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일 계축
상이 영사전(永思殿)에서 삭제(朔祭)를 행하였다.
평안도 안주(安州)에 크게 우박이 내려 초목이 모두 상했다.
임담(林墰)을 예조 판서로, 이시방(李時昉)을 형조 판서로, 여이재(呂爾載)를 호조 참판 겸 동지의금으로, 이준(李浚)을 장릉 참봉(章陵參奉)으로, 이수(李洙)를 전설사 별검(典設司別檢)으로 삼았다. 이준과 이수는 곧 의순 공주(義順公主)019) 의 오빠이다.
경상도의 진사(進士) 신석형(申碩亨) 등 40여 인이 상소하기를,
"아, 고 문성공(文成公) 신(臣) 이이(李珥)와 문간공(文簡公) 신 성혼(成渾) 두 현신(賢臣)의 탄생지가 신들의 거주지와는 5백여 리나 떨어져 있고 세대 또한 오늘날과 거의 60여 년이나 차이가 나는 까닭에, 지금 세대에 그들의 전형(典刑)을 실제로 접할 길이 없고 보면, 오직 그들이 남긴 문집을 통해서 그들의 언행과 도덕을 상고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세상에 안목을 갖춘 자가 없고 보면 그 학덕(學德)의 높고 낮음과 완전하고 불완전함에 대해서는 본래 누구든지 감히 가볍게 논의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우선 유직(柳㮨)의 상소 가운데 크게 문제되는 것을 거론하여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신들이 살피건대, 이이(李珥)가 문순공(文純公) 신 이황(李滉)을 찾아가 만난 것은 무오년020) 의 일로서 이때 이이의 나이가 23세였는데, 이황이 즉시 문인 조목(趙穆)에게 글을 보내기를 ‘후생가외(後生可畏)라고 했는데, 옛성현이 나를 속이지 않았구나…….’ 하였습니다. 그 해에 이황이 이이에게 보낸 답서에 ‘나이가 늙고 기력이 약한데다 사방에서 벗을 취하여 스스로 도움이 되게 하지 못한 까닭에 늘 바라보고 기다리던 참에 두 장의 편지가 왔소. 이를 나의 약석(藥石)으로 삼기에도 채 미치지 못할 형편인데, 도리어 이 귀머거리에게 얻어 들으려 하다니 어찌된 일이오? 성인과 세대가 멀어 그 말씀이 인멸된 까닭에 이단(異端)이 진리를 어지럽힌 결과, 옛날의 총명하고 재주가 걸출한 인사들도 시종 미혹되었는데 이것이야 본래 논할 것이 없다고 하더라도, 정백자(程伯子)021) 와 장횡거(張橫渠)022) 그리고 주회암(朱晦菴)023) 등 여러 선생까지도 거기에 약간은 드나들지 않을 수가 없게끔 되었다가 곧바로 그 잘못됨을 깨달았던 것이니, 아, 천하에 큰 용기와 큰 지혜의 소유자가 아니라면 그 거센 물결을 벗어나 진리의 물줄기로 어떻게 되돌아 올 수 있겠소. 지난날 사람들의 말을 듣건대, 족하가 석씨(釋氏)의 글을 읽고 상당히 중독되었다고 하기에, 마음으로 애석하게 여긴 지 오래였소. 그런데 전일 나를 찾아왔을 때 그러한 사실을 숨기지 않고 잘못됨을 말하였고, 지금 두 편지의 취지를 보아도 또 이와 같으니, 족하는 더불어 도에 나아갈 만한 사람임을 내가 알겠소. 다만 두려운 것은 새맛이 붙기 전에 옛맛을 잊기 어렵다는 점과 오곡이 익기 전에 가라지와 피가 먼저 익지 않을까 하는 점이오.’ 하고, 또 말하기를 ‘나의 경우 처음도 그랬소만 늙어갈수록 더욱 덧없이 생애를 보내지 않을까 늘 두렵기만 한데, 훌륭한 군자를 바라는 마음이 배고프고 목마를 때보다 더하다오.’ 하였습니다. 그런데 유직 등은 이 편지의 위아래를 잘라 버리고 ‘새맛이 붙기 전에’ 이하의 네 귀절만을 거론하여, 이황이 깊이 염려하고 통렬하게 경계한 말이라고 핑계대었습니다.
그 뒤에 이황이 《성학십도(聖學十圖)》를 논정(論定)한 이이에게 답서를 보내면서 ‘인설도(仁說圖)는 심학도(心學圖) 앞에 있어야 한다는 그 견해가 매우 뛰어나오. 내가 지난해 돌아와서야 그렇게 되어야 옳다는 것을 알았는데, 보내온 글을 받고 더욱 확신하게 되어 즉시 그대로 순서를 바꾸었소.’라고 하였으니, 양현(兩賢)이 평소 학문을 하면서 계오(契悟)된 것이 이보다 클 수가 없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유직 등은 ‘털끝만큼도 계오된 바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황이 경오년에 죽었는데, 계유년에 여러 신하가 시호를 내릴 것을 청하자, 위에서는 그의 행장(行狀)이 없다는 이유로 윤허하지 않았습니다. 이때 이이가 아뢰기를 ‘이황은 일생 동안 의리의 학문에 침잠(沈潛)하였는데, 그 언론(言論)과 풍지(風旨)는 옛 명현이라도 이보다 더할 수 없습니다. 행장의 유무가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이미 죽은 현인에 대해서 그 행적(行迹)이 이미 드러나 있는데도 오히려 포숭(褒崇)을 아끼시는데, 더구나 현재의 선비들에 대해서야 어떻게 현인을 좋아하는 성의를 가지실 수 있겠습니까. 이황의 시호가 한두 해 늦더라도 크게 해로울 것은 없지만, 온 나라의 선비들이 전하께서 현인을 좋아하는 성의를 갖고 있지 않다고 의심한다면, 그 해로움이 어찌 적다고 하겠습니까…….’ 하였습니다.
신사년에 이이가 또 청하기를 ‘교화를 밝히려면 반드시 선현을 높이고 추장(推奬)하여 후학이 모범으로 삼도록 해야 합니다. 예컨대 조광조(趙光祖)는 도학(道學)을 창명(倡明)했고 이황은 이학(理學)에 침잠했으니, 먼저 종사(從祀)할 것을 윤허하시어 선비들의 소망을 진작시키는 것이 마땅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유직 등은 말하기를 ‘이황이 죽은 뒤에 이이가 모든 힘을 다하여 이황의 학문을 공격하였다.’고 하였으니, 그 말의 근거가 없는 것이 구절마다 모두 이런 식입니다.
이기변(理氣辨)에 대한 것은 이러합니다. 이황과 기대승(奇大升)의 사칠논변(四七論辨)에 대해서 이이와 성혼이 함께 주자(朱子)의 말을 가지고 강명(講明)한 바가 있었는데, 성혼은 이황의 견해를 옳다고 하고 이이는 이황의 견해를 정견(正見) 중의 한 점 누(累)라고 여겨 기대승의 편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이는 성혼에게 답서를 보내면서 ‘명언(明彦) 【기대승의 자(字).】 의 학문을 어찌 감히 퇴계와 견주겠는가. 단지 약간의 재지(才知)가 있어 우연히 그것을 알게 된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이이는 본래 주자에 대해 이론을 세우지 않고 단지 이황의 견해에 대해서만 시비를 가렸는데, 실로 아집(我執)이 없는 공정한 마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마치 본의(本義)024) 에서 정전(程傳)025) 을 쓰지 않고, 남헌(南軒)026) 이 《지언(知言)》027) 의 순수하지 못한 것을 기휘하지 않았으며, 회암(晦蓭)028) 이 구산(龜山)029) 과 연평(延平)030) 의 말을 옹호하지 않았던 경우와 꼭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유직 등은 심지어 이이의 글 가운데 ‘어떻게 주자라고 하겠는가.[何以爲朱子]’ 등의 말을 인용하여 전현(前賢)을 헐뜯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공자라고 하겠는가.[何以爲孔子]’ 등의 말도 맹자(孟子)가 공성(孔聖)을 헐뜯은 말이라고 하겠습니까. 이렇게 되면 이이만 알지 못한 것이 아니라 맹자까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맹자가 이르기를 ‘군자는 역시 인(仁)을 할 뿐이니 어찌 꼭 같아야 하겠는가.’ 하였습니다. 아, 서로 같지 않은 점이 있더라도 바로 그 속에 같은 점이 실제로 있고 보면, 두 현인이 함께 현인이 되는 데에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유직 등은 알지 못할 이야기를 억지로 지어내어 외람되게도 자격을 심사하는 말을 만들어 내었습니다. 그들이 말한 ‘이기(理氣)는 일물(一物)이며 심(心)은 곧 기(氣)’라는 등의 말은 본래 이이의 문집에는 보이지도 않는데, 오늘날 그를 공격하고 배척하는 말로 만들어 내어 후학을 속이고 상을 현혹시키려고 하였습니다만, 교묘하게 하려다가 도리어 졸렬하게 되고 말았습니다. 아, 후미진 곳은 속일 수 있다 하더라도 나라 전체를 어떻게 속일 수 있겠으며, 알지 못하는 자야 속일 수 있다 하더라도 아는 자를 어떻게 속일 수 있겠습니까.
