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일 신해
상이 영사전(永思殿)에 거둥하여 초하루 제사를 지냈다.
신유(申濡)를 도승지로, 임담(林墰)을 예조 판서로, 이후원(李厚源)을 이조 참판으로, 조수익(趙壽益)을 이조 참의로, 이행우(李行遇)를 부제학으로, 김집(金集)을 대사헌으로, 남노성(南老星)을 대사간으로, 정기풍(鄭基豐)을 지평으로, 하진(河溍)을 헌납으로, 조형(趙珩)을 집의로, 송국택(宋國澤)을 승지로 삼았다.
11월 2일 임자
좌의정 조익(趙翼)이 여러 차례 사직하기를 그만두지 않자, 상이 허락하였다.
진주사(陳奏使) 인평 대군(麟坪大君) 이요(李㴭) 등이 청나라에 가 주문(奏文)을 올렸다. 주문은 대략 다음과 같다.
"삼가 살펴보건대, 왜국과 우리 나라는 통신(通信)을 한 지가 비록 오래되었으나 교활한 왜인들의 정상은 본래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지난해 이래로 우리에게 요구하고 공갈하는 일이 없는 해가 없으니 정형(情形)이 평상시와 다르고 모든 것이 의심스럽습니다. 우리 나라가 일찍이 임진년에 잔혹하게 저들의 유린을 당하였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인심이 놀라고 두려워합니다. 비록 헛소문을 듣더라도 문득 의심하고 두려워하는데, 방비가 전혀 갖추어지지 않아 도무지 믿을 것이라곤 없습니다. 반드시 먼저 보전하고 지키는 계책이 있어야 대국의 구제해 주는 응원을 기다릴 수 있을 것인데, 이는 선왕조의 신하들이 항상 간절히 근심하고 걱정한 것으로 대국의 조정에 아뢴 바입니다.
순치(順治) 2년113) 해부의 회자(回咨)에 ‘일본과 조선은 비록 큰 바다를 사이에 두고 있지만 실제로는 국토가 서로 접해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변고를 헤아릴 수가 없고 또 미리 예측하기도 어려우니, 조선왕은 마땅히 변방의 방어를 엄하게 신칙하여야 할 것이고, 만약 긴급한 적정이 있으면 사람을 보내 보고하라.’ 하였고, 또 지난해 사은 배신 정태화(鄭太和) 등이 경사로부터 돌아와 아뢰기를 ‘성지(城池)를 수선하는 일을 대국의 조정에 진달하니, 아문에서 말을 전하기를 「이는 선황제께서 금지하신 일이니, 단지 사신이 입으로 전하는 말만으로 가벼이 허락할 수 없다. 주문이 오기를 기다려 의당 처치할 것이다.」라고 했다.’ 하였습니다. 신의 망령된 소견으로는, 왜국의 정상을 전하여 보고하라는 성지가 이미 있었고, 성을 수축하는 일에 대한 계청에 대해서도 와서 주문을 하게 하였으니, 대국의 조정에서 속국에 대해 진념하시는 뜻이 이에 지극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이에 감히 사실에 근거해 아뢴 것입니다. 참으로 참람하고 외람된 죄는 있습니다만, 만약 이 사이에 털끝만큼이라도 다른 뜻이 있다고 하신다면 이 어찌 신하로서 차마 들을 수 있는 바이겠습니까.
지난날 사문(査問)하실 때에, 변방의 신하가 엄한 위엄 아래서 허둥지둥 어쩔 줄 몰라 사실대로 답변을 하지 못하였고, 당사자도 또한 자신이 수상이므로 감히 변방의 신하에게 미루지 못하여 우리 나라의 사정이 명백하게 진달되지 못하였으니, 신은 애통하고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습니다. 즉시 노협(盧協)은 엄하게 형신을 가하여 멀리 변방으로 유배하였고, 이만(李曼)도 유배하는 법률을 시행하여 그의 죄를 징계하였습니다. 지금 엄한 칙유를 받들건대, 우리 나라의 죄안은 전적으로 이 두 사람이 잘못 대답한 데서 말미암았으니, 어찌 매우 원통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신이 이어 생각건대, 우리 나라의 사대하는 예는 반드시 정성스럽고 공경하여 항상 털끝만큼이라도 미진한 점이 있어 제후로서의 법도에 허물이 있을까 두려워하는데, 하물며 굽어 조제(吊祭)를 하사하신 것이 이 어떤 은전이길래 절목에 삼가기를 생각지 않았겠습니까. 다만, 전에는 책봉과 조제에 각각 두 번의 사행(使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난해는 합하여 한 번의 사행으로 하였기 때문에 의거할 만한 전례가 없었는데, 혹 몇 가지 일에 대해 겸하여 사은한 적이 있었기에, 이에 감히 이 예를 따라 행하였던 것이니, 이는 실로 우리 나라 군신이 애통하여 겨를이 없는 망극한 가운데 제대로 살피지 못해 일어난 일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두 건의 표문(表文)을 지어 올리는 일이 무엇이 어렵다고 감히 법식을 어겨가면서 스스로 큰 허물에 빠지겠습니까."
11월 4일 갑인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경상 감사 남선(南銑)이 하직 인사를 하자, 상이 면대하고 유시하여 보냈다.
경상 감사 남선(南銑)이 하직 인사를 하자, 상이 면대하고 유시하여 보냈다.
