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효종실록2권, 효종 즉위년 1649년 11월

싸라리리 2025. 12. 20. 0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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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일 병진

상이 영사전(永思殿)에서 삭제(朔祭)를 거행하였다.

 

사은사 인흥군(仁興君) 이영(李瑛), 부사 이시방(李時昉), 서장관 강여재(姜與載)가 북경에 갔다.

 

11월 2일 정사

상이 주강에 나아가 《중용(中庸)》 수장(首章)을 강하였다. 강을 마치자 특진관 윤이지(尹履之)가 아뢰기를,
"북사(北使)182)  가 송경(松京)에 돌아와 말한 바가 있다고 하는데 【청나라 사신이 송도에 도착하여 정명수(鄭命壽)가 "명년 봄에 각로(閣老)가 나와 이 나라를 진정(鎭定)한다."라는 등의 말을 했기 때문이다.】  반사(伴使)가 즉시 계문하지 않았으므로, 일의 긴급 여부는 비록 알 수 없으나 밖의 의논이 모두 먼저 변석해야 한다고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떻게 해명해야 하는가?"
하니, 동지경연 임담(林墰)이 아뢰기를,
"헛말이거나 사실이거나 간에 그가 이미 말을 하였으니 강을 건너기 전에 변석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말한 것 이외에 또 의주(義州)에서 10일 동안 묵겠다는 말이 있으니, 필시 기다리는 것이 있어서 그런 것이다. 정명수의 말이 비록 이와 같으나 여러 사신이 반드시 모두 아는 것은 아니다. 이후에 일이 있고 없고는 오직 정명수에게 달렸는데, 그가 뇌물을 요구하는 뜻이 없으니 먼저 주기도 어렵다. 또 지레 먼저 사신을 보내는 것도 이를 인해 야기시킬 염려가 없지 않다."
하니, 임담이 아뢰기를,
"상의 분부처럼 참으로 그렇습니다."
하였다. 참찬관 김익희(金益熙)가 아뢰기를,
"새로 즉위한 처음이어서 저들이 반드시 의심하고 염려할텐데 신이 고부사(告訃使) 홍주원(洪柱元)의 말을 들으니 우리 나라 경계에 들어오면서부터 곳곳에서 척화(斥和)하는 말을 들었다고 합니다. 저들이 만약 이러한 말을 듣는다면 장차 우리 나라를 의심할 것이니, 때에 미쳐 의문을 풀어 주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정명수의 말은 아주 농담에 가까운데 사람을 보내 즉시 묻는 것은 너무 갑작스러운 듯하다. 조정에서 또 잘못한 바가 없으니, 어찌 반드시 먼저 겁을 내어 저들의 의심을 더하겠는가. 그러나 저들이 의심하는 단서를 약간 보이고 오랫동안 우리 나라 국경에 머무는 것은 어떻게 되어가는가를 보려는 것인 듯하다. 내일 마땅히 대신과 더불어 의논해 처리하라."
하자, 김익희가 아뢰기를,
"상께서 현재 상중(喪中)에 계시므로 사욕(私慾)은 사라지고 선단(善端)이 발현되고 있습니다. 만약 이때를 놓치면 후에는 학문을 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또 신이 일찍이 듣건대, 전례에는 여섯 승지가 각기 공사(公事)를 갖고 친히 품주(稟奏)하여 행하였으며, 국기일(國忌日)에는 주상께서도 역시 천담복(淺淡服)으로 시사청(視事廳)에 나아갔다고 하니, 고제(古制)가 참으로 준행할 만합니다. 또 신이 선조(先朝) 때 경연을 열던 날에 보았는데 대간이 아뢸 일이 있으면 혹 들어와 아뢰도록 명하였으니, 이 역시 본받을 만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연을 연 지 이미 오래인데 아직껏 대신을 보지 못하였다. 임금과 신하가 만나는데 어찌 정해진 규례가 있겠는가. 나는 대신과 대간으로 하여금 모두 경연에 참여하도록 하고자 한다. 드물게 만나본다면 정이 어디서 생기겠는가."
하고, 인하여 묻기를,
"지난번 용인(龍仁)의 조광조 서원(書院)에 사액(賜額)하기를 청한 소를 보건대, 미처 거행하지 못했다는 말이 있었는데, 무슨 폐단이 있어 그런지 모르겠다."
하니, 익희가 대답하기를,
"무슨 폐단이 있겠습니까. 다만 겨를이 없었던 것입니다. 근래에 파산 서원(坡山書院)에서도 역시 사액을 청한 일이 있었으니, 일체로 사액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고, 인하여 우리 나라 학문의 연원을 언급하고, 또 성혼(成渾)이 무함을 입은 곡절을 진달하니, 상이 이르기를,
"다른 일은 속일 수 있지만 사는 곳의 멀고 가까움을 어찌 속일 수 있겠는가."
하니, 익희가 아뢰기를,
"간사한 사람이 현혹시키는 것이 대부분 이렇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성혼과 이이 두 사람은 비록 종사(從祀)하지는 못하더라도 서원의 청액(請額)이 어찌하여 지금까지 지체되었는가?"
하고, 또 묻기를,
"자운 서원(紫雲書院)은 어느 곳에 있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바로 파산(坡山)에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청송(聽松)은 누구의 서원 이름인가?"
하니, 대답하기를,
"이는 성수침(成守琛)의 당호(堂號)로, 서원이 아닙니다."
하였다.

 

11월 3일 무오

상이 대신 및 비국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대신에게 묻기를,
"윤이지(尹履之) 등이 경연에서 진달한 정명수(鄭命壽)가 했다는 말에 대해 여러 사람의 의논이 모두 ‘마땅히 북사(北使)가 우리 나라 국경에 있는 날 먼저 변석해야 한다.’라고 하는데, 이해(利害)가 어떠한지 모르겠다."
하니, 영의정 이경석(李景奭)이 대답하기를,
"근래에 평안 감사(平安監司) 허적(許積)의 서장을 보건대, 저들이 매양 우리 나라에서 후대한다고 말한다고 하였으니, 만약 우리를 의심하는 뜻이 있다면 어찌 이런 말을 했겠습니까. 지금은 우선 그냥 두었다가 저들이 물어온 연후에 변석해도 늦지 않습니다."
하니, 상이 그렇겠다고 하였다.

 

11월 4일 기미

정인경(鄭麟卿)을 지평으로, 이홍연(李弘淵)을 장령으로, 이정기(李夔廷)·홍처대(洪處大)를 정언으로, 김응조(金應祖)를 보덕으로, 홍처량(洪處亮)을 겸사서(兼司書)로, 원숙(元䎘)을 통제사(統制使)로 삼았다.

 

갑산 부사(甲山府使) 유심(柳籌)이 사조(辭朝)하니, 상이 불러 보고 유시하기를,
"북쪽 변방이 난리를 겪은 후 세월이 이미 오래 지났다. 그대는 전 부사가 다스리지 못한 것을 핑계대지 말고 더욱 마음을 다하라."
하니, 유심이 아뢰기를,
"신은 비록 급암(汲黯)처럼 훌륭하지는 못하나 급암처럼 병이 있으니, 가면 돌아오지 못할 듯싶습니다."
하니, 상이 승지를 돌아보며 이르기를,
"이 사람의 병이 얼마나 심한지 모르겠다만 기피하는 빛이 뚜렷하다. 추고하라."
하였다.

 

상이 주강에 나아가 《중용(中庸)》 제 5장을 강하였다.

 

영돈녕부사 김상헌이 상차하기를,
"삼가 듣건대, 근일에 사람들의 말이 자자하여 모두 전조(銓曹)에서 사람을 쓰는 것이 공의(公義)에 맞지 않는다고 하며, 심지어 탄핵장에 발하기까지 하였다 하니, 전조의 관원이 된 자가 어찌 스스로 편안할 수가 있겠습니까. 전조의 장관은 평소에 충실하고 염간하다고 일컬어진 것을 온 조정이 다 알고 있으니, 반드시 뇌물이나 청탁을 받은 잘못은 없을 것입니다. 다만 분별력이 없어서 지나치게 남의 말을 믿다가 이에 이르렀으니, 그 정상은 용서할 만하나 잘못을 덮어두기는 어렵습니다. 일찌감치 처리하여 사로(仕路)를 맑게 하소서.
또 신이 일찍이 장법(贓法)을 엄히 해야 한다고 말씀드렸는데, 열흘도 못 되어 갑자기 김여수(金汝水)를 정배(定配)하라는 명을 내렸고, 정관(政官)은 또 전 병사(兵使) 안철(安澈)을 총관(摠管)에 의망하여 비점(批點)을 받기까지 하여 탐오하고 잘 섬기는 자를 권장했습니다. 이로써 보건대 청렴한 관리는 귀한 대접을 받지 못하고 탐욕스런 관리만 숭상받고 있는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김여수는 그가 일찍이 북도(北道)에 있으면서 치적(治績)을 남겼기 때문에 그렇게 처리한 것인데, 경의 말이 이에 이르렀으니, 마땅히 해부(該府)로 하여금 법에 의해 처리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11월 5일 경신

상이 주강에 나아가 《중용(中庸)》 제 6장부터 제 8장까지를 강하였다. 송준길(宋浚吉)이 나아와 아뢰기를,
"반정(反正)했던 초기에 민심이 기뻐하면서 크게 다스림을 보리라고 기대했는데 불행하게도 연달아 변란을 만나게 되어 선대왕(先大王)께서 크게 다스려 보려는 뜻이 끝내 펴지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전하께서 《중용(中庸)》을 강하고 계시니 계지술사(繼志述事)183)   역시 하나의 큰 효도입니다. 참으로 이 때를 놓치면 여러 신하들이 실망할 것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전하께서 다스리는 데에 있어서 반드시 삼대(三代)에서 구하실 것이 아니라 마땅히 계해년184)  의 초기를 법으로 삼으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마음은 삼대의 정치를 따르고 싶다만 해내지 못할 듯싶다."
하였다. 강이 끝나자 제사(諸司)의 윤대관을 소견하였다.

 

무고(誣告)한 죄인 이빈(李彬)이 복주되었다. 이빈이 ‘권관(權管) 최천일(崔千一)과 출신(出身) 최백일(崔百一)이 일찍이 심기원(沈器遠)이 반역했을 때 그 모의에 동참하였다.’고 글을 올려 고해서 금부로 하여금 국문하게 하였는데 일이 사실이 아니어서 이빈이 복주된 것이다.

 

영돈녕부사 김상헌이 상차하기를,
"천재(天災)가 거듭 발생하고 변방 방비가 허술한 데가 많으니 오늘날의 일이 매우 염려됩니다. 신이 삼가 듣건대 요사이 무신(武臣)에 참여 되었으나 활을 쏠 줄 모르는 자가 아주 많고, 이름은 포적(砲籍)에 있으나 화약(火藥)도 장진할 줄을 모르는 자가 전부라고 하니, 평소에도 이와 같다면 급한 일에 임했을 때 어떻게 쓰겠습니까. 침착하게 기미를 알고 독특한 지혜를 가진 군사는 항오 사이에 매몰되고 말을 교묘히 하고 헐뜯기를 잘하는 무리만 매양 남보다 먼저 진출하게 되니 재주 높은 자가 진출하지 못하고 강직한 자가 한을 품는 것이 당연합니다. 신은 평소 여러 무신(武臣)들과 서로 소원하였고 늙어서 견문 역시 끊어져 한 사람의 간성(干城) 재목을 천거하거나 웅호(熊虎)같은 장수도 뽑지 못하였습니다. 전하께서 시험삼아 문무 대신으로 하여금 각기 지용(智勇)을 겸비한 사람을 천거하게 하고, 겸해서 자신을 천거하는 것도 허락하여 그들의 장기를 시험하소서. 만약 모략(謀略)이 뛰어나거나 여력(膂力)이 월등하거나 기예(技藝)가 우수한 자를 발탁해서 현임(顯任)에 제수하여 격려하는 거조를 보이되, 문지(門地)의 고하와 용모의 장약(壯弱)을 따지지 말고 오직 사람을 얻기에 힘쓰셔서 그 정원을 한정하지 말으소서. 만약 세력에 겁을 내거나 뇌물을 탐익하거나 인정과 안면에 이끌려 나라 일을 그르치는 자가 있을 경우, 엄격한 법을 적용하여 잘못 천거한 죄를 면치 못하게 하소서. 다만 말로(末路)의 사람들은 헐뜯고 칭찬하는 것을 전도되게 하니 소문을 듣는 즈음에 허실(虛實)이 서로 반씩이 됩니다. 대저 일을 꾀함은 지혜에 달렸고 성사시키는 것은 명(命)에 달려 있으니, 이를 또 살피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지금 남쪽 방비에 염려가 많고 천재가 거듭 발생하고 있으니 경이 염려한 바가 참으로 사의(事宜)에 합당하다. 마땅히 해조로 하여금 거행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해조가 작질(爵秩)이 높은 문무의 신하로 하여금 회의하여 천거하게 할 것을 청하니, 객사(客使)가 강을 건넌 후에 거행하라고 명하였다.

 

우의정 김육(金堉)이 상차하기를,
"왕자(王者)의 정사는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보다 우선할 일이 없으니 백성이 편안한 연후에야 나라가 안정될 수 있습니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천변(天變)이 오는 것은 백성들의 원망이 부른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백성들이 부역(賦役)에 시달려 즐거이 살면서 일할 마음이 없으니, 원망하는 기운이 쌓이고 맺혀 그 형상이 하늘에 보이는 것은, 필연의 이치입니다. 인군이 재변을 만나면 두려워하며 몸을 기울여 수성(修省)하는 것에는 별다른 방도가 없고 오직 백성을 보호하는 정사를 행하여 그들의 삶을 편안케 해주는 것뿐입니다.
대동법(大同法)은 역(役)을 고르게 하여 백성을 편안케 하기 위한 것이니 실로 시대를 구할 수 있는 좋은 계책입니다. 비록 여러 도(道)에 두루 행하지는 못하더라도 기전(畿甸)과 관동(關東)에 이미 시행하여 힘을 얻었으니 만약 또 양호(兩湖) 지방에서 시행하면 백성을 편안케 하고 나라에 도움이 되는 방도로 이것보다 더 큰 것이 없습니다. 졸곡(卒哭) 후에 바로 의논했어야 했는데 객사(客使)가 마침 이르러 와서 아직까지 미루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객사가 이미 갔는데도 묘당(廟堂)의 논의가 조용해 들리지 않으니, 신은 못내 괴이하게 여깁니다. 만약 신이 나오기를 기다려 회의하려고 했다면 신은 불행하게도 병으로 누워 있으니 역시 일을 그르친 죽을 죄입니다. 신이 이 일에 급급한 것은 이 일은 즉위하신 초기에 시행하여야지 흉년이 들면 또 시행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세운(歲運)이 조금 풍년이 들었으니 이는 하늘이 편리함을 빌려준 것입니다. 명년의 역사를 겨울 전에 의논해 정하여야 시행할 수 있습니다. 신이 미치지 못할까 염려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신으로 하여금 나와서 회의하게 하더라도 말할 바는 이에 불과하니, 말이 혹 쓰이게 되면 백성들의 다행이요, 만일 채택할 것이 없다면 다만 한 노망한 사람이 일을 잘못 헤아린 것이니, 그런 재상을 어디에 쓰겠습니까. 천하의 일은 서로 모순(矛盾)되기를 좋아하니, 자산(子産)이 이른바 ‘어찌 감히 당신의 얼굴이 내 얼굴과 같다고 하겠습니까185)  .’ 한 것은, 신이 매우 깊이 개탄하는 것입니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일을 꾀하는 것은 사람에게 달려 있고 성사시키는 것은 하늘에 달려 있다.’고 하였으니, 신이 믿는 바는 오직 전하뿐입니다. 감히 별폭(別幅)에 써서 올립니다."
하였는데, 그 별폭에 이르기를,
"민간의 백가지 역(役)이 모두 전결(田結)에서 나오니, 이는 바로 옛날의 경계법(經界法)입니다. 나라에 일이 많다 보니 민역(民役)이 날로 무거워져서 1년에 응당 행하여야 할 역으로 매결당 소용되는 비용이 거의 목면(木綿) 10여 필이나 되고 적어도 7, 8필은 밑돌지 않는데 뜻밖에 마구 나오는 역은 여기에 들어 있지 않으니, 백성들이 어찌 곤궁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만약 대동법을 시행하면 매 1결마다 【10속(束)이 1부(負)가 되고, 1백 부가 1결(結)이다. 전(田)에서 수확하는 다소에 따라 속이라 하고, 부라 하고, 결이라 한다.】  봄에 목면 1필, 쌀 2두(斗)를 내고, 가을에 쌀 3두를 내면 모두 10두가 되는데, 전세(田稅) 이외의 진상물(進上物)과 본도의 잡역(雜役), 본읍에 납부해야 할 것이 모두 그 가운데 있어 한번 납부한 후에는 1년내내 편안히 지내도 됩니다. 경기에서 선혜청(宣惠廳)에 봄 가을에 8두씩 1년 16두를 바치는 것에 비하면 역시 매우 너그럽습니다. 양호(兩湖) 지방의 전결이 모두 27만 결로 목면이 5천 4백 동(同)이고 쌀이 8만 5천 석이니, 수단이 좋은 사람에게 부쳐 규획하여 조치하게 하면 미포(米布)의 수가 남아서 반드시 공적인 저장과 사사로운 저축이 많아져 상하가 모두 충족하여 뜻밖의 역(役) 역시 응할 수가 있습니다. 다만 탐욕스럽고 교활한 아전이 그 색목(色目)이 간단함을 혐의하고 모리배(牟利輩)들이 방납(防納)하기 어려움을 원망하여 반드시 헛소문을 퍼뜨려 교란시킬 것이니, 신은 이점이 염려됩니다."
하였다. 상이 소를 보고는 비국으로 하여금 의논하게 하니, 비국이 아뢰기를,
"이 일을 시행할 경우에는 반드시 미리 시험해 보아야 할 것이니, 호서(湖西) 지방 한 도(道)에 먼저 시험해 보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제도를 고치는 일은 그 이익이 10배가 되지 않으면 옛사람들이 경계하였으니, 처음하는 즈음에 충분히 살펴 처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난번 이경엄(李景嚴)이 대선혜(大宣惠)를 설치하자고 청한 소로 인해 영돈녕부사 김상헌이 헌의하여 말하기를 ‘만약 막히어 행하기 어려운 폐단이 있게 되면 반드시 좋아하지 않은 자의 비난이 있게 될 것이니, 양암(諒闇)186)  이 지나기를 기다린 후에 면대해 품정(稟定)하겠다.’ 하였으니, 그것 역시 이런 뜻이었습니다. 이번에 우의정 김육이 진달한 바 양호 지방에 대동법을 실시하는 것은 실로 크게 변통하는 데 관계되므로 신들이 감히 경솔하게 결정할 수 없어 김상헌에게 물었더니, 의견이 전과 같았습니다. 청컨대 김육이 출사하기를 기다려 탑전(榻前)에서 품의하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김육이 출사하니, 상이 대신 및 비국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고, 대동법의 이해 관계를 여러 신하들에게 물었다. 우의정 김육이 아뢰기를,
"이는 선혜(宣惠)의 법과 차이가 없습니다. 선혜법은 고상(故相) 이원익(李元翼)이 건의한 것인데 먼저 경기·강원도 두 도에서 실시하고 호서에는 미처 시행하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마땅히 먼저 이 도에서 시험해야 하는데, 삼남(三南)에는 부호(富戶)가 많습니다. 이 법의 시행을 부호들이 좋아하지 않습니다. 국가에서 영(令)을 시행하는 데 있어서 마땅히 소민(小民)들의 바람을 따라야 합니다. 어찌 부호들을 꺼려서 백성들에게 편리한 법을 시행하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하고, 좌의정 조익(趙翼), 연양군(延陽君) 이시백(李時白)은 모두 행하는 것이 편리하다고 하고, 호조 판서 이기조(李基祚), 호군(護軍) 정세규(鄭世規)는 모두 불편하다고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동법을 시행하면 대호(大戶)가 원망하고, 시행하지 않으면 소민이 원망한다고 하는데, 원망하는 대소가 어떠한가?"
하니, 여러 신하들이 모두 말하기를,
"소민의 원망이 큽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소를 참작하여 시행하라."
하였다.

