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일 임자
상이 영사전(永思殿)에서 삭제(朔祭)를 거행하였다.
이기조(李基祚)를 우참찬으로, 원두표(元斗杓)를 호조 판서 겸 판의금부사로, 이행우(李行遇)를 대사간으로 삼았다.
헌부가 아뢰기를,
"경상 감사 민응협(閔應協)이 본도에 과장(科場)을 설치한 일과 관련하여 전후 치계한 말이 이미 부당하기 짝이 없었는데, 심지어 우도의 경우는 이미 과장을 설치하여 선비를 뽑았음에도 불구하고 녹명(錄名)과 수권(收券)의 수를 일일이 거론하여 아뢰었으니, 이는 팔도에 있지 않았던 규례입니다. 도주(道主)의 신분으로서 이미 다사(多士)들을 진정시키지 못하고, 또 전에 없던 규례를 만들어 후일의 말꼬리를 만들 폐단을 열어 놓았으므로 물의가 비등하면서 모두 잘못이라고 하니, 중하게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9월 2일 계축
상이 주강에 나아가 《서전》 익직(益稷)을 강하였다.
비변사가 흉년을 이유로 백관(百官)의 녹봉(祿俸)을 감하자고 청하니, 상이 하교하였다.
"충성되고 신실한 신하에게 녹봉을 중히 하라고 한 것은 성인의 가르침으로서 흉년든 해라면 더욱 관심을 쏟는 것이 마땅하니, 감해서는 안 된다."
9월 3일 갑인
상이 대신과 비국의 제신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진주(陳奏)할 문서를 상의하여 지었는가?"
하니, 영의정 이경여가 아뢰기를,
"신의 생각으로는 진주하는 말은 사실에 의거하여 곧바로 진달하면서 무함을 받은 사실을 해명해야 하리라고 여겨집니다. 나라가 무함받은 것이 일단 해명되면 그 나머지는 자연히 차례대로 풀릴 것이니, 두 신하의 일을 제기하여 그들의 노여움을 범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아예 거론하지 않을 경우 두 신하에게 죄를 돌리는 것처럼 될 것인데, 저 사람들도 필시 두 신하에게 죄가 있다고 여길 것이다. 지금 문장을 잘 구성하여 저들의 노여움을 범하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호조 판서 원두표가 아뢰기를,
"칙서(勅書) 속에 이미 노협(盧協)과 이만(李曼)의 이름을 거론했으니 우리쪽에서 답이 없어서는 안 됩니다. 문장을 구성하기가 매우 어려운데, 그저 대답을 잘못했다고 말을 만들어야 합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게 하라."
하였다. 우의정 이시백이 아뢰기를,
"의논하는 자들은 말하기를 ‘이만과 노협 등을 의주에 잡아두거나 북경(北京)에 압송하기라도 하면 저들이 필시 노여움을 풀 것이다.’고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런 일은 결코 할 수 없다. 어찌 예측할 수 없는 일을 시험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경여가 아뢰기를,
"경중(京中)에 잡아다 놓고 상의 뜻으로 저들에게 이르기를 ‘나도 대죄(待罪)하는 중에 있으므로 감히 처치하지 못한다.’ 하고는 그들의 답을 살펴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것은 괜찮을 수도 있겠다만 어떻게 결말을 짓겠는가."
하자, 병조 참판 조석윤(趙錫胤)이 아뢰기를,
"바야흐로 진주(陳奏)하여 해명하려고 하는 만큼 앞질러 먼저 잡아올 필요는 없습니다."
하였다. 원두표가 아뢰기를,
"양서(兩西)에 흉년이 들어 곡식 종자도 없는 형편이니, 금년의 조세를 면제해주고 양호(兩湖)의 곡식을 옮겨다가 서방 백성들에게 나눠 줌으로써 내년 봄의 농사 밑천으로 삼게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고, 이경여가 아뢰기를,
"비축한 관향곡(管餉穀)을 지급하면 매우 편하겠는데, 장부에만 거짓으로 기록된 것이 많다고 합니다."
하고, 원두표가 아뢰기를,
"감사로 하여금 장부를 속여 만든 자를 조사하여 죄주게 한다면 징계되는 바가 있어 두려워할 것입니다."
