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일 갑신
상이 영사전(永思殿)에서 삭제(朔祭)를 거행하였다.
선묘조(宣廟朝)계미년015) 에 육진(六鎭)이 번호(藩胡)의 난을 만나 백성들이 생업을 잃게 되자, 조정에서 농우(農牛)를 나누어 보냈다. 그리고 각 고을에서 그 수효를 기록하게 하고, 그 소가 죽게 되면 곧장 그 대가를 징수하곤 하였는데, 그로 인해 침해하는 폐해가 자손과 인족에게까지 미쳐 백성들이 괴로워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암행 어사 이행원(李行源)이 백성의 호소로 인하여 그 폐해를 아뢰니, 상이 조사해서 탕감해 줄 것을 명하였다.
4월 2일 을유
조수익(趙壽益)을 대사간으로, 김홍욱(金弘郁)을 사인으로, 김응조(金應祖)를 사간으로, 김휘(金徽)를 이조 좌랑으로, 조한영(曺漢英)을 헌납으로, 심세정(沈世鼎)과 강호(姜鎬)를 정언으로 삼았다.
4월 3일 병술
경상도 안동(安東)·의성(義城)·밀양(密陽) 등 고을에 진눈깨비가 내렸고, 평안도 상원군(祥原郡)에 큰 눈이 내렸다.
상이 대신과 비국의 여러 신하를 인견하고, 이르기를,
"근래 연일 서리가 내리고 날씨가 추우니 매우 걱정스럽다."
하니, 영의정 이경여가 아뢰기를,
"절후(節候)가 질서를 잃으면 농사에도 피해가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우리 나라에 붕당으로 인한 해독이 오래되었다. 심지어 다른 나라 사람들도 우리 나라에 붕당이 있음을 말하니, 역시 부끄럽지 않은가."
하니, 경여가 아뢰기를,
"전하께서 붕당으로 말씀하시나, 대체로 우리 나라의 편당은 군자(君子)와 소인(小人)의 구별에서 생긴 것이 아니라 대대로 내려오는 업(業)을 지키다 보니 각자 분열된 것입니다. 임금이 현사(賢邪)를 분별해서 쓴다면, 자연 청탁(淸濁)이 분간될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너무 심하게 분별하면 탁한 자가 언제나 청한 자를 이기려 하니, 이 점도 염려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근본을 따져서 말한다면 임금 노릇을 제대로 못한 과실이 실로 나에게 있지만, 조신(朝臣)들이 붕당을 지은 병통은 참으로 오늘날의 고질적인 병폐이다."
하니, 경여가 아뢰기를,
"신면(申冕)은 명문의 자손이니, 굳이 자점(自點)과 친히 지낼 이유가 없지만 자점이 언제나 명사(名士)와 교류하고자 하였기 때문에 왕래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를 가지고 그의 당이라 지적하여 버려서는 안 됩니다. 이지항(李之恒)도 그와 인척관계로 인하여 혹 왕래하기는 하였지만 오래도록 버려두어서는 안 됩니다. 신은 모두 거두어 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였다. 우의정 조익이 아뢰기를,
"유계(兪棨)는 포의(布衣)일 때 신에게 경서(經書)를 배워서 신은 그의 위인이 범연치 않다는 것을 알았습니다만, 이제 와서 보니 참으로 정직한 선비입니다. 그런데 주의(注擬)할 적에 상께서 낙점을 아끼시니, 무슨 죄가 그에게 있어서 그러시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니, 상이 노여워하며 이르기를,
"이제 비록 소진(蘇秦)이나 장의(張儀)의 말재주로도 내 마음을 움직이지는 못할 것이다. 유계가 어찌 감히 30년간 섬겼던 임금에게 ‘인(仁)’이라 칭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고 한단 말인가."
하였다. 부제학 조석윤(趙錫胤)이 아뢰기를,
"유계의 마음에 어찌 다른 뜻이 있어서 그랬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유계가 당초 심대부(沈大孚)의 상소를 옳다고 하였는데, 나중에는 내가 그 뜻을 모를까봐서 또 ‘인(仁)’ 자의 뜻까지 설명하면서 선왕(先王)의 시호에는 합당하지 않다고 하였다. 어찌 감히 그럴 수가 있는가."
하였다. 조익이 아뢰기를,
"대부(大孚)도 어찌 다른 속셈이 있었겠습니까. 신이 대부를 애석히 여겨서가 아닙니다. 그리고 유계도 어찌 대부와 서로 친해서 함께 그런 논의를 드렸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심대부는 속으로 ‘인(仁)’ 자가 합당하지 않다고 여기고서 마침내 ‘종(宗)’과 ‘조(祖)’를 가지고 말하였는데, 이는 ‘조(祖)’라 칭하지 못하면 인종(仁宗)이라고 거듭 사용하지 못하게 되어 자연 ‘인(仁)’ 자를 사용하지 못하게 될 것이기 때문인 것이다. 그의 심술이 바르지 못하다. 그리고 이조는 꼭 유계를 전랑(銓郞)에다 수의(首擬)하였는데, 내가 매우 싫었다. 그러나 분(忿)함을 징계하려는 뜻에서 그만두었다. 또 이조는 정사 때마다 유계를 천거하는데, 이는 무슨 도리인가. 유계가 만일 제갈량의 재지(才智)가 있다면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결코 쓸 수 없다. 만일 불의(不義)를 행한 것으로 말한다면, 중죄로 다스려도 안 될 것이 없다. 유계가 만일 나를 지탄하였다면 아무리 이보다 심하게 해도 충애(忠愛)라고 하겠다. 그러나 선왕에게 어찌 감히 그렇게 한단 말인가. 그의 관작을 삭탈하라."
하였다.
상이 옥당의 강관(講官)을 소대(召對)하여 《대학연의(大學衍義)》를 강하였다.
4월 4일 정해
적성현(積城縣)에 큰 눈이 내렸다.
이후원(李厚源)을 대사간으로, 김시진(金始振)을 문학으로, 이정영(李正英)을 수찬으로 삼았다.
상이 하교하기를,
"유계와 심대부 등이 감히 소장(疏章)에 드러내어 아무런 거리낌없이 선왕을 비방하였으니, 용서할 수 없는 죄이다. 이제 비록 늦었지만 결코 그대로 둘 수가 없다. 우선 말감(末減)해 주는 법을 따라 유계는 극변(極邊)으로 귀양보내고, 대부는 중도 부처(中道付處)하라."
