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효종실록5권, 효종 1년 1650년 윤11월

싸라리리 2025. 12. 20. 1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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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11월 1일 경진

오준(吳竣)을 형조 판서로, 이응시(李應蓍)를 사간으로, 이수인(李壽仁)을 지평으로, 홍명하(洪命夏)를 부교리로, 이후선(李厚先)을 정언으로, 민응형(閔應亨)을 대사간으로, 김익희(金益熙)를 승지로, 이후(李垕)를 정언으로 삼았다.

 

윤11월 3일 임오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죄인 서헌문(徐獻文)이 복주되었다. 헌문은 평안도 사람이다. 손수 계모를 시해하였는데, 신문에 나와 공초를 바칠 적에는 계모가 아니고 서모(庶母)라고 하였다. 위관 우의정 이시백(李時白)이 차자를 올려 강상의 옥사로 다스릴 수 없으니 형조에 이송해 달라고 건의하였다. 그러나 상이 따르지 않고, 다시 형신을 더하도록 명하였는데, 헌문이 비로소 자복하여 마침내 복주되었다.

 

윤11월 4일 계미

형혹성이 태미 동원(太微東垣)에서 나왔다.

 

이석(李晳)을 사간으로, 홍처윤(洪處尹)을 배천 군수(白川郡守)로 삼았다. 처윤이 부모의 봉양을 위해 외직을 구했기 때문이다.

 

