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1일 임자
상이 영사전(永思殿)에서 삭제(朔祭)를 행하였다.
남선(南銑)을 대사헌으로, 민응형(閔應亨)을 부제학으로, 김익희(金益熙)를 대사간으로, 이지항(李之恒)을 승지로, 김응조(金應祖)를 응교로, 홍처대(洪處大)를 교리로, 유준창(柳俊昌)을 헌납으로, 오두인(吳斗寅)·이유석(李惟碩)을 지평으로 삼았다.
이때에, 상이 편치 않은 지 이미 오래 되었고 날씨가 또 무더웠으므로 정원이 경연(經筵)을 정지할 것을 청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다음날 주강(晝講)에 나아가 《서전》 순전(舜典)을 강하였다.
평안 감사 심지원(沈之源), 북병사(北兵使) 신경호(申景琥), 병조 참판 김남중(金南重) 등을 파직시켰다. 이때에 수령 천거법(守令薦擧法)을 거듭 밝혀 잘못 천거한 자를 죄주었는데, 이번에 지원 등이 천거한 사람이 모두 불법 행위를 하다가 죄를 받았기 때문에, 모두 좌죄(坐罪)되어 파직된 것이다.
경상도에서 다시 공도회(公都會)073) 를 열고 제술 시험을 보였으나 도내의 유생들이 모두 시험에 응하지 않았다. 이때에 태학생이, 본도 유생 유직이 진소하여 현인(賢人)074) 을 무함하였다는 이유로 이름을 유적(儒籍)에서 삭제하자, 유직 등은 신석형(申碩亨)이 자기들의 의논을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떼 지어 일어나 그를 축출하였다. 조정이 그런 폐습을 징계하려고 본도 감사 민응협(閔應協)에게 조사해서 다스리게 했는데, 그 무리들이 모두 분개하여, 시험날에 한 사람도 응시하지 않았다. 민응협이 그 일을 보고하자, 예조가 아뢰기를,
"영남의 사습(士習)이 매우 아름답지 못하긴 하나 위엄으로 제압해서는 안 되니,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여러 유생들을 잘 타일러 가능한 한 진정시키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부교리 정두경(鄭斗卿)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신이 삼가 생각건대 임금은 국량이 크지 않아서는 안 되며 결단을 과단성 있게 내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국량이 크면 덕치(德治)를 행할 수 있고 결단을 과단성 있게 하면 기강을 확립할 수 있습니다. 그렇긴 하지만 이 두 가지에도 걱정이 따르니, 국량이 크면 너무 은혜롭게 용서해 주는 잘못이 있게 마련이고 결단을 과단성 있게 하노라면 멋대로 하는 폐단이 빚어지게 마련입니다. 한 장제(漢章帝)가 두헌(竇憲)에게 죄를 내리지 않은 것075) 은 국량이 큰 데서 빚어진 잘못이었고, 진왕(秦王) 견(堅)이 진(晋)나라를 정벌한 것076) 은 결단을 과단성 있게 한 데서 빚어진 잘못이었습니다. 따라서 임금은 반드시 시비를 분명하게 살펴야만 이와 같은 걱정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신이 삼가 전하를 살펴 보건대, 임금으로서의 국량을 지니고 계시면서도 의심해선 안 될 것을 의심하기도 하고, 임금다운 결단성이 있으면서도 결단해야 할 것을 결단하지 못하고 계십니다. 의심해선 안 될 것을 의심하면 규괘(睽卦) 상구효(上九爻)의 걱정이 있게 되고, 결단을 내려야 할 때 결단하지 못하면 곽공(郭公)의 호오(好惡)처럼 될 걱정077) 이 있게 되는데, 신은 이것을 병을 낫게 하는 제일의 약석으로 삼고자 합니다.
《예기(禮記)》에 이르기를 ‘형제(兄弟)의 아들은 유자(猶子)라고 한다.’ 하였으니, 소현(昭顯)의 아들은 바로 전하의 아들인 것입니다. 부자간에는 죄가 서로 미치지 않으므로 주공(周公)이 채숙(蔡叔)을 내치면서도 그 아들을 경사(卿士)로 삼았고, 기예(冀芮)가 진 문공(晉文公)을 죽이려 하였으나 문공은 그 아들을 대부(大夫)로 삼았으니, 이것이야말로 지극히 공정한 도라 하겠습니다. 소현의 아들의 경우 그 어미가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어린 아이와는 상관없는 일이니, 전하께서 궁중에서 보살펴 기르면서 친아들과 똑같이 대해 주시면 만세(萬世) 후에도 반드시 성덕(聖德)을 일컬을 것입니다.
공자(孔子)가 이르기를 ‘천자(天子)에게 간쟁하는 신하 7인만 있으면 무도(無道)하더라도 천하를 잃지 않을 것이며, 제후에게 간쟁하는 신하 5인만 있으면 무도하더라도 그 나라를 잃지 않을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곧은 절개로 과감하게 말하는 선비를 소홀히 대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날의 일로 말한다면, 홍무적(洪茂績)·이응시(李應蓍)·심노(沈𢋡)가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성상께서 즉위하시어 이 세 신하를 석방하셨으니 온 나라 사람으로서 그 누가 경하하지 않았겠습니까. 다만 이미 석방의 은혜를 받았는데도 오래도록 조적(朝籍)에 통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옳지 않다고 신은 삼가 생각합니다. 그리고 무적의 경우는 나이가 70을 넘어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는데, 혹시라도 바람 앞의 촛불처럼 갑자기 죽기라도 한다면, 성상께서는 반드시 임조(臨朝)의 탄식이 있을 것입니다.
삼가 여항(閭巷)의 의논을 듣건대, 이만(李曼)의 죄에 대해 대부분 억울하다고들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재상 이경석(李景奭)과 판서 조경이 귀양간 것에 대해서도 사람들이 모두 탄식하면서 애석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견제받는 곳이 있으니 어찌할 도리가 없다고 하더라도 이만의 경우는 우리가 조종하기에 달렸는데, 석방한다고 해서 무슨 관계가 있겠습니까.
사람의 슬픔 중에서 이별보다 더한 것은 없으니 부모가 자식을 이별하고 자식이 부모를 이별할 때, 그 슬픔이 어떠하겠습니까. 같은 나라 안에서 서로 이별하는 것도 가슴이 아픈 일인데, 더구나 다른 나라로 가는 경우이겠습니까. 이번에 북으로 시녀(侍女)를 보내는 일이 부득이한 것이기는 하지만 어찌 원한이 없겠습니까. 전하께서 유사(有司)로 하여금 특별히 가속(家屬)을 보살펴 주게 한다면, 또한 그 마음을 위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올해 가뭄이 극심한데, 이 일이 비록 작은 것이라고 하더라도 재변을 사라지게 하는 한 방법이 또한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가납(嘉納)하여 특별히 홍무적을 서용하게 하고, 유사에게 명하여 시녀의 부모를 각별히 보살펴 주되 봄가을로 먹을 것을 대주고 호역(戶役)을 덜어주며 급복전(給復田)을 주게 하는 동시에 족속(族屬)들의 천역(賤役)을 모두 면제해 주게 하였다.
집의 권우(權堣)가 상소하여 간쟁하는 말을 받아들이고 어진 신하를 대우하고 시비를 밝히고 형상(刑賞)을 신중히 할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가상(嘉尙)하다는 두 글자로 답하였다.
7월 3일 갑인
상이 주강에 나아가 《서전(書傳)》 대우모(大禹謨)를 강하였다.
영의정 이경여(李敬輿)가 상차하기를,
"하늘의 재이(災異)와 사물에 나타나는 변고가 어느 것인들 재변이 아니겠습니까마는, 가뭄으로 곡식 싹이 말라죽고 황충이 뿌리를 갉아먹고 있으므로 백성의 양식이 떨어져 생민(生民)이 남김없이 죽고 말 형편이 되었으니, 오늘날처럼 절박하게 피부에 와 닿는 때가 어찌 있었겠습니까.
더구나 성상께서 왕업을 이으신 기원(紀元)의 해에 명(命)을 바루고 길하게 하고 밝게 할 때를 당하여 의(義)를 행함에 잘못이 없고 덕택(德澤)이 더해 가고 있는데도 천심(天心)이 기쁘게 여기지 않고 거듭 재해(災害)만 내리니, 마치 말세의 어지러운 나라가 망해가는 때와 같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온 나라 사람의 의혹이 더욱 심해지고 있으니 우러러 탄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론을 들어 보건대 다들 ‘전하께서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돌보며 어진이를 좋아하고 선비에게 예우하며 간언을 받아들이고 직언을 용납하는 정성이 보위에 오르시던 처음보다 점점 못하니, 어쩌면 위란(危亂)의 지경에 이르지나 않겠는가.’ 하였습니다. 아, 하늘을 공경하되 혹시라도 상제(上帝)를 대하듯이 하는 마음에 틈이 있게 되면 덕이 순수하게 되지 못하고 백성을 보살피되 혹시라도 다친 사람 보듯이 하는 마음에 부족함이 있으면 인(仁)이 확충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진이를 좋아하고 선비를 예우하되 처음처럼 하지 못하는 것은 이해(利害)에 마음이 흔들리고 세속의 의론에 본심을 빼앗겨서 그런 것이고, 간하는 말을 받아들이고 직언을 용납하되 시원스럽게 수용해야 하는 도리에 부끄러운 점이 있는 것은 성상의 도량이 확충되지 않고 사심을 이기지 못해서 그런 것입니다.
아, 천명(天命)은 믿기 어려운 것이며 인심(人心)은 떠나기 쉬운 것입니다. 하늘은 높이 위에 있으나 매우 분명하게 관찰하고 있으며 백성은 아래에 있으나 지극히 어리석으면서도 신령스러운 존재입니다. 임금의 한 마음은 그 기미(幾微)가 매우 은미하지만 선악(善惡)의 효력은 그림자와 메아리보다도 빠르며, 일상 행동이 지극히 비근한 것이라 하더라도 추기(樞機)의 발동은 천지(天地)를 감동시키기까지 하니, 감응(感應)의 이치는 속일 수 없는 것입니다.
근래의 일을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서쪽 이웃에서 힐난하는 말을 하자 온 나라가 어쩔 줄 몰라했으나 성덕(聖德)은 이지러지지 않았고 뭇 신하들은 화목하였으며, 입대(入對)하고 영준(英俊)을 연방(延訪)함에 한 집안 식구처럼 뜻이 합치되어 나랏일을 의논할 때 형세가 같은 배를 탄 것과 같았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벽력과 같은 임금의 위엄이 한번 진동하자 기상(氣象)이 갑자기 변하여 말씨는 화평(和平)을 잃고 일은 상리(常理)에 어긋나 귀양보내는 형벌이 갑자기 잠깐 사이에서 나오고 말았습니다.
임금은 날이 갈수록 억세어지기만 하고 신하의 도는 이루어지지 못한 결과 상하가 통하지 않게 되어 비색(否塞)한 형상이 이미 드러났습니다. 그리하여 말을 하고 조치하는 것들이 혹 인심(人心)에 어긋나고 항간의 논의를 비등하게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이에 영합하여 구차하게 용납되려는 무리들이 눈썹을 치켜올리며 진출할 기회를 노리고, 염치와 절의를 지키며 스스로 아끼는 선비는 자취를 거두어 물러날 것을 생각하고 있으니, 장차 정직과 진실은 용납되지 않고 아첨하고 약삭빠른 자가 득세하게 될 것입니다. 전하께서 마음에 반성해 보시고 물정(物情)을 굽어 살펴 보시면, 사기(士氣)가 꺾이고 상하여 입다물고 말하지 않고 있는 진상이 아주 가까운 곳에서부터 저절로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아, 이전(二典)·삼모(三謨)의 훈계가 어느 것인들 귀감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기분좋게 하는 말이 있거든 비도(非道)가 아닌지 돌아보고 감정이 상하는 말이 있거든 도(道)가 아닌지 살펴보라.’는 말이야말로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제일의 묘방(妙方)이고, ‘임금된 것이 즐거운 게 아니라, 내 뜻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즐겁다.’고 한 것이야말로 옛날이나 지금이나 나라를 망친 변함없는 길입니다. 따라서 이런 병통을 다스리려고 한다면 다시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역상(易象)의 ‘분함을 경계하라.’고 한 말과 정자(程子)의 ‘노여운 일을 당했을 때에 노여움을 잊고 시비(是非)를 관찰하여 다스리라.’는 교훈이야말로 유부(兪跗)와 편작(扁鵲)의 절묘한 비결인데, 어찌하여 고황(膏肓)의 병에 시험해 보지 않으십니까.
옛날 용렬했던 임금이라 하더라도 모두 조종(祖宗)의 부탁을 받고 억조(億兆)의 군사(君師)가 되었는데, 누군들 제 몸을 손상하고 나라를 망하게 하여 천하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하는 신세가 되고 싶어 했겠습니까. 다만 자기 한 몸의 사심을 참아내지 못하고 스스로 생각하기를 ‘군상(君上)으로서 어떻게 신하에게 굴할 수 있겠는가.’ 한 나머지 뇌정(雷霆)과 같은 임금의 위엄을 가지고 사람에게 포학을 부려 신하들이 감히 대들지 못하게 하면서 한 때의 쾌감을 맛보았을 뿐 후환(後患)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용렬한 임금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명철한 임금이라고 불리워지는 자들도 옛 성인의 글을 배우고 터득하여 이치로써 자기 욕심을 이기지 못하면 이 화를 면하는 경우가 드물어 똑같이 망하고 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중화(重華)078) 가 자기의 사욕을 버리고 남의 선을 취하고, 대우(大禹)가 훌륭한 말에 절을 하고, 성탕(成湯)이 간언(諫言)을 어기지 않은 것을 가지고 후세에서 법으로 삼고 백왕(百王)의 준칙(準則)으로 삼는 이유인 것입니다. 전하께서 지난일을 점검하고 스스로 반성해 보실 때, 과연 제대로 치(治)와 도(道)를 똑같이 해서 세 성인(聖人)에게 부끄러움이 없다고 여기십니까. 남들이 아는 곳은 혹 말해 줄 수도 있겠지만 남이 모르는 곳에 있어서는 더욱 깊이 살피셔야 마땅합니다.
아, 왕자(王者)는 임금 자리에 나아가서 하늘의 섭리를 본받아 도를 행하는 것입니다. 북신(北辰)079) 이 제 자리를 잡으면 뭇 별들이 옹위(擁衛)하면서 각각 자신의 별자리를 지켜 안팎이 뚜렷이 구별되는데, 임금의 도에 있어서도 이와 아주 흡사합니다. 난의 계제(階梯)를 막으려면 반드시 궁금(宮禁)을 엄중히 해야 하고 공도(公道)를 넓히려면 반드시 개인적으로 통하는 길을 막아야 합니다. 임금은 구중궁궐 깊은 곳에 거처하여 아득히 홀로 있는 상태입니다. 그러나 듣지 못하는 것을 듣고 싶어하고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싶어하는 것은 똑같은 사람의 심정이니, 어찌 귀하고 천함에 따라 다를 것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정치를 잘 해보려는 임금은 반드시 복심으로서의 역할을 공경(公卿)에게 부탁하고 이목(耳目)의 기여를 대각(臺閣)에게 책임 지우는 것이니, 이 때문에 임금의 눈이 밝게 되고 귀가 통달하게 되어 겉과 속을 환하게 알게 됨으로써 조금이라도 사사(私邪)로운 누(累)가 그 사이를 교란할 수 없게 되는 동시에 궁(宮)과 부(府)가 일체(一體)가 되어 나라가 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난을 부르는 임금은 반드시 이와는 정반대의 방법을 취하며 다른 사사로운 길에 맡겨버리고 맙니다. 그럴 경우 그들은 항간에 떠도는 이야기와 중요하지도 않은 자질구레한 이야기를 가지고 먼저 임금의 마음을 시험하여 동태를 관찰한 다음, 얕은 데에서 깊은 곳으로 점점 들어가 일단 으슥하고 음침한 소굴을 만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뒤에는 간사하고 편벽된 길을 잇따라 열어 흑백(黑白)을 가리지 못하게 혼란시킴으로써 임금의 귀를 현혹케 하는데, 이렇게 되면 시비(是非)와 형상(刑賞)을 암암리에 자신이 주장하는 형세가 자연히 이루어지면서 나라도 이에 따라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전하께서도 역대(歷代)의 득실(得失)을 살펴 보시면 반드시 이 두 가지에 대해 개연(慨然)한 느낌이 들면서 경계되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그렇긴 하지만 천하의 일이란 모두 은미한 데를 따라 나타나고 작은 것이 모여 큰 것을 이루게 되는 것인 만큼 은미할 적에 막고 조짐이 있을 때 끊어야 하니, 반드시 그 시초를 삼가야 하는데, 싫어하지 않으면서도 엄하게 하고 신중히 하여 용서하지 말아야 합니다. 속으로 분류해 본다면 어찌 근습(近習)뿐이겠습니까. 정로(正路)를 말미암지 않는 것은 모두 곡경(曲徑)인데, 나라에 화를 끼치는 방법은 시대마다 각각 다릅니다. 전하께서 표준을 세우고 왕위를 바루시어 솔선 수범하여 아랫사람들을 부리고 계시는데 궁액(宮掖)과 외사(外舍)가 동떨어진 상황에서 보잘것없는 신이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이 진정 지나친 염려일 수도 있습니다만, 온수(溫樹)080) 에 대한 말이 혹 외간에 전파되면 낙함(落函)의 폐단이 금내(禁內)에 깊어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성상의 마음이 일단 바루어지게 되면 바깥의 간사한 자가 진출을 구할 길이 없게 될 것이니 순수한 지치(至治)의 기반이 실로 여기에서 마련될 것입니다. 어리석은 신이 못내 일에 앞서 누누이 말씀드리는 까닭은 생각이 혹 해이해져 문호(門戶)의 빗장이 열리게 될 경우 신과 같은 사람이 1백 명이 있어 아무리 힘을 다해 두루 방어하고자 하더라도 모든 물줄기가 바다를 쏟아져 들어가는 것과 같은 상황이 되어 어찌할 수 없게 될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아직 서리가 내리지 않았는데도 얼음이 얼까 걱정하는 것이 망발인 듯도 싶습니다만, 한 번 더 내다보고 성찰을 하신다면 그래도 조금의 도움은 될 것입니다.
아, 옥백(玉帛)의 예의를 갖추어 어진이를 부르는 것은 명철한 임금이 먼저 해야 할 바입니다. 그러므로 선묘조(宣廟朝) 때에는 제일 먼저 문순공(文純公) 이황(李滉), 문간공(文簡公) 성혼(成渾)과 일사(逸士)인 성운(成運)·조식(曺植), 그리고 그밖에 이항(李恒)·민순(閔純) 등을 불러서 대관(大官)으로 높여 주기도 하고 대간에 배치하기도 했으니, 그들의 뜻을 끝까지 펴도록 해 주지는 못하였더라도 크게 하려는 바가 있었습니다. 그러니 그 당시의 조정 풍채(風采)는 태평시대를 훌륭하게 이룰 여건이 조성되었다고 할 만합니다.
그러다가 우리 선왕조(先王朝)에 이르러서는 시사(時事)가 어지러워 온갖 일들에 겨를이 없었습니다만, 궁정(弓旌)081) 을 사방으로 내보내어 지성으로 불러들였습니다. 그리하여 초야에서 덕을 기르던 선비인 김장생(金長生)·장현광(張顯光)과 같은 이들이 비록 늙은 관계로 서울에 오래도록 있을 수는 없었지만 융숭하신 은총과 특별한 예수(禮數)는 시종일관 변하지 않았는데, 그들의 언론과 궤범을 조야(朝野)가 법으로 취할 수 있었으니, 두 분 성왕(聖王)께서 유사(儒師)를 높이고 도학(道學)을 중히 여기신 뜻이야말로 어찌 후사(後嗣)로서 마땅히 본받을 바가 아니겠습니까.
