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효종실록3권, 효종 1년 1650년 2월

싸라리리 2025. 12. 20. 10:04
반응형

2월 1일 갑신

상이 영사전(永思殿)에서 삭제(朔祭)를 거행하였다.

 

2월 2일 을유

신유(申濡)를 승지로, 이만(李曼)을 대사헌으로, 하진(河溍)을 지평으로, 홍명일(洪命一)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함경도에 전염병이 크게 번져 감사가 보고하니, 상이 내국(內局)에 명하여 약을 조제하여 보내도록 하고, 또 동서의 활인서(活人署)에도 조제하여 주도록 하였다.

 

2월 5일 무자

우부승지 이일상(李一相)이 상소하기를,
"신이 삼가 보건대, 전하께서는 지성으로 다스림을 도모하시고 사물 다스림을 지극히 공평하게 하시며, 자주 조서(詔書)를 내리시고 계속해서 백성들을 고무하는 거조를 행하십니다. 그런데 무슨 영문인지 두어 달 이후로 조짐이 아름답지 않고 천심(天心)이 기쁘게 여기지 않아 많은 사람의 뜻이 막혀서 아래에는 잘못을 지적하는 충성이 없고 위에는 기꺼이 수용하는 미덕이 부족합니다. 그리하여 비분 강개하여 나라를 걱정하는 자를 어리석은 자라 하고 묵묵히 따르면서 자리만 보존하는 자를 똑똑하다고 하니, 묘당(廟堂)에는 서로 존중하며 협조하는 아름다움이 없어졌고 형세는 지리멸렬한 근심이 있게 되었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전하께서는 구중궁궐에 깊이 계셔서 곡진히 알지 못하실 것입니다.
유계(兪棨)와 심대부(沈大孚) 등의 죄의 유무와 경중은 논할 것 없이 전후하여 여러 신하가 이미 곡진히 진달하였으니, 오늘 신은 감히 다시 번거롭게 말하지 않겠습니다. 신은 삼가 들으니 지난번 송시열이 진언(進言)할 적에 수답(酬答)하신 말이 상당히 평온하지 못하였다 합니다. 시열의 말이 비록 곡진하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이 역시 소박하고 정직한 산야(山野) 충신의 장점인데, 전하의 포용하는 도량으로서 어찌 용서하는 것을 생각하지 않으셨습니까. 이로 인해 소문이 확대되면서 많은 사람의 기가 꺾였으니 조정의 복이 아닌 듯합니다. 유계 등에 대해서 그 실정을 자세히 살펴 본다면 어찌 다른 뜻이 있었겠습니까. 전하께서는 후일 신의 말이 비호하려는 데서 나온 것이 아니라 오로지 임금을 아끼는 마음에서 한 것임을 필시 아시게 될 것입니다.
신은 삼가 듣건대 선묘조(宣廟朝)에 차천로(車天輅)가 차술(借述)한 죄로 멀리 북쪽 변방에 유배되었는데, 그 뒤 그 도(道)의 관찰사가 임지로 떠나려 할 때 선묘께서 유시하시기를 ‘천로가 죄를 범하였으니 법을 무시할 수는 없으나 그의 글재주를 생각하면 애석하다. 굶주려 죽지 않도록 하라.’고 하였다 합니다. 관찰사가 부임한 뒤 매일 그를 찾아가니 천로가 괴이하게 여겨 그 연유를 묻고는 땅에 엎드려 감복하여 울었다 하는데, 지금까지도 미담으로 전해옵니다. 천로는 글재주 이외에는 별로 볼 것이 없었는데도 선묘께서는 하나의 재주를 지닌 선비를 이토록 생각하였는데, 더구나 실용(實用)의 재주를 지닌 이를 관대하게 수용하면서 그의 부족한 점을 용서해 주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영부사 신 김상헌이 말미를 받아 성묘하러 간다고 하는데, 앞으로의 형세가 혹 편치 못할까 싶기도 하니 굳이 억지로 만류할 수는 없겠으나, 다만 지금 원로(元老)가 또 떠나가면 중외의 실망이 어떻겠습니까. 봄추위가 아직 풀리지 않았는데 질병을 무릅쓰고 길을 떠나면 필시 더욱 건강이 손상될 것이니 갔다가 곧바로 돌아오는 것은 역시 기필할 수 없습니다. 날씨가 따뜻해지기를 기다렸다가 형세를 보아서 잠시 갔다 오도록 허락하여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성상께서는 속히 온화한 성지(聖旨)를 내리시어 잠시 머물러 있도록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그대가 근밀(近密)의 신하로서 이런 충언을 올리니 내 매우 가상히 여긴다. 어찌 두려운 마음으로 생각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이조 정랑 홍명하(洪命夏)가 상소하기를,
"삼가 생각건대 전하께서는 어느 임금보다도 훌륭하신 하늘이 낸 효자이시고 치세(治世)를 바라는 정성이 너무나 극진하시니, 세도(世道)를 만회하여 훌륭한 치세가 되리라 기대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럭저럭 세월만 보내면서 임시 방편만 취하시니, 무너진 기강이 확립되지 않고 고질이 된 폐습이 제거되지 못하여 백성에게 실제의 혜택이 미치지 않음은 물론 정령(政令)이 매번 신의를 잃고 있습니다. 물 흐르듯 간언(諫言)을 따르시던 미덕은 점차 처음과 같지 않아 조그마한 일도 너무 심하게 기를 꺾으시고, 경연에서의 대화도 전과는 달라 근시(近侍)의 신하마저 생각이 있어도 전달하지 못하며, 관직을 제수할 적에 현저하게 감정적으로 처리하시니 식자들이 모두 걱정을 합니다. 게다가 항간에는 유언비어가 끝없이 나돌아 공포에 동요되고 있으니, 신은 국사가 이러하고서도 얼마나 지탱할 수 있을지 감히 모르겠습니다. 더구나 조정이 둘로 나뉜 채 묘당의 의논이 모순되는데, 전하의 치세를 원하는 정성마저도 중단되고 보면 위태로움을 안정으로 전환시켜 국가를 진정시킬 수 있겠습니까.
옛 역사를 보면 현인 군자는 국가에 중요하였습니다. 송나라 때는 사마광(司馬光)이 조정으로 돌아오자 천하가 그에 의지하여 안정되었고, 한나라 때에는 강직한 신하 급암(汲黯)이 조정에 있게 되자 역적들이 감히 마음대로 못하였습니다. 이번에 이조 판서 김집이 뜻밖에 조정을 떠나고, 영돈녕부사 김상헌도 물러가려고 하니, 전하의 조정이 이제 텅 비게 되었습니다. 이미 물러간 현신도 성심으로 돈유하여 마음을 돌리도록 힘써야 되는데, 하물며 물러가려고 하는 원로를 그냥 가도록 맡겨두어서 거듭 백성들의 실망을 사서야 되겠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 거취(去就)와 안위(安危)의 기미를 살피시어 종시토록 의지하고 믿는 정성을 다하시면 다행스럽기 그지없겠습니다.
대체로 다스리는 방도는 각기 그 요령이 있는 것입니다. 사사로운 생각을 버리고 공정한 도를 넓히는 것은 왕도 정치의 요령이며, 현인과 간인을 분명히 구분하여 의심없이 현인을 등용하고 단호히 간인을 제거하는 것[勿貳勿疑]은 사람을 쓰는 요령이며, 요역과 부세를 가볍고 적게 하고 폐해를 끼치는 정치를 개혁하는 것은 백성을 기르는 요령이며, 경계를 즐거이 듣고 바른 말을 수용하는 것은 말을 듣는 요령이며, 두려워하는 마음가짐으로 자신을 반성하고 진실함으로 하늘에 응하는 것은 재앙을 그치게 하는 요령입니다. 형벌과 상이 제대로 시행되고 출척(黜陟)이 엄격하고 분명하면 기강의 확립은 걱정할 것이 없고, 여러 전문 인력을 독려해서 책임지워 완성하게 하면 인재의 부족은 걱정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진실로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삼가고 분발하시어 성상의 뜻을 굳게 정하시어 다스리고 교화하는 근본으로 삼으시면 다스리는 요령은 자연 강령이 서고 조목별로 정리될 것입니다. 신은 어려운 시국을 목격하고 걱정과 분한 마음이 북받쳐 감히 소장을 올리니, 삼가 전하께서는 굽어 살피소서."
하니, 답하기를,
"그대가 연이어 소장을 올려 충언을 갖추 진달하니, 나라를 걱정하고 임금을 아끼는 정성을 내 매우 가상히 여긴다. 두려운 마음으로 생각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함경도 회령(會寧)과 종성(鐘城) 두 고을에 두만강을 건너온 노루가 수없이 많아 거주민들이 손으로 때려 잡아 먹기도 하였다.