영중추부사 김육(金堉)이 양주(楊州)에 있다가 전지에 응답하여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유계가 망령되게 이미 정해진 뒤에 묘호(廟號)를 거론하였으니, 그의 말을 버리고 쓰지 않을 따름입니다. 어찌하여 추급해 그를 죄주고, 연이어 여러 신하들에게 미칠 수 있겠습니까. 한 선제(漢宣帝) 때에 하후승(夏侯勝)이 세종(世宗)의 묘악(廟樂)을 논하면서 조서(詔書)를 그르다고 의논하였는데, 어사가 탄핵하여 아뢴 뒤에야 비로소 옥리(獄吏)에게 내렸고, 뒤에 간의 대부(諫議大夫)를 삼고 말하기를 ‘선생은 바른 말을 하라. 지난번처럼 벌을 받을까 염려하지 말라.’ 하였습니다. 황패(黃霸)는 옥 안에서 《상서(尙書)》를 배우며 하후승을 사사(師事)하였는데, 마침내 정승이 되었습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유계의 일로 다른 사람에게 노여움을 옮겨 은택이 상신(相臣)과 유신(儒臣)에게도 끝내 내리지 않고, 또 중신을 옥에 가두었습니다. 한(漢)나라는 지진이 일어나자 황패와 하후승을 석방하였는데, 지금 천변을 당하여 여러 사람들을 죄주시니, 재앙을 두려워하는 도리에 어긋날까 염려스럽습니다. 또한 선왕조에 해당되는 일은 법을 엄하게 적용하시며 외척에 관계되는 말은 잘 받아들이지 않으십니다. 어염의 이익을 독점하고 산림과 천택의 이로움을 농단하는 것을 만약 모두 금지하신다면 인심이 순응하고 하늘의 뜻을 얻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답하기를,
"경이 물러가 산림에 누워 있으면서도 나라를 근심하고 임금을 사랑하는 마음을 잊지 않고서 특별히 소장을 올려 경계하고 가르쳐 주는 것이 간절하니 참으로 감격스럽고 기쁘다. 어찌 두려운 마음으로 유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11월 5일 을묘
상이 주강에 나아가 《서전》 익직을 강하였다.
헌부가 【집의 조형(趙珩), 장령 심광수(沈光洙).】 아뢰기를,
"삼가 숙안 공주(淑安公主)의 길례를 금년에 행하기로 정했다고 들었습니다. 비록 부득이한 사세에서 나온 것이지만, 예문(禮文)에 ‘당사자와 주혼자(主婚者)가 기년(朞年) 이상의 상이 없어야 혼인을 할 수 있다.’고 하였으니, 이는 만세토록 바꿀 수 없는 예입니다. 위에서부터 이런 예를 무너뜨린다면 장차 무엇을 가지고 아랫사람들의 실례를 책하시겠습니까. 청컨대 내년에 상을 마치기를 기다린 뒤에 다시 좋은 날을 택해 크게 성대한 예를 거행하여 전하의 바른 가법(家法)을 보이소서."
하니, 답하기를,
"너희들이 논한 것은 만세의 떳떳한 예이고, 오늘날 처한 경우는 한때의 권도이다. 상도(常道)와 권도는 어느 한쪽도 폐할 수 없다. 만약 상도만 지키면서 권변을 알지 못하면 혹 후회해도 소용없는 일이 있을까 염려스럽다. 비록 그렇지만 예문을 가지고 하는 말인데 내 어찌 자신만 믿고서 억지로 어기겠는가. 다시 대신에게 의논하라."
하였다. 영의정 이경여가 아뢰기를,
"궁정은 풍화(風化)의 근본이고, 성인은 인륜의 지극한 분입니다. 나라에 교화를 이루고, 사방에 표준을 보이는 것은 예 말고는 의당 보다 큰 일이 없을 것입니다. 전날 여러 신하들의 의논은 권도였고, 지금 대간이 말하는 것은 상도입니다. 상도와 권도를 참작해서 경중을 비교하여 버리고 취하며 절충하는 바가 있는 데 이르러서는 오직 성상께서 재단하시기에 달려 있습니다."
하니, 상이 하교하기를,
"수의한 대신의 말을 보니, 분명히 자기 의견을 밝히는 데 매우 흠이 있다. 어디서 취해 결정을 한단 말인가. 아, 나랏일이 이 지경에 이르러 어쩔 수 없이 이런 거조를 하게 된 것이다. 만약 불행히도 말하기 어려운 일이 있게 되면 조정에 욕을 끼치는 일이 아니겠는가. 이로써 논한다면 나라의 수치가 되는 것이 도리어 한때 권도를 행하는 것보다 심함이 있을 것이다. 경중을 비교해 버리고 취하는 일이 여기서 결판이 났다. 예 또한 정(情)에서 나오니 아마도 여기서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전에 의논했던 대로 시행하라."
하였다. 【당시 청나라에서 우리 나라에 혼인을 요구하는 의논이 있었기 때문이다.】
【태백산사고본】 5책 5권 18장 A면【국편영인본】 35책 457면
【분류】정론-간쟁(諫諍) / 왕실-의식(儀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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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6일 병진
번개가 쳤다.
형혹성이 태미 서원으로 들어갔다.
김상(金尙)을 승지로, 강여재(姜與載)를 보덕으로 삼았다.
대정 현감(大靜縣監) 조정황(趙廷璜)이 하직 인사를 올리자, 상이 면대하고 유시하여 보냈다.
상이 주강에 나아가 《서전》 우공(禹貢)을 강하였다.
11월 8일 무오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11월 9일 기미
상이 주강에 나아가 《서전》 우공을 강하였다.
11월 10일 경신
상이 주강에 나아가 《서전》 우공을 강하였다.
11월 11일 신유
상이 주강에 나아가 《서전》 우공을 강하였다. 충청 병사 이급(李圾)이 하직 인사를 올리자, 상이 면대하고 유시하여 보냈다.
경상도 진사 이상일(李尙逸) 등이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지난날 유직(柳㮨)의 상소는 다른 뜻이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이는 대체로 종사(從祀)하는 중대한 법전은 가벼이 거행해서는 안 되고, 백세의 공의는 끝내 속일 수 없다는 뜻이었습니다. 다만 초야에 묻힌 어리석은 사람이 시의(時宜)를 알지 못하고 한마디 말이 촉휘(觸諱)하였는데, 뭇사람들이 노여움을 일제히 격발하여 심지어 선현을 무함하고 욕되게 하며 군부를 기망한다고까지 하면서 소두(疏頭) 유직에 대해서는 유적(儒籍)에서 삭제하고 또 황첨(黃籤)을 붙였으며 있는 힘을 다해 위협하고 금고시켰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한 도의 많은 선비들로 하여금 감히 과거에 응시하지 못하도록 하였습니다. 만물이 모두 우러르는 날을 당해서도 유독 대동(大同)의 경사에 참여하지 못하였으니, 유직의 상소에 일찍이 무슨 죄가 있길래 성균관 유생들이 벌을 시행함이 한결같이 이런 데 이르렀는지 모르겠습니다. 상소 가운데의 조어에 혹 온당치 않은 말이 있을 경우 그것을 과격하다고 하는 것은 괜찮지만, 선현을 무함한다고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과감히 자기의 소견을 진달하여 구차하게 영합하지 않았을 경우 자기 의견에 부합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옳지만, 군부를 기망한다고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신들이, 그들이 행하는 것을 살펴보고 그들의 심사를 추적해 보건대, 소두를 벌한 것은 한 도를 위협한 것이고, 한 도를 위협한 것은 한 세상을 겸제(箝制)하려는 것입니다. 한 도의 선비들을 위협하고 한 세상 사람들의 입을 겸제하여 자기들이 하는 일에 거슬림이 있을 수 없게 한 뒤에 반드시 자기들의 마음먹은 일을 행하려고 한 것이니, 그들의 계책을 세움이 또한 방자합니다.