 

11월 6일 신유

전남도(全南道)의 부안(扶安)·함열(咸悅)·옥구(沃溝)·무장(茂長)·만경(萬頃)·고부(古阜) 등 여섯 고을에 해일(海溢)이 발생하고, 여산(礪山)과 함열에는 지진(地震)이 발생하였다.

 

상이 주강에 나아가 《중용(中庸)》 제 10장을 강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자질이 가깝고 힘이 부지런할 수 있는 자란 무엇을 말하는가?"
하니, 검토관 윤집(尹鏶)이 대답하기를,
"자질이 서로 가깝고 힘을 씀이 부지런하면 이 세 가지를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하고, 송준길은 아뢰기를,
"모든 사람의 자품은 각기 서로 가까운 것이 있습니다. 공자의 제자로 말하자면 중유(仲由)는 예리한 칼날을 밟을 수 있는 데 가깝고, 원헌(原憲)은 작록을 사양할 수 있는 데 가깝고, 염유(冉有)는 국가를 고르게 하는 데 가까운 것이 그것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조용히 죽음에 나아가기는 어렵고 비분강개하여 몸을 던지기는 쉬운데 그들은 모두 사절(死節)한 선비들입니다. 명(明)나라가 망할 때 사절한 신하가 있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는데 그 까닭을 알 수가 없습니다. 병자년 난리에 강도(江都)에서 사절한 사람으로 심현(沈誢)·이시직(李時稷)·송시영(宋時榮) 등은 나라에서 단지 정려(旌閭)만 내리고 증직(贈職)하는 전례가 없어 지금까지도 애석해 합니다. 또 정축년 이후에 사대부의 아내로 사로잡혀 몸을 더럽힌 자들을 그대로 데리고 살도록 하는 것을 법으로 정해놓았는데, 풍속을 해치는 경우가 이보다 더 심한 것이 없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태괘(泰卦)의 구이(九二) 정전(程傳)에 말하기를 ‘구차스레 인순(因循)하여 정사(政事)가 느슨해지니, 반드시 강단(剛斷)한 임금과 영렬(英烈)한 보좌가 있어 진작시켜 변통해야 유위(有爲)하게 된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말이 옳다. 그러나 굽은 것을 바로잡으려다 곧은 정도를 넘어서고 다스려지기를 바라 너무 서두르면 역시 병폐가 있게 되니, 송 신종(宋神宗)과 왕안석(王安石)이 이런 경우이니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또 반드시 사람을 얻은 후에 일을 제대로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니, 송준길이 아뢰기를,
"상의 전교에 이른바 ‘사람을 얻어야 한다.’는 말씀은 참으로 그렇습니다. 우문태(宇文泰)는 소작(蘇綽)을 얻고187)  , 부견(符堅)은 왕맹(王猛)을 얻은 연후에야188)   정치를 제대로 할 수 있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사람을 알아보기란 매우 어렵다."
하니, 송준길이 아뢰기를,
"성상께서 저위(儲位)189)  에 계실 때 궁료(宮僚)와 함께 서연(書筵)에서 강하시면서 한 무제(漢武帝)가 한 문제(漢文帝)보다 낫다고 논하셨다 하는데,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전의 말이라 내가 잊어버렸다."
하니, 준길이 아뢰기를,
"전하께서 만약 이런 말씀을 하셨다면 어리석은 신은 종사에 마침내 힘입는 바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무엇을 가지고 말하는가?"
하니, 준길이 대답하기를,
"언외(言外)의 뜻을 신이 어찌 모르겠습니까."
하였다.

 

11월 7일 임술

암행 어사 이정영(李正英)·홍수(洪鐩)·이석(李晳)·홍명하(洪命夏)·홍처윤(洪處尹)·임중(任重) 등을 명소(命召)하여 봉서(封書)를 주어 보냈는데, 봉서는 바로 염문(廉問)할 조목(條目)이었다.

 

헌부가 내수사(內需司) 노비(奴婢)의 신공(身貢)을 모두 해조에 부쳐 경비로 쓰게 해달라고 청하였는데, 여러 차례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이조 판서 이시백(李時白)이 면직되었는데, 김상헌(金尙憲)의 논핵 때문이었다.

 

11월 8일 계해

임담(林墰)을 이조 판서로, 이기조(李基祚)를 호조 판서로, 김광욱(金光煜)을 형조 판서로, 심액(沈詻)를 우참찬으로, 한흥일(韓興一)을 초배(超拜)하여 판의금부사로, 조경(趙絅)을 대사헌으로, 윤강(尹絳)·조수익(趙壽益)·심지원(沈之源)을 승지로, 송준길(宋浚吉)을 집의로, 조빈(趙贇)을 사간으로, 정지화(鄭知和)를 보덕으로, 이재(李梓)를 장령으로, 심지한(沈之漢)을 응교로, 권우(權堣)를 부교리로, 김좌명(金佐明)을 수찬으로, 정세보(鄭世輔)를 지평으로, 최일(崔逸)을 정언으로, 최혜길(崔惠吉)을 경기 감사(京畿監司)로, 임전(林)을 전남 감사(全南監司)로 삼았다.

 

암행 어사 윤성(尹珹)·이제형(李齊衡)·목겸선(睦兼善) 등을 명소하여 봉서(封書)를 주어 보냈다.

 

돈령부 도정 심현(沈誢)을 이조 참판에, 사복시 정 이시직(李時稷)을 승정원 도승지에, 사복시 주부 송시영(宋時榮)을 승정원 좌승지에 추증하였는데, 송준길의 말을 따른 것이다.

 

11월 9일 갑자

암행 어사 이재(李梓)·장차주(張次周)·김시진(金始振)·이행원(李行源)·임선백(任善伯) 등을 명소하여 봉서를 주어 보냈다.

 

11월 10일 을축

부호군 김집(金集)이 돌아가 수묘(修墓)하기를 청하니, 허락하고 인하여 말을 주도록 명하였다. 영의정 이경석이 상차하기를,
"옛말에 이르기를 ‘어진 자가 있지 않으면 어떻게 나라를 다스릴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성상께서 임어하신 이래 지성으로 어진이를 좋아하시므로 재주를 품고 도(道)를 지닌 선비들이 서로 이어 등용되었으니 모범이 되기에 족했습니다. 지금 듣건대 전 대사헌 김집이 이번에 하향하려고 한다 합니다. 나이 많은 사람이 객지에서 혹독한 추위를 만났으니 잠깐 돌아가 쉬려는 것 역시 부득이한 것입니다. 그러나 바람을 쐬며 험한 길을 갈 경우에 질병이 염려되며 한번 향리(鄕里)로 가고 나면 비록 힘쓴다 하더라도 그가 올 것을 어찌 기필할 수 있겠습니까. 수묘는 자제(子弟)도 할 수 있으니, 성상께서 온화하게 유시하여 머물게 하면 어찌 결심하고 돌아가겠습니까. 또 선조(宣祖) 때의 선정신(先正臣) 성혼(成渾)이 서울에 들어왔는데 그때 추위를 당해 대신이 신탄(薪炭)을 주라고 청했었습니다. 이는 한때의 은전(恩典)에 관계되지만 신이 감히 야사(野史) 가운데서 들은 바를 아울러 진달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경의 말이 지극하다 하겠다. 지난번 경연에서 내가 부모를 진정으로 측은하게 여기는 그의 마음을 가엾게 여겨 이미 허락하였다마는, 지금 와서 생각하니 마음이 실로 편안치 못하다. 다만 식언(食言)을 한 것인가 꺼림칙하였는데 차자의 말이 이에 이르니, 이는 공정한 말이다. 어찌 사소한 의리에 구애받겠는가. 마땅히 내 지극한 뜻을 유시하여 머물게 하라. 또 끝에서 한 말은 실로 내 뜻에 합당하다. 특별히 해조로 하여금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영돈녕부사 김상헌 역시 차자를 올리기를,
"전 대사헌 김집이 지금 물러나 돌아가려고 하니, 신은 삼가 탄식스럽고 애석하게 여깁니다. 옛날 당(唐)나라 중서 우승(中書右丞) 공규(孔戣)가 치사(致仕)하여 물러가니, 이부 시랑(吏部侍郞) 한유(韓愈)가 상소하여 머물게 하기를 청하기를 ‘공규는 나이가 70이 넘었으나 정력이 쇠퇴하지 않았고, 나라를 걱정하느라 집을 잊고 용의가 주도(周到)하니, 참으로 그가 가는 대로 맡겨두고 남아서 돕게 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 하였습니다.
신이 삼가 보건대, 김집은 유문(儒門)의 숙망(宿望)으로 노성(老成)하고 단량(端亮)하여 사림(士林)이 모두 향하여 앙모하며 다투어 기뻐하지 않은 자가 없습니다. 성명께서 한 조정에 데려다 놓았는데 오랫동안 여저(旅邸)에 머물러 있어 질병이 들어 진정해 돌아가기를 청하였습니다. 신 역시 구차하게 따라주어 신화(新化)를 돕지 않게 해서는 마땅치 않다고 여깁니다.
전하께서 조정에서 새로운 태재(太宰)를 얻으셨습니다. 신이 평소 임담(林墰)의 사람됨을 아는데 그의 단아한 뜻이 바야흐로 스스로 조심하여 사림의 소종(所宗)과 전배(前輩)·장자(長者)의 앞에 서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순(舜)임금이 9관(官)을 명하자 엄숙하고 신중하게 서로 사양하였습니다. 전하께서 바야흐로 요 순 시대의 정치를 재현하고자 하시니 임담이 어찌 백이(伯夷)의 뒷자취를 따르려 하지 않겠습니까만, 다만 작질(爵秩)이 맞지 않아 반드시 이 때문에 어렵게 여기는 것입니다. 신은 노병으로 정신이 혼미해서 말하는 것이 법도가 없으나 나라를 걱정하는 지극한 마음으로 감히 소회를 진달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애써 휴가를 주었으나 잊혀지지 않는 마음이 간절하였다. 대신의 말을 인해 즉시 머물라고 권유하니 내 마음이 놓인다."
하였다. 승지 윤강(尹絳)·심지원(沈之源)·김경여(金慶餘), 홍문관 교리 조복양(趙復陽), 수찬 윤집(尹鏶) 등이 역시 면유(勉諭)하여 머물게 하기를 청하니, 답하기를,
"내 뜻은 이미 영상의 차자에 대한 비답에 유시하였다."
하였다. 상이 다시 사관(史官)을 보내 유시하니, 김집이 상소하기를,
"신은 노병과 천식으로 추위를 견디기 어렵다는 것을 성상께서 이미 통촉하시어 물러나 돌아가기를 허락하셨습니다. 전하께서 또 대신의 말을 중하게 여기시어 재차 사관을 보내 유시하시니 사체가 과중하여 듣기에 매우 놀랍습니다. 신이 삼가 영돈녕부사 김상헌의 차자를 보건대 놀랍고 위축되어 움츠러들어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아, 참외밭에서 신끈을 고쳐매는 것을 옛사람이 경계하였는데 어찌 감히 하루인들 지체하여 옛사람의 깊은 경계를 범하고 평생 지켜 온 바를 잃겠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물러나 돌아가기를 허락하시어 따뜻한 봄에 조정으로 돌아오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내 뜻은 이미 전후의 유시에서 다 말하였으니, 모름지기 지극한 뜻을 본받아 속히 들어오면 어찌 나에게만 다행이겠는가, 실로 국가의 다행일 것이다."
하였다. 진사 김수항(金壽恒) 등 10여 인이 상소하여 머물게 하기를 청하니, 답하기를,
"그대들이 어진자를 경애(敬愛)하는 성의가 이러하니, 재삼 가상하게 여긴다. 내 마땅히 성의를 다하여 머물기를 권유하겠다."
하였다. 상이 김집의 조카 승지 김익희(金益熙)를 보내 온화하게 유시하기를 갖추 지극하게 하니, 익희가 유시를 전하고 돌아와 아뢰기를,
"신이 가서 숙부(叔父)인 김집에게 유시했더니, 대답하기를 ‘성상께서 어진이를 좋아하는 정성을 불초한 신에게 베푸시고 자제까지 보내 상의 뜻을 전유(傳諭)하시니 땅에 엎드려 감격해 울 뿐이다. 삼가 마땅히 거처하는 곳에 돌아가 다시 글월을 올려 사정을 진달하고 가련하게 여겨 살펴주시기를 바라겠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거처하는 곳으로 돌아가겠다는 뜻이 있다는 말을 들으니, 그대가 전한 성의가 가상하다."
하였다. 김집이 상소하기를,
"가는 것을 만류하라는 청이 갑자기 대신과 근시에게서 나오고 유신들의 상소도 잇달았습니다. 보기 드문 과중한 거조를 베풀어서는 안 될 사람에게 베푸시므로 듣고 보기에 매우 놀랍습니다. 그런데 두 차례나 사관을 보내 지극한 뜻을 유시하기까지 하시니 참으로 황공하여 감히 따를 수가 없었습니다. 부득이하여 도피해 숨을 계책을 했었는데 신의 조카 승지 익희를 보내서 내리신 유지(諭旨)가 정녕하여 귀신도 감동케 하시니 신이 어찌 감히 잘못에 빠져들어 고쳐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거처하는 집에 돌아와 생각하느라 밤을 지새는데 다시 매우 편안치 못한 고민이 있습니다. 영돈녕부사의 차자에 순임금의 조정에서 서로 사양했던 비유를 했고, 유생의 소에 ‘현인을 대우함이 지극하지 못하다.’는 말이 있어 더욱 마음이 놀라 몸둘 곳이 없습니다. 그들이 신을 머물게 하려는 것은 바로 신을 내쫓는 것입니다. 저들 중에 신을 모르는 자들에 대해서는 한스럽게 여길 것도 없습니다만 현명하신 전하께서도 오히려 애써 만류하고 계시니, 이는 보잘것없는 신이 군부(君父)에게 신임을 얻지 못한 것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성상께서는 신이 저 자신을 분명하게 안다는 사실을 살피셔서 다른 사람의 말에 넘어가지 마시고 일찌감치 물러나 돌아가기를 허락해 뒷날 후회가 없도록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경이 이런 말을 하니, 내가 매우 서운하다. 내가 머물기를 권하는 것은 대신이나 근시의 말에 따른 것이 아니다. 실로 눈이 오고 매섭게 추운 날씨에 나이 많은 사람이 멀리 가기가 어려운 것을 염려해서이다. 멀리 떠나려는 생각을 조금 돌려 나를 위해 잠시 머물러준다면 국가에는 도움이 되고 사림(士林)들에게는 얼마나 모범이 되겠는가. 나의 지극한 뜻을 잘 인식해서 그런 말을 하지 말도록 하라."
하니, 김집이 부득이 가는 것을 정지하였다.