부교리 홍명하(洪命夏)가 상소하여, 재이를 만나 수성하는 도리에 대해 지극히 진달하고, 또 아뢰기를,
"조정에 인물이 없는데 선왕조의 노성한 신하들이 서로 이어 전원으로 돌아갔으니, 전하의 조정이 이로부터 텅비게 될 것입니다. 지난 광해군 때에 영남의 유생들이 정인홍을 유적(儒籍)에서 삭제했다는 이유로 엎치락뒤치락거리며 당시의 정승을 비방하고 배척하여 남은 힘을 아끼지 않기에 이르렀는데, 당시 정승 문충공(文忠公) 이항복(李恒福) 등이 사직하겠다는 소장을 수십 번이나 올렸지만 광해는 끝내 허락을 하지 않았으니, 어찌 선현을 높이고 국체를 중시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생각지도 못하게 성명한 조정에 영남 유생들이 한번 소를 올리자 천청이 현혹되어 노성한 숙덕의 신하를 팽개치듯 버림으로써 피사(詖辭)와 음사(淫辭)가 바로 그 계책에 들어맞아 정승의 자리가 텅 비고 기상이 우울하게 되었으니, 어찌 단지 사문만의 불행일 뿐이겠습니까. 이미 물러간 정승을 지낸 신하들이, 몸은 비록 밖에 있지만 뜻은 간절히 임금을 사랑하여 전지에 응해 소차를 올려 빠뜨리고 잘못된 것을 보충하려고 하는데, 전하께서는 하나도 그들의 말을 채용하지는 않으면서 도리어 조정 신하들의 윗자리에 초치하려고 하니, 이것이 그들이 들어오기를 바라면서 문을 닫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경연의 늙은 신하들은 일을 말하는 것으로 자기 책임을 삼으니, 전하께서도 항상 충직으로 그들을 대우해야 합니다. 그런데 앞자리에서 토론할 적에 한마디 말이라도 성지에 거슬리면 곧 ‘너희들도 또한 공명을 얻기 위한 장소로 생각하는가?’ 하시니, 이 무슨 말씀입니까. 차라리 꾸짖고 벌을 주어 배척해 물리치실지언정 어찌 이런 전교를 늙은 신하에게 더해 노예처럼 하찮게 꾸짖으신단 말입니까. 이 점이 바로 민응형이 떠나간 이유입니다. 요즈음 조정 사대부들 사이의 기색을 보건대, 조금이라도 청렴하고 개결한 지조가 있는 사람은 모두 장차 자기의 재능을 숨기려고 하는데, 하물며 산림에 묻혀 자신을 닦는 선비들이야 그 누가 전하를 위해 조정에 나오기를 원하겠습니까. 옛날의 역사를 차례로 살펴보건대, 나라가 장차 어지러워지려 할 적에는 어진 사대부들이 조정에 한 사람도 없어 상하가 기탄이 없어진 뒤에 공론이 비색되고 조정이 혼란해져 패망이 뒤따랐습니다. 어찌 감히 멀리 역대의 일을 인용하겠습니까. 혼조가 멀지 않으니, 앞 일이 거울이 됩니다.
또한 생각건대, 전하께서 간언을 들으실 적에 겉으로는 너그러이 용납하시는 듯하지만 속으로는 실상 듣기를 싫어하시며, 처음에는 진언을 허락하였다가 끝내는 반드시 거절하시니, 이것이 바로 전하의 커다란 병통의 뿌리입니다. 궁중을 영선하는 것이 비록 부득이한 데서 나온 것이지만 공사를 한다는 말이 한번 여항에 전파되면 듣는 사람 모두 그 누가 의혹되지 않겠습니까. 조석윤이 남들이 감히 말하지 못하는 것을 말하여 뭇 의심을 깨뜨리자 전하께서도 또한 가납하시는 뜻을 보이셨습니다. 그런데 그뒤 궁가에 관계된 말을 하자 도리어 온편치 못하다는 전교를 내리시고 다시 대각에 두지 않으셨습니다. 이석(李晳)이 피혐하고 사직하면서 꺼리지 않고 말을 다해 자못 간관의 풍채가 있자, 전하께서 특별히 고비(皐比)를 하사하시어 그의 곧은 말을 장려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뒤 궁가 노예에 대한 한 가지 일의 잘못으로 점점 승락하기를 아끼셨습니다. 이리하여 성상의 목소리와 얼굴빛이 사람을 막고 좋아하고 미워함이 즉석에서 판별되니, 지금부터 이후로 언로가 막힐 것입니다.
일에 따라 진언하여 빠뜨리고 잘못된 것을 널리 구원하는 것이 어찌 유독 간관만이 그렇게 하는 것이겠습니까. 또한 대신의 책임이기도 합니다. 지난번 대신이 약석 같은 말을 올려 반드시 허물이 없는 데로 임금을 인도하려 하였는데 무식(無識)이란 두 글자로 거절하시어 감히 다시는 말을 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신은 나름대로 전하를 위해 애석하게 생각합니다. 아, 전하께서는 단지 한결같이 뭇사람들의 말만 따르면 권병이 아래로 옮겨가는 데 가깝다는 것만 아시고, 자기를 버리고 남을 따르는 것이 아름다운 덕이 되는 줄은 전혀 생각지 않으십니다. 전하께서는 단지 아랫사람 다스리는 것을 엄하지 않게 하면 무너진 기강을 진작시킬 수 없다는 것만 아시고 일처리를 전도되게 하는 것이 잘못된 거조가 되는 줄은 전혀 생각지 않으십니다. 전하께서는 단지 붕당을 깨뜨려야 한다는 것만 아시기에 지극히 공정한 마음으로 확연하게 사물을 재단해 처리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조정의 신하가 한 사람을 의논하는 것을 보면 먼저 그들이 자기와 생각을 달리하는 사람을 배척하는가 의심하고, 한 사람을 구원하는 것을 보면 먼저 그들이 사사로운 당을 비호하는가 의심하십니다. 일단 의심을 하게 되면 생각이 이미 한쪽으로 치우치므로 말의 시비와 일의 곡직을 돌아보지 않으시고 오직 색목(色目)이 어떤가로써 버리고 취하는 자료를 삼는 것이니, 이는 전하의 공정한 마음이 도리어 전하의 사사로운 뜻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국시가 안정되지 못하고 사론이 마구 흩어져 어진이는 감히 자기의 심정을 다하지 못하고 불초한 자는 그 틈을 엿보고 있습니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의심하는 마음을 갖는 것은 참소하고 해치는 말을 다가오게 하는 것이고, 결단력이 없는 뜻을 갖는 것은 뭇 굽은 사람들이 들어오는 문을 열어놓는 것이다.’ 하였으니, 신은 이 점을 근심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그대의 소장을 보니 충성스런 말과 곧은 의논이 직절하고 간절하다. 무릇 신자의 도리는 말을 다하는 데 있고, 인군의 도리는 간언을 받아들이는 데 있다. 그대가 이미 직분을 다했는데, 나라고 어찌 유독 그렇게 하지 않겠는가. 그대는 의당 사양하지 말고 속히 나와 행공하라. 나의 좌우에 있으면서 속마음을 털어놓고 성의껏 인도하기를 더욱 힘써 내가 미치지 못하는 바를 도와달라."
하고, 이어 하교하기를,
"원래의 소장에 볼 만한 말이 많이 있기 때문에 내리지 않는다."
하였다.