본도(本道)의 고 판서 신(臣) 장현광(張顯光)은 근세의 대유(大儒)로서 《주역(周易)》에 조예가 깊어 사류(士類)의 추앙을 받은 지 오래입니다. 그가 지은 경위지설(經緯之說)은 이기(理氣)를 극론(極論)하면서 종횡으로 무려 수천만 언을 논했는데, 모두 이황과 다른 입장을 취하고 이이와 부합되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일찍이 후학들 중에서 그가 이황의 학문을 공격했다고 의심한 자는 아직 없었고 보면, 저 유직 등의 말이 과연 어느 곳의 사람에게서 받아 온 것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아, 이에 이르러 선현이 극도로 무고를 당했고 본도의 이름이 헐값으로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더구나 성혼의 경우는 이기를 변론한 것이 실로 이황을 위주로 한 것이니, 이 또한 이황의 견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유직 등이 이이의 학문과 동일하다고 말하면서 배척하니, 이는 더욱 말이 되지 않습니다.
또 신사년에 쓴 논학봉사(論學封事)를 취하여 공격합니다만, 신사년 봉사는 모두 궁리(窮理)와 격물(格物)에 대한 일을 강론하여 밝힌 것인데도, 다만 ‘정신을 보존하고 아낀다.[保惜精神]’는 말을 끄집어 내어 표적을 삼고 있습니다. 그들의 말이 비록 교묘하다 하더라도 그 글이 아직 남아 있으니 속일 수 없는 일로서 정말 여러 말이 필요없다고 할 것입니다.
아, 처음에 이이가 승려였다고 헐뜯으면서 ‘사마시(司馬試) 때에 알성(謁聖)을 허락하지 않았다.’고 한 것은 계미년에 올린 송응개(宋應漑)의 질투어린 계사(啓辭)이며, 성혼을 처음으로 무함하여 ‘임금을 버리고 선비를 해쳤다.’고 한 것은 이홍로(李弘老)와 정인홍(鄭仁弘)이 지어내서 모함한 이야기였습니다. 응개는 선조 대왕께서 이 때문에 친히 교서(敎書)를 지어 유배시켰습니다. 그리고 홍로와 인홍은 평소 무함한 사람이 성혼뿐만이 아니었는데, 끝내는 국가의 상형(常刑)에 복주(伏誅)되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이 무리들이 저주하기로 맹세한 하천배의 패거리에 끼어든 지 오래 되었다고 할 것입니다. 선비의 신분으로서 옛날 하던 대로 답습하는 것이 수치가 된다는 것도 모른 채, 자꾸 헛소문이라도 퍼뜨리면 사실로 인정되더라는 과거의 일만 다행으로 여기고서, 또 오늘날 다수의 세력을 동원하여 매장시키려고 하니, 그 버릇이야말로 가증스러운 것으로서 이러한 풍조는 결코 자라나게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아, 이기에 대한 변론이 똑같은데 이황의 것은 높이고 성혼의 것은 내쳤으며, 인홍 한 사람이 모두 흉악하게 참소하였는데 이황을 무고한 것은 배격하고 성혼을 무고한 것은 조술(祖述)하였습니다. 아, 천하에 어떻게 똑같은 변론에 대해서 누구는 높이고 누구는 물리치는 논의가 있을 수 있으며, 또 다 같이 무고하였는데 어떤 것은 배격하고 어떤 것은 조술하는 시비(是非)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아, 선현의 언행과 사적이 어떠했는지 잘 상고하지 않고 함부로 말한다면 어찌 이이와 성혼만 모르는 것이 되겠습니까. 실은 이황까지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어찌 이이와 성혼만 무고하는 것이 되겠습니까. 실은 이황까지도 무고하는 것입니다. 만약 공평한 자에게 이를 논하게 한다면, 높이는 것이 이로우면 높이고 배척하는 것이 이로우면 배척하고, 배격하는 것이 이로우면 배격하고 조술하는 것이 이로우면 조술하여 본래 주견도 없이 남의 말과 이로운 것만 따른다고 말하지 않겠습니까.
삼가 생각건대 임금은 하늘과 같습니다. 한서(寒暑)의 차서(次序)가 어긋날 때도 있지만 역시 천도는 지극히 공정하지 않음이 없는 것처럼 임금이 특히 기뻐하고 유감으로 생각하는 것은 아랫백성들이 면할 수 없는 일이라 하겠습니다. 다만 신민(臣民)이 바라는 것은 오직 해와 달의 밝음으로 어둡게 숨겨진 원통함이 없어졌으면 하는 것이며, 사대부가 논하는 것은 단지 가능한 한 공명한 견해를 드러내어 치우치고 가려진 폐단을 제거했으면 하는 것입니다.
시험삼아 고 문정공(文正公) 신 조광조(趙光祖)의 일을 들어서 밝혀보겠습니다. 그가 등용되자 온 나라 안이 다 기대하여 마지않았음에도 유독 미워한 것은 소인배들이었으며, 그가 화를 당하게 되었을 때 온 나라 안이 모두 원통하게 여겼건만 유독 다행이라고 여긴 자는 간신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신원(伸冤)해 주는 은총과 시호를 추증하는 포장과 문묘에 종사(從祀)하는 은전이 역대 임금으로부터 잇달아 나왔으므로 그 당시나 후세에서 그 효성어린 처사를 우러러보고 잘 조술한 것을 더욱 칭송하였습니다.
지금 이 두 현인에 대해서도 인조 대왕께서 즉위하신 초기에 유신(儒臣)과 사림(士林) 공동의 요청을 들어서 이미 신설(伸雪)하고 증시(贈諡)하였고 보면, 선조(宣祖)를 잘 조술한 일을 모두가 칭송해 마지않는 터입니다. 그런데도 유직 등은 인조 대왕께서 을해년에 내린 한때의 어비(御批)를 내세워 상의 귀를 번거롭게 하면서 사사로운 뜻을 이루려 하고 있는데, 몰아쳐서 핍박하는 모양이야말로 마치 여염집 필부가 어떠한 조처를 취했을 때 그 아들에게 감히 이를 변경할 수 없다고 책망하는 것처럼 하고 있으니, 이것이 무슨 도리이며, 무슨 기상(氣象)입니까.
더구나 을해년에 비답을 내리면서 허물이 있다고 하신 말씀은 인조 대왕께서 경연에서 연신(筵臣)과 진솔하게 대화하시는 가운데 이미 그 잘못을 깨달으셨고, 고 상신(相臣) 최명길(崔鳴吉)의 스스로 발명하는 소에 대해 비답을 내리신 뒤로는 나라 전체가 귀를 기울여서 들었을 뿐만이 아니고 본도에서 가장 상세히 들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또 유직 등이 낭관이 되어 그것을 근거로 원용하였고 보면 너무도 그 태도가 간사하고 외람되다 할 것이니, 비단 오늘날의 죄인이 되는 것만이 아닙니다.
대개 우리 나라에서 이황은 주돈이(周敦頤)와 정자(程子)에 비유되고 이이와 성혼은 이황에 대해 주희와 장식에 비유됩니다. 후학이 주돈이와 정자는 받들면서 주희와 장식을 배척하는 것은 실로 도리가 아닙니다. 그런데도 시기하고 편벽된 풍조의 결과로 번번이 이황을 편들고 이이와 성혼을 배척하려고 합니다. 그 단서와 결말을 따져 물어보지도 않고 비슷하지도 않은 말을 억지로 만들면서 흉악하게 참소한 무리들의 후예에 같이 뒤섞이게 된다는 것을 돌아보지도 않으니, 아, 또한 괴이한 일입니다.
아, 비록 보통 사람들이 집에서 나누는 대화나 한가로운 이야기라도 반드시 증거가 있어야 믿으려고 하는 것이 일반 사람들의 상식입니다. 그런데 더구나 선현과 관계된 일로 온 도를 대표하여 군부에게 고하면서 이렇듯 믿지 못할 근거없는 말을 하다니, 정말 차마 듣지 못하겠습니다. 이것이 비록 한두 사람의 주장에서 나왔다 하더라도 도(道) 전체 선비들을 규합시켜 아무도 다른 의견을 내놓지 못하게 하고 온통 그 와중에 휩쓸리게 하여 진정되지 못하게 하였고 보면 영남 사림의 크나큰 수치가 아니겠습니까. 세도(世道)가 이 지경에 이르고 보니 진실로 한심합니다. 신들이 오늘날 말씀드리는 것이야말로 부득이한 데서 나온 것입니다. 성명께서는 너그럽게 살펴주소서."
하니, 답하기를,
"소를 보고 잘 알 았다. 그대들이 서로 배척하여 끝없이 분란을 조성하고 있는데, 내가 보기에는 까마귀의 자웅을 가리는 것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
하였다.
5월 2일 갑인
평안 감사 심지원(沈之源)이 치계하였다.
"4월 28일 청나라 사신 3인이 북경(北京)으로부터 와서 압록강을 건넜는데, 호위 대장이라는 자가 군졸을 이끌고 강 연안에 주둔해 있다고 합니다."
상이 표피(豹皮) 8장과 녹비(鹿皮) 15장을 호조에 내려 객사(客使)의 행차에 보태 쓰도록 하고 외방에 분정(分定)된 숫자를 감하도록 하였다.
간원이 아뢰기를,
"호조 참판 여이재(呂爾載)는 지난날 남쪽 고을을 맡았을 적에도 사람들의 비난이 많았고 북경에 사신으로 갔을 때도 조심스럽게 행동하지 못했습니다. 전일 지신사(知申事)031) 에 임명된 것이 시망(時望) 밖에 갑자기 나온 처사라서 대간의 비평이 일어나려고 하자 항장(抗章)을 올리면서 사직하여 체직되었는데, 소의 내용이 대부분 불평하는 것이었습니다. 제멋대로 성내면서 염치를 잊고 공의를 업신여긴 것이야말로 가증스럽기 짝이 없으니 파직하고 서용하지 마소서.