 

사복시 정 송시열(宋時烈)이 상소하기를,
"삼가 듣건대 지난번 경연에서 구언(求言)하시는 성상의 분부가 계셨다 하므로 이에 전일 올리려 했던 봉사(封事)를 하나의 책자(冊子)로 만들어 올립니다."
하였는데, 그 조목은 ‘슬픔을 절제하여 몸을 보호할 것[節哀以保身], 예를 강론하여 신종할 것[講禮以愼終], 학문에 힘써 마음을 바룰 것[勉學以正心], 몸을 닦아 집안을 다스릴 것[修身以齊家], 간사한 사람을 멀리하여 충직한 사람을 가까이 할 것[遠便佞以近忠直], 사사로운 은혜를 억제하여 공도를 넓힐 것[抑私恩以恢公道], 선임을 정밀하게 하여 체통을 밝힐 것[精選任以明體統], 기강을 떨쳐 풍속을 면려할 것[振紀綱以勵風俗], 재용을 절약하여 나라의 근본을 단단하게 할 것[節財用以固邦本], 공안을 바로잡아 백성들의 힘을 늦추어 줄 것[正貢案以紓民力], 검소한 덕을 숭상하여 사치의 풍조를 고칠 것[崇儉德以革奢侈], 사보를 엄선하여 세자를 보필할 것[擇師保以輔儲貳], 정사를 닦아 외적을 막을 것[修政事以禦外侮]’이었는데, 모두 종이를 첩(貼)하고서 말하기를,
"신은 삼가 상고하건대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의 소장(疏章)에는 모두 첩황(貼黃)하였다고 합니다. 대개 현저하게 드러나지 않은 임금의 과실(過失)을 논할 경우에 첩(貼)하고, 임금의 마음씀이 은미하여 사람들이 미처 알지 못할 경우에 첩하고, 일이 국가의 기밀(機密)에 관계될 경우에 첩하고, 일이 궁중의 은미한 일에 관계될 경우에 첩하고, 말이 번쇄(煩鎖)할 경우에 첩하고, 아름다운 모유(謨猷)를 논하면서 그것이 자기에게서 나온 것임을 감추고 아름다움을 임금께 돌릴 경우에 첩하고, 의리(義理)가 매우 깊으나 오활한 데 비기었을 경우에 첩하니, 이는 모두 반드시 상의 앞에 이른 연후에 친히 열어보도록 한 것으로, 그 마음씀이 매우 간절합니다.
오늘 말씀드린 바는 다른 사람이 알아서는 안 될 것이 매우 많기 때문에 감히 그 방식을 썼습니다. 그러나 정자와 주자는 모두 황첩(黃貼)을 썼지만 지금 전하께서는 바야흐로 상중(喪中)에 계시기 때문에 감히 백첩(白貼)으로 올립니다."
하고는, 인하여 돌아가 어머니의 병을 돌보게 해 주기를 빌었다. 【올린 책자 가운데 조목별로 소회를 진달하면서, 대일통(大一統)으로 대의(大義)를 밝히는 것을 제일건으로 하였기때문에 첩지(貼紙)하여 비밀로 했다 한다.】  상이 불러 보고 면유하기를,
"내가 의지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데 지금 또 돌아가기를 청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니, 대답하기를,
"노모(老母)의 병이 위중하다고 듣고는 감히 죽음을 무릅쓰고 진달하여 청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김대헌(金大憲)190)  이 이미 물러나 돌아가고자 하는데, 그대가 또 돌아갈 뜻을 두니, 내가 매우 서운하기 때문에 현재 몸이 편치 않으면서도 불러 보고 유시하는 것이다."
하니, 시열이 아뢰기를,
"이미 노모에게 질병이 있다는 말을 듣고도 신이 만일 돌아가 보지 않으면 이는 효(孝)로써 교화하는데 한 죄인이 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올린 책자는 내가 살펴보았는데, 밤이 깊도록 피로한 줄을 몰랐다. 식견(識見)이 맑지 못하고 충애(忠愛)하는 마음이 부족하고, 정성이 돈독하지 못하면 어찌 이에 이를 수 있겠는가."
하니, 시열이 대답하기를,
"성상의 하교가 이에 이르니 실로 우리 나라 만세의 복입니다. 신이 감히 신의 말을 가납하신 것을 다행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이는 순임금이 천근한 말을 살핀 성대한 덕이기 때문에 신이 기쁨을 금치 못하는 것입니다. 옛날 주자(朱子)의 말에 ‘신하가 진언하는 것에도 스스로 때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신의 상소 끝에 말한 바가 혹시라도 전파된다면 관계된 바가 작지 않을 것입니다마는 신이 갖고 있는 생각을 지금 모두 말씀드리지 못한다면 후일에 어찌 매번 글을 올릴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하찮은 생각을 무릅쓰고 올린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금부터 아주 내려가 버릴 생각인가?"
하니, 시열이 아뢰기를,
"신이 어찌 감히 아주 가버리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난번 인견할 때는 아주 거절하는 뜻이 있었는데, 지금 이 말을 들으니 매우 다행스럽다."
하니, 시열이 아뢰기를,
"신이 받은 은혜가 매우 두터운데 어찌 차마 저버리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금은 머물 수 없는가?"
하자, 시열이 아뢰기를,
"어머니의 병을 들은 이상 신이 감히 머물 수가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언제 돌아오겠는가?"
하니, 시열이 아뢰기를,
"법전(法典)에 휴가를 주는 기간이 있으니, 기한에 맞춰 조정으로 돌아오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정(正)은 나에게 사부(師傅)의 구의(舊誼)가 있으니 정의(情意)가 다른 사람과 같지 않다."
하니, 시열이 사례하기를,
"모두가 신하인데 누구에게 피차가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말이 좋다."
하니, 시열이 아뢰기를,
"《중용(中庸)》에 이르기를 ‘체군신(體群臣)’이라 하였는데, 주자가 ‘마치 일체(一體)처럼 보라는 것이다.’라고 해석했으니, 원컨대 상께서는 여러 신하를 일체로 보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떤 사람은 지금 마땅히 일체(一切)를 경장(更張)하여야 한다고 말하는데 이 말은 어떤가?"
하니, 시열이 아뢰기를,
"지금은 국가가 마치 중병을 앓고난 것과 같습니다. 대저 중병을 앓는 사람이 독한 약을 과용하면 역시 죽게 되므로 이를 염려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비록 그러나 병이 위중한데도 약을 쓰지 않으면 역시 죽게 됩니다. 이는 성상께서 참작하시어 중(中)을 얻는 데 달려 있습니다. 송 신종(宋神宗)과 왕안석(王安石)이 후세에 경장(更張)하는 자의 경계가 되는데, 만약 적임자를 얻어 맡기면 염려할 바가 아닙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사람을 참으로 얻는다면 무슨 걱정이 있겠는가."
하였다. 시열이 아뢰기를,
"방납(防納)이 오늘날의 큰 폐단이 되고 있는데, 사대부들이 흔히 이 때문에 염치를 잃게 됩니다. 근래에는 또 듣건대 대궐 안에서 공상(供上)받은 종이를 방납한다고 합니다. 전해들은 말이어서 반드시 다 믿을 수는 없지만 만약 참으로 그런 일이 있다면 이 얼마나 성덕(聖德)에 누(累)가 되겠습니까."
하니, 상이 깜짝 놀라며 이르기를,
"어찌 그런 일이 있겠는가. 이는 혹시 하사받은 집에서 빙자하여 그런 것이 아닌가.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비록 대궐 안의 소행이 아니라 하더라도 어찌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말해 주어 깨우칠 수 있겠는가."
하니, 시열이 아뢰기를,
"법은 귀(貴)하고 가까운 곳에서부터 무너지니, 마땅히 엄금하여야 합니다."
하였다. 시열이 드디어 하직하고 물러나오니, 말을 주라고 명하였다.

 

형조에서 수도 단자(囚徒單子)를 올리니, 하교하였다.
"추운 중동(仲冬)에 갇혀 있는 고초를 내가 매우 불쌍하게 여긴다. 즉시 유사(攸司)로 하여금 처결하게 하여 옥사가 지체되는 폐단이 없게 하라."

 

11월 11일 병인

간원이 아뢰기를,
"행상(倖相)191)  이 국사를 담당하여 뇌물을 받아들일 때 당시의 무부(武夫)들이 백성들에게서 긁어들여 잘 섬기는 것으로 출세하는 발판으로 삼았으니, 그중에 더욱 심하게 드러나서 대중이 함께 분해하는 자는 엄하게 다스려서 여러 사람을 격려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부총관 안철(安澈)은 뇌물을 주고 아첨하여 연달아 기영(圻營)192)  과 서곤(西閫)을 차지하여 추잡한 말이 낭자합니다. 도신(道臣)의 장계로 파직되었는데 서용하라는 명이 내리자마자 갑자기 총부(摠府)의 중요한 자리를 제수하였고, 원로(元老)가 차자를 올려 논핵한 후에도 아무렇지 않게 정고(呈告)하여 체직되었으니, 조정을 매우 욕되게 하였습니다. 사판에서 삭거하소서. 해조 역시 사정을 따른 잘못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해당 당상과 낭청을 되도록 무겁게 추고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나라에서 사람을 쓸 경우에 자급이 매우 중대하므로 재능이 탁월하여 여러 사람의 기대에 흡족한 사람이 아니면 한때의 은권(恩眷)이 있다 하여 갑작스레 발탁해서는 안 됩니다. 병조 판서 한흥일(韓興一)은 자신이 서전(西銓)의 장(長)으로서 제배하는 즈음에 공의(公議)를 아랑곳하지 않았고 원로 대신이 차자를 올려 논핵했는데도 도리어 격외(格外)로 총탁해 발탁하여 두 자급을 건너 뛰기까지 하였으니 여론이 아주 놀라워합니다. 한흥일이 겸대하고 있는 판의금을 체차하고, 새로 제수한 가자도 아울러 개정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안철은 파직하고, 해조의 당상과 낭청은 추고하라. 판의금부사는 한두 노신이 서로 병 때문에 휴가하였고, 또 적당한 자가 없으므로 성국(省鞫)이 지연되어 결단하지 못하고 있어, 자급이 비록 중하지만 사체가 구차하고 간략하기 때문에 이런 명을 내린 것이다. 이른바 은권이니 총탁이니 하는 등의 말은 평온하지 못한 듯한데, 그 뜻을 모르겠다."
하였다. 좌의정 조익(趙翼) 역시 차자를 올려 한흥일에게 자급을 초급한 잘못을 논하고 대간의 계사를 따르지 않은 것이 미안하다고 하니, 상이 비로소 따랐다.

 

한성부가 아뢰기를,
"요즘 경외(京外)의 백성들이 이동이 심하여 거처를 정하지 못하는 것은 대개 부역을 피하기 위해서입니다. 만약 제도를 정하지 않으면 장차 나라를 다스릴 수가 없습니다. 옛말에 이르기를 ‘요순을 본받고자 하면 마땅히 조종(祖宗)을 본받으라.’고 하였으니, 조종조의 《경국대전(經國大典)》이 어찌 오늘날 마땅히 본받아야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호전(戶典)에서 상고해 보니, 5호를 1통(統)으로 하고 통에는 이정(里正)을 두고 면(面)에는 권농관(勸農官)을 두었는데 그뜻이 매우 원대하여 실로 오늘날에 합당합니다. 그런데 오랫동안 폐지되어 오던 것을 이제 거행하고자 하면 엄하게 사목(事目)을 세워 장려해 봉행해야만 합니다. 응당 행해야 할 절목을 묘당과 의논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이조 판서 임담(林墰)이 상소하여 사직하고 김집에게 사양하니,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11월 12일 정묘

심지한(沈之漢)을 사간으로 삼았다.

 

11월 14일 기사

좌의정 조익(趙翼)이 선조(先朝) 때 올린 차자 가운데서 ‘대학곤득논어천설소(大學困得論語淺說疏)’와 ‘옥당논재이겸논심학(玉堂論災異兼論心學) 1단(段)’, ‘논선혜청소(論宣惠廳疏)’, ‘논대동법소(論大同法疏)’, ‘논군제소(論軍制疏)’, ‘청변통과거강경차(請變通科擧講經箚)’ 등 여섯 가지 일로 1책을 만들어 올렸다. 그 차자에 이르기를,
"신이 삼가 상고하건대,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치신(治身)·제가(齊家)하여 평천하(平天下)에 미치는 것은 다스리는 도(道)요, 치도의 기강을 세우고 백직(百職)을 분정(分正)하고 천시(天時)에 따라서 일을 처리하여 제도를 만들어 천하의 일을 다하는 것은 다스리는 법(法)이다.’ 하였습니다. 또 말하기를 ‘치도(治道)를 논할 때 본(本)에 따라 말한 경우가 있고, 일[事]에 따라 말한 경우가 있다.’고 하였으니, 정자가 어찌 치도를 모르는 자라고 하겠습니까. 그렇다면 이는 실로 다스리는 데 있어서 간절한 요점입니다.
대개 정치를 하는 도는 근본이 있고 일이 있는데, 순(舜)임금이 우(禹)임금에게 준 위미(危微)와 정일(精一)이란 말은 정치의 근본이며, 사악(四岳)과 구관(九官)을 명하여 여러 직(職)을 나누어 다스린 것은 정치의 일입니다. 이 두 가지는 모두 정치의 대요로 어느 한 쪽도 그만둘 수 없는 것입니다. 근본이 없으면 인욕(人慾)이 방자해지고 천리(天理)가 없게 되어 쓰고 버리는 거조(擧措)가 모두 정당함을 잃게 될 것이며 어지러움이 그것을 말미암아 발생할 것이니, 어떻게 다스리겠습니까. 그 일이 없게 되면 백성들의 이(利)가 흥(興)할 수 없고, 백성들의 해(害)가 제거되지 않아 혜택이 백성들에게 미치지 않으니 백성들의 삶이 어디를 말미암아서 이루어지며 민덕(民德)이 어디를 말미암아 바르게 되겠습니까. 옛날 제왕(帝王)의 정치하는 도리는 이 두 가지에 불과하였을 뿐이니, 후에 정치를 하려는 자는 오직 이것으로써 법을 삼아야 할 뿐입니다. 그러나 이는 정치하는 도입니다. 능히 이 도를 말미암아 성대한 효과를 이루는 데는 그 요점이 둘 있으니, 하나는 입지(立志)를 바르게 하는 것이요 하나는 택술(擇術)을 자세히 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바른 입지라고 하는가 하면, 치심(治心)하고 수신(修身)하는 것이 반드시 한결같이 옛날의 제왕과 같게 하고자 하며, 다스려지기를 바라서 백성을 보호하는 것이 반드시 한결같이 옛날의 제왕처럼 하고자 하여, 두 가지를 모두 반드시 그 이치를 다하고자 해 털끝만큼이라도 다하지 못함이 없게 하고자 하는 것을 입지가 바르다고 하는 것입니다. 만약 도를 다하기를 구하지 않고 미진(未盡)함을 편안히 여기며, 자신은 반드시 그 이치에서 말미암지 않고, 백성은 반드시 제자리를 얻지 못하며, 사심(私心)을 반드시 이기지 못하고 이(理)를 반드시 회복하지 못하며, 대공지정(大公至正)의 도가 반드시 행해지지 않고 구차하고 고식적인 정사가 해가 되지 않는다고 여겨, 그 뜻이 이와 같으면 결코 지극한 다스림을 바랄 수 없고 오직 난망(亂亡)으로 달려갈 뿐입니다.
무엇을 택술(擇術)이 자세하다고 하는가 하면, 대저 옛날 성인은 자신을 다스리고 백성을 다스리는 것이 모두 당연한 도가 있었으니, 후세에 자신을 다스리고 백성을 다스리는 자는 오직 한결같이 옛날 성인의 도리로 법을 삼아야 합니다. 자기를 다스리려면 격물·치지·성의·정심·수신·제가의 덕목(德目)이 있으니 이로써 일삼아 부지런히 힘써서 얻지 못하면 놓아두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이 자기를 다스리는 데 있어서 택술(擇術)하는 것입니다. 만약 백성을 다스리려면 마땅히 차마 못하는 마음으로 차마 못하는 정사를 행해야 하니, 정전(井田)·수축(樹畜)·학교(學校) 등의 일은 모두 이른바 차마 하지 못하는 정사로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역대의 치란과 성쇠는 서로 찾아드는 것이 무궁하고 그 백성을 다스리는 법은 제도와 절목이 때에 따라 달라져 폐지된 것이 많고 문란해진 것이 많아 백성들의 해가 날이 갈수록 더욱 심해졌습니다. 성현이 이때를 당하여 반드시 백성들이 병폐를 받는 까닭을 자세히 살펴 때에 맞춰 마땅하게 정하고 변통해서 고통 속에 빠져 있는 것을 건져야 합니다. 그러면 그 일이 비록 옛날과는 같지 않으나 그 도는 실로 차마 못하는 마음으로 차마 못하는 정사를 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백성을 다스리는 데 있어서 택술하는 것입니다.
만약 몸을 가다듬는다면서 이단(異端)에 미혹되거나 속학(俗學)에 흐르거나 성색(聲色)과 화리(貨利)와 궁실(宮室)을 일삼는다면, 이는 몸을 가다듬는 술(術)을 제대로 선택하지 못한 것입니다. 만약 백성을 다스리면서 혹 옛날에 빠지고 지금에 마땅치 않거나 혹은 일상(日常)에 젖어 그 폐단을 살피지 못하거나 혹은 한갓 그 명분만 취하고 그 실제에 힘쓰지 않거나 혹은 작은 은혜 베풀기를 좋아하고 대덕(大德)을 생각하지 않아 도탄에 빠진 이 백성들을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보기만 하고 구제할 줄을 모르면, 이는 백성 다스리는 술을 제대로 선택하지 못한 것입니다. 임금이 참으로 마음을 다스리고 몸을 가다듬어 그 근본을 세우고, 일을 제정하고 법도를 세워 그 백성을 보호하며, 입지(立志)가 아주 바르며 택술(擇術)이 아주 자세하면 그 덕은 바로 삼대(三代) 제왕의 덕이며, 그 다스림은 바로 삼대 제왕의 다스림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삼대의 성대함을 어찌 사람이 다시 펼치지 못하는 것이겠습니까. 하려고 하는 자만 있다면 가능한 일입니다. 만일 이것을 하지 못할 것으로 여긴다면 어찌 도를 아는 자라고 하겠습니까.
삼가 전하께서는 하늘의 부탁을 받고 조종(祖宗)의 크나큰 공적을 물려받아 억조 창생의 부모가 되었는데, 난리를 겪고난 후여서 모든 일이 무너지고 백성들의 괴로움이 말할 수 없으며, 나라의 형세가 쇠약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러니 반드시 몸을 가다듬는 방법을 다해 정령과 거조가 모두 한결같이 바른 데서 나와야 하고, 또 백성을 보호하는 방술을 다해 나라에 한 사람이라도 제자리를 잃는 자가 없게 해야만 근본이 튼튼하고 나라가 편안하게 되는 효과가 있게 되어, 이에 황천이 부탁한 책임과 조종이 전해준 뜻을 저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려면 입지(立志)를 극도로 순정(純正)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되며, 택술(擇術)을 상세하게 살피지 않아서는 안 되며, 용력(用力)을 매우 쏟지 않으면 안 됩니다.
삼가 보건대 전하께서는 인덕(仁德)이 출천(出天)하고 총명이 탁월하시어 대고(大故)193)   이래로 굳은 집상(執喪)과 심한 애통은 비록 여염의 일반 사람이라도 미치기 어려운 바가 있어 이미 백성들이 감격하고 있으며, 내리신 명령과 시행한 것이 모두 사람들의 마음에 합치되어 백성들이 다 전하께서 크게 다스리려는 뜻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에 쓰러져가는 것을 떨쳐 일으키고 한 세상을 편안한 지역으로 만들기를 모두 고대하고 있으니 여기에서 하늘의 뜻이 우리 나라를 평화롭게 다스리고자 함을 볼 수 있습니다. 만약 이 때에 크게 다스리지 못하여 신인(神人)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다면 어찌 영원한 큰 한이 되지 않겠습니까.
신은 본래 세상 일을 모르는 유생으로 성품이 매우 어리석고 못났습니다. 젊어서부터 시대에 인정을 받지 못하고 오직 성현의 책을 읽고 기뻐하며 그 곳에다 마음을 쏟았습니다. 모든 옛날 성인들이 자기를 가다듬고 남을 다스린 방도를 자세히 생각해 보았으며, 또 세상을 염려하는 구구한 마음이 있어 당세의 병폐 역시 항상 찾아보면서 탄식하였습니다.
반정(反正)한 후에 외람하게 선왕(先王)의 은정어린 대우를 받아 높은 벼슬을 두루 역임한 지 무릇 10여 년이 되었습니다. 일찍이 자신의 역량을 헤아리지 않고 가슴속의 소회를 진달한 것이 여러번이었는데, 당시 대신의 소견이 같지 않아서 끝내 행해지지 않아 항상 탄식해 왔습니다.
신의 망령된 말은, 그 하나는 임금의 학문을 진보시키는 방법과 덕을 닦는 요령이며, 그 셋은 전역(田役)의 폐단과 군역(軍役)의 괴로움 및 과거(科擧)에서 배강(背講)하는 폐해입니다. 이 세 가지는 바로 신이 평생 마음을 다하여 헤아려서 고치고자 한 것입니다. 항상 생각하기를 ‘지금의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세상을 구제하는 방책은 오직 이 세 가지에 달려 있고 더는 다른 계책이 없다. 참으로 이것을 행하면 모든 나라 안의 쌓인 폐단이 일체 다 없어질 것이다. 폐단이 없어지면 다스림이 이르는 것은, 마치 병이 없어지면 몸이 편안해지는 것과 같다.’라고 여겼습니다. 지금 신이 삼가 그릇되이 은혜를 입어 이에 이르렀는데 사양해도 허락을 받지 못하니 오직 송구스러운 마음만 쌓입니다. 다만 이미 그 지위에 있으니 한갓 자리만 채우고 있어서는 안 되고 오직 정성을 다하고 힘을 다해 보답하기를 도모해야 하는데 평소 쌓아온 바가 오직 이 네 가지 뿐입니다.
옛날 송(宋)나라의 사마광(司馬光)이 인종조(仁宗朝)에 차자를 올려 인(仁)·명(明)·무(武) 및 임관(任官)·신상(信賞)·필벌(必罰) 여섯 가지 일을 논하였고, 영종조(英宗朝)에 이르러 또 이 일을 아뢰면서 ‘신은 두루 세 조정을 섬겼는데 모두 이 여섯 가지 일을 말하였습니다. 평생 힘써 배워 얻은 바가 모두 여기에 있습니다.’ 하였습니다. 신의 평생 소회는 오직 이 네 가지뿐이기 때문에 삼가 전일의 소장(疏章)에서 이 일을 논한 것을 한 책으로 만들어 올립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천근(淺近)한 말이라 하여 소홀히 하지 말고 보시어 반복하여 자세히 살피소서. 그러면 반드시 그 깊은 병폐가 참으로 신이 진달한 바와 같고, 구하는 방도 역시 이렇게 하지 않을 수 없음을 환히 아실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신의 평생 하고자 한 것이 행해지고 치평(治平)의 효과도 친히 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어찌 유독 어리석은 신만의 다행이겠습니까. 실로 국가의 다행이며, 세도(世道)의 다행이 될 것입니다."
하였는데, 상이 가납(嘉納)하였다.