지금 우리 전하께서는 겨우 등려(滕廬)082) 에서 나와 은명(殷命)을 두지는 못하고 계십니다만, 2, 3명의 석사(碩士)를 모두 좌우에 두고 정치의 방도를 묻고 고문(顧問)에 응하게 함으로써 선왕의 뜻을 따르고 계시므로 장차 전공(前功)이 많게 될 것이기에 온 조정이 매우 기뻐하는 등 세도에 희망이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서쪽지방의 사정이 창황해져서 사기(事機)가 한번 변하자 어진 사람을 못 가도록 잡아둘 수가 없게 되어 조정이 쓸쓸해졌으니 말을 하자니 분하고 슬프기만 합니다.
아, 상서로운 기린과 봉황을 평지를 달리는 데 쓰면 마소에도 못 미칠지 모릅니다. 그러나 태산(泰山)과 교악(喬嶽)은 움직이는 모습을 볼 수 없어도 저절로 공리(功利)의 효과를 나타내게 마련입니다. 그러니 어진 사람을 쓰는 효과면에서 어찌 보탬이 작다고 하겠습니까. 성상께서는 더욱 유념하시어 예우를 극진히 해서 불러 오시고 사욕을 극복하여 그들의 뜻에 따르소서. 그리고 경악에 불러 두고서 그들에게 많은 말씀을 듣고 조론(朝論)을 참고하면서 전하의 잘못을 보완하소서. 그러면 성상의 덕이 반드시 증진되는 바가 있을 것이며, 조정의 정치에 반드시 유익한 바가 있을 것이며, 그리고 사림(士林)에도 모범을 삼을 바가 있을 것이며, 정신(廷臣)에게도 공경하고 꺼리는 바가 있게 될 것이니, 국가에 보탬이 되는 점이 결코 작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옛날에 진출한 자는 조정에 한 사람도 있지 않으니, 《시경》 치의(緇衣)의 어진이를 좋아하는 정신을 시종 돈독히 하시기를 바랍니다. 이 2, 3명의 신하는 모두 산번(山樊)에서 도(道)를 지키고 임하(林下)에서 경(經)을 궁구하면서 갈포옷을 입고 보옥(寶玉)을 간직한 채 깊이 숨겨두고 팔지 않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모유(謨猷)와 경제(經濟)에 대해서는 참으로 논할 겨를이 없습니다만, 그들의 표치(標致)를 말하더라도 충분히 탐오한 자들을 격동시켜 깨끗하게 만들고 풍속을 격려할 수 있을 것이니, 세간의 작록(爵祿)만을 중히 여기고 명의(名義)를 가볍게 여기는 속자(俗子)들과는 비교하여 의논할 차원이 아닙니다. 그런데 일종의 의논들은 심지어 범승(范升)을 비난하고 장해(張楷)를 책망하듯083) 하는 자가 있기까지 하니, 풍속의 흐름과 세도의 무너짐이 또한 깊이 개탄할 만합니다. 이점은 성상께서 더욱더 생각을 하셔야 할 것입니다.
아, 붕당(朋黨)이 나라를 병들게 한 지가 오래 되었습니다. 지금의 사대부로서 그 누군들 붕당이 증오스럽다는 것을 모르겠습니까마는, 모두 색목(色目)으로 돌아감을 면하지 못하고 있는데, 이것은 그 사람들 모두가 꼭 당론(黨論)을 숭상하여 스스로 편벽한 데에 빠져서가 아닙니다. 혹 부형(父兄) 때의 찌꺼기를 이어받거나 혹 벗들의 인정을 받다 보면 그렇게 되는 것인데, 한번 이렇게 구별이 되고 보면 그 구덩이에서 몸을 빼낼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드뭅니다. 그런데 남의 안색을 살펴 보고 남에게 농락을 당하면서 진취(進取)를 꾀하는 자가 아니라면 시비(是非)를 구별하고 부끄럽게 느끼는 천심(天心)이 어찌 전혀 없겠습니까. 하지만 논의하는 사이에 한번 적치(赤幟)를 세우게 되면, 우뚝 서서 단독으로 행하는 선비가 아닌 이상, 바람에 쏠리듯 그림자가 따르듯이 하지 않는 자가 없이 피차간 모두들 그러합니다. 이는 대개 모두들 70년간 대대로 전해 온 여론(餘論)을 계승하고 있기 때문인데, 따라서 옛날의 붕당처럼, 군자는 붕(朋)을 만들고 소인은 당(黨)을 만들던 것과는 틀립니다.
부형과 자손에 있어 어질고 어질지 못함이 똑같지 않은데도 전후로 다투는 것은 한결같이 전철(前轍)을 따르고 있는데, 이점이 바로 인물의 현우(賢愚)가 그 사이에 서로 뒤섞여 있으면서 잘못된 논의가 지금까지도 끝나지 않는 이유인 것입니다. 붕(朋)을 대립하게 한 뒤부터는 표방(標榜)한 바가 매우 많아 그것을 하자면 또한 추해서 다시 거론하고 싶지도 않은데, 그 사이에 사대부 중에도 명목(名目)이 다름을 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일찍이 계해년에는 명신(名臣)과 석사(碩士)들이 각자 영수(領袖)를 두어 선조(先朝)의 지극한 덕을 우러러 본받아서 논의가 서로 통하고 매우 밀접하게 합치되었습니다. 그래서 한 가지 재주나 한 가지 예능을 가지고 있어도 모두 수록(收錄)되었으므로 진신들이 서로 기뻐하며 오래도록 보존될 수 있다고들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런 상황에서도 둘 사이에 진출만을 꾀하는 부박(浮薄)한 무리들이 있어서 한편으로 시배(時輩)들에게 아부한다고 하고 한편으로 자기의 주장을 버리고 저편의 주장을 위해 나간다고 하면서 말을 만들어 내고 비방을 하며 서로 선동을 하였습니다. 다행히 노숙하고 명철한 제공(諸公)들이 진정시키고 억제한 덕택으로 궤멸되는 정도까지는 이르지 않았으나, 그 뒤로는 언론(言論)이 옳을 때도 있고 그를 때도 있었으며 용사(用舍)가 공적일 때도 있고 사적일 때도 있는 등 들쭉날쭉하여 가지런하지 못한 채 상호간에 득과 실이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을해년에 이르러서는 종사(從祀)에 대한 주청이 관학(館學)에서 나옴으로 인하여 2, 3인의 제멋대로 구는 인사들이 현인을 무함하는 논의를 고무하고 선동하면서 붕류(朋類)를 앞장서서 거느리고 드러내놓고 배척하였습니다. 이때부터 서로 공격하며 원수처럼 여기게 되었으니, 그 불행이야말로 이루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것은 종사에 대한 시비를 다툰 것일 뿐으로서 사람마다 각자 소견이 있어서 계미년의 나머지 수법을 이은 것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다소의 유생(儒生)들로서 듣고 아는 자가 백에 한둘이 있었을 정도였으니, 알지 못하고 망령되게 논의한 것에 대해서야 깊이 허물로 삼을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지금 유직의 경우는 또 이것과는 다릅니다. 선정(先正)의 깊은 학술의 조예와 강론한 이기(理氣)의 미지(微旨)와 출처(出處)의 시비(是非)에 대해서는 유직이 알 바가 아닌 만큼 그것은 우선 버려두고 논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두 신하가 명현(名賢)이며 대유(大儒)로서 회재(晦齋)와 퇴계(退溪) 뒤를 그들밖에 계승할 자가 없다는 것에 대해서는 유직도 들었을 것입니다. 임금을 버려두고 어버이를 뒤로 미루는 것이야말로 인륜의 큰 악행인데, 유직은 시골의 후생으로서 인륜의 큰 악행을 거론하며 조금도 거리낌없이 감히 명현 대유에게 덮어 씌웠습니다. 가령 이런 큰 악행을 유직과 같은 자에게 조금 가했다 하더라도 그의 종족(宗族)이나 향당(鄕黨)에서 그와 교류하는 자들이 오히려 분연히 일어나 불평하면서 변명할 말을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더구나 다사(多士)들이 존경하고 있는 두 신하와 같은 이가 터무니없는 망극한 무함으로 더럽힘을 당한 경우이겠습니까. 성균관 유생들이 그들의 이름을 유적(儒籍)에서 깎아낸 것이 어찌 당연하지 않다고 하겠습니까.
다사(多士)들이 모인 뒤에 두루 물어 보지 않고 갑자기 그 이름을 유적에서 지운 것은 근거없는 처사로서 사람들의 말이 있게 된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악을 미워하다가 지나치게 된 것일 뿐입니다. 그런데 먼저 나간 유생들은 이미 유직을 비난하는 상소가 내려졌는데도 억지로 의견을 달리하여 서로 앞장 서서 돌아가면서 유직의 논의에 붙는 것처럼 하였으니, 또한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는 유생들이 헤아려 생각했거나 계교한 것이 아니라 다만 분위기와 기습(氣習)에 이끌리게 되어서 그런 것입니다. 그리고 먼저 나간 자가 이미 갔고 보면 뒤에 나가는 자가 편히 있을 수 없는 것은 이치와 형세상 당연한 것입니다. 이는 중도에 어긋난 망령된 행동입니다만, 유생이라고 자처한 나머지 과격하게 행동하다 나온 광망(狂妄)된 행동이었으니, 어찌 꼭 심각하게 책망할 것까지 있겠습니까.
다만 유직의 일은 사문(斯文)에 관계된 것인 만큼 감히 경솔하게 논의해서는 안 되겠지만, 그밖의 제생들에게는 특별히 예관(禮官)을 보내어 성지(聖旨)로 돈유함으로써 유감의 뜻과 분한 마음을 풀고 속히 함장(函丈)의 자리로 나와 다같이 경사를 함께하는 과거에 참여하게 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그렇게 하면 유생도 신하인데 어찌 감히 미혹된 마음을 다시 돌리지 않고 강하게 성상의 분부를 어기며 처음 즉위하신 해에 직접 치루는 큰 과거에 스스로 생경한 짓을 하겠습니까. 이상진(李象震) 등 3, 4명의 경우는 괴상하고 망령된 행동이 가증스럽기 짝이 없지만 상소 속에 유직처럼 욕한 것은 없으니, 의당 유생들에게 전유(傳諭)하여 세척해 주게 함으로써 스스로 새롭게 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는 것도 한 방법이겠습니다.
대개 선비들의 논의가 정해지지 않고 지금까지 시끄러운 것은 또한 성상의 넓은 도량으로 모두 받아들여 용인해 준 나머지 시비를 분명하게 가리려 하지 않은 데에 연유하는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이미 두 신하의 어짐을 아시고 전교에 드러내셨으니, 유직처럼 현인을 미워하고 투기하며 욕하는 사람에게는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을 분명하게 보이셔야 합니다. 그리하여 학교(學校)의 극벌(極罰)로 다스려 사방의 선비들에게 성상께서 어진이를 본받으시는 뜻을 환히 알게 하신다면, 어찌 오늘날과 같은 분란이 있겠습니까. 이미 그렇게도 하지 못한 채 도리어 유직을 공격하는 자를 잘못이라 하고 유직의 편이 되는 자를 옳다고 하면서 그를 엄폐하는 전교까지 내리셨습니다. 이것이 비록 더러움까지도 용납하시는 성대한 덕이라 하더라도 임금으로서의 과단성 있는 정치에는 결함이 있는 듯합니다.
옛날 적신(賊臣) 정인홍(鄭仁弘)이 선정신 이언적(李彦迪)과 이황(李滉)을 추악하게 헐뜯었기 때문에 당시 성균관 유생들이 그의 이름을 유적(儒籍)에서 지우고 부황(付黃)하여 그 죄상을 선포했습니다. 인홍은 그 뒤 윤기(倫紀)에 죄를 얻어 마침내는 방형(邦刑)에 복주(伏誅)되었습니다만, 당시의 명성과 지위는 유직에게 비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사류(士類)가 일제히 분개하여 이런 극벌(極罰)을 베풀자 온 세상 사람들이 통쾌하게 여겼는데, 그것을 그르게 여긴 자가 있었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유직을 부황하여 그 죄를 선포한 것이 어찌 유독 성균관 유생들의 깊은 죄가 된단 말입니까. 다만 그때가 적당한 시기가 아니었고 당초에 작정하지 않은 채 갑자기 죄의 등급을 더한 것이 지나쳤을 뿐인데, 유적(儒籍)에서 깎아내는 이외에 오직 부황이 있었을 따름입니다. 그리고 좨주(祭酒)의 계사(啓辭)에 ‘벌을 더했다.’ 한 것은 엄폐하려는 뜻이 있어서 그랬던 것은 아닌 듯합니다.
신은 세로(世路)에 잘못 나와 역시 지목(指目)의 대상이 되는 것을 면치 못했으나 성격이 본래 무기력해서 조정에 선 지 40여 년 동안 일찍이 눈을 부릅뜨고 담기를 부리면서 힘써 당론(黨論)을 주장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오늘날에 와서는 나이가 70에 가깝고 부귀가 극도에 다다랐으므로 국사의 망극함을 만나지 않으려고 다만 조바심을 내며 오직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려 하고 있을 뿐입니다. 어떻게 차마 새로 진출한 연소배들과 더불어 논의를 좌우하고 친한 자들과 편당을 지어 군부(君父)를 기만하면서 스스로 평소의 본 뜻을 저버리겠습니까. 다만 의덕(懿德)을 좋아하는 것은 타고난 성품에서 나온 것으로, 두 신하의 훌륭한 점에 대해서는 평소 우러러 사모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번 성균관 유생들의 일로 인하여 특별히 수의(收議)하라는 명(命)을 내리셨으므로, 신의 간절한 정성을 다 드러내지 않을 수가 없었는데, 아울러 본말(本末)을 언급하다 보니 말이 지리해졌으므로 두려워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신면(申冕)은 명가(名家)의 자제로서 이른 나이에 관계에 진출하여 평탄하게 벼슬길을 밟아 스스로 현관(顯官)의 반열에 올랐는데, 권신(權臣)을 의지할 일이 무엇이 있기에 권문에 드나들면서 자취를 더럽혀 염우(廉隅)를 손상하는 짓을 하였겠습니까. 저들이 은근히 정성을 보여오자 그것을 받는 입장에서 예의상 응답해 주기 위해 혹 왕래하였다고 하더라도 어찌 그것을 심각하게 따질 것까지야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사류(士類)들 사이에서 너무 지나치게 책망하고 언어가 전달되면서 소문이 너무 과하게 떠돌게 되었습니다. 이는 산림(山林)에 몸을 깨끗이 하던 선비로서는 본디 비루하게 여겼던 점일 것입니다. 그러다가 하루아침에 부름을 입고 융숭한 예우(禮遇)를 받게 되자 감격한 나머지 격탁양청(激濁揚淸)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았던 것인데, 마침내는 백간(白簡)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내용이 너무 엄하여 끝없이 사건이 확대된 결과 끝내는 찬출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가 지나쳤다고 한다면 모르지만, 구원(丘園)에 있는 선비로서 어찌 일찍이 신면 등에게 쌓인 원망과 깊은 노여움이 있기에 고의로 죄에 빠뜨릴 계획을 하였겠습니까. 신면이 이미 성은을 입어 다시 가까운 반열에 통하게 되었으니, 산인(山人)의 본정(本情)도 헤아려 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신면의 도리로서는 위로는 성상의 은혜에 감사하고 아래로는 오랜 정분을 생각해서 침착하고 공평한 마음으로 대도(大道)에 함께 나아갔어야 할 것인데, 사직 상소를 올림에 있어 분한 감정에 휘말려 말을 만들고 뜻을 붙인 것이 실로 평온함을 잃었으니, 이것은 신면의 잘못입니다. 그러나 일단 역경을 만나서 화평함을 잃지 않는 것은 옛사람들도 어렵게 여기던 것입니다. 따라서 신면의 잘못이 어찌 대간(臺諫)의 평론을 다시 일으켜 그 관직을 파면시키는 데 이르기까지 하는 것이겠습니까.
그리고 이상진의 논은 너무 엄하지 않습니까. 노성(老成)하고 충박(忠朴)한 신하가 평생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으로 공평하고 치우치지 않게 스스로 힘써 왔는데, 백발이 된 오늘날에 와서 세상에 무엇을 구하려고 고의로 의지하고 아부하는 태도를 지어 신면에게 예쁘게 보이려 했겠습니까. 그 뜻은 오늘날 조정이 안정되지 못한 것을 민망하게 여겨 진정시킬 계책을 세우려고 한 데 지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실정 밖의 말로 함부로 곧장 배척하였습니다. 대각(臺閣)이 일을 논함에 있어 머뭇거리지 않고 곧바로 결단하는 것을 숭상한다고 하더라도 짐작없이 하는 말이 어찌 이와 같을 수 있습니까. 그렇긴 하지만 대간을 너그럽게 용납하는 것은 언로(言路)를 위한 것인 만큼 특명으로 외방에 보임(補任)하신 것은 뒤폐단이 있을 듯합니다.
이성항(李性恒)이 좌천된 이유는 더욱 명백하지 않으니, 성명(成命)을 거두기를 청한 대간의 논의는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목겸선(睦兼善)의 저격(狙擊)과 이수함(李守諴)의 위동(危動)은 목적을 갖고 취한 행동으로서 인심을 현혹시키려는 것이라서 공의(公議)가 허여하지 않은 것인데, 어찌 전적으로 당론(黨論)이라 하겠습니까. 모르겠습니다만 전하께서는 이들에 대해서 무엇을 취하셨기에 잘못으로 여기지 않으십니까. 그들을 체직시켰으나 애당초 성상의 뜻이 아니었고 좌천시킨 것도 양쪽 모두 책벌을 가해야 된다는 상황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대성인이 하시는 일을 참으로 소인의 마음으로 헤아릴 수 없기는 하나 대공지정(大公至正)한 도리가 아니라는 의혹이 없을 수가 없습니다.
전에 정시성(鄭始成)이 김종일(金宗一)을 탄핵한 일은 특별한 의도가 있는 것이었는데, 전혀 실상(實狀)이 없자 고의로 다른 일을 거론하여 사람을 큰 죄에 빠뜨렸으니 이는 심술(心術)과 관련된 것인 동시에 당론(黨論)과도 연결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전하께서는 정상을 살피지 못하시고 노하셔야 할 데에 노하지 않으시어 우물쭈물 스스로 물러가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뒤에는 삼사(三司)가 논한 것이 사리에 어긋나거나 사심을 행한 것도 아닌데, 여러 번 준엄한 비답을 내려 노하지 않을 데에 노하심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그 자리에 편히 있을 수 없게 하였습니다. 이렇게 된 것은 다른 까닭이 아니라 모두 집착하는 병으로 말미암아 이렇듯 전도된 행동이 있게 된 것입니다. 전하께서 고요히 생각하시어 시비를 참되게 가리시면 진실로 밝은 성상의 조감(照鑑)에 다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신이 붕당(朋黨)에 대한 이야기를 앞서 대략 말씀드렸으니, 붕당을 처리하는 방법에 대해서 말씀을 다 드릴까 합니다. 붕당의 화(禍)에 대한 처방은 투기하는 아내가 있는 집안을 바르게 해 나가는 방법과 같습니다. 수신(修身)·제가(齊家)의 근본 원리를 극진히 실천해 나가면 관저(關雎)084) 와 교목(喬木)085) 과 같은 교화를 앉아서 오게 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신하를 부리는 도에 있어서도 모범적으로 이끌어 가는 방도를 극진히 하면 서로들 귀감이 되어 공경하고 사양하는 풍조가 자연적으로 발생할 것인데, 따라서 옳은 것을 옳게 여기고 그른 것은 그르게 여기며 어진이를 어질게 여기고 악한이를 악하게 여기게 되어 성(誠)과 명(明) 양쪽이 모두 이루어질 것입니다.