도승지의 직임이야말로 얼마나 중합니까. 그런데 이재가 지난번 이 직임에 임명된 뒤 대간의 논박이 있다는 말을 듣고 먼저 자아비판하고 물러났는데도 곧 이어 후정(後政)에서 다시 의망(擬望)하였으며, 하루 사이에 다른 직임에 의망한 것이 두세 번이나 되었습니다. 이조의 당상과 낭청을 중하게 추고하소서."
하니, 따르지 않았다.
이재는 재상의 반열에 뛰어오르기는 했지만 본시 인망(人望)이 없었다. 이때 조정이 문무 당상을 빈청(賓廳)에 모아 조정 사대부의 딸 중에서 간택하여 청나라에 보내려고 하였는데, 문관 재신(宰臣) 중에서는 민형남(閔馨男)·허계(許啓)·여이재만 사실대로 대답하였다. 이재가 도승지가 되었을 때 대사간 이일상(李一相)이 논핵하려 한다는 말을 듣고 드디어 소를 올려 해직을 청하였는데, 그 소에 "친지들이 허가하려는 기색이 적고 시류(時流)가 많이들 비난합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한 가지 설로는, 처녀를 선택하던 날 사실대로 대답했다는 이유로 신을 제일 비방했다고 하니, 아, 사람의 말이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단 말입니까. 신의 처지가 불행하기만 한데 임금에게 아첨했다는 죄목을 또 신에게 가한다면, 이밖의 얼토당토않은 비난이야 따라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이 소가 나가자 중외(中外)가 소란했는데, 얼마 안 되어 다시 도승지에 의망되었다가 마침내 호부 겸 의금에 제수되었다. 일상이 마침내 동료들과 더불어 탄핵하며 누차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5월 3일 을묘
연접 도감(延接都監)이 아뢰기를,
"칙사가 관소에 머물러 있을 때 및 혼례 도감(婚禮都監)이 쓴 철(鐵) 2천여 근과 숯[炭] 9 백여 석을 모두 선공감에 책임지웠는데, 그것만도 이미 1년치 항공(恒貢)의 수준을 뛰어넘었습니다. 그런데 더구나 앞으로 칙사가 또 올텐데, 그때 써야 할 비용은 더욱 마련해 낼 길이 없으니, 훈련 도감과 군기시에 저축된 철과 숯을 적당히 옮겨 쓰도록 하고 뒤에 값을 지불해 주도록 하소서."
하니, 하교하기를,
"도감의 당상들이 물력(物力)이 고갈될 것은 생각하지 않고 곤욕을 당할 일만 걱정한 나머지 한결같이 요청한 대로 따른 결과, 철과 숯을 이처럼 많이 사용했으니 한심스럽기 그지없다. 그리고 군기시와 훈련 도감은 객사(客使)의 비용을 대려고 설치한 것이 아니니, 또한 가져다 쓰지 말도록 하라."
하고, 이어 추고하도록 명하였다.
하교하였다.
"근래 외방의 노인 현황을 개록(開錄)한 계사를 보건대, 1백 세 가까이 되는 자가 상당히 많았고 1백 세 되는 자도 간혹 있었는데, 그야말로 세간에서 보기 드물게 장수한 노인들이라 하겠다. 그 자제되는 자들의 기뻐하면서도 두려워하는 마음이 필시 절실할텐데, 나만은 그렇지 못하니 가슴을 에는 듯하다. 노인들에게 이미 작위를 내려 주었다 하더라도, 해도 감사로 하여금 먹을 것과 옷감을 넉넉히 주도록 하여 나의 뜻을 보이라."
예조가 아뢰기를,
"연주(練主)를 개제(改題)할 시기가 이미 임박하였습니다. 《오례의(五禮儀)》 연제의(練祭儀)에는 ‘모호(某號) 대왕이라고 개제한다.’고만 되어 있는데, 종묘 열성(列聖)의 신주(神主) 경우에는 ‘모조(某朝) 【유명(有明)을 말함.】 증시(贈諡) 모호(某號) 【태조의 경우 강헌(康獻)이라고 쓰는 것.】 모조(某祖) 【태조의 경우 태조라고 쓰는 것.】 모휘호(某徽號) 대왕’이라고 쓰며, 각 제사의 축문(祝文)에는 ‘모조 증시(某朝贈諡)’ 네 글자를 빼고 ‘모조 모시호 모휘호 대왕’ 이라고만 쓰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은 어떤 예를 따라 개제(改題)해야 합니까? 중대한 일이니, 대신에게 의논하소서."
하니, 하교하기를,
"해방 승지가 대신에게 밀의(密議)하라."
하였는데, 이는 우주(虞主)의 경우엔 휘호만 쓰지만 연주(練主)부터는 중조(中朝)의 증시 및 묘호(廟號)를 쓰는 것이 예(禮)이기 때문이었다. 예방 승지 이래(李䅘)가 대신에게 수의(收議)한 뒤 밀봉(密封)해서 들였다. 영의정 이경여(李敬輿)가 아뢰기를,
"생각건대 우리 인조 대왕께서는 불행히도 재난의 운세를 만나 외로운 성에 파월(播越)하셨으나 시종일관 의리를 지키셨습니다. 급기야 국가의 운명이 이미 결정되자 낙천적인 인자함으로 종사와 생민을 위해 계책을 세우셨으나 중국을 향한 정성이야 어찌 하루라도 잊은 적이 있으셨겠습니까. 신이 일찍이 탑전에 입시하여 황명(皇明)에 대한 말을 언급하자 오열하며 제대로 말씀을 하지도 못하셨는데, 신이 지금도 생각하노라면 나도 모르게 간장이 찢어지는 듯합니다.
오늘날 천하의 사세가 지난날과는 딴판이니, 연주(練主)를 개제(改題)할 때 청국이 준 시호를 써야 될 것인지의 여부를 의논드리기가 실로 어렵습니다. 다만 앞으로 부묘(祔廟)한 뒤를 생각해 보건대, 열성(列聖)의 혼이 오르내리고 엄숙하기 그지없는 청묘(淸廟) 안에 소목(昭穆)의 엄연한 순서에 따라 보좌(寶座)가 나란히 배열되어 있는데, 신위(神位)에 쓰인 시호 위의 두 글자가 유독 차이가 난다면 영욕과 중대한 관련이 있는 만큼 실로 미안한 일일뿐더러, 13년 동안 와신상담했던 선조(先朝)의 본심과도 어긋날테니, 권도(權道)를 쓰는 것이 합당하겠습니다. 그러나 우리 나라의 인심이 좋지 못하여, 이익이 되는 것이면 크고 작은 일을 막론하고 반드시 저쪽에 누설시키는데, 이 일이 혹시라도 탄로날 경우 국가의 존망과 직결될 것입니다. 신의 얕은 식견으로 감히 자신의 견해만 옳다고 할 수 없으니, 다른 대신 및 사려가 깊은 2, 3명의 중신에게 은밀히 자문을 구하시어 의리를 참작하고 충분히 강구하여 처리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고, 우의정 조익(趙翼)은 아뢰기를,
"이처럼 막중한 일을 쉽사리 단정지을 수는 없으니, 충분히 생각한 뒤에 아뢰겠습니다."
하였는데, 이날 조익이 밀계하기를,
"선조(先朝)에서 이미 썼던 방식대로 쓰는 것이야말로 그만둘 수 없는 일입니다. 다만 나라 안의 일이 대부분 비밀이 지켜지지 않는데, 혹시라도 누설되지 않을까 하는 이 점을 또한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신의 망령된 의견을 근거로 결정할 수 있겠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친히 믿는 중신에게 다시 자문을 구하시어 처리하소서."
하였다. 의논이 들어오자 상이 제주관(題主官)인 좌부승지 신유(申濡)를 인견하였다. 사관(史官) 1인만 입시하고 환관은 모두 물리치도록 명한 뒤에, 이어 영상과 우상의 밀계를 보이면서 이르기를,
"대신의 의견이 이와 같은데 내가 상의해 보고 싶었으나 혹시라도 누설될까 염려되어 하지 못했다. 승지는 제주(題主)를 담당했으니 모쪼록 이 뜻을 알고 쓰도록 하라. 일찍이 지문(誌文) 중에 나오는 말 때문에 염려했는데, 이번은 지문의 경우와는 다르니, 입을 조심하도록 하라."
하니, 【장릉(長陵)의 지문 가운데 청국에 저촉되는 말이 많았고 또 순치(順治)의 연호를 쓰지 않았기 때문에 청나라 사신이 왔을 때 상이 이 점을 무척 걱정하였다.】 대답하기를,
"신이 어찌 감히 명하신 대로 하지 않겠습니까. 다만 글자 수는 어느 정도로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묘호와 휘호만 쓰고, 글자 모양은 권도(權道)를 써서 작게 쓰도록 하라."
하였다. 상이 신유에게 이르기를,
"근래 객사(客使)가 잇달아 왕래하는 바람에 3도가 특히 혹독하게 피해를 받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관서(關西)가 더욱 그러하다. 이런 때인데도 수령들이 일이 있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고 공무를 빙자하여 사욕을 채우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니, 암행 어사를 나눠 파견하여 그들을 적발해 중하게 다스리는 일이 필수적이다. 그런데 나는 사람을 알아보는 식견이 없어서 어떤 사람을 보내야 할지 모르겠다. 시종 중에 어사 자격이 있는 자를 대신으로 하여금 넉넉히 가려 아뢰게 함으로써 선택해 보낼 수 있도록 하라."