 

11월 16일 신미

김집(金集)을 대사헌으로 삼았다.

 

집의 송준길(宋浚吉)이 상소하기를,
"신이 지난날 재차 경연에서 모시면서 외람되이 소회를 진달하였는데, 성상의 말씀이 자상하여 장려하심이 깊었습니다. 신이 목석(木石)이 아닌 이상 어찌 감격할 줄 모르겠습니까. 단지 신은 정신이 혼미하고 말이 천박해 성상의 마음을 깨닫게 하여 융숭한 보살핌에 우러러 보답할 수가 없어서 혼자말로 사심을 얘기하노라니 부끄러운 마음만 듭니다. 그 때의 이야기는 모두 한마디 한마디가 순수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만 다시 번갈아가며 아뢸 즈음에 성상께서 어찌 다 기억하셨겠습니까. 또 신이 성상의 하교를 직접 받들었는데 구언(求言)하는 뜻이 정녕할 뿐만이 아니었으니 이는 형식적으로 고사(故事)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장차 채용하여 신화(新化)를 도우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이 어찌 감히 묵묵히 한마디도 없이 전하의 소망을 외롭게 하겠습니까. 삼가 탑전에 나아가 진달했던 바를 하나하나 다시 반복하여 아뢰어서 나머지 뜻을 다합니다. 오직 전하께서는 사람이 못났다 하여 말까지 버리지 마시고 혹 성상의 마음에 두신다면 역시 죽은 말을 사들이는 뜻194)  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신이 처음 뵙던 날에 즉시 진언하기를 ‘전하께서 지금 《중용(中庸)》을 강하고 계시는데 주자(朱子)의 서문(序文)에 서술한 상고(上古)의 성왕(聖王)의 도통(道統)을 전함과 위미(危微)와 정일(精一)에 대한 16자는 실로 만세 심학(心學)의 연원(淵源)으로, 예로부터 유신(儒臣)들이 그 임금에게 도통(道統)의 책임을 지우려 했던 것은 신하의 충성하고자 하는 지극한 뜻이었습니다. 오늘날 신하가 성상과 같이 훌륭한 분을 만나서 이것으로써 바라는 자들도, 그 마음이 어찌 간절하지 않겠으며 전하 역시 어찌 사양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성상께서는 즉시 그렇다고 하셨습니다.
대저 이른바 도(道)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일용하는 사이와 동정하는 즈음에 사리를 정밀하게 살펴 참으로 그 중(中)을 얻는 것을 말합니다. 이로써 덕(德)을 이루는 것을 수기(修己)라고 하며, 이로써 교화를 베푸는 것을 치인(治人)이라 하며, 수기와 치인의 실제를 다하는 것을 전도(傳道)라고 하니, 요순이 서로 전한 것이 단지 이와 같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도통(道統)이 군상(君相)에게 있으면 도가 한 시대에 행하여져 은택이 후세에 유전(流傳)되고, 도통이 필부(匹夫)에게 있게 되면 도가 한 세대에 행하여지지 않고 단지 후학에게만 전해집니다. 만약 도통이 실전(失傳)되고 아울러 필부가 전해 받아서 진작시키지도 못하면 천하가 어두워져 따를 바를 모르게 됩니다.
아, 주공(周公)이 세상을 뜬 후로 백세 동안 훌륭한 정치가 없었고, 맹자가 죽은 뒤로 천년 동안 진정한 선비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송(宋)나라에 이르러 정(程)·주(朱) 등 제자(諸子)가 비로소 그 도통을 접하였으나 그 후에는 또 아무도 없었으며, 임금으로 이 도를 맡아 전한 자는 더욱 들을 수 없었으니, 이것이야말로 신이 길이 한탄해오던 것으로 진정 전하에게 바라는 바입니다.
신은 듣건대 《중용(中庸)》 수장(首章)은 《대학(大學)》의 경(經) 1장과 실로 서로 안팎이 되어 몸을 가다듬고 국가를 다스리는 도가 대략 여기에 갖추어져 있다고 합니다. 대개 ‘하늘이 부여해준 성품[天命之性]’은 명덕(明德)의 도구(道具)이며, ‘성품대로 따르는 도[率性之道]’는 명덕의 행하는 바이며, ‘사람이 행해야 할 방법을 제정한 가르침[修道之敎]’은 신민(新民)의 법도(法度)이며, ‘계구(戒懼)’는 전체를 포함하는 공부인데 정심(正心)의 분야이며, ‘신독(愼獨)’은 성찰 공부인데 성의(誠意)의 분야입니다. ‘중화의 극치에 이르게 되면 천지가 제자리를 찾아 안정하고 만물이 제대로 길러질 것이다.[致中和天地位焉萬物育焉]’는 명덕(明德), 신민(新民), 지어지선(止於至善), 명명덕어천하(明明德於天下)를 말하는 것입니다. 오직 전하께서는 정신을 쓰시고 묵묵히 생각하시어 의심하지 말으시고 도(道)를 스스로 맡으셔서 성인은 반드시 배워야 하고 요순은 반드시 본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소서. 그리하여 스스로 물러나거나 겁내지 말며, 스스로 무기력해 하지 말며, 이해 관계에 얽힌 말에 동요되지 말며, 세속의 논의에 흔들리지 말으셔서 반드시 이 도(道)로 하여금 크게 밝아지게 하시고 크게 행해지도록 하여 도통의 전수함을 접하소서. 그러신다면 만세의 다행이겠습니다.
안연(顔淵)은 누추한 시골의 선비였는데도 오히려 말하기를 ‘순(舜)은 어떤 사람이며 나는 어떤 사람인가. 노력하면 순처럼 될 수 있다.’ 하였는데, 더구나 당당한 천승(天乘)의 나라 임금으로서 황천(皇天)의 부탁을 받은 책임과 만백성을 거느린 책임이 있는데도 스스로 적게 여기고 스스로 포기하겠습니까. 오직 전하께서는 다시 생각하소서.
또 신이 계해년 중흥(中興)하던 처음에 진언하기를 ‘훌륭한 사람들이 조정에 가득하니 본받을 만한 일이 많습니다.’ 하니, 전하께서 즉시 답하시기를 ‘비록 그러하나 마땅히 삼대를 본받아야 한다.’라고 하셨으니, 그 말씀이 훌륭하셨습니다. 신이 진달한 바는 어찌 그리 하나같이 비루하였으며 성명의 마음씀은 어찌 그리 뛰어났습니까. 옛날 정명도(程明道)가 송 신종(宋神宗)을 대하여 극진히 치도(治道)를 진달하니, 신종이 이르기를 ‘이는 요순의 일인데 짐이 어떻게 감당하겠는가.’ 하자, 명도가 수심에 잠겨 말하기를 ‘폐하의 말씀은 종사와 신민의 복(福)이 아닙니다.’라고 하였으니, 아, 전하의 말씀이야말로 실로 조종의 경사이며 백성들의 복입니다. 오로지 아래에 있는 자들 가운데 명도와 같은 자가 없어 개탄스러울 뿐입니다. 정자의 말에 ‘당우(唐虞)의 시대는 미칠 수 없으나 삼대는 결단코 회복할 수 있다.’라고 하였는데, 그가 신종에게 올린 차자 가운데 매우 자세히 논했습니다. 정자가 어찌 거짓말을 하여 당시 임금과 후학을 속였겠습니까. 오직 전하께서는 천지를 위해 마음을 세우시고, 백성을 위해 표준을 세우시며, 지나간 성인을 위해 끊어진 학문을 이으시고 만세를 위해 태평한 시대를 열으소서. 이런 뜻을 굳게 지녀 변치 말으시고 물러나지 말으셔서 먼저 5년, 7년의 계획을 세워 1년 동안 반드시 1년치의 공부를 하소서. 그러면 뜻이 일과 함께 수립되고 일이 뜻에 따라 이루어져 장차는 오직 전하께서 하고자 하시는 대로 될 것입니다.
선유(先儒)들이 상중에 있는 날을 선단(善端)이 발견되는 때라고 하였는데, 제가 친히 경험해 보고서야 바야흐로 이 말이 실지로 그렇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지금 전하께서 선단이 바야흐로 싹터 인자한 마음이 훈훈하여 마치 불꽃이 처음 타오르는 듯하고 샘물이 비로소 솟는 것과 같습니다. 맹자가 ‘그걸 채우면 사해(四海)를 보존할 수 있고 채우지 않으면 부모를 섬기지도 못한다.’ 하였으니, 참으로 두렵습니다. 옛날의 제왕 중에는 처음에는 비록 뜻이 있었으나 나중까지 잘하는 자는 많지 않아서 앞과 뒤가 마치 두 사람인 듯한 자가 많았습니다. 지금은 성명의 뜻이 진실로 정립되었다 하겠습니다만, 뒷날 세월이 흐르고 세상이 변하여 일에 익숙해지고 정이 들어서 마침내는 만가지 계획이 아득하여 한 가지 일도 그 전 뜻에 맞는 것이 없게 되면 천년 후에 어찌 이에 대해 탄식하고 통한스레 여기지 않을 줄을 알겠습니까.
전하께서는 거조를 조절하시는 사이에 실로 공의(公議)에 맞지 않은 것이 많습니다. 옛날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이것에 밝은 자는 혹 저것에 어두운 법이다. 큰 성인이 아니면 어찌 기질(氣質)의 병이 없을 수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성명께서 평소 여기에 대해 묵묵히 살피셔서 스스로 부족하심을 깨달으셨기 때문에 경연에 임하시어 탄식하시며 심히 어렵게 여기신 것은 아니십니까.
주부자(朱夫子)가 말하기를 ‘무릇 양(陽)은 반드시 강건(剛健)하고, 강건하면 반드시 밝게 되고, 밝으면 알기가 쉬우며, 음(陰)은 반드시 유약(柔弱)하고, 유약하면 반드시 어둡게 되고, 어두우면 헤아리기가 어렵다. 그 광명정대(光明正大)하고 소창통달(疎暢通達)함이 청천백일(靑天白日)과 같고 고산대천(高山大川)과 같으며, 위엄은 뇌정(雷霆)과 같으면서도 은택은 우로(雨露)와 같고 마치 용호(龍虎)처럼 맹렬(猛烈)하면서도 인봉(麟鳳)처럼 상서(祥瑞)로워 뜻이 크고 조금도 의심할 것이 없는 자는 반드시 군자(君子)이다. 아부나 하고 이랬다 저랬다 하며 규합하는 것이 뱀이나 지렁이 같고 서케처럼 잗달며 물여우나 여우처럼 교활하며 도적이나 저주(咀呪)와 같이 교활하여 비교할 수 조차 없는 자는 반드시 소인(小人)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주자의 이 말은 군자와 소인의 정상을 모두 갖추었으니, 임금은 이로써 사람을 관찰하신다면 일이 훨씬 손쉬울 것입니다.
장남헌(張南軒)195)  이 말하기를 ‘절의를 지키다 죽는 선비는 반드시 안색을 범하면서 과감하게 간(諫)하는 사람 가운데서 구해야 한다.’라고 하였으니, 임금은 역시 이런 뜻을 아셔야 합니다. 애공(哀公)이 묻기를 ‘어떻게 해야 백성들이 복종하겠는가?’ 하니, 공자(孔子)가 대답하기를 ‘정직한 자를 채용하고 모든 정직하지 않은 자를 놓아 두면 백성들이 복종하고, 정직하지 않은 자를 들어 쓰고 정직한 자를 버려두면 백성들이 복종하지 않을 것입니다.’고 하였습니다. 정자가 말하기를 ‘행동거지가 마땅하면 백성들이 복종한다.’고 하였으니, 대개 임금의 격치(格致)·성정(誠正)의 학문이 공력(功力)이 이미 깊어 권도(權度)가 어긋나지 않은 연후에야 여러 아랫사람의 시비(是非)와 사정(邪正)이 그 실제를 얻을 수 있습니다. 또 대신에게 묻고, 가까운 신하에게 물으면 거동하는 즈음에 거의 잘못이 없어 인심이 복종할 것입니다. 대저 이렇게 하면 조정이 깨끗해지고 기강이 바로잡혀 엄숙해지며 편당(偏黨)하는 옛버릇 역시 모두 모르는 가운데 융화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어진 자와 불초한 자가 거꾸로 되면 끝내는 반드시 난망(亂亡)에 이르고 맙니다.
또 전일 어사를 보내라는 성상의 하교가 정녕하여 아래에서 엄선하여 아뢰도록 하였는데, 정원이 옛날의 규례가 아니라 하여 고집하였습니다. 어리석은 신의 생각으로는, 성상께서 새로 보위(寶位)에 등극하시어 여러 신하들의 현명 여부를 혹 미처 전부 살피지 못하셨을 것이니 대신이 뽑아 아뢰는 것이 사의(事宜)에 맞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조정의 체례(體例)를 알지 못하여 그냥 물러나오고 말았습니다. 선정신(先正臣) 이이(李珥)의 기록을 상고해 보니, 선조조(宣祖朝) 때 어사를 파견하려고 대신에게 누가 괜찮은가 물으니 대신이 ‘뽑는 것은 성상의 마음에 달려 있다.’고 하자, 당시의 식자(識者)들이 말하기를 ‘사람을 천거하여 직책을 제수하는 것은 대신의 직임인데 평소에 마음을 쓰지 않았고, 물음에 임해서는 말을 꾸며 댔으니, 아주 대신의 체모를 잃은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바로 오늘날 거울삼아야 할 것입니다. 대저 어사는 중요한 직임이어서 혹시라도 적임자를 얻지 못하여 염문(廉問)을 자세히 하지 못하거나, 출척이 공정하지 못하면 그 해가 아주 커서 도리어 보내지 않는 것만도 못하게 됩니다. 지금 비록 이미 지난 일이나 성명께서는 후일 유념하시어 비슷한 경우에 적용하소서.
또 전하께서 인재를 얻기 어렵다고 탄식하시었는데, 이는 사실 그렇습니다. 그러나 옛말에 이르기를 ‘인재는 다른 세대에서 빌리지 않아도 하늘이 한 세대의 사람을 내어 한 세대의 일을 완료하기에 족하다.’라고 하였습니다. 《주역(周易)》에 이르기를 ‘같은 유의 소리가 서로 응하고, 같은 유의 기운이 서로 찾기 때문에 구름은 용을 따르고 바람은 호랑이를 따른다.’라고 하였습니다. 오늘날 비록 인물이 적기는 하지만 만약 정성을 다하여 구하면 천리나 되는 나라에 어찌 한 세대의 인재가 없겠습니까. 오직 그 가운데서 나은 자를 뽑아 써서 천위(天位)를 함께 하고 천직(天職)을 다스리며 서로 믿기를 계부(契符)처럼 하고, 서로 친하기를 부자(父子)처럼 한 연후에야 정교(政敎)를 닦아 밝히고 한 시대를 다스려 안정시킬 것입니다. 삼대의 군신은 미칠 수 없거니와 비록 부견이 왕맹을 등용하고, 우문태가 소작을 등용했지만 역시 모두 군신의 마음과 하나가 되어 소강(小康)의 다스림을 이룰 수가 있었습니다.
예로부터 오늘날까지 상하가 서로 맺어지지 않고서 일을 성공시킨 자는 없었습니다. 《주역(周易)》 혁괘(革卦) 구삼(九三)에 이르기를 ‘혁명해야 한다는 말이 세번 일치되면 신용이 있어서 변혁할 수 있다.’고 하였고, 태괘(泰卦) 구이(九二)에 이르기를 ‘거치른 것까지 포함하여 과단성 있는 용기를 가지며 은미한 일이나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인재를 버리지 않으며 사사로운 붕당을 끊어버리면 중용의 도에 나란히 짝하게 될 것이다.’고 하였는데,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크게 변혁하면 크게 이롭고 조금 변혁하면 이익이 적다.’라고 하였으며, 동자(董子)도 역시 이르기를 ‘정치를 하다가 행하여지지 않으면 심한 것은 반드시 경장(更張)해야만 행해지게 된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모두 변통해야 할 것은 변통하지 않을 수 없고, 경장해야 할 것은 경장하지 않을 수 없음을 말한 것입니다. 대개 예로부터 국가가 전성함이 극에 이르면 중간에서 쇠미하게 되고, 법(法)이 오래 되면 폐단이 생겨나 편안함에 길들여지고 누습을 그대로 따라 날이 갈수록 글러져서 장차 나라를 다스릴 수 없게 되면 반드시 훌륭한 임금과 훌륭한 신하가 개연히 흥기(興起)하여 혼매한 자를 깨우치고 묵은 폐단을 통렬히 고쳐서 선왕의 유지(遺志)를 잘 계승해 일대의 규모를 환히 새롭게 하는 법으로, 그런 연후에야 선열(先烈)에게 공이 빛나고 후손에게 형업을 물려줄 수 있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보시기에 지금의 나라 형세가 어떻다고 여기십니까. 백성들의 곤란함이 이미 심한 지경에 이르러 밖으로는 제압을 받고 안으로는 믿을 곳이 없으며 천재(天災) 지변(地變)과 물괴(物怪) 인요(人妖)가 없는 달이 없으니, 비유하자면 큰병이 든 사람이 원기가 점차 다해 백가지 증세가 한꺼번에 일어나서 가슴속의 숨결 하나만이 겨우 간신히 남아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이러한데도 만약 급히 약을 투여하여 살릴 생각은 하지 않고 팔짱을 끼고서 죽기만을 기다린다면 자애롭지 못하고 효성스럽지 못한 데로 돌아가는 것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이 어찌 전하께서 변통할 줄을 모르고 그전 잘못을 답습하거나 구습에 젖어 있을 때이겠습니까.
신은 평소 시무(時務)에 어두워 참으로 무슨 술책을 써야 구제할 수 있을지를 모릅니다. 그러나 시골에 살면서 익히 부로(父老)와 사민(士民)의 논의를 들었는데, 모두가 수륙군(水陸軍)의 인족(隣族)을 침징(侵徵)하는 것과 삼세목(三稅木)이 너무 가는 것 및 이서(吏胥)들이 농간을 부리는 행위, 공평하지 못한 부역, 고르지 못한 공안(貢案)196)  이 오늘날의 고질적인 폐단이라고 하였습니다. 또 대동법(大同法)을 시행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매우 간절하여서 잔뜩 기대를 하고 있고 졸곡(卒哭) 이후에는 반드시 크게 진작시키고 크게 변혁시킴이 있을 것이니, 잠시 더 살아서 덕화(德化)가 이루어지는 것을 보았으면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졸곡이 지난 지 몇 달이 되었는데도 아직 사방의 기대에 위로함이 없습니다. 신은 조정에서 지금 강구하고 있다는 것을 압니다만, 역시 자상하고 기상이 단아하며 재주와 성의를 겸비한 신하를 각별히 엄선하여 위임해서 완성토록 책임지우고 착실히 변통하여 백성들의 작은 폐해나마 구제토록 하였으면 합니다. 그러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올해는 추수 역시 가망이 없으니 간신히 살아남은 잔약한 백성들이 어떻게 감당하겠습니까. 생각이 이에 미치니 참으로 불쌍합니다. 두루 전사(前史)를 보건대 장각(張角)과 갈영(葛榮)의 변란197)  이 어찌 일찍이 굶주림 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는 더욱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신은 듣건대, 호남(湖南)·호서(湖西) 두 도는 백성들의 폐해가 심하여 연해 지방 일대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는 어느 궁가(宮家)의 소유이고 어디서 어디까지는 어떤 세도가의 소유가 되어 어염(魚鹽)의 이익에 백성들은 손을 대지 못한다고 합니다. 반정(反正)하던 처음에 대간의 논핵을 인하여 혁파했었는데, 그 후 침해가 또 전과 같아 백성들의 원망과 괴로움이 이에 극도에 이르렀습니다. 또 파주(坡州)는 작은 고을인데 대군(大君)이 농장(農庄)을 설치하여 부역을 피하려는 백성들이 다투어 달려가고 있는데도 관가에서 감히 호령을 하지 못해 백성들의 부역이 이 때문에 더욱 고통스럽습니다. 이러한 곳이 몇 군데나 되는지 모르며 궁노(宮奴)들이 교만 횡포하여 소란을 피워 나라 사람들의 말이 자자한데, 아, 이 역시 금지시킬 수 없겠습니까. 전(傳)에 이르기를 ‘부자(父子)·형제(兄弟)가 족히 본받은 후에야 백성들이 본받는다.’라고 하였으니, 오직 성명께서는 마음을 쓰소서.
