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효종실록2권, 효종 즉위년 1649년 12월

싸라리리 2025. 12. 20. 0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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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일 을유

좌의정 조익(趙翼)이 《중용(中庸)》과 《대학(大學)》의 주해(註解)를 올리고, 인하여 상차하기를,
"신이 어려서 사서(四書)를 읽어 조금은 논설(論說)이 있습니다. 삼가 전하께서 서연(書筵)에 계실 때 바야흐로 《맹자(孟子)》를 강하신다는 말을 듣고 삼가 《논어(論語)》와 《맹자(猛子)》의 주해를 바쳐 선왕(先王)의 포상(褒賞)을 입었었는데, 지금 생각하니 비감(悲感)이 듭니다. 지난번 또 들으니 경연에서 《중용(中庸)》을 강하신다기에 감히 용학(庸學)의 주해를 베껴서 올립니다.
신이 삼가 생각건대 주자집설(朱子集說)이 찬연히 명백하니, 후학들은 마땅히 이를 말미암아서 구해야 하는데, 신이 다시 미세한 뜻을 더 구하고자 하여 몇년 동안 깊이 생각해 보았더니 구설(舊說) 이외에 대략이나마 미온(微蘊)된 것이 있는 듯해서 감히 어리석은 견해를 차기(箚記)해 혼매함을 무릅쓰고 올립니다. 오직 심술(心術)에 대한 절실한 공부는 성의(誠意)·정심(正心)에 있는데, 성의가 더욱 긴요하니 이는 신이 뜻을 다하여 사색해 얻은 것입니다."
하였는데, 상이 보고는 아름답게 여겨 말[馬]을 하사(下賜)하라고 명하였다.

 

12월 2일 병술

이상일(李尙逸)을 장령으로, 이정기(李廷夔)를 정언으로 삼았다.

 

병조에 명하여 상번(上番) 군사의 의복이 엷은 자를 조사해 모두 유의(襦衣)를 주도록 하였다.

 

상이 주강에 나아가 《중용(中庸)》 제 19장을 강하였다. 강을 마치고 함경 감사(咸鏡監司) 정세규(鄭世規)를 소견하여 묻기를,
"내가 전(前) 감사의 계를 보고 본도의 흉황(凶荒)을 알았고, 또 경의 소도 보았는데, 이제 어떻게 할 계획인가?"
하니, 세규가 대답하기를,
"신이 듣건대 남도(南道) 지방의 기민(飢民)이 조곡(糶穀)을 받은 것이 매우 많은데도 가난해서 갚지 못해 심지어 밥그릇까지 다 팔았다고 하니, 이후에는 반드시 수적(收糴)210)  하여 기민을 진구할 형세가 없습니다. 원컨대 영동(嶺東)의 미속(米粟)을 옮겨 진구하소서."
하였다. 호조 판서 이기조(李基祚)가 지경연으로 입시했다가 나아가 아뢰기를,
"영동 역시 멀어서 전운(轉運)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니, 세규가 아뢰기를,
"군병이 용감하고 건장하기가 북로(北路)와 같은 곳이 없었는데 지금은 잔약함이 심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왜 그렇게 되었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북쪽 사람들이 춥고 굶주림이 절박하여 죽음에서 헤어나기도 어려운데 어느 겨를에 용맹을 기르겠습니까."
하고, 인하여 그의 할아버지 정언신(鄭彦信)이 본도 감사로 있을 때의 일을 진달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 역시 잘하라."
하였다.

 

12월 3일 정해

상이 대신 및 비국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좌의정 조익이 나아가 아뢰기를,
"왕정(王政) 가운데서 큰 것으로는 대동법(大同法)보다 큰 것이 없는데 어찌 한 두가지 일이 불편하다 하여 행하지 않겠습니까."
하고, 우의정 김육은 아뢰기를,
"대동법은 지금 모든 조례(條例)를 올렸으니, 전하께서 옳다고 여기시면 행하시고 불가하면 신을 죄주소서."
하니, 상이 대답하지 않았다. 김육이 또 아뢰기를,
"신이 일찍이 관상감 제조를 지내어서 역법(曆法)을 마땅히 바꾸어야 함을 압니다. 역법은 반드시 1백 년 혹은 50년에 한 번씩 바꾸어야 하는데 지금 쓰고 있는 역은 바로 허형(許衡) 등이 만든 법으로 이미 4백 년이 되었으니 어찌 변경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번 서양(西洋)의 새법에는 견해가 없지 않으니, 그 법을 참고해서 고쳐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가운데서도 역시 옳지 않은 것이 있다. 우선 추산(推算)하여 고쳐 어떠한지 보아야 한다."
하였다.

