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효종실록3권, 효종 1년 1650년 3월

싸라리리 2025. 12. 20.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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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일 갑인

사은사 인흥군(仁興君) 이영(李瑛)과 부사 이시방(李時昉)이 별폭(別幅)을 역관 이형장(李馨長)에게 주어서 청사와 같이 강을 건너게 하여 밀계(密啓)하기를,
"파흘내(巴訖乃)·보대평고(甫大平古)·정명수(鄭命守) 등이 와서 제명(帝命)으로 이르기를 ‘세폐(歲幣) 등의 물건을 국왕은 필시 정성을 다하려 할텐데, 사신이 감히 목화가 흉작이라고 말하여 기한을 연기하려고 하니 이는 국왕의 뜻인가?’ 하기에, 신 영이 대답하기를 ‘아문(衙門)이 우리에게 하고 싶은 말이 무어냐고 묻기에 세폐를 마련하기가 어려운 정상을 말하였을 뿐, 당초 국왕께 품의하여 정한 것은 아니다.’고 하였습니다. 파흘내 등이 또 ‘주문(奏文) 중에 왜(倭)의 염려스러운 정상을 낱낱이 말하고, 표류해온 한인(漢人)을 대국(大國)으로 잡아 보냈으므로 왜인들이 혼란을 야기할 단서가 되었다고까지 하였다. 그러나 표류한 한인을 왜국에서 잡아온 것이 아닌데 어찌 그것으로 흔단을 야기하겠는가. 그대의 나라에서 왜인들의 정상을 핑계로 탐색하여 시험하려고 한 것이다. 그런 논의를 주장한 자가 누구인가?’ 하기에, 신 시방이 대답하기를 ‘표류한 한인은 본래 왜국에서 행상(行商)하던 자인데 우리 나라에서 잡아 가까운 왜관(倭館)으로 보내지 않고 상국(上國)으로 보냈으니, 저들이 어찌 분한 생각을 품지 않겠는가.’ 하였습니다.
파흘내 등이 ‘이제 왜인들의 정상을 핑계로 성지(城池)를 보수하고 무기를 정비하고자 하는데, 앞으로 무엇을 하려고 하는가. 왜인들의 정상이 예측할 수 없다는 말이 어디서 나왔는가?’ 하기에, 시방이 말하기를 ‘우리 나라의 군정(軍政)은 폐지된 지가 이미 오래이므로 갑작스런 변이 있게 되면 믿는 것은 상국의 구원이다. 그러나 왜인들이 갑자기 쳐들어 올 경우 구원병이 오기 전에 온 나라가 유린을 당할 것이므로 반드시 성지를 수리해서 우선 들어가 보존되어야만 상국의 구원도 기다릴 수가 있기 때문에 선왕(先王) 때부터 이를 걱정했었고, 지난날 정승 정태화가 들어와서도 그런 뜻을 말했던 것인데, 상국에서는 문서로 말할 것을 기대하였다. 그런데 표류한 한인을 잡은 뒤에 전일보다 갑절이나 왜인들의 정상을 예측하기 어렵게 되었기 때문에 이런 주문을 한 것이다. 조정에 별도로 주장한 사람이 어찌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저들이 또 ‘지난번 칙사의 행차에 그대 조정의 거조를 살피도록 했는데, 안으로 삼공과 육경, 밖으로 감사와 병사를 모두 새 사람으로 바꾸고, 선조(先朝)의 구신(舊臣)을 모두 쫓아내어 국왕이 위에서 고립되게 하였다고 하였다. 다른 의논이 있어서인가?’ 하기에, 시방이 ‘국왕이 왕위를 이은 뒤 구신으로서 죄를 받은 이는 별로 없다. 나도 선조 때 형조 판서였는데, 지금 본직으로 왔다. 하였습니다. 저들이 ‘그렇다면 삼공 이하 내외 관원으로서 그대로 전직에 있는 자를 낱낱이 헤아려 대답하라.’고 하기에, 대답하기를 ‘우상 정태화는 모친의 상을 당해서 직을 떠나 있고, 김자점은 내국 도제조(內局都提調)로서 선왕(先王)께서 위독하던 때 시약(侍藥)을 제대로 살피지 않았기 때문에 본직을 파하였고, 좌상 이경석은 영상으로 승진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저들이 ‘자점이 직접 약을 의논하고 직접 약을 조제하였는가?’ 하기에, 시방이 ‘우리 나라의 법은, 시약을 하여 효험이 있으면 상을 내리고 그렇지 못하면 죄를 받는 것이 관례이다.’ 하였습니다. 저들이 ‘자점이 죄를 받은 것이 국왕의 명에 의한 것인가?’ 하기에, 대답하기를 ‘국법이 그러하다. 따라서 대간이 공론과 법에 의거하여 죄를 청하면 주상께서는 따르지 않을 수가 없다.’ 하였습니다. 저들이 ‘주장하여 논의한 대간이 누구인가? 이름을 지적하여 대답하라.’ 하기에, 대답하기를 ‘대간은 논의할 일이 있으면 많은 관원이 같이 모여 외부인은 물리치고 의논한다. 그 일이 매우 은밀한데 주장한 자를 어떻게 알겠는가?’ 하였습니다. 저들이 ‘부사(副使)는 형부(刑部)의 상서(尙書)로서 비국의 유사 당상을 겸하고 있으니, 조정의 일을 모르는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바른대로 대답 하려고 않으니, 이는 황상의 명을 가볍게 여기고 대간의 세력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그 당시 많은 관원을 다 기억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양사의 장관은 누구였는가? 이 논의는 일개 자점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다. 바른대로 고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 하기에, 대답하기를 ‘양사의 장관은 자주 바뀌는데 어떻게 지적해 낼 수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저들이 ‘자점은 큰 공이 있는 사람으로 전왕(前王)이 믿고 중히 여긴 자이다. 그리고 상국에도 정성을 바쳤는데, 이제 갑자기 쫓아냈다. 새로운 사람들과 무슨 일을 하려고 하는가? 사신이 끝내 주장한 자를 바른대로 말하지 않으니, 이는 부사와 서장관도 필시 그 사이에 간여한 것이다. 우리들이 가서 조사해야 하겠다.’ 하고, 또 ‘육경과 감사·병사 이하 그들의 이름을 어찌 분명히 말하지 않는가?’ 하기에, 대답하기를 ‘육경은 누구를 체직하고 누구를 대신하였으며, 감사와 병사는 누가 지금 맡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저들이 신 여재(與載)를 지적하여 말하기를 ‘서장관은 그때 무슨 관직에 있었는가?’ 하기에, 대답하기를 ‘나는 선왕 때 보덕(輔德)이었고, 지금은 사성(司成)이다.’ 하였습니다. 저들이 ‘서장관도 대간을 역임하였다고 들은 듯한데, 어찌 주장한 자를 모르겠는가?’ 하기에 대답하기를 ‘내가 대간에서 체직된 지가 이미 오래인데 대간의 논의를 어떻게 참여해 알겠는가.’ 하였습니다. 저들이 말하기를 ‘황상이 묻는데도 끝내 바른대로 대답하지 않으니, 사신을 구류해 두고 우리가 본국으로 나가서 주장한 자를 조사해 내어 잡아와 처리해야 하겠다.’ 하고, 또 말하기를 ‘세폐에 관한 일을 국왕에게 품의하지 않고 사신이 자기 개인의 뜻으로 말하는 것을 보니, 크고 작은 논의가 국왕을 거치지 않는다는 것을 이를 근거로 알 수 있다. 지난 병자년011)  에 척화(斥和)의 논의로 전쟁의 발단을 야기하여 끝내 남한 산성의 화를 자초하였고, 지난 경진년012)  에 논의를 주장하는 사람과 벼슬을 싫어하는 남쪽의 무리가 함부로 다른 의논을 주장하여 중벌을 받았는데도, 오히려 징치(懲治)되지 않고 또 다시 그 무리가 조정에 포진하고 있으면서 정사를 바꾸어 국사를 그르치려 하고 있으니, 상국에서는 건너다 보고만 있지 않을 것이다. 한 번 진정시키는 것을 그만둘 수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하고, 시방이 또 별폭(別幅)으로 밀계하기를,
"정명수가 신 시방과 여재를 부르고, 이형장까지 불러서 문서를 가져다 보이면서 ‘전일 나갔을 적에 대통관(大通官)의 무리가 불측한 소문을 많이 들어 여러 칙사가 모두 알고 있으니, 앞으로 난처한 일이 있을까 염려된다. 내가 대군(大君)이 오기를 극력 청한 것은 사전에 막아보고자 한 것이었다. 그러나 일이 끝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찌하면 좋은가. 이 글은 바로 상칙사(上勅使)가 관(館)에 있을 적에 청나라 글씨로 김상헌과 조경(趙絅)·김집(金集)의 이름을 써 가지고 온 것이다. 그래서 장차 칙서 내용에 삽입하려고 하는데, 청나라 글자와 조선이 사용하는 글자가 다르기 때문에 황부왕(皇父王)이 나로 하여금 자세히 물어서 알아 오라고 하였다.’ 하기에, 대답하기를 ‘이 세 사람의 이름을 황부왕이 어떻게 알았는가? 그리고 이제 지명해서 묻는 것은 무슨 뜻인가?’ 하였습니다.
명수가 ‘상헌은 상국에 죄를 얻어 선왕조에 정승에 임명하였다가 곧바로 체직한 지 오래인데 이제 어찌하여 다시 기용하는가?’ 하기에, 대답하기를 ‘노병으로 인하여 사직을 즉시 허락하여 향리에 물러가 살고 있으니, 조정에는 참여하지 못한다.’ 하였습니다. 저가 ‘물러갔다고는 하지만 조정의 논의가 모두 그의 문에서 나온다. 조경은 당시 예조 판서로서 조제(吊祭)에 관한 의주(儀注)를 즉시 우리에게 알려주지 않았는데, 도감에 물으니 「예조의 의주가 아직 오지 않았다.」고 하였다. 그에 대한 과실이 예조에 있다. 집(集)은 선왕(先王) 때에 벼슬을 하지 않던 사람인데 이제 대사헌이 되어 시론(時論)을 주장한다고 하는데 그러한가?’ 하기에, 대답하기를 ‘김집이 대사헌이 된 것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그런데 칙사는 어디서 들었는가?’ 하자, 저가 ‘비록 우리를 속이려고 하지만 우리의 이목이 매우 많은데 속일 수 있겠는가. 연전 관(館)에 있을 적에 대사헌의 성명을 알고 싶어서 영접청(迎接廳)에 물으니, 바로 김집이라 하였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어떻게 알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이 세 사람의 성명을 모두 기록해 가지고 왔다. 그리고 칙서에 황부왕(皇父王)이라고 했었는데, 회사(回謝)하는 문서에는 섭정왕(攝政王)이라고 하였다. 황제가 사제(賜祭)하고 아름다운 시호를 주었으니 이는 막대한 은전인데, 사례하는 뜻이 없었고 조제(吊祭)할 때에도 곡을 하지 않았다. 이는 바로 일시의 논의를 주장하는 자들이 상국을 멸시해서 그런 것이다. 그 점에 대해서 앞으로 사문(査問)하는 일이 있을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신들은 황제의 명을 굳게 거부하였다는 것으로 이렇게 구류(拘留)를 당하였고, 원역(員役) 이하는 다른 관에다 분리하여 배치하고서 하루에 썩은 쌀 1되를 지급해 줍니다. 대체로 이곳의 일은 전과는 크게 다른데, 현재 홍승주(洪承疇)가 각로(閣老)로 있으면서 명나라 때의 등록을 가져다가 청나라 글로 번역해서 사용하기 때문에, 일마다 생경한 것이 바로 이에서 연유합니다. 들으니 파흘내와 각로 기청고가 상사와 부사가 되어 보대평고(甫大平古) 등 몇 사람 및 정명수와 같이 나갈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전 좌의정 정태화를 기복(起復)시켜서 판중추부사로 삼았다. 좌의정 조익(趙翼)이 밀계하기를,
"신들이 다시 생각해 보니, 예에 ‘삼년상에 졸곡(卒哭)을 마치면 전쟁을 피하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오늘날의 국사가 전쟁과 무엇이 다릅니까. 저들이 우리에게 놀라 동요하게 한다고 하는 것은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전의 의논을 따라 속히 정태화를 기복시켜 지금의 어려움을 구제하도록 하소서."
하였는데, 정원이 아뢰기를,
"대신을 기복시키는 것은 사체가 중대하니 양사의 성상소(城上所)를 명초(命招)하여 말하소서."
하니 【조종조에 궁성(宮城) 위에다 청(廳)을 설치하고 양사에서 각기 1원(員)씩 일에 따라 들어오도록 하고, 인하여 계사(啓辭)를 전하였기 때문에 성상소라고 하였다.】  상이 따랐다. 이에 양사가 서경(署經)하여 마침내 태화를 기복시켰다.

