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일 을묘
상이 영사전(永思殿)에서 삭제(朔祭)를 거행하였다.
이때에 날씨가 매우 추웠으므로 경범 죄수들을 석방하도록 명하였다.
1월 3일 정사
이정영(李正英)을 교리로, 송준길(宋浚吉)을 진선으로, 박안제(朴安悌)를 수찬으로 삼았다.
1월 4일 무오
상이 주강(晝講)에 나아가 《중용(中庸)》 27장을 강하였다. 강을 마치자 지경연 조경(趙絅)이 나아가 아뢰기를,
"전하께서 정신을 가다듬어 다스리시는데도 천재(天災)가 자주 나타나니, 이것이 비록 인애(仁愛)로운 하늘이 훌륭한 치적을 이루게 하려는 것이라 하더라도 어쩌면 정사를 시행하는 과정에 천심(天心)에 합당하지 못한 점이 있어서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옛날 소식(蘇軾)이 송 신종(宋神宗)에게 ‘폐하께서는 치적을 바라는 것이 너무 성급하고, 사람을 등용하는 것이 너무 빠르며, 남의 말을 듣는 것이 너무 지나치다.’고 했는데, 신은 전하께서도 그런 병통이 있지 않나 싶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사람을 제대로 안 뒤에 쓰고, 그러한 사람을 쓴 뒤에야 백성이 편안하게 되는 것이니, 반드시 백성들의 탄식과 원성이 없게 된 뒤라야 치세(治世)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전하께서 비록 은혜로운 정치를 베풀어도 백성들이 그 혜택을 받지 못하니, 이는 전하께서 치도(治道)의 요체를 터득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맹자(孟子)는 ‘모두가 어질다고 말하여도 그대로 믿어서는 안 되며 실제로 어진 것을 확인한 뒤에 등용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조종조(祖宗朝)의 사람을 쓰는 방도는 비록 다섯 현신[五賢臣]과 같은 경우에도 그들을 처음 등용할 때는 참봉(參奉)으로 임용하기도 하였는데, 이는 어진 점을 확인한 뒤에 쓰려는 의도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시험해 보지도 않고 자급을 뛰어넘어 등용하는 자도 있으니 옳지 못한 듯합니다."
하였다.
영돈녕부사 김상헌(金尙憲)이 돌아가고자 하여 상소하기를,
"삼가 생각하건대, 지금 해가 바뀌고 계절이 크게 변하였는데도 민심의 동향은 전과 크게 다를 바가 없습니다. 헛소문이 날로 일어나 어리석은 이나 유식한 이 모두 그러하니, 정사와 호령이 공의(公議)를 거듭 어김을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안정시키기 어려운 실상과 우려되는 형세가 가시밭에 서 있고 얼음 위를 걷는 듯하니, 나라의 일이 끝내 어떻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큰 뜻을 분발하시어 훌륭한 덕을 날로 새롭게 하심으로써 조종(祖宗)의 중대한 부탁과 신민(臣民)들의 간절한 바람을 저버리지 마소서. 신은 이제 다한 목숨이라 영원히 성명의 시대와 이별하여 다시는 충성을 바칠 수 없게 되었으니, 부질없이 혼자서 근심하고 답답하게 여기는 심정만 그지없을 뿐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정령(政令)이 공의(公議)를 거듭 어기고 헛소문이 날로 일어나는 것은 모두가 나의 부덕한 소치이다. 너무나 두렵다."
하였다.
1월 7일 신유
상이 영사전에서 춘향(春享)을 거행하였다.
유경창(柳慶昌)을 승지로, 김시진(金始振)을 지평으로 삼았다.
진선 송준길(宋浚吉)이 상소하기를,
"삼가 생각하건대 오늘날의 국사는 위태롭기 그지없습니다. 위로는 천문(天文)이 경계를 보이고, 기상이 매우 참혹하여 무지개와 안개, 우레, 바람이 거두어져 간직되어야 하는 계절인데도 새로 시작하는 초기에 거듭 나타나는가 하면, 아래로는 인심이 흉흉하고 놀라 헛소문이 날로 일어나, 높은 데 올라가 소리치거나 방(榜)을 붙이는 등 못하는 짓이 없으며, 짐을 꾸려 피난을 가는 자까지 있게 되었습니다. 천시(天時)와 인사(人事)가 어찌 한결같이 이러한지 모르겠습니다.
군신 상하가 공구 수성(恐懼修省)하여 불속에서 구원하고 물속에서 건져내듯 황급히 서둘러도 오히려 이 난국을 구제할 수 없을까 걱정되는데, 어찌하여 느슨하고 방종하여 한가로이 말들만 하면서 한 사람도 국사를 담당하는 자가 없단 말입니까. 아, 위태롭습니다. 한 달 사이에 도하(都下)의 기상이 매우 처참하여 마치 따뜻한 봄볕에 만물이 싹트려다가 갑자기 서리를 맞고 생기가 꺾인 듯하니, 이 점이 신이 밥을 먹지 못하고 잠을 이루지 못하는 까닭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나라를 걱정하는 충성이 말속에 넘치니 매우 가상하고 감탄스럽다. 재앙과 이변이 속출하고 기상이 참혹한 것은 모두 내가 임금답지 못한 소치이니 참으로 나는 애태우며 염려하여 마지않는다."