하니, 【그 뒤에 영의정 이경여는 홍명하(洪命夏)·조복양(趙復陽)·김휘(金徽)·김좌명(金佐明)·김시진(金始振)을 천거하였고, 우의정 조익은 홍명하·홍처량(洪處亮)·조한영(曺漢英)·김좌명·이경철(李慶徹)·임의백(任義伯)·김시진을 천거하였다.】 신유가 아뢰기를,
"어사를 보내면 수령이야 단속되겠습니다만, 현재 객사(客使)가 서울에 있는데다가 한창 농사 일이 바쁜 이때에 어사를 나누어 파견하여 사행(使行)과 겹치게 할 경우, 탐오한 수령들이야 본디 말할 것도 없지만 잘 다스리는 수령들까지도 수족을 놀릴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전일 어사를 보냈을 때에 수령을 너무나 많이 교체시켰는데, 그들을 영송(迎送)하는 폐단이 어찌 탐관오리가 침탈하는 폐단보다 못했겠습니까. 이것도 백성에게 피해를 끼치는 일이니, 원하건대 상께서 헤아려 조처하소서."
하자, 상이 옳게 여겼다.
5월 4일 병진
상이 하교하였다.
"지난번 피물(皮物)을 해조에 내렸는데 내탕고의 저축이 얼마 되지 않아 수량이 매우 적었기 때문에 늘 마음속으로 겸연쩍게 생각하였다. 지금 경상 병영에서 올린 것을 보건대, 호피(虎皮)와 표피(豹皮)가 있으니, 해조로 하여금 객사(客使)의 수요에 보충해 쓰도록 하라."
5월 5일 정사
박서(朴遾)를 대사헌으로, 조윤석(趙胤錫)을 귀후서 별제(歸厚署別提)로 삼았다. 조윤석은 고 국구(國舅) 조창원(趙昌遠)의 아들이다.
서울에 거주하는 노인 중에 90세 이상에게는 미곡 1석과 면포(綿布) 2필을 내리고 1백세인 자에게는 미곡 2석과 면포 3필을 내리도록 명하였다.
상이 예조에 하교하기를,
"연제(練祭)를 행하는 날에 세자와 공주가 변복(變服)하는 절목(節目)이 왜 없는가?"
하였는데, 예조가 회계하기를,
"왕세자와 공주는 모두 나이가 어리기 때문에 처음부터 복제(服制)를 의정(議定)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왕세자의 경우만은 3년이 지나기 전까지는 서연(書筵)의 복색을 소복(素服)으로 정한 이상 지금도 의당 변제(變除)할 일이 없는데, 연제를 행하는 날 소복 차림으로 시민당(時敏堂)에 나아가 의례(儀例)대로 망곡(望哭)하는 것이 마땅하겠기에, 이렇게 계하(啓下)했던 것이었습니다."
하니, 알았다고 답하였다.
5월 6일 무오
영돈녕부사 김상헌(金尙憲)이 양주(楊州)에서 들어오고, 전 판서 김집(金集)이 연산(連山)에서 들어왔는데, 연제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5월 7일 기미
우의정 조익이 상차하기를,
"삼가 살피건대 《가례(家禮)》 소상조(小祥條) 진연복(陳練服) 주(註)에 ‘남자는 연관(練冠)을 쓰고 수질(首絰)·부판(負版)·벽령(辟領)·최(衰)를 제거한다.’ 하였고, 구준(丘濬)의 의절(儀節)에는 ‘복문(服問)032) 에 이르기를 「삼년상의 경우, 연제(練祭)를 지낸 뒤에는 공최(功衰)033) 를 입는다.」 하였고, 잡기(雜記)034) 의 「부모상에도 공최를 입는다.」고 한 귀절의 주에 「삼년상을 지내면서 연제를 행한 뒤에 입는 최복(衰服)은 승(升)035) 의 수가 대공(大功)과 같기 때문에 공최라고 하는 것이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소상(小祥) 때에 따로 최복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 이제 헤아려 보건대 관은 조금 고운 마포(麻布)로 만들고, 복장은 일체 대공의 최복과 같이 하되 포(布)는 조금 거친 마포로 해야 될 듯하다.’고 하였습니다.
위의 주장을 살펴보건대 소상복에는 숙포(熟布)036) 로 최복을 만들어야 마땅하겠습니다만, 신이 요즈음 이모저모로 상고하고 검토해 본 결과 그렇지 않으리라는 의심이 들었습니다. 대체로 위에 인용한 복문과 잡기의 공최에 대한 글을 살펴보건대, 소상에 별도의 최복이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 주에는 승(升)의 수가 대공과 같다는 점만 언급했지 연숙(練熟)한 포(布)를 써야 한다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이를 보건대 연제를 지낸 후의 최복은 그 승의 수가 연제를 지내기 전과 비교해서 촘촘하기는 하지만, 포 자체는 표백하지 않는 생포(生布)를 그대로 쓰는 것인 듯합니다.
또 단궁(檀弓)037) 을 상고하건대 ‘연제를 지낸 뒤에는 황색으로 안을 받치고 적색으로 선을 두른다.[練後黃裏縓緣]’고 한 귀절의 소(疏)에 ‘소상이 되면 연관(練冠)과 연중의(練中衣)를 착용하기 때문에 소상을 연이라고 하는 것이다. 연의(練衣)라는 것은 연(練)038) 으로 중의(中衣)를 만든 것이고, 황리(黃裏)라는 것은 황색으로 중의의 안감을 삼는 것이다. 정복(正服)은 변할 수 없지만 중의는 정복이 아니기 때문에 최복의 형식만 빌리는 것이다. 전(縓)은 옅은 적색이고, 정복은 최복을 말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보면 소상 때에는 관과 중의만 연사(練絲)로 하고 최복은 연사로 하지 않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의절》의 이른바 ‘소상에 별도의 최복이 있다.’고 한 말은 옳지만, ‘숙포(熟布)로 최복을 만든다.’고 한 말은 그렇지 않을 듯합니다.
삼가 《오례의(五禮儀)》를 살펴 보건대 ‘소상복에 연관(練冠)만 쓰지 최복은 변하지 않는다.’ 하였고, 선왕조의 《등록(謄錄)》에도 모두 이 제도를 쓰고 있는데, 이는 대체로 《가례》의 소상조를 적용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지금 공사 간의 모든 예(禮)에 《가례》를 적용하고 있으니, 이에 의거하여 행하는 것이 본래 당연하긴 합니다. 그러나 예는 절문(節文)이 있는 것으로서, 옛사람들이 예를 만든 본래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예기(禮記)》에 이르기를 ‘상사(喪事)는 갈수록 낫게 하지, 못하게 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가벼운 복(服)으로 바꿔 입게 되는 것이다.’ 하였는데, 간전(間傳)039) 의 글을 보건대 ‘참최(斬衰)의 포는 처음엔 3승으로 했다가 우제(虞祭)와 졸곡(卒哭)이 지나면 성포(成布)040) 6승으로 한다.’ 하였고, 복문과 잡기에 의거하건대 ‘소상이 지난 뒤에 포의 승수(升數)는 대공복(大功服)과 같다. 그런데 대공복의 경우 강복(降服)은 7승이고 정복(正服)은 8승이니, 이 소상의 경우는 7승으로 하게 된다. 그리고 대상(大祥) 때에 흰 마포(麻布)는 15승짜리로 하고 심의(深衣)는 마(麻)로 하는데, 담제(禫祭) 때 섬(纖)041) 을 입는 것은 곧 길복(吉服)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옛제도에 의거하건대 초상 때부터 복을 벗을 때까지 점차 변복하는 것이 이와 같았습니다. 그런데 《가례》에 변제(變制)에 대한 사항이 없는데, 이 점에 대해서는 내용이 불충실한 듯싶습니다. 인주(人主)가 행하는 예는 온 나라의 의칙(儀則)이 되는 만큼, 이 한 절목은 마땅히 옛제도에 의거하여 연포관(練布冠)을 만들고 또 연중의(練中衣)와 최복을 만들되 약간 촘촘한 생포(生布)로 만들어야만 점차 변복해 가는 옛사람의 도에 합치되리라 여겨집니다. 그리고 상으로부터 인평 대군(麟坪大君)까지의 복은 마땅히 이와 같아야 되고 친상(親喪)을 당한 온 나라 사람들도 이 제도를 따라야 하겠습니다만, 백관의 복제(服制)의 경우는 본래 옛제도를 따른 것이 아니라 그저 후세의 조복(朝服)에 맞추어 포(布)로 만든 것인 만큼 꼭 바꿀 필요없이 옛날 그대로 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삼가 원하건대 예관으로 하여금 다시 상고하여 품처(稟處)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그 차자를 예조에 내리니, 예조가 대신 및 유신(儒臣)에게 의논할 것을 청하였다. 영의정 이경여가 아뢰기를,
"신은 본래 예학(禮學)에 어두운데, 어찌 감히 예경(禮經)의 남긴 뜻을 강구하여 스스로 외람되다는 비난을 자초하겠습니까."
하고, 영돈녕부사 김상헌(金尙憲)이 아뢰기를,
"본래 예학에 어두운데다가 나이들어 정신이 혼미하니, 이미 정해진 국조(國朝)의 제도에 대해서 감히 경솔하게 의논드리지 못하겠습니다."
하고, 전 판서 김집(金集)이 아뢰기를,
"정복(正服)을 바꾸지 않고 중의(中衣)만 연(練)으로 한다는 것은 《예기》의 주에 나오고, 연제 때 대공포(大功布)로 복을 만든다고 한 것은 《의례경전통해(儀禮經典通解)》에 나오는데, 통해는 곧 황면재(黃勉齋)042) 가 직접 주자의 지시를 받아 찬정(撰定)한 책인 만큼 그 말이야말로 정론(正論)이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국가에 이미 예전부터 행해온 제도가 있고 원로들도 저처럼 의논을 드리고 있으니, 오직 상께서 재결하시기에 달렸습니다."
하니, 상이 의논대로 하라고 명하였다.