하니, 정원이 【도승지 윤순지(尹順之), 좌승지 윤강(尹絳), 우승지 신유(申濡), 좌부승지 이래(李䅘), 우부승지 남선(南翧), 동부승지 유경창(柳慶昌).】 아뢰기를,
"유계와 심대부는 망언(妄言)한 과실이 있지만 당초에 너그러이 용서해 주었으니, 실로 성대(聖代)의 아름다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대신의 진계(陳啓)로 인해 사태가 악화되어 이렇게까지 되었으니, 이는 대성인(大聖人)의 ‘분노를 다른 사람에게 옮기지 않는다.’는 뜻이 아닌 듯합니다.
더구나 비방하였다고 하신 하교는 더욱 두 신하의 본 뜻이 아닙니다. 삼가 원하건대 위엄을 조금 거두소서."
하자, 답하기를,
"개인적인 인정이 비록 간절하더라도 의리로 따져보면, 신하로서 이렇게 구호(救護)해서는 안 된다."
하였다.
헌부가 아뢰기를,
"유계와 심대부는 망언한 과실은 참으로 있지마는 그의 본뜻을 살피면 어찌 그 사이에 털끝만큼이라도 비방하는 뜻이 있었겠습니까. 엄한 성지(聖旨)가 내려 모두 사기가 저상(沮喪)되었습니다. 유배하라는 명을 다시 거두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상이 옥당의 강관(講官)을 소대(召對)하여 《대학연의(大學衍義)》를 강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한 문제(漢文帝)가 비록 육형(肉刑)을 제거하였지만, 그래도 죽은 자가 많았다. 만일 ‘자(慈)’ 자에만 구구히 얽매인다면, 도리어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자비(慈悲)’의 자(慈)가 될 것이니, 어찌 ‘자’만을 주장하여 한갓 조그만 은혜만을 일삼겠는가."
하니, 검토관 윤집(尹鏶)이 아뢰기를,
"문제가 비록 죄가 있는 자에게 관대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어찌 죄가 아닌 것으로 사람을 죽였겠습니까."
하고, 참찬관 유경창(柳慶昌)이 아뢰기를,
"유계와 심대부는 참으로 망언한 죄가 없지는 않지만, 당초 관대히 용서해 주어 중외가 흠앙하였습니다. 어제 대신이 진계한 것으로 인하여 오늘 찬축하는 명이 있었기 때문에 본원에서 진달하였는데, 도리어 엄한 성지를 받들었습니다. 황공하기 그지없습니다."
하고, 교리 홍처윤(洪處尹)과 윤집(尹鏶)도 유계 등의 일을 말하였으나, 상이 모두 답하지 않았다.
우의정 조익이 상소하기를,
"신은 어제 입시(入侍)하여 유계의 일을 함부로 논함으로써 성상께서 진노하시고 유배하라는 명까지 있게 하였습니다. 신은 황공하여 몸둘 곳이 없습니다. 선왕(先王)의 인성(仁聖)하신 덕은 온 나라가 함께 감동하여 받드는 바인데, 신하로서 어찌 감히 기롱하고 폄하하겠습니까. 아무리 미쳐서 실성한 사람이라도 필시 그렇게는 감히 못할 것입니다. 만일 유계가 선왕에 대해서 털끝만큼이라도 부족하게 여기는 마음이 있었다면 신도 의당 엄하게 질책하였을 것입니다. 시호를 의논하던 당초에 여러 신하가 합당한 글자를 찾지 못하여 논의가 결정되지 못하고 있을 적에 신이 여러 신료들에게 ‘인(仁)자 만이 가장 합당한데 다만 인묘(仁廟)의 시호에 저촉되어 어렵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헤아리기에는 유계의 마음도 이러한 것이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유계의 사람됨이 선을 지향하고 학문에 힘써 재주가 실로 애석하기 때문에 감히 함부로 말씀드린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 성상의 진노를 촉발하여 그를 버리는 일까지 있을 줄이야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신은 삼가 전하께서 여러 아랫사람의 뜻을 깊이 살피지 못하신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유계가 이렇게 죄를 받았는데, 그를 논한 자로서 어찌 혼자만 면할 수 있겠습니까. 신은 사실(私室)에서 석고 대죄(席藁待罪)하고 삼가 견책을 기다립니다. 삼가 원하건대 신을 형장(刑章)으로 다스려 망언한 자의 경계를 삼으소서."
하니, 상이 대죄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영의정 이경여가 상차하기를,
"어제 탑전에서 삼가 보니, 진노한 기색이 목소리와 용안에 너무 현저하여 성인의 중화(中和)의 기상을 크게 상실하였으므로, 신은 황공하고 의혹스러웠습니다. 신은 성상의 덕이 관대하며 인자하고 성상의 학문이 고명하시니, 궂은 것 미운 것 모두 포용하여 사물에 순응하심에 있어서 필시 생각하지 않더라도 잘 하시고 굳이 힘쓰지 않아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겨왔습니다. 그런데 이제 보니, 모르는 사이에 천지의 큰 도량에 유감됨이 있었습니다. 의리를 강명(講明)할 적에 혹시라도 성찰하고 보존하는 공력이 부족해서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성탕(成湯)과 같이 큰 성인도 과실이 없을 수 없어, 허물 고치는 것을 꺼리지 않은 것으로 후세에 법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성명(聖明)께서 아무리 좌우의 실대(失對)에 격분하였다 하더라도 깊은 밤 생각하시고 맑은 새벽 한가하실 적에 필시 확연히 깨달으심이 있어 흔쾌히 후회하는 단서를 보여 주실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삼가 유계와 심대부 등을 유배하라는 명이 내렸다는 말을 듣고, 신은 놀라고 실망하였습니다. 성명께서 이런 거조를 하시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하였습니다.
인정(人情)이란 그다지 서로 멀지 않은 것입니다. 유계 등도 미쳐서 실성한 사람이 아닙니다. 선조(先朝)를 내리 섬겨 시종(侍從)으로 출입하였으니 후한 은혜와 예우가 소원(疎遠)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 선왕(先王)께서 위에 계신 지 30년에 가까워 깊고 후한 인덕이 사람들의 살과 뼈에 깊이 스몄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승하하시자 궁벽한 산골의 백성들까지도 애통해 하였습니다. 유계 등이 유독 어떤 마음을 가졌기에, 승하하신 초상에 차마 폄하하는 마음을 내어 애통하고 망극한 중에 함부로 말하기까지 하였겠습니까. 생각건대 필시 묘호(廟號)에 ‘조(祖)’ 자를 거듭 사용하는 것을 혐의롭게 여겨서일 것입니다. 그리고 심대부는 필시 선조조(宣祖朝)의 윤근수(尹根壽)와 윤효전(尹孝全)의 일016) 을 본받은 것이니, 어찌 그 사이에 다른 의도가 있었겠습니까.