 

3월 2일 을묘

좌의정 조익이 아뢰기를,
"복상(卜相)은 반드시 상의 하교를 거쳐야 합니다. 청사(淸使)가 오니 삼공(三公)을 갖추어야 하는데, 사세가 급박하니 변통하는 방도가 있어야 합니다. 감히 삼가 품의합니다."
하니, 마침내 복상을 명하여 정태화를 좌의정으로, 조익을 우의정으로 삼았다.

 

3월 3일 병진

예조가 아뢰기를,
"지금 문례관(問禮官) 윤집(尹鏶)의 치계를 보니 ‘전하께서 흑의(黑衣)로 행례(行禮)할 것으로 강정(講定)하였는데, 문양의 유무에 대해서는 분명한 언급이 없었다.’고 하였습니다. 예문을 근거로 말하자면 무양 적색 흑원령포(無揚赤色黑圓領袍)가 소복(素服) 중에 칙서를 맞이하는 예에 꼭 맞는 것입니다. 다만 지난해 칙서를 맞이할 때에 흑원령포를 입었으나 칙사가 쟁변하여 힐책함으로 인하여 황은(皇恩)에 사례할 때는 무늬가 있는 흑색 원령포에 대홍 더그레를 입었습니다. 이번에 만일 문양이 없는 흑원령포로 고쳐 입으면 의아해 할 단서가 없지 않을 것입니다. 전과 같이 익선관(翼善冠), 남색 더그레, 청정소옥대(靑鞓素玉帶)로 행례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묘당에 의논하소서."
하니, 묘당에서 해조의 계사가 합당하다고 하자, 상이 따랐다.

 

상이 대신과 비국의 여러 신하를 인견하였다. 우의정 조익이 아뢰기를,
"신들이 저들과 문답할 말을 의논하여 정해서 계달(啓達)하였습니다. 그런데 또 영상의 별록(別錄)을 보니, 역시 같은 의사였습니다. 또 별폭(別幅)을 신에게 보내어 ‘양사의 전후 많은 관원이 모두 스스로 담당한다면 혹 무사할 수도 있을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참으로 그렇다. 저들이 많은 관원을 모두 일일이 문책하지는 못할 것이다. 전후의 관원이 어찌 몇 사람뿐이겠는가."
하였다. 조익이 아뢰기를,
"신도 일찍이 헌부의 장이었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왜인의 정상에 관한 일은 저들이 반드시 경상 감사에게 힐문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는 이만(李曼)인가?"
하자, 좌우가 모두 아뢰기를,
"이만이 실로 그 당시 감사였는데, 주문에도 이만의 이름을 거론하였습니다."
하였다. 조익이 아뢰기를,
"이만은 이미 조사 중에 있으니 도승지를 체직하여야 합니다."
하니, 따랐다. 상이 이르기를,
"내관 임우문(林友聞)이 말하기를 ‘지난번 등대(登對)했을 때 한 말이 이미 서로(西路)에 퍼졌다.’고 하였다. 어찌 한심하지 않은가."
하니, 영중추부사 이경여(李敬輿)가 아뢰기를,
"근래 들으니, 연신(筵臣)이 집에 돌아가기도 전에 경연에서 한 말들이 이미 외간에 알려진다고 하니, 매우 괴이합니다."
하자, 상이 내관(內官)을 돌아보며 이르기를,
"너희는 모두 밖으로 나가라."
하였다. 사약(司鑰)들도 물러가도록 하였다.

 

3월 4일 정사

햇무리가 졌다. 흰무지개가 햇무리 동쪽에서 나와 북쪽으로 뻗쳐서 햇무리 서쪽에 이어졌다.

 

원두표(元斗杓)를 공조 판서로, 홍수(洪鐩)를 지평으로, 동지(同知) 목서흠(睦敍欽)을 자헌(資憲)의 품계로 초가(超加)하였는데, 그의 나이가 80이어서 노인을 우대한 것이다.

 

좌의정 정태화가 기복하라는 명을 환수하기를 원하였는데, 다섯 번째 상소를 올리자 비로소 허락하였다.

 

상이 하교하였다.
"전옥(典獄)의 중죄수 중에 질병에 전염된 자가 많다고 하니, 너무나 불쌍하다. 성심껏 치료하도록 하라."

 

영의정 이경석(李景奭)이 서로(西路)에서 먼저 돌아왔다. 상이 인하여 대신을 소견(召見)하고, 경석에게 이르기를,
"그들의 기색이 어떠하던가?"
하니, 경석이 대답하기를,
"처음 만났으나 상당히 기뻐하는 기색이었습니다. 그러나 옛사람이 ‘웃는 자는 헤아릴 수가 없다.’고 하였는데, 참으로 알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저들이 10인으로 하여금 칙서를 지키도록 하면서 ‘만일 누설하는 자가 있으면 사죄(死罪)로 논하겠다.’고 하기 때문에, 정명수가 아는 것이 있어도 역시 감히 말하지 못하였습니다. 힐문할 적에 모두 사실대로 대답한다면 저들이 혹 관대히 용서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만, 우물쭈물 사실대로 대답하지 않으면 국가에 일이 생기고 자신에게도 화가 미칠 것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옳다."
하였다. 경석이 아뢰기를,
"저들이 표문(表文)을 지은 사람과 대각에서 의논을 주장한 신하를 물으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것이 바로 실제 문제이다. 표문은 지은 사람이 있지만, 논의를 주장한 사람은 만일 모른다고 대답할 경우 저들이 필시 더욱 화를 낼 것이다. 반드시 헤아려서 말을 잘 하여야 한다."
하였다. 우의정 조익이 아뢰기를,
"양사의 많은 관원의 성명은 모두 말해 줄 수 있지만, 논의를 주장한 사람을 물을 경우 ‘이는 온 나라의 공공(公共)한 논의이므로 본래 주장한 사람이 없다.’는 것으로 대답하는 것이 합당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영중추부사 이경여에게 하문하기를,
"경의 뜻은 어떠한가?"
하자, 경여가 대답하기를,
"신의 생각도 그러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사은표(謝恩表) 내용 중에 ‘절혜(節惠)’ 2자와 ‘귀모(歸賵)’ 2자가 힐책하는 단서가 되었다. ‘절혜’ 2자는 출처가 어느 책인가?"
하니, 경석이 아뢰기를,
"《예기(禮記)》의 말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2본(本)의 칙서 중에 하나는 바로 섭정왕(攝政王)의 글이라 하는데, 만일 과연 구혼(求婚)하는 말이 있다면 어찌해야 하겠는가?"
하니, 경석이 아뢰기를,
"적합한 자가 없다는 것으로 말하는 것이 합당하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저들이 모르고서 묻는다면 의당 그렇게 대답해야 하겠지만 혹 저들에게 몰래 말해 준 간사한 자가 있을 경우 매우 염려스럽다. 그리고 저들이 ‘만일 친 공주가 없으면 그보다 조금 낮은 자도 괜찮다.’고 하면 이도 난처하지 않겠는가?"
하니, 경여가 아뢰기를,
"조금 낮은 자는 더욱 허락할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소현(昭顯)의 딸을 말한 것이다.】  상이 이르기를,
"저들이 5인의 이름을 낱낱이 거론하면서 ‘앞으로 이 5인에게 국사를 위임할 것이다. 그리고 이후로 척화(斥和)의 논의가 있더라도 이 5인이 책임지도록 할 것이다.’고 하였다 한다. 이 말이 파다하던데 경들은 들었는가?"
하니, 경석이 아뢰기를,
"전조(前朝)에는 과연 간인(奸人)이 난을 조작하고 화를 전가한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다시 그런 일이 있을 줄 어찌 알았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른바 5인이란 바로 김자점·원두표·구인후·이시백·구인기라고 한다."
하고, 또 이르기를,
"세 노신(老臣)의 일은 결국 어떻게 되겠는가?"
하니, 경석이 아뢰기를,
"조경(趙絅)은 필시 힐문하는 일이 있을 듯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예조 판서 때의 일 때문에 그러한가?"
하니, 경석이 아뢰기를,
"저들이 사은표와 주문 등의 일을 가지고 항상 그런 말을 한다 합니다."
하였다. 이때에 뜬소문이 파다하였는데, 모두가 김자점 부자가 우리 나라의 일을 청나라에 누설한 것으로 의심하였다. 상도 의심하여 그의 자식 김연(金鍊)과 김식(金鉽) 등을 외직(外職)으로 내보내 그들과 내통하는 길을 단절시키고자 하였다. 경여가 아뢰기를,
"자점이 어찌 죄가 없겠습니까마는 요즘 의심하는 것은 증거가 없으니 처리하기가 어렵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보전시키려고 하는 것이다."
하였다. 대신이 물러가려 하자 상이 만류하면서 귤[黃柑] 한 쟁반을 하사하도록 명하고, 또 한 쟁반은 승지와 사관에게 하사하도록 하였다. 인하여 대신에게 이르기를,
"오늘의 일을 자제들에게도 말하지 말라."
하였다.

