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일 임오
상이 영사전(永思殿)에서 삭제(朔祭)를 거행하였다.
평안 감사 정유성(鄭維城)이 사조(辭朝)하니, 면유(面諭)하여 보냈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신들이 양서(兩西)를 진구할 대책에 대해 회의를 했는데, 모두들 기민(飢民)에게 혜택을 줄 것으로는 올해 거둬 들일 쌀을 감해 주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 농사의 상황으로 보면 앞으로 전결(田結)이 감축되리라는 것을 따라서 알 수 있는데, 전결이 일단 감축되면 거둬들이는 쌀도 자연 감해질 것입니다. 원수(元數)가 이미 감해진 뒤에 또 양감(量減)하는 거조가 있게 될 경우, 1년의 수입량을 1년 지출량과 비교하면 필시 부족하게 될 걱정이 있을 것인데, 백방으로 생각해 보아도 달리 좋은 대책이 없습니다.
선조(先朝) 을유년102) 에 재생(裁省)했던 규정에 의거하여 태복시(太僕寺)에서는 외구마를 줄이고 군기시(軍器寺) 및 훈국(訓局)에서도 군기 만드는 일을 정지하게 하여 거기서 줄인 미포(米布)로 부족한 경비의 수를 충당한다면, 경비를 절감하고 기민(飢民)을 구제하는 방법에 있어 조금이나마 효력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이어 하교하기를,
"경기와 해서(海西) 지방에서 새로 생산되는 것을 진상하는 것이 많지는 않다 하더라도 어찌 마음에 편하겠는가. 대비전(大妃殿)을 제외한 나머지에 대해서는 금년에는 모두 정파(停罷)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8월 2일 계미
임성익(林聖翊)을 헌납으로 삼았다.
예조가 아뢰기를,
"국상(國喪) 이래로 온갖 진상품을 일체 정파했는데, 요즘 한재(旱災)로 인하여 주방(酒房)의 어온(御醞)까지도 다시 임시로 줄였으므로 신들의 마음이 미안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런데 두 도에서 새로 생산되는 것을 진상하는 것까지 이제 또 모두 줄인다면 백성이 임금을 받드는 정성을 우러러 펼 바가 없습니다. 새로 생산된 것을 진상하는 것만큼은 줄이지 마소서."
하니, 답하기를,
"풀 한 포기 쌀 한 톨도 백성에게서 나오지 않는 것이 없는데, 또 어떻게 구복(口腹)을 채우느라 가슴속에 불안을 끼치겠는가."
하였다.
상이 주강(晝講)에 나아가 《서전(書傳)》 대우모(大禹謨)를 강하였다.
홍명하(洪命夏)·김휘(金徽)·홍처량(洪處亮) 등을 암행 어사(暗行御史)로 삼아 경기와 양서(兩西)를 염찰(廉察)하게 하였다.
8월 3일 갑신
비변사가 아뢰기를,
"저번에 성상께서 궁한 백성에게 관심을 쏟으시어 진구하라는 명을 내리셨는데, 이는 문왕(文王)이 불쌍한 사람들에게 맨 먼저 혜택을 준 뜻과 같으므로 보고 듣는 자들이 모두 공경하고 탄복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해당 관청에서 성실하게 봉행하지 못하여 권세가의 노복들이 10분의 6, 7을 차지한 반면, 의지할 데 없는 불쌍한 사람들은 참여하지 못한 채 허둥지둥 서로 이끌고 거리에서 원망하며 울부짖고 있는데, 심지어는 사부(士夫)들이 허명(虛名)을 적어놓고 쌀을 싣고 가는 경우까지 있습니다. 이토록까지 영(令)이 시행되지 않고 사람들이 형편없게 되었으니 지극히 한심스럽습니다. 만약 이 습관을 통렬히 징계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곡식을 나눠주어 진휼하는 일은 반드시 아무 실속이 없게 되고 말 것이니, 한성부로 하여금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않은 부관(部官)들을 적발해서 중하게 과죄(科罪)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나도 원래 이런 폐단이 있을까 염려했는데 지금 과연 그렇게 되었다. 사람들의 비양심적인 행위가 어찌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단 말인가. 쌀을 싣고 간다는 말은 이야기하기도 부끄럽다. 사부란 두 글자를 어찌 차마 말할 수 있겠는가. 해부로 하여금 조사하여 아뢰게 하라."
