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효종실록2권, 효종 즉위년 1649년 10월

싸라리리 2025. 12. 20. 08:48
반응형

10월 1일 병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상이 영사전에서 칠우제를 지냈다.

 

삼공(三公)이 아뢰기를,
"초야의 신하들 중에 서울에 와 있는 자들이 보살펴 주는 은혜를 입은 것이 역시 이미 지극하였습니다. 이제 9월이 지나갔고 또 관복(冠服)을 바꾸어 입는 절차가 있는데 여사(旅舍)에서 옷가지를 마련하기가 쉬운 형편이 아닙니다. 성상께서 슬퍼하심이 바야흐로 간절하시어 혹 미처 살피지 못하실까 염려됩니다."
하니, 답하기를,
"한기(寒氣)가 매서운데 여사가 추울 것은 말하지 않아도 상상할 수가 있다. 해조로 하여금 넉넉히 주게 하라."
하였다.

 

10월 2일 정해

예조가 아뢰기를,
"졸곡(卒哭) 후에는 대사(大祀)에만 악(樂)을 쓰는 것이 《오례의(五禮儀)》에 실려 있습니다. 이번 동향 대제(冬享大祭)에는 악을 써야 하는데, 북사(北使)171)  가 서울에 들어온 후, 모든 접응하는 절목을 바야흐로 상중(喪中)이라 하여 절손한 것이 많습니다. 만약 북사가 대제(大祭)의 음악을 들으면 의아하게 여길 단서가 없지 않으니, 악 쓰는 것을 권정(權停)하소서."
하니, 상이 대신에게 의논하라고 명하였다. 영의정 이경석, 좌의정 조익, 우의정 김육 등이 아뢰기를,
"북사가 서울에 들어온 후에는 태묘 제사에 음악 쓰는 것을 권정하지 않을 수 없는 형세입니다. 또 옛날에는 상을 당한 3년 안에는 제사를 지내지 않았으니, 졸곡 후 악을 쓰는 것은 바로 후세에서 권도로 행한 것입니다. 이제 한때의 사세로 인해 제악(祭樂)을 권정하는 것은 불가할 것이 없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10월 3일 무자

상이 영사전에서 졸곡제를 행하였다.

 

상이 하교하였다.
"김경여(金慶餘)와 신천익(愼天翊)의 여사(旅舍)가 냉랭한 것이 초야의 사람들과 다름이 없을 것이니, 역시 해조로 하여금 특별히 옷가지를 내리게 하라."

 

비변사가 아뢰기를,
"동래(東萊)는 바로 아침 저녁으로 왜인(倭人)을 접하는 곳으로 조정에서 부사(府使)를 가려 보내는 뜻이 범연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부사 노협(盧協)은 조심할 생각은 하지 않고 법을 무시하고 사정을 따라 처자식을 아주 가까운 곳에다 데려다 두었으니, 나국하소서."
하니, 따랐다.

 

영돈녕부사 김상헌이 물러가기를 비는 소장을 올리니, 답하기를,
"소를 보니 서운하여 뭐라고 유시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내가 경에게 바라는 바가 주석(柱石)과 같을 뿐만이 아닌데 어찌 갑자기 이런 말을 하는가. 혹 내가 덕이 없어 그렇다 하더라도 선조 여러 대의 은혜를 생각하지 않는단 말인가. 이에 근시를 보내어 내 지극한 뜻을 유시하니 잠시라도 머물기 바란다."
하고, 승지 임전(林)을 보내 친절하게 유시하였다. 상헌이 대답하기를,
"신의 질병이 근일 더욱 심합니다. 비록 영원히 하직하고 멀리 물러날 수는 없더라도 잠시 교외로 나가 조금이나마 만년을 지내게 해 주소서."
하니, 하교하기를,
"오래 가 있을 계책을 하지 말고 얼른 돌아올 생각을 하라."
하면서 다시 승지를 보내 유시하였다.

 

10월 4일 기축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이시매(李時楳)를 승지로, 정홍명(鄭弘溟)을 대사성으로, 조경(趙絅)을 지경연사로, 신천익(愼天翊)을 부응교로, 최온(崔蘊)을 진선으로, 홍처량(洪處亮)을 이조 좌랑으로 삼았다.

 

집의 송준길(宋浚吉), 공조 참판 김집(金集)이 상소하여 돌아가기를 비니, 모두 우악한 답을 내리고 허락하지 않았다.

 

송준길·송시열·선우협(鮮于浹)·최온(崔蘊)·권시(權諰)·이유태(李惟泰) 등이 잇따라 돌아갔다. 좌의정 조익이 차자를 올려, 다시 은지(恩旨)를 내려 유시해 머물게 하기를 청하였다. 이어 전(前) 좌랑 안방준(安邦俊), 전 사부 신석번(申碩蕃), 전 세마 김만영(金萬榮), 군수 조극선(趙克善), 전 찰방 유즙(柳諿), 사인 이시부(李時敷)·권사길(權士吉) 등 7인을 천거하여 조정에 거두어 두기를 청하니, 상이 우악한 답을 내렸다.

 

10월 5일 경인

홍문관이 아뢰기를,
"진강할 책을 영사 이경석에게 물었더니, 말하기를 ‘조강과 주강에는 《중용(中庸)》을 강하고, 석강에는 《대학연의(大學衍義)》를 강하되 모두 전에 진강한 것과 같게 해야 한다. 인하여 생각건대, 새로 교화하는 초기이니 하루에 세 번 접견하여 치도(治道)를 강명하는 것이 바로 지금 해야 할 첫번째 일이며, 그 다음이 형정(刑政)을 닦고 퇴폐해진 기강을 진작시키고 선후를 자세히 살피고 시조(施措)를 순서 있게 하는 것이다. 어진 신하를 좋아하여 머물러 있게 하는 도리에 이르러서는 오직 유신(儒臣)을 연방(延訪)하는 데 달려 있으니, 성명께서 특별히 마음을 쓰시고 분명하게 지휘를 내리시어 초야의 신하로 하여금 갑자기 돌아가는 일이 없도록 하시면 매우 다행이겠다.’ 하였습니다."
하니, 알았다고 답하였다.

 

10월 6일 신묘

삼성(三省)한 죄인 이훈(李薰)이 복주(伏誅)되었다. 이훈은 종실(宗室)의 아들인데 사람됨이 흉패하여 그의 아내를 죽였고 또 그의 부모를 때렸으며, 그의 아비를 죽이고자 하기까지 하였다. 법관(法官)의 논계로 인해 삼성 추국하게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취복(就服)한 것이다.