재차 과거장을 개설하던 날, 전하께서 예관(禮官)으로 하여금 성균관 유생들에게 효유하여 유직의 벌을 풀어주게 하시었고, 또 본도의 감사에게 명하여 많은 선비들에게 권면하고 효유하여 과거 시험에 나아가게 하였습니다. 신들이 공경히 전지를 받들고 감격하여 눈물을 떨구었는데, 성균관 유생들은 한결같이 명을 어기어 많은 선비들로 하여금 다시 모였다가 다시 흩어지게 하였습니다. 아, 또한 너무 심합니다. 한 도는 금고시킬 수 있다지만 임금의 명을 어찌 거역할 수 있겠습니까. 사사로운 울분은 씻을 수 있다지만, 나라의 시험을 어찌 사사로운 것으로 할 수 있겠습니까. 이른바 조정의 명을 억지로 어기고 성대한 과거를 방해한 자란 과연 누구를 가리켜 말한 것입니까. 지금 말하는 자들이 혹 우도(右道) 사람들은 출방(出榜)했다고 핑계를 하지만, 이는 그렇지 않습니다. 당초 좌도·우도의 선비들이 모두 과거 시험장에 나갔던 것은, 대체로 하교가 이미 내렸으니 유직의 벌을 반드시 풀었을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올라가서 비로소 성균관 유생들이 성상의 명을 끝내 받들지 않았음을 안 뒤에, 좌도 사람들은 감히 과거에 응시하지 않겠다는 뜻을 고시관에게 말하고 물러났고, 우도의 의리를 조금 아는 사람들도 모두 흩어져 돌아왔는데 때를 타고 요행을 바라는 무리들로 구차하게 백 명의 숫자를 채운 것입니다. 국가에서 인재를 선발하는 과거의 뜻이 어찌 이다지도 구차하단 말입니까. 심지어 나라의 시험에 응시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신들을 무함하는 죄안을 삼아, 혹 인륜을 무시하는 해괴한 귀신의 무리로 지적하기도 하고 혹 임금을 위협하고 업신여겼다는 말을 날조하여, 그들의 입에 거론할 뿐만이 아니고, 또한 성총에까지 주달하고 있습니다. 아, 이것이 과연 대신이 임금에게 고하는 말이며, 이것이 과연 사유(師儒)가 선비를 대우하는 도리입니까. 【대신은 조익(趙翼)을 가리킨 것이고, 사유는 조석윤을 가리킨 것이다.】 신들은 이런 제목이 마땅히 어떤 사람들에게 더해져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만약 선왕의 정론을 지켜 함부로 남을 따르는 행동을 하지 않으며, 염치가 있는 곳을 돌아보고서 버리고 취해야 할 의리를 밝히고자 하는 사람을, 그들을 지적하여 인륜을 무시하는 해괴한 귀신이라고 하고 그들을 지적하여 임금에게 요구하고 위를 무시한다고 한다면, 저 선왕의 정론을 어기며 자기들의 사사로운 계책을 이루려 하고, 군부의 성명을 어기며 남을 무함하고자 힘쓰는 자들을 장차 지목하여 어떤 사람이라 하겠습니까.
‘유직의 상소에 참여한 자들이 어찌 모두 옳고 그름을 잘 알겠는가. 한두 사람이 유인하고 위협했는데, 풍성(風聲)과 기습(氣習)이 그렇게 되게 하였다.’고 한 데 대해서는 더욱 의혹과 놀라움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신들이 비록 매우 형편없지만 또한 옳고 그름을 분변할 줄 아는 천성은 있으니, 어찌 남들의 유인과 위협을 받고서 억지로 구차하게 부화뇌동하는 의논을 하겠습니까. 하물며 이른바 남을 달래고 남을 위협하는 짓을 어찌 사람마다 능히 할 수 있겠습니까. 반드시 뜻을 얻어 요직을 차지하고서 한 세상을 움켜쥐고 마음대로 폈다 오므렸다 쥐고 흔들며 오직 자기 뜻대로 하는 자라야 바야흐로 달래고 위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요즈음 영남 사람들은 기상이 꺾이고 풀이 죽어 발을 싸매고 가만히 물러나 있는데, 그 누가 능히 남을 달래고 남을 위협하겠으며 소문과 기습이 어디로부터 나오겠습니까.
가련하다는 말에 대해서 신들은 편안히 받아들이고 변명하지 않겠습니다. 왜냐하면, 요즘 세도를 보건대 복종하고 위배하는 사이에 화와 복이 그 자리에서 이르고 마는데, 신들의 경우는 옳고 그름이 한번 정해지면 다시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 남들의 모욕을 받아도 감히 말 한마디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신들의 정상이 참으로 가련한 것입니다. 그런데 달래고 위협했다고 일컫고 풍습이라고 말하니, 이 어찌 성을 내어 중도를 얻지 못함이 이와 같단 말입니까. 사예(四裔)로 내친다114) 느니, 양관(兩觀)의 죽임115) 이라느니,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고 한 비유116) 라느니, 장돈(章惇)과 채경(蔡京)의 비유117) 라느니 하는 말들이 극도로 낭자하여 말에 도리가 없는 데 대해서는 신들이 하나하나 쟁론하여 성총에 누를 끼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로부터 지금까지 초야의 한미한 선비로서 권간이 하는 짓을 하려 하는 자가 어찌 있었겠으며, 벼슬하지 않은 선비로서 상소를 올렸다가 갑자기 유배되거나 죽임을 당하는 형벌을 받은 자가 어찌 있었겠습니까."