하였다. 경여가 아뢰기를,
"나라의 일이 이와 같으니, 조정에 있는 신하가 비록 한마음으로 협력하더라도 오히려 구제하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중인(衆人)들도 오히려 그러한데, 더구나 생사를 함께하고 휴척을 함께하는 사람들의 경우이겠습니까. 호조 판서 원두표와 형조 판서 이시방(李時昉)에 대해서 사람들이 염파(廉頗)와 인상여(藺相如)와 같은 혐의105) 가 있다고들 하고 있으니, 어찌 너무나도 불행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염파와 인상여는 인품이 매우 높았기 때문에 끝내 생사를 같이하는 동지가 되었습니다. 구순(寇恂)과 가복(賈復) 같은 경우도 한 광무(漢光武)가 한마디 말을 하자 모두 원한을 풀었습니다106) ."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영상이 이렇게 말한 것이야말로 국가의 복이다. 두 경(卿)은 모두 대대로 나라의 은총을 받고 함께 기특한 공을 세운 자로서 재상에까지 이르러 기대되는 바가 무척이나 많다. 만약 작은 혐의를 끊어 버려 국가의 급한 일을 우선하지 않는다면 경들만 불행할 뿐 아니라 국가의 불행이라 할 것이다."
하고, 이어 염파와 인상여가 혐의와 원한을 잘 처리한 일을 일컬었다. 이에 원두표가 기세가 등등하게 해명하면서 노기가 얼굴에 나타났는데, 이시방이 뭐라고 말을 하려 하자 시백(時白)이 한사코 말렸다.
9월 4일 을묘
형조 판서 이시방(李時昉)이 상소하기를,
"신은 타고난 성품이 성글고 졸렬하며 재주와 학식도 보잘것없으므로 분수를 지키며 자족하는 외에 사람과 서로 견줄 뜻이 없다는 것은 같은 조정 신료들이 알고 있는 바입니다. 그런데 염파와 인상여, 구순과 가복에 대한 이야기가 천청(天聽)에까지 전달되었는데, 간절하게 교계(敎戒)하신 뜻이 보통 이상의 특별한 것이었으므로 신은 정성스럽게 간직하고 장엄하게 외우며 감격하여 눈물을 흘릴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신이 마음에 편치 못한 바가 있습니다. 신이 겸대하고 있는 선혜청(宣惠廳)·상평청(常平廳) 양청의 임무는 삼공(三公)이 으레 겸하는 아문(衙門)인데, 게다가 신은 영상과 우상에게 모두 상피(相避)해야 할 혐의가 있는 처지이니, 비록 임시로 설치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어찌 감히 태연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성명께서는 속히 체개(遞改)하라고 명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두 아문의 제조(提調)는 피혐할 필요가 없다. 상소 속의 ‘가슴 속에 간직하고 장엄하게 외웠다.’는 말에 대해서 내가 매우 아름답고 기쁘게 여긴다. 영상이 한 말은 경들을 매우 사랑해서 한 것이다. 경들은 염파와 인상여, 구순과 가복으로 지목된 것을 혐의쩍게 여기지 말고 염파와 인상여, 구순과 가복의 행실을 사모하여 협력하고 공경하면서 나라의 일을 함께 구제해 무강한 복을 받도록 하라. 그러면 어찌 국가에만 다행이겠는가. 실상은 경들의 복이다. 경은 노력하라. 나는 두 번 말하지 않겠다."
하였다.
9월 6일 정사
상이 서교(西郊)에 거둥하여 청사(淸使)를 영접하고, 인정전(仁政殿)에서 접견하였다.
9월 7일 무오
달이 남두(南斗) 괴성(魁星)으로 들어갔다.
강원도에 큰물이 졌다.
상이 남별궁(南別宮)에 거둥하여 청사(淸使)를 접견하였다.
9월 8일 기미
상이 영의정 이경여에게 명하여 백관과 더불어 청사의 관소에 가서 조문하고 제사를 올린 일에 대해 사례하지 않은 본국의 실수를 먼저 사과하고, 이어 이경석(李景奭)과 조경(趙絅)의 억울함에 대해 말하게 하였는데, 청사가 말하였다.