 

상이 진선 송시열을 불러 보았다. 시열이 들어와 뵙고 인하여 돌아가기를 비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그런 말을 들으니 매우 섭섭하다."
하였다. 시열이 아뢰기를,
"천위(天威)를 지척에 두고 소회를 다 말씀드리지 않고 떠난다면 어떻게 천은에 보답하겠습니까. 예로부터 임금들은 요순의 도를 들으면 모두 오활하다고 여겼는데, 성명(聖明)을 만나 이 말을 올리지 않으면 다시 어느 때를 기다리겠습니까. 요순의 도는 다른 것이 아니라 단지 인욕과 천리 사이에 있습니다. 전하께서는 종사(從事)하심이 천리이면 확충하시고 인욕이라면 막아 끊으시어 부지런히 힘쓰소서. 그러면 어찌 요순이 되지 못할까 염려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것이 어찌 오활한 말이겠는가. 맹자(孟子)가 반드시 요 순을 일컬은 것도 이런 뜻이었다."
하니, 시열이 아뢰기를,
"전하께서 바야흐로 상중에 계시어 순선(純善)한 마음만 있고, 성색(聲色)이나 화리(貨利)는 하나도 마음에 있지 않습니다. 이때가 바로 선을 할 기회이니 이 기회를 잃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임금의 자치(自治)하는 도리는 그렇지만 나라를 다스리는 도리는 임금 혼자서 하는 것은 아니다. 진선(進善) 역시 물러가기를 생각하니, 이는 빈말이 아닌가?"
하니, 대답하기를,
"신같은 사람은 도움될 바가 없습니다. 전하께서 과연 성심으로 진작하시면 어찌 일을 맡을 신하가 없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진선은 재학(才學)이 있어 함께 나라를 다스릴 만한데 오직 물러가기만을 생각하니, 내가 매우 민망하다. 들으니, 김집(金集) 역시 물러가고자 한다고 하는데, 어떻게 하면 머물게 할 수 있겠는가?"
하니, 시열이 아뢰기를,
"전하께서 만약 성경(誠敬)의 도리를 다하신다면 그가 어찌 감히 가겠습니까. 신은 듣건대 천하의 일이란 임금의 마음에 근본하지 않는 것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10월 7일 임진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심지한(沈之漢)을 사간으로 삼았다.

 

상이 서교(西郊)에 행행하여 청사(淸使)를 맞이하고 인정전에서 접견하였다. 청나라 사신이 조제(弔祭)하는 일로 왔다.

 

10월 8일 계사

비변사가 아뢰기를,
"옥송(獄訟)은 나라의 큰 정사로 백성들에게 억울함이 있으면 반드시 펴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유사(有司)가 만약 공(公)을 따르지 않고 국법을 본받지 않아 친하고 친하지 않음에 따라 법의 적용을 달리 한다면 일반 백성들이 억울함을 펼 수가 없을 것입니다. 지금 새로 교화하는 초기를 당하여서는 더욱 신중히 생각하여 처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삼가 듣건대, 교외에 행행하실 때 상언(上言) 받아들이는 것을 허락하셨다고 하니, 내외 원근을 막론하고 오랫동안 마음 속에 쌓여 있던 바를 오늘날 펴기를 바라는 자가 반드시 많을 것입니다. 각 해사(該司)로 하여금 실정과 법을 참고하고 속히 처결하여 미진한 탄식이 없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10월 9일 갑오

청사(靑使)가 영사전(永思殿)에서 조제(弔祭)를 행하였는데, 상이 시신(侍臣)과 함께 먼저 전(殿) 안으로 들어가 곡례(哭禮)를 행하였다.

 

10월 10일 을미

상이 영사전에서 동향 대제를 행하고, 인하여 청사의 조례(弔禮)를 명정전(明政殿)에서 받았다.

 

10월 11일 병신

송시열을 장령으로, 장응일(張應一)을 보덕으로, 정승명(鄭承明)을 지평으로, 허열(許悅)을 정언으로 삼았다.

 

상이 남별궁(南別宮)에 행행하여 청사를 보았다.

 

10월 13일 무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민응형(閔應亨)을 부제학으로, 윤경(尹絅)을 대사간으로, 한흥일(韓興一)을 지경연으로, 임담(林墰)·김남중(金南重)을 동지경연으로, 민응협(閔應協)을 경상 감사로, 여이재(呂爾載)를 전남 감사로, 신익전(申翊全)을 승지로, 임성익(林聖翊)을 장령으로, 이상일(李尙逸)을 헌납으로 삼았다.

 

10월 14일 기해

처음에 산릉(山陵)의 역군(役軍) 2천 명을 각도에 나누어 정했는데, 단지 1천 3백 99명만 쓰고 나머지는 모두 베로 받았다.

 

10월 15일 경자

부응교 신천익(愼天翊)이 상소하기를,
"신은 삼가 생각건대 정심(正心)이란 것은 나라를 다스리는 큰 근본이라고 여겨집니다. 임금이 그의 마음을 바르게 하면 말과 행동이 모두 바르게 되니, 그것을 날마다 쓰면 어디에 시행한들 바르게 되지 않겠습니까. 시정(時政)의 바름과 바르지 못함, 조정의 바름과 바르지 못함, 내외(內外)의 바름과 바르지 못함은 근심할 것이 못 됩니다. 예로부터 임금은 모두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이 나라를 다스리는 대본(大本)임을 알았으니, 그 누군들 정심에 마음을 쓰지 않았겠습니까. 다만 처음에는 부지런하다가 나중에는 게을러져 끝내는 정심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한(漢)·당(唐)·송(宋)의 여러 임금 가운데 마음을 바르게 하여 시종 한결같이 한 자는 드물었습니다. 아, 처음과 끝을 한결같이 하지 못한 것은 성(誠)을 다하지 못한 데 불과합니다. 성을 다함은 바로 이른바 ‘지극한 정성은 쉼이 없다.[至誠無息]’고 하는 것이니, 그것이 《중용(中庸)》의 대공(大公) 지정(至正)한 도리를 끝까지 다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정성을 다해야만 지극함을 다할 수 있습니다. 성명께서는 마음에 새기소서."
하니, 상이 기꺼이 받아들였다.

 

인흥군(仁興君) 이영(李瑛)을 【선조 대왕(宣祖大王)의 아들이다.】  사은사(謝恩使)로, 이시방(李時昉)을 부사(副使)로 삼았다. 처음에 영의정 이경석을 정사(正使)로 차출하였는데, 청나라 사람들이 반드시 종실(宗室)을 사신으로 삼고자 하였기 때문에 영으로 대신한 것이다.

 

헌부가 아뢰기를,
"전 현감 윤선도(尹善道)는 일찍이 선조(先朝) 때 나라의 후한 은혜를 입었는데도 병자년 난리 때 끝내 분문(奔問)하지 않고 해도(海島)를 점유하여 호부(豪富)함을 즐겼으며, 나라에 국상이 있는데도 감히 마음대로 편안함을 즐기고 분곡(奔哭)하지 않고서 아들을 보내 상소하여 은연중 조정의 뜻을 염탐하였으니, 그의 교만스럽고 세상을 농락한 정상이 더욱 얄밉습니다. 잡아다 국문하여 죄를 정하소서."
하였다. 여러 번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10월 16일 신축

개기 월식(皆旣月蝕) 하였다.

