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일 정사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9월 1일 정사
조익(趙翼)을 좌의정으로, 김육(金堉)을 우의정으로, 【좌의정 정태화(鄭太和)가 모상(母喪)을 당했다.】 이시방(李時昉)을 형조 판서로, 허휘(許徽)를 공조 판서로, 김남중(金南重)을 대사헌으로, 최혜길(崔惠吉)을 도승지로, 조수익(趙壽益)을 대사성으로, 이정영(李正英)을 수찬으로 삼았다.
조익을 총호사(摠護使)로 삼았다.
부사직(副司直) 하진(河溍)이 상소하기를,
"신이 병든 몸으로 도성에 들어와 두 달이나 이곳에 있었습니다. 삼가 들으니, 전하께서 언관(言官)을 중히 하지 않을 수 없다고 여기시어 대간을 가려 의망하라는 전교를 내리시고, 선현(先賢)을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하시어 후예를 녹용하라는 전교를 내리시고, 해도(海島)에 있는 여러 아이들이 혹 병에 시달릴까 염려하시어 내군(內郡)으로 옮겨 두라고 전교하셨다고 합니다. 이 세 말씀은 모두 성상의 충심(衷心)에서 나온 것으로, 실로 우리 나라의 억만년토록 무궁한 아름다움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말하기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행하기가 어려우며 그 실제를 다하기는 더욱 어렵습니다. 삼가 보건대, 전하께서는 비록 말씀은 하셨지만 행하는 데 있어 그 실제를 다하지 않음이 있습니다. 이경여(李敬輿)·홍무적(洪茂績)·이응시(李應蓍)·심노(沈𢋡) 등이 한번 천위를 건드리어 오랫동안 먼곳에 귀양을 가 있었는데, 지난번 대신(大臣)의 차자를 인하여 양이(量移)만을 명하셨습니다. 전하께서 이미 ‘원로 대신의 계책을 따르지 않고 무엇을 기다리겠는가.’ 하셨다면 어찌 그날로 완전히 풀어주지 않으셨습니까? 이는 전하께서 말씀은 하셨으나 행함에 그 실제를 다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선정신(先正臣) 이언적(李彦迪) 등의 제사를 받드는 자손이 벼슬조차도 받지 못하여 현인(賢人)을 존경하는 아름다운 뜻이 마침내는 헛된 곳으로 돌아가고 말았으니, 이는 전하께서 행하면서도 그 실제를 다하지 않은 것입니다.
소현 세자(昭顯世子)의 여러 아들을 내군(內郡)으로 옮겨 두라고 하셨으니, 원근에서 보고 듣는 사람이면 누군들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지 않았겠습니까. 다만 양사에서 신생(辛生)을 국문하기를 청한 것은 대개 흉물(兇物)을 묻고 독(毒)을 넣은 사실을 끝까지 조사하여 대중의 분함을 펴고자 해서였는데, 지금 재궁(梓宮)이 빈전(殯殿)에 있으니 우선 끝까지 신문함을 늦춘 것은 참으로 전하의 지극한 뜻입니다. 그러니 여러 아이들을 경중(京中)으로 불러들여 그들로 하여금 교외에서 곡하며 영결(永訣)하는 반열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해야 바야흐로 선왕(先王)의 유의(遺意)를 잘 계술하였다고 할 수 있으니, 하루라도 늦추어서는 안 됩니다. 풍토(風土)에 몸을 상하게 되면 비록 후회한들 무슨 소용 있겠습니까. 이는 전하께서 말씀은 하셨으나 그 실제를 다하지 않은 것입니다."
하니, 상이 알았다고 답하였다.
전 좌랑 이회보(李回寶)가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신이 4월 28일 직숙(直宿)하면서 삼가 저보(邸報)를 보니, 대행 대왕(大行大王)의 증후(症候)를 감한(感寒)이라고 분명하게 썼었는데, 어의(御醫)가 학질로 다스려 마침내는 종천(終天)의 슬픔을 안게 되었습니다. 양사에서 이형익(李馨益)의 국문을 청하였으나 전하께서는 ‘선조(先朝)에 공이 있다.’는 이유로 윤허하지 않으셨으니, 신은 후세에서 성상의 학문이 《춘추(春秋)》의 의리와 선악의 미세한 분간에 밝지 못하였다고 볼까 두렵습니다.
자전께서 다른 궁(宮)에서 별도로 거처하신 후 전의 증세가 다시 일어났다는 설이 매양 조보(朝報)에 나왔습니다. 그런데 환어하신 이래 이제 네 달이 되었으나 한번 감기가 드신 것 외에는 전의 증세가 재발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신하가 되어 감히 이런 말을 질병이 없는 국모(國母)에게 함부로 가하고 약방(藥房)을 왕래하면서 함부로 무함했으니 대역 부도(大逆不道)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임금을 시해할 마음을 품은 데 대한 처벌은 하루라도 늦출 수가 없는데 지금껏 용납해 두고 있으니, 의리가 분명하지 못합니다. 신은 성상의 학문이 혹 의리를 분별함이 투철하지 못한가 염려됩니다. 신생(辛生)의 흉역(凶逆)은 강충(江充)160) 보다 만배나 더하며, 선후(先后)의 병환 역시 한 무제(漢武帝)가 꿈에 놀란 것에161) 비할 바가 아니니, 지금 망극한 슬픔을 당하여서 의리상 마땅히 먼저 국문해야 할 자는 신생이 아니겠습니까. 공제(公除)한 후에도 아직껏 조용하니, 신은 못내 통분스럽습니다."
봉례(奉禮) 여작(呂焯)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아, 흉악한 저주(咀呪)가 화얼(禍孼)을 빚어내고 요의(妖醫)가 시기에 응하여 망극한 변이 갑자기 뜻밖에서 나왔습니다. 신생과 이형익은 그 죄가 같은데 어찌 화의 근본이 된 흉물을 하루라도 천지 사이에서 살도록 용납하겠습니까. 더군다나 신생은 간교하기 짝이 없고 날래고 사납기가 남보다 배나 더하다고 하는데, 먼저 일의 기미가 전과 다름을 헤아리고 문득 의구하는 마음이 생기면 혹 감옥을 뛰쳐 나올 근심이 없지 않습니다. 어리석은 신의 생각으로는 마땅히 급히 엄하게 국문하도록 명하시되, 국문할 때 설사 끌어대는 말이 있더라도 오직 전하께서 잘 처리하여 저절로 안정되게 하는 데 달려 있다고 여깁니다."
정원에 하교하기를,
"나는 어리석고 나약한 자질에다 식견(識見)도 없이 이런 중임(重任)을 맡고 보니 어떻게 할지를 모르겠기에 조용히 관망하면서 하는 바가 없었다. 그런데 인심이 아름답지 못하여 문득 업신여기는 뜻이 생겨나 모든 소장(疏章)에 좋지 못한 말을 많이 하여 나의 의중을 시험하였다. 그런데도 내가 언로(言路)를 염려하여 모르는 체하고 너그럽게 답하자 함부로 거리낌없이 흉한 계책을 이루고자 한다. 하진의 소장에 신생을 국문하라는 말이 있어 내가 이미 놀랐으나, 많은 말을 하고 싶지 않아 범연하게 답하였다. 이제 이회보·여작의 소장을 보건대, 이렇게까지 말을 무리하게 이르렀다. 이회보는 또 시병(侍病)한 의관(醫官)에게 현륙(顯戮)을 행하지 않는다고 장황하게 떠벌리면서 《춘추(春秋)》의 의리로 나무라고 있다. 당시의 일은 모두 사관(史官)의 기록에 실려 있으니 내가 말하고 싶지 않다. 이것은 드러내 놓고 억지로 수악(首惡)의 이름을 가한 것이니, 만세의 공론이 없겠는가.
대개 신생의 일은 이미 선왕조(先王朝)에서 결단한, 하나의 고자(告者)일 뿐이다. 어찌 다시 물을 일이 있겠는가. 그런데 심지어 여작은 말하기를 ‘국문할 때에 설사 끌어들이는 것이 있더라도 오직 전하께서 잘 처리하는 데 달렸다.’라고 하였으니, 이 역시 무슨 뜻인가? 내 생각으로는 흉물을 묻고 독을 탄 흉얼의 여당이, 이형익(李馨益)이 매양 구급(救急)하는 의술을 써서 그들의 흉계를 마음대로 이루지 못함을 매우 미워하여 유감을 품었고 오늘에 이르러서는 또 신생이 보복하려고 실토한 것을 한스럽게 여겨, 이에 하진으로 하여금 말을 꺼내게 해서 어떻게 하는지 시험해 보고는, 두 사람이 서로 이어 상소하여 임금을 협박할 계책을 삼은 것이라 여겨진다. 그 통악한 형상은 본디 말할 것이 없으나 반드시 교사한 흉한 무리가 있을 것이니, 정원에서는 불러다 물어서 아뢰라."
