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일 신사
일식이 있었다.
전 대제학 정홍명(鄭弘溟)이 죽었다. 홍명은 옛 정승 정철(鄭澈)의 아들이다. 일찍 가정의 훈화를 받고 자신을 갈고 닦아 스스로 서니, 더불어 교유하는 상대가 모두 한 시대의 이름있는 사람들이었다. 광해군 때에는 뭇소인들에게 미움을 받아 배척되어 등용되지 못했다. 인조가 중흥하자, 영화롭고 현달한 직임을 차례로 거치고 문형(文衡)을 담당하는 데까지 이르렀으나, 모두 사양하여 제수되지 않았다. 성품이 강직하고 남을 잘 인정하지 않았으며 술마시기를 매우 좋아했다. 문장은 넓고도 풍부하였는데, 더욱 사부(詞賦)에 장점이 있었다. 만년에 향리에 묻혀 살다가 일생을 마쳤다. 호는 기암(畸菴)이다. 문집이 있어 세상에 전한다.
10월 2일 임오
상이 주강에 나아가 《서전(書傳)》 고요모를 강하였다. 강을 마친 뒤에 부제학 민응형(閔應亨)이 아뢰기를,
"오늘날 북쪽 지방의 유생들이 올린 상소는 실로 어진이를 높이고 우리 유가의 도를 호위하려는 정성에서 나온 것이니, 성상께서 참으로 너그럽게 포용하여 답하여야 할 것인데, 도리어 엄한 비답을 내리셨습니다. 심지어 ‘남의 사주를 받았다.’는 등의 말로 전교하셨으니, 왕께서 하신 말씀이 한번 전파되면 원근에 있는 사람들이 듣고 깜짝 놀랄 것입니다. 어찌 단지 북쪽 지방에 있는 유생들만 낙담할 뿐이겠습니까. 대신(大臣)과 삼사(三司)가 번갈아 올린 글도 널리 구제하는 뜻에서 나온 것인데, 단지 알았다고만 답을 하셨으니, 이것이 어찌 대신을 공경하고 대간을 대우하는 도리입니까. 종사(從祀)를 청한 데 대해서도 이는 곧 사림의 공공(公共)의 의논이었는데, 잘못된 의논들이 그로부터 마구 쏟아져 나와 혹 가부(可否)가 같지 않음이 있었으니 성명께서 매우 어렵게 여기신 것은 참으로 신중한 뜻에서 나온 것일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 유생들의 과격한 거조에 대해서도 성색(聲色)을 바꾸지 마시고 조용히 타일러 인도하셨어야지, 가벼이 실정에서 벗어난 비답을 내리시어 너무도 준엄하게 물리쳐 버린 것은 마땅치 않았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성균관 유생들이 다시 성묘(聖廟)를 비우고 영남의 유생들이 나라의 시험에 나오지 않았는데, 어떻게 성색을 바꾸지 않고서 능히 조정할 수 있겠는가. 피차 서로 버티다가 점점 이 지경에까지 이르고 말았으니, 나 또한 어떻게 조처해야 할지 모르겠다."
하였다. 대사헌 조석윤(趙錫胤)이 또한 북쪽 지방 유생들의 상소에 대한 비답이 온편치 못했다는 뜻을 극언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들이 공평한 마음으로 생각해보면 내 말이 잘못된 것이 아님을 알 것이다."
하였다. 석윤이 또 아뢰기를,
"요즈음 액정(掖庭)에서 집을 축조하는 거조가 있다고 들었는데, 과연 이런 일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실제 몇 칸의 집을 경영하였는데 지금 이미 완공하였다."
하였다. 석윤이 아뢰기를,
"이런 때 토목공사는 사람들을 놀라게 할 수 있으니, 속히 그만두게 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나로 하여금 깨닫게 하였다. 비록 완성되지 않은 공사가 있더라도 그만두게 하는 데 무엇이 어렵겠는가."
하였다.
10월 4일 갑신
상이 서교(西郊)에 거둥하여 청나라 사신을 맞이하고, 인정전(仁政殿)에서 접견하였다. 청나라에서 보내온 칙서에는,
"황조비 황후(皇祖妣皇后)께 시호를 존상하고 태묘에 부향(祔享)하였다. 이에 경사스러운 전장(典章)으로 인하여 특별히 계심랑(啓心郞) 액색흑(額色黑)과 학사(學士) 뇌공(賚功) 등을 파견하여 조서를 싸서 보내고 아울러 망단(蟒段)·직금(織金)·폐백(幣帛)을 하사하니 공경히 받들도록 하라."
하였고, 조서에는,
"아름다운 말씀과 단아한 모습은 당년에 내치(內治)를 신칙한 것이요, 황후의 법도와 남기신 아름다움은 만사(萬祀)에 큰 이름을 합할 만하도다. 전장(典章)이 갖추어져 있으니, 효성스런 제향을 드러내야 마땅하리라. 삼가 생각건대, 황조비 황후께서는 태조(太祖)를 빛나게 도우시어 개벽의 풍성한 공을 이루시었고, 선황(先皇)을 묵묵히 보살피시어 찬성(纘成)의 대업을 넓히셨도다. 독실히 황부(皇父) 섭정왕(攝政王)110) 을 낳으시니, 타고난 성철(聖哲)이시었고 어린 이 몸을 붙들어 도왔도다. 만방에 임어하실 때에는 중위(重闈)의 후덕(厚德)을 거슬러 올라가 따르셨고, 억조의 백성들을 어루만져 편안히 하실 때에는 왕실의 남긴 지모(智謀)를 따르셨다. 경사스러운 은택을 후손들에게 널리 입히셨으니, 예제(禮制)는 반드시 묘사(廟祀)에 높이 모셔야 하리라. 위로는 선왕(先王)의 뜻을 이루고 아래로는 여론에 순응하여 순치(順治) 7년 7월 26일 공경히 천지와 종묘의 신에게 고하고 여러 왕들과 패륵(貝勒)111) 과 문무의 뭇신하들을 거느리고서 공경히 책보(冊寶)를 받들어 효열공민 헌철인화 찬천려성 무황후(孝烈恭敏獻哲仁和贊天儷聖武皇后)라고 존호를 올리고 태묘에 부향(祔享)한다. 전례(典禮)를 지극히 융성하게 하였으니, 은혜를 베풂도 넓어야 하리라. 특별히 천하에 사면을 내려 큰 자애를 넓힌다. 응당 행해야 할 마땅한 일은 조목조목 뒤에 나열한다. 아, 향기롭게 제사를 올려 영원토록 인자함에 보답하고, 아름다운 명예를 펴 밝혀 영원토록 성스럽고 훌륭함을 드러내노라. 예전의 교훈과 행적을 법식으로 이 아름다움을 드러내어 천하에 선포해 모두 알게 하노라."
하였다.
10월 5일 을유
사면을 내렸다.
10월 6일 병술
부제학 민응형(閔應亨)이 면대를 청하니, 상이 그를 불러 보았다. 응형이 아뢰기를,
"신이 안변(安邊)에서 부름을 받고 나올 적에 길가는 사람들의 말을 들으니, 모두들 삼대(三代)의 정치를 오늘날 다시 볼 수 있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조정에 들어와 여러 번 가까이에서 모시고 나니 그때 들은 바와 크게 달랐습니다. 신의 어리석은 소견으로는, 전하께서는 겨우 사직을 보전할 정도인데, 뜻을 세우심이 견고하지 못하고 우유부단하시니 위태롭고 어지러운 상황에 이르면 구제하지 못하실까 염려스럽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의 잘못과 중외의 폐단을 숨김없이 모두 진달하라."