하였는데, 답하기를,
"한 도의 선비들이 모두 유직의 상소에 참여한 것은 매우 구차한 일이며, 나라의 시험에 나아오지 않은 것은 매우 옳지 못한 일이다. 이른바 임금에게 요구하고 위를 무시했다는 등의 말이, 성난 데서 나와 바르지 못하고 한쪽으로 치우친 것은, 내 이미 통촉하고 있다. 너희들이 남과 다투지 않고 물러나 스스로를 닦는다면 비방하는 말이 무엇이 두렵겠는가. 내 많은 말을 하지 않는다. 각자 힘쓰도록 하라."
하였다.
영의정 이경여가, 영남 유생들의 배척을 받았다는 이유로 소를 올려 면직을 구하였다. 그 대략에,
"삼가 영남 유생들의 상소를 보건대, 암암리에 지적하고 드러내 놓고 배척하는 데 남은 힘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두 어진이의 아름다운 덕은 평소 우러러 사모하는 바로, 존숭하고 숭상하는 마음은 실로 밖으로부터 얻어지는 것이 아닌지라, 무함하고 헐뜯는 말에 대해 신도 애통해 하고 미워합니다. 가령 유직 등이 종사의 중대한 법전은 가벼이 거행할 수 없다고 하였다면 사람마다 각각 견해가 다르니 깊이 허물할 것도 못 됩니다. 그러나 감히 어버이를 버리고 임금을 뒤로 했다는 말을 방자하게 마구 덧붙였으니, 성균관 유생들이 벌을 시행한 것은 실로 공공의 의논이었습니다. 다만 황첨을 추가한 것은 아마도 중도에 맞지 않을 듯합니다. 그러므로 신이 전계(前啓)에서 운운한 바가 있습니다. 그간의 말들에 대해서는 성명께서 이미 통촉하고 계실 것입니다. ‘어찌 감히 억지로 조정의 명을 어기고 성대한 과거를 방해할 수 있겠는가.’라고 한 것은,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 한 말로서 바른 길로 방향을 바꾸도록 하고자 한 의도였습니다. 그런데 영남 유생들이 몸소 그렇게 해 놓고 도리어 신의 죄로 삼으니, 그 또한 이상합니다. 영남의 선비들은 무려 수천 명이나 되는데, 어떻게 모든 사람의 의견이 모두 유직의 소견과 같겠습니까. 이는 반드시 그럴 리가 없는데도 반드시 온 도 선비들을 들먹이며 말을 하니, 신이 이른바 달래고 위협했다는 것이 과연 그런 일이 없었겠습니까? 하늘은 속일 수 없으니, 신은 많은 말을 할 필요가 없겠습니다. 저들이 ‘뜻을 얻어 요직을 차지하고서 한 세상을 움켜쥐고 마음대로 폈다 오므렸다 쥐고 흔들며 오직 자기 뜻대로 하는 자라야 바야흐로 달래고 위협할 수 있다.’고 한 말은, 신을 멋대로 정권을 휘두르는 권간으로 여긴 것입니다. 신이 과연 이런 죄가 있다면 유배하거나 죽이는 법전을 명확히 내려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신이 비록 비루하고 졸렬하지만 또한 대신의 지위에 있는데 어찌 감히 이처럼 거리낌없이 모욕할 수 있단 말입니까. 신 자신은 모욕을 당해도 괜찮지만 나라의 체통을 어그러뜨릴 수 있겠습니까. 예로부터 권신이 정권을 쥐고 정사를 어지럽히면 초야에 있는 선비로서 소장을 올려 죄를 청하는 경우는 있었습니다만, 자신의 사사로운 울분으로 인하여 저쪽을 칭탁하며 이쪽을 비유하고 반은 드러내고 반은 숨기면서 대악(大惡)에 대신을 빠뜨리기를 이와 같이 하는 자는 없었습니다. 무릇 민풍과 토속의 아름다움은 전적으로 사람에게 달려 있는 것이니, 단지 지역만 가지고 스스로 잘난 체하는 것이 어찌 마땅하겠습니까. 그 고장에서 선정(先正)들이 배출되자 그 지방을 추로지향(鄒魯之鄕)이라고 호칭하게 되었고, 그분들의 남은 풍화와 공렬을 지금까지 우러러 사모하고 있습니다. 가령 그분들의 남은 향기가 민멸되지 않았다면, 선유를 원수처럼 보기를 한결같이 어찌 그리도 너무 심하게 하여 이런 오늘날의 시끄러운 분쟁을 불러온단 말입니까. 더구나 영남에는 선비들이 거의 1만 명이나 되니, 그 안에 선을 즐기고 의를 좋아하며 단정하게 자신을 지키는 선비가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런데 눈을 부릅뜨고 간담을 펼쳐 선현을 무함하고 선정을 더럽히는 자들이 추로지향이란 옛이름에 빙자하여 ‘온 도의 선비들이 모두 나를 따른다.’고 하니, 어찌 영남의 인사들을 무함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더구나 지금은 언로가 막히고 조정의 의논이 분열되어 곧고 진실한 선비는 물러나길 생각하고, 아첨하고 굽실거리는 것이 풍습을 이루고 있어 하늘의 노여움과 백성들의 곤궁함이 날로 더욱 심해지고 있으니, 신과 같이 아주 형편없는 사람은 마땅히 물러나야 할 뿐입니다."
하였는데, 답하기를,
"아, 심하구나. 내가 밝지 못함이여. 영남 유생들의 상소 가운데 임금에게 요구하고 위를 무시한다는 등의 말에 대해 범범하게 답을 하였는데, 어찌 암암리에 지적하고 드러내 놓고 배척함이 이와 같은 줄을 생각이나 했겠는가. 그점에 대해 매우 부끄럽고 한탄스럽다. 전날 경의 계사는 다른 의도가 있었던 것이 아니고 조정하려고 한 것이었다. 진실로 권유하고 조절하여 크게 화합하는 경지로 함께 돌아가기 위한 것이었으니 어찌 배척할 만한 말이 있겠는가. 저들의 마음씀을 비록 알 수 없지만, 어찌 억지로 끌어들여 자신을 정당화시킬 수 있겠는가. 경의 뜻이 바로 나의 뜻이다. 경이 만약 저들의 공격과 배척을 받아 편안하지 못하다면 내 어찌 유독 편안하겠는가. 경은 과인의 혼매함을 훈계하고 깨우쳐 종사를 보전해야 한다. 어찌 이처럼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물러나기를 구할 수 있겠는가. 이 일로나 저 일로나 경이 자리를 떠날 이유가 없다. 내 비록 더불어 어떤 일을 하기에 부족한 사람이지만, 선왕조의 옛 은혜를 생각해 속히 출사해서 도를 논해 나의 갈망에 부합되게 하라."