하였다.
1월 8일 임술
상이 주강에 나아가 《중용(中庸)》 28장을 강하였다. 강을 마치자 제사(諸司)의 윤대관(輪對官)을 불러서 접견하였다.
이조 정랑 홍명하(洪命夏)가 상소하기를,
"근래 도성의 인심을 보건대 헛소문이 날로 일어나 어리석은 자나 유식한 자나 모두 의혹된데다가 성변(星變)은 경계를 보이고 기후는 처참하여 불측한 재앙이 조석간에 닥칠 것만 같습니다. 성명께서 위에 계시고 여러 현신이 아래에 있는데 국가의 위급한 정상이 어찌 이 지경에 이른단 말입니까. 며칠 전 경연에서 사구(射具)의 제도를 변혁시키라고 하신 하교는 뒤진 제도를 부흥시키려는 한때의 적절한 조처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그 말씀이 일단 전파되자 많은 사람들의 의심이 더욱 깊어졌으니, 오늘날의 인심이 맑지 못함을 이에서 볼 수 있습니다.
헛소문을 막을 만한 계책이 없고 국사에 믿을 만한 형세도 없으니 지금의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계책으로는 먼저 큰 뜻을 세워 오로지 진정시키기에 힘쓰고, 모든 일은 기미를 살피고 반드시 삼가하는 것이 제일입니다. 신이 어제 저녁에 춘방(春坊)에 입직(立直)하면서 앞으로 불시에 시사(試射)를 거행할 것이라는 말을 우연히 들었습니다. 이는 격려하고 권장하려는 성상의 뜻에서 나온 것임을 참으로 알지만 신의 어리석은 생각에는 사람들이 의심하고 두려워하는 이때 한바탕 헛소문을 더 선동하는 것을 면치 못할까 염려됩니다. 삼가 원하건대 성명께서는 사려를 깊고 멀리 하시어 중일(中日)001) 에 시사(試射)하는 이외에 불시에 거행하는 것을 속히 중지하시면 천만 다행이겠습니다.
신은 또 삼가 생각건대 치도(治道)는 그 요점을 터득하는 것이 귀중하고, 관리의 임용은 어진이를 얻는 것이 귀중하며, 간언(諫言)을 따르는 것은 물흐르듯 하는 것이 귀중합니다. 그러나 삼가 살피건대 전하께서 비록 치도를 구하는 정성이 있지만 그 요점을 얻지 못하시고, 어진이를 임용한다는 명성은 있지만 그 실상은 미진하며, 간언을 따르시는 아름다움도 점차 처음과 같지 않습니다. 비록 일반적인 대간(臺諫)의 계사라도 궁가(宮家)에 관계되는 일이면 거절하고 따르지 않을 뿐만이 아니라 도리어 미안한 하교를 하시니, 어찌하여 ‘말을 들으면 반드시 과감하게 실행해야 한다’는 경계가 거론되도록 하십니까. 그리고 전하께서는 지난번 ‘인심을 위로하고 기쁘게 하여 재앙을 그치게 하는 방도로 삼겠다.’고 하셨는데, 세 신하에게만은 어찌하여 관대한 은전을 베풀지 않으십니까.
아, 지금은 바로 전하께서 즉위하신 원년(元年)입니다. 봄볕이 따스하여 만물이 생기를 발하는데, 그늘진 골짜기에는 아직도 즉위하신 은택을 아끼시니, 이것이 어찌 중외의 신민이 일찍이 성명(聖明)께 바라던 바이겠습니까. 작상(爵賞)에 있어서도, 공기(公器)002) 를 가지고 사사로운 은혜를 베풀어서는 안 되는데, 지난번의 정사에 김흥조(金興祖) 등을 특별히 서로(西路)의 수령에 제수하였습니다. 흥조 등은 과연 어려움을 무릅쓰고 왕자를 호종한 특별한 공로가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구분하여 서용하라는 명이 있고 나서 바로 특별히 제수하는 명을 계속하여 내리니, 이는 전하께서 공기를 가지고 사사로운 은혜를 갚는 것입니다. 보고 들은 모든 이들이 너나없이 놀라 탄식합니다. 청탁에 의해 사사로이 제수하는 일이 이로부터 점차 많아질까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전하께서 왕위를 이으신 이후로 비록 덕에 흠이 되는 일은 없었지만 정령(政令)에 있어서 공의(公議)를 거스름이 이러하니, 신은 한탄스러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성명께서는 종시토록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지소서."