하였다.
8월 4일 을유
곽지흠(郭之欽)을 장령으로, 신천익(愼天翊)을 응교로, 서필원(徐必遠)을 대교로 삼았다.
진선(進善) 송시열(宋時烈)이 상소하기를,
"신이 병들어 먼 시골에 엎드려 있으나 때로는 오가는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듣기도 하는데, 전하께서 한 가지라도 선정을 행하셨다는 말을 들으면 기뻐서 먹는 것도 잊을 정도이며 잘못된 정사가 있다는 말을 들으면 걱정스러워 잠을 이루지 못하고 때로는 눈물까지 흘리곤 합니다. 지금 일일이 진달하자니 신의 병세가 위독해서 정력이 미치지 못하고, 한마디 말도 없이 죽자니 사무치는 고충(孤忠)에 무궁한 한이 될 것만 같습니다. 그래서 감히 병든 몸으로 아픔을 참고 미천한 정성이나마 대략 올림으로써 채택하시는 자료로 제공할까 합니다.
신이 삼가 듣건대, 요즘 전하께서 성학(聖學)에 더욱 힘쓰시어 하루에 세 번씩 경연에 나아가신다고 하는데, 이는 대체로 장차 뜻을 겸손히 하고 항상 힘씀으로써 자신을 닦고 정치를 세우는 근본을 삼으려고 하는 것이니, 먼 지방에서 전해 듣고 모두 흠모하며 우러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학문은 무엇보다도 요점을 알아야 하고 일은 성실하게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겉으로 형식적으로만 응하면서 내실이 없다면, 하루에 책 1천 장을 독파하고 1만 축(軸) 사이에 마음을 노닌다 하더라도 그것은 그저 보고 듣기에 아름답게 여겨질 뿐이지 자신을 위하여 날로 새롭게 되는 요체를 터득하는 데에는 아무 이익도 없게 되는 것입니다.
신이 주자(朱子)의 글을 조금 읽어 보니 한 글자 한 구절도 지론(至論)이며 격언(格言)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는 또 제왕(帝王)의 학문에 절실한 것이 있었고, 동시에 오늘날의 병통을 적중시킨 것도 있었는데, 마치 성명(聖明)을 위하여 미리 준비해 둔 것과 같았으므로 감히 몇 조목을 구성하여 다음과 같이 올립니다.
삼가 생각건대, 이런 말들은 이미 예람(睿覽)을 거쳤을 것이고 경연의 신하들도 이미 강하여 들려드렸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이와 같이 간절하고 지극한 가르침은 마땅히 탕(湯)임금의 반명(盤銘)에 비견되는 것으로 늘 보아도 싫지 않은 것이고 보면, 다시 올린다고 하여 무슨 혐의가 되겠습니까. 신이 배운 것은 이 정도 밖에 되지 않으니, 가령 다행히 죽지 않고 전하의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된다 하더라도 자문에 응할 것은 또한 이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이것을 법으로 삼고 자성(自省)하는 자료로 삼아 마음에 체득하고 일에 징험하시어 마치 건순(乾淳) 연간의 대유(大儒)를 대하듯 날마다 한가한 틈에 접하소서. 그러면 성학이 날로 고명해지고 치도(治道)도 날로 아름답고 빛나는 경지에 올라 우뚝하게 동방의 요(堯) 순(舜)이 되실 것입니다. 성명께서는 살펴주소서."
