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효종실록4권, 효종 1년 1650년 6월

싸라리리 2025. 12. 20.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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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일 계미

한흥일(韓興一)을 이조 판서로, 이시백(李時白)을 병조 판서로, 신면(申冕)을 승지로, 임의백(任義伯)을 장령으로, 정유성(鄭維城)을 대사성으로 삼았다.

 

결성 현감(結城縣監) 원궤(元簋)가 사조(辭朝)하니, 면유(面諭)하여 보냈다. 승지 이일상(李一相)이 나아가 아뢰기를,
"고 장령 홍익한(洪翼漢)의 노모가 평택(平澤)에서 병사(病死)했다 하는데, 진휼하는 은전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해조로 하여금 상수(喪需)를 넉넉히 주도록 하라."
하였다.

 

6월 3일 을유

동부승지 신면(申冕)이 상소하기를,
"신처럼 어리석은 자가 처신을 제대로 하지 못한 탓으로 거센 비난을 받고 세상의 큰 죄인이 되었는데도 목숨을 온전히 부지하게 된 것은 모두가 성상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었습니다. 이번에 뜻밖에도 석방하고 수서(收叙)하는 은전이 거듭 있게 된 뒤에, 또 새로 제수하는 명이 꿈에도 생각지 못했는데 내렸습니다. 따라서 은혜에 감사하며 곧장 나아가는 것이 의리상 당연하겠습니다만, 신의 지극한 원통함이 아직 풀려지지 않아 몸을 보전하기 어렵겠기에, 감히 서글피 호소하며 심정을 말씀드릴까 합니다.
신은 등제(登第)한 이래로 과분한 대우를 받아 주의할 때마다 남보다 앞 자리에 있게 되었는데, 이는 부친과 조부의 음덕(蔭德) 때문에 그렇게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신이 비록 보잘것없지만 다른 길을 통해 진출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신은 김자점(金自點)과 연척의 정분이 전연 없을 뿐더러 털끝만큼의 힘도 의지한 것이 없습니다. 부여잡고 부탁한다고 해서 무슨 이득이 있기에 몸과 명예를 버리면서까지 스스로 천 길 구덩이에 빠지겠습니까. 더구나 그의 친구이고 한패거리로서 그의 악을 도와주고 나라를 병들게 한 죄가 이와 같다면 누구든지 나를 죽일 수 있는데 어찌 산림의 선비들만이 성내겠습니까.
그런데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얽어매는가 하면 적개심에 불타 배척하면서 흐리멍덩하고 어리석기 짝이 없다고 지목하여 반드시 헤아릴 수 없는 함정에 빠뜨리려고 하는데, 이것에 대해서는 성명께서 통촉하고 계실 것입니다. 신이 그 심사에 대해서 감히 분명하게 아뢰지 않는 것은 국가의 체모를 손상시키는 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현재 청론(淸論)이 한창 일어나고 깨끗한 선비들이 조정에 가득한 때에 신처럼 더러운 자는 그저 내침을 당하는 것이 합당하니, 체면을 허락하시어 분수대로 살도록 해주소서."
하니, 답하기를,
"상소를 보고 다 잘 알았다. 그대는 사직하지 말고 직무를 살피라."
하였다.

 

상이 대신 및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이경여(李敬輿)가 아뢰기를,
"전일 북사(北使)가 왔을 때 사람들이 모두 두렵게 생각했는데, 이제 막 돌아갔으므로 등에 진 무거운 짐을 벗어놓은 듯합니다. 이런 때는 무엇이든 한번 해볼 만한 때인데 신과 같은 자로서는 감당할 수 없으니,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은 겸양하지 말고 나의 부족한 점을 돕도록 하라."
하였다. 경여가 아뢰기를,
"신이 늘 마음속으로 염려하던 것도 상의 앞에 오면 제대로 다 진달하지 못하는데, 이 역시 앞뒤를 재어보며 주저하는 죄라고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는 내가 제대로 수용하지 못한 탓이다."
하였다. 경여가 대답하기를,
"상께서 이렇게까지 분부하시니 국가의 복입니다. 예로부터 치란(治亂)은 실로 위와 아래가 얼마나 돈독한지에 달려 있었습니다. 성상의 온화하고 공순하며 효우(孝友)하는 덕에 대해서는 중외(中外)가 모두 흠앙하고 있습니다만, 식견이 있는 선비들 가운데에는 잘 받아들이지 못하시는 점을 근심하는 자도 있습니다. 신 또한 일찍이 ‘일 개인의 사정(私情)을 떠나 좋아하고 미워하시며, 천하의 공의(公議)를 따라 시비를 결단하소서.’라고 청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을 오래도록 보지 못했는데, 지금 법언(法言)을 듣게 되었다."
하였다. 경여가 아뢰기를,
"인재의 부족이 요즘보다 심했던 적이 없으니, 더욱 공력을 들여 배양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 실록청을 설치하려고 합니다만, 신이 조종조의 《실록》 찬수관을 살펴 보건대 당시 융성했던 인재들을 지금으로서는 도저히 미칠 수 없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성상께서 처음 즉위하셨을 때 산림(山林)의 선비들을 초빙하신 것이야말로 지극한 성덕의 발로라 하겠는데, 그 뒤로는 처음의 좋은 뜻을 계승하지 못한 아쉬움이 없지 않습니다. 송시열(宋時烈)이나 송준길(宋浚吉)과 같은 경우는 이름이 청나라 사람의 입에서 나오지 않았으니, 조정에 초치해야 옳겠습니다만, 조정의 분위기를 보면 또한 꺼리는 점이 있습니다."
하니, 상이 그렇다고 하였다. 경여가 아뢰기를,
"홍무적·심로·이응시는 신과 함께 죄를 받았는데, 신만 이렇게까지 은혜를 입고 무적 등은 직첩을 환급(還給)받는 정도로 그쳤습니다. 무적의 사람됨에 대해서는 신이 본래 알고 있는데, 경학(經學)의 선비는 아니지만 기휘(忌諱)를 피하지 않는 기절(氣節)이 있습니다. 그리고 응시는 신이 알지 못합니다만, 대체로 과감하게 말하는 선비입니다. 과감하게 말하는 선비들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혹 직언함으로써 명예를 구한다고 지목하기도 하지만, 한 문제(漢文帝) 이후로는 어쩔 수 없이 이름을 취하였는데, 당 태종(唐太宗)은 전적으로 이름을 위주로 하였습니다. 혹 이름을 위하더라도 하는 일이 선하다면 국가에 또한 유익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첫째가는 사람을 얻지 못할 바엔 차라리 이름을 취하는 것이 낫다. 그렇지만 오로지 이름만을 위주로 한다면 그 유폐(流弊)가 이루 말할 수 없게 될 것이다."
하였다. 경여가 아뢰기를,
"이름과 실제가 서로 부합한다면 제일 좋을 것입니다. 과감하게 말하는 선비들이 간혹 이름을 위하기도 하지만 진실로 그 말을 채택하기만 한다면 어찌 임금의 덕에 유익하지 않겠습니까. 더구나 이름도 위하지 않아 염치가 도무지 없는 자와 비교할 때, 그 인물됨이 누가 낫겠습니까."
하니, 상이 그렇겠다고 하였다. 상이 또 이르기를,
"당론(黨論)의 해가 요즈음 심해지는 듯하다. 조정이 바르게 된 뒤에 나라를 다스릴 수 있는 법인데, 지금 이와 같으니 어떻게 구제해야 하겠는가?"
하니, 경여가 아뢰기를,
"관학(館學)에서는 마치 다른 나라 사람들처럼 피차 상대하고 있으니, 너무 심하지 않습니까. 이이(李珥)와 성혼(成渾) 두 현신에 대해서 선묘조(宣廟朝) 임오·계미년 무렵에 한쪽 편의 사람들이 그들에게 큰 허물이 있다고 배척했는데, 그 뒤로, 그 문하생과 자손들은 기어코 종사(從祀)하려 하고 배척한 사람의 자손들은 한사코 깎아 내리려 하여 이 때문에 분당 현상이 더욱 심해졌습니다. 삼사의 논의라 하더라도 한쪽에 치우치는 때가 어찌 없겠습니까. 오직 성상께서 그 언론을 살피시어 만약 쓸 만하면 색목(色目)을 염두에 두지 마시고 쓰는 것이 옳습니다. 더구나 공론(公論)의 경우는 역시 편당 때문에 차이가 있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오늘날에는 당파 싸움이 점점 정밀해져서 그 형적을 없애고 하기 때문에 임금이 위에서 알 수 없는 점이 있으니, 오직 대신이 힘써 진정시키는 것이 좋겠다. 양현(兩賢)의 종사 문제도 부당한 점이 있다. 막중한 전례(典禮)를 경솔히 의논할 수 없는 만큼 의논이 정해지는 날을 서서히 기다렸어야 마땅한데, 마치 원수라도 되는 것처럼 서로들 배격하고 있다. 이런데도 종사를 허락한다면 이 풍조가 점차 자라날 것이니,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
하였다. 교리 홍처윤(洪處尹)이 아뢰기를,
"전일 종사를 청하는 영남 유생들의 소에 대해 성상께서 ‘까마귀가 자웅을 다투는 듯하다.’고 비답을 내리셨으므로 이를 듣는 자들이 모두 놀랐습니다. 이는 오직 시비를 밝히려고 한 일일 뿐입니다. 시비가 위에서 밝혀지기만 한다면 아무리 당론이 있다 하더라도 나라에 무슨 해가 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당론이 유생들의 개인적인 일로 그치는 것이라면 내가 왜 굳이 말하겠는가. 끝내는 국가의 해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였다. 경여가 아뢰기를,
"유계(兪棨)의 죄가 어찌 유배를 보내야 할 정도까지야 되겠습니까. 피차를 막론하고 사람들이 모두 구하려 하는 것은 그 재주를 애석하게 여겨 그런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심대부(沈大孚)는 얼마나 용렬하기에 유계처럼 구해주려 하지 않는가."
하였다. 해은군(海恩君) 윤이지(尹履之)가 아뢰기를,
"임금은 이름을 귀하게 여겨서는 안 된다고 신은 생각합니다."
하니, 경여가 아뢰기를,
"그렇다면 염치없이 이익만 구하는 자를 취해야 한단 말입니까. 선유(先儒)가 ‘중인(中人) 이하는 명예 구하는 일을 좋아하지 않을까 두렵다.’라고 하였는데, 나라를 다스리는 도리상 반드시 명절(名節)을 갈고 닦게 해야 합니다."
하였다. 상이 승지 유경창(柳慶昌)에게 이르기를,
"교리 홍처윤이 ‘아무리 당론이 있다 하더라도 국가에 무슨 해가 되겠는가.’라고 하였는데, 너무도 형편없다. 우선 추고하라."
하였다.

 

상이 주강에 나아가 《서전(書傳)》 순전(舜典)을 강하였다. 강이 끝나자, 상이 이르기를,
"지난번 초야에 있는 자가 올린 소장을 보건대, 과거가 불공정하다고 많이 말하였다. 이것이 맹랑한 말인가, 아니면 그런 일이 있었는가?"
하니, 특진관 김광욱(金光煜)이 아뢰기를,
"낙방한 자들의 불평은 없을 수가 없습니다. 봉명(奉命)한 신하로서 그 누가 감히 사정(私情)을 따랐겠습니까."
하고, 승지 조수익(趙壽益)이 아뢰기를,
"외방의 시장(試場)에는 간혹 혼잡한 폐단이 없지도 않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외방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하였다. 동지경연 임담(林墰)이 아뢰기를,
"근래 과장(科場)이 엄숙하지 못하다는 말이 있으니, 경계하여 단속시켜야 할 것입니다. 신이 지난번 예조 판서로 있을 때, 김집(金集)이 신에게 말하기를 ‘과거를 보일 때 피봉(皮封)에 폐단이 많이 있다.’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른바 피봉이라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
하자, 임담이 아뢰기를,
"시험지의 피봉은 모두 세 곳에 ‘근봉(謹封)’이라고 써서 그 위에 도장을 찍는데, 동당(東堂)059)  의 경우는 그곳을 잘라내고 다른 종이에 주서(朱書)로 바꿔 써서 채점을 하는 반면, 감시(監試) 때에는 잘라내지도 않을 뿐더러 바꿔 쓰지도 않은 채 그대로 채점을 하기 때문에 ‘근봉’이라고 쓴 필적을 보고서 암암리에 식별할 수 가 있습니다. 따라서 ‘근봉’이라는 글자를 새겨서 찍으면 난잡하게 될 염려를 예방할 수 있을 것인데, 김집이 이렇게 말했기 때문에 진달드리는 것입니다."
하였다. 광욱이 아뢰기를,
"신이 어려서부터 보건대, 과거 응시자들이 시험지의 피봉을 선생의 손이 복손[福手]이라고 하여 써주기를 청하는 자가 많았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는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시관(試官)이 분발(分發)을 보던가?"
하니, 【조정의 모든 일을 각사(各司)의 하인이 소지(小紙)에 써서 관원에게 보내는데, 이를 분발이라고 한다.】  대답하기를,
"과연 보기는 했습니다만, 서로 전달해 통지하는 혐의가 있기 때문에 감히 일일이 보지는 못했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시장(試場)이 엄숙하지 못하다고 하겠다."
하였다. 수익이 아뢰기를,
"외방의 시관은 더욱 가려 보내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찌 외방뿐이겠는가."
하였다. 수익이 아뢰기를,
"경중(京中)의 시장 역시 수년 전부터 사람들의 말이 파다하니, 정말 개탄스럽습니다. 반드시 시관에 적합한 자를 신중히 가려야만 뜬소문이 없어질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해조로 하여금 다시 밝혀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상이 석강에 나아가 《대학연의》를 강하였다.