하였다. 응형이 아뢰기를,
"즉위한 초기에 일을 할 적에는 마땅히 점진적으로 해야 하는데, 산인(山人)들은 뜻은 크지만 재주가 소략하고 일에 앞서 격양하여 도리어 조정의 의논을 흩어지게 하였습니다. 또 두 현신(賢臣)을 종사(從祀)하자는 계청으로 유림들이 서로 다투어 기상이 아름답지 못했는데도, 상께서 잘 진정시키지 못하시어 점점 틈이 벌어져 끝내는 권당(捲堂)을 하기에까지 이른 것입니다. 그리고 시녀를 뽑는 일이 안으로는 서울로부터 밖으로는 팔방에까지 이르러 딸을 둔 집에서는 마치 병화(兵火)를 피하듯이 달아나 숨고, 심지어는 머리를 자르고 스스로 목매어 죽는 자까지 있어 원망과 탄식이 길에 가득합니다. 한편 공부(貢賦)가 고르지 못한 데다 기근과 흉년까지 겹쳐 백성들이 편안히 살지 못하므로 근심스런 탄식이 극도에 이르렀습니다. 삼남(三南) 가운데 호서(湖西)가 더욱 심하니, 균역법(均役法)을 행해야 합니다. 여러 궁궐의 어염(漁塩)의 폐단도 다스려 바로잡으소서."
하니, 상이 가납하였다.
10월 7일 정해
상이 남별궁(南別宮)에 거둥하여 청나라 사신을 접견하였다.
강원도 영월(寧越) 등 8읍에 기근이 들었다.
10월 8일 무자
제주에 큰 바람이 불어 나무를 부러뜨리고 지붕을 날렸다. 소와 말이 많이 죽었다.
상이 덕원 부사(德源府使) 이중신(李重信)을 불러 보고, 표리 한 벌을 내려주었다. 중신이 공무로 서울에 왔는데, 돌아갈 적에 불러 보니, 주대(奏對)하는 것이 자못 민첩했기 때문에 이런 하사가 있었다.
10월 10일 경인
헌부가 아뢰기를,
"근년 이래로 교화가 밝지 못하고 인륜이 무너져 윤리의 변고가 달마다 생겨나니, 어찌 크게 한심해 할 만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요즈음 듣건대, 안성(安城)에 사는 진사 유격(兪格)이라는 자는 대대로 높은 벼슬을 하던 집안의 사람으로 성품과 행실이 어그러지고 불량하여 짐승과 같은데, 자기의 서얼 누이동생을 간음하고는 탄로나자 집을 버리고 달아났습니다. 원근에 있는 사람들이 전해 듣고 놀라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곳의 수령이 된 자는 마땅히 감사에게 즉시 보고하여 계속 조정에까지 아뢰게 했어야 마땅한데, 태연히 덮어둠으로써 극악한 대죄를 지은 사람으로 하여금 편안히 방자한 행동을 하게 하였으니, 나라의 법을 두려워하지 않은 정상을 징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안성 군수 서택리(徐擇履)는 먼저 파직한 뒤에 추고하고, 경기 감사로 하여금 엄밀하게 추적해 체포하여 죄인을 반드시 잡아서 떳떳한 형벌을 바르게 시행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상이 야대에 나아갔다. 옥당의 강관이 《심경(心經)》을 강하였다. 강을 마친 뒤에 시독관 조복양(趙復陽)이 아뢰기를,
"요즈음 보건대, 성상의 거조에 자못 아첨을 좋아하고 곧은 말을 싫어하는 병이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하였는데, 복양이 아뢰기를,
"유계(兪棨)를 귀양보낸 것은 곧은 말을 싫어하는 데 가깝고, 박서(朴遾)를 발탁한 것은 아첨을 좋아하는 데 가깝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유계는 선왕을 비방하고 헐뜯었으니 곧다고 할 수 없다. 박서가 아첨했다는 것은 무슨 일인가?"
하였다. 복양이 아뢰기를,
"박서가 헌부의 장관으로 있을 적에 갑자기 합계(合啓)를 정지해 상의 뜻에 맞추었기 때문에 자못 외부의 의논이 있었습니다."
하니, 상이 웃으면서 이르기를,
"내가 어찌 김자점을 구제하는 의논 듣기를 좋아하겠는가."
하였다.
공조 판서 박서가 소를 올려 면직을 청하자, 답하기를,
"이는 소인의 마음으로 미루어 헤아린 것에 불과하다. 유계의 일을 탐지하고자 하여 이런 말을 꺼낸 것이니, 경에게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굳이 사양하여 조정의 체통을 손상시키지 말고, 더욱 충정(忠貞)을 힘써 정성을 다하도록 하라."
하였다. 조복양도 소를 올려 파직을 청하였는데, 답하기를,
"스스로 해명하는 말은 그래도 괜찮지만 성내는 말은 매우 옳지 못하다."
하였다. 얼마 뒤에 특명으로 복양을 파직시켰다.
10월 12일 임진
청나라 사신이 돌아갔다. 상이 서쪽 교외에 거둥하여 전송하였다.
헌부가 아뢰기를,
"산림과 천택(川澤)에 금법(禁法)을 쓰지 않는 것은 바로 옛날 성왕들이 어진 정치를 하는 한 가지 방법이었습니다. 우리 나라의 입안(立案)하는 법은 본래 백성들을 병들게 하는 잘못된 것이었는데, 그 폐단이 근래 더욱 심하여 일반 백성들이 원망하고 괴로워하며 식자들이 개탄한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성상께서 즉위하신 초기에, 간관들이 백성을 사랑하시는 성상의 뜻을 우러러 받들어 폐단을 혁파해야 한다는 의논을 제일 먼저 진달했는데, 곧이어 살펴 처리하겠다는 명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중외에 있는 사람들이 매우 기뻐하며 귀기울여 듣고 발돋움하여 바라보며 모두들 이제부터는 다시 성왕의 정치를 볼 수 있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어찌 끝내 빈 문투가 되고 말 줄을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신들이 해조에 계하한 문서를 가져다 살펴보니, 수진궁(壽進宮)·내수사(內需司) 및 여러 궁가에 소속된 염분(塩盆)·어전(漁箭)·시장(柴場) 중에서 줄인 것은 10분의 1도 채 되지 않고 각 아문의 공용으로 쓰이는 것은 혁파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로써 말한다면, 남아 있는 것이 얼마이고 혁파한 것은 얼마입니까? 당초 대간이 논계한 뜻과 성상께서 살펴 처리하겠다고 명하신 그 뜻이 어찌 이와 같은 데서 그치고자 한 것이겠습니까. 조사만 해보고 도로 그만두어 거듭 원근의 여망을 실망시키는 것은 애초 조사하지 않는 것만도 못합니다. 성상께서 매번 궁가를 우대할 생각을 하시니, 이는 참으로 돈독히 하고 화목하게 하는 아름다운 뜻입니다. 그러나 사랑과 의리는 어느 한쪽도 폐지해서는 안 됩니다. 수진궁 이하에 대해서는 단지 성상께서 처치하시기에 달렸는데, 또한 어디에서 견제를 받아 시원하게 시행을 하지 못하십니까. 또한 사대부나 일반인들이 점유하고 있는 것은 모두 혁파해야 할 대상 속에 들어 있는데, 위에 있는 사람이 자신을 바르게 하여 아래를 거느리는 실상이 없으면 인심이 어찌 흔쾌히 복종하려 하겠습니까. 청컨대 해조로 하여금 선조(先朝)에서 내려주신 문서를 가져다 살펴서 그중에서 사사로이 입안한 것은 모두 시행하지 못하게 하시고, 비록 분명히 내려준 곳이라도 만약 지나치게 범람한 것이 있으면 또한 헤아려 줄이거나 혁파하소서. 각 아문에 속한 것도 공용에 관계없는 것은 아울러 혁파하게 하소서. 그리고 각도에 신칙하여 이 이후로 입안하기를 도모하는 자는 계문하여 무겁게 다스려서 쌓인 폐단을 혁파해 뭇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여러 궁가의 어염 등에 관한 일은 합해 계산하면 그 수가 비록 많지만 나누어 살펴보면 지나치게 범람하지는 않다. 이와 같이 번거롭게 논할 필요가 없다."