 

상이 석강에 나아가 《대학연의(大學衍義)》를 강하였다.

 

진선(進善) 심광수(沈光洙)가 상소하여 사직하고 인하여 시폐 몇 조목을 진달하였는데, 그 가운데 말하기를,
"근래의 성변(星變)을 모든 사람들이 다 말을 하는데 관상감에서 아뢰지 않으니, 거의 공광(孔光)이 ‘걱정할 필요가 없다211)  .’는 것과 왕안석(王安石)이 ‘두려워할 것이 못 된다212)  .’고 한 것과 가깝지 않겠습니까. 또 지금 모든 사람이 우러러보는 신하와 바른 말 하는 선비들이 여러 해 동안 귀양을 가 있고 아직껏 죄적(罪籍)에 있으니, 전하께서 현인을 좋아하고 선(善)을 좋아하는 실제가 미덥지 못한 듯싶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소의 말은 내가 마땅히 잘 인식해서 유념하겠으니,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이때 천변이 자주 보였는데도 일관(日官)이 감히 직서(直書)하여 올리지 못하였고, 이경여(李敬輿)·홍무적(洪茂績)·이응시(李應蓍) 등이 모두 선조(先朝)에서 죄를 얻어 아직껏 적소(謫所)에 있었기 때문에 심광수가 아울러 이에 대해 언급한 것이다.

 

12월 4일 무자

간원이 아뢰기를,
"상평청(常平廳)은 바로 진휼청(賑恤廳)의 이름을 바꾼 것으로 처음 뜻은 본래 기민(飢民)을 구제해 살리는 것이었는데, 지금은 도리어 재물을 모으고 이익을 구하는 터전이 되고 있습니다. 제사(諸司)의 상공가(常供價)를 먼저 서울 사람에게 주고 외방에서 두 배로 징수하니, 백성 들의 고통이 어떠하겠습니까. 청컨대 해청의 당상과 낭청을 아울러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상이 주강에 나아가 《중용(中庸)》 제 20장을 강하였다. 강을 마치고 부제학 민응형(閔應亨)이 나아가 아뢰기를,
"근일 양사에서 논한 바는 모두 공의인데 전하께서 때로는 윤허해 따른 것이 있으나 다 따르지 않으셨습니다. 원컨대 상께서는 치우침을 버리시고 쾌히 받아 들이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따를 만한 일은 다 이미 따랐다."
하자, 아뢰기를,
"그래도 모두 쾌히 따르는 것만은 못합니다."
하였다. 응형이 또 그가 이미 말한 바 있는 북도(北道) 백성의 폐해를 거듭 말하니, 상이 웃었다. 형조 판서 김광욱(金光煜)이 나아가 아뢰기를,
"신이 현재 형관(刑官)으로 있으니 형옥(刑獄)의 일로써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식(李植)과 이경증(李景曾)은 일찍이 고관(考官)이 되어서 시제(試題)로써 선조 때 죄를 입었는데 죽은 후에도 아직껏 죄적(罪籍)에 있으니 참으로 불쌍합니다."
하니, 상이 그의 관작을 회복하라고 명하였다.

 

12월 5일 기축

신천익(愼天翊)을 사간으로, 심지한(沈之漢)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상이 주강에 나아가 《중용(中庸)》 제 20장을 강하였다. 강을 마치자 시독관(侍讀官) 조복양(趙復陽)이 나아가 아뢰기를,
"임금이 하루 동안에 어진 사대부를 만날 때가 많고 환관과 궁첩을 친할 때가 적으면 함양할 수가 있습니다. 신은 듣건대 조종조에서는 자주 승지를 불러 정사에 대해 물었으며, 세조(世祖)께서는 일찍이 밤중에 승지 윤필상(尹弼商)을 와내(臥內)로 불러 옥의 죄수가 몇이나 되느냐고 물었으며, 위징(魏徵)이 일을 아뢰자 당 태종(唐太宗)은 주머니 속에 있던 매를 죽였으니213)  , 옛날에는 군신(君臣) 사이의 친근함이 이러했습니다."
하니, 상이 한참 있다가 이르기를,
"번쾌(樊噲) 역시 일찍이 문을 열고 곧바로 들어간 일이 있다214)  만, 고금이 다른 것이다."
하였다.

