪽을 향하는데 동쪽을 상(上)으로 하고, 부형(父兄)은 당 밑에서 북쪽을 향하고, 부인(夫人)·명부(命婦)는 시체의 서쪽에서 동쪽을 향하고, 외종(外宗)은 방 안에서 남쪽을 향하고, 소신(小臣)은 자리를 펴고, 상축(商祝)은 교금(絞紟), 금(衾)087) , 옷 등을 펴놓고, 사(士)는 소반 위에 있는 물에 손을 씻고서 시신을 들어다가 염(斂)하는 곳에 옮겨놓는다. 염이 끝난 다음 태재(太宰)가 염이 끝났음을 고하면 아들이 시신에 기대어 곡용(哭踊)하고 부인도 동쪽을 향하여 역시 그렇게 한다.’ 【상대기.】 하였습니다. 《오례의(五禮儀)》 【대략 같은데 전(奠)이 있고, 또 질쇄(質殺)가 이때에 와서 비로소 사용된다.】 신이 상고하건대, 고례에는 대렴과 성빈(成殯)을 합쳐 한 번의 전을 올리는데 빈을 한 뒤에 비로소 전을 베푼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국제에는 대렴과 성빈에 각기 전을 베푸니 아마도 고례를 따르는 것을 정례(正禮)로 삼아야 마땅할 듯합니다. 그리고 또 질쇄는 바로 시체에 옷을 입힐 때 사용하는 것인데 국제에는 이때에 와서 비로소 사용하니 아마도 고례의 뜻이 아닌 듯합니다. 10. 성복(成服). 《의례경전(儀禮經傳)》에, ‘임금의 상에는 3일 뒤에 아들과 부인이 장(杖)을 짚고 5일 뒤 빈소를 마치고서 대부, 세부(世婦)에게 상장을 준다.’ 【상대기.】 하였고, ‘천자가 죽으면 3일 만에 축(祝)이 먼저 복을 입고, 5일 만에 관장(官長)이 복을 입고, 7일 만에 국중(國中)의 남녀가 복을 입고, 석달 만에 천하가 복을 입는다.’ 【단궁(檀弓).】 하였고, ‘사사(肆師)가 외내(外內) 명남녀(命男女)의 상복이 법에 맞지 않는 자를 금한다.’ 【춘관(春官).】 하였고, 주자가 말하기를, ‘참최 3년은 아비와 임금을 위하여 입는 복이다. 그 복은 포관(布冠), 포삼(布杉)에 벽령(辟領), 부판(負版)을 단 최복(衰服)과 엄임(掩衽), 친삼(襯杉), 포군(布君)을 입고 마(麻)로 만든 요질(腰絰), 수질(首絰), 마대(麻帶)를 두르고 짚신을 신고 죽장(竹杖)을 짚는데 천자로부터 서인에 이르기까지 신분의 귀천으로써 증손(增損)하는 바가 없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임금과 신하의 복이 같으나 약간의 구별을 하여 상하를 분별한다. 13개월 만에 연복(練服)을 입고서 소상(小祥)을 지내고 25개월 만에 난복(襴襆)을 하고서 담제(禫祭)를 지내고 27개월 만에 조복을 입고서 상을 벗는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초상(初喪) 때는 마땅히 고례에 따라 상복을 지어 입고서 상에 임하고, 따로 포(布)로 복두(幞頭), 공복(公服), 혁대(革帶)를 만들어 착용하고서 조회하는 것이 예에 합당하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예에 임금의 상사에 달관(達官)의 장(長)들은 죽장(竹杖)을 짚는다 하였는데, 이른바 달관이란 일을 전담하여 임금께 주달(奏達)할 수 있는 관원을 이름이다. 오늘에 있어서는 안으로 성(省)·조(曹)·시(寺)·감(監)의 장관과 밖으로는 감사·군수 등으로서 모든 사(司)의 장과 일찍이 시종(侍從) 이상의 관직을 역임하여 전담해서 일을 주달했던 이들이 바로 달관이다. 그러므로 지금 상장을 짚지 않는 제도를 요좌(僚佐) 이하에게 시행한다면 가하지만 심지어는 그 장관들로 하여금 아랫사람과 함께 상장을 짚지 않게 하고 있는데, 비록 지난날 정승과 장수를 지낸 사람이 벼슬하지 않고 집에 있다 할지라도 다른 것이 없게 한다면 어찌 박하지 아니한가.’ 하였고, 또 말하기를, ‘전에 보니 효종(孝宗)께서는 장사를 지낸 뒤에도 오히려 백포의관(白布衣冠)으로 조회를 보셨으니 이는 매우 성대한 덕이다. 전세에는 임금이 스스로 복을 입지 않았기 때문에 고례를 행할 수 없었던 것이지만, 당시에는 이런 좋은 기회가 있었는데도 유신(儒臣)과 예관(禮官)이 이룩해 밝혀서 1대의 제도로 만들지 못하여 드디어 임금은 위에서 복을 입는데 신하들은 아래에서 복을 벗게 하여 잘못을 인습하였으니 매우 통한스럽다.’ 하였습니다. 《오례의(五禮儀)》에는, ‘종친과 문무 백관은 단령의(團領衣)에 베[布]로 싼 사모를 쓰고 마대(麻帶)를 매고 백피화(白皮靴)를 신었다가 졸곡(卒哭) 뒤에는 백의(白衣)에 오사모(烏紗帽)를 쓰고 흑각대(黑角帶)를 띤다. 모든 상사에는 최복을 입고 연제(練祭) 때에는 연포(練布)로 사모를 싼다.’ 하였습니다. 신이 상고하건대, 《오례의(五禮儀)》의 복제(服制)는 매우 윤서(倫緖)가 없습니다. 대체로 임금과 아비는 일체인데 어찌 아비에 대해서는 순전히 상복을 사용하고 임금에 대해서는 조복의 제도를 섞어 사용하여 반은 높이고 반은 낮추는 의전(儀典)이 있겠습니까. 그리고 또 전함(前銜)은 지금은 비록 관직이 없다 하더라도 그의 이름이 이미 사적(仕籍)에 있으니 실로 관직에 있는 자와 조금도 다를 것이 없는데 사인(士人)과 함께 백의를 입는 제도는 더더욱 옳지 않습니다. 일찍이 상고하건대 송 영종(宋寧宗) 초기에 천자는 칠사천황복(漆紗淺黃服)을 입었는데 신하들은 이미 역월(易月)했다 하여 복을 입지 않으니, 주자가 차자를 올려 이미 지난 실수는 뒤에 와서 고칠 수 없거니와 앞으로 계빈(啓殯)088) 하여 발인(發靷)할 때는 마땅히 다시 초상 때의 상복을 착용해야 된다고 하였습니다. 지난해에 지평 민순(閔純)이 헌의(獻議)하여 《오례의(五禮儀)》를 고치어 너무 심한 것을 약간 제거하였으니, 신이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신의 이 건의를 예관에게 내리시어 한결같이 주자가 손익한 제도를 따라 속히 지휘하여 백관으로 하여금 미리 최복을 준비하였다가 발인할 때에 입고서 들어와 임하도록 하고, 지금 입고 있는 단령은 그 끝을 꿰매어 입고 포모(布帽)와 포로 싼 각대(角帶)와 백화(白靴)로써 일을 볼 때 입는 복장으로 삼게 하소서. 그리고 전함들에게도 이때 다시 성복(成服)하게 하면 사의(事宜)에 합당할 것 같습니다. 11. 조석전(朝夕奠). 《의례경전(儀禮經傳)》에, ‘사복(司服)이 전(奠)드릴 때 입는 의복을 이바지한다.’ 【춘관.】 하였습니다. 《오례의(五禮儀)》 【배례(拜禮)가 없다.】 신이 상고하건대, 고례는 다만 대개만을 들었을 뿐, 배례(拜禮)의 절목은 말하지 않았습니다. 《주자가례(朱子家禮)》에 성복(成服) 전의 대소렴전(大小斂奠)에는 모두 효자(孝子)의 배례를 말하지 않고 성복 후에서야 비로소 주인 이하의 재배를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국제에는 없으니 아마도 주자의 설을 따르는 것이 무방할 듯합니다. 12. 진조조전(陳朝祖奠)089) 《의례경전(儀禮經傳)》에, ‘내수(內竪)는 상기(喪紀)의 일이 있을 때이면 내인(內人)들을 벽제(辟除)한다.’ 하였고, ‘세부(世婦)가 여궁(女宮)을 거느리고서 자성(粢盛)을 씻어 제기(祭器)에 담는다.’ 하였습니다. 《오례의(五禮儀)》 【조조(朝祖)와 전(奠)이 없다.】 신이 상고하건대, 예(禮)에 ‘상구(喪柩)를 조상의 종묘로 옮겨 망인(亡人)이 조상을 뵙게 하는 것은 망인의 효심을 따르는 것이니 망인의 처지에서 보면 평소 거처하던 침실을 떠나는 것이 슬프다. 그러므로 조고(祖考)의 종묘에 가서 결별하고서 떠나는 것이다.’ 하였으니, 이는 진실로 예의 큰 절목으로서 폐할 수 없는 것인데 국제에는 없으니 아마도 강구해 행해야 될 듯합니다. 그리고 이어 정제(定制)로 삼으시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13. 계(啓). 《의례경전(儀禮經傳)》에, ‘상축(喪祝)이 계한다.’ 하였고, ‘장부(丈夫)는 문(免)090) 하고 부인은 복머리[髽]를 하고 산대(散帶)091) 를 드리우고서 자리로 나아간다.’ 하였고, ‘계하는 새벽에는 외내가 모두 곡하지 않는다.’ 【기(記).】 하였습니다. 《오례의(五禮儀)》 【변복(變服)하는 절차가 없다.】 신이 상고하건대, 계빈(啓殯)은 시구(尸柩)를 뵙는 것이므로 소렴 때처럼 변복하는 것입니다. 이는 큰 절목인데 국제에는 없으니 고례를 따르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14. 조전(祖奠)092) . 《의례경전(儀禮經傳)》에, ‘조전에 깔 건석(巾席)을 걷고서 서쪽에서 기다리면 주인은 허리를 굽히고서 올라가고 부인은 뛰면서[踊] 내려간다. 주인이 단(袒)하면 상축(商祝)이 상구(喪柩)를 실은 수레를 어거하여 출발해 조금 가다가 멈춘다. 주인은 뛰면서 단했던 옷소매를 바르게 입고서 상구를 실은 수레 앞으로 가서 상구의 남쪽을 수레에 묶고, 부인은 내려와서 섬돌 사이의 위치로 나아간다. 떠나가는 데는[祖] 순서가 있기 때문에 수레는 방향을 틀지만 음식을 차려놓았던 그릇은 방향을 돌리지 않는다. 축(祝)이 명(銘)093) 을 가져다가 자리[菌]094) 위에 놓으면 두 사람이 중(重)095) 의 왼쪽을 돌아 나아가서 자리를 펴고 조전을 앞서와 같이 행한다. 그러면 주인은 허리를 굽히고서 말을 바치기를[薦馬] 앞서와 같이 한다. 빈(賓)이 나아가면 주인이 전송한다.’ 하였고, 《예기(禮記)》에, ‘뜰에서 조전을 행한다.’ 【상례의(喪禮儀)에 자세히 보인다.】 하였고, ‘상구를 실은 수레가 출발하여 조금 가다가 멈추는데 수레의 방향은 돌리지만 위치는 바뀌지 않고, 곁에서 네 사람이 피(披)096) 를 잡는다.’ 【본경(本經)의 기록이다.】 하였고, ‘축(祝)이 조전의 제찬(祭饌)을 주인의 남쪽에 있는 수레[輅] 앞에 북쪽을 상(上)으로 하여 차려 놓고서 보자기로 덮는다.’ 【상동(上同).】 하였습니다. 《오례의(五禮儀)》 【대략 같다.】 신이 상고하건대, 국제(國制)에 비록 이 의전(儀典)이 있으나 이미 조조(朝祖)에 관한 절목이 없으므로 이 의전을 빈전(殯殿)에서 시행하고서 그대로 발인하니 매우 먼 길을 가는데 가까운 데서부터 점진적으로 나아가는 뜻이 아닙니다. 고례에는 조조의 의전이 있고, 이어 조전(祖奠)을 묘정(廟庭)에서 행하고, 이튿날 새벽에 견전(遣奠)을 행하고서 발인합니다. 발인 절차는 《의례(儀禮)》에 자세히 나타나 있습니다. 15. 우(虞)097) 《의례경전(儀禮經傳)》에, ‘제후는 칠우(七虞)이다.’ 하였습니다. 《오례의(五禮儀)》 【반우의(返虞儀)가 있다.】 신이 상고하건대, 예에 ‘정오에 우제(虞祭)를 지낸다. 길이 먼 경우에는 무덤에서 우제를 행한다.’ 하였으니, 반우(返虞)한다는 글에 구애될 필요가 없을 듯합니다. 16. 반곡(返哭)098) 《의례경전(儀禮經傳)》에, ‘반곡하는 사람은 서계(西階)로 올라가 동쪽을 향하고 주인은 당하(堂下)에서 동쪽을 향해 서는데 북쪽을 상(上)으로 한다. 부인은 들어가고 대부는 뛰면서[踊] 조계(阼階)로 올라간다. 주부는 실내(室內)099) 로 들어간다.’ 하였습니다. 《오례의(五禮儀)》 【없다.】 신이 상고하건대, 예에 ‘반곡하여 조문(吊問)하는 것은 슬픔이 지극한 것이다. 돌아왔으나 어버이는 이미 죽어 없어져서 어버이를 잃었으니 이때를 당하여 슬픔이 지극하다.’ 하였고, 주자가 말하기를, ‘반곡하려고 당(堂)으로 오르는 것은 돌아간 어버이가 평소 예를 행하였던 곳으로 돌아가는 것이고, 주부가 실(室)로 들어가는 것은 죽은 어버이가 평소 궤양(饋養)했던 곳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 의사를 안다면 이른바 그가 밟던 자리를 밟고 그가 행하던 예를 행하는 등의 일이 자연스럽게 행해져서 바야흐로 계지(繼志)·술사(述事)의 일을 알게 될 것이다.’ 하였습니다. 이 한 절목을 빠뜨려서는 안 될 것 같은데 국제에는 없으니 고례를 따르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17. 조석전(朝夕奠)을 파함. 신이 상고하건대, 이 한 절목은 초우(初虞) 뒤에 있어야 하는데 《의례경전(儀禮經傳)》이나 국제에 나오는 글이 없으므로 신이 삼가 《가례(家禮)》에서 따다가 보충하였습니다. 18. 부(祔)100) 《의례경전(儀禮經傳)》에, ‘명일(明日)101) 에 신주(神主)를 소목(昭穆)의 반차(班次)에 따라 종묘에 모신다.’ 【사우(士虞).】 하였고, ‘명일 조부(祖父)의 신주를 다른 사당으로 옮기고 새로 죽은 이의 신주를 조부의 신주가 있던 곳에 모신다. 상제(喪祭)가 변하여 길제(吉祭)로 가고 부묘(祔廟)하는 데는 반드시 하루를 띄우지 않고 이 날에 접속해서 행한다.’ 【예기.】 하였고, ‘부제(祔祭) 때는 상장(喪杖)을 짚고서 당(堂)102) 에 오르지 않는다.’ 【상소기(喪小記).】 하였고, 주자가 말하기를, ‘선왕(先王)께서 예를 제정한 것은 본래 인정에 따른 것이니 길흉의 사이에 변하는 것이 순서가 있다. 그러므로 처음 죽었을 때는 오로지 생존한 분을 섬기는 예를 쓰고 졸곡(卒哭)과 부묘(祔廟)를 마친 뒤에야 신(神)으로 섬긴다. 그러나 차마 다 변경할 수 없기 때문에 신주를 다시 정침(正寢)으로 모셔다가 생존한 분을 섬기는 예로 섬기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오례의(五禮儀)》 【없다.】 신이 상고하건대, 주자가 말하기를 ‘새로 죽은 분을 조부의 사당에 부(祔)하는 것은 조부에게 다른 사당으로 옮긴다는 것을 고하고 새로 죽은 분에게 이 사당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고하는 순서이다. 그런데 지금은 공실(公室)이나 사가(私家)의 묘(廟)에 모두 한 사당 안에 감실(龕室)103) 만을 달리하고 서쪽을 상(上)으로 하는 제도만이 있고 다시 좌소(左昭), 우목(右穆)의 반차(班次)가 없다. 그러므로 체천(遞遷)할 경우가 생기면 모든 감실을 다 옮기고 새로 죽은 이가 그 아버지가 있던 감실로 들어간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예의 큰 절목으로서 고례와 같지 않다. 그런데 예를 하는 자들이 오히려 조부가 있던 사당에 부(祔)한다는 예문을 고집하는 것은 의의가 없는 듯하다. 그렇다고 마침내 예를 고쳐서 아버지 사당에 부한다면 또 애례존양(愛禮存羊)104) 의 뜻이 아닐 것이다.’ 하였으니, 이에 의거해 보면 이것은 폐할 수 없는 큰 절목인데 국제에는 없으니 아마도 강정해 행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태백산사고본】 1책 1권 17장 B면【국편영인본】 35책 373면
[註 047] 인혁(因革) : 옛것을 따름과 개혁함.[註 048] 취송(聚訟) : 서로 시비하여 결말이 나지 아니함.[註 049] 정문(情文) : 내용과 형식.[註 050] 개원(開元) : 당 현종(唐玄宗)의 연호.[註 051] 변제(變除) : 변복(變服) 공제(公除).[註 052] 통상(通喪) : 상하가 통행하는 상례로 삼년상을 이름.[註 053] 경화(更化) : 정치와 교화를 고치어 새롭게 함.[註 054] 사위(事爲) : 사업.[註 055] 여러 왕손(王孫) : 소현 세자(昭顯世子)의 세 아들. 인조 25년에 당시 강빈 사건(姜嬪事件:소현 세자의 음식에 독을 넣어 죽였다는 무고 사건)이 문제가 되어 그의 소생인 왕손 3형제를 제주도에 귀양보냈는데, 이때 장자 석철(石鐵)은 12세, 차자 석린(石麟)은 8세, 삼자 석견(石堅)은 4세였다.[註 056] 고명(顧命) : 임금이 죽을 때 후사를 부탁하는 유명(遺命).[註 057] 재생백(哉生魄) : 음력 16일.[註 058] 서언(誓言) : 유언.[註 059] 노침(路寢) : 정전(正殿).[註 060] 정종(正終) : 정전에서 죽음.[註 061] 복(復) : 초혼(招魂). 사람이 죽은 몇 시간 뒤에 망인이 입던 옷을 가지고 지붕에 올라가서 왼손으로 깃을 잡고 오른손으로 허리를 잡고서 아무(何某)는 복하라고 세 번 외친 다음 그 옷으로 시신을 덮음.[註 062] 《의례경전(儀禮經傳)》 : 주자(朱子)가 찬(撰)한 《의례경전통해(儀禮經傳通解)》로 원집(原集)이 37권이고 속집이 29권임.[註 063] 시사전(始死奠) : 고복(皋復)이 끝난 뒤에 올리는 전.[註 064] 항시(巷市) : 골목에서 시장을 보는 것. 국상이 나면 애도의 뜻으로 시장을 철거하기 때문에 필요한 생필품을 골목에서 구함.[註 065] 차길(借吉) : 상제의 몸으로 길례(吉禮) 때에 특별히 길복(吉服)을 입는 것.[註 066] 천시(遷尸) : 왕이 죽어 소렴, 대렴을 마친 뒤에 왕의 시신을 당(堂)으로 옮기는 것.[註 067] 설치(楔齒) : 반함(飯含)을 하기 전에 먼저 뿔 숟가락을 아래 위의 이(齒) 사이에 끼워 입이 다물어지지 않게 하는 것.[註 068] 철족(綴足) : 시신의 발이 뒤틀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발을 의자의 다리에 묶어 놓는 것.[註 069] 유당(帷堂) : 당상(堂上)에 유막(帷幕)을 설치한 상막(喪幕).[註 070] 각사(角柶) : 뿔로 만든 숟가락.[註 071] 연궤(燕几) : 편안한 의자.[註 072] 흔창(興鬯) : 왕의 시신을 목욕시키는 울창주(鬱鬯酒).[註 073] 사기(肆器) : 너비가 8척, 길이가 12척, 깊이가 3척인 얼음을 채운 통. 하절기에 시체의 부패를 방지하기 위하여 얼음을 채운 이 통을 시신에 넣어둠.[註 074] 권의(卷衣) : 곤룡포.[註 075] 금모(錦冒) : 시체를 싸는 비단 자루 습(襲) 이후와 소렴 이전에 시체를 싸둔다.[註 076] 보쇄(黼殺) : 시체를 싸는 도끼 무늬의 수를 놓은 천. 위를 싸는 것을 보라하고 아래를 싸는 것을 쇄라함.[註 077] 모질(冒質) : 금모(錦昌)의 윗부분이다..[註 078] 쇄(殺) : 금모의 아래 부분이다.[註 079] 반옥(飯玉) : 염할 때 죽은 사람의 입에 구슬을 물리는 것.[註 080] 반미(飯米) : 염할 때 죽은 사람의 일에 쌀을 물리는 것.[註 081] 막포(幕布) : 장막을 만드는 거친 베.[註 082] 온공(溫公) : 사마광(司馬光).[註 083] 습(襲) : 죽은 사람에게 좌임포(左衽袍)를 입히는 것.[註 084] 반함(飯含) : 염할 때 죽은 사람의 입에 쌀을 물리는 것.[註 085] 환질(環絰) : 성복 때 상제가 건(巾) 위에 덧씌워 쓰는 수절(首絰).[註 086] 위모(委貌) : 관명(冠名).[註 087] 금(衾) : 홑이불.[註 088] 계빈(啓殯) : 발인(發靷)할 때 출란(出棺)하기 위하여 빈소를 여는 것.[註 089] 진조조전(陳朝祖奠) : 발인할 때 죽은 사람이 종묘로 가서 마지막으로 조상을 보이고 하직 인사를 올리게 하고 곁들어 전을 올리는 것.[註 090] 문(免) : 갓을 벗고 한 치 너비의 베로 머리를 묶고 뒤로 늘어 뜨리는 것.[註 091] 산대(散帶) : 띠의 끝을 꼬지 않고 흐트려 놓은 것.[註 092] 조전(祖奠) : 발인에 앞서 출발을 알리는 전. 조는 행신(行神)을 뜻함.[註 093] 명(銘) : 명정.[註 094] 자리[菌] : 관 밑에 까는 자리로서 관과 함께 묻는다.[註 095] 중(重) : 우제(虞祭) 이전에는 신주가 없으므로 나무를 깎아 뜰 중앙에 세워 놓고 죽은 이의 혼신이 임시로 이 나무에 의지하게 하고 또 죽은 이의 필요한 물건들을 이 나무에 매달아 놓는다.[註 096] 피(披) : 관을 끄는 끈.[註 097] 우(虞) : 장사를 지내고 돌아와서 빈궁(殯宮)에 지내는 제사. 망인의 시체는 땅으로 돌아갔으나 정기(精氣)는 정처 없이 방황하므로 우제를 올려 혼신을 안정시킴.[註 098] 반곡(返哭) : 장사를 마치고 돌아와서 종묘에서 곡을 하며 슬픔을 다하는 것.[註 099] 실내(室內) : 종묘 안.[註 100] 부(祔) : 졸곡(卒哭)이 끝난 다음날, 새로 죽은 이의 신주(神主)를 소목(昭穆)의 서차에 따라 종묘에 모시는 것.[註 101] 명일(明日) : 졸곡(卒哭) 다음날.[註 102] 당(堂) : 사당.[註 103] 감실(龕室) : 종묘 안에 신주를 모셔 놓는 장.[註 104] 애례존양(愛禮存羊) : 예를 아껴 구례(舊禮) 또는 허례(虛禮)를 버리지 않고 보전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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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상고하건대, 처음 죽었을 때에는 시체가 복식(服飾)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효자가 머리를 풀어뜨리고 상사에 임하지만 소렴을 하는 데 이르러서는 시체에 이미 복식을 하였으므로 효자도 수식이 없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환질과 소변(素弁)을 갖추는 것인데 국제(國制)에는 없으니 고례로써 첨가해 보충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9. 대렴(大斂).
《의례경전(儀禮經傳)》에, ‘임금은 장차 대렴하려 할 때에 아들은 소변 위에 수질을 두르고서 동서(東序) 남단의 자리로 나아가고, 경대부는 당(堂)의 모서리 기둥 서쪽 자리로 나아가 북쪽을 향하는데 동쪽을 상(上)으로 하고, 부형(父兄)은 당 밑에서 북쪽을 향하고, 부인(夫人)·명부(命婦)는 시체의 서쪽에서 동쪽을 향하고, 외종(外宗)은 방 안에서 남쪽을 향하고, 소신(小臣)은 자리를 펴고, 상축(商祝)은 교금(絞紟), 금(衾)087) , 옷 등을 펴놓고, 사(士)는 소반 위에 있는 물에 손을 씻고서 시신을 들어다가 염(斂)하는 곳에 옮겨놓는다. 염이 끝난 다음 태재(太宰)가 염이 끝났음을 고하면 아들이 시신에 기대어 곡용(哭踊)하고 부인도 동쪽을 향하여 역시 그렇게 한다.’ 【상대기.】 하였습니다.