 

3월 5일 무오

윤순지(尹順之)를 도승지로, 김련(金鍊)을 한산 군수(韓山郡守)로, 김식(金鉽)을 곡성 현감(谷城縣監)으로 삼았다.

 

당초 중사(中使) 나업(羅嶪)이 다른 일로 사은사와 함께 북경에 갔었는데, 이때에 파흘내 등과 함께 왔으나 그들이 주관하는 일이 누설될까 염려하여 먼저 보내지 않다가 서울에 가까이 온 뒤에야 비로소 나업을 돌아가도록 허락하였다. 나업이 상을 배알한 뒤에, 상이 대신과 이조 판서 이시백을 인견하였다. 상이 나업으로 하여금 그가 들은 바를 말하도록 하니, 나업이 아뢰기를,
"저들이 말하기를 ‘혼인에 관한 일을 그대가 자세히 모르기 때문에 이제야 분명히 말하니, 그대는 돌아가 국왕에게 고하고, 또 국왕의 뜻을 홍제원(弘濟院)으로 와서 알려라. 구왕(九王)이 부지(夫之)를 【부지는 바로 고국씨(古國氏)의 칭호이다.】  갓 잃어 국왕과 혼인을 맺고자 한다. 국왕의 딸이 몇이며 몇 살인지 우리들이 모두 안다. 만일 혼인이 성사되면 여러 신하가 감히 무시하지 못할 것이며, 대국에서도 전적으로 믿게 될 것이다. 다만 국왕이 필시 독단하지 못하고 신하들에게 물을텐데, 신하들은 반드시 「그들과 어떻게 혼인을 맺을 수 있겠습니까.」 할 것이기 때문에, 그들로 하여금 먼저 알지 못하게 하려 한 것이다. 그리고 들으니 그대 나라의 신하들은 각기 당이 갈려서 선왕(先王)이 승하한 지 얼마 안 되어 구신(舊臣)을 내쫓았다 한다. 이는 필시 주장한 자가 있을 것이니 이번에 조사해야겠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영의정 이경석이 삼사의 장관을 부르기를 청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저들이 전 경상 감사가 상국(上國)을 겁주어 동요케 하였다고 한다는데, 그 뜻이 상당히 흉악하다 한다. 국가에서도 의당 주선하겠지만 경들도 말을 잘 하도록 하라."
하니, 모두 아뢰기를,
"성상께서 아랫사람의 심정을 깊이 알아주시는 인덕(仁德)이 지극하십니다."
하였다. 상이 또 이르기를,
"저들이 또 조경이 예조 판서 때 한 일을 가지고 말한다 하니 참으로 염려스럽다."
하니, 나업이 아뢰기를,
"방물(方物)에 관한 일도 예조 판서가 주관하였다고 하였습니다. 혼인에 관해서는 신이 응답하기를 ‘현재 있는 공주는 2살이다.’고 하니, ‘공주의 나이가 어리면 종실(宗室) 가운데 적합한 자로 선택하여도 무방하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인하여 신하들과 그에 대한 가부를 의논하자, 모두 아뢰기를,
"허락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옛날의 제왕들도 행한 경우가 있습니다. 제일 가까운 종실을 불러서 딸이 있는지 물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밖에 여러 일도 잘 강구하여야 한다."
하였다. 경석이 아뢰기를,
"발론(發論)한 대간을 처음에는 많은 관원으로 대답하여 허물을 분산시키려고 하였는데, 지금 의논하는 자는 ‘만일 많은 관원으로 말하면 연루되는 자가 필시 많게 될 것이다.’고 합니다."
하니, 부제학 조석윤(趙錫胤)이 아뢰기를,
"대간이 자점(自點)을 논핵한 것은 바로 온 나라의 공론인데 어떻게 누구누구라고 지적하여 말하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들은 깊이 생각해 보지 못했는가? 나는 잠시도 잊어 본 적이 없다. 일에는 알 수 없는 것이 있다. 만일 부득이한 상황에서 저들이 매번 군상(君上)을 위협하고 대국(大國)을 협박하였다고 하면, 이러한 때에 한두 사람 엄호하려다 결국 어떻게 될지를 모르겠다. 나는 불행하게도 위난한 때에 임금이 되었다. 위로 종사(宗祀)를 받들고 있는데, 이제 이런 변을 만났으니 앞으로 어찌하면 좋겠는가?"
하고, 인하여 오래도록 서글픈 모습을 하였다. 상이 또 이르기를,
"이른바 ‘귀모(歸賵)’에 관한 말은 전에 들은 것과 다르다."
하고, 나업에게 말하도록 하니, 나업이 아뢰기를,
"사신이 북경에 있을 적에 저들이 조제(吊祭)에 대해 각기 사은하지 않은 것을 가지고 힐책하였는데, 서장관이 ‘귀모’의 구절을 가지고 사은하는 뜻이라고 지적하여 말하자, 저들이 서장관에게 ‘모(賵)’자의 뜻을 써서 바치라고 하여 비로소 이 힐문이 있게 되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내일 나업을 시켜 회보(回報)할 적에 혼인에 관하여 뭐라고 답해야 하겠는가?"
하니, 경석 등이 모두 아뢰기를,
"허락한다는 뜻으로 가서 대답하게 하는 것이 합당하겠습니다."
하자, 상이 그렇겠다고 하였다.

 

3월 7일 경신

상이 대신과 비국의 여러 신하를 인견하고 하문하기를,
"어제 나업이 혼인을 허락한다는 뜻을 홍제원에 가서 말하니, 저들이 기뻐하면서 김상헌과 김집 등에 대해서는 앞으로 거론하지 않고 우리 나라에서 처리하도록 하겠다고 스스로 말하고 ‘조경은 비록 힐문하지 않을 수 없지만 어찌 심하게 다스리기까지야 하겠는가. 이만(李曼)과 노협(盧協)은 백마 산성(白馬山城)에 안치하겠다.’고 하였다 한다. 이는 모두 완화한다는 뜻이니, 자점(自點)을 논핵한 대간도 어찌 심하게 따지겠는가. 대간도 우선 거명하지 않겠다고 하였다 한다."
하니, 영의정 이경석이 아뢰기를,
"만일 대간의 거명이 불가피하게 되면 우선 서울에 있는 사람들이 자진하여 ‘공론이 그러하기 때문에 우리들이 모두 공론을 따라 논계하였다.’고 말하도록 하면 좋을 듯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많은 관원이 반드시 모두 가서 응해야 한다."
하니, 경석이 아뢰기를,
"조경은 이미 다른 일로 저들이 트집을 잡고 있는데, 또 대간으로서 힐문을 당하게 되면 더욱 우려스럽습니다. 다시 대간에 끼어 거명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자, 상이 그렇다고 하였다. 경석이 아뢰기를,
"조경·이만·노협 3인에게는 먼저 은화(銀貨)를 주어서 뇌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겠다. 여러 사람의 이름을 이미 저들이 거론한 이상 저들이 이를 빌미로 뇌물을 바라는 마음이 없지 않을 것이다. 각기 그들의 자제에게 지급하여 도모하게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부제학 조석윤이 아뢰기를,
"앞으로 대간을 힐문하는 일이 있을 경우 그때도 개개인에게 지급하기는 곤란합니다."
하고, 인하여 공가(公家)에서 모두 지급하되 오로지 관반(館伴)이나 호조 판서에게 전담시켜 뇌물을 주도록 할 것을 극력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편리한 대로 처리하라."
하였다.

 

상이 서교(西郊)에 나갔다. 승지 오정일(吳挺一)을 불러 마대군(馬隊軍)을 물러가게 하라고 명하였는데, 이는 저들이 볼까 염려해서였다. 환궁한 뒤에 인정전에서 접견하고, 영칙례(迎勅禮)를 행하였다. 청사(淸使)가 또 칙서 1통을 상에게 바쳤는데, 바로 섭정왕(攝政王)의 글이었다. 그 글 중에 혼사에 관한 언급이 있었기 때문에 파흘내와 기청고 등이 매우 비밀스럽게 처리하여 좌우를 물리친 뒤에 상에게 볼 것을 청하였다. 상이 어렵게 여기는 기색이 없자 파흘내 등이 서로 돌아보며 웃었다. 파한 뒤에 상이 도승지 윤강(尹絳)에게 일렀다.
"혼사를 쾌히 허락하자 저들이 매우 기뻐하였다. 사문(査問)도 하지 않았으나 오늘날의 일이 상당히 완화된 것이다. 이런 뜻을 대신에게 전하라."
【칙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황제는 조선 국왕에게 칙유한다. 전에 그대의 선왕(先王)에게 시호를 내렸는데도 그대는 공손하게 상소하여 사은하지 않음은 물론 예물도 바치지 않았으며, 황숙(皇叔) 섭정왕(攝政王)이 부의를 보냈는데도 본장(本章)에 대해서 사은하지도 않았다. 또 비록 예물은 갖추었다 하더라도 단자(單子)에 황숙부 섭정왕이라고 쓰지 않았으니, 이는 모두 실례한 것이다. 그리고 왕의 주문을 보니 ‘왜(倭)의 사정이 참으로 우려스럽다. 혹시 위급한 일이라도 만나게 되면 어찌할 방도가 없으니 성을 수리하고 군사를 훈련시키고자 한다.’ 하였고, 또 ‘의정부가 첩보에 의거하여 말하기를 「만일 왜국의 연해에 표류해온 한인(漢人)의 배를 가까운 왜관(倭館)으로 보내지 않고 곧바로 상국으로 보내게 되면 그들이 전보다 더 심한 악감을 우리에게 갖게 될 것이다.」고 하였다.’는 등의 말이 있었다. 그렇다면 그런 보고를 한 관원은 앞으로 한인을 왜인으로 만들어 왜국으로 보내겠다는 것인가, 아니면 명조(明朝)가 아직도 있다고 여겨서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짐(朕)의 한인을 강제로 왜국으로 보내겠다는 것인가? 그런 관원은 분명히 난(亂)을 만들어 나라를 망칠 사람인 듯한데, 국왕은 그런 관원을 잡아다 중죄로 다스리지는 않고 도리어 그를 인용하여 주문을 하였으니 이는 그대의 과실이다. 즉시 잡아다 국문해서 중죄를 내리라. 또 보내온 배신(陪臣) 이시방은 부신(部臣)에게 ‘금년은 면(綿)을 걷지 못하였으니 한 해의 공포(貢布)를 줄여 달라.’고 하여 부신이 전주(轉奏)하였다. 짐은 조선의 고통을 민망히 여기고 평민들을 불쌍히 여겨 일찍이 세공(歲貢)과 사신(使臣)에게 예로 제공하는 것을 많이 줄여 주었는데, 이것이 어찌 그대가 요구해서 그렇게 한 것이었겠는가. 대체로 실정과 말투를 보건대 주문은 비록 왕의 주본(奏本)이지만 주본의 말은 실로 왕의 마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필시 간신의 뜻에서 나온 것이다. 만일 왜인이 강함을 믿고 그대 나라를 침범한다면 대국의 군사가 구원할 것이며, 결단코 지체하거나 잘못할 리가 없다. 그대 나라의 간신이 천하가 아직 다 평정되지 못하고 도적이 아직 모두 없어지지 않은 것으로 헤아리고 그대 나라의 병마(兵馬)를 조발할까 염려하여 일부러 가상적인 것을 설정하고 거짓으로 왜인의 실정에 핑계를 댄 것이다. 그러나 이제 천하가 이미 하나가 되었고 모든 백성이 우리의 영역으로 귀일되었다. 지난날 표류해온 왜선을 짐이 불쌍히 여겨 차마 구류하지 못하고 그대 나라로 송환하였다. 그런데 그대는 이번에 짐의 백성인 한인의 배를 붙들어서 이곳으로 보내지 않고 왜관으로 보내고자 하였으며, 또 성을 수축하고 병사를 훈련하고자 하였다. 이는 모두 난신(亂臣)에게서 나온 말이다. 생각해 보면 지난날 그대의 선왕(先王)은 우리 조정의 은덕을 잊지 못하여 충성을 다하였다. 그런데 지금의 왕이 어찌 충성을 다하려 하지 않을 리가 있겠는가. 비단 지금만이 아니라 그대 조선의 사왕(嗣王) 대대로 영원히 산하(山河)와 같이 변함이 없을 것이니 어찌 잊을 때가 있겠는가. 이는 모두 아래의 간신이 당을 결성하여 끝없는 난(亂)의 근원을 열어놓는 것이다. 모든 말은 보낸 대신에게 만나서 모두 말하도록 하였다. 특별히 유시한다."】 두 번째 칙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황부(皇父) 섭정왕(攝政王)은 조선 국왕에게 칙유(勅諭)한다. 나의 여러 왕(王) 및 패륵(貝勒)과 여러 대신들이 누차 아뢰어 ‘예로부터 번국(藩國)의 참한 여인을 가려서 비(妃)로 삼은 전례가 있으니, 대신을 조선으로 보내서 숙녀를 가려 비로 삼아 조선과 인친(姻親)을 맺도록 하기를 바란다.’고 하기에, 많은 사람들의 말이 옳다고 생각되어 특별히 대신들을 보내어 인친에 관한 일을 유시하도록 하였다. 그대 조선은 이미 우리와 한 나라가 되었는데, 다시 인친을 맺게 된다면 더욱 오래도록 견고하여 두 나라가 되지 않을 것이다. 왕의 누이나 딸, 혹은 왕의 근족(近族)이나 대신의 딸 중에 참하고 덕행이 있는 자가 있으면, 선택하여서 짐이 보낸 대신들이 보고 와서 회주(回奏)하게 하라. 특별히 유시한다."