 

12월 6일 경인

암행 어사 김홍욱(金弘郁)과 곽지흠(郭之欽)을 명소(命召)하여 봉서(封書)를 주어 보냈다.

 

상이 주강에 나아가 《중용(中庸)》 제 20장을 강하였다. 부제학 민응형, 검토관 김좌명(金佐明)이 대략 글의 뜻을 아뢰니, 상이 이조 판서 김집을 돌아보며 묻기를,
"경만이 말이 없으니 무엇 때문인가?"
하니, 김집이 대답하기를,
"20장은 비은(費隱)과 소대(小大)를 겸해 포괄하여 말한 것으로 12장의 뜻을 여기에서 모두 결론지은 것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수신(修身) 공부는 바로 구경(九經)의 근본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이 들어오면 듣지 못한 말을 들을 수가 있으니 매우 추운 날이 아니면 자주 들어오라."
하였다.

 

12월 7일 신묘

남선(南翧)을 승지로, 송시열(宋時烈)을 집의로, 송준길(宋浚吉)을 진선으로 삼았다.

 

해주 목사(海州牧使) 권훈(權勛) 등이 사조하니, 면유하여 보냈다.

 

12월 9일 계사

이때 여러 궁가(宮家)에서 입안(立案)이라 일컬으면서 다투어 토지를 점령하고 면세(免稅)했다는 핑계로 민결(民結)을 가로챘으며, 내사 노비의 잡역과 복호는 법전에 실려 있는데도 유독 서로(西路)에서만은 그 전결에 대하여 세금을 면제하였다. 또 각사의 노비를 뽑아서 내정(內庭)의 역에 충당한 후 사부(斜付)라 칭하였고, 내사(內司)의 공사는 정원을 거치지 않고 출납해 곧바로 해조에 부쳐 문서를 토출(討出)해 냈으며, 사천으로 매우 사나운 자는 옛주인을 많이 배반하고 내사로 투속해서 사람들이 모두 통분하게 여겼었다. 이때에 이르러 조석윤(趙錫胤)이 대사간이 되어 이로써 논한 지 달을 넘겼는데도 모두 들어주지 않았다. 석윤이 말이 시행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여러 동료들과 함께 인피하였다. 헌부가 출사하기를 청하였는데 석윤이 병을 핑계로 출사하지 않았다. 정원이 규례에 따라 파직하기를 청하니, 상이 파직하지 말라고 하였다.

 

12월 10일 갑오

심액(沈詻)을 좌참찬으로, 오정일(吳挺一)을 승지로 삼았다.

 

12월 10일 갑오

비변사가 아뢰기를,
"황주(黃州)와 안주(安州)에 당초 설관(設官)한 것은 본디 뜻이 있었으니 이제 쉽게 변경할 수 없습니다. 청컨대 그대로 겸목사(兼牧使)와 판관(判官)의 제도를 두되 일찍이 시종(侍從)을 지낸 성망(聲望)이 있는 자를 가려서 판관을 삼아 잔폐함을 소생하는 터전으로 삼으소서."
하니, 따랐다. 또 아뢰기를,
"서울과 시골에 실시하는 오가작통(五家作統)이 법전에 실려 있으나 이처럼 국가에 일이 많은 때를 당하여서는 설치하는 것이 만약 마땅하지 못하면 시끄러울 근심이 없지 않으니, 우선은 천천히 의논하여 처리하게 하소서."
하니, 모두 따랐다. 이때에 헌부가 황주와 안주에 목사를 두고 판관은 혁파하기를 청하였으며, 한성부에서 오가작통을 시행하기를 청하였기 때문에 아뢴 것이다.

 

12월 11일 을미

상이 주강에 나아가 《중용(中庸)》 제 20장을 강하였다. 강을 마치자 부제학 민응형이 나아가 아뢰기를,
"지난번에 조석윤이 말이 시행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인피하였고, 병으로 소명에 나오지 않았으니 규례상 마땅히 파직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전하께서 윤허하지 않으셨으니 너그럽게 용납해 주시는 도리가 지극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그 말을 따르지 않으시니 일에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간절하니 내가 매우 가상히 여긴다."
하였다.

 

 

12월 12일 병신

상이 주강에 나아가 《중용(中庸)》 제 20장을 강하였다. 상이 연신에게 일렀다.
"‘남은 한 번에 능히 하거든 나는 백 번을 하며 남이 열 번에 능히 하거든 나는 천 번을 한다.’는 말은 가장 착실한 말이다. 사람이 참으로 이로써 마음을 삼으면 무슨 일을 하지 못하겠는가."