하였다.
11월 12일 임술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임담(林墰)을 지경연사로, 이후원(李厚源)을 동지경연사로, 조석윤(趙錫胤)을 예조 참판으로, 강대수(姜大遂)를 승지로 삼았다.
상이 주강에 나아가 《서전》 우공을 강하였다.
11월 13일 계해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상이 대신 및 비국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호조 판서 원두표(元斗杓)가 아뢰기를,
"김상헌(金尙憲)·김육(金堉) 같은 조정의 노성한 신하들이 모두 이미 물러나 돌아갔습니다. 요즈음 듣자 하니, 조익(趙翼)도 장차 성을 떠난다고 합니다. 이런 어렵고 근심스러운 때를 당해서는 더욱 숙덕의 노신을 머물도록 면려하여 일에 따라 자문을 구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맞다. 위로는 천재가 거듭 나타나고 아래로는 인사가 이와 같으니, 그 연유를 궁구해 보면 허물이 실로 나에게 있다. 조정에 있는 대신들이 서로 연이어 돌아가기를 고하니, 누구와 더불어 나라를 함께 하겠는가."
하였다. 이조 판서 한흥일(韓興一)이 아뢰기를,
"김육은 젊었을 적에 매우 가난하여 몸소 농사를 지어 자급을 하다가 반정 후에 비로소 과거에 급제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이 70이 되면 바로 치사(致仕)해야 한다고 항상 말했습니다. 오늘날 그가 떠나간 것이 비록 그의 본의지만 실은 그의 말이 쓰이지 않는 데서 연유한 것입니다."
하니, 【이에 앞서 김육이 대동전폐법(大同錢幣法)을 행하고자 하였는데, 김상헌과 김집(金集)이 제일 먼저 불가하다고 하고, 이경석(李景奭)과 조석윤(趙錫胤)도 실행하기 어렵다고 하였다. 그래서 떠나기를 구한 것이다.】 상이 승지에게 이르기를,
"조 정승과 김 판부사의 처소에 모두 사관을 보내 돌아오라는 뜻으로 효유하라."
하였다. 대체로 조익이 일찍이 차자를 올려 영남 유생들의 잘못을 통렬히 배척하였는데, 이때 이르러 이상일(李尙逸) 등의 상소에 대한 비답에 공평치 못하고 한쪽으로 치우쳤다는 전교가 있었기 때문에 조익이 드디어 떠나간 것이다.
헌부가 상차하여 임금이 학문을 하는 방법에 대해 논하고, 또 좋아하고 미워함을 공정히 하고 언로를 넓히는 도에 대해 진달하였다. 또 아뢰기를,
"삼가 듣건대 근일 경연에서, 유계(兪棨)가 가까운 곳에 와 있으면서 여러 사람들을 지휘하고 있다는 전교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가 떠나고 온 데 대한 허와 실을 논할 것 없이 전하께서 어디서 들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전하의 밝은 성덕으로는 아무리 깊숙해도 밝게 비추지 않음이 없는데 외부의 말이 출처도 없이 들어오니, 신은 전하가 이 말을 들으신 것이 반드시 정로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하여 염려됩니다."
하니, 답하기를,
"충성스럽고 곧고 간절한 말이 실로 나의 마음에 흡족해 매우 가상하고 기쁘게 생각한다. 나를 어떤 일을 하기에 부족한 사람이라고 여기지 말고 더욱 흉금을 터놓고 나를 깨우쳐 그대들의 충성을 다하도록 힘쓰라."
하였다.
11월 15일 을축
상이 영사전에서 망제(望祭)를 행하였다.
11월 16일 병인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예조 참판 조석윤이 상소하기를,
"차라리 명을 어기고 게을리 한 주벌을 받을지언정 끝내 감히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출사할 수 없으며, 또한 거듭 영남 유생들의 비방과 배척을 받았으므로 사유(師儒)의 직에 그대로 있을 수는 없습니다."
하였는데, 답하기를,
"경의 말이 여기까지 이르니 경의 청렴함을 충분히 볼 수 있어 내가 가상하게 생각한다. 영남 유생들의 상소에 비록 운운한 말이 있지만 서로 다툴 것이 없다. 나의 얕은 소견으로는, 반드시 사직해야 할 이유가 없는 것 같다. 더구나 재상은 대체를 유지하는 데 힘을 써야 하는데, 어찌 이처럼 발끈 성을 낼 필요가 있겠는가."
하였다.
상이 또 사관을 보내 조익을 머물도록 면려하니, 조익이 상소하여 다시 물러갈 뜻을 진달하자, 답하였다.
"경의 말이 여기까지 이르니, 내 다시 무슨 유시를 하겠는가. 단지 매우 부끄러울 따름이다. 경은 의당 사직하지 말고, 안심하고 몸을 요양하라."
11월 17일 정묘
번개가 쳤다.
윤순지(尹順之)를 병조 참판으로, 채유후(蔡𥙿後)를 부제학으로 삼았다.
상이 주강에 나아가 《서전》 우공을 강하였다.
11월 18일 무진
상이 주강에 나아가 《서전》 우공을 강하였다. 강을 마친 뒤에 시강관 홍처윤(洪處尹)이 아뢰기를,
"요즈음 천재와 물괴가 거듭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런 때를 당해서 비록 상하가 서로 수성하더라도 오히려 아침 저녁을 보전하지 못할까 두려운데, 대신이 서로 연이어 물러나기를 고하니 상하의 성의가 미덥지 못해서 그런 것인가 염려스럽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 이 때가 어떤 때인데 원로 대신들이 차례로 물러간단 말인가. 내 성의가 천박한 소치가 아닌 것이 없다. 오히려 누구를 원망하겠는가. 지난날 영남 유생들의 상소에 대한 비답에 불공(不公)의 공(公) 자를 잘못 정(正) 자로 썼는데, 지금까지 후회가 된다. 영남 유생들이 끝내 과거에 나아오지 않으니 참으로 그들이 죄가 있지만 성균관 유생들도 또한 잘못이 있다. 만약 영남 유생들을 괴이한 귀신의 무리라고 한다면 그래도 혹 괜찮지만, 임금을 협박하고 위를 무시한다고까지 하였으니 어찌 지나치지 않은가. 영남 유생들의 상소 가운데 말은 참으로 옳지 않은 곳이 많지만, 그들의 주된 의도는 대개 임금을 협박하고 위를 무시한다는 등의 말을 분변하려고 한 것이다. 그러니 위에 있는 사람의 도리도 또한 전연 답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반드시 일체가 되도록 조절하려고 하여 이런 비답을 한 것뿐이다."