하니, 답하기를,
"부족하고 잘못하는 점을 갖추 아뢰는 말이 매우 간절하고 바르니, 내 깊이 가상하게 여긴다. 상소의 말을 의당 깊이 생각하겠다."
하였다.
1월 9일 계해
도목 정사를 하였다. 임담(林墰)을 형조 판서로, 장응일(張應一)을 사간으로, 심지한(沈之漢)을 응교로, 홍중보(洪重普)를 문학으로, 이경억(李慶億)을 사서로, 성이성(成以性)을 부교리로, 윤집(尹鏶)을 부수찬으로, 곽성귀(郭聖龜)를 필선으로 삼았다.
이조가 공산 현감(公山縣監) 이태연(李泰淵)을 부수찬에 수석으로 의망(擬望)하였는데, 상이 정원에 하교하였다.
"이태연은 공산을 다스리면서 좋은 치적을 이루었으니, 내가 의당 발탁해서 경악에 두고서 총애하여야 하는데 한편 생각하면 한 고을의 백성들이 하루만이라도 편안히 살게 하는 것도 큰 일이 아닌가. 때문에 망설이면서 제수하지 못하고 있다."
1월 11일 을축
황해도에 전염병이 크게 번져 사망자가 많았다.
1월 12일 병인
상이 대신과 비국(備局)의 여러 신하를 인견하였다. 영의정 이경석(李景奭)에게 이르기를,
"지난번 송준길의 상소를 보니 ‘수일 사이에 기상이 홀연히 처참해져서 마치 봄에 갑자기 엄한 추위를 만난 듯하니 매우 근심된다.’ 하고, 또 ‘한 사람도 국사를 담당하는 자가 없다.’고 하였는데, 그 까닭이 어디에 있는가?"
하니, 경석이 대답하기를,
"국사를 담당하는 자가 없다고 한 것은 신과 같은 자가 쓸데없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고, 기상이 처참하다고 한 것은 근래 도성에 나도는 헛소문 때문입니다. 자고로 불궤(不軌)의 무리는 헛소문을 반드시 조작하게 마련인데, 그러한 말로 인하여 놀라 동요되어서는 안 됩니다.
신에게 생각되는 바가 있지만 황공하여 감히 아뢰지 못한 지가 오래입니다. 소현(昭顯)의 여러 아들에 대한 일은 이제 선왕(先王) 때와는 다릅니다. 당시에는 부득이 그렇게 처치할 수 밖에 없었으나 지금은 가까운 곳에 두어야 합니다. 이경여(李敬輿)·심노(沈𢋡)·이응시(李應蓍) 등의 죄상에 대해서는 성명께서 필시 이미 통촉하셨을 것입니다. 이제 완전히 석방한다 해도 선왕의 뜻을 이어받드는 도리에는 방해됨이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연양군(延陽君) 이시백(李時白)과 호조 판서 이기조(李基祚)도 같은 말을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의 생각도 그러하다. 그러나 어렵게 여기는 것도 그만한 생각이 있어서이다. 만일 이러한 일로서 화기(和氣)를 부르고 인심이 위안된다면 선왕의 뜻을 이어받드는 도리가 크다. 세 신하는 모두 석방하고 셋째 아이는 가까운 곳으로 옮기라."
하였다.
1월 13일 정묘
우의정 김육(金堉)이 선조의 묘를 성묘하기 위하여 양주(楊州)로 물러갔다. 이보다 앞서 김육이 대동법(大同法)을 시행할 것을 청하자, 상이 이조 판서 김집(金集)에게 물으니, 김집은 시행하는 것이 불가하다고 하고, 또 건의하여 원로 대신에게 인재를 물어 차례에 구애받지 말고 등용하기를 청하였는데, 이에 김육이 상소하기를,
"인재를 등용하는 권한은 인주(人主)의 대병(大柄)이므로 아래에서 마음대로 해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이로 인해서 두 사람이 화협하지 못했는데, 그 뒤로 여러번 상소하여 치사를 청하면서 아뢰기를,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도리는 진퇴가 분명하고 그 마음에 변함이 없어야 할 뿐입니다. 나아가야 할 때에 물러나는 것은 잘못이며, 물러가야 할 때 나아가는 것도 잘못입니다. 미관 말직에 있는 자도 오히려 그러해야 하는데, 더구나 대신의 반열에 있는 자이겠습니까. 대체로 물러가서는 안 되는 경우가 셋이며, 물러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경우가 셋입니다. 이를테면 자신에게 국가의 안위가 걸려 있어 국가의 존망에 관계된 자가 첫째요, 산림(山林)에서 와서 덕망이 세상을 덮는 자가 둘째요, 나이가 젊고 근력이 있어 국사를 담당할 만한 자가 셋째이니, 이상은 물러가서는 안 되는 경우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분명히 알 만큼 재덕(才德)이 부족한 경우가 첫째요, 나이가 이미 많고 노쇠하여 치료하기 어려운 병을 지닌 자가 둘째며, 남의 비웃음이나 당하며 쓰여지기에는 부적합한 말을 하는 자가 셋째이니, 이는 물러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경우입니다.