 

2월 6일 기축

소현(昭顯)의 셋째 아들을 강화로 옮겼다. 상이 그가 병이 났다는 말을 듣고 내의원에서 약을 가지고 가서 구하도록 명하였다.

 

2월 7일 경인

정원이 아뢰기를,
"요(堯) 순(舜)을 본받고자 하면 의당 조종(祖宗)을 본받아야 합니다. 우리 나라의 치적 중에서는 세종조(世宗朝)가 가장 훌륭하여 모두 후세의 법이 될 만합니다. 정신을 가다듬어 다스리기를 도모하는 지금이야말로 당연히 준수하여 행하여야 할 것으로서 이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실록(實錄)》 중에 시무(時務)에 절실한 여러 정교(政敎)와 양법(良法)과 아름다운 뜻을 모두 등사해 올려서 항상 좌우에 비치해 두면, 성상의 덕을 넓히고 다스리는 도에 유익함이 어찌 작겠습니까. 지금 사관(史官)이 사각(史閣)의 기와 개수 문제로 적상산(赤裳山)에 가 있으니, 그로 하여금 열람하여 적어서 올리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이어 하교하기를,
"성묘조(成廟朝) 때의 일도 초록하여 올리게 하라."
하였다.

 

2월 8일 신묘

이시백(李時白)을 이조 판서로, 정유성(鄭維城)을 대사간으로, 이재(李梓)를 집의로, 이홍연(李弘淵)을 사간으로, 조한영(曺漢英)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사은사(謝恩使) 인흥군(仁興君) 이영(李瑛)과 부사(副使) 이시방(李時昉) 등이 치계하기를,
"신들이 북경에 도착하였는데 관(館)의 문이 굳게 닫혀 있었습니다. 역관 정명수(鄭命守) 등이 와서 말하기를 ‘우리들이 떠나올 적에 접대하는 것이 전과는 크게 달랐다. 서로(西路)에서는 반찬 수를 줄이는가 하면 감시도 엄하였으며, 서울에 들어가서는 통관(通官)이 문지기에게 욕을 당하였으니, 피차간에 간격이 없다는 의미가 어디에 있는가. 본국에 필시 숨길 만한 일이 있기에 그런 것이다. 지금 굳게 닫아 두는 것도 당연한 형세이니 괴이하게 여기지 말라.’ 하였으며, 또 예부(禮部)의 뜻으로 전하기를 ‘조제(吊祭)와 책봉(冊封)에 대해 각기 사은(謝恩)하는 방물(方物)이 있어야 하는데, 이번에는 어찌하여 그리하지 않는가? 하기에, 신들이 말하기를 ‘이는 모두 같은 시기에 있는 은전이므로 별도로 사은하는 예가 없어도 될 듯하다고 하니, 정역이 말하기를 ‘책봉에 대해서만 오로지 사은하고 조제에 대해서는 사은하지 않으니 이는 책봉만을 소중히 여기고 사제(賜祭)는 가벼이 여긴 것이다. 필시 주무 관장자가 있을 것이니 의당 힐문하는 조처가 있어야 한다.’ 하였습니다.
며칠 후 호부 상서 파흘내(巴訖乃) 등 3인이 와서 섭왕(攝王)의 뜻으로 전하기를 ‘그대의 나라에서 매번 청하는 것을 애써 들어준 것도 많은데 은혜에 감사할 줄은 모르고 도리어 불경(不敬)스런 일이 있으니 이는 무슨 도리인가. 본국에 목화가 흉작이어서 무명베를 준비하기가 곤란하다고 말하는데 그대 나라가 아무리 작지만 민호(民戶)가 5천은 넘을 것이다. 만일 매 호에 1필씩만 징수하면 충분히 수효를 채울 것인데 준비하지 못할 걱정이 무엇인가. 그러나 이제 쌀로써 대신하겠다 하니, 봉성(鳳城)으로 운반하는 값은 역시 계산하여 감할 것이다. 하고, 또 ‘두 나라가 통화(通和)하는 것은 본래 우호를 다지기 위함인데, 칙사의 일행이 토산품을 무역하고자 하면 그대 나라에서 허락하지 않으니 성의와 신의가 없음을 알 수 있다고 하는 등 기타 힐책하는 말이 한둘이 아니었습니다."
하고,’ 또 치계하기를,
"파흘내와 기청고(祈靑古)·정명수(鄭命守) 등 6인이 모일(某日)에 칙서를 가지고 간다고 합니다."
하였다. 이에 상이 대신과 비국의 여러 신하를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지난번 남쪽에 해진(海震)의 변이 있어 내가 매우 두려워하고 있는데, 이제 청사(淸使)가 6 인이나 함께 온다니 그 의도가 어떤 것이겠는가?"
하니, 영의정 이경석이 아뢰기를,
"이번에 필시 힐문하는 일이 있을 것입니다. 표문(表文)을 사대(査對)005)  할 적에 미진한 곳이 있기에 신이 고치도록 했었는데, 이제 다시 보니 역시 소루함을 면치 못하였습니다. 힐책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하고, 좌의정 조익(趙翼)이 아뢰기를,
"신의 생각에도 표문 때문에 필시 이런 힐문이 있을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저들이 힐책을 하게 되면 말로써 다툴 수 없을 것인데 어떻게 한단 말인가?"
하니, 조익이 아뢰기를,
"이는 필시 우리 나라의 간사한 자가 크게 모함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우리 나라의 문금(門禁)이 엄밀한 것이 역시 빌미가 된 것이다."
하니, 이경석이 아뢰기를,
"저들이 만일 무리한 일로 힐책할 경우 신이 직접 담당하겠습니다. 그렇게 해서 나라가 무사하다면 신이 어찌 감히 몸 하나를 아끼겠습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경의 나라를 위한 정성이 간절하다 할 만하다."
하였다. 이경석이 아뢰기를,
"원두표(元斗杓)가 지금 파산(罷散) 중에 있으니 서용하여 원접사(遠接使)로 삼아야 합니다."
하니, 허락하였다. 또 아뢰기를,
"저들은 이조와 병조 판서가 접응(接應)해야 한다고 하는데, 이조 판서 김집(金集)이 세 번째 소를 올린 뒤에 나갔습니다. 현신을 대우하는 도리로서는 마음을 돌리기를 기다려야 하지만 사세가 이러하니 지금 체직시켜 다른 사람으로 대신하게 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또 아뢰기를,
"청사(淸使)는 모두 대관(大官)이니 별도로 문후하는 조처가 있어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관(內官)을 보내야 하는가?"
하자, 그렇다고 대답하였다. 연양군(延陽君) 이시백(李時白)이 아뢰기를,
"지위가 높은 조신(朝臣)을 보내야 합니다."
하자, 이경석이 예조 판서 오준(吳竣)과 원접사를 같이 보낼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이경석이 아뢰기를,
"서로(西路)에 저축해 놓은 내수사의 공포(貢布)가 있으면 연도(沿道)의 여러 읍에 나누어 주어 백성의 수고를 덜어주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수사의 공물은 으레 모두 직접 수납하는데 저축해 놓은 것이 있을 리가 있겠는가."
하였다. 이경석이 아뢰기를,
"이러한 때에 모든 공가(公家)에 저축해 놓은 것을 내어서 부족한 것을 돕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호조와 병조 판서가 지금 모두 참석하였으니 서로 의논해서 시행하라."
하였다. 병조 판서 한흥일(韓興一)이 아뢰기를,
"본조에 저축해 놓은 것이 상당히 많으니 사용할 수 있습니다."
하자, 이경석이 아뢰기를,
"해조에 미리 저축해 놓은 것은 실로 군민(軍民)을 위해서 장만한 것이니, 바로 오늘날 써야 합니다."
하였다.