삼가 성자(聖慈)께서는 위엄을 조금 거두시고 슬기로운 성찰을 더 깊이 하시어 내리신 명을 우선 중지하소서. 그리고 정신(廷臣)에게 물으시고 여론을 따르심으로써 중외(中外)의 신하들로 하여금 성상의 새로운 모습을 모두 우러르게 하소서. 신은 편벽되이 뼈에 사무치는 은혜를 입었기에 분골쇄신하여 큰 은혜에 보답할 것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찌 조정의 서로 아는 한두 사람을 위하여 쓸데없는 말을 하여 우리 임금을 속이겠습니까."
하였는데, 상이 듣지 않았다.
4월 5일 무자
상이 하교하였다.
"이 달 삭서(朔書) 중에 불가(佛家)의 말을 쓴 자가 있었다. 너무나 온당하지 못하니 이후로는 그러한 문자를 쓰지 말게 하라."
이조 판서 이시백(李時白)이, 유계를 주의(注擬)한 것에 대하여 엄지(嚴旨)가 있었음을 들어 재차 상소하여 면직을 원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이 그를 주의한 것은 직책상의 일에 속하니 그다지 잘못이 없다. 안심하고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참판 김남중(金南重)이 상소하여 면직을 원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간원이 【사간 김응조(金應祖).】 유계와 심대부를 멀리 유배하거나 중도 부처하라고 한 명을 환수하기를 청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삼분모(三分耗)를 회록(會錄)하는 것은 옛법이 아닙니다. 병자년017) 의 난을 겪은 뒤로 공사간에 탕갈되어 신 응조가 아룀으로 인하여 임시로 시행한 것입니다. 시행한 지 10여 년인데, 안동부(安東府)같은 곳은 원곡(元穀)이 이미 많은데다 회록의 수효도 해마다 증가되어 1년에 1인당 받는 조곡(糶穀)이 60, 70곡(斛)이나 되기도 하므로,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도망하는 백성이 잇따라 생깁니다. 한 읍이 이러하니 다른 곳도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여러 도(道)의 삼분모미(三分耗米)에 대한 회록을 혁파해서 백성들의 원성을 줄이도록 하소서."
하였는데, 묘당에서 의논하도록 명하였다. 묘당이 응조의 말을 채용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헌부가 다시 전계(前啓)인 유계 등의 유배하라는 명을 환수할 것을 거듭 청하고, 또 아뢰기를,
"전 승지 이만(李曼)의 죄의 경중은 성상께서 이미 통촉하고 계시니, 이제 굳이 열거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대신과 중신은 변방의 성에다 안치하였는데, 이만은 서울에서 가까운 호서(湖西)에 부처(付處)하였으니, 사체로서도 미안할 뿐 아니라, 당초 죄를 정한 본의도 아닙니다. 청북(淸北)의 연로(沿路)에다 이배(移配)하여 원근의 보고 듣는 자로 하여금 죄를 분담한 뜻을 분명히 알도록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윤허하지 않는다. 이배하는 일은 아뢴 대로 하라. 여기 논한 두 가지를 가지고 보면 의리에 전혀 어둡고 군부(君父)를 멸시한 경들의 정상이 환히 드러나 감추기가 어렵다. 인심이 이러하니 국가가 망하지 않고 무엇을 기대하겠는가. 아, 통탄스럽다."
하였다.
상이 옥당의 강관을 소대하여 《대학연의(大學衍義)》를 강하였다.
이만을 영변부(寧邊府)로 이배하였다.
4월 6일 기축
대사헌 남선(南銑), 집의 이재(李梓), 장령 유준창(柳俊昌)·윤겸(尹㻩), 지평 홍수(洪鐩)·최일(崔逸)이 인피하기를,
"신들이, 유계와 심대부를 유배시키라는 명을 환수할 것을 여러 날 논열(論列)하였으나, 성의가 부족하여 윤허를 받들지 못하고 도리어 엄한 유지를 받들었습니다. 신들의 직을 속히 삭제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승지 신유(申濡)가, 대간을 이렇게 대우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으나 상은 답하지 않았다. 승지와 사관이 모두 그대로 앉아서 기다렸는데, 다음날 아침 답하기를,
"일상적인 말을 꿰어 맞추어 명성을 얻을 터전으로만 삼으려 하고 사체의 경중은 생각지 않으니, 무식하다고 할 만하다. 아무리 대간을 대하는 도리상 후하게 해야 한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선왕보다도 소중할 수 있겠는가. 그대들이 이 점을 전혀 생각지 못하므로 부득이 말하는 것이다."
하였다.
4월 7일 경인
사간 김응조(金應祖)가 인피하기를,
"신도 그제 유계와 심대부 등의 일을 논계하였습니다. 헌부의 여러 관원과 죄가 같은데, 혼자만 면할 수가 없습니다."
하고, 대사간 이후원(李厚源)도 이로써 인피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응조 등이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영의정 이경여가 상차하기를,
"헌부가 청하고 정원이 아뢴 것은 임금을 아끼는 의리에서 한 것이니, 어찌 그 사이에 사사로운 뜻이 있었겠습니까. 그런데도 근신(近臣)의 말을 막고 반박하여 무식하다고 힐책하는가 하면 인피하는 대간을 삭직하도록 허락하셨으니, 성명(聖明)이 위에 계시면서 이런 일이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하였습니다.
신은 지난번 차자를 올렸으나 성의가 부족하여 성상의 뜻을 돌리지 못하고 위엄만 범하였습니다. 이제 다시 정성을 아뢰니, 성상께서는 주저하지 마시고 새롭게 도모하시어 쾌히 후회하는 단서를 보이시고, 근밀의 신하를 위로하시고, 면직된 대관을 복직시키어 공의(公議)를 포용하고, 언로를 활짝 여시기를 삼가 바랍니다."
하였으나, 상이 듣지 않았다.
4월 8일 신묘
상이 영사전(永思殿)에서 하향(夏享)을 거행하였다.