하였다.
헌부가 아뢰기를,
"산림과 천택(川澤)에 금법(禁法)을 쓰지 않는 것은 바로 옛날 성왕들이 어진 정치를 하는 한 가지 방법이었습니다. 우리 나라의 입안(立案)하는 법은 본래 백성들을 병들게 하는 잘못된 것이었는데, 그 폐단이 근래 더욱 심하여 일반 백성들이 원망하고 괴로워하며 식자들이 개탄한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성상께서 즉위하신 초기에, 간관들이 백성을 사랑하시는 성상의 뜻을 우러러 받들어 폐단을 혁파해야 한다는 의논을 제일 먼저 진달했는데, 곧이어 살펴 처리하겠다는 명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중외에 있는 사람들이 매우 기뻐하며 귀기울여 듣고 발돋움하여 바라보며 모두들 이제부터는 다시 성왕의 정치를 볼 수 있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어찌 끝내 빈 문투가 되고 말 줄을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신들이 해조에 계하한 문서를 가져다 살펴보니, 수진궁(壽進宮)·내수사(內需司) 및 여러 궁가에 소속된 염분(塩盆)·어전(漁箭)·시장(柴場) 중에서 줄인 것은 10분의 1도 채 되지 않고 각 아문의 공용으로 쓰이는 것은 혁파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로써 말한다면, 남아 있는 것이 얼마이고 혁파한 것은 얼마입니까? 당초 대간이 논계한 뜻과 성상께서 살펴 처리하겠다고 명하신 그 뜻이 어찌 이와 같은 데서 그치고자 한 것이겠습니까. 조사만 해보고 도로 그만두어 거듭 원근의 여망을 실망시키는 것은 애초 조사하지 않는 것만도 못합니다. 성상께서 매번 궁가를 우대할 생각을 하시니, 이는 참으로 돈독히 하고 화목하게 하는 아름다운 뜻입니다. 그러나 사랑과 의리는 어느 한쪽도 폐지해서는 안 됩니다. 수진궁 이하에 대해서는 단지 성상께서 처치하시기에 달렸는데, 또한 어디에서 견제를 받아 시원하게 시행을 하지 못하십니까. 또한 사대부나 일반인들이 점유하고 있는 것은 모두 혁파해야 할 대상 속에 들어 있는데, 위에 있는 사람이 자신을 바르게 하여 아래를 거느리는 실상이 없으면 인심이 어찌 흔쾌히 복종하려 하겠습니까. 청컨대 해조로 하여금 선조(先朝)에서 내려주신 문서를 가져다 살펴서 그중에서 사사로이 입안한 것은 모두 시행하지 못하게 하시고, 비록 분명히 내려준 곳이라도 만약 지나치게 범람한 것이 있으면 또한 헤아려 줄이거나 혁파하소서. 각 아문에 속한 것도 공용에 관계없는 것은 아울러 혁파하게 하소서. 그리고 각도에 신칙하여 이 이후로 입안하기를 도모하는 자는 계문하여 무겁게 다스려서 쌓인 폐단을 혁파해 뭇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여러 궁가의 어염 등에 관한 일은 합해 계산하면 그 수가 비록 많지만 나누어 살펴보면 지나치게 범람하지는 않다. 이와 같이 번거롭게 논할 필요가 없다."
하였다.
10월 13일 계사
우박이 내리고 무지개가 나타났다.
상이 대신 및 비국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이경여(李敬輿)가 아뢰기를,
"여러 궁가에 소속된 어염을 비록 모두 혁파하기는 어렵지만, 대신(臺臣)이 아뢴 대로 해조로 하여금 명확히 조사하여 혁파할 만한 것을 혁파한다면 어찌 성덕이 빛나지 않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선왕조 정축년112) 에 이미 재량해 줄였기 때문에 따르지 않은 것이다."
하였다. 호조 판서 원두표(元斗杓)는 백관들의 녹봉을 줄이자고 청하고, 이경여는 경기에서 거두어들이는 쌀을 헤아려 줄이자고 청하니, 상이 모두 따랐다. 부제학 민응형이 박서의 상소에 대한 비답이 온편치 않았다는 뜻을 말하고, 또 유계는 죄가 없다고 말하자, 상이 소리를 높여 이르기를,
"부제학도 이런 말을 하는가? 지금 반드시 유계를 잡아다 다스린 뒤에야 국시가 안정될 수 있을 것이다. 조복양(趙復陽)은 심지어 유계가 예를 아는 사람이라고까지 하였는데, 유계가 아는 것은 무슨 예인가?"
하니, 응형이 아뢰기를,
"당초 유계의 상소는, 단지 시호를 중첩하는 것은 온편치 못하다는 것을 진달한 것뿐이었습니다. 이는 여이징(呂爾徵)·심대부(沈大孚) 같은 무리들도 모두 소를 올려 진달한 것입니다. 성상께서 유독 유계에 대해서만 매번 엄한 전교를 내리시니, 신이 어찌 감히 위로 천위를 두려워하여 평일 품고 있는 생각을 다 아뢰지 않겠습니까. 전하께서 반드시 유계를 죄주려 하신다면 먼저 여이징부터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노하여 승지에게 이르기를,
"유사로 하여금 유계를 잡아오도록 하라."
하였다. 이경여 등이 앞으로 나아가 함께 아뢰며 성명을 거두어 달라고 청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경여가 아뢰기를,
"오늘 입시한 여러 신하들이 어찌 모두 성상을 저버리고 유계를 보호하는 자들이겠습니까. 성상의 포용력 있는 국량으로 이미 전에 용납하시었는데, 지금 유신(儒臣)들이 아뢴 바를 인하여 이런 뜻밖의 명이 있으시니 보고 듣는 사람이 누군들 놀라고 탄식하지 않겠습니까. 신들이 대신의 자리에 있으면서 만약 구원해 바로잡지 못한다면 무슨 얼굴로 다시 백료의 윗자리에 앉아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들은 다시 번거롭게 논하지 말라."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모두 엎드려 일어나지 않으면서 한참 동안 성명을 도로 거두는 전교를 기다렸다. 상이 이르기를,
"대신이 아뢰어 해가 늦도록 서로 버티고 있으니 사체가 온편치 못하다. 유계는 오늘 우선 용서해 준다. 부제학은 평일 우대하는 신하이지만 추고하라."