하고, 이어 주자가 송 효종(宋孝宗)에게 올린 봉사(封事)와 학문의 요점을 논한 두 조목을 써 올리면서 아뢰기를,
"신은 삼가 생각건대, 삼대(三代) 이후로 습속이 비루해진 나머지 도학(道學)을 오활하여 현실적으로 시행하는 데에는 절실하지 못한 것이라고들 여겼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운영해 갈 때 사용한 방법은 권모 술수와 지력(智力)밖에는 없었습니다. 이에 도학과 정치가 두 길로 나뉘어져 이에 도학은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으니, 탄식을 금할 수가 있겠습니까. 주자는 평소 이 점에 분개하여 학문을 논할 때 현실적인 일을 빠뜨리지 않았고 정치를 논하면서도 반드시 학문에 근본을 두었기 때문에 다스림에 있어 그 도(道)를 얻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대체로 이른바 체용(體用)은 한 근원이며 현미(顯微)는 간격이 없다는 것으로서 이것이야말로 제왕의 본통(本統)이며 성학의 연원인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선뜻 올라오기를 내가 날마다 바라고 있는데, 어찌하여 이토록 핑계대고 사양만 하는가. 상소 속의 정성스러운 뜻은 모두 나를 사랑하는 충성스러운 정성에서 나온 것인데, 마음에 새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천리 밖에서 상소를 올리는 것이 어찌 직접 나와서 계몽해 주는 것만 하겠는가. 속히 올라와 나의 뜻에 부응하라."
하였다.
상이 대신 및 비국의 제신을 인견하고 서민(西民)을 진휼할 대책에 대하여 의논하였다. 인하여 제신에게 하문하기를,
"숙안 공주(淑安公主)의 혼례를 아직 이루지 못했는데, 앞으로의 사태를 예측하기 어려우니, 이런 때일지라도 임시로 예를 이루게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니, 대사헌 조석윤(趙錫胤)이 아뢰기를,
"현재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상도(常道)를 지킬 수는 없습니다만, 이는 곧 대단한 변례(變禮)로서 예문(禮文) 밖의 일이므로 신은 감히 말씀드리지 못하겠습니다."
하고, 영의정 이경여(李敬輿)가 아뢰기를,
"임금의 거조는 한 나라의 법이 되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백성이 어찌 형세가 이와 같은지를 알겠습니까. 그러나 성상의 염려가 심원하니, 널리 물어서 처리하소서."
하고, 한흥일(韓興一)·박서(朴遾)·이후원(李厚源)·윤순지(尹順之) 등이 모두 아뢰기를,
"천하의 사변이 무궁한데 어찌 상경(常經)만을 지킬 수 있겠습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 행례(行禮)는 가능한 한 간략하게 하겠다."
하였다.
8월 6일 정해
비변사가 아뢰기를,
"먹을 것을 버리고 군사를 버리는 것에도 차례가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크게 흉년이 든 해를 당하여 원근의 군사를 모아 나라의 곡식을 허비하고 백성의 일을 해치고 있으니, 제도(諸道)의 어영군(御營軍) 및 기전(畿甸)의 정초군(精抄軍)이 번갈아 번(番)서는 일을 정지하게 하소서. 그리고 송도(松都) 속오군(束伍軍)의 번을 없애 남는 쌀은 본부에 머물려 두고 기민(飢民)을 구제하며 객사(客使)를 접응하는 데 쓰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8월 9일 경인
이후원(李厚源)을 도승지로, 윤득열(尹得說)을 승지로, 신혼(申混)을 봉교로, 조사기(趙嗣基)를 검열로, 강호(姜鎬)를 지평으로, 민응형(閔應亨)을 부제학으로, 홍처윤(洪處尹)을 응교로 삼았다.
상이 조강에 나아가 《서전(書傳)》 대우모(大禹謨)를 강하였다. 강을 마치자, 영경연 이경여가 아뢰기를,
"삼가 호행사(護行使) 원두표(元斗杓) 등의 치계(馳啓)를 보건대, 일의 기미가 전과 다르니 참으로 염려스럽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객행(客行)103) 의 선성(先聲)이 또 뜻밖에 나왔는데,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하였다. 경여가 이에 세자빈(世子嬪)을 속히 정하자고 청하니, 상이 옳게 여겼다. 이어 승지에게 이르기를,
"소현 세자(昭顯世子)의 둘째 딸을 전 현감 구숙(具橚)의 아들 구봉장(具鳳章)과 정혼(定婚)시키려 하니, 이 뜻을 해조에 이르라."
하였다.
개성 유수(開城留守) 여이재(呂爾載), 장단 부사(長湍府使) 허동립(許東岦)이 사조(辭朝)하니, 모두 면유(面諭)하여 보냈다.
8월 10일 신묘
상이 주강에 나아가 《서전》 대우모를 강하였다.