여이재(呂爾載)를 도승지로, 정유성(鄭維城)·조수익(趙壽益)을 승지로, 신천익(愼天翊)을 집의로, 이후원(李厚源)을 대사헌으로, 김중일(金重鎰)·이지무(李枝茂)를 장령으로, 정시성(鄭始成)·이성항(李性恒)을 지평으로, 남용익(南龍翼)을 설서로, 홍처대(洪處大)를 수찬으로, 윤순지(尹順之)를 이조 참판으로, 이일상(李一相)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간원이 【정언 심세정(沈世鼎).】 아뢰기를,
"간신(諫臣)이 일에 따라 논열하는 것은 실로 올바르게 되도록 하기 위한 것인데, 무슨 피혐할 일이 있겠습니까. 김응조와 이후원을 모두 출사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또 아뢰기를,
"대간은 인주의 귀와 눈이니, 숨김없이 다 말하는 것은 바로 그 직분입니다. 엄한 성지를 내리시니 부득이 인혐한 것인데, 마침내 청한 대로 삭직까지 하셨으니, 전하께서 대신을 대우하는 것이 너무 야박하지 않습니까. 남선(南銑) 등을 삭직하라는 명을 환수하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옥당이 상차하기를,
"유계 등을 유배하라는 명과, 남선 등을 삭직하라는 명을 속히 중지하소서."
하였으나, 상이 모두 듣지 않았다.
4월 9일 임진
우의정 조익이 두 차례나 정고(呈告)하니, 상이 승지를 보내어 회유하였다.
부제학 조석윤(趙錫胤)이 상소하기를,
"유계 등이 죄를 받은 것은, 실로 신이 경솔히 함부로 응대하여 성상의 위엄을 격동시켰기 때문입니다. 온 조정이 놀라 의혹하고 기상이 꺾였으니, 신이 비록 형벌을 받더라도 그 죄를 벗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삼가 생각건대 군신간은 부자간과 같습니다. 부모가 허물이 있으면 자식으로서는 의당 끝까지 간(諫)해서 매를 맞아 피가 흐르더라도 감히 그만두지 못하는 것이니, 신하로서 임금에게 무엇이 이와 다르겠습니까. 신이 만일 피혐하고 주벌(誅罰)을 두려워해서 생각을 다 말하지 않는다면 이는 임금을 아끼지 않는 것입니다.
유계가 시호를 의논드린 소에 참으로 털끝만큼이라도 기롱하고 폄하한 말이 있었다면, 조신(朝臣)들이 함께 분노하고 질책하였을 것이니, 어찌 엄한 성지가 내릴 때까지 기다리겠습니까. 신이 탑전에서 삼가 성상의 하교를 들으니 ‘유계의 상소에 「어진자[仁者]는 사욕(私欲)이 없는 것이다.」는 등의 말이 있었고, 또 두 번이나 상소하면서 먼저 심대부(沈大孚)를 구원하고 이어 시호를 논란하였다.’고 하시면서 말씀이 엄하셨습니다. 참으로 그러했다면 성상께서 유계를 의심하심이 당연합니다. 그리고 유계가 선왕을 기롱하여 의논하였는데도 신하들이 그를 변호하였다면 성상의 노여움이 큰 것도 당연합니다. 그러나 신이 물러나와 그의 상소를 구해서 보니, 실제는 성상께서 하교하신 구절의 말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상소는 올린 적이 없었습니다. 이로써 본다면, 유계의 본의는 다만 중첩되게 ‘조(祖)’를 시호로 사용하여 정문(情文)에 구애됨이 있을까를 염려한 것뿐으로 막중한 전례(典禮)가 지극히 온당하게 되게 하려는 것일 뿐이었습니다.
그 당시 성상의 비답도 자못 온화하였는데, 이는 역시 그의 진실한 뜻을 양해하시어 허물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해가 바뀐 뒤에 갑자기 신료가 경솔히 한 잘못으로 인하여 크게 진노하시어 변방에다 버리는 법까지 가하셨으니, 성인의 절도에 맞는 희로(喜怒)와, 왕자(王者)의 탕평(蕩平)하는 도에 어떻다 하겠습니까. 더구나 심대부는 다만 유계의 일로 격노하심으로 인하여 함께 중벌을 받아, 멀리 외진 북쪽으로 또는 황량한 산골로 유배를 갔으니, 관대하고 인자함으로 아래를 보살피시는 성명(聖明)의 덕에 어찌 손상됨이 없겠습니까. 더구나 이로 인하여 정승이 불안해 하고 대각(臺閣)이 텅 비었으며, 신하들이 기가 꺾여 온 나라가 실망하고 있으니, 국가의 불행스러움을 어찌 다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성인의 마음은 본래 매인 곳이 없어, 죄가 있으면 죄를 주고 용서할 만하면 용서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허심탄회하고 크게 공평하여 외물(外物)에 따라 기뻐하고 노여워하는 도가 아니겠습니까. 신은 성명께서 그 본정(本情)을 통촉하지 못하신 것이 아닌가 염려되어, 이에 감히 외람스럽게 우러러 진달하니, 이 또한 자신을 헤아리지 못하는 짓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신을 삭직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그대의 논변이 이러하니 나도 부득이 말을 다하겠다. 대개 대부의 상소는 한 번이었고, 비록 드러내어 배척하지는 않았으나, 은미한 뜻이 가증스러웠기 때문에 부처(付處)하는 벌을 대략 시행하였다. 유계는 두 번 상소하였는데, 처음에는 그대 상소에 한 말처럼 말이 심하지 않았으나, 두 번째는 감히 묘호(廟號)를 들어 배척하여 마음속에 있는 말을 다하였으니, 심한 중에서도 더 심한 경우가 아니겠는가. 이것은 그대가 필시 미처 보지 못한 것일 것이다. 그 당시 이 두 사람의 창도로 인하여 사설(邪說)과 이론이 분분하게 일어났다. 당초 조정에서 의논할 적에 시비를 논하여 합당하게 되도록 힘썼다면 참으로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전례(典禮)가 이미 정해진 뒤에 두어 사람의 사설로 인하여 시비가 분분하게 되었으니, 사체나 정례(情禮)로 보아 어떻다 하겠는가.