 

상이 집제(執制)를 너무 지나치게 하여 날로 매우 수척해지고 오랫동안 평안치 못하여 여러 아랫사람들이 근심하였다. 졸곡 이후부터 약방과 정원 및 삼사가 모두 권제(權制)를 따르라고 청하고, 대신이 빈청에 모여 하루에도 여러 차례 아뢰었으나, 상이 오랫동안 허락하지 않았다. 이때에 이르러 대신이 여러 재신을 거느리고 복합하여 힘껏 아뢰고, 계속해서 자전(慈殿)이 먼저 권제를 따라 성상을 개도(開導)하도록 청하였다. 삼사 역시 복합하고 물러가지 않으니, 상이 비로소 하교하였다.
"자전께서 친히 스스로 강림(降臨)하시어 종일 간절하게 교시하시니 내가 부득이 명을 받들기로 하였다."

 

10월 17일 임인

번개가 쳤다.

 

청사(淸使)가 돌아가니, 상이 서교에 행행하여 전송했다.

 

조경(趙絅)을 대사헌으로, 심광수(沈光洙)를 지평으로 삼았다.

 

헌부가 아뢰기를,
"밀양 부사 조정립(曺挺立)은 일찍이 혼조(昏朝) 때 적신(賊臣)에게 빌붙어 외람되게 청현직에 올랐고 폐모론(廢母論)을 억지로 끌어다 붙여 현상(賢相)을 탄핵했었으니, 반정(反正)한 후에 형벌을 면한 것만도 이미 다행입니다. 또 품행이 방정하지 못하여 남의 양첩(良妾)을 빼앗았습니다. 본직을 제수받자 사람들이 모두 놀라고 분하게 여기니, 파직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10월 18일 계묘