영돈녕부사 김상헌(金尙憲)이 양주(楊州)에 물러가 살면서 상소하여 치사(致仕)를 청했는데, 그 상소에,
"신이 늙어서 구책(驅策)을 견디지 못한다는 것을 성명께서 통촉하시고 이미 시골에 물러가 있도록 윤허하셨습니다. 신은 성상의 은혜를 흠뻑 입고서도 보답할 길이 없이 그저 낮이나 밤이나 대궐을 향하여 거듭 송축할 따름입니다. 다만 누조(累朝)의 두터운 은혜만을 탐한 채 차마 벼슬을 영원히 사직하지 못하고 더디게 떠남으로 인하여 사람들에게 기롱과 욕을 받고 있으니, 체면을 손상시키고 조정에 욕을 끼친 것 모두가 신이 스스로 취(取)한 것인데, 누구를 탓하겠습니까. 지금 이후로는 아무 미련없이 하루가 가기 전에 떠남으로써 성명께서 끝내 보전해 주신 성덕을 빛나게 할 것이니, 천지 부모께서는 특별히 불쌍하게 여기시어 속히 치사를 허락해 주소서."
하니, 답하기를,
"경의 상소가 어찌 이 지경까지 이르렀는가. 나는 매우 섭섭하다. 치사의 청은 결코 윤허하기 곤란하니, 나의 지극한 뜻을 본받아 다시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8월 12일 계사
평안도에 큰 바람이 불어 나무가 꺾이고 돌이 뒹굴었으며 지붕의 기와가 모두 날아갔다.
8월 13일 갑오
상이 대신 및 비국의 제신과 강도 유수(江都留守) 조계원(趙啓遠)을 인견하였다. 조계원이 본부 목장의 말을 다른 섬에 옮기고 목장을 백성들에게 내주어 농사지어 먹도록 허락해 줄 것을 청하니, 따랐다.
8월 15일 병신
상이 영사전(永思殿)에 망제(望祭)를 행하였다.
상이 영사전(永思殿)에 망제(望祭)를 행하였다.
8월 16일 정유
북병사(北兵使) 김일(金逸)이 사조(辭朝)하니, 면유(面諭)하여 보냈다.
8월 18일 기해
경기에 큰비가 와서 물에 빠져 죽은 백성이 많았다.
8월 19일 경자
태백(太白)이 낮에 나타났다.
8월 20일 신축
상이 예조에 하교하기를,
"충신, 효자, 열녀 등에게 정표(旌表)하는 일은 사체(事體)가 매우 중대하니, 더욱 널리 물어서 가능한 한 사실대로 하도록 하라"
하였다. 당시에 해조가 초계(抄啓)한 것이 상당히 많았으므로, 상이 진위(眞僞)가 서로 뒤섞일까 우려하여 이렇게 하교한 것이다.
8월 24일 을사
상이 주강에 나아가 《서전》 고요모(皐陶謨)를 강하였다.
박서(朴遾)를 대사헌으로 삼았다.
간원이 아뢰기를,
"경상좌도에서 감시(監試)를 설장(設場)했을 때에 일제히 모였던 거자(擧子) 7백 명이 처음에야 어찌 응시할 마음이 없었겠습니까. 이는 약간의 무리가 선동하여 파장(罷場)한 것에 불과함이 분명합니다. 그러니 시관(試官)이 만약 잘 타일렀다면 또 어찌 한결같이 잘못된 행동을 고집했을 리가 있었겠습니까. 그런데도 그만 출제(出題)한 뒤에 흩어져 가도록 내버려 두었고 앞장서서 창도한 자도 적발하여 징계하지 않았으니, 주선하여 잘 처리하지 못한 잘못이 실로 이미 많습니다. 더구나 우도(右道)에서 이미 설장했고 보면 명을 욕되게 하고 국사를 그르친 죄를 더욱 은폐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경시관(京試官)은 그 책임이 중하니 파직시켜 영원히 서용하지 말고 동참했던 시관도 아울러 파직시키소서."
하니, 추고하라고 답하였다. 이에 앞서 경상좌도에 감시를 설장했을 때 제생(諸生)들이 유직(柳㮨)의 정거(停擧)와 삭적(削籍)을 풀어주지 않았다는 것을 핑계로 파장(罷場)하고 나갔었다.