하였다. 처윤이 유직 등이 두 어진이를 무함하고 헐뜯은 죄에 대해 극진히 진달하고, 이어 아뢰기를,
"지금 영남 유생들의 상소에 연명한 자가 1천 4백 인이나 되도록 많지만 서울에 올라와 소를 올린 자는 80, 90인에 불과하였으니, 이 또한 기세를 허장하려는 의도였습니다."
하고, 동지경연 이후원은 아뢰기를,
"성균관 유생들의 일에 비록 과격한 거조가 있었지만, 이는 어진이를 높이려는 뜻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성상께서 너무도 심하게 꺾어버렸습니다. 영남 유생들은 바로 어진이를 업신여기는 당인데, 그들의 상소에 대한 비답은 너그러우셨습니다. 심지어 그들을 배척한 사람을 바르지 못하다고까지 하였으니, 대신이 어찌 떠나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미 바르지 못하다고 말하고서 사관을 보내 그를 머물도록 하니, 이 어찌 예로써 아랫사람을 대우하는 도리이겠습니까. 대체로 관학(館學)의 일은 관학에 맡기고 사관(四館)의 일은 사관에 맡겨야 합니다. 가령 권간이 국정을 담당하여 삭적(削籍)을 풀어주고자 하면 삭적을 풀어주게 하고, 정거(停擧)를 풀어주고자 하면 정거를 풀어주게 해서 관학과 사관이 감히 손을 쓰지 못한다면 한 줄기 공론이 어느 곳에 붙어 있겠습니까. 혼조(昏朝) 때 정인홍(鄭仁弘)·이위경(李偉卿)의 무리들이 또한 모두 삭적되었지만 끝내 감히 풀지 못하였으니, 이 어찌 한 줄기 공론이 아니었겠습니까. 오늘날의 이 일 또한 마땅히 관학과 사관에 맡겨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두 신하는 모두 큰 덕을 가진 명유(名儒)들이니, 내 어찌 만족하지 않게 여기는 마음이 있겠는가. 다만, 종사(從祀)의 의논은 가벼이 허락할 수가 없다. 영남 유생들이야 비록 형편없는 자들이기는 하나 위에서 처치하는 것은 어찌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예조 참판 조석윤이 또 소를 올려 면직을 구하였다. 그 대략에,
"신은 유계 및 영남 유생들의 일에 대해서 크게 염치에 관계되어 야박한 사람, 미세한 일로 맡겨 버리고 편안히 그만둘 수가 없습니다. 신의 어리석은 소견으로는 유계의 본정은 절대로 다른 의도가 없는데 성상의 전지에 유계는 사면하기 어려운 죄가 있다고 하시니, 이는 신이 당을 비호하고 사사로운 사람을 비호한 것입니다. 선왕을 저버리고 군부를 속인 죄가 어찌 유계와 차이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혼자만 귀양가는 형벌을 면했으니 실형(失刑)이 심합니다. 더구나 감히 죄없는 평범한 사람과 같이 직명을 띠고 있을 수 있겠습니까.
영남 유생들의 말에 대해 신이 그들과 서로 다투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국가의 옳고 그름이 뒤섞여 구별이 없어서는 안 되고 신하의 물러가고 나아감을 구차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유직의 상소에는 피사(詖辭)·음사(淫辭)·사사(邪辭)·둔사(遁辭)가 지극했는데, 성상께서 일찍이 통렬하게 변별을 하지 않으시고 오직 고식적으로 아울러 용납하기만을 힘쓰셨습니다. 지금 분을 터뜨려 남을 공격하는 소에 대해서도 또한 너무 지나치게 너그러이 용납하시어, 심지어 인신의 막중한 죄목을 갑자기 사악한 사람을 배척하고 바른 사람을 보위하는 대신에게 더하기까지 하셨습니다. 성상의 마음이 정해지지 않고 국시가 분명하지 못한 것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니, 세도(世道)에 대한 근심이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배척을 받은 대신들이 혹 창황히 나라를 떠나기도 하고 정고(呈告)하여 물러나기도 하는데, 마찬가지인 신이 장차 무슨 면목으로 태연히 무릅쓰고 출사하겠습니까."
하였는데, 답하기를,
"내 비록 어떤 일을 하기에 부족한 사람이지만, 이런 어렵고 우려할 만한 날을 당하여 어찌 이처럼 굳이 사양만 하는가. 더구나 선왕조의 실록은 하루가 시급하니, 경은 의당 사양하지 말고 직책을 살펴야 할 것이다."
하였다.
장령 심광수(沈光洙)가 상소하여, 시정(時政)의 잘잘못에 대해 극진히 아뢰고, 또 아뢰기를,
"종사(從祀)하는 한 가지 일에 대해 한쪽은 옳다 하고 한쪽은 그르다고 하는 것이 정상적인 이치입니다마는, 신은 둘 다 병되게 생각합니다. 어째서이겠습니까. 이는 대체로 이학(理學)이 끊어진 지 오래되었고, 시비가 문란해진 것이 고질화되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큰 선비가 사문(斯文)을 주맹(主盟)함이 없다면 오늘날의 의논은 정하기 어려운 것인데, 다른 의논에 대해 울분과 질투가 너무 급하여 일의 마땅함을 돌아보지 않고 너무도 범람하게 벌을 시행하여 평안하지 못한 단서를 열어놓게 되었으니, 이것이 갑의 잘못입니다. 종사하는 중대한 법전은 말세에 가벼이 의논할 수 있는 바가 아니라고 여겨 편안히 안정하고 스스로를 지키면서 구차하게 뇌동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옳습니다만, 심지어 선배의 도학의 정밀하고 거친 점에 대해서 후세의 말학으로서 실제로 알지도 못하고서 기필코 배척하여 터무니없는 말을 퍼뜨리며 헐뜯고 비방하여 마치 쟁송하듯이 하였으니, 이것이 을의 잘못입니다."