좌부승지 신유(申濡)가 아뢰기를,
"제주(題主)할 때 국호와 시호를 쓰지 말아야 할지 아직 명백하게 결정이 나지 않았는데, 다시 하교해 주셔야만 쓸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대신과 예관에게도 상세히 알려야 하겠기에 감히 품합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묘호와 휘호만 쓰고 국호와 시호는 쓰지 말라. 대신과 예관에게는 그대가 가서 밀유(密諭)하라."
하였다.
5월 8일 경신
상이 영사전(永思殿)에서 연제(練祭)를 행하였다.
5월 9일 신유
영돈녕부사 김상헌이 상소하여 돌아가기를 청하였는데, 그 소의 대략에,
"요즈음 또 형세상 머물러 있을 수 없는 점이 있습니다. 안팎으로 조종하면서 드러내놓고 행동으로 옮길 뜻을 보이고 있는데, 여전히 머뭇거린다면 앞으로 필시 조정에까지 욕을 끼칠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경의 소장을 살펴 보았는데 참으로 섭섭하다. 경에게 임기응변하는 방법이 없지도 않을텐데, 어찌 이처럼 무턱대고 떠나려 하는가. 모쪼록 나의 뜻을 새기도록 하라."
하였다. 【당시 청나라 사신이 올 예정이었기 때문에 이렇게 상소한 것이다.】
【태백산사고본】 4책 4권 6장 B면【국편영인본】 35책 42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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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판서 김집(金集)도 상소하여 돌아가기를 청하였는데, 그 소의 대략에,
"뜻밖의 화를 이미 당하게 되었는데 말끔히 풀리게 된 것이야말로 모두 시종일관 돌보아 주신 상의 은혜 덕분이었습니다. 날씨가 따뜻해지면 올라오라는 분부를 뼛골에 새기고 있었습니다만, 소란스러운 상황에서 처신하기가 불편하여 머뭇거리고 있던 차에 국상(國祥)이 박두해 왔으므로 지팡이를 끌고 성에 들어와 곡반(哭班)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얼마 남지 않은 목숨으로 서울에 오래 머물러 있을 수 없기에 대궐을 바라보며 한없이 눈물만 흘릴 따름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경의 소장을 살펴 보았는데 내 마음이 섭섭하다. 가까운 궐하에서 끝내 서로 만나보지도 못하고 떠난다면, 이 뒤로 생각만 더 간절해질 것이다. 내가 보고 싶으니 경은 살펴서 하도록 하라."
하였다. 비답이 내리기 전에 김집이 이미 떠났는데, 상소에서 말한 뜻밖의 화라는 것은 청나라 사람들이 사문(査問)했을 때의 일을 가리킨 것이었다.
정원이 예문관으로 하여금 김상헌에게 가서 대제학의 천거를 물어오게 하도록 청하니, 따랐다. 상헌이 아뢰기를,
"2품 이상에는 이 직책에 어울리는 자가 거의 없는데, 한두 명이 있다 하더라도 죄를 받고 있거나 늙고 병들었습니다. 이외에 품질(品秩)이 미달되고 현재 파산(罷散) 중에 있는 자가 있긴 합니다만, 감히 곧장 천거하지는 못하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품질이 미달된 것은 어떨지 몰라도 파산된 자라면 사체상 타당치 못하다."
하였다. 당시 조석윤(趙錫胤)이 부제학의 신분으로 좌파(坐罷)된 상황에서 아직 2품에 오르지 못했었는데, 상헌이 석윤을 천거하고 싶었기 때문에 이렇게 청한 것이다.
5월 10일 임술
홍청도(洪淸道) 회덕현(懷德縣)에 청색·백색·흑색 두꺼비들이 봇도랑에 모여 며칠 동안이나 뛰어오르며 서로 싸웠다.
이조 판서 이시백(李時白)이 상차하기를,
"호조 참판 여이재(呂爾載)에 대해서는 신만 그 인물됨을 잘 아는 것이 아닙니다. 남쪽 고을에서 임무를 수행했을 당시의 공덕을 기리는 비(碑)가 아직도 남아 있고, 북경에 사신으로 갔을 때도 염근(廉謹)하다는 칭찬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일찍부터 명로(名路)에 오르고 누차 은대(銀臺)043) 의 경력을 쌓았는데, 병술년에 이르러 처음으로 지신(知申)044) 에 의망(擬望)됐고 보면, 이는 관례에 따른 의망으로서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이번의 대평(臺評)은 필시 이유가 있겠습니다만, 신이 치우치게 사정(私情)을 썼다고 한 것은 신의 본심을 모르고 한 말인 듯합니다. 신은 이재와 사돈간인데, 만약 이것을 가지고 신의 죄안(罪案)으로 삼는다면, 신은 이것보다 더 큰 죄들을 갖고 있습니다. 신의 동생 이시방(李時昉)을 추부(秋部)045) 에 의망했고, 매부 김경여(金慶餘)를 은대에 의망했는가 하면, 지금의 대사간도 신의 종제(宗弟)입니다. 이 얼마나 치우치게 사정을 썼다고 배척받아야 할 죄들입니까. 그런데도 유독 먼 사돈 관계에 있는 사람만 적용하고, 가까운 동생이나 매부·종제는 적용하지 않는단 말입니까.
아무리 일가 친척이라 하더라도 일단 당상에 올랐으면 피혐하지 않게끔 법전에 실려 있는데, 더구나 원래 피혐할 이유가 없는 이재의 경우이겠습니까. 그리고 그가 금오(金吾)046) 와 지부(地部)047) 의 경력을 갖고 있는데, 종2품 중에서 아무 탈이 없는 자가 또한 적었던 상황에서 그를 잇달아 의망하게 된 것은 형세상 어쩔 수 없는 일이었고, 또 한 정사(政事)에서 거듭 의망하는 것은 전례가 있는 일로서 신이 창시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또 이것을 가지고 신을 죄주려 하다니, 신의 죄가 어쩌면 그리도 많단 말입니까. 그 의도가 무엇인지 알 수는 없지만, 너무도 심하게 논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차자를 살펴보고 사직하려는 뜻을 잘 알았다. 대간의 발언은 홧김에 나온 것으로서 매우 아름답지 못한 일이라는 것을 진작부터 잘 알고 있다. 경이 번거롭게 따질 것이 있겠는가. 굳이 사피하지 말고 마음을 안정시켜 공무를 행하라."
하였다.
5월 11일 계해
오준(吳竣)을 예조 판서로, 임담(林墰)을 대사헌으로, 박서(朴遾)를 도승지로, 홍명하(洪命夏)를 교리로, 김좌명(金佐明)을 수찬으로 삼았다.
대사간 이일상(李一相)이 인피(引避)하여 아뢰기를,
"신이 삼가 이조 판서 이시백의 차자에 대한 비답을 보건대, 대간의 말은 홧김에 나온 것이라고 분부하셨으므로 신은 두려움을 금치 못하였습니다. 이어 이시백의 차자를 보건대, 마치 여이재(呂爾載)를 위하여 입증해 주려는 것처럼 장황하게 공척(攻斥)하였으므로 신은 홀로 개탄하였습니다.
이재가 느닷없이 청반(淸班)의 높은 직위에 뛰어 올랐을 때, 공의(公議)에 인정을 받지 못한 이유가 실로 과거에 있었던 비방에 기인한 것이었고 보면, 전상(銓相)048) 이 차자 가운데에서 한 말에 대해 신은 참으로 가소롭게 여기는 바입니다. 북경에서 판매(販買)했다는 비방이나 남쪽 고을에서 실어 날랐다는 이야기들이 파다하게 전파되었는데, 전장은 사돈 관계에 있기 때문에 유독 듣지 못했다는 말입니까.
신은 과연 시백에게 종제(從弟)가 됩니다. 따라서 어렸을 때부터 그의 마음을 잘 알고 있는데, 평소 염간(廉簡)하고 충실한 것에 대해서는 이의가 있을 수 없습니다. 다만 사람들의 말을 과신하여 후하게 해 주려 한 나머지, 주의(注擬)할 때에 물의가 어떠한지를 전연 살피지 않았으니, 치우치게 사정(私情)에 이끌렸다는 비난을 어떻게 면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차자에서 동생이니 매부니 종제니 하고 거론한 말은 모두 상대방을 난처하게 하는 것들로서 신으로 하여금 그 사이에서 말하기 곤란하게 하는 점이 있다는 것은 성명께서 이미 통촉하셨을 테니, 신이 감히 이것을 가지고 많은 말씀을 드리지 않겠습니다. 그런데 대론(臺論)이 끝나기도 전에 무턱대고 변명하며 상소하는 행동을 취하여 전에 없던 폐단을 열어 놓았는데, 이는 그저 속이 텅 비어 있는 까닭에 옆에서 선동하는 말을 너무 들어준 결과가 아니겠습니까. 거듭 그를 위해 애석하게 생각합니다.
여이재가 상소 끝 부분에서 말한 내용은 신들이 그런 의논을 한 일이 전혀 없을 뿐더러 조정에서도 대부분 그때 가서 바꿔 들이도록 말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재가 그만 사직하는 소를 올리면서 스스로 반성하는 도리는 생각지 않고 마냥 분개하는 마음만 품은 채 몰래 딴 생각을 내어 상소 끝 부분에 삽입시키면서 적나라하게 속마음을 드러내었으니, 사부(士夫)의 마음가짐이 어찌 이럴 수 있단 말입니까. 신이 형편없기는 하나 언책(言責)의 직책을 맡고 있는데, 이제 중신의 배척을 받은데다가 미안한 비답까지 내리셨으니, 신을 체직하소서."