하였다. 정원이 이회보와 여작 등을 불러다 물으니, 이회보는 대답하기를,
"이형익이 처음에는 감한(感寒)으로 고했다가 갑자기 학질로 다스렸으므로 어리석은 신은 신하로서 질병을 조심스럽게 치료하는 정성이 전혀 아니라고 여겼습니다. 이것이 어찌 《춘추(春秋)》의 임금을 섬기는 도리이겠습니까. 그리고 ‘신생이 보복하려고 실토하였다.’는 하교는 신이 실로 곡절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신생이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선왕조에서 실토한 것입니다. 흉물을 묻을 즈음에 그가 이미 악행을 함께 저질렀으니, 이는 강충보다 만배나 더한 자가 아니겠습니까."
하고, 여작은 대답하기를,
"춘궁(春宮)을 짓는 곳에서 더러운 물건을 많이 발견했는데, 이는 모두 신생이 스스로 묻고 가리켜 주어 파낸 것입니다. 그때 역사를 감독하던 관원들이 모두 직접 보았으니, 이것이 신생의 소행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지금 망극한 슬픔을 당하여 혹 이로 인해서 질환을 얻은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없지 않으니, 군부를 위해 분노를 품는 정성이 과연 어떻겠습니까. 신생의 여당(餘黨)이 있는지 없는지 신이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러나 무수한 더러운 물건은 본디 한 여자가 묻을 수 있는 것이 아니요, 반드시 밖에서 호응한 사람이 없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소장 가운데 언급했던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이 두 사람이 대답한 바를 보건대, 책임 막음하기에 급급하였고 대답하기 어려운 말에 대해서는 전혀 대답하지 않았으니, 아주 통분스럽고 놀랍다. 이회보가 말한 강충의 일이 어찌 이 일에 비교가 되는가. 마땅히 국문하여 처리해야 하나 언로에 관계되므로 지금은 우선 그냥 둔다.
또 자전께서 경덕궁(慶德宮)으로 이어한 것은 선왕조(先王朝) 때에 있었는데, 상소 가운데서 이른바 대역 부도(大逆不道)란 누구를 가리켜 말한 것인가? 또 환어하신 후의 내간(內間)의 일을 어디를 통해 알았기에 그렇게 단정해서 말하는가? 그 말이 음험하고 괴이하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을 어찌 내가 말하고 싶겠는가마는, 내가 만약 말을 하지 않으면 반드시 선조(先朝)에 누를 끼치기 때문에 부득이 말하는 것이다. 아, 매우 불행한 일이다."
하였다.
9월 2일 무오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병조가 아뢰기를,
"북로(北路)의 봉화(烽火)를 여러 달 동안 올리지 않으니 혹시 변이라도 있으면 참으로 매우 염려됩니다. 구름이 짙게 끼어 봉화가 끊어지는 것이야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맑은 날에도 올리지 않는 것은 모두 각 고을 수령들이 근실하지 못한 소치입니다. 청컨대 경기·강원·함경 감사 및 남·북병사에게 특별 경계하도록 신칙하고, 수령과 봉졸(烽卒)로서 태만하거나 소홀히 한 자는 사목에 의해 죄를 주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예조가 아뢰기를,
"앞으로의 칙서(勅書)를 맞이할 때의 복색(服色)에 대하여 《오례의(五禮儀)》를 상고하건대 ‘면복(冕服)을 입는데, 고명(誥命)을 받지 않았으면 아청색(鴉靑色) 원령포(圓領袍)에 익선관(翼善冠)·청정소옥대(靑鞓素玉帶)를 착용하고 예를 행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병인년162) 계운궁(啓運宮)163) 의 상(喪)에는 본조의 계사로 인해 대신과 의논하여 아청색이 드러나지 않는 적색(赤色)으로 바꾸었으니, 지금 역시 이에 의거해 행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기유년164) 선조(宣祖)의 국휼(國恤) 때 궁궐을 드나들 때의 복색은 졸곡(卒哭) 후일 경우에는 익선관을 백색으로 바꾸었고 옥대 역시 베로 쌌었습니다. 이는 필시 명종(明宗) 때 지평 민순(閔純)이 제도를 정한 뜻에서 나온 것이니, 청컨대 이 예를 준용하소서."
하니, 따랐다.
공조 좌랑 이유태(李惟泰)가 상소하기를,
"아, 전하의 나라는 위태합니다. 온 강(江)에 풍랑이 일어 물이 새는 배가 침몰하려는 형세와 같으니, 생각하면 몸이 떨리고 보자니 참혹하며, 말을 하지 않자니 가슴이 답답하고 말을 하자니 길어집니다. 영돈녕부사 김상헌의 정충(精忠)과 사업(事業)은 전 시대에서 구한다 하더라도 몇 사람이나 있겠습니까. 비록 천년이 지나더라도 역시 존경하고 애모할 만합니다. 정신을 모아 꿈속에서도 구한다면 게으른 자를 일어나게 하고 완악한 사람을 일으키며, 탐욕스런 자를 청렴하게 할 수 있으니, 백세의 스승으로 삼을 만합니다. 그러므로 밝은 일월(日月)도 그보다 밝다고 할 수 없으며 높은 태산(泰山)도 그보다 더 높다고 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괜찮을 것입니다. 나이가 80에 이르러 시골에 물러나 있자 맑은 이름과 아름다운 명성을 한몸에 지녀 사림(士林)들이 북두(北斗)처럼 우러르고 천하가 그의 생사(生死)를 물었습니다. 이와 같이 살다가 이와 같이 죽으면 그 누가 감히 업신여길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존경하여 성심으로 부르고 예로써 맞이하여 왔으니, 이것이 어찌 관작에 연연해서이며 또 어찌 나라 일이 잘못되는 것을 좋아하는 자이겠습니까. 그의 생각에 지금 말해야 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오직 이조의 인재(人才)를 진퇴(進退)시키는 것과 주의(注擬)하는 득실(得失)이 실로 치체(治體)에 관계된다고 여겼기 때문에 그들이 사정(私情)을 행하는 것을 보고는 한마디 말로 배척했습니다. 이는 실로 원로(元老)가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에 충성하는 마음을 스스로 그만둘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심대부(沈大孚)·엄정구(嚴鼎耉)·조빈(趙贇)·이회(李禬)는 대체 어떤 사람들이기에 기롱하고 배척하며 업신여기고 욕보이면서 이처럼 도리에 어긋나고 본성을 거스르는 행동을 하는지 신은 그들의 의도를 알 수가 없습니다. 전하께서 높이는데도 높일 줄을 모르고 전하께서 공경하는데도 공경할 줄을 모르며, 천하 사람들이 모두 이 원로가 있는 줄 아는데도 이 사람들은 이 원로가 있는 줄을 모르니, 역시 왜 그렇습니까?
