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효종실록5권, 효종 1년 1650년 12월

싸라리리 2025. 12. 20. 1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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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일 기유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헌부가 아뢰기를,
"의관 정지문(鄭之問)은 성품이 본래 패악합니다. 일찍이 혼조 때 여러 번 면직을 구하는 소장을 진달했는데 그 조어에 차마 듣지 못할 말이 있었습니다. 또 선왕께서 편찮으시던 날 다른 곳에서 머뭇거리며 끝내 부름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법률이 지극히 엄하니 죄를 용서할 수 없습니다. 청컨대 율에 따라 다스리도록 명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헌부가 의논하기를 그치지 않자, 상이 대신에게 의논하도록 명하였다. 영의정 이경여가 헌의하기를,
"삼가 생각건대, 선왕조에 옛것을 개혁하여 법을 밝게 보이자, 흉악한 무리들과 간사한 자들이 차례로 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때를 당하여 이런 사람이 주벌되지 않고 귀양을 갔으니 그 사이에 참작할 바가 있었던 것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만약 28년 뒤에 제기하여 큰 형벌을 시행하려고 하면, 이것이 참으로 악한 자를 미워하고 죄 있는 자를 토벌하는 뜻에서 나온 것이지만 또한 너무 심한 것을 하지 않는다는 도리에 어긋납니다. 만약 대간의 의논을 시행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한다면 도로 유배지로 보내 한창 일어나는 공의를 조금 위로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따랐다.

 

12월 2일 경술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12월 5일 계축

큰 눈이 내렸다.

 

12월 8일 병진

동래 부사 유심(柳淰)이 치계하기를,
"관수왜(館守倭)가 역관을 시켜 말을 전하기를 ‘대군(大君)이 날마다 애완물로 소일을 하니, 귀국에서 만약 진기한 새나 짐승을 넉넉하게 보내준다면 단지 도주에게 영광이 있을 뿐만이 아니고, 동무(東武)의 여러 장수들도 또한 반드시 귀국의 성의와 믿음에 감격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하였는데, 예조가 그들의 요청을 따르자고 청하니, 허락하였다.

 

12월 9일 정사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의주 부윤 소동도(蘇東道)가 치계하였다.
"섭정왕(攝政王)이 11월 9일 병으로 죽었습니다. 청나라 사신이 부고를 전하기 위해 나왔는데, 추가로 보낸 시녀(侍女)도 중도에서 돌려보냈다고 합니다."

 

12월 10일 무오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12월 11일 기미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상이 영사전에서 납향제(臘享祭)를 행하였다.

 

전 대군 사부 윤빈(尹彬)이 소를 올리고 편찬한 《고감록(古鑑錄)》 1권을 올렸는데, 【《서전(書傳)》과 《강목(綱目)》 및 주자(朱子)의 주차(奏箚) 가운데 있는 치도(治道)에 관계되는 말을 뽑아 한 권을 만들고 고감이라고 이름한 것이다.】  상이 너그러이 대답하고 표피를 특별히 하사하였다.

 

영의정 이경여가 상차하기를,
"지금 대사헌 홍무적(洪茂績)이 피혐한 말을 보니, 일을 논하는 것이 장황하고 말의 예봉이 섬뜩합니다. 신이 놀라 두려워한 뒤에 이어 그의 곧고 분명한 풍채가 늙어서도 쇠하지 않았음을 감탄하였습니다. 그가 신을 공격한 말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만, 신이 반드시 다투어 변론하려고 하면 어린아이와 다투며 힐난하는 것과 같아서 짐짓 놔뒀습니다. 대개 신과 무적은 어려서부터 교유하여 늙어서도 막역한 사이로 어찌 오늘날에 이르러 서로 어긋남이 있겠습니까. 다만 혈기의 울분을 참지 못해 이런 중도에서 지나친 거조를 한 것입니다. 그러나 풍상에 꺾인 뒤로도 지조를 변치 않고 일에 따라 자신의 풍도를 드러내니, 이는 당개(唐介)118)  도 능히 할 수 없었던 일인데 이 사람은 능히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의 말이 타당한지 아닌지를 따질 것 없이 또한 숭상할 만한 일입니다. 신이 어찌 털끝만큼이라도 마음에 앙금이 있어 그와 더불어 서로 다투려는 것이겠습니까. 다만 홍무적이 이미 대간이 되었고, 신 또한 대신의 자리에 있으면서 대간에게 배척을 받았으니, 이는 곧 공의에 용납되지 못한 것입니다. 공의에 용납되지 못한 대신이 어찌 하루라도 그 자리에 무릅쓰고 앉아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 염치에 관계된 일이므로 태연히 있을 수가 없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언론이 태연하여 도무지 속세의 선비들처럼 서로 성내고 다투는 의도가 없으니, 내 매우 훌륭하게 생각한다. 안으로 살펴도 흠이 없으니 비록 무례한 사람이 내 곁에서 웃통을 벗거나 벌거벗는다고 하더라도 나에게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경은 사양하지 말고 안심하고 직책을 살피도록 하라."
하였다. 당시 홍무적이 정지문의 일로 인피하였는데, 말이 경여까지 침범했기 때문이다.