 

윤11월 5일 갑신

안개가 끼었다.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경상 감사 남선(南銑)이 치계하기를,
"용궁(龍宮)의 유학 안처의(安處義) 집에 상소에 비답한 글이 있어 서로 전파하고 있었습니다. 현감 이익징(李翼徵)이 처의를 힐문하자, 처의는 현유도(玄裕道)에게 들었다고 하였고, 유도는 정진(鄭鎭)에게서 들었다고 하였습니다. 또 정진을 힐문하자, 정진이 말하기를 ‘일찍이 안동 사람 남천로(南天露)를 통해 들었다. 함경도 유생 이후빈(李後彬) 등의 상소에 대한 비답을 어떤 사람이 써서 유도에게 주었다.’ 하였습니다. 또 유도를 힐문하려고 하였는데, 유도가 이미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고 합니다. 왕언을 만들어 내어 글로 써서 전하는 데 이르렀으니, 이는 실로 근고에 없었던 변고입니다. 이른바 유도는 스스로 자기의 죄를 알고 곧바로 먼저 목매 죽었으니, 더욱 지극히 놀랍습니다. 그들이 위조한 비답을 베껴서 아룁니다."
하였는데, 형조가 아뢰기를,
"현유도 등의 일에 대해 자신도 모르게 놀랐습니다. 별지에다 쓴바 왕언을 지어 내어 전파한 정상에 대해서는 더욱 지극히 흉칙하고 참혹합니다. 유도가 스스로 자기의 죄를 알고 추고, 핵실하는 데 미치기 전에 곧바로 스스로 목매어 죽었습니다. 지금 마땅히 끝까지 추고할 자는 정진 및 현직도(玄直道)·현지도(玄志道)·안처의 등이며, 남천로도 정진의 공초에 나왔으니 또한 똑같이 캐물어야 합니다. 청컨대 본도로 하여금 지어낸 사람을 조사해 계문하게 하여 처치하소서."
하니, 하교하기를,
"현유도가 이미 목매 죽었지만 안처의·정진 및 직도 등을 그대로 놔둘 수는 없다. 본도로 하여금 추문하여 처치하게 하되, 옥석이 함께 타버리는 근심과 소요스런 폐단이 없게 하라."
하였다. 헌부가 아뢰기를,
"지금 비답을 위조한 일을 보건대, 지극히 놀랍습니다. 이것은 전고에 없었던 변고입니다. 패란한 무리들이 왕언을 위조하여 한 도를 고동시키는 바탕으로 삼았으니, 이처럼 인심이 망측할 수 있습니까. 유도가 곧바로 목매어 죽었으니, 이미 의심스러울 만합니다. 그 나머지 도당으로 아직 정진 등 네 사람이 있으니, 청컨대 속히 잡아다가 엄히 국문하여 기필코 정범을 잡아 전형을 밝게 보이소서."
하니, 답하기를,
"비록 본도로 하여금 추문하게 하더라도 반드시 미진한 근심은 없을 것이니, 꼭 잡아올 필요는 없다."
하였다. 뒤에 양사가 여러 번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장령 심광수(沈光洙)만이 유독 그 의논을 그쳤는데, 사람들이 대부분 그를 그르게 여겼다. 감사 남선이 또 치계하기를,
"다시 정진을 추문하니, 그의 공초에 ‘평소 미치광이 병이 있는데, 발병을 할 때면 물불도 피할 줄 모르게 된다. 어느 날 밤에 마침 현유도 집에 갔었는데 그 병이 갑자기 일어나, 불측한 말을 지어내어 유도에게 써 주었다. 사악한 귀신의 재앙에 홀린 듯하다.’ 하였습니다. 정진이 비록 이처럼 꾸며서 말을 하였지만 이미 자복하였으므로 그 도당 현직도 등은 지금 우선 그대로 옥에 가두어 두었습니다. 청컨대 형조로 하여금 아뢰어 처치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명하여 대신에게 의논하게 하였다. 영의정 이경여는 헌의하기를,
"정진이 범한 바는 지극히 흉악하고 참혹합니다. 이미 죄를 자복하였으니 빨리 왕법을 바르게 해서 여정을 통쾌하게 해야 마땅합니다. 경옥(京獄)으로 잡아오느라고 부질없이 지연시키느니, 가두어둔 곳에서 주벌하는 것이 순편할 듯합니다. 대체로 이 옥사는 끝까지 추궁하여 그 잔당을 모조리 잡아내야 하는 역적에 관계된 옥사와는 다릅니다. 현유도는 자살하였고 정진은 이어서 죄를 자복하였으니, 이에 의거하여 처벌하면 그만입니다. 기타 옥에 있는 자들은 더욱 속히 처치하여 옥사를 완결하고 인심을 진정시켜야 합니다."
하고, 우의정 이시백은 헌의하기를,
"이번 정진의 죄는 어보를 위조하고 관작을 도둑질해 판 자와는 전혀 같지 않습니다. 그가 성상의 비답을 거짓으로 지어 한 도에 전파하였으니, 그 마음에 목적한 바를 참으로 헤아릴 수 없습니다. 추안 가운데 있는 답변한 말도 미치광이가 한 짓이 아니고, 정상이 드러나고 말이 노출되자 비로소 자복한 것이니, 더욱 지극히 흉악하고 참혹합니다. 만약 왕옥에 잡아다가 전형을 베풀어 팔로에 밝게 보이지 않는다면 나라의 형벌에 어그러짐이 있게 되고, 또한 뒷날의 폐단을 막지 못할 것입니다."
하였는데, 명하여 이경여의 헌의에 따라 시행하게 하였다.