하였다.
10월 14일 갑오
번개가 쳤다.
10월 15일 을미
상이 영사전(永思殿)에서 망제(望祭)를 지냈다.
우레가 치고 우박이 내렸다. 월식이 있었다.
10월 17일 정유
비변사가 아뢰기를,
"시녀(侍女)를 뽑아 보내는 일은 비록 부득이한 일입니다만, 사대부의 서녀(庶女)로 숫자를 채워 보내기까지 하게 되면, 저들이 우리 나라의 적서(嫡庶)의 구별에 대해서 모를 터이니, 뒷날 끝없는 폐해가 생기게 될 것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중에 한 사람을 가려 첫머리에 아름답게 보일 거리로 삼고 그 나머지는 창기(娼妓)나 천한 여자를 단장해 보내소서."
하니, 상이 하교하기를,
"우리 나라의 죄없는 사람들을 빼앗아 다른 나라로 몰아 보내니, 그 부자나 형제된 사람들의 심정이 어떻겠는가. 생각하면 가슴이 꽉 막히고 말을 하면 목이 메인다. 나랏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내 매우 부끄럽고 두렵기만 하다. 지금은 그 부모의 마음을 기쁘게 하기에 힘써 그들의 영결하는 애통함을 조금이라도 풀어주는 것이 급선무이다. 본사는 나의 이런 뜻을 체념하여 속히 받들어 시행하라."
하였다.
상이 주강에 나아가 《서전》 익직(益稷)을 강하였다. 강을 마친 뒤에 특진관 홍무적(洪茂績)이 아뢰기를,
"지난번 민응형이 입시하였을 적에 갑자기 우레와 같은 위엄을 진동하시어 꺾어버리심이 너무 심했습니다. 무릇 신하의 말을 듣는 도는 쓸 만하면 쓰고 쓸 수 없을 경우에는 버리면 그만입니다. 응형은 머리 허연 늙은 신하로 충심으로 나라를 근심해 말이 시사(時事)에 미치면 눈물을 흘리며 크게 탄식하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이것이 그가 평소 지녀온 태도인데 언사가 졸렬하고 솔직하여 천위를 범한 것입니다. 그가 진달한 바가 비록 혹 미치고 망령된 말이라 하더라도 참으로 너그러이 용납하여 허탄하게 받아들이셔야 마땅하지, 어찌하여 벌을 베푸는 데까지 이르신단 말입니까. 원근에 있는 사람들이 듣고 반드시 ‘우리 임금이 간하는 말을 막는다.’고 할 것입니다. 지금 만약 해와 달이 바뀌는 것처럼 번연히 잘못을 고치신다면 이 어찌 성대하게 덕 있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청컨대 민형응을 추고하라는 명과 조복양을 파직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이 진달한 바가 충심에서 나왔을 뿐이 아니다. 민응형은 전부터 우대하던 사람이다. 추고하지 말라."
하였다. 무적이 일어나 감사하며 아뢰기를,
"복양의 말도 다른 뜻이 있어 한 말이 아니니, 아울러 용서해 주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10월 18일 무술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김광욱(金光煜)을 경기 감사로, 윤이지(尹履之)를 판윤으로, 임담(林墰)을 대사헌으로, 신유(申濡)를 대사간으로, 황감(黃㦿)을 대사성으로, 성이성(成以性)을 부응교로, 김휘(金徽)를 부교리로, 곽성귀(郭聖龜)를 장령으로, 심구(沈玖)를 정언으로 삼았다.
상이 주강에 나아가 《서전》 익직을 강하였다.
상이 하교하기를,
"김여수(金汝水)는 배소로 간 지 겨우 한 달만에 곧바로 석방되었으니, 범장(犯贓)을 다스리는 법률이 엄하지 못하다는 말이 맞다. 대간이 논핵한 바에 따라 도로 배소로 보내도록 하라. 오빈(吳䎙)은 죄상이 이미 드러났는데도 그대로 배소에다 방치해 두고 있으니 일처리가 매우 희미하다. 잡아다가 국문하여 처치하라."
하였다. 이보다 먼저 오빈이 강계(江界)에 부임해 있을 때, 이신우(李信友)란 자가 인평 대군(麟坪大君) 집의 문서를 가지고 가서 본부의 삼화(蔘貨)의 이권을 빼앗으려고 하자, 오빈이 그 문서를 불사르고 곤장을 쳐서 좇아내었다. 신우는 바로 인조 대왕 유모의 아들이다. 그러자 탐욕스럽고 범람한 정상을 가지고 오빈을 무함하여 중외에 유언비어를 퍼뜨렸다. 오빈이 마침 어사의 안핵을 받고 파출되었었는데, 옥에 가두었다가 정배하도록 명하였다. 이때 이르러 대간이 여수의 범장죄를 논핵하자, 상이 대각에서 치우치게 무부(武夫)를 공박한다고 여겨 이렇게 명한 것이다.
헌부가, 조복양을 파직하도록 한 명을 도로 거두어 달라고 청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집의 이석(李晳)이 인피하여 아뢰기를,
"불행히도 근래에는 나라에 어려운 일이 많습니다. 객사(客使)가 옷감을 짜듯이 줄줄이 이어져 백성들의 힘이 다하였고, 여자들을 뽑아내느라 소요를 일으킴이 극에 달했습니다. 기근이 거듭 닥쳐 유리하는 백성들이 길에 가득하고, 부역이 계속 겹쳐 탄식하는 소리가 길에 가득합니다. 우레가 치고 안개가 끼는 일이 달마다 발생하고, 물괴(物怪)와 인요(人妖)가 날마다 나타납니다. 관직의 법이 어지러워 하찮은 자들이 조정에 가득하고, 풍속이 음란하여 근친 상간이 일어났습니다. 근심스럽고 위태로운 단서가 한둘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신이 한마디 말도 아뢰지 못하였습니다.