전 대사간 이지항(李之恒)같은 자는 하나의 지조없고 간사한 사람입니다. 권세가 행신(倖臣)에게 있으면 문객(門客)이 되는 것을 달갑게 여기어 부끄러운 줄을 모르고, 인사권이 전관(銓官)에게 있으면 자제(子弟)들과 사귀어 오직 하고자 하는 대로 합니다. 지난번 김식(金鉽)이 전랑이 되었는데, 이것이 어찌 인망에 따른 것이겠습니까. 이해창(李海昌)이 한 일이지만 실은 이지항이 그 주모자였습니다. 이번에 이해창이 태복정(太僕正)이 되었는데, 이는 실로 자급이 오를 계제를 마련해 준 것입니다. 이는 이지항이 도모한 바로서 세 차례나 관직을 옮겨 제수하여 여론이 시끄러워 귀 있는 자는 모두 듣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지항의 계사에는 ‘별달리 비난하는 의논이 없다.’ 하여 그냥 넘겨버림을 면치 못하였고 구절마다 글자마다 억양(抑揚)하지 않음이 없어, 몰래 전관에게 붙어서 대로(大老)를 드러내어 배척하였으니, 신은 못내 통분스럽습니다. 지금 의논하는 자들이 혹 말하기를 ‘심액(沈詻)이 판서(判書)가 되어서는 피차를 두루 등용하였고 사심을 쓴 바가 없었다.’라고 하는데, 신은 웃음이 나옵니다. 시인(時人)들은 관작을 탐하기 때문에 피차를 통용하는 것으로 사심이 없다고 하지만, 사림(士林)은 국가를 위하기 때문에 피차를 통용하면 사(邪)와 정(正)이 뒤섞여 나오므로 사심을 쓴 것이라고 여깁니다. 이지항이 달리 비방하는 의논이 없다고 말하나, 자신이 대사간이 되어서도 다른 비방의 의논이 있음을 몰랐던 것입니다. 심대부·엄정구·조빈·이회 역시 사람이니, 참으로 호오(好惡)의 천성이 있다면 어찌 심액이 정사에 사정을 뒤섞어 쓴 것이 그릇되고 다른 사람의 부림을 받은 것이 못난 것임을 모르겠습니까. 그런데도 심대부가 배척받기에 이르러서는 국가를 염두에 두지 않고 의리를 돌아보지 않은 채 앞장서서 스스로 담당하고 힘을 내어 함께 구원했으니, 이는 혁장외어(䦧墻外禦)165) 한다는 뜻입니다.
만약 심대부 무리들의 마음에, 과연 이지항의 무리를 제일가는 청류(淸流)로 여겨 청관(淸官)에 합당하다고 여기고 심액이 등용한 바가 십분 공정하다고 여기며, 또 귀가 어두워서 다른 사람의 비방을 듣지 못하였다고 한다면, 심대부의 무리는 옳은 사람이며 가상합니다. 그러나 만약 그렇지 않고서 그런 마음이 있었고 들은 바가 있는데도 임금에게 고하기를 ‘귀먹은 것이 김상헌보다 심하다.’고 했다면 이는 비단 대인(大人)을 모욕한 것일 뿐 아니라 자신들의 마음을 속인 것이며 천지 귀신을 속인 것이며 전하를 속인 것입니다. 임금을 속이는 일은 신하로서 할 바가 아닙니다. 신은 그 사람을 모르고 실로 그의 마음을 알지 못하니, 어찌 감히 그 죄를 억지로 정하겠습니까. 이는 심대부 무리의 마음에 있어 속일 수 없는 것이고 또 전하의 청감(淸鑑)으로 통촉하는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역시 심대부 무리가 자신들의 마음을 속인 것이 아니고 또 임금을 속인 것이 아니라고 여기신다면, 그의 말이 비록 옳지 않으나 그 마음은 곧은 사람이 되는 데에는 해롭지 않으니 전하께서 쓰셔도 되는데, 하필 파직시키고 체직시키겠습니까. 그렇지 않고 심대부 무리가 자신들의 마음을 속이고 또 임금을 속였다고 여기신다면 원로를 모욕하여 조정을 불안하게 한 것 역시 작은 일이 아닙니다. 소인의 악 가운데 마음을 속이는 것보다 더 심한 것이 없고, 신하의 죄로서는 임금을 속이는 것보다 심한 것이 없으며, 오늘날의 화(禍)로서는 당(黨)을 옹호하는 것보다 더 심한 것이 없습니다. 전하께서는 어찌 통렬하게 끊으시어 호오를 분명히 밝히지 않으시고 반드시 전 대사헌 김집(金集)의 상소를 기다렸다가 단지 엄정구만을 파직하고 심대부에게는 죄를 주지 않으신단 말입니까? 그러므로 이회의 무리가 전하의 마음을 엿보고 또 장황한 사설(辭說)을 늘어놓았는데, 은연중 대로(大老)를 배척하는 뜻이 있었으니 신은 실로 민망하게 여깁니다.
아, 전하의 나라는 위태롭습니다. 천하의 대로(大老)가 남의 공격을 받아 비난과 모욕이 이에 이르렀는데도 조정 대신들은 예삿일로 보니 그 나머지는 다시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신은 뜻 있고 기미를 아는 선비들이 산림(山林) 깊숙이 숨어서 나오려고 하지 않고, 온 자들도 필시 실망하여 가버리려고 할까 염려됩니다.
명왕(明王)이 일어나는 것은 천년에 한번 있으며, 두 원로가 돌아간 것은 인심(人心)이 배여 있는 바입니다. 지금은 바로 음양(陰陽)이 서로 다투고 세상이 어두운 때인데도 모두 돌아갈 것만 생각하고 나라 일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종묘 사직과 백성들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송시열(宋時烈)같은 사람에 이르러서는 성상께서 인정해 주심이 가장 깊고 재학(才學)이 뛰어난 자인데 불행히도 물러갔으니, 참으로 애석합니다. 시열은 신의 친구인데, 학문의 천심(淺深)은 신이 감히 말할 수 없으나, 변고가 있은 이래로 문을 닫고 강학(講學)하며 전야(田野)에서 욕심없이 자득하며 마치 그렇게 생애를 마치려는 듯하였습니다. 선조(先朝)에서 여러 차례 불렀으나 감히 나아가지 않은 것이 어찌 군부를 잊고 명을 어기기를 즐겨서 그런 것이겠습니까. 옛날 부자(夫子)께서 칠조개(漆雕開)에게 벼슬을 하라고 하니, 말하기를 ‘저는 여기에는 자신이 없습니다.’라고 하였으니, 송시열은 이것을 배운 것입니다. 지난번 맨 먼저 신명(新命)을 입어 돌보아주는 뜻이 매우 간절하였고 나라에 대상(大喪)이 있었으므로 감히 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헌관(憲官)을 제수하기에 이르러 여러 차례 사양하였으나 윤허를 받지 못하자 나아가 사은한 후에 즉시 입대를 청한 것이 어찌 사부로서의 사사로운 정성을 바치고 평생의 묵은 회포를 펴고자 해서였겠습니까. 선조(先朝) 때 오지 않은 것은 임금을 잊어서가 아니요, 이날 조정에 나온 것 역시 벼슬하기를 좋아해서가 아닙니다. 반드시 성상을 우러러보면서 그의 충심(衷心)을 다 아뢰고 진퇴(進退)를 결정할 계책으로 삼으려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마침 성후(聖候)가 미령하시어 나오게 하지 못하자 스스로 ‘내가 우매하고 비루하니 임금에게 박대를 당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온 것을 후회하면서 물러가기를 결정하였던 것입니다.
아, 군신(君臣)이 사귀는 즈음에 어찌 구차스레 할 수 있겠습니까. 송시열은 10년 동안 전야(田野)에 있으면서 스스로 농민(農民) 사이에 끼어 있다가 하루 아침에 명을 받들었으니, 전하와 교제함이 없었더라면 초야(草野)의 신하라고 해도 될 것입니다. 성명(聖明)을 만난 것에 감격하여 억지로 나갔는데, 소회가 있어 입대를 청했는데도 윤허를 받지 못하다가 정원의 여러 신하들이 청한 후에야 성사되었으니, 다시 불러 들인 명은 또 성상의 마음속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관(冠)을 걸어두고 성문을 나가 질병이라 일컫고 들어 가지 않음은 비록 세속 사람들이 보기에는 놀랍겠지만 실은 고의(古義)에 맞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후회하시고 깊이 자신의 허물을 책망하여 승지를 보내 간절히 만류하기까지 하셨으니, 선비를 대하는 예가 여러 왕들보다 월등합니다. 그 때문에 사방이 쏠리고 인심이 감격했습니다. 그러나 송시열을 비난하는 말이 이를 따라 나오게 되었습니다. 전하께서 송시열을 상규(常規)로써 대우하지 않고 극진히 하였는데도 시열이 그 예가 자신에게 맞지 않는다고 자처하였으니, 도리어 전하의 수치가 된 것입니다.
한번 성문(城門)을 나가면 끝내 돌아간 것입니다. 만약 다시 특별한 권우(眷遇)를 탐내어 물러나려 했던 것을 물러나지 않고 이미 걸어두었던 관을 쓰며, 이미 벗었던 직책을 다시 띠고 이미 나갔던 성문을 들어와서 아무렇지도 않게 길에서 호창(呼唱)한다면 사람들이 또 뭐라고 하겠습니까. 염치의 대절(大節)은 세도(世道)와 관계되니, 시열이 비록 스스로 가벼이 하고자 하더라도 조정을 욕되게 하는데 어떻게 하겠습니까. 전하께서는 어찌 특별히 소지(召旨)를 내리고 성의를 극진하게 하여 기어이 오게 하지 않으십니까.