 

상이 주강에 나아가 《서전》 우공을 강하였다. 강을 마친 뒤에 특진관 원두표가 아뢰기를,
"삼가 남선의 장계를 보건대, 거짓 비답을 만들어내어 도내에 전파하였다고 하니, 인심과 세도가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일이 매우 헤아릴 수가 없으니, 내 실로 한심하게 여긴다. 밝게 조사하고 거듭 추궁하지 않을 수 없다만, 이로 인하여 많은 선비들에게 화를 끼치게 될까 염려스럽다."
하였다. 시독관 조한영(曺漢英)이 아뢰기를,
"두 어진이를 종사하자는 요청은 실로 공론에서 나온 것인데, 한편에서 공격해 배척하는 것은 오로지 붕당으로 인해 그러는 것입니다. 지금 비답을 위조한 변고가 어찌 크게 마음을 놀라게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대개 듣건대, 이로써 도내를 고동하여 어진이를 무함하는 소를 올릴 유생들을 꾀어 모았다고 합니다."
하니, 상이 답하지 않았다.

 

윤11월 6일 을유

상이 주강에 나아가 《서전》 우공을 강하였다.

 

윤11월 7일 병술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상이 주강에 나아가 《서전》 우공을 강하였다.

 

진주 목사 이상일(李尙逸), 옥천 군수 이두양(李斗陽), 경성 판관 이만길(李晩吉)이 하직 인사를 올리자, 면대하고 유시하여 보냈다.

 

윤11월 8일 정해

상이 주강에 나아가 《서전》 우공을 강하였다. 강을 마친 뒤에 동지경연 이후원(李厚源)이 아뢰기를,
"명관이 만약 탄핵을 받게 되면 반드시 공론이 도로 허락하길 기다린 뒤에야 다시 청현의 반열에 들어올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근래 탄핵하는 먹물이 채 마르기도 전에 곧바로 다시 현직을 역임하는 것은 모두 조정의 기강이 점점 해이해져서 그런 것입니다."
하고, 【신면(申冕) 등을 가리킨 것이다.】  이어 재이에 대해 진달하기를,
"옛말에 남방은 눈이 내리지 않는 곳이라고 하는데, 지금 듣건대 노령(蘆嶺)의 길이 눈에 막혀 불통된 지가 3일이나 되고 삼례(參禮)의 들에는 혹 눈에 깔려 죽은 자가 있다고 합니다."
하였다. 시독관 홍명하(洪命夏)도 재앙을 늦추는 도리에 대해 진달하고, 또 아뢰기를,
"이번 공주의 길례는 반드시 질박함을 보여 온 나라의 솔선이 된 연후에야 아랫사람들에게 본보기가 될 수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임금에게 어려운 일을 책임지우는 것은 참으로 옳다. 그러나 뭇 신하들도 스스로 상호 책려해야 한다."
하였다. 후원이 아뢰기를,
"근래 듣건대, 부마의 말안장이 당나라 제도에 따라 영롱하게 조각했다고 하는데, 사실인지 모르겠습니다."
하니, 상이 가볍게 웃으면서 이르기를,
"실로 그런 일이 없다. 경이 만약 말하지 않았다면 내가 어떻게 알았겠는가. 근래 소장을 보건대, 굽은 길이 점점 열린다는 말이 있었는데, 내간의 어떤 일이 밖으로 전파되었는지 모르겠다."
하였다. 명하가 아뢰기를,
"요즈음 궁위가 엄하지 못해 내간의 말이 이미 굽은 길을 경유해 나갔으니, 밖의 말도 또한 반드시 굽은 길을 경유해 들어갈 것입니다. 굽은 길이 열리었음을 알 수 있으니, 이는 작은 일이 아닙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난번 내가 이른바 유계가 와서 가까운 곳에 있다고 한 것은 우연히 그렇게 말한 것일 뿐이었다. 뒤에 간원의 차자를 보니, 내가 어디에서 들었느냐고 하였다. 이로써 미루어 보건대 유언 비어가 사실이 아닌 것을 알 수 있겠다."
하였다.