 

2월 9일 임진

상이 주강에 나아가 《서전(書傳)》의 서문을 강하였다. 강을 마치자 영의정 이경석이 청대(請對)하니, 상이 소견(召見)하였다. 이경석이 나아가 아뢰기를,
"신이 물러가 생각해 보니, 6인의 사신이 함께 오는 것은 비상한 일이니 우리가 대처하는 것도 전일과는 달라야 합니다. 오준(吳竣)이 가는 것을 신이 대신하게 해 주소서. 기일에 앞서 달려가 놀라고 공경하는 기색을 보여야 할 것이고, 또 혹 임시하여 주선할 일도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과연 경의 말과 같긴 하다만, 서울에서의 책응(策應)은 누가 담당해야 하겠는가?"
하였다. 경석이 대답하기를,
"세종조(世宗朝)에 조사(詔使)가 오는 일로 인하여 황희(黃喜)를 기복(起復)했었습니다. 이번에도 정태화(鄭太和)가 지금 상중에 있으나 역시 기복하여 쓰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매우 옳다."
하고, 드디어 기복을 명하였다. 경석이 또 자신이 가게 해 줄 것을 극력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은 평소에도 휴식하지 못하였는데, 이제 직접 가기를 청하여 혼자서 담당하려고 하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른다. 다만 모쪼록 삼가해서 그들의 노여움을 촉발시키지 않도록 하라."
하자, 대답하기를,
"성상의 하교가 정녕하신데 감히 받들어 행하지 않겠습니까. 원컨대 상께서는 간쟁을 가납하시어 현사(賢邪)를 분별하시고, 또 기거(起居)를 절제하고 삼가하시어 성궁(聖躬)을 조섭하소서."
하였다. 이경석이 물러간 뒤에 상이 원접사 원두표를 불러 위로하고 면려해서 보냈다.

 

2월 10일 계사

남선(南銑)을 대사헌으로, 김좌명(金佐明)을 교리로, 이만(李曼)을 도승지로 삼았다.

 

2월 11일 갑오

이경여(李敬輿)를 석방하도록 명하고 영중추부사에 서배(叙拜)한 뒤 역마(驛馬)를 타고 오도록 하였다.

 

영돈녕부사 김상헌이 고귀(告歸)하자 상이 만류하였는데, 이때에 사직하고 떠나니 상이 불러서 만나 보았다. 상헌이 아뢰기를,
"고인이 이르기를 ‘임금은 여러 신하와 백성에게 죄를 짓지 말아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대체로 임금이란 신하에게 두려워할 것이 없는데도 이러한 말이 있으니, 임금의 자리는 어려운 것으로서 반드시 인심을 따른 연후에야 보존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신하들의 말 중에는 조정하려고 노력하는 것도 있고 지나치게 강직한 것도 있는데, 임금의 도리로서는 반드시 모두 수용한 연후에야 인심이 화합하여 따르는 것입니다."
하고, 인하여 제구(祭具) 및 태의(太醫)를 수행하도록 한 명을 사양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상이 주강에 나아가 《서전(書傳)》의 요전(堯典)을 강하였다. 강이 끝나자 각사(各司)의 윤대관(輪對官)을 소견(召見)하였다.

 

2월 12일 을미

상이 주강에 나아가 《서전(書傳)》의 요전을 강하였다.

 

2월 13일 병신

김자점(金自點)이 죄를 받았으므로 그가 거느렸던 군관(軍官)을 능천 부원군(綾川府院君) 구인후(具仁垕)에게 이속(移屬)시켰다.

 

상이 대신과 비국의 여러 신하를 인견하였다. 좌의정 조익(趙翼)이 아뢰기를,
"저들이 반찬이 박하였다는 것과 간략하게 한 표문(表文)의 착오를 가지고서 힐책하였다고 하는데, 전년부터 와전된 말이 매우 많으니 저들이 필시 들었을 것입니다. 이번에 6인의 사신이 오는 것은 아마 이 두 가지만은 아닐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기청고(祈靑古)는 문자를 약간 아니 필시 표문을 조사할 것이고, 파흘내(巴訖乃)는 동쪽의 일을 주관하는 자인데 이번에 나오니 필시 힐책하는 일이 있을 것이다. 이 점이 걱정이다. 그리고 저들이 만일 아무개가 정권을 잡고서 아무 일을 오로지 주관하였다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하자, 부제학 조석윤(趙錫胤)이 아뢰기를,
"만일 범한 일이 있다면 참으로 어찌할 수가 없지만, 저들의 위세를 두려워해서 죄없는 사람을 잡아 보내도록 한다면, 어찌 그런 나라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반드시 먼저 거절하는 계책을 정해야 합니다."
하였다.

 

2월 14일 정유

경상도 상주(尙州)에 하늘을 덮을 정도로 오리떼가 날아와 큰 들에 모여 진퇴(進退)하면서 전투하는 형세를 취하였는데, 그 소리가 우레와 같았다.

 

2월 18일 신축

경상도 대구(大邱)와 칠곡(漆谷)·언양(彦陽) 등 고을에 지진이 있었다.