이제 신은 분에 넘치는 은총으로 치사(致仕)할 나이가 넘었으니 물러가야 하겠습니까, 물러가지 않아야 하겠습니까. 옛사람을 들어 말하건대 자신에게 국가의 존망이 걸린 한(漢)의 제갈량(諸葛亮)이나 백성들의 인망이 간절했던 진(晋)의 사안석(謝安石)이나 나이가 노쇠하지 않았던 송(宋)의 문천상(文天祥)의 경우와, 참람되지만 비교해 본다면, 하늘을 나는 붕새와 땅속 벌레의 차이 정도일 뿐만이 아니며, 시세의 어려움도 한(漢)이나 진(晋)·송(宋)의 경우와도 다릅니다. 조금이라도 그대로 나아가야 할 도리가 어디에 있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성명께서는 속히 치사를 허락하여 주소서."
하니, 상이 위로하는 하유(下諭)를 하고 윤허하지 않았다. 김육이 마침내 떠나게 해 줄 것을 바라면서 또 상소하기를,
"신의 고조(高祖) 신(臣) 김식(金湜)은 기묘(己卯)의 화에 걸렸고, 족조(族祖) 신(臣) 김권(金權)은 광해(光海) 때에 귀양지에서 죽어, 이미 쓸쓸한 한족(寒族)이 되었었습니다. 그러다가 변변치 못한 신이 외람되어 태사(台司)에 오르고, 불초한 자식 하나가 또 경악에 들었으므로 남들은 영예롭게 여겼으나, 신은 근심과 두려움이 더하였습니다. 한 번 화를 당한 가문의 신으로서는 활에 다친 새가 굽은 나무만 보아도 지레 놀라듯 하는 마음을 지니게 되는 것은 감히 다른 사람과 비할 바가 아니었습니다."
하고, 또 상소하기를,
"신이 시기(時忌)를 범한 것은 참으로 스스로 취한 짓이니, 이는 목숨을 보존하려 해도 오히려 어려울 일인데, 어찌 감히 어진이의 길을 오래도록 방해하겠습니까. 신이 ‘한 번 화를 당한 가문’이라고 상소한 것도 실로 이러한 근심에서입니다. 전하께서 신을 불쌍히 여기시어 놓아주지 않으심이 마침 화근이 되었습니다."
하였는데, 모두 우대하는 비답을 내리고 윤허하지 않았다.
1월 17일 신미
영동(嶺東)의 미두(米豆) 2천 석을 옮겨다 북도(北道)의 주린 백성들을 구제하도록 명하였다.
1월 18일 임신
번개가 쳤다.
전남도(全南道) 광양현(光陽縣)에서, 공중에서 여러 개의 큰 북을 치는 듯한 소리가 울렸는데, 집들이 흔들렸다. 바다에서도 많은 포(砲)를 일제히 쏘는 듯한 소리가 났다.
1월 19일 계유
조수익(趙壽益)을 대사간으로, 조석윤(趙錫胤)·신익량(申翊亮)을 승지로, 권대운(權大運)을 정언으로 삼았다.
1월 20일 갑술
홍명일(洪命一)을 승지로 삼았다.
1월 21일 을해
월식이 있었다. 항성(亢星)이 목성(木星)을 범하였다.
상이 주강에 나아가 《중용(中庸)》 29장을 강하였다. 강을 마치고 집의 송시열(宋時烈)이 나아가 아뢰기를,
"신이 민간의 고통을 성상께 아뢰고자 합니다. 그러나 전하께서 더욱 살피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시종(侍從)의 신하로서 서울과 지방을 왕래하면서 보고 들은 일을 말해주지 않는다면 내가 어디를 통하여 알겠는가."
하였다. 시열이 아뢰기를,
"지금 백성들이 도탄에 빠져 있으니 성명께 기대함이 크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즉위하신 해가 다 가도록 아직도 실효가 없습니다. 옛사람이 ‘어두운 군주에게는 원망하지도 않고 밝은 군주를 원망한다.’고 한 말이 참으로 이런 때문인 것입니다.
근래의 일을 예를 들어 말하자면, 산릉 역부(山陵役夫)의 값을 처음에는 감제(減除)한다는 영을 내렸다가 곧이어 다시 징수한다는 명을 내렸습니다. 조정이 신의를 잃음이 이와 같으니 백성이 어떻게 믿겠습니까. 그리고 베[布]의 길이도 일정한 법식이 있게 마련인데, 근래에는 모든 일을 규례에 따르지 않습니다. 조정에서 처음 35척(尺)으로 정하였던 것을 얼마 안 되어 40척으로 고쳤으니, 백성들이 원망을 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백성들이 원성이 있음을 모르는 것이 아니나 해조(該曹)에서도 부득이하여 그런 것이다. 나도 마음이 편치 않다. 이런 뜻으로 묘당(廟堂)에 의논하도록 하라."