《오례의(五禮儀)》 【대략 같은데 전(奠)이 있고, 또 질쇄(質殺)가 이때에 와서 비로소 사용된다.】 신이 상고하건대, 고례에는 대렴과 성빈(成殯)을 합쳐 한 번의 전을 올리는데 빈을 한 뒤에 비로소 전을 베푼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국제에는 대렴과 성빈에 각기 전을 베푸니 아마도 고례를 따르는 것을 정례(正禮)로 삼아야 마땅할 듯합니다. 그리고 또 질쇄는 바로 시체에 옷을 입힐 때 사용하는 것인데 국제에는 이때에 와서 비로소 사용하니 아마도 고례의 뜻이 아닌 듯합니다. 10. 성복(成服). 《의례경전(儀禮經傳)》에, ‘임금의 상에는 3일 뒤에 아들과 부인이 장(杖)을 짚고 5일 뒤 빈소를 마치고서 대부, 세부(世婦)에게 상장을 준다.’ 【상대기.】 하였고, ‘천자가 죽으면 3일 만에 축(祝)이 먼저 복을 입고, 5일 만에 관장(官長)이 복을 입고, 7일 만에 국중(國中)의 남녀가 복을 입고, 석달 만에 천하가 복을 입는다.’ 【단궁(檀弓).】 하였고, ‘사사(肆師)가 외내(外內) 명남녀(命男女)의 상복이 법에 맞지 않는 자를 금한다.’ 【춘관(春官).】 하였고, 주자가 말하기를, ‘참최 3년은 아비와 임금을 위하여 입는 복이다. 그 복은 포관(布冠), 포삼(布杉)에 벽령(辟領), 부판(負版)을 단 최복(衰服)과 엄임(掩衽), 친삼(襯杉), 포군(布君)을 입고 마(麻)로 만든 요질(腰絰), 수질(首絰), 마대(麻帶)를 두르고 짚신을 신고 죽장(竹杖)을 짚는데 천자로부터 서인에 이르기까지 신분의 귀천으로써 증손(增損)하는 바가 없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임금과 신하의 복이 같으나 약간의 구별을 하여 상하를 분별한다. 13개월 만에 연복(練服)을 입고서 소상(小祥)을 지내고 25개월 만에 난복(襴襆)을 하고서 담제(禫祭)를 지내고 27개월 만에 조복을 입고서 상을 벗는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초상(初喪) 때는 마땅히 고례에 따라 상복을 지어 입고서 상에 임하고, 따로 포(布)로 복두(幞頭), 공복(公服), 혁대(革帶)를 만들어 착용하고서 조회하는 것이 예에 합당하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예에 임금의 상사에 달관(達官)의 장(長)들은 죽장(竹杖)을 짚는다 하였는데, 이른바 달관이란 일을 전담하여 임금께 주달(奏達)할 수 있는 관원을 이름이다. 오늘에 있어서는 안으로 성(省)·조(曹)·시(寺)·감(監)의 장관과 밖으로는 감사·군수 등으로서 모든 사(司)의 장과 일찍이 시종(侍從) 이상의 관직을 역임하여 전담해서 일을 주달했던 이들이 바로 달관이다. 그러므로 지금 상장을 짚지 않는 제도를 요좌(僚佐) 이하에게 시행한다면 가하지만 심지어는 그 장관들로 하여금 아랫사람과 함께 상장을 짚지 않게 하고 있는데, 비록 지난날 정승과 장수를 지낸 사람이 벼슬하지 않고 집에 있다 할지라도 다른 것이 없게 한다면 어찌 박하지 아니한가.’ 하였고, 또 말하기를, ‘전에 보니 효종(孝宗)께서는 장사를 지낸 뒤에도 오히려 백포의관(白布衣冠)으로 조회를 보셨으니 이는 매우 성대한 덕이다. 전세에는 임금이 스스로 복을 입지 않았기 때문에 고례를 행할 수 없었던 것이지만, 당시에는 이런 좋은 기회가 있었는데도 유신(儒臣)과 예관(禮官)이 이룩해 밝혀서 1대의 제도로 만들지 못하여 드디어 임금은 위에서 복을 입는데 신하들은 아래에서 복을 벗게 하여 잘못을 인습하였으니 매우 통한스럽다.’ 하였습니다. 《오례의(五禮儀)》에는, ‘종친과 문무 백관은 단령의(團領衣)에 베[布]로 싼 사모를 쓰고 마대(麻帶)를 매고 백피화(白皮靴)를 신었다가 졸곡(卒哭) 뒤에는 백의(白衣)에 오사모(烏紗帽)를 쓰고 흑각대(黑角帶)를 띤다. 모든 상사에는 최복을 입고 연제(練祭) 때에는 연포(練布)로 사모를 싼다.’ 하였습니다. 신이 상고하건대, 《오례의(五禮儀)》의 복제(服制)는 매우 윤서(倫緖)가 없습니다. 대체로 임금과 아비는 일체인데 어찌 아비에 대해서는 순전히 상복을 사용하고 임금에 대해서는 조복의 제도를 섞어 사용하여 반은 높이고 반은 낮추는 의전(儀典)이 있겠습니까. 그리고 또 전함(前銜)은 지금은 비록 관직이 없다 하더라도 그의 이름이 이미 사적(仕籍)에 있으니 실로 관직에 있는 자와 조금도 다를 것이 없는데 사인(士人)과 함께 백의를 입는 제도는 더더욱 옳지 않습니다. 일찍이 상고하건대 송 영종(宋寧宗) 초기에 천자는 칠사천황복(漆紗淺黃服)을 입었는데 신하들은 이미 역월(易月)했다 하여 복을 입지 않으니, 주자가 차자를 올려 이미 지난 실수는 뒤에 와서 고칠 수 없거니와 앞으로 계빈(啓殯)088) 하여 발인(發靷)할 때는 마땅히 다시 초상 때의 상복을 착용해야 된다고 하였습니다. 지난해에 지평 민순(閔純)이 헌의(獻議)하여 《오례의(五禮儀)》를 고치어 너무 심한 것을 약간 제거하였으니, 신이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신의 이 건의를 예관에게 내리시어 한결같이 주자가 손익한 제도를 따라 속히 지휘하여 백관으로 하여금 미리 최복을 준비하였다가 발인할 때에 입고서 들어와 임하도록 하고, 지금 입고 있는 단령은 그 끝을 꿰매어 입고 포모(布帽)와 포로 싼 각대(角帶)와 백화(白靴)로써 일을 볼 때 입는 복장으로 삼게 하소서. 그리고 전함들에게도 이때 다시 성복(成服)하게 하면 사의(事宜)에 합당할 것 같습니다. 11. 조석전(朝夕奠). 《의례경전(儀禮經傳)》에, ‘사복(司服)이 전(奠)드릴 때 입는 의복을 이바지한다.’ 【춘관.】 하였습니다. 《오례의(五禮儀)》 【배례(拜禮)가 없다.】 신이 상고하건대, 고례는 다만 대개만을 들었을 뿐, 배례(拜禮)의 절목은 말하지 않았습니다. 《주자가례(朱子家禮)》에 성복(成服) 전의 대소렴전(大小斂奠)에는 모두 효자(孝子)의 배례를 말하지 않고 성복 후에서야 비로소 주인 이하의 재배를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국제에는 없으니 아마도 주자의 설을 따르는 것이 무방할 듯합니다. 12. 진조조전(陳朝祖奠)089) 《의례경전(儀禮經傳)》에, ‘내수(內竪)는 상기(喪紀)의 일이 있을 때이면 내인(內人)들을 벽제(辟除)한다.’ 하였고, ‘세부(世婦)가 여궁(女宮)을 거느리고서 자성(粢盛)을 씻어 제기(祭器)에 담는다.’ 하였습니다. 《오례의(五禮儀)》 【조조(朝祖)와 전(奠)이 없다.】 신이 상고하건대, 예(禮)에 ‘상구(喪柩)를 조상의 종묘로 옮겨 망인(亡人)이 조상을 뵙게 하는 것은 망인의 효심을 따르는 것이니 망인의 처지에서 보면 평소 거처하던 침실을 떠나는 것이 슬프다. 그러므로 조고(祖考)의 종묘에 가서 결별하고서 떠나는 것이다.’ 하였으니, 이는 진실로 예의 큰 절목으로서 폐할 수 없는 것인데 국제에는 없으니 아마도 강구해 행해야 될 듯합니다. 그리고 이어 정제(定制)로 삼으시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13. 계(啓). 《의례경전(儀禮經傳)》에, ‘상축(喪祝)이 계한다.’ 하였고, ‘장부(丈夫)는 문(免)090) 하고 부인은 복머리[髽]를 하고 산대(散帶)091) 를 드리우고서 자리로 나아간다.’ 하였고, ‘계하는 새벽에는 외내가 모두 곡하지 않는다.’ 【기(記).】 하였습니다. 《오례의(五禮儀)》 【변복(變服)하는 절차가 없다.】 신이 상고하건대, 계빈(啓殯)은 시구(尸柩)를 뵙는 것이므로 소렴 때처럼 변복하는 것입니다. 이는 큰 절목인데 국제에는 없으니 고례를 따르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14. 조전(祖奠)092) . 《의례경전(儀禮經傳)》에, ‘조전에 깔 건석(巾席)을 걷고서 서쪽에서 기다리면 주인은 허리를 굽히고서 올라가고 부인은 뛰면서[踊] 내려간다. 주인이 단(袒)하면 상축(商祝)이 상구(喪柩)를 실은 수레를 어거하여 출발해 조금 가다가 멈춘다. 주인은 뛰면서 단했던 옷소매를 바르게 입고서 상구를 실은 수레 앞으로 가서 상구의 남쪽을 수레에 묶고, 부인은 내려와서 섬돌 사이의 위치로 나아간다. 떠나가는 데는[祖] 순서가 있기 때문에 수레는 방향을 틀지만 음식을 차려놓았던 그릇은 방향을 돌리지 않는다. 축(祝)이 명(銘)093) 을 가져다가 자리[菌]094) 위에 놓으면 두 사람이 중(重)095) 의 왼쪽을 돌아 나아가서 자리를 펴고 조전을 앞서와 같이 행한다. 그러면 주인은 허리를 굽히고서 말을 바치기를[薦馬] 앞서와 같이 한다. 빈(賓)이 나아가면 주인이 전송한다.’ 하였고, 《예기(禮記)》에, ‘뜰에서 조전을 행한다.’ 【상례의(喪禮儀)에 자세히 보인다.】 하였고, ‘상구를 실은 수레가 출발하여 조금 가다가 멈추는데 수레의 방향은 돌리지만 위치는 바뀌지 않고, 곁에서 네 사람이 피(披)096) 를 잡는다.’ 【본경(本經)의 기록이다.】 하였고, ‘축(祝)이 조전의 제찬(祭饌)을 주인의 남쪽에 있는 수레[輅] 앞에 북쪽을 상(上)으로 하여 차려 놓고서 보자기로 덮는다.’ 【상동(上同).】 하였습니다. 《오례의(五禮儀)》 【대략 같다.】 신이 상고하건대, 국제(國制)에 비록 이 의전(儀典)이 있으나 이미 조조(朝祖)에 관한 절목이 없으므로 이 의전을 빈전(殯殿)에서 시행하고서 그대로 발인하니 매우 먼 길을 가는데 가까운 데서부터 점진적으로 나아가는 뜻이 아닙니다. 고례에는 조조의 의전이 있고, 이어 조전(祖奠)을 묘정(廟庭)에서 행하고, 이튿날 새벽에 견전(遣奠)을 행하고서 발인합니다. 발인 절차는 《의례(儀禮)》에 자세히 나타나 있습니다. 15. 우(虞)097) 《의례경전(儀禮經傳)》에, ‘제후는 칠우(七虞)이다.’ 하였습니다. 《오례의(五禮儀)》 【반우의(返虞儀)가 있다.】 신이 상고하건대, 예에 ‘정오에 우제(虞祭)를 지낸다. 길이 먼 경우에는 무덤에서 우제를 행한다.’ 하였으니, 반우(返虞)한다는 글에 구애될 필요가 없을 듯합니다. 16. 반곡(返哭)098) 《의례경전(儀禮經傳)》에, ‘반곡하는 사람은 서계(西階)로 올라가 동쪽을 향하고 주인은 당하(堂下)에서 동쪽을 향해 서는데 북쪽을 상(上)으로 한다. 부인은 들어가고 대부는 뛰면서[踊] 조계(阼階)로 올라간다. 주부는 실내(室內)099) 로 들어간다.’ 하였습니다. 《오례의(五禮儀)》 【없다.】 신이 상고하건대, 예에 ‘반곡하여 조문(吊問)하는 것은 슬픔이 지극한 것이다. 돌아왔으나 어버이는 이미 죽어 없어져서 어버이를 잃었으니 이때를 당하여 슬픔이 지극하다.’ 하였고, 주자가 말하기를, ‘반곡하려고 당(堂)으로 오르는 것은 돌아간 어버이가 평소 예를 행하였던 곳으로 돌아가는 것이고, 주부가 실(室)로 들어가는 것은 죽은 어버이가 평소 궤양(饋養)했던 곳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 의사를 안다면 이른바 그가 밟던 자리를 밟고 그가 행하던 예를 행하는 등의 일이 자연스럽게 행해져서 바야흐로 계지(繼志)·술사(述事)의 일을 알게 될 것이다.’ 하였습니다. 이 한 절목을 빠뜨려서는 안 될 것 같은데 국제에는 없으니 고례를 따르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17. 조석전(朝夕奠)을 파함. 신이 상고하건대, 이 한 절목은 초우(初虞) 뒤에 있어야 하는데 《의례경전(儀禮經傳)》이나 국제에 나오는 글이 없으므로 신이 삼가 《가례(家禮)》에서 따다가 보충하였습니다. 18. 부(祔)100) 《의례경전(儀禮經傳)》에, ‘명일(明日)101) 에 신주(神主)를 소목(昭穆)의 반차(班次)에 따라 종묘에 모신다.’ 【사우(士虞).】 하였고, ‘명일 조부(祖父)의 신주를 다른 사당으로 옮기고 새로 죽은 이의 신주를 조부의 신주가 있던 곳에 모신다. 상제(喪祭)가 변하여 길제(吉祭)로 가고 부묘(祔廟)하는 데는 반드시 하루를 띄우지 않고 이 날에 접속해서 행한다.’ 【예기.】 하였고, ‘부제(祔祭) 때는 상장(喪杖)을 짚고서 당(堂)102) 에 오르지 않는다.’ 【상소기(喪小記).】 하였고, 주자가 말하기를, ‘선왕(先王)께서 예를 제정한 것은 본래 인정에 따른 것이니 길흉의 사이에 변하는 것이 순서가 있다. 그러므로 처음 죽었을 때는 오로지 생존한 분을 섬기는 예를 쓰고 졸곡(卒哭)과 부묘(祔廟)를 마친 뒤에야 신(神)으로 섬긴다. 그러나 차마 다 변경할 수 없기 때문에 신주를 다시 정침(正寢)으로 모셔다가 생존한 분을 섬기는 예로 섬기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오례의(五禮儀)》 【없다.】 신이 상고하건대, 주자가 말하기를 ‘새로 죽은 분을 조부의 사당에 부(祔)하는 것은 조부에게 다른 사당으로 옮긴다는 것을 고하고 새로 죽은 분에게 이 사당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고하는 순서이다. 그런데 지금은 공실(公室)이나 사가(私家)의 묘(廟)에 모두 한 사당 안에 감실(龕室)103) 만을 달리하고 서쪽을 상(上)으로 하는 제도만이 있고 다시 좌소(左昭), 우목(右穆)의 반차(班次)가 없다. 그러므로 체천(遞遷)할 경우가 생기면 모든 감실을 다 옮기고 새로 죽은 이가 그 아버지가 있던 감실로 들어간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예의 큰 절목으로서 고례와 같지 않다. 그런데 예를 하는 자들이 오히려 조부가 있던 사당에 부(祔)한다는 예문을 고집하는 것은 의의가 없는 듯하다. 그렇다고 마침내 예를 고쳐서 아버지 사당에 부한다면 또 애례존양(愛禮存羊)104) 의 뜻이 아닐 것이다.’ 하였으니, 이에 의거해 보면 이것은 폐할 수 없는 큰 절목인데 국제에는 없으니 아마도 강정해 행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태백산사고본】 1책 1권 17장 B면【국편영인본】 35책 373면
[註 047] 인혁(因革) : 옛것을 따름과 개혁함.[註 048] 취송(聚訟) : 서로 시비하여 결말이 나지 아니함.[註 049] 정문(情文) : 내용과 형식.[註 050] 개원(開元) : 당 현종(唐玄宗)의 연호.[註 051] 변제(變除) : 변복(變服) 공제(公除).[註 052] 통상(通喪) : 상하가 통행하는 상례로 삼년상을 이름.[註 053] 경화(更化) : 정치와 교화를 고치어 새롭게 함.[註 054] 사위(事爲) : 사업.[註 055] 여러 왕손(王孫) : 소현 세자(昭顯世子)의 세 아들. 인조 25년에 당시 강빈 사건(姜嬪事件:소현 세자의 음식에 독을 넣어 죽였다는 무고 사건)이 문제가 되어 그의 소생인 왕손 3형제를 제주도에 귀양보냈는데, 이때 장자 석철(石鐵)은 12세, 차자 석린(石麟)은 8세, 삼자 석견(石堅)은 4세였다.[註 056] 고명(顧命) : 임금이 죽을 때 후사를 부탁하는 유명(遺命).[註 057] 재생백(哉生魄) : 음력 16일.[註 058] 서언(誓言) : 유언.[註 059] 노침(路寢) : 정전(正殿).[註 060] 정종(正終) : 정전에서 죽음.[註 061] 복(復) : 초혼(招魂). 사람이 죽은 몇 시간 뒤에 망인이 입던 옷을 가지고 지붕에 올라가서 왼손으로 깃을 잡고 오른손으로 허리를 잡고서 아무(何某)는 복하라고 세 번 외친 다음 그 옷으로 시신을 덮음.[註 062] 《의례경전(儀禮經傳)》 : 주자(朱子)가 찬(撰)한 《의례경전통해(儀禮經傳通解)》로 원집(原集)이 37권이고 속집이 29권임.[註 063] 시사전(始死奠) : 고복(皋復)이 끝난 뒤에 올리는 전.[註 064] 항시(巷市) : 골목에서 시장을 보는 것. 국상이 나면 애도의 뜻으로 시장을 철거하기 때문에 필요한 생필품을 골목에서 구함.[註 065] 차길(借吉) : 상제의 몸으로 길례(吉禮) 때에 특별히 길복(吉服)을 입는 것.[註 066] 천시(遷尸) : 왕이 죽어 소렴, 대렴을 마친 뒤에 왕의 시신을 당(堂)으로 옮기는 것.[註 067] 설치(楔齒) : 반함(飯含)을 하기 전에 먼저 뿔 숟가락을 아래 위의 이(齒) 사이에 끼워 입이 다물어지지 않게 하는 것.[註 068] 철족(綴足) : 시신의 발이 뒤틀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발을 의자의 다리에 묶어 놓는 것.[註 069] 유당(帷堂) : 당상(堂上)에 유막(帷幕)을 설치한 상막(喪幕).[註 070] 각사(角柶) : 뿔로 만든 숟가락.[註 071] 연궤(燕几) : 편안한 의자.[註 072] 흔창(興鬯) : 왕의 시신을 목욕시키는 울창주(鬱鬯酒).[註 073] 사기(肆器) : 너비가 8척, 길이가 12척, 깊이가 3척인 얼음을 채운 통. 하절기에 시체의 부패를 방지하기 위하여 얼음을 채운 이 통을 시신에 넣어둠.[註 074] 권의(卷衣) : 곤룡포.[註 075] 금모(錦冒) : 시체를 싸는 비단 자루 습(襲) 이후와 소렴 이전에 시체를 싸둔다.[註 076] 보쇄(黼殺) : 시체를 싸는 도끼 무늬의 수를 놓은 천. 위를 싸는 것을 보라하고 아래를 싸는 것을 쇄라함.[註 077] 모질(冒質) : 금모(錦昌)의 윗부분이다..[註 078] 쇄(殺) : 금모의 아래 부분이다.[註 079] 반옥(飯玉) : 염할 때 죽은 사람의 입에 구슬을 물리는 것.[註 080] 반미(飯米) : 염할 때 죽은 사람의 일에 쌀을 물리는 것.[註 081] 막포(幕布) : 장막을 만드는 거친 베.[註 082] 온공(溫公) : 사마광(司馬光).[註 083] 습(襲) : 죽은 사람에게 좌임포(左衽袍)를 입히는 것.[註 084] 반함(飯含) : 염할 때 죽은 사람의 입에 쌀을 물리는 것.[註 085] 환질(環絰) : 성복 때 상제가 건(巾) 위에 덧씌워 쓰는 수절(首絰).[註 086] 위모(委貌) : 관명(冠名).[註 087] 금(衾) : 홑이불.[註 088] 계빈(啓殯) : 발인(發靷)할 때 출란(出棺)하기 위하여 빈소를 여는 것.[註 089] 진조조전(陳朝祖奠) : 발인할 때 죽은 사람이 종묘로 가서 마지막으로 조상을 보이고 하직 인사를 올리게 하고 곁들어 전을 올리는 것.[註 090] 문(免) : 갓을 벗고 한 치 너비의 베로 머리를 묶고 뒤로 늘어 뜨리는 것.[註 091] 산대(散帶) : 띠의 끝을 꼬지 않고 흐트려 놓은 것.[註 092] 조전(祖奠) : 발인에 앞서 출발을 알리는 전. 조는 행신(行神)을 뜻함.[註 093] 명(銘) : 명정.[註 094] 자리[菌] : 관 밑에 까는 자리로서 관과 함께 묻는다.[註 095] 중(重) : 우제(虞祭) 이전에는 신주가 없으므로 나무를 깎아 뜰 중앙에 세워 놓고 죽은 이의 혼신이 임시로 이 나무에 의지하게 하고 또 죽은 이의 필요한 물건들을 이 나무에 매달아 놓는다.[註 096] 피(披) : 관을 끄는 끈.[註 097] 우(虞) : 장사를 지내고 돌아와서 빈궁(殯宮)에 지내는 제사. 망인의 시체는 땅으로 돌아갔으나 정기(精氣)는 정처 없이 방황하므로 우제를 올려 혼신을 안정시킴.[註 098] 반곡(返哭) : 장사를 마치고 돌아와서 종묘에서 곡을 하며 슬픔을 다하는 것.[註 099] 실내(室內) : 종묘 안.[註 100] 부(祔) : 졸곡(卒哭)이 끝난 다음날, 새로 죽은 이의 신주(神主)를 소목(昭穆)의 서차에 따라 종묘에 모시는 것.[註 101] 명일(明日) : 졸곡(卒哭) 다음날.[註 102] 당(堂) : 사당.[註 103] 감실(龕室) : 종묘 안에 신주를 모셔 놓는 장.[註 104] 애례존양(愛禮存羊) : 예를 아껴 구례(舊禮) 또는 허례(虛禮)를 버리지 않고 보전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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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상고하건대, 고례에는 대렴과 성빈(成殯)을 합쳐 한 번의 전을 올리는데 빈을 한 뒤에 비로소 전을 베푼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국제에는 대렴과 성빈에 각기 전을 베푸니 아마도 고례를 따르는 것을 정례(正禮)로 삼아야 마땅할 듯합니다. 그리고 또 질쇄는 바로 시체에 옷을 입힐 때 사용하는 것인데 국제에는 이때에 와서 비로소 사용하니 아마도 고례의 뜻이 아닌 듯합니다.
10. 성복(成服).
《의례경전(儀禮經傳)》에, ‘임금의 상에는 3일 뒤에 아들과 부인이 장(杖)을 짚고 5일 뒤 빈소를 마치고서 대부, 세부(世婦)에게 상장을 준다.’ 【상대기.】 하였고, ‘천자가 죽으면 3일 만에 축(祝)이 먼저 복을 입고, 5일 만에 관장(官長)이 복을 입고, 7일 만에 국중(國中)의 남녀가 복을 입고, 석달 만에 천하가 복을 입는다.’ 【단궁(檀弓).】 하였고, ‘사사(肆師)가 외내(外內) 명남녀(命男女)의 상복이 법에 맞지 않는 자를 금한다.’ 【춘관(春官).】 하였고, 주자가 말하기를, ‘참최 3년은 아비와 임금을 위하여 입는 복이다. 그 복은 포관(布冠), 포삼(布杉)에 벽령(辟領), 부판(負版)을 단 최복(衰服)과 엄임(掩衽), 친삼(襯杉), 포군(布君)을 입고 마(麻)로 만든 요질(腰絰), 수질(首絰), 마대(麻帶)를 두르고 짚신을 신고 죽장(竹杖)을 짚는데 천자로부터 서인에 이르기까지 신분의 귀천으로써 증손(增損)하는 바가 없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임금과 신하의 복이 같으나 약간의 구별을 하여 상하를 분별한다. 13개월 만에 연복(練服)을 입고서 소상(小祥)을 지내고 25개월 만에 난복(襴襆)을 하고서 담제(禫祭)를 지내고 27개월 만에 조복을 입고서 상을 벗는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초상(初喪) 때는 마땅히 고례에 따라 상복을 지어 입고서 상에 임하고, 따로 포(布)로 복두(幞頭), 공복(公服), 혁대(革帶)를 만들어 착용하고서 조회하는 것이 예에 합당하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예에 임금의 상사에 달관(達官)의 장(長)들은 죽장(竹杖)을 짚는다 하였는데, 이른바 달관이란 일을 전담하여 임금께 주달(奏達)할 수 있는 관원을 이름이다. 오늘에 있어서는 안으로 성(省)·조(曹)·시(寺)·감(監)의 장관과 밖으로는 감사·군수 등으로서 모든 사(司)의 장과 일찍이 시종(侍從) 이상의 관직을 역임하여 전담해서 일을 주달했던 이들이 바로 달관이다. 그러므로 지금 상장을 짚지 않는 제도를 요좌(僚佐) 이하에게 시행한다면 가하지만 심지어는 그 장관들로 하여금 아랫사람과 함께 상장을 짚지 않게 하고 있는데, 비록 지난날 정승과 장수를 지낸 사람이 벼슬하지 않고 집에 있다 할지라도 다른 것이 없게 한다면 어찌 박하지 아니한가.’ 하였고, 또 말하기를, ‘전에 보니 효종(孝宗)께서는 장사를 지낸 뒤에도 오히려 백포의관(白布衣冠)으로 조회를 보셨으니 이는 매우 성대한 덕이다. 전세에는 임금이 스스로 복을 입지 않았기 때문에 고례를 행할 수 없었던 것이지만, 당시에는 이런 좋은 기회가 있었는데도 유신(儒臣)과 예관(禮官)이 이룩해 밝혀서 1대의 제도로 만들지 못하여 드디어 임금은 위에서 복을 입는데 신하들은 아래에서 복을 벗게 하여 잘못을 인습하였으니 매우 통한스럽다.’ 하였습니다.
《오례의(五禮儀)》에는, ‘종친과 문무 백관은 단령의(團領衣)에 베[布]로 싼 사모를 쓰고 마대(麻帶)를 매고 백피화(白皮靴)를 신었다가 졸곡(卒哭) 뒤에는 백의(白衣)에 오사모(烏紗帽)를 쓰고 흑각대(黑角帶)를 띤다. 모든 상사에는 최복을 입고 연제(練祭) 때에는 연포(練布)로 사모를 싼다.’ 하였습니다.
신이 상고하건대, 《오례의(五禮儀)》의 복제(服制)는 매우 윤서(倫緖)가 없습니다. 대체로 임금과 아비는 일체인데 어찌 아비에 대해서는 순전히 상복을 사용하고 임금에 대해서는 조복의 제도를 섞어 사용하여 반은 높이고 반은 낮추는 의전(儀典)이 있겠습니까. 그리고 또 전함(前銜)은 지금은 비록 관직이 없다 하더라도 그의 이름이 이미 사적(仕籍)에 있으니 실로 관직에 있는 자와 조금도 다를 것이 없는데 사인(士人)과 함께 백의를 입는 제도는 더더욱 옳지 않습니다. 일찍이 상고하건대 송 영종(宋寧宗) 초기에 천자는 칠사천황복(漆紗淺黃服)을 입었는데 신하들은 이미 역월(易月)했다 하여 복을 입지 않으니, 주자가 차자를 올려 이미 지난 실수는 뒤에 와서 고칠 수 없거니와 앞으로 계빈(啓殯)088) 하여 발인(發靷)할 때는 마땅히 다시 초상 때의 상복을 착용해야 된다고 하였습니다. 지난해에 지평 민순(閔純)이 헌의(獻議)하여 《오례의(五禮儀)》를 고치어 너무 심한 것을 약간 제거하였으니, 신이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신의 이 건의를 예관에게 내리시어 한결같이 주자가 손익한 제도를 따라 속히 지휘하여 백관으로 하여금 미리 최복을 준비하였다가 발인할 때에 입고서 들어와 임하도록 하고, 지금 입고 있는 단령은 그 끝을 꿰매어 입고 포모(布帽)와 포로 싼 각대(角帶)와 백화(白靴)로써 일을 볼 때 입는 복장으로 삼게 하소서. 그리고 전함들에게도 이때 다시 성복(成服)하게 하면 사의(事宜)에 합당할 것 같습니다.
11. 조석전(朝夕奠).
《의례경전(儀禮經傳)》에, ‘사복(司服)이 전(奠)드릴 때 입는 의복을 이바지한다.’ 【춘관.】 하였습니다.