어진이를 올려 주고 악한이를 내쫓음에 있어 한결같이 하늘의 법칙을 따르고 좋아하고 싫어하며 주고 빼앗음에 있어 자기의 사심을 참여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자면 당을 만들고 붕을 만드는 일을 다 잊어버리는 것만한 것이 없는데, 양쪽을 다 잊으면 마음에 누(累)되는 바가 없게 됩니다. 그리고 기뻐하고 노여워할 때 거울에 비치는 물건처럼 대상에 따라 발하는 것이 최상이니, 그렇게 하면 나의 선입관이 개입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 어진이를 천거하면 당(黨)이 같은 사람이기 때문이 아닌가 의심을 가지게 되고, 악한이를 탄핵하면 자기와 당을 달리하기 때문에 공격하는 것이 아닌가 의심을 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속이고 있지나 않나 하는 생각이 미리부터 성상의 마음을 얽매어 놓게 되는데, 마음속의 본체(本體)가 일단 가리워지게 되면 어떻게 툭 터진 마음으로 재결하고 처리하여 과(過)와 불급(不及)의 차이가 없을 수 있겠으며 거조마다 마땅함을 얻어 사방 백성의 마음을 열복시킬 수 있겠습니까.
틈을 엿보는 자들이 기교를 부리고 임금의 뜻에 영합(迎合)하는 자들이 자기의 편리를 도모하려고 하여 조용히 하려고 해도 더욱 시끄럽고 제거하려 해도 더욱 치성하게 되는 것이 요즘에 이미 나타난 현상이니, 뱃머리를 돌리고 수레 바퀴를 돌리는 일이 있지 않으면 시끄러움을 그치게 하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그러나 이에 대한 것 역시 전하께서 삼무사(三無私)086) 의 공심(公心)을 받들어 궁궐에서부터 먼저 시행하여 친소(親疏)에게 한결같이 베풀어 안과 밖의 차이가 없게 한 다음에야 비로소 외정(外庭)을 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 천도(天道)가 지극히 참되기 때문에 만물이 모두 번성하고, 인주가 지극히 공평하게 하기 때문에 만민이 법으로 삼는 것입니다. 《서경(書經)》에 ‘서민(庶民)들이 사당(邪黨)을 두지 않고 관원들이 빌붙지 않는 것은 오직 임금이 표준을 세우기 때문이다.’고 하였는데, 어찌 그렇지 않겠습니까.
전(傳)에 이르기를 ‘희로애락(喜怒哀樂)의 감정이 나타나지 않은 것을 중(中)이라 하고 그 감정이 나타나되 모두 절도(節度)에 맞는 것을 화(和)라고 한다.’고 하였고, ‘중화(中和)에 이르면 천지가 제 자리를 잡고 만물이 발육된다.’고 하였습니다. 항상 경외(敬畏)하는 마음을 간직하고 남모르는 깊고 은미한 곳에서의 행동을 두렵게 여기고 경계하여 천리(天理)를 확충하고 덕성(德性)을 함양해 가는 이것이 아직 나타나지 않은 중[未發之中]이요, 안도 없고 바깥도 없으며 보내는 것도 없고 맞아들이는 것도 없이 확연 대공(廓然大公)하여 사물(事物)이 닥쳐 오면 순리대로 응하는 이것이 이미 나타난 화[已發之和]입니다.
하늘과 사람은 한 가지 이치로서 위와 아래가 간격이 없는 것이므로 나의 마음이 올바르면 천지(天地)의 마음도 올바른 것이며, 나의 기운이 순하면 천지의 기운도 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미 마음을 바루지도 못하고 또 기운을 순히 하지도 못하고서 천지의 마음을 돌려 중화(中和)의 복(福)을 이르게 하고자 한다면 이미 어렵지 않겠습니까. 하늘의 비가 내리려면 반드시 음양(陰陽)이 서로 조화되고 천택(川澤)의 수증기가 올라가서 더운 기운과 찬 기운이 서로 잘 화합하여야 단비가 쏟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나라가 장차 다스려지게 하려면 반드시 군신(君臣)의 뜻이 서로 합치되어 태평하고 융화하며 큰 공도(公道)를 넓히고 지극한 이치를 잘 형성해 가야 하는 것입니다. 서쪽 교외 하늘의 얇은 구름이 흡족한 비를 내린 적이 있지 않았으며, 교만하게 스스로 성인인 체하는 임금이 치도(治道)를 달성한 경우는 있지 않았습니다. 오늘날의 형세는 바로 추위에 엉겨 얼음이 얼고 바람이 차고 매서워서, 풀을 말리고 뿌리를 썩혀 살리려는 뜻을 볼 수 없게 된 것과 같습니다. 하늘에 대해 잘 말하는 자는 반드시 사람에게서 본받는 것인데, 항양(恒暘)의 허물이 어찌 그 조짐 없이 있게 된 것이겠습니까.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천지의 상도(常道)는 그 마음으로 운용되지만 만물(萬物)에 두루 미치는 데는 사심이 없으며, 성인의 상도도 그 정으로 이루어내지만 만사(萬事)에 순응하는 데는 사정(私情)이 없다.’ 하고, 또 말하기를 ‘천하에서 한 나라에 이르고 한 집에서 만사에 이르기까지 화합하지 못하는 이유는 모두 틈이 있기 때문이니, 틈이 없으면 화합하게 된다.’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전하께서는 마음을 비워 상대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줌이 없으면서 신하들의 편벽됨이 없기를 바라시고, 큰 도량을 넓히지 못하고 의혹된 부분을 끊어버리지 못하면서 신하들에게 틈이 없기를 바라시니, 이는 선왕(先王)께서 평평탕탕(平平蕩蕩)한 왕도 정치를 펴시어 신민이 표준에 모이고[會極] 표준으로 돌아가게[歸極] 하던 방도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절의(節義) 있는 사람을 포상하여 높여 주고 노성(老成)한 선비를 법으로 삼는 것은 나라를 소유한 임금이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입니다. 영돈녕부사 김상헌(金尙憲)과 고 참판 정온(鄭蘊)의 높은 풍채와 준엄한 절의는 비록 일월과 빛을 다툰다고 해도 될 것입니다. 하늘이 한 늙은이를 남겨 놓아 영광전(靈光殿)처럼 높이 보이게 하였는데, 선조(先朝)에서 발탁하여 정승의 자리에 두었으며 성상께서도 남다른 은수(恩數)로 어진이를 대우하시어 전대와 후대가 한 법을 쓰고 있으니, 두 사람에게는 서운한 것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노공(潞公)087) 이 낙양(洛陽)에 살면서 대정(大政)을 참여하여 들었던 것은 송(宋)나라 조정이 늙은이에게 정사를 물었기 때문입니다. 어찌 그 고사를 따르지 않으십니까. 정온에게는 봉작과 증직을 하여 충절을 표창하는 은전을 아직 빠뜨리고 있어서 떳떳한 법에 결함이 있으므로 지사(志士)들이 탄식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우악하게 조처하여 풍성(風聲)을 세우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그리고 원로(元老)에게 자문하여 숨은 덕을 드러내는 것 또한 어찌 재변을 그치게 하는 데 한 가지의 큰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신은 만번 죽을 뻔한 뒤에 다시 대궐문에 들어왔고 죄수 속에서 일어나 금방 신이 앉을 자리가 아닌 정승 자리에 외람되게 앉아 있게 되었으니, 옛날부터 특이한 은총을 받은 자들을 헤아려 봐도 신에게 비교될 자는 드물 것입니다. 상의 은덕이 하늘과 같은데 보답해 드릴 곳이 없으니 참으로 어찌 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신의 구구한 본심으로는 그저 한 조정에 벼슬하고 있는 동료들과 성심을 다하여 서로 대우하고, 공경하고 협동하여 상호 면려하면서 친함과 소원함에 간격을 두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리하여 재능이 있으면 반드시 천거하고 허물이 있으면 반드시 바로잡고자 하였는데, 이런 마음으로 나라에 보답하면 거의 조그만 보탬이 되리라 여겼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마음이 나의 마음과 같지 않고 세상이 날이 갈수록 더욱 어렵고 험해지면서 논의가 가닥이 많아지고 거짓말이 날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렵고 걱정스러운 것들이 눈에 가득하여 손을 댈 곳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옛날의 통달한 재능을 갖춘 사람으로 하여금 이 일을 감당하게 하더라도 수많은 어려움을 두루 구제하여 성상의 마음에 맞게 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더구나 신은 재능과 학식이 보잘것없고, 덕망과 실력이 모두 가벼워 위로는 군부(君父)에게 믿음을 받지 못하고 아래로는 백료(百僚)에게 신임을 받지 못하고 있으니, 임금 마음의 잘못을 바로잡고 사리에 어긋난 일을 바루는 것에 대해서는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할 뿐더러 일에 임하여 응당 해야 할 일도 허술하게 될까 걱정뿐입니다. 그리하여 복속(覆餗)의 재앙이 있을까 스스로 걱정하기에도 겨를이 없는데, 시대를 구제하는 직책을 어떻게 감히 맡겠습니까.
아, 궁(宮)·상(商)·각(角)·치(徵)는 똑같이 조율(調律)된 적이 없었고 조(燥)·습(濕)·신(辛)·감(甘)은 각각 다른 맛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반드시 사광(師曠)이 거문고 줄받이를 돌면서 당기기도 하고 늘이기도 하여 소리를 조화하고 역아(易牙)가 손을 놀려 고루고루 섞어 맛을 내기를 기다린 다음에야 음악이 이루어지고 맛이 갖추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질장구를 치고 파잎을 불면서 육률(六律)을 의논할 수 있겠으며 풀뿌리를 씹고 나물을 먹으면서 어떻게 오미(五味)를 논할 수 있겠습니까. 차마 곧장 떠나지 못하는 것이 임금을 향한 간절한 정성 때문이라고 하더라도, 나라의 일을 잘못되게 하고 정사를 어긋나게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스스로 헤아려 분명하게 처신하는 것이 낫지 않습니까.
차본(箚本)을 이미 갖추어 놓고 바야흐로 재(齋)가 파하기를 기다리고 있는 중에 삼가 정원에 내린 전교를 보건대, 성인(聖人)의 뉘우치는 마음이 가을 바람이 불어오기도 전에 싹텄고 자신의 책임으로 돌려 책하시는 것은 우(禹)임금이나 탕(湯)임금보다도 훨씬 뛰어나셨습니다. 어찌 하늘의 노여움만 돌리고 백성의 심정만 위로해 줄 뿐이겠습니까. 국세가 힘차게 발흥할 것을 눈을 비비고 기다릴 수 있게 되었으므로 신은 진실로 우러러 기뻐하면서 큰 소리로 두세 번이나 외웠습니다.
추구(芻狗)와 토저(土苴)처럼 쓸모없는 신이 어찌 임금의 뜻에 만분의 일인들 응대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깜박이는 반딧불도 혹 조림(照臨)하는 밝은 빛에 도움이 될 수도 있고 말발굽에 고인 얕은 물도 크나큰 하해(河海)를 이루는 하나의 물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신이 조목별로 진달한 어리석은 말도 재변을 그치게 하는 데에 혹 도움이 될지도 모르니 성상께서는 유의하소서. 나라에 재해가 있을 경우 재상(宰相)을 책면(策免)한 고사(故事)가 있는데, 이치로 볼 때 또한 당연한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신의 직명(職名)을 파면하시어 하늘의 꾸지람에 답하시고 어질고 덕망 있는 인재를 다시 뽑아서 이 어려운 때를 구제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경의 차자를 살펴 보건대 정원에 내린 교지를 큰 소리로 두세 번 외웠다고 하였는데, 부끄러움과 두려움이 교차함을 느꼈다. 몸에 돌려 허물을 반성해 보니 망연자실하여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말 한마디 글자 하나인들 감히 소홀히 하겠는가. 내가 띠에 써놓고 언제나 마음을 가다듬는 자료로 삼겠다. 더구나 요즘 어수선한 사단들은 참으로 내가 근본을 바루는 데로 잘 인도하지 못하고 그 끝을 다스리려 한 데서 말미암은 것이니, 참으로 이른바 성색(聲色)의 말단인 것이라고 하겠다. 나의 과실이 여기에서 더욱 드러났으니 앞으로는 상하가 마땅히 그 본원으로 돌아가서 화목과 협동에 힘써야 할 것이다. 각자 유신(惟新)해서 마음과 힘을 한 가지로 한다면 어찌 나라의 복만 되겠는가. 실로 공경 자손들이 만세토록 누리는 복이 될 것이다.
유생(儒生)을 권유하자는 논의는 깊이 내 뜻에 맞는다. 특별히 예관(禮官)에게 명하여 즉시 돈독히 유시하게 하라. 그러면 제제(濟濟)한 아름다움이 있게 될 것이다. 요즈음 산림(山林)의 선비들이 오히려 나를 만족스럽게 여기지 않을까 두려운데, 내가 어찌 다른 뜻을 두었겠는가. 처음을 이어가지 못한다는 탄식은 내 마음에 깊이 부끄러움을 느끼게 한다. 그래서 또한 근시(近侍)를 시켜 나를 대신하여 교시를 초하게 하면서 선뜻 올라 오게 되기를 기대하였다. 그런데 경(卿)이 왜 이렇게까지 사직하는가. 지금 이처럼 가물고 황충이 발생한 것은 전적으로 내가 어리석어 하늘에 죄를 얻었기 때문에 내려진 재앙이니, 나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 경에게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경은 사직하지 말라. 그리고 또한 나를 같이 일할 만한 자격이 없다고 하여 버리지 말고, 날마다 소장을 올려 숨김없이 직언(直言)을 하여, 나로 하여금 선(善)한 데로 옮겨 가고 허물을 고칠 수 있게 하라."
하였다.
정유성(鄭維城)을 평안 감사로 삼고 가선(嘉善)을 가자(加資)했으며, 이후원(李厚源)을 대사성으로 삼았다.
성균관 동지사 윤순지(尹順之), 대사성 이후원이 태학에 나아가 성상의 분부를 전하고 타이르며 유직을 부황(付黃)한 벌을 풀어주도록 하자, 여러 유생들이 아뢰기를,
"선현(先賢)을 무함하고 욕하여 사문(斯文)에 죄를 얻었으므로, 많은 선비들이 다 분개해서 서로 의논하여 부황한 것입니다. 따라서 약간의 선비가 나간 것으로 인하여 경솔하게 큰 벌을 받은 자를 풀어 줄 수는 없습니다. 차라리 격렬할지언정 무기력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바로 선비의 기백입니다. 부황한 표지를 제거하라고 하신 것에 대해서는 명을 받들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피차의 유생들이 한결같이 명령을 어기고 있는데, 이들은 유독 나라 안에 살지 않는단 말인가. 내가 알 바가 아니다."
하였다. 이때에 태학생이 상의 분부를 받들고 조금씩 도로 모였는데, 이에 이르러 엄지(嚴旨)가 있었다는 말을 듣고는 또 권당(捲堂)하고 나갔다. 정원이 온화한 성지(聖旨)를 내려 많은 선비들을 개유하라고 청하자, 답하기를,
"나도 역시 과오를 뉘우친다."
하고, 예관(禮官)에게 유시하도록 하였다. 예조 참판 이경헌(李景憲)과 대사성 이후원이 태학에 나아가 유생들을 불러놓고 성상의 뜻을 유시하니, 유생들이 말하기를,
"명을 어기는 것은 신하의 도리에 있어 더할 수 없는 죄악입니다. 그리고 나라 안에 살지 않는 자는 또한 일개 교화 밖의 난민(亂民)일 뿐입니다. 이런 죄명(罪名)을 지고 무슨 얼굴로 다시 현관(賢關)에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하고, 마침내 서로 물러갔다. 상이 또 동부승지 이행진(李行進)을 보내어 유생들을 불러 타이르니, 유생들이 비로소 도로 들어왔다.
생원 박승후(朴承後) 등이 아뢰기를,
"불행하게도 사론(士論)이 갈라짐에 따라 경(京)·외(外)의 많은 제유(諸儒)들이 정거(停擧)와 제명(除名)을 당했는데, 저번 재회(齋會)하던 날에는 또 유직을 부황(付黃)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부황이야말로 사림(士林)의 극벌(極罰)인데, 재임(齋任)이 많은 선비들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자기 마음대로 독단하여 시행했습니다. 이는 염치(廉恥)에 관계된 것이기에 감히 뻔뻔스럽게 따라 갈 수 없어서 50여 명이 서로 모의하지 않고 일제히 물러났던 것입니다. 신들의 거취(去就)는 유직에게 사정을 두어서 그런 것이 아니었으므로 진소(陳疏)하여 스스로 해명하는 바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조정(朝廷)이 힘써 조제(調劑)하여 화해하고 협력시키려 하고 있으니, 마땅히 각자 새로운 마음자세를 갖고 조정의 뜻을 몸받도록 하라."
하였다.
태학생(太學生) 박세채(朴世采) 등이 상소하기를,
"두 분의 현신(賢臣)088) 을 종사(從祀)하자는 청(請)이 있은 뒤로 일종의 이의(異議)를 제기하는 사람들이 함부로 선정(先正)에게 추악한 말을 하고 있어서 사림들이 통탄스럽게 여겨 온 지가 오래 되었습니다. 저 유직이란 자는 얼마나 괴귀(怪鬼)한 위인이기에 사론(邪論)을 떠벌려 죄안(罪案)을 만들고는 말하기를 ‘어버이를 유기하고 임금을 뒤로 미루어 명교(名敎)에 죄를 얻었다.’고 한단 말입니까. 아, 사람의 마음은 헤아리기 어려운 것이라고 하지만 어찌 이처럼 극도에 이르렀단 말입니까. 그래서 지난번 많은 선비들이 모였을 때 공론(公論)이 더욱 격렬하여 앞서 시행한 벌이 죄에 비해 오히려 가볍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마침내 부황하는 거조가 있게 되었는데, 동참한 유생들은 이견을 가진 자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다만 목래선(睦來善)·이희년(李喜年) 등이 함께 음관(蔭官)으로서 재론(齋論)에 참여하지 않고 나가자는 의논을 앞장 서서 꺼내어 한 떼의 사람들을 선동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세 가지 이유를 내세웠는데, 첫째는 ‘유직을 부황하였기 때문에 나간 것이다.’ 하였고, 둘째는 ‘재론(齋論)할 때에 가부(可否)를 묻지 않았기 때문에 나간 것이다.’ 하였고, 셋째는 ‘제류(儕流)들이 모두 나갔기 때문에 할 수 없이 나간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대저 재벌(齋罰)로 가벼운 것은 손도(損徒)이고 무거운 것은 삭적(削籍)하거나 부황하는 것입니다. 이 전례가 어느 때에 시작되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어찌 꼭 윤기(倫紀)를 범한 다음에야 비로소 부황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만약 다른 의견을 세우고자 한다면 쟁론도 가능합니다. 그런데 일찍이 한마디 말도 여기에 대해 언급하지 않다가 물러가서야 뒷말을 하면서 이것을 꼬집어 허물로 삼고 있으니, 참으로 알 수 없는 자들입니다.