내수사의 사장(私藏)에 이르러서는 전후의 유신들이 파하기를 청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옛사람이 이른바 ‘제후의 부(富)는 백성들에게 저장한다.’라고 한 것은 이런 것이 아닐 듯하며, 주부자(朱夫子)가 말한 바 ‘사저(私貯)로 여겨서 사인(私人)에게 맡긴다.’라고 한 것이 어찌 매우 추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지난날 대신(臺臣)이 성명께 바란 바가 심히 간절하였는데도 전하께서 살피지 않으셨으니 비록 간절한 개유를 받더라도 끝내 백성들의 마음에는 석연치 못한 점이 있을 것으로, 신은 전하를 위해 애석하게 여깁니다.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즉시 통렬하게 스스로 힘쓰지 않으십니까. 대신이 전후에 논한 데 대해 아울러 지휘를 내리시어 속히 깨달으심을 보이소서. 내수사 사재(私財)는 비록 갑자기 혁파하기는 어렵더라도 혹 연한(年限)을 한정하고, 혹은 절반으로 나누어 호조에 부치시고, 사노(私奴)로 투속한 자 역시 빨리 환급을 허락하시어 사방에 사례하기를 어제 송시열(宋時烈)이 아뢴바 공상지(供上紙)에 관한 일처럼 하소서. 그런 연후에야 중외(中外)의 모범이 되고 옛습성을 씻어내 훌륭한 정치를 이루게 될 것입니다.
정부자(程夫子)의 논의 가운데 ‘중용(中庸)을 하는 데 있어서 불가능한 것으로는 극기(克己)가 가장 어렵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사상채(謝上蔡)198)  의 말에 ‘자기 사심을 이기는 것은 모름지기 성(性)이 편벽하여 극복하기 어려운 곳에서부터 극복해 가야 한다.’ 하고, 또 스스로 말하기를 ‘극기 공부는 버리기 어려운 것을 가려서 버리되 집에 좋은 벼루가 있으면 남에게 줄 수 있는 정도가 되어야 한다. 그런 후에는 공부가 점점 수월해질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상채를 본받지 않으십니까. 스스로 기질상 가장 극복하기 어려운 곳이 어디에 있는가를 살피시어 먼저 가장 극복하기 어려운 것을 한칼에 끊어 버려서 오늘 하나의 어려운 일을 행하고, 내일 또 하나의 어려운 일을 행하여 오래되면 패연(沛然)하게 어려운 일이 없게 되고 마침내는 극복하지 못할 것이 없어서 중용의 경지에 이르는 것도 가능할 것입니다.
주부자가 효종(孝宗)에게 고하기를 ‘폐하께서는 송(宋)나라의 성주(聖主)이시며, 오늘날은 폐하의 성대한 시대입니다. 그런데 소망에 부응하지 않으시면 조종(祖宗)의 백성과 후손들이 더는 귀복(歸服)할 마음이 없게 될 것입니다.’ 하였고, 소공(召公)이 성왕(成王)을 경계하기를 ‘신생아가 처음 태어났을 때에는 스스로 철명(哲命)을 부여받는 것과 같으니, 지금 하늘이 철(哲)을 명하실 지 길흉을 명하실 지 여러 해 다스리도록 명하실 지 모르지만, 알 수 있는 것은 지금 우리가 새로운 터전을 어떻게 경영하느냐는 것입니다.’ 하였고, 맹자(孟子)는 말하기를 ‘비록 지혜가 있더라도 시기를 보는 것만 못하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천명(天命)이 돌보아 주는 처음과 인심이 간절히 바라는 때를 만나셨습니다. 이는 실로 근본을 바로잡고 시작을 올바르게 하여 스스로 철명(哲命)을 부여받을 때이며 도리에 순종하고 유리한 형세를 이용하여 시도해 볼 만한 기회입니다. 비단 전하께서 기회를 잃어서는 안 될 뿐만 아니라 국가의 성쇠와 치란(治亂)의 구분, 묘사(廟社)의 안위(安危) 영욕(榮辱)의 조짐이 모두 여기에서 결정되니,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으며 삼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신이 탑전에서 감히 나라를 어지럽힌 자를 형벌함에 있어서 중전(重典)을 쓰라는 말로써 아뢴 것은 참으로 때에 따라 폐단을 구하는 의리여서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으로, 사마공(司馬公)이 말한 바 ‘가볍게도 하고 무겁게도 해야 한다[胥輕胥重].’는 것과, 주자(朱子)가 말한 바 ‘관용과 위엄을 병용하여야 한다.’는 뜻이지, 전하를 형법(刑法)을 엄하게 하고 각박한 것을 숭상하도록 인도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공자가 이르기를 ‘법령으로 인도하고 형벌로 다스리면 백성들이 구차하게 형벌만 면하려 할 뿐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없고, 덕으로 인도하고 예(禮)로 다스리면 부끄러워할 줄을 알고 또 착한 사람이 되려 할 것이다.’고 하였는데, 주자가 해석하기를 ‘법령이란 다스리는 도구요 형벌이란 다스림을 보조하는 법이다. 덕과 예는 다스림을 도출해내는 근본이며 덕은 또 예의 근본이다.’고 하였으니, 성현들이 논한 바는 만세토록 행해도 폐해가 없을 것입니다. 오직 전하께서는 깊이 유의하시되 완급(緩急)을 아소서.
신은 듣건대 옛날의 성왕(聖王)은 항상 조심하고 삼가하여 날마다 수레에는 여분(旅賁)199)  의 규정을 두고 조하를 받는 뜰에서는 관사(官師)의 전례(典禮)를 두고 자리에는 훈계하는 말을 외워주는 신하를 두고 침소에는 측근에서 모시는 신하들의 잠계(箴戒)를 두며, 사무를 처리할 때는 고사(瞽史)200)  를 두어 인도하게 하였고 평소에는 사공(師工)의 송(誦)이 있게 하여 사(史)는 서(書)를 잃지 않고, 몽(矇)은 송(誦)을 잃지 않아 훈어(訓御)하도록 하였습니다. 후세에는 이런 법이 모두 폐지되고 경연 한 가지 일에만 대략 옛날 뜻이 있으니, 선유들이 이른바 군덕(君德)의 성취를 경연에다 책임지운다는 것이 이것입니다. 좋은 예로는 정자(程子)의 말에 ‘임금이 하루 가운데 어진 사대부(士大夫)를 접할 때가 많고 환관과 궁첩을 친히 할 때가 적으면 자연히 기질이 변화하여 덕기(德器)가 성취된다.’고 하였습니다. 동래 여씨(東萊呂氏)201)  는 말하기를 ‘임금은 항상 자상하고 독실한 사람과 함께 거처하여 선단(善端)을 흥기(興起)시키고 덕성을 함양하여 그 경조(輕躁)함을 누르고 그 사(邪)를 없애 날로 고쳐 나가고 달로 변화해야지 말로만 하는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참으로 지론입니다.
신이 장로(長老)에게 듣건대, 선조 대왕께서는 전쟁이 한창인 즈음에도 오히려 날마다 세 번 경연을 열어 강학을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선대왕(先大王)께서는 계해년 초기에 역시 날마다 세 번 경연을 열었으며 또 자주 야대(夜對)를 내렸다고 하니, 부지런하고 근면하여 최대한으로 나라를 잘 다스려 보려고 한 것이 이와 같았습니다. 신이 삼가 요즈음을 보건대, 경연을 여는 것이 매우 드물어 조종의 가법(家法)에 비하면 실로 부끄러움이 있습니다. 정자가 말한 바 ‘하루 걸러 한 번 경연을 열어 몇 줄을 강독하고 여러 관원들은 으레 입대하였다가 점잖게 물러가니 이렇게 하면서 보양(輔養)을 책임지우는 것은 역시 어렵지 않겠는가.’라고 한 것이 참으로 두렵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상중(喪中)에 계시어 옥후(玉候)가 미처 정상을 회복하지 못하셨고 날씨조차 또 매우 추우니 참으로 자주 경연에 임어하시어 피로하게 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전하께서 향학하심이 마치 물이 동쪽으로 흐르듯 하시니 매양 겨울날이 조금 따뜻해질 때와 밤기운이 청명할 즈음에 재보(宰輔)를 등대시키고 유신(儒臣)을 인접하여 좋은 도리를 개진하게 하여 치체(治體)를 강마(講磨)하게 하면 총명이 날로 열리고 지기(志氣)가 날로 강해져 그 절선(節宣)202)  하는 도리에도 반드시 크게 유익함이 있게 될 것입니다.
김집(金集)의 경우는 노성한 숙유로 현재 후한 대접을 받아 온 나라 사람들이 다 추앙하고 있으니 성상께서 현인을 좋아하는 정성이 예사롭지 않은 데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그를 접견하실 때가 매우 드물고 단지 특진(特進)의 예(例)만 쓰시니, 어찌 일폭 십한(一暴十寒)의 지경으로 돌아가지 않겠습니까. 김집은 나이가 비록 많으나 근력이 정강(精剛)하니, 질병과 사고가 있는 때를 제외하고는 자주 입시하게 하기를 선조(宣祖) 때 정경세(鄭經世)에게 했던 것처럼 하소서. 그렇게 하면 반드시 도움되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 세자(世子)께서는 옥질(玉質)이 유충(幼冲)하시어 금(金)이 용광로에 있는 것과 같으니 보양(輔養)하는 도리를 소략하게 해서는 더욱 안 됩니다. 역시 이 사람으로 하여금 자주 진현(進見)하여 보도하게 하소서. 오늘날 재학(才學)이 탁월하고 충성심이 뛰어나 중외의 칭송을 받는 자는 모두 하루라도 전하 곁에 있게 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이유태(李惟泰)·권시(權諰) 등 역시 학식이 넓고 지려가 심원하며 선비들의 바람이 심히 무겁습니다. 신 같은 자는 잔약하고 못났는데도 역시 외람되게 유악(帷帷)에서 모시고 있는데, 오직 이 두 신하는 아직도 먼 밖에 있어 어리석은 자가 훌륭한 자보다 앞에 있는 격이니, 신은 실로 부끄럽습니다. 원컨대 특별히 부르시어 경연에 입시하도록 하소서.
신은 본래 오활한 유생인데다가 고질까지 있으며 학술이 천박하고 심신(心神)이 어두워서 본디 뛰어난 의견을 제시하여 명지(明旨)에 맞추어 조금이라도 치화(治化)를 도울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전하께서 이미 성인으로 삼대(三代)의 다스림을 할 것을 스스로 기약하셨으니 근본은 선 것입니다. 사람을 알아 잘 맡기고 거조가 마땅함을 얻으면 민심이 복종할 것이며, 변통하여 백성의 고통을 구제하고 극기(克己)하여 선도(善道)를 따르면 폐습이 제거되어 원근이 모두 감복할 것이며, 자주 경연에 임어하시어 현인을 친하고 도를 강마하면 성덕이 날로 이루어져 다스리는 효과가 날로 새롭게 될 것입니다. 무릇 이 몇 가지 것을 날로 강마하여 부지런히 해 게으르지 않으면 다스리는 도리가 대략 갖춰지고 나머지는 그에 따라서 저절로 조처될 것입니다. 그러나 천하의 일은 임금의 마음에 근본하지 않는 것이 없어서 온갖 책임 및 뭇사악함과 뭇욕심이 몰려들어 위험하게 흔들려 편안하기 어려움이 필부(匹夫)나 사인(士人)보다 만배나 됩니다. 참으로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아무쪼록 조심하시어 혹시라도 게을리하지 마시고 신심(身心)을 수습하고 정신을 차리시어 발하기 전에는 가지고 있는 마음을 엄할수록 더욱 공경히 하고 발했을 때는 성찰한 바로써 더욱 정미(精微)하고 더욱 치밀하게 하여, 침착하고 고요하며 깨끗하고 너그럽게 하셔서 참된 마음이 자리를 잡아 객기(客氣)에 흔들리지 않게 하고 기혈(氣血)이 법에 따라 희로(喜怒)에 넘치지 않게 하소서. 본원(本原)이 이러한데도 다스리는 효과가 드러나지 않은 예는 없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정자(程子)가 말한 바 ‘일마다 고치더라도 장차 그 고치는 것을 다할 수가 없고, 사람마다 모두 버리더라도 그 버리는 것을 다할 수 없다.’는 경우가 될 것이니, 어찌 매우 두렵지 않겠으며 장차 날로 난망으로 돌아가지 않겠습니까.
신은 이에 또 느낀 바가 있습니다. 선비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제각기 품은 뜻이 있는데도 초야에 묻혀 사는 것은 본래 원했던 바가 아니라 참으로 부득이해서 그런 것입니다. 주부자(朱夫子)가 말하기를 ‘사대부의 출처(出處)의 득실은 비단 자기 한 사람의 사사로움만 아니라 풍속의 성쇠와 관계된다.’라고 하였습니다. 한 선비의 출처가 만약 풍교(風敎)와 관계되지 않는다면 주자의 의논이 이와 같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대저 어찌 의롭지 않은 것을 주자가 말하였겠습니까. 이는 반드시 그 도가 있는 것입니다. 신과 같은 자는 말할 것도 없지만 무릇 초야(草野)에 있는 여러 선비들이 모두 전하께서 새로 즉위하시어 교화하고 융숭히 예우하는 데 감격하여 기꺼이 이르고 있습니다. 만약 다른날에 전하의 덕업(德業)이 날로 일어나고 교화가 날로 융성하여 우리 나라를 마치 상(商)나라 고종(高宗)처럼 안정시키고 쇠퇴한 국가를 흥기시켜 주 선왕(周宣王)처럼 난리를 평정하신다면 오늘날의 여러 신하들은 모두 영화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만에 하나 도모한 바가 잘못되면 비단 전하만이 천고(千古)에 웃음을 살 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여러 신하들도 모두 은혜를 탐하고 벼슬에 연연하여 뜻을 지키지 못한 데로 귀결되고 말 것입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일찌감치 그들이 돌아가는 것을 허락하여 그들의 평소 뜻을 이루게 하시면 거의 풍교(風敎)의 일단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오직 전하께서는 그들의 무례함을 헤아리시어 마음쓰시면 다행이겠습니다."
하였는데, 답하기를,
"충성스럽고 임금을 사랑하는 정성이 말 밖에 흘러 넘친다. 말한 바가 모두 절실하고 심원하니 두려운 마음을 두지 않겠는가."
하고는, 인하여 비국으로 하여금 의논하게 하였다. 비국이 아뢰기를,
"이 소의 내용을 보건대, 길고 긴 말이 경전(經傳)의 뜻과 선현(先賢)의 의논에 근본하지 않은 것이 없고 또 성상께서 입신(立身) 수기(修己)하는 방도와 개기(改紀)하고 백성을 소생시키는 도리에 절실하지 않은 것이 없으니, 그의 학문이 넓고 식견이 밝음에 오늘날 세상의 제유(諸儒)가 미치지 못함을 알겠습니다. 바야흐로 성상께서 다스리기를 구하는 날을 당해 초야에 이와 같은 유신이 있어서 우뚝이 서서 이처럼 아름다운 계책을 진달하니 참으로 국가의 다행입니다.
그가 말한 바에 따라 논하겠습니다. 도통(道統)을 전하는 것으로 전하께 바랐는데 이는 참으로 맹자가 요 순이 아니면 진달하지 않은 뜻이니, 그의 학문이 도(道)에서 얻은 것이 아니라면 어찌 이런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임금에게 책난(責難)한 것이 지극하다고 하겠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성명께서는 도통을 자임(自任)하시고 이로써 뜻을 세우신 다음 현인을 친히 하시고 학문에 힘쓰셔서 확충하소서. 그러면 어찌 요 순에 미치지 못할 것을 염려하겠습니까. 성상의 전교에 이른바 삼대(三代)를 본받아야 한다고 하신 것은, 이는 참으로 도통으로써 자임(自任)하신 것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이 뜻을 굳게 지켜 물러서지도 말고 변치도 말으소서. 그러면 장차 성상의 덕망이 날로 높아지고 성상의 다스림이 날로 융성해질 것이니, 종사와 백성들에게 다행함을 어찌 말로 다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을 알아보면 명철하다.’는 말은 순임금 역시 어렵게 여겼습니다. 성상의 전교에 이것을 염려하신 것은 실로 어렵게 여기고 삼가는 도리입니다. 삼가 보건대 성상의 뜻이 인재를 변별(辨別)하는 것으로 일을 삼고 계시니 국가를 다스림에 있어서 요점을 얻었다고 하겠습니다. 인용한 주자(朱子)의 말은 참으로 사람을 보는 법이니, 이로써 살펴보면 선악과 사정을 거의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변혁하여 시폐를 구하는 것은 참으로 오늘날의 급선무이며, 인족(隣族)이 침해를 받고 공부(貢賦)가 고르지 못함에 대해서는 바야흐로 조정에서 변통할 것을 의논하고 있으며, 대동법 역시 방금 강정한 지 오래지 않으니, 마땅히 품처(稟處)해 시행할 것입니다. 양호(兩湖)와 양서(兩西) 연해 일대의 어염(魚鹽) 이익을 모두 궁가와 세력가에서 빼앗아 점유하였고, 파주(坡州)에 대군(大君)이 전장(田庄)을 설치한 폐단은 사람들의 말이 자자하니, 모두 마땅히 일체 금단하여 백성들의 해를 제거해야 합니다. 내수사의 사장(私藏)은 비록 갑자기 혁파하기는 어렵더라도 연한을 정하거나 혹은 반을 나누어 호조에 부치며 사노로 투속한 자는 빨리 환급하기를 허락하라고 말한 것은 바로 오늘날 사(私)를 버리고 공(公)을 위하는 도리입니다. 지금은 옥후(玉候)가 편안치 못하고 날씨조차 매우 차가우니 자주 경연에 나아가시는 것을 억지로 권하기가 어렵습니다. 혹 때때로 유신을 인접하여 치도(治道)를 강마하는 것은 역시 절선(節宣)하는 한 단서입니다. 노성한 숙유에 이르러서는 김집(金集)같은 자를 자주 입시하게 하고, 또 서연(書筵)에 진강(進講)하는 날에 이 사람을 입참(入參)하게 하면 보도(輔導)하는 방도에 이익됨이 반드시 클 것입니다. 이유태·권시같은 자를 경연에 부르라고 말한 것은 참으로 현인을 추천하고 능한 자에게 양보하는 도리이며, 두 신하의 재학(才學) 역시 진강하는 열(列)에 합당하니 산림에 있도록 해서는 안 됩니다. 즉시 소환토록 하신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말단에 진달한 신심(身心)을 수습하고 정신을 가다듬으며, 발하기 전에는 잘 지키고 발하고 나면 성찰하라고 한 것은 바로 임금의 근원 공부여서 잠시라도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삼가 원하건대 성명께서는 요순 삼대에 뜻을 두시되 잘 지키고 성찰하는 공부로 힘쓰고 따라서 조금도 간단(間斷)이 없게 하소서. 그렇게 하시면 사욕(私欲)이 소멸하고 천리(天理)가 순전(純全)해져서 호령을 발하여 시행하는 일이 한결같이 바른 도리에서 나오지 않는 것이 없을 터이니, 삼대의 다스림을 이루기가 어찌 어렵겠습니까. 또 전하께서 후일 치화(治化)하심의 융쇠(隆衰)를 염려하였는데, 그 경계함이 더욱 간절합니다. 삼가 원하건대 성상께서는 아무쪼록 조심하시어 이를 모름지기 잊지 마시고 반드시 다스림이 삼대처럼 성대하게 되기를 기약하시되 그 경계한 바를 답습하지 마소서. 그러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이 소는 여러 유생들이 시폐(時弊)를 뒤섞어 진달한 것에 비할 바가 아니니, 청컨대 한 통을 베껴서 좌우에 두시고 조석으로 보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인하여 하교하기를,
"대군(大君)이 전장(田庄)을 설치한 것은 면세(免稅)한 일이 없으니 공가(公家)에서 알 바가 아니고, 내수사를 설치한 것은 오늘날 새로 창설한 것이 아니니 변경하기 어렵다. 사노로서 투속한 자는 소원(訴冤)에 따라서 아울러 즉시 공정하게 결단하라."
하였다.