대신은 나라의 팔다리인데 전하께서 대신들을 대우하는 데 있어서 존경하는 도가 어그러진 점이 있으며, 선비는 나라의 원기인데 전하께서 유생들을 보시는 것이 노예들을 천시하시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궁가에서 어염의 이권을 빼앗는 폐해에 대해 전하께서 못 들으신 것이 아니면서도 치우치게 친애하는 마음이 없지 않으시며, 내수사에 투속하는 폐단에 대해 전하께서 모르시는 것이 아니면서도 치우친 사심이 없지 않으십니다. 옛궁궐을 철거하고 급하지도 않은 사삿집을 경영하시며, 시대의 상황이 어려운 것을 잊으시고 때에 맞지 않는 궁실을 창건하십니다. 성덕의 흠이 또한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런데도 신이 한마디도 바로잡는 말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이목이 총명하지 못하다는 전교는 참으로 그렇습니다. 아, 임금은 비유하자면 머리이고, 신하는 비유하자면 이목인 것입니다. 《서경》에 ‘머리가 명석하면 모든 일이 편안하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신은 이목의 총명은 또한 머리에 관계된다고 생각합니다. 《맹자(孟子)》에 말하기를 ‘진실로 그 기르는 방법을 얻으면 어느 물건인들 자라지 않음이 없고, 진실로 그 기르는 방법을 잃으면 어느 물건인들 소멸되지 않음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신은 전하께서 이목을 기르는 데 반드시 그 도로써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목을 잘 기르지도 못하면서 이목이 총명하기를 바란다면 이는 귀를 막고 들리기를 구하고 눈을 감고 밝아지기를 책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시험삼아 근일의 일을 가지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조복양이 야대에 입시하였을 적에 지척의 앞자리에서 정령하게 개도(開導)하였습니다. 박실하고 우둔한 신하는 꺼릴 줄을 모르고 단지 성명만 믿고서 감히 품은 생각을 진달하였습니다. 이는 임금을 섬기는 데 숨김이 없는 뜻에 불과한데,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되어 성상의 노여움이 크게 격앙되었습니다. 복양이 꾸지람을 당한 것은 애석해 할 만한 것이 못되지만, 성상의 말씀하시는 기세가 지나치게 드러나고 거조가 온당함을 잃어 아랫사람들로 하여금 감히 입을 열지 못하게 하였으므로 신은 지금부터 비록 충성스런 말이나 지극한 의론이 있더라도 다시는 전하 앞에서 아뢰지 못할까 염려스럽습니다. 신은 귀도 먹고 눈도 멀어 이목을 모두 잃었으니, 청컨대 신의 직을 파직하소서."
하니, 상이 하교하기를,
"집의 이석이 나의 과실을 지극하게 말하였다. 내 매우 가상히 여겨 특별히 호피(虎皮)를 하사해 그의 곧음을 드러낸다."
하였다. 이에 앞서 상이 경연에서 말이 간관에게 미치자, 이목이 총명하지 못하다는 전교가 있었다. 그래서 이석 등이 인혐한 것이다.
10월 19일 기해
상이 주강에 나아가 《서전》 익직을 강하였다.
대사헌 조석윤(趙錫胤)이 일찍이 여러 궁가의 염분 등을 혁파하는 일로 논계하였는데, 온편치 않은 비답이 있었다. 그러므로 이 때문에 인피하였는데, 옥당이 처치하여 출사를 청하였다. 석윤이, 경연에서 이목이 총명하지 못하다는 전교가 있었음을 듣고 패소(牌召)에 나아가지 않았다가 연좌되어 파직되었다. 이에 영의정 이경여가 상차하기를,
"석윤이 즉시 패소에 나아가지 않았으니, 근래의 예로 헤아려 보면 참으로 파면시키는 것이 마땅합니다. 다만, 사대부가 나아가고 물러나는 데에는 오직 의(義)가 있는 바를 따를 뿐 단지 명을 받들어 순종하고 추향해 달려나가는 것으로 공손함을 삼지는 않습니다. 성명께서 경연에 임하시어 이목이 총명하지 못하다는 말로 배척하기까지 하셨으니, 이것이 바로 석윤이 감히 전하의 명에 달려나가지 못한 이유입니다. 석윤은 마음가짐이 공평하며 나라를 근심하고 임금을 사랑하는 정성이 보통 사람들보다 빼어나 조정의 신하 가운데 그보다 나은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신이 항상 이점을 가지고 탑전에서 여러 차례 진달하였는데, 단지 들어주지 않으실 뿐만 아니라 그를 대우하는 것이 더욱 야박하시니, 어찌 석윤의 충직성을 좌우의 신하들에게 용납되지 못하게 하는 것일 뿐이겠습니까. 이것은 신의 말을 상을 속이고 저버린 것으로 여기는 것이니, 신 또한 무슨 얼굴로 백료의 윗자리에 감히 있겠습니까.
근래 천재와 시변, 나라의 형세와 백성들의 일에 통곡할 만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런데 삼가 살펴보건대, 성명께서는 한 세상을 가볍게 보시어 선을 좋아하고 간언을 받아들이며 성실한 사람을 추존하고 적임자에게 일을 맡겨 시대의 어려운 상황을 구제하도록 도모할 것은 생각지 않으시고, 귀에 거슬리는 말을 하면 문득 꺾어버리시어 기상이 저상되고 언로가 막히는 상태에 이르게 하셨습니다. 신이 지나치게 명주(明主)를 근심하건대, 단지 통곡할 뿐만이 아닙니다. 만약 지금이라도 태도를 바꾸어 도모해 능히 광명정대한 대체를 회복하여 사사로운 억측, 기필하는 마음, 고집스런 태도, 자기 주장만 내세우는 사적인 생각이 마음속에 용납되지 못하게 하시지 않는다면, 곧고 진실한 선비들은 모두 물러나 숨어버릴 것을 생각하고 아첨하고 굽실거리는 사람들이 날마다 앞에 나올까 염려스럽습니다. 나랏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전하께서 비록 세상을 다스리는 데 혼자 운영하시고자 하더라도 부질없이 성상의 마음만 수고롭힐 뿐 조금도 실득이 없을 것이며, 머리를 돌려보면 아득히 이미 천길 아래로 떨어져 있을 것입니다.
또한 선왕께서 임어하신 30년 가까운 기간의 풍성하고 위대한 공렬, 깊고 두터운 인정(仁政)과 은택이 서책에 분명히 실려 있으니 영원히 만세에 전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책임은 태사(太史)에게 달려 있는 것으로, 사람마다 누구나 대신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한 사람이 파직을 당하자 일이 대부분 낭패가 되고 말았으니, 마땅히 변통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감히 마음속의 생각을 진달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이는 내 뜻이 아니나 사세가 이와 같으니 복직하여 직임을 살피는 것이 좋겠다. 진달한 바의 일이 이와 같이 은근하고 간절하니, 내 비록 영민하지는 못하지만 어찌 유념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당시 석윤이 대제학으로 한창 선조(先朝)의 실록을 수찬하고 있었기 때문에 경여가 총재관(摠裁官)으로서 차자를 올려 진달한 것이 이와 같았다.
부호군 강대수(姜大遂)가 소를 올렸다. 그 대략에,
"요즈음 안으로는 조정으로부터 밖으로는 주현에 이르기까지 흠이나 얽어매고 구습을 그대로 따르며 전고(典故)를 무너뜨리지 않음이 없습니다. 이는 다른 까닭이 아니라, 공정한 마음이 없어지고 사사로운 생각이 멋대로 넘쳐 흘러 달면 삼키고 쓰면 뱉기 때문입니다. 궁궐에 관한 일이면 감히 그 잘못을 바로잡지 못하고, 척리에 관한 일이면 감히 그 잘못을 바로잡지 못하며, 호강한 세도가에 관한 일이면 감히 그 잘못을 바로잡지 못하고, 사당(私黨)에 관한 일이면 감히 그 잘못을 바로잡지 못합니다. 옳고 그름과 좋아하고 미워함도 그러하며, 내치고 올려주는 것과 취하고 버리는 데에도 그러하니, 기강이 어떻게 펴지고 어떻게 다스려지겠습니까."
하고, 이어 인재를 교육하고 민력을 아껴 기르기를 청하였는데, 상이 너그러이 답하였다.
10월 20일 경자
상이 주강에 나아가 《서전》 익직을 강하였다.
10월 21일 신축
우레가 치고 우박이 내렸다.