 

12월 13일 정유

윤순지(尹順之)를 도승지로, 심지원(沈之源)을 대사간으로, 조석윤(趙錫胤)을 대사성으로, 권우(權堣)를 사인으로 삼았다.

 

상이 대신 및 비국의 여러 신하를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대동법(大同法)은 이미 상정(詳定)하였는데, 여러 의논은 어떻게 여기는가?"
하니, 영의정 이경석(李景奭)이 아뢰기를,
"행하여 폐단이 없으면 더할 수 없이 좋으나 이해는 먼곳에서 헤아리기가 어려워, 절목에 혹 막히어 시행하기 어려운 것이 있는가 싶습니다. 신이 선왕 초년에 매양 사관(史官)으로 입시해 들었는데, 그때 여러 노대신들이 어찌 깊이 생각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도 끝내 시행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신은 무슨 까닭이었는지 모르겠으나 신의 뜻으로는 먼저 홍청도(洪淸道)부터 시행하여 그 이해를 안 연후에 다른 도에 시행해야 한다고 여깁니다."
하고, 우의정 김육은 아뢰기를,
"시행하는 여부는 성상의 결단에 달려 있을 뿐이니, 더 의논할 일이 없습니다."
하니, 경석이 이르기를,
"그렇지 않습니다. 고 상신 이원익이 편리 여부를 민간에 물어서 차자를 올려 파하기를 청한 것입니다."
하고, 좌의정 조익은 아뢰기를,
"당시 여러 의논이 시끄럽게 들끓어서 심지어 왕안석(王安石)에게 비교하기까지 했기 때문에 이원익이 부득이 파한 것이지 본래의 뜻은 아니었습니다."
하였다. 경석이 아뢰기를,
"전라 감사(全羅監司) 임전(林)을 묘당(廟堂)에서 속히 출발시켜 보내기를 청했는데, 처상(妻喪) 때문에 오래도록 사조(辭朝)하지 못하였습니다. 정상은 비록 절박하더라도 그 일은 잘못되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일이 매우 놀라우니 잡아다가 추문하라."
하였다. 병조 참판 이만(李曼)이 아뢰기를,
"지난 혼조 때 간사한 사람이 경상도 양전 어사(慶尙道量田御史)가 되어 억지로 전부(田簿)를 보태 허결(虛結)을 실지로 징수한 것이 3만여 결이 되었는데 아직껏 혁파하지 않아 백성들이 명(命)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국가에서 만약 경비를 걱정해서라면 명백하게 백성들에게서 부세를 늘려야지 어찌 혼조 때의 허결로써 중하게 민폐를 끼칠 수 있겠습니까. 차라리 수천 석의 곡식을 잃을지언정 한 도(道)의 인심을 잃어서는 안 됩니다. 신이 영남(嶺南)을 맡은 적이 있어서 이런 폐단을 잘 알기 때문에 감히 진달하는 바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 역시 모르는 바는 아니나 경비가 부족하여 단행하지 못한 것이다. 경의 말 가운데 ‘차라리 수천 석의 곡식을 잃을지언정 한 도의 인심을 잃어서는 안 된다.’고 한 것은 참으로 좋으니, 모두 제거하라."
하였다. 경석이 아뢰기를,
"좌상이 군정(軍政)에 대해 차자를 올려 논하기를 ‘무휼(憮恤)하여 인심을 얻은 연후에야 난리를 만나 쓸 수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도망간 자와 죽은 자의 부담이 이웃과 친족에게 미치는 것은 마땅히 60∼70년을 한정하여 모두 군안(軍案)에서 빼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12월 15일 기해

백홍(白虹)이 달을 꿰었다.

 

상이 영사전(永思殿)에 망제(望祭)를 지냈다.

 

통제사(統制使) 유정익(柳廷益), 경주 부윤(慶州府尹) 홍득일(洪得一), 춘천 부사(春川府使) 박장원(朴長遠) 등이 사조하니, 면유하여 보냈다.

 

12월 16일 경자

공생(貢生) 박준일(朴俊一)이 상소하여 시폐를 진달하니, 상이 보고는 정원에 하교하기를,
"박준일이 먼 고장의 하류(下流)로서 상소해 시폐를 진달하니, 그 정성이 가상하다. 그 사람을 불러 그 소를 읽게 하고 또 그 사람됨을 살펴보라."
하였다. 정원이 회계하기를,
"준일이 제법 일을 알고, 그 소를 읽는 데도 착오가 없었습니다."
하니, 상이 너그러이 비답하고 정조(政曹)에 명하여 관리로 등용하게 하였다.