헌부가 아뢰기를,
"나라에 역사가 있는 것은 득실을 밝히고 포폄을 드리우기 위한 것이어서 하루라도 없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선조실록(宣祖實錄)》은 혼조(昏朝) 때 간신(奸臣)이 그릇되게 편찬했기 때문에, 국(局)을 설치하여 개수(改修)하면서 이식(李植)이 전적으로 그 일을 관장했으나, 완료하기 전에 죄를 입어 중지되었습니다. 비단 한때의 의신(疑信)이 오래되면 입증하기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야사(野史) 및 사대부 집에 소장된 서적을 거두어 해당 청(廳)에 모아두었는데 혹 되돌려 보냈거나 찾아가지고 간 것도 있습니다. 만약 지금 수정하지 않으면 전장(典章)과 문헌(文獻)을 장차 전할 수 없게 될 것이니, 해관(該館)으로 하여금 품지하여 시행하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장령 송시열이 상소하기를,
"신은 삼가 생각건대, 전하께서 아래로는 신료들의 간청에 못 이기고 위로는 자전의 뜻을 순종하여 이미 권제를 따르셨으니, 이는 실로 종사와 신민의 다행입니다. 그러나 전하께서 억지로 행하시니 끝내 마음이 편치 못하실 것인데, 마음이 편치 못한 것으로 말미암아 병이 생기게 됩니다. 그러나 예경(禮經)을 상고하고 사세(事勢)를 참작해보면 불안하게 여길 이치가 전혀 없습니다. 더구나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중(中)은 항상 정(正)보다 중(重)하다. 정이 반드시 중은 아니나, 중을 말하면 정은 그 가운데 있다.’고 하였습니다. 삼가 원컨대 이를 미안하게 여기지 마시고 당연한 것으로 여기소서.
신이 또 생각건대, 전하께서 천성으로 타고 나신 효성을 끝까지 다 이루고자 하시고, 양암(諒闇)172)  의 예를 이루어 반드시 시종 유감이 없기를 구하신다면, 옛날 성왕들이 신하를 벗하여 도움을 받았던 것보다 나은 방법이 없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연신(筵臣)을 가려 선발하여 낮에는 세 번 접견하시고 밤에도 역시 돌아가며 입시하게 하여 경사(經史)를 논하기도 하고 치도(治道)를 강구하기도 하며, 혹은 예사 이야기를 나누다가 한밤중이 되어야 비로소 주무시고 이른 새벽에 일어나서 크게 덕을 밝히는 것을 일상의 일로 삼으소서. 그렇게 하면, 전하께서 거상(居喪)하는 예가 순수하고 명백하여 조금도 하자가 없게 될 뿐만 아니라, 총명이 날로 더해지고 지기(志氣)가 날로 굳건해져서 성학(聖學)에 크게 도움이 될 것입니다. 《시경》에 이르기를 ‘그대가 군자를 벗할 때 보니 허물이 있지나 않은가 근신하고, 그대가 집에 있을 적에 살펴보아도 옥루(屋漏)에 부끄러움이 없게 한다.’ 하였습니다. 삼가 원컨대 전하께서는 홀로 있을 때를 삼가는 공력을 이루시어 천덕(天德)과 왕도(王道)의 요체를 삼으소서. 그러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그러나 신하를 벗삼는 도리가 만약 극진하고도 골고루 미치지 못하면 염증이 쉽게 생기게 됩니다. 그러므로 정자(程子)가 경연(經筵)에서 사관(史官)으로 하여금 임금의 언동을 기록하지 못하게 하려 한 것은 대개 임금이 기탄하는 바가 있을까를 염려해서였고, 한두 사람만 때때로 전대(專對)하게 하고자 한 것은 대개 여러 신하들이 늘어서서 모시면 불편할까 염려해서였으며, 평범한 말을 하고 간하지 못하게 한 것은 대개 번거로움을 견디지 못할까 염려해서였습니다. 이는 모두가 어진 사대부(士大夫)를 친근히 하여 궁중의 편안한 생활에 젖어드는 것을 방지하고자 한 것이니, 임금을 위해서 염려한 것이 매우 간절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삼가 원컨대 성명께서 여기에 마음을 쓰시면 그 도움되는 바가 예방(禮防)173)  에만 그치지는 않을 것입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추모하심이 바야흐로 간절하시어 아침 저녁으로 근신하고 계십니다. 신이 이러할 때 감히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이 어찌 감히 전하께서 장차 털끝만큼이라도 미진함이 있을 것으로 여겨서이겠습니까. 대개 방종하게 즐기며 오만하고 포학한 것은 결코 대순(大舜)이 행할 리가 없는데도 백익(伯益)이 ‘단주(丹朱)처럼 하지 말라.’고 경계하였고, 잗단 행실을 삼가지 않는 것은 결코 무왕(武王)이 할 바가 아닌데도 소공(召公)이 ‘한 삼태기의 흙이 모자라는 데서 공이 무너진다.’고 경계하였습니다. 그런데도 대순과 무왕이 마음을 비우고 경건하게 받아들였습니다. 신이 어찌 감히 순임금과 무왕처럼 되시기를 전하께 바라지 않겠습니까.
신이 삼가 요즈음 조정 사이를 보건대 시비(是非)가 바야흐로 생겨 불화가 날로 심해지니, 바로 안위(安危)와 소장(消長)이 갈리는 기회입니다. 대개 근년 이래로 권행(權倖)이 위세를 떨쳐 그 기반이 매우 견고한데, 이른바 명류(名流)라는 자도 모두 물이 들어서 예의가 모조리 없어지고 염치가 모두 사라져서 안팎이 서로 따르면서 아무렇지 않게 여기며 부끄러워할 줄을 모릅니다. 어찌 관자(管子)가 진정 우인(愚人)이어서 ‘나라가 멸망한다.’고 한 그의 말174)  이 도리어 헛된 말이겠습니까.
김경여(金慶餘)·송준길(宋浚吉)은 초야(草野)에 있던 소원한 신하로서 세상에 흔치 않은 지우(知遇)에 감동되어 왕정(王庭)에 서서 지성으로 대중에게 호령하고 강한 자도 용서하지 않았으므로 의율(擬律)을 조어하는 사이에 혹 과격한 점이 없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정당한 논의는 즉위 초기의 정사에 유익함이 있게 한 것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세도(世道)가 혼란스럽고 시론(時論)이 어긋나 분분하게 얽혀 갖가지로 공척(攻斥)함으로써 송준길로 하여금 낭패스럽게 만들어 떠나고자 해도 떠날 수 없는 처지로 끌어들였으니, 역시 한스러운 일입니다.
송 효종(宋孝宗) 초년에 위섬지(魏掞之)가 포의(布衣)로서 부름을 받고 가서 바른 말을 하다가 배척을 받았는데, 주자(朱子)가 탄식하기를 ‘조정에 잘못이 있는 것을 재상과 대간(臺諫)이 뻔히 알면서도 물러서 있어 소신(小臣)으로 하여금 분수를 범해 전패되게 했으니 이미 조정의 아름다운 일이 아니다. 또 너그럽게 용납하여 장려하지 못한 채 머뭇거리다가 떠나게 했으니, 듣기에 매우 놀랍다.’라고 하였는데, 오늘날의 일이 불행하게도 그 경우에 가깝습니다.
대저 근일 논의된 사람이 아주 많습니다만 논핵을 받은 자들 가운데서 제대로 분수를 헤아려 비판에 잘 처신한 자는 이시해(李時楷)·이행진(李行進) 등 수삼 명에 불과할 뿐, 그 나머지는 성난 눈초리로 화를 내면서 꾸짖기를 끝이 없게 하였습니다. 대저 허물을 듣고 스스로 반성하는 것은 실로 군자의 일로서 본시 오늘날에 바랄 수는 없으나, 그 패악한 말과 성을 몹시 낸 것은 사대부의 기상이 없다 하겠습니다. 심지어 송준길의 지우(知友)와 친구까지도 모두 억제하고 참간(讒間)하여 수사(收司)175)  의 법으로 다스리지 않는 일이 없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보건대, 준길이 의율(擬律)한 조어(措語)는 마침 좋은 제목(題目)이 될 듯합니다.
그 이외에 이천기(李天基) 같은 자는 준문심법(峻文深法)이란 말을 가지고 도리어 공의(公議)를 헐뜯는가 하면 ‘기관(機關)이 위구(危懼)스럽다.’는 말로 단안(斷案)을 삼았습니다. 무릇 ‘기관’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소인(小人)의 마음이 간교하다는 것을 바꾸어 이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후세(後世)에서는 허다하게 기관만을 부리므로 하늘이 성현(聖賢)을 내지 않으니, 이는 실로 천지의 화기(和氣)를 해치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오늘날 염치가 없는 무리를 배척해 제거하여 조정을 맑게 하는 자의 마음이야말로 충성스럽고 그 의리가 바르기만 한데 어찌하여 이에 이르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옛날 주자(朱子)가 당시 사람들이 공척하면서 말이 날로 더욱 새로워지자 이에 탄식하기를 ‘옛말에다가 윤색을 가해 한번 광채가 나기를 도모한다.’고 하였는데, 이천기의 의도가 만약 이에서 나왔다면 그가 말한 기관이란 것은 바로 자신을 두고 말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점에 대해서는 반드시 변론할 자가 있을 것입니다.
정승명(鄭承明)에 있어서는 처음부터 가까이할 만한 사람들을 사귀지 못하였고 보면 소외된 외로운 사람으로서 제대로 자립할 수 없는 형세이므로 애써 기치를 세운 것은 참으로 부득이해서 그렇게 했던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임성익(林聖翊)이 이미 정승명에 대해 그르다고 하여 체차를 청하였으니, 이 역시 감히 전계(前啓)가 공론(公論)이 아니라고 여겨지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이미 공론이라고 여기면서 도리어 급급하게 정계(停啓)하기를 마치 미치지 못할 것처럼 한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신이 일찍이 여러 장로(長老)들에게 듣건대, 옛일은 논하지 않더라도 계해년176)   중흥(中興)하던 초기만 하더라도 대간의 풍도가 그래도 볼 만한 것이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무릇 양사에서 함께 발론한 경우에는 반드시 서로 통의(通義)한 연후에야 비로소 정계하였고, 또 반드시 발론(發論)한 사람에게 통의했으니, 이렇게 한 것은 모두 조정을 높이고 공의를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뒤로는 이러한 풍토가 무너져서 지금에 이르러서는 더욱 심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대각(臺閣)의 신하들이 단지 자신의 몸만을 보살필 뿐 다시 조정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 채 공의(公議)가 있을 경우 동료와 상의하지 않고 발론한 사람과도 의논하지 않고는 오직 자기 뜻에 편리한 대로 마음대로 정계하면서 조금도 거리낌이 없으니, 그 역시 한심하다고 하겠습니다. 지금 새로 교화를 펴는 초기에 이러한 폐습을 깊이 미워하여 통렬히 징계하지 않는다면 뒤폐단을 징계할 방도가 없게 될 것입니다.
또 한 가지 논의가 있으니, 노성(老成)하고 우유부단한 말을 하는 데 있어서 마치 역아(易牙)177)  가 오미(五味)를 조리(調理)하듯 사광(師曠)이 오성(五聲)을 조화시키듯 합니다. 이에 그 말을 들으면 좋은데 그 실제를 따져보면 바로 양쪽을 다 온전하게 하려는 것 같으나 실제로는 양쪽을 상하게 하는 것입니다. 대저 향초(香草)와 악초(惡草)는 한 이랑에 심지 못하고 얼음과 숯은 같은 그릇에 담을 수 없는 법입니다. 실정이 이미 다른데 억지로 같게 하려고 한다면 반드시 같게 될 리가 없습니다. 만약 논핵을 입은 사람이 과연 문을 닫고 들어 앉아 자취를 거두고 허물을 고쳐 스스로 새로워진다면 어진이가 되고 충성스러운 사람이 될 것이니 그 누가 막겠습니까. 이렇게 한 연후에 구슬이 한 가닥 끈에 같이 꿰이듯이 함께 대도(大道)로 나간다면 이것이 진정한 평평 탕탕(平平蕩蕩)의 기상인 것입니다. 지금은 그렇지 못해 음양(陰陽)이 서로 다투고 시비(是非)가 각각 다른 상황으로서 이쪽이 저쪽을 이기지 않으면 저쪽에서 이쪽을 이기게 되어 본시 양쪽이 서로 버티면서 끝내 결판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현부(賢否)를 구별하지 않고 피차를 분간하지 않는 것으로 공평한 도리를 삼으려 한다면, 이야말로 저쪽의 형세를 도와 그들로 하여금 기고만장하게 하여 감히 누가 무어라고 하지 못하게 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입니다. 이것이 원우(元祐)의 조정책(調停策)과 건중(建中)의 지평책(持平策)이 후세에 비웃음을 받게 된 이유입니다.
또 어떤 이는 송준길과 김경여가 전야(田野)의 인물로서 갑자기 격양하는 논의를 하여 신임이 두텁지 못한데 말을 심하게 하는 것은 합당치 못하다고 하는데, 이 말이 그럴 듯하나 또 지당한 논의는 아닙니다. 무릇 사대부가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이야 어찌 일찍이 조야(朝野)의 차이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주자(朱子)가 항상 강개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초야의 외로운 신하로 충의(忠義)를 다하고자 한다.’ 하였고, 또 항상 당시 사람들의 탁란(濁亂)하는 것을 미워하여 말하기를 ‘하늘에 계시는 조종(祖宗)의 신이 이들에게 무엇을 등졌기에 차마 이러는지 모르겠다.’ 하였습니다. 무릇 송준길과 김경여는 모두 세록(世祿)의 신하로서 비록 전야에 있었으나 본디 충의(忠義)를 다할 뜻을 지녔고, 전하께서 또 기용하여 언지(言地)에 두었으니 진실로 덕(德)을 전야에 있을 때처럼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좋지 못한 사람이 눈앞에 와 있고 손끝에 다가와 있는데 잠자코 있으면서 7년이란 오랜 세월을 기다린다면, 《주역(周易)》에서 말한 ‘마침내 허물이 없으리라.’ 한 것은 이와 같지는 않을 듯하고, 한(韓)·구(歐)의 비난178)  이 엄준할 뿐만이 아닐 것입니다.
대저 오늘날의 일에 대해서는 많은 말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단지 송준길로 하여금 낭패하여 물러가게 하려 한다면 단지 시세를 모르고 망령되이 행동한 실수가 있다고 책망하면 됩니다. 만일 그의 말이 조금이라도 행해지게 해서 조정이 혹 맑아지고 기강이 혹 서게 하려 한다면 《주역(周昜)》에서 말한 바 ‘신하가 바르면 길하다.[小正之吉]’는 경우가 실로 송준길에게 해당될 것입니다. 이 두 가지에 대해서는 전하의 뜻이 어떠한가에 달려 있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성명께서는 빨리 시비를 정하시어 오래도록 분운(紛紜)함이 없게 하신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신처럼 불초한 사람은 분수에 만족하며 자리에서 물러나 더는 세상에 나올 생각이 없으니, 본디 혐의할 바가 없기 때문에 감히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또 생각건대 조정에서 신을 언책(言責)에 두었는데 탄핵하지 못하면 신에 대해 생각하기를 ‘용렬하고 비루하여 반드시 김경여나 송준길처럼 하지 못하는 것이다.’고 할 것인데, 이는 송나라의 소과경(簫果卿)이 부끄러워 탄식한 바입니다. 그러므로 끝내 묵묵히 있을 수가 없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성명께서는 저의 어리석음을 불쌍히 여기시어 참람함을 용서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진달한 말은 모두 매우 간절하며, 신하를 벗삼고 홀로 있을 때를 삼가라는 말은 더욱 경계하고 두렵게 여기지 않겠는가. 근래에 조정이 바르지 못해 공경하고 협동하는 도리가 어긋나니, 내가 매우 놀랍다. 송준길 등은 부언(浮言)에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 내가 반드시 이 사람들로 하여금 조정에 있게 해서 꺼리는 바가 있게 하고자 한다."
하였다.