 

죽산 부사 현태시(玄太始), 배천 군수 홍처윤(洪處尹), 강진 현감 이유원(李惟源)이 하직 인사를 올리자, 상이 인견하고 처윤에게 이르기를,
"경연의 신하는 외직에 보임할 수 없지만 어버이를 위해 봉양을 구하므로 허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만 올해의 기근이 이와 같으니 한 고을을 가지고 봉양하더라도 또한 뜻에 흡족하게 하지 못할까 염려된다."
하였다.

 

윤11월 9일 무자

상이 대신 및 비국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우의정 이시백이 아뢰기를,
"신은 이미 재주와 지혜가 없는 데다 병 또한 이와 같은데, 영상은 아직도 출사하지 않고 있으니, 상께서 돈유하여 책려하지 않으시면 안 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들이 만약 힘을 다해 도와 인도하면 나라가 거의 안정될 수 있을 것이다. 예로부터 인군이 비록 더불어 어떤 일을 하기에 부족하더라도 만약 훌륭한 보필이 있으면 전복되는 근심을 면할 수 있었다."
하였다. 상이 우윤  홍무적(洪茂績)에게 이르기를,
"경은 어찌하여 한마디 말도 없는가?"
하니, 무적이 절하고 사죄한 뒤 기강이 해이한 폐단을 진달하자, 상이 이르기를,
"근래의 풍습을 보건대, 자못 진(晋)나라 때 강좌(江左)의 풍습과 유사하다."
하였다. 상이 또 이르기를,
"백마(白馬)에 있는 두 신하를 【곧 이경석(李景奭)과 조경(趙絅)이다. 바야흐로 의주 백마성에 나가 있었다.】  내 잊은 적이 없지만 일에 구애됨이 있어 뜻대로 할 수 없었다. 지금은 세월이 이미 오래되었으니, 본도로 하여금 식량과 반찬을 넉넉하게 내려주도록 하라."
하자, 시백이 또 조경이 처상(妻喪)을 당했다고 진달하니, 상이 명하여 장사지낼 물품을 내리게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장차 나아가려 하니, 상이 호조 판서 원두표에게 이르기를,
"본조의 면포를 강도에 나누어 두지 않았는가?"
하니, 두표가 아뢰기를,
"강도에 저축해 놓은 곡식이 6만여 석인데, 면포에 대해서는 일찍이 나누어 저축해 두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옛날 윤탁(尹鐸)이 진양(晋陽)을 다스릴 때, 민심을 얻는 것으로 보장(保障)의 근본을 삼았습니다. 지금 강도 유수 조계원(趙啓遠)은 정사를 하는 데 엄한 것을 숭상하여 백성들이 자못 기뻐하지 않고 있습니다. 혹시라도 변란이 일어나면 아마도 의지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지금 사람들이 군상의 잘못을 말하는 것은 어렵지 않게 여기면서도 조정 신하들의 일에 이르러서는 감히 지적해 말하지 못하는 것은, 남의 비밀을 캐내어 고한다는 혐의를 받을 염려 때문이거나 안면과 정에 구애되어 그러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른다. 이는 모두 당론에서 연유한 것이다."
하였다. 상이 또 슬프게 탄식을 하며 이르기를,
"지금 군신 상하가 힘을 합쳐 함께 구제하면, 천운은 돌고 도는 것이니 어찌 탈 만한 좋은 기회가 없겠는가. 그런데 고식적으로 그럭저럭 지내 나랏일이 날로 잘못되어 가고 있으니, 내 지붕만 쳐다보며 탄식할 뿐이다. 경창에 저축해 둔 미포(米布)는 경이 기미를 살펴 잘 처치해 강도로 이송하되, 번거롭게 소문내지 말라."
하니, 두표가 아뢰기를,
"성상의 뜻을 신이 어찌 모르겠습니까. 마땅히 받들어 주선하겠습니다."
하였다.

 

윤11월 10일 기축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윤11월 11일 경인

이홍연(李弘淵)을 집의로, 윤겸(尹㻩)을 장령으로, 정언벽(丁彦璧)을 지평으로, 김응조(金應祖)를 응교로 삼았다.