 

조경(趙絅)을 예조 판서로, 오정일(吳挺一)을 승지로, 김시진(金始振)을 정언으로, 이석(李晳)을 보덕으로, 김홍욱(金弘郁)을 부응교로, 김휘(金徽)를 부수찬으로, 유준창(柳俊昌)을 장령으로 삼았다.

 

진선 송준길이 상소하여 면직을 원하니, 상이 우대하는 답을 내렸다. 이때 청사(淸使)가 갑자기 왔으므로 조야가 의심하고 두려워하였는데, 김상헌·김집·송준길·송시열·김경여같은 이들은 한 사람도 조정에 없었다.

 

간원이 아뢰기를,
"어사를 파견해서 불법을 염탐하도록 한 것은 바로 새로운 정사에 규율을 세우는 일입니다. 이번에 수령으로서 죄를 범한 자가 수십여 인인데, 그 중에서 용서할 만한 자도 혹 있겠으나, 죄상이 분명히 드러나 의심할 것이 없는 자가 어찌 전혀 없겠습니까. 그런데도 스스로 변명하는 말만을 근거로 갑자기 풀어주고, 종중(從重)의 율(律)은 삭직(削職)이나 도배(徒配)에 불과하니, 탐관오리를 어떻게 징계하겠습니까. 해부(該府)로 하여금 사실대로 조사해서 율에 따라 죄를 바루게 하소서.
옛날 한 광무(漢光武)는 장죄(贓罪)에 대해서 매우 엄하게 법을 적용하였습니다. 대사도(大司徒)인 구양흡(歐陽歙)이 장죄를 범하였는데, 제자 1천여 명이 대궐에 나아가 애걸하며 구명하였으나 끝내 사형을 면하지 못하였습니다. 이번에 권영(權榮)은 수많은 재물을 탐하였으니 그 죄를 용서하기 어려운데도 유배하는 데 그쳤으므로 국법이 신장되지 못하였습니다. 율에 따라 처단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권영은 지방에 있는 대신이 들어오기를 기다려서 의논하여 처리하라."
하였다. 당초 권영이 위원 군수(渭原郡守)로 있으면서 삼(蔘) 수백 근을 범하여, 감사와 어사가 연이어 계문(啓聞)하였다. 이에 하옥하도록 명하였는데, 금부가 아뢰기를,
"권영은 나이가 70세입니다. 법으로 보아 형(刑)을 사용하는 것이 마땅치 않으니, 대신에게 의논하소서."
하니, 대신이 아뢰기를,
"법이 그러하니 사죄(死罪)를 감하여 유배하고 그 장물은 관에서 몰수하도록 하소서."
하였다. 상이 하교하기를,
"일단 장물을 몰수하는 이상 죄상이 이미 드러났는데, 율에 의하여 처단할 수 없단 말인가. 다시 대신에게 의논하라."
하였는데, 좌의정 조익이 아뢰기를,
"사람의 목숨은 매우 소중합니다. 도류(徒流) 이하는 혹 용이하게 처리할 수도 있지만 사형은 삼가 살피지 않을 수 없으니, 전의 의논대로 하소서."
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그런데 이때에 와서 양사(兩司)가 율대로 할 것을 극력 청하니, 오랜 뒤에야 따랐다.

 

2월 19일 임인

상이 주강에 나아가 《서전(書傳)》의 요전(堯典)을 강하였다. 강을 마치자 지경연 한흥일(韓興一)이 나아가 아뢰기를,
"신은 지금 금부에 재직하고 있는데 대간이 죄를 범한 수령을 사실대로 조사할 것을 청하였습니다. 그러나 본부는 어사의 장계만을 근거로 하고 별도의 증거는 확보하지 못하고 있으니, 본도에서 조사해서 아뢰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는 어사의 서계가 애초에 분명하지 못한 데서 연유한 것이다. 조사한 내용 중에 허위와 관련된 것은 본도에서 다시 엄하게 조사하도록 하라."
하였다.

 

2월 20일 계묘

이보다 앞서 헌부가 광주 부윤 기진흥(奇震興)이 본직에 합당하지 못한 데다 백성에게 폐해를 끼쳤음을 논하여 파직시킬 것을 청하였는데, 이때에 비변사가 아뢰기를,
"광주의 백성 2백 5십여 인이 본사에 정서(呈書)하여 기진흥이 백성을 사랑한 치적을 대단하게 말하였는데, 신들도 일찍이 그의 혜정(惠政)에 대하여 들었습니다. 이제 청사(淸使)의 접대가 한창 시급한데, 이러한 때 백성을 아끼는 관리를 얻기가 참으로 쉽지 않으니 속히 직임을 살피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집의 이재(李梓)와 장령 윤겸(尹㻩) 등이 인피(引避)하기를,
"비국이 신들의 논한 바가 전적으로 사실이 아님으로 여기고, 대론(臺論)을 중지하기도 전에 직임을 살피도록 할 것을 청하였습니다. 이는 모두가 신들이 사실의 유무를 제대로 살피지 못한 소치이니 신들의 직을 체차하소서."
하고, 대사헌 남선(南銑)과 장령 유준창(柳俊昌)도 이를 이유로 인피하였다. 간원이 아울러 출사할 것을 청하였는데, 남선 등이 출사한 뒤에 기진흥을 다시 논하였으나 상이 끝내 따르지 않았다.