【태백산사고본】 3책 3권 17장 A면【국편영인본】 35책 417면
【분류】외교-야(野) / 외교-왜(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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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칙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황부(皇父) 섭정왕(攝政王)은 조선 국왕에게 칙유(勅諭)한다. 나의 여러 왕(王) 및 패륵(貝勒)과 여러 대신들이 누차 아뢰어 ‘예로부터 번국(藩國)의 참한 여인을 가려서 비(妃)로 삼은 전례가 있으니, 대신을 조선으로 보내서 숙녀를 가려 비로 삼아 조선과 인친(姻親)을 맺도록 하기를 바란다.’고 하기에, 많은 사람들의 말이 옳다고 생각되어 특별히 대신들을 보내어 인친에 관한 일을 유시하도록 하였다. 그대 조선은 이미 우리와 한 나라가 되었는데, 다시 인친을 맺게 된다면 더욱 오래도록 견고하여 두 나라가 되지 않을 것이다. 왕의 누이나 딸, 혹은 왕의 근족(近族)이나 대신의 딸 중에 참하고 덕행이 있는 자가 있으면, 선택하여서 짐이 보낸 대신들이 보고 와서 회주(回奏)하게 하라. 특별히 유시한다."

 

3월 8일 신유

청사(淸使)가 대신·육경(六卿)·양사(兩司)·승지(承旨) 등 4인을 불러서 정명수를 시켜 묻기를,
"왜인의 실정에 대한 주문은 누가 주관하였는가? ‘표류해온 한인(漢人)을 왜관으로 보내지 않으면 왜가 필시 화를 낼 것이다.’고 하였는데, 이후로 표류한 한인을 잡더라도 왜관으로 보내야겠다는 것인가? 표류한 한인에 대한 말이 과연 변신(邊臣)의 장계에 있었는가?"
하니, 영의정 이경석이 응답하기를,
"주문 중의 표현을 미처 살피지 못하였는데, 이제 비로소 깨달았다."
하였다. 명수가 말하기를,
"깨달았으면 어찌하여 고치지 않았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처음에 깨달았다면 어찌 감히 고치지 않았겠는가. 이제 엄한 힐책을 받고 다시 그 뜻을 생각해 보니 본 뜻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한 점이 있다. 동래 부사(東萊府使) 노협(盧協)과 경상 감사(慶尙監司) 이만(李曼)의 치보(馳報)에는 왜인의 정상에 대해서만 언급하였고 표류한 한인에 대한 말은 별로 없었다. 대체로 이 일은 함께 의논한 일이지만, 내가 묘당의 수속으로 있었으니 어찌 감히 남에게 책임을 미루겠는가. 주문에 표현을 잘못한 죄를 내가 어찌 피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명수가 이에 이만과 노협을 불러서 먼저 이만에게 묻기를,
"장계에 어떠한 말을 하였는가?"
하니, 이만이 말하기를,
"변방의 일이 긴급한데 감사가 멀리 있기 때문에 모든 왜의 정상을 동래 부사가 반드시 먼저 치계하는 한편 감사에게 보고한다. 긴급한 일인 경우에는 감사도 치계를 하는 것이 지금까지의 관례이다. 첨사(僉使) 조광원(趙光瑗)이 차사원(差使員)을 시켜 말을 달려 왜관으로 들여보내자 왜인들이 끌어내려 구타하였는데, 이는 전에 없던 일이었기 때문에 동래 부사가 한편으로는 조정에 계문(啓聞)하고 한편으로는 감사에게 보고해 와서 감사도 즉시 치계하였다."
하였다. 명수가 말하기를,
"이른바 표류한 한인(漢人)에 관한 말은 무슨 일인가?"
하니, 이만이 말하기를,
"변방의 장수가 순라(巡邏) 도중에 표류해온 한인의 배를 나포하였으므로 통제사(統制使)가 이를 즉시 계문(啓聞)하였고, 감사도 변방 장수의 보고에 따라 뒤미처 치계하였다. 묘당에서는 ‘표류해온 한인을 상국으로 압송하지 않을 수 없다.’ 하고, 의복과 음식을 지급해서 통영(統營)에 대기하도록 하였는데, 전번 칙사의 일행이 돌아갈 때 압송하였다. 이 일을 주문에다 언급한 것은, 왜인이 매번 예수교인들이 한인의 배에 섞여 타고 오는 것을 우려하여 누차 왜관으로 압송해 줄 것을 요청하여 왔었는데, 이번에 만일 표류해온 한인을 상국으로 압송한 것을 알게 된다면 교활한 왜인들이 분노하여 변을 일으킬 근심이 없지 않기 때문에 상국에 갖추어 아뢴 것이다. 이는 바로 뜻밖의 근심을 미리 염려하는 것인 동시에 상국에 숨기지 않으려고 한 뜻이니, 어찌 다른 뜻이 있겠는가."
하였다. 명수가 노협에게 묻기를,
"그대의 장계는 무슨 일이었는가?"
하니, 노협이 말하기를,
"변방 관리의 임무는 사건이 발생하는 대로 즉시 조정에 보고하는 것이다. 변방 관리로 9개월 동안 있으면서 왜선(倭船)의 왕래와 모든 공갈하는 말에 대해 빠짐없이 치계하였는데, 그 이외에 다른 계문(啓聞)은 없었다."
하고, 한참 있다가 조광원의 일을 덧붙여 말하였다. 명수가 말하기를,
"그렇다면 두 사람은 모두 나가라."
하고, 또 경석에게 묻기를,
"그렇다면 표류한 한인 등의 말은 누가 주장해서 하였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노협과 이만 두 사람은 표류한 한인에 대한 보고를 한 것이 별로 없다는 것은 처음에 이미 말하였다."
하였다. 명수가 말하기를,
"그렇다면 누가 주장해서 하였는가? 성지(城池)를 수축해서 앞으로 무엇하려고 하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어찌 주장한 자가 있었겠는가. 그러나 내가 수석의 자리에 있었으니 표현을 잘못한 과실에 대한 책임은 어찌 감히 피하겠는가."
하였다. 명수가 말하기를,
"모든 일을 다 자신이 감당하는데, 주문도 혼자서 주관하였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이는 비록 혼자 주관한 일은 아니지만 수상의 지위에 있었으니 어찌 감히 변방의 신하에게 죄를 돌리겠는가."
하였다. 명수가 좌우에 묻기를,
"영상이 혼자서 주장했는가? 비국의 여러 재상이 함께 참여하였는가?"
하니, 좌우가 말이 없었는데, 호조 판서 이기조(李基祚) 만이 말하기를,
"영상이 혼자서 할 수가 있겠는가. 우리들도 모두 참여했다."
하자, 명수가 말하기를,
"영상이 이미 혼자서 담당하였다 하는데, 무슨 다른 말이 필요하겠는가."
하였다. 명수가 또 이조 판서 이시백에게 묻기를,
"무슨 일로 일찍이 이조 판서에서 체직되었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우리 나라는 전형(銓衡)과 양사의 관원 같은 경우, 오래 있는 이가 드물기 때문에 자주 갈린 것이다."
하였다. 명수가 말하기를,
"우리들이 북경에서 일찍이 듣건대 공이 이조 판서로서 훈국(訓局)을 겸직하고 있으며 매우 총애와 신임을 받고 있다고 하였는데, 어찌해서 이조 판서 직은 체직되고 훈국의 직임은 체직되지 않았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훈국은 겸대(兼帶)하는 직임이기 때문에 10년이 되더라도 가볍게 체직하지 않는 것이다."
하였다. 명수가 말하기를,
"듣기로는 조정에 모두 신인을 등용하였다고 했는데, 이제 와서 보건대 구신(舊臣)들이 상당히 많으니, 대개가 헛소문이었다."
하고, 또 묻기를,
"조제(吊祭)에 대해서 사례하지 않은 것은 무슨 뜻인가?"
하니, 대답하기를,
"애도(哀悼) 중에 경황이 없어 제대로 살피지 못해서 그런 것이다."
하였다. 명수가 말하기를,
"소현(昭顯)의 상에 보낸 조제에 대해서는 사례를 하고, 별도의 예단(禮單)이 있었는데, 어찌하여 이번에는 전번의 규례와 다른가?"
하니, 대답하기를,
"그 당시는 사제(賜祭)와 책봉(冊封)에 각기 사신을 보내 왔었는데, 이번에는 합해서 한 사신이 왔기 때문에 우리 나라에서 살피지 못하고 그런 실수를 한 것이다."
하였다. 또 묻기를,
"표문(表文)은 누가 지었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유계(兪棨)가 지은 것이다."
하였다. 또 묻기를,