 

6월 4일 병술

상이 조강에 나아가 《서전》 순전을 강하였다. 영경연 이경여(李敬輿)가 아뢰기를,
"순전 가운데 ‘사람들에게 상형(常刑)을 보여주되[象以典刑]’ 등의 장구(章句)는 더욱 유의하셔야 합니다. 상(象)이란 상위(象魏)060)  의 상과 같은 말입니다. 형(刑)을 적용할 때는 《등록(謄錄)》처럼 준용(遵用)만 해서는 안 되고 마치 무게를 재는 권형(權衡)처럼 반드시 법과 정상을 참작해야 합니다. 우리 나라의 법은 아주 가벼운 죄라도 금부와 형조가 반드시 먼저 형신(刑訊)을 청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는 일개 서리(胥吏)나 하는 일이니, 관직을 설치한 의도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런데 이는 중대한 관계가 있는 일로서 아랫사람들이 고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저 사흉(四兇)도 요임금 시대에 군신이 문답하는 자리에 참여했지만 어찌 감히 요임금의 성덕을 해칠 수 있었겠습니까. 그래서 죄가 아직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에 요임금이 미처 죄를 주지 못했던 것인데, 순임금이 정사를 이어받은 뒤에는 죄가 비로소 드러났기 때문에 죄를 준 것입니다. 법을 적용하는 도리는 반드시 그 죄상이 뚜렷이 드러날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을 죄주었을 때 백성이 원통하다고 하면 이는 인심이 흡족하게 여기지 않은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송 태조(宋太祖)가 ‘어찌 후세에는 법망이 이렇게도 치밀한가.’ 하였는데, 후세의 법망이 치밀하다는 것을 알 수 있겠다."
하였다. 경여가 아뢰기를,
"마치 거울에 물건이 비치면 아름답고 추한 모습이 스스로 드러나듯 그렇게 노여워할 일에 노여워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본심을 보존하는 공부가 필수적인데, 그렇게 된 뒤에야 무턱대고 노여워하는 잘못을 없앨 수 있습니다. 고 상신(相臣) 완평 부원군(完平府院君) 이원익(李元翼)은 간혹 관청에서 종일토록 형벌을 시행할 때에도 목소리나 안색에 감정을 드러낸 적이 없었습니다. 원익에게 학문의 공부가 있다는 말을 듣지는 못하였습니다만, 대체로 그의 자품(資稟)이 본래 고상해서 그런 것일 것입니다. 더구나 학문이 고명하신 성상께서 이 점에 유의하여 함양하신다면 어찌 도움이 적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옛사람도 ‘학문을 쌓으면 기질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하였으니,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하였다. 경여가 아뢰기를,
"임금은 보통 사람들과는 더욱 달라 성색(聲色)이나 공리(功利) 때문에 공격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따라서 그 의욕(意慾)을 제어하려면, 마치 병장기를 가지고 도둑을 막아내듯 반드시 학문의 힘을 빌려야 합니다."
하고, 대사간 민응형(閔應亨)이 아뢰기를,
"임금의 희로(喜怒)를 마치 만물에 베풀어지는 천지의 조화처럼 하시면 사적인 희로가 없게 될 것입니다. 임금에게 사적인 희로가 있게 되면 이는 화풀이로 끝나게 마련입니다. 묘당도 있고 삼사도 있으니, 아랫사람들의 말을 수용하시면 이런 허물이 없게 될 것입니다."
하고, 경여가 아뢰기를,
"요 순같은 성인께서도 널리 자문하여 보필하는 도움을 받으셨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임금이 홀로 이룰 수는 없는 법이니,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하였다. 경여가 아뢰기를,
"승지를 엄선한 뒤 신임하고 그 말을 받아들이셔야 합니다. 옛날에는 승지가 상지(上旨)를 봉환(封還)한 경우도 많았습니다."
하고, 지경연 임담이 아뢰기를,
"신하가 그저 분부대로 봉행하기만 한다면, 일개 서리(胥吏)로도 충분할텐데, 굳이 인재를 가려 고위직에 둘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고, 경여가 아뢰기를,
"양사의 장관은 엄선해야 하는데, 지금의 장관은 적임자입니다. 대사간 민응형의 나라를 걱정하는 정성은 따를 자가 없습니다. 늘 볼 때마다 신들의 잘못을 책망하곤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사간이 승지로 있을 때 간절하게 충언(忠言)을 하였으므로 내가 매우 가상하게 여기며 기뻐하였다. 요즘 오랫동안 보지 못했으나 내 마음속에 잊은 적이 없었다. 이제 간관이 되었으니, 잘못을 바로잡는 책임을 완수하여 나의 부족한 점을 돕도록 하라."
하였다. 도승지 박서가 아뢰기를,
"근래 하루에 세 차례나 경연을 열어 옥체가 피로하실 것이니, 하루에 한 번만 열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겨울철에는 병이 자주 걸리기 때문에 여름철에 자주 경연을 열려고 하는 것이다."
하였다. 경여가 아뢰기를,
"조종조에서는 종묘에서 친제(親祭)를 행하고 돌아와 바로 경연을 열기도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그렇다고 하고, 처윤 등에게 이르기를,
"하루에 세 차례 경연을 열 때에는 주강에도 《대학연의》를 강하라."
하였다. 경여가 아뢰기를,
"전하께서는 한가하실 때 《사기(史記)》를 열람하십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때때로 펼쳐 본다."
하자, 대답하기를,
"치란(治亂)에 대한 경계를 살피시면 상당히 유익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주강에 나아가 《대학연의》를 강하였다.

 

상이 석강에 나아가 《대학연의》를 강하였다.

 

6월 5일 정해

권우(權堣)를 집의로, 정두경(鄭斗卿)을 부교리로, 이단상(李端相)을 설서로, 송시열(宋時烈)을 진선으로, 조석윤(趙錫胤)을 부제학으로, 신최(申最)를 검열로, 강여재(姜與載)를 장령으로, 김시진(金始振)·임중(任重)을 지평으로 삼았다.

 

상이 주강에 나아가 《서전》 순전을 강하였다. 강이 끝나자, 동지경연 이후원(李厚源)이 아뢰기를,
"신이 일찍이 관북(關北)에서 임무를 수행할 때 듣건대, 윤귀생(尹貴生)이란 자가 부모상 3년을 치른 뒤에도 여전히 시묘(侍墓)하면서 술과 고기를 입에 대지 않았다고 했는데, 국상(國喪) 졸곡일(卒哭日)에 궐문 밖에 와서 곡하다가 신을 만났습니다. 또 양대립(楊大立)이란 자는 부모상 3년을 치른 뒤에 아침 저녁으로 곡을 폐하지 않았는데, 난리가 일어나자 몸소 신주(神主)를 지고 다니며 반드시 소사(蔬食)를 얻어 제사지냈고, 국상을 만나서는 졸곡 때까지 고기를 먹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니, 상이 기특하게 여기고 해조로 하여금 특별히 상전(賞典)을 베풀어 그 행실을 표창하도록 하였다.

 

6월 6일 무자

상이 주강에 나아가 《서전》 순전을 강하였다. 시독관 조복양(趙復陽)이 아뢰기를,
"오형(五刑)과 오복(五服)은 선왕이 실정과 법을 참작하여 만든 것입니다. 실정은 가벼운데 죄가 무거우면 죄를 입은 자가 복종하지 않을 것입니다. 천하의 모든 일이 꼭 실정을 살펴야 하지만 형법(刑法)은 더욱 삼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요점은 ‘명(明)’ 자를 벗어나지 않는다."
하였다. 복양이 아뢰기를,
"순전에서는 즉위 초에 맨 먼저 ‘사방에서 보고 듣는 것을 분명하게 전달하도록 했다.’ 하였는데, 이것이 임금이 정치를 함에 있어 첫째가는 뜻입니다. 지금은 세도(世道)가 날로 쇠하여져 기개 있게 분발하는 의지는 없고 무사안일한 버릇에만 젖어 있습니다. 만약 언로(言路)를 활짝 열어 꺾이거나 막히지 않도록 하신다면 나라를 다스릴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전에도 한창 춥거나 더울 때엔 경연을 정지한 전례가 있었는데, 상께서는 날마다 경연을 여시니 참으로 장하신 일입니다. 우임금은 촌음(寸陰)을 아끼셨고 주공은 안일에 빠지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전하께서 만약 처음부터 끝까지 게을리하시지 않는다면 이제 삼왕(二帝三王)의 다스림에 어찌 바로 미치지 못하겠습니까. 지난번에 승지가 한창 더우니 경연을 정지하자고 청한 것은 매우 잘못된 것입니다."
하였다.

 

6월 7일 기축

곽지흠(郭之欽)을 장령으로, 윤순지(尹順之)를 동지경연으로, 이성항(李性恒)을 문학으로, 심액(沈詻)을 좌참찬으로 삼았다.

 

상이 주강에 나아가 《서전》 순전을 강하였다. 대사헌 이후원(李厚源)이 동지경연으로서 입시하여 아뢰기를,
"요즈음에 와서 작상(爵賞)을 너무 남용한 까닭에 명기(名器)가 날로 가벼워져 식자들이 오래 전부터 한심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전 토포사(討捕使) 기진흥(奇震興)은 도둑을 잡은 공로로 승질(陞秩)되기까지 하였습니다. 법전에 수령이 도둑을 잘 잡았을 때 논상한다는 내용이 있지만 토포사는 수령과는 다른 것입니다. 만약 이 때문에 진흥에게 상을 내리신다면 감사·병사와 포도 대장에게도 논상해야 하니, 개정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전례를 상고하여 처리하라."
하였는데, 그 뒤에 여러 차례 아뢰니, 따랐다.

 

상이 석강에 나아가 《대학연의》를 강하였다.

 

6월 8일 경인

간원이 아뢰기를,
"정치를 하는 데 있어서는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보다 더 중대한 일이 없는데,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근본은 무엇보다 먼저 역(役)을 균등하게 하는 것입니다. 기전(畿甸)·관동(關東)·해서(海西)는 이미 대동법(大同法)을 시행하여 역을 고르게 하였으나, 삼남(三南)의 경우는, 임진난 뒤에 임시로 공안(貢案)을 정해서 그때 전쟁의 피해를 입은 각 고을의 요역을 피해를 입지 않은 내포(內浦)로 옮겨 정하고 그 뒤로 다시 상정(詳定)하지 않았기 때문에, 전남도의 역이 경상도보다 무겁고 홍청도(洪淸道)는 전남도보다 무겁게 되었으며 홍청도의 역도 매우 고르지 못하게 되었으니, 삼도(三道)의 고르지 못한 것을 한꺼번에 변통할 수는 없지만 홍청도만 변통하는 것은 진실로 어려울 것이 없습니다. 내포(內浦)에 정한 역은 산군(山郡)의 세 배가 되므로 점점 궁핍해져 앞으로 텅텅비게 되었으니, 이 어찌 한심하지 않습니까. 묘당으로 하여금 그것이 편리한지의 여부를 헤아리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그대로 따랐다.