삼가 듣건대 이조 판서 조경(趙絅)이 일찍이 헌장(憲長)이 되어 원당(原黨)을 논핵하고자 하여 조석윤(趙錫胤)을 그 당으로 지목하여 미포(米布)의 설로써 더럽히기까지 했는데, 한두 동료가 힘껏 변명하여 그치게 되었다고 하니, 아, 역시 심합니다. 신은 조석윤과 평소 모르고 지내 그 사람됨을 자세히 알지 못하나, 듣건대 그가 집에 있으면서 처신함에 염결(廉潔)로 스스로를 지켰으며, 조정에 들어온 후 일 행하는 것을 여론이 허여하여 지금의 제일류(第一流)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조경은 무슨 마음으로 감히 변장자(卞莊子)의 술책166) 을 그 사람에게 써서 함정 가운데 빠뜨리고도 아까워할 줄을 모른단 말입니까. 대저 조경은 발끈 성을 잘 내고 자호(自好)하는 사람으로 젊은 나이에 청망(淸望)이 있어 사람들이 제법 허여하였습니다. 그러나 조정에 들어온 지 오래되어 명성(名聲)에 도취되었고 경전(經傳)의 가르침을 부회(傅會)하여 간언(奸言)을 꾸며 대었으므로 벼슬이 비록 높지만 사림에서는 비루하게 여깁니다. 만약 조석윤에게 실제로 그런 허물이 있다면 곧바로 그 사람을 배척하면 됩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진퇴를 결정하지 못하고 돌아다 보면서 기회가 있으면 발론을 하고자 하고 불리할 듯하면 잠자코 있는단 말입니까. 이것이 과연 군자의 마음이며 국가를 위한 계책이겠습니까. 이는 붕당의 뜻으로써 자기의 반대파를 공격하는 데 불과한 것이니, 신은 실로 그 속셈을 모르겠습니다. 이는 심대부·엄정구·조빈·이회와 같은 수단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두 대로(大老)의 거취는 실로 국가와 관계되므로 내가 매우 우려하고 있다."
하였다.
9월 3일 기미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우의정 김육이 상소하여 면직을 빌었으나, 상이 우대하는 비답을 내리고 윤허하지 않았다.
9월 4일 경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이조 판서 조경이 면직되었다. 조경이 이유태(李惟泰)의 상소에서 배척을 받아 여러번 사직하니, 윤허한 것이다.
9월 6일 임술
이시백(李時白)을 이조 판서로, 한흥일(韓興一)을 병조 판서로, 조경(趙絅)을 예조 판서로, 이기조(李基祚)를 병조 참판으로, 한필원(韓必遠)을 예조 참판으로, 송준길(宋浚吉)을 집의로, 이상일(李尙逸)을 장령으로, 배시량(裵時亮)을 평안 병사로 삼았다.
9월 7일 계해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9월 8일 갑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예조가 아뢰기를,
"《정원일기(政院日記)》를 상고해 보니, 대왕(大王)의 상(喪)에 조제(吊祭)하고 책봉하러 온 조사(詔使)를 접견하고 연향하는 날에는 모두 소복(素服)을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무진년에는 황태자의 책봉을 반경(頒慶)했기 때문에 선조(宣祖)께서 바야흐로 명종(明宗)의 상(喪)을 입고 계셨으나 흑단령(黑團領)으로 예를 행하였습니다. 일찍이 병인년167) 에 선왕(先王)께서 하교하시기를 ‘선조(先朝)에서 흑단령으로 예를 행한 것은 조사(詔使)가 백의(白衣)를 허락하지 않은 데서 나온 것이니 지금 이로써 예(例)를 삼아서는 안 된다.’고 하자, 그때 상신(相臣) 신흠(申欽)이 의논드리기를 ‘반경(頒慶)과 조제(吊祭)는 구별이 있는 듯합니다.’ 하였습니다. 이로써 미루어 보면 이번 복색(服色)은 백색을 쓰고, 찬선(饌膳)은 채소를 쓰며, 대소선(大小膳)의 진화(進花) 역시 어전(御前)에 설치하지 말아야 합니다. 청컨대 이 예를 따르소서."
하니, 따랐다.
9월 9일 을축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9월 10일 병인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묘시(卯時)에 계빈전(啓殯奠)을 행하고, 진시(辰時)에 찬궁(欑宮)을 열고 별전(別奠)을 행하였으며, 신시(申時)에 조전(祖奠)을 행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내일 자시(子時)에 견전(遣奠)을 행하고 곧바로 발인을 행하여야 하니, 만약 그 사이에 또 조전(朝奠)을 행한다면 일이 매우 바쁘게 됩니다. 청컨대 견전에 겸하여 조전(朝奠)을 행하소서."
하니, 따랐다.
9월 11일 정묘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자시(子時)에 재궁(梓宮)이 출발할 때에 견전을 행하고, 대여(大輿)가 모화관에 이르러 노제(路祭)를 행하였다. 조제를 마치고 상이 악차(幄次)에서 나와 사배(四拜)하고 곡하여 보냈다.
9월 12일 무진
대여가 산릉(山陵)을 5리쯤 남겨놓고 왼쪽 긴 상여채가 부러져 양쪽 가로장대를 묶어 앞으로 나갔다. 총호사 조익(趙翼) 등이 보고하여 아뢰니, 정원에 하교하기를,
"그 대여의 긴 상여채는 필시 나무의 결에 흠이 있었을 것인데 신중히 가리지 않아 이렇게 된 것이다. 해당 낭청과 감조관(監造官) 및 목수(木手)를 아울러 잡아다 추고하라. 배행한 대장(大將) 역시 검칙하지 못한 죄가 있고, 도감 당상 역시 전혀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없으니, 아울러 추고하라."
하였는데, 그 후에 또 하교하기를,
"영여(靈輿)가 부러져 재궁을 놀라게 해 슬프고 두려운 마음이 아직도 가시지 않으니, 어찌 단지 낭청만 죄를 주겠는가. 국장 도감의 전후 당상관도 아울러 잡아다 추고하라."
하였다. 그리하여 원두표(元斗杓)·정세규(鄭世規)·한흥일(韓興一)·조경(趙絅) 등을 모두 하옥시켰다. 얼마 후 상이, 정상이 용서할 만하다 하여 모두 석방하고, 낭청 강유(姜瑜) 등만을 차등을 두어 도배(徒配)하였다.
9월 13일 기사
집의 송준길(宋浚吉)이 인피하기를,
"김자점(金自點)이 나라를 담당하고 마음대로 권력을 휘두른 지가 오래 되자 사대부로서 완고하고 우둔하며 이익을 좋아하는 자들이 휩쓸려 빌붙고도 달갑게 여기며 부끄러워할 줄을 모르니, 세도(世道)가 극도로 무너졌습니다. 새로 교화하는 처음에 만약 통렬히 격양하여 착함과 사특함을 구별하지 않으면 교화가 청명해질 리가 없고, 공론을 넓힐 수 없습니다. 한 때에 빌붙은 무리들을 비록 모두 규찰하여 적발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그 가운데서 드러난 이시만(李時萬)·이이존(李以存)·신면(申冕)·이지항(李之恒)·이해창(李海昌)·엄정구(嚴鼎耉)·황감(黃㦿) 등은 아첨으로 권문(權門)을 섬겨 추잡한 욕을 받아 선비의 품위를 더럽혔습니다. 또 이행진(李行進)·이시해(李時楷) 등은 훈재(勳宰)의 집을 드나들며 압객(押客)168) 이라 일컬어 사람들의 말이 많으니, 마땅히 경중을 분간하여 죄를 의논해서 나라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해 주고 조정의 더러움을 맑게 하는 것을 그만둘 수가 없습니다. 이에 간통을 발하여 의논하였더니, 동료들의 의논이 하나로 모아졌습니다. 그런데 유독 대사헌 김남중(金南重)만이 시종 어렵게 여겼습니다. 신은 하루 동안 직책에 있으면 하루의 책임을 다하여 성은에 만분의 일이나마 갚아야 마땅하겠기에 감히 몸을 아끼어 사(私)를 돌볼 계책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말이 믿음을 받지 못하였으니, 신을 체직하소서."