8월 25일 병오
경상도에 바람이 크게 불었다.
8월 26일 정미
상이 주강에 나아가 《서전》 고요모를 강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임금이 하늘을 대신하여 사물을 다스리면서 천직(天職)을 함께 수행할 자는 오직 신린(臣隣)이 있을 뿐인데, 말세에 와서는 사람을 얻기가 가장 어렵게 되었다. 지금 이 장(章)을 읽어 보니 나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진다."
하니, 시독관 조복양(趙復陽)이 아뢰기를,
"삼대(三代) 이상에서는 누구든 훌륭하기만 하면 임용했는데, 후세에 와서는 사람을 등용하는 길이 넓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암혈 아래에 또한 나오기를 어렵게 여기는 선비가 있는지 어찌 알겠습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혹 기대하는 뜻이 너무 높아 세상에 나오는 것을 깨끗하게 여기지 않는 자가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어찌 그에게 반드시 그런 실상이 있다고 보장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8월 27일 무신
호행사(護行使) 원두표(元斗杓) 등이 북경에서 돌아왔다. 상이 불러 보고 하문하기를,
"저 나라에서 이경석(李景奭)과 조경(趙絅)의 일을 뭐라고 하던가?"
하니, 두표가 아뢰기를,
"그들의 말투를 보건대 매우 흉칙하고 비밀스러웠습니다. 그리고 늘 일마다 임금에게 책임을 돌리기 때문에 신들은 감히 두 신하의 일은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저 사람들이 매양 말하기를 ‘왜사(倭使)가 왕래할 때 양식과 찬거리만을 주고 별로 다른 일은 없다고 했는데, 그대 나라는 걸핏하면 왜를 핑계로 우리를 공갈하고 있으니, 속임수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경석은 스스로 해당되는 죄가 있으니 본국에서 처치하도록 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우리 나라에서 이 논의를 주장한 자를 묻고는 문득 김상헌(金尙憲)·김집(金集) 등의 성명을 거론하였는데, 다만 김집에 대해서는 그 명자(名字)를 틀리게 말했습니다.
구왕(九王)이 처음에 공주(公主)를 보고서는 상당히 기뻐하는 기색이 있었고 신들도 후하게 대우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북경에 도착하고 나서는 공주가 아름답지 않고 시녀(侍女)도 못생겼다는 이유로 온갖 방법으로 힐책하였는데, 이것이 매우 우려됩니다. 구왕이 말하기를 ‘선한(先汗) 때부터 본국에 은혜를 베푼 것이 매우 두터웠고, 나도 국왕에게 사사로이 베푼 은혜가 있다. 그런데 번번이 왜적과 흔단이 있다는 핑계로 성을 쌓고 군사를 훈련시키겠다고 청하니, 이는 필시 그대 나라가 상하 간에 모두 다른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녀를 선발하여 올리는 일은 명나라 때부터 이미 구례(舊例)로 되어 있다. 오늘날 일은 그대 나라의 행동을 보려는 것인데, 그대 나라가 정밀하게 선발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공주도 만족스럽지 못할 뿐 아니라 시녀 역시 못생긴 자가 대부분이다. 그대 나라의 불성실함을 여기에서 더욱 볼 수 있다. 이경석과 조경 두 신하의 죄는 이미 성안(成案)이 되었으니 이곳에서 처치할 필요는 없고 결말은 본국에 달려 있다.’고 하였습니다."
하고, 두표가 또 아뢰기를,
"북경에 있을 적에 들으니, 명(明)나라 주씨(朱氏)가 광동(廣東)과 광서(廣西) 등 몇 성(省)을 보유하고는 영력(永曆)이라고 개원(改元)을 했다고 하는데, 청(淸)나라 사람들이 매우 비밀스럽게 취급하고 있기 때문에 자세히 알 수는 없었습니다."
하였다.
청사(淸使) 3인이 용만(龍灣)에 도착하였다. 원접사(遠接使) 한흥일(韓興一)이 칙서(勅書)를 등서해 보내 보고했는데, 그 칙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주문(奏文)에 의거하건대, 왜국과 서로 사이가 좋지 않으므로 성을 수리하고 군사를 모으고 병기를 정돈한다고 했는데, 이런 말을 한 것이 한두 번 정도가 아니었다. 그대의 선왕(先王) 때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몇 번인지 모른다.