 

상이 주강에 나아가 《서전》 순전을 강하였다. 강을 마친 뒤 동지경연 윤순지(尹順之)가 아뢰기를,
"오늘의 급선무는 우선 인재를 양성하는 것입니다. 반궁(泮宮)061)  에 있는 많은 선비들은 현재 원점(圓點) 때문에 모여 있는데 격려하고 권장하는 거조가 없을 수 없습니다.
신이 들으니, 명묘조(明廟朝) 때에는 자주 사관(史官)을 보내 출제(出題)하여 제술할 것을 명하고, 우등한 자에게는 즉시 상을 내렸으므로 당시에 사기가 매우 흥기되었다고 지금도 칭송합니다. 또 요즈음 선비들의 버릇이 아름답지 못해 배척하는 짓이 풍조를 이루어 영남 선비들은 모두 성균관에 오지 않으니, 참으로 한심스럽습니다. 만약 그들을 고무하고 격려하신다면 오지 않을 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하고, 또 아뢰기를,
"요즈음 문관(文官)들이 문자를 포기하니 참으로 우려됩니다. 조종조 때에는 가까운 시종들에게 자주 제술하게 하여 권장하였기 때문에 그 당시에는 인재들이 많았던 것입니다. 선묘(宣廟) 초년에 쓰인 인재들도 다 명묘(明廟) 때 배출된 사람들입니다."
하였다. 승지 이래가 아뢰기를,
"선비들 중 지금 한창 농사철이고 길이 물에 막혀서 오지 못한 사람도 있습니다."
하니, 대교 조사기(趙嗣基)가 붓을 놓고 나와서 아뢰기를,
"승지의 말이 틀렸습니다. 날씨가 이렇게 가무니 물에 막히는 일은 결코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농사철이라고는 하나 올라오는 선비가 어찌 없겠습니까. 불행하게도 사론(士論)이 잘못 일어 영남 선비들 중 태반이 삭적(削籍)되었거나 정거(停擧)되었기 때문에 이렇게 큰 경과(慶科)에 올 수가 없으니, 이 어찌 잘못된 일이 아닙니까. 신이 사관(四館)에 있어 선비들의 일을 미리 알 수가 있었으므로 정거를 풀도록 간통(簡通)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하였다. 시독관 조한영(曺漢英)이 아뢰기를,
"사관(史官)은 사실을 기록할 뿐이지 아뢰는 일은 그의 직임이 아닙니다. 게다가 아뢴 말이 매우 외람됩니다. 그리고 어떻게 동료들에게 간통한 일을 상달할 수 있단 말입니까. 또 사문(斯文)에 죄를 얻은 선비는 큰 경사라 하더라도 과거에 나가도록 허락해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승지가 조사기를 추고해야 한다고 청했는데, 상이 답하지 않았다.

 

상이 석강에 나아가 《대학연의》를 강하였다.

 

처음으로 ‘근봉(謹封)’이란 도장을 새겨서 감시(監試) 시권(試券) 피봉(皮封)에 찍도록 하였다. 이는 전 예조 판서 임담의 의견을 따른 것이다.

 

비변사가, 앞으로는 2품 이상으로 북병사(北兵使)에 의차(擬差)하자고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고사(故事)에 북병사는 재주와 명망이 있는 2품의 무신이 아니면 제수하지 않았었는데, 번호(藩胡)가 물러가자 이 직책에 제수되는 자의 직위나 명망이 차츰 가벼워져 선왕(先王) 말년부터는 흔히 당상관으로 제수해 왔다. 이때에 이르러 이후원(李厚源)이 "다시 북평사(北評事)를 두어 진압하는 자리로 삼자."고 하였는데, 비국이 이를 묵살하고 이 건의를 한 것이다.

 

대제학 정홍명(鄭弘溟)이 병을 이유로 사직을 청하니, 윤허하였다. 장유(張維)와 이식(李植)이 죽고 나자 문망(文望)이 홍명(弘溟)에게 돌아갔다. 선왕조 때에 함양 군수(咸陽郡守)로 있던 홍명을 대제학에 발탁했으나 홍명이 부임하지 않고 창평(昌平)으로 물러나 살았다. 이때에 이르러 재차 대제학에 제수했는데, 홍명이 또 병을 이유로 사직한 것이다.

 

6월 9일 신묘

사은사(謝恩使) 인평 대군(麟坪大君) 이요(李㴭), 부사 임담, 서장관 이홍연(李弘淵)이 하직 인사를 하니, 상이 불러 보고 보냈다.

 

6월 10일 임진

상이 조강에 나아가 《서전》 순전을 강하였다. 영경연 조익(趙翼)이 아뢰기를,
"간원이 아뢴 것에 대해 비국으로 하여금 논의하게 하셨는데, 신들의 생각엔 요역이 균등하지 못함으로 인해 백성들의 원망이 더욱 심하니 역이 고르게 된 뒤에야 백성을 보전할 수 있으므로 형조 판서와 호조 판서로 하여금 이 일을 주관하게 하고 싶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말하기는 매우 쉽지만 하기는 매우 어려운 것이다. 이 논의가 있은 지 60년이 되도록 바로잡지 못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지난번에 대동법(大同法)을 시행하려고 하였는데 경외의 백성들이 다 불편하다고 하여 정지한 것이다. 그 이름은 비록 역을 균등하게 한다고 하지만 실은 대동법과 다름이 없다. 오늘의 나라 형편은 마치 큰 병을 앓고 난 사람 같아서 경장(更張)이 불가능할지도 모르니, 그 가부를 형조 판서와 호조 판서에게 묻고 싶은데, 경들의 뜻은 어떠한가?"
하니, 호조 판서 이기조(李基祚)가 아뢰기를,
"호서(湖西)는 경작지가 적은데 역은 무거우며 양남(兩南)은 경작지가 많은데 역은 가벼우니, 역을 고르게 하는 것이 어찌 아름다운 뜻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전엔 무거웠는데 이제는 가볍다고 생각하는 자는 기뻐하겠지만, 전엔 가벼웠는데 지금은 무겁다고 생각하는 자는 반드시 원망할 것입니다."
하였다. 이시방(李時昉)과 민응형(閔應亨)은 모두 편하다고 말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들은 물러가서 대신들과 충분히 논의하여 기다리고 있으라. 의당 다시 면대해서 논의하겠다."
하였다.

 

상이 주강에 나아가 《대학연의》를 강하였다.

 

상이 석강에 나아가 《대학연의》를 강하였다.

 

6월 11일 계사

신유(申濡)를 도승지로, 이수함(李守諴)을 지평으로, 이상진(李尙眞)을 정언으로 삼았다.

 

보은 현감(報恩縣監) 이하악(李河岳)이 하직 인사를 하니, 면유(面諭)하여 보냈다.

 

6월 11일 계사

각사의 윤대관(輪對官)을 불러서 접견하였다.

 

6월 12일 갑오

교리 정두경(鄭斗卿)이 상소하면서 자신이 지은 풍간(諷諫)한 시 20편을 바치니, 상이 후한 비답을 내리고 호피(虎皮)를 하사하였다. 일찍이 두경은 경계하는 뜻으로 글을 지으면서 편 끝마다 시를 인용하여 마무리했는데, 이날 그것을 바친 것이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근본은 우선 역을 균등하게 하는 데에 있음은 진실로 간원이 올린 계사와 같습니다. 삼남의 공안(貢案)이 고르지 못한 것 때문에 식자들이 오랫동안 탄식해 왔으니, 비록 변통하려고 해도 크게 불편할 것은 없습니다. 각도 전결(田結)의 원수(元數)를 계산하여 공물(貢物)의 많고 적음을 정하고 이것에 따라 쌀과 베로 계산해 내게 함으로써 너무 무겁거나 가볍게 매겨지는 곳이 없도록 하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간원이 올린 계사에서는 홍청도(洪淸道)만 시행하자고 하였으나 반드시 통합하여 한덩어리로 만든 뒤라야 피차에 걸리고 방해되는 폐단이 없을 것입니다. 해조로 하여금 전담토록 해야겠지만 사무에 밝은 형조 판서 이시방이 이 직임에 적합하니, 그에게 겸하여 살피게 하고 서로 상의해서 삼남의 원공안(元貢案)과 전결의 총수를 조사하고 그 경중을 참작하여 영구한 법식을 만들도록 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어제 탑전에서 이시방이, 양호(兩湖)에서는 어디든지 1결에 쌀 서 말씩을 거두어 각사의 공물에 응하도록 하자고 하였습니다. 오늘 신들이 본사 당상, 양사 장관과 서로 상의하여 양호의 결수(結數)와 공물값을 산출하였는데, 우의정 조익(趙翼)은 ‘1결당 쌀 서 말씩을 거두어 각사의 공물값으로 삼는다면 꽤 많이 남을 뿐 아니라 백성들에게 거두는 양도 적어질 것이므로, 요역이 무거운 백성이 편리할 뿐만 아니라 역이 가벼운 고을도 내는 양이 줄으면 줄었지 늘지는 않게 될 것이니, 비록 다른 곳으로 옮겨 정해 쓰는 일이 없더라도 역이 절로 균등해지고 상하가 다 만족하게 될 것이다. 지금의 대책으로는 이보다 더 나은 것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병조 판서 이시백(李時白)과 형조 판서 이시방, 대사간 민응형(閔應亨)의 뜻도 조익과 같았습니다.
영의정 이경여(李敬輿)는 말하기를 ‘우리 나라의 공물은 토산물로 정한 뜻을 이미 잃었으므로 모두 쌀과 베로 수납하는 것인데, 이것은 다 농민과 공녀(紅女)의 손에서 나온 것이니, 결수를 계산해서 값을 거두는 것이 이치상 균평(均平)하다. 지나치게 무겁거나 가벼운 폐단을 한꺼번에 바로잡지 않을 수 없으니, 대강 바로잡은 뒤에 양도에 그 좋고 나쁜 점을 물어 참작하고 헤아리되 한결같이 백성들이 원하는 것에 따르며, 영남은 형편을 보아서 시행하는 것이 편리하겠다.’고 하였습니다.
대사헌 이후원(李厚源)은 말하기를 ‘역을 고르게 하는 것은 좋지만 쌀로 바꾸어 수납하는 것은 불편할 뿐만 아니라 남는 것을 취한다는 혐의도 있다.’고 하였습니다. 해은군(海恩君) 윤이지(尹履之), 이조 판서 한흥일(韓興一), 호조 판서 이기조(李基祚)의 뜻도 후원과 같았습니다. 여러 사람의 의논이 비록 크게 다르지는 않았지만 늦추자는 의견과 서두르자는 의견, 우선하자는 의견과 뒤로 미루자는 의견이 서로 달랐으니, 후일 등대할 때에 다시 품의하여 정하도록 하소서."
하니, 따랐다. 그러나 그 뒤로 이런 논의는 끝내 시행되지 않았다.

 

우의정 조익이 차자를 올리기를,
"학문이란 것은 정치의 본원(本源)입니다. 학문이 아니면 다스림을 이룩할 근본이 없게 되므로 신은 먼저 위아래로 통하는 학문의 도를 말씀드린 뒤에 인군의 학문에 대해 언급하겠습니다. 사람의 자품은 본시 한가지여서 배우면 현인이나 군자가 되고 배우지 않으면 범인이 되는 것인데, 세상의 선비들은 모두 학문의 시급함은 알지 못하고 오직 바깥 일만을 시급하게 여기고 있으니, 이는 매우 사리에 어둡고 미혹한 것으로 슬퍼해야 할 일입니다.
배우는 자들이 진실로 도에 나아간 사람을 택하여 사표(師表)로 삼고 몸소 그에게 배운다면 자신의 행하는 바가 자연히 성현의 행동을 본받게 될 것입니다. 옛 성인 중에 지존(至尊)의 자리에 있으면서 지극한 덕으로 지극한 다스림을 이룩하신 분은 바로 이제 삼왕(二帝三王)이니, 후세의 임금은 마땅히 이제 삼왕을 본받아야 합니다. 그분들의 언론과 정사는 책에 실려 있으니, 진실로 이를 읽고 구하여, 정밀하게 살피고 굳게 지키는 공부, 엄숙하게 경계함, 사람을 알아보는 슬기, 백성을 사랑하는 뜻에 대해 어느 것 하나 빼놓지 않고 다 본받는다면, 덕이 어찌 옛날만 못하며 정치가 어찌 옛날만 못하겠습니까.
삼가 생각건대, 전하께서는 도를 구하는 뜻이 간절하고 강학을 부지런히 하시어 동궁에 계실 적부터 서연(書筵)에서 강독한 것은 공맹의 글이었고 요즈음엔 경연에서 또 《상서(尙書)》를 강독하시는데 때로는 하루에 세 번씩 강하시니, 성지(聖志)의 돈독함과 성공(聖功)의 민첩함이 여염집 필부로서도 미치기 어렵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 나라가 태평의 운을 만났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학문을 함에 있어 오경(五經)에서 구하는 것은 박학 다문(博學多聞)을 위한 길이겠지만, 절실한 공부를 찾는 데에는 사서(四書)처럼 요긴하지는 못합니다. 만약 사서에서 얻는 것이 없이 건성으로 오경을 읽는다면 박학하기만 하지 요령을 얻지 못하는 폐단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비록 다른 글을 읽는 때라도 여가 있는 대로 다시 사서를 계속해서 읽고 복습하여 일생의 공부로 삼으시되, 반드시 성지(聖智)와 성덕(聖德)이 옛 성현과 같게 될 때까지 하셔야 합니다. 전하께서 지금까지 강하신 글이 모두 성인의 글인만큼 오직 지성(至誠)으로 구하신다면 평탄하기가 대로와 같을 것이나, 만약 성인이 되겠다는 의지가 없으시면 경연에서의 진강도 단순히 전례를 따라 횟수만 채우는 허식에 불과할 것입니다. 신이 염려하는 것은 성현되기를 구함에 있어 혹 그 요령을 깊이 얻지 못하고 ‘나도 요순이 될 수 있다.’는 기약을 스스로 포기하지나 않으실까 하는 점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개도(開導)하고 권계(勸戒)하는 말이 이렇듯 간절하고 감동적인데, 어찌 깊이 생각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6월 13일 을미

황감을 승지로, 이성항(李性恒)을 지평으로 삼았다.