 

10월 19일 갑진

우의정 김육이 세 번 정고(呈告)하니, 모두 불윤 비답을 내렸다.

 

10월 20일 을사

김집을 대사헌으로, 오준(吳竣)을 예조 판서로 삼았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북로(北路)의 흉년은 육진(六鎭)이 더욱 심하여 만약 명년 봄에 청나라에서 후춘(厚春)에 【종호(種胡)의 호칭이다.】  곡식을 옮기라고 요청해오면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 만약 먼저 청나라 사신에게 말하기를 ‘북로의 기근에 진구해 살릴 계책이 없으니, 후춘 지방에 저축된 곡식이 있으면 속히 옮겨 달라.’하면 그들이 허락하지는 않더라도 장차 우리 나라의 기근을 알아 우리로 하여금 그들을 진구하라고 할 염려는 없습니다. 반송사(伴送使) 및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저들과 접응할 때에 기회를 보아 잘 말하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안으로는 액정서(掖庭署)로부터 아래로 여러 각사(各司)에 이르기까지 백성을 해치는 폐단이 날이 갈수록 더한 것은 참으로 《대전(大典)》의 법을 행하지 않은 데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래서 선왕(先王)께서 임조(臨朝)하시어 이에 대해 개탄하지 않으신 적이 없었습니다. 지금 만약 안으로는 궁금(宮禁)에서부터 밖으로는 여항(閭巷)에 이르기까지 육부(六部) 백사(百司) 및 팔도의 감사(監司)와 수령(守令)이 한결같이 법제(法制)를 지키고 범한 자를 죄주게 하면 어찌 넘치고 지나친 폐단이 있겠으며, 백성들 역시 어찌 굶주리고 법을 무시하는 근심이 있겠습니까.
상께서 마땅히 행하여야 할 일인 경연(經筵)이나 상참(常參) 등에 대한 각종의 조항을 해조(該曹)로 하여금 하나하나 기록해 아뢰게 하고, 육부·백사와 감사·수령은 각기 그들이 마땅히 행하여야 할 일을 날로 새롭게 수명(修明)하고 번갈아 살피고 신칙하여, 감히 어기어 범하지 못하게 하고 출척(黜陟)을 크게 밝히면, 나라를 다스리는 도리가 대개 이에 있을 것입니다. 속히 중외에 분명하게 유시하소서."
하니, 따랐다.

 

10월 22일 정미

조석윤(趙錫胤)을 대사간으로, 유경즙(柳景緝)을 승지로, 곽지흠(郭之欽)을 장령으로, 김휘(金徽)를 교리로, 김시진(金始振)을 문학으로 삼았다.

 

영흥 부사(永興府使) 이지정(李志定)이 사조(辭朝)하니, 면유(面諭)하여 보냈다.