선왕께서 승하하시던 날 깊은 산 궁벽한 골짜기에서까지 어쩔 줄 모르고 애모(哀慕)하였으며, 서울의 서민들은 다투어 쌀과 베를 내어 능역군(陵役軍)을 공궤하면서 행여나 뒤질까 염려하였다. 이토록 무지한 백성들의 행위와 유식한 조정 사대부의 비방하고 폄하한 행위를 비교해 보면, 역시 가슴이 아프지 않겠는가. 의리와 신하의 도리로 보아 옳은가, 그른가? 그들의 마음도 편하겠는가, 불안하겠는가? 이러기 때문에 나는 기필코 국법을 바루고자 한 지가 오래되었다. 어찌 오늘의 일을 기다려서 성을 내는 것이겠는가. 또 두 번째 상소의 유무를 생각하지 않은 채 일시적인 분노로 감히 선왕을 핑계하여 남에게 죄를 씌우는 일이 어찌 있겠는가.
오늘날의 신료들이 시비를 분별하지 않은 채 떼 지어 일어나 다투어 화를 내면서 마치 손을 댈 수 없는 것처럼 하는데, 나는 감히 성을 내지 못하고 도리어 두려워하고 있다. 그대는 이 두 사람의 상소 내용이 어떠했는가를 몰랐으니, 무슨 죄가 있겠는가.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4월 10일 계사
김응조(金應祖)를 응교로, 김좌명(金佐明)을 교리로, 김상(金尙)을 승지로, 권우(權堣)를 사간으로, 남선(南翧)을 황해 감사로 삼았다.
우의정 조익이 상소하기를,
"삼가 조석윤(趙錫胤)의 상소에 대한 비답을 보니, 유계가 두 번의 상소를 하였다고 하셨습니다. 신이 삼가 듣건대 유계는 한 번의 상소만 하였지 두 번째의 상소는 없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그 두 번째 상소의 말을 필시 유계가 올린 것이 아닐 것입니다. 신의 생각에는 전하께서 상중이라 정신이 없으시던 때, 다른 사람의 상소를 유계의 상소로 여기신 게 아닌가 싶습니다. 유계의 상소는 전례(典禮)를 일반적으로 논한 것에 불과하고, 비방하고 폄하한 뜻은 없었습니다. 심대부의 상소도 신은, 전례만을 논하였고 선왕을 비방하고 폄하한 뜻은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은 본래 서로 친한 사이가 아닌데, 친한 사이가 아닌 사람끼리 서로 의논해서 군부를 비방하겠습니까. 공자가 ‘남이 나를 속일 것이라고 미리 짐작하지 않고, 남이 나를 불신할 것이라고 억측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성인의 이 말씀이 지극히 충후하지 않습니까.
전하께서는 단지 일찍이 그 상소에 좋지 않은 말이 있음을 보셨기 때문에 엄히 질책하셨으나, 이제 그 상소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아셨으니, 확실하게 의혹을 푸셔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인의 허심탄회하고 크게 공평하여 마음을 비우고 사물을 대하는 도리입니다."
하였는데, 상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4월 11일 갑오
상이 하교하기를,
"지난번 내가 이승민(李承敏)의 상소를 가상히 여겨 파격적으로 수용(收用)하라고 명하였는데, 지금 수용하였는가?"
하니, 이조가 아뢰기를,
"승민은 보인(保人)입니다. 의당 병조에서 그에 상응하는 직을 제수해야 합니다."
하자, 답하기를,
"너무나 해괴하다. 그 당시 당상이 누구누구인가?"
하였다. 이조가 아뢰기를,
"판서 김집(金集), 참판 김남중(金南重), 참의 이행우(李行遇)입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판서는 근무한 날이 매우 짧으니 거론할 필요가 없고, 참판과 참의는 재직한 지 오래인데도 아직까지 받들어 시행하지 않았으니, 이는 바로 사사로운 부탁을 들어주기에 바빠서 그런 것이다. 우선 중한 율에 따라 추고하라."
하였다. 병조가 아뢰기를,
"승민이 글을 잘하고 재주가 있다고는 하나 무인(武人)의 일을 모르니, 변방의 장수나 내삼청(內三廳)018) 금군(禁軍)의 직임에는 모두 적당하지 못합니다. 병조에 적당한 자리가 없어 지금까지 수용하지 못하였으나, 보인의 신역은 이미 본도로 하여금 상의 하교대로 면제해 주도록 하였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참으로 의(義)에 해롭지 않다면 임금의 명을 가끔은 봉행하는 것도 무방할 듯하다."
하였다. 이조가 마침내 이승민을 중부 참봉(中部參奉)으로 삼았다.
4월 12일 을미
정홍명(鄭弘溟)을 대사헌으로, 김응조(金應祖)를 겸필선(兼弼善)으로 삼았다.
4월 13일 병신
상이 정원에 명하여 유계가 올린 예전의 상소를 가져오게 하였는데, 정원이 그 원본을 찾지 못하고, 《일기(日記)》에 기재되어 있는 것을 베껴서 올렸다. 상이 행여 삭제한 내용이 있을까 의심하여 승지에게 명하여 살펴서 아뢰도록 하였다. 조수익(趙壽益)과 유경창(柳慶昌)이 아뢰기를,
"신들은 본원에 들어온 지가 오래되지 않아 당시의 《일기(日記)》를 수정(修正)한 것을 모르겠는데, 전부터 《일기(日記)》에는 크고 작은 상소를 초록하는 규례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 문세(文勢)를 보건대 끊긴 곳이 없는 듯합니다. 반복해서 생각해도 진달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동문서답을 하니, 임금을 섬기는 도리가 너무 부족하다. 당시 수정한 주서(注書)는 누군가?"
하자, 아뢰기를,
"지금 설서(說書)인 남용익(南龍翼)입니다."
하였다.
상이 대신과 비국의 여러 신하를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북경의 소식이 아직까지 없는데, 저들이 쉽게 돌아오지 못할까 매우 우려스럽다."
하니, 영의정 이경여(李敬輿)가 아뢰기를,
"관(館)에서 말하기를 ‘18일 이전에는 소식이 있을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경여가 또 아뢰기를,
"신이 유계의 일을 아뢰었는데, 신에게 견책을 내리지 않고, 엄한 성지를 여러 신하에게 여러번 내리시니, 황공하기 그지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헌부의 의논이, 유계에 대해서는 멀리 유배보내는 것이 불가하다 하고, 이만(李曼)에 대해서는 기필코 변방으로 이배하고자 하니, 마음씀씀이가 어찌 이러하단 말인가."
하고, 또 이르기를,
"부제학 조석윤이 ‘유계는 두 번째 상소를 올린 적이 없다.’고 하고, 우상도 그리 말하는데, 난들 어찌 죄를 주려고 없는 일을 있었다고 하겠는가. 정원은 참으로 상고해 낼 수 없는가? 유계가 정언으로서 사직하는 상소를 하였기 때문에 내가 답하기를 ‘알았다.’고 하였다. 그런 말이 없었다면 어떻게 ‘상소의 내용은 알았다.’고 하였겠는가."