 

전 대사헌 남선(南銑) 등을 서용할 것을 명했는데, 이는 대사간 민응형(閔應亨)의 말을 따른 것이다.

 

6월 16일 무술

상이 하교하였다.
"선왕께서 왕자와 옹주들이 장성하는 모습을 미처 보지 못하고 돌아가신 것을 나는 늘 가슴 아프게 여기면서도 이런 마음을 풀 길이 없었다. 효명 옹주(孝明翁主)와 숭선군(崇善君)·낙선군(樂善君)의 집에 각각 노비 150 구를 내려 주라."

 

6월 18일 경자

간원이 【대사간 민응형(閔應亨), 정언 유도삼(柳道三)·이상진(李尙眞).】  아뢰기를,
"우부승지 신면(申冕)이 사직소에서 자기를 탄핵한 사람에 대해 드러나게 성을 내고 거리낌없이 헐뜯은 것은 매우 아름답지 못한 일입니다. 하물며 당초 죄를 받을 때에도 비방에 대해 잘 대처하지 못한 잘못이 있었는데, 새로 은택을 입어 다시 가까운 반열에 서게 되었으니, 신면으로서는 마땅히 스스로 반성하기에 힘써야 하거늘 지금 도리어 장황하게 사설을 늘어놓아 마치 공의(公議)와 서로 겨루는 것처럼 하니, 조정에서 서로 공경하는 도리와 사대부의 자신을 반성하는 뜻으로 볼 때 어찌 이와 같이 할 수 있습니까. 파직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자신을 변명하는 소장에서 누구인들 한두 마디 말이 없겠는가.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까지 말하는가. 너무 까다롭게 법을 적용하는 듯하다."
하였다. 정언 이상진(李尙眞)이 그때 대청(臺廳)에 있다가 인피하여 아뢰기를,
"신이 승지 신면의 소를 보니, 자기를 탄핵한 사람을 원수와 같이 헐뜯어 그 말이 아름답지 못했습니다. 이에 대해 규핵(糾劾)하는 조치를 하지 않을 수 없기에 오늘 요석(僚席)에서 충분히 숙의한 끝에 절충안을 따르기로 한 것이었는데, 삼가 성비를 보니 ‘법을 너무 까다롭게 적용하는 것 같다.’는 하교를 하셨습니다. 법을 너무 까다롭게 적용해서 남을 논핵하는 일은 이 얼마나 나쁜 일입니까. 신은 진실로 황공할 뿐입니다. 그러나 자신을 변명하는 행위를 하지 않을 수는 없다 하더라도 어찌 감히 분노에 찬 심정을 임금께 올리는 글 속에 그토록 기탄없이 쓸 수 있습니까. 이른바 ‘거센 비난을 받았다.[重觸機弩]’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또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얽어매어 기필코 헤아릴 수 없는 함정에 빠뜨리려고 하였다.’는 말은 또 무슨 말입니까? 그리고 ‘그 심사에 대해서 감히 분명하게 아뢰지 못하는 것은 나라의 체모를 손상시키는 점이 있다.’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누가 기(機)이고 누가 노(弩)며, 누가 촉발시켰습니까? 그리고 무엇으로 얽고 무엇으로 매었습니까? 악을 제거하고 선을 드날리며 무너진 기강을 바로잡는 것을 함정에 빠뜨린다고 할 수 있습니까? 조정에 가득한 백관들 중에서 몇 사람만 천거한 것은 친소(親疏)와는 무관한 것인데, 무슨 마음을 써서 누구에겐 후하게 하고 누구에겐 박하게 했다는 말입니까. 다시 무슨 앞에 열거한 것보다 더 큰 비밀스런 뜻과 숨긴 말이 있기에 뱃속에 간직해 두고서 분명히 지적하여 아뢰기를 어렵게 여기는 것입니까.
만일 나라의 체모를 손상할까 두려워 감히 분명하게 진술하지 못했다면, 이미 진술한 것은 나라의 체모를 손상시키지 않는다는 말입니까. 그때는 초야의 신하들이 모두 임금의 지우(知遇)를 받아 자기의 직분을 다할 것을 생각하였으므로 이렇게 격양(激揚)시키는 조처를 내렸던 것입니다.
만약 이를 일컬어 세도(世道)를 헤아리지 못했기 때문에 빚어진 실책이라고 하거나, 그런 조처를 하는 사이에 과격한 실수가 없지 않았다고 하거나, 아니면 경중의 구분없이 된 일이라고 한다면 오히려 가하다 하겠습니다. 저들은 초야에서 뜻을 구하여 세상과는 다툼이 없었으니, 어찌 일호라도 한쪽에 치우친 사사로움이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신면은 감히 이와 같은 말로 옳고 그름을 흐려서 임금의 총명을 현혹시켰습니다. 이런 버릇이 점점 자라나면 어찌 뒷날에 큰 근심거리가 되지 않겠습니까. 만약 좋아함과 미워함을 분명히 내보이지 않는다면 세상엔 공론(公論)이 없어지고 나라는 나라꼴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일이 이미 매우 놀랍고 관계되는 바가 또한 무겁습니다. 신들이 논한 것은 진실로 법을 가혹하게 적용한 것이 아닌데 전하께서 윤허하지 않으실 뿐 아니라 도리어 온당치 못한 전교를 내리시니, 신은 삼가 당혹스럽습니다.
또 생각건대, 참의 이지항(李之恒), 승지 황감도 역시 사직소를 냈지만 그 말에 흠잡을 데가 없었기 때문에 이런 논의가 없었던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여기에서 이 논의가 결코 가혹한 법률 적용이 아님을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신은 대간의 자리에 있으면서 말을 신임받지 못하였으니, 어찌 감히 뻔뻔스레 자리에 무릅쓰고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남쪽 고을로 유배했다가 서용된 지 얼마되지 않았는데 이런 논의가 있기에 지나치지 않은가 염려하여 그렇게 비답했던 것뿐이지 특별히 준엄한 뜻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대의 그릇된 견해가 어찌 이러한 데까지 이르렀는지 참으로 괴이하다."
하였다.

 

검열 조사기(趙嗣基)·신최(申最)는 사관 천거가 지평 김시진(金始振)에 의해 막혔다는 이유로 모두 소를 올리고 체직을 청하였다.

 

이때 실록 찬수(纂修) 기일이 급박하고 대제학이 오랫동안 비어 있었으므로 대신(大臣)들이 대제학을 정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고사(故事)에 대제학을 지낸 자가 추천하게 되어 있는데, 전 대제학 정홍명(鄭弘溟)은 병으로 시골에 있고 이경석(李景奭)과 조경(趙絅)은 백마성(白馬城)에 구금되어 있었으며 오직 영부사 김상헌(金尙憲)만 있었다. 상이 사관을 보내어 물으니, 그는 조석윤(趙錫胤) 한 사람만 천거하였다. 그러자 상이 이르기를 "문형(文衡)을 차출할 때에는 정부의 육경이 모여 의논해서 권점(圈點)의 많고 적음에 따라 의망(擬望)의 순서를 정하는 것인데, 한 사람만 천거했으니 권점을 찍을 곳이 없다. 김상헌에게 다시 물으라." 하니, 상헌이 아뢰기를 "국가가 양관(兩館)062)   제학(提學)을 둔 것은 문형을 예비하기 위한 것입니다. 영의정 이경여와 우의정 조익은 다 제학을 지냈으니 마땅히 양관 제학과 함께 모여 의논해서 천거해야 합니다." 하였다. 경여와 조익이 아뢰기를 "현임 양관 제학인 김광욱(金光煜)과 오준(吳竣)은 지금 의천(擬薦) 대상 중에 속해 있으므로 모여 의논할 수 없습니다." 하고, 드디어 조석윤과 양관 제학을 추천하였다. 그러자 상이 대신(大臣), 정부의 동서벽, 육경, 판윤을 명초(命招)해서 권점(圈點)하도록 한 뒤, 드디어 조석윤을 대제학으로 삼았다.

 

6월 19일 신축

대사간 민응형(閔應亨)이 인피하여 아뢰기를,
"요즈음 조정이 분열되고 분위기가 아름답지 못하기에 신이 일찍이 탑전에서 개탄스러운 점을 누누이 진달하였습니다. 어제 서로 모인 자리에서 정언 이상진(李尙眞)이 발언하기를 ‘승지 신면(申冕)의 사직소 가운데 불미스러운 말이 많으니 논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신은 갑자기 그 말을 듣고 매우 이상하게 여겨져서 ‘설령 성낸 말이 있더라도 성상께서 이미 큰 은택을 내려 다시 서용하였는데 무슨 뜻으로 다시 말썽을 일으키려 하는가.’ 하였습니다. 이렇게 한낮이 되도록 반복해서 논란하였는데, 상진이 신면의 소 가운데 있는 말을 끄집어내며 말하기를 ‘깊은 의도가 있어 뒷날 우려될 일이 없지 않을 것 같다.’고 하였습니다. 신은 끝내 그러한 점을 느끼지 못하겠기에 내부 분열을 빚는 부정(不靖)한 생각이라고 나무랐지만, 그는 굳이 고집하여 되돌리지 않았고 장차 인피하려고 하였습니다. 신은 점점 더 격해지게 될까 염려스러워, 말을 줄이고 표현을 고쳐 억지로 따른 것인데, 이제 성교를 받아 보니, 신이 자신의 의견을 지키지 못한 잘못이 드러났습니다. 신을 체직하소서."
하고, 정언 유도삼(柳道三)도 이 때문에 인피하였다. 헌부가 【대사헌 이후원(李厚源).】 이상진은 출사하게 하고 민응형(閔應亨) 등은 체직시키자고 청하니, 답하기를,
"대사간의 피혐하는 말은 실로 오늘날의 고질병을 말한 것인데, 어찌하여 체직을 청하는가? 이는 참으로 뜻밖의 말이다. 충성스럽고 바른말 잘하며 질박하고 정직한 사람을 결코 가볍게 체직하기 어렵다. 유도삼도 체직하지 말라."
하였다.

 

헌부가 아뢰기를,
"신들이 삼가 한원(翰苑)063)  의 고사(故事)를 들으니, 새로 천거할 때에는 지방의 관원에게도 두루 알리는 것이 전례로 되어 있습니다. 참하관(參下官)에 있어서는 비록 파산(罷散) 중인 자일지라도 가부를 논의하는 것은 시임관(時任官)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런데 천거에 대한 일이 결정되기 전에 사적으로 가부를 말하며 다만 하리(下吏)들의 말만 따라 앞질러 개좌(開坐)한 일은 이미 옛 규례에 어긋납니다.
그리고 사실(私室)에서 한 이야기를 장황하게 소장에 진술하여 마치 고발이라도 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으니, 매우 가증스럽습니다. 검열 조사기(趙嗣基)·신최(申最)를 중히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그대로 따랐다.

 

6월 20일 임인

검열 조사기·신최를 추고하라는 전지에 대해 하교하였다.
"‘번쇄하다.’고 말한다면 가하겠지만 ‘마치 고발이라도 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으니 가증스럽다.’는 따위의 말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이며 사람의 입을 봉하자는 의도에 불과하다. 이 전지(傳旨)는 부표(付標)를 고쳐 들이라."