하였다. 시열이 아뢰기를,
"대체로 변통할 일이 있어 묘당에 의논하도록 하면 묘당에서는 아름다운 뜻을 깊이 이해하지 못하고서 문득 반대하고 나서므로 신은 매양 한스럽게 여깁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군국(軍國)에 관한 중요한 일을 독단하기란 쉽지 않으니 반드시 자문한 뒤에 시행해야 한다."
하였다. 시열이 아뢰기를,
"근래에 조정이 화합하지 못합니다. 이조 판서 김집(金集)이 그 직위에 있기가 불안하여 이제 또 물러갔으므로 신은 답답하게 여깁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아침에 그의 상소를 보고 매우 놀라 탄식하였다. 국사가 이러한데도 모두 물러가기만을 생각하니 이는 참으로 내가 부덕하기 때문이다."
하였다. 시열이 아뢰기를,
"김집은 우상(右相)의 상소 내용 때문에 부득이 갔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우상의 상소에는 별로 공척(攻斥)하는 말이 없었는데 어찌하여 이처럼 결단코 갔는가?"
하였다. 시열이 아뢰기를,
"대동법에 관한 의논이 맞지 않아서 우상이 불평하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모두 공도를 위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었는데 이제 와서는 이처럼 격해졌습니다. 필시 떠도는 말이 오가서 경동(驚動)함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승지 윤강(尹絳)을 돌아보며 이르기를,
"애써 만류하는 뜻으로 사관을 급히 보내 하유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날 홍주 목사(洪州牧使) 목행선(睦行善) 등이 사조(辭朝)하였는데, 만나서 유시(諭示)하여 보냈다. 이어 제사(諸司)의 윤대관(輪對官)을 소견(召見)하였다.
이조 판서 김집이 연산(連山)으로 돌아갔다.
1월 22일 병자
상이 주강에 나아가 《중용(中庸)》 31장을 강하였다.
영돈녕부사 김상헌(金尙憲)이 상차하기를,
"신이 감내할 수 없는 큰 질병이 있고 또 크게 어려운 형세를 만났으니, 이는 역시 조금은 살펴 주실 만한 점이 있습니다. 지금 나라의 형세는 날로 위급해지고, 신의 병은 날로 위중해 지는데, 우상은 자신의 의견이 시행되지 않음으로 인하여 물러갔고, 좌상은 개장(改葬)의 복(服)으로 인하여 말미를 받아 오래도록 물러가 있습니다. 그리하여 혼자서 모든 국사를 담당하는데, 아무리 젊고 힘이 강한 이라 하더라도 큰 집에 기둥 하나만이 받친 격이니, 이 역시 어떻게 혼자만을 믿겠습니까.
지금 들으니, 전하께서 산릉(山陵)에 행차하려 하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혹시라도 불행히 적국의 사신이 전의 기약을 잊지 아니하고 제멋대로 몰려나와 군병(軍兵)을 징발하여 여러 날 해산하지 않게 되어 수많은 헛소문이 그틈을 타 선동이라도 하게 되면 묘당(廟堂)에는 진정시킬 계책이 없고, 장수는 외적을 막아낼 만한 인재가 아니니, 안위(安危)의 기틀이 순간에 결정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국가의 일이 어찌 위태로울 정도일 뿐이겠습니까. 신은 이러한 때 앞으로 어떻게 해야 될지를 모르겠습니다. 비록 그렇지만 신이 오래도록 병을 앓던 나머지 정신이 혼란하여 이러한 망발이 있는 것이니, 반드시 그러한 일이 있을 것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또 그러한 염려가 반드시 없을 것이라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삼가 전하께서는 덕 있는 어진 보필을 불러와 강직한 현신과 아울러 국사를 맡기고, 선비들의 여망을 짊어진 중신을 다시 불러와 같이 화목하고 도와 국사를 구제하도록 하심은 물론 먼저 소용없는 노물(老物)을 물리쳐서 조정을 맑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병중에도 나라를 걱정하는 정성이 이러하니, 내 실로 감탄하는 바이다. 배릉(拜陵)의 행차는, 정이야 망극하지만 내가 다시 생각하여 처리하겠다."
하였다.