그렇긴 하지만 염우(廉隅)에 관계된 것인데, 어찌 스스로 나는 잘못한 것이 없다고 하여 편안하게 여기고 굳게 앉아 있을 수 있겠습니까. 신들이 따라 나온 것은 대체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신들이 전후하여 권당(捲堂)한 것은 진실로 부득이하여 취한 것입니다. 그 뒤 성상께서 가능한한 조화시키려는 뜻을 두시고 특별히 대종백(大宗伯)을 보내 곡진하게 유시하셨는데, 얼굴을 대하고 명하는 것과 같을 뿐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신들은 명을 받들고 두려운 나머지 즉시 식당(食堂)으로 들어갔는데, 먼저 나간 자들은 한 사람도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끝내 마음에 불안한 바가 있어 바야흐로 주저하고 있을 때 대신이 유직을 부황한 표지를 제거하기를 청하자, 상이 본관(本館)089) 에 분부하여 타이르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나 유직에게 벌을 더한 것은 실로 공공(公共)의 논의에서 나온 것인 만큼 한 때 진정시키려는 거조 때문에 구차하게 오르내려서는 안 될 것이 분명합니다. 어진이를 무함한 벌에 대해서 더하기도 하고 풀어주기도 하는 것은 본래 사자(士子)들의 책임이지 결코 대신(大臣)과 조정(朝廷)이 지휘할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이 길이 한번 열리면 뒷날 있을 무궁한 폐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들이 감히 명을 받들지 않았던 것인데, 어찌 엄한 비답을 갑자기 내리시면서 준절(峻截)하게 말씀하실 줄이야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대체로 명령을 어기는 것은 신하의 극죄(極罪)이며, 나라 안에 있지 않으면 이는 바로 교화(敎化) 밖의 백성입니다. 이와 같은 죄악을 지고는 감히 일각도 성묘(聖廟)의 아래에 숨쉬고 살 수 없는 바이기 때문에 시골에 물러가 살면서 공손히 현륙(顯戮)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게 이번에 성상께서 넓은 도량으로 신들을 포용하시어 윤음(綸音)을 여러 번 내리셨으므로 신들도 감히 한결같이 물러가 움츠리고만 있을 수 없기에 힘써 도로 들어온 것입니다. 그러나 명령을 어긴 죄만은 여전히 신의 몸에 있습니다. 이와 같은 죄를 범하여 지고 있으면서도 한번 가슴속의 말을 드러내지 않는다면 끝끝내 임금을 업신여긴 율법에서 스스로 벗어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신은 한 말씀을 내려 결단해 주셨으면 합니다. 만약 양신(兩臣)을 어질다고 여긴다면 높여 숭상하는 자가 옳고 공격하여 배척하는 자가 잘못이며, 만약 양신을 어질지 않다고 여긴다면 공격하여 배척하는 자가 옳고 높여 숭상하는 자가 그른 것이니, 옳고 그름이 한번 밝혀지면 간사함과 정직함이 즉시 판명될 것입니다. 이밖에는 다른 의논이 있을 수 없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통쾌하게 결단을 내려 주시어 높여 숭상하고 공격하여 배척하는 사이에서 좋아하고 싫어하심을 분명하게 보여 주소서. 그러면 시비가 혼동되지 않고 사정(邪正)이 저절로 판명될 것입니다."
하였는데, 상소가 들어가자, 상이 하교하기를,
"이미 말하기를 ‘결코 대신과 조정이 지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였는데, 글을 올릴 일이 뭐가 있겠는가. 이 상소를 도로 내어 주라."
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유생들의 상소에 답을 내리지 않는 것은 자못 선비를 대우하는 도리에 결함이 있는 일입니다. 마땅히 분명하게 비답을 내리시어 상하가 막히지 않게 하고 유생들이 스스로 안정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나와 대신이 다 사체(事體)에 어둡고 거조(擧措)에 마땅함을 잃어 유생들로 하여금 더욱더 불평하는 마음만 갖게 만들었으니, 내가 매우 부끄러워 답할 말이 없다."
하였다. 태학(太學)의 유생들이 서로 의논하기를,
"성상의 분부가 간절하여 태학에 도로 들어오긴 했으나 이미 명령을 어긴 죄를 졌고 또 상소를 물리치는 거조가 있었으니, 그대로 현관(賢關)에 거처하고 있을 수 없다."
하고, 대궐에서 물러나와 태학에 돌아가 성묘(聖廟)에 하직 인사를 올리고 그 길로 흩어져 갔다. 상이 유생들이 권당하고 나갔다는 말을 듣고, 대신과 비국의 여러 신하를 인견(引見)한 뒤 큰 소리로 이르기를,
"내가 선처하지 못하여 유생들이 지금 또 성균관을 비웠다. 처음에는 나도 앞서 말한 것에 대한 잘못을 뉘우치고 근시(近侍)를 보내어 타일렀는데, 지금은 상소 속의 말 뜻을 보건대 명령을 어겼다고 한 것을 집언(執言)하는 꼬투리로 삼고 안으로 탐색하여 시험하려는 계획을 하고 있다. 유생은 매양 염치를 소중하게 여기는데, 인군만 유독 염치를 돌아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가 그래서 답하지 않고 그저 부끄럽다고만 한 것인데, 이것이 어찌 공관(空館)까지 할 일인가. 사방에서 보고 들으면 반드시 해괴하게 여길 것이다."
하니, 우의정 조익(趙翼)이 아뢰기를,
"유생은 본디 지휘해서는 안 되고 또 위협해서도 안 되니, 특별히 포용하는 아량을 보여 온화한 비답을 내리시면, 저 유생들이 어찌 끝끝내 들어오지 않겠습니까."
하고, 대사성 이후원(李厚源)이 아뢰기를,
"신이 사장(師長) 자리에 있지만 유생의 논의에는 간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처음에는 상소의 말이 어떠했는지 몰랐는데, 공관(空館)한 뒤에 그 뜻을 재임(齋任)에게 물어보니, 그가 말하기를 ‘상께서 명령을 어긴다는 분부를 내리셨으므로 감히 그래도 현관(賢關)에 거처할 수 없었다. 그러나 돈독하신 유시가 세 번이나 이르렀으므로 할수없이 들어왔으나, 이미 명령을 어긴 죄를 지고 있었기 때문에 대략 소장을 진달했던 것이다. 그런데 비답은 내리지 않으시고 도리어 엄한 분부를 내리셨으므로 유생들이 감히 태연히 재(齋)에 거처하지 못하고 서로 더불어 나왔다.’고 하였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향당(鄕黨)에서 사심없이 좋아하는 자들도 양신(兩臣)을 어질다고 말하고 있으니 참으로 어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종사(從祀)하는 일은 중대한 예전(禮典)이니 경솔하게 논의해서는 안 된다. 유생들의 이 행동이 어진이를 높이는 일이라고 하더라도 실은 노리는 마음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임금이 아랫사람을 부리는 도리상 어찌 피차(彼此)에 사랑하고 미워하는 마음을 두어 치우친 일을 하겠는가. 나도 전에 태학에 들어 갔는데, 지금 태학에 직숙(直宿)하면서 인(仁)에 처하고 의(義)를 실천할 계획을 하려 한다. 결코 돈독히 타이를 수는 없다."
하였다. 이기조(李基祚)·박서(朴遾) 등이 아뢰기를,
"선비는 국가의 원기(元氣)이니, 사기(士氣)를 북돋아 세우는 것이 임금이 할 도리입니다. 선비에게 잘못이 있더라도 사람마다 죄를 주어서는 안 됩니다."
하니, 상이 후원에게 이르기를,
"유생들이 자기들의 뜻을 펼 목적으로 번번이 이런 식으로 임금을 협박할 계획을 하니, 이런 폐단은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경의 뜻으로 타이르는 것이 온당하겠다."
하였다.
대사성 이후원이 상소하기를,
"신이 어제 등대(登對)한 뒤에 재임(齋任)을 초치해서 갖추어 타일렀으나, 연소하고 광견(狂狷)한 선비가 미혹된 고집을 돌리지 않고 한결같이 이 지경에 이르고 있으니, 참으로 개탄스럽고 애석합니다. 그리고 신 역시 사장(師長)의 책임을 맡고 있으니 사의에 어긋나도록 지도한 죄를 참으로 피할 바가 없습니다.
다만 생각건대 예로부터 임금이 사기(士氣)를 배양하는 데 있어서는 항상 그들이 무기력하게 될까 걱정하였지 그들의 광직(狂直)한 것을 걱정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윤강(倫綱)이 없고 도의에 어긋난 거조가 있다 하더라도 언제나 용서하고 장려하면서 오히려 그들의 기운이 꺾일까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런데 더구나 문자와 언어 사이에서 그들의 자질구레한 허물을 적발하여 가혹하게 나무라고 드러내놓고 배척해서야 되겠습니까. 유생들이 저지른 오늘날의 일은 바로 버릇없는 아이가 제 부모의 사랑만을 믿고는 철모르고 망령되게 굴다가 스스로 죄에 빠진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부모된 자로서는 마땅히 곡진하게 타일러 가르치고 책망해서 이런 상황에 이르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어찌 한 마디 말과 한 가지 일의 잘못을 가지고 갑자기 끊을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만약 그들을 끊지 않으려 하신다면, 어찌 근시(近侍)를 보내어 유생들을 불러 궐정에 꿇어앉힌 뒤 가르치고 책망해서 그들이 스스로 새로워질 길을 허락해 주지 않으십니까."
하니, 답하기를,
"예로부터 유생이 권당(捲堂)하는 일은 어느 시대이고 없었던 때가 없었다. 그러나 어찌 오늘날과 같이 이토록 의리가 없고 기강이 없는 때가 있었겠는가. 조종(祖宗)의 성대했던 은전에 대해서는 내가 알지 못하는 바가 아니지만, 불행하게도 직접 말세의 풍속을 만나게 된 상황이라서 할수없이 이렇게 하는 것일 뿐이다."
하였다.
사정(司正) 신혼(申混)이 유지에 응하여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예로부터 재변을 만난 때에는 반드시 공구(恐懼)하고 수성(修省)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재변이 닥치면 두려워하다가도 재변이 없어지면 소흘히 하고 있으니, 어찌 재를 올리고 경을 외우는 것과 다를 게 있습니까. 착실하지 못한 해로움이 진실로 이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은 전하께서 착실한 것으로써 모든 일의 약석(藥石)을 삼으시기를 바랍니다.
작상(爵賞)과 형벌(刑罰)은 임금의 큰 권한입니다. 이것이 한번 흔들리게 되면 아랫사람들이 조종하게 되는데, 조종하는 마음이 생겨나면 임금을 경멸하고 무시하는 환란을 막지 못하게 됩니다. 이를 막을 수 있는 것은 기강을 유지하는 것뿐입니다.
옛날 한 원제(漢元帝)와 당 문종(唐文宗)은 자애롭고 인후하며 공손하고 검약했으니, 어진 임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쇠퇴하고 어지러워서 떨치지 못했던 것은 우유부단했던 이유 이외에 다른 것이 없습니다. 전하께서는 몸소 우(禹)와 탕(湯)의 지극한 덕행을 가지고 계시면서도 두 임금의 유약하고 나태한 행적을 따르고 계시니, 신은 삼가 부끄러운 마음이 듭니다.
원년(元年)의 큰 경사를 맞아 사방이 기대에 부풀어 있는데, 만약 잘못된 습관을 통렬하게 개혁하지 않는다면 무엇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기쁘게 해 주겠습니까. 더구나 괴격(乖激)한 행동을 진정시킬 길은 인재(人才)를 양성하는 것뿐이고 분열된 인심을 조제(調劑)할 길은 태화(太和)로 돌아가게 하는 것뿐인데 어찌하여 청금(靑衿)들과 반목하여 반궁(泮宮)에 학생들이 없게 만드십니까. 그리고 구차하기만 한 근래의 규례만을 따라 행하면서 성대하게 설치된 옛제도는 손상시키고 있는데, 이는 반드시 성상께서 그다지 장구한 생각을 하지 않으시고 치지도외(置之度外)하기 때문입니다.
유현(儒賢)의 기북(冀北)090) 으로서 장보(章甫)091) 가 모여 있는 경상 일도의 경우, 온 도의 선비가 과거에 응시하지 않을 만큼 이미 괴리현상이 나타났는데도 그 부형(父兄)에게 개유(開諭)하게 하면서 심지어는 사마상여(司馬相如)가 촉(蜀)땅에 격문을 보낸 것[諭蜀]에 비유하기까지 하였으니, 이는 한 나라를 온통 경화(梗化)의 지역에 버려 두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면서 내외를 진정시키고 동이(同異)를 조화시켜 나라의 체모를 보존하고 사람들의 말에 사례하고자 하신다면 또한 어렵지 않겠습니까. 이는 유사(有司)의 불찰(不察)이지만 성상의 누(累)가 될까 두렵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나의 과실에 대해 자세히 진달했는데, 이는 실로 내가 듣고 싶었던 것이었다. 그대의 충성어린 강직한 말과 나라를 걱정하고 임금을 사랑하는 정성이 매우 가상하니, 마음에 새기지 않겠는가. 그리고 재변이 닥치면 두려워하다가 재변이 지나면 소흘히 여긴다는 한 가지 조목이야말로 오늘날 더욱 약석(藥石)이 되는 말이다. 내가 즉시 벽에 써 붙이고 늘 살펴 보려고 한다."
하였다.
영의정 이경여(李敬輿)가 상차하였는데, 그 대략에,
"현인을 무함한 간사한 말은 깊이 배척하지 않으면 안 되고 서로 괴리된 많은 선비들은 조제하여 화합시키지 않으면 안 되겠기에, 무릅쓰고 한 통의 차자를 진달하여 그들이 간사하게 미혹시키고 있는 것을 밝힘과 동시에 부황(付黃)을 풀어 주도록 청하였는데, 이는 사태가 원만하게 해결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습니다. 그런데 유소(儒疏)를 도로 내려 보내어 묘정(廟庭)에 수직(守直)이 없게 되었는데, 일이 상도(常度)를 벗어나면서 사기(士氣)가 꺾였으니, 선비를 대우하는 도리에 머지 않아 해로움이 있을 것입니다. 원기(元氣)를 배양하는 일은 임금이 가장 먼저 힘써야 할 일이고 몸을 굽혀 선비를 예우하는 것은 성왕의 높은 풍도이니, 앞으로 선처가 있으시기를 깊이 전하에게 기대합니다.
그리고 신혼(申混)의 상소를 보건대 신이 말한 유촉(諭蜀)이라는 말을 인용하면서 한 도의 선비들의 마음을 격동시켜 원망을 신의 몸에 돌렸는가 하면 한 도의 사람들로 하여금 정사를 잡은 자에게 원망을 돌리게 하였으니, 과연 조정의 누(累)가 되지 않겠습니까. 부형들로 하여금 자제들을 가르치게 해야 한다는 말은 정자(程子)가 한 말인데, 신혼은 그르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한 말이라면 원래 그를 수도 있겠지만 선현(先賢)의 유훈(遺訓)인데도 그르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촉(蜀)은 한 무제(漢武帝) 때에 이미 직방(職方)의 여도(輿圖)에 편입되어 오래도록 문명(文明)의 풍화(風化)에 젖었고, 상여(相如)가 격문을 띄워 타이른 것도 그 자제들이 정역(征役)의 괴로움을 꺼리기 때문에 그 부형을 나무란 것에 지나지 않는데, 어찌 일찍이 교화를 막는 것으로 타이른 것이겠습니까. 소관(小官)에게 비난을 당하여 전연 체면이 없게 되었으니, 파면하시어 사람들의 말에 사례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경의 사직소를 보고 내가 매우 놀랐다. 국사가 이와 같은데, 내가 중하게 여길 사람은 경이 아닌가. 비방하는 말을 돌아보지 않고 인심을 조제(調劑)하려고 한 사람도 경이 아닌가. 이른바 사람의 말이란 것이 참으로 통탄스러운데, 내가 죄를 주고 싶어도 죄를 주지 않은 것은 구언(求言)을 했기 때문이다. 경은 마음에 두지 말고 부디 속히 출사하여 나의 기대에 부응하라."
하였다.
우의정 조익(趙翼)이, 임금을 인도하는 신하의 도리로서는 강무(剛武)한 행동을 하여 살육(殺戮)의 마음을 열게 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는 이유로 상차하여 신혼을 배척하고, 또 근시(近侍)를 보내 관학 유생들에게 돈유할 것을 청하니, 답하기를,
"이들의 경망스러운 말은 따질 필요도 없다. 경은 사직하지 말고 안심하고 도를 논하라. 아, 저 유생들은 나에게 성을 낸 것인가, 선성(先聖)에게 성을 낸 것인가. 나에게 성을 낸 것이라면 나를 나무라는 것이 옳을 것인데, 어찌 감히 노여움을 옮겨서 성묘(聖廟)를 경솔히 버린단 말인가. 당초 권당(捲堂)한 것은 전적으로 내가 실언했기 때문이므로 내가 깊이 뉘우쳐 한스럽게 여기고 나 자신을 나무라면서 권면하고 타이르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런데 약간의 의리도 없고 행실도 없는 무리가 의리는 생각하지 않은 채 한갓 말한 것을 시행하지 않는 것만을 분하게 여겨 도로 들어온 지 5, 6일도 채 못 되어 문득 이런 변을 일으켰으니, 그 마음속의 의도를 대체로 상상할 만하다.
나는 경들도 반드시 통렬하게 미워하여 풍속을 바루고 국가의 체모를 보존시키리라고 여겼는데, 뜻하지 않게도 지금 근시를 보내어 타이르라고 청하고 있으니, 내가 놀랍기 그지없다. 경들은 부디 변을 제어할 방법을 생각해서 빨리 해관(該館)의 관원들에게 상의하여 처치하게 하라."
하고, 정원에 하교하기를,
"성묘(聖廟)를 비운 지가 지금 며칠인가. 만약 오늘이 지나도 들어와 지키는 사람이 없으면 내가 어떻게 감히 편안하게 있겠는가. 말과 생각이 여기에 미치니 온 몸이 오싹하다. 이 뜻을 해관에게 말하여 즉각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우의정 조익(趙翼)이 태학(太學)에 나아가 윤순지(尹順之)·이후원(李厚源)과 함께 교문(橋門) 밖에 나가 앉아서 유생들을 불러 모으고 상의 분부로 타이르니, 유생들이 말하기를,
"대신(大臣)과 사유(師儒)가 이미 성지(聖旨)를 받들고 이렇게까지 간절히 타이르시니, 의리상 감히 따르지 않아서는 안 되겠다."
하고, 드디어 서로 더불어 도로 들어왔다.
태학생 이백린(李伯麟) 등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요즘 사림(士林)이 불행하여 소요를 일으키는 단서가 거듭 나와 계속 사태가 발전됨에 따라 마침내는 성균관을 비우는 행동까지 나오고 말았습니다. 박세채(朴世采)와 김수항(金壽恒) 등이 감히 전후의 곡절을 진달하는 한 통의 소장을 올렸는데, 연소한 유생이 소장의 체례(體例)에 익숙하지 못한 탓으로 조어(措語)하는 사이에 자못 타당함을 잃었습니다. 그 소장에서 ‘조정 대신이 지휘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고 하였는데, 그 뜻은 학궁(學宮)에서 행하는 벌을 조정이 하필 간여해야 하는가라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뜻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 결과 엄한 분부가 나오게 되었고, 태학 많은 선비들의 상소를 도로 내 주라는 명이 있기까지 되었던 것입니다.