"돌아가면 이것을 황제에게 고하겠다. 이번 행차의 목적은 오로지 시녀(侍女)에 있다. 본국이 미녀를 뽑아 보내면 황부왕(皇父王)이 보고 반드시 기뻐할 것이며, 지난번 의심했던 것도 모두 풀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진주사가 수십 번 가더라도 이익이 없을 것이다."
9월 9일 경신
경관(京官)을 양계(兩界)107) 에 나누어 보내 나이 적은 미모의 시녀를 각각 3, 4명씩 가리게 하고, 경중(京中)은 포도청으로 하여금 일을 수행하면서 여염(閭閻)의 아름다운 여자를 찾게 하였다. 뽑힌 자 중에는 스스로 삭발하는 자도 있었으며 부모와 형제가 도로에서 울부짖었는데, 7, 8세 되는 아이는 거의 모두 혼인시켰다. 상이 때때로 중사(中使)를 보내어 재상과 비국에 앉아 선발하는 일을 상의하게 하였다.
사은사 인평 대군(麟坪大君) 이요(李㴭)와 부사 임담(林墰)이 도중에 치계하기를,
"신들이 북경(北京)에 있을 때 섭왕(攝王)이 파흘내(巴訖乃)·가린(加麟) 박씨(博氏)와 기청고(祈靑古) 등을 보내 말하기를 ‘왜국 정세에 우려할 단서가 없는데도 그대 나라가 번번이 이를 주문(奏聞)하고 있으니, 이는 필시 조신(朝臣) 중에 간사한 무리가 나라의 일을 괴란시키려고 계책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그러나 국왕이야 어찌 다 알고 있겠는가. 이 뜻을 귀국하거든 국왕에게 고하라.’ 하였습니다."
하였다. 이때 구왕(九王)의 어미를 부묘한 데 대해 반사(頒赦)가 있었는데, 청사 두 사람이 또 나오게 되었으므로 중외가 모두 의구심에 휩싸였다.
이때 청사가 올 예정이었으므로 원접사(遠接使)를 차출해야 했는데, 정경(正卿) 중에는 적당한 자가 없었다. 대신이 종2품을 승차(陞差)하여 보내기를 청하니, 상이 박서(朴遾)를 특별히 승진시켜 공조 판서로 삼고 이어 원접사로 차임하였다.
상이 하교하기를,
"기년(朞年)이 지났는데도 아직 산릉(山陵)에 전알(展謁)하지 못했으니 망극한 슬픔에 상로(霜露)의 감상을 어찌할 수 없다. 해는 흉년들고 백성은 고생하여 걱정스럽기 짝이 없는데, 더구나 삼사(三使)가 돌아가지 않은 지금 또 양사가 온다는 소식이 있다. 내가 비록 걸어서 갔다 올 수는 없다 하더라도 민력(民力)을 수고롭게 하고 민재(民財)를 허비하여 도로를 보수하고 교량을 수리해야만 하겠는가. 해당 고을 수령들은 거가(車駕)를 인도하지 말고, 감사는 이끌고 가는 자들을 간소하게 함은 물론 양식을 싸가지고 가게 하라. 만약 범하는 자가 있으면 법으로 제재를 가하라."
하고, 이어 대신 이하는 양식을 직접 가지고 가게 하여 열읍(列邑)을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하였다. 이에 앞서 상이 장릉(長陵)에 거둥하고자 하여 해조(該曹)에 택일하게 하였는데, 마침 청사(淸使)가 오게 되어 우선 물려서 행하게 했다가 이때 와서 이렇게 하교한 것이다.
9월 13일 갑자
청사가 돌아갔다. 상이 서교(西郊)에 거둥하여 전송하였다.
9월 14일 을축
태백(太白)이 낮에 나타났다.
9월 15일 병인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함경도 유생 이후빈(李後彬) 등이 상소하여 두 현신(賢臣)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기를 청하니, 답하기를,
"너희들의 상소 내용을 보건대 한심스럽기 짝이 없다. 아, 여름에 밭매는 것보다 힘든 아첨은 옛사람이 부끄럽게 여긴 바이다. 비록 경유(京儒)의 시배(時輩)들에게 친교를 맺어 아첨을 하고자 한다 하더라도, 억지를 써가며 알지 못하는 바를 어찌 감히 이처럼 한단 말인가. 나는 매우 통탄스럽고 해괴하게 여긴다. 남의 사주를 받아 임금의 동향을 살피려 하였으니, 그 죄는 죽어도 모자란다. 너희들을 법대로 조치해야 마땅하나 지금은 우선 용서해 주니, 너희들은 물러가 학업을 닦으라."