 

용인(龍仁) 유생(儒生) 심수경(沈壽卿) 등이 상소하여 조광조(趙光祖)의 서원(書院)에 사액(賜額)하기를 청하니, 허락하였다.

 

10월 23일 무신

토성(土星)이 역행(逆行)하여 동정(東井) 제 1성을 범하였다.

 

상이 비로소 주강(晝講)에 나아가 《중용(中庸)》 서문(序文)을 강하였다. 상이 읽다가 ‘주희(朱熹)는 서(序)하노라.’ 하는 데 이르러 그 이름을 휘(諱)하였다. 강관(講官)이 아뢰기를,
"주자(朱子)의 이름을 전하께서 휘하셨으니, 지금부터는 강관이 진강(進講)할 때에도 역시 휘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좋다고 하였다. 시강관 김휘(金徽)가 나아가 아뢰기를,
"지난 선조(宣祖) 때에는 성혼(成渾)과 같은 유현(儒賢)들이 모두 경연에 입시하였습니다. 지금 산림(山林)에서 독서하던 사람들이 경사(京師)에 와 있으니, 고사(故事)에 의하여 경연을 여는 날 입시하게 하면 반드시 도움이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비록 고례(古例)가 없더라도 해야 옳은데 더군다나 고례가 있는 데이겠는가."
하였다. 연신(筵臣)이 대신에게 의논하기를 청하니, 따랐다. 상이 특진관 김집(金集)에게 이르기를,
"근래에 조정이 매우 바르지 못하다. 지난번 송준길(宋浚吉)이 8, 9인을 탄핵하여 격양(激揚)하는 일을 했는데, 요즈음 보니 장주(章奏)하는 사이에 아름답지 못한 습성이 많다. 어찌해서 이런가?"
하니, 김집이 대답하기를,
"논박을 받은 사람 가운데 혹 달게 받아들여 사리대로 여기는 자가 있는가 하면 혹은 그렇지 않은 자도 있기 때문에 여항 사이에 떠돌아다니는 말 역시 아주 분분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허물이 있으면 고쳐야 하고, 없으면 더욱 힘써야 하는 것이 고훈(古訓)이다. 논박을 입는 사람은 마땅히 스스로 새롭게 되기에 겨를이 없어야 하는데도 근래 아름답지 못한 일이 많다. 내가 중히 다스리고자 하는데 어떤가?"
하니, 김집이 아뢰기를,
"흘러 내려온 습성이어서 갑자기 고치기는 어려우니, 오직 성상께서 시비를 분명하게 하는 데 달려 있을 뿐입니다. 신이 다시 논하고자 하였으나 비단 정계(停啓)한 지 이미 오래되었을 뿐만 아니라 또 공의(公議)가 이미 그들이 그른 것을 알게 되었으므로 다시 논하여 쾌하게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간이 다시 논핵하지 않더라도 어찌 처치할 방도가 없겠는가. 지난번 어떤 사람의 【바로 송시열이다.】  상소를 보건대, 이행진(李行進)·이시해(李時楷)는 비방을 받고도 잘 처신했다는 말이 있었는데, 이 말이 과연 그런가?"
하니, 대답하기를,
"그런 일이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밖에는 잘 처신한 자가 없는가?"
하니, 아뢰기를,
"신이 자세히 듣지 못하였습니다만 잘 처신하지 못한 자가 많습니다."
하였다.

 

예조(禮曹)가 대신(大臣)의 뜻으로 아뢰기를,
"교화(敎化)가 나라의 급선무인데도 용렬한 임금은 소홀히 하고 속된 관리는 태만히 합니다. 선조(先朝) 때에 습속(習俗)이 날로 잘못되는 것을 깊이 염려하여, 예조에 명하여 중외에 신칙해 그 절목(節目)을 가려 봉행(奉行)하기에 편하도록 했는데, 대개 효제(孝悌)를 권장하여 불효(不孝)와 부제(不悌)를 징치(懲治)하고, 젊은이가 어른을 능멸하고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능멸하며 향리(鄕里)에서 서로 싸우고 의식(衣食)을 지나치게 사치하게 하는 풍속 등에 대해서는 대략 향약(鄕約)의 옛 규례을 모방하여 영구히 준행하는 법식을 삼았습니다. 새로 교화하는 초기에 더욱 소홀하게 할 수 없으니, 청컨대 해조로 하여금 거듭 밝혀 실효를 거두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예조가 아뢰기를,
"초야(草野)의 신하를 경연에 입시하게 하는 뜻으로 대신에게 의논했더니, 영의정 이경석은 말하기를 ‘강관(講官)의 건백(建白)에 의하여 번갈아 입시하게 하고, 또 행실이 닦이고 학문이 밝은 자를 가려 성균관에서 강습하게 하면 안정되는 교화를 이룰 수 있다.’하였고, 영돈녕부사 김상헌은 말하기를 ‘방금 부름을 받아 경사에 와 있는 자를 먼저 선택하여 경연관을 겸대(兼帶)시켜서 시강(侍講)에 출입하게 해 점차 견문을 넓히게 한 다음 차례로 진용(進用)하면 발모연여(拔茅連茹)179)  의 아름다움을 볼 것이다.’하였습니다. 우의정 조익(趙翼)은 말하기를 ‘마땅히 고사를 따라 이미 경사에 와 있는 자를 먼저 경연에 들어와 참여하게 하고, 미처 소명(召命)을 받지 못한 사람 역시 해조로 하여금 초출, 서계(書啓)하여 시독(侍讀)·시강(侍講)의 직명으로 차임해서 교대로 입시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습니다."
하니, 김상헌의 의논에 따르라고 명하였다.

 

10월 24일 기유

지문 제술관(誌文製述官) 조경(趙絅), 서사관(書寫官) 오준(吳竣), 산릉 도감 제조 이시방(李時昉)을 정헌 대부(正憲大夫)로, 명정 서사관(銘旌書寫官) 김광욱(金光煜), 국장 도감 제조 임담(林墰)·이기조(李基祚)를 자헌 대부(資憲大夫)로, 시보전문서사관(謚寶篆文書寫官) 여이징(呂爾徵), 산릉 도감 제조 여이재(呂爾載), 도승지 김남중(金南重)을 가의 대부(嘉義大夫)로, 시책문서사관(謚冊文書寫官) 신익전(申翊全), 우주제주관(虞主題主官) 이시매(李時楳)를 가선 대부(嘉善大夫)로, 산릉 도감 도청 유경창(柳慶昌)·신속(申洬), 봉폐관집의(封閉官執義)  송준길(宋浚吉), 애책문서사관(哀冊文書寫官) 이정영(李正英)을 통정 대부(通政大夫)로 올렸는데, 이는 바로 3도감(都監)에 대한 상전(賞典)이었다. 이행우(李行遇)를 이조 참의로, 정지화(鄭知和)를 집의로 삼았다.

 

상이 주강에 나아가 《중용(中庸)》 수장(首章)을 강하였다.