"누가 짓도록 시켰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대제학이 이 사람을 시켜 짓게 한 것이다."
하였다. 또 묻기를,
"그 당시 예조 판서는 누구였는가?"
하니, 좌중에서 누군가가 조경(趙絅)이었다고 대답하였다. 마침내 즉시 조경을 불러 묻기를,
"누가 표문을 지었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유계가 지었다."
하였다. 또 묻기를,
"누가 짓도록 시켰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내가 시켰다."
하였다. 묻기를,
"지은 뒤에 누가 먼저 보았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내가 먼저 보았다."
하자, 명수가 말하기를,
"제술하는 법은 오직 명한 뜻이 어디에 있는가만을 보는 것이다."
하였다. 조경이 묻는 대로 즉시 응답하지 못하자, 명수가 말하기를,
"마음이 그 생김새와 같으니 참으로 간인(奸人)이다."
하고, 마침내 조제에 대해 사례하지 않은 것이 모두 예조에서 연유한 것이라 하여 결국 조경에게 죄를 돌렸다.
선왕(先王) 말년 때부터 조정에서 왜의 정상이 우려스럽다 하여 성지(城池)와 병기들을 수선하고자 하였으나, 이는 바로 청인(淸人)과 약조할 때의 금지조항이었다. 그래서 정태화(鄭太和)가 북경에 갈 적에 선왕이 명하여 왜인들의 정상이 예측할 수 없으니 부득이 약간 수선해야겠다는 뜻을 설득해 보도록 하였는데, 명수가 아문의 뜻으로 전하기를 "반드시 문서가 있은 연후에야 허락할 수 있다."고 하였으므로 태화가 이런 뜻을 치계하였다. 이에 비국이 승문원에서 문서를 제술하여 사신 편에 부칠 것을 청하였는데, 태화가 미처 복명하기 전에 선왕이 이미 승하하였다. 금상이 즉위한 초에 사은사 인흥군(仁興君) 이영(李瑛) 등의 편에 주문을 보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삼가 주문을 올립니다. 왜구에 대비할 수 있도록 살펴주시기를 바라는 일로 감히 소방의 형편을 진달합니다.
의정부의 장계에 ‘경상도 관찰사 이만의 치보를 의거하건대 「동래 부사 노협의 첩정에 『근년 이래로 왜인의 동태가 우려할 만한 일이 매우 많다. 지난해 가을에 차왜(差倭)를 접대하는 등의 일로 다대포 첨사(多大浦僉使) 조광원(趙光瑗)이 말을 달려 왜관으로 들어가자 여러 왜인들이 멸시하는 대우를 한다고 하면서 차관(差官)을 채찍으로 때렸으며, 말이 매우 불손하였다. 그리고 대마도주가 관례상 본부(本部)의 관원과 서로 서신을 교환해 왔는데, 이번에 도주가 들어갔다고 하니, 무슨 일인지는 확실하게 알 수는 없으나 형적이 매우 황당하다. 그리고 연이어 나온 왜차(倭差)들의 공갈이 한두 번이 아니니, 앞으로의 일이 우려스러우므로 사유를 갖추어 첩정한다.』고 하였기에 사유를 갖추어 치보한다.」고 하였습니다.
신들이 삼가 살펴 보건대 도왜(島倭)가 정성을 바쳐 통신(通信)해 오면서 지금까지 50여 년간 한결같이 공순하여 어기고 잘못하는 일이 없었는데, 무인년 이후부터 전에 없던 사단을 야기시키는 일이 해마다 늘어 약조한 이외에 요구하는 것이 한둘이 아니었으며, 이를 응해주지 않으면 크게 성을 내고 원한을 품고 있습니다. 모든 왕복하는 문서 중에 본국에서 지급하는 물건과 종전부터 관례대로 사용해 오던 글자도 갑자기 고쳤습니다. 관백(關伯)은 본래 일본 국왕이라고 칭해 왔었는데 이제 대군(大君)이라고 고쳤고, 관왜(館倭)들이 또 역관(譯官)에게 밀서(密書)를 보여주었는데 말이 매우 패역스러웠습니다.
이토록 갈수록 더하여 이미 해괴한 지경에 이르렀는데, 뜻밖에 근래에 변장(邊將)이 말을 달려 들어간 한 가지를 가지고 무시한다고 하면서 매우 흉포한 말을 하였습니다. 접대차관(接待差官)을 잡아다 엄히 조사하기는 하였지만 관왜가 공차(公差)를 구타하고 욕을 보인 것은 역시 전에 없었던 일입니다. 게다가 대마도의 명을 받든 왜인들이 감히 거만하게 변신(邊臣)에게 서신을 보내 도주(島主)가 강호(江戶)에 들어갔다고 하는가 하면, 본국에서 관례에 따라 지급하는 쌀도, 전에는 관왜가 대마도로 보내어 식량으로 사용해 왔는데, 이제는 모두 왜관에다 저장해 놓고 있으니, 마치 시기를 기다리는 듯합니다. 그동안의 정상이 전과는 다르니, 의심스런 단서를 다 열거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말하는 예수교인들은 바로 왜국의 반적(叛賊)인데, 그 무리가 한인의 상선에 섞여서 왜국의 연해 지방에 출몰하므로 왜국이 매우 근심하고 있습니다. 일찍이 본국에 요청하기를 「만일 표류해오는 상선이 있으면 즉시 체포해서 보내달라.」고 하였는데, 이번에 표류해온 한인을 가까운 왜관으로 보내지 않고 곧바로 석방하여 상국으로 보냈기 때문에 그들이 우리에게 감정을 품은 것이 필시 전보다 더할 것입니다. 전후의 사정으로 보아 이미 틈이 생겼기 때문에 만일 미리 대처하지 않으면 앞으로 갑작스런 변에 대응하기가 어려울 듯합니다. 그러나 지금의 각처 성지(城池)와 군병(軍兵)과 기계가 하나도 믿을 만한 것이 없으니 만일 변방에 변이라도 있게 되면 와해될 형세이니, 미리 대비하는 계책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내용을 중국에 주문해서 분명한 성지를 받아야 하겠기에 상응하는 내용을 갖추어 아룁니다.’ 하였습니다.
신이 삼가 살펴 보건대 소방은 임진·정유의 왜변을 겪은 뒤로 각처의 성지가 모두 망가졌고, 군병(軍兵)도 훈련하지 않은 지가 이제 10여 년입니다. 이제 준동하는 왜인의 동태가 정말 우려스러운데, 혹시 위급한 일을 당하면 어찌할 계책이 없으니 오직 대국에 호소하여 구원해 주기를 바라는 길뿐입니다. 다만 생각건대 동래와 서울과의 거리는 10일도 채 안 걸리는 길이고, 서울에서 황경(皇京)과의 거리는 까마득히 머니, 소방에서 사신을 선발하여 보내 호소하고 대국에서 군대를 조발하는 동안에, 어떤 성지와 어떤 군대로 구원병이 올 때까지 기다리겠습니까.
이제 성지를 수리하고 군병을 훈련하여 스스로 수비하는 계책으로 삼고자 하나, 일찍이 금하는 명을 받았으므로 역시 경솔히 거행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점이 신이 조정의 신하들과 밤낮으로 근심하면서도 좋은 계책을 찾지 못하는 이유인데, 소방이 일단 병화를 당하면 의지할 곳이 없어 온 나라가 분탕되어서 황상이 거듭 동쪽을 돌봐야 하는 근심을 끼칠까 또한 두렵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황상께서는 국가를 잇게 해준 선황(先皇)의 인덕을 따르시고 옛성인의 미리 대비하라는 경계를 생각하시어, 특별히 주문 내용 중의 정상을 살펴 자강(自强)하는 방도를 지시하심으로써 소방으로 하여금 위급한 일을 당하여 와해되는 근심을 면하게 하여 주시면 다행스럽기 그지없겠습니다. 삼가 갖추어 주문하며 성지를 기다립니다."

 

우의정 조익(趙翼)과 비국의 여러 신하들이 면대를 청하니, 상이 소견(召見)하였다. 조익이 아뢰기를,
"조제(吊祭)에 대하여 사례하지 않은 일은 조경의 말이 앞뒤가 맞지 않는 바람에 저들이 책임을 조경에게 돌렸지만, 주문(奏文)에 관한 일은 이경석 자신이 전적으로 담당하였기 때문에 결국 경석에게 책임이 돌아갔습니다. 신은 비록 처음부터 의논에 참여하지는 못했으나 해명하여 말하려 하니, 명수(命守)가 사나운 소리로 질책하면서 말을 못하게 하였습니다. 분하고 답답한 생각이 더욱 어떻겠습니까."
하고, 공조 판서 원두표가 아뢰기를,
"이경석과 조경이 지금은 죄를 면하기가 어려운 형세입니다. 신들이 본국에서 논죄하게 해 줄 것을 저들에게 청하니, 저들이 ‘대신·육경·양사가 속히 죄를 의논해 가지고 와서 말하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인하여 관소(館所)로 나업을 보내서 저들에게 사과하면서 말하게 하기를,
"이제 죄책이 본국의 수상에게로 돌아갔고 보면 임금된 자로서 어찌 감히 나는 모르는 바라고 하겠는가."
하였다.