 

2월 21일 갑진

상이 주강에 나아가 《서전(書傳)》의 요전을 강하였다. 강을 마치자 시독관 김좌명(金佐明)이 나아가 아뢰기를,
"근래에 아첨하는 풍조가 크게 유행하여 친구들 사이만 다 그러할 뿐 아니라 군부(君父)의 앞에서도 아첨하는 말을 드리니 신은 삼가 그르게 여깁니다. 성명(聖明)의 효성은 하늘에서 타고나셨다는 말은 신하들 간에 서로 사석에서 말하여 임금의 덕을 찬양한 경우라면 그럴 수 있겠으나, 입시한 날에도 전하의 효성은 하늘에서 타고났다고 한다면, 이는 모두 면전에서 아첨하는 말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현재 진언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지만 그대의 말은 절실하지 않은 말이 없다. 내가 매우 가상하게 여긴다."
하고, 승지 윤강(尹絳)을 돌아보며 이르기를,
"내가 매번 소(疏)나 차자(箚子)를 보면 감당할 수 없는 말이 많아 얼굴이 화끈거렸다. 이제 이 말을 들으니 그 뜻이 매우 옳다. 이후로는 상소나 차자에 지나치게 미화한 말이 있으면 들이지 말라."
하였다.

 

2월 22일 을사

오준(吳竣)을 예조 판서로, 윤이지(尹履之)를 형조 판서로, 이래(李䅘)를 승지로 삼았다.

 