하고, 또 이르기를,
"심대부(沈大孚)의 죄가 가장 무겁다는 것인가? 어찌하여 한 사람도 그를 변호하는 자가 없는가. 내가 ‘그의 은미한 뜻이 가증스럽다.’고 했는데, 한 번도 변호하는 자가 없었다."
하였다. 대신이 물러간 뒤에 상이 승지에게 이르기를,
"전에 ‘인(仁) 자의 뜻을 밝혀 말하면서 털끝만큼이라도 사사로운 인욕(人欲)이 없는 것을 의미한다고 했다.’고 한 말은 그 뒤에 생각해 보니, 유계의 상소 내용이 아닌 듯하였다."
하였다.
4월 14일 정유
상이 하교하기를,
"어제 상소의 등본을 살펴서 아뢸 적에, 하문한 말에 대해서는 전혀 대답하지 않고, 마치 동문서답하듯 하였으니, 너무나 괴이하다. 당해 승지를 우선 추고하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어제 정원이 베껴서 올린 《일기(日記)》에 기록된 유계의 상소를 보건대, 한 대목이 완전히 빠져 기재되어 있지 않았으니, 너무나 경악스럽다. 당해 주서가 어찌 감히 마음대로 뽑아 삭제한단 말인가. 여러 승지가 같이 앉아서 자세히 물어 아뢰라."
하였다. 정원이 가주서 남용익을 불러다 물으니, 용익이 대답하기를,
"모든 상소는 하나하나 《일기(日記)》에 기록하고 한 글자도 누락됨이 없게 하는데, 어찌 그 상소만은 감히 삭제하였겠습니까."
하였다. 하교하기를,
"남용익을 잡아다 국문하여야 하겠으나, 필시 일이 사실대로 밝혀지지는 못하고 사람들의 비방만 갑절로 늘어날 것이니, 지금은 우선 그만두라."
하였다.
4월 15일 무술
월식이 있었다.
상이 영사전(永思殿)에서 망제(望祭)를 거행하였다.
황해 감사 남선과 광주 부윤 심지명이 사조(辭朝)하니, 불러 유시(諭示)하여 보냈다.
4월 16일 기해
이정영(李正英)을 헌납으로, 정인경(鄭麟卿)을 정언으로, 이후원(李厚源)을 도승지로, 강여재(姜與載)를 장령으로 삼았다.
상이 하교하였다.
"《정원일기》에 기재된 유계의 상소에 별다른 말이 없다고 하니, 내가 정신이 없어 잘 살피지 못한 탓이겠다만, 그래도 괴이할 따름이다. 비록 그렇더라도 유계와 심대부는 아울러 석방하여, 사람들의 불만을 쾌히 풀어주고 한편으로는 과인의 부덕함을 들어내어 모두 알게 하라."
4월 17일 경자
비변사가 아뢰기를,
"청사(淸使)가 이달 15일 강을 건넜을텐데, 청사가 이제 또 나온다고 하니, 반송사(伴送使)를 원접사(遠接使)로 삼도록 하소서."
하니, 따랐다. 이는 섭정왕(攝政王)이 보낸 자가 칙사(勅使)라고 칭하였기 때문이다.
응교 김응조가 상소하기를,
"신이 삼가 살피건대, 전하는 하늘이 내신 성인의 자질을 갖추어 영명(英明)하심이 전고(前古)에 으뜸이십니다. 그러나 학문상 몸소 체험하여 터득하고 확충하여 함양하는 공부에 있어서는 미진한 바가 있기 때문에, 말씀과 행동에 지나치게 살피고 너무 단정하는 면이 있습니다. 신이 삼가 하나하나 아뢰고자 합니다.
아, 지금의 인재는 선왕께서 위에 오르실 초기의 수준에 미치지 못하고, 선왕조의 인재는 선묘조(宣廟朝)의 수준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 온 나라의 공언(公言)입니다. 오늘날의 인재를 모두 거두어 모아 단점은 버리고 장점만 헤아려 쓴다 하더라도 오히려 이 세상의 일을 해내기에 부족할텐데, 더구나 기를 꺾고 진노하여 박대하심으로써 조금도 보살피고 아껴주지 않으신다면, 많은 인재가 배출되어 한 시대의 수요에 충족되기를 어찌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뜻밖에도 오늘날 유계와 심대부의 일로 인하여 죄를 얻은 자가 많으니, 신은 삼가 의혹스럽게 여깁니다.
유계와 심대부 등의 참람하고 광망(狂妄)한 죄는 비단 신들만 아는 것이 아니라 그들도 필시 스스로 알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군부(君父)를 비방한 것으로 죄안(罪案)을 삼는다면, 그들만이 불복할 뿐 아니라 신들도 절대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옛날 정경세(鄭經世)가 상소하여 선조 대왕(宣祖大王)의 묘호(廟號)를 논하였는데, 지금 그 글이 아직도 그의 유고(遺稿)에 있다 합니다. 이는 다만 창업(創業)과 대를 잇는 것을 구별하여 논쟁한 것인데, 대체로 대부의 논의는 이에서 나온 것입니다. 선배의 논의를 보고 흠모하여 모방한 것이니, 어찌 다른 의도가 있었겠습니까.
유계의 상소도 대부가 말로 인하여 힐책을 받는 것을 애석해서 한 것에 불과한데, 표현하는 과정에서 참람하고 광망한 데 빠지는 것을 스스로 깨닫지 못했을 뿐이니, 선왕을 비방하였다고 한다면 역시 원통하지 않겠습니까. 한 해가 지난 뒤에 갑자기 중한 죄를 가하여, 지난날 한림에 두었던 사람을 이제는 죄인으로 삼아 북변에 귀양을 보냈습니다. 이 한 가지 일로 인하여 헌부의 전원이 삭직을 당했고, 전형(銓衡)을 맡은 관직이 모두 비었으며, 우상은 인혐하여 들어갔고, 조석윤은 이미 스스로 물러갔으며, 그밖에도 성상의 뜻을 거역하여 견책을 기다리고 있는 자가 한둘이 아니니, 이것이 무슨 현상입니까.