이후원(李厚源)을 도승지로, 이홍연(李弘淵)을 사간으로, 심광수(沈光洙)를 장령으로, 홍수(洪鐩)를 지평으로 삼았다.
헌부가 【집의 이석(李晳), 지평 이항(李杭).】 아뢰기를,
"양사 장관은 책임이 지극히 무겁습니다. 전부터 이 선발에 신통(新通)할 경우에는 반드시 여러 당상들이 익숙히 강론하여 의견이 일치된 뒤에 비망했던 까닭은 그 선발을 중히 여겼기 때문입니다. 지난번 새로 의망하는 인원이 4명이나 되었는데도 당상 가운데 전혀 참여하지 못한 사람이 있었으니, 이는 전에 없었던 일입니다. 혐의로운 관계를 피하지 아니하고 자기들 멋대로 하려고 한 조짐을 자라게 해서는 안 됩니다. 청컨대 이조 당상을 추고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조어에 드러나게 성내는 기색이 있으니, 내 매우 놀랍기만 하다."
하였다. 그 뒤에 여러 차례 아뢰어서야 따랐다. 당시 이조에서 오준(吳竣)을 대사헌에 의망하고, 신유(申濡)·이행진(李行進)·오정일(吳挺一)을 대사간에 의망했는데, 모두 신통자들이었다. 지평 이항이 인피하여 아뢰기를,
"양사의 장관은 지극히 신중하게 선발해야 합니다. 하루의 정사에 네 사람을 새로 의망했는데, 당상 한 사람은 전혀 참여하지 못했으니, 어찌 이와 같이 급급히 하여 수백 년 동안 전해 내려온 규례를 무너뜨린단 말입니까. 신의 소견으로 보건대, 이것이 자기들 멋대로 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또한 그 의망한 가운데 한집안 사람이 반이나 되니, 비록 혐의로운 관계라고 하더라도 참으로 지나치지 않습니다."
하고, 집의 이석도 이 일로써 인피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이항 등이 모두 물러나 물론을 기다렸다. 간원이 처치하여 출사하게 할 것을 청하였다. 이항은 패소(牌召)에 나아가지 않았기 때문에 파직되었다.
헌부가 【집의 이석(李晳), 지평 이항(李杭).】 아뢰기를,
"양사 장관은 책임이 지극히 무겁습니다. 전부터 이 선발에 신통(新通)할 경우에는 반드시 여러 당상들이 익숙히 강론하여 의견이 일치된 뒤에 비망했던 까닭은 그 선발을 중히 여겼기 때문입니다. 지난번 새로 의망하는 인원이 4명이나 되었는데도 당상 가운데 전혀 참여하지 못한 사람이 있었으니, 이는 전에 없었던 일입니다. 혐의로운 관계를 피하지 아니하고 자기들 멋대로 하려고 한 조짐을 자라게 해서는 안 됩니다. 청컨대 이조 당상을 추고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조어에 드러나게 성내는 기색이 있으니, 내 매우 놀랍기만 하다."
하였다. 그 뒤에 여러 차례 아뢰어서야 따랐다. 당시 이조에서 오준(吳竣)을 대사헌에 의망하고, 신유(申濡)·이행진(李行進)·오정일(吳挺一)을 대사간에 의망했는데, 모두 신통자들이었다. 지평 이항이 인피하여 아뢰기를,
"양사의 장관은 지극히 신중하게 선발해야 합니다. 하루의 정사에 네 사람을 새로 의망했는데, 당상 한 사람은 전혀 참여하지 못했으니, 어찌 이와 같이 급급히 하여 수백 년 동안 전해 내려온 규례를 무너뜨린단 말입니까. 신의 소견으로 보건대, 이것이 자기들 멋대로 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또한 그 의망한 가운데 한집안 사람이 반이나 되니, 비록 혐의로운 관계라고 하더라도 참으로 지나치지 않습니다."
하고, 집의 이석도 이 일로써 인피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이항 등이 모두 물러나 물론을 기다렸다. 간원이 처치하여 출사하게 할 것을 청하였다. 이항은 패소(牌召)에 나아가지 않았기 때문에 파직되었다.
이조 판서 한흥일(韓興一)이 상소하기를,
"오준은 이미 경연과 제학의 직임을 띠고 있고, 이행진은 물의가 이미 허락했으며, 신유와 오정일도 당하의 청선(淸選)을 모두 두루 거쳤습니다. 그래서 신이 양사 장관의 비망에 의망하려고 하여, 지난번 정청을 열었을 때에 참판 윤순지(尹順之)로 하여금 참의 윤강(尹絳)에게 간통(簡通)하게 했는데, 그 간찰이 전해졌는지 전해지지 않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대각의 의논 중에 심지어 한집안 사람이 반이나 된다고까지 하였습니다. 당상은 상피하지 않는 것이 이미 법전에 실려 있으니, 오준이 비록 신의 처사촌이라도 상피하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물며 오촌 친척인 오정일에 대해서이겠습니까. 신을 체직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내가 마땅히 잘 살펴 처리할 것이니, 경은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조정이 화합하지 못하는 것이 날이 가면 갈수록 더욱 심하여 일이 대부분 잘못되어 가고 있으니, 내 일찍이 개탄하던 바이다. 지금 이 상소를 보건대, 나도 모르게 한심하기만 하다. 일에 따라 자세히 살펴 처리해서 이런 폐단을 막지 않을 수 없다. 이조 참판 윤순지와 참의 윤강을 모두 추고하라."
하고, 헌부로 하여금 그날 개좌하여 함문하게 하였는데, 당시 헌부에는 단지 논계하는 관원만 있었기 때문에 명하여 형조로 옮겨 추고하게 하였다. 이조 참판 윤순지의 함사(緘辭)에,
"지난날 대사간을 의망할 때에 판서 한흥일이 말하기를 ‘마땅히 신유·이행진·오정일로 비의해야 하겠다.’ 하기에, 신이 말하기를 ‘참의가 오지 않았는데 신통 세 사람을 의망하는 것이 어떨지 모르겠다.’ 하니, 흥일이 신으로 하여금 윤강에게 간통을 하게 하였습니다. 신이 과연 이런 뜻으로 윤강에게 편지를 썼는데, 편지 끝에다 성명을 쓰지 않았습니다. 신이 지금 와서 생각하니, 또한 미심쩍은 일이었다고 생각됩니다."
하고, 참의 윤강의 함사에,
"지난날 신이 복제(服制)로 상가(喪家)에 있을 때, 하리가 와서 참판의 편지를 전달했는데, 끝에 이름이 아닌 두 글자만 쓰여 있었습니다. 이는 사사로운 서찰이지 간통이 아닙니다. 또 헌장(憲長)의 의망은 사사로운 서찰 중에서도 거론하지 않았습니다. 특별히 가부를 상의하는 일도 없었기 때문에 단지 편지를 보았다는 뜻으로 답을 써서 보냈습니다. 판서의 상소는 필시 곡절이 이러한 줄을 잘 몰랐던 듯합니다."