 

동래 부사 유심(柳淰)이 사조(辭朝)하니, 면유하여 보냈다.

 

상이 하교하기를,
"신면(申冕)·이지항(李之恒)·엄정구(嚴鼎耉)·황감(黃㦿)·이해창(李海昌) 등은 지난번 대론(臺論)을 인하여 대략 가벼운 벌을 시행했으니, 마땅히 고개를 움츠리고 자취를 거두어 공의를 기다리기에 겨를이 없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에 감히 발론한 사람을 배척하여 사사로운 분을 풀고자 하여 함부로 거리낌없이 하였으니, 근래에 조정이 조용하지 못함은 오로지 이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비록 기강이 무너지고 의리가 어둡고 막혔다고 하지만, 단지 붕당(朋黨)이 있는 줄만 알고 존엄한 조정이 있는 줄을 모른 것이다. 그 방자하고 거리낌없음은 참으로 매우 놀랍다. 엄히 다스리어 조정의 기강을 엄숙하게 하지 않을 수 없으니, 아울러 멀리 찬축하라. 이시만(李時萬)·이이존(李以存)은 몸이 조정에 있지 않으니 삭탈 관직(削奪官職)하라. 임성익(林聖翊)·이천기(李天基)·정승명(鄭承明)은 대각(臺閣)의 직책에 있으면서 공의를 막아 감히 붕당을 비호할 계책을 하였으니 역시 놀랍다. 아울러 우선 파직하라."
하였다.

 

헌부가 아뢰기를,
"사복시 정(司僕寺正) 이회(李禬)의 아들이 그의 종모(從母)를 간통하여 일이 발각되자 스스로 죽었는데 이 말이 낭자하게 전파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들으니, 이회의 집에서는 행 호군(行護軍) 홍헌(洪憲) 및 강후(姜珝)의 처가 무함한 것이라 하여 해조(該曹)에 정장(呈狀)하였습니다. 그런데도 해조에서는 예사 일로 보아 여러날 동안 지체시켰고 안문(按問)하는 즈음에도 법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해조의 당상을 추고하고 낭청은 파직하며, 이회와 홍헌을 아울러 나문(拿問)하여 처치하소서.
전 목사 송흥주(宋興周)의 아들은 그 형의 딸을 간통하여 그 말이 매우 낭자한데도 덮어두고 발론하지 않아 사람들이 모두 놀라고 분하게 여깁니다. 본도(本道)로 하여금 조사하여 보고하게 하고, 송흥주는 사판(仕版)에서 삭거(削去)하소서. 그 고을 수령은 덮어둔 죄를 다스리지 않을 수 없으니 파직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10월 25일 경술

좌의정 조익이 상차하기를,
"신민일(申敏一)을 대사성으로, 조극선(趙克善)을 사업(司業)으로 삼아 교육의 책임을 전담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해조로 하여금 시행하게 하라."
하였다. 그 후에 민일을 대사성에 제배하였는데, 정조(政曹)에서 품지(稟旨)하자 일반적인 격식을 따르지 않고 단망(單望)으로 계하하였다. 성균관의 장관은 임무가 매우 막중하여 전후 이 직책에 재직할 사람은 반드시 당시 사람들의 명망을 받는 자로 선택하였다. 그런데 민일이 단망으로 갑자기 제배되자 여론이 해괴하게 여겼다.

 

장령 송시열이 인피하기를,
"다섯 신하를 멀리 찬축하라는 명이 갑자기 뜻밖에서 나왔는데, 성상께서 뜻하는 바는 감히 알 수 없으나 여러 사람의 뜻이 두려워하면서 모두 너무 지나치다고 합니다. 신이 조용히 전하를 깨우치지 못한 죄가 크니, 신을 체직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어찌 한 사람의 소 때문에 갑자기 중전(重典)을 베풀었겠는가. 요즈음 여러 사람이 인피하며 영구(營救)하는 즈음에 모두 탄로가 나 내가 이미 통촉하고 있었다. 장령은 잘못이 없으니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영의정 이경석이 상차하기를,
"신면(申冕) 등을 멀리 찬축하고 이시만(李時萬) 등을 삭직(削職)하라는 명이 비록 조정의 기강을 엄숙히 하고 당습(黨習)을 혁파하려는 지극한 뜻에서 나왔으나 어리석은 신은 지나치다고 여겨집니다. 송준길이 이 사람들을 논한 것은 그 뜻은 좋았지만 그 논핵은 과격하였습니다. 신이 일찍이 송준길과 김집을 만나 말했더니, 역시 신의 말을 옳게 여겼습니다. 무릇 사람이 배척을 받고서 마음속으로 반성하고 남을 허물하지 않는 것은 학력(學力)이 있지 않으면 천분(天分)이 높은 연후에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의 여러 신하들은 식견이 이미 거기에 미치지 못하고 친지들이 또 선도(善導)하지 못하였으니, 집에서 말하거나 거리에서 말한 바가 어떠했는지는 모르겠으나 만약 이로써 중한 죄를 가하면 훌륭한 시대의 아름다운 일이 아닐 듯싶습니다. 벌은 죄에 합당해야 인심이 복종하는 법인데, 찬축하고 삭탈하는 벌은 너무 과하지 않겠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중화(中和)로 위육(位育)하는 도리를 생각하시고 저들에게도 노할 만한 점이 있었음을 헤아리시어 뇌정(雷霆)의 위엄을 조금 거두소서."
하니, 답하기를,
"경의 말은 생각을 덜했다 할 수 있겠다. 저 몇 사람들은 조종의 기강을 무너뜨리고 우리 조정의 존엄을 무시하여 점차 어떻게 할 수 없는 지경으로 몰아갔는데, 저들에게도 노할 만한 점이 있다고 핑계하여 죄를 주지 않겠는가? 중화(中和)로 처리하고자 하여 진숙(振肅)하지 않는다면, 장차 반드시 어리석은 어짐으로 돌아가고 말 것이다. 이번 일은 송시열의 상소로 인한 것이 아니니, 경은 지나치게 염려하지 말라."
하였다.

 

헌부가 【대사헌 김집, 장령 송시열이다.】  아뢰기를,
"대저 다섯 신하의 죄는 본디 몸가짐을 조심하지 않아 명행(名行)을 무너뜨렸기에 조금 바로잡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지 원래 중한 죄로 다스리려 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비방에 잘 처신하지 못한 잘못은 과연 있지만 이로 인해 먼 지방으로 귀양을 보내기까지 한다면 벌이 그 죄보다 과하게 되고 잘못을 너무 곧게 바로잡게 되어 호오(好惡)의 바름에 과실이 있게 됩니다. 신면 등을 멀리 찬축하라는 명을 환수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런데도 다스리지 않으면 나라의 기강을 수습할 수가 없으니, 번거롭게 논하지 말라."
하였다.