전하께서 편당을 조절하고 인재에 따라 참작하여 등용하는 도(道)가 선왕만 못하시는데, 기를 꺾고 위엄으로 박대하심이 너무 과하십니다. 전년에 그러했고 금년에 또 그러시니, 전하의 조정이 텅 비지 않겠습니까. 현재 하늘이 경계를 보이고 물괴(物怪)가 거듭 나타나 인심이 뒤숭숭하여 온 나라가 물 끓듯 합니다. 이야말로 전하께서 마음을 가다듬고 자성하여 인심을 수습하심으로써 천명을 이어가야 할 때입니다. 전하께서 이를 소홀히 할 수 있겠습니까.
이번에 유계 등은 이미 석방되었으나 몇 줄 성상의 하교하신 말씀이 매우 엄하여 심지어는 ‘사람들이 불순하다.’고까지 하셨으니, 오늘날 신하들의 죄가 이에서 한층 더하였습니다. 선유(先儒)가 말하기를 ‘성을 내야 할 적에 문득 성내는 것을 잊고 사리의 시비를 살피라.’고 하였습니다. 전하께서도 혹 한가하실 적에 심기를 화평하게 하시고 시험삼아 반복하여 생각해 보시면, 사리의 시비가 어찌 성감(聖鑑)의 아래에 자연히 드러나지 않겠습니까. 신의 망언이 이에 이르렀으니, 삼가 원하건대 속히 삭직하여 축출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사직하지 말고 직무를 살피라."
하였다.
4월 18일 신축
상이 안에 저축해 둔 호초(胡椒) 29말[斗]을 호조에 내려서 청사(淸使)의 요구에 응하게 하였다.
우의정 조익이, 상이 유계를 죄준 것은 자신 때문이었다고 하여, 병을 핑계로 정고(呈告)하였는데, 유계가 석방되자, 조익도 마침내 나왔다.
4월 19일 임인
상이 서교(西郊)에 행행하여 청사를 영접하고, 인정전에서 접견하였다.
4월 20일 계묘
영양군(嶺陽君) 이현(李儇)을 의순 공주(義順公主) 호행사(護行使)로 삼았는데, 현이 아비의 병을 이유로 사직하자 공조 판서 원두표(元斗杓)로 대체하였다.
4월 22일 을사
상이 서교에 행행하여 의순 공주를 전송하였다. 시녀 16인과 여의(女醫), 유모 등 몇 사람이 따라갔는데, 이를 본 도성의 백성들이 모두 비참해 하였다.
4월 23일 병오
상이 하교하였다.
"이시방(李時昉)·이지항(李之恒)·이시해(李時楷)·신면(申冕)·이행진(李行進)·이이존(李以存)·이해창(李海昌)·엄정구(嚴鼎耉) 등을 서용하라."
당시 청사가 계속해서 나왔기 때문에 선조(先朝)의 실록(實錄)을 미처 편찬하지 못하였다. 이때에 와서 춘추관이 즉시 국(局)을 설치해서 일을 시작할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따랐다. 이어 대제학의 차출을 명하였다.
상이 대신과 비국의 여러 신하를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근래에 객사(客使)가 계속 나오는데, 세 칙사가 온다는 소식이 또 왔다. 백성들이 어떻게 지탱해 내겠는가. 가뭄마저 심하니 더욱 걱정스럽다."
하니, 영의정 이경여가 대답하기를,
"지방의 가뭄이 경기 지역과 같습니다. 천시(天時)와 인사(人事)가 어찌 이 지경인지 모르겠습니다. 칙사가 객관에 머물고 있는 지가 50여 일이나 되어 민력이 이미 고갈되었습니다. 앞으로의 근심이 참으로 성상의 염려하신 바와 같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삼가 보건대 성상께서 가없는 은전을 특별히 베푸시자 모두가 감격해 합니다. 그런데 그 중에 죄명은 같으나 누락된 자가 있습니다."
하고, 인하여 황감(黃㦿)의 이름을 거론하자, 상이 이르기를,
"과연 잊었다. 같이 서용하라."
하였다. 또 이시만(李時萬)의 이름을 거론하는 이가 있자, 상이 이르기를,
"그 사람은 함부로 죽인 죄를 새로 저질렀기 때문에 서용하지 않은 것이다."
하였다. 우의정 조익이 아뢰기를,
"신은 지난날 일로 인하여 망발을 하고 물러가 생각해 보니 황공하기 그지없었습니다."
하였는데, 이는 유계의 일을 지적해서 말한 것이었다. 상이 이르기를,
"이는 내가 사리에 어두워 살피지 못한 탓이다. 경에게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하였다. 경여가 아뢰기를,
"군신간은 자고로 어려운 관계입니다. 아침에는 칭찬을 받았다가도 저녁에는 엄한 견책을 받으니 참으로 탄식할 일입니다. 성상의 마음에 더욱 깊이 생각하셔야 합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요즘 사람들은 예전 사람처럼 궁중에서의 일을 말하지 않는 자가 드뭅니다. 경연에서 한 말이 한번 밖에 전파되면 비록 먼 지방의 어리석은 백성들까지도 옳다 그르다 하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원컨대 상께서는 말씀하실 때 매양 자상하고 삼가하는 마음을 간직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유념하겠다고 하였다. 경여가 아뢰기를,
"신이 선조(先朝)에 입시(入侍)한 기회에, 서용하는 명을 가려서 하시는 것을 들어서 아뢰기를 ‘비유하건대 하늘이 우로(雨露)의 혜택을 좋은 풀과 나쁜 나무를 가려서 줍니까.’ 하니, 선왕께서 답하시기를 ‘내가 그것을 모르는 것이 아니다. 선조(先朝)에는 서용하라는 명이 내려도 전조(銓曹)에서 죄과의 경중을 따져서 차례로 의망(擬望)하였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않고 서용하라는 명이 내리기만 하면 곧바로 모두 주의(注擬)하기 때문에 차라리 내 스스로의 마음으로 경중을 분별하고자 한 것이다.’ 하시기에, 신이 대답하기를 ‘신하가 죄가 있으면 벌을 주고 벌이 끝나면 의당 허물을 씻어주어 지난 잘못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 왕도 정치의 포용하는 도리인데, 그렇게 하셔야 되지 않겠습니까?’ 하자, 선왕께서 ‘정말 그렇다.’고 하셨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아침에 실록을 찬수(纂修)할 것을 청하자, 대제학을 차출하라는 하교를 내리셨습니다. 그런데 문형(文衡)의 직임은 반드시 전임자의 천거를 받아야 하는데, 지금은 전 대제학 조경(趙絅)이 죄를 받았고, 대신 중에는 영돈녕부사 김상헌만이 이 직임을 역임하였습니다. 사관을 보내서 묻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이조 판서 이시백(李時白)이 아뢰기를,
"신이 외람되게 전형의 자리에 있으나 육경(六卿)과 아경(亞卿)을 주의할 적에 언제나 사람이 없음을 걱정하여 구차스러움을 면치 못하였습니다. 전 판서 김집(金集)이 일찍이 ‘순서에 구애받지 말고 특별히 승진시켜야 한다.’고 말했는데, 이 문제를 대신에게 묻도록 하소서."