 

3월 9일 임술

상이 대신과 비국의 여러 신하를 인견하고 하문하기를,
"어제 나업의 말을 들으니, 저들은 과연 두 신하에게 죄를 돌렸다. 그런데 명수가 말하기를 ‘예조 판서는 실제 과실이 있지만 영상의 일은 마침내 이런 지경까지 될 줄은 생각하지 못하였다. 여러 칙사도 처음에는 영상 자신이 수석의 지위에 있는 이상 부득이 스스로 담당한 것이라고 여겼으나, 노협과 이만 두 사람의 말을 듣고 보니, 표류한 한인에 대한 일은 실제로 영상이 직접 한 것이었다.’고 명수가 나업에게 말하였다 한다. 국사를 말한 것이었는데 영상 혼자서 죄책을 담당하게 하였으니 참으로 한심스럽다."
하니, 영중추부사 이경여(李敬輿)가 아뢰기를,
"이경석 혼자서 담당한 것은 잘한 것입니다. 그러나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너무나 분통스럽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명수가 말하기를 ‘조사한 곡절을 돌아가 황제에게 아뢸 것이다. 그러나 혼사가 이루어지게 되면, 조사한 일 역시 조금 관대해질 것이다. 그런데 처녀 선택에 대해서 지금까지 회답이 없으니 어쩐 일인가?’ 하였다 하니, 그의 뜻을 알 만하다. 그러나 선택에 적절한 처녀를 아직껏 얻지 못하였으니, 어쩌면 좋겠는가?"
하니, 종부시 제조 오준(吳竣)이 아뢰기를,
"일찍이 성상의 하교를 듣고 금림군(錦林君)이 스스로 말하기를 ‘딸이 있는데 자색(姿色)이 있다.’고 하였으니, 선택에 적절할 듯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어제 이미 선택하여 들어오게 하였다."
하였다. 대사헌 남선(南銑)과 대사간 정유성(鄭維城)이 아뢰기를,
"이만과 노협은 조사를 받을 때에 조금도 스스로 담당할 기색이 없이 자못 묘당에다 떠밀려는 뜻이 있었습니다. 더구나 왜차(倭差)가 예수교 잔당을 찾으려고 일찍이 나왔을 적에 노협은 즉시 치계를 했었는데도 지금까지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전연 모른 것처럼 하고 있습니다. 모두 잡아다가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감사는 혹 모를 수도 있겠지만, 노협은 어찌 감히 전연 모른다고 대답할 수 있겠는가. 매우 해괴하다. 모두 잡아다가 추고하라."
하고, 호조 판서 이기조(李基祚)에게 이르기를,
"조사를 하던 날 모두가 묵묵히 있었는데, 경의 한 마디 말이 매우 듣기 좋았다. 내가 매우 가상히 여긴다."
하였다.

 

상이 남별궁(南別宮)에 행행하여 청사(淸使)를 만났다. 정명수가 파흘내의 말을 전하기를,
"사례하는 표문은 모두가 조경이 지은 것인데도, 처음에는 다른 사람에게 떠밀려고 하다가 뒤에 가서야 자신이 담당하였으니, 이는 실로 국왕을 모함하려고 한 것입니다. 왜인의 정상에 대한 것은 영의정 이경석이 ‘내가 수상이니 의당 스스로 담당하겠다.’고 말하였고, 또 변신(邊臣)을 불러서 물어보니 모두 범한 바가 없었으며, 경석이 모두 자신이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성을 수리하고 병사를 훈련시켜서 누구와 전쟁을 하려고 하는 것이겠습니까. 이 역시 나라를 그르치는 사람입니다. 모두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하니, 상이 말하기를,
"나는 한 나라의 군주로서 참으로 일을 잘 처리하지 못하였지만, 두 신하의 마음은 본래 다른 뜻이 없었소. 다시 생각해 주기를 청하오."
하자, 청사(淸使)가 말하기를,
"국왕은 즉위한 초기이니 어떻게 알겠습니까. 이는 실로 여러 신하가 속인 죄입니다."
하였다. 상이 말하기를,
"내 감히 몰랐다고 하겠소?"
하니, 청사가 말하기를,
"그렇다면 국왕의 뜻은 어떻게 처리하고자 합니까?"
하였다. 상이 말하기를,
"나는 현재 황송하기에 겨를이 없는데, 어찌 감히 이래라저래라 하겠소."
하니, 청사가 말하기를,
"진실로 듣고 싶습니다."
하였으나, 상이 고사하였다. 청사가 말하기를,
"우리들이 명을 받들고 나와서 죄를 조사하였으니, 의당 사죄(死罪)로 결단하여야 하는데, 왕의 말씀을 듣고 왕의 뜻을 알고자 합니다. 그런데 이제 곧바로 우리에게 떠맡기렵니까."
하니, 상이 말하기를,
"죄는 그렇다 하더라도 실정이 아니요. 만일 사죄를 감하여 먼 변방에 안치한다면 그것도 고통을 주는 일일 것이요."
하였다. 청사 두 사람이 한참 동안 말을 하더니, 비로소 대답하기를,
"국왕의 말씀을 듣고자 한 것은 바로 이를 위해서였습니다. 2인의 죄는 비록 사죄에 해당되지만, 인명은 역시 소중한 것입니다. 국왕이 안치하고자 하시는데, 안치할 경우에도 여러 해 얼고 굶주리면 역시 죽게 될 것이니, 국왕의 말씀을 따르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사례하자, 청사가 말하기를,
"우리들은 이미 국왕의 하고자 하는 대로 따랐는데, 우리들의 하고자 하는 것을 왕은 어찌 염두에 두지 않습니까?"
하니, 상이 말하기를,
"선택된 자가 아직 어려서 더욱 좋은 자를 선택하고자 한 까닭에 아직 보기를 청하지 않았소이다."
하였다.

 

김육(金堉)을 진위 진향 정사(進慰進香正使)로, 밀산군(密山君) 이찬(李澯)을 부사로, 이상일(李尙逸)을 서장관으로 삼았다.

 

3월 10일 계해

상이 청사를 선정전(宣政殿)에서 접견하였다.

 

3월 11일 갑자

홍청도(洪淸道) 공산현(公山縣)에 물오리[野鴨]가 세 무리로 나뉘어서 각기 좌우 진(陣)을 만들고 진퇴하며 싸움을 하였는데, 모였다가는 흩어지고 한 것이 1개월이 넘었다.

 

이경여(李敬輿)를 영의정으로 삼았다.

 

간원이 아뢰기를,
"지난해 보낸 주문의 내용에 대해 비국의 여러 신하는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칙사가 조사하던 날 영상이 혼자서 담당하여 누누이 대답하는 말이 모두 자기에게 죄를 돌리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을 돌보지 않고 나라만을 생각한 그의 의리에 사람들은 존경하고 있습니다. 칙사가 육경(六卿)과 여러 재신들에게 두루 고하며 황제를 속인 죄를 모두 영상에게 돌렸는데도, 동석한 여러 재상은 그토록 할 말이 없었단 말입니까. 이기조(李基祚) 한 사람만이 같이 죄를 받겠다고 하였고, 나머지는 모두 쳐다보기만 한 채 묵묵히 한 마디도 없었습니다. 의리로 따져 보건대 어찌 그럴 수가 있겠습니까. 그 당시 동석했던 육경의 재상들 중에 당초 같이 일을 하고서도 끝내 죄를 같이 받겠다고 해명하지 않은 자는 모두 중한 율에 따라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3월 12일 을축

상이 선정전에서 청사를 접견하였다.

 

3월 13일 병인

이경석과 조경을 의주(義州)의 백마성(白馬城)에 유배하였다. 경석이 떠나려 하면서 조정을 떠나는 회포를 진달하고 인하여 경계하는 뜻을 언급하였다. 상이 수찰(手札)로 답하기를,
"덕이 부족하고 사리에 어두운 내가 나라를 잘 다스리지 못하여 오늘과 같은 일이 있게 되었으니, 너무나 통탄스럽다. 관하(關河)가 아득히 멀어 그리움이 간절하겠지만, 천도가 밝으니 서로 만날 날이 있을 것이다. 경은 모름지기 자중자애하라. 차자의 내용은 내가 가슴에 새기겠다."
하고, 이어 표피(豹皮)와 납약(臘藥)을 내렸다. 【당시 청사가 관(館)에 있었기 때문에 대전 별감을 시켜서 전하게 하였다.】  상이 연경에 가는 인평 대군(麟坪大君)에게 청국에 가서 말하도록 하였는데, 청국이 석방을 허락해서 돌아왔다. 상이 소견(召見)하여 간곡히 위로하고 이어 귤[柑]을 내렸다. 얼마 뒤에 청사(淸使)가 또 온다는 말을 듣고 상이 지방으로 나가 피해 있게 하였다. 경석이 춘천(春川)으로 떠나려 하자, 상이 사관을 보내어 유시하기를,
"듣건대, 경의 아들이 현재 안협(安峽)의 수령으로 있다 하니, 경은 우선 그곳으로 가서 편히 조리하라."
하니, 경석이 고사하였으나 허락하지 않고, 본도로 하여금 음식물을 계속 지급하게 하였다.

 

3월 14일 정묘

우의정        조익이 간원의 계사(啓辭)를 이유로 차자를 올려 스스로를 인책하였다. 대사간        정유성(鄭維城) 등이 인피하기를,
"신들의 논계는 함께 일을 의논했던 신하만을 지적한 것이었습니다. 우상은 당초 같이 의논하지 않았고, 본원의 논계에 원래 싸잡아서 언급한 뜻이 없는데, 차자를 올려 사직까지 할 줄은 미처 생각지 못하였습니다. 이제 신들의 망언으로 인하여 상신이 직위에 있음을 불안하게 하였으니 신들의 직을 체차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모두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헌부가 처치하여 모두 출사시킬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3월 15일 무진

상이 영사전(永思殿)에서 망제(望祭)를 거행하였다.

 

상이 하교하기를,
"도성에 전염병이 크게 번져 사망자가 많은데, 동서(東西)의 활인서(活人署)에 안치한 자가 몇이나 되는가?"
하였다. 정원이 두 관서의 관원을 불러다 물으니, 각기 1백 수십 인이라고 하였는데, 약물을 내려주도록 명하였다.

 

3월 16일 기사

상이 선정전에서 청사를 접견하였는데 정명수가 청사의 말을 전하였다.
"우리들은 상에게 불충스런 조신(朝臣)이 많다는 말을 익히 들었기 때문에 조사하기 위하여 왔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보니, 모두 스스로 두려움을 알고서 전야(田野)로 물러갔으나 이경석과 조경만은 남아 있기 때문에 중한 법으로 다스리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국왕께서 차마 바로 사형을 시행하지 못하고 굳이 안치할 것을 청하기에 우리들이 허락하였으니, 이는 실로 우리의 본래 뜻이 아니었습니다.
김자점은 우리가 듣기로는 선왕 때부터 공이 많아 중임을 맡았다고 하였는데, 이제 내쫓겼다 하므로 그 이유를 묻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와서 보니 불의한 일을 많이 하여 죄를 얻었다고 하기 때문에 묻지 않았습니다. 김상헌은 상국에 죄를 지었고 김집은 죄는 짓지 않았지만, 이들이 그른 의논을 오로지 주장한다 하기에 조사하려 하였으나 지금은 물러가고 없으므로 역시 묻지 않았습니다. 양사의 장관들이 다른 의논을 내기 좋아하고, 다른 사람을 공격하여 자기의 능력을 과시하며, 또 상소하여 악언(惡言)을 하는 자가 있다고 하는데, 모두 우선 보류하였습니다. 이후로 다시 이런 사람이 등용되거나, 다시 이런 일이 있게 되면 그들은 반드시 죄를 받게 될 것입니다. 조신들이 모두 여기 있으니 모두 잘 알아두기 바랍니다."

 

3월 17일 경오

상이 남별궁에 행행하여 청사를 만났다. 비국이 정문(呈文)하여 이경석과 조경의 무죄를 해명하고자 하였으나, 그들의 진노를 염려하여 마침내 그만두었다.