경상도의 진사(進士) 유직(柳稷) 등 9백여 인이 상소하기를,
"근래에 홍위(洪葳)와 이원상(李元相) 등이 여러 차례 소장(疏章)을 올려서 고(故) 문성공(文成公) 신 이이(李珥)와 문간공(文簡公) 신 성혼(成渾)을 성묘(聖廟)에 종사(從祀)할 것을 청하였는데, 신들은 삼가 의혹스럽게 생각합니다. 아, 성묘가 어떤 곳이며, 두 신하는 과연 어떤 사람입니까. 대체로 두 신하를 종사의 반열에 청하는 것은 그들의 어짐을 가지고서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그 실상을 논하면 전혀 그렇지 못한 점이 있습니다. 시험삼아 두 신하의 출처(出處)와 도덕(道德)이 어떠한가를 보소서. 과연 하나하나 옛날의 현인에 부끄러움이 없습니까. 두 신하가 살던 시대가 이토록 가까워 보고 듣는 바로 그들의 사람됨을 알 수 있으니, 현부(賢否)와 시비(是非)의 구분은 자연 감출 수가 없습니다.
요컨대 두 신하는 역시 한때의 명인(名人)이니 어찌 한두 가지 일컬을 만한 일이야 없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의 평생을 살펴보면 결점이 매우 많습니다. 사람을 논하는 법은 반드시 대절(大節)이 우선이니, 대절이 손상되었으면 나머지는 족히 볼 것이 없는 것입니다. 이이가 천륜(天倫)을 끊고서 공문(空門)006)                  에 도망하여 숨은 것은 참으로 명교(名敎)에 죄를 얻은 것이니, 그 당시에도 사마시에 뽑혀서 성묘(聖廟)에 배알하는 것을 오히려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성혼은 나라의 후한 은혜를 입고서도 임금이 파천하던 날 달려오지 않은 것은 참으로 왕법에 용서받지 못할 바로서 선묘(宣廟)께서 내린 준엄한 하교가 어제의 일 같습니다.
아, 어질면서 그 어버이를 버리는 자는 없으며, 의로우면서 그 임금을 소홀히 하는 자는 없습니다. 다른 일은 논할 것도 없이 이 한 가지만으로도 족히 두 신하에 대한 단안(斷案)이 됩니다. 그 이외에도 충현(忠賢)을 교묘하게 헐뜯고, 붕당을 그릇되게 비호하였으며, 걸핏하면 나라를 다스리는 실무(實務)라고 하고 언론의 향방을 마음대로 조정하여 족히 위세를 드날렸지만 한 일과 말들은 치우치고 소루함을 면치 못하였으니, 대체로 그의 마음 중에 크게 의심스러운 것이 이와 같습니다. 그렇지만 이는 천근한 것일 뿐이며, 학문의 폐단에 있어서는 이보다 더욱 큰 것이 있습니다. 이이는 일찍이 이교(異敎)를 섬겨서 그 구습을 벗어버리지 못하고 엽등(躐等)하기를 좋아하여 진실한 길을 가지 못한 채 허황한 환상을 하였으니 우리 유가(儒家)의 계책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면목(面目)을 바꾸어 그 설을 스스로 성취시켰습니다만, 선정신(先正臣) 문순공(文純公) 이황(李滉)도 일찍이 깊이 염려하고 엄히 경계하였으니 ‘새로 하려는 것은 달갑지 않고 익숙한 곳은 잊기 어려워서 오곡의 열매가 익기도 전에 돌피의 가을이 갑자기 닥친다.’는 등의 말씀007)                  은 참으로 그 뜻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이의 학(學)은 오로지 기(氣)자만을 주장하여 기를 이(理)로 알았습니다. 이 때문에 이와 기를 같은 것으로 여겨 다시 분별함이 없었으며, 심지어 마음이 바로 기이고 사단(四端)과 칠정(七情)이 모두 기에서 생긴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병통의 근본은 원래 도(道)와 기(器)를 변별하지 않은 육구연(陸九淵)의 견해에서 나온 것으로서 그 폐해는 작용(作用)을 성(性)의 체(體)라고 한 석씨(釋氏)의 주장과 같습니다. 대체로 이와 기의 분별은 바로 학문의 생사(生死)가 걸린 갈림길이며, 천리(天理)와 인욕(人欲)의 정밀한 한계와, 유도(儒道)와 이단(異端)의 다른 점과 옳고 그름이 모두 이에서 판가름 되는 것입니다. 이황은 도(道)의 체(體)를 분명하게 보고, 인성에 대해 힘써 공부하여, 염(濂)·락(洛)008)                  의 서로 전해온 은미한 뜻의 근원을 추급하고, 자양(紫陽)009)                  이 이미 천명해 놓은 요결(要訣)을 밝혀서 천명도(天命圖)와 심통성정도(心統性情圖)를 지어 체(體)와 용(用), 현(顯)과 미(微)를 섬세하고도 극진하게 규명하였고, 사단과 칠정의 구분에 있어서도 더욱 그 묘를 다하여, 천고의 숨겨진 자물쇠를 열어 놓았으니, 백세 이후 성인이 다시 태어난다 해도 의혹됨이 없을 것입니다.