우의정 김육이 또 상소하기를,
"나라에는 위급한 일이 없고, 몸에는 의당 물러가야 하는 의리가 있는데, 먼저 그 마음을 변하고서도 국사를 잘 하는 자는 없는 것입니다. 신으로 하여금 창을 매고 위험한 전쟁터로 나가라고 하시면 비록 늙고 병든 몸이지만 감히 죽음을 무릅쓰고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말이 쓰여지지 않고 뜻을 펴지 못하였는데도 그 직책만을 영화로이 여기어 무리의 뒤나 따라다니면서 그 본심을 상실한 채 남이 시키는 대로나 하는 것이라면, 하인들을 시켜도 되는 일입니다. 어찌 꼭 신이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문(下問)하신 일이나 꼭 시행해야 할 일은 신이 비록 직을 떠나더라도 극력 아뢰겠습니다. 그 말이 쓸 만하면 결단하여 시행하시고, 그 말이 쓸 만하지 못하면 결단하여 버리소서. 그렇게 하시면 어찌 인심이 쾌하게 여기고 신 또한 편안해지지 않겠습니까. 하필 소나 말처럼 고삐를 매어 신으로 하여금 본심을 저버리고 끝내는 나라까지 저버리게 하시렵니까.
이제 들으니 이조 판서 김집이 상소를 남겨두고 떠났다고 합니다. 전하께서도 일찍이 봄이 되면 왕래하도록 허락하셨는데, 혹시라도 그가 나가고 신이 들어가면 남들은 필시 신의 말로 인하여 그가 갔다고 할 것입니다. 어진 벗을 내쫓고 자신이 들어가는 그러한 사람이 어떻게 세상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 신은 이미 위험한 기관(機關)을 범하였으니 참으로 스스로를 보전하기가 어렵습니다. 만일 어진이를 업신여기고 변법(變法)을 한 것으로 왕안석(王安石)에 견주어 공격한다면, 전하께서 아무리 신을 구원하고자 하여도 안 될 것입니다. 신은 차라리 게을리하여 책임을 회피한 죄를 받을지언정 진퇴(進退)에 기준이 없는 사람이 되어 탄핵의 아래 욕을 당하는 그런 사람은 차마 될 수 없습니다. 삼가 성명께서는 속히 신의 직을 체차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나의 생각은 이미 전에 다 말하였으니 지금 더 말할 것이 없다. 다만 생각해 보건대 경이 나오지 않으면 이는 바로 그를 내쫓는 격이 된다. 속히 들어와서 함께 국사를 보살피도록 하라."
하였다.
집의 송시열(宋時烈)이 아뢰기를,
"이조 판서 김집은 신의 스승입니다. 이번에 우상의 배척을 받아 창황히 떠나갔는데도 신은 힘을 다해 분명하게 분별하여 거취를 함께 하지 못하였으니 부끄럽기 그지없습니다. 신은 김경여(金慶餘)·송준길(宋浚吉) 등과 격탁양청(激濁揚淸)003) 하는 행동을 망령되이 하였는데, 그로 인하여 돌고 도는 사이에 뜬소문이 서로 충동하고 비방하는 의논이 무리지어 일어나 사우(師友)에게 누가 미치고 결국 원로(元老)에게까지 미쳐서 꼭 떠나고야 마는 상태가 되고 말았습니다. 믿는 바는, 성상의 뜻이 굳게 정해지고 삼공(三公)이 협력한다면 사리를 분별하고 시비를 진정시켜 국사가 끝내 잘못되지 않으리라는 점입니다.
이번에 우상이 사소한 일로 인하여 불평스러운 마음으로 상소를 해서 ‘자신에게 국가의 안위가 걸려 있어 국가의 존망에 관계된 자’라느니 ‘산림에서 와서 덕망이 세상을 덮는 자’라고 하여 은연중에 두 신하를 비난하는 뜻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 ‘활에 다친 새가 굽은 나무만 보아도 놀라는 처지’라고 하는가 하면 ‘마침 화근이 되었다’고 하였으며, 마지막에는 ‘시기(時忌)를 범하였으니 목숨을 보존하려 해도 어렵다’는 등의 말을 하였습니다. 한마디 한마디가 너무 심각하여 마치 김집이 한 시대를 장악하고서 위복(威福)을 마음대로 하는 듯한 투였습니다. 아, 이처럼 신실하지 못한 말을 할 수 있는 것입니까.
대저 이른바 ‘때[時]’란 누구의 때를 말하는 것입니까. 임금과 재상은 한 시대를 도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상은 국정을 담당하여 자신이 국가의 운영을 책임지고서도 마치 지금이 다른 사람이 담당한 때인 양하였으니 그 이유를 역시 잘 모르겠습니다. 삼가 우상의 평소 행적을 생각해 보면 반드시 이러한 데까지 이를 처신은 아니었으니, 필시 오고간 말들에 격동되어 그리 되었을 것입니다. 이는 실로 함부로 행동한 신들의 죄에서 기인한 것이니 후회한들 소용이 없게 되었습니다.