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멀고 가까움을 막론하고 유(儒)라고 이름하는 이상에는 모두 관대하게 용서하는 것이 곧 선비를 대우하는 임금의 도리입니다. 지금 북방 유생들이 근일 나라의 걱정이 바야흐로 심한 것을 알지 못하고 감히 이 상소를 올렸으니, 신들도 적절한 때가 아니라는 것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수십 명의 유생이 머나먼 천리 길을 따지지 않고 이렇게 와서 대궐에 호소하였는데, 성교(聖敎)가 지극히 엄하여 사기(士氣)가 꺾인 나머지 먼 지방 사람들이 부끄러워 죽고 싶어들 합니다. 근밀한 자리에 있으므로 구구한 심정을 감히 진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사론(士論)이 어그러지고 조정이 어지러워진 것이 전적으로 이것 때문이다. 나라가 이것 때문에 망할 것인데, 그들을 대우하는 도리를 어찌 평화롭게 할 수 있겠는가. 계사(啓辭)의 뜻도 어긋나지 않았는가. 나는 도저히 그들의 계사를 인정하지 못하겠다."
하였다.
영의정 이경여 등이 상차하기를,
"까마귀 알과 소리개 알을 깨지 않은 뒤에야 봉황이 오는 것이며 죽은 말의 뼈를 버리지 않은 다음에야 천리마가 오는 법입니다. 예로부터 성스럽고 명철한 제왕이 유(儒)를 높이고 선비를 사랑하면서도 오히려 미치지 못할까 걱정했는데, 그것이 어찌 그 사람들이 모두 반드시 학문이 천도와 인사를 관통하고 재주가 경국 제세의 능력을 품고 있어서 그러했겠습니까. 실은 종이에 그린 단청(丹靑)을 인하여 진룡(眞龍)이 실내에 들어오는 것을 보려는 목적에서였습니다.
북방 유생들이 두 신하의 도학 연원에 대해 참으로 알고 독실하게 좋아한다고는 기필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처럼 일이 많은 때에 감히 때아닌 청을 진달한 것도 실로 성상을 번독스럽게 한 잘못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만은 풍도를 듣고 분발한 것에 지나지 않으니, 그들이 아름다운 덕을 좋아하는 본래의 성품을 잃지 않은 것입니다. 따라서 예(例)에 따라 진퇴하는 것이야말로 가까운 말을 제대로 살피는 도리에 맞는 것인데, 성비(聖批)가 매우 준엄하여 죽어도 죄가 모자란다고 하교하기까지 하셨습니다. 유생이 참람되고 망령되어 어진이를 숭상하는 논의에 스스로 빌붙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어찌 죽음을 당할 죄이며 법대로 조치해야 할 것이겠습니까.
왕의 말씀이 한번 내리자 유식한 자가 놀라고 의혹해하는데, 신들은 인심이 복종하지 않고 사기가 저상될까 두렵습니다. 어찌 전하께서 등극한 처음에 문(文)을 우선하여 교화를 일으켜야 하는 정치에 부족함이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 피해가 어찌 까마귀 알과 소리개 알을 깨며 천리마의 뼈를 버린 것에 그칠 뿐이겠습니까. 장보(章甫)를 입고 유(儒)라고 이름하는 자를 국가가 예로 대우하지 않는다면, 자신의 학식과 재능을 드러내지 않는 자들이 오히려 산림으로 더 깊이 들어가지 못할까 두려워할 것입니다.
아, 일월은 사정(私情)이 없어 어디든 비추지 않는 곳이 없으며 천지는 지극히 인자하여 무엇이든 기르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임금은 하늘을 몸받은 자로서 광대하고 무방(無方)해야 하는데, 어찌 차이를 두어 먼 변방의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의 뜻을 다 펴지 못하게 한대서야 되겠습니까. 더구나 한마디 말을 하는 것은 성인도 삼가던 것이며 말하는 사이에는 화평하게 하는 것이 귀한 것이니, 한마디 말이라도 잘못되면 원근(遠近)이 풀이 죽는 법입니다. 반드시 극기(克己)하고 사리를 관찰하는 공부를 배가(倍加)해야만 큰 화로에 눈이 녹듯 효력을 거둘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차자의 말은 알았다고 답하였다.