 

정언 유도삼(柳道三)이 인피하여 아뢰기를,
"신은 신면을 논핵할 때 애당초 의견은 비록 같지 않았지만 망설이다가 끝내 따라 동참하였습니다. 이에 대한 헌부의 처치는 실로 공의(公議)인데 뜻밖에 체직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은혜가 극진하지만 염치 또한 중한 것이니, 세상에 어찌 구차한 대간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신을 파직하소서."
하고, 대사간 민응형(閔應亨)은 인피하여 아뢰기를,
"신이 엊그제 동석(同席)해서 발론하여 말을 많이 하며 조정한 것은 신면의 소에 실수가 없다는 것이 아니었으며 한 번 탄핵하는 것이 불가하다고 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다만 이미 지나간 일인데 상소의 내용 중에 실수한 말을 끄집어내어 다시 시끄럽게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끝내 같이 행동한 것은 역시 조정하려는 뜻에서였습니다. 그러나 이미 따라 참여하고서 물러나와서 뒷말을 한 잘못은 진실로 면하기 어렵습니다. 이미 체직된 관원은 절대로 잠시라도 그대로 있을 수가 없으니, 신을 체직하소서."
하고, 정언 이상진(李尙眞)은 인피하여 아뢰기를,
"어제 동료들이 처음의 생각을 바꾸어 잇달아 인혐하여 한바탕 소요를 일으키는 바람에 신이 한 논핵은 ‘너무 지나치다.’는 배척을 받았습니다. 그동안 회의석상에서 한 이야기 가운데 자세함과 소략함이 매우 다르고 허와 실이 같지 않은 것도 있었습니다. 발언할 당시에 장관이 번번이 말하기를 ‘신면의 소장에 있는 불평스런 말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비난하고 있으니, 이번 논핵에 대해 어찌 이론(異論)을 세울 수 있겠는가. 다만 유배에서 막 풀려나 거두어 쓰는 은전을 입었는데 이렇게 다시 규핵하는 것은 아마도 너무 조급한 듯하니 좀 기다렸다가 뒷날 다시 논의하자.’ 하기에, 신이 답하기를 ‘이 상소가 나온 지 이미 오래되었는데, 만약 그것이 잘못되었음을 알았다면 다시 어느 때를 기다리는가.’ 하였는데, 제가 미워한 것은 바로 그가 유배에서 풀린 지 얼마 되지도 않았으면서 오히려 자숙하지 않고 조정을 거리낌없이 경멸했기 때문입니다. 그날 서로 견지했던 뜻이 대략 이와 같았는데 ‘갑자기 듣고 매우 이상하게 여겼다.’고 말하여 마치 전에 듣지 못한 것을 비로소 듣게 된 듯이 하였으니, 이 또한 이상스럽습니다.
더구나 그가 말한 ‘내부 분열을 빚는 부정한 생각’이라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내부 운운한 말은 참으로 한번의 웃음거리도 되지 않습니다. 대저 규핵하는 것은 그 사람이 실수한 것을 꾸짖어 스스로 새롭게 하도록 길을 열어주는 것입니다. 신면도 탄핵을 받은 뒤에 개과천선한다면 진실로 군자되는 데 지장이 없을 것입니다. 지금 잘잘못이 아직 확실하게 정해지지도 않았는데, 분열시켰다거나 부정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장관은 무슨 특별한 의견을 가졌기에 갑자기 그런 말을 하여 성총(聖聰)을 미혹시킨단 말입니까.
신은 탄핵으로 한 사람의 실수를 바로잡으려다가 도리어 붕당을 만들고 사정에 치우쳤다는 죄목에 빠지게 되었으니, 이 모두가 신이 남에게 신임을 받지 못한 소치입니다. 이미 몇 차례 온당치 못하다는 전교를 받았을 뿐 아니라 동료 장관에게 뜻밖의 배척을 받았으니, 어찌 잠시인들 무릅쓰고 있을 수 있겠습니까. 신을 파직하소서."
하고, 대사헌 이후원, 집의 권우, 장령 곽지흠은 인피하여 아뢰기를,
"사람의 의견은 각자 같지 않은 것이니, 민응형(閔應亨)에게도 소견이 있는 이상 굳이 같게 할 수는 없습니다. 동료가 아무리 굳게 고집하며 돌이키지 않더라도 자신은 또한 스스로 처신하는 도리가 있는 만큼 오직 그 일이 옳은가 그른가를 관찰할 뿐이지 굳이 억지로 따를 필요가 있습니까. 이미 그 논핵에 참여하고 나서 물러나와 뒷말을 하는 것은 간관의 풍채가 없는 짓입니다. 유도삼도 두 동료 사이에서 우물쭈물하며 아무런 주관이 없었으니 구차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이것이 체직을 청한 까닭입니다. 삼가 성비(聖批)를 보건대, 체직을 청한 것을 뜻밖에 나왔다고 하셨으니, 신들의 처치가 정당성을 잃었음이 드러났습니다.
그리고 조사기와 신최 등을 논계할 때 한 말은 결코 다른 뜻이 없었습니다. 신진의 소관(小官)들이 감히 저희들끼리 한 사사로운 말을 장황하게 소장에 진술하여 마치 고발이라도 하듯이 하기에 그 정태(情態)가 가증스러워 신들이 그들의 버릇을 바로잡고 조정의 체면을 높이려고 한 것인데, 지금 들으니 사람의 입을 봉할 의도라고 전교하셨습니다. 이른바 사람의 입을 봉한다는 것은 임금을 에워싸고 가리려는 권신(權臣)이나 하는 짓인데, 신들이 무슨 일을 위하여 감히 사람의 입을 봉하며 말을 하지 못하게 하겠습니까.
대간의 계사에 부표(付標)하는 일은 지금까지 없었던 일로 이는 모두가 신들이 신임을 받지 못한 까닭이니, 더욱 잠시라도 무릅쓰고 있을 수 없습니다. 신들을 파직하소서."
하고, 지평 김시진(金始振)은 인피하여 아뢰기를,
"간원의 관원들과 본부(本府)의 동료들이 다 인피하였으니 신이 처치해야 마땅한데, 동료가 인피한 계사의 끝부분을 보니 조사기 등을 추고하라는 전지에 부표(付標)하라는 전교가 있어 인혐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실로 신이 함부로 행동한 것에서 말미암은 것이라 형편상 처치하기 어렵습니다. 신을 파직하소서."
하였는데,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도삼 등은 모두 물러가서 물론을 기다렸다.

 

충청 감사 김경여(金慶餘)가 임지로 떠나기에 앞서 점차 잘못되어가는 일곱 가지 점에 대해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신은 언젠가 전하께서 탄식하시며 인재가 없다고 전교하시는 것을 탑전에서 들은 적이 있으므로 성상의 뜻을 우러러 엿볼 수 있었습니다. 이제 반년이 지났지만 아직까지 단 한 번의 호령이나 행동도 이에 유의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습니다. 이는 실로 시국이 매우 다급하여 생각이 미칠 여유가 없기 때문이기는 하나, 사람이란 편안함에 익숙해지기 쉽고 편안하면 반드시 위태로움을 망각하게 되는 법입니다. 한번 변고를 겪고는 좋은 뜻이 온통 사라지고 당초에 뜻이 굳게 정해지지 않아 금방 막히고 흔들리게 되었으니, 하늘에 계신 조종의 신령과 팔도 백성들의 마음이 전하에게 책망하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전하께서 끝맺음을 잘 못하는 첫 번째 일입니다.
백성은 나라에 의지하고 나라는 백성에게 의지하므로 백성이 편안하면 나라가 잘 보존되고 백성이 곤궁하면 나라가 망하는 법입니다. 그래서 옛날의 정치를 잘했던 임금들은 모두 백성을 편안히 하는 것으로 근본을 삼았는데, 백성을 편안히 하는 길은 오직 수령이 어떠하냐에 달려 있습니다. 이 때문에 한(漢)나라 때에는 반드시 선부(選部)064)  에 명을 내렸고, 당(唐)나라 때에는 자사(刺史)를 친히 만났던 것입니다. 전하께서 즉위하신 초기에는 관리를 선발하는 것에 대한 전교가 자상스러우셨으며, 정사를 하는 날이면 하직 인사 온 수령들을 빠짐없이 인견하시고 직접 물어보셨으므로 수령만이 분발할 뿐 아니라 이조 또한 함부로 적격자가 아닌 자를 의망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요즘 와서는 이런 규례가 잘 행해지지 않아 수령들은 대부분 태만하고 이조 또한 두려워하는 마음을 갖지 않으니, 이것이 전하께서 끝맺음을 잘 못하시는 두 번째 일입니다.
형벌과 상은 임금의 큰 권한입니다. 형벌과 상이 공정하면 악을 행하는 자는 두려워하고 선을 행하는 자는 권장되어 나라가 이 때문에 다스려지며, 형벌과 상이 공정함을 잃으면 죄가 있는 자는 요행히 피하고 공이 있는 자는 원망하게 되어 나라가 이 때문에 어지러워집니다. 전하께서 즉위하신 초기에는 조정의 기강이 떨쳐지지 않을까 깊이 염려하고 권징(勸懲)이 제대로 되지 않을까 염려하여 상벌을 행할 때엔 반드시 공정한 방도를 찾았으므로 아랫사람들이 모두 푸른 하늘의 해를 보듯 성상의 마음을 우러러 보았습니다. 그런데 요즘 와서 기강이 해이해지고 명계(命戒)가 전도되어 조정에는 호오(好惡)가 분명하지 못하고 사대부 사이엔 시비(是非)가 흐릿하여 모든 조처에 대해 중외를 막론하고 속으로 의심하여 모두 조정을 업신여기는 뜻을 가지고 있으니, 이것이 전하께서 끝맺음을 잘 못하시는 세 번째 일입니다.
하늘이 백성을 낳고 사목(司牧)을 세우셨지만 넓은 강토와 많은 백성을 한 사람이 다스릴 수 없기 때문에 반드시 어질고 유능한 이를 맞이하여 그와 더불어 천위(天位)와 천직(天職)을 함께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경서를 연구하고 스스로 즐기면서 산야에서 도를 지키는 사람은 반드시 임금이 공경과 예우를 극진히 하고 자신의 말과 계책을 받아들여준 뒤에야 조정에 나와 벼슬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교만한 안색과 싫어하거나 야박한 뜻이 혹시 교제할 때에 보이기라도 한다면 그 누가 조정에 서려고 하겠습니까. 전하께서 즉위하신 초기엔 어질고 유능한 이를 맞이하고 방문하며 숨은 인재를 빠짐없이 찾아 예우하여 그 부지런하고 간절한 뜻이 언외(言外)에 넘쳤는데, 요즈음에 와서는 전에 가지셨던 마음가짐이 차츰 쇠하여져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우리 임금께서 선비를 대접하시는 것이 처음 같지 않으시니, 아, 애석하도다.’ 하니, 이것이 전하께서 끝맺음을 잘 못하시는 네 번째 일입니다.
신은 들으니 도는 가장 먼저 집안에서 행해지는 것이라고 합니다. 때문에 궁궐이 엄하냐 엄하지 못하냐에 따라 그 몸이 바르냐 바르지 못하냐를 볼 수 있습니다. 전하께서 즉위하신 초기에는 방금(防禁)이 엄격하여 작은일 큰일 할 것 없이 조심하셨으므로 외부의 말이 들어오지 않고 내부의 말이 나가지 않았으며, 아무리 가까운 인척이라도 감히 위엄을 훔쳐 복을 만들거나 권세를 믿고 은총을 팔아서 성덕(聖德)에 누를 끼치는 자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요즈음에 와서는 금중의 은밀한 일이 작은일이건 큰일이건 바깥으로 전해져 매우 파다하다고 하니, 과연 사람들의 말대로라면 바깥 말이 결코 들어온 적이 없다고 어떻게 보장하겠습니까. 말의 드나드는 것은 다 참된 것이라 하더라고 아름답지 못한 일인데, 하물며 작은 것을 크다 하고 흰 것을 검다고 한다면 성상의 총명을 현혹시키고 많은 사람의 귀를 어지럽게 하는 것을 어찌 이루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이러한 것을 고치지 않는다면 골고루 사랑하려는 아름다운 마음은 이루지 못하고 반드시 한쪽 편의 말만 듣는다는 비난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전하께서 끝맺음을 잘 못하시는 다섯 번째 일입니다.
무릇 임금이 보필하는 신하를 두는 것은 자신의 뜻에 맞추기 위함이 아니고 자신을 바르게 하기 위함입니다. 전하께서 즉위하신 초기에 등용했던 사람은 모두가 단정하고 어질며 정직한 사람들이었으므로 조정은 엄숙하고 맑았으며 모든 관료들은 서로 공경하고 어려워했습니다. 그런데 요즘에 와서는 입맛의 달고 씀이 자신과 다를 때엔 기상이 돌변하고 강경하게 대드는 자에겐 반드시 은전을 아껴 싫어하고 미워하는 빛을 보이셨고 아첨하는 자에겐 으레 은총을 내림으로써 그들을 우대하고 권장하는 뜻을 보이셨습니다. 이것이 전하께서 끝맺음을 잘 못하시는 여섯 번째 일입니다.
옛사람은 언로를 막는 것을 냇물을 막는 데 비유했습니다. 대개 왕도를 일으키는 길이 한 가지가 아니지만 간하는 말을 따르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고, 나라를 망치는 일이 한 가지가 아니지만 곧은 말을 미워하는 일보다 더 심한 것이 없습니다. 전하께서 즉위하신 초기에는 남의 말 듣기를 흐르는 물처럼 하시고도 오히려 듣지 못하는 것이 있을까 두려워하셨기 때문에 사람들이 스스로 분발하여 제각기 정성을 다하려 하였습니다. 그런데 요즈음에는 바른말이 날마다 성상에게 거부를 당하고 아첨하는 풍조가 남몰래 조정에서 자라나며, 강직한 자는 반드시 과격하다는 이름을 얻고 입을 다물고 있는 자는 도리어 순후하다는 평을 받고 있습니다. 이것이 전하께서 끝맺음을 잘 못하시는 일곱 번째 일입니다.
전하께서는 시험삼아 신이 드린 말씀을 가지고 자신을 반성하시어 만약 털끝만큼이라도 제 말씀에 속임이 있다면 신의 죄를 다스리시고 만일 망언이 아닐 경우에는 서둘러 반성하고 깊이 염려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경의 소를 살펴보니, 충성스럽고 강직하며 나를 근심하고 사랑하는 말이 매우 간절하여 심히 아름답게 여기고 찬탄한다. 내 어찌 가슴 깊이 새겨두지 않겠는가."
하였다.