 

11월 17일 임신

간원이 아뢰기를,
"오늘날의 급한 일은 백성을 보호하는 것만한 것이 없고, 백성을 보호하고자 하면 마땅히 백성을 병들게 하는 폐단을 고쳐야 합니다. 대저 하늘이 준 물건의 이로움은 본래 우리 백성을 위한 것인데, 위에 있는 자가 빼앗아 독차지하고 이 백성들로 하여금 굶주림과 추위에 떨며 떠돌게 한다면, 그 역시 매우 불인(不仁)한 것입니다. 이는 왕정(王政)에서 백성들과 이익을 함께 해야 하는 것으로 새로 교화하는 처음에 소홀히 해서는 안 될 일입니다.
지난번 본원의 논계를 인해서 여러 궁가와 세력가의 시장(柴場)·염분(鹽盆)·어전(魚箭)을 조사해 혁파하라는 명이 계셨으나, 외방의 관리가 조정의 명령을 믿지 않고 한갓 권세 있는 집만 두려워해 조사해 혁파하는 즈음에 빠뜨린 것이 매우 많았으니, 놀라운 일입니다. 전지(田地)를 입안(立案)203)  하는 데 이르러서는, 대간의 논의에 거론되지 않았다고 핑계하여 외방에서 보고할 바를 잠재우고 행하지 않으니, 신들은 놀라고 탄식합니다.
산택(山澤)의 이익 역시 백성들과 함께 해야 하는데 더군다나 곡식을 생산하는 토지를 어찌 독점하도록 내버려 두어서 백성들에게 무거운 해를 끼치겠습니까. 삼가 강원도(江原道)의 계본(啓本)을 보건대 각 고을에 입안(立案)한 곳이 적지 않습니다. 삼가 듣건대 해서(海西) 한 도는 이런 폐단이 더욱 심하여 가난한 백성과 하호(下戶)들이 졸지에 그들의 옛것을 잃은 자가 곳곳에서 발생한다고 합니다. 이를 통렬히 고치지 않으면 어떻게 인심을 기쁘게 하겠습니까. 청컨대 제도(諸道)의 감사에게 유시하여 여러 읍에 신칙해 여러 궁가와 세가의 시장·염분·어전으로 전일에 조사해 보고한 이외에 만일 누락된 곳이 있으면 다시 더 엄히 조사하여 하나하나 계문하게 하고, 입안한 곳 역시 일체로 시행하게 하며, 해조는 각도에서 계문하는 대로 즉시 입계하여 사패(賜牌)204)   이외에는 아울러 혁파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여러 차례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11월 18일 계유

상이 영사전(永思殿)에서 동지제(冬至祭)를 지냈다.

 

상이 하교하기를,
"대사헌 김집(金集)을 경연에 입시시키되 선조(先朝) 때 정경세(鄭經世)의 예와 같이 하라."
하였는데, 집의 송준길의 말을 따른 것이다.

 

상이 대신 및 비국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대사간 조석윤(趙錫胤)이 아뢰기를,
"오달제(吳達濟)의 노모(老母)가 죽었으니, 휼전(恤典)을 행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는 미처 듣지 못했다. 실로 매우 불쌍하니, 해조로 하여금 상수(喪需)를 넉넉히 내리게 하라. 정뇌경(鄭雷卿)의 노모에게 일찍이 선조왕 때 두루 보살피라는 특명이 있었으니, 역시 해조로 하여금 계속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인천 부사(仁川府使) 성초객(成楚客)이 사조(辭朝)하니, 면유(面諭)하여 보냈다.

 

11월 19일 갑술

김집(金集)을 이조 판서로, 조경(趙絅)을 우참찬으로, 임담(林墰)을 대사헌으로, 한흥일(韓興一)을 우빈객으로, 정홍명(鄭弘溟)을 동지경연사로, 이래(李䅘)를 승지로, 김응조(金應祖)를 응교로, 조빈(趙贇)을 겸필선으로, 홍처윤(洪處尹)을 헌납으로, 정두경(鄭斗卿)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상이 주강에 나아가 《중용(中庸)》 제 11장, 제 12장을 강하였다.

 

과천 현감(果川縣監) 여이홍(呂爾弘)이 사조하니, 면유하여 보냈다.

 

영의정 이경석의 정고(呈告)가 세 번 이르니, 모두 불윤 비답(不允批答)을 내리라고 명하였다.

 

11월 20일 을해

달이 헌원성(軒轅星)으로 들어가고, 유성(流星)이 하고성(河鼓星) 위에서 나와 서쪽 하늘 끝으로 들어갔는데, 빛이 땅을 비추었다.

 

상이 주강에 나아가 《중용(中庸)》 제 13장을 강하였다.

 

경상 감사(慶尙監司) 민응협(閔應協), 무장 현감(茂長縣監) 김왕(金迬) 등이 사조하니, 면유하여 보냈다.