이이는 평소 이러한 점을 털끝만큼도 깨달음이 없이 흐리멍덩하게 묵은 학문에 떨어져 있다가 이황이 죽은 뒤에 이황의 학을 있는 힘을 다해 공격하였습니다. 그의 설이 모두 그의 문집에 있으나 종횡으로 잘못된 것들을 모두 다 기록할 수가 없습니다. 이황의 말을 지적하여 이(理)를 해친 것이라 하는가 하면 이황의 말은 성(性)을 모른 것이라고 하였으며, 심지어는 ‘주자가 참으로 이와 기가 호발(互發)하여 각기 상대해서 나오는 것이라고 하였다면 주자도 잘못한 것이니 어찌 주자라 하겠는가?’ 하였으니, 편견과 착각으로 감히 전현(前賢)을 이토록 헐뜯을 수가 있습니까. 삼가 주자의 설을 살펴보면 이(理)가 있은 연후에 기(氣)가 있다.’고 하였으니, 이와 기는 결단코 둘이며 ‘사단(四端)은 이에서 발하고, 칠정(七情)은 기에서 발한 것이다.’고 하였으니, 이것이 이와 기가 호발한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주자의 정론(定論)이 이토록 명백한데도 오히려 믿지 않았습니다. 이황의 학은 바로 주자의 학이었으니 이이에게서 배척을 당한 것은 당연합니다.
성혼(成渾)의 학은 대체로 이이와 같은 맥락으로, 이른바 ‘이와 기는 같이 발한다.’는 등의 말은 필경 큰 근본에 깨달은 바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학을 논하는 상소에 애초 궁리(窮理)나 격물(格物)에 관한 일을 강구하여 밝힌 것은 없고, 다만 정신을 보존하고 아껴야 한다는 말로 제일의 법문(法門)으로 삼았는데, 이는 바로 도가(道家)의 유파에 해당되는 것으로 자사자리(自私自利)의 설이니, 우리 유가의 학문하는 규모가 아닙니다. 이는 본래 치우친 학술을 수용한 데서 연유한 것인데, 더구나 그의 재기와 역량이 이이의 풍도에 비해 아래인 데이겠습니까. 아, 유자(儒者)가 귀중하고 존상(尊尙)되는 것은 바른 학문이 있기 때문이며, 진실한 덕이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런데 두 신하의 행적을 상고해 보면 천륜을 어겨 풍교(風敎)를 손상시키고, 도(道)를 문란시켜 성인의 법을 배반하였는데, 그들을 성묘(聖廟)에 배향하여 제사를 받드는 것이 옳겠습니까? 이는 사체가 중대한 것으로, 일시적으로만 받드는 것이 아니라 백세토록 우러러 받들게 되는 것이니, 모름지기 천하에 지극히 합당하게 처리해야 합니다. 어찌 그 사람됨을 논하여 실상을 따지지 않고서 당을 비호하고 억지로 끌어대어 합당하지도 않고 공정하지도 못한 일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지난 을해010)                   연간에 송시형(宋時瑩) 등이 처음 이런 요청을 하였는데, 성학(聖學)이 고명하신 인조 대왕께서 의연히 물리쳐 그 일이 마침내 중지되었습니다. 성인(聖人)의 하신 일이 일반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데서 나왔으므로 참으로 영원히 바꿀 수 없는 법이라 할 것입니다. 당시의 비답(批答)이 정녕할 뿐 아니라 통쾌하여 지금까지도 끊임없이 칭송되고 있어 자신도 모르게 감동되고 격앙됩니다. 아, 인심의 향배와 사습(士習)의 사정(邪正)이 모두 그 시초에 달렸습니다. 숭장(崇奬)하는 일이 한번 잘못되어, 추종하여 휩쓸리거나 등을 돌려 방황해서 다시 바루어지지 못하면, 장차 위로는 선성(先聖)을 욕되게 하고 아래로는 후학을 그르쳐 우리 도(道)의 연원이 종식되게 될 것입니다. 위아래로 수백 년 사이에 이에 참여된 선유(先儒)는 겨우 다섯 신하입니다. 이밖에도 공덕이 있고 하자가 없는 굉유(宏儒)와 석사(碩士)가 전후하여 많았으니, 어찌 이 두 신하보다 나은 이가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조종(祖宗)의 훌륭한 시대에 언제 쉽게 논의한 적이 있었습니까.
이제 이 논의를 주장하는 자는 일체 자기가 좋아하는 바에 아부하여 성고(聖考)의 큰 훈시를 무시한 채 백세의 공의(公議)를 두려워할 것이 없다고 하는가 하면 유림의 정론(正論)을 사론(邪論)으로 지적하고 온 나라가 분리된 것을 귀일(歸一)되었다고 지목하면서 중대하기 그지없는 법을 힘으로 도모할 수 있다고 하며 서로 견강부회하여 못하는 짓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두려워서 감히 아무 말도 못하고 위세만 점차로 더해가니, 참으로 한심스럽습니다. 신들의 오늘날 이 일이 시의(時議)에 용납되지 못할 줄을 참으로 알지마는 인심은 속이기 어렵고 천리는 지극히 공정하니, 격발한 중론(衆論)을 전하에게 아뢰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의리의 바름을 깊이 생각하시어 참람하고 망령된 요청을 통렬히 물리치소서."
하였는데, 상소의 내용은 잘 알았다고 답하였다.