 

상이 주강에 나아가 《서전》 우공을 강하였다. 강을 마친 뒤에 여러 관사의 윤대관(輪對官)을 불러 보았다.

 

윤11월 12일 신묘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윤11월 13일 임진

남노성(南老星)을 승지로, 성이성(成以性)을 사간으로, 이경억(李慶億)을 정언으로, 홍명하(洪命夏)를 이조 정랑으로, 심택(沈澤)을 전남 감사로, 소동도(蘇東道)를 의주 부윤으로 삼았다. 우윤 홍무적(洪茂績)을 특별히 대사헌에 제수하였다.

 

대사헌 김집(金集)이 연산(連山)에 있으면서 소장을 올려 면직을 구하니, 답하였다.
"소장을 연달아 보니 마치 대면한 듯하여 내 마음이 위로된다. 또한 봄을 기다려 조정으로 돌아오겠다는 말이 있으니, 내 매우 기쁘고 다행하게 생각한다. 마지못해 경의 뜻에 따라 잠시 체면을 허락하니, 경은 잊지 말라."

 

대사헌 김집(金集)이 연산(連山)에 있으면서 소장을 올려 면직을 구하니, 답하였다.
"소장을 연달아 보니 마치 대면한 듯하여 내 마음이 위로된다. 또한 봄을 기다려 조정으로 돌아오겠다는 말이 있으니, 내 매우 기쁘고 다행하게 생각한다. 마지못해 경의 뜻에 따라 잠시 체면을 허락하니, 경은 잊지 말라."

 

윤11월 14일 계사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당시 날씨가 매우 추웠는데, 상이 병조에 명하여 속옷을 만들어 옷이 없는 시위하는 군사들에게 나누어 주게 하였다.

 

윤11월 17일 병신

윤순지(尹順之)를 도승지로, 이재(李梓)를 집의로, 정언원(丁彦瑗)·임의백(任義伯)을 장령으로, 임중(任重)을 지평으로, 심구(沈玖)를 정언으로, 유경창(柳慶昌)을 승지로, 신천익(愼天翊)을 부응교로, 허적(許積)을 병조 참판으로, 조석윤(趙錫胤)을 동지경연으로 삼았다.

 

윤11월 18일 정유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전남 좌수사 민인량(閔寅亮)이 하직 인사를 올리자, 면대하고 유시해 보냈다.

 

윤11월 20일 기해

영중추부사 조익(趙翼)이 소장을 올려 치사를 구하자, 답하였다.
"치사하는 것이 비록 옛날의 예이지만 태평할 때에나 마땅하지 위란할 때에는 마땅치 않다. 이 때가 어떤 때인데 기로의 대신들이 서로 이어 초야로 도망가 나로 하여금 고립되게 하는가. 경은 이 점을 생각하라."

 