이에 박세채 등이 서로 돌아보며 낭패스럽게 되어 감히 재(齋)에 들어가지 못하고 그저 잘못을 인책하여 스스로 물러나는 것만을 생각한 나머지 권당(捲堂)하는 것이 온당하지 못하다는 것은 깨닫지 못하였습니다만, 그 본심을 따져보면 황공한 심정이었을 뿐 다른 이유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조금도 용서하여 살펴 주지 않은 채 우레 같은 위엄만을 거듭 보이시면서 의리가 없고 행실이 없는 관학(館學)의 죄인(罪人)이라는 등의 말로 제목(題目)을 단정해서 크게 사기를 꺾으셨으므로, 분포(粉袍)의 무리들이 모두 기운을 잃고 숨을 죽이면서 실망의 한숨을 쉬고 있습니다. 선비를 대우하는 도리는 이와 같이 너무 박하게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신들은 무릅쓰고 나아간다는 혐의를 피하지 않고 서로 이끌고 재(齋)에 들어 왔습니다만, 40 명의 제생(諸生)들은 바야흐로 군부(君父)의 엄지(嚴旨)를 받고 하나의 죄 지은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다 같은 태학의 선비인데 누구는 반벽(泮壁)에 출입하고 누구는 사실(私室)에서 안타깝게 움츠리고 있으니, 일찍이 새로운 교화를 펴는 날에 이와 같은 아름답지 못한 경색(景色)이 있으리라고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특별히 명백한 분부를 내려 온화하게 타이르는 뜻을 보이소서. 그러면 상하 사이에 의심하고 두려워하던 마음이 풀리고 스스로 반성하여 부끄러움을 알게 될 것이며 더욱 성상의 도량이 큰 것에 감동할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지난번의 일을 내가 그만둘 수 있겠는가. 그렇긴 하지만 이미 지나간 일이니 깊이 허물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내가 그들의 미치광스럽고 망령된 짓을 용서하여 스스로 새로워지는 길을 열어 줄 것이니, 세채 등도 허물을 뉘우치고 착한 데로 옮기는 것이 또한 옳지 않겠는가. 내가 끊어버릴 리가 없으니, 더욱 면려(勉勵)하여 나의 지극한 뜻을 몸받고 전혀 남과 나의 분별을 잊고서 함께 화목하고 협동하는 아름다움을 이루도록 하라."
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일찍이 선조(先朝) 때에 관시(館試)를 없애라는 분부가 있었던 것은 부득이한 데에서 나온 일이었습니다. 지금은 관유(館儒)들이 성지(聖旨)에 감동하여 식당(食堂)에 도로 들어왔으니, 먼저 나간 선비들에게도 의당 일체 타일러서 아울러 함양(涵養)의 은택에 젖게 한다면 어찌 사문(斯文)의 다행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상이 하교하기를,
"내가 어찌 좋아서 이렇게 하겠는가. 부득이해서이다. 경들의 말이 좋긴 하나 조정의 사체로 말한다면 끝내 낭패를 보는 것보다는 일찍 대처하는 것이 더 낫다. 그러나 계사(啓辭)가 이러하니, 대신에게 의논하여 처리하라."
하였다. 영의정 이경여(李敬輿), 우의정 조익(趙翼)이 아뢰기를,
"만약 관시를 없앤다면 과거를 설치한 뜻을 매우 상실하는 것이 되니, 선비를 대우하는 도리가 아닐 듯합니다. 예전대로 행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이에 앞서 상이 관시를 없애려고 을해년의 전례를 상고해서 아뢰게 했는데, 대체로 을해년에 관학(館學)에서 종사(從祀)의 논의 때문에 많은 선비들이 각립(角立)하자 선왕(先王)이 특별히 관시를 없애게 하였다. 이에 예조가 상고하여 아뢰었는데, 이때에 와서 대신들의 의논대로 하라고 명한 것이다.
영의정 이경여가 상차하여 총재(摠裁)의 직책을 사직하고 아뢰기를,
"정인홍(鄭仁弘)을 부황(付黃)했다는 이야기는 오래 전부터 퍼졌고 천신(薦紳)들 중에서도 말하는 자들이 상당히 있었기 때문에, 신이 일찍이 전일에 망령되게 진달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듣건대 외간에서는 혹 이 일이 있었다고 하기도 하고 청금록(靑衿錄)에서만 삭제했다고 하는 등 논의가 일치하지 않으므로 확실하게 정할 수가 없는 상태입니다. 신이 공규(公揆)의 자리에 있으면서 한 마디 말을 잘못함으로써 여러 사람들이 떠들고 있습니다. 인홍을 부황한 일에 대해서도 이미 증빙할 만한 문서가 없고 확실하게 증거할 만한 것이 없는데, 신이 경솔하게도 남의 말만을 믿고 천청(天聽)을 혼란스럽게까지 함으로써 마침내 상소를 올린 신하로 하여금 갑자기 특명으로 추고를 당하게 하였습니다. 신이 말을 삼가지 못한 것은 이제 후회해도 소용이 없기에 황공스러워 대죄(待罪)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경은 총재(摠裁)의 직임을 고사(固辭)하지 말라. 부황한 것에 대해 확실하게 증거할 만한 것은 없다고 하더라도 이미 그에 대하여 말한 사람이 있는데, 경에게 무슨 걱정할 것이 있겠는가. 경에게는 아무 잘못이 없으니 안심하고 대죄하지 말라."
하였다. 이보다 앞서 전 지평 목겸선(睦兼善)이 진소(陳疏)하여 자기의 아우와 조카가 맨 먼저 창도하여 이론(異論)을 제기하지 않았다는 실상에 대해 변론하고, 또 아뢰기를,
"정인홍은 일찍이 혼조(昏朝) 때 다만 청금록에서 삭제당했을 뿐 부황을 당했다는 말은 들어 보지 못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겸선의 이 상소의 말이 사실과 다르다고 하여 추고하도록 특명을 내렸는데, 이경여가 이 때문에 차자를 진달하여 대죄한 것이다.
7월 4일 을묘
소현(昭顯)의 셋째 아들을 교동(喬桐)에 옮겨 두고 내의(內醫)를 특별히 보내 약을 가지고 가서 치료하게 하였다.
7월 5일 병진
전 집의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을 불렀는데, 모두 사양하고 오지 않았다.
전 집의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을 불렀는데, 모두 사양하고 오지 않았다.
7월 6일 정사
상이 영사전(永思殿)에서 추향제(秋享祭)를 행하였다.
이때에 크게 가물자 상이 걱정하여 대신 및 비국의 여러 신하를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한재(旱災)가 이 지경이니, 불쌍한 우리 백성이 어떻게 살아간단 말인가."
하니, 영의정 이경여가 아뢰기를,
"화기(和氣)는 상서로움을 오게 하고 괴기(乖氣)는 재변을 불러오기 마련입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그동안 상하가 가로막혀 화기가 이르지 못해서 이렇듯 전에 없던 재앙이 있는 듯합니다. 듣건대 양서(兩西) 지방의 한재가 더욱 참혹한데 관조(官糶)를 이미 다 흩어 주어서 진휼해 줄 길이 없다 하니, 해서(海西)에서 거둔 쌀을 경창(京倉)에 납부하지 말고 본도에 그대로 놔두어 진휼하는 자본으로 삼게 하소서."
하자, 상이 따랐다. 상이 이르기를,
"함경도의 관조가 무려 30만 곡(斛)이나 되는데, 이름만 있고 실제의 양은 없다. 이는 대체로 전후로 일을 맡은 자들의 죄이다."
하니, 경여가 아뢰기를,
"남한산성도 포흠(逋欠)이 많은데, 더구나 영북(嶺北) 수천 리나 떨어진 외방의 경우이겠습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받을 만한 것은 받아내고 받을 수 없는 것은 버려 두라."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수어사(守禦使)를 지금 차출해야 하는데 누가 적임자인가?"
하니, 이경여·조익 등이 모두 이시방을 천거하자, 상이 따랐다. 연성군(延城君) 이시방이 아뢰기를,
"하늘에 응할 때는 형식적으로 해서는 안 되는데, 구황(救荒) 정책으로는 긴축만한 것이 없습니다. 혁파해야 할 공사와 긴급하지 않은 일은 제때에 알맞게 줄여서 하늘을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실상으로 삼으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옳다. 속히 강구하여 정하도록 하라."
하였다. 상이 경여에게 이르기를,
"경이 차자 속에서 ‘이성항(李性恒)을 좌천시킨 것은 더욱 명백하지 않다.’고 하였는데, 내가 그에 대해 분명하게 말하겠다. 성항이 피혐(避嫌)한 말 속에 ‘전하께서 붕당을 타파하고자 하시더라도 받들어 시행할 사람이 없습니다.’고 하였는데, 오늘날 조신(朝臣)들이 설령 이런 습성이 있을지라도 어찌 감히 이런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또 이준경(李浚慶)의 일을 인용하여 스스로 분명한 증거로 삼으면서 나에게 감히 가볍게 논의하지 못하도록 하였으니, 어찌 이런 도리가 있단 말인가. 한번 좌천시킨 것은 안 될 것이 없다."
하니, 조익이 아뢰기를,
"성상의 분부가 참으로 옳습니다만, 붕당을 타파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영상의 말이 나의 뜻에 매우 합치된다. 받들어 시행하는 사람이 없다고 하지 말라."
하였는데, 이경여의 차자 속에 조제(調劑)해야 된다는 말이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분부한 것이다.
상이 하교하기를,
"가뭄이 이 지경에 이르러 백성이 거의 목숨을 부지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가슴 속이 타는 듯하다. 내가 직접 희생물이 되려 하니, 예관(禮官)에게 택일(擇日)하여 아뢰게 하라."
하였다. 예조가 흑포(黑袍)에 옥대(玉帶)를 띠고 흑화자(黑靴子)를 신고서 행례(行禮)하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7월 7일 무오
사간 장응일(張應一)이 상소하기를,
"신은 일찍이 듣건대 임금이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은 뜻을 정하는 것보다 앞서는 것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전하께서 어찌 일찍이 크게 성취시킬 뜻을 두고 계시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성상의 뜻이 부드럽고 약하시어 굳게 정해지지 못했기 때문에 일에 임하여 우물쭈물 미루면서 번번이 물러서서 뒤돌아 보시는 탄식을 있게 하였으니, 어떻게 대본(大本)을 주장하고 온갖 일에 제대로 응수하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임금이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은 시비(是非)를 밝히는 것보다 더 급한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전하께서 어찌 일찍이 거울처럼 밝고 물처럼 맑게 하고자 하시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본원(本源)의 마음 자리가 스스로 깨끗하고 맑지 못했기 때문에 말을 살피고 사물에 응수함에 있어 언제나 모호한 실수가 있게 되었으니, 어떻게 의리를 밝히고 시비의 분별을 정밀하게 하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임금이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은 과단성 있게 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은 없다고 하였습니다. 전하께서 어찌 일찍이 우레처럼 엄하게 하시고 바람처럼 빠르게 하고자 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성상의 성품이 인후(仁厚)하여 굳세고 과감한 점이 부족하기 때문에 우유부단하여 견제당할 걱정을 면하지 못하였으니, 어떻게 일정한 견해를 주장하고 통쾌한 결단의 사용을 바랄 수 있겠습니까.
요즈음 사론(士論)이 마구 분열되는 것이야말로 실로 세도(世道)의 쇠퇴함과 융성함에 관계된 일이니, 어찌 한심스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생각건대 그 시초에 대중지정(大中至正)한 의(義)로써 결단하지 못하여 오늘날 더욱 격렬해지는 결과를 초래했는데, 이 또한 전하의 시비가 분명하지 못하고 결단이 부족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리하여 처음에는 유림(儒林)들이 다투던 것이 사부(士夫)의 싸움으로 옮겨져서 함께 협력해야 할 자리가 칼을 만지며 노려보는 마당으로 뒤바뀌었으니, 점차적으로 이루어진 이 단서에 대해서 어찌 그 원인을 몰라서야 되겠습니까.
조신(朝紳)들이 분열된 것은 그 유래가 이미 오래 되었습니다. 그러나 선왕(先王)의 세대에는 그래도 돌아보며 꺼리는 바가 있었는데,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극도에 달했습니다. 산림(山林)의 고사(高士)들까지도 색목(色目) 속에 걸려 있고, 천하의 대로(大老)도 붕비(朋比)의 논의를 주장하고 있으니, 그 나머지야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뜻을 정하고 시비를 밝혀 과단성 있는 정치를 넓혀 가셨다면 반드시 이와 같이 심하게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신이 어렵고 위태로운 상황을 목격하고 시휘(時諱)에 저촉되는 말씀을 드렸는데,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용서하고 살피시어 더욱 유념해 주소서."
하니, 답하기를,
"나의 병통을 논했으니, 그야말로 약석(藥石)이다. 명심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하였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쓸데없는 비용을 절약해야 하니, 여염에서의 혼인·상장(喪葬)·가사(家舍)·의복·음식을 제도에 벗어나게 하고 있는 것은 일체 금지시키소서. 그리고 무격(巫覡)과 맹복(盲卜)이 행하는 음사(淫祀)와 독경(讀經)하는 등의 일로 재화와 곡식을 소비하는 것도 마땅히 통렬하게 금지시키소서. 또 봉선(奉先)하고 향상(享上)하는 물건이라도 다 임시로 줄여 구황(救荒)하고 제급(濟急)하는 자본으로 삼아 재변을 구하고 백성을 위로하는 도를 다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그 가운데 술을 빚어 취하도록 마시는 폐단은 곡식을 가장 많이 낭비하는 일이니, 더욱 엄금해야 한다. 공진(供進)하는 술도 없애도록 하라."
하였다.
7월 8일 기미
예조가 사직단(社稷壇)에 기우제(祈雨祭)를 지낼 적에 풍악을 사용하자고 청하니, 상이 대신에게 의논하게 하였다. 영의정 이경여(李敬輿), 우의정 조익(趙翼)이 아뢰기를,
"지금 전하께서 최마복(衰麻服)을 벗으시고 길복(吉服) 차림으로 생민(生民)을 위하여 사직단에 기우제를 지내는 것은 절박한 심정에서 할 수 없이 하는 일인데, 이는 묵최(墨衰)를 입고 전쟁터에 나감으로써 적의 침략을 막고 생민을 구제하는 뜻과 대략 같은 것입니다. 일단 전쟁터에 나간다면 어찌 정기(旌旂)와 금고(金鼓)를 베풀지 않음으로써 삼군(三軍)의 귀와 눈이 의지할 바가 없게 할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이 종고(鍾鼓)와 우약(羽籥)을 설치하는 목적은 오로지 신명(神明)을 내려오게 하기 위함으로서 마음속에 거리낄 것이 없는 일이니, 예조의 계사(啓辭)대로 행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송(宋)나라 선인후(宣仁后)가 말하기를 ‘진실로 국가에 이로움이 있다면 나는 터럭과 살도 아끼지 않겠다.’고 했다. 만민을 위하여 나의 잘못을 자책하고 비를 비는 도리에 있어 참으로 감히 사정(私情)대로 할 수가 없다만, 심신(心神)이 망극해서 어찌 할 바를 모르겠다. 속히 낭관(郞官)을 보내어 밖에 있는 대신에게 물어 마음속에 미진한 점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 영돈녕 김상헌(金尙憲), 영중추 김육(金堉)이 아뢰기를,
"상중에 계시면서 풍악을 사용하는 것에 이미 개인적인 정리상 차마 하지 못할 점이 있다면, 하늘을 섬기는 정성에 있어서도 혹 조금이라도 전일하지 못한 점이 있을까 두렵습니다. 성탕(成湯)은 상림(桑林)에서 여섯 가지 일을 가지고 자책하였고092) , 송 인종(宋仁宗)은 금중(禁中)에서 노천에 서서 밤을 새웠는데, 그 당시 풍악을 사용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성상께서 애통해 하며 슬퍼하시는 정성이 스스로 하늘의 마음을 미덥게 하고 감동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니, 풍악을 쓰느냐 쓰지 않느냐의 여부와는 상관이 없을 듯합니다."
하니, 의논대로 하라고 명하였다. 조익이 상차하기를,
"예(禮)라는 것이 본디 정성을 기본으로 하고 형식을 말단으로 삼는 것이긴 합니다. 그러나 본말(本末)을 모두 구비한다면, 가장 좋을 것입니다. 옛날에 종묘(宗廟)의 제사는 상사(喪事) 때문에 폐지한 적이 있었지만 천지(天地)와 산천(山川)의 제사만큼은 상여줄을 넘고서도 행했으니, 그렇다면 외신(外神)을 섬기는 것과 종묘를 섬기는 예는 사체가 동일하지 않다고 할 것입니다. 이번에 풍악을 사용하는 것이 어찌 음악을 즐기고 좋아함으로써 슬퍼하는 마음에 해로움이 있는 것과 같겠습니까. 신을 섬기는 막중한 예에 미진한 바가 있을까 두렵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내 마음이 겨우 안정되었는데, 다시 신을 섬기는 일이 미진하게 된다는 이 말을 듣고 도로 두려워진다. 대신과 육경(六卿)에게 회의하여 아뢰게 하라."
하였다. 대신과 병조 판서 이시백(李時白), 예조 판서 오준(吳竣), 이조 판서 한흥일(韓興一), 호조 판서 이기조(李基祚)가 모두 아뢰기를,
"예에는 경(經)과 권(權)이 있으니, 풍악을 사용하는 것도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이에 따랐다.
7월 9일 경신
상이 사직(社稷)에 거둥하여 하교하였다.
"이번 가뭄이 참혹함으로 인하여 저번에 구언(求言)하는 분부를 내려 잘못을 들려 주고 널리 바로잡아 주기를 바란 지가 이미 여러 날이 되었다. 그런데도 침묵을 지키는 풍조가 이루어져 곧은 말을 듣지 못하고 있다. 내가 부덕해서 도울 가치가 없다고 여겨서 그런 것인가. 아니면 또한 어찌할 도리가 없다고 여겨서 그런 것인가. 하늘의 마음이 돌아서지 않고 날이 갈수록 더욱 심해지고 있다. 한 사람 때문에 이토록 혹독하게 재변이 백성들에게 미치고 있으니, 말이 여기에 이름에 부끄럽고 두려운 마음이 모두 그지없어 깊은 골짜기에 떨어진 듯한 심정이다.
이미 몸을 삼가고 덕을 닦지는 못하고서 문득 하늘에 기원하여 비를 구하고자 하니, 헛된 겉치레에 지나지 않는 일이 될 듯도 싶다만 가슴속의 절박한 심정이야 어찌 그만둘 수 있겠는가. 우리 모든 제관(祭官)과 집사(執事)들은 대소를 막론하고 각각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정성을 다하여 천심(天心)을 감동시킬 수 있도록 하라. 또 해조(該曹)로 하여금 빈궁한 백성을 보살피고 현능한 사람을 뽑아서 백성의 생활을 편안하게 해 주는 동시에 백성의 어려움을 구제할 대책을 조목별로 세워 보고하게 하라."
호조가 아뢰기를,
"한성부로 하여금 사족(士族)과 서인(庶人) 중에 더욱 가난한 자를 뽑아서 쌀을 나누어 주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7월 10일 신유
상이 사직(社稷)에서 재숙(齋宿)했는데, 이날 밤에 비가 약간 내렸다. 새벽에 기우제를 행하고 날이 밝자 환궁(還宮)했는데, 이튿날인 임술일에 비가 내렸다. 헌관(獻官)인 영의정 이경여와 우의정 조익에게 각각 구마(廐馬) 1필씩을 하사하고, 여러 집사들에게 차등 있게 논상하였다.
7월 11일 임술
영중추부사 김육(金堉)이 양주(楊州)에서 상소하여 치사(致仕)를 청하니, 답하였다.