하고, 사간 권우(權堣), 헌납 이정영(李正英), 정언 강호(姜鎬)·정인경(鄭麟卿)이 모두 이를 이유로 인피하니, 사피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일상 등이 모두 물러가 물론(物論)을 기다렸는데, 헌부가 처치하여 모두 출사(出仕)시키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5월 12일 갑자
달이 목성(木星)을 범하였다.
상이 서교(西郊)에 행행하여 청사(淸使)를 영접하고 인정전(仁政殿)에서 접견하였다. 청사가 섭정왕(攝政王)의 글을 전하였다. 그 글에,
"여러 왕과 대신이 모두 말하기를 ‘상사(喪事)가 중하기는 하나 왕께서 너무도 비통해 하시는데 국사의 중대한 면을 염두에 두셔야 하고 비위(妃位)도 오래 비워두어서는 안 됩니다.’ 하면서 누차 간청하기에, 내가 억지로라도 여러 의견을 따르기로 하였소. 그리하여 호부 상서인 종실 파흘내(巴屹乃)와 내원(內院) 태학사(太學士) 기청고(祈靑古) 등을 파견하는 때를 이용하여, 일찍이 간택하고 와서 보고하도록 하였소. 그리고 결친(結親)하는 일로 따로 관원을 보냈는데, 사홍(梭紅) 등이 와서 왕녀(王女)가 정숙하고 아름답다고 이야기하였소. 내 생각으로는 먼저 통신사를 보내고 뒤이어 육례(六禮)를 갖춘 다음에 영친(迎親)하려 하였소만, 여러 왕과 대신이 또 모두 말하기를 ‘조선은 길이 먼데 예절대로 하려고 하면 왕복하느라 시일이 지체될 듯싶습니다.’ 하기에, 내가 다시 그 의견을 따라 속히 진송(進送)하도록 하였는데, 왕께서 업신여긴다고 생각하실까 두렵소. 이에 특히 나의 뜻을 알리니 왕께서는 이해해 주시기 바라오."
하고, 또 저채(紵綵) 6백 필, 적금(赤金) 5백 냥, 은 1만 냥을 보냈는데, 상이 금과 은을 호조에 내렸다.
5월 13일 을축
김수현(金壽賢)을 대사헌으로, 김응조(金應祖)를 집의로, 유도삼(柳道三)을 정언으로 삼았다.
5월 14일 병인
비변사가 아뢰기를,
"서로(西路)의 사정이 이미 막다른 데까지 왔는데, 의주(義州)·구성(龜城)·태천(泰川) 등이 호위해 가는 장수들의 행차를 갑자기 감당하게 되었으니, 그간의 사정이 더욱 절박하리라는 것을 대체로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일찍이 경연에서 구제책을 강구하도록 하였고 보면 서로의 백성을 돌보아 주시려는 성상의 뜻이야 말로 지극하다 하겠습니다.
다만 생각건대 국가의 재정상 한계가 있어 일일이 구제하기가 참으로 어려운데, 전일 6 두(斗)씩 감해주도록 한 것만으로는 또한 부족하여 그 정도로 그만둘 수도 없는 형편입니다. 세 고을의 관향(管餉) 미곡 1천 석을 세 고을에 내 주어 본도 감사로 하여금 균등하게 분배해 주도록 하는 동시에 기타 각 고을도 헤아려 혜택을 받도록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리고 관향의 모곡(耗穀)도 5년 기한으로 면제해 주되, 각 고을의 미곡수가 차이가 나니, 또한 감사로 하여금 모곡량을 계산한 뒤 많고 적은 곳을 참작하여 잘 구획을 짓도록 함으로써 뒷날의 쓰임에 대비케 하소서.
이 일은 해서(海西)에도 똑같이 시행해야 합니다. 그런데 양서(兩西) 지방은 본래 차이가 없는데도, 사명(使命)을 지공(支供)한 비용을 원곡(元穀)에서 덜어주도록 되어 있는 것을 해서만은 유독 허락해 주지 않고 있습니다. 앞으로는 양도(兩道)를 회감(會減)049) 할 때 차이가 나게 하지 마소서.
양서의 관향은 1년치의 모곡이 수만 석을 밑돌지 않을 것인데, 그렇다면 해마다 수만 석의 곡식으로 서쪽 지방의 백성들을 구제하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감사와 수령이 이런 뜻을 제대로 받들어 새기지 못한 나머지 한 곳에 헛되이 쏟아 부어버리는 결과를 초래할 경우, 계속 대주기도 어려워 뒷감당을 잘 해낼 뾰족한 수가 없으니, 이런 뜻을 아울러 양도 감사에게 유시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현재 민생고가 극도에 달했는데, 어찌 곡식 수만 석을 아끼겠는가. 모두 그대로 시행하라. 그러나 낭비하는 폐단이 없지도 않을 테니, 모곡을 우선 1년 기한으로 나누어 주도록 하라."
하였다.
청나라가 보낸 채단(綵段)을 대군·왕자·종실·부마·대신·훈신·근신·혼례 도감 관원 및 내관 등에게 반사(頒賜)하고, 또 하교하기를,
"반사하고 남은 각색(各色) 단(段) 3백 30필을 해조에 내리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채단 40필과 은 1천 냥을 금림군(錦林君) 이개윤(李愷胤)에게 주어라."
하였다.
정원이 망제(望祭)를 섭행(攝行)시키도록 청하니, 따르지 않았다. 재계(再啓)하니, 답하였다.
"계사(啓辭)의 뜻이 간절하기는 하다만, 내 몸에 병도 없는데 제사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어찌 마음이 편하겠는가."
5월 15일 정묘
상이 영사전(永思殿)에서 망제를 행하였다.
상이 안에서 장인(匠人)을 불러 수차(水車) 한 채를 만들게 한 뒤 비국에 내주며 하교하기를,
"과거 연경(燕京)과 심양(瀋陽)으로 통하는 길을 가다가 논농사에 쓰이는 기구를 자세히 관찰하였는데, 관개용(灌漑用)으로는 수차가 제일이었다. 그런데 우리 나라는 이 방법을 전혀 모른 나머지, 바로 옆에 콸콸 흐르는 물이 있어도 지세가 조금 높기만 하면 그저 말라 죽어가는 것만 바라볼 뿐 어찌할 줄을 모르니, 정말 개탄할 일이다. 농사는 바로 국가의 대본(大本)인데 그 도구를 또 이렇듯 이용할 줄을 모르니 참으로 걱정스럽다. 이제 공장(工匠)으로 하여금 그 제도대로 만들어 내게 하였는데, 묘당이 편리한지의 여부를 잘 살펴서, 쓸 만하거든 외방에 전해 알림으로써 조금이라도 권농(勸農)하는 데 도움이 되게 하라."
하였는데, 회계하기를,
"성상께서 이렇게 가뭄이 든 때를 당하여 특별히 백성의 일에 관심을 두시고 금중(禁中)에서 수차를 만드셨는데, 제도가 매우 정교하고 작동하는 것이 귀신같습니다. 참으로 가가호호에 설치할 경우 필시 가뭄을 방지하는 데 적지 않게 도움이 될 것입니다. 속히 유사로 하여금 그 모양대로 10개를 만들어 팔도 및 개성(開城)과 강도(江都)에 나누어 보내도록 하소서."
하니, 따랐다.
수릉관(守陵官) 이해(李澥) 등 및 제주관(題主官) 신유(申濡)에게 가자(加資)하도록 명하고, 나머지 사람들에게도 차등 있게 물품을 하사하였는데, 연제(練祭)를 행한 뒤에 내린 상전(賞典)이었다.
헌부가 아뢰기를,
"상주 목사(尙州牧使) 김종일(金宗一)은 일찍이 선조(先朝) 때 외람되게도 청반(淸班)에 몸을 담은 자로서, 신민이 복이 없어 선왕께서 승하하시자 심산 궁곡에 있는 백성들도 모두 통곡하여 슬퍼하였는데, 겨우 졸곡(卒哭)이 지나자마자 태연히 취처(娶妻)하였으니, 무식하게도 예를 망친 정상이 극에 달했습니다. 사판(仕版)에서 삭제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다시 더 자세히 듣고 처리하라."
하였다. 그 뒤에 지평 정시성(鄭始成)이 사실이 아니었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직되니, 헌부가 마침내 정론(停論)하였다.
5월 16일 무진
상이 남별궁(南別宮)에 행행하여 청사(淸使)를 보았다.
헌부가 아뢰기를,
"국가에 일이 많아 금부 당상이 유고(有故) 중이어서 오래도록 업무를 처리하지 못한 나머지 적체되어 있는 죄수가 상당히 많습니다. 그들의 억울하고 원통하게 여기는 기운이 하늘의 마음을 상하게 하였을 것인데, 더구나 이렇게 혹심한 가뭄을 당한 때이겠습니까. 속히 처결하게 하는 동시에 형조에서도 똑같이 거행하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5월 17일 기사
이후원(李厚源)을 대사헌으로, 정유(鄭攸)를 이조 정랑으로 삼았다.
정원이 아뢰기를,
"노인에게 직첩(職牒)을 주는 것은 노인을 우대하려는 뜻에서 나온 것으로서 그야말로 조정의 성전(盛典)이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요즈음 듣건대 경외(京外)의 관원이 사실대로 봉행하지 않아 나이를 속이고 외람되게 등록된 자가 상당히 많다 합니다. 해조로 하여금 제도(諸道)의 수령에게 이문(移文)하여 호적과 군안(軍案)을 직접 살피고 그 용모를 관찰하게 한 뒤, 나이를 늘려 함부로 등록된 자가 있으면 모두 도태시키도록 하소서."
하니, 따랐다.
5월 18일 경오
평안도에 오래도록 가뭄이 들어 본도의 대동강(大同江) 등 여러 곳에서 기우제를 지내려고 하였다. 이에 부수찬 윤집(尹鏶)이 제문을 지어 올리니, 하교하였다.