《오례의(五禮儀)》 【배례(拜禮)가 없다.】 신이 상고하건대, 고례는 다만 대개만을 들었을 뿐, 배례(拜禮)의 절목은 말하지 않았습니다. 《주자가례(朱子家禮)》에 성복(成服) 전의 대소렴전(大小斂奠)에는 모두 효자(孝子)의 배례를 말하지 않고 성복 후에서야 비로소 주인 이하의 재배를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국제에는 없으니 아마도 주자의 설을 따르는 것이 무방할 듯합니다. 12. 진조조전(陳朝祖奠)089) 《의례경전(儀禮經傳)》에, ‘내수(內竪)는 상기(喪紀)의 일이 있을 때이면 내인(內人)들을 벽제(辟除)한다.’ 하였고, ‘세부(世婦)가 여궁(女宮)을 거느리고서 자성(粢盛)을 씻어 제기(祭器)에 담는다.’ 하였습니다. 《오례의(五禮儀)》 【조조(朝祖)와 전(奠)이 없다.】 신이 상고하건대, 예(禮)에 ‘상구(喪柩)를 조상의 종묘로 옮겨 망인(亡人)이 조상을 뵙게 하는 것은 망인의 효심을 따르는 것이니 망인의 처지에서 보면 평소 거처하던 침실을 떠나는 것이 슬프다. 그러므로 조고(祖考)의 종묘에 가서 결별하고서 떠나는 것이다.’ 하였으니, 이는 진실로 예의 큰 절목으로서 폐할 수 없는 것인데 국제에는 없으니 아마도 강구해 행해야 될 듯합니다. 그리고 이어 정제(定制)로 삼으시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13. 계(啓). 《의례경전(儀禮經傳)》에, ‘상축(喪祝)이 계한다.’ 하였고, ‘장부(丈夫)는 문(免)090) 하고 부인은 복머리[髽]를 하고 산대(散帶)091) 를 드리우고서 자리로 나아간다.’ 하였고, ‘계하는 새벽에는 외내가 모두 곡하지 않는다.’ 【기(記).】 하였습니다. 《오례의(五禮儀)》 【변복(變服)하는 절차가 없다.】 신이 상고하건대, 계빈(啓殯)은 시구(尸柩)를 뵙는 것이므로 소렴 때처럼 변복하는 것입니다. 이는 큰 절목인데 국제에는 없으니 고례를 따르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14. 조전(祖奠)092) . 《의례경전(儀禮經傳)》에, ‘조전에 깔 건석(巾席)을 걷고서 서쪽에서 기다리면 주인은 허리를 굽히고서 올라가고 부인은 뛰면서[踊] 내려간다. 주인이 단(袒)하면 상축(商祝)이 상구(喪柩)를 실은 수레를 어거하여 출발해 조금 가다가 멈춘다. 주인은 뛰면서 단했던 옷소매를 바르게 입고서 상구를 실은 수레 앞으로 가서 상구의 남쪽을 수레에 묶고, 부인은 내려와서 섬돌 사이의 위치로 나아간다. 떠나가는 데는[祖] 순서가 있기 때문에 수레는 방향을 틀지만 음식을 차려놓았던 그릇은 방향을 돌리지 않는다. 축(祝)이 명(銘)093) 을 가져다가 자리[菌]094) 위에 놓으면 두 사람이 중(重)095) 의 왼쪽을 돌아 나아가서 자리를 펴고 조전을 앞서와 같이 행한다. 그러면 주인은 허리를 굽히고서 말을 바치기를[薦馬] 앞서와 같이 한다. 빈(賓)이 나아가면 주인이 전송한다.’ 하였고, 《예기(禮記)》에, ‘뜰에서 조전을 행한다.’ 【상례의(喪禮儀)에 자세히 보인다.】 하였고, ‘상구를 실은 수레가 출발하여 조금 가다가 멈추는데 수레의 방향은 돌리지만 위치는 바뀌지 않고, 곁에서 네 사람이 피(披)096) 를 잡는다.’ 【본경(本經)의 기록이다.】 하였고, ‘축(祝)이 조전의 제찬(祭饌)을 주인의 남쪽에 있는 수레[輅] 앞에 북쪽을 상(上)으로 하여 차려 놓고서 보자기로 덮는다.’ 【상동(上同).】 하였습니다. 《오례의(五禮儀)》 【대략 같다.】 신이 상고하건대, 국제(國制)에 비록 이 의전(儀典)이 있으나 이미 조조(朝祖)에 관한 절목이 없으므로 이 의전을 빈전(殯殿)에서 시행하고서 그대로 발인하니 매우 먼 길을 가는데 가까운 데서부터 점진적으로 나아가는 뜻이 아닙니다. 고례에는 조조의 의전이 있고, 이어 조전(祖奠)을 묘정(廟庭)에서 행하고, 이튿날 새벽에 견전(遣奠)을 행하고서 발인합니다. 발인 절차는 《의례(儀禮)》에 자세히 나타나 있습니다. 15. 우(虞)097) 《의례경전(儀禮經傳)》에, ‘제후는 칠우(七虞)이다.’ 하였습니다. 《오례의(五禮儀)》 【반우의(返虞儀)가 있다.】 신이 상고하건대, 예에 ‘정오에 우제(虞祭)를 지낸다. 길이 먼 경우에는 무덤에서 우제를 행한다.’ 하였으니, 반우(返虞)한다는 글에 구애될 필요가 없을 듯합니다. 16. 반곡(返哭)098) 《의례경전(儀禮經傳)》에, ‘반곡하는 사람은 서계(西階)로 올라가 동쪽을 향하고 주인은 당하(堂下)에서 동쪽을 향해 서는데 북쪽을 상(上)으로 한다. 부인은 들어가고 대부는 뛰면서[踊] 조계(阼階)로 올라간다. 주부는 실내(室內)099) 로 들어간다.’ 하였습니다. 《오례의(五禮儀)》 【없다.】 신이 상고하건대, 예에 ‘반곡하여 조문(吊問)하는 것은 슬픔이 지극한 것이다. 돌아왔으나 어버이는 이미 죽어 없어져서 어버이를 잃었으니 이때를 당하여 슬픔이 지극하다.’ 하였고, 주자가 말하기를, ‘반곡하려고 당(堂)으로 오르는 것은 돌아간 어버이가 평소 예를 행하였던 곳으로 돌아가는 것이고, 주부가 실(室)로 들어가는 것은 죽은 어버이가 평소 궤양(饋養)했던 곳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 의사를 안다면 이른바 그가 밟던 자리를 밟고 그가 행하던 예를 행하는 등의 일이 자연스럽게 행해져서 바야흐로 계지(繼志)·술사(述事)의 일을 알게 될 것이다.’ 하였습니다. 이 한 절목을 빠뜨려서는 안 될 것 같은데 국제에는 없으니 고례를 따르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17. 조석전(朝夕奠)을 파함. 신이 상고하건대, 이 한 절목은 초우(初虞) 뒤에 있어야 하는데 《의례경전(儀禮經傳)》이나 국제에 나오는 글이 없으므로 신이 삼가 《가례(家禮)》에서 따다가 보충하였습니다. 18. 부(祔)100) 《의례경전(儀禮經傳)》에, ‘명일(明日)101) 에 신주(神主)를 소목(昭穆)의 반차(班次)에 따라 종묘에 모신다.’ 【사우(士虞).】 하였고, ‘명일 조부(祖父)의 신주를 다른 사당으로 옮기고 새로 죽은 이의 신주를 조부의 신주가 있던 곳에 모신다. 상제(喪祭)가 변하여 길제(吉祭)로 가고 부묘(祔廟)하는 데는 반드시 하루를 띄우지 않고 이 날에 접속해서 행한다.’ 【예기.】 하였고, ‘부제(祔祭) 때는 상장(喪杖)을 짚고서 당(堂)102) 에 오르지 않는다.’ 【상소기(喪小記).】 하였고, 주자가 말하기를, ‘선왕(先王)께서 예를 제정한 것은 본래 인정에 따른 것이니 길흉의 사이에 변하는 것이 순서가 있다. 그러므로 처음 죽었을 때는 오로지 생존한 분을 섬기는 예를 쓰고 졸곡(卒哭)과 부묘(祔廟)를 마친 뒤에야 신(神)으로 섬긴다. 그러나 차마 다 변경할 수 없기 때문에 신주를 다시 정침(正寢)으로 모셔다가 생존한 분을 섬기는 예로 섬기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오례의(五禮儀)》 【없다.】 신이 상고하건대, 주자가 말하기를 ‘새로 죽은 분을 조부의 사당에 부(祔)하는 것은 조부에게 다른 사당으로 옮긴다는 것을 고하고 새로 죽은 분에게 이 사당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고하는 순서이다. 그런데 지금은 공실(公室)이나 사가(私家)의 묘(廟)에 모두 한 사당 안에 감실(龕室)103) 만을 달리하고 서쪽을 상(上)으로 하는 제도만이 있고 다시 좌소(左昭), 우목(右穆)의 반차(班次)가 없다. 그러므로 체천(遞遷)할 경우가 생기면 모든 감실을 다 옮기고 새로 죽은 이가 그 아버지가 있던 감실로 들어간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예의 큰 절목으로서 고례와 같지 않다. 그런데 예를 하는 자들이 오히려 조부가 있던 사당에 부(祔)한다는 예문을 고집하는 것은 의의가 없는 듯하다. 그렇다고 마침내 예를 고쳐서 아버지 사당에 부한다면 또 애례존양(愛禮存羊)104) 의 뜻이 아닐 것이다.’ 하였으니, 이에 의거해 보면 이것은 폐할 수 없는 큰 절목인데 국제에는 없으니 아마도 강정해 행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태백산사고본】 1책 1권 17장 B면【국편영인본】 35책 373면
[註 047] 인혁(因革) : 옛것을 따름과 개혁함.[註 048] 취송(聚訟) : 서로 시비하여 결말이 나지 아니함.[註 049] 정문(情文) : 내용과 형식.[註 050] 개원(開元) : 당 현종(唐玄宗)의 연호.[註 051] 변제(變除) : 변복(變服) 공제(公除).[註 052] 통상(通喪) : 상하가 통행하는 상례로 삼년상을 이름.[註 053] 경화(更化) : 정치와 교화를 고치어 새롭게 함.[註 054] 사위(事爲) : 사업.[註 055] 여러 왕손(王孫) : 소현 세자(昭顯世子)의 세 아들. 인조 25년에 당시 강빈 사건(姜嬪事件:소현 세자의 음식에 독을 넣어 죽였다는 무고 사건)이 문제가 되어 그의 소생인 왕손 3형제를 제주도에 귀양보냈는데, 이때 장자 석철(石鐵)은 12세, 차자 석린(石麟)은 8세, 삼자 석견(石堅)은 4세였다.[註 056] 고명(顧命) : 임금이 죽을 때 후사를 부탁하는 유명(遺命).[註 057] 재생백(哉生魄) : 음력 16일.[註 058] 서언(誓言) : 유언.[註 059] 노침(路寢) : 정전(正殿).[註 060] 정종(正終) : 정전에서 죽음.[註 061] 복(復) : 초혼(招魂). 사람이 죽은 몇 시간 뒤에 망인이 입던 옷을 가지고 지붕에 올라가서 왼손으로 깃을 잡고 오른손으로 허리를 잡고서 아무(何某)는 복하라고 세 번 외친 다음 그 옷으로 시신을 덮음.[註 062] 《의례경전(儀禮經傳)》 : 주자(朱子)가 찬(撰)한 《의례경전통해(儀禮經傳通解)》로 원집(原集)이 37권이고 속집이 29권임.[註 063] 시사전(始死奠) : 고복(皋復)이 끝난 뒤에 올리는 전.[註 064] 항시(巷市) : 골목에서 시장을 보는 것. 국상이 나면 애도의 뜻으로 시장을 철거하기 때문에 필요한 생필품을 골목에서 구함.[註 065] 차길(借吉) : 상제의 몸으로 길례(吉禮) 때에 특별히 길복(吉服)을 입는 것.[註 066] 천시(遷尸) : 왕이 죽어 소렴, 대렴을 마친 뒤에 왕의 시신을 당(堂)으로 옮기는 것.[註 067] 설치(楔齒) : 반함(飯含)을 하기 전에 먼저 뿔 숟가락을 아래 위의 이(齒) 사이에 끼워 입이 다물어지지 않게 하는 것.[註 068] 철족(綴足) : 시신의 발이 뒤틀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발을 의자의 다리에 묶어 놓는 것.[註 069] 유당(帷堂) : 당상(堂上)에 유막(帷幕)을 설치한 상막(喪幕).[註 070] 각사(角柶) : 뿔로 만든 숟가락.[註 071] 연궤(燕几) : 편안한 의자.[註 072] 흔창(興鬯) : 왕의 시신을 목욕시키는 울창주(鬱鬯酒).[註 073] 사기(肆器) : 너비가 8척, 길이가 12척, 깊이가 3척인 얼음을 채운 통. 하절기에 시체의 부패를 방지하기 위하여 얼음을 채운 이 통을 시신에 넣어둠.[註 074] 권의(卷衣) : 곤룡포.[註 075] 금모(錦冒) : 시체를 싸는 비단 자루 습(襲) 이후와 소렴 이전에 시체를 싸둔다.[註 076] 보쇄(黼殺) : 시체를 싸는 도끼 무늬의 수를 놓은 천. 위를 싸는 것을 보라하고 아래를 싸는 것을 쇄라함.[註 077] 모질(冒質) : 금모(錦昌)의 윗부분이다..[註 078] 쇄(殺) : 금모의 아래 부분이다.[註 079] 반옥(飯玉) : 염할 때 죽은 사람의 입에 구슬을 물리는 것.[註 080] 반미(飯米) : 염할 때 죽은 사람의 일에 쌀을 물리는 것.[註 081] 막포(幕布) : 장막을 만드는 거친 베.[註 082] 온공(溫公) : 사마광(司馬光).[註 083] 습(襲) : 죽은 사람에게 좌임포(左衽袍)를 입히는 것.[註 084] 반함(飯含) : 염할 때 죽은 사람의 입에 쌀을 물리는 것.[註 085] 환질(環絰) : 성복 때 상제가 건(巾) 위에 덧씌워 쓰는 수절(首絰).[註 086] 위모(委貌) : 관명(冠名).[註 087] 금(衾) : 홑이불.[註 088] 계빈(啓殯) : 발인(發靷)할 때 출란(出棺)하기 위하여 빈소를 여는 것.[註 089] 진조조전(陳朝祖奠) : 발인할 때 죽은 사람이 종묘로 가서 마지막으로 조상을 보이고 하직 인사를 올리게 하고 곁들어 전을 올리는 것.[註 090] 문(免) : 갓을 벗고 한 치 너비의 베로 머리를 묶고 뒤로 늘어 뜨리는 것.[註 091] 산대(散帶) : 띠의 끝을 꼬지 않고 흐트려 놓은 것.[註 092] 조전(祖奠) : 발인에 앞서 출발을 알리는 전. 조는 행신(行神)을 뜻함.[註 093] 명(銘) : 명정.[註 094] 자리[菌] : 관 밑에 까는 자리로서 관과 함께 묻는다.[註 095] 중(重) : 우제(虞祭) 이전에는 신주가 없으므로 나무를 깎아 뜰 중앙에 세워 놓고 죽은 이의 혼신이 임시로 이 나무에 의지하게 하고 또 죽은 이의 필요한 물건들을 이 나무에 매달아 놓는다.[註 096] 피(披) : 관을 끄는 끈.[註 097] 우(虞) : 장사를 지내고 돌아와서 빈궁(殯宮)에 지내는 제사. 망인의 시체는 땅으로 돌아갔으나 정기(精氣)는 정처 없이 방황하므로 우제를 올려 혼신을 안정시킴.[註 098] 반곡(返哭) : 장사를 마치고 돌아와서 종묘에서 곡을 하며 슬픔을 다하는 것.[註 099] 실내(室內) : 종묘 안.[註 100] 부(祔) : 졸곡(卒哭)이 끝난 다음날, 새로 죽은 이의 신주(神主)를 소목(昭穆)의 서차에 따라 종묘에 모시는 것.[註 101] 명일(明日) : 졸곡(卒哭) 다음날.[註 102] 당(堂) : 사당.[註 103] 감실(龕室) : 종묘 안에 신주를 모셔 놓는 장.[註 104] 애례존양(愛禮存羊) : 예를 아껴 구례(舊禮) 또는 허례(虛禮)를 버리지 않고 보전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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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상고하건대, 고례는 다만 대개만을 들었을 뿐, 배례(拜禮)의 절목은 말하지 않았습니다. 《주자가례(朱子家禮)》에 성복(成服) 전의 대소렴전(大小斂奠)에는 모두 효자(孝子)의 배례를 말하지 않고 성복 후에서야 비로소 주인 이하의 재배를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국제에는 없으니 아마도 주자의 설을 따르는 것이 무방할 듯합니다.
12. 진조조전(陳朝祖奠)089) 《의례경전(儀禮經傳)》에, ‘내수(內竪)는 상기(喪紀)의 일이 있을 때이면 내인(內人)들을 벽제(辟除)한다.’ 하였고, ‘세부(世婦)가 여궁(女宮)을 거느리고서 자성(粢盛)을 씻어 제기(祭器)에 담는다.’ 하였습니다. 《오례의(五禮儀)》 【조조(朝祖)와 전(奠)이 없다.】 신이 상고하건대, 예(禮)에 ‘상구(喪柩)를 조상의 종묘로 옮겨 망인(亡人)이 조상을 뵙게 하는 것은 망인의 효심을 따르는 것이니 망인의 처지에서 보면 평소 거처하던 침실을 떠나는 것이 슬프다. 그러므로 조고(祖考)의 종묘에 가서 결별하고서 떠나는 것이다.’ 하였으니, 이는 진실로 예의 큰 절목으로서 폐할 수 없는 것인데 국제에는 없으니 아마도 강구해 행해야 될 듯합니다. 그리고 이어 정제(定制)로 삼으시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13. 계(啓). 《의례경전(儀禮經傳)》에, ‘상축(喪祝)이 계한다.’ 하였고, ‘장부(丈夫)는 문(免)090) 하고 부인은 복머리[髽]를 하고 산대(散帶)091) 를 드리우고서 자리로 나아간다.’ 하였고, ‘계하는 새벽에는 외내가 모두 곡하지 않는다.’ 【기(記).】 하였습니다. 《오례의(五禮儀)》 【변복(變服)하는 절차가 없다.】 신이 상고하건대, 계빈(啓殯)은 시구(尸柩)를 뵙는 것이므로 소렴 때처럼 변복하는 것입니다. 이는 큰 절목인데 국제에는 없으니 고례를 따르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14. 조전(祖奠)092) . 《의례경전(儀禮經傳)》에, ‘조전에 깔 건석(巾席)을 걷고서 서쪽에서 기다리면 주인은 허리를 굽히고서 올라가고 부인은 뛰면서[踊] 내려간다. 주인이 단(袒)하면 상축(商祝)이 상구(喪柩)를 실은 수레를 어거하여 출발해 조금 가다가 멈춘다. 주인은 뛰면서 단했던 옷소매를 바르게 입고서 상구를 실은 수레 앞으로 가서 상구의 남쪽을 수레에 묶고, 부인은 내려와서 섬돌 사이의 위치로 나아간다. 떠나가는 데는[祖] 순서가 있기 때문에 수레는 방향을 틀지만 음식을 차려놓았던 그릇은 방향을 돌리지 않는다. 축(祝)이 명(銘)093) 을 가져다가 자리[菌]094) 위에 놓으면 두 사람이 중(重)095) 의 왼쪽을 돌아 나아가서 자리를 펴고 조전을 앞서와 같이 행한다. 그러면 주인은 허리를 굽히고서 말을 바치기를[薦馬] 앞서와 같이 한다. 빈(賓)이 나아가면 주인이 전송한다.’ 하였고, 《예기(禮記)》에, ‘뜰에서 조전을 행한다.’ 【상례의(喪禮儀)에 자세히 보인다.】 하였고, ‘상구를 실은 수레가 출발하여 조금 가다가 멈추는데 수레의 방향은 돌리지만 위치는 바뀌지 않고, 곁에서 네 사람이 피(披)096) 를 잡는다.’ 【본경(本經)의 기록이다.】 하였고, ‘축(祝)이 조전의 제찬(祭饌)을 주인의 남쪽에 있는 수레[輅] 앞에 북쪽을 상(上)으로 하여 차려 놓고서 보자기로 덮는다.’ 【상동(上同).】 하였습니다. 《오례의(五禮儀)》 【대략 같다.】 신이 상고하건대, 국제(國制)에 비록 이 의전(儀典)이 있으나 이미 조조(朝祖)에 관한 절목이 없으므로 이 의전을 빈전(殯殿)에서 시행하고서 그대로 발인하니 매우 먼 길을 가는데 가까운 데서부터 점진적으로 나아가는 뜻이 아닙니다. 고례에는 조조의 의전이 있고, 이어 조전(祖奠)을 묘정(廟庭)에서 행하고, 이튿날 새벽에 견전(遣奠)을 행하고서 발인합니다. 발인 절차는 《의례(儀禮)》에 자세히 나타나 있습니다. 15. 우(虞)097) 《의례경전(儀禮經傳)》에, ‘제후는 칠우(七虞)이다.’ 하였습니다. 《오례의(五禮儀)》 【반우의(返虞儀)가 있다.】 신이 상고하건대, 예에 ‘정오에 우제(虞祭)를 지낸다. 길이 먼 경우에는 무덤에서 우제를 행한다.’ 하였으니, 반우(返虞)한다는 글에 구애될 필요가 없을 듯합니다. 16. 반곡(返哭)098) 《의례경전(儀禮經傳)》에, ‘반곡하는 사람은 서계(西階)로 올라가 동쪽을 향하고 주인은 당하(堂下)에서 동쪽을 향해 서는데 북쪽을 상(上)으로 한다. 부인은 들어가고 대부는 뛰면서[踊] 조계(阼階)로 올라간다. 주부는 실내(室內)099) 로 들어간다.’ 하였습니다. 《오례의(五禮儀)》 【없다.】 신이 상고하건대, 예에 ‘반곡하여 조문(吊問)하는 것은 슬픔이 지극한 것이다. 돌아왔으나 어버이는 이미 죽어 없어져서 어버이를 잃었으니 이때를 당하여 슬픔이 지극하다.’ 하였고, 주자가 말하기를, ‘반곡하려고 당(堂)으로 오르는 것은 돌아간 어버이가 평소 예를 행하였던 곳으로 돌아가는 것이고, 주부가 실(室)로 들어가는 것은 죽은 어버이가 평소 궤양(饋養)했던 곳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 의사를 안다면 이른바 그가 밟던 자리를 밟고 그가 행하던 예를 행하는 등의 일이 자연스럽게 행해져서 바야흐로 계지(繼志)·술사(述事)의 일을 알게 될 것이다.’ 하였습니다. 이 한 절목을 빠뜨려서는 안 될 것 같은데 국제에는 없으니 고례를 따르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17. 조석전(朝夕奠)을 파함. 신이 상고하건대, 이 한 절목은 초우(初虞) 뒤에 있어야 하는데 《의례경전(儀禮經傳)》이나 국제에 나오는 글이 없으므로 신이 삼가 《가례(家禮)》에서 따다가 보충하였습니다. 18. 부(祔)100) 《의례경전(儀禮經傳)》에, ‘명일(明日)101) 에 신주(神主)를 소목(昭穆)의 반차(班次)에 따라 종묘에 모신다.’ 【사우(士虞).】 하였고, ‘명일 조부(祖父)의 신주를 다른 사당으로 옮기고 새로 죽은 이의 신주를 조부의 신주가 있던 곳에 모신다. 상제(喪祭)가 변하여 길제(吉祭)로 가고 부묘(祔廟)하는 데는 반드시 하루를 띄우지 않고 이 날에 접속해서 행한다.’ 【예기.】 하였고, ‘부제(祔祭) 때는 상장(喪杖)을 짚고서 당(堂)102) 에 오르지 않는다.’ 【상소기(喪小記).】 하였고, 주자가 말하기를, ‘선왕(先王)께서 예를 제정한 것은 본래 인정에 따른 것이니 길흉의 사이에 변하는 것이 순서가 있다. 그러므로 처음 죽었을 때는 오로지 생존한 분을 섬기는 예를 쓰고 졸곡(卒哭)과 부묘(祔廟)를 마친 뒤에야 신(神)으로 섬긴다. 그러나 차마 다 변경할 수 없기 때문에 신주를 다시 정침(正寢)으로 모셔다가 생존한 분을 섬기는 예로 섬기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오례의(五禮儀)》 【없다.】 신이 상고하건대, 주자가 말하기를 ‘새로 죽은 분을 조부의 사당에 부(祔)하는 것은 조부에게 다른 사당으로 옮긴다는 것을 고하고 새로 죽은 분에게 이 사당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고하는 순서이다. 그런데 지금은 공실(公室)이나 사가(私家)의 묘(廟)에 모두 한 사당 안에 감실(龕室)103) 만을 달리하고 서쪽을 상(上)으로 하는 제도만이 있고 다시 좌소(左昭), 우목(右穆)의 반차(班次)가 없다. 그러므로 체천(遞遷)할 경우가 생기면 모든 감실을 다 옮기고 새로 죽은 이가 그 아버지가 있던 감실로 들어간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예의 큰 절목으로서 고례와 같지 않다. 그런데 예를 하는 자들이 오히려 조부가 있던 사당에 부(祔)한다는 예문을 고집하는 것은 의의가 없는 듯하다. 그렇다고 마침내 예를 고쳐서 아버지 사당에 부한다면 또 애례존양(愛禮存羊)104) 의 뜻이 아닐 것이다.’ 하였으니, 이에 의거해 보면 이것은 폐할 수 없는 큰 절목인데 국제에는 없으니 아마도 강정해 행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태백산사고본】 1책 1권 17장 B면【국편영인본】 35책 373면
[註 047] 인혁(因革) : 옛것을 따름과 개혁함.[註 048] 취송(聚訟) : 서로 시비하여 결말이 나지 아니함.[註 049] 정문(情文) : 내용과 형식.[註 050] 개원(開元) : 당 현종(唐玄宗)의 연호.[註 051] 변제(變除) : 변복(變服) 공제(公除).[註 052] 통상(通喪) : 상하가 통행하는 상례로 삼년상을 이름.[註 053] 경화(更化) : 정치와 교화를 고치어 새롭게 함.[註 054] 사위(事爲) : 사업.[註 055] 여러 왕손(王孫) : 소현 세자(昭顯世子)의 세 아들. 인조 25년에 당시 강빈 사건(姜嬪事件:소현 세자의 음식에 독을 넣어 죽였다는 무고 사건)이 문제가 되어 그의 소생인 왕손 3형제를 제주도에 귀양보냈는데, 이때 장자 석철(石鐵)은 12세, 차자 석린(石麟)은 8세, 삼자 석견(石堅)은 4세였다.[註 056] 고명(顧命) : 임금이 죽을 때 후사를 부탁하는 유명(遺命).[註 057] 재생백(哉生魄) : 음력 16일.[註 058] 서언(誓言) : 유언.[註 059] 노침(路寢) : 정전(正殿).[註 060] 정종(正終) : 정전에서 죽음.[註 061] 복(復) : 초혼(招魂). 사람이 죽은 몇 시간 뒤에 망인이 입던 옷을 가지고 지붕에 올라가서 왼손으로 깃을 잡고 오른손으로 허리를 잡고서 아무(何某)는 복하라고 세 번 외친 다음 그 옷으로 시신을 덮음.[註 062] 《의례경전(儀禮經傳)》 : 주자(朱子)가 찬(撰)한 《의례경전통해(儀禮經傳通解)》로 원집(原集)이 37권이고 속집이 29권임.[註 063] 시사전(始死奠) : 고복(皋復)이 끝난 뒤에 올리는 전.[註 064] 항시(巷市) : 골목에서 시장을 보는 것. 국상이 나면 애도의 뜻으로 시장을 철거하기 때문에 필요한 생필품을 골목에서 구함.[註 065] 차길(借吉) : 상제의 몸으로 길례(吉禮) 때에 특별히 길복(吉服)을 입는 것.[註 066] 천시(遷尸) : 왕이 죽어 소렴, 대렴을 마친 뒤에 왕의 시신을 당(堂)으로 옮기는 것.[註 067] 설치(楔齒) : 반함(飯含)을 하기 전에 먼저 뿔 숟가락을 아래 위의 이(齒) 사이에 끼워 입이 다물어지지 않게 하는 것.[註 068] 철족(綴足) : 시신의 발이 뒤틀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발을 의자의 다리에 묶어 놓는 것.[註 069] 유당(帷堂) : 당상(堂上)에 유막(帷幕)을 설치한 상막(喪幕).[註 070] 각사(角柶) : 뿔로 만든 숟가락.[註 071] 연궤(燕几) : 편안한 의자.[註 072] 흔창(興鬯) : 왕의 시신을 목욕시키는 울창주(鬱鬯酒).[註 073] 사기(肆器) : 너비가 8척, 길이가 12척, 깊이가 3척인 얼음을 채운 통. 하절기에 시체의 부패를 방지하기 위하여 얼음을 채운 이 통을 시신에 넣어둠.[註 074] 권의(卷衣) : 곤룡포.[註 075] 금모(錦冒) : 시체를 싸는 비단 자루 습(襲) 이후와 소렴 이전에 시체를 싸둔다.[註 076] 보쇄(黼殺) : 시체를 싸는 도끼 무늬의 수를 놓은 천. 위를 싸는 것을 보라하고 아래를 싸는 것을 쇄라함.[註 077] 모질(冒質) : 금모(錦昌)의 윗부분이다..[註 078] 쇄(殺) : 금모의 아래 부분이다.[註 079] 반옥(飯玉) : 염할 때 죽은 사람의 입에 구슬을 물리는 것.[註 080] 반미(飯米) : 염할 때 죽은 사람의 일에 쌀을 물리는 것.[註 081] 막포(幕布) : 장막을 만드는 거친 베.[註 082] 온공(溫公) : 사마광(司馬光).[註 083] 습(襲) : 죽은 사람에게 좌임포(左衽袍)를 입히는 것.[註 084] 반함(飯含) : 염할 때 죽은 사람의 입에 쌀을 물리는 것.[註 085] 환질(環絰) : 성복 때 상제가 건(巾) 위에 덧씌워 쓰는 수절(首絰).[註 086] 위모(委貌) : 관명(冠名).[註 087] 금(衾) : 홑이불.[註 088] 계빈(啓殯) : 발인(發靷)할 때 출란(出棺)하기 위하여 빈소를 여는 것.[註 089] 진조조전(陳朝祖奠) : 발인할 때 죽은 사람이 종묘로 가서 마지막으로 조상을 보이고 하직 인사를 올리게 하고 곁들어 전을 올리는 것.[註 090] 문(免) : 갓을 벗고 한 치 너비의 베로 머리를 묶고 뒤로 늘어 뜨리는 것.[註 091] 산대(散帶) : 띠의 끝을 꼬지 않고 흐트려 놓은 것.[註 092] 조전(祖奠) : 발인에 앞서 출발을 알리는 전. 조는 행신(行神)을 뜻함.[註 093] 명(銘) : 명정.[註 094] 자리[菌] : 관 밑에 까는 자리로서 관과 함께 묻는다.[註 095] 중(重) : 우제(虞祭) 이전에는 신주가 없으므로 나무를 깎아 뜰 중앙에 세워 놓고 죽은 이의 혼신이 임시로 이 나무에 의지하게 하고 또 죽은 이의 필요한 물건들을 이 나무에 매달아 놓는다.[註 096] 피(披) : 관을 끄는 끈.[註 097] 우(虞) : 장사를 지내고 돌아와서 빈궁(殯宮)에 지내는 제사. 망인의 시체는 땅으로 돌아갔으나 정기(精氣)는 정처 없이 방황하므로 우제를 올려 혼신을 안정시킴.[註 098] 반곡(返哭) : 장사를 마치고 돌아와서 종묘에서 곡을 하며 슬픔을 다하는 것.[註 099] 실내(室內) : 종묘 안.[註 100] 부(祔) : 졸곡(卒哭)이 끝난 다음날, 새로 죽은 이의 신주(神主)를 소목(昭穆)의 서차에 따라 종묘에 모시는 것.[註 101] 명일(明日) : 졸곡(卒哭) 다음날.[註 102] 당(堂) : 사당.[註 103] 감실(龕室) : 종묘 안에 신주를 모셔 놓는 장.[註 104] 애례존양(愛禮存羊) : 예를 아껴 구례(舊禮) 또는 허례(虛禮)를 버리지 않고 보전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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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례경전(儀禮經傳)》에, ‘내수(內竪)는 상기(喪紀)의 일이 있을 때이면 내인(內人)들을 벽제(辟除)한다.’ 하였고, ‘세부(世婦)가 여궁(女宮)을 거느리고서 자성(粢盛)을 씻어 제기(祭器)에 담는다.’ 하였습니다.