하였는데, 형조가 모두 조율하여 아뢰자, 상이 하교하기를,
"윤순지는 간통을 보내라고 하는 장관의 말을 듣고서도 서식에 맞추어 쓰지 않음으로써 도리어 꼬투리를 잡힐 단서를 있게 하였고, 윤강은 그 편지를 보고서도 서식에 맞지 않았다고 칭탁해 모르는 일이라고 돌려 버렸다. 근후한 사람도 이와 같이 한단 말인가. 화합하지 못한 책임을 면하기 어렵다. 그러나 적용한 법조문이 너무 지나치니, 윤순지는 체차하고 윤강은 파직하라."
하였다.
10월 23일 계묘
상이 대신 및 비국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이경여가, 천재가 너무 참혹하고 시정(時政)에 잘못이 많다는 점을 극진히 진달하고, 자신의 잘못이라고 하면서 면직을 구하였는데, 상이 너그러이 답하고 허락치 않았다. 상이 여러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태묘가 어떠한 곳인데 제사에 차임된 관원으로 심지어 술에 취해 일을 살피지 않는 자까지 있단 말인가. 이와 같은 무리들은 반드시 무거운 법으로 처치한 뒤에야 백관을 책려할 수 있을 것이다. 내 일찍이 심양(瀋陽)에 있을 때에 술을 가까이 한 적이 많았던 것은 여러 경들이 다 아는 바이다. 그러나 저위(儲位)에 오른 뒤로는 일체 술을 끊었다. 저들이 만약 정숙하고 공경히 일을 받들겠다고 마음먹었다면 잠시 동안 술을 마시지 않는 것이 무엇이 어렵겠는가."
하니, 호조 판서 원두표(元斗杓)가 아뢰기를,
"여러 신하들이 오늘 친히 하교를 받들었으니, 앞으로 성상께서 만약 다시 술을 드시게 되면 신들은 마땅히 술잔을 깨뜨리고 간쟁할 것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좋다. 내가 마시지 않을 것을 이 집을 두고 맹세한다."
하였다.
10월 26일 병오
공조 좌랑 이회보(李回寶)가 수만 자나 되는 상소문을 올려 김자점(金自點)의 임금을 무시하는 부도(不道)한 죄를 극진히 진달하고, 또 대각에서 역적을 토벌하는 것이 엄하지 못함을 말하고, 이어 오랑캐와 내통한 역관을 엄하게 국문하여 기필코 죄인을 잡아서 신과 사람들의 울분을 통쾌하게 풀어달라고 청하였는데, 답하지 않았다. 【자점이 선조(先朝)에 조숙원(趙淑媛)과 인척 관계를 맺었는데 심지어 저궁을 위태롭게 하길 모의한다는 설이 여항에 전파되기까지 하였다. 상이 즉위한 초기에 대각의 의논이 거듭 일어나자, 자점이 또 몰래 북인(北人)들과 내통하여 산인(山人)을 무함하는 형적이 있었는데, 일이 아직 드러나질 않았다. 그러므로 대간이 단지 안치시킬 것만 청하였다. 이때 이르러 회보가 대역으로 논단하여 소를 진달해 극진히 말하였다. 소가 들어가자 상이 불태워 버렸다고 한다.】
【태백산사고본】 5책 5권 15장 B면【국편영인본】 35책 455면
【분류】정론-정론(政論) / 사법-행형(行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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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7일 정미
우의정 이시백(李時白)이 여러 차례 소를 올려 면직을 구하니, 답하였다.
"하늘이 노하고 백성이 원망하는 것이 날마다 더욱 심해져서 국세의 위태로움이 열 개의 계란을 포개놓은 것이나 아홉 개의 바둑알을 올려놓은 것으로도 그 위태로움을 비유하기에 부족하다. 이러한 때를 당하여 경은 팔다리와 같은 훈구의 신하로 내가 태산처럼 의지하는 바인데, 인피하여 들어앉은 지 한 달이 지나 정승의 자리가 오래 비어 있다. 어찌 이다지도 나를 곤궁하게 한단 말인가. 비록 질병이 있더라도 귀신이 부지해 도와 반드시 약을 쓰지 않아도 나을 경사가 있을 것이다. 사양만 하지 말고 속히 출사하여 도를 논해서 지극한 바람에 부응토록 하라."
상이 대신 및 비국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상이 호조 판서 원두표에게 이르기를,
"경이 북경(北京)에 갔을 때, 과연 신독재(愼獨齋)에 관한 말이 있었는가? 【당시 청나라 사람들의 말에 청음(淸陰)과 신독재가 나랏일을 담당하여 화친을 배척한다는 말이 있었다. 이회보의 상소 가운데, 이는 반드시 김자점이 통지했을 것이라는 말이 있었으므로, 상이 이런 질문을 한 것이다.】 이른바 신독재란 누구를 가리켜 말한 것인지 모르겠다."
하니, 두표가 아뢰기를,
"신독재는 바로 김집(金集)의 재실 이름입니다. 신이 북경에 있을 적에 단지 그의 이름을 잘못 일컫는 것만 들었지, 신독재라고 하는 말은 듣질 못했습니다. 지난해 청나라 사신이 왔을 때, 유언 비어가 떠돌아 심지어 김상헌과 김집 등이 화친을 배척한다는 말이 있기까지 하였는데, 누가 만들어 낸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회보가 자점이 했을 것이라고 지적하였으니, 반드시 들은 곳이 있을 것입니다. 또한 전하께서 산인에 대해 애초 예로써 그들을 초빙하셨는데, 지금은 처음처럼 하지 않으신다는 탄식이 있습니다. 영부사 김상헌은 나라의 원로인데, 한번 서울을 떠나자 또한 서로 까마득히 잊어버리는 지경에 놔두고 있으니, 신은 어진이를 대우하는 도리가 마땅히 이와 같이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이 어찌 나의 본심이겠는가. 참으로 부득이한 형세 때문이다."
하였다. 영의정 이경여가 아뢰기를,
"회보의 상소에 대한 비답을 속히 내려서 중외의 의혹을 풀어주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회보는 마땅히 견책과 벌을 받아야 한다."
하자, 경여가 아뢰기를,
"말이 비록 미치고 망령되나 간언한 사람에게 어찌 죄를 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10월 28일 무신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상이 하교하기를,
"임금과 신하의 대의(大義)는 해와 별처럼 밝아 신하가 임금을 폄하해서도 안 되고 자식이 아비를 폄하해서도 안 되는 것이니, 이는 만세토록 바꿀 수 없는 도리이다. 지금 유계(兪棨)라는 자는 선왕의 휘호(徽號)에 대해 조정의 의논이 이미 정해진 뒤인데, 몸을 바쳐 일에 복무할 의리는 생각지 않고 바로 폄하하고 얕보는 마음을 내어 감히 문장에 드러내어 논하였으니, 참으로 놀랍고 해괴함을 금치 못하겠다. 대관에 제수되어서도 반드시 논하여 고쳐 자기 마음을 유쾌하게 하려고 하였으니, 고금에 어찌 이러한 신하가 있었던가. 그를 신원해 구원하려고 하는 자들은 단지 시호를 중첩하는 것이 불가한 점을 말한 것이지 다른 속셈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말을 한다. 그렇다면 문왕(文王)과 주공(周公)의 시호는 무엇 때문에 문자를 중첩해 썼단 말인가.
오늘날 논의가 잘못되어 도리어 유계를 옳다고 하니, 아, 30년 군신간의 의리가 땅을 쓴 듯이 없어지고 말았다. 만약 그를 죄주지 않는다면 삼강오상이 보존되는 것이 거의 없을 것이다. 나는 이 점을 두려워하니 그렇게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우선 말감하는 조문에 따라 해부로 하여금 먼 지방으로 유계를 유배하여 임금과 신하간의 의리가 엄절함을 밝힌다."