하였다. 대사헌 김남중이 인피하기를,
"아침에 집의 송준길이 발한 간통을 보았는데, 신의 생각에는 ‘김자점과 친한 사람들 가운데 어찌 그집을 드나들어 청의(淸議)가 비루하게 여기는 자가 없겠는가. 그러나 만약 자세히 구별하지 않고 일체로 모두 물리치면 지나칠 염려가 없지 않다. 원두표에 이르러서는 처음부터 당국(當國)할 세력이 없었고 또 정권(政權)을 잡은 권력도 없었으니 그가 교유함이 무슨 이로운 형세에 좇아 빌붙고 인물을 진퇴시켜서 붕당을 만들어 나라를 해치려 한 것이 있겠는가. 지금 평소 서로 친했다는 이유로 압객(押客)으로 지목하여 모두 죄를 논하려 하는 것이 실로 옳은지 모르겠다. 더군다나 지금 산릉(山陵)의 일을 다 마치지 못했으니 번거롭게 할 때가 아니다. 또 이런 논의가 한번 나오면 조정 사이에 조용하지 못할 단서가 없지 않다.’고 여겼습니다. 이에 진정시키기에 힘쓰고자 하여 몇 차례 왕복하면서 끝내 구차스레 함께 하지 않았습니다. 수석(首席)의 자리에 있으면서 말이 믿음을 받지 못해 이처럼 소란을 불렀습니다. 신을 체직하소서."
하였다. 지평 임중(任重), 장령 이상일(李尙逸) 역시 동료의 의논과 일치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인피하니, 답하기를,
"사직하지 말라."
하자, 송준길 등이 아울러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간원이 【대사간 김경여(金慶餘), 정언 오핵(吳翮)이다.】 아뢰기를,
"악인을 물리치고 선인을 격려하여 조정을 바로잡고자 한 송준길의 의논은 가상합니다. 대사헌이 진정시킨다는 핑계를 대어 억지로 부식(扶植)한 것은 구차스러운 듯합니다. 근실(謹悉)로 답하여 이견(異見)을 내지 않음에 있어서는 조만(早晩)의 차이는 있지만 대의(大意)는 같습니다. 청컨대 대사헌 김남중은 체차하고, 집의 송준길, 지평 임중, 장령 이상일은 출사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또 아뢰기를,
"선비의 수치로는 권문에 빌붙는 것보다 심한 것이 없고, 사대부의 수치는 염치를 잃는 것보다 더한 것이 없습니다. 전남 감사 이시만, 서산 군수(瑞山郡守) 이이존은 김자점의 권문에 물들어 청의에 버림을 받아 사람들 모두가 비루하게 여깁니다. 부호군 이지항(李之恒)은 그와 인척간이니 마땅히 스스로 삼가야 하는데도 안팎으로 논의하여 사람들의 말이 많습니다. 부호군 이해창(李海昌)과 전 집의 엄정구, 광주 부윤(廣州府尹) 황감(黃㦿)은 혹 자제들과 사귀기도 하고 혹은 가까운 이웃에 살면서 어두운 밤에 왕래하여 정분이 친밀하므로 여론이 자자하니, 한번 규핵하여 격양하는 일을 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부제학 신면(申冕)은 청의가 허여한 사람인데 권세있고 귀한 집안의 관곡한 대우를 입게 되자 거절하지 못해 여론이 많으니 그대로 그 직에 있게 할 수가 없습니다. 훈재(勳宰)에게 있어 명류(名流)는 취미가 저절로 서로 같지 않은데 예조 참의 이행진(李行進), 승지 이시해(李時楷) 등은 원두표의 집에 출입하며 압객이라 호칭하여 사람들의 말이 많습니다. 청컨대 이시만·이이존은 삭탈 관작하고 이지항은 파직하여 서용하지 말며, 이해창·엄정구·황감·신면·이행진·이시해는 모두 파직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모두 추고하라."
하였다.
헌부가 【집의 송준길, 장령 이상일, 지평 임중이다.】 아뢰기를,
"김자점이 나라를 혼미하게 하고 조정을 그르쳐 바야흐로 찬출하는 법을 논의하고 있으니, 그에게 빌붙어 일을 그르치고 남을 비방한 무리들은 대략 징치하여 조정을 맑게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시만·이이존·신면·이지항·이해창·엄정구·황감 등은 혹 아첨하고 빌붙어 친밀한 사이로 비루함을 돌아보지 않았고, 혹은 그에게 농락을 당하여 기세를 돕기도 하여 청의에 버림을 받고 선비들에게 욕을 끼쳤습니다. 새로 교화하는 이때에 만약 격양하는 거조가 없다면 교화가 청명하게 될 수 없고, 공론을 넓게 펼 수가 없습니다. 청컨대 아울러 사판에서 삭제하소서. 사대부의 몸가짐은 삼가지 않을 수 없고 훈재(勳宰)와 명류(名流)는 취향(趣向)이 저절로 구분되는 것입니다. 이행진·이시해 등은 원두표의 집에 출입하여 사람들의 평판이 아름답지 못한데도 태연히 여기고 부끄러워할 줄을 모르므로 식자들이 비루하게 여깁니다. 청컨대 아울러 파직하여 서용하지 마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지평 임중이 인피하기를,
"신은 이시만 등을 논핵하는 계사에 이미 동참하였습니다. 그런데 다시 밖의 의논을 들어보니, 황감은 비록 가까운 곳에 살고 있다고는 하나 실제로는 친밀하게 왕래한 자취가 없고 김자점에게 거슬림을 받은 사실을 사람들 모두가 알고 있다고 하며, 신면은 명위(名位)가 이미 높으니 어찌 그의 권세를 의지해 진출할 바탕을 삼았겠느냐라고 합니다.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억울하다고 일컬어 일을 논함에 사실을 잃었는데 어찌 감히 편하게 연계하겠습니까."
하고, 장령 이상일(李尙逸)은 인피하기를,
"임중이 황감과 신면을 위해 억울함을 송사하는 자와 같이 하는 것을 신은 실로 그 뜻을 알 수가 없습니다. 황감은 겉으로는 거스르는 것처럼 하면서 속으로는 투합하고 친밀하게 출입하므로 사람들 모두가 말을 전하고 있으며, 신면의 경우는 참외밭에서 신을 매는 일을 군자는 피해야 하는 법이니 사람들의 말 듣는 것을 어떻게 면할 수 있겠습니까. 동료의 논의가 준엄하게 나와 임중과 더불어 동참하였는데 임중이 인피하였으니 신이 어찌 자신이 옳다고 여겨 편하게 그대로 무릅쓰고 있겠습니까."
하고, 헌납 이천기(李天基)는 인피하기를,
"새로 발론한 것이 너무 급급한 듯합니다. 반우(返虞)가 멀지 않았으니 조용히 다시 의논한들 어찌 늦겠습니까. 어리석은 의견이 이러하여 모르는 체 묵묵히 따라 참여하기가 어려우니, 어찌 감히 언지(言地)에 무릅쓰고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집의 송준길은 인피하기를,
"임중의 인피하는 말 가운데 성대하게 황감·신면의 억울함을 일컬어 변명하는 바탕을 삼았으니, 신은 괴이쩍게 여깁니다. 황감이 이웃에 살면서 아첨하고 빌붙어 어두운 저녁이면 편복(便服)으로 출입하여 가깝게 지낸 정상을 사람들이 많이 보고 전했습니다. 김자점에게 거슬림을 받았다는 말은 처음 목행선(睦行善)의 상소에서 나왔으나, 행선 역시 스스로 잘못 들은 것이라고 추고하는 함사(緘辭)에서 갖추 진술하고 있습니다. 신면에 이르러서는, 원래 길사(吉士)가 아닌데다가 당원(黨援)을 맺기를 좋아해 조정의 권한을 흔들고자 행문(倖門)에 부탁하고 안팎으로 성세(聲勢)를 이루었습니다. 김홍욱(金弘郁)이 장차 김자점을 논하려 하자 극력 늦추려 하였으나 성공치 못하였고, 공의가 이미 발한 후에는 갖가지로 선동하고 시비를 현란시켜 비단 정성껏 섬기는 정도만이 아니었으니, 이는 대개 그들과 함께 패할까 염려해서였습니다. 임중 역시 이미 듣고서 함께 발론하였다가 며칠 사이에 그 정절을 바꿔 도리어 구해(救解)할 계책을 하였으며, 밖에 있는 여러 동료들은 머뭇거리며 관망하면서 회피하고자 하는 뜻이 현저했습니다. 세도(世道)가 이에 이르렀으니 참으로 개탄스럽습니다. 신은 이미 동료에게 제재를 받았으니, 어찌 감히 마음 편하게 직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정언 심세정(沈世鼎)은 인피하기를,
"신이 본원(本院)의 전계(前啓)를 전하려고 대청(臺廳)으로 갔다가 이천기가 인피하는 말에 ‘반우하기 전에 급급히 논계함은 잘못이다.’라고 한 것을 보았습니다. 신이 이미 이 논의에 참여하였는데 어찌 감히 마음 편하게 동료를 처치하겠습니까."