《오례의(五禮儀)》 【조조(朝祖)와 전(奠)이 없다.】 신이 상고하건대, 예(禮)에 ‘상구(喪柩)를 조상의 종묘로 옮겨 망인(亡人)이 조상을 뵙게 하는 것은 망인의 효심을 따르는 것이니 망인의 처지에서 보면 평소 거처하던 침실을 떠나는 것이 슬프다. 그러므로 조고(祖考)의 종묘에 가서 결별하고서 떠나는 것이다.’ 하였으니, 이는 진실로 예의 큰 절목으로서 폐할 수 없는 것인데 국제에는 없으니 아마도 강구해 행해야 될 듯합니다. 그리고 이어 정제(定制)로 삼으시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13. 계(啓). 《의례경전(儀禮經傳)》에, ‘상축(喪祝)이 계한다.’ 하였고, ‘장부(丈夫)는 문(免)090) 하고 부인은 복머리[髽]를 하고 산대(散帶)091) 를 드리우고서 자리로 나아간다.’ 하였고, ‘계하는 새벽에는 외내가 모두 곡하지 않는다.’ 【기(記).】 하였습니다. 《오례의(五禮儀)》 【변복(變服)하는 절차가 없다.】 신이 상고하건대, 계빈(啓殯)은 시구(尸柩)를 뵙는 것이므로 소렴 때처럼 변복하는 것입니다. 이는 큰 절목인데 국제에는 없으니 고례를 따르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14. 조전(祖奠)092) . 《의례경전(儀禮經傳)》에, ‘조전에 깔 건석(巾席)을 걷고서 서쪽에서 기다리면 주인은 허리를 굽히고서 올라가고 부인은 뛰면서[踊] 내려간다. 주인이 단(袒)하면 상축(商祝)이 상구(喪柩)를 실은 수레를 어거하여 출발해 조금 가다가 멈춘다. 주인은 뛰면서 단했던 옷소매를 바르게 입고서 상구를 실은 수레 앞으로 가서 상구의 남쪽을 수레에 묶고, 부인은 내려와서 섬돌 사이의 위치로 나아간다. 떠나가는 데는[祖] 순서가 있기 때문에 수레는 방향을 틀지만 음식을 차려놓았던 그릇은 방향을 돌리지 않는다. 축(祝)이 명(銘)093) 을 가져다가 자리[菌]094) 위에 놓으면 두 사람이 중(重)095) 의 왼쪽을 돌아 나아가서 자리를 펴고 조전을 앞서와 같이 행한다. 그러면 주인은 허리를 굽히고서 말을 바치기를[薦馬] 앞서와 같이 한다. 빈(賓)이 나아가면 주인이 전송한다.’ 하였고, 《예기(禮記)》에, ‘뜰에서 조전을 행한다.’ 【상례의(喪禮儀)에 자세히 보인다.】 하였고, ‘상구를 실은 수레가 출발하여 조금 가다가 멈추는데 수레의 방향은 돌리지만 위치는 바뀌지 않고, 곁에서 네 사람이 피(披)096) 를 잡는다.’ 【본경(本經)의 기록이다.】 하였고, ‘축(祝)이 조전의 제찬(祭饌)을 주인의 남쪽에 있는 수레[輅] 앞에 북쪽을 상(上)으로 하여 차려 놓고서 보자기로 덮는다.’ 【상동(上同).】 하였습니다. 《오례의(五禮儀)》 【대략 같다.】 신이 상고하건대, 국제(國制)에 비록 이 의전(儀典)이 있으나 이미 조조(朝祖)에 관한 절목이 없으므로 이 의전을 빈전(殯殿)에서 시행하고서 그대로 발인하니 매우 먼 길을 가는데 가까운 데서부터 점진적으로 나아가는 뜻이 아닙니다. 고례에는 조조의 의전이 있고, 이어 조전(祖奠)을 묘정(廟庭)에서 행하고, 이튿날 새벽에 견전(遣奠)을 행하고서 발인합니다. 발인 절차는 《의례(儀禮)》에 자세히 나타나 있습니다. 15. 우(虞)097) 《의례경전(儀禮經傳)》에, ‘제후는 칠우(七虞)이다.’ 하였습니다. 《오례의(五禮儀)》 【반우의(返虞儀)가 있다.】 신이 상고하건대, 예에 ‘정오에 우제(虞祭)를 지낸다. 길이 먼 경우에는 무덤에서 우제를 행한다.’ 하였으니, 반우(返虞)한다는 글에 구애될 필요가 없을 듯합니다. 16. 반곡(返哭)098) 《의례경전(儀禮經傳)》에, ‘반곡하는 사람은 서계(西階)로 올라가 동쪽을 향하고 주인은 당하(堂下)에서 동쪽을 향해 서는데 북쪽을 상(上)으로 한다. 부인은 들어가고 대부는 뛰면서[踊] 조계(阼階)로 올라간다. 주부는 실내(室內)099) 로 들어간다.’ 하였습니다. 《오례의(五禮儀)》 【없다.】 신이 상고하건대, 예에 ‘반곡하여 조문(吊問)하는 것은 슬픔이 지극한 것이다. 돌아왔으나 어버이는 이미 죽어 없어져서 어버이를 잃었으니 이때를 당하여 슬픔이 지극하다.’ 하였고, 주자가 말하기를, ‘반곡하려고 당(堂)으로 오르는 것은 돌아간 어버이가 평소 예를 행하였던 곳으로 돌아가는 것이고, 주부가 실(室)로 들어가는 것은 죽은 어버이가 평소 궤양(饋養)했던 곳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 의사를 안다면 이른바 그가 밟던 자리를 밟고 그가 행하던 예를 행하는 등의 일이 자연스럽게 행해져서 바야흐로 계지(繼志)·술사(述事)의 일을 알게 될 것이다.’ 하였습니다. 이 한 절목을 빠뜨려서는 안 될 것 같은데 국제에는 없으니 고례를 따르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17. 조석전(朝夕奠)을 파함. 신이 상고하건대, 이 한 절목은 초우(初虞) 뒤에 있어야 하는데 《의례경전(儀禮經傳)》이나 국제에 나오는 글이 없으므로 신이 삼가 《가례(家禮)》에서 따다가 보충하였습니다. 18. 부(祔)100) 《의례경전(儀禮經傳)》에, ‘명일(明日)101) 에 신주(神主)를 소목(昭穆)의 반차(班次)에 따라 종묘에 모신다.’ 【사우(士虞).】 하였고, ‘명일 조부(祖父)의 신주를 다른 사당으로 옮기고 새로 죽은 이의 신주를 조부의 신주가 있던 곳에 모신다. 상제(喪祭)가 변하여 길제(吉祭)로 가고 부묘(祔廟)하는 데는 반드시 하루를 띄우지 않고 이 날에 접속해서 행한다.’ 【예기.】 하였고, ‘부제(祔祭) 때는 상장(喪杖)을 짚고서 당(堂)102) 에 오르지 않는다.’ 【상소기(喪小記).】 하였고, 주자가 말하기를, ‘선왕(先王)께서 예를 제정한 것은 본래 인정에 따른 것이니 길흉의 사이에 변하는 것이 순서가 있다. 그러므로 처음 죽었을 때는 오로지 생존한 분을 섬기는 예를 쓰고 졸곡(卒哭)과 부묘(祔廟)를 마친 뒤에야 신(神)으로 섬긴다. 그러나 차마 다 변경할 수 없기 때문에 신주를 다시 정침(正寢)으로 모셔다가 생존한 분을 섬기는 예로 섬기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오례의(五禮儀)》 【없다.】 신이 상고하건대, 주자가 말하기를 ‘새로 죽은 분을 조부의 사당에 부(祔)하는 것은 조부에게 다른 사당으로 옮긴다는 것을 고하고 새로 죽은 분에게 이 사당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고하는 순서이다. 그런데 지금은 공실(公室)이나 사가(私家)의 묘(廟)에 모두 한 사당 안에 감실(龕室)103) 만을 달리하고 서쪽을 상(上)으로 하는 제도만이 있고 다시 좌소(左昭), 우목(右穆)의 반차(班次)가 없다. 그러므로 체천(遞遷)할 경우가 생기면 모든 감실을 다 옮기고 새로 죽은 이가 그 아버지가 있던 감실로 들어간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예의 큰 절목으로서 고례와 같지 않다. 그런데 예를 하는 자들이 오히려 조부가 있던 사당에 부(祔)한다는 예문을 고집하는 것은 의의가 없는 듯하다. 그렇다고 마침내 예를 고쳐서 아버지 사당에 부한다면 또 애례존양(愛禮存羊)104) 의 뜻이 아닐 것이다.’ 하였으니, 이에 의거해 보면 이것은 폐할 수 없는 큰 절목인데 국제에는 없으니 아마도 강정해 행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태백산사고본】 1책 1권 17장 B면【국편영인본】 35책 373면
[註 047] 인혁(因革) : 옛것을 따름과 개혁함.[註 048] 취송(聚訟) : 서로 시비하여 결말이 나지 아니함.[註 049] 정문(情文) : 내용과 형식.[註 050] 개원(開元) : 당 현종(唐玄宗)의 연호.[註 051] 변제(變除) : 변복(變服) 공제(公除).[註 052] 통상(通喪) : 상하가 통행하는 상례로 삼년상을 이름.[註 053] 경화(更化) : 정치와 교화를 고치어 새롭게 함.[註 054] 사위(事爲) : 사업.[註 055] 여러 왕손(王孫) : 소현 세자(昭顯世子)의 세 아들. 인조 25년에 당시 강빈 사건(姜嬪事件:소현 세자의 음식에 독을 넣어 죽였다는 무고 사건)이 문제가 되어 그의 소생인 왕손 3형제를 제주도에 귀양보냈는데, 이때 장자 석철(石鐵)은 12세, 차자 석린(石麟)은 8세, 삼자 석견(石堅)은 4세였다.[註 056] 고명(顧命) : 임금이 죽을 때 후사를 부탁하는 유명(遺命).[註 057] 재생백(哉生魄) : 음력 16일.[註 058] 서언(誓言) : 유언.[註 059] 노침(路寢) : 정전(正殿).[註 060] 정종(正終) : 정전에서 죽음.[註 061] 복(復) : 초혼(招魂). 사람이 죽은 몇 시간 뒤에 망인이 입던 옷을 가지고 지붕에 올라가서 왼손으로 깃을 잡고 오른손으로 허리를 잡고서 아무(何某)는 복하라고 세 번 외친 다음 그 옷으로 시신을 덮음.[註 062] 《의례경전(儀禮經傳)》 : 주자(朱子)가 찬(撰)한 《의례경전통해(儀禮經傳通解)》로 원집(原集)이 37권이고 속집이 29권임.[註 063] 시사전(始死奠) : 고복(皋復)이 끝난 뒤에 올리는 전.[註 064] 항시(巷市) : 골목에서 시장을 보는 것. 국상이 나면 애도의 뜻으로 시장을 철거하기 때문에 필요한 생필품을 골목에서 구함.[註 065] 차길(借吉) : 상제의 몸으로 길례(吉禮) 때에 특별히 길복(吉服)을 입는 것.[註 066] 천시(遷尸) : 왕이 죽어 소렴, 대렴을 마친 뒤에 왕의 시신을 당(堂)으로 옮기는 것.[註 067] 설치(楔齒) : 반함(飯含)을 하기 전에 먼저 뿔 숟가락을 아래 위의 이(齒) 사이에 끼워 입이 다물어지지 않게 하는 것.[註 068] 철족(綴足) : 시신의 발이 뒤틀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발을 의자의 다리에 묶어 놓는 것.[註 069] 유당(帷堂) : 당상(堂上)에 유막(帷幕)을 설치한 상막(喪幕).[註 070] 각사(角柶) : 뿔로 만든 숟가락.[註 071] 연궤(燕几) : 편안한 의자.[註 072] 흔창(興鬯) : 왕의 시신을 목욕시키는 울창주(鬱鬯酒).[註 073] 사기(肆器) : 너비가 8척, 길이가 12척, 깊이가 3척인 얼음을 채운 통. 하절기에 시체의 부패를 방지하기 위하여 얼음을 채운 이 통을 시신에 넣어둠.[註 074] 권의(卷衣) : 곤룡포.[註 075] 금모(錦冒) : 시체를 싸는 비단 자루 습(襲) 이후와 소렴 이전에 시체를 싸둔다.[註 076] 보쇄(黼殺) : 시체를 싸는 도끼 무늬의 수를 놓은 천. 위를 싸는 것을 보라하고 아래를 싸는 것을 쇄라함.[註 077] 모질(冒質) : 금모(錦昌)의 윗부분이다..[註 078] 쇄(殺) : 금모의 아래 부분이다.[註 079] 반옥(飯玉) : 염할 때 죽은 사람의 입에 구슬을 물리는 것.[註 080] 반미(飯米) : 염할 때 죽은 사람의 일에 쌀을 물리는 것.[註 081] 막포(幕布) : 장막을 만드는 거친 베.[註 082] 온공(溫公) : 사마광(司馬光).[註 083] 습(襲) : 죽은 사람에게 좌임포(左衽袍)를 입히는 것.[註 084] 반함(飯含) : 염할 때 죽은 사람의 입에 쌀을 물리는 것.[註 085] 환질(環絰) : 성복 때 상제가 건(巾) 위에 덧씌워 쓰는 수절(首絰).[註 086] 위모(委貌) : 관명(冠名).[註 087] 금(衾) : 홑이불.[註 088] 계빈(啓殯) : 발인(發靷)할 때 출란(出棺)하기 위하여 빈소를 여는 것.[註 089] 진조조전(陳朝祖奠) : 발인할 때 죽은 사람이 종묘로 가서 마지막으로 조상을 보이고 하직 인사를 올리게 하고 곁들어 전을 올리는 것.[註 090] 문(免) : 갓을 벗고 한 치 너비의 베로 머리를 묶고 뒤로 늘어 뜨리는 것.[註 091] 산대(散帶) : 띠의 끝을 꼬지 않고 흐트려 놓은 것.[註 092] 조전(祖奠) : 발인에 앞서 출발을 알리는 전. 조는 행신(行神)을 뜻함.[註 093] 명(銘) : 명정.[註 094] 자리[菌] : 관 밑에 까는 자리로서 관과 함께 묻는다.[註 095] 중(重) : 우제(虞祭) 이전에는 신주가 없으므로 나무를 깎아 뜰 중앙에 세워 놓고 죽은 이의 혼신이 임시로 이 나무에 의지하게 하고 또 죽은 이의 필요한 물건들을 이 나무에 매달아 놓는다.[註 096] 피(披) : 관을 끄는 끈.[註 097] 우(虞) : 장사를 지내고 돌아와서 빈궁(殯宮)에 지내는 제사. 망인의 시체는 땅으로 돌아갔으나 정기(精氣)는 정처 없이 방황하므로 우제를 올려 혼신을 안정시킴.[註 098] 반곡(返哭) : 장사를 마치고 돌아와서 종묘에서 곡을 하며 슬픔을 다하는 것.[註 099] 실내(室內) : 종묘 안.[註 100] 부(祔) : 졸곡(卒哭)이 끝난 다음날, 새로 죽은 이의 신주(神主)를 소목(昭穆)의 서차에 따라 종묘에 모시는 것.[註 101] 명일(明日) : 졸곡(卒哭) 다음날.[註 102] 당(堂) : 사당.[註 103] 감실(龕室) : 종묘 안에 신주를 모셔 놓는 장.[註 104] 애례존양(愛禮存羊) : 예를 아껴 구례(舊禮) 또는 허례(虛禮)를 버리지 않고 보전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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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상고하건대, 예(禮)에 ‘상구(喪柩)를 조상의 종묘로 옮겨 망인(亡人)이 조상을 뵙게 하는 것은 망인의 효심을 따르는 것이니 망인의 처지에서 보면 평소 거처하던 침실을 떠나는 것이 슬프다. 그러므로 조고(祖考)의 종묘에 가서 결별하고서 떠나는 것이다.’ 하였으니, 이는 진실로 예의 큰 절목으로서 폐할 수 없는 것인데 국제에는 없으니 아마도 강구해 행해야 될 듯합니다. 그리고 이어 정제(定制)로 삼으시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13. 계(啓).
《의례경전(儀禮經傳)》에, ‘상축(喪祝)이 계한다.’ 하였고, ‘장부(丈夫)는 문(免)090) 하고 부인은 복머리[髽]를 하고 산대(散帶)091) 를 드리우고서 자리로 나아간다.’ 하였고, ‘계하는 새벽에는 외내가 모두 곡하지 않는다.’ 【기(記).】 하였습니다.