 

12월 17일 신축

조경(趙絅)을 대사헌으로, 심지한(沈之漢)·김휘(金徽)를 부교리로, 안방준(安邦俊)을 지평으로 삼았다. 안방준은 보성(寶城) 사람이다. 인조(仁祖) 때 재상이 기절(氣絶)이 있다고 천거하여 여러번 벼슬을 내려 불렀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이때에 이르러 이 직을 탁배했으나 또 사양하고 오지 않았다.

 

예조가 아뢰기를,
"즉위한 후 설과(設科)는 혹 소상(小祥) 전에 하기도 하고 혹은 소상 후에 하기도 하여 그 규례가 같지 않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소상 전에는 예삿일을 하지 않으니 소상 후에 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여러 대신의 뜻이 이와 같습니다."
하니, 따랐다.

 

12월 18일 임인

사옹원이 명년부터 병자년 후 줄였던 날마다 올리는 생선을 다시 올리게 하기를 청하니, 상이 하교하였다.
"3년을 한정으로 하여 우선은 다시 올리지 말라."

 

상이 주강에 나아가 《중용(中庸)》 제 22장을 강하였다. 강을 마치고 상이 민응형에게 이르기를,
"부제학이 입시하는 날이면 매양 충언을 진달하니, 내가 매우 가상히 여긴다."
하니, 대답하기를,
"신에게 무슨 충언이 있겠습니까. 항상 나라에 변란이 있게 되면 신의 한 몸도 역시 감싸줄 곳이 없을까 염려되므로 신이 몸을 걱정해서 그런 말을 한 것입니다."
하였다.

 

전남 감사(全南監司) 이시매(李時楳) 등이 사조하니, 면유하여 보냈다.

 

12월 19일 계묘

우레가 쳤다.

 

한필원(韓必遠)을 도승지로, 김휘(金徽)를 헌납으로, 이제형(李齊衡)·오핵(吳翮)을 정언으로 삼았다.

 

상이 주강에 나아가 《중용(中庸)》 제 23장을 강하였다. 강을 마치자 참찬관 신유(申濡)가 아뢰기를,
"근래에 재이(災異)가 자주 보이고 백홍(白虹)이 달을 꿰고, 형혹성이 심성(心星)을 지키는데도 관상감에서는 역시 계문하지 않았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참으로 그와 같다면 성관(星官)을 어디에 쓰겠는가."
하였다.

 

12월 20일 갑진

상이 주강에 나아가 《중용(中庸)》 제 24장을 강하였다. 강을 마치자 부제학 민응형이 아뢰기를,
"신이 어제 황새가 우는 소리를 들었는데, 이는 이변 가운데서 큰 것입니다."
하고, 지경연사 한흥일(韓興一)이 아뢰기를,
"나라가 장차 망하려면 반드시 요얼이 있기 마련인데 비단 천변뿐만 아니라 인심이 두려워하여 곳곳에서 전해가며 부르짖는 소리가 있습니다. 종루(鐘樓)에 방(榜)을 걸었는데 불측한 말이 있다고까지 합니다."
하고, 응형은 아뢰기를,
"이는 모두 와전된 말이니 상심할 게 무엇이 있겠습니까. 다만 두려운 것은 천변입니다."

 

이때 모든 관원들이 관직에 태만하여 사무가 정체되었다. 상이 육조 및 한성부, 장례원에 명하여 매월 개좌(開坐)한 날수를 써서 계문하게 하였다.

 

12월 23일 정미

상이 영사전(永思殿)에 납향(臘享)을 행하였다.

 

영의정 이경석이 차자를 올려 시폐를 극진히 말하고 인하여 책면하기를 구하니, 상이 하교하였다.
"내가 마땅히 면유하겠다."