윤11월 22일 신축

강화 유수 조계원(趙啓遠)이 병을 일컫고 사직하자, 상이 하교하기를,
"조계원이 사직한 장계 가운데 이른바 ‘경연에서의 말’이란 조보(朝報)에 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알았단 말인가. 매번 인대할 때마다 상하가 주고받은 말이 그 시기를 넘기기도 전에 빠짐없이 전파된다고 하여 마음속으로 깜짝 놀라고 있었지만 그래도 다 믿지는 않았었다. 어찌 지금처럼 이와 같은 일이 있으리라고 예측이나 했겠는가. 더구나 편전에서 인접한 것은 평상시 인견하는 것과는 또한 차이가 있지 않은가. 참여하여 들은 자는 단지 승지와 사관뿐인데 이처럼 말이 전해지니, 근시(近侍)를 신임하는 뜻이 어디에 있는가. 크고 작은 군국의 일 또한 어찌 신중하고 은밀하게 할 리가 있겠는가. 관계된 바가 적지 않으니, 그 말을 전한 자를 승지는 물어서 아뢰라."
하였다. 동부승지 채유후(蔡𥙿後)가 아뢰기를,
"가주서 이명익(李溟翼)에게 물어보니, 일을 기록한 초고를 설서 조귀석(趙龜錫)이 와서 보았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반드시 어떤 대화가 있었는지를 먼저 안 뒤에야 초고를 구해 보았을 것이다. 조귀석이 어떤 사람에게 들었는지 불러다 물어서 아뢰라."
하니, 정원이 아뢰기를,
"즉시 조귀석을 불러다 물어보니, 귀석이 말하기를 ‘사관 신최(申最)는 바로 나의 외종 동생이다. 내가 우연히 편지로 경연에서의 대화에 대해 물었는데, 신최가 우리 아버지가 비방을 받았다는 뜻으로 대략 통지해 주었다. 내가 이날 본원에서 입직하는데 가주서 이명익이 마침 와서 보고 또 그 말을 전해 주었다. 내가 그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어 정원으로 가서 주서가 일을 기록한 초고를 구해 보았고, 그 내용을 아버지에게 서신으로 보고했다.’ 하였습니다."
하자, 또 하교하기를,
"경연에서 한 말이 도처에 전파되었다. 나라의 기강이 비록 무너졌으나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바가 없는 것이 또한 어찌하여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단 말인가. 이명익과 신최를 모두 잡아다 형추하라. 조귀석이 당초 편지로 남에게 물은 것은 또한 무슨 뜻인가. 먼저 파직시킨 뒤에 추고하라."
하였다. 금부가 신최와 이명익의 공사(供辭)로 형신을 청하자, 상이 따랐다. 신최는 의논해 처치하라고 명하여 금부가 의논해 아뢰자, 상이 파직을 명하였다. 영의정 이경여, 우의정 이시백이 상차하기를,
"삼가 사관을 형추하라는 명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이는 참으로 폐단을 우려하고 뒤를 경계하는 지극한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마는 예로써 아랫사람을 대우하고 정상을 참작해 죄를 정하는 도에 아마도 방해가 될 듯합니다. 예에 ‘형은 대부(大夫)에게 시행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대부에게도 오히려 형을 더할 수 없는데, 하물며 붓을 잡고 법도에 따라 기록하는 신하이겠습니까. 아침에 위엄스런 옥안을 모시다가 저녁에 옥리에게 나아가는 것도 이미 듣는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데, 더구나 묶어 고문을 하여 하인들처럼 천하게 다룬단 말입니까. 선조조(宣祖朝) 40년간, 인조조(仁祖朝) 27년간에 일을 기록하던 신하로 죄과를 범하고 법에 저촉된 사람이 어찌 없었겠습니까마는 오늘과 같은 거조가 있었다고는 듣지 못했습니다. 성명께서 위에 계시면서 인후함으로 정치를 하시는데 쇠한 세상의 독책하는 정사가 순식간에 바로 나올 줄을 어찌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이명익은 바로 영남 사람입니다. 신들이 평소 그 사람을 모릅니다만 어찌 감히 떠도는 말과 부질없는 말로 군부를 속이겠습니까. 삼가 우레와 같은 위엄을 조금 거두시고 헤아려 마땅히 시행해야 할 벌을 내리소서."
하니, 답하기를,
"형법이란 바로 국가를 유지하는 것이다. 조종의 법률을 내 어찌 감히 사사로이 하겠으며, 경들도 또한 어찌 감히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유사에게 맡겨 법에 따라 다스리게 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간원이 【사간 성이성(成以性), 정언 이경억(李慶億).】  아뢰기를,
"지금 듣건대, 전 가주서 이명익을 형추하라는 명이 있었다고 하니, 지극히 놀라움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경연에서 한 말도 진실로 군국의 기밀에 관계된 일이 아니면 묻고 싶은 것이 인정이고, 서로 고해주는 것도 인정입니다. 지금 잘못을 범한 것이 그 죄가 매우 미미한데 이토록 엄하게 다스려 조금도 용서해주지 않는다면, 한 사람 사관이 죄를 받는 것은 참으로 애석해 할 만한 것이 못되나 어찌 성명에게 허물되는 일이 되지 않겠습니까. 형추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고, 헌부가 【집의 심노(沈𢋡).】  아뢰기를,
"지금 듣건대, 전 가주서 이명익을 형추하라는 명이 있었다고 하니, 지극히 놀라움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대체로 인주가 신료들을 인접하여 서로 더불어 시정의 잘잘못과 인재의 현부와 군국의 크고 작은 일을 강론하는 경우는 단지 경연에서와 인견할 때 뿐입니다. 그렇다면 위로 왕의 말씀으로부터 아래로 신료들이 주대한 말에 이르기까지 털끝만한 것이라도 은폐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다만 지금은 시세가 태평한 때와 다르니 기밀에 관계된 일은 그래도 비밀히 할 수 있지만, 기타 으레 한 말은 어찌 꺼릴 만한 일에 해당되겠습니까. 한번 사관을 잡아다 형추한 뒤로는 인견하는 거조가 지극히 비밀스럽고 기휘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올라가 주대한 대소 신하들도 합문을 물러나온 뒤로는 흘끗흘끗 서로 눈치만 보며 입을 굳게 다물 것이며, 조정에 있는 여러 신하들도 경연에서 어떤 말이 오갔고 어떤 거조가 있었는지를 감히 묻지 못하게 되어 마치 천상의 일처럼 까마득히 알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인심이 의심할 것이며 기상이 아름답지 못할 것이니, 절대로 성명한 세상의 아름다운 일이 아닙니다. 가령 간사한 사람이 가까이서 모시는 반열에 들어 상의 뜻을 조장하고 영합하여 국사를 잘못되게 하고, 터무니없는 말을 날조하여 선량한 사람들을 무함하고 해칠 경우, 대신이 들을 수 없고 삼사가 감히 알지 못한다면 그 유폐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삼가 성명께서 우연히 살피시지 못하여 이런 거조가 있었나 싶습니다. 이명익은 근시의 직에 있는 사람으로 일반 관원과는 다릅니다. 한때의 잘못으로 무거운 법률을 가하게 되면 뭇사람 심정에 원망하지 않음이 없을 것입니다. 지금부터는 군국의 비밀에 관계된 일을 제외하고는 경연에서 한 말도 일체 비밀로 하지 않는 것으로 영원히 훗날의 법식을 삼고, 이명익을 형추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였는데, 상이 모두 따르지 않았다. 여러번 아뢰어서야 따랐다. 그 뒤에 영월군으로 유배하도록 명하였다.