하고, 장령 윤성(尹珹)은 인피하기를,
"이지항·신면은 작위가 이미 높은데 어찌 의지하여 진출하기를 구한 일이 있었겠습니까. 이행진(李行進)과 원두표는 본래 어려서부터 친구사이이니 한 번씩 왕래하는 것은 이치상 당연합니다. 그것 때문에 죄를 준다면 너무 심하지 않겠습니까. 황감은 김자점과 형세가 아주 다르고, 심지어 사는 곳이 너무 가깝다 하여 항상 이사하여 피하고자 하였으니 더럽게 여긴 뜻을 끝내 볼 수가 있습니다. 신이 들은 바는 동료들과 다름이 있으니, 감히 구차스레 함께 할 수 없습니다."
하고, 지평 홍수(洪鐩)는 인피하기를,
"김자점과 원두표는 경상(卿相)의 지위에 있으며 이시만(李時萬) 등과는 조정에서 같이 일한 지 이미 오래 되어 안면이 익숙하니 왕래하며 서로 사이좋게 지내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어찌 반드시 구별하여 지목해서 상중에 번거롭게 하기까지 합니까. 신이 구차스레 함께 하지 못함은 이 때문입니다."
하고, 대사간 김경여(金慶餘)는 인피하기를,
"임중이, 신면과 황감은 너무 억울하다고 한 말은 어찌 그리도 신이 들은 바와 다릅니까. ‘황 참의(黃參議)는 어두운 밤에 왕래하고 편복(便服)으로 출입하며, 신 참의(申參議)는 경솔하게 부화뇌동하기를 좋아하고 분주하게 구해(救解)한다.’고 사람마다 말하는데, 임중 역시 지목한 가운데 들어있는데도 듣지 못했단 말입니까. 대간이 논하는 바는 한결같이 공의를 따라야 하는데, 이제 중한 배척을 받았으니 편안하게 있기 어려운 형세입니다."
하고, 정언 오핵은 인피하기를,
"신은 이미 논의에 참여했으니 어찌 다른 말이 있겠습니까. 여러 동료들이 모두 인피하여 감히 편안하게 있을 수 없으니, 신을 체직하여 주소서."
하니, 답하기를,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모두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옥당(玉堂)이 【교리 유계(兪棨), 부교리 정두경(鄭斗卿), 부수찬 홍처대(洪處大)이다.】 차자를 올리기를,
"대각(臺閣)의 규핵은 풍문에서 나오니 들은 바에 경중(輕重)이 같지 않은 것은 형세가 본디 그런 것입니다. 상량하여 확정할 때에 구차하게 의견을 같이 할 필요는 없지만, 이미 참여하여 함께 의논했다가 문득 구해하면서 눈치를 보며 머뭇거리어 논의를 이루지 못했습니다. 새로 교화하는 이때에는 격양함이 급하니, 들은 대로 규찰해 적발하는 것은 실로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입니다. 동료의 의논이 모순되는 것에 대해서는 저절로 그 허물을 질 자가 있게 마련입니다. 분분한 말은 더불어 따질 만한 것이 못 되고, 조용히 다시 의논해야 한다는 설은 실로 구차스러우니 논의가 준엄하게 일어나는 즈음에 일을 피한다는 혐의를 면할 수 없습니다. 전계(前啓)를 전하고자 하였고 처음부터 다른 의견이 없었으며 자신이 잘못한 바가 없으니 무슨 피할 만한 혐의가 있겠습니까. 시비하는 사이에 참으로 들은 바가 있으면 곧바로 자기의 의견을 진술하는 것이 무슨 손상되는 바가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변명을 너무 번거롭게 하였으니, 매우 대각의 체통을 잃은 것입니다. 이미 신계(新啓)를 공론(公論)이라 하였다가 또 논계한 것을 지목하여 그르다고 하였습니다. 세운 뜻이 무상하고 하는 말이 두리뭉실하며, 때가 아니라고 칭탁했으니 잘못이 상대방에게 있습니다. 청컨대 임중·이천기·윤성·홍수는 체차하고, 이상일·심세정·송준길·김경여·오핵은 출사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지평 이수인(李壽仁)이 인피하기를,
"집의 송준길은 산림에서 독서한 사람으로서 여러 사람들의 비난도 꺼려하지 않고 예리한 뜻으로 감언(敢言)하고 일을 따라 규핵하니 그 뜻은 가상합니다. 그러나 법을 적용하는 즈음에 말의 기세가 너무 예리하고 구분없이 일체로 논죄하니, 신은 오늘날 근본을 바로잡는 도리가 아니라고 여겨집니다. 오늘날의 계책으로는 마땅히 먼저 임금을 바르게 하는 것을 제일의 급선무로 삼아야 합니다. 지성으로 간절하게 하고 재삼 반복하여 임금의 마음이 온화해지게 하고 정의(情意)가 미덥게 한 연후에야 아는 것을 모두 말해야 합니다. 이것은 생각하지 않고 한갓 격양(激揚)하기만 힘써 논의가 날로 격해지니, 신은 실로 알 수 없습니다. 신의 의견은 그와 서로 어긋나 구차스레 함께 할 수 없으니, 신을 체직하여 주소서."
하니, 답하기를,
"사직하지 말라."
하였는데,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헌부가 【지평(持平) 김시진(金始振)이다.】 아뢰기를,
"임금을 바루는 것과 일을 말하는 것은 처음부터 두 가지 이치가 아닙니다. 이미 대간의 자리에 있으면서 일이 있는데도 말을 하지 않으면서 ‘나는 아직 임금의 마음을 바루지 못하였다.’고 한다면 옳겠습니까. 억지로 인피하면서 조어가 구차하였으니, 이수인을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양사가 이시만(李時萬) 등을 논핵하기를 한 달이 넘도록 그치지 않으니, 비로소 파직을 명하였다. 얼마 후 장령 임성익(林聖翊)이 혼자 나아가 정계(停啓)하니, 정언 정승명(鄭承明) 역시 정계하였다.
9월 14일 경오
상이 현궁(玄宮)을 내리는 날에 친히 산릉(山陵)에 가고자 하였는데, 여러 신하들이 힘껏 가지 말기를 청하니, 상이 억지로 따랐다. 이에 앞서 예조가 아뢰기를,
"재궁(梓宮)을 발인할 때 전하께서 연(輦)을 타고 시종하는 것이 《오례의(五禮儀)》에 실려 있으나 선조조(宣祖朝) 이후로는 이 예를 행하였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일찍이 인목 왕후(仁穆王后)와 인헌 왕후(仁獻王后)의 상에 대행 대왕께서도 역시 행하지 않으셨는데, 대개 때에는 고금의 다름이 있고, 지역에는 원근의 구별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번의 장릉(長陵)169) 은 거리가 몹시 멀고, 또 발인에서부터 현궁을 내릴 때까지 날짜가 거의 열흘이 걸리니, 결코 그대로 시종하는 예를 행해서는 안 됩니다."
하니, 답하기를,
"일은 비록 그러하나 예문(禮文)의 뜻 역시 범연한 것은 아니다. 한번 놓치면 후회해도 소용없으니, 다시 의논하여 처리하라."
하였다. 예조가 대신과 의논하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좌의정 이경석, 영돈녕부사 김상헌이 의논드리기를,
"청컨대 발인할 때에 교외에서 곡송(哭送)하고, 현궁을 내리는 날 친히 산릉에 가시어 지극한 정을 펴소서."