하였다. 정원이 유계를 유배하라는 명을 그치기를 청하였으나, 상이 듣지 않았다.
상이 하교하였다.
"내가 공조 좌랑 이회보의 상소를 보니, 마음이 매우 애통하고 놀랍기만 하다. 선조(先朝)의 대신이 비록 한때 견책과 벌을 받았기로서니, 어찌 도적이라고 지적해 현란한 말을 마구 펼치며 위태로운 말을 드러내 우리 조정을 어지럽히고자 할 수 있단 말인가. 더구나 궁중의 일을 어떻게 알고서 이와 같이 말한단 말인가. 이 사람이 어지럽게 말한 죄는 참으로 잡아다 국문하는 것이 마땅하지만, 언로를 방해할까 염려스러우니 지금은 우선 그냥 둔다. 정원은 알라."
상이 하교하였다.
"유계를 먼 지방으로 유배하라는 전지를 계하한 뒤에 밤이 이미 깊었는데, 해부는 아직도 거행하지 않고 있으니, 어찌 그리도 임금의 명을 경시하여 고의로 이처럼 지연시키는가. 판의금과 당해 도사를 잡아다 추고하라."
판의금 원두표와 도사 이용(李涌)을 금부에 하옥하였다.
금부가 유계를 해남현(海南縣)에다 정배하자, 상이 하교하기를,
"어찌하여 남쪽 지방에다 정배하는가."
하였다. 금부가 온성부(穩城府)에다 옮겨 정배하자, 또 하교하기를,
"기한을 정해 유배지로 압송하고, 조금도 지체하지 말라."
하였다.
상이 하교하기를,
"중신을 대우하는 도리상 특이한 은전을 베풀지 않을 수 없다. 원두표는 특령으로 방송하고, 도사 이용은 형신하라."
하였다. 동지의금 홍무적(洪茂績)이 상소하여, 그에게 죄가 없음을 말하자, 파직만을 명하였다.
10월 29일 기유
간원이, 【사간 이홍연(李弘淵), 정언 홍수(洪鐩)·심구(沈玖).】 유계를 유배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어 달라고 여러 번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청나라 사신 한 사람이 돌아가다 황주(黃州)에 이르러 천연두로 죽었다. 비국이, 중신을 파견해 정사(正使)를 위로하고 이어 조제(吊祭)를 지내자고 청하니, 따랐다.
영의정 이경여가 상차하기를,
"유계 한 사람이 조정의 화의 발단을 만들어 조정의 신하들에게까지 화가 미치게 하고 성덕에 누를 끼치게 한 것이 한둘이 아니었는데, 끝내는 이 지경에까지 이르고 말았습니다. 성인의 천지와 같은 도량으로 능히 한 미미한 신하를 용납하지 못하고 노여움을 품고 풀지 못함으로써 어떤 계기가 있을 때마다 문득 촉발되며, 아울러 임금을 사랑하고 임금의 잘못을 바로잡는 신하에 【조석윤을 가리킨다.】 대해서 도리어 당을 비호하여 당파를 구원하려 하는 말이라고 의심하시니, 임금의 사심없이 텅 빈 마음으로 비추고 공평하게 저울질하는 경지에 혹 미세한 티끌이 가리고 약간의 오차가 있는 것이 아닙니까.
신이 또한 망령된 소견으로 헤아려 보건대, 선조(先朝)에게 인(仁)으로 시호를 올린 것에 대해 어찌 단지 대신·관각·재상·근신들만이 모두 합당하다고 생각했을 뿐이겠습니까. 뭇 신료들과 일반인들에 이르기까지 이의가 없었습니다. 휘호를 받들어 올리자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기뻐하였으니, 이는 실로 한 시대 공공의 의론으로서 영원토록 천하 만세에 전해지는 것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한 미미한 신하의 착오로 인하여 왕언을 여러 차례 내리시고 큰벌이 그때마다 더해져, 아무 실정없이 망령되게 한 일을 의도적으로 폄하하고 손상시키려 했다는 쪽으로 억지로 귀결시키려 하시니, 사책(史冊)에 기록되어 백세 뒤에 전해졌을 적에 혹 당시에 참으로 이론을 제기하는 자가 있었을 것이라고 의심을 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도리어 전 시대의 공렬을 빛나게 하여 뒷시대에 전해주는 도리에 손상됨이 있을까 염려스럽습니다.
또한 금오(金吾)의 장관을 한밤중에 옥에 가두고, 특명으로 전관(銓官)을 추고하여 함사(緘辭)를 받도록 재촉하시니, 거조가 평상시와 달라 보고 듣는 이들이 모두 놀라워 합니다. 임금이 신하를 대우하는 데에도 반드시 예의가 있어야 합니다. 옛날 일에서 찾아보건대 이것이 과연 치세(治世)의 일입니까.
삼가 살펴보건대, 성상은 자질이 청명하시어 늘 하늘의 법칙을 따르시지만, 유독 노여움을 다스리는 문제에 있어서는 착실하게 깊이 공부를 하려 하지 않으셔서, 말씀하시는 기색과 행동하시는 즈음에 좋아하고 싫어하는 사사로운 마음으로 치우침을 면치 못하시고 단지 당파를 비호하지나 않나 의심한 것입니다. 이 때문에 기강을 떨쳐 정숙하게 하고자 하시지만 문란함이 더욱더 심해지고, 피차를 공평하게 하고자 하시지만 사사로운 뜻이 먼저 드러나는 것입니다. 변통이 없는 꽉 막힌 고집스런 생각으로 의심과 믿음이 서로 교차되어 마치 물이 흘러갈수록 더욱 격렬해지고 불이 더욱 치성해지는 것과 같습니다. 어찌하여 기쁨과 노여움을 이치대로 따라 사람들이 저절로 돌아와 복종하며, 마음을 무심한 경지에 두고 사물이 오면 순순히 그에 응해, 형벌과 상의 쓰임을 각각 마땅하게 하고 옳고 그름의 귀결이 각기 바름을 얻도록 하지 않으십니까. 위엄과 형벌로써 한 세상을 억제하고자 도모하신다면 그 해로움이 어진이와 사악한 이가 섞여 조정에 나아가 손과 발을 둘 바가 없을 정도에 그칠 뿐이 아닐 것이니, 처음에 인심을 수습하여 왕업을 잘 이어나가는 도리가 아닐 듯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내가 매우 무식하여 가르침이 여기까지 이르렀으니, 어찌 유념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10월 30일 경술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영의정 이경여가, 비답한 말 가운데 무식(無識)이란 두 글자가 있는 것으로써 차자를 올려 대죄하니, 답하였다.
"경의 차자를 보건대, 내가 경에게 믿음을 받지 못한 것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참으로 부끄럽고 한탄스럽다. 경의 약석(藥石) 같은 말이 있지 않았던들 나라를 장차 어찌하며, 나는 장차 무엇을 믿겠는가. 이른바 두 글자는 내 스스로 겸손해 한 말에 불과하니, 어찌 깊은 뜻이 있겠는가. 경은 지나치게 생각하지 말고, 안심하고 대죄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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