하고, 이경여가 아뢰기를,
"작상(爵賞)이 신중하지 못하여 명기(名器)가 뒤섞였다고 하는 것이 근래에 항상 하는 말들입니다. 주의할 때까지도 매양 사람이 부족함을 걱정하게 되는 것은 이조 판서의 말이 맞습니다. 그러나 덕이 있는 이에게 내리는 관작을 신하가 감히 천거할 바가 아닙니다. 오직 성상의 마음으로 가리셔야 할 뿐입니다."
하고, 또 여러 도감(都監)에 상으로 가자해 주는 폐단을 말하여 아뢰기를,
"10여 글자를 쓴 공로에도 자급을 올려주었으니, 이는 덕에 따라 명하는 뜻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덕형(李德馨)과 이항복(李恒福) 같은 이는 낭료(郞僚)로 있을 적에 선묘(宣廟)께서 이미 그들의 그릇을 아시고 차례에 구애받지 않고 승진시켜 등용하였고, 선왕조(先王朝)에는 김시양(金時讓)과 정세규(鄭世規)를 몇 년 사이에 재상의 자리에 발탁하였습니다. 이는 모두 밝은 성감(聖鑑)에 연유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을 아는 것은 자고로 어려운 것이라서 만일 명철(明哲)한 사람이 아닌 경우에는 도리어 해로움이 있게 됩니다."
하니, 상이 그렇다고 하였다. 대사간 이일상(李一相)이 아뢰기를,
"국사가 이러하니 신하의 직분과 의리로서는 의당 있는 힘을 다하여야 합니다. 그런데도 동창위(東昌尉) 권대항(權大恒)은 지난번 북경에 가는 직임을 맡게 되자 낙상(落傷)하였다 하여 염치를 무시하고 비국의 좌중에 다친 얼굴을 증거로 보이기까지 하였습니다. 파직하고 서용하지 마소서."
하니, 상이 추고하라고 하였다. 또 아뢰기를,
"영양군(嶺陽君) 이현(李儇)은 부친의 병환이 있기는 하였지만 위급한 지경은 아니었는데도 외람되게 사정(私情)을 아뢰어 결국 원행(遠行)을 면하였습니다. 파직하소서."
하였다. 여러 차례 아뢰자 따랐다.
4월 24일 정미
상이 하교하였다.
"의순 공주의 형 이준(李浚)과 이수(李洙) 두 사람에게 해조로 하여금 직(職)을 제수하게 하여 멀리 이별하는 정을 위로하게 하라."
헌부가 아뢰기를,
"정배(定配)한 죄인 노협(盧協)은 제목숨을 부지하려고 화를 국가에 전가하였습니다. 그런데 율(律)을 너무 가볍게 적용하여 정배에 그쳤습니다. 극변(極邊)에 안치하소서."
하였다. 여러번 아뢰자 따랐다. 마침내 창성부(昌城府)로 유배시켰다.
4월 26일 기유
비변사가 아뢰기를,
"경기의 백성들은 저장해 둔 종자를 모두 요역의 대가로 바치고서 4월이 다 가는데도 파종할 계책이 없습니다. 남한 산성과 강화도에 저장해 둔 3천, 4천 석을 각읍에 나누어 주어 제때에 파종하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4월 27일 경술
이조가 아뢰기를,
"영사전(永思殿)에 친제(親祭)할 적에, 대제(大祭)인 경우, 작세(爵洗)와 관세위(盥洗位)의 집사(執事)가 있지만, 속절(俗節)과 삭망(朔望)인 경우는 이런 집사가 예문에 기재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당초 우제(虞祭)의 등록(謄錄)을 잘못 적용하였던 것입니다. 잘못된 것을 알았으니 바로잡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찬자(贊者)는 찬의(贊儀), 알자(謁者)는 인의(引儀)로서 원래 정해진 관원이 있는데, 다른 인원으로 대신하는 것도 구례가 아닙니다. 모두 《오례의(五禮儀)》에 의거해서 상정(詳定)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우의정 조익이 상소하기를,
"유계(兪棨) 등은 이미 사면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유계 등의 일을 논한 자가 어찌 유계 등보다 죄가 중하겠습니까. 남선(南銑) 등은 다만 관례에 따라 책임을 다한 것인데, 말로써 죄를 얻었으니, 실로 성상의 조정에 있어서는 안될 일입니다. 인피(引避)하는 것으로 인하여 삭직까지 한 것은 일찍이 들어보지 못한 일입니다.
그리고 조석윤(趙錫胤)은 선량하고 얌전한데다가 문학(文學)까지 겸비하였으니, 보통의 신하 대하듯이 하는 것은 온당하지 않습니다. 패초(牌招)해도 오지 않으면 파직하여야 하는 것이 근래의 관례이긴 하지만, 이는 대죄(待罪)하는 중에 있었던 일로서, 사람들이 모두 말한 것 때문에 연좌된 것이라고들 합니다. 남선 등의 삭직과 조석윤을 파직하라는 명을 다시 거두소서."
하니, 답하기를,
"상소의 말이 이러하니, 내 가상히 여긴다."
하였다.
4월 28일 신해
봉교 이후(李垕)를 보내서 대제학 천거에 대하여 영돈녕부사 김상헌에게 물었다. 당시 상헌이 양주(楊州)에 있었는데, 늙어 정신이 혼미하다는 것을 이유로 사양하였다. 상이 대신에게 의논해서 아뢰도록 명하자, 이경여 등이 상헌의 병이 낫기를 기다려서 다시 물을 것을 청하였다. 이에 다시 이후를 보내서 묻도록 했는데, 후가 돌아와서 아뢰었다.
"상헌이 ‘서울에 들어가 숙배(肅拜)하고 사은할 것이니, 그때에 시임(時任) 대신들과 상의해서 의망(擬望)하겠다.’고 하였습니다."
4월 29일 임자
평안도 가산(嘉山)에 큰 우박이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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