9월 16일 정묘
좌의정 조익이 상차하기를,
"신이 어제 북유(北儒)에게 내린 비답이 미안하다는 뜻을 동료들과 의논하여 상차하였습니다만, 구구한 신의 뜻에는 오히려 미진한 바가 있기에 다시 이렇게 번거롭게 해드리는 바이니, 삼가 바라건대 살펴주소서. 예로부터 성명(聖明)한 제왕이 세상을 다스리고 사물에 응하는 방도는 오직 시비와 선악과 사정(邪正)을 평등하게 살펴 버리고 취하는 것일 뿐이었으니, 어찌 조금이라도 견주어 차이를 두려는 사사로움이 그 사이에 개입되었겠습니까. 그러므로 치세(治世)의 도(道)는 본래 지극히 쉽고 지극히 간략한 것입니다. 《주역》에 이르기를 ‘쉽고 간략하게 하여 천하의 이치를 얻는다.’고 한 것이 이것입니다. 지금 이이와 성혼 두 현신을 문묘에 종사하자는 논의는 실로 거국적인 공론입니다. 두 신하의 학문과 덕의(德義)의 실상에 대해서는 전후하여 올린 상소에서 이미 진달하였으니 이제 다시 말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당시에 종유하며 배우는 자들이 이미 모두 마음속으로 진정 열복(悅服)하였으며, 죽은 뒤에는 듣고 보고서 경모하는 자들이 거의 온 나라에 퍼져 있어 시간이 가면 갈수록 더욱 깊어만 가니, 이것이 어찌 억지로 하는 것이겠습니까.
전일 종사하는 일로 진소(陳疏)한 것이 호남(湖南)의 바닷가와 관서(關西)의 의주(義州) 사람들까지 모두 모여 와서 한 것인데, 이 사람들이 어찌 모두 남의 사주를 받아 그렇게 하였겠으며, 또한 어찌 이익이 있어 그렇게 한 것이겠습니까. 오직 천성에서 우러나온 병이(秉彛)와 호덕(好德)의 마음에 비추어 볼 때 스스로 그만둘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예나 지금이나 안이나 밖이나 인성(人性)이 착하다는 것과 온 천하가 인(仁)으로 돌아가는 것은 필연적인 이치라는 것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영북(嶺北) 지방의 경우 문학이 부족하여 본디 뒤떨어진 지역으로 일컬어지고 있을지라도 병이의 성품은 사람마다 고르게 받았다 할 것입니다. 두 신하의 덕의(德義)와 명성(名聲)이 어디를 막론하고 알려져 있고 보면, 이 유생들이 비록 현자에 대한 일을 깊이 알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어찌 유독 그 풍도에 대해 듣지 못하였겠습니까. 스스로 이름을 유적(儒籍)에 두고 있는 사람으로서 어진이를 높이는 정성이 어찌 다른 지방에 뒤질 수 있겠는가 하는 마음에서 서로 이끌고 먼 거리를 왔을 뿐인 것입니다. 그런데 성상께서는 그들이 남의 사주를 받고서 왔다고 의심을 하고 계십니다만, 신은 결코 그렇지는 않을 듯싶습니다. 저 두 신하를 높이 사모하는 논의야말로 온 세상의 공론인데, 어찌 먼 지방의 유생에게까지 힘을 빌리겠습니까. 그리고 그들의 말이 또 어찌 영향을 미칠 수 있겠습니까.
게다가 천리 길을 멀리 오느라면 고생이 매우 많기 때문에 예전부터 경시(京試)에 와서 응시한 북유(北儒)가 없었습니다. 그들에게 만약 성심이 없다면 어찌 남의 사주를 받았다고 해서 오겠습니까. 그들이 온 것은 성심에서 나온 것인데도 전하께서 이와 같이 의심하고 계시니, 이는 아마도 성인이 성심으로 사람을 대하는 도리가 아닌가 합니다. 심지어는 그 죄가 죽여도 모자란다고까지 하셨는데, 저들이 만약 성심으로 왔는데도 전하께서 배척하여 끊기를 이와 같이 하시어 저들로 하여금 원통함을 안고 돌아가게 한다면, 이 또한 임금이 사람을 대우하는 도리에 당연한 일이 아니라고 여겨집니다. 저 두 신하의 덕행은 이미 오래 전에 드러났는데, 유생들이 존모하는 것이 옳겠습니까, 모함하는 것이 옳겠습니까.