"청천(淸川) 이하 세 곳의 제문을 보건대, 스스로 죄스럽게 여긴다는 말이 언급되지 않았으니, 내 마음만 불안할 뿐이 아니다. 신을 어떻게 감동시키겠는가. 다시 짓도록 하라."
간원이 아뢰기를,
"이조 판서 이시백(李時白)은 대론(臺論)이 한창 일어나는 날에 별안간 항장(抗章)을 올려 당사자를 변호하였으니, 이것이야말로 전에 없었던 일입니다. 다른 관직에 있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감히 이렇게는 하지 못할텐데, 더구나 1품의 중신인데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조정의 체면을 생각하지 않고 현재의 공의(公議)를 돌아보지도 않은 채 무턱대고 이런 해괴한 행동을 취하였는데, 어찌 놔두고 논하지 않음으로써 뒷날의 끝없는 폐단을 열어 놓을 수 있겠습니까. 중하게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5월 19일 신미
김경여(金慶餘)를 홍청 감사(洪淸監司)로, 장응일(張應一)을 사간으로, 홍명하(洪命夏)를 이조 정랑으로 삼았다.
우변 포도청이 아뢰기를,
"밤이 깊은 뒤에 나졸(邏卒)이 형조 낭관을 만나 그의 종자를 체포하였는데, 낭관이 화를 내며 본청의 아전에게 장(杖)을 쳤습니다. 이미 야금(夜禁)을 범하고서도 오히려 침해를 가했으니, 유사로 하여금 추고하게 하소서."
하니, 하교하기를,
"조사(朝士)가 이처럼 범법행위를 하다니 놀랍기 짝이 없다. 나추(拿推)하라."
하였다.
형조가 아뢰기를,
"각사(各司)는 모두 육조(六曹)에 소속되어 있는데, 속사(屬司)가 상사(上司)의 추고를 청한 것은 전에 없던 일입니다. 그리고 본조의 상직(上直)하는 관원이 통부(通符)를 받아 가는 길이었고 보면 이는 일반인이 야금(夜禁)을 범한 것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다만 한때의 분노 때문에 아랫사람에게 벌을 가했고 보면 과연 경솔하게 행동한 잘못이 있습니다만, 포도청이 일단 본조의 속사인 이상 본조에 이문(移文)하여 처치를 기다리는 것이 원래 서로 공경하는 의리에 부합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지 않고 곧장 추고를 청하였는데, 체면이 한번 무너지면 규검(糾檢)할 길이 없게 됩니다. 해당 포도 대장을 추고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낭청이 추감(推勘)되자마자 갑자기 이렇게 아뢰다니, 그것이 옳은 일인지 나는 모르겠다."
하였다. 이완(李浣)이 포도 대장이 되어 거만하게 자신을 높이며 체면을 손상시켰기 때문에 형조가 이렇게 청했던 것인데, 상은 낭청에게 사정을 두는 것으로 의심하여 허락하지 않았다.
정원이 아뢰기를,
"지금 경상 감사가 올린 향천 단자(鄕薦單子)를 보건대, 수령 한 사람이 무려 8인이나 추천한 경우도 있고 70세가 가까운데도 무예로 천거된 자도 있었습니다. 비국의 계사 가운데, 나이에 구애받지 말고 꼭 인원 수를 정할 필요도 없다는 말이 있긴 하였습니다. 그러나 한 고을 안에 재행(才行)이 뛰어난 자가 어찌 이토록 많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나이 70이 다 되었으면 기력이 이미 떨어졌을텐데 그런 자를 앞으로 어디에 쓰겠습니까. 본도가 이렇다면 다른 도도 알 수 있는 일입니다. 묘당으로 하여금 다시 품하여 처리하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당초 비국의 계사는 예사로 보아넘길 항천의 유가 아니고 매우 중대한 거조를 취한 것으로서, 대략 건원(建元)050) 때 현량(賢良)을 선발한 것이나 동경(東京)051) 때 효렴(孝廉)을 추천한 규례와 비슷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이 일이야말로 금상께서 즉위하신 초기에 거행하는 매우 성대한 일인 만큼, 방백들로서는 이를 새겨 봉행함으로써 인재를 대우하려는 성조(聖朝)의 뜻을 받들었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올해 초로 기한을 정했는데도 5월이 다 지나가는 지금에야 경기와 영남에서 상문(上聞)하였고 기타 제도는 아직 거행하지도 않고 있습니다. 더구나 일찍이 계사 가운데, 감사가 적임자를 자세히 살펴 예우해서 보내도록 하라고 하였는데, 이번에 계문하면서 각 고을의 단자만 올려 보냈을 뿐 별도로 취사선택을 하지 않았으니, 착실히 봉행하는 뜻이 전혀 없습니다. 제도의 감사를 중하게 추고하소서.
그리고 기력이 이미 쇠퇴한 자도 선발 대상 속에 포함되어 있고, 정읍(井邑)같은 작은 고을에서 8인이나 추천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원래 영평(營平)052) 같은 방략(方略)의 소유자나 복파(伏波)053) 처럼 원기 왕성하고 날쌘 자가 아니면, 70세 된 노인을 장수로 선택하는 대열에 끼워 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당초 사목(事目)에 ‘나이에 구애받지 말라.’고 한 이상, 지금 와서 소급하여 나무랄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옛날 중국에서도 훌륭한 선비들이 많이 배출되는 곳으로 유독 여남(汝南) 지방을 손꼽았고, 후한(後漢) 때 장수들의 태반이 남양(南陽) 출신이었으니, 진정 적임자만 있다면 수효가 많다고 혐의할 필요는 없습니다. 처음부터 숫자를 정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미리 허위로 작성했다고 의심하여 적임자가 아니라고 해서 억누르는 뜻을 먼저 보일 수 있겠습니까. 나이나 숫자에 관계없이 오로지 정밀하게 가리면서 사의(私意)를 개입시키지 못하도록 하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생각건대 국가에서 원근을 막론하고 인재를 등용하였기 때문에 조종조에 석보(碩輔) 명인(名人)이 대부분 초야에서 배출되었습니다. 선조조(宣祖朝)의 경우를 말하건대, 조정에 등용된 자의 반 수가 호남과 영남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보면 외방 출신의 조사(朝士)는 열 명 가운데 겨우 2, 3 인에 불과합니다. 인재의 성쇠(盛衰)라는 것이 안팎으로 순환하는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어떻게 과거와 현재가 이토록 엄청나게 다를 수 있단 말입니까. 무려 수백 명에 이르는 외방의 문사(文士)들이 늙도록 경학(經學)을 궁구하기도 하고 문필에 종사하기도 하는데, 온갖 어려움을 뚫고 다행히 과거에 합격해도 뜻을 펴보지도 못하고 버림받은 채, 무식하기 짝이 없는 고관 대작의 자제들과 한번 우열을 비교할 수도 없게 된다면, 이 어찌 현인이면 누구든 임용한다는 도리에 부합된다 하겠습니까.
지금 특별히 천거하는 때에, 재행(才行)이 있으면서도 오래도록 묻혀 있는 외방의 문관들도 함께 찾아내어 사실대로 계문하게 함으로써 수용(收用)에 대비케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5월 20일 임신
헌부가 아뢰기를,
"지난번 영남 유생들이 분소(分疏)054) 한 것은 한때의 공의(公議)에서 나온 행동이었는데, 추악한 무리들이 서로 배척하여 그들의 집을 허물고 도에서 축출하는 벌을 가하기까지 하였으니, 이야말로 과거 정인홍(鄭仁弘)이 한 도를 위협했던 풍조라 할 것입니다. 방백으로 하여금 공명정대하게 조사하여 수창(首倡)한 자를 적발해서 정죄(定罪)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내가 보기에 서로 배격했다는 점에서는 서울의 유생들이 정삭(停削)055) 했던 행동도 이와 다름없다고 생각한다."
하였다. 이상진(李象震)은 종사(從祀)하자는 의논을 비난했다가 정삭되는 벌을 받았고, 신석형(申碩亨)은 영남 유생들을 배척했다가 도에서 축출되는 벌을 받았는데, 상이 이렇게 하교한 것은 둘 다 미워한 것이었다.
5월 21일 계유
이기발(李起浡)을 장령으로, 조한영(曺漢英)을 교리로 삼았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나라를 잘 다스리려면 반드시 먼저 체통을 확립해야 하니, 그런 뒤에야 모든 강목(綱目)에 질서가 잡혀 업적을 이룰 수 있습니다. 예컨대 삼공(三公)은 육경(六卿)을 통솔하고, 육경은 각사(各司)의 모든 집사(執事)를 감독하여 열심히 직무를 수행하게 하며, 정원은 봉박(封駁)056) 하는 임무를 관장하고, 대간은 규정(糾正)하는 책임을 주관하고 있습니다. 이에 인주가 대공지정(大公至正)한 도로 위에서 살피시어 모든 신료들로 하여금 각각 그 임무를 완수하게 하면서 서로 침해하는 일이 없게끔 하는 한편, 합리적인 일에 대해서는 지존께서도 굽히는 이것이야말로 고금에 통하는 의리라 할 것입니다.