하니, 상이 다시 대신과 의논하게 하였는데, 대신의 의견도 모두 앞의 의논과 같으므로 상이 따랐었다. 이때에 이르러 여러 사람들의 뜻이 모두 상의 슬픔이 너무 심하여 병이 난 지 여러 날임을 걱정하여, 정원·양사·옥당이 산릉의 행차를 중지하기를 청하여 합사해 힘껏 다투고, 대신이 2품 이상을 거느리고 굳이 청하여 마지않으니, 상이 하교하기를,
"경들의 말이 이에 이른 것은 나의 병을 위해서가 아니라 종사를 위하고 기민(畿民)을 위한 것이니, 지극한 정을 억제하고 여러 사람의 뜻을 억지로나마 따르겠다. 단지 통곡할 뿐이다."
하였다.
9월 15일 신미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상이 망곡례를 행하였다.
9월 16일 임신
특별히 경기의 부미(賦米)를 감하였다. 이때 산릉(山陵)의 역사가 겨우 완성되었는데 객사(客使)가 잇따라 이르러 경기 백성들의 역(役)이 다른 도에 비해 배나 되었고, 또 흉년을 만났기 때문에 이런 명이 있게 된 것이다.
9월 17일 계유
이기조(李基祚)를 대사헌으로 삼았다.
9월 18일 갑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조경(趙絅)을 지의금 부사로, 김중일(金重鎰)을 장령으로, 김시진(金始振)·이수인(李壽仁)을 지평으로, 홍처량(洪處亮)을 헌납으로 삼았다.
함경 감사 이후원(李厚源)이, 갑산 부사 이익선(李益善)은 고을살이를 형편없이 한다는 이유로 파출할 것을 계문하니, 하교하였다.
"먼 변방의 곤궁한 백성에게 무슨 죄가 있는가. 이처럼 완악하고 사나운 관리는 파출에 그쳐서는 안 되니, 잡아다 국문하여 처리하라."
9월 19일 을해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9월 20일 병자
장릉(長陵)에 장례(葬禮)하였다. 오시(五時)에 현궁을 내리고 유시(酉時)에 산릉에서 초우제(初虞祭)를 지냈다. 상이 망곡(望哭)을 의례(儀禮)대로 하고 승지를 보내 산릉에 문안하게 하였다. 정원이 전에는 이런 예가 없었다고 아뢰었으나, 상이 특별히 가도록 하였다.
9월 21일 정축
축시(丑時)에 산릉에서 재우제(再虞祭)를 행하였다. 상이 의례대로 망곡하였다.
반우(返虞)하니, 상이 교외에서 맞이하였다. 배행(陪行)하여 영사전(永思殿)에 이르러 별전(別奠)을 행하였다.
9월 23일 기묘
상이 영사전에서 삼우제(三虞祭)를 행하였다.
9월 24일 경진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9월 25일 신사
상이 영사전에서 사우제(四虞祭)를 행하였다.
김육을 사은사 겸 동지 정조 정사로, 김경여(金慶餘)를 승지로, 조수익(趙壽益)을 대사간으로, 권우(權堣)를 지평으로, 심지한(沈之漢)을 교리로, 윤집(尹鏶)을 부수찬으로, 기진흥(奇震興)을 광주 부윤(廣州府尹)으로 삼았다.
옥당이 【교리 유계(兪棨)·조복양(趙復陽), 수찬 장차주(張次周)·홍처대(洪處大)이다.】 상차하기를,
"천도(天道)가 운행하여 만물이 각기 그 본성을 이루어 막히거나 꺾이는 해가 없으며, 말을 하지 않아도 믿고 노하지 않아도 위엄이 있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천지의 물체됨이 한결같고 희로의 자취가 없어서입니다. 만약 천도에 희로의 자취가 있어 재빨리 물체에 가한다면 모든 천지 사이에 사는 것은 장차 놀라서 도망하고 전도되고 질서를 잃어 그 삶을 이루지 못한 지 오래일 것입니다. 왕자(王者)의 도리는 하늘과 같은데 다만 말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참으로 혹 말을 하는 사이에 조금이라도 불평스런 기운이 있다면 대체(大體)를 손상하고 품물(品物)을 뒤흔드는 걱정이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 임금은 한 몸으로 하늘을 대신하여 만 물을 다스리니, 비록 총명함이 뛰어나더라도 조화를 도와 사물을 이루는 데에는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옛날의 성왕(聖王)은 모두가 두루 듣고 널리 물어 꼴 베는 사람의 말이라도 반드시 가려 썼고 광망(狂妄)한 자도 죄를 주지 않았으니, 참으로 이렇게 하지 않으면 천하의 선인(善人)을 오게 할 수 없어서였습니다.
전하께서 즉위하신 이래로 비록 상을 당하시어 거상(居喪) 하시는 중에도 먼저 언로를 열어 물이 흐르듯 청납하시니, 순임금의 밝은 눈과 밝은 귀도 이보다 더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에 나라 안 사방이 기뻐하고 고무되어 너나 할것없이 하찮은 성의라도 바치고 숨김없이 다 진달하여 답지한 상소가 공거(公車)에 끊이지 않고 있으니, 그 사이에 어찌 채납할 만한 것이 한둘은 없겠습니까. 하진(河溍)의 소장에도 역시 볼 만한 것이 있는데 단지 촉범(觸犯)함이 있다는 이유로 싫어하고 미워하는 뜻을 드러나게 보이셨습니다. 여작(呂焯)·이회보(李回寶) 등의 상소에 이르러서는 비록 매우 광망하다고 하겠으나 성상의 비답이 너무 엄준하였고, 심지어 정원으로 하여금 불러서 사주한 사람을 묻게까지 했습니다. 대저 신하와 임금은 그 존비가 아주 달라 지극히 낮은 신하로서 지극히 존귀한 임금에게 기력을 내어 거슬리는 말을 하기란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러니 임금이 말을 하도록 장려하고 이치에 맞지 않은 말을 해도 그냥 두어야 하는데, 말이 이치에 맞지 않는다 하여 지나치게 노하시었으며, 심지어 노하여 마지않으면서 의심해 불러 물으셨으니, 어찌 매우 미안하지 않으며, 그런 조짐이 커가는 것을 크게 우려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대저 올빼미 둥지가 뒤집히면 봉황새가 떠나고, 죽은 뼈를 물리치면 좋은 말[馬]이 이르지 않는 법입니다. 신들은 언로가 막히는 것이 이로 말미암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이어서 정원에 내린 비답에 ‘나로 하여금 수족을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자 한다.’라고 하교하셨고, 합계(合啓)에 답하신 말 가운데는 또 ‘간사한 자가 나라를 어지럽힌다.’라는 말씀까지 있어 신들은 서로 바라보며 놀라 더욱 실망하였습니다. 어찌 성명(聖明)하신 전하께서 이처럼 불평(不平)한 하교를 하십니까. 《예기(禮記)》에 이르기를 ‘가까이 있으면서 간(諫)하지 않으면 시열(尸列)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정원은 가까운 곳에 있다 할 수 있으니, 일이 혹 미안하면 쟁집(爭執)하는 것이 직책입니다. 전하께서 지금의 사대부가 예리함이 없고 연약하여 활기가 없는 것이 풍조를 이루고 있는 것을 보셨다면 격려하고 권면하기에 겨를이 없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이와 같은 하교가 계시니 어찌 전하께서는 한 세상을 쏠리게 하여 오직 전하에게 순순히 따르게만 하고자 하신단 말입니까. 신들은 실로 미혹됨이 없을 수 없습니다.
합계(合啓)의 말에 이르러서는 과격한 점이 있었지만 성상의 마음을 감동시키기에 급급하여 너무 지나침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옛날 사람 중에 걸(桀)·주(紂)와 환(桓)·영(靈) 으로 군상(君上)을 지척(指斥)한 자가 있었으나 당시 임금은 죄를 주지 않았으므로 후세에서 미담으로 일컫습니다. 더군다나 언관이 한 탐오한 재상을 논핵하면서 말을 만드는 사이에 비록 비의(比擬)함을 자세하게 못하였지만 어찌 이로써 갑자기 이러한 엄지(嚴旨)를 내리십니까. 대저 언행이란 천지를 움직이는 요인입니다. 왕의 말은 실과 같으나 그 효과는 동아줄과 같으니, 천하의 대정(大政)이 발하는 데 관계된 바가 매우 중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易)》에 이르기를 ‘군자(君子)가 방안에 있으면서 말을 선하게 내면 천리 밖에서 응하고, 선하지 못하게 내면 천리 밖에서도 어긴다.’라고 하였습니다. 대저 전후로 엄지를 내리시자 사대부들 사이에 모두 놀라고 두려워하며 마음을 상실하여, 지사(志士)는 멀리 갈 생각을 하고 범부(凡夫)는 구차히 면할 계획을 하고 있으니, 이것이 어찌 조정의 복이겠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성명께서는 통렬히 성찰을 가하시어 분명한 교유를 보이시어 여러 아랫사람들로 하여금 모두 전하께서 풍뢰(風雷)처럼 빨리 고치시고 일월(日月)처럼 새롭게 되셨음을 알게 하소서. 그러면 성덕의 빛남이 실로 허물이 없던 처음보다 나을 것입니다.