 

6월 21일 계묘

강원도에 황충이 발생하였다.

 

도목정(都目政)을 하여 조귀석(趙龜錫)을 대교로, 이천기(李天基)를 헌납으로, 옥천 군수(沃川郡守) 정기풍(鄭基豊)을 문학으로, 공산 현감(公山縣監) 이태연(李泰淵)을 수찬으로, 충원 현감(忠原縣監) 이진(李𥘼)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장령 이성항(李性恒)이 인피하여 아뢰기를,
"신이 지평 이수함(李守諴)과 어떻게 처치할 것인지 상의할 적에 이상진(李尙眞)의 일을 모순이라 하여 여러 가지로 논란하다가 끝내 의견을 하나로 합일시키지 못하고 구차하게 동참하여 동의하였으므로 신은 실로 부끄럽게 여깁니다. 신을 파직하소서."
하니, 지평 이수함이 인피하여 아뢰기를,
"전하의 나라가 오늘 망하지 않을 경우 내일은 반드시 망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붕당의 화 때문입니다. 요즈음 조정의 분열이 날로 심해져 자꾸만 패를 갈라 원수처럼 공격하고 제각기 칼을 어루만지며 상대편을 공격하는 것만으로도 부족하여 은혜를 원수로 갚아 넘어뜨릴 계략을 꾸미고 있습니다. 만약 이런 짓이 계속된다면 전하께서는 위에서 고립되어 조정 신하들이 아래에서 사사로운 짓을 해나갈 것이니, 국가는 멀지 않은 장래에 망하게 될 것입니다. 정언 이상진은 공의(公議)는 상관하지 않고 편당만을 일삼으며 다시 시끄럽게 하고 있으니, 신은 삼가 애통스럽습니다. 더구나 간원의 계사에 대한 비답이 당초 엄한 분부가 없었는데 상진이 엄한 분부라고 하면서 감히 부당한 피혐을 하였으니, 그 계략의 속셈을 알겠습니다. 신은 ‘상진의 의논이 바르지 않으니 체직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으로 반복해서 논란하였지만 끝내는 동료와 소견이 서로 맞지 않았으니, 신을 체직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성항 등도 아울러 물러가서 물론을 기다렸다. 옥당이 【교리 홍처윤(洪處尹)·조한영(曺漢英), 부교리 조복양(趙復陽), 부수찬 홍처대(洪處大).】  차자를 올리기를,
"양사(兩司)가 모두 인혐하고 물러나서 요즘 조정 사대부들 사이에서는 ‘진실로 화합할 수 없게 되었다.’는 탄식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한때 논핵한 것으로 인해 서로 불평하다가 떠들썩하게 근거없는 논의를 일으킨 데에 불과한 것으로 이러한 일은 간혹 있었지만 온 조정이 분열하여 서로 다툰 일은 실제로 없었습니다. 신면의 상소 중에 성낸 내용이 있었으니, 한번 바로잡아 주는 것은 다만 전례를 따르는 것일 뿐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가지고 ‘분열’이니 ‘부정(不靖)’이니 하는 것은 참으로 지나친 염려입니다.
간관이 되어 우왕좌왕하였으니, 구차스럽다는 비판이 있는 것은 당연합니다. 힘써 조정하려는 뜻이 아름답지 않은 것은 아니나 처음엔 논의가 같다가 뒤에 다른 말을 하여 이미 체직되었으니 그대로 두기는 어렵습니다. 일에 따라 바로잡는 것이 풍채는 가상하나 성을 내며 많은 말을 하는 것은 너무 지나친 것입니다. 체직을 청하는 논의는 실로 공의(公議)를 따른 일인데, 어찌하여 처치가 정당성을 잃었다고 할 수 있습니까. 부표(付票)하라는 전교는 실로 뜻밖에 나온 것으로 자못 대간을 대우하는 도리에 흠이 되는 일입니다. 당초 실수한 것이 없는데 어찌 가볍게 체직할 수 있습니까. 사관(史官)을 추고하자고 청한 일은 사실 자신에게 말미암은 것이니, 감히 처치하지 못한 것은 형세가 그러했기 때문입니다. 기회를 엿보아 속을 털어놓은 것을 동료들이 좋지 않게 여기자 구차하게 동의했던 것을 부끄럽게 여긴 것은 사리상 당연합니다. 간악한 말로 선동하여 현혹시킬 계책을 이루려고 한 것은 그 정태(情態)가 매우 가증스럽습니다. 정언 유도삼, 대사간 민응형, 정언 이상진, 지평 이수함은 체차시키고 대사헌 이후원, 집의 권우, 장령 곽지흠, 지평 김시진, 장령 이성항은 출사하도록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 먼저는 ‘진실로 화합할 수 없게 되었다는 탄식이 있다.’고 하여 누그러뜨리고 이어서 ‘사실 이런 일이 없다.’고 하여 딱 끊었으니, 엄폐하는 데는 잘했다 하겠지만 종묘 사직에는 어쩐단 말인가. 세상에 ‘형혹고알(熒惑告訐)’ 네 글자가 없다면 어떤 문자를 사용해서 멋대로 상대를 공격하고 배척할 것인가. 오늘의 나랏일은 위태로워 아슬아슬하다고 하겠다. 그러나 아뢴 대로 따르겠다. 대사간 민응형은 체직하지 말라."
하였다. 민응형이 명초(命招)하여도 나오지 않자 정원이 전례대로 파직할 것을 청하니, 상이 파직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대사헌 이후원(李厚源)이 자리에 나왔다가 다시 인피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이에 후원은 물러가서 물론을 기다렸다. 옥당이 차자를 올려 자신들의 엄폐한 죄를 속히 다스려 인신(人臣)의 경계로 삼아달라고 청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6월 22일 갑진

이날 계속해서 도목정(都目政)을 하여 장응일(張應一)을 겸필선으로, 윤순지(尹順之)를 동지성균으로, 홍처량(洪處亮)을 이조 정랑으로, 김홍욱(金弘郁)을 부응교로, 이기조(李基祚)를 지춘추로, 허열(許悅)을 정언으로, 목겸선(睦兼善)을 지평으로 삼았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왕정(王政)에서 중하게 여기는 것으로는 농상(農桑)보다 앞서는 것이 없습니다. 이 때문에 공자와 맹자께서도 모두 농사철을 빼앗지 않는 것이 백성을 보존하는 급선무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더구나 금년에는 6명의 청나라 사신 때문에 민력이 이미 고갈되었으니 내년의 희망은 다만 힘껏 농사짓는 데 있을 뿐인데 하늘이 재앙을 내려 가뭄과 황충의 재해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 앞장서서 백성들을 안정시키고 진휼하는 책임은 오로지 수령에게 달려 있습니다.
공산 현감(公山縣監) 이태연(李泰淵)과 충원 현감(忠原縣監) 이진(李𥘼)은 치적이 도내에서 으뜸이어서 온 고을이 편안하고 선정이 멀리까지 소문났습니다. 그들을 사농(司農)과 소부(少府)로 부르는 것이 승진의 은전을 베푸는 일에 진실로 합당합니다마는 이러한 때에 신구 수령을 맞고 보내는 폐단 또한 적지 않아 수십 명의 농민들이 수십 일 동안 도로를 왔다갔다 하며 시간을 보내게 될 것입니다. 한 사람의 농부가 농사를 못 지으면 열 사람이 굶주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따져본다면 굶주리는 백성의 수가 얼마나 많겠습니까. 두 고을의 수령을 이미 출대(出代)하셨지만 지금에 있어서는 변통하여 한 고을에 은혜를 베푸는 것이 작은 일이 아닌 듯합니다. 이태연과 이진을 모두 잉임시키소서.
옥천 군수(沃川郡守) 정기풍(鄭基豊)은 그 성적(聲績)이 어떠한지 아직 알 수 없지만 교체하는 폐해가 공산현 등과 다르지 않으니, 역시 똑같이 시행하셔야 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예조가 【참판 이경헌(李景憲), 참의 이시해(李時楷).】  아뢰기를,
"성균관이 보고한 내용을 보건대 ‘지난번 양현(兩賢)을 공척하는 논핵이 나오자 중외의 사론이 갈라졌었는데, 이번 증광시(增廣試) 원점 때문에 많은 선비들이 모였을 때 사론(士論)이 일제히 일어나기를 「지난번 삭적된 유생 중 풀어줄 만한 약간 명은 풀어주었는데, 소두(疏頭) 유직(柳㮨)은 지금 또 벌을 받았다.」 하여, 이 때문에 제생(諸生) 수십여 명이 무단히 나갔다. 이들 유생은 유직의 소하(疏下)도 아니어서 본시 피혐할 혐의가 없는데 서로 몰려 나간 것은 터무니없는 짓인 듯하다. 나머지 유생 백여 명도 스스로 편안하게 여기지 못하고 감히 자신만 원점을 받을 수 없다고 하면서 잇달아 나갔다. 본관의 여러 관원들이 그들을 불러 재삼 달래보았지만 나갈 것을 앞장서 주장했던 유생이 끝내 들어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강제로 위협할 수도 없어 부득이 사유를 갖추어 이첩한다.’ 하였기에, 이런 뜻으로 입계합니다.
양현의 도학은 동방의 사림들에게 가장 추앙받는 바인데, 조신(朝紳)들이 한번 분열한 후로 점점 이론이 자라났으니 이는 진실로 사문의 큰 불행입니다. 선현을 모욕하다가 유림에게 죄를 얻어 한 시기 사론(士論)의 시비가 멎지 않았으나 그들의 잘못을 공개적으로 성토한 것은 자연스런 공의(公議)입니다. 상께서 새로 즉위하시어 팔도 사람들이 눈을 부비며 기대하고 있는데, 특별히 대과(大科)를 설치하여 온 나라와 더불어 경사를 함께 하니, 모든 사방의 선비들이 서둘러 의관을 갖추고 기꺼이 기일에 맞춰 과거보러 몰려들 것입니다. 그런데 저들 수십 인은 본시 유직의 상소에 참여하지도 않았으면서 한때의 사사로운 감정 때문에 감히 소란을 피우고 무단히 퇴거함으로써 원점을 중도에서 철회했을 뿐 아니라 스승의 간곡한 타이름에도 꿈쩍하지 않았으니, 이는 실로 전고에 없던 일입니다. 유생 약간 명의 소요 때문에 이런 큰 경과(慶科)를 폐지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본관(本館)으로 하여금 다시 그들을 타일러서 돌아오도록 하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예조가 【참판 이경헌(李景憲), 참의 이시해(李時楷).】  아뢰기를,
"성균관이 보고한 내용을 보건대 ‘지난번 양현(兩賢)을 공척하는 논핵이 나오자 중외의 사론이 갈라졌었는데, 이번 증광시(增廣試) 원점 때문에 많은 선비들이 모였을 때 사론(士論)이 일제히 일어나기를 「지난번 삭적된 유생 중 풀어줄 만한 약간 명은 풀어주었는데, 소두(疏頭) 유직(柳㮨)은 지금 또 벌을 받았다.」 하여, 이 때문에 제생(諸生) 수십여 명이 무단히 나갔다. 이들 유생은 유직의 소하(疏下)도 아니어서 본시 피혐할 혐의가 없는데 서로 몰려 나간 것은 터무니없는 짓인 듯하다. 나머지 유생 백여 명도 스스로 편안하게 여기지 못하고 감히 자신만 원점을 받을 수 없다고 하면서 잇달아 나갔다. 본관의 여러 관원들이 그들을 불러 재삼 달래보았지만 나갈 것을 앞장서 주장했던 유생이 끝내 들어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강제로 위협할 수도 없어 부득이 사유를 갖추어 이첩한다.’ 하였기에, 이런 뜻으로 입계합니다.
양현의 도학은 동방의 사림들에게 가장 추앙받는 바인데, 조신(朝紳)들이 한번 분열한 후로 점점 이론이 자라났으니 이는 진실로 사문의 큰 불행입니다. 선현을 모욕하다가 유림에게 죄를 얻어 한 시기 사론(士論)의 시비가 멎지 않았으나 그들의 잘못을 공개적으로 성토한 것은 자연스런 공의(公議)입니다. 상께서 새로 즉위하시어 팔도 사람들이 눈을 부비며 기대하고 있는데, 특별히 대과(大科)를 설치하여 온 나라와 더불어 경사를 함께 하니, 모든 사방의 선비들이 서둘러 의관을 갖추고 기꺼이 기일에 맞춰 과거보러 몰려들 것입니다. 그런데 저들 수십 인은 본시 유직의 상소에 참여하지도 않았으면서 한때의 사사로운 감정 때문에 감히 소란을 피우고 무단히 퇴거함으로써 원점을 중도에서 철회했을 뿐 아니라 스승의 간곡한 타이름에도 꿈쩍하지 않았으니, 이는 실로 전고에 없던 일입니다. 유생 약간 명의 소요 때문에 이런 큰 경과(慶科)를 폐지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본관(本館)으로 하여금 다시 그들을 타일러서 돌아오도록 하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6월 24일 병오

상이 하교하였다.
"전 정언 이상진(李尙眞)에게 의흥 현감(義興縣監)을, 전 지평 이수함(李守諴)에게 진보 현감(眞寶縣監)을, 장령 이성항(李性恒)에게 연풍 현감(延豊縣監)을 제수하라."