그리고 유직(柳㮨)은 선현을 무함했을 뿐만이 아니라 항성(恒性)을 잃은 자로서 기망(欺罔)하는 그 말이 실로 통분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그가 올린 상소는 모두 허탄하기만 한데 그중에 더욱 뚜렷이 드러난 것은 이러합니다.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이 서로 논한 이기(理氣)의 글은 처음부터 끝까지 되풀이한 말이 모두 이(理)와 기(氣)가 동일하지 않다는 것을 밝힌 것인데, 유직은 그만 말하기를 곧 ‘이기를 한 물건으로 하였으니 육가(陸家)108) 의 학(學)이다.’ 하였습니다. 그리고 성혼의 상소에 있는 ‘신심을 거두어 간직하고 정신을 보호하여 아낀다.[收拾身心 保惜精神]’는 이 여덟 글자는 본래 주자(朱子)의 말인데도 유직은 그만 말하기를 ‘현저하게 유자(儒者)의 규구(規矩)가 아니요, 도가류(道家類)이다.’고 하였으니, 또한 너무나도 기망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무릇 말과 실상이 서로 부합되는 것을 불기(不欺)라 하고 말과 실상이 서로 다른 것을 기(欺)라고 합니다. 조고(趙高)가 바친 것은 사실은 사슴이었는데 그것을 가리켜 말이라고 하였으므로, 그것을 기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유직의 말이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고 한 것과 무엇이 다릅니까. 초야의 선비가 천리 길을 달려와 대궐에 호소한 것이 곧 기망(欺罔)하는 상소를 한 것이 된다면 어찌 통탄스럽지 않겠습니까. 전(傳)에 말하기를 ‘임금에게 무례하게 구는 자를 보면 마치 새매가 참새를 쫓듯이 죽여야 한다.’ 하였는데, 유직이 기망한 죄야말로 지금의 신자(臣子)들이 모두 참새를 쫓듯이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영남 좌도의 유생들이 유직을 정거(停擧)와 삭적(削籍)에서 풀어 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스스로 과거 시험을 폐하고 그것을 절의를 지킨 것처럼 여기고 있으니, 이 어찌 큰 변이 아닙니까. 그 사건은 무리를 지어 국명(國命)을 거역한 것이고 그 계획은 조정을 협박하고 견제하여 유직에게 내린 벌을 풀게끔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바로 ‘임금에게 강요하는 것은 임금을 무시하는 짓이다.’라는 것으로서 그 정상이 참으로 통탄스러우니 조짐을 키워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런데 나름대로 보건대 전하의 뜻은 영남 유생에 대해 매양 너그럽게 용납하며 그르다고 해서는 안 되는 것처럼 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어진이를 사모하는 말을 한 자는 번번이 깊이 미워하고 통렬하게 꺾으시면서 어진이까지도 아울러 경홀하게 여기고 계시니, 이 점을 신은 정말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신은 삼가 생각건대 성상의 뜻이 혹시라도 유직의 마음을 거스르면 영남의 마음을 잃게 된다고 여기기 때문에 한결같이 너그럽게 용납하며 그 뜻을 거스르지 않으려고 하시는 반면, 양현을 종사(從祀)하자는 논의에 대해서는 나라가 장차 망할 것이라는 분부까지 내리게 되었다고 여겨집니다. 무릇 세상을 다스리는 방법은 다만 그 시비가 있는 곳을 관찰하여 옳은 것은 취하고 그른 것은 버리는 것일 뿐입니다. 예로부터 종사하자는 논의가 어찌 나라를 망치는 도리가 되었습니까. 지난 선조(先朝) 때에 원황(元鎤)이 영남 감사가 되자 유생들이 통문(通文)하여 배척하였는데, 선왕(先王)께서 명하여 앞장서서 창도한 자를 잡아 국문하여 치죄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때에 영남의 인심을 잃은 일을 보지 못했고 또 과거를 폐하며 지금처럼 공동(恐動)시킨 일도 보지 못했습니다.