 

2월 23일 병오

당초 이시만(李時萬)이 전남 감사로 있을 때, 전주의 유생이 그의 군관과 싸웠다. 그 군관이 돌아가 시만에게 호소하니, 시만이 유생을 잡아다가 매질을 하였는데, 얼마 후 사망하였다. 이때에 와서 그 유생의 아들이 그의 원통함을 송사하였는데, 상이 하교하기를,
"방백(方伯)은 조정이 믿고 맡긴 자인데 조정의 삼가 구휼하는 도를 이해하지 못하고서 한갓 일시적인 분풀이로 형장을 함부로 사용해서 사람의 목숨을 빼앗기에 이르렀으니, 기타 도내의 피해야 이루 말할 수 있겠는가. 도내에 원통함을 호소하는 자가 있어도 또 그런 식으로 들어주지 않는다면 그의 원통함이 어떠하겠는가. 비리를 안 이상 이미 지난일이라고 핑계하고 다스리지 않아서는 안 된다. 전 감사 이시만을 잡아다 국문해서 죄를 정하라."
하였다. 헌부가 잡아다 국문하라는 명을 거둘 것을 청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마침내 하옥시켜 함부로 형을 사용한 죄로 논하였다.

 

부산의 관왜(館倭)가 안동(安東)으로 도망쳐 숨었는데 체포하여 그의 나라로 되돌려 보내는 한편, 그를 숨겨준 우리 나라 사람도 다스렸다.

 

2월 27일 경술

삼성(三省)에 명하여 죄인 구월(九月)을 국문하게 하였다. 구월은 여주(驪州) 사람 김태길(金泰吉)의 여종이다. 그의 어미가 태길의 종에게 시집가자 구월은 그 아비를 따라 태길의 집에 가서 복역(服役)하였다. 그의 남편 역시 태길의 종이었는데, 태길에게 죄를 지어 태길이 살해하자 구월이 그 남편이 피살된 것을 분하게 여겨 내수사에 투속(投屬)하여 내비(內婢)로 자칭하였다. 마침내 인평 대군(麟坪大君) 집으로 분속되었는데, 얼마 후 태길이 시골에서 서울로 오자 구월이 대군 집의 여러 종과 같이 좁은 곳에서 기다리다가 태길을 붙들어 묶어다가 구월이 직접 찔러서 살해하였다. 그 뒤 태길의 아들이 형조에 호소하였는데, 형조에서는 태길의 여종으로 단정하였다. 상은 구월이 내비(內婢)라고 한 이상 태길의 집에서 그 어미의 양적(良籍)을 찾아내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무턱대고 주인을 시해한 율(律)을 적용할 수는 없다고 하였다. 양사가 극력 간쟁하자 상이 노하여 대간의 체직을 명하였다. 송시열과 조석윤(趙錫胤) 등이 역시 극력 말하니, 상이 비로소 삼성에 국문할 것을 명하였다. 구월이 마침내 자신이 찌른 정상을 자복하였으나 태길의 여종이 된 것에 대해서는 불복하였다. 삼성에서 형을 추가하여 끝까지 심문할 것을 청하였는데, 얼마 안 되어 옥에서 죽었다.

 

2월 28일 신해

상이 대신과 비국의 여러 신하를 인견하였다. 상이 하문하기를,
"청인(淸人)이 내관(內官)에게 물은 것은 이해할 수가 없다."
하였는데, 이는 상의 자녀가 몇이냐고 물었기 때문이다. 좌의정 조익이 대답하기를,
"묻지 않아야 할 일을 물으니 참으로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내관이 말하기를 ‘한 통의 칙서는 보지 못하게 했다.’고 하는데, 무슨 내용인지 모르겠다."
하고, 또 정태화(鄭太和)의 기복(起復)에 대해서 삼사(三司)의 장관에게 하문하니, 대사헌 남선(南銑)과 부제학 조석윤(趙錫胤) 등이 모두 아뢰기를,
"상(喪)의 기강은 중한 것이고 지금 긴급한 일도 없으니, 갑자기 이런 행동을 취해서는 안 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우선 하지 말라."
하였다. 영중추부사 이경여가 나아가 아뢰기를,
"저들이 매번 처음의 말을 가지고 주장하니, 이번에 미리 생각해서 서로 어긋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그렇다고 하였다.

 

오준(吳竣)을 별연위사(別延慰使)로 삼아 황주(黃州)로 가서 청사(淸使)에게 문안하도록 하였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