더욱이 현재는 새로 교화를 펼치는 초창기인 만큼, 반드시 온당하게 거조를 행하고 상벌이 지나치지 않게 하며 궁궐을 엄하게 단속하고 사사로이 통하는 길을 막으며 언로(言路)가 훤히 뚫리게 하고 사람들이 심복하게 하여 털끝만큼이라도 사의(私意)가 그 속에 개입되지 않게 하는 동시에, 상규(常規)를 정리하고 번거로운 형식적 절차를 제거함으로써 성실한 풍토가 이루어지도록 노력해야 하니, 이렇듯 용감하게 나아가야만 국력이 쇠약해지는 폐단과 혼란스러워 망하게 되는 화를 면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시험삼아 형옥(刑獄) 한 가지 일을 가지고 말씀드릴까 합니다. 금부가 개좌(開坐)하는 날이 1개월에 2, 3일밖에 되지 않아서, 정범(情犯)이 매우 중한 자도 취복(取服)할 기약이 없을 뿐더러 실수로 가벼운 죄를 지은 자들 역시 오래도록 구속하게 된 나머지 감옥 안이 온통 원망하는 소리로 가득 차 있는 실정입니다. 이는 해부의 관원이 게으름을 부린 탓도 있지만, 금기(禁忌)에 걸리는 날이 너무 많아서 그런 것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신들이 늘 이 점을 개탄하였는데, 방금 듣건대 죄인 권영(權榮)을 상형(常刑)에 복주(伏誅)시켜야 할 일과 관련하여, 금부가 내일이 탄일(誕日)이라는 이유로 기일을 연기할 것을 청하자, 상께서 형식적인 일이라고 하시면서 즉시 법대로 집행하게 하셨다고 하였습니다. 신들은 속례(俗例)에 미혹되지 않고 단호하게 결정을 내리신 성상의 조치에 대해 우러러 치하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만약 죄있는 자를 죽일 때에는 제대로 결단을 내리시면서 무고한 자들을 풀어줄 때 결단을 내리지 못하신다면, 거꾸로 흠휼(欽恤)057) 하는 성덕(聖德)에 해가 될 뿐만 아니라, 신들이 드린 말씀도 임금을 포악한 정치를 하게끔 인도하는 결과가 되고 말 것입니다. 원컨대 지금부터는 형복·사송(詞訟) 및 기타 긴요한 관계가 있는 각사의 개좌는, 상사(上祀) 때 3일, 중사(中祀) 때 1일, 기신(忌辰) 때 원근에 따라 1, 2일을 금기일로 정하는 외에는 모두 구애받지 말게 하는 것이 마땅하니, 예관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여 앞으로의 법식으로 정하게 하소서. 옛날 한 명제(漢明帝)는 반지(反支)058) 의 금기 조항을 없애 일이 지체되지 않도록 하였는데, 그 일이 사책에 기록되기까지 하였습니다.
신들이 군상(君上)의 아름다운 거조를 보고 그지없이 기쁘고 감격한 나머지 감히 이렇듯 번거롭게 아뢰면서 어두운 소견으로 경계하는 말까지 진달드리고 보니 참으로 참람되다는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신들의 참된 뜻은 실로 이를 계기로 확대 적용하여 적은 데에서부터 큰 것으로 발전시켜 나아가시기를 기대하는 것인 동시에, 거조를 온당하게 하고 형벌이 지나치게 되지 않도록 깊이 유념하여 더욱 대공지정한 도에 뜻을 두시게 되기를 바라는 것일 뿐입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조종의 법은 모두 준수해야 하는데, 더구나 백성의 생활과 직결되고 국가의 흥망과 관계되는 이 탐장율(貪贓律)이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이 법이 한번 흔들리면 수령을 신중하게 가리고 어사를 나눠 파견하는 일도 모두 형식적인 결과가 되고 말 것이기에 내가 어쩔 수 없이 결단을 내려 행한 것이다. 그러나 연로한 자를 죽이게 한 것을 생각하면 측은하고 가슴이 아파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른다.
이는 모두 내가 제대로 교화를 맑게 펼치지 못한 결과 사람들로 하여금 이토록까지 법을 범하게 한 것이니 더욱 두렵기 그지없다. 계사에서 경계하여 진달한 말 모두가 지극히 간절하니, 어찌 가슴에 새겨 명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만약 죄있는 자를 죽일 때에는 제대로 결단을 내리시면서 무고한 자들을 풀어줄 때 결단을 내리지 못하신다면 거꾸로 흠휼하는 덕에 해가 될 것이다.’고 한 구절은 벽에 걸어두고 늘 경계로 삼겠다. 경들도 일이 있을 때마다 바로잡아 나의 부족한 점을 돕도록 하라."
하였다. 【권영의 사건 전말은 당초 논죄한 글 아래에 실려 있다.】
【태백산사고본】 4책 4권 10장 A면【국편영인본】 35책 430면
【분류】사법-행형(行刑)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註 056] 봉박(封駁) : 소를 봉입하고 물리치는 것.[註 057] 흠휼(欽恤) : 형벌을 신중히 내리는 것.[註 058] 반지(反支) : 초하루의 간지(干支)에 따라 매달 정해지는 금기일.
ⓒ 한국고전번역원
5월 23일 을해
우의정 조익(趙翼)이 며칠에 걸쳐 정고(呈告)하였는데, 상이 승지를 보내 돈유(敦諭)하니, 조익이 이에 출사(出仕)하였다.
5월 25일 정축
예조가 비국의 계사를 인하여 회계하기를,
"제향(祭享) 때 재계(齋戒)하는 규정을 보건대, 종묘(宗廟)의 오향제(五享祭)와 【4계절의 제향과 납향(臘享).】 사직의 대제(大祭)를 상사(上祀)라고 하는데 이때는 산재(散齋) 4일에 치재(致齋) 3일이고, 문묘(文廟)의 제향과 여러 산천제(山川祭)를 중사(中祀)라고 하는데 이때는 산재가 3일이고 치재가 2일입니다. 그런데 각사(各司)가 산재일과 치재일을 모두 구기(拘忌)하여 개좌(開坐)하지 못하게 되면, 공무가 필시 적체될 것입니다. 따라서 치재일만 개좌하지 말고, 기신제(忌辰祭) 및 기일이 정해져 있지 않은 별제(別祭)는 제사 하루 전과 제일(祭日)만 개좌하지 말고, 일식과 월식이 있을 때는 그 날만 개좌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곧 예로부터 준행해 온 예문(禮文)이니, 이에 의거하여 시행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호조가 아뢰기를,
"전후의 칙사의 행차에 교역한다는 핑계로 강제로 탈취한 백성의 재물을 본조에서 보상해 준 액수가 거의 수천 냥에 이르니, 너무도 국고가 탕진되었습니다. 그런데 근래에 국가가 상평청(常平廳)을 설치하여 3도 백성의 【양서(兩西)와 기전(圻甸).】 급한 사정을 구해주고 있는 이상, 실업 상태인 시민(市民)들에게도 똑같은 혜택을 베풀어 주어야 마땅합니다. 이번에 강제로 뺏은 백금(白金)이 1천 7백 69냥인데, 상평청의 재고로 보상해주는 것이 온당하겠습니다만, 너무 액수가 많다면 본조에서 보조해 주는 것이 또한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따랐다.
상이 주강(晝講)에 나아가 《서전(書傳)》 요전(堯典)을 강하였다.
상이 석강(夕講)에 나아가 《대학연의(大學衍義)》를 강하였다. 강이 끝나자 상이 탄식하기를,
"영명(英明)했던 광무제(光武帝) 역시 참위설(讖緯說)에 미혹되었다니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하고, 또 이르기를,
"양 무제(梁武帝)처럼 독실하게 불교를 믿은 사람이 없는데, 양 무제와 같이 참혹한 화를 당한 사람도 없으니, 더욱 가소로운 일이다."
하였다.
5월 26일 무인
전라도 무장현(茂長縣)에 지진이 일어났다.
상이 주강에 나아가 《서전》 순전(舜典)을 강하였다.
상이 석강에 나아가 《대학연의》을 강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첨사(詹事) 하경용(何景容)이 ‘강남(江南)에 전쟁이 일어날 것이다.’고 하였으니, 선견지명이 있었다 하겠다. 그런데 태자 첨사의 신분으로서 제대로 그 임금을 간하지도 못했으니, 어찌 죄가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
하니, 승지 유경창(柳慶昌)이 아뢰기를,
"위진(魏晋) 시대에 청허(淸虛)를 숭상했던 풍조야말로 가증스러운 것입니다. 그 중에 한 때의 명인(名人)이 있었어도 이처럼 유속(流俗)에 오염되었고 보면, 기타는 모두 볼 가치도 없다 할 것입니다."
하였다.
5월 27일 기묘
황해도에 우박이 왔는데, 큰 것은 계란만하였다.
5월 28일 경진
이기조(李基祚)를 지경연으로, 이후원(李厚源)을 동지경연으로, 김광욱(金光煜)을 동지춘추로, 민응형(閔應亨)을 대사간으로, 이일상(李一相)을 승지로, 홍처량(洪處亮)을 이조 좌랑으로 삼았다.
상이 하교하였다.
"영돈녕부사 김상헌은 고향에 있는 날이 항상 많아 봉록을 받지 못하고 있으니, 본도로 하여금 달마다 봉록을 지급하게 하라."
상이 주강에 나아가 《서전》 순전을 강하였다.
상이 석강에 나아가 《대학연의》를 강하였다.
5월 29일 신사
상이 주강에 나아가 《서전》 순전을 강하였다. 시독관 홍처윤(洪處尹)이 아뢰기를,
"‘군후(群后)가 조회하러 왔을 때, 그 동안의 치적을 보고하게 하고 그 실상을 면밀히 조사한다.’고 한 것이야말로 후세에서 행해야 할 사항입니다. 근래에 사조(辭朝)하는 수령을 모두 상께서 불러 보시므로 외간에서 다들 감탄해 마지 않는데, 수령이 공무로 상경할 때에도 불러 보신다면 이 역시 면밀히 조사하는 뜻이 될 것입니다."
하니, 따랐다.
상이 석강에 나아가 《대학연의》를 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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