하였는데, 답하기를,
"소장을 살펴보니 나도 모르게 마음이 찡해진다. 내가 요즈음 소를 본 것이 많았으나 이와 같이 친절하게 드러내 밝힌 것은 없었다. 진실로 충성과 사랑이 지극하고 식견이 밝은 사람이 아니면 어떻게 이렇게까지 할 수 있겠는가. 그대가 출사하기를 기다려 내 한번 얼굴을 보고 싶다."
하였다.
11월 19일 기사
진도 군수 박길협(朴吉協)이 하직 인사를 올리자, 상이 불러 보고 진도의 형세를 물었는데, 길협이 대답해 아뢸 때 말이 분명치 못하였다. 상이 승지에게 이르기를,
"그의 사람됨을 보니 평범한 수령은 혹 할 수 있겠지만, 진도는 근래 토호의 변란이 있었던 곳이니, 이 사람이 완악한 백성들을 진압하고 복종시키기는 어려울 듯하다. 해조로 하여금 무신 중에 명성과 공적이 있는 사람으로 바꾸어 차임해 보내게 하라."
하였다. 당시 본읍에 토호 이천곤(李天鵾) 등이 멋대로 창고를 열고서 국가의 곡식을 훔쳐가고 품관을 살해하며 군적을 지워버린 일이 있어, 조정에서 바야흐로 그 죄를 다스리고자 하였기 때문에 이런 전교가 있은 것이다.
영돈녕부사 김상헌(金尙憲)이 양주(楊州)에 있으면서 또 소장을 올리고 올라오지 않았는데, 답하기를,
"경의 소장을 보니, 내가 무엇을 잃어버린 듯하지만 어떻게 비유를 하지 못하겠다. 경이 나아오지 않는 것은 진실로 나의 성의가 얇기 때문이니, 오히려 누구를 허물하겠는가. 또한 지금 절기가 엄동설한에 이르렀고 몸에 질병이 있으니 비록 억지로 나오게 할 수는 없으나, 날이 따뜻해지고 병에 차도가 있게 되면 마음을 바꾸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글을 보니 감정이 복받친다. 오직 경이 헤아려 처신하라."
하였다.
11월 20일 경오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정언벽(丁彦璧)을 정언으로, 민인량(閔寅亮)을 전남 좌수사로 삼았다.
상이 주강에 나아가 《서전》 우공을 강하였다.
영의정 이경여가 네 번이나 정고를 하니, 상이 하교하기를,
"아, 시험삼아 오늘날의 국세를 보라. 편안한가, 위태로운가? 위태롭기가 마치 매어 단 깃발의 술과 같아 아침 저녁을 보전하지 못할 듯하다. 밤낮으로 근심하고 두려워하여 잠도 안 오고 밥먹는 것도 잊고 있다. 이런 때를 당해서 중후한 데 의지하여 일을 이루길 우러를 바가 경이 아니겠는가. 내가 그렇게 되길 바라는 것이 점을 치는 시초·거북이나 주춧돌과 같을 뿐만이 아닌데, 경은 한가하길 구하는 데 급하여 마치 더럽혀질 듯이 하고 있다. 혼매한 과인이 근심하고 탄식하는 것은 비록 불쌍히 여기기에 부족하겠지만, 하늘에 계신 선왕들의 영령도 또한 반드시 아득한 가운데서 근심하고 계실 것이다. 자신을 깨끗이 하고 스스로를 지키는 의리가 비록 중요하지만, 대대로 벼슬해 온 집안의 신하가 떠나고 나아감은 산림의 고상한 선비와 다름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오직 경은 나의 지극한 뜻을 헤아려 빨리 보내온 소장을 폐지하고, 속히 출사하여 도를 논해 나의 갈망에 부합하라."
하였다.
11월 21일 신미
상이 주강에 나아가 《서전》 우공을 강하였다.
대사헌 김집(金集)이 병을 일컫고 부름에 나오지 않았다. 소를 올려 체직을 구하였는데, 답하기를,
"경이 나간 뒤로 내가 어느 날인들 잊었겠는가. 다만 구애되는 것이 있어 뜻과 같이 할 수 없었다. 지금 서쪽의 일이 조금 늦추어졌는데 경의 말이 오히려 이와 같으니 텅 빈 듯한 이 마음을 어떻게 비유할 수 있겠는가. 추위가 이와 같으니 감히 바로 올라오라고 재촉할 수는 없지만 날이 따뜻해진 뒤에는 마음을 바꾸어 올라오도록 하라. 내가 날마다 기다릴 터이니 경은 마땅히 유념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영의정 이경여가 상차하여 면직을 구하였다. 그 대략에,
"어리석은 신은, 반짝이는 반딧불로도 혹 해와 달이 내리 비추는 것을 도울 수 있고, 미미한 티끌이나 이슬로도 거의 바다와 산악의 높고 깊은 것을 도울 수 있다고 망령되이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헤아려 보지도 않고 단지 스스로 감격하여 국정을 담당해서 옛사람의 알아줌을 추모하여 보답하고자 하는 의리에 스스로 부합되게 하려고 생각했으니, 힘을 다해 도와 시대의 어려움을 조금이나마 구제하고 싶은 마음이야 어찌 한량이 있겠습니까. 나라의 운명이 불행하여 강한 이웃이 공갈하고 협박하며, 일의 기미가 번갈아 핍박하여 인심이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각도에 사신을 계속 내려보내도 모든 농사는 흉년이 들어 국세와 민생이 이미 어떻게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런 일은 하늘에 달린 문제요 사람들에게 달린 문제이지 우리 잘못이 아니니, 하늘에 계신 조종의 영령과 온 나라에 사는 백성들이 아마 전하를 이해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상의 자만심이 날로 자라나 기쁨과 노여움을 마음내키는 대로 하고, 형벌과 상이 중도를 잃어 원근의 사람들이 놀라워하고 있습니다. 굽은 길이 점점 열리고 공도가 행해지지 않으며, 아첨하고 굽실거리는 것이 풍습을 이루고 충성스럽고 곧은 사람은 소원하게 되었습니다. 사람을 쓰고 버릴 때에 친한 이와 소원한 이의 차별이 있고, 말하는 기색이 갑자기 화평을 완전히 잃었습니다. 상하가 서로 교유하지 못하여 화창한 기상이 드러나지 않고 있습니다. ‘성의를 미루어 만물을 다스리고 아랫사람을 접할 때 공손하기를 생각하라.’는 것은 생각지 않고, 오직 억측과 속임수로 밝음을 삼고 남의 뜻을 꺾어버리는 것으로 위엄을 삼으며 자질구레한 것으로 지혜를 삼고 있습니다. 