때문에 파합납(巴哈納)과 기충격(祈充格) 등을 보내어 칙서를 가지고 가서 진위를 물어보게 했는데, 파합납과 기충격 등이 회주(回奏)하기를 ‘신들이 경상도 관찰사 이만(李曼)과 동래부사 노협(盧協) 등을 데려다 자세히 신문하니, 답하기를「왜국과 조선은 평소에 서로 우호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므로, 원한이나 전쟁 따위의 일이 모두 없다.」고 하였다. 따라서 전에 주문한 것은 교묘하게 기망한 것이다.’고 하였다.
이를 통해 보건대 성을 수리하고 군사를 모으고 병기를 정돈하는 등의 일은 원래 왜국과는 관계가 없고 오로지 짐(朕)과 문제를 일으키려고 하는 것이다. 그런 의도에서 성지(城池)를 수리하고 병마(兵馬)를 불러 모으고 기계를 정돈하는 것은 교묘하게 속이는 처사로서 예절에도 위배되는 것이다. 짐은 그에 대비할 따름이니, 다시 무슨 말을 하겠는가."
8월 28일 기유
홍청도(洪淸道)에 비가 많이 왔다.
상이 대신과 비국의 제신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어제 원두표(元斗杓)의 말을 듣고 오늘 칙서의 등본을 보니 그 뜻을 헤아리기가 어렵다. 이는 두 신하에게만 죄를 주려는 것이 아니고 온 나라를 의심하는 것이니, 내가 놀랍기 그지없다."
하니, 호조 판서 이기조(李基祚)가 아뢰기를,
"급히 대신을 보내 변명해야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두 신하가 국사에 마음을 다 쏟았는데, 내가 잘 처리하지 못해서 이 지경에 이르게 하였으니, 어찌해야 하는가?"
하니, 공조 판서 원두표가 아뢰기를,
"우리 나라는 사변을 만나면 군신 상하가 걱정하고 수선만 떨 뿐 끝내 잘 처리하는 일은 없으니, 어떻게 난을 그치게 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대신과 이조 판서·병조 판서, 그리고 삼사(三司)의 장관이 다 입시하였습니다. 이들은 모두 국정에 참여하는 사람들이니, 진주(陳奏)할 일들을 속히 의논하여 결정해야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장차 무슨 말로 변명을 해야 하는가?"
하니, 형조 판서 이시방(李時昉)이 아뢰기를,
"저들이 성곽을 수축하는 것을 가지고 우리를 힐책한다면 우리 또한 왜국의 정세가 예측할 수 없다는 것으로 핑계를 대야 하는데, 전날 이만(李曼)과 노협(盧協) 등이 죽을까 두려워서 사실대로 대답하지 못했다는 것으로 말을 하면 될 것입니다."
하였다. 원두표가 아뢰기를,
"진주(陳奏)할 때 변무(辨誣)라고 이름을 붙여야 합니까, 아니면 대죄(待罪)라고 해야 합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죄라고만 하면 이는 죄를 승복하는 것이다. 대죄와 변무를 둘 다 거론하는 것이 마땅한데, 두 신하의 일에 대해서도 언급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우의정 조익(趙翼)이 아뢰기를,
"청사(淸使)가 일단 관소(館所)에 들어가면 백관이 일제히 정문(呈文)을 올려 변명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저들은 문자만 가지고는 움직일 수 없고 곧장 대화를 통해야 하니, 대신으로 차출하여 보내야 한다. 그러나 영상은 평소 저들과 사이가 좋지 못하고 우상은 늙고 병든 상태이니, 새로 복상(卜相)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부사 이하도 잘 가려서 차임하여 보내야 한다."
하였다. 기조가 아뢰기를,
"전날 청사가 왔을 때 일의 기틀을 그르친 자는 이만과 노협입니다. 두 사람을 북경에 압송하여 그곳에서 처치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두 사람이 가더라도 반드시 사실대로 말하지 않을 것이니, 해만 있고 이익은 없을 것이다."
하였다.
이기조(李基祚)를 진주 부사(陳奏副使)로, 정지화(鄭知和)를 서장관(書狀官)으로 삼았다.