옛날 송나라 때 범중엄(范仲淹)이 좌천되자 윤수(尹洙)와 채양(蔡襄)·여정(余靖) 등은 ‘중엄은 신의 사우(師友)이니만큼 진퇴와 영욕을 의리상 달리할 수 없으니 같이 좌천시키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주자(朱子)가 배척을 당하였을 때에 그의 친구와 문인 중에 능히 자신을 지킨 자는 모두 함께 물러난 반면 그렇지 못한 자는 우물쭈물하면서 눈치를 보았는데, 이 때문에 주자는 ‘확립하지 못하고 바람 앞에서 흔들거렸다.’고 꾸짖고 ‘대이삼장(大耳三藏)이 천진교(天津橋) 위에서 엿본다004) ’는 말로 기롱하였습니다. 이제 김집(金集)이 떠나 갔으니 신은 의리상 혼자 남아 있기가 어렵습니다.
아, 전하께서 어렵고 중대한 왕업을 물려 받으시고 큰 뜻을 분발하시어 원로(元老)를 예로 맞아들이며 숙유(宿儒)를 높이 등용하셨으므로 신은 참으로 생각하기를 ‘앞으로 전하께서 성심으로 학문에 전념하고 사심을 억제하여 선을 따르셔서 상(商)의 고종(高宗)처럼 나라를 중흥하고, 주(周)의 선왕(宣王)처럼 어지러운 것을 바로 다스려 국가를 부흥시키시면 온 세상의 백성들이 함께 영광스러울 것이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신은 비루하고 졸렬한 자신을 헤아리지도 않고 나오기에 힘써 갔다가는 다시 왔습니다.
그런데 이제 성명(聖明)께서 하시는 조처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크게 만족스럽지 못하고, 세상은 더욱 혼란해져 국사가 더욱 어렵고 위태롭습니다. 신은 위로는 하늘의 재앙이 두렵고, 아래로는 백성의 고통이 걱정되어 피어린 충정으로 속마음을 아뢰어 조그만 충성이나마 바치고자 하였으나, 그 중대한 것은 이미 가납되지 못하였고 이제 또 사우(師友)의 의리상 거취를 달리할 수 없게 되었으니 같이 물러가는 이외에 별다른 도리가 없습니다. 신의 직을 파척하도록 명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내가 성심으로 머물러 주기를 권하는데도 이조 판서는 어찌하여 마음을 돌리지 않는가. 그대는 떠나야 할 의리가 없으니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시열이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헌부가 출사(出仕)를 계청하였는데, 시열은 병을 핑계로 소명(召命)에도 응하지 않았다. 정원이 근래의 준례에 의거해서 파직할 것을 청하니, 답하기를,
"너무나 우대하는 도리가 아니다. 특별히 파직하지 말라."
하였다.
1월 23일 정축
조경(趙絅)을 대사헌으로, 이석(李晳)을 장령으로, 장응일(張應一)을 겸필선으로, 김홍욱(金弘郁)을 겸보덕으로, 남선(南銑)을 도승지로, 이일상(李一相)을 승지로, 윤순지(尹順之)를 동지경연으로, 김응조(金應祖)를 응교로 삼았다.
1월 24일 무인
상이 주강에 나아가 《중용(中庸)》 32장을 강하였다. 강을 마치자 지평 김시진(金始振)이 나아가 아뢰기를,
"송준길(宋浚吉)과 송시열 등이 악을 미워하고 선을 선양하는 행동을 하였기 때문에 헐뜯는 말이 많은데, 혹 그를 좋아하지 않는 자가 이런 기회를 노릴까 염려됩니다. 이번에 우상이 공박하여 배척함이 너무 지나쳤습니다. 우상도 사류(士類)인데 어찌 그 지경에 이르렀는지 모르겠습니다. 김상헌도 물러가려 하므로 여정(輿情)의 실망이 너무 큽니다. 전하께서는 비록 양편의 중간에 서는 것으로 화합을 시키는 바탕으로 삼으려 하시지만 일이란 본디 시와 비가 있기 마련이니 둘다 옳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분명하게 분별하시어 처리하소서."
하니, 상이 잠자코 말이 없었다.
희천 군수(熙川郡守) 이명립(李詺立)과 용궁 현감(龍宮縣監) 이익징(李翼徵)이 사조(辭朝)하였는데, 만나보고 유시하여 보냈다.
1월 25일 기묘
상이 주강에 나아가 《중용(中庸)》 33장을 강하였다.
우의정 김육이 또 상소하여 면직을 청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김육을 영중추부사로, 윤겸(尹㻩)을 장령으로, 이정기(李廷夔)를 정언으로, 정두경(鄭斗卿)을 수찬으로, 신민일(申敏一)을 대사성으로, 조석윤(趙錫胤)을 부제학으로 삼았다.
1월 26일 경진
상이 주강에 나아가 《중용(中庸)》 33장을 강하였다.