또 전하께서 왕위를 이으신 처음에 유일(遺逸)을 불러 모두 조정에 두고 공경하는 정성이 말씀 가운데 넘치시니, 중외에서 눈을 닦고 삼대(三代)의 성한 아름다움을 보기를 기대했었습니다. 대저 성인(聖人)의 끊임없는 지성은 반드시 조금의 간단(間斷)도 없으셨을 것이나 걱정하는 사람들의 의논이 혹 전하께서 선비를 대우하심에 장차 처음의 뜻을 잇지 못해 예전에 진출했던 선비들이 지금은 없다는 탄식이 있을까 염려하고 있으니 아, 어찌 그렇기야 하겠습니까. 산야(山野)의 사람들은 으레 세속 사람과 맞지 않아서 나오기를 어렵게 여기고 물러가기는 쉽게 하는 것이 바로 그들이 평소 지키는 바입니다. 전하의 성명하심으로는 애당초 전부터 모르시지 않았을 터인데 왜 지금은 그렇지 않으십니까. 속론(俗論)이 들끓고 청의(淸議)가 사그라진 오늘날을 당해서는 뜻을 두어 배양하고 그 기(氣)를 오래 길러서, 꺾이고 막히며 이산(離散)되는 데에 이르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만약 일을 말한 것이 한번 성상의 마음에 맞지 않는다 하여 조정에서 용납되지 않아 낭패하여 가버린다면 단지 이런 거조는 세도(世道)와 크게 관계될 뿐만 아니라 지금은 인산(因山)을 이미 마치고 정화(政化)를 새로이 시작하여야 하는데, 한때의 원로(元老)와 유림(儒林)의 표본인 신하들이 혹 장차 서로 잇달아 물러가기를 빌어 속세에서 은둔하려는 생각을 품게 되면 전하께서는 그 누구와 함께 나라를 다스리겠습니까. 전하께서는 마땅히 더욱 성심(誠心)을 여시고 애써 머물라고 유시하시며 현준한 인물을 거두어 모아 조정에 늘어 세워야 합니다. 그러면 시끄러움이 진정되고 기강이 정돈되어 국가가 그 경사를 힘입게 될 것이니, 성명께서는 유의하소서.
송시열(宋時烈)은 서적에 밝고 고인(古人)에 마음을 두었는데 오직 그의 강개한 성품이 너무 지나치게 결단하는 잘못을 면치 못하였으며 그날 지레 돌아간 것 역시 그 의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야흐로 스스로 인책하면서 감히 무릅쓰고 머물러 있지 못하고, 또 어미의 병 때문에 상소하여 사직을 빌었으니, 그 형세가 참으로 급박하고 그 정상 역시 애처롭습니다. 마침 계인(啓靷)하는 처음을 당하여 우선 그 상소를 돌려주게 하였는데, 시열이 성밖에서 엎드려 명을 기다린 지 열흘이 지나도록 황송하고 낭패하며 진퇴할 바를 모르고 있습니다. 전하께서 만약 시열을 쓸 수 없다고 여기신다면 우선 물러가도록 허락하여 늙은 어미를 봉양하고 독서(讀書)하여 뜻을 구하게 해서 후일 쓰이기를 기다리는 것도 불가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만약 종적(踪迹)을 전패(顚沛)하게 하고 진퇴유곡이 되게 하여 혹 뒷사람들의 경계가 되게 하면 관계된 바가 어찌 적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일찍 결정을 내리시어 여러 아랫사람들의 의혹을 풀어주시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삼가 보건대 요즈음 위 아래 사이가 막히는 조짐이 있습니다. 만약 이로 인해 점차 확대되어 조금이라도 좋은 기회를 잃게 되면 어찌 천고의 지극한 한이 되지 않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말이 참으로 음미할 만하다. 옥당에 있는 신하의 충심껏 하는 말이 없다면 내가 어떻게 허물을 알겠는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확연히 깨달아서 바야흐로 자신을 책하고 반성해 마지않고 있다. 나에게 부끄러운 마음이 있지 여러 관원에게는 잘못이 없다. 더군다나 송시열의 일은 어찌 그럴 리가 있겠는가. 혼미한 가운데 다만 살피지 못한 것일 뿐인데, 그대들의 말이 없었더라면 의심하는 탄식을 부를 뻔하였다. 이 때문에 상하의 정이 통하는 것을 귀하게 여기는 것이다."
하였다.
진선(進善) 송시열이 상소하기를,
"세월이 빨리 흘러 용순(龍輴)170) 이 먼 곳으로 떠나시니 슬픔이 오정(五情)을 꿰어 부르짖고 사모해도 미칠 수가 없습니다. 신은 늙은 어미가 있는데 요즈음 한질(寒疾)에 걸리어 날로 점점 심해가니 부모의 은혜를 갚으려는 사정(私情)에 차마 갑자기 떠날 수가 없어 대행왕의 제단이 장차 오르려 할 때에야 비로소 바삐 달려 왔으니, 회피하고 게을리한 죄가 이에 이르러 더욱 큽니다. 또 신이 전일 돌아간 것은 단지 하찮은 필부의 뜻을 지키고자 했던 것이지 어찌 도피할 수 없는 분의(分義)를 잊었겠습니까. 그러나 형적이 지나쳤고 일이 전에 없었던 것인 만큼 시의(時議)가 시끄러운 것은 진실로 마땅합니다. 스스로 헤아리기를, 영원히 산골짜기에 버려져서 농부가 되어 문을 닫고 허물을 반성하면서 어미를 봉양하고 독서하며 성화(聖化)의 여파에 젖고자 하였는데, 뜻밖에도 성상의 은혜가 더욱 융숭하여 벼슬을 더 가하고 부르셨으므로, 신은 참으로 황공하여 진퇴할 바를 몰랐습니다. 그러나 일에는 때가 있어 원근에서 분상하고 있어 무릅쓰고 나온다는 혐의를 돌아볼 겨를이 없었기 때문에 꾹 참고 올라와 신자(臣子)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털어 놓았으니, 망망한 천지에 원통함이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 신이 어제 삼가 전하께서 어린아이처럼 통곡하는 것을 보고 차마 들을 수가 없어 몰래 길 옆에 엎드려 피눈물을 쏟았습니다. 곧이어 삼가 생각하기를, 모든 사람의 자식된 자는 반드시 어버이는 다시 모실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해야 하니, 한번 봉양함을 놓치면 뒤늦게 통곡해도 무슨 보탬이 있겠는가라고 여겼습니다. 하물며 신의 어미는 이미 70세를 넘어 특히 쇠약함이 심한데 세월이 흐르는 물처럼 빠르니 남은 날이 며칠이나 되겠습니까. 서쪽 해를 바라보면 매번 놀랍고 두렵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신의 간절한 정상을 헤아리시고 특별히 체직을 허락하시어 사사로운 정을 펴게 하소서. 그렇게 하면 비단 효리(孝理)가 두루 미칠 뿐만 아니라 한 필부가 유감이 없게 될 것이어서 조정에서 염치를 배양하는 뜻에도 조금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소장을 살펴보니 매우 서운하다. 힘써 겸퇴(謙退)하는 뜻이 한결같이 어찌 이에 이르렀는가? 지난날 돌아간 것은 과단성 있는 기풍이어서 내가 높이 생각하는 바인데 쓸데없는 속설(俗說)을 어찌 마음에 두는가. 나의 오늘날 마음으로는 애닯은 사정(私情)을 비록 억지로 말릴 수는 없으나, 잠시 머물러 한번 서로 만나고 물러가면 안 되겠는가? 오직 자세히 살펴 처리하기 바란다."
하였다.
9월 27일 계미
상이 영사전(永思殿)에서 오우제(五虞祭)를 행하였다.
9월 29일 을유
상이 영사전에서 육우제를 행하였다.
민응협(閔應協)을 승지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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