"지난번 인접(引接)하던 날에 물러감을 허락하지 않았는데 아직도 환조(還朝)하지 않고 있으므로 내가 매우 괴이하게 여기며 탄식하였는데, 지금 또 사직을 하니, 이는 또한 무슨 뜻에서 그러는 것인가. 경은 의당 조리하고 와야 한다."
옥당(玉堂)이 【부응교 홍진윤(洪震尹), 교리 조한영(曺漢英), 부교리 홍처대(洪處大), 수찬 이천기(李天基).】 상차하기를,
"신들이 삼가 보건대 장응일(張應一)의 상소에 ‘천하의 대로(大老)도 붕비(朋比)의 논의를 주장한다.’고 하였는데, 그가 말한 대로란 영돈녕부사 김상헌(金尙憲)을 지적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러나 상헌이야말로 정충대절(精忠大節)이 태산처럼 우뚝하니, 늙고 병들어 국사(國事)를 맡지는 못했어도 임금의 국정 자문에 도움을 주고 아름다운 풍속을 앉아서 진정하고 있으므로, 나라에서 길흉을 가려주는 시초[著]와 거북[龜]처럼 의지하고 있으며, 사람들은 태산(泰山)과 북두(北斗)처럼 우러러 보고 있습니다. 오래도록 백성들이 그가 조정에 나오기를 기다리는 덕망을 한 몸에 지니고 있으면서도 나랏일에서 물러날 뜻을 굳게 가지고 논의에 참여함이 없이 시끄러운 세상 밖에 우뚝 서 있으니, 그의 청천 백일(靑天白日)과 같은 뜻을 그 누가 모르겠습니까.
그런데 장응일이 함부로 헐뜯고 선동하는 말을 떠벌리면서 마음속으로 ‘붕비(朋比)에 대한 한 조목은 누구나 듣기 싫어하는데, 찾아보아도 증거가 없는 일이다.’고 생각하고는 이렇게 배척하였으니, 그의 계책을 충분히 이루었다 하겠습니다. 아, 사람이 어쩌면 이렇게까지 말을 만들어 낼 수 있단 말입니까. 색목(色目)이라고 지칭한 것도 본래 근거없이 논의하면서 억지로 붙여 나온 것인데, 그 동안 산림(山林)의 선비 중에서 그 누가 이런 누명에서 벗어난 경우가 있겠습니까. 장응일이 지금 간쟁하는 자리에 있으면서 감히 모함하는 말을 앞장 서서 하였으니, 참으로 탄핵하여 바로잡는 거조가 없다면 어떻게 한 세상에 시비를 밝히고 장래의 화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겠습니까. 그를 파직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나도 그 말이 망령된 것인 줄은 알고 있는데, 배척하지 않은 것은 언로(言路)를 위해서였다. 원로 대신과 산림의 선비에게 무슨 손해될 것이 있겠는가. 그냥 놓아두는 것도 좋을 듯싶다만, 또한 잘못이 없지 않으니, 체직만 시키라."
하였다.
7월 12일 계해
헌부가 【대사헌 남선(南銑), 지평 오두인(吳斗寅).】 아뢰기를,
"삼가 장응일의 상소를 보건대 주장하는 의도가 심상치 않고 말의 표현이 매우 간사한데, 이미 대로(大老)라고 해 놓고는 뒤따라 추악하게 헐뜯었습니다. 일월(日月)과 빛을 다툴 만한 절의와 태산 북두와 같이 높은 덕망은 한 나라가 존경할 뿐만 아니라, 천하에서도 모두 경모(景慕)하고 있으니, 그를 헐뜯는 자가 있다면 결코 정인(正人)이 아닙니다. 원로(元老)가 나랏일을 사양하고 시골에 물러가 있는 것이 선조(先朝) 때부터였는데, 성상께서 왕위를 이어받으신 처음에 대우가 보통이 아니었으며 의지하고 믿는 것이 융중(隆重)하였습니다. 그리고 원로가 한두 번 교체시키도록 의논드린 적이 있기도 하였습니다만, 그것은 모두 임금에게 충성하고 나라를 위해 죽겠다는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와 같은 노인의 충성된 마음은 환하게 질정(質正)할 수 있는데, 일찍이 어떤 편사(偏私)한 일이 조금이라도 있었기에 감히 붕비(朋比)를 주장한다는 말로 억지로 헐뜯고 무함하며 배척해서 죄에 빠뜨리려는 마음을 쓴단 말입니까. 붕비란 두 글자는 예로부터 임금이 아주 미워하는 것이므로 이따금 소인들이 바른 선비를 모해(謀害)할 적마다 이 명목을 빌려서 그들의 바르지 못한 간사한 계책을 성사시켜 왔습니다. 응일의 이 말이 과연 지극히 공평하고, 치우친 사심이 없는 데서 나온 것이라고 하겠습니까.
아, 간사한 소인이 정인 군자를 해치는 기회를 열어 주고 온 나라 사람들이 머리에 손을 얹고 바라다 보는 자를 끊는 것이 이 상소로 말미암지 않는다고 보장할 수 없을 것입니다. 《대역(大易)》의 도(道)는 조짐을 미리 막는 데에 요점이 있고 《춘추(春秋)》의 의(義)는 미리 시비를 분변하는 것을 귀하게 여기는 것이니, 파직하고 서용(叙用)하지 마소서."
하니, 답하기를,
"그 말이 편벽된 점은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구언(求言)을 하면서 한편으로 죄를 준다면 되겠는가. 이들의 망령된 말에 대해서는 내가 따지고 싶지 않다. 여러 원로(元老)와 산림의 선비들도 반드시 마음속에 개의하지 않을 것이다. 경들이 이것을 미끼로 진언(進言)의 길을 막아서 나로 하여금 고립되어 들을 길이 없게 하려고 하는가. 경이 물러가 생각해 보면 또한 반드시 부끄러워질 것이다."
하였다.
간원이 【헌납 유준창(柳俊昌), 정언 강호(姜鎬)·허열(許悅).】 아뢰기를,
"유지(有旨)에 응하여 진언(進言)한 사람인 이상 비록 중도에 벗어나는 말이 있을지라도 내가 죄를 주지 않을 것이라고 이미 상께서 분부하셨으니, 장응일을 체차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니, 답하기를,
"장응일을 체차한 것은 참으로 참작하여 처리한 것인데, 이와 같이 논계(論啓)하다니, 매우 타당하지 못하다."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김상헌의 대절(大節)은 해와 별처럼 환하니, 그를 공격한다면 그는 필시 정인(正人)이 아니다. 똑같이 대간(臺諫)인데, 한쪽에서는 응일을 파직시켜야 한다고 하고 한쪽에서는 응일을 체직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아, 임금은 이목(耳目)을 대간에 의지하여 일시의 시비를 논하는 것인데, 말의 모순이 한결같이 이와 같으니, 장차 어느 쪽을 좇아야 한단 말인가. 간원의 관리가 겉으로는 진언한다고 핑계하면서 마음속으로는 실상 몰래 보호를 하였는데, 상의 총명으로도 오히려 다 밝히지 못한 바가 있었으니, 탄식을 금할 수 있겠는가.
【태백산사고본】 4책 4권 39장 B면【국편영인본】 35책 444면
【분류】정론-간쟁(諫諍) / 인사-임면(任免) / 역사-사학(史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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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은 논한다.김상헌의 대절(大節)은 해와 별처럼 환하니, 그를 공격한다면 그는 필시 정인(正人)이 아니다. 똑같이 대간(臺諫)인데, 한쪽에서는 응일을 파직시켜야 한다고 하고 한쪽에서는 응일을 체직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아, 임금은 이목(耳目)을 대간에 의지하여 일시의 시비를 논하는 것인데, 말의 모순이 한결같이 이와 같으니, 장차 어느 쪽을 좇아야 한단 말인가. 간원의 관리가 겉으로는 진언한다고 핑계하면서 마음속으로는 실상 몰래 보호를 하였는데, 상의 총명으로도 오히려 다 밝히지 못한 바가 있었으니, 탄식을 금할 수 있겠는가.
7월 13일 갑자
대사헌 남선(南銑), 지평 오두인(吳斗寅)이 인피(引避)하기를,
"어제 받은 성비(聖批)에 ‘언로(言路)를 막아 나를 고립시켜서 들을 길이 없게 하려 하는가.’고 분부하셨습니다. 만약 장응일을 성지(聖旨)에 응했다고 하여 그냥 놓아 둔다면 기회를 엿보아 모함하는 무리들이 반드시 꼬리를 물고 일어날 것인데, 조짐을 막고 시비를 먼저 분변해야 하는 의리를 어찌 그만둘 수 있겠습니까. 말이 신임을 받지 못하니, 형세상 구차하게 무릅쓰고 있기가 어렵습니다."
하고, 헌납 유준창(柳俊昌) 등이 인피하기를,
"시시비비(是是非非)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각각 소견이 있는 법인데, 헌부가 마구 헐뜯고 배척했으니 태연히 있을 수 없습니다."
하고, 모두 인혐(引嫌)하고 물러났다. 옥당이 상차하기를,
"남선 등은 출사(出仕)하게 하고 유준창 등은 체차(遞差)시키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7월 15일 병인
김응조(金應祖)를 사간으로, 임의백(任義伯)을 헌납으로, 홍수(洪鐩)를 정언으로, 이지무(李枝茂)를 장령으로 삼았다.
7월 16일 정묘
영돈녕부사 감상헌이 상소하여 봉록(俸祿)을 사양하니, 답하였다.
"경이 이처럼 고사하는 것은 모두 나의 성의가 부족해서 그런 것이니, 내가 매우 부끄럽다. 부디 나의 지극한 뜻을 몸받아 안심하고 수령하라."
행 부호군(行副護軍) 조석윤(趙錫胤)이 네 차례나 상소하며 문형(文衡)의 직무를 극력 사양하니, 상이 온화하게 비답을 내리며 허락하지 않았다.
상이 석강(夕講)에 나아가 《대학연의(大學衍義)》를 강하였다. 강을 마치자, 지경연 한흥일(韓興一)이 아뢰기를,
"저번에 현능(賢能)한 인재를 뽑으라고 분부하셨습니다. 실직(實職)이 있는 당상과 삼사(三司)의 관원들에게 각각 아는 사람을 천거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근래에는 일이 착실하지 못하니 전날처럼 구차스럽게 채우지 말고 천주반좌율(薦主反坐律)을 거듭 밝히라. 그리고 대신에게도 각각 사람을 천거하게 하라."
하였다. 특진관 김광욱(金光煜)이 아뢰기를,
"관각(館閣)에 사한(詞翰)의 인재가 요즘 매우 적은데, 이는 국가가 제대로 배양하지 못해서 그런 것입니다. 옛날 홍서봉(洪瑞鳳)이 문형(文衡)을 맡았을 때에 문명(文名)이 있는 당상관 이하를 뽑아 정과(程課)로 제술(製述)을 시켜 후일의 쓰임에 대비했는데, 지금도 폐지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이민구(李敏求)는 문재(文才)가 아까운데 폐기된 지 이미 오래 되었습니다. 지금 큰 은혜를 내리는 때를 만났으니 죄를 용서하고 서용(叙用)하더라도 안 될 것이 없습니다."
하였는데, 흥일이 이를 인하여 강도(江都)의 일을 두루 거론하고 민구를 극력 구제하면서 눈물을 흘리고 오열(嗚咽)까지 하여 임금의 마음을 감동시키니, 상이 이르기를,
"죄에는 수범(首犯)과 종범(從犯)이 있는 것인데 나도 그의 재능을 아깝게 여긴다. 대신에게 의논하여 처리하라."
하였다. 영의정 이경여(李敬輿), 우의정 조익(趙翼)이 아뢰기를,
"이민구가 죄로 폐기된 지 이제 14년이 되었습니다. 종전에 패군(敗軍)한 사람이 끝내 수용되는 은혜를 입었는데, 민구가 영원히 폐기되고 있는 것은 실로 원통한 일입니다."
하였는데, 얼마 안 되어 민구가 서용(叙用)의 명을 받았다.
7월 17일 무진
상이 조정을 하직하는 수령을 인견하고 직접 타일러 보냈다.
7월 18일 기사
상이 주강에 나아가 《서전(書傳)》 대우모(大禹謨)를 강하였다.
이지항(李之恒)·정언황(丁彦璜)을 승지로, 심세정(沈世鼎)을 정언으로, 조귀석(趙龜錫)을 봉교로 삼았다.
7월 19일 경오
관상감(觀象監)이 아뢰기를,
"달력이 오래되면 착오가 생기는 것은 필연적인 이치입니다. 시력(時曆)을 주는 일을 행해 온 지 3백 년이 넘었으므로 개헌(改憲)하는 절차에 대해 의논하는 자들은 마땅히 고쳐야 한다고들 하는데, 확실히 증거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가정(嘉靖)·만력(萬曆) 연간에 명경(名卿)·거유(巨儒)들이 드러내놓고 고치기를 청했어도 그 의논이 도로 폐기되었고 보면 달력을 만드는 어려움을 대체로 알 수가 있습니다.
서양(西洋)의 역법이 명(明)나라 조정에 쓰여지지 않다가 이제서야 처음으로 행해지고 있는데, 그것이 정리(定理)에 부합하는 것인지는 또한 알지 못하겠습니다. 지난해에 일관(日官)을 북경(北京)에 보내어 탕약망(湯若望)을 만나보게 하였습니다만, 글자를 써가면서 질문하느라 제대로 뜻을 표현하지 못한 채 다만 해가 궤도를 운행하는 도수의 법(法)만 배웠으니, 지극히 적은 부분만 살폈을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서양의 글은 바로 이역(異域)의 학술이므로 구력(舊曆)의 법(法)과 서로 방불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서로 틀리는 것은 다만 절기(節氣)가 하루나 이틀 정도 앞뒤로 차이가 나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이의 결법(訣法)을 자세히 알지도 못하면서 옛것을 버리고 새것을 따르기로 경솔하게 단정해서는 안 될 듯합니다. 따라서 최상의 방책은 일관 중에서 총명한 자를 가려 신력(新曆)의 법을 만들게 하되 날마다 과정을 더하여 독촉해 가르쳐서 그 이치를 깨닫게 한 다음 노자를 주어 북경으로 보내 의심나는 곳을 질문하여 바루게 하는 것인데, 그렇게 하면 혹 온당하게 될 듯도 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다만 윤달이 틀리니 다시 의논하여 처리하라."
하였다. 관상감이 또 신력을 배우기 전에는 그대로 그전의 법을 사용하자고 청하니, 따랐다.
영의정 이경여가 상차하기를,
"무릇 천하의 일은 기회를 잃지 않아야 힘을 덜 들이고 공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기전(畿甸)과 양서(兩西) 지방에 대한 구황(救荒) 대책을 마땅히 불에 타고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주듯 해야 하는데, 일이 닥친 뒤에 구제하고자 한다면 10배의 힘을 들여야 할 것이니, 호조와 상평청(常平廳)으로 하여금 제때에 강론하게 해서 때 늦은 탄식을 면하게 해야 합니다. 인하여 생각건대 선혜청(宣惠廳)의 가을 조세를 보통 해에 견주어 급히 변통하지 않으면, 이는 백성들을 몰아다가 사방에 흩어지도록 재촉하는 셈이 됩니다. 그러나 만약 모두 삭감하거나 반감할 경우 기전의 정공(正供)과 온갖 수응(需應)할 일들이 형편없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해서(海西) 전세(田稅)의 경우 5두미(斗米)를 올려 오지 않은 것을 모두 머물려 두었다가 구황의 자본으로 삼는다면, 해조(該曹)의 경상 비용에 부족함이 있게 될 것입니다. 신이 이른바, 일이 닥친 뒤에 구제하고자 한다면 10배의 힘을 더 들여야 한다는 것이 이를 두고 말한 것입니다.
급히 해조와 선혜청으로 하여금 공물(貢物)의 완급과 숙저(宿儲)의 다소를 참작하고 헤아려서 감해도 될 것은 감하고 부득이한 것은 그대로 두는 등 상황에 따라 변통하여 부족한 것을 보충하게 하소서. 그리고 경기 지방은 선혜청의 가을 조세를 전부 감하거나 3분의 1만 거두게 하소서. 황해도의 5두미는 이미 머물려 두도록 허락하였으니, 전세(田稅)로서 현재 본도에 있는 것도 운송을 정지하게 해서 본도의 물력으로 하여금 조금이라도 도움이 있게 하소서. 그런 다음에야 성상께서 재변을 구제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인(仁)이 비로소 착수할 곳이 있게 되고, 유랑하고 길에 쓰러져 죽는 걱정도 혹 조금은 구제할 수 있을 것입니다. 평안도는 이미 6두미를 삭제했는데 지역이 또 멀어서 곡식을 옮기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그리고 삼남(三南)은 3도와 같지는 않다 하더라도 풍년이 들지도 않았을 뿐더러 앞으로 결실을 맺을지도 미리 알기 어려우니, 배를 띄우는 일을 참으로 가볍게 의논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본도의 온갖 공사(公私)의 신역(身役) 및 상납하는 각종 포물(布物)과 양영(兩營)에서 받아들일 것 가운데 적당량을 임시로 정지시켜야 합니다. 이것이 백성을 구제하기 위한 급선무입니다.
그러나 받아들이는 가운데에도 완급(緩急)의 차이가 없지 않고 재변을 당한 곳도 경중의 차이가 없지 않을 것인데, 활협(濶狹)을 참작하여 적당하게 조절하는 것은 오직 해사(該司)와 해도(該道)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해사와 해도로 하여금 취재(聚財)의 말단적인 일만을 하지 말고, 백성을 다친 사람처럼 생각하는 성상의 뜻을 본받게 하며, 후일에 있을 처리하기 어려울 사세를 생각해서 상례(常例)만을 따르지 말고 특별히 선처하도록 하소서.
그리고 인족(隣族)에게 책임지우는 폐단은 원래 백성들을 병들게 하는 것 중에서도 큰 것입니다. 더구나 이처럼 크게 흉년이 든 때에 백성에게서 긁어 내는 정치를 행하여 끝내 실질적인 소득은 없이 백성의 유랑만을 재촉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에 대해서는 어렵고 쉬움을 따지지 말고 3도의 감사로 하여금 일체 침책하지 못하게 하소서. 그리고 위에 있는 자는 사람에게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을 미루어 사람에게 차마 하지 못하는 정치를 행해야 할 것이니, 상례(常例)에 구애받지 말고 임시로 맥도(貊道)093) 를 행한다면 하늘의 꾸지람에 답하고 백성의 재변을 구제하는 데에 무슨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진달한 바 민사(民事)가 참으로 경의 말과 같으므로 내가 매우 걱정되고 두려워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옛날 장온고(張蘊古)094) 가 말하기를 ‘한 사람이 천하를 다스리게 하는 것이지 천하가 한 사람을 받들게 하는 것이 아니다.’고 했다. 더구나 재변을 만나 두렵게 여기는 마당에 자신을 봉양하는 비용을 절감해서 백성을 편리하게 하는 계획을 어찌 감히 아껴 거듭 백성에게 고통을 안겨 주겠는가. 유사(有司)로 있는 신하와 서로 의논하여 처리하겠다."
하였다.
7월 20일 신미
상이 주강에 나아가 《서전》 대우모(大禹謨)를 강하였다.