《오례의(五禮儀)》 【변복(變服)하는 절차가 없다.】 신이 상고하건대, 계빈(啓殯)은 시구(尸柩)를 뵙는 것이므로 소렴 때처럼 변복하는 것입니다. 이는 큰 절목인데 국제에는 없으니 고례를 따르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14. 조전(祖奠)092) . 《의례경전(儀禮經傳)》에, ‘조전에 깔 건석(巾席)을 걷고서 서쪽에서 기다리면 주인은 허리를 굽히고서 올라가고 부인은 뛰면서[踊] 내려간다. 주인이 단(袒)하면 상축(商祝)이 상구(喪柩)를 실은 수레를 어거하여 출발해 조금 가다가 멈춘다. 주인은 뛰면서 단했던 옷소매를 바르게 입고서 상구를 실은 수레 앞으로 가서 상구의 남쪽을 수레에 묶고, 부인은 내려와서 섬돌 사이의 위치로 나아간다. 떠나가는 데는[祖] 순서가 있기 때문에 수레는 방향을 틀지만 음식을 차려놓았던 그릇은 방향을 돌리지 않는다. 축(祝)이 명(銘)093) 을 가져다가 자리[菌]094) 위에 놓으면 두 사람이 중(重)095) 의 왼쪽을 돌아 나아가서 자리를 펴고 조전을 앞서와 같이 행한다. 그러면 주인은 허리를 굽히고서 말을 바치기를[薦馬] 앞서와 같이 한다. 빈(賓)이 나아가면 주인이 전송한다.’ 하였고, 《예기(禮記)》에, ‘뜰에서 조전을 행한다.’ 【상례의(喪禮儀)에 자세히 보인다.】 하였고, ‘상구를 실은 수레가 출발하여 조금 가다가 멈추는데 수레의 방향은 돌리지만 위치는 바뀌지 않고, 곁에서 네 사람이 피(披)096) 를 잡는다.’ 【본경(本經)의 기록이다.】 하였고, ‘축(祝)이 조전의 제찬(祭饌)을 주인의 남쪽에 있는 수레[輅] 앞에 북쪽을 상(上)으로 하여 차려 놓고서 보자기로 덮는다.’ 【상동(上同).】 하였습니다. 《오례의(五禮儀)》 【대략 같다.】 신이 상고하건대, 국제(國制)에 비록 이 의전(儀典)이 있으나 이미 조조(朝祖)에 관한 절목이 없으므로 이 의전을 빈전(殯殿)에서 시행하고서 그대로 발인하니 매우 먼 길을 가는데 가까운 데서부터 점진적으로 나아가는 뜻이 아닙니다. 고례에는 조조의 의전이 있고, 이어 조전(祖奠)을 묘정(廟庭)에서 행하고, 이튿날 새벽에 견전(遣奠)을 행하고서 발인합니다. 발인 절차는 《의례(儀禮)》에 자세히 나타나 있습니다. 15. 우(虞)097) 《의례경전(儀禮經傳)》에, ‘제후는 칠우(七虞)이다.’ 하였습니다. 《오례의(五禮儀)》 【반우의(返虞儀)가 있다.】 신이 상고하건대, 예에 ‘정오에 우제(虞祭)를 지낸다. 길이 먼 경우에는 무덤에서 우제를 행한다.’ 하였으니, 반우(返虞)한다는 글에 구애될 필요가 없을 듯합니다. 16. 반곡(返哭)098) 《의례경전(儀禮經傳)》에, ‘반곡하는 사람은 서계(西階)로 올라가 동쪽을 향하고 주인은 당하(堂下)에서 동쪽을 향해 서는데 북쪽을 상(上)으로 한다. 부인은 들어가고 대부는 뛰면서[踊] 조계(阼階)로 올라간다. 주부는 실내(室內)099) 로 들어간다.’ 하였습니다. 《오례의(五禮儀)》 【없다.】 신이 상고하건대, 예에 ‘반곡하여 조문(吊問)하는 것은 슬픔이 지극한 것이다. 돌아왔으나 어버이는 이미 죽어 없어져서 어버이를 잃었으니 이때를 당하여 슬픔이 지극하다.’ 하였고, 주자가 말하기를, ‘반곡하려고 당(堂)으로 오르는 것은 돌아간 어버이가 평소 예를 행하였던 곳으로 돌아가는 것이고, 주부가 실(室)로 들어가는 것은 죽은 어버이가 평소 궤양(饋養)했던 곳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 의사를 안다면 이른바 그가 밟던 자리를 밟고 그가 행하던 예를 행하는 등의 일이 자연스럽게 행해져서 바야흐로 계지(繼志)·술사(述事)의 일을 알게 될 것이다.’ 하였습니다. 이 한 절목을 빠뜨려서는 안 될 것 같은데 국제에는 없으니 고례를 따르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17. 조석전(朝夕奠)을 파함. 신이 상고하건대, 이 한 절목은 초우(初虞) 뒤에 있어야 하는데 《의례경전(儀禮經傳)》이나 국제에 나오는 글이 없으므로 신이 삼가 《가례(家禮)》에서 따다가 보충하였습니다. 18. 부(祔)100) 《의례경전(儀禮經傳)》에, ‘명일(明日)101) 에 신주(神主)를 소목(昭穆)의 반차(班次)에 따라 종묘에 모신다.’ 【사우(士虞).】 하였고, ‘명일 조부(祖父)의 신주를 다른 사당으로 옮기고 새로 죽은 이의 신주를 조부의 신주가 있던 곳에 모신다. 상제(喪祭)가 변하여 길제(吉祭)로 가고 부묘(祔廟)하는 데는 반드시 하루를 띄우지 않고 이 날에 접속해서 행한다.’ 【예기.】 하였고, ‘부제(祔祭) 때는 상장(喪杖)을 짚고서 당(堂)102) 에 오르지 않는다.’ 【상소기(喪小記).】 하였고, 주자가 말하기를, ‘선왕(先王)께서 예를 제정한 것은 본래 인정에 따른 것이니 길흉의 사이에 변하는 것이 순서가 있다. 그러므로 처음 죽었을 때는 오로지 생존한 분을 섬기는 예를 쓰고 졸곡(卒哭)과 부묘(祔廟)를 마친 뒤에야 신(神)으로 섬긴다. 그러나 차마 다 변경할 수 없기 때문에 신주를 다시 정침(正寢)으로 모셔다가 생존한 분을 섬기는 예로 섬기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오례의(五禮儀)》 【없다.】 신이 상고하건대, 주자가 말하기를 ‘새로 죽은 분을 조부의 사당에 부(祔)하는 것은 조부에게 다른 사당으로 옮긴다는 것을 고하고 새로 죽은 분에게 이 사당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고하는 순서이다. 그런데 지금은 공실(公室)이나 사가(私家)의 묘(廟)에 모두 한 사당 안에 감실(龕室)103) 만을 달리하고 서쪽을 상(上)으로 하는 제도만이 있고 다시 좌소(左昭), 우목(右穆)의 반차(班次)가 없다. 그러므로 체천(遞遷)할 경우가 생기면 모든 감실을 다 옮기고 새로 죽은 이가 그 아버지가 있던 감실로 들어간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예의 큰 절목으로서 고례와 같지 않다. 그런데 예를 하는 자들이 오히려 조부가 있던 사당에 부(祔)한다는 예문을 고집하는 것은 의의가 없는 듯하다. 그렇다고 마침내 예를 고쳐서 아버지 사당에 부한다면 또 애례존양(愛禮存羊)104) 의 뜻이 아닐 것이다.’ 하였으니, 이에 의거해 보면 이것은 폐할 수 없는 큰 절목인데 국제에는 없으니 아마도 강정해 행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태백산사고본】 1책 1권 17장 B면【국편영인본】 35책 373면
[註 047] 인혁(因革) : 옛것을 따름과 개혁함.[註 048] 취송(聚訟) : 서로 시비하여 결말이 나지 아니함.[註 049] 정문(情文) : 내용과 형식.[註 050] 개원(開元) : 당 현종(唐玄宗)의 연호.[註 051] 변제(變除) : 변복(變服) 공제(公除).[註 052] 통상(通喪) : 상하가 통행하는 상례로 삼년상을 이름.[註 053] 경화(更化) : 정치와 교화를 고치어 새롭게 함.[註 054] 사위(事爲) : 사업.[註 055] 여러 왕손(王孫) : 소현 세자(昭顯世子)의 세 아들. 인조 25년에 당시 강빈 사건(姜嬪事件:소현 세자의 음식에 독을 넣어 죽였다는 무고 사건)이 문제가 되어 그의 소생인 왕손 3형제를 제주도에 귀양보냈는데, 이때 장자 석철(石鐵)은 12세, 차자 석린(石麟)은 8세, 삼자 석견(石堅)은 4세였다.[註 056] 고명(顧命) : 임금이 죽을 때 후사를 부탁하는 유명(遺命).[註 057] 재생백(哉生魄) : 음력 16일.[註 058] 서언(誓言) : 유언.[註 059] 노침(路寢) : 정전(正殿).[註 060] 정종(正終) : 정전에서 죽음.[註 061] 복(復) : 초혼(招魂). 사람이 죽은 몇 시간 뒤에 망인이 입던 옷을 가지고 지붕에 올라가서 왼손으로 깃을 잡고 오른손으로 허리를 잡고서 아무(何某)는 복하라고 세 번 외친 다음 그 옷으로 시신을 덮음.[註 062] 《의례경전(儀禮經傳)》 : 주자(朱子)가 찬(撰)한 《의례경전통해(儀禮經傳通解)》로 원집(原集)이 37권이고 속집이 29권임.[註 063] 시사전(始死奠) : 고복(皋復)이 끝난 뒤에 올리는 전.[註 064] 항시(巷市) : 골목에서 시장을 보는 것. 국상이 나면 애도의 뜻으로 시장을 철거하기 때문에 필요한 생필품을 골목에서 구함.[註 065] 차길(借吉) : 상제의 몸으로 길례(吉禮) 때에 특별히 길복(吉服)을 입는 것.[註 066] 천시(遷尸) : 왕이 죽어 소렴, 대렴을 마친 뒤에 왕의 시신을 당(堂)으로 옮기는 것.[註 067] 설치(楔齒) : 반함(飯含)을 하기 전에 먼저 뿔 숟가락을 아래 위의 이(齒) 사이에 끼워 입이 다물어지지 않게 하는 것.[註 068] 철족(綴足) : 시신의 발이 뒤틀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발을 의자의 다리에 묶어 놓는 것.[註 069] 유당(帷堂) : 당상(堂上)에 유막(帷幕)을 설치한 상막(喪幕).[註 070] 각사(角柶) : 뿔로 만든 숟가락.[註 071] 연궤(燕几) : 편안한 의자.[註 072] 흔창(興鬯) : 왕의 시신을 목욕시키는 울창주(鬱鬯酒).[註 073] 사기(肆器) : 너비가 8척, 길이가 12척, 깊이가 3척인 얼음을 채운 통. 하절기에 시체의 부패를 방지하기 위하여 얼음을 채운 이 통을 시신에 넣어둠.[註 074] 권의(卷衣) : 곤룡포.[註 075] 금모(錦冒) : 시체를 싸는 비단 자루 습(襲) 이후와 소렴 이전에 시체를 싸둔다.[註 076] 보쇄(黼殺) : 시체를 싸는 도끼 무늬의 수를 놓은 천. 위를 싸는 것을 보라하고 아래를 싸는 것을 쇄라함.[註 077] 모질(冒質) : 금모(錦昌)의 윗부분이다..[註 078] 쇄(殺) : 금모의 아래 부분이다.[註 079] 반옥(飯玉) : 염할 때 죽은 사람의 입에 구슬을 물리는 것.[註 080] 반미(飯米) : 염할 때 죽은 사람의 일에 쌀을 물리는 것.[註 081] 막포(幕布) : 장막을 만드는 거친 베.[註 082] 온공(溫公) : 사마광(司馬光).[註 083] 습(襲) : 죽은 사람에게 좌임포(左衽袍)를 입히는 것.[註 084] 반함(飯含) : 염할 때 죽은 사람의 입에 쌀을 물리는 것.[註 085] 환질(環絰) : 성복 때 상제가 건(巾) 위에 덧씌워 쓰는 수절(首絰).[註 086] 위모(委貌) : 관명(冠名).[註 087] 금(衾) : 홑이불.[註 088] 계빈(啓殯) : 발인(發靷)할 때 출란(出棺)하기 위하여 빈소를 여는 것.[註 089] 진조조전(陳朝祖奠) : 발인할 때 죽은 사람이 종묘로 가서 마지막으로 조상을 보이고 하직 인사를 올리게 하고 곁들어 전을 올리는 것.[註 090] 문(免) : 갓을 벗고 한 치 너비의 베로 머리를 묶고 뒤로 늘어 뜨리는 것.[註 091] 산대(散帶) : 띠의 끝을 꼬지 않고 흐트려 놓은 것.[註 092] 조전(祖奠) : 발인에 앞서 출발을 알리는 전. 조는 행신(行神)을 뜻함.[註 093] 명(銘) : 명정.[註 094] 자리[菌] : 관 밑에 까는 자리로서 관과 함께 묻는다.[註 095] 중(重) : 우제(虞祭) 이전에는 신주가 없으므로 나무를 깎아 뜰 중앙에 세워 놓고 죽은 이의 혼신이 임시로 이 나무에 의지하게 하고 또 죽은 이의 필요한 물건들을 이 나무에 매달아 놓는다.[註 096] 피(披) : 관을 끄는 끈.[註 097] 우(虞) : 장사를 지내고 돌아와서 빈궁(殯宮)에 지내는 제사. 망인의 시체는 땅으로 돌아갔으나 정기(精氣)는 정처 없이 방황하므로 우제를 올려 혼신을 안정시킴.[註 098] 반곡(返哭) : 장사를 마치고 돌아와서 종묘에서 곡을 하며 슬픔을 다하는 것.[註 099] 실내(室內) : 종묘 안.[註 100] 부(祔) : 졸곡(卒哭)이 끝난 다음날, 새로 죽은 이의 신주(神主)를 소목(昭穆)의 서차에 따라 종묘에 모시는 것.[註 101] 명일(明日) : 졸곡(卒哭) 다음날.[註 102] 당(堂) : 사당.[註 103] 감실(龕室) : 종묘 안에 신주를 모셔 놓는 장.[註 104] 애례존양(愛禮存羊) : 예를 아껴 구례(舊禮) 또는 허례(虛禮)를 버리지 않고 보전하는 것.
ⓒ 한국고전번역원
신이 상고하건대, 계빈(啓殯)은 시구(尸柩)를 뵙는 것이므로 소렴 때처럼 변복하는 것입니다. 이는 큰 절목인데 국제에는 없으니 고례를 따르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14. 조전(祖奠)092) .
《의례경전(儀禮經傳)》에, ‘조전에 깔 건석(巾席)을 걷고서 서쪽에서 기다리면 주인은 허리를 굽히고서 올라가고 부인은 뛰면서[踊] 내려간다. 주인이 단(袒)하면 상축(商祝)이 상구(喪柩)를 실은 수레를 어거하여 출발해 조금 가다가 멈춘다. 주인은 뛰면서 단했던 옷소매를 바르게 입고서 상구를 실은 수레 앞으로 가서 상구의 남쪽을 수레에 묶고, 부인은 내려와서 섬돌 사이의 위치로 나아간다. 떠나가는 데는[祖] 순서가 있기 때문에 수레는 방향을 틀지만 음식을 차려놓았던 그릇은 방향을 돌리지 않는다. 축(祝)이 명(銘)093) 을 가져다가 자리[菌]094) 위에 놓으면 두 사람이 중(重)095) 의 왼쪽을 돌아 나아가서 자리를 펴고 조전을 앞서와 같이 행한다. 그러면 주인은 허리를 굽히고서 말을 바치기를[薦馬] 앞서와 같이 한다. 빈(賓)이 나아가면 주인이 전송한다.’ 하였고, 《예기(禮記)》에, ‘뜰에서 조전을 행한다.’ 【상례의(喪禮儀)에 자세히 보인다.】 하였고, ‘상구를 실은 수레가 출발하여 조금 가다가 멈추는데 수레의 방향은 돌리지만 위치는 바뀌지 않고, 곁에서 네 사람이 피(披)096) 를 잡는다.’ 【본경(本經)의 기록이다.】 하였고, ‘축(祝)이 조전의 제찬(祭饌)을 주인의 남쪽에 있는 수레[輅] 앞에 북쪽을 상(上)으로 하여 차려 놓고서 보자기로 덮는다.’ 【상동(上同).】 하였습니다.
《오례의(五禮儀)》 【대략 같다.】 신이 상고하건대, 국제(國制)에 비록 이 의전(儀典)이 있으나 이미 조조(朝祖)에 관한 절목이 없으므로 이 의전을 빈전(殯殿)에서 시행하고서 그대로 발인하니 매우 먼 길을 가는데 가까운 데서부터 점진적으로 나아가는 뜻이 아닙니다. 고례에는 조조의 의전이 있고, 이어 조전(祖奠)을 묘정(廟庭)에서 행하고, 이튿날 새벽에 견전(遣奠)을 행하고서 발인합니다. 발인 절차는 《의례(儀禮)》에 자세히 나타나 있습니다. 15. 우(虞)097) 《의례경전(儀禮經傳)》에, ‘제후는 칠우(七虞)이다.’ 하였습니다. 《오례의(五禮儀)》 【반우의(返虞儀)가 있다.】 신이 상고하건대, 예에 ‘정오에 우제(虞祭)를 지낸다. 길이 먼 경우에는 무덤에서 우제를 행한다.’ 하였으니, 반우(返虞)한다는 글에 구애될 필요가 없을 듯합니다. 16. 반곡(返哭)098) 《의례경전(儀禮經傳)》에, ‘반곡하는 사람은 서계(西階)로 올라가 동쪽을 향하고 주인은 당하(堂下)에서 동쪽을 향해 서는데 북쪽을 상(上)으로 한다. 부인은 들어가고 대부는 뛰면서[踊] 조계(阼階)로 올라간다. 주부는 실내(室內)099) 로 들어간다.’ 하였습니다. 《오례의(五禮儀)》 【없다.】 신이 상고하건대, 예에 ‘반곡하여 조문(吊問)하는 것은 슬픔이 지극한 것이다. 돌아왔으나 어버이는 이미 죽어 없어져서 어버이를 잃었으니 이때를 당하여 슬픔이 지극하다.’ 하였고, 주자가 말하기를, ‘반곡하려고 당(堂)으로 오르는 것은 돌아간 어버이가 평소 예를 행하였던 곳으로 돌아가는 것이고, 주부가 실(室)로 들어가는 것은 죽은 어버이가 평소 궤양(饋養)했던 곳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 의사를 안다면 이른바 그가 밟던 자리를 밟고 그가 행하던 예를 행하는 등의 일이 자연스럽게 행해져서 바야흐로 계지(繼志)·술사(述事)의 일을 알게 될 것이다.’ 하였습니다. 이 한 절목을 빠뜨려서는 안 될 것 같은데 국제에는 없으니 고례를 따르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17. 조석전(朝夕奠)을 파함. 신이 상고하건대, 이 한 절목은 초우(初虞) 뒤에 있어야 하는데 《의례경전(儀禮經傳)》이나 국제에 나오는 글이 없으므로 신이 삼가 《가례(家禮)》에서 따다가 보충하였습니다. 18. 부(祔)100) 《의례경전(儀禮經傳)》에, ‘명일(明日)101) 에 신주(神主)를 소목(昭穆)의 반차(班次)에 따라 종묘에 모신다.’ 【사우(士虞).】 하였고, ‘명일 조부(祖父)의 신주를 다른 사당으로 옮기고 새로 죽은 이의 신주를 조부의 신주가 있던 곳에 모신다. 상제(喪祭)가 변하여 길제(吉祭)로 가고 부묘(祔廟)하는 데는 반드시 하루를 띄우지 않고 이 날에 접속해서 행한다.’ 【예기.】 하였고, ‘부제(祔祭) 때는 상장(喪杖)을 짚고서 당(堂)102) 에 오르지 않는다.’ 【상소기(喪小記).】 하였고, 주자가 말하기를, ‘선왕(先王)께서 예를 제정한 것은 본래 인정에 따른 것이니 길흉의 사이에 변하는 것이 순서가 있다. 그러므로 처음 죽었을 때는 오로지 생존한 분을 섬기는 예를 쓰고 졸곡(卒哭)과 부묘(祔廟)를 마친 뒤에야 신(神)으로 섬긴다. 그러나 차마 다 변경할 수 없기 때문에 신주를 다시 정침(正寢)으로 모셔다가 생존한 분을 섬기는 예로 섬기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오례의(五禮儀)》 【없다.】 신이 상고하건대, 주자가 말하기를 ‘새로 죽은 분을 조부의 사당에 부(祔)하는 것은 조부에게 다른 사당으로 옮긴다는 것을 고하고 새로 죽은 분에게 이 사당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고하는 순서이다. 그런데 지금은 공실(公室)이나 사가(私家)의 묘(廟)에 모두 한 사당 안에 감실(龕室)103) 만을 달리하고 서쪽을 상(上)으로 하는 제도만이 있고 다시 좌소(左昭), 우목(右穆)의 반차(班次)가 없다. 그러므로 체천(遞遷)할 경우가 생기면 모든 감실을 다 옮기고 새로 죽은 이가 그 아버지가 있던 감실로 들어간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예의 큰 절목으로서 고례와 같지 않다. 그런데 예를 하는 자들이 오히려 조부가 있던 사당에 부(祔)한다는 예문을 고집하는 것은 의의가 없는 듯하다. 그렇다고 마침내 예를 고쳐서 아버지 사당에 부한다면 또 애례존양(愛禮存羊)104) 의 뜻이 아닐 것이다.’ 하였으니, 이에 의거해 보면 이것은 폐할 수 없는 큰 절목인데 국제에는 없으니 아마도 강정해 행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태백산사고본】 1책 1권 17장 B면【국편영인본】 35책 373면
[註 047] 인혁(因革) : 옛것을 따름과 개혁함.[註 048] 취송(聚訟) : 서로 시비하여 결말이 나지 아니함.[註 049] 정문(情文) : 내용과 형식.[註 050] 개원(開元) : 당 현종(唐玄宗)의 연호.[註 051] 변제(變除) : 변복(變服) 공제(公除).[註 052] 통상(通喪) : 상하가 통행하는 상례로 삼년상을 이름.[註 053] 경화(更化) : 정치와 교화를 고치어 새롭게 함.[註 054] 사위(事爲) : 사업.[註 055] 여러 왕손(王孫) : 소현 세자(昭顯世子)의 세 아들. 인조 25년에 당시 강빈 사건(姜嬪事件:소현 세자의 음식에 독을 넣어 죽였다는 무고 사건)이 문제가 되어 그의 소생인 왕손 3형제를 제주도에 귀양보냈는데, 이때 장자 석철(石鐵)은 12세, 차자 석린(石麟)은 8세, 삼자 석견(石堅)은 4세였다.[註 056] 고명(顧命) : 임금이 죽을 때 후사를 부탁하는 유명(遺命).[註 057] 재생백(哉生魄) : 음력 16일.[註 058] 서언(誓言) : 유언.[註 059] 노침(路寢) : 정전(正殿).[註 060] 정종(正終) : 정전에서 죽음.[註 061] 복(復) : 초혼(招魂). 사람이 죽은 몇 시간 뒤에 망인이 입던 옷을 가지고 지붕에 올라가서 왼손으로 깃을 잡고 오른손으로 허리를 잡고서 아무(何某)는 복하라고 세 번 외친 다음 그 옷으로 시신을 덮음.[註 062] 《의례경전(儀禮經傳)》 : 주자(朱子)가 찬(撰)한 《의례경전통해(儀禮經傳通解)》로 원집(原集)이 37권이고 속집이 29권임.[註 063] 시사전(始死奠) : 고복(皋復)이 끝난 뒤에 올리는 전.[註 064] 항시(巷市) : 골목에서 시장을 보는 것. 국상이 나면 애도의 뜻으로 시장을 철거하기 때문에 필요한 생필품을 골목에서 구함.[註 065] 차길(借吉) : 상제의 몸으로 길례(吉禮) 때에 특별히 길복(吉服)을 입는 것.[註 066] 천시(遷尸) : 왕이 죽어 소렴, 대렴을 마친 뒤에 왕의 시신을 당(堂)으로 옮기는 것.[註 067] 설치(楔齒) : 반함(飯含)을 하기 전에 먼저 뿔 숟가락을 아래 위의 이(齒) 사이에 끼워 입이 다물어지지 않게 하는 것.[註 068] 철족(綴足) : 시신의 발이 뒤틀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발을 의자의 다리에 묶어 놓는 것.[註 069] 유당(帷堂) : 당상(堂上)에 유막(帷幕)을 설치한 상막(喪幕).[註 070] 각사(角柶) : 뿔로 만든 숟가락.[註 071] 연궤(燕几) : 편안한 의자.[註 072] 흔창(興鬯) : 왕의 시신을 목욕시키는 울창주(鬱鬯酒).[註 073] 사기(肆器) : 너비가 8척, 길이가 12척, 깊이가 3척인 얼음을 채운 통. 하절기에 시체의 부패를 방지하기 위하여 얼음을 채운 이 통을 시신에 넣어둠.[註 074] 권의(卷衣) : 곤룡포.[註 075] 금모(錦冒) : 시체를 싸는 비단 자루 습(襲) 이후와 소렴 이전에 시체를 싸둔다.[註 076] 보쇄(黼殺) : 시체를 싸는 도끼 무늬의 수를 놓은 천. 위를 싸는 것을 보라하고 아래를 싸는 것을 쇄라함.[註 077] 모질(冒質) : 금모(錦昌)의 윗부분이다..[註 078] 쇄(殺) : 금모의 아래 부분이다.[註 079] 반옥(飯玉) : 염할 때 죽은 사람의 입에 구슬을 물리는 것.[註 080] 반미(飯米) : 염할 때 죽은 사람의 일에 쌀을 물리는 것.[註 081] 막포(幕布) : 장막을 만드는 거친 베.[註 082] 온공(溫公) : 사마광(司馬光).[註 083] 습(襲) : 죽은 사람에게 좌임포(左衽袍)를 입히는 것.[註 084] 반함(飯含) : 염할 때 죽은 사람의 입에 쌀을 물리는 것.[註 085] 환질(環絰) : 성복 때 상제가 건(巾) 위에 덧씌워 쓰는 수절(首絰).[註 086] 위모(委貌) : 관명(冠名).[註 087] 금(衾) : 홑이불.[註 088] 계빈(啓殯) : 발인(發靷)할 때 출란(出棺)하기 위하여 빈소를 여는 것.[註 089] 진조조전(陳朝祖奠) : 발인할 때 죽은 사람이 종묘로 가서 마지막으로 조상을 보이고 하직 인사를 올리게 하고 곁들어 전을 올리는 것.[註 090] 문(免) : 갓을 벗고 한 치 너비의 베로 머리를 묶고 뒤로 늘어 뜨리는 것.[註 091] 산대(散帶) : 띠의 끝을 꼬지 않고 흐트려 놓은 것.[註 092] 조전(祖奠) : 발인에 앞서 출발을 알리는 전. 조는 행신(行神)을 뜻함.[註 093] 명(銘) : 명정.[註 094] 자리[菌] : 관 밑에 까는 자리로서 관과 함께 묻는다.[註 095] 중(重) : 우제(虞祭) 이전에는 신주가 없으므로 나무를 깎아 뜰 중앙에 세워 놓고 죽은 이의 혼신이 임시로 이 나무에 의지하게 하고 또 죽은 이의 필요한 물건들을 이 나무에 매달아 놓는다.[註 096] 피(披) : 관을 끄는 끈.[註 097] 우(虞) : 장사를 지내고 돌아와서 빈궁(殯宮)에 지내는 제사. 망인의 시체는 땅으로 돌아갔으나 정기(精氣)는 정처 없이 방황하므로 우제를 올려 혼신을 안정시킴.[註 098] 반곡(返哭) : 장사를 마치고 돌아와서 종묘에서 곡을 하며 슬픔을 다하는 것.[註 099] 실내(室內) : 종묘 안.[註 100] 부(祔) : 졸곡(卒哭)이 끝난 다음날, 새로 죽은 이의 신주(神主)를 소목(昭穆)의 서차에 따라 종묘에 모시는 것.[註 101] 명일(明日) : 졸곡(卒哭) 다음날.[註 102] 당(堂) : 사당.[註 103] 감실(龕室) : 종묘 안에 신주를 모셔 놓는 장.[註 104] 애례존양(愛禮存羊) : 예를 아껴 구례(舊禮) 또는 허례(虛禮)를 버리지 않고 보전하는 것.
ⓒ 한국고전번역원
신이 상고하건대, 국제(國制)에 비록 이 의전(儀典)이 있으나 이미 조조(朝祖)에 관한 절목이 없으므로 이 의전을 빈전(殯殿)에서 시행하고서 그대로 발인하니 매우 먼 길을 가는데 가까운 데서부터 점진적으로 나아가는 뜻이 아닙니다. 고례에는 조조의 의전이 있고, 이어 조전(祖奠)을 묘정(廟庭)에서 행하고, 이튿날 새벽에 견전(遣奠)을 행하고서 발인합니다. 발인 절차는 《의례(儀禮)》에 자세히 나타나 있습니다.