8월 29일 경술
조익(趙翼)을 좌의정으로, 이시백(李時白)을 우의정으로, 구인후(具仁垕)를 병조 판서로 삼고, 이어 이시백을 진주사(陳奏使)로 삼았다.
상이 주강에 나아가 《서전》 대우모를 강하였다.
지평 강호(姜鎬)가 인피(引避)하기를,
"과거를 설치하여 선비를 뽑는 일은 제왕의 대공지정(大公至正)한 일이니 반드시 온 나라의 선비들이 멀고 가까운 데를 막론하고 다 응시해야만 사체에 합당한 것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이번에 사론(士論)이 분열되었는데 조정에서도 적절하게 조제(調濟)시키지 못하였으므로 경상좌도의 선비들이 마침내 응시하지 않는 사태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우도에 과장(科場)을 설치했다고는 하더라도 나와 응시한 자는 수백 인밖에 되지 않았으니, 이는 실로 2백여 년 동안에 없었던 일입니다. 어찌 너무도 매몰차고 구차스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결코 그대로 복시(覆試)를 시행하여 나라의 체모를 거듭 손상케 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신이 경외(京外)의 감시(監試) 초시(初試)를 모두 파방(罷榜)해야 한다는 뜻으로 동료에게 간통(簡通)했는데, 끝내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했습니다. 이는 모두가 신이 경시당한 데서 온 소치이니, 신을 체직하소서."
하고, 대사헌 박서(朴遾) 등이 인피하기를,
"삼가 지평 강호가 인피한 말을 보건대 놀랍고 괴이하게 여겨지는 마음을 금하지 못하겠습니다. 성상이 즉위하신 초년에 특별히 널리 선비를 뽑는 과거를 설치한 것은 참으로 성대한 일입니다. 그런데 영남 지방의 유생들은 지난번에 유직(柳㮨)의 소(疏)에 참여하였다는 이유로 응시하려 하지 않았는데, 간절하게 권면하고 타이른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적절하게 조제하지 못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팔도(八道)의 선비가 거의 모두 즐거운 마음으로 응시하였는데, 영남 좌도만이 조정의 간곡한 뜻을 체득하지 못한 채 유직의 벌을 풀어주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끝내 과거를 폐하고 말았으니 이것은 또 무슨 마음입니까. 더구나 이미 과장에 들어왔다가 출제(出題)한 뒤에 파하여 나갔으니 파장(罷場)한 것인데, 끝내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과장을 설치하여 선비를 뽑은 뒤에는 거자(擧子)의 다소에 대해서는 거론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경상우도의 응시자 명단과 회수된 시험지의 수를 일일이 거론하며 계문함으로써 팔도에 있지도 않은 규정을 새로 만들고 있으니, 도대체 이것은 또 무슨 뜻입니까.
강호는 그저 영남 유생들이 파장한 것과 관련하여 매몰찬 처사라고만 하면서 막중한 경과(慶科)를 이것 때문에 파방할 수 없다는 것은 알지 못하니, 그 또한 너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하겠습니다. 가령 이것을 파하고 다시 설치한다고 하더라도 또 응시하려 하지 않으면 그때도 파해야 한단 말입니까. 신들이 삼가 선조조(宣祖朝)의 수교(受敎)를 보건대 ‘과거 시험장에서 일이 생겼을 경우, 시관(試官)에게 잘못이 있으면 시관에게 죄를 주고 거자(擧子)에게 잘못이 있으면 거자의 이름을 삭제해야 할 것이니, 절대로 파방(罷榜)은 허락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또 일찍이 선조(先朝) 때에도 경중(京中)의 감시(監試) 이소(二所)가 파장하자 양사(兩司)가 한 달이 넘도록 파방을 청했으나 윤허하지 않았는데, 그때 예조 판서 김상헌이 이소를 감해 버리고 그대로 복시(覆試)를 시행하자고 청했었습니다. 경시(京試)의 파장 때에도 오히려 파방을 하지 않았는데, 더구나 반도(半道)104) 의 선비가 파장한 경우이겠습니까. 지난번 간원에 답한 비답에도 죄가 거자에게 있다고 분부하셨고 보면, 영남 좌도의 선비들이 파장을 했다고 해서 이미 시험을 보인 막중한 과거를 갑자기 파할 수 있겠습니까. 이 때문에 오가면서 의논하고 있었는데 그런 즈음에 갑자기 인피하였으니, 신들이 어찌 스스로 자기 의견을 옳다고 여겨 태연히 그대로 자리에 있겠습니까. 신들을 체직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강호 등이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간원이 아뢰기를,