 

3월 18일 신미

청사가 돌아갔다. 상이 서교(西郊)에 행행하여 전송하였다.

 

의주 부윤 심택(沈澤)이 치계하였다.
"좌부승지(左副承旨)라고 하는 청사 1인과 대통관(大通官) 이잉질석(李芿叱石)이 나와, 19 일 서울에 도착할 예정이라고 하면서 먼저 말하기를 ‘여러 칙사가 서울을 떠나지 않았으면 그대로 머물면서 기다리고, 만일 출발하였으면 현재 있는 곳에서 기다리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헌부가 아뢰기를,
"왕명을 받들고 사신으로 간 신하는 문답하는 때에 일에 따라 명백하게 말을 해야 하는데, 사은 부사 이시방(李時昉)은 저들이 김자점에 대하여 물을 적에 시약(侍藥)을 삼가지 못한 것만을 말하고, 현저한 죄목을 빠뜨렸습니다. 파직하고 서용하지 마소서."
하니, 답하기를,
"형세상 창졸간에 잘못 대답할 수도 있는 것이니, 굳이 깊이 논할 것 없다."
하였다. 수일간 논계하니 그대로 따랐다.

 

3월 19일 임신

상이 대신과 비국의 여러 신하를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저들이 뒤미처 오는 자가 있다는데, 무슨 까닭에서이겠는가?"
하니, 영의정 이경여가 아뢰기를,
"그 까닭을 헤아릴 수는 없습니다만, 우리의 형편으로 말하자면, 접대하는 폐단을 지탱하기가 역시 어렵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민생이 앞으로 어떻게 견디겠는가."
하였다. 영중추부사 김육이 아뢰기를,
"다른 칙서가 없다고 하니, 필시 앞서 나온 자들의 일일 것입니다."
하고, 형조 판서 윤이지(尹履之)가 아뢰기를,
"우선 서둘러서 여러 참(站)에 쌀을 나누어 지급한 연후에야 뿔뿔이 흩어지는 근심이 없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그렇다고 하였다. 우의정 조익이 아뢰기를,
"평안도는 육두미(六斗米)를 견감하였으니, 백성들이 받은 혜택이 큽니다. 황해와 경기의 백성도 같이 보살펴주어야 합니다. 경기 백성의 곤궁함이 다른 도에 비해 더욱 심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기는 자세히 보고 듣기 때문이다. 어느 곳인들 그렇지 않겠는가."
하였다. 이경여가 아뢰기를,
"임금으로서 위태롭고 어려운 때를 당해서 근본을 생각지 않고 매양 경비를 중하게 여기시는데, 국가에 있어서 경비가 어찌 중요하지 않겠습니까마는 근본에 비교한다면 선후의 구별이 있기 마련입니다. 성상께서 백성들의 고통을 특별히 염려하시어 평안도에 육두미를 견감하여 주었으니 부모의 인애하는 마음이라 할 것입니다. 신은 항상 그 마음을 보존하여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강도(江都)는 비록 다른 곳과는 다르지마는 그곳의 조적(糶糴)의 수를 알아서 적절하게 나누어 지급하여 민생을 구원하라."
하고, 또 이르기를,
"외간의 소란이 지금은 어떠한가? 지난번 천변(天變)이 괜히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비록 구차히 목숨을 부지하였으나, 살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3월 20일 계유

상이 인정전에서 청사를 접견하였다. 파흘내 등이 귀로에 파주(坡州)에 이르렀는데, 또 청사가 서로(西路)로 먼저 도착해서 마침내 파흘내 등과 다시 서울로 들어와 곧바로 궐 아래로 나아가니, 상이 즉시 나가 만났다. 청사가 말하기를,
"동·서부사(東西副使) 2인은 먼저 돌아가고 그 나머지 사신들은 그대로 머물렀다가 여자(女子)와 함께 돌아가도록 하여 왕래하는 폐해를 줄이겠습니다."
하니, 상이 명대로 하겠다고 하였다.
이때에 파흘내를 동정사(東正使), 기청고를 서정사(西正使), 그 아래 2인은 각각 동·서부사라 하였고, 정명수는 제 5사(第五使)라고 하였다. 청사가 또 내전으로 들어가 종실의 딸들을 보았는데, 한참 후에 나와 말하기를,
"16세 여자는 행장을 꾸리고, 13세 여자는 궁중에 그대로 있게 하여 기르면서 대기하게 하고, 그 나머지는 모두 내보내십시요. 그리고 여자를 데리고 갈 때에는 대군(大君)도 같이 가야 합니다."
하니, 상이 말하기를,
"소상(小祥)이 얼마 안 남았는데, 이제 갑자기 이런 행차를 하게 되면 정리(情理)상 망극하오. 내가 바로 대군이고 대군이 바로 나인데 정이 어찌 다르겠소이까."
하며, 몇 차례 말을 주고받았는데, 청사가 말하기를,
"대군과 대신이 모두 행장을 꾸리게 하십시요. 상제(祥祭)가 지난 뒤엔 대군이 가고, 지나기 전에는 대신이 가면 됩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조신(朝臣)의 딸을 시녀(侍女)로 충당해야 하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말하기를,
"내가 종실의 딸을 양녀로 삼아서 들여보내는데, 어떻게 용잡한 여자들을 같이 가게 하겠소이까?"
하니, 청사가 말하기를,
"조용히 헤아려서 처리하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말하기를,
"두 대인은 내일 몇 시에 출발할 예정이요? 오늘 저녁에 관(館)으로 가서 만나보고, 내일도 교외에 나가 전송하겠소이다."
하니, 저가 말하기를,
"닭이 울 때에 떠날 것이니, 나오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행장을 꾸리게 된 여자는 금림군(錦林君) 이개윤(李愷胤)의 딸이다.】

【태백산사고본】 3책 3권 22장 B면【국편영인본】 35책 419면
【분류】외교-야(野) / 왕실-종친(宗親)

ⓒ 한국고전번역원

 

3월 21일 갑술

청사 2인이 먼저 돌아갔다.

 

3월 22일 을해

공조 판서 원두표 등 4인을 혼례 도감(婚禮都監) 당상으로 삼아 종실의 여자 행장 꾸리는 것을 주관하게 하였다.

 

3월 23일 병자

상이 대신과 비국의 여러 신하를 인견하였다. 상이 하문하기를,
"저들이 이곳에 오래 머물고 있으니 민력이 지탱해내지 못할까 참으로 염려된다."
하니, 영의정 이경여가 아뢰기를,
"신이 들으니, 사복시에 은(銀)이 1만 냥이 있다고 하던데, 그 중에서 6백 냥을 떼어 해서(海西)의 여러 참(站)에다 지급하고, 또 4백 냥은 경기의 여러 참에다 지급하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어찌 6백 냥만 주겠는가. 더 주도록 하라."
하고, 또 이르기를,
"선혜청의 쌀은 1년을 쓰고 남은 것이 있는가?"
하니, 호조 판서 이기조(李基祚)가 아뢰기를,
"과연 남은 저축이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기의 백성에게는 선혜청에 저축된 것을 주는 것이 좋겠다."
하니, 경여가 아뢰기를,
"성상께서 백성의 고통을 이토록 깊이 염려하시니 누군들 감격하지 않겠습니까. 신은 이를 인하여 아뢰고자 합니다. 옛말에 ‘절약하여 백성을 사랑한다.’고 하였는데, 신이 남쪽 지방에 갔을 적에 들으니, 어공(御供)하는 해의(海衣) 1첩 값이 목면 20필까지 간다고 하였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나도 들었다. 이후로는 다시 봉진(封進)하지 말라."
하였다. 경여가 아뢰기를,
"마른 붕어는 맛도 좋지 않은데 민폐가 역시 많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떻게 먹는 것 때문에 백성에게 폐를 끼치겠는가. 앞으로 없애라."
하였다. 신하들이 물러가려 하는데, 상이 이경여·조익 및 원두표·이기조·임담(林墰)·이후원(李厚源) 등을 남도록 명하고 이르기를,
"근래에 사대부 집에서 서로 다투어 혼사를 치른다고 하던데, 사실인가? 국혼(國婚)을 앞두고 있으니, 미리 어느 집에 아들과 딸이 있는지 알아야 대처할 수가 있는데, 사대부가 모두 서로 혼사를 하고 나면 어떻게 하겠는가. 경들은 나의 이런 뜻을 알고, 각기 친구에게 구혼하는 자가 있거든 은밀히 알아내어 봉서(封書)하여 들이도록 하라. 나의 말도 사사로움에 관계되는 것이어서 대신에게 말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일은 내외의 구분이 없기 때문에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세자의 혼사는 중대한 혼사인데, 세자의 나이는 10세이다. 또 공주 두 명 중에 하나는 11세이고, 하나는 9세이다. 사대부의 자녀 중에 8세부터 12세까지는 모두 혼인을 금하도록 하라."
하였다.

 

3월 24일 정축

이경여를 사은 정사(謝恩正使)로, 여이징(呂爾徵)을 부사로, 이홍연(李弘淵)을 서장관으로 삼았는데, 청사가 건장한 사람을 부사로 삼도록 했기 때문에 임담으로 대신하였다.

 

3월 25일 무인

상이 남별궁에 행행하여 청사를 만났다.

 

금림군 이개윤의 딸을 의순 공주(義順公主)로 삼았다. 개윤에게 가덕(嘉德)의 품계를 더하고, 비단과 미두(米豆)를 후하게 내렸다.