예조 판서 오준(吳竣)이 경연에서 노인을 우대하는 은전을 시행하기를 청하니, 상이 예조에서 의논하도록 하였는데, 예조가 회계하기를,
"선왕조의 경오년 《등록(謄錄)》을 가져다 상고해 보건대 성교(聖敎)로 인하여 관작을 내리는 은전을 크게 베풀었는데, 천인(賤人)에게까지도 은전을 내렸기 때문에 항간의 부노(父老)들이 지금까지 눈물을 흘리며 모두 훌륭한 덕이라고 칭송합니다. 이번에 경로(敬老)의 행사가 또 교화를 새롭게 하는 초기에 나오니, 보고 듣는 사람이면 누군들 감탄하지 않겠습니까. 조신(朝臣)인 경우는 이조로 하여금 일일이 거행하도록 하여 누락되고 고루 미치지 못했다는 탄식이 없게 하고, 공·사천(公私賤)으로 80세가 된 자는 역시 이조로 하여금 품지(稟旨)하여 처리하게 하소서."
하고, 이조가 경오년의 구례에 따를 것을 청하니, 허락하였다.
1월 28일 임오
영돈녕부사 김상헌이 선영(先塋)을 보살피는 일로 돌아가기를 원하니, 상이 명하여 말을 내주고 제구(祭具)를 관에서 갖추어 주도록 하는 동시에 내의(內醫)로 하여금 약물(藥物)을 가지고 따라가도록 하였다.
영의정 이경석(李景奭)이 상차하기를,
"신은 본디 촌장(寸長)도 없습니다. 그러나 생각이 있으면 반드시 아뢰고 일을 만나면 회피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신이 조정에 선 이래로 스스로 힘써온 바입니다.
대동법(大同法)은 본래 백성을 편리하게 하기 위한 것이니, 널리 많은 사람들의 의견을 들어보고자 하는 것은 상세하고 신중하게 하려는 데 목적이 있는 것으로 당초 고의로 모나게 반대하려고 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말이 돌고 도는 과정에서 동료 재상이 인피(引避)하는 말이 될 줄이야 어찌 생각이나 하였겠습니까. 결국 이조 판서가 낭패스러워 돌아가기에 이르렀는데, 신도 동료 재상에게 다른 뜻이 없었다는 것을 압니다만, 이조 판서로서야 어찌 떠나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오직 성명께서는 어진이 좋아하는 마음을 더욱 돈독히 하시어 재야의 어진이는 오게 할 방도를 생각하시고 조정에 있는 이는 머물러 있도록 할 방도를 생각하소서. 원로의 진퇴는 더욱 국가의 체모에 관계되니 어찌 더 유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봄추위가 아직 매서우니 감기로 손상되기 쉽습니다. 우선 조섭하게 하여 날씨가 따뜻해지기를 기다리도록 하소서. 또 원하건대 전하께서도 마음을 비우고 받아들이는 도량을 더욱 넓히시어 잘못을 지적하는 자를 아름답게 권장하고, 귀에 거슬리는 말도 관대히 수용하시어 사람들로 하여금 화기(和氣)를 지니고 행동하게 함으로써 위태로움을 안정으로 변화시키는 근본으로 삼으소서.
신같은 자는 나이가 많으니 근력이 강건하다고 할 수가 없으며, 세상일에 도무지 밝게 아는 것이 없으면서 외람되게 수상의 직임을 차지하고 있으니 담당할 만한가의 여부는 따질 것도 없는데, 사람의 말이 이러하고 보면 담당할 수 없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삼가 성명께서는 속히 신의 직을 체차하고 어진 재상으로 다시 정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경마저 물러가고자 하면 앞으로 누구와 나라를 다스리겠는가. 모름지기 어려운 국사를 염려하고 조정을 진정할 방도를 생각하여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홍청 병사(洪淸兵使) 원숙(元䎘)이 사조(辭朝)하니, 만나 보고 유시하여 보냈다.
당초에 전주(全州)의 보인(保人) 이승민(李承敏)이 상소하여 시정(時政)의 잘잘못과 군민(軍民)의 쌓인 폐해에 대해 말하였는데, 상이 가납하는 한편 정원으로 하여금 그를 불러다 읽어보도록 시험하게 하였다. 승민이 막힘없이 읽으니, 상이 정조(政曹)로 하여금 수용(收用)하도록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승지 윤강(尹絳)이 아뢰기를,
"이승민은 보인입니다. 먼저 그 신역을 면제해 주어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보인의 처지로서도 오히려 부지런히 학문하여 성취하였으니 내 실로 가상하게 여긴다. 뒤에 의당 수용할 것이나 우선 그 신역을 감해 주도록 하라."
하였다.
'한국사 공부 > 조선왕조실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 효종실록3권, 효종 1년 1650년 3월 (0) | 2025.12.20 |
|---|---|
| 효종실록3권, 효종 1년 1650년 2월 (0) | 2025.12.20 |
| 효종실록2권, 효종 즉위년 1649년 12월 (0) | 2025.12.20 |
| 효종실록2권, 효종 즉위년 1649년 11월 (0) | 2025.12.20 |
| 효종실록2권, 효종 즉위년 1649년 10월 (0) | 2025.12.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