저 영남의 선비들이 과거를 폐한 것은 모두 그들의 본심이 아닙니다. 과거는 곧 선비들이 어버이의 마음을 기쁘게 해드리고 출세하는 길이 되기 때문에 평소 크게 하고 싶어하는 바입니다. 따라서 비록 유직과 친하게 지내는 자라 하더라도 유직을 위해 과거를 폐하지 않을 것인데, 더구나 한 도의 유생으로서 유직과 평소 알지 못하는 자들이 모두 유직을 위해 과거를 폐하겠습니까. 그럴 리는 만무합니다. 이는 필시 위협하여 제지하는 자가 있어서 그런 것입니다.
감사 민응협(閔應協)도 그 책임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대저 공도회(公都會)를 폐지한 지가 이미 오래 되었는데 이처럼 일이 많은 때에 유독 설행(設行)하기를 청했다가 얼마 뒤에 또 유생들이 유직에게 벌을 내린 것 때문에 과거에 응시하지 않겠다고 한다 하였으니, 처음부터 공도회를 베풀자고 청한 것은 이를 위한 계책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녹명(錄名)되어 과장(科場)에 들어온 인원 수를 계문(啓聞)하는 규정은 처음부터 없었는데, 이 또한 의도를 가지고 한 듯하니 매우 괴이합니다. 도주(道主)의 의향이 이와 같은데, 또 중간에 선동하는 자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니 초야의 외롭고 약한 사람들이 어찌 따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의 계책으로는 먼저 민응협(閔應協)을 파직하고 공정하고 의리를 아는 사람으로 유직을 위해 계획을 하지 않을 자를 가려 보내어 그로 하여금 제생(諸生)을 잘 타일러서 그들의 의혹을 풀어 주게 하는 한편, 유직이 기망하고 일을 그르친 죄를 다스려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제생을 위협하고 견제하는 자가 없어져 유생들이 모두 전과 같이 과거에 응시하여 그들의 소원을 이룰 수 있는 동시에 한 도내가 안정되어 무사하게 될 것입니다. 신이 늘 유직이 기망하는 간특함에 대해 분함을 품고 있던 터에 또 영남 지방의 실정을 깊이 살피고서 감히 다시 무릅쓰고 진달하니 성찰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답하기를,
"차자의 내용에 병적인 곳이 많다. 내가 경을 위하여 매우 애석하게 여긴다."
하였다.
대사간 이행우(李行遇) 등이 상차하여 북유(北儒)의 상소에 대해 내린 비답이 미안하다고 논하고, 대사헌 조석윤(趙錫胤)도 상소하여 말했는데, 상이 모두 듣지 않았다.
9월 17일 무진
도승지 이후원(李厚源)이 아뢰기를,
"이번 배릉(拜陵)의 행차는 삼년상(三年喪) 안에 이루어지는 일이고, 신릉과 구릉을 행제(行祭)할 때에도 길흉의 차이가 있으니, 축문(祝文)의 내용도 달라야 할 듯합니다. 예관(禮官)으로 하여금 대신에게 의논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영의정 이경여, 우의정 이시백이 아뢰기를,
"사당에 제향하고 능에 성묘할 때는 각각 주되는 바가 있습니다. 사당에 제향할 때는 경(敬)을 위주로 하고 능에 성묘할 때는 애(哀)를 위주로 하는 것입니다. 고례(古禮)의 묘제(墓祭)에는 제문이 없는데 거기에는 의도가 있습니다. 지금 배릉은 대체로 삼년상 이전에 행하는 것으로서 상로(霜露)의 지극한 정을 펴려는 것이요, 변두(籩豆)와 보궤(簠簋)를 차려 놓고 올리는 제향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애통하는 마음으로 성묘하는 것이 주가 되고 전(奠)과 천(薦)은 다음입니다.