 

간원이 【사간 심지모(沈之謨), 헌납 이상일(李尙逸)이다.】  아뢰기를,
"조정의 상전(賞典)은 예로부터 상례가 있으니, 한때의 작은 수고 때문에 지나치게 상을 주어서는 안 되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번에 송준길·이정영(李正英) 등이 모두 당상(堂上)에 초승하는 명을 받았습니다. 사책(寫冊)·봉릉(封陵)에 비록 자급을 올려주는 규정이 있지만, 준길은 자급과 직책이 모두 맞지 않고 정영은 자궁(資窮)이기는 하나 직이 맞지 않습니다. 은명(恩命)이 한 번 내리자 여러 사람의 뜻이 모두 지나치다고 생각합니다. 개정하소서."
하였다. 여러 차례 아뢰니, 따랐다.

 

10월 26일 신해

상이 영돈녕부사 김상헌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천재(天災)와 시변(時變)이 겹겹으로 나타나니 앞으로의 나랏일을 어떻게 구제하겠는가. 경이 이번에 들어왔으니, 모름지기 나의 부족함을 도우라."
하니, 김상헌이 일어나 사례하기를,
"신이 이미 입시하였으니, 청컨대 잠깐 청광(淸光)180)  을 뵙고자 합니다."
하고는, 바로 나아가 아뢰기를,
"우러러 천용(天容)을 뵈니 지난해와 아주 다른데 근심을 많이 하셔서 그런 것입니까? 비록 그러나 성상의 춘추가 바야흐로 젊으시고 또 일해 볼 만한 기회를 만났으니, 나라를 다스릴 계책을 하소서. 옛사람이 말하기를 ‘모든 일은 때가 지나면 할 수가 없다.’고 하였는데, 성상의 생각도 이에 미치셨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조종의 중한 부탁을 받았으니 어찌 잘 다스리고자 하는 마음이 없겠는가. 그러나 재주가 없고 덕이 박하며 또 걱정을 만나 한갓 스스로 두려워할 뿐이다."
하였다. 승지 김경여(金慶餘)가 아뢰기를,
"신면(申冕) 등을 멀리 찬축하라는 명은 벌이 너무 무겁습니다."
하니, 상헌이 아뢰기를,
"다섯 신하의 귀양은 비록 스스로 취한 일이기는 하지만 군신 사이에 어찌 허물을 용서하는 도리가 없겠습니까. 순임금이 사흉(四凶)을 죄주자 모두 복종한 것은 그 벌이 그 죄에 맞아서였습니다. 이번 다섯 신하의 벌이 어찌 죄에 합당하다고 하겠습니까. 멀리 귀양을 보내는 것은 극도의 벌이니, 노여움을 조금 거두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이 반드시 깊이 생각하여 말한 것이겠으나, 다만 이 무리들에게 이미 참작하여 벌을 시행했는데 조금도 뉘우칠 마음이 없었으므로 부득이 깊이 다스린 것이다."
하니, 상헌이 아뢰기를,
"상벌은 저울을 쓰는 것과 같아서 조금만 기울어도 사람들이 모두 지적합니다. 죄에는 각기 맞는 율이 있으니 멀리 찬축하는 것은 너무 무겁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이에 이르니 마땅히 중도 부처(中道付處)의 율로 감하겠다."
하니, 상헌이 아뢰기를,
"요순 같은 성인도 사람을 알고 백성을 편안케 하는 것을 어렵게 여겼습니다. 사람을 알아서 각기 합당한 일을 맡기면 백성을 편안케 하는 것이 그 가운데 있습니다. 요즈음 경연을 열었으니, 반드시 여러 아랫사람들의 현부(賢否)를 구별하셨을 것이니 믿을 만한 자를 가려 정성으로 맡기면 됩니다. 백성들이 극도로 곤궁하고 변방의 방비가 허술하니 참으로 사람을 얻지 못하면 어떻게 다스리겠습니까."
하니, 상이 말하기를,
"사람을 아는 것은 요임금도 어렵게 여겼는데, 더군다나 나이겠는가. 다만 알지 못할까 염려되지, 참으로 안다면 어찌 맡기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하니, 상헌이 아뢰기를,
"백성들의 곤궁함이 참으로 탐욕스런 관리에게서 말미암기 때문에 옛날 현군(賢君)을 기릴 때는 반드시 장리(贓吏)를 용서하지 않음을 말했습니다. 전하께서는 여기에 마음을 쓰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참으로 경의 말과 같다."
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전하께서 왕위를 이어받은 초기에 왕대비·왕비·왕세자가 이미 위(位)를 정했으니, 존숭하는 책례(冊禮)를 뒤따라 거행하는 것이 예입니다. 졸곡이 이미 지났으니, 마땅히 도감을 설치하여야 합니다. 다만 무신년181) 등록(謄錄)을 상고해 보니 아울러 3년 후에 설행하였습니다. 막대한 큰 예는 반드시 자세히 강구하여 처리해야 하니, 대신과 의논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무신년에 이미 행한 예에 의해 3년이 지난 후에 행하라."
하였다.

 

장령 송시열이 인피하기를,
"인평 대군의 궁노(宮奴)가 신이 살고 있는 가까운 곳에서 소란을 피웠습니다. 신이 헌부에 있으므로 그 일이 비록 잗달지만 그대로 두고 묻지 않아서는 안 되겠기에 여러날 동안 찾아 잡으려 했으나 끝내 그 무리를 찾지 못하고 한 사람만 겨우 잡아 가두어 두었는데 이제 또 풀려 났습니다. 옛날의 사사(士師)는 천자(天子)의 아버지도 붙잡았는데, 지금의 대헌(臺憲)은 대군(大君)의 종조차 다스릴 수 없습니다. 법이 행해지지 않음이 귀근(貴近)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모두 신이 못나고 유약한 데서 말미암게 되었습니다. 신을 체직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10월 27일 임자

이홍연(李弘淵)을 정언으로, 정유(鄭攸)를 이조 정랑으로 삼았다.

 

상이 주강에 나아가 《중용(中庸)》 수장(首章)을 강하였다.

 

10월 29일 갑인

헌부가 아뢰기를,
"염전(鹽田)의 토세(土稅)와 상선(商船)의 포세(浦稅), 사찰(寺刹)의 차역(差役)은 바로 그 고을 수령의 소관이어서 감영이나 수영에서 마음대로 침범할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근래에는 억지로 각 고을에 명하여 세를 받아 영(營)에 들이기 때문에 으레 이중으로 징수하는 폐단이 있습니다. 사찰 역시 그러한데 기전(畿甸)의 사찰은 여러 궁가(宮家)의 원당(願堂)이라고 일컬어 본 고을에서 차역하는 일이 있으면 경저인(京邸人)이 궁가(宮家)로부터 책망을 받는 것이 끝이 없습니다. 일체 금단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10월 30일 을묘

김신국(金藎國)을 판의금부사로, 심지원(沈之源)·임전(林)·김익희(金益熙)를 승지로, 허계(許啓)를 경기 감사로, 이정영(李正英)을 교리로 삼았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