15. 우(虞)097) 《의례경전(儀禮經傳)》에, ‘제후는 칠우(七虞)이다.’ 하였습니다. 《오례의(五禮儀)》 【반우의(返虞儀)가 있다.】 신이 상고하건대, 예에 ‘정오에 우제(虞祭)를 지낸다. 길이 먼 경우에는 무덤에서 우제를 행한다.’ 하였으니, 반우(返虞)한다는 글에 구애될 필요가 없을 듯합니다. 16. 반곡(返哭)098) 《의례경전(儀禮經傳)》에, ‘반곡하는 사람은 서계(西階)로 올라가 동쪽을 향하고 주인은 당하(堂下)에서 동쪽을 향해 서는데 북쪽을 상(上)으로 한다. 부인은 들어가고 대부는 뛰면서[踊] 조계(阼階)로 올라간다. 주부는 실내(室內)099) 로 들어간다.’ 하였습니다. 《오례의(五禮儀)》 【없다.】 신이 상고하건대, 예에 ‘반곡하여 조문(吊問)하는 것은 슬픔이 지극한 것이다. 돌아왔으나 어버이는 이미 죽어 없어져서 어버이를 잃었으니 이때를 당하여 슬픔이 지극하다.’ 하였고, 주자가 말하기를, ‘반곡하려고 당(堂)으로 오르는 것은 돌아간 어버이가 평소 예를 행하였던 곳으로 돌아가는 것이고, 주부가 실(室)로 들어가는 것은 죽은 어버이가 평소 궤양(饋養)했던 곳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 의사를 안다면 이른바 그가 밟던 자리를 밟고 그가 행하던 예를 행하는 등의 일이 자연스럽게 행해져서 바야흐로 계지(繼志)·술사(述事)의 일을 알게 될 것이다.’ 하였습니다. 이 한 절목을 빠뜨려서는 안 될 것 같은데 국제에는 없으니 고례를 따르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17. 조석전(朝夕奠)을 파함. 신이 상고하건대, 이 한 절목은 초우(初虞) 뒤에 있어야 하는데 《의례경전(儀禮經傳)》이나 국제에 나오는 글이 없으므로 신이 삼가 《가례(家禮)》에서 따다가 보충하였습니다. 18. 부(祔)100) 《의례경전(儀禮經傳)》에, ‘명일(明日)101) 에 신주(神主)를 소목(昭穆)의 반차(班次)에 따라 종묘에 모신다.’ 【사우(士虞).】 하였고, ‘명일 조부(祖父)의 신주를 다른 사당으로 옮기고 새로 죽은 이의 신주를 조부의 신주가 있던 곳에 모신다. 상제(喪祭)가 변하여 길제(吉祭)로 가고 부묘(祔廟)하는 데는 반드시 하루를 띄우지 않고 이 날에 접속해서 행한다.’ 【예기.】 하였고, ‘부제(祔祭) 때는 상장(喪杖)을 짚고서 당(堂)102) 에 오르지 않는다.’ 【상소기(喪小記).】 하였고, 주자가 말하기를, ‘선왕(先王)께서 예를 제정한 것은 본래 인정에 따른 것이니 길흉의 사이에 변하는 것이 순서가 있다. 그러므로 처음 죽었을 때는 오로지 생존한 분을 섬기는 예를 쓰고 졸곡(卒哭)과 부묘(祔廟)를 마친 뒤에야 신(神)으로 섬긴다. 그러나 차마 다 변경할 수 없기 때문에 신주를 다시 정침(正寢)으로 모셔다가 생존한 분을 섬기는 예로 섬기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오례의(五禮儀)》 【없다.】 신이 상고하건대, 주자가 말하기를 ‘새로 죽은 분을 조부의 사당에 부(祔)하는 것은 조부에게 다른 사당으로 옮긴다는 것을 고하고 새로 죽은 분에게 이 사당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고하는 순서이다. 그런데 지금은 공실(公室)이나 사가(私家)의 묘(廟)에 모두 한 사당 안에 감실(龕室)103) 만을 달리하고 서쪽을 상(上)으로 하는 제도만이 있고 다시 좌소(左昭), 우목(右穆)의 반차(班次)가 없다. 그러므로 체천(遞遷)할 경우가 생기면 모든 감실을 다 옮기고 새로 죽은 이가 그 아버지가 있던 감실로 들어간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예의 큰 절목으로서 고례와 같지 않다. 그런데 예를 하는 자들이 오히려 조부가 있던 사당에 부(祔)한다는 예문을 고집하는 것은 의의가 없는 듯하다. 그렇다고 마침내 예를 고쳐서 아버지 사당에 부한다면 또 애례존양(愛禮存羊)104) 의 뜻이 아닐 것이다.’ 하였으니, 이에 의거해 보면 이것은 폐할 수 없는 큰 절목인데 국제에는 없으니 아마도 강정해 행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태백산사고본】 1책 1권 17장 B면【국편영인본】 35책 373면
[註 047] 인혁(因革) : 옛것을 따름과 개혁함.[註 048] 취송(聚訟) : 서로 시비하여 결말이 나지 아니함.[註 049] 정문(情文) : 내용과 형식.[註 050] 개원(開元) : 당 현종(唐玄宗)의 연호.[註 051] 변제(變除) : 변복(變服) 공제(公除).[註 052] 통상(通喪) : 상하가 통행하는 상례로 삼년상을 이름.[註 053] 경화(更化) : 정치와 교화를 고치어 새롭게 함.[註 054] 사위(事爲) : 사업.[註 055] 여러 왕손(王孫) : 소현 세자(昭顯世子)의 세 아들. 인조 25년에 당시 강빈 사건(姜嬪事件:소현 세자의 음식에 독을 넣어 죽였다는 무고 사건)이 문제가 되어 그의 소생인 왕손 3형제를 제주도에 귀양보냈는데, 이때 장자 석철(石鐵)은 12세, 차자 석린(石麟)은 8세, 삼자 석견(石堅)은 4세였다.[註 056] 고명(顧命) : 임금이 죽을 때 후사를 부탁하는 유명(遺命).[註 057] 재생백(哉生魄) : 음력 16일.[註 058] 서언(誓言) : 유언.[註 059] 노침(路寢) : 정전(正殿).[註 060] 정종(正終) : 정전에서 죽음.[註 061] 복(復) : 초혼(招魂). 사람이 죽은 몇 시간 뒤에 망인이 입던 옷을 가지고 지붕에 올라가서 왼손으로 깃을 잡고 오른손으로 허리를 잡고서 아무(何某)는 복하라고 세 번 외친 다음 그 옷으로 시신을 덮음.[註 062] 《의례경전(儀禮經傳)》 : 주자(朱子)가 찬(撰)한 《의례경전통해(儀禮經傳通解)》로 원집(原集)이 37권이고 속집이 29권임.[註 063] 시사전(始死奠) : 고복(皋復)이 끝난 뒤에 올리는 전.[註 064] 항시(巷市) : 골목에서 시장을 보는 것. 국상이 나면 애도의 뜻으로 시장을 철거하기 때문에 필요한 생필품을 골목에서 구함.[註 065] 차길(借吉) : 상제의 몸으로 길례(吉禮) 때에 특별히 길복(吉服)을 입는 것.[註 066] 천시(遷尸) : 왕이 죽어 소렴, 대렴을 마친 뒤에 왕의 시신을 당(堂)으로 옮기는 것.[註 067] 설치(楔齒) : 반함(飯含)을 하기 전에 먼저 뿔 숟가락을 아래 위의 이(齒) 사이에 끼워 입이 다물어지지 않게 하는 것.[註 068] 철족(綴足) : 시신의 발이 뒤틀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발을 의자의 다리에 묶어 놓는 것.[註 069] 유당(帷堂) : 당상(堂上)에 유막(帷幕)을 설치한 상막(喪幕).[註 070] 각사(角柶) : 뿔로 만든 숟가락.[註 071] 연궤(燕几) : 편안한 의자.[註 072] 흔창(興鬯) : 왕의 시신을 목욕시키는 울창주(鬱鬯酒).[註 073] 사기(肆器) : 너비가 8척, 길이가 12척, 깊이가 3척인 얼음을 채운 통. 하절기에 시체의 부패를 방지하기 위하여 얼음을 채운 이 통을 시신에 넣어둠.[註 074] 권의(卷衣) : 곤룡포.[註 075] 금모(錦冒) : 시체를 싸는 비단 자루 습(襲) 이후와 소렴 이전에 시체를 싸둔다.[註 076] 보쇄(黼殺) : 시체를 싸는 도끼 무늬의 수를 놓은 천. 위를 싸는 것을 보라하고 아래를 싸는 것을 쇄라함.[註 077] 모질(冒質) : 금모(錦昌)의 윗부분이다..[註 078] 쇄(殺) : 금모의 아래 부분이다.[註 079] 반옥(飯玉) : 염할 때 죽은 사람의 입에 구슬을 물리는 것.[註 080] 반미(飯米) : 염할 때 죽은 사람의 일에 쌀을 물리는 것.[註 081] 막포(幕布) : 장막을 만드는 거친 베.[註 082] 온공(溫公) : 사마광(司馬光).[註 083] 습(襲) : 죽은 사람에게 좌임포(左衽袍)를 입히는 것.[註 084] 반함(飯含) : 염할 때 죽은 사람의 입에 쌀을 물리는 것.[註 085] 환질(環絰) : 성복 때 상제가 건(巾) 위에 덧씌워 쓰는 수절(首絰).[註 086] 위모(委貌) : 관명(冠名).[註 087] 금(衾) : 홑이불.[註 088] 계빈(啓殯) : 발인(發靷)할 때 출란(出棺)하기 위하여 빈소를 여는 것.[註 089] 진조조전(陳朝祖奠) : 발인할 때 죽은 사람이 종묘로 가서 마지막으로 조상을 보이고 하직 인사를 올리게 하고 곁들어 전을 올리는 것.[註 090] 문(免) : 갓을 벗고 한 치 너비의 베로 머리를 묶고 뒤로 늘어 뜨리는 것.[註 091] 산대(散帶) : 띠의 끝을 꼬지 않고 흐트려 놓은 것.[註 092] 조전(祖奠) : 발인에 앞서 출발을 알리는 전. 조는 행신(行神)을 뜻함.[註 093] 명(銘) : 명정.[註 094] 자리[菌] : 관 밑에 까는 자리로서 관과 함께 묻는다.[註 095] 중(重) : 우제(虞祭) 이전에는 신주가 없으므로 나무를 깎아 뜰 중앙에 세워 놓고 죽은 이의 혼신이 임시로 이 나무에 의지하게 하고 또 죽은 이의 필요한 물건들을 이 나무에 매달아 놓는다.[註 096] 피(披) : 관을 끄는 끈.[註 097] 우(虞) : 장사를 지내고 돌아와서 빈궁(殯宮)에 지내는 제사. 망인의 시체는 땅으로 돌아갔으나 정기(精氣)는 정처 없이 방황하므로 우제를 올려 혼신을 안정시킴.[註 098] 반곡(返哭) : 장사를 마치고 돌아와서 종묘에서 곡을 하며 슬픔을 다하는 것.[註 099] 실내(室內) : 종묘 안.[註 100] 부(祔) : 졸곡(卒哭)이 끝난 다음날, 새로 죽은 이의 신주(神主)를 소목(昭穆)의 서차에 따라 종묘에 모시는 것.[註 101] 명일(明日) : 졸곡(卒哭) 다음날.[註 102] 당(堂) : 사당.[註 103] 감실(龕室) : 종묘 안에 신주를 모셔 놓는 장.[註 104] 애례존양(愛禮存羊) : 예를 아껴 구례(舊禮) 또는 허례(虛禮)를 버리지 않고 보전하는 것.
ⓒ 한국고전번역원
《의례경전(儀禮經傳)》에, ‘제후는 칠우(七虞)이다.’ 하였습니다.
《오례의(五禮儀)》 【반우의(返虞儀)가 있다.】 신이 상고하건대, 예에 ‘정오에 우제(虞祭)를 지낸다. 길이 먼 경우에는 무덤에서 우제를 행한다.’ 하였으니, 반우(返虞)한다는 글에 구애될 필요가 없을 듯합니다. 16. 반곡(返哭)098) 《의례경전(儀禮經傳)》에, ‘반곡하는 사람은 서계(西階)로 올라가 동쪽을 향하고 주인은 당하(堂下)에서 동쪽을 향해 서는데 북쪽을 상(上)으로 한다. 부인은 들어가고 대부는 뛰면서[踊] 조계(阼階)로 올라간다. 주부는 실내(室內)099) 로 들어간다.’ 하였습니다. 《오례의(五禮儀)》 【없다.】 신이 상고하건대, 예에 ‘반곡하여 조문(吊問)하는 것은 슬픔이 지극한 것이다. 돌아왔으나 어버이는 이미 죽어 없어져서 어버이를 잃었으니 이때를 당하여 슬픔이 지극하다.’ 하였고, 주자가 말하기를, ‘반곡하려고 당(堂)으로 오르는 것은 돌아간 어버이가 평소 예를 행하였던 곳으로 돌아가는 것이고, 주부가 실(室)로 들어가는 것은 죽은 어버이가 평소 궤양(饋養)했던 곳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 의사를 안다면 이른바 그가 밟던 자리를 밟고 그가 행하던 예를 행하는 등의 일이 자연스럽게 행해져서 바야흐로 계지(繼志)·술사(述事)의 일을 알게 될 것이다.’ 하였습니다. 이 한 절목을 빠뜨려서는 안 될 것 같은데 국제에는 없으니 고례를 따르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17. 조석전(朝夕奠)을 파함. 신이 상고하건대, 이 한 절목은 초우(初虞) 뒤에 있어야 하는데 《의례경전(儀禮經傳)》이나 국제에 나오는 글이 없으므로 신이 삼가 《가례(家禮)》에서 따다가 보충하였습니다. 18. 부(祔)100) 《의례경전(儀禮經傳)》에, ‘명일(明日)101) 에 신주(神主)를 소목(昭穆)의 반차(班次)에 따라 종묘에 모신다.’ 【사우(士虞).】 하였고, ‘명일 조부(祖父)의 신주를 다른 사당으로 옮기고 새로 죽은 이의 신주를 조부의 신주가 있던 곳에 모신다. 상제(喪祭)가 변하여 길제(吉祭)로 가고 부묘(祔廟)하는 데는 반드시 하루를 띄우지 않고 이 날에 접속해서 행한다.’ 【예기.】 하였고, ‘부제(祔祭) 때는 상장(喪杖)을 짚고서 당(堂)102) 에 오르지 않는다.’ 【상소기(喪小記).】 하였고, 주자가 말하기를, ‘선왕(先王)께서 예를 제정한 것은 본래 인정에 따른 것이니 길흉의 사이에 변하는 것이 순서가 있다. 그러므로 처음 죽었을 때는 오로지 생존한 분을 섬기는 예를 쓰고 졸곡(卒哭)과 부묘(祔廟)를 마친 뒤에야 신(神)으로 섬긴다. 그러나 차마 다 변경할 수 없기 때문에 신주를 다시 정침(正寢)으로 모셔다가 생존한 분을 섬기는 예로 섬기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오례의(五禮儀)》 【없다.】 신이 상고하건대, 주자가 말하기를 ‘새로 죽은 분을 조부의 사당에 부(祔)하는 것은 조부에게 다른 사당으로 옮긴다는 것을 고하고 새로 죽은 분에게 이 사당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고하는 순서이다. 그런데 지금은 공실(公室)이나 사가(私家)의 묘(廟)에 모두 한 사당 안에 감실(龕室)103) 만을 달리하고 서쪽을 상(上)으로 하는 제도만이 있고 다시 좌소(左昭), 우목(右穆)의 반차(班次)가 없다. 그러므로 체천(遞遷)할 경우가 생기면 모든 감실을 다 옮기고 새로 죽은 이가 그 아버지가 있던 감실로 들어간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예의 큰 절목으로서 고례와 같지 않다. 그런데 예를 하는 자들이 오히려 조부가 있던 사당에 부(祔)한다는 예문을 고집하는 것은 의의가 없는 듯하다. 그렇다고 마침내 예를 고쳐서 아버지 사당에 부한다면 또 애례존양(愛禮存羊)104) 의 뜻이 아닐 것이다.’ 하였으니, 이에 의거해 보면 이것은 폐할 수 없는 큰 절목인데 국제에는 없으니 아마도 강정해 행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태백산사고본】 1책 1권 17장 B면【국편영인본】 35책 373면
[註 047] 인혁(因革) : 옛것을 따름과 개혁함.[註 048] 취송(聚訟) : 서로 시비하여 결말이 나지 아니함.[註 049] 정문(情文) : 내용과 형식.[註 050] 개원(開元) : 당 현종(唐玄宗)의 연호.[註 051] 변제(變除) : 변복(變服) 공제(公除).[註 052] 통상(通喪) : 상하가 통행하는 상례로 삼년상을 이름.[註 053] 경화(更化) : 정치와 교화를 고치어 새롭게 함.[註 054] 사위(事爲) : 사업.[註 055] 여러 왕손(王孫) : 소현 세자(昭顯世子)의 세 아들. 인조 25년에 당시 강빈 사건(姜嬪事件:소현 세자의 음식에 독을 넣어 죽였다는 무고 사건)이 문제가 되어 그의 소생인 왕손 3형제를 제주도에 귀양보냈는데, 이때 장자 석철(石鐵)은 12세, 차자 석린(石麟)은 8세, 삼자 석견(石堅)은 4세였다.[註 056] 고명(顧命) : 임금이 죽을 때 후사를 부탁하는 유명(遺命).[註 057] 재생백(哉生魄) : 음력 16일.[註 058] 서언(誓言) : 유언.[註 059] 노침(路寢) : 정전(正殿).[註 060] 정종(正終) : 정전에서 죽음.[註 061] 복(復) : 초혼(招魂). 사람이 죽은 몇 시간 뒤에 망인이 입던 옷을 가지고 지붕에 올라가서 왼손으로 깃을 잡고 오른손으로 허리를 잡고서 아무(何某)는 복하라고 세 번 외친 다음 그 옷으로 시신을 덮음.[註 062] 《의례경전(儀禮經傳)》 : 주자(朱子)가 찬(撰)한 《의례경전통해(儀禮經傳通解)》로 원집(原集)이 37권이고 속집이 29권임.[註 063] 시사전(始死奠) : 고복(皋復)이 끝난 뒤에 올리는 전.[註 064] 항시(巷市) : 골목에서 시장을 보는 것. 국상이 나면 애도의 뜻으로 시장을 철거하기 때문에 필요한 생필품을 골목에서 구함.[註 065] 차길(借吉) : 상제의 몸으로 길례(吉禮) 때에 특별히 길복(吉服)을 입는 것.[註 066] 천시(遷尸) : 왕이 죽어 소렴, 대렴을 마친 뒤에 왕의 시신을 당(堂)으로 옮기는 것.[註 067] 설치(楔齒) : 반함(飯含)을 하기 전에 먼저 뿔 숟가락을 아래 위의 이(齒) 사이에 끼워 입이 다물어지지 않게 하는 것.[註 068] 철족(綴足) : 시신의 발이 뒤틀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발을 의자의 다리에 묶어 놓는 것.[註 069] 유당(帷堂) : 당상(堂上)에 유막(帷幕)을 설치한 상막(喪幕).[註 070] 각사(角柶) : 뿔로 만든 숟가락.[註 071] 연궤(燕几) : 편안한 의자.[註 072] 흔창(興鬯) : 왕의 시신을 목욕시키는 울창주(鬱鬯酒).[註 073] 사기(肆器) : 너비가 8척, 길이가 12척, 깊이가 3척인 얼음을 채운 통. 하절기에 시체의 부패를 방지하기 위하여 얼음을 채운 이 통을 시신에 넣어둠.[註 074] 권의(卷衣) : 곤룡포.[註 075] 금모(錦冒) : 시체를 싸는 비단 자루 습(襲) 이후와 소렴 이전에 시체를 싸둔다.[註 076] 보쇄(黼殺) : 시체를 싸는 도끼 무늬의 수를 놓은 천. 위를 싸는 것을 보라하고 아래를 싸는 것을 쇄라함.[註 077] 모질(冒質) : 금모(錦昌)의 윗부분이다..[註 078] 쇄(殺) : 금모의 아래 부분이다.[註 079] 반옥(飯玉) : 염할 때 죽은 사람의 입에 구슬을 물리는 것.[註 080] 반미(飯米) : 염할 때 죽은 사람의 일에 쌀을 물리는 것.[註 081] 막포(幕布) : 장막을 만드는 거친 베.[註 082] 온공(溫公) : 사마광(司馬光).[註 083] 습(襲) : 죽은 사람에게 좌임포(左衽袍)를 입히는 것.[註 084] 반함(飯含) : 염할 때 죽은 사람의 입에 쌀을 물리는 것.[註 085] 환질(環絰) : 성복 때 상제가 건(巾) 위에 덧씌워 쓰는 수절(首絰).[註 086] 위모(委貌) : 관명(冠名).[註 087] 금(衾) : 홑이불.[註 088] 계빈(啓殯) : 발인(發靷)할 때 출란(出棺)하기 위하여 빈소를 여는 것.[註 089] 진조조전(陳朝祖奠) : 발인할 때 죽은 사람이 종묘로 가서 마지막으로 조상을 보이고 하직 인사를 올리게 하고 곁들어 전을 올리는 것.[註 090] 문(免) : 갓을 벗고 한 치 너비의 베로 머리를 묶고 뒤로 늘어 뜨리는 것.[註 091] 산대(散帶) : 띠의 끝을 꼬지 않고 흐트려 놓은 것.[註 092] 조전(祖奠) : 발인에 앞서 출발을 알리는 전. 조는 행신(行神)을 뜻함.[註 093] 명(銘) : 명정.[註 094] 자리[菌] : 관 밑에 까는 자리로서 관과 함께 묻는다.[註 095] 중(重) : 우제(虞祭) 이전에는 신주가 없으므로 나무를 깎아 뜰 중앙에 세워 놓고 죽은 이의 혼신이 임시로 이 나무에 의지하게 하고 또 죽은 이의 필요한 물건들을 이 나무에 매달아 놓는다.[註 096] 피(披) : 관을 끄는 끈.[註 097] 우(虞) : 장사를 지내고 돌아와서 빈궁(殯宮)에 지내는 제사. 망인의 시체는 땅으로 돌아갔으나 정기(精氣)는 정처 없이 방황하므로 우제를 올려 혼신을 안정시킴.[註 098] 반곡(返哭) : 장사를 마치고 돌아와서 종묘에서 곡을 하며 슬픔을 다하는 것.[註 099] 실내(室內) : 종묘 안.[註 100] 부(祔) : 졸곡(卒哭)이 끝난 다음날, 새로 죽은 이의 신주(神主)를 소목(昭穆)의 서차에 따라 종묘에 모시는 것.[註 101] 명일(明日) : 졸곡(卒哭) 다음날.[註 102] 당(堂) : 사당.[註 103] 감실(龕室) : 종묘 안에 신주를 모셔 놓는 장.[註 104] 애례존양(愛禮存羊) : 예를 아껴 구례(舊禮) 또는 허례(虛禮)를 버리지 않고 보전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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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상고하건대, 예에 ‘정오에 우제(虞祭)를 지낸다. 길이 먼 경우에는 무덤에서 우제를 행한다.’ 하였으니, 반우(返虞)한다는 글에 구애될 필요가 없을 듯합니다.
16. 반곡(返哭)098) 《의례경전(儀禮經傳)》에, ‘반곡하는 사람은 서계(西階)로 올라가 동쪽을 향하고 주인은 당하(堂下)에서 동쪽을 향해 서는데 북쪽을 상(上)으로 한다. 부인은 들어가고 대부는 뛰면서[踊] 조계(阼階)로 올라간다. 주부는 실내(室內)099) 로 들어간다.’ 하였습니다.
《오례의(五禮儀)》 【없다.】 신이 상고하건대, 예에 ‘반곡하여 조문(吊問)하는 것은 슬픔이 지극한 것이다. 돌아왔으나 어버이는 이미 죽어 없어져서 어버이를 잃었으니 이때를 당하여 슬픔이 지극하다.’ 하였고, 주자가 말하기를, ‘반곡하려고 당(堂)으로 오르는 것은 돌아간 어버이가 평소 예를 행하였던 곳으로 돌아가는 것이고, 주부가 실(室)로 들어가는 것은 죽은 어버이가 평소 궤양(饋養)했던 곳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 의사를 안다면 이른바 그가 밟던 자리를 밟고 그가 행하던 예를 행하는 등의 일이 자연스럽게 행해져서 바야흐로 계지(繼志)·술사(述事)의 일을 알게 될 것이다.’ 하였습니다. 이 한 절목을 빠뜨려서는 안 될 것 같은데 국제에는 없으니 고례를 따르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17. 조석전(朝夕奠)을 파함. 신이 상고하건대, 이 한 절목은 초우(初虞) 뒤에 있어야 하는데 《의례경전(儀禮經傳)》이나 국제에 나오는 글이 없으므로 신이 삼가 《가례(家禮)》에서 따다가 보충하였습니다. 18. 부(祔)100) 《의례경전(儀禮經傳)》에, ‘명일(明日)101) 에 신주(神主)를 소목(昭穆)의 반차(班次)에 따라 종묘에 모신다.’ 【사우(士虞).】 하였고, ‘명일 조부(祖父)의 신주를 다른 사당으로 옮기고 새로 죽은 이의 신주를 조부의 신주가 있던 곳에 모신다. 상제(喪祭)가 변하여 길제(吉祭)로 가고 부묘(祔廟)하는 데는 반드시 하루를 띄우지 않고 이 날에 접속해서 행한다.’ 【예기.】 하였고, ‘부제(祔祭) 때는 상장(喪杖)을 짚고서 당(堂)102) 에 오르지 않는다.’ 【상소기(喪小記).】 하였고, 주자가 말하기를, ‘선왕(先王)께서 예를 제정한 것은 본래 인정에 따른 것이니 길흉의 사이에 변하는 것이 순서가 있다. 그러므로 처음 죽었을 때는 오로지 생존한 분을 섬기는 예를 쓰고 졸곡(卒哭)과 부묘(祔廟)를 마친 뒤에야 신(神)으로 섬긴다. 그러나 차마 다 변경할 수 없기 때문에 신주를 다시 정침(正寢)으로 모셔다가 생존한 분을 섬기는 예로 섬기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오례의(五禮儀)》 【없다.】 신이 상고하건대, 주자가 말하기를 ‘새로 죽은 분을 조부의 사당에 부(祔)하는 것은 조부에게 다른 사당으로 옮긴다는 것을 고하고 새로 죽은 분에게 이 사당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고하는 순서이다. 그런데 지금은 공실(公室)이나 사가(私家)의 묘(廟)에 모두 한 사당 안에 감실(龕室)103) 만을 달리하고 서쪽을 상(上)으로 하는 제도만이 있고 다시 좌소(左昭), 우목(右穆)의 반차(班次)가 없다. 그러므로 체천(遞遷)할 경우가 생기면 모든 감실을 다 옮기고 새로 죽은 이가 그 아버지가 있던 감실로 들어간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예의 큰 절목으로서 고례와 같지 않다. 그런데 예를 하는 자들이 오히려 조부가 있던 사당에 부(祔)한다는 예문을 고집하는 것은 의의가 없는 듯하다. 그렇다고 마침내 예를 고쳐서 아버지 사당에 부한다면 또 애례존양(愛禮存羊)104) 의 뜻이 아닐 것이다.’ 하였으니, 이에 의거해 보면 이것은 폐할 수 없는 큰 절목인데 국제에는 없으니 아마도 강정해 행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태백산사고본】 1책 1권 17장 B면【국편영인본】 35책 373면
[註 047] 인혁(因革) : 옛것을 따름과 개혁함.[註 048] 취송(聚訟) : 서로 시비하여 결말이 나지 아니함.[註 049] 정문(情文) : 내용과 형식.[註 050] 개원(開元) : 당 현종(唐玄宗)의 연호.[註 051] 변제(變除) : 변복(變服) 공제(公除).[註 052] 통상(通喪) : 상하가 통행하는 상례로 삼년상을 이름.[註 053] 경화(更化) : 정치와 교화를 고치어 새롭게 함.[註 054] 사위(事爲) : 사업.[註 055] 여러 왕손(王孫) : 소현 세자(昭顯世子)의 세 아들. 인조 25년에 당시 강빈 사건(姜嬪事件:소현 세자의 음식에 독을 넣어 죽였다는 무고 사건)이 문제가 되어 그의 소생인 왕손 3형제를 제주도에 귀양보냈는데, 이때 장자 석철(石鐵)은 12세, 차자 석린(石麟)은 8세, 삼자 석견(石堅)은 4세였다.[註 056] 고명(顧命) : 임금이 죽을 때 후사를 부탁하는 유명(遺命).[註 057] 재생백(哉生魄) : 음력 16일.[註 058] 서언(誓言) : 유언.[註 059] 노침(路寢) : 정전(正殿).[註 060] 정종(正終) : 정전에서 죽음.[註 061] 복(復) : 초혼(招魂). 사람이 죽은 몇 시간 뒤에 망인이 입던 옷을 가지고 지붕에 올라가서 왼손으로 깃을 잡고 오른손으로 허리를 잡고서 아무(何某)는 복하라고 세 번 외친 다음 그 옷으로 시신을 덮음.[註 062] 《의례경전(儀禮經傳)》 : 주자(朱子)가 찬(撰)한 《의례경전통해(儀禮經傳通解)》로 원집(原集)이 37권이고 속집이 29권임.[註 063] 시사전(始死奠) : 고복(皋復)이 끝난 뒤에 올리는 전.[註 064] 항시(巷市) : 골목에서 시장을 보는 것. 국상이 나면 애도의 뜻으로 시장을 철거하기 때문에 필요한 생필품을 골목에서 구함.[註 065] 차길(借吉) : 상제의 몸으로 길례(吉禮) 때에 특별히 길복(吉服)을 입는 것.[註 066] 천시(遷尸) : 왕이 죽어 소렴, 대렴을 마친 뒤에 왕의 시신을 당(堂)으로 옮기는 것.[註 067] 설치(楔齒) : 반함(飯含)을 하기 전에 먼저 뿔 숟가락을 아래 위의 이(齒) 사이에 끼워 입이 다물어지지 않게 하는 것.[註 068] 철족(綴足) : 시신의 발이 뒤틀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발을 의자의 다리에 묶어 놓는 것.[註 069] 유당(帷堂) : 당상(堂上)에 유막(帷幕)을 설치한 상막(喪幕).[註 070] 각사(角柶) : 뿔로 만든 숟가락.[註 071] 연궤(燕几) : 편안한 의자.[註 072] 흔창(興鬯) : 왕의 시신을 목욕시키는 울창주(鬱鬯酒).[註 073] 사기(肆器) : 너비가 8척, 길이가 12척, 깊이가 3척인 얼음을 채운 통. 하절기에 시체의 부패를 방지하기 위하여 얼음을 채운 이 통을 시신에 넣어둠.[註 074] 권의(卷衣) : 곤룡포.[註 075] 금모(錦冒) : 시체를 싸는 비단 자루 습(襲) 이후와 소렴 이전에 시체를 싸둔다.[註 076] 보쇄(黼殺) : 시체를 싸는 도끼 무늬의 수를 놓은 천. 위를 싸는 것을 보라하고 아래를 싸는 것을 쇄라함.[註 077] 모질(冒質) : 금모(錦昌)의 윗부분이다..[註 078] 쇄(殺) : 금모의 아래 부분이다.[註 079] 반옥(飯玉) : 염할 때 죽은 사람의 입에 구슬을 물리는 것.[註 080] 반미(飯米) : 염할 때 죽은 사람의 일에 쌀을 물리는 것.[註 081] 막포(幕布) : 장막을 만드는 거친 베.[註 082] 온공(溫公) : 사마광(司馬光).[註 083] 습(襲) : 죽은 사람에게 좌임포(左衽袍)를 입히는 것.[註 084] 반함(飯含) : 염할 때 죽은 사람의 입에 쌀을 물리는 것.[註 085] 환질(環絰) : 성복 때 상제가 건(巾) 위에 덧씌워 쓰는 수절(首絰).[註 086] 위모(委貌) : 관명(冠名).[註 087] 금(衾) : 홑이불.[註 088] 계빈(啓殯) : 발인(發靷)할 때 출란(出棺)하기 위하여 빈소를 여는 것.[註 089] 진조조전(陳朝祖奠) : 발인할 때 죽은 사람이 종묘로 가서 마지막으로 조상을 보이고 하직 인사를 올리게 하고 곁들어 전을 올리는 것.[註 090] 문(免) : 갓을 벗고 한 치 너비의 베로 머리를 묶고 뒤로 늘어 뜨리는 것.[註 091] 산대(散帶) : 띠의 끝을 꼬지 않고 흐트려 놓은 것.[註 092] 조전(祖奠) : 발인에 앞서 출발을 알리는 전. 조는 행신(行神)을 뜻함.[註 093] 명(銘) : 명정.[註 094] 자리[菌] : 관 밑에 까는 자리로서 관과 함께 묻는다.[註 095] 중(重) : 우제(虞祭) 이전에는 신주가 없으므로 나무를 깎아 뜰 중앙에 세워 놓고 죽은 이의 혼신이 임시로 이 나무에 의지하게 하고 또 죽은 이의 필요한 물건들을 이 나무에 매달아 놓는다.[註 096] 피(披) : 관을 끄는 끈.[註 097] 우(虞) : 장사를 지내고 돌아와서 빈궁(殯宮)에 지내는 제사. 망인의 시체는 땅으로 돌아갔으나 정기(精氣)는 정처 없이 방황하므로 우제를 올려 혼신을 안정시킴.[註 098] 반곡(返哭) : 장사를 마치고 돌아와서 종묘에서 곡을 하며 슬픔을 다하는 것.[註 099] 실내(室內) : 종묘 안.[註 100] 부(祔) : 졸곡(卒哭)이 끝난 다음날, 새로 죽은 이의 신주(神主)를 소목(昭穆)의 서차에 따라 종묘에 모시는 것.[註 101] 명일(明日) : 졸곡(卒哭) 다음날.[註 102] 당(堂) : 사당.[註 103] 감실(龕室) : 종묘 안에 신주를 모셔 놓는 장.[註 104] 애례존양(愛禮存羊) : 예를 아껴 구례(舊禮) 또는 허례(虛禮)를 버리지 않고 보전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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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상고하건대, 예에 ‘반곡하여 조문(吊問)하는 것은 슬픔이 지극한 것이다. 돌아왔으나 어버이는 이미 죽어 없어져서 어버이를 잃었으니 이때를 당하여 슬픔이 지극하다.’ 하였고, 주자가 말하기를, ‘반곡하려고 당(堂)으로 오르는 것은 돌아간 어버이가 평소 예를 행하였던 곳으로 돌아가는 것이고, 주부가 실(室)로 들어가는 것은 죽은 어버이가 평소 궤양(饋養)했던 곳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 의사를 안다면 이른바 그가 밟던 자리를 밟고 그가 행하던 예를 행하는 등의 일이 자연스럽게 행해져서 바야흐로 계지(繼志)·술사(述事)의 일을 알게 될 것이다.’ 하였습니다. 이 한 절목을 빠뜨려서는 안 될 것 같은데 국제에는 없으니 고례를 따르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17. 조석전(朝夕奠)을 파함.