 

윤11월 23일 임인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윤11월 24일 계묘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시약청(侍藥廳)을 설치했다. 당시 왕대비가 오랫동안 편치 못했는데, 이때 이르러 갑자기 병세가 악화되어 약방 제조가 입직하여 시약하였다.

 

이날 왕대비가 통명전(通明殿)으로 이어하였다.

 

당시 세자도 편안하지 못하였는데 마마와 같은 증세가 있다가 얼마 지난 뒤에 나았다.

 

윤11월 25일 갑진

왕대비가 또 옛 도총부로 이어하였다. 시약청이 벽사단(辟邪丹)과 웅황살귀원(雄黃殺鬼元)을 제조해 올렸다.

 

윤11월 26일 을사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시약청이 박군(朴頵)의 죄를 용서하여 정지문(鄭之問) 및 호군 이원진(李元鎭) 등과 함께 의논하여 약을 올리도록 해달라고 청하자, 따랐다.

 

윤11월 27일 병오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윤11월 28일 정미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왕대비가 번침(燔鍼)을 맞았다.

 

상이 영의정 이경여를 인견하였다. 경여가 아뢰기를,
"요즈음 재이가 매우 참혹하여 인심이 의심하고 두려워하니, 식자들의 근심이 이르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일종의 떠도는 의논이 비록 나라를 근심하는 데서 나왔지만 수원 부사 변사기(邊士紀)는 여러 차례 중요한 직임을 거치면서 직책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은 적이 없었고, 또 본직에 제수되어서도 능히 마음을 다했으니, 이는 실로 무장 중에서 급할 때 힘을 얻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근래 떠도는 의논으로 인하여 마음이 편치 못했고, 지난번에는 감사가 갑자기 파출하였습니다. 신의 소견으로는 그대로 잉임시키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른바 떠도는 의논이란 어떤 말인가?"
하였는데, 경여가 아뢰기를,
"사기뿐만이 아닙니다. 근기(近畿)에서 병사를 주관하는 사람들 또한 대부분 이런데 동요되고 있다 합니다."
하였다. 상이 놀라며 이르기를,
"과연 그런 일이 있는가. 그 사람이 누구인가?"
하니, 경여가 아뢰기를,
"광주 부윤 기진흥(奇震興)도 스스로 불안해 한다고 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변사기를 속히 잉임시키도록 하라. 옛날 당 태종(唐太宗)이 이군연(李君羨)을 죽이자 그 뒤에 과연 여주(女主)의 변이 없었던가. 어찌 형체도 없는 일로 스스로 의심하고 꺼리는 마음을 내는가. 이는 실로 어지러움을 부르는 길이다."
하였다. 경여가 이어 진정시키는 방법에 대해 진달하고, 또 아뢰기를,
"사기는 진실한 사람입니다. 관직이 이미 극에 달했으니 어찌 다른 뜻이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 성의를 미루어 그를 후하게 대우하소서."
하였다.

 

윤11월 29일 무신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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