 

헌납 이천기(李天基)가 병으로 사직하면서 대각(臺閣)을 너그러이 수용하는 방도에 대해 진술하니, 이조에 계하하였다. 이조가 계속 직임을 보게 할 것을 청하니, 특별히 체직시킬 것을 명하였다.

 

비국이, 통영(統營)의 합조 첨방(合操添防)을 파하여 민폐를 제거할 것을 청하니, 상이 "시행한 지 오래 되어 갑자기 변경할 수 없으니, 우선 그대로 두라."고 하였다.

 

6월 25일 정미

헌부가 【지평 목겸선(睦兼善).】  아뢰기를,
"적신(賊臣) 효립(孝立)의 과녀(寡女)065)  가 효립의 이성 조카 심(沈)씨와 간통하여 야간에 도주하였으니, 해당 관청으로 하여금 체포하여 다스리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그 뒤에 효립의 딸과 심씨는 다 목매어 죽었다. 또 아뢰기를,
"사림이 둘로 갈라져 서로 공격하는 것이 너무 지나칩니다. 이번 경과(慶科)에 원점(圓點)을 받은 유생의 수가 수백 명도 채 못 되니, 극히 한심스럽습니다. 접때 재임(齋任) 몇 사람이 갑자기 발론하자, 삭적된 유생인 이상진(李象震) 등 8인 중에 4인은 삭적된 것을 해제하고 나머지 4인은 삭적된 대로 두었는데, 유직(柳㮨)은 삭적된 외에 부황(付黃)066)  까지 하였습니다. 그런데 재임은 그 옳고 그름을 끝내 제생들에게 물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제생들이 ‘부황의 벌은 인륜을 범한 큰 죄인에 한하여 시행하는 것으로 사론(士論)에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에게 강제로 이 벌을 가하는 것은 실로 전에 없던 일이다. 결코 하찮은 과거를 위해 구차스럽게 반궁(泮宮)에 남아 있을 수 없다.’고 하면서 잇달아 나가버렸다고 합니다.
어제 성균관에서 예조에 이첩한 것을 보니, 어떤 이는 삭적된 것을 풀고 어떤 이는 그대로 둔 것을 그냥 범칭하여 ‘해제할 만한 자는 해제하였다.’고 하였고, 부황(付黃)하여 크게 사론에 위배된 것에 대해서도 범칭하여 ‘벌을 가하였다.’ 하였는데, 매우 타당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본관(本館)과 예조는 먼저 나간 유생을 그르다고 하였는데, 그 사람을 그르다고 하면서 들어오게 하는 것은 마치 들어오기를 바라면서 문을 닫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성균관의 사장(師長)으로 있는 자가 진실로 선비들을 화합시켜 다시 돌아오게 하고 싶다면 재임(齋任)들을 잘 타이르며 벌칙부터 풀어주고 들어오기를 권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여러 차례 타일러도 끝끝내 따르지 않을 경우에는 마땅히 사실대로 예조에 보고하여 선처하도록 입계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당초 실상을 전혀 거론하지 않았으니 이미 흩어진 선비들이 어찌 다시 되돌아올 리가 있겠습니까. 대사성과 예조의 당상은 두루 조정하지 못하고 일처리를 분명하게 하지 못한 잘못을 면하기 어려우니, 중하게 추고하소서.
요즘 대각(臺閣)에서 논의가 서로 어긋남으로 인하여 한바탕 소란스러웠고, 천만 뜻밖에 세 신하를 외직에 보임한다는 명이 내려졌습니다. 대간을 대우하는 도리가 이와 같이 박해서야 되겠습니까. 이미 내리신 명을 거두소서."
하니, 답하기를,
"국자(國子)067)  와 예조가 한 행동은 모두 형편없는 처사였다. 근래 엄폐하는 병통이 이 지경에까지 이른 줄은 몰랐다. 아뢴 대로 하라. 세 신하를 외직에 보임한 것은 말감(末減)한 것이니, 번거롭게 논의하지 말라."
하였다.

 

간원이 【정언 강호(姜鎬)·허열(許悅).】  아뢰기를,
"지난번에 있은 양사의 논의가 무슨 대단한 일이었기에 점차로 격해져서 이러한 데에까지 이르렀습니까. 사용한 말이 적합하지는 않지만 넉넉하게 수용해야 하는 성상의 도리로 볼 때 진실로 이와 같아서는 안 됩니다. 무릇 임금이 아랫사람의 의견을 받아들이는 요령은 그 말을 받아들일 만하면 받아들이고 받아들일 만하지 않으면 그대로 둘 뿐인데, 어찌하여 느닷없이 벌을 가하여 밝은 세상에 흠집을 만드십니까. 이는 언로를 넓히고 대신(臺臣)을 대우하는 도리가 아니니, 이상진 등을 외직에 보임하라는 명을 환수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무리 사정(私情)과 사계(私計)에 절실하다 하더라도 양사가 어찌 이렇게까지 거리낌없이 할 수 있는가. 나는 결코 붕당에 아첨하기 위해 우물쭈물하다가 국사가 날로 잘못되어가는 것을 차마 앉아서 볼 수 없다. 그대들은 번거롭게 아뢰지 말라."
하였다.

 

정언 강호와 허열이 성상의 비답에 온당치 못한 내용이 있다는 이유를 들어 인피하고, 지평 목겸선은 "양사가 모두 들고 일어났으니, 기탄함이 없다."고 한 전교 때문에 인피하였으며, 집의 권우와 장령 곽지흠은 이미 전론(前論)에 참여한 것 때문에 인피하였는데, 모두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옥당이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양사의 제관(諸官)들은 별로 체직할 만한 잘못이 없으니, 강호·허열·목겸선·권우·곽지흠을 모두 출사시키소서."
하니, 상이 그대로 따랐다.

 

함경 감사 정세규(鄭世規)가 치계하기를,
"역질이 지나간 뒤에 가뭄과 황충이 너무 심한데, 도내에 정배된 죄인 중 석방되지 않은 자가 아직도 많습니다. 마땅히 너그럽게 용서하시어 화기(和氣)를 부르고 재앙을 사라지게 하는 도리를 다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요즈음 가뭄과 황충의 재해는 그 죄가 나 한 사람에게 있지 아랫백성들에게 무슨 죄가 있겠는가. 더구나 북로(北路)068)  에 내린 벌은 치우치게 혹독하기 때문에 생민들을 생각할 적마다 내 몸이 아픈 듯하다. 도신(道臣)의 치계가 실로 일리가 있으니, 특별히 비상한 은전을 베풀어 따로 기록한 죄인을 모두 석방하도록 하라."
하였다.

 

숙릉 참봉(淑陵參奉) 진익성(陳翊聖)이 상소하여 빈과(贇科)를 베풀 것을 청하였는데, 묘당이 창설해서는 안 된다고 아뢰니, 상이 이를 따랐다. 【빈과(贇科)란 문과와 무과를 다 갖춘 과거를 말한다.】

【태백산사고본】 4책 4권 24장 A면【국편영인본】 35책 437면
【분류】정론-정론(政論) / 인사-선발(選拔)

ⓒ 한국고전번역원

 

전에 영중추부사 김육(金堉)이 양서(兩西)에 전화(錢貨)를 유통시킬 것을 주장했었는데, 이때 진위사(陳慰使)로 청나라에 갔다가 자신의 노자로 전화 15만 문(文)을 바꾸어 돌아오다가 의주에 이르러 계청하기를,
"이 전화를 평양(平壤)과 안주(安州)의 도회지에 나누어 두고 먼저 시범적으로 사용하여 통용시킬 만하거든 즉시 산에서 돈을 주조하여 계속 통용시키는 것이 편리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상이 하교하였다.
"가뭄이 날로 심해지고 삼복더위가 타는 듯한데 감옥살이의 고통이 말할 수 있겠는가. 승지는 감옥을 돌아보고 죄가 가벼운 자는 석방하라."

 

6월 26일 무신

대사간 민응형이 시의(時議)에 배척을 받자 상소하여 체직을 청하니, 답하였다.
"아, 오늘날 국사는 해나갈 수가 없구나. 반드시 당에 붙어서 아첨해야만 겨우 용납받고 그렇지 않으면 모두가 있는 힘껏 성내고 배척하며 헐뜯고 욕하기를 기탄없이 하니, 통탄스럽기 그지없다. 그대에게 체직시킬 만한 잘못이 없지만 이렇게 굳이 사직하니, 우선 그대의 뜻에 부응하겠다."

 

진위사 김육이 환조(還朝)하였다. 상이 불러 보니, 김육이 나아가서 아뢰기를,
"신은 근력과 재지가 이미 다하였으니, 조정에 남아 있은들 무슨 보탬이 되겠습니까. 더구나 칠십에 치사하는 것은 옛 성현의 가르침입니다. 신은 삼가 고의(古義)에 따라 즉시 물러가기를 원합니다."
하니, 상이 타이르고 윤허하지 않았다. 이튿날 김육은 결국 양주(楊州)로 떠났다.

 

6월 27일 기유

동지성균관사 윤순지(尹順之)가 아뢰기를,
"어제 저녁에 삼가 들으니, 성균관으로 되돌아온 선비들이 대간의 계사 때문에 식년 원점 유생(式年圓點儒生)과 함께 일시에 나갔으며 대사성은 거듭 대평(臺評)을 입어 행공할 수 없다고 합니다. 신은 이 말을 듣고 놀라 이른 아침 본관(本館)으로 가서 제생을 불러 모았더니 재임(齋任) 6인만이 재(齋)를 지키고 있었는데, 그들도 원점은 하지 않았습니다. 신이 여러 가지로 타이르면서 돌아올 것을 권유하였더니, 이구동성으로 대답하기를 ‘사장(師長)이 여러 제생들을 위해 진정책을 다방면으로 강구한 결과 차츰차츰 돌아와 60∼70인 정도까지 이르렀는데 뜻밖에도 사장이 백간(白簡)을 입게 되었다069)  . 그 까닭을 캐보면 이유가 제생들에게 있는데 어찌 아무런 죄도 없는 듯이 태연스레 재(齋)에 남아 있을 수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또 대각의 평이 편파적이었음을 말하고 돌아올 희망은 조금도 없다고 하였습니다. 약간 명의 재임이 아직 관을 떠나지 않고 있지만 재사(齋舍)에만 들 뿐 식당에는 들어가지 않으니, 성균관을 텅 비운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대저 당초의 조처가 비록 경솔하긴 했지만 선현을 욕하고 매도한 것에 대해 어찌 공개적으로 성토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먼저 나간 선비는 유직의 상소와는 관련이 없으니, 시비의 소재는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먼저 나간 자가 돌아오지 아니하면 뒤에 나간 자가 불안한 것은 진실로 형세상 당연한 것입니다. 먼저 나간 선비들에게 소요를 일으킨 단서가 있기는 하지만 공자의 제자에도 광견(狂狷)070)  의 폐단이 있었으니, 너무 비난할 것은 못 됩니다. 더구나 이번 증광시(增廣試)는 여느 과거와는 다른 것입니다. 즉위하신 원년에 이런 경사에 참여하도록 한다면 배우는 사람치고 누가 나와서 벼슬하고 싶어하지 않겠습니까. 자그마한 의견의 차이로 인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점점 더 악화시켜 이러한 지경에까지 이르게 하였습니다. 과거 볼 시기가 이미 임박하여 남은 날이 많지 않으니 사기를 북돋우는 데 힘써 꺾이거나 좌절하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이 진실로 오늘날에 해야 할 급선무입니다. 신은 겸임(兼任)인 까닭에 실관(實官)과는 달라서 권하고 타이르는 방법 외에 다른 대책이 없습니다. 마땅히 대사성으로 하여금 속히 임무를 살피도록 하는 한편, 예관에게 하교하여 별도로 유시를 전하게 하소서."
하니, 대신(大臣)과 의논해서 처리하라고 답하였다. 영의정 이경여(李敬輿)는 의논드리기를,
"공제(功制)071)  가 아직 끝나지 않아 감히 의논드릴 수 없으니, 추후에 작은 차자를 올려 저의 견해를 아뢰겠습니다."
하고, 우의정 조익(趙翼)은 의논드리기를,
"대사성이 출사하기를 기다려서 그로 하여금 타이르도록 하되, 과거일이 박두하였으니 변통하여 원점(圓點)을 감하여 주고 과거에 응시하도록 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그대로 따랐다.