신이 상고하건대, 이 한 절목은 초우(初虞) 뒤에 있어야 하는데 《의례경전(儀禮經傳)》이나 국제에 나오는 글이 없으므로 신이 삼가 《가례(家禮)》에서 따다가 보충하였습니다.
18. 부(祔)100) 《의례경전(儀禮經傳)》에, ‘명일(明日)101) 에 신주(神主)를 소목(昭穆)의 반차(班次)에 따라 종묘에 모신다.’ 【사우(士虞).】 하였고, ‘명일 조부(祖父)의 신주를 다른 사당으로 옮기고 새로 죽은 이의 신주를 조부의 신주가 있던 곳에 모신다. 상제(喪祭)가 변하여 길제(吉祭)로 가고 부묘(祔廟)하는 데는 반드시 하루를 띄우지 않고 이 날에 접속해서 행한다.’ 【예기.】 하였고, ‘부제(祔祭) 때는 상장(喪杖)을 짚고서 당(堂)102) 에 오르지 않는다.’ 【상소기(喪小記).】 하였고, 주자가 말하기를, ‘선왕(先王)께서 예를 제정한 것은 본래 인정에 따른 것이니 길흉의 사이에 변하는 것이 순서가 있다. 그러므로 처음 죽었을 때는 오로지 생존한 분을 섬기는 예를 쓰고 졸곡(卒哭)과 부묘(祔廟)를 마친 뒤에야 신(神)으로 섬긴다. 그러나 차마 다 변경할 수 없기 때문에 신주를 다시 정침(正寢)으로 모셔다가 생존한 분을 섬기는 예로 섬기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오례의(五禮儀)》 【없다.】 신이 상고하건대, 주자가 말하기를 ‘새로 죽은 분을 조부의 사당에 부(祔)하는 것은 조부에게 다른 사당으로 옮긴다는 것을 고하고 새로 죽은 분에게 이 사당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고하는 순서이다. 그런데 지금은 공실(公室)이나 사가(私家)의 묘(廟)에 모두 한 사당 안에 감실(龕室)103) 만을 달리하고 서쪽을 상(上)으로 하는 제도만이 있고 다시 좌소(左昭), 우목(右穆)의 반차(班次)가 없다. 그러므로 체천(遞遷)할 경우가 생기면 모든 감실을 다 옮기고 새로 죽은 이가 그 아버지가 있던 감실로 들어간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예의 큰 절목으로서 고례와 같지 않다. 그런데 예를 하는 자들이 오히려 조부가 있던 사당에 부(祔)한다는 예문을 고집하는 것은 의의가 없는 듯하다. 그렇다고 마침내 예를 고쳐서 아버지 사당에 부한다면 또 애례존양(愛禮存羊)104) 의 뜻이 아닐 것이다.’ 하였으니, 이에 의거해 보면 이것은 폐할 수 없는 큰 절목인데 국제에는 없으니 아마도 강정해 행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태백산사고본】 1책 1권 17장 B면【국편영인본】 35책 373면
[註 047] 인혁(因革) : 옛것을 따름과 개혁함.[註 048] 취송(聚訟) : 서로 시비하여 결말이 나지 아니함.[註 049] 정문(情文) : 내용과 형식.[註 050] 개원(開元) : 당 현종(唐玄宗)의 연호.[註 051] 변제(變除) : 변복(變服) 공제(公除).[註 052] 통상(通喪) : 상하가 통행하는 상례로 삼년상을 이름.[註 053] 경화(更化) : 정치와 교화를 고치어 새롭게 함.[註 054] 사위(事爲) : 사업.[註 055] 여러 왕손(王孫) : 소현 세자(昭顯世子)의 세 아들. 인조 25년에 당시 강빈 사건(姜嬪事件:소현 세자의 음식에 독을 넣어 죽였다는 무고 사건)이 문제가 되어 그의 소생인 왕손 3형제를 제주도에 귀양보냈는데, 이때 장자 석철(石鐵)은 12세, 차자 석린(石麟)은 8세, 삼자 석견(石堅)은 4세였다.[註 056] 고명(顧命) : 임금이 죽을 때 후사를 부탁하는 유명(遺命).[註 057] 재생백(哉生魄) : 음력 16일.[註 058] 서언(誓言) : 유언.[註 059] 노침(路寢) : 정전(正殿).[註 060] 정종(正終) : 정전에서 죽음.[註 061] 복(復) : 초혼(招魂). 사람이 죽은 몇 시간 뒤에 망인이 입던 옷을 가지고 지붕에 올라가서 왼손으로 깃을 잡고 오른손으로 허리를 잡고서 아무(何某)는 복하라고 세 번 외친 다음 그 옷으로 시신을 덮음.[註 062] 《의례경전(儀禮經傳)》 : 주자(朱子)가 찬(撰)한 《의례경전통해(儀禮經傳通解)》로 원집(原集)이 37권이고 속집이 29권임.[註 063] 시사전(始死奠) : 고복(皋復)이 끝난 뒤에 올리는 전.[註 064] 항시(巷市) : 골목에서 시장을 보는 것. 국상이 나면 애도의 뜻으로 시장을 철거하기 때문에 필요한 생필품을 골목에서 구함.[註 065] 차길(借吉) : 상제의 몸으로 길례(吉禮) 때에 특별히 길복(吉服)을 입는 것.[註 066] 천시(遷尸) : 왕이 죽어 소렴, 대렴을 마친 뒤에 왕의 시신을 당(堂)으로 옮기는 것.[註 067] 설치(楔齒) : 반함(飯含)을 하기 전에 먼저 뿔 숟가락을 아래 위의 이(齒) 사이에 끼워 입이 다물어지지 않게 하는 것.[註 068] 철족(綴足) : 시신의 발이 뒤틀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발을 의자의 다리에 묶어 놓는 것.[註 069] 유당(帷堂) : 당상(堂上)에 유막(帷幕)을 설치한 상막(喪幕).[註 070] 각사(角柶) : 뿔로 만든 숟가락.[註 071] 연궤(燕几) : 편안한 의자.[註 072] 흔창(興鬯) : 왕의 시신을 목욕시키는 울창주(鬱鬯酒).[註 073] 사기(肆器) : 너비가 8척, 길이가 12척, 깊이가 3척인 얼음을 채운 통. 하절기에 시체의 부패를 방지하기 위하여 얼음을 채운 이 통을 시신에 넣어둠.[註 074] 권의(卷衣) : 곤룡포.[註 075] 금모(錦冒) : 시체를 싸는 비단 자루 습(襲) 이후와 소렴 이전에 시체를 싸둔다.[註 076] 보쇄(黼殺) : 시체를 싸는 도끼 무늬의 수를 놓은 천. 위를 싸는 것을 보라하고 아래를 싸는 것을 쇄라함.[註 077] 모질(冒質) : 금모(錦昌)의 윗부분이다..[註 078] 쇄(殺) : 금모의 아래 부분이다.[註 079] 반옥(飯玉) : 염할 때 죽은 사람의 입에 구슬을 물리는 것.[註 080] 반미(飯米) : 염할 때 죽은 사람의 일에 쌀을 물리는 것.[註 081] 막포(幕布) : 장막을 만드는 거친 베.[註 082] 온공(溫公) : 사마광(司馬光).[註 083] 습(襲) : 죽은 사람에게 좌임포(左衽袍)를 입히는 것.[註 084] 반함(飯含) : 염할 때 죽은 사람의 입에 쌀을 물리는 것.[註 085] 환질(環絰) : 성복 때 상제가 건(巾) 위에 덧씌워 쓰는 수절(首絰).[註 086] 위모(委貌) : 관명(冠名).[註 087] 금(衾) : 홑이불.[註 088] 계빈(啓殯) : 발인(發靷)할 때 출란(出棺)하기 위하여 빈소를 여는 것.[註 089] 진조조전(陳朝祖奠) : 발인할 때 죽은 사람이 종묘로 가서 마지막으로 조상을 보이고 하직 인사를 올리게 하고 곁들어 전을 올리는 것.[註 090] 문(免) : 갓을 벗고 한 치 너비의 베로 머리를 묶고 뒤로 늘어 뜨리는 것.[註 091] 산대(散帶) : 띠의 끝을 꼬지 않고 흐트려 놓은 것.[註 092] 조전(祖奠) : 발인에 앞서 출발을 알리는 전. 조는 행신(行神)을 뜻함.[註 093] 명(銘) : 명정.[註 094] 자리[菌] : 관 밑에 까는 자리로서 관과 함께 묻는다.[註 095] 중(重) : 우제(虞祭) 이전에는 신주가 없으므로 나무를 깎아 뜰 중앙에 세워 놓고 죽은 이의 혼신이 임시로 이 나무에 의지하게 하고 또 죽은 이의 필요한 물건들을 이 나무에 매달아 놓는다.[註 096] 피(披) : 관을 끄는 끈.[註 097] 우(虞) : 장사를 지내고 돌아와서 빈궁(殯宮)에 지내는 제사. 망인의 시체는 땅으로 돌아갔으나 정기(精氣)는 정처 없이 방황하므로 우제를 올려 혼신을 안정시킴.[註 098] 반곡(返哭) : 장사를 마치고 돌아와서 종묘에서 곡을 하며 슬픔을 다하는 것.[註 099] 실내(室內) : 종묘 안.[註 100] 부(祔) : 졸곡(卒哭)이 끝난 다음날, 새로 죽은 이의 신주(神主)를 소목(昭穆)의 서차에 따라 종묘에 모시는 것.[註 101] 명일(明日) : 졸곡(卒哭) 다음날.[註 102] 당(堂) : 사당.[註 103] 감실(龕室) : 종묘 안에 신주를 모셔 놓는 장.[註 104] 애례존양(愛禮存羊) : 예를 아껴 구례(舊禮) 또는 허례(虛禮)를 버리지 않고 보전하는 것.
ⓒ 한국고전번역원
《의례경전(儀禮經傳)》에, ‘명일(明日)101) 에 신주(神主)를 소목(昭穆)의 반차(班次)에 따라 종묘에 모신다.’ 【사우(士虞).】 하였고, ‘명일 조부(祖父)의 신주를 다른 사당으로 옮기고 새로 죽은 이의 신주를 조부의 신주가 있던 곳에 모신다. 상제(喪祭)가 변하여 길제(吉祭)로 가고 부묘(祔廟)하는 데는 반드시 하루를 띄우지 않고 이 날에 접속해서 행한다.’ 【예기.】 하였고, ‘부제(祔祭) 때는 상장(喪杖)을 짚고서 당(堂)102) 에 오르지 않는다.’ 【상소기(喪小記).】 하였고, 주자가 말하기를, ‘선왕(先王)께서 예를 제정한 것은 본래 인정에 따른 것이니 길흉의 사이에 변하는 것이 순서가 있다. 그러므로 처음 죽었을 때는 오로지 생존한 분을 섬기는 예를 쓰고 졸곡(卒哭)과 부묘(祔廟)를 마친 뒤에야 신(神)으로 섬긴다. 그러나 차마 다 변경할 수 없기 때문에 신주를 다시 정침(正寢)으로 모셔다가 생존한 분을 섬기는 예로 섬기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오례의(五禮儀)》 【없다.】 신이 상고하건대, 주자가 말하기를 ‘새로 죽은 분을 조부의 사당에 부(祔)하는 것은 조부에게 다른 사당으로 옮긴다는 것을 고하고 새로 죽은 분에게 이 사당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고하는 순서이다. 그런데 지금은 공실(公室)이나 사가(私家)의 묘(廟)에 모두 한 사당 안에 감실(龕室)103) 만을 달리하고 서쪽을 상(上)으로 하는 제도만이 있고 다시 좌소(左昭), 우목(右穆)의 반차(班次)가 없다. 그러므로 체천(遞遷)할 경우가 생기면 모든 감실을 다 옮기고 새로 죽은 이가 그 아버지가 있던 감실로 들어간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예의 큰 절목으로서 고례와 같지 않다. 그런데 예를 하는 자들이 오히려 조부가 있던 사당에 부(祔)한다는 예문을 고집하는 것은 의의가 없는 듯하다. 그렇다고 마침내 예를 고쳐서 아버지 사당에 부한다면 또 애례존양(愛禮存羊)104) 의 뜻이 아닐 것이다.’ 하였으니, 이에 의거해 보면 이것은 폐할 수 없는 큰 절목인데 국제에는 없으니 아마도 강정해 행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태백산사고본】 1책 1권 17장 B면【국편영인본】 35책 373면
[註 047] 인혁(因革) : 옛것을 따름과 개혁함.[註 048] 취송(聚訟) : 서로 시비하여 결말이 나지 아니함.[註 049] 정문(情文) : 내용과 형식.[註 050] 개원(開元) : 당 현종(唐玄宗)의 연호.[註 051] 변제(變除) : 변복(變服) 공제(公除).[註 052] 통상(通喪) : 상하가 통행하는 상례로 삼년상을 이름.[註 053] 경화(更化) : 정치와 교화를 고치어 새롭게 함.[註 054] 사위(事爲) : 사업.[註 055] 여러 왕손(王孫) : 소현 세자(昭顯世子)의 세 아들. 인조 25년에 당시 강빈 사건(姜嬪事件:소현 세자의 음식에 독을 넣어 죽였다는 무고 사건)이 문제가 되어 그의 소생인 왕손 3형제를 제주도에 귀양보냈는데, 이때 장자 석철(石鐵)은 12세, 차자 석린(石麟)은 8세, 삼자 석견(石堅)은 4세였다.[註 056] 고명(顧命) : 임금이 죽을 때 후사를 부탁하는 유명(遺命).[註 057] 재생백(哉生魄) : 음력 16일.[註 058] 서언(誓言) : 유언.[註 059] 노침(路寢) : 정전(正殿).[註 060] 정종(正終) : 정전에서 죽음.[註 061] 복(復) : 초혼(招魂). 사람이 죽은 몇 시간 뒤에 망인이 입던 옷을 가지고 지붕에 올라가서 왼손으로 깃을 잡고 오른손으로 허리를 잡고서 아무(何某)는 복하라고 세 번 외친 다음 그 옷으로 시신을 덮음.[註 062] 《의례경전(儀禮經傳)》 : 주자(朱子)가 찬(撰)한 《의례경전통해(儀禮經傳通解)》로 원집(原集)이 37권이고 속집이 29권임.[註 063] 시사전(始死奠) : 고복(皋復)이 끝난 뒤에 올리는 전.[註 064] 항시(巷市) : 골목에서 시장을 보는 것. 국상이 나면 애도의 뜻으로 시장을 철거하기 때문에 필요한 생필품을 골목에서 구함.[註 065] 차길(借吉) : 상제의 몸으로 길례(吉禮) 때에 특별히 길복(吉服)을 입는 것.[註 066] 천시(遷尸) : 왕이 죽어 소렴, 대렴을 마친 뒤에 왕의 시신을 당(堂)으로 옮기는 것.[註 067] 설치(楔齒) : 반함(飯含)을 하기 전에 먼저 뿔 숟가락을 아래 위의 이(齒) 사이에 끼워 입이 다물어지지 않게 하는 것.[註 068] 철족(綴足) : 시신의 발이 뒤틀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발을 의자의 다리에 묶어 놓는 것.[註 069] 유당(帷堂) : 당상(堂上)에 유막(帷幕)을 설치한 상막(喪幕).[註 070] 각사(角柶) : 뿔로 만든 숟가락.[註 071] 연궤(燕几) : 편안한 의자.[註 072] 흔창(興鬯) : 왕의 시신을 목욕시키는 울창주(鬱鬯酒).[註 073] 사기(肆器) : 너비가 8척, 길이가 12척, 깊이가 3척인 얼음을 채운 통. 하절기에 시체의 부패를 방지하기 위하여 얼음을 채운 이 통을 시신에 넣어둠.[註 074] 권의(卷衣) : 곤룡포.[註 075] 금모(錦冒) : 시체를 싸는 비단 자루 습(襲) 이후와 소렴 이전에 시체를 싸둔다.[註 076] 보쇄(黼殺) : 시체를 싸는 도끼 무늬의 수를 놓은 천. 위를 싸는 것을 보라하고 아래를 싸는 것을 쇄라함.[註 077] 모질(冒質) : 금모(錦昌)의 윗부분이다..[註 078] 쇄(殺) : 금모의 아래 부분이다.[註 079] 반옥(飯玉) : 염할 때 죽은 사람의 입에 구슬을 물리는 것.[註 080] 반미(飯米) : 염할 때 죽은 사람의 일에 쌀을 물리는 것.[註 081] 막포(幕布) : 장막을 만드는 거친 베.[註 082] 온공(溫公) : 사마광(司馬光).[註 083] 습(襲) : 죽은 사람에게 좌임포(左衽袍)를 입히는 것.[註 084] 반함(飯含) : 염할 때 죽은 사람의 입에 쌀을 물리는 것.[註 085] 환질(環絰) : 성복 때 상제가 건(巾) 위에 덧씌워 쓰는 수절(首絰).[註 086] 위모(委貌) : 관명(冠名).[註 087] 금(衾) : 홑이불.[註 088] 계빈(啓殯) : 발인(發靷)할 때 출란(出棺)하기 위하여 빈소를 여는 것.[註 089] 진조조전(陳朝祖奠) : 발인할 때 죽은 사람이 종묘로 가서 마지막으로 조상을 보이고 하직 인사를 올리게 하고 곁들어 전을 올리는 것.[註 090] 문(免) : 갓을 벗고 한 치 너비의 베로 머리를 묶고 뒤로 늘어 뜨리는 것.[註 091] 산대(散帶) : 띠의 끝을 꼬지 않고 흐트려 놓은 것.[註 092] 조전(祖奠) : 발인에 앞서 출발을 알리는 전. 조는 행신(行神)을 뜻함.[註 093] 명(銘) : 명정.[註 094] 자리[菌] : 관 밑에 까는 자리로서 관과 함께 묻는다.[註 095] 중(重) : 우제(虞祭) 이전에는 신주가 없으므로 나무를 깎아 뜰 중앙에 세워 놓고 죽은 이의 혼신이 임시로 이 나무에 의지하게 하고 또 죽은 이의 필요한 물건들을 이 나무에 매달아 놓는다.[註 096] 피(披) : 관을 끄는 끈.[註 097] 우(虞) : 장사를 지내고 돌아와서 빈궁(殯宮)에 지내는 제사. 망인의 시체는 땅으로 돌아갔으나 정기(精氣)는 정처 없이 방황하므로 우제를 올려 혼신을 안정시킴.[註 098] 반곡(返哭) : 장사를 마치고 돌아와서 종묘에서 곡을 하며 슬픔을 다하는 것.[註 099] 실내(室內) : 종묘 안.[註 100] 부(祔) : 졸곡(卒哭)이 끝난 다음날, 새로 죽은 이의 신주(神主)를 소목(昭穆)의 서차에 따라 종묘에 모시는 것.[註 101] 명일(明日) : 졸곡(卒哭) 다음날.[註 102] 당(堂) : 사당.[註 103] 감실(龕室) : 종묘 안에 신주를 모셔 놓는 장.[註 104] 애례존양(愛禮存羊) : 예를 아껴 구례(舊禮) 또는 허례(虛禮)를 버리지 않고 보전하는 것.
ⓒ 한국고전번역원
신이 상고하건대, 주자가 말하기를 ‘새로 죽은 분을 조부의 사당에 부(祔)하는 것은 조부에게 다른 사당으로 옮긴다는 것을 고하고 새로 죽은 분에게 이 사당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고하는 순서이다. 그런데 지금은 공실(公室)이나 사가(私家)의 묘(廟)에 모두 한 사당 안에 감실(龕室)103) 만을 달리하고 서쪽을 상(上)으로 하는 제도만이 있고 다시 좌소(左昭), 우목(右穆)의 반차(班次)가 없다. 그러므로 체천(遞遷)할 경우가 생기면 모든 감실을 다 옮기고 새로 죽은 이가 그 아버지가 있던 감실로 들어간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예의 큰 절목으로서 고례와 같지 않다. 그런데 예를 하는 자들이 오히려 조부가 있던 사당에 부(祔)한다는 예문을 고집하는 것은 의의가 없는 듯하다. 그렇다고 마침내 예를 고쳐서 아버지 사당에 부한다면 또 애례존양(愛禮存羊)104) 의 뜻이 아닐 것이다.’ 하였으니, 이에 의거해 보면 이것은 폐할 수 없는 큰 절목인데 국제에는 없으니 아마도 강정해 행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예조가, 대신에게 의논하기를 청하였다. 좌의정 이경석(李景奭)이 헌의하기를,
"외람되이 의논해 처리하라시는 명을 받고 감히 끝내 모른다고 사양만 할 수 없어 삼가 그 긴절한 조목에 오류가 많은 신의 설을 붙여 작은 책자로 만들어 올립니다."
하였는데, 그 책자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복(復).
신이 삼가 살피건대 예에 ‘복은 사랑을 극진히 하는 도이다.’ 하였습니다. 이번에 복할 때에 신이 영의정, 예조 판서와 함께 내정(內庭)으로 들어가서 내시(內侍)를 시켜 예에 따라 행하게 하였습니다. 고례에 이른바 소신(小臣)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겠으나 《가례(家禮)》로써 보면 복하는 자는 바로 시자(侍者)이니 《오례의(五禮儀)》에 ‘내시가 복한다.’는 것이 여기에서 뜻을 취한 것이 아니겠는지요. 대신, 예관(禮官), 승지, 사관(史官) 등을 정종(正終)105) 의 예에 동참시키는 것은 후세에 항식(恒式)으로 삼게 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2. 계신민(戒臣民).
신이 삼가 살피건대 《오례의(五禮儀)》에 ‘졸곡 이후에 가취(嫁娶)를 허락하여 3일 동안 차길(借吉)한다.’ 하여 조금도 차등이 없으니 김집(金集)이 근거로 인용한 주자의 말씀이 옳습니다. 그러나 고금의 시의(時宜)가 다르니 너무 번쇄하면 영구한 전식(典式)이 되기 어렵고, 3년상의 최복(衰服)을 입은 자에게 졸곡 뒤에 차길하는 것은 더욱 예에 위배된다고들 합니다. 《예기(禮記)》에 ‘공(公)의 상에 모든 달관(達官)의 장(長)은 상장(喪杖)을 짚는다.’ 하였는데, 주자가 말하기를 ‘달관(達官)은 스스로 임금과 교통할 수 있는 자이니, 안으로는 공경(公卿) 재집(宰執), 6조의 장, 9시(寺)·5감(監)의 장과 밖으로는 감사 군수로서 스스로 임금에게 장주(章奏)를 통할 수 있는 자들이다. 이들은 모두 상장을 짚고 그 이하는 상장을 짚지 않는다.’ 하였으니, 이로써 말해도 차등의 구별이 없을 수 없습니다. 고례에 임금의 복을 입고 있는 자는 감히 사사로이 어버이의 상복을 입지 못하고 임금의 복을 벗은 뒤에야 어버이의 복을 입고서 대소상(大小祥)의 제사를 행한다고 하였는데, 지금 비록 고례대로 다 회복할 수는 없지만 3년의 상복을 입은 자와 전함 당하(堂下)로서 일찍이 3·4 품(品) 및 시종을 지낸 자는 담제가 지나기를 기다린 뒤에 비로소 가취를 허락하고 그 나머지는 모두 《오례의(五禮儀)》에 따라 시행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3. 천시(遷尸)·설치(楔齒)·철족(綴足)·유당(帷堂).
신이 삼가 살피건대 이 네 조항은 강정(講定)해 기록하여 고거(考據)에 대비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4. 반함(飯含).
신이 삼가 살피건대 《오례의(五禮儀)》에 내시로써 전봉(傳捧)106) 하게 한 것은 생시에 내시가 전진(傳進)하던 뜻을 형상하여 정신(廷臣)으로 하여금 친히 행하게 하지 않은 것이 아니겠는지요. 《오례의(五禮儀)》에 ‘의정이 정전의 문밖에 가서 쌀을 담은 대접과 구슬을 담은 소반을 꿇어앉아 올리면 내시가 손을 씻고서 전봉한다.……’ 하였는데, 의정이 정전 문밖에 가서 꿇어앉아 올린다는 것은 아마도 태재(太宰)가 함옥(含玉)을 돕는 유제(遺制)인 듯하고, 또한 평소 올리는 모든 물건을 내시에게 전해서 내시가 몸소 올리게 한 예(例)인 듯도 합니다. 사왕(嗣王)이 몸소 하지 않는 데에는 근거한 바가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겠는지요. 예의 뜻은 깊고 은미하여 가벼이 의논할 수 없으니 깊이 강구하여 행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5. 환질(環絰)을 갖춤.