헌부가 【대사헌 남선(南銑), 집의 이재(李梓), 장령 이지무(李枝茂), 지평 오두인(吳斗寅).】 아뢰기를,
"이민구(李敏求)가 임금을 잊고 나라를 저버려 종묘 사직에 죄를 얻은 것은 김경징(金慶徵)과 똑같은데, 목숨을 보존하여 오늘날까지 올 수 있었던 것만도 다행한 일입니다. 종신토록 폐기시키는 것이 무엇이 애석하기에 꼭 다시 사로(仕路)를 열어 주어 아무 잘못이 없는 사람과 똑같이 해 준단 말입니까. 거두어 서용하라는 의논을 시행하지 마소서."
하고, 간원이 【헌납 임의백(任義伯), 정언 심세정(沈世鼎).】 아뢰기를,
"이민구가 일찍이 검찰(檢察)의 임무를 받고도 끝내 종묘 사직을 위망에 빠지게 하였으니, 유배(流配)의 형전(刑典)으로 다스린 것만도 이미 실형(失刑)했다 할 것인데, 민구는 도리어 남몰래 비밀스런 계책을 부려 돌아올 발판을 마련하는 여지로 삼았습니다. 【처음에 민구가 영변부(寧邊府)에 귀양가서 정명수(鄭命守)의 처제(妻弟)를 취하여 첩(妾)으로 삼았다. 그 뒤 정명수가 청사(淸使)로 나왔을 때에 서로(西路)에 유배한 사람들을 모두 석방하라고 청하자, 조정이 할수없이 따랐다. 그리하여 민구가 마침내 아산현(牙山縣)에 양이(量移)되었으므로 간원이 이같이 아뢴 것이다.】 선왕께서 그 정상을 통촉하시어 장신(張紳)과 김경징(金慶徵)이 지하에서 원통해 할 것이라는 분부까지 내리셨으니, 전하께서 아무리 용서하여 등용시키고 싶다 하더라도 종사와 선왕에 대해서는 어찌하시렵니까. 거두어 서용하라는 의논을 시행하지 마소서. 그리고 이민구가 문장을 짓는 조그마한 재주를 갖고 있다 하더라도 이미 용서받지 못할 큰 죄를 지었고 보면 김광욱(金光煜)이 공의(公義)를 아랑곳하지 않고 감히 거두어 서용해 주기를 주청한 것은 매우 망령된 처사이니, 판윤 김광욱을 파직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민구에게 선조(先朝)에서 직첩(職牒)을 주던 날 이미 거두어 서용할 뜻이 있었던 것이므로 대신에게 의논하게 하였으니, 그 뜻이 범연한 것이 아니었다. 김광욱의 말은 자기의 생각을 진달한 것에 지나지 않을 뿐인데, 어찌 이다지도 심하게 논한단 말인가. 모두 번거롭게 논박하지 말라."
하였다. 이 뒤로 대간이 여러 달을 두고 연계(連啓)하니, 상이 다시 대신에게 의논하라고 명하였다. 영의정 이경여, 우의정 조익이 헌의(獻議)하기를,
"이민구는 본디 백면서생(白面書生)인 만큼 보장(保障)의 한 지역을 맡아 강적을 막는 것은 스스로 기약할 성격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묘당(廟堂)에서는 그 재능을 잘못 사용하였고, 민구는 자기 능력을 헤아리지도 못하고 응했으니, 단번에 패망하고 만 것은 괴이할 것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 용서할 만한 길이 있다고 여겨져서 일찍이 의논을 드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근일 대간의 논의가 준절히 일어나 달이 지나도록 논집(論執)하고 있는데, 대체로 강도(江都)에서 종묘와 사직을 함몰시키고 사녀(士女)의 혈육을 더럽히게 한 일을 죄로 삼고 있으니, 신은 실로 두려운 마음이 듭니다. 신이 말한 것은 정에 입각한 것이고 대간이 논한 것은 법에 입각한 것으로서 이미 경중의 차이가 있는데, 신이 어찌 감히 정상을 참작하자는 당초의 의견을 고집하여 법에 의거한 대간의 논의를 막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놓아 두어라."
하였다. 대사헌 조석윤(趙錫胤) 등이 인피하기를,
"이민구는 임금을 잊고 나라를 저버려 종묘 사직에 죄를 얻었으니, 나라 사람들이 함께 분하게 여기는 바로서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그 죄를 씻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재신들이 망령된 소견으로 감히 임금의 귀를 번거롭게 했고 묘당의 관대한 의논이 도리어 왕법(王法)을 소홀히 한 것이 되어 근일의 시끄러운 사태를 야기시켰으니, 신들은 삼가 안타깝게 여깁니다. 따라서 양사가 법에 의거하여 논한 것이야말로 여론이 일제히 격발된 데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달포가 지난 뒤에야 비로소 다시 대신에게 의논하도록 하였으니 이것만도 이미 군신 간에 뜻을 통하는 도리에 혐의가 있다 할 것인데, 놓아 두라는 분부가 또 의외로 나왔으므로 신들은 더욱 경악스럽고 개탄스러움을 금하지 못하겠습니다.
신들이 삼가 대신의 의논을 보건대, 오로지 국가에서 그 재능을 잘못 사용한 만큼 용서할 만한 정상이 있다는 것을 주안점으로 삼았는데, 신들의 어리석은 소견으로는 삼가 그렇지 않다고 여깁니다. 강도(江都)는 천연의 요새이므로 쉽게 건너 올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일을 맡은 자가 아무리 병법을 익히고 승리를 제압할 재주가 있는 사람이 못 된다 하더라도 진실로 사수(死守)할 마음을 갖고 일이 발생하기 전에 대비하였다면 무인지경을 밟듯이 쉽게 오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적병 수십 명이 겨우 강 언덕에 오르자마자 몸을 빼어 먼저 달아나서 사졸의 창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군부가 위임한 중임을 떨어진 신짝 버리듯이 함으로써 종묘 사직을 망하게 하였고 백성들을 어육(魚肉)이 되게 하는 등 차마 말할 수 없는 지경에까지 사태가 이르도록 하였습니다. 따라서 이는 전진(戰陣)에 임하여 교전하다가 실패하여 시체로 돌아온 자와는 전혀 가깝지 않은데, 민구를 용서해 줄 만한 정상이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더구나 민구의 재능과 인망은 본래 김경징(金慶徵)보다 우위에 있었으므로 경징의 한 가지 거조도 모두 민구에게서 나왔습니다. 그래서 그때 유모(乳母)라는 기롱까지 있었고 보면, 전수(戰守)할 방도를 전혀 잊고 편안하게 날짜만 보낸 죄는 경징에게 있었던 게 아니고 민구에게 있었던 것인데, 다만 부장(副將)이었다는 이유로 나라의 형벌을 면할 수 있었던 것만도 다행이라 할 것입니다. 지금 만약 사로(仕路)에 다시 끼이게 하여 전혀 죄가 없는 자에게 하듯이 해 준다면 지하의 귀신들이 유독 원통해 하지 않겠습니까.
예로부터 국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기강(紀綱)을 정돈하고 공의(公議)가 행해지도록 하였습니다. 기강이 문란하고 법이 무너지면 제방이 허물어지게 되니, 이점이야말로 우리 임금과 우리 정승이 마땅히 두려운 마음을 가져야 할 곳입니다. 어찌 일시적으로 인정에만 얽매여 여론의 공정함을 생각하지 않고 기강과 법을 스스로 무너뜨린단 말입니까. 형편없는 신들이 외람되이 풍헌의 자리에 있어 말이 신임을 받지 못한 나머지 끝내 공공(公共)한 논의로 하여금 막혀 시행되지 못하게 하였으니, 감히 하루라도 무릅쓰고 있겠습니까. 신들을 파직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놔두라고 한 것은 곧 그대로 쓰지 말라는 뜻이었는데, 말이 뜻을 전달하지 못했다. 경들은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이조 좌랑 김휘(金徽)가 상소하여 장응일(張應一)에게 죄를 주어서는 안 된다고 하니, 답하였다.
"왕의 유지(有旨)에 응한 자에게 죄주기를 청하는 것은 망령된 논의라는 것을 나도 알고 있다."
7월 21일 임신
상이 제사(諸司)의 윤대관(輪對官)을 불러 보았다.
장단 부사 겸 방어사(長湍府使兼防禦使) 노집(盧濈)이 사조(辭朝)하니, 상이 불러 보고는 이르기를 "노집은 위인이 어둡고 용렬하여 방어사의 직임에는 적합하지 않다." 하고, 체직을 명하였다.
상이 주강에 나아가 《서전》 대우모(大禹謨)를 강하였다.
저녁에 유신(儒臣)을 소대(召對)하고 《대학연의》를 강하였다.
진사(進士) 이홍유(李弘猷) 등이 상소하여, 먼저 박세채(朴世采) 등이 공관(空館)한 일과 이백린(李伯麟) 등이 상소하여 세채를 구원한 것에 대해 배척하고, 또 이상진(李象震)·유직(柳㮨)·홍유부(洪有阜) 등을 구원하면서 그들이 정거(停擧)당한 것을 억울하다고 일컬었는데, 답하기를,
"그대들은 똑같이 공자(孔子)를 배우는 자들이다. 아무리 불평스러운 뜻이 있더라도 어찌 번번이 서로 따질 수 있는가. 그대들이 먼저 나의 뜻을 몸받아 스스로 충성되고 어진 선비가 된다면, 그 누가 감히 따르지 않겠는가. 물러가 부디 이 말을 가슴에 새기라."
하고, 이어 사관(四館)에 명하여 이상진 등의 정거를 풀어주라고 명하였다.
우의정 조익(趙翼)이 상소하여 호서(湖西) 지방의 세 가지 폐단에 대한 변통책을 진달하기를,
"첫째, 병영(兵營)·수영(水營)에 쓰이는 대소 수요(需要)를 모두 군병(軍兵)에게서 마련하여 영문(營門)의 모양을 이루고 있는데, 이것이 아니면 달리 마련할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 군병이 1년에 두 차례 납포(納布)하는 것이 도합 60필이나 되니 견디지 못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지금 만약 병사(兵使)로 하여금 홍주(洪州)나 서산(瑞山)이나 해미(海美)를 겸하여 관장하게 하고 수사(水使)로 하여금 보령(保寧)을 겸하여 관장하게 하여 각자 본읍(本邑)의 각 관청에서 받아들인 것으로 먹고 살게 하되 경기 수사가 교동(喬桐)을 겸하여 관장하는 예처럼 하여 다시는 침탈하고 징수하는 폐단이 없게 한다면 군병을 보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둘째, 면천(沔川)은 예로부터 전선(戰船)이 없었는데, 정축년095) 난리가 있은 뒤에 비로소 설립해서 당진(唐津)과 힘을 합하여 함께 만들게 했습니다. 그러나 일단 배를 만든 뒤에는 배를 정박시킬 곳이 없어서 처음에는 해미에 옮겼다가 나중에는 홍주로 옮겼습니다. 그런데 본군에서 홍주까지의 거리가 1백여 리나 되므로 한갓 수직(守直)하는 폐단만 있을 뿐이고 또 배를 부릴 군사가 없으니, 혹시라도 사변이 있게 되면 어떤 사람이 배를 부리며 어떤 사람이 적을 막는단 말입니까.
공산 산성(公山山城)은 본읍(本邑)에서 5리 밖에 있는데 간간이 가파른 언덕이 있습니다. 임담이 감사(監司)가 된 뒤로 감영을 옮겨 성에 들였는데, 지공(支供)과 사환(使喚)을 모두 본주(本州)에서 마련하게 된 결과 사람들이 험준한 산을 넘어 5리 밖으로 분주히 다녀야 하니, 이는 실로 견디기 어려운 큰 폐단입니다. 난을 당해도 지키지 못할 성인데 그저 본주의 해로움만 되고 있으니, 지금 만약 전례에 의하여 영(營)을 본주의 옛 자리에 옮겨 중군(中軍)으로 하여금 성을 지키게 하는 한편 방백(方伯)으로 하여금 4주(四州)096) 에 순행하며 머물게 하면, 공산(公山)만 치우치게 고통받는 걱정을 덜 수 있을 것입니다. 본도에 속히 변통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비변사로 하여금 의논하게 하였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감사(監司)·병사(兵使)·수사(水使)가 모두 주(州)·군(郡)을 겸해 관장하게 하면서 오랫동안 맡겨 공을 이루도록 권장하면 군민(軍民)의 고혈을 짜내는 병폐를 제거할 수 있다고 예전부터 말하는 자가 있었습니다만, 이해(利害)가 반반이라서 아직 변통하지 못했습니다. 후일 등대(登對)할 때 품의(稟議)하여 처리하겠습니다.
그리고 면천에 새로 전선을 들도록 설치한 것은 위급할 때 힘이 되지도 못하고 현재 지탱하기 어려운 걱정만 있으니, 본도 감사로 하여금 형세를 잘 헤아려 계문(啓聞)하게 한 뒤 처치하게 하소서. 또 공산 산성은 본읍이 견디기 어려운 병폐가 되고 있는데, 감사는 성을 지키는 관리가 아니고 각 고을을 순시하면서 풍속을 관찰하는 것이 바로 그 직임입니다. 그러니 평시의 예에 따라 한 곳에 머물러 있지 말고 고을의 대소(大小)를 따져 머물러 있고 순행하는 것을 알맞게 하게 하소서. 이와 같이 하면 산성에 오래 머물러 있는 폐단이 저절로 제거될 것입니다."
하니, 따랐다.
7월 22일 계유
우의정 조익이 상차하기를,
"아조(我朝)의 선현(先賢) 중에 조광조(趙光祖)는 도학(道學)을 밝혔고, 이황(李滉)은 이굴(理窟)에 침잠하였으니, 이 두 분이야말로 가장 뛰어나다고 하겠습니다만, 그 뒤로는 이이(李珥)와 성혼(成渾)만한 이가 있지 않습니다. 이것은 신의 말이 아니라 그동안 선배들의 말이 모두 그러합니다. 이이는 천품이 고매하고 충양(充養)이 순수하며 식견(識見)이 통투(通透)하고 행선(行善)이 민용(敏勇)하니, 이점에서는 우리 나라 역사 이래로 있지 않았던 일인 듯싶습니다. 그리고 성혼은 고명(高明)함이나 투철(透澈)한 면에서는 이이에게 못 미치는 듯하더라도 지조의 엄격함과 행실의 독실함은 실로 이이와 서로 비슷하니, 모두 세상에 드문 대현(大賢)입니다.
전하께서 참으로 그 현부(賢否)를 알고 싶으시면 둘 다 문집(文集)이 있으니 가져다 보시면 될 것입니다. 문집은 두루 보실 여가가 없으실지 모르겠습니다만, 행장(行狀)이 한 권 있는데, 바로 김장생(金長生)이 짓고 이정귀(李廷龜)가 정리한 것으로 평생 동안의 언행이 빠짐없이 기록되어 있으니, 그것을 보시면 그들이 의심할 나위없이 대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간인(姦人)이 욕하고 헐뜯은 것으로 인하여 어진이를 높이는 도리를 없애버린다면, 이는 간인을 중하게 여기고 어진이를 가볍게 여기는 처사이니, 사리상 어찌 당연한 일이겠습니까. 삼가 성상의 뜻이 아직 정해지지 못한 듯하기에 감히 생각했던 것을 다 말씀드려 성찰해 주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경처럼 순실(純實)하고 노성(老成)한 사람도 오히려 이런 거조가 있으니, 내가 매우 애석하게 생각한다. 또한 나랏일을 생각하여 시끄럽게 떠들고 있는 자들의 창도(倡導)가 되지 말라."
하였다.
7월 23일 갑술
사직(司直) 조복양(趙復陽)이 상소하기를,
"아, 언로(言路)가 열리느냐 닫히느냐에 따라 나라의 치란(治亂)이 결정됩니다. 생각건대 우리 성상께서는 너그럽게 용납하시고 지극한 사랑으로 신하를 대우하시며 대신(臺臣)들이 논한 것도 많이 채택하여 받아들이고 계십니다. 그런데도 직언을 가려 듣는 덕에는 부족함이 있고 마음을 비우고 받아들이는 도량에는 넓지 못한 바가 있어 뜻에 조금만 거슬리면 문득 꺾어버리시는가 하면 뇌정(雷霆)의 위엄으로 진노하기도 하고 출척(黜斥)의 벌을 베풀기도 하며 죄는 주지 않더라도 싫어하는 기색을 완연히 드러내십니다.
우선 요즘의 일을 가지고 말해 보겠습니다. 조석윤(趙錫胤)의 청아(淸雅)한 명망(名望)은 조정에서도 비교할 자가 없을 정도입니다. 지금 비록 발탁되어 문형(文衡)을 맡았다고는 하더라도 성상의 은혜로운 사랑은 쇠해졌음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논자들은 모두 그 이유에 대해 말하기를 전에 논한 유계(兪棨)의 일을 성상께서 아직 이해하지 못하고 계시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유계로 말하자면 재식(才識)과 행능(行能)을 갖춘 당대의 가사(佳士)로서 선왕(先王)의 일을 기롱하고 풍자했을 리가 만무한데, 배척하여 버렸으니 그것만으로도 이미 선비들의 바람에 어긋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더구나 석윤까지 멀리해서야 되겠습니까.
이상진(李尙眞)이 탄핵한 논의는 애당초 전례에 따라 서로 바로잡기 위한 뜻에서 나온 것인 만큼 혹 전후로 과격한 잘못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 본심을 헤아려 보면 또한 다른 뜻은 없습니다. 그리고 이성항(李性恒)의 경우는 단지 이수함(李守諴)의 당론(黨論)을 밝히려고 한 것인데 그 의도를 충분히 표현하지 못한 것일 뿐입니다. 그런데 무단히 폄척(貶斥)하며 그만 이수함이 터무니없는 말로 현혹시킨 죄와 똑같이 처리하였습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수함의 정태(情態)가 밉기는 하지만 우선 놔두고 오연(烏鳶)의 알을 깨뜨리지 않는 의를 따르는 것도 한 방법일 것인데, 더구나 이성항 등의 경우이겠습니까.
임금은 말을 간결하고 신중하게 해야 합니다. 임금의 말이 원근에 전파되면 백성들이 듣고 남몰래 그 뜻을 논의하게 되는 것이니, 말씀할 때에 삼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지금 정원은 실로 옛날의 급사(給舍)의 책임을 겸하고 있는 곳인데, 임금의 말을 받들어 봉행한다는 말만 들을 수 있을 뿐 유지(有旨)를 봉해서 되돌려 보내는 일은 보기 드무니, 또한 그 직분을 잃었다고 할 만합니다.
지금 사기(士氣)가 시들해져 직도(直道)가 저상되고 있으니 북돋워 주고 격려해 줄 방도가 있지 않으면 쇠해 가는 사기를 떨쳐 일어나게 하기가 어렵습니다. 지금 홍무적(洪茂績)을 서용(叙用)하라는 명을 내리자 뭇 여론이 모두 흠모하고 감탄하는데, 이것이 어찌 무적에게 사정을 두어서 그런 것이겠습니까.
그리고 이응시(李應蓍)와 같은 자는 당직(讜直)한 기개가 참으로 볼 만하니, 진실로 거두어 발탁해서 대각(臺閣)의 자리에 두어야 마땅합니다. 그리고 무릇 말에 관계된 일은 조금이라도 사리에 타당할 경우에는 비록 잘못한 바가 있더라도 아울러 너그럽게 용서해서 반드시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생각을 다 말할 수 있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억울함을 호소하듯이 정치를 논의하고 이익을 추구하듯이 충성을 바치게 한다면, 어찌 언론을 크게 열어 놓고도 국가를 다스리지 못할 걱정이 있겠습니까.