 

지평 목겸선(睦兼善)이 인피하기를,
"성균관의 계사를 보니, 대간이 매우 편파적이었다고 하였습니다. 신은 남들의 비판을 무릅쓰고 대략 그 전말을 아뢰겠습니다.
대저 문묘 종사에 대한 논의는 유래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옳고 그른 것에 대한 견해는 사람마다 같지 않습니다. 그르다고 하는 의견이 옳다고 하는 의견에 반드시 해롭지는 않으며, 옳다고 하는 의견이 그르다고 하는 의견에 반드시 해롭지는 않으니, 협박하여 몰아붙이거나 구차스럽게 동의만 하지 않는다면 옳다고 하는 자가 그르다고 하는 자를 어찌 반드시 깊이 배척하겠습니까.
지금 선비들을 권유하는 대책으로는 ‘조정(調停)’과 ‘진정(鎭靜)’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으니, 논의에 대한 시비는 논할 바가 아닙니다. 그런데 지금 권유의 책임을 맡은 자는 그 계책이 이에 미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말하기를 ‘공개적으로 성토한 것은 실로 공의(公議)를 따른 일이었다.’느니, ‘선현을 모욕했으니 어찌 공개적으로 성토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느니, ‘유생 약간 명의 소요 때문에 이런 중대한 과거를 폐지할 수 없다.’느니 하였습니다. 지금 만약 유직(柳㮨)·이상진(李象震)과 함께 상소한 유생 및 성균관에서 전후로 나간 유생을 제외하고 그 나머지 사람만 과거를 보여 인재를 뽑는다면 공정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오로지 성상께서 관대하신 말씀으로 정성스럽게 타일러서 모두 함께 과거에 나오도록 한다면 중외의 많은 선비들이 감격하여 고무될 뿐만 아니라 진실로 국가에 매우 다행스런 일이 될 것입니다. 신은 이것이 염려되어 사실에 의거하여 논계하다가 도리어 편파적이라는 비판을 받았으니, 결코 그냥 무릅쓰고 있기가 어렵습니다. 신을 체직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겸선은 물러가서 물론을 기다렸다. 집의 권우와 장령 곽지흠 등이 처치하여 아뢰기를,
"요즘 반궁(泮宮)의 일은 참으로 작은 염려가 아닙니다. 그러나 옛부터 위엄으로 제압할 수 없는 것이 유생이니, 잘 권하고 타이르는 수밖에 없습니다. 본관과 해조가 이미 권유하라는 뜻으로 아뢰었으니 그 결말을 기다리는 것이 옳거늘 경솔하게 사장(師長)을 죄주자고 논핵하여 많은 유생들을 불안하게 해 일을 더욱더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경솔하게 소란을 일으킨 실수는 면하기 어려우니, 지평 목겸선을 체직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대각(臺閣)에 있는 자가 미진한 문제를 바로잡는 것은 되도록 많은 선비들에게 억울함이 없도록 하려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그의 직분이다. 또 만약 경솔하다고 생각하여 말하지 않는다면 장차 입을 열게 될 날이 없을 것이니, 어떻게 깊이 허물할 수 있겠는가. 나는 체직까지 시킬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그대들의 뜻이 이와 같다 하니, 자못 괴이하다. 하지만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상이 하교하였다.
"이번 가뭄이 갈수록 더욱 심해지고 황충의 재해마저 없는 곳 없이 발생하고 있는데, 서북 지역이 더욱 심하다. 덕이 부족한 내가 외람되이 큰 기업을 지키고 있으므로 그 혜택이 아 랫백성들에게 미치지 못하고 단지 고생만 시키고 있다. 가을에도 풍년의 가망이 없으니, 불쌍한, 우리 백성들이 어떻게 이 해를 넘기겠는가. 조용히 생각해보니, 그 책임이 나 한 사람에게 있다. 밤낮으로 근심하고 마음을 졸여 마치 내 몸이 아픈 듯 편한 곳이 없다. 승지는 널리 직언(直言)을 구하는 뜻으로 내 대신 교서를 초안하여 나의 미치지 못하는 점을 보충하도록 하라. 또 중외에 명하여 일반 옥사를 신속히 처리하여 지체됨이 없도록 하라. 기도가 비록 말절이기는 하지만 이것 역시 소홀히 할 수 없으니, 해조로 하여금 마땅히 행해야 할 기도를 미처 행하지 못한 것이 있으면 즉시 거행하게 하라."

 

6월 28일 경술

홍청 감사(洪淸監司) 김경여(金慶餘)와 은율 현감(殷栗縣監) 박안기(朴安期)가 사조(辭朝)하니, 그들을 직접 유시한 뒤에 보냈다.

 

대사성 정유성(鄭維城)을 추고하라는 전지에 대해 하교하였다.
"관학(館學)의 많은 유생들이 흩어져 나간 지 이미 여러 날이 되었으니, 그냥 내버려 둘 작은 일이 아니다. 대사성이 비록 추감(推勘)은 받았지만 이미 행공(行公)이라고 하였으니, 속히 출사하여 그들을 권유해서 되돌아 오게 하라."

 

6월 29일 신해

상이 하교하기를,
"예로부터 유생들이 어떤 죄악에 대해 부황(付黃)하는 벌을 시행하였는가? 승지들은 의논하여 아뢰어라."
하니, 정원이 회계하기를,
"옛날에는 부황(付黃)이 삭적(削籍)보다 가벼웠는데 지금은 중벌이 되었습니다. 지난번 광해조 때에 유생들이 대사헌 정인홍(鄭仁弘)이 선정신(先正臣) 이언적(李彦迪)을 비방한 죄를 들어서 부황한 일이 있고, 요즘에는 폐조(廢朝)의 흉도들을 다 부황하였다고 합니다."
하였다.

 

대사성 정유성(鄭維城)이 상소하기를,
"신이 계속 태학(太學)에 나가 돌아올 것을 권유하였더니 앞서 나갔던 약간 명은 돌아올 뜻을 보였으나 앞장서서 주장했던 몇 사람이 강력하게 저지하기 때문에 들어오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뒤에 나간 유생들이 점점 모여서 거의 60여 명이 되었을 무렵 신의 처사가 불분명했던 탓으로 갑자기 대각의 탄핵이 일어나자 모였던 유생들이 다시 흩어지게 되었으니, 신의 죄가 이에 이르러 더욱 커지게 되었습니다. 애당초 소요를 일으킨 곡절을 조금도 가리거나 편든 일이 없었는데, 대론에 대한 비답을 보니 ‘엄폐했다.’고 하교하셨습니다. 엄폐하는 것은 신하에게 있어 가장 큰 죄인데 신이 이 죄를 지었으니, 만번 죽어 마땅합니다. 그리고 대신(臺臣)이, 신이 범칭해서 벌을 주었다고만 했지 부황했다는 말을 거론하지 않은 것을 가지고 신의 죄안(罪案)을 삼았습니다. 그러나 재중(齋中)에서 내리는 벌은 ‘손삭(損削)’과 ‘부황(付黃)’만 있을 뿐이니, 손삭된 유생에게 벌을 더주었다고 했다면 이른바 부황했다는 것임은 말하지 않아도 자명한 것입니다. 그리고 부황의 벌은 당초 ‘장원불공(壯元不恭)’에서 창시된 것으로 전에 선정을 모욕한 사람에게도 이 벌을 주었으니 반드시 대벽죄(大辟罪)에 해당되어야만 이 벌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목내선(睦來善)과 이희년(李喜年)은 전의 조관(朝官)으로서 원점(圓點)에 참여하였으니, 재중의 공사에는 서로 간여하지 않는 것이 전례입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이 주동하여 여러 사람이 성균관을 나갔으니, 소요를 일으킨 단서는 실로 이들에게서 기인한 것입니다. 그뒤 돌아오려고 개유하는 말을 듣던 많은 유생들도 역시 그들의 저지로 인하여 마음대로 할 수 없었습니다. 신이 처음부터 직접 그들의 이름을 거명해서 배척하지 않은 것은 어다까지나 권유해서 돌아오게 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법을 집행하는 대관은 조금도 편드는 마음이 없어서 비록 아우나 조카라도 사실을 엄폐하고 거론하지 않는 경우에는 미워하는 법이니, 강직하게 탄핵하는 마당에 신이 어느 곳으로 죄를 피하겠습니까. 거듭 탄핵을 입은 신이 뻔뻔스레 반궁에 들어와 다시 유생들을 대하여 이 일을 거행한다면 이는 매우 염치 없는 짓입니다. 자애로운 성상께서는 신의 절박한 사정을 헤아려 체직을 허락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오늘의 제생(諸生)은 바로 후일 조정에 설 선비가 아닌가. 그러니 의당 힘써 조정하여 함께 화합하도록 한다면 이보다 더 아름다운 일은 없다. 그대는 사직하지 말고 모름지기 국사를 염려하여 제생들을 권유하고 선처해서 그들이 모두 즐거운 마음으로 과거에 응시하도록 함으로써 국가가 널리 인재를 취하는 길에 흠이 없도록 하기 바란다."
하고, 그 소를 묘당에 내려 의논하도록 하였다. 영의정 이경여와 우의정 조익이 아뢰기를,
"선비는 국가의 원기(元氣)이며 과거는 인재를 등용하는 중요한 방도입니다. 하물며 성인이 처음 일어나 만물이 다 바라보며 크게 예를 베풀어 사방 사람들과 경사를 함께 하는 때에 있어서이겠습니까. 불행하게도 사론이 엇갈려 중외가 안정되지 않아 현관(賢關)072)  이 거의 비고 영남 유생 들이 앞장서 물러가니, 성상의 즉위를 기념해 시행하는 성대한 일이 장차 썰렁해지게 되었습니다. 유생들이란 위엄으로 제어하기 어렵고 제왕의 도량은 포용하는 것을 더욱 귀하게 여깁니다. 그러니 사유(師儒)와 장관들로 하여금 직접 성지를 받들어 선비들을 타이르고 조용히 개도하게 하되, 유직에게 처음 내린 벌만은 그대로 두어 현인을 무고한 죄를 징계하도록 하고 첨황(籤黃)만은 제거하여 분을 풀어줌으로써 함께 힘써서 나아가자는 뜻으로 자상하게 경계하고 권유하는 것이 마땅한 방법일 듯합니다. 영남(嶺南)으로 말하면 도신(道臣)을 시켜 사사로이 치우친 마음을 버리고 정성껏 조정의 뜻을 받들어 도내의 유생들을 널리 타이르게 하신다면 어찌 끝까지 깨닫지 못하고 조정의 명을 거스리면서 이 막대한 행사를 방해하겠습니까. 영남 선비들의 수는 만여 명에 이릅니다. 유직의 소하(疏下)는 십분의 일에 불과한데 온 도의 선비들이 모두 과거에 응하지 않는다는 말은 매우 괴이합니다. 신석형(申碩亨) 등은 선현을 변무(辯誣)하다가 도리어 도에서 쫓겨나는 벌을 받았습니다. 선비의 풍조가 이러하니 참으로 잘못된 것입니다.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옛날에는 자제들이 부형을 따르더니 요즘에는 부형이 자제를 따르는데, 이는 근본을 알지 못해서 그런 것이다.’ 하였고, 한 고조(漢高祖) 같은 이는 패(沛) 땅을 얻으려고 백서(帛書)를 부형들에게 주었는데 그 부형들이 자제들을 설득하여 데리고 그를 따랐습니다. 그리고 사마상여(司馬相如)가 파촉에 사신으로 갔을 때에도 부로들에게 글을 써서 책한 뒤에야 그 자제들이 따랐던 것입니다. 그러니 존비와 상하의 구분이 있은 뒤에야 순종하여 혼란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선비들이 한쪽으로 어긋나게 되는 것이 어찌 부형들의 바람이겠습니까. 임금이 명하고 아버지가 가르치며 스승이 타일러도 따르지 않는다면 이 세 분을 한결같이 섬겨야 한다는 뜻에 과연 어떻다고 하겠습니까. 피차를 막론하고 모두 개유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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