 

이만(李曼)과 노협(盧協) 등을 하옥시켰는데, 이만이 공초하기를,
"신은 억울하게 사문(査問)을 받았으나, 삼가 인자하신 성상께서 불쌍히 여기시고 비호해 주심으로 인하여 하찮은 목숨을 보전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이렇게 나추(拿推)하시나 이는 부모의 견책과 같으니 황공하고 감읍스러워 감히 털끝만큼도 원망할 것이 없습니다만, 신의 억울한 사정은 당초의 주문과 이번 칙사의 말 뜻을 근거해 보면 자세히 알 수가 있습니다.
주문 내용에 ‘이러한 내용을 갖추어 첩정한다.[等因具呈]’는 구절 이상은 동래 부사가 첩정한 내용이고, ‘이러한 실정을 갖추어 치보한다.[等情具報]’는 구절 이상은 신이 치보한 말이며, ‘신들이 삼가 살펴 보건대[臣等竊照]’ 이하는 의정부에서 장계한 말입니다. 만일 질문에 대한 답변에서 조금이라도 어긋남이 있게 되면, 일신의 화는 말할 것도 없고 주문(奏文) 전편의 내용이 거짓이라는 의심을 받게 될 것이므로, 잘못 대답한 데서 오는 환란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신이 답변한 말은 성상께서 이미 통촉하셨을 줄 압니다. 대체로 왜인들의 정상에 대해서는 전부터 동래 부사가 곧바로 장계했기 때문에 신은 일찍이 치보한 일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만일 따져 물을 때에 사실대로 대답하면 주본의 내용과 서로 다르게 되기 때문에 신이 마침내 담당하였습니다. 그리고 표류해온 한인(漢人)에 대한 것은, 원본에 의정부에서 장계한 것으로 표현하였기 때문에 신이 비록 스스로 담당하고자 하더라도 문서가 명백하니 어긋나는 단서가 될까 염려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대로 대답하지 않을 수 없었고, 기타 대답할 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대신 및 비국의 당상과 미리 의견을 맞추었었습니다.
그러나 칙사를 만나서는, 신이 치보한 조광원(趙光瑗)의 사건과, 왜의 봉행(奉行)과 서신을 교환한 등의 일은 힐책의 대상이 되지 않고, 다만 표류해온 한인에 대한 것만을 따져 물었습니다. 그런데 이는 의정부의 장계 내용인 ‘삼가 살펴 보건대[竊照]’ 이하의 내용으로서 칙사가 처음 물을 적에 표류해온 한인에 대한 건은 대신이 이미 담당하여 칙사가 재삼 힐문해서 실상을 자세히 알고 난 뒤에 비로소 신에게 물었기 때문에, 신이 만일 직접 담당하게 되면 말이 서로 어긋나 도움보다는 해가 될 것이라고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전일 의견을 맞춘 대로 조목조목 대답하여, 대신이 대답한 것과 조금도 어긋남이 없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끝에 또 ‘표류해온 한인을 압송한 것은 본래 상국을 위해서였고, 사유를 갖추어 아뢴 것은 후환을 염려해서 한 것이다.’고 별도로 말한 것은 묘당에 조금도 전가시키는 말이 아니었을 뿐 아니라, 묘당을 위해서 분명하게 해명한 것임이 역시 명백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세와 말을 살펴 이해하지 못하고서, 신에게 ‘분명히 책임을 전가시켜 자신이 벗어나려는 계책으로 삼았다.’고 한다면, 참으로 너무나 원통합니다. 신은 일찍이 양서(兩西)의 감사로 있으면서 ‘청인(淸人)과 문답할 때에는 반드시 긴요한 말만을 간추려 하고 허튼 말을 줄여야 저들이 경청하지, 만일 말이 지리하여 두서가 없으면 도리어 견책을 받게 되어 실상을 다 말하지 못하게 된다.’고 하는 말을 익히 들었기 때문에 이번에 신은 힐문을 하게 되는 사유를 낱낱이 들어 먼저 긴요한 말로 그들의 질문에 답하려 하였습니다. 그런데 표류해온 한인을 압송하게 된 곡절을 겨우 대답하자마자 칙사가 갑자기 나가라고 하였기 때문에 비록 묻지 않은 일에 대해서도 억지로 말하고자 하여도 할 수 없는 형세였습니다. 신에게 극력 쟁변하여 대신을 대신하여 죄를 받지 않았다고 하여도 오히려 억울하기 짝이 없는데, 더구나 전가시켜 스스로 벗어날 방안이었다고 하는 죄안(罪案)은 실정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소위 전가라는 것은, 그런 일이 자기에게 있었는데도 남에게 책임을 떠미는 것을 말하고, 남과 함께 일을 하고서도 교묘하게 피하여 자신만 면하려고 하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날의 일에 대하여 자세히 그 전말을 따져볼 때 신의 실정이 이런 두 가지 경우에 하나라도 비슷한 점이 있습니까.
묘당에서 계획하는 일은 변방의 신하로서는 참여하여 알 수 없는 것이고, 이른바 치보의 말에 대해서는 칙서에서도 힐문하지 않았으니, 신이 아무리 직접 주문의 일을 담당하고자 한들, 저들이 우리 나라의 사례를 자세히 알고 있는데 어찌 믿고서 죄를 분담시키겠습니까. 만일 대신과 죄를 분담하겠다고 청하지 않은 것을 잘못이라 한다면 신은 지금 추문 중에 있으니 자진해서 죄를 받겠으나, 어찌 감히 남과 죄를 분담하겠다고 청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리고 한 가지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만일 신이 먼저 들어가 스스로 해명하여 오로지 묘당에서 책임을 지게 하였다면 형적의 혐의가 있겠지마는, 이는 그렇지 않고 대신이 먼저 들어가 자신이 담당하였고, 신의 대답에 조금도 어긋나거나 회피하는 단서가 없었으며 이어 변론하여 해명을 하였는데, 어떻게 전가하였다는 죄목을 씌울 수 있습니까.
신이 입대(入對)하고 난 뒤에 모두 그르다고 하지 않았고, 대신도 신의 말을 들어 증언하였습니다. 이는 공경(公卿)과 시종(侍從)이 함께 들은 바인데, 신이 어찌 감히 꾸며서 스스로 기만하는 죄에 빠지겠습니까. 성명께서 만일 신의 스스로 변명하는 말을 모두 믿기가 어려우시거든 동석하였던 여러 신하에게 물어보소서. 과연 한 마디라도 묘당에 전가시키는 단서가 있었다면 비록 중죄(重罪)라도 달게 받겠습니다.
신과 대신이 함께 들어가서 조사를 받고서 신은 요행히 면하고 대신에게 견책이 돌아갔으니, 그에 따른 벌을 참으로 받고자 합니다. 그러나 죄를 전가하여 자신은 벗어났다는 죄목은 억울하기 그지없습니다."
하고, 노협은 공초하기를,
"신은 칙사가 도착하기 전에 주문의 등초(謄草)를 보았는데, 이른바 신이 장계한 내용은, 조광원의 구타에 관한 일과, 봉행(奉行)013)  의 서계에 관한 것과, 차왜(差倭)가 공갈한 일로서, 모두 ‘이런 내용을 갖추어 첩정한다.[等因具呈]’는 구절 이상에 있었습니다. 이른바 표류해온 한인 등에 관한 일은 ‘신들이 삼가 살펴 보건대[臣等竊照]’ 이하에 있었기 때문에 이만과 같이 대신에게 의견을 맞추기를 ‘칙사가 사문(査問)할 적에 「내용을 갖추어 첩정한다」의 이상에 대해서는 우리가 담당하겠으나, 「신들이 삼가 살펴보건대」 이하의 일에 대해서는 장계에서 나온 말이 아니므로 문답할 적에 차이가 나게 되면 주문의 전편을 사실이 아닌 것으로 여길 것인 만큼 잘못 대답한 우환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직접 담당하고자 하나 형세가 낭패스러우니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하니, 대신이 ‘「삼가 살피건대」 이하는 내가 담당하겠다.’ 하였습니다.
대신과 의견을 맞춘 뒤에 마침내 칙사의 사문을 받게 되었는데, 장계에 언급된 3건의 일은 주문의 표현대로 자세히 대답하여 조금도 전가한 말이 없었습니다. 표류해온 한인에 관한 일은 비록 ‘삼가 살펴 보건대’ 이하에 나오는 일이기는 하지만, 저들이 만일 물으면, 대신 자신이 담당하기로 한 것을 이유로 묵묵히 말을 하지 않고 대신이 견책을 받는 것을 좌시할 수 만은 없기 때문에, 장차 저들이 말을 꺼내기를 기다려 예수교인에 대한 일을 인용해서 증거로 삼을 수 있도록 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표류해온 한인에 대한 일은 이만에게만 묻고는 신에게는 묻지 않고 나가도록 재촉하였으니, 예수교인에 대한 일을 어떻게 거론하겠습니까.
만일 신에게 ‘저들이 묻지 않았더라도 어찌 예수교인의 일을 가지고서 직접 담당하여 계속 쟁변하지 않았느냐?’고 한다면 혹 모르겠으나, 저들이 묻지 않은 말을 가지고 신에게 전가시킬 의사가 있었다는 것으로 죄명을 삼는다면 역시 억울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금부가 모두 형추(刑推)하기를 청하니, 상이 노협은 형추하고, 이만은 의논하여 처리하라고 명하였다. 금부가 아뢰기를,
"신하로서 이러한 사실을 남에게 전가시켜 자신만 면하려는 계책을 하였다면 참으로 죄를 용서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제 이만이 장계에 언급한 일에 대해서는 모두 자신이 담당하였는데, 주문(奏文)에 관한 일은 밖에 있는 감사로서는 자신이 담당하기는 어려운 형세입니다. 그러나 대간의 계사로 인하여 이런 나추(拿推)의 명을 하셨으므로 신들이 감히 가볍게 의논하지 못하겠습니다. 대신에게 의논하소서."
하니, 따랐다. 영의정 이경여, 우의정 조익, 영중추부사 김육이 아뢰기를,
"주문에 말한 경상 감사 이만의 치보 내용은 이만 자신이 치보한 것이라고 인정하였습니다. 그러나 ‘삼가 살펴 보건대[竊照]’ 이하 의정부 장계 내용인 표류해온 한인 등에 대한 말은 당초 묻지 않았으며, 문답한 뒤에 곧바로 나가도록 하였으므로, 표류한 한인에 관해서 간여할 수 없었던 것은 참으로 형세가 그러했던 것이니, 그가 꼭 묘당에 전가시키려는 의도는 아니었습니다. 다만 주문으로 인해서 결국 사단이 생겨 대신이 죄를 받기까지 하였는데, 이만이 치보한 것이 주문에 기재되었으니, 만일 너무 가벼운 죄로 논할 경우 저들이 알게 되어 문제삼거나 또는 뒤폐단이 있을까 염려됩니다. 성상께서 재결하소서."
하니, 상이 삭직(削職)하여 정배(定配)하라고 명하였다. 그 뒤 노협은 세 차례 형신(刑訊)을 받았는데, 역시 정배하도록 명하였다.

 

3월 26일 기묘

진위사(陳慰使) 김육 등이 사조(辭朝)하니, 상이 인견하고 보냈다.

 

연접 도감(延接都監)이 아뢰기를,
"명수(命守)가, 뒤이어 나온 사신은 황부왕(皇父王)의 명을 직접 받들고 왔다고 하면서 말하기를 ‘국왕이 일이 있으면 의당 대군(大君)이 와야 한다. 이제 만일 대군을 보내지 않는다면 우리는 모두 즉시 북경으로 달려가 황부왕에게 품명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또 이형장(李馨長)을 시켜서 반복해서 요청하자, 명수가 화를 내고 옷을 떨치고 일어나면서 ‘대군이 가지 않으면 황부왕은 반드시 크게 의혹스럽게 여겨 혼사가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필시 호의를 베풀지 않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하였는데, 비국이 아뢰기를,
"그만둘 수 없는 형세입니다. 이는 참으로 조 태후(趙太后)가 장안군(長安君)을 내보낸 것과 같은 경우014)  입니다."
하니, 상이 부득이 따랐다.

 

3월 30일 계미

왜차(倭差) 평의윤(平義倫)이 동래에 도착하여 즉위를 축하하였다.

 

평안도 순안(順安) 등의 고을에 진눈깨비가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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