옛날 송 진종(宋眞宗)이 중서성(中書省)에 조서를 내려, 장부를 비치하고 간관(諫官)과 어사(御史)가 말한 일을 기록했다가 시행 여부에 대해 연말에 가서 갖추어 아뢰라고 하였는데, 이 뜻이 매우 좋습니다. 지금 만약 정원으로 하여금 대간이 논계(論啓)한 것과 군신(君臣)이 장주(章奏)한 것을 가져다가 기록하여 책자(冊子)로 만들어 두게 한다면 시비를 상고하고 헌언(獻言)한 실정을 알아낼 수 있음은 물론 그 성패를 징험하여 청언(聽言)한 실효를 요약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당 태종(唐太宗)은 학사원(學士院)을 두고 퇴조(退朝)하는 여가에 끌어들여 자문을 받곤 하였는데 어떤 때는 밤중이 되도록 논했다고 하며 또 5품 이상으로 하여금 번갈아 내성(內省)에 숙직하게 한 뒤 민간의 병폐와 정사의 득실에 대해 두루 물었다고 합니다. 정관(貞觀)의 아름다운 정치는 실로 여기에서 말미암은 것인데, 어찌 임금으로서 마땅히 법으로 삼을 바가 아니겠습니까.
아, 천하의 일은 시(是)가 있으면 비(非)가 있게 마련이고 정(正)이 있으면 사(邪)가 있게 마련입니다. 시비(是非)를 분변하고 사정(邪正)을 분별하는 것보다 더 큰 임금의 직분은 없습니다. 그런데 삼가 살펴보건대 전하께서 가부를 논하시는 것이 그다지 명료하지 못한 듯한데, 무엇 때문입니까. 선정신(先正臣)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이 순유(醇儒)요 대현(大賢)이라는 것은 전하께서도 환히 알고 계실 것입니다. 아무리 종사(從祀)하는 예가 중하여 어렵게 여기신다 하더라도, 어찌 저 간사하고 망령된 무리들이 함부로 헐뜯으며 욕하도록 놓아둔 채 조금도 돌아보지 않으신단 말입니까. 지금 유생의 상소를 도로 물리치자 태학(太學)이 다시 텅 비었습니다. 유생들도 참으로 과격하게 행동한 잘못이 있습니다만, 전하께서 유생들을 대우하는 것이 너무 박하지 않습니까. 사문(斯文)의 의논이야말로 세도(世道)의 성쇠와 직결되는데, 몸을 굽혀 선비에게 예우하는 것이 곧 제왕의 성대한 예절입니다.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유(儒)를 높이고 도(道)를 중히 여기는 마음을 독실하게 하시어 세교(世敎)를 밝히소서.
김상헌(金尙憲)의 정충 대절(精忠大節)은 일월과 빛을 다투어도 될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천하가 알고 있으며 나라 사람이 우러르고 있는데, 장응일(張應一)은 그만 감히 기롱과 배척을 마구 가했습니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한유(韓愈)는 악어(鱷魚)의 횡포는 길들일 수 있었으나 황보박(皇甫鎛)·이봉길(李逢吉)의 참소와 비방은 그치게 하지 못했다097) .’고 했는데, 신 역시 ‘김상헌이 풍속이 다른 이방인(異邦人)은 복종시킬 수 있었으나 심대부(沈大孚)·장응일(張應一)에게는 물어뜯김을 면하지 못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세도가 이와 같으니 참으로 한심스럽습니다.
산림(山林)의 선비는 다른 일은 염두에도 두지 않습니다. 만약 한 때 탄핵할 경우에는 친소(親疏)를 가리지 않으므로 애당초 색목(色目)이라고 말할 것도 없는데, 응일이 반드시 이를 이유로 배척하려고 하는 것은, 한 세상의 선비를 일망타진하여 경위(傾危)의 술책을 부리려는 데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로부터 붕당(朋黨)이란 말이야말로 소인들이 당세의 임금을 현혹시키고 군자를 무함하는 묘법(妙法)이었습니다. 오늘날 동서(東西)의 명목은 비록 명신(名臣)·숙덕(宿德)으로 공정한 마음에 정직한 도의를 가진 사람이라 할지라도 오히려 그 속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더구나 응일 같은 무리는 일생 동안 분주하게 붕당만을 일삼은 자인데, 어떻게 이처럼 큰 말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비록 유지에 응하였기 때문에 죄를 가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마땅히 시비를 통촉하시고 호오(好惡)를 분명하게 보이시어 여러 간사한 문을 막아야 합니다.
전하께서 왕위에 오르신 처음에는 나이 많고 덕망 높은 신하를 맞이하여 등용하시고 산림에 은거한 선비를 초치하여 융숭한 예우를 하셨습니다. 그래서 뜻 있는 인사들이 조정에 나올 길조가 있기를 중외의 백성이 눈을 씻고 바라보면서 분위기가 일신되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리고 대각(臺閣)의 경우는 조정에서 조심하였을 뿐 아니라 경사(京師)의 이서(吏胥)와 시정(市井)의 무리들까지 두려워하며 스스로 단속하였으니, 사람을 제대로 쓰는 효과를 여기에서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얼마 흐르지도 않아서 잇따라 서로 이끌고 가버리는 결과가 되고 말았습니다. 지금 다행히도 성상께서 특별히 교지를 내려 송준길(宋浚吉) 등을 다시 부르시니, 이어 선비를 사랑하는 정성이 조금도 쇠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겠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말이 이와 같이 갈등을 빚게 하고 속된 논의가 날로 더욱 비루해지니, 물외(物外)에서 노니는 저들이 어찌 기꺼이 오려고 하겠습니까. 이는 전하의 정성 여부에 달려 있다고 하겠습니다.
또 안방준(安邦俊)·선우협(鮮于浹)·최온(崔蘊)·조극선(趙克善)·권시(權諰)·이유태(李惟泰)·유즙(柳楫)·정도응(鄭道應)·김만영(金萬榮) 등도 이미 조정에 들어와 현달한 벼슬을 한 사람들이니, 아울러 일체 불러 들여 수용하소서. 이밖에도 선량하고 지명도가 있는 선비를 다 전조(銓曹)로 하여금 찾아서 진출시키도록 한다면, 어진이가 나오는 길이 점점 열릴 것이고 맑은 의논이 조금씩 행해질 것입니다. 향거(鄕擧)의 제도가 주밀(周密)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사람 수가 이미 많아서 한갓 난잡한 폐단만 있을 뿐입니다. 만약 감사(監司)에게 무재(茂才)로서 특출한 사람을 2, 3명씩 세공(歲貢)하게 한다면, 반드시 정밀하게 선발되어서 바야흐로 실용(實用)에 합당하게 될 것입니다.
요즈음 천거하는 관원을 일반적으로 3품(品) 이상으로 제한하고 있으므로 잡직(雜職) 용품(庸品)들도 천주(薦主)로 참여하는 반면 대간이나 시종들은 도리어 참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외람되고 잡된 폐단은 전적으로 이 때문에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제 마땅히 공경(公卿)과 여러 현관(顯官) 및 일찍이 대간·시종 이상을 지낸 사람으로 하고, 무신(武臣)은 일찍이 곤수 이상의 벼슬을 지낸 자들로 천주가 되게 해서 그들로 하여금 각자 아는 사람을 천거하면서 그 행적(行蹟)을 두루 진달하여 열거하게 해야 합니다. 그러면 감히 망령되게 천거하지 못할 것이니 그런대로 실효가 있을 것입니다. 요직에 중하게 선발하는 일을 어찌 그 사람의 내력도 알지 못하면서 전주(銓注)에만 의지하여 전례대로 임명할 수 있겠습니까. 참으로 조신(朝紳)들을 널리 뽑아서 날마다 교대로 접견하면서 은근히 자리에 앉게 한 뒤 어려운 문제를 묻고 자문을 구한다면 그것만으로도 시정(時政)에 보탬이 될 것이며, 인하여 그 언행을 살펴서 알고 계신다면 여러 신하들이 다투어 권면해서 온갖 사무가 닦여지고 거행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번에 심리(審理)하면서 특별히 석방의 은택을 베풀어 준다면 이를 통해 화기(和氣)가 어쩌면 감돌게 될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일반 백성이 죄를 지었을 때에도 용서해 줄 수 있는 법인데, 더구나 선왕의 손자이며 전하의 유자(猶子)098) 인 경우이겠습니까. 예(禮)에 절모(絶母)하는 의(義)가 있고 법으로도 종모(從母)하는 조항이 없는데, 당초 법률을 의논한 신하는 무엇을 상고해서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가까운 지역에 옮겨 둔 것이야말로 지극한 생각에서 나온 것이니 특별히 더 어루만져 길러 은애(恩愛)를 다한다면, 어찌 성인(聖人)의 지극한 덕이 아니겠습니까.
아, 풍속이 날로 악화되어 이륜(彛倫)이 무너진 나머지 금독(禽犢)의 변이 선비의 족속에서 발생하고 향리에서는 효제(孝悌)의 행실을 들어볼 수가 없으니, 교육하여 인도할 방도에 대해 참으로 생각을 더하여 강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정숙한 자를 정문(旌門)하고 선량한 자를 표창하는 은전도 특별히 거행해야 하니, 중외(中外)로 하여금 효자와 열녀를 수소문하여 찾아서 특별히 정려(旌閭)하게 하소서. 이와 함께 충신(忠臣)·열사(烈士)로서 절의(節義)를 지키다 죽은 자에게는 제사지내는 은전을 내리기도 하고 자손을 돌봐주기도 하여 풍성(風聲)을 세워야 하는데, 이것 또한 새로 펴는 정치에서 마땅히 행해야 할 일입니다.
이상 말씀드린 것은 모두 마땅히 행해야 할 급선무입니다만, 삼가 생각건대 뜻이야말로 모든 일의 근본이 된다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임금이 정치를 하는 데에는 반드시 뜻을 세우는 것이 우선이니, 전하께서는 마음을 맑게 가지고 뜻을 확고히 정하여 깊이 생각하셔서 맹성(猛省)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그대가 이토록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였는데, 재삼 읽어보고 내가 가상하게 여겨 감탄하였다. 마음에 새겨 채택해 시행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7월 24일 을해
조수익(趙壽益)을 대사성으로, 조석윤(趙錫胤)을 동지춘추로, 정두경(鄭斗卿)을 수찬으로, 조한영(曺漢英)·이천기(李天基)를 교리로 삼았다.
우의정 조익(趙翼)이 상차하기를,
"신은 젊어서부터 성혼(成渾)과 이이(李珥) 두 신하의 어짊에 대하여 깊이 감복하였는데, 좋아하고 사모하는 것이 직접 가르침을 받은 자와 다름이 없고 공경하고 흠망하는 것이 옛성인에 대한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신은 우직하도록 소박한 성격을 지녔습니다만, 철이 든 뒤로는 들은 것과 아는 것이 이와 같기 때문에 보통 말하고 논할 때에도 아는 것을 변경하여 이 마음을 속일 수는 없었습니다. 이는 신의 융통성 없는 성격으로 죽을 때까지 굳게 지키고 변경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삼가 성상의 분부를 보건대 두 신하에 대해 부족하게 여기는 뜻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전하에게는 사람을 알아보는 밝음에 극진하지 못한 점이 있고 어진이를 좋아하는 정성에도 지극하지 못한 점이 있는 듯합니다. 사람을 알아보는 밝음에 미진한 바가 있고 어진이를 좋아하는 정성에 지극하지 못한 바가 있으면 그 해로움이 크지 않겠습니까. 그런데도 아무 말없이 입만 다물고 있다면 이는 전하를 속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의 구구한 마음이 스스로 편치 못하기에 감히 두 신하의 현덕(賢德)에 대한 실상을 대략 진달해서 우러러 전하께서 성찰해 주시기를 바랐던 것인데, 이는 다만 성상을 위하여 두 신하에 대해 밝게 아시기를 원한 것일 뿐이지 어찌 털끝만큼이라도 다른 뜻이 있었던 것이겠습니까.
그런데 삼가 성상의 비답을 받들건대 ‘시끄럽게 떠들고 있는 자들의 창도(倡導)가 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신이 지극히 어리석긴 하지만 어찌 유생(儒生)들의 소란스런 논의를 위해 진달하기까지야 하겠습니까. 신의 평소 행사(行事)가 볼 만한 것은 없지만 부박(浮薄)하여 일을 만들기 좋아하는 잘못은 일찍이 저질러 본 적이 없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신이 너무나도 노망(老妄)하여 정신이 혼미해서 일을 생각하는 것이 전도(顚倒)된 듯합니다. 그런데도 오래도록 자리만 차지하고 있어 시위 소찬(尸位素餐)의 부끄러움만 가득하니, 삼가 바라건대 면직해 주시어 문을 닫고 분수를 지키면서 남은 여생을 마칠 수 있게 해 주소서."
하니, 답하기를,
"경은 사직하지 말고 조리하면서 직무를 살피라."
하였다.
이천 현감(利川縣監) 이빈국(李賓國)이 사조(辭朝)하니, 상이 인견(引見)하고는 그가 연로(年老)하다는 이유로 체직을 명하였다.
7월 25일 병자
대사간 김익희(金益熙)가 결성(結城) 지역에서 병 때문에 부소(赴召)하지 못하고 상소하여 사직하면서 이어 소회를 진달하였는데, 그 대략에,
"아, 전하께서 왕위에 오르신 처음에는 인자하다는 소문이 퍼져 사방이 바람에 쓸리듯 감동했는데, 얼마 되지 않아 기대하던 인심이 점차 풀어지고 있는가 하면 꾸짖어 경고하는 천재(天災)만이 거듭되고 있습니다. 사습(士習)은 날이 갈수록 투박해지고 민속(民俗)도 날이 갈수록 악화되어 국사가 수습할 수 없는 지경에 다다르고 있는데, 전하께서는 그런 것을 알고 계십니까.
아, 전하께서 효제(孝悌)의 행실과 예지(睿智)로운 성품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은 용잠(龍潛)099) 때부터 이미 휴상(休祥)으로 드러났습니다. 그리고 보위(寶位)에 오르셔서는 양암(諒陰)100) 중에 슬픔에 찬 검은 얼굴 빛으로 애모(哀慕)하는 정성이 극진하셨고 선왕의 뜻을 계승하여 용서를 베푸는 은전을 다하셨으며 어진 선비를 예우하여 선류(善類)들이 함께 나오는 아름다운 광경이 있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거조(擧措)하는 사이에 사심(私心)이 공심(公心)을 가리기도 하고 용사(用舍)하는 즈음에 사도(邪道)가 정도(正道)를 이긴 경우도 있었습니다. 곧은 말을 듣기 싫어하시어 언로(言路)가 활짝 열리지 못하게 하였으며 여러 신하를 경시한 결과 군도(君道)가 아래로 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의리에 입각한 말은 귀에 들어오지 않고 공리(公利)에 대한 말은 싫지 않게 받아들였습니다. 총명을 문부(文簿)의 잗단 데에만 맡겨 두고 지려(智慮)를 규례(規例)의 진부한 데에만 국한시키고 계십니다. 그리하여 정치의 하자와 백성의 병폐를 일체 개정없이 따르면서 덤덤하게 세월만 보낼 뿐 마침내 한 가지 일도 진보될 수 있는 것이 없으니, 우리 백성에게서 보고 듣는 하늘이 재이(災異)를 내어 꾸짖고 훈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삼가 살펴보건대 전하께서는 타고나신 성품이 뛰어나고 성스러운 도량도 너그러우십니다만, 기질의 병이 좀 있습니다. 워낙 뛰어나기 때문에 차분하고 신중한 면은 도리어 부족함이 있고, 너그럽기 때문에 알차고 성실한 면은 조금 결함이 있는 것입니다. 화를 낼 때는 더욱 절도가 없어 귀에 거슬리는 말에 대해서는 번번이 엄한 비답을 내리시면서 실정 밖의 명목으로 뒤집어 씌우고 헤아릴 수 없는 위엄으로 벼락을 치시니, 이것이 어찌 희로(喜怒)를 발할 때 대공(大公)에 순응하는 성인의 도리라 하겠습니까.
그리고 신이 삼가 생각건대 예로부터 훌륭한 정치를 했던 임금들은 반드시 어진이의 보좌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어진이에게 맡기되 의심하지 않고 대우하기를 지성으로 하여 골육지친(骨肉之親)일지라도 그 사이에 끼어들어 비방하지 못하며 소인들의 참소하는 말이 용납되지 않도록 한 뒤에야 신하가 임금을 부모처럼 사랑하여 끓는 물 타는 불에라도 뛰어들며 날카로운 칼날을 밟는 위험이 있더라도 피하지 않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도 인물이 적다고 하나 또한 강개(慷慨)한 마음으로 나라를 걱정하고 세상과 흐름을 같이 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는 자들이 있으니, 전하께서 만약 성의있게 찾으신다면 어찌 사체(事體)에 밝아 적절히 쓸 만한 선비로서 나와 쓰임이 되는 자가 없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상세히 진달한 것이 모두 나라를 걱정하고 임금을 사랑해서 하는 말이었다. 내가 매우 가상하게 여기며 감탄하는 바이다."
하였다.
7월 26일 정축
온성 부사(穩城府使) 이원환(李元煥)과 박천 군수(博川郡守) 임국한(任國翰)이 사조(辭朝)하니, 직접 타일러 보냈다.
7월 27일 무인
신천익(愼天翊)을 수찬으로, 조복양(趙復陽)을 부교리로, 장차주(張次周)를 부수찬으로 삼았다.
옥당의 강관(講官)을 소대(召對)하여 《대학연의(大學衍義)》를 강하였다.
7월 28일 기묘
평안도 중화(中和) 등 네 고을에 폭우가 쏟아져 사람이 빠져 죽기도 하였는데, 특별히 구휼하는 은전을 베풀라고 명하였다.
옥당의 강관을 소대하여 《대학연의》를 강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진평(陳平)이 여씨(呂氏)들을 왕이 되도록 허락한 것은 무슨 이유인가?"
하니, 시독관 조한영(曺漢英)이 답하기를,
"그것은 곧 일시적으로 뜻을 맞춰 주려는 의도에서였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나의 의견은 그렇지 않다. 태후(太后)101) 가 일단 왕으로 만들려고 하는 이상 어찌 진평의 한마디 말 때문에 그만두겠는가. 진평의 의도는 태후가 만약 자기 말을 따르지 않고 자신을 제거한다면 그 뒤에 일을 치뤄 낼 수 없다고 여긴 것이다. 그래서 우선 그 뜻에 순응한 것이다."
하였다. 한영이 아뢰기를,
"임금을 섬기는 도리는 한결같이 의로 섬기는 것일 따름이니, 성패는 따질 것이 못 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것은 바로 일시적인 권모(權謀)였으니, 후인들이 배워서는 안 된다."
하였다. 검토관 정두경(鄭斗卿)이 아뢰기를,
"한 고조(漢高祖)는 한신(韓信)을 몰랐는데, 소하(蕭何)는 그를 알았습니다. 그러나 소하의 지혜가 고제(高帝)보다 나아서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고제는 그를 만나보지 못했기 때문에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
하고, 이어 이르기를,
"한 고조가 한신을 죽인 것은 대체로 혜제(惠帝)가 어리고 약했기 때문에 후환이 있을까 염려하여 그랬던 것이다. 만약 혜제도 문제(文帝)처럼 영명(英明)했다면 필시 한신 등을 죽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였다. 두경이 아뢰기를,
"혜제가 조왕(趙王)을 대우한 것은 또한 성덕에 해당하는 일이라고 할 만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혜제는 이와 같은 행실이 있었기 때문에 폐위되지 않은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필시 폐위되었을 것이다."
하였다.
7월 29일 경진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옥당의 강관을 소대하여 《대학연의》를 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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