 

12월 25일 기유

상이 영돈녕부사 김상헌을 소견하였다. 상헌이 장차 들어오려는데 상이 환관에게 명하여 부축하게 하였다. 상의 앞에 이르자 상이 이르기를,
"근래 천재가 혹심한데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하늘이 멀지 않아 아래를 밝게 살피시니, 원하건대 상께서는 항상 상제(上帝)를 마주하고 있는 듯이 하소서. 그러면 하늘이 반드시 보우(保佑)하라 명하실 것입니다. 전하의 정무 중에 혹 태만하고 소홀한 일이 있는지 염려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지금 모두 말하라."
하니, 대답하기를,
"신은 이미 늙고 혼미하여 생각한 바가 없으나 생각건대 성왕(聖王)의 정사는 양(陽)을 부지하고 음(陰)을 억제하는 것보다 먼저 해야 할 것이 없습니다. 이제 이 해가 이미 다하고 춘양(春陽)이 점차 가까워져 하늘과 땅이 서로 교류하고 만물이 자생(滋生)하니, 임금이 과연 본받으면 개태(開泰)하는 운수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좋은 말이라고 칭찬하였다. 상헌이 물러가려고 하니, 상이 또 명하여 환관에게 부축해 일으켜 나가게 하였다. 이날 또 대신 및 비국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상이 영의정 이경석에게 이르기를,
"어제 경의 차자를 보고는 내마음이 두려워 예사로이 비답할 수 없었기 때문에 오늘 인견한 것이다. 하늘이 경계(警戒)를 보인 것은 모두 나 때문인데 경은 고사(古事)를 이끌어 책면하는 말을 하니, 내가 실로 부끄럽다."
하고, 인하여 차자를 가지고 조목에 따라 묻기를,
"이른바 덕(德)을 닦는 것은 간언을 받아들이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하였는데, 내가 일찍이 재변을 만나 구언(求言)하였으나 나의 잘못을 직척(直斥)하는 자를 보지 못하였다. 이것도 내가 간언을 받아들이지 않아서 그러한 것인가?"
하니, 대답하기를,
"신이 어찌 감히 성상께서 간언을 받아들이시기에 부족하다고 생각하겠습니까. 옛날의 신하는 그 임금에게 ‘단주(丹朱)를 본받지 말라.’라고 한 자가 있었으니, 신하가 임금에게 책임지우기를 이와 같이 했던 것입니다.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시종 이런 마음을 가지소서."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사치를 버리는 것은 반드시 궁금(宮禁)에서부터 시작하라.’ 하였는데, 이 말은 옳다. 그러나 지금은 바야흐로 상중(喪中)에 있으니, 참으로 이런 폐단이 있는지 모르겠다. 마땅히 천천히 살펴서 금지시키겠다."
하고, 또 이르기를,
"‘보민(保民)은 반드시 환자곡을 견감하는 데서부터 시작하라.’ 하였는데, 이는 마땅히 상의하여 처리하겠다."
하니, 대답하기를,
"세종(世宗) 때에는 해마다 쌓인 포흠(逋欠)을 모두 견감하였습니다. 지금은 간사한 자의 정상을 비록 알 수 없으나 그 가운데서 형세상 징수할 수 없는 것은 모두 감해 주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강도(江都)와 남한(南漢)의 포흠이 얼마인가?"
하니, 호조 판서 이기조(李基祚)가 아뢰기를,
"어떻게 다 알겠습니까?"
하니, 경석이 아뢰기를,
"대개 몇 백 석은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여러 해 쌓인 포흠은 모조리 탕척하게 하고, 이후에는 다시 이런 폐단이 없게 하라."
하였다. 상이 또 이르기를,
"‘형옥을 살피는 것은 마땅히 의금부에서부터 시작하라.’ 하였는데, 그 가운데서 죄가 중한 자는 쉽게 의논할 수 없으나 가벼운 자는 마땅히 속히 소결(疏決)하겠다."
하고, 또 경석에게 이르기를,
"차자 가운데서 진달한 양서 지방의 세미(稅米)를 연한을 정해 양감(量減)하는 일은 지금 호조 판서와 함께 상의하는 것이 옳다."
하니, 기조가 아뢰기를,
"해서 지방은 다른 도에 비해 요역이 자못 가벼운데 이제 또 세미를 감해주면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우의정 김육(金堉) 역시 재이를 이유로 면직하기를 비니,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함경 감사(咸鏡監司) 정세규(鄭世規)가 사조하니, 면유하여 보냈다.

 

12월 26일 경술

남선(南銑)을 대사헌으로, 홍처윤(洪處尹)을 교리로, 이정기를 지평으로 삼았다.

 

12월 27일 신해

경상도 곤양군(昆陽郡)에 지진이 발생하였다.

 

상이 주강에 나아가 《중용(中庸)》 제 26장을 강하였다.

 

강진 현감(康津縣監) 이구연(李九淵) 등이 사조하니, 면유하여 보내고 이어 제사(諸司)의 윤대관을 소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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