"거자(擧子)가 파장하는 풍조는 가증스러운 것이니, 한 도를 빼거나 일소(一所)를 빼 버려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전후의 수교(受敎)가 간절했을 뿐만이 아닌데도 별도로 이론(異論)을 낸 것은 매우 근거가 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성헌(成憲)을 지키려고 한 것은 폐단을 막으려는 데 뜻이 있는 것으로서 대각의 체모를 깊이 얻은 일입니다. 지평 강호는 체차하고 대사헌 박서 등은 출사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좌의정 조익이 상차하여 아뢰기를,
"이시백(李時白)은 충성되고 성실하며 너그럽고 후덕한데다 청렴하고 근신하며 주밀하고 자상하니 참으로 재보(宰輔)에 적합합니다만, 나이 많고 병이 깊어 멀리 사신 길을 떠나는 것은 감내하지 못할 것이고 신과는 사돈간이기 때문에 상피(相避)해야 할 입장입니다. 신과 같이 늙고 병든 사람은 있으나마나 한 존재이니, 의당 한지(閑地)에 물러가 있어야 합니다. 다시 감당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복상(卜相)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우상이 병이 많은 데 대해서는 나도 걱정하고 있다. 상피하는 한 조목은 대신에게 의논하여 처리할 것이니, 경은 안심하고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이조가 이것을 대신에게 의논하였는데, 영의정 이경여(李敬輿)가 아뢰기를,
"상피법(相避法)은 법전(法典)에 실려 있는 만큼 한때의 일로 인하여 경솔히 고친다면 반드시 뒤폐단이 있을 것이니, 평시라면 논의할 것도 없습니다. 다만 사세가 이 지경에 이르러 아무리 둘러보아도 계책이 없으니, 임시 방편의 도리를 쓰지 않을 수 없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8월 30일 신해
우의정 이시백이 상소하여 면직을 청하면서 좌상과는 사돈간이므로 상피해야 하는 혐의가 있다고 진달하니, 답하였다.
"경은 충신(忠信)함과 덕망으로 이미 나라 사람들에게 신임을 받고 있다. 그래서 내 뜻을 먼저 정한 뒤 여러 사람에게 물어 보니 모두 동의하면서 성공을 바라는 마음들이 간절하였다. 그런데 어찌 이토록 지나치게 겸양을 하는가. 더구나 사돈간에 상피하는 법을 둔 법전의 뜻은 필시 서관(庶官)에게 적용하기 위한 것이다. 어찌 이것에 구애되어 어진 대신을 쓰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아, 나라의 일이 어렵고 위태로운데, 오늘의 사행(使行)을 늦출 수 있겠는가. 부득이한 혐의가 있더라도 돌아다 볼 겨를이 없으니, 경은 만사를 물리치고 속히 나와 방도를 논의하여 시대의 어려움을 구제하라."
우의정 이시백이 상소하여 면직을 청하면서 좌상과는 사돈간이므로 상피해야 하는 혐의가 있다고 진달하니, 답하였다.
"경은 충신(忠信)함과 덕망으로 이미 나라 사람들에게 신임을 받고 있다. 그래서 내 뜻을 먼저 정한 뒤 여러 사람에게 물어 보니 모두 동의하면서 성공을 바라는 마음들이 간절하였다. 그런데 어찌 이토록 지나치게 겸양을 하는가. 더구나 사돈간에 상피하는 법을 둔 법전의 뜻은 필시 서관(庶官)에게 적용하기 위한 것이다. 어찌 이것에 구애되어 어진 대신을 쓰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아, 나라의 일이 어렵고 위태로운데, 오늘의 사행(使行)을 늦출 수 있겠는가. 부득이한 혐의가 있더라도 돌아다 볼 겨를이 없으니, 경은 만사를 물리치고 속히 나와 방도를 논의하여 시대의 어려움을 구제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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