붕당을 깨뜨리려고 하면 시비와 현사(賢邪)는 분변하지 않고 오직 색목이 편중한 것만 생각하시고, 기강을 떨치려고 하면 공평정대한 것은 힘쓰지 않고 단지 과중한 위엄과 형벌만 숭상하십니다. 유사가 서리의 직책을 행하고 정해져 있는 법률을 무시하고 상의 뜻대로 하여 조정의 사대부들은 벌벌 떨며 허물을 얻을까 염려하고 민심은 흩어져 아침 저녁을 보전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기상이 참혹하여 위란의 징조가 나타나고, 천심이 기쁘지 못해 재해가 거듭 이르고 있습니다. 나라의 근본이 날마다 흔들리고 폐단이 있는 정사가 점점 불어나는데도 전하께서는 오만하게 스스로 잘난 체하고 뭇신하들을 깔보고 계십니다. 널리 구제하는 말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간쟁하는 길이 이미 막혔으며, 어진이를 표상하는 정성이 이르지 않고 피사(詖辭)와 음사(淫辭)가 날마다 방자합니다. 국가의 노성한 신하들은 직위를 사양하고 향리로 돌아가며, 장사(莊士)들도 전원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어제 나왔던 사람이 지금 도망했는데도 알지 못합니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는 국가가 바야흐로 흥성하여 공고히 흠이 없는 때에 처하더라도, 급한 여울에 배가 내려가듯 비탈에 구슬이 굴러가듯이 글러져가는 형세를 만회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더구나 위급하여 보전하느냐 망하느냐 하는 때에 있어서 무너져 버리는 환난을 면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는데, 답하기를,
"경의 차자를 보니 벌벌 떨리도록 두렵고 척연히 감동을 준다. 내 어찌 마음이 움직여 더욱 공경하지 않겠는가. 오직 경이 선왕의 은혜와 알아줌을 미루어 생각해 나를 덕이 없다고 내버리지 않는다면 어찌 혼매한 과인만의 다행이겠는가. 실로 온 나라 사람들의 다행일 것이다. 속히 출사하여 상하의 여망에 부응토록 하라."
하였다.
11월 22일 임신
홍주 목사 임전(林), 진도 군수 정즙(鄭檝), 진해 현감 이홍규(李弘奎)가 하직 인사를 올리자, 면대하고 유시하여 보냈다.
비인(庇仁) 유학 남회(南誨)가 상소하였다. 그 대략에,
"근래 영남 유생들의 상소로 영의정 이경여가 정고하고 출사하지 않으며, 좌의정 조익이 물러나 향리로 돌아갔습니다. 옛날 송나라 인종(仁宗) 때 왕공신(王拱辰)이 사류를 일망타진하였고, 그 뒤에 한기(韓琦)·범중엄(范仲淹)·구양수(歐陽修) 등도 서로 이어 파직되어 내쫓김으로써 송나라 왕실이 위약해지자 밖의 오랑캐들이 침탈하고 업신여겼습니다. 이 때의 일을 거울로 삼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또,
"신이 비록 영남 유생들이 상소한 말을 알지 못하지만 풍문으로 들으니 선현을 비방하고 헐뜯으며 대신을 기롱했다 하니, 영남 유생들은 괴이한 것을 좋아함이 심합니다. 신이 일찍이 듣건대, 역신(逆臣) 정여립(鄭汝立)·정인홍(鄭仁弘)이 크게 어진이를 배격했다고 하니, 어찌 인홍을 조술하는 남은 의논이 아니겠습니까. 영남은 평소 문헌의 고장이라고 일컬어져 왔는데, 도리어 공자를 업신여기고 여러 현인들을 꾸짖는 무리가 있으니, 사문의 불행이 무엇이 이보다 심하겠습니까."
하였는데, 답하기를,
"그대가 초야의 선비로서 나라를 근심하고 임금을 사랑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이와 같이 진언을 하니, 내 매우 가상하게 생각한다."
하였다.
11월 23일 계유
좌의정 조익을 체직하여 영중추부사에 제수하였다.
11월 24일 갑술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11월 25일 을해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상이 주강에 나아가 《서전》 우공을 강하였다. 강을 마친 뒤에 특진관 홍무적(洪茂績)이 아뢰기를,
"요즈음 하늘의 재앙과 백성들의 원망이 하루하루 더 심해지고 있어 신은 항상 눈물을 흘립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이 전후로 입시하면서 어찌 나를 경계시켜 주는 말이 한마디도 없었는가?"
하였는데, 무적이 일어나 사죄하고 아뢰기를,
"오늘날 영의정은 바로 사림의 영수인데 인혐하여 들어간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조익과 김육도 모두 차례로 물러나 돌아갔고, 민응형(閔應亨)도 성문을 나갔습니다. 선왕조 30년 동안 어찌 일찍이 이런 기상을 보았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마음속에 있는 생각을 숨기지 말고 다 진술하라."
하니, 무적이 아뢰기를,
"요즈음 나랏일을 말하던 유계(兪棨)·심대부(沈大孚) 등과 같은 신하들은 말이 참으로 미치고 망령되었지만 유배되어 쫓겨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 말이 쓸 만하면 쓰고 쓸 수 없으면 방치할 따름입니다. 지금 만약 널리 탕척하는 법전을 시행하지 않는다면 대각의 풍도가 날마다 점점 쓸쓸해지고 아첨하는 신하들이 이로부터 진출할까 염려스럽습니다."
하였다.
11월 26일 병자
상이 주강에 나아가 《서전》 우공을 강하였다.
11월 27일 정축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11월 28일 무인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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