신이 삼가 살피건대 《가례(家禮)》 및 의절(儀節)에 모두 실려 있지 않으니, 《오례의(五禮儀)》에 궐략한 것도 이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겠는지요. 《의례경전(儀禮經傳)》에 소렴(小斂)을 하고서는 환질을 하는 제도가 있으나 다만 참최(斬衰)를 입는 자에게만 환질이 있고 자최(齊衰) 이하에는 문(免)만 할 뿐이니 이에 따라 행하면 고례에 부합할 듯합니다.
6. 대렴(大斂).
신이 삼가 살피건대 이번에야말로 경대부(卿大夫)가 당염(堂廉)107) 의 위치로 나아간다는 유제를 가장 잘 따라 대신, 예조 판서, 삼사의 장관, 6승지, 좌우 사관이 처음부터 들어가 시립(侍立)하였다가 연 뚜껑을 닫으려 할 때에서야 비로소 나왔으니 이 또한 후세에 본보기로 삼아야 마땅하겠습니다. 전례(奠禮)에 이르러서는 고례에는 대렴을 끝낸 뒤에 있고 원래 성빈(成殯)하고서 올리는 전은 없는데 《오례의(五禮儀)》에 대렴과 성빈에 모두 각각 전을 베푼다고 한 것은 어떤 근거에서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세속에서 통행하고 있는 예가 모두 이렇게 행한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상례와 제례는 선조가 하던 대로 따라야 한다는 설을 선정(先正) 이황(李滉)도 일찍이 말하면서 예는 후한 쪽을 따르는 것이 마땅하다고 한 것이 아마도 이를 가리킨 것인 듯합니다.
7. 성복(成服).
신이 살피건대 성복의 예는 논한 바가 구체적이고 자세합니다. 임금의 상례가 고례로 회복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어리석은 신도 일찍이 개연하게 여겨 선현들의 의논을 상고해 보았습니다. 주자의 논변(論辨)에 허다한 말들이 있지만 그 가장 중요한 것은 초상이 나면 고례에 따라 상복을 지어 입고서 상에 임하고, 따로 포복두(布幞頭), 포공복(布公服), 포과대(布褱帶)를 만들어 착용하고서 조회한다는 설입니다. 이 설이 참으로 정문(情文)에 맞지만 성대하였던 송(宋)나라에서도 오히려 다 회복하지 못하였습니다. 본조(本朝)108) 의 상제(喪制)는 옛날에 비교하여 더욱 근엄한데도 《오례의(五禮儀)》에는 오히려 한결같이 고제(古制)를 따르지 않은 것은 어째서이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만약 이미 입은 상복을 고치어 따로 최질(衰絰)을 만든다면 신은 그것이 과연 예에 맞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렇다고 최질의 제도를 비례(非禮)라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조종조의 정해진 제도를 따라 이미 성복을 한 뒤에 다시 최복을 지어 성복하는 것은 예에 없는 예이니 감히 그것이 사리에 맞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영종(寧宗) 때 주자가 차자를 올려 계빈(啓殯)하여 발인할 때엔 다시 초상 때의 복을 입으라고 청했던 것은 지금의 경우와 다릅니다. 대개 지레 입었던 칠사천황복(漆紗淺黃服)을 벗고 초상 때 이미 성복했던 복을 입는 것이 정례(情禮)에 매우 합당할뿐더러 고례의 가까이까지 회복하는 것이기 때문이었으니, 지금의 제도와 비교할 때 근사하지 않은 듯합니다. 선정신(先正臣) 이황(李滉)이 말하기를 ‘일찍이 주자의 군신복의(君臣服議)와 황상백(黃商伯), 여정보(余正甫) 등에게 답한 편지에서 말한 바를 보건대 지금 《오례의(五禮儀)》에 정한 국상 때의 신하의 복은 아마도 주자의 설을 따라 참작해 정한 것인 듯하다.’ 하였으니 이는 이황도 《오례의(五禮儀)》의 제도를 취한 것입니다. 포모(布帽), 포단령(布團領)은 정무(政務)를 볼 때의 복장이고 참최(斬衰), 마대(麻帶)는 옛 제도이니, 이황이 ‘주자의 설을 따라 참작해 정했다.’는 말이 어찌 이를 가리켜 이른 것이 아니겠습니까. 명묘(明廟)의 국상 때 이황은 《오례의(五禮儀)》의 군신상제(君臣喪制)가 도리에 맞지 않는 것이 많다는 이유로 주자의 군신복제의(君臣服制議)에 따라 참작해서 다시 정하려고 하여 예조와 의논하였으나 당시 참판인 박순(朴淳)이 어렵게 여기므로 마침내 그 의논이 중지되었다 하니, 어찌 선왕의 성문 헌장(成文憲章)을 경솔히 고치는 것을 어렵게 여겨서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이미 성복(成服)한 복은 지난 뒤에 소급해 고칠 수 없지만 상제(喪制)에 개정해야 할 것들은 개정해 고례로 돌아가서, 초상에는 질(絰), 장(杖), 최마(衰麻)로 성복하고, 정무를 보는 복장으로는 포모, 포과각대(布裹角帶), 백화(白靴)를 착용한다면 한 왕조(王朝)의 제도가 될 수 있으니 어찌 좋지 않겠습니까. 선묘조(宣廟朝) 때 지평 민순(閔純)이 졸곡 뒤에는 오모(烏帽), 오대(烏帶)를 하는 의전(儀典)을 사용하지 말고 흰 의관으로 3년의 제도를 마치기를 청하자 선묘께서 따르셨으니 이것을 법으로 삼을 만합니다. 그리고 전함(前銜) 당하(堂下) 3품 이하에는 간혹 품질(品秩)이 낮지 않은 자도 있고 일찍이 시종을 지낸 자도 있는데 임금의 복을 입는 데는 도리어 사인(士人)과 동등하게 백의(白衣)를 입는 제도를 쓰고 있으니 실로 옳지 않습니다. 예관(禮官)이 만약 달관(達官)은 장(杖)을 짚는다는 고례의 뜻과 시임(時任)과 전함은 최질(衰絰)을 한다는 제도를 상고해서 아울러 참작하여 그 차등을 정해서, 위로 예단(睿斷)를 취하여 아래로 후세에 전할 수 있으면 다행이겠습니다.
8. 조조(朝祖).
신이 삼가 살피건대 이 절목은 이미 예에도 있지만 인정에 따라 만든 것으로 거기에는 깊은 뜻이 있습니다. 그러나 국제에 없는 것은 반드시 행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의례(儀禮)》 기석(旣夕)에 ‘상구(喪柩)를 조(祖)109) 로 옮기어 상구를 양영(兩楹) 사이에 바르게 놓고 자리를 상구의 서쪽에 펴고서 앞서와 같이 전(奠)을 베푼다.’ 하였고, 《예기(禮記)》에 ‘자유(子游)가 말하기를 「창 밑에서 반함하고 호(戶)에서 소렴하고 조계(阼階)110) 에서 대렴하고 객위(客位)111) 에서 빈(殯)하고 정(庭)112) 에서 조(祖)113) 하고 묘(墓)에 장사지내는 것은 점차 멀리 떠남을 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상사는 나아감은 있고 물러남은 없다.」 했다.’ 하였고, 《예기(禮記)》에 또 ‘장사에 미쳐서는 종묘의 담을 헐고 행신(行神)의 위치를 넘어 대문으로 나아가니 이것은 은(殷)나라의 도인데 공자에게 배운 사람들은 이 예를 행하였다.’ 하였고, 《가례(家禮)》 조조의(朝祖儀)에 ‘사당(祠堂) 전정(前庭)에 이르러 이상(夷牀)114) 위에 상구를 바르게 놓는데 머리를 북쪽으로 둔다. 축(祝)이 집사(執事)를 거느리고 영좌(靈座) 및 전(奠)을 상구의 서쪽에 동향해서 차린다. 그러면 주인 이하가 각자의 위치로 나아가서 곡을 하는데 슬픔을 극진히 하고서 멈춘다.’ 하였습니다. 《의례(儀禮)》 기석(旣夕)의 예로써 보면 장사지내기 이틀 전에 조(祖)115) 로 옮기고 계빈(啓殯)에 미쳐서 장사 지내려 할 때에는 조묘(祖廟)의 중정(中庭)에서 조전(祖奠)을 올리는 것입니다. 그런 뒤에 은례(殷禮)를 행할 경우 또 묘문(廟門)의 담을 헐고서 대문으로 나아갑니다. 담을 헐고 대문으로 나아간다고 한 것은 빈소에서 묘정(廟庭)으로 옮겨 전을 올린 뒤에 대문으로 나아가는 것이니 밖에서 들어가는 오늘날의 제도와 같지 않습니다. 그런데 지금 만약 이 예를 행한다면 형편으로 보아 발인 전일에 행해야 되고 또 종묘의 담을 헐고 들어가야 하니 이미 고례와 맞지 않고 그 밖에도 불편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옛날에는 길흉의 예를 모두 종묘에서 행하였기 때문에 흉례를 행하는 데에도 심히 장애되는 바가 없었지만, 고금이 이미 다르고 원근이 같지 않아 구애되는 절목이 많으므로 아무리 고례를 따르려 해도 사세가 매우 어렵습니다. 《오례의(五禮儀)》에 이에 관한 절목이 없고 다만 빈전에 조전을 올리는 것만이 있는 것도 아마도 이런 이유에서일 것입니다.
9. 계(啓).
신이 삼가 살피건대 계빈(啓殯)하고서 변복(變服)하는 것이 예인데 《오례의(五禮儀)》에 없는 것은 무엇 때문에 그렇게 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이 역시 참작해서 손익(損益)한 속에 들어간 것이 아니겠는지요.
10. 반곡(反哭).
신이 살피건대 예에 이른바 ‘당(堂)으로 오르고 실내로 들어간다.’는 것은 주소(注疏)를 상고해 보면 모두 묘중(廟中)을 이름입니다. 폄(窆)116) 을 마치고 돌아와서 조묘(祖廟)에 반곡하는 것이 고례이나, 《오례의(五禮儀)》에는 이미 조조(朝祖)의 절목이 없기 때문에 반곡의(反哭儀) 또한 없는 것은 생각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겠는지요. 그리고 반우의(反虞儀)도 반곡의와 같은 것인데 이미 혼전(魂殿)에 돌아온 뒤에 곡읍하는 의식이 없는 것도 장차 초우제(初虞祭)가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겠는지요. 우제의 곡은 우제를 위한 곡이지 반곡의 곡이 아닙니다. 이번에 초우는 능소(陵所)에서 행하고 재우는 이튿날 행할 것이지만 이미 돌아와서 영좌(靈座)에 봉안했으면 재우 전에 곡림하는 절차가 있어야 마땅할 것 같으니 이는 예조가 품의해 정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영돈녕부사 김상헌(金尙憲)이 헌의하기를,
"신이 김집(金集)이 올린 《고금상례이동(古今喪禮異同)》 1책을 보건대 고거(考據)가 매우 자세하니 대대로 전문 분야의 학업을 전수한 노사 숙유(老師宿儒)라고 이를 만합니다. 신은 젊어서는 고루하고 늙어서는 더욱 혼미하여 일찍이 백호취송(白虎聚訟)117) 의 회합에 참여하지 못하여 항상 숙씨 태재(叔氏汰哉)118) 의 비난을 지고 있었는데, 지금 막중한 예를 논하는 자리와 옛것을 버리고 새로운 것을 도모하는 이때를 당하여 어찌 감히 참람하게 의사를 진술하여 불학 무식한 사람이 함부로 논하는 허물을 더 지겠습니까. 그러나 신의 좁은 소견으로 시험해 보건대 의심되는 바가 없지 않습니다. 대개 옛 성인은 이미 볼 수 없고 옛 예는 방실(放失)된 것이 많기 때문에 후유(後儒)들이 부득이 의(義)로써 예를 일으켜 뜻을 드러낸 것입니다.
옛 글에 ‘예는 시의(時宜)를 따르는 것이다.’ 하였고, 또 경계(經界)의 제도를 논한 맹자(孟子)를 찬양한 주자의 말에 ‘기왕의 자취에 연연하지 않았으되 선왕의 본 뜻을 잃지도 않았다.’ 하였으니, 천년 뒤에 나서 천년 전에도 행하지 않던 것을 행하고자 하면 인정이 반드시 의심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옛날에도 삼왕(三王)도 예를 한가지로 하지 않았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중(重)이 주(周)나라의 예법인데 후세에서는 백견(白絹)으로 대용하며, 초상(初喪) 때 묘사(廟社)에 고하는 예에 있어서는 《통전(通典)》에 여러 사당의 신주를 모아 조묘(祖廟)119) 에 간직한다 하였는데, 백견을 바꾸어 중(重)으로 회복하는 것은 지극히 쉬운 일이고 신주들을 조묘로 모으는 것은 예의 중한 것인데도 오히려 옛 도를 행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니 고금이 같지 않은 예문(禮文)이 어찌 한이 있겠습니까. 조종조 이래로 《오례의(五禮儀)》를 지어 한 왕조(王朝)의 법제로 삼으려 한 것이 비록 주공(周公)의 예와 부합하는지는 모르겠으나, 간혹 가장 타당치 않은 한두 군데만을 고치고 선왕 세대에 전해오는 옛 풍속으로서 예문과는 조금 다르지만 그런대로 통행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는 다 고치지 않은 데는 또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도 김집의 말 중에서 명백하여 따라야 할 것만을 골라 행하고 그 나머지는 여러 유신(儒臣)이 다 모여 깊이 강론하여 자세히 처리하기를 기다려 후회를 남기지 않는 것이 마땅할 것 같습니다."
하였고, 우의정 정태화(鄭太和)가 헌의하기를,
"삼가 김집이 올린 책자를 보건대 그 주의(主意)가 오로지 고례를 회복하려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생각건대 《오례의(五禮儀)》를 편찬할 때에 반드시 예문을 널리 상고하고 시의(時宜)를 참작하여 국제(國制)로 정하였을 것이고, 우리 열성(列聖)께서도 이미 준수해 통행하여 오늘에 이르렀는데, 지금 조종조에서도 행하지 않았던 것을 가지고 경솔히 변경 개정하는 것이 어떠할지 모르겠습니다. 그중에 초상 때 복(復)한 뒤 전(奠)을 올리는 것과 시신(尸身)을 옮기는 등 네 조항 및 성복한 뒤 조석으로 전을 올리고 절을 하는 것과 길이 멀면 초우(初虞)를 능소(陵所)에서 지낸다는 설은, 불편함이 없는 절목인 듯하고 크게 변경하는 것도 아니니, 예관으로 하여금 이로써 품의하여 결정케 하여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좌의정의 건의 중에 있는 사항을 영돈녕부사의 건의에 따라 본조가 참작해 깊이 강론하여 결정하라."
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예는 인정에 인연하여 천리(天理)를 품절(品節)한 것이니, 인정에 순응하면 천리에 합치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정에 연유하여 예문(禮文)을 세우고 시대에 따라 알맞게 제정하는 것이 예의 본의라고 하였습니다. 삼대(三代)의 예도 때에 따라 손익(損益)했는데, 공자께서 ‘주(周)나라의 예가 이대(二代)120) 를 거울 삼았으니 그 문체가 성대하구나. 나는 주나라의 예를 따르겠다.’ 하였으니, 이는 성인께서도 시왕(時王)의 제도를 중하게 여기신 것입니다. 국초(國初) 이후로 《오례의(五禮儀)》를 편저(編著)하여 열성이 준행한 것이 3백 년이나 되었는데, 그 사이에 현신(賢臣), 숙유(宿儒)가 하나둘이 아니었으되 그것을 고치지 않은 것이 어찌 생각이 없어서 그러했겠습니까. 그러나 절목 중에 혹 빠지거나 갖추어지지 않은 것이 있다면 보충하거나 변경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김집이 의논한 예 중에 설치(楔齒), 철족(綴足)의 도구와 환질(環絰), 소변(小弁)의 제도는 마땅히 첨가해 보충해야 할 바이고, 모쇄(冒殺)를 습(襲)할 때 사용하고 계빈(啓殯)할 때 복을 변경하는 것은 마땅히 변통해야 할 바이며, 성복한 뒤에 배례(拜禮)가 있고 반우(返虞) 뒤에 곡례(哭禮)가 있는 이것은 마땅히 따라야 할 고례입니다. 《오례의(五禮儀)》 습구조(襲具條)에 ‘수관(首冠)이 있다.’고 한 주에 ‘바로 복건(幅巾)이다.’ 하였으므로, 김집은 ‘용포(龍袍)를 입은 위에 복건을 씌우는 것은 서로 어울리지 않으니 마땅히 고례에 따라 작변(爵弁)이나 현면(玄冕)을 사용해야 한다. 만약 복건을 사용한다면 심의(深衣)를 사용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으나, 심의와 복건은 제왕(帝王)의 염습에 쓰이는 것이 아니니 용포, 현면의 말이 실로 예에 맞습니다.
병이 있으면 외정(外庭) 사람이 함께 알고 승하하면 외정 사람이 함께 그 상사를 다스린다는 이것은 바로 정종(正終)하는 임금의 도입니다. 지난번 대렴 때는 대신, 예관, 정원, 삼사의 장관이 모두 입시(入侍)하였으니 예에 맞았지만, 소렴 때는 입시하기를 청하였으나 들어가지를 못하여 후회스러운 일이 많았으니 습(襲) 이후를 모두 대렴 때처럼 한다면 진실로 후세에 법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초우 뒤에 조석전(朝夕奠)을 파하는 것이 《오례의(五禮儀)》에 명문(明文)이 없지만 《가례(家禮)》에 따라 파하는 것이 이미 규례가 되었습니다. 전(傳)에 ‘부모의 상은 귀하거나 천하거나 한결같다.’ 하였으니, 《오례의(五禮儀)》에 실려 있지 않은 것은 《가례(家禮)》를 참작해 쓴 것이 매우 많습니다. 신하들이 질장(絰杖)의 복을 입는 것과 대여(大輿)가 조조(朝祖)하는 예는 대신들이 모두 어렵게 여기고 있으니 행할 수 없을 듯합니다. 천년 뒤에 나서 천년 전에도 행하지 않던 것을 행하고자 하면 인정이 의심할 것이라는 말이 어찌 옳지 않습니까.
시사전(始死奠)이 사상례(士喪禮)에 실려 있는데 《주자가례(朱子家禮)》에 그것을 빼버린 것은 주자가 어찌 시사전을 소홀히 여겨서이겠습니까. 대개 사세에 불편한 바가 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상사에 예가 넉넉하고 슬픔이 부족한 것이 예가 부족하고 슬픔이 충분한 것만 못하다 하였으니, 초상을 만나 가슴을 치고 뛰며 슬퍼하는 중에 상(床)을 가져다가 포해(脯醢)를 차려 놓지 않았다 해서 예에 무슨 손상이 있겠습니까. 내시가 고복(皐復)하고 의정이 반함(飯含)하는 것과 묘제(廟制)가 달라 부례(祔禮)를 거행하지 않는 것은 《오례의(五禮儀)》에 이미 참작해 정해 놓았으니 지금 변경함이 없어야 마땅하고, 다만 전함(前銜)의 복이 사인(士人)과 같은 것은 실로 옳지 않으니 품질(品秩)의 고하를 막론하고 모두 시임(時任)과 동일하게 하여 당하(堂下) 3품 이하의 관원은 포립(布笠)으로 포모(布帽)를 대신 쓰고 복관(復官)하면 동일하게 최복을 입게 해야 합니다. 백포 숙마(白布熟麻)를 사용하는 것은 성복한 뒤에 처음으로 사적(仕籍)에 오른 자에게만 해당합니다.
경계하여 가취(嫁娶)를 금하게 한다고 한 밑의 주에 ‘졸곡 뒤에 가취를 허락하여 3일 동안 차길(借吉)한다.’고 하여 조금도 차등이 없지만, 김집이 인거(引據)한 바로는 구별하기가 어려울 듯하니 시임 전함을 막론하고 모두 삼년복을 입는다면 모두 담제(禫祭)를 지낸 뒤에 가취를 허락하고, 그 나머지 사서인들은 모두 《오례의(五禮儀)》를 따르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이 절목들을 따로 속보(續補)의 책으로 만들어 항식(恒式)으로 정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신들이 예관으로 있으나 예학(禮學)에 어두우니 노사 숙유가 강구한 바와 원로 대신이 어렵게 여긴 바를 어찌 감히 억측으로 결단하여 함부로 논하겠습니까. 그러나 깊이 강구하여 정하라시는 분부를 받았으므로 감히 천박한 소견을 대충 진달하지 않을 수 없어서이니 성상께서 헤아려 결정하소서."
하니, 상이 대신에게 명하여 다시 빈청(賓廳)에 모여 의논해 결정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영돈녕부사 김상헌이 병으로 오지 못하여 회의가 거행되지 못하였다.
6월 25일 계축
영돈녕부사 김상헌이 소명을 받고 조정으로 나아오니 상이 가마를 타고 출입하도록 명하였다. 과거에 상헌이 화의(和議)를 강력히 배척하여 항변해 굽히지 않았다. 정축년121) 에 남한 산성에 있을 적에 목숨을 걸고 정의를 지켜 대의(大義)를 밝혔는데, 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날로 변하는 것을 보고는 의분에 북받쳐 눈물을 흘리며 간하였고 성하(城下)의 의논122) 이 결정됨에 미쳐서는 손으로 항서(降書)를 찢고 조당(朝堂)에서 통곡하며 목을 매어 거의 죽게 되었으나 옆에 있던 사람이 구제하여 죽음을 면하였다. 남한 산성의 포위가 풀린 뒤에는 병든 몸을 가마에 싣고 곧장 안동(安東) 전사(田舍)로 내려가서 세상 생각을 끊어버리고서 평생을 마칠 계획을 하였다.
그런데 신득연(申得淵), 이계(李烓) 등이 없는 사실을 꾸며 청나라에 참소하여 심양(瀋陽)으로 잡혀갔는데, 청나라의 책망이 매우 위급하여 일이 예측할 수 없는 지경이었으나 상헌은 누워서 일어나지도 않고 말이 조금도 비굴하지 않으니, 노상(虜相)이 칭찬하며 감히 모욕을 하지 않고서 관중(館中)에 머물게 하였다. 전후 두 차례에 걸쳐 거의 6년 동안 심양에 억류되었다가 을유년에 비로소 석방되어 돌아와서는 양주(楊州)에 있는 묘사(墓舍)에 살면서 서울에는 한 발도 들여놓지 않았다.
병술년에 대배(大拜)123) 되자 누차 상소하여 사직을 청하였으나 윤허를 받지 못하여 억지로 명에 따랐다. 그러나 극력 사직하여 면직(免職)의 윤허를 받고는 그 날로 전에 살던 곳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이때에 이르러 국상(國喪)이 났음을 듣고 달려와 궐하(闕下)에서 곡(哭)을 하고는 병을 핑계로 돌아가자, 조정의 의논이 모두 선왕의 뒤를 이어 즉위하신 처음에 대로(大老)가 오래도록 전야(田野)에 있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고 하였고, 상도 주의(注意)하심이 더욱 독실하여 특별히 승지를 보내어 유지(諭旨)를 내려 부르심이 간절하니 얼마 되지 않아서 입조(入朝)하였다. 그러자 상은 즉시 여차(廬次)에서 인대(引對)할 것을 허락하고 내시 두 사람에게 명하여 부축해 들어오게 하여 특수한 예의로서 대우하였으며, 그가 나아갈 때에는 손을 들어 전송하고서 이어 가마를 타고 궁중을 출입할 것을 명하였다. 상헌이 상소하여 사직을 청하기를,
"신은 신하의 몸으로 먼저 국사에 신명(身命)을 바치지 못했는데 도리어 감당할 수 없는 예우(禮遇)를 받으며 들어가서 천안(天顔)을 배알하니 애통하고 황공하여 눈물만 흐를 뿐이었는데, 가마를 타고 출입하라시는 명을 받았습니다. 이 명은 송(宋)나라 조정에서 문언박(文彦博)을 대우했던 고사(古事)인데, 노공(潞公)124) 은 사조(四朝)를 섬긴 원로(元老)로서 나이가 80에 가까워 행보(行步)가 불편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특별 예우를 받았으나, 조야(朝野)가 두려운 눈으로 본 바이고 사적(史籍)에 드물게 전해지는 바였습니다. 그런데 신이 어떤 사람이기에 감히 이런 예를 감당하겠습니까. 신은 작은 계책이나마 내어 신화(新化)125) 를 돕지 못했으므로 잔약한 몸과 작은 복마저도 과분하게 여기며 죽을 날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세상에 드문 영총(榮寵)이 내리시니 어찌 아침 이슬보다 먼저 사그러지지 않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경은 높은 덕을 지닌 원로 대신이니 내가 오늘 경을 대우하는 도리는 이렇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 또 모든 일은 사리가 어떠하냐를 보아야 하는 것인데 무엇 때문에 고금의 이동(異同)을 따질 필요가 있는가. 경은 안심하고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6월 26일 갑인
장령 송시열(宋時烈)이 소명을 받고 조정으로 나아와서는 누차 상소하여 돌아가기를 빌었으나 상이 은혜로운 비답으로 윤허하지 않으니, 시열이 예궐하여 왕명(王命)에 감사하고 이어 입대(入對)를 청하였다. 이때 마침 상께 병이 있어 접견하지 않으니 시열은 대청(臺廳)에서 조복을 벗고 곧장 국문(國門)으로 나아가 상소하고서 떠났다. 그러자 상이 크게 놀라 곧 여섯 승지를 불러 이르기를,
"내가 병으로 접견하지 못했으므로 인해 시열이 갑자기 돌아갈 계획을 결정하였으니 누가 나를 위하여 그를 머물게 할 수 있겠는가."
하니, 평소 시열과 친한 동부승지 김익희(金益熙)가 성지(聖旨)를 가지고 뒤쫓아가서 타이르겠다고 청하였다. 그러자 상이 기뻐하면서 윤허하였다. 시열은 상의 뜻이 매우 간절하다는 것을 듣고는 돌아와 성밖에 당도해서 상소하여 사죄하고 이어 돌아가기를 더욱 강력히 청하니, 상이 정원에 전교하기를,
"현자를 대우하는 나의 마음이 정성스럽지 못하다고 이를 만하다. 평소 존경하여 예우하는 뜻을 스스로 드러낼 방법이 없으니, 승지는 나를 대신해서 교서를 짓되 나의 지극한 뜻을 효유하여 산림에 있는 세상에서 높이 뛰어난 선비들로 하여금 조정을 멀리하는 마음을 조금이나마 돌리게 하라."
하고, 특별히 예조 낭관을 보내어 시열에게 유지(諭旨)를 전하게 하였으나 시열은 이미 상소하고서 떠나버렸다. 그 상소에,
"슬픔을 절제하여 몸을 보호하며, 예를 강론하여 상사(喪事)에 예를 다하며, 학문을 밝히어 마음을 바르게 하며, 몸을 닦아 집을 가지런히 하며, 아첨하는 신하를 멀리하고 충직한 신하를 가까이하며, 사사로운 은혜를 억제하여 공도(公道)를 넓히며, 선임(選任)을 정미롭게 하여 체통을 밝히며, 기강을 진작시켜 풍속을 가다듬으며, 재용(財用)을 절약하여 방본(邦本)을 견고히 하며, 사부(師傅)를 골라 세자를 보도(輔導)하도록 하며, 공안(貢案)을 바르게 하여 백성의 형편을 펴게 하며, 검소한 덕을 숭상하여 사치를 혁신하며, 무비(武備)를 닦아 외모(外侮)를 막으소서."
하였는데, 상이 아름답게 여겨 받아들였다. 시열은 상의 지우(知遇)를 받아 예우함이 특별히 융숭했는데 한 번 입대(入對)를 허락하지 않았다 하여 사모(紗帽)를 벗어버리고 서둘러 돌아가니, 듣는 이들이 모두 너무 지나치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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