《오례의(五禮儀)》에 기재된 것을 보건대 ‘왕후(王后)와 동릉(同陵)일 경우에는, 능사(陵司)가 왕후의 신좌(神座)를 영좌(靈座)의 동쪽에 설치하고 전사사(典祀司)가 준소(尊所)에 잔(盞) 셋을 가설하고 각기 예찬(禮饌)을 진설한 다음 전하가 왕후전에 부잔(副盞)을 올리고 아헌관(亞獻官)이 또 부잔을 올린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사대부의 집에서 고비(考妣)를 아울러 제향하는 예와 같은 점이 있는 것인데, 그러면 최복(衰服)을 입은 것에도 혐의가 없이 지극한 정을 겸하여 펼 수 있을 것이며, 조종조의 전례(典禮)를 변경하는 폐단도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축문에 있어서도 대략 글을 만들되 혹시 구애되는 점이 있으면 두 개의 축을 만들어도 무방할 것입니다."
하고, 좌의정 조익은 아뢰기를,
"《예경(禮經)》에 ‘상복을 입은 3년 안에는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그렇다면 모든 선대의 묘소와 산릉(山陵)에는 모두 제사를 지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주자(朱子)가 논하기를 ‘상복을 입은 3년 안에 선대의 사당에 제사지내는 일을 인정상 그만둘 수는 없으니, 묵최(墨衰)로 행하거나 아니면 복이 끝났거나 가벼운 복을 입은 자로 하여금 행하게 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인정상 그만둘 수 없기 때문에 만든 제도입니다. 지금 능제(陵祭)를 만약 일시에 신릉과 구릉에 병행할 경우 절차상 극히 방해되는 점이 있을 것이니,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구릉의 제사에는 따로 헌관을 내어 섭행(攝行)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구릉의 제사를 섭행하게 하는 것은 정리상 차마 못할 바이니, 영상과 우상의 의논대로 시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9월 19일 경오
태백(太白)이 낮에 나타났다.
진주사(陳奏使) 우의정 이시백(李時白), 부사 우참찬 이기조(李基祚), 서장관 정지화(鄭知和)가 청국으로 갔다.
9월 21일 임신
진주사 이시백 등을 소환하고, 인평 대군(麟坪大君)으로 대신하면서 동지사(冬至使)를 겸하게 하였다. 정명수(鄭命守)가 말하기를, "반드시 대군으로 진주사를 차견해야만 요청대로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였으므로, 이 명이 있게 된 것이다.
9월 23일 갑술
상이 하교하기를,
"교외(郊外)에 거둥했다가 만약 경숙(經宿)하게 될 경우 종묘에 고하는 예문(禮文)이 있는데, 영사전(永思殿)에는 유독 고사(告辭)하는 일이 없는가?"
하니, 예조가 아뢰기를,
"이는 곧 나갈 때 반드시 고한다는 뜻이니, 대신을 보내어 대신 고하게 하되 숙녕전(肅寧殿)에도 고사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자, 상이 따랐다.
9월 24일 을해
수찬 정두경(鄭斗卿)이 상소하여 능에 거둥할 적에 말을 빨리 달리지 말도록 청하니, 상이 따랐다.
9월 25일 병자
상이 장릉(長陵)에 거둥하였다.
9월 26일 정축
수릉관(守陵官) 이해(李澥) 등에게 가자(加資)를 명하였다.
9월 27일 무인
전라도 여산(礪山) 등 고을에 큰물이 졌다.
9월 29일 경진
정원이 일식하는 날에는 우선 친제(親祭)의 거행을 정지하기를 청하니, 상이 예관(禮官)에게 명하여 의논하게 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고례(古禮)에 일식하는 재변을 만났을 때 임금이 소복(消復)109) 되기를 생각하여 옷을 바꿔 입고 정전(正殿)을 피하며 몸을 움츠려 두렵게 생각하는 것은 모두 하늘을 공경하고 자신의 잘못을 질책하는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제례를 친행(親行)하시는 것은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자세로 재변을 사라지게 하는 도리에 방해가 될까 두려우니, 대신에게 섭행(攝行)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사은사 인평 대군(麟坪大君) 이요(李㴭)와 부사 임담(林墰)이 북경에서 돌아왔다.
'한국사 공부 > 조선왕조실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 효종실록5권, 효종 1년 1650년 11월 (0) | 2025.12.20 |
|---|---|
| 효종실록5권, 효종 1년 1650년 10월 (0) | 2025.12.20 |
| 효종실록5권, 효종 1년 1650년 8월 (1) | 2025.12.20 |
| 효종실록4권, 효종 1년 1650년 7월 (0) | 2025.12.20 |
| 효종실록4권, 효종 1년 1650년 6월 (0) | 2025.12.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