 

간원이 【대사간 조석윤(趙錫胤), 사간 심지한(沈之漢)이다.】  전지에 응하여 상차하기를,
"신들이 삼가 보건대, 전하께서 사위(嗣位)하신 이래 마음을 가다듬고 다스리기를 구하여 모든 정령과 거조가 다 여러 사람의 마음을 위로하고 기쁘게 하기에 족하니 중외가 기뻐하며 잔뜩 기대를 하고서 훌륭한 정치를 어서 보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세월은 벌써 많이 지났는데도 실효(實効)가 전혀 없고, 백가지 법이 바로잡히지 않아 모든 일이 행해지지 않으며, 천재와 시변이 가면 갈수록 더 심하고 어렵고 위태로운 형세가 이루 말할 수 없게 되었으니, 이것이야말로 여러 신하들이 걱정하며 탄식해 마지않는 것이며, 전하께서 이로써 두려워하고 근심하여 신하들에게 도움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언(求言)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말을 쓰기가 어려운 것이니, 구언하고서 쓰지 않으면 구하지 않음만 못합니다. 전하의 뜻은 장차 중지(衆智)를 모아서 실지로 시행하려는 것입니까, 아니면 고사(故事)에 따라서 형식만 갖추시려는 것입니까. 이것을 신들이 감히 알 수가 없습니다. 신들은 삼가 생각건대, 예로부터 임금은 시작은 잘하나 마무리를 잘하지 못한 자가 많았고, 시작을 잘하지 못하고서 마무리를 잘한 자도 있지 않았습니다. 옛사람이 끝을 처음처럼 삼가라고 경계하고 아들을 낳아 처음 가르치는 것처럼 하라고 비유한 것은 참으로 이 때문입니다. 전하께서는 총명하시어 큰일을 하실 만한 자질로서 끝없는 근심을 부탁받았으니, 그 개연히 자임(自任)하고 자기(自期)하는 중대함이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전하께서 금일에 요(堯)임금이 되고, 순(舜)임금이 되고, 탕(湯)임금이 되고, 문왕(文王)·무왕(武王)이 되는 것은 단지 전하의 뜻에 달려 있습니다. 대저 뜻이란 만사의 근본이어서 농사짓는 자는 벼를 거두는 데에 뜻을 두기 때문에 그 노력을 그치지 않으며, 길가는 자는 집으로 가는 데 뜻을 두기 때문에 가는 것을 쉬지 않으니, 다스리기를 구하면서 뜻을 세우지 않으면 어찌 이루어지겠습니까. 옛날 당 문종(唐文宗)은 중주(中主)가 되는 것을 부끄러워했으니205)  니, 임금으로서 참으로 자포자기함이 심하지 않으면 그 누군들 잘 다스리려는 뜻이 없겠습니까. 그런데 삼대(三代) 이후로 한결같이 어찌 다스려진 날은 적고 어지러운 날은 많습니까. 그것은 성왕(聖王)의 학문에 밝지 못하여 뜻을 기(氣)에 빼앗기고 지(智)가 욕(欲)에 가리워지기 때문입니다. 대저 성왕의 학문이란 무엇입니까? 성현의 가르침은 모두 방책(方冊)에 실려 있어 두루 들 수는 없으나, 순임금의 이른바 정일집중(精一執中), 공자의 이른바 극복위인(克復爲仁), 《대학(大學)》의 격치성정(格致誠正), 《중용(中庸)》의 명선성신(明善誠身)은 동일한 법입니다. 대개 하늘이 중정(中正)의 덕을 사람에게 내려준 것은 혼연한 한 이치여서 이(理)는 기(氣)에서 떠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한 마음은 이와 기(氣)를 합하고 있으므로 공허하여 형체가 없으나 거울처럼 맑아서 오성(五性)을 갖추고 있습니다. 고요하여 움직이지 않는 것은 체(體)이며 느끼어 이루는 것은 용(用)입니다. 오직 그 이(理)에는 선하지 않은 것이 없으나 기(氣)에는 맑고 깨끗함과 순수하고 잡됨의 다름이 있기 때문에 반드시 강학하여 마음을 다스려 발하기 전에는 존양(存養)하고 발한 후에는 성찰(省察)하여 천리(天理)가 항상 있게 하고 인욕(人欲)이 물러가게 해야 합니다. 그런 연후에 허명(虛明)이 한결같이 맑아져, 체(體)가 서고 용(用)이 행해지는 것이 마치 텅빈 거울과 같고 고요한 물과 같이 되면 어묵(語默)·동정(動靜)이 저절로 이치를 따르고 희로애락(喜怒哀樂)이 발함이 모두 절도에 맞으며, 일을 처리함에 경중과 장단이 어긋나지 않으며, 사람을 봄에 시비와 사정을 숨길 수가 없습니다. 본원(本源)이 이미 바르고 표준이 이미 서면 안으로는 궁곤(宮壼)이 엄숙해지고 밖으로는 조정이 청명해지며, 아래로는 백성이 멀리로는 사방이 감히 하나도 바르지 않을 수 없어 왕도(王道)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때문에 옛날 명왕(明王)이 학문하기를 급하게 여기고, 어진 신하들이 반드시 임금을 바루기를 먼저 한 것입니다.
삼대 이상은 치화(治化)가 크게 흥하여 이 도(道)가 밝았는데 한(漢)·당(唐) 이후로는 쇠란(衰亂)이 서로 찾아들어 이 도가 폐해졌습니다. 이제 전하께서는 위로 황천(皇天)의 중한 부탁을 받았고, 아래로는 백성들의 간절한 바람을 받으셨는데 한·당에 스스로 머물고 성대한 삼대를 뒤쫓고자 하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전하의 시초(始初)는 청명하여 마치 해가 바야흐로 솟아오르는 것과 같아 만가지 선(善)이 감돌고 물욕(物欲)이 자라지 않습니다. 참으로 이러할 때에 확충하여 힘써 행하시면 덕이 어찌 선왕과 같게 되지 않겠으며, 다스림이 어찌 성세(盛世)에 미치지 못하겠습니까. 더군다나 이 때가 어떤 때입니까. 아래에서는 백성들이 곤궁하고 위에서는 하늘이 노하시어, 인심이 크게 무너지고 세도가 크게 괴리되어 우러러 보거나 굽어 보거나 한 가지 일도 믿을 만하여 안심할 것이 없습니다. 위란(危亂)이 급급한 형상은 지혜 있는 자가 아니더라도 알 수가 있으니, 지금은 전하께서 겉치레나 지키고 일상(日常)을 따르며 편안함이나 즐기면서 구차스레 보낼 때가 아님이 분명합니다. 필부(匹夫)의 효자도 오히려 출세하여 이름을 세상에 드날려서 그 어버이를 현달하게 할 것을 생각하는데, 더군다나 제왕(帝王)의 온천하에 통하는 효도이겠습니까. 전하의 효도는 선왕의 뜻을 계승하고 선왕의 사업을 이어받아 덕을 닦고 인(仁)을 행하며, 많은 어려움을 널리 구제하고 천명을 맞이하여서 종사에 무궁한 아름다움이 이르게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전하께서 만일 다스려 보고자 하지 않으시면 그만이지만 만일 다스려 보고자 하신다면 마땅히 선인의 가르침을 반드시 따르고 선왕의 다스림을 반드시 본받아서, 후세의 비루한 정세에 견제받지 말고 세속의 고식적인 의논에 유혹되지 말으셔서 뜻을 날마다 강하게 하고 덕(德)을 날로 새롭게 하신 연후에야 가능합니다. 전하께서는 시험삼아 스스로 내가 몸을 가다듬는 것이 정밀하고 전일하게 하여 자기의 사심을 극복하여 예에 복귀한다는 가르침을 제대로 실천하였는지, 내가 집안을 다스린 것이 능히 관저(關雎)·인지(麟趾)의 아름다움을 추구하였는지, 내가 백성을 보살핀 것이 다친 사람을 보살피듯 하는 인(仁)을 다하였는지를 반성해 보소서. 그리하여 한결같은 마음으로 정성을 다하여 부지런히 하기를 오늘도 그렇게 하고 내일도 또 그렇게 하여 한가지 일도 방과하지 말며 다른 일 역시 방과하지 말면서 반드시 덕은 선왕과 같고, 다스림은 성세와 같기를 기약하신다면 바람에 쏠려 크게 변화하는 효과를 볼 날이 어찌 없겠습니까.
전(傳)에 이르기를 ‘성(誠)이란 하늘의 도(道)이며 성하게 하는 것은 사람의 도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늘이 높고 밝게 덮어 사시(四時)가 행해지고 만물이 이루어지는 것은 진실하여 속임이 없고 강건(剛健)하여 쉬지 않아서이며, 성인이 움직이지 않아도 변화하고 하는 일이 없어도 위엄이 있는 것은 그 덕이 속임이 없고 쉬지 않으며 하늘에 순(純)하기 때문입니다. 성(聖)에 이르지 못하면 그 덕이 하늘에 순하지 못하기 때문에 반드시 선(善)을 가려서 굳게 지키고 스스로 힘써서 쉬지 않아야 하는데, 그것이 성공함에 미쳐서는 생지(生知) 안행(安行)과 다름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학문을 하면서 성(誠)으로 하지 않으면 다스림에 진전이 없는 것입니다. 신들은 전하께서 학문에 항상 마음을 써 다스리기를 구하는 뜻이 과연 그 성을 다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어찌 그런 일을 하였는데 그 효과가 없습니까.
전하의 마음 은미한 곳은 진실로 신들이 엿보아 헤아릴 바 아니니 밖에 나타난 것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전하께서 비록 조정을 바루고자 하시나 시비와 선악의 구분이 엄하지 못하시고, 백성들을 돌보고자 하시나 돌보아 주시고 은혜를 베푸는 정사를 시행하지 않으셨으며 단본(端本) 선칙(善則)의 도리에는 더욱 부족한 점이 있으니 어째서입니까. 내수사는 실로 제왕의 대공 지정(大公至正)한 도리가 아니므로 헌신(憲臣)의 계사는 그 뜻이 매우 아름다운데도 끝내 윤허해 따르지 않으시고, 일이 궁가에 관계된 것은 한결같이 뿌리쳐 배척하셨습니다. 원당(願堂)에서 세(稅)를 받는 것이 얼마나 무리한 일이며 얼마나 하찮은 일인데, 역시 혁파하지 않으셨습니다. 대관(臺官)이 다스릴 사람을 사사로이 빼앗아 가서 헌신(憲臣)이 인피했는데도 전하께서는 묻지 않으셨으며, 주인을 시해하는 데 참여한 자를 오랫동안 내어주지 않아 헌신이 쟁집했는데도 전하께서는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신하들의 모범이 되는 일은 마땅히 성상께서 먼저 하셔야 하고 기강을 바로잡는 것은 마땅히 귀근(貴近)한 신하로부터 시작해야 하는데도 전하께서는 구습에 젖어서 사심을 극복하지 못하심이 이와 같으시며 친애함에 편벽되어 법을 밝히지 못하심이 이와 같으시니, 퇴폐한 풍습을 어떻게 바로잡겠으며 무너진 기강을 어떻게 진작시키겠습니까. 지금 이후부터는 백성을 병들게 하는 폐단을 반드시 이에 얽혀 제거하지 못하게 될 것이며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정사를 반드시 장애 받아 행하지 못하는 것이 있게 될 것입니다.
아, 오늘날의 조정은 혼탁함이 심합니다. 사대부(士大夫)의 염치가 모조리 없어졌고, 선비의 탐욕스런 풍조가 크게 치성하여, 방납(防納)하여 모리(牟利)하는 일과 외방(外方)에다 구걸하는 습성이 모두 놀랍기만 한데, 말을 하려니 추합니다. 오늘날 백성들의 곤란함이 극에 이르렀는데, 호족과 세가에서 약탈함이 날로 심하며, 수재(守宰)들의 약탈이 날로 방자해지고 있으며, 군병(軍兵)의 인족을 침해하고 공물(貢物)을 매점매석하는 폐단은 일일이 감당하기가 어려워, 들자니 참혹합니다. 궁중과 인척은 사람들이 본받는 바인데 근본이 바르지 못하고 근원이 맑지 못하니, 조정이 혼탁해지는 것이 괴이한 일이 아니며, 공경 대부는 백성들이 모두 우러러보는 바인데 의(義)를 버리고 이(利)를 따르며 공(公)을 여위게 하고 사(私)를 살찌우니, 민생이 곤궁한 것은 진실로 당연합니다. 대체로 이 몇 가지가 서로 악화되어 기강은 날로 무너지고 풍속은 날로 무너지며 백성들의 원망은 날로 심해지고 인심은 날로 떠나며 국맥(國脉)은 날로 저상되고 나라의 근본은 날로 깎이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저들 귀척과 권세가와 사대부로서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들은 각기 배가 불러서 함께 부유함을 누리고 양양하게 편안히 즐기며 스스로 계책을 얻었다고 하면서 유독 국가에는 전혀 이익을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사람의 원망과 하늘의 노여움을 사서 나라가 전복되는 경우에 이르면 저들 역시 어떻게 부귀를 누리겠습니까. 이것이 지사(志士)와 충신(忠臣)들이 분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대저 임금은 나라를 의지하고 나라는 백성을 의지하는 법이니, 백성이 없으면 나라도 없고 나라가 없으면 임금도 없습니다. 스스로 대단히 무도한 임금이 아니면 누군들 백성들을 마땅히 돌보아야 한다는 것을 모르겠습니까마는, 그러나 사사로운 한 마음을 스스로 이기지 못하여 비록 그런 마음이 있더라도 그런 정사를 행하지 못하여 나라를 망치는 자가 많습니다.
대저 이른바 사(私)라는 것은 마음에서 나올 때는 아주 미세하지만 일을 해칠 때는 매우 크니, 《역(易)》에 이른바 ‘약간의 차이가 결국에는 엄청나게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사람 마음의 전체(全體)는 본래 하늘과 같이 커 순수한 천리(天理) 그대로이므로 인욕(人欲)으로 이간시키지만 않는다면 확연히 크게 공변되어 인(仁)을 이루 다 쓸 수가 없지만, 털끝만큼이라도 인욕이 그 사이에 끼이면 천리(天理)는 막히고 매우 작아져서 정사에 베풀면 가는 곳마다 편벽되고 인색해지는 병통이 있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성왕(聖王)이 치도(治道)가 이루기 어려운 것을 염려하지 않고 나의 마음을 다스리는 학문이 지극하지 못한 것을 염려하였던 것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큰 뜻을 분발하여 성심으로 학문에 전념하셔서 궁격(窮格)·사변(思辨)의 일에 공부를 더하시고, 경사(敬肆)·조사(操舍) 의 바탕에 힘을 붙이시어 이치가 날로 더욱 밝아지고 덕(德)이 날로 더욱 새로워지게 하여 참으로 실천할 바를 알아서 정밀함을 다하고 고명을 극대화시키소서. 그러면 언동(言動)과 조치가 모두 이치에 부합되어서 위에서 표준을 세우면 아래에서 교화가 행해질 것입니다. 따라서 궁중은 아름답게 정제되고, 외척들은 두려워하고 조심할 것입니다. 또 조정에는 예의가 밝아지고 기강이 진작될 것이며, 시골에는 혜택이 두루 미치고 근심과 탄식이 사라질 것입니다. 인화(人和)가 이미 이루어지면 천변이 늦춰지고 민생이 이미 안정되면 군정(軍政)이 닦일 것이니, 어찌 외침(外侵)을 근심하겠으며 어찌 불운(不運)을 걱정하겠습니까. 《주역(周易)》에 이르기를 ‘근본을 바르게 하면 만사가 다스려진다.’고 하였고, 맹자는 말하기를 ‘한 임금이 바르면 나라가 안정된다.’고 하였으니, 어찌 믿지 않겠습니까.
아, 치란과 흥망의 기틀은 단지 전하의 한 작은 마음에 달려 있으니, 전하께서 어찌 두려운 마음을 갖고 진작하시어 조종(祖宗)의 막중한 부탁을 저버리는 일이 없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 전하께서는 힘써 살피소서."
하니, 답하기를,
"충직한 말이 매우 간절하여 참으로 아름답게 여긴다. 어찌 두려워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11월 21일 병자

예조가 아뢰기를,
"졸곡(卒哭) 후 대제(大祭)에는 음악을 쓴다고 이미 예문(禮文)에 실려 있습니다. 음악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이루는 것이니, 청컨대 해원(該院)으로 하여금 기일 전에 음악을 익히게 하소서."
하니, 대신과 의논하라고 명하였다. 영돈녕부사 김상헌(金尙憲), 좌의정 조익(趙翼), 우의정 김육(金堉)이 모두 아뢰기를,
"졸곡 후 대사(大祀)에 음악을 쓰는 것이 이미 《오례의(五禮儀)》에 실려 있으니, 제사 전에 음악을 익히는 것을 그만둘 수 없습니다."
하니, 따랐다.

 

상이 주강에 나아가 《중용(中庸)》 제 14장을 강하였다. 강을 파한 후 제사(諸司)의 윤대관을 소견하였다.

 

헌부가 아뢰기를,
"변란 때에 사족(士族)의 부녀로 실행(失行)한 자를 그때의 상신(相臣)이 건의하여 그 가장으로 하여금 다시 데리고 살고 개취(改娶) 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는데, 풍속을 그르친 것이 이보다 더 심한 것이 없습니다.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무릇 장가를 드는 것은 자기와 짝하는 것이니, 실절(失節)한 자로써 배필을 삼는 것도 이미 실절이다.’고 하였으니, 이 법은 정자의 가르침과 크게 어긋나고 예의를 그르친 것이 심합니다. 우리 나라가 비록 매우 문약(文弱)하나 예의와 명교(明敎)가 찬연하여 중국에 부끄럽지 않았으니 구구히 유지해 온 것은 바로 이 때문인데, 이제 그걸 무너뜨리니 식자들이 매우 한심하게 여깁니다. 그 이후로 사대부의 가풍(家風)이 날로 무너져 규문(閨門)에 부끄러운 일이 많으며, 가끔 차마 말로 할 수 없는 일도 있으니 모두 이 법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일이 풍교(風敎)에 관계되니, 다시 데리고 살라는 법을 시행하지 말아 개취하고자 하는 가장은 개취하기를 허락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11월 22일 정축

이기조(李基祚)를 동지경연사로, 신유(申濡)·심지원(沈之源)·김익희(金益熙)를 승지로, 유준창(柳俊昌)을 장령으로, 이홍연(李弘淵)을 보덕으로, 심광수(沈光洙)를 진선으로, 오정위(吳挺緯)를 정언으로 삼았다.

 

상이 주강에 나아가 《중용(中庸)》 제 15장, 제 16장을 강하였다.

 

영일 현감(迎日縣監) 이인하(李仁夏)가 사조하니, 면유하여 보냈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나라를 다스리는 도리는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데 있고, 백성을 편안케 하는 근본은 사람을 얻는 데 달려 있으니, 향천(鄕薦)하는 법을 이제 마땅히 신명(申明)하여야 합니다. 멀리 떨어진 시골에서 재주를 안고 헛되이 늙어가는 자가 참으로 애석합니다. 각읍의 수령으로 하여금 경내(境內)에서 모든 사람이 다 같이 칭찬하는 자를 엄선토록 하되, 행실이 있거나 재주가 있는 자면 나이에 구애받지 말고 조관(朝官)·생진(生進)·유학(幼學)을 물론하고 각기 연초에 천거하여 순영(巡營)에 보내게 하소서. 없으면 구차하게 천거할 필요가 없으며, 있으면 숫자를 정하지 말고 감사가 가한 자를 상세히 살펴서 예우하여 보내게 하소서. 그들이 서울에 이르면 이조에서 신언서판(身言書判)의 법으로 시험해 정부(政府)에 올린 다음 정부에서는 그 가운데서 뛰어난 자를 가려 이조에 계하하여 장부에 기록해 두었다가 결원에 따라 직을 주되, 행실이 매우 높고 재주가 뛰어난 자는 혹 참상직(參上職)을 제수하고, 사정에 따라 잘못 천거한 자는 수령을 죄주도록 하소서. 무사(武士) 중에 특출하여 곤수(閫帥)가 될 만하거나 조금 못하여 변장(邊將)이 될 만한 자는 문사(文士)와 마찬가지로 천거토록 하여 병조로 하여금 무예와 병서(兵書)를 시험하여 재능에 따라 직임을 주게 하소서. 또 각읍으로 하여금 학교를 세워서 선비를 양성하게 하소서. 교수와 훈도의 관원을 비록 다시 설치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경내(境內)의 문학과 행실이 있는 선비를 가려서 학장(學長)으로 정한 다음 매월 양식과 찬을 지급하여 향교에다 사자(士子)를 모아 가르치게 하되 반드시 예(禮)를 우선으로 하게 하소서. 그런 다음 초하루 보름이 되면 수령이 비록 무관이라 하더라도 친히 향교에 가서 학장으로 하여금 고강(考講)하게 하여 그 고하(高下)의 차례를 정하고 권과(勸課)하게 하소서. 그 가운데서 완악하고 패만하여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자는 무겁게 벌을 시행하여 훌륭한 자는 장려하고 악한 자는 징계하며 상형(賞刑)을 분명하고 미덥게 하소서. 그러면 비록 짧은 기간에 효과를 책임지울 수는 없으나 풍속이 혹 점차 변하게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11월 23일 무인

상이 대신 및 비국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우의정 김육(金堉)이 아뢰기를,
"신이 일찍이 관서(關西)에 갔다가 들었는데, 성천(成川)에 사는 백성 김복(金福)이란 자는 현재 80세인데 시복친(緦服親)이 한집에서 살면서 남녀가 의식(衣食)을 함께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사대부 사이에서도 듣지 못한 것이니 마땅히 포상을 가해 다른 사람을 권면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참으로 가상한 일이니 먼저 노직(老職)을 제수하라."
하였다. 좌의정 조익(趙翼)이 아뢰기를,
"조헌(趙憲)의 7백 의사(義士)는 조헌과 함께 같은 날 절의를 지키다 죽었으니, 전횡(田橫)의 객(客)206)  에 비해 훨씬 훌륭합니다. 그의 특이한 충절이 이러한데도 두 아들은 굶주림과 추위에 떨고 있습니다. 조정에서 마땅히 불쌍히 여겨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예로부터 충신으로 조헌에게 비할 만한 자가 드무니, 특별히 그 아들을 녹용(錄用)하게 하라."
하였다. 승지 심지원(沈之源)이 아뢰기를,
"청(淸)나라에서 인출한 역서(曆書)에 윤월(閏月)이 없는데, 우리 나라 역서에는 윤 11월이 있으며, 기타 절일(節日) 역시 모두 같지 않습니다. 지난번 일관(日官)을 청나라에 보내 서양(西洋)의 역법(曆法)을 전수(傳受)하여 오도록 했는데 이제 이와 같습니다. 그렇게 되면 사시(四時)가 차례를 잃음을 면치 못하게 되니, 조사한 일관을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만약 제대로 따지지 못해 어긋나게 되었다면 어찌 추고만 하고 그치겠는가. 관상감(觀象監)으로 하여금 바로잡게 하라."
하였다.

 

태학생(太學生) 홍위(洪葳) 등 수백 명이 상소하기를,
"예로부터 나라에서는 반드시 학궁(學宮)을 설립하여 인재를 교육하였고, 또 반드시 학궁에 성현을 제사한 것은, 대개 성현의 도덕은 만세토록 사람들의 표준이 되었으므로 떳떳한 성품을 지닌 모든 사람은 다 종주(宗主)로 받들기 때문에 국가를 다스리는 자는 처음부터 존봉(尊奉)하여 가르치는 도리로 삼지 않을 수 없으며, 가르치는 방도는 또 반드시 성현을 준칙으로 삼기 때문에 학궁에서 향사(享祀)하여 많은 선비들로 하여금 사법(師法)으로 삼도록 한 것입니다.
대저 성인의 도는 바로 인륜(人倫)이 지극하고 천리(天理)가 지극하기 때문에 만세의 표준이 되는 것입니다. 성인은 비록 죽었더라도 그 말과 일은 서책에 실려 만세에 전합니다. 후세 사람이 그 책을 읽고 그 이치를 찾아 성인을 본받고 발명한 바가 있게 되면, 이는 성인의 법통을 전수하였다고 하겠으며 세상의 본보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漢)·당(唐)의 유자(儒者)는 모두 종사(從祀)하는 열에 들었습니다. 문물(文物)이 발달한 송나라에 이르러서는 대현(大賢)이 계속 일어나 성인의 도가 세상에 크게 밝혀졌으며 끊어진 성인의 학문이 다시 회복되었습니다. 이로부터 천하의 선비들이 모두 성인을 배워야 하고, 이 도를 구해야 함을 알았으니, 천하 만세에 공이 큽니다. 그러니 학궁에서 만세토록 존경받는 것이 어찌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나라가 처음에는 비루하다고 불렸는데 최치원(崔致遠)과 설총(薛聰)이 비로소 문자(文字)를 알았고, 우리의 도(道)가 동쪽으로 오기에 미쳐서 안향(安珦)·정몽주(鄭夢周)가 크게 사문(斯文)을 천명(闡明)하였으니, 그들을 우리 나라 학궁에서 향사함은 본디 마땅합니다. 그리고 본조의 다섯 현인207)  에 이르러서는 그 학문의 깊이와 실천의 바름이 전조 제유(諸儒)에 비할 바가 아니어서 모두 묘향(廟享)에 들었으니, 이 어찌 일대의 성전(盛典)이 아니겠습니까. 다섯 현인 후에는 또 선정신(先正臣)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와 문간공(文簡公) 성혼(成渾)이 있는데, 모두 이른 나이부터 개연히 성현의 도를 사모해 경전의 뜻에 침잠(沈潛)해 초연히 얻은 바가 있었습니다. 이이는 왕정(王庭)에서 벼슬하여 세도(世道)를 자기 임무로 삼았으며, 성혼은 시골에 물러가서 덕(德)을 기르고 도(道)를 닦았습니다. 대개 이이의 학문은 고명(高明) 투철(透徹)해서 도체(道體)를 통견(洞見)했기 때문에 그의 동정과 안팎이 명백 정대하여 저절로 뛰어났습니다. 그가 조정에 서서 임금을 섬겨 은택을 이르게 할 뜻이 청천 백일과 같았음은 노예(奴隷)들도 모두 알았습니다. 선조(宣祖)의 인정을 받아 위임함이 극도로 융숭하여 장차 큰일을 해보려고 했는데, 불행히도 세상을 하직함으로 해서 뜻을 이루지 못하였으니, 어찌 천고의 한이 아니겠습니까. 성혼은 단정하고 엄숙하여 굳게 지키고 힘써 행하였으며 그 마음가짐과 일 처리를 한결같이 성현을 법삼았습니다. 집에서 있으면서 반드시 실질적인 학문을 하여 맺힌 데가 없으므로 학자들이 구름처럼 모였으니, 옛날에 이른바 사도(師道)가 존엄한 자라고 한 그대로였습니다. 만년에 인정을 받아 조정에 나와 헌언(獻言)하였는데, 모두 당세의 간절한 일들로 임금을 걱정하고 백성을 근심한 그의 성심이 간절하였습니다만, 물여우같은 소인배들의 참소로 임금의 총애가 끝을 맺지 못하였으니, 어쩌면 그렇게도 불행하단 말입니까. 두 신하의 학문과 전반적인 것은 대략 이러한데, 그 조예의 깊이와 행실의 바름은 모두 옛날 현인에게 부끄럽지 않아서 백대의 사표(師表)가 될 수 있습니다. 죽은 지 5세(世)가 못 되어 남긴 은택이 사라지지 않았고 높은 산처럼 우러름이 오래면 오랠수록 더욱 심합니다.
신들은 삼가 생각건대, 두 신하의 도덕은 마땅히 백세의 모범이 되는데, 지금까지 성전(盛典)을 거행하지 않아 아직껏 존사(尊祀)하는 반열에 들지 못하고 있으니, 사림의 수치와 성조의 흠결이 이보다 더 심한 것이 없다고 여깁니다. 신들이 일찍이 이로써 선조(先朝)에 아뢰었는데 병자년과 정축년의 난리를 만나 중지되었고, 이어서 일이 많아 지금까지 겨를이 없었습니다. 이는 실로 신들의 죄이며, 혹은 하늘의 뜻이 기다리는 것이 있어 그런 것이라고 합니다. 이제 새로 교화하여 분발하고 유자(儒子)를 존숭하고 도를 중히 여기는 날을 당해 사문(斯文)의 빠진 전례(典禮)를 닦는 것을 마땅히 먼저 해야 합니다. 공론(公論)이 한번 일어나자 많은 선비들이 향응(響應)해 모의를 하지 않아도 의견이 같습니다. 신들은 삼가 덕을 좋아하는 정성을 다하여 어진이를 높이는 분부를 내리시기 바랍니다. 삼가 원하건대 성상께서는 깊이 두 신하의 성대한 도덕이 일찍이 종사(從祀)한 제현만 못하지 않음을 살피셔서 빨리 신들의 구구하고 간절한 청을 허락하여 많은 선비들의 귀의(歸依)할 바가 있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성묘(聖廟)에 종사하는 것은 막중하고 막대한 전례(典禮)여서 경솔히 의논하기 어려울 듯싶다."
하였다. 여러번 상소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1월 24일 기묘

상이 주강에 나아가 《중용(中庸)》 제 17장을 강하였다. 강을 마치자 부제학 민응형(閔應亨)이 아뢰기를,
"성상께서 구언(求言)하는 전지를 내리셨으니 신들 역시 상차하여 진언해야 하는데, 이미 연석에 입시하였으니 민간의 질고(疾苦)에 대해 면전에서 진달하겠습니다."
하고, 인하여 수백 마디 말을 조목별로 진달하였는데, 서북 지방의 민폐에 대해 더욱 자세히 하였다. 또 아뢰기를,
"각도에서 봉진(封進)하는 내국(內局)의 인삼(人蔘) 1냥의 값이 많게는 면포(綿布) 20 필(匹)이고, 우황(牛黃)은 신이 일찍이 강릉 부사(江陵府使)로 있을 때 1부(部)의 값이 면포 15필, 혹은 20필이었는데, 순천 부사(順天府使)에 배수되기에 이르러서는 60필이었고, 또 안변(安邊)에 부임해서는 더해져 80필에 이르러 달마다 더하고 해마다 더했습니다. 이는 내국에서 좋은 품질만을 선호하기 때문인데 백성들이 생활을 유지하지 못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또 천재와 시변이 마구 나타나는데, 변은 까닭없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그 원인이 있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충성스런 말이 애틋하여 나로 하여금 들어보지 못한 민폐(民弊)를 듣게 하니, 마음이 매우 후련하다."
하였다.

 

11월 25일 경진

이조 판서 김집(金集)이 여러 차례 상소하여 사직하니, 상이 우악한 비답을 내리고 윤허하지 않았다.

 

헌부가 아뢰기를,
"진도 군수(珍島郡守) 이효성(李孝性)과 남포 현감(藍浦縣監) 이순성(李循性) 형제는 모두 고(故) 판서(判書) 이안눌(李安訥)의 가노(家奴)로서 면천(免賤)한 것 역시 명백하지 않으며 문관도 아니요 무관도 아닌 다만 하나의 무뢰배일 뿐입니다. 한갓 재산이 많은 까닭으로 김자점(金自點)에게 바치고 그의 사랑을 받으니 자급(資級)을 따지지 않고 여러 차례 초탁하였으며 수령의 직임을 제수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관방(官方)이 문란해져 나라 사람들이 분노합니다. 청컨대 사판에서 삭제하소서."
하니, 파직을 명하였다.

 

11월 26일 신사

홍명일(洪命一)을 승지로, 홍처대(洪處大)를 부수찬으로 삼았다.

 

헌부가 【집의 송준길, 지평 정인경(鄭麟卿)·정세보(鄭世輔)이다.】  아뢰기를,
"임금이 사심(私心)이 있기 때문에 사재(私財)가 있게 되며, 사재가 있기 때문에 사인(私人)이 있게 되는데, 이는 고금의 지사(志士)가 통한스럽게 여기고 매우 개탄하는 것입니다. 사재와 사인으로는 내수사의 폐단보다 더한 것이 없는데 이처럼 새로 교화하는 날을 당하여 신들이 마땅히 정성을 모아 힘껏 간하여 반드시 성상의 마음을 돌리기를 기해야 했으나, 또 창설한 지 이미 오래여서 갑자기 혁파하기가 쉽지 않을 것을 염려해 머뭇거리며 우물쭈물 감히 말을 내지 못했으니, 이는 신들이 책난하는 성의가 부족한 죄입니다. 그 가운데 나아가 다음 방법을 생각해 보면 내사의 노비만이 유독 복호(復戶)하는 은혜를 입어서는 안 되고 또 편오(編伍)208)  와 사부(斜付)의 【각사(各司)의 노비를 가려 뽑아 내정(內庭)의 역(役)에 충당하는 것을 사부라 한다.】  역을 면제해서는 안 되며, 또 진고(陳告)의 예를 열어서도 안 됩니다.
대개 오늘날은 요역과 부세가 번다하여 백성들이 도탄에 빠졌고, 군사의 정원이 부족하여 인족(隣族)이 함께 곤란을 겪어, 나라가 위태로워 조석을 보장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내노(內奴) 역시 똑같은 백성입니다. 이때가 참으로 어떠한 때인데 유독 부역을 면제해 주어 평민만 고통을 겪으며 홀로 원망하도록 하십니까. 또 각사의 전복(典僕)을 모조리 사부(斜付)에 넣고, 공물 주인(貢物主人)들을 관역(官役)에 응하도록 요구하여 외방(外方)까지 침징(侵徵)하니, 각사가 날로 잔패해지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지난해 비국에서 내노를 사부에 충당하기를 청한 것은 참으로 폐단을 구하는 절급한 논의였습니다. 진고의 법에 이르러서는 가장 풍속을 손상시키고 백성을 병들게 하는 고질된 병폐로서 사나운 노예들이 주인을 배반하고 세력에 아부하여 명분을 무너뜨림이 이때보다 심한 적이 없습니다. 또 더러는 주인을 죽이는 패역한 변까지 발생하여 그 피해는 말할 수 없이 많은데, 원망이 국가로 모이고 누(累)가 군덕(君德)에 귀결되는 것은 실로 이 법 탓입니다. 무릇 이 몇 가지 일은 급급히 변통하여 조금이나마 중외에서 충성을 바치려는 마음을 위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내사(內司)의 공사(公事)는 조종조의 구례(舊例)에는 반드시 관문(關文)이 이조를 거쳤으니, 궁중과 부중이 일체로 폐단을 막고 근심을 방지한 뜻이 참으로 범연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십수년 전에는 이조에서 첨압(簽押)209)  하는 즈음에 오히려 내용을 따졌었는데, 지금은 붓을 잡고 자리를 찾아 서명하는 것만 오직 조심할 뿐 다시는 그 공사의 내용이 무엇인지 묻지 않고 다만 내사(內司)의 관원이 하는 대로 맡겨두니, 종종 법을 어기고 백성들을 학대하는 일이 발생하는 원인이 여기에 있습니다. 조종에서 법을 설치한 뜻이 어찌 이런 것이었겠습니까. 《기(記)》에 이르기를 ‘하늘은 사사로이 덮어 주는 일이 없고 땅은 사사로이 실어 주는 일이 없으며, 해와 달은 사사로이 비추어 주는 일이 없다. 왕자(王者)는 이 세 가지 사(私)가 없음을 받들어 백성들을 위로해야 한다.’고 하였으며, 선유가 말하기를 ‘극기 공부는 먼저 극복하기 어려운 것부터 제거해야 한다.’고 하였는데, 아, 이것이 어찌 어려운 일이기에 성명께서는 제거하지 못하고 스스로 사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십니까. 청컨대 명교(明敎)를 내리시어 특명으로 내노비의 복호하는 규정을 파하시어 군읍으로 하여금 속오(束伍)에 충정하는 것을 한결같이 각사(各寺)의 노비와 사노의 예대로 하여 일반 사람과 부역을 같게 하소서. 그리고 지금부터는 사부(斜付)하는 역을 지난해 비국의 청에 의해 내노로써 충정하고 또 진고(陳告)하는 법을 혁파하여 주인을 배반하고 투속하는 폐단을 없게 하소서. 또 모든 내사의 공사는 반드시 이조 당상과 낭청으로 하여금 서명하게 한 연후에 정원을 거쳐 출납하게 하되, 만일 이치에 어긋난 것이 있으면 이조와 정원으로 하여금 법에 따라 조사하게 하여 외람된 일이 없게 해 새로운 교화를 밝혀 백성들의 바람을 위로하소서."
하고, 간원 역시 내수사 노비의 복호하는 규정 파하기를 여러 차례 아뢰었으나, 모두 따르지 않았다.

 

11월 27일 임오

상이 주강에 나아가 《중용(中庸)》 제 18장을 강하였다.

 

제천 현감(堤川縣監) 조지맹(趙志孟)이 사조하니, 면유하여 보냈다.

 

11월 29일 갑신

약방(藥房)이, 상이 현재 몸이 불편하다 하여 친히 삭제(朔祭)를 행하지 말기를 청하니, 하교하기를,
"해가 장차 저물어가고 새해가 가까워오니 슬프고 비통한 마음이 더해서 견디기 어렵다. 비록 날마다 곡읍(哭泣)하지는 못하더라도 단지 한 달에 삭망(朔望)만 친제할 뿐인데 어찌 감히 날씨가 춥다고 말하겠는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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