 

12월 12일 경신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상이 서쪽 교외로 거둥하여 청나라 사신을 맞이하고, 인정전에서 접견하였다.

 

12월 13일 신유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12월 16일 갑자

심액(沈詻)을 예조 판서로, 이시방(李時昉)을 공조 판서로, 박서(朴遾)를 우참찬으로, 심노(沈𢋡)를 집의로, 이정영(李正英)을 헌납으로, 채충원(蔡忠元)을 부교리로, 홍명하(洪命夏)를 검상으로 삼았다.

 

12월 17일 을축

태백이 하늘을 가로질렀다.

 

12월 18일 병인

영의정 이경여, 우의정 이시백이 아뢰기를,
"천하의 일이 의견이 하나로 통일되면 성공을 하고, 둘로 나뉘어지면 실패를 하게 됩니다. 나라를 다스리는 도에 있어서도 더욱 명령이 한 군데서 나와야 합니다. 그런데 근래 체통이 문란하고 기강이 해이해져서 그 폐단이 끝내 조정의 명이 행해지지 않는 데까지 이르고 말았으며 그 폐단이 날로 심해지고 있으니, 참으로 지극히 한심스러운 일입니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중서성(中書省)은 정치의 근본으로 천하의 치란이 관계된 곳이다.’ 하였으니, 만약 감당할 만한 사람이 아니면 구차하게 그 자리에 채워서 국체를 날로 비천하게 하고 모든 일을 날로 무너뜨리게 해서는 안 됩니다. 비국은 바로 경상(卿相)들이 있는 곳으로, 모든 베풀어 시행하는 데 관계된 일을 반드시 가부를 상의해 확정하여 회의를 해서 의견 통일을 한 뒤 아뢰어 윤허하시는 결재를 받는데, 이것이 바로 성명(成命)인 것입니다. 중외에 있는 여러 신하들이 만약 그 성명의 이점과 병폐에 대해 의논할 만한 것이 있을 경우에는 아뢰어 경장해서 비록 열 번 고치더라도 방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만약 단지 자기 소견대로 각각 자기 관사의 입장만을 주장하여, 명령이 반포되었는데도 각도에 이문하여 한결같이 전철을 따를 것만을 더욱 급하게 재촉하고 핍박하면 묘당의 명령은 단지 문구(文具)가 되고 말 것이고, 신의가 없다는 비방이 끝내는 국가로 돌아오고 말 것입니다. 청컨대 여러 상사(上司)의 이문으로서 계하를 거치지 않았거나 비국의 품정을 거치지 않아서 전후 서로 어긋나는 점이 있는 것은 각도의 감사들로 하여금 조사해 계문하게 하소서. 그리고 조정의 명을 폐치하고 사사로이 자기 멋대로 고치는 자는 어느 상사를 막론하고 나타나는 대로 중하게 처벌하여 국체를 보전하고 정령을 한결같이 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따랐다.

 

12월 23일 신미

증광 전시(增廣殿試)를 베풀어 이운근(李雲根) 등 33인을 취하였다. 상이 즉위한 것을 경하하는 과거였다.

 

12월 25일 계유

민응형(閔應亨)을 부제학으로, 김익희(金益熙)를 대사간으로 삼았다.

 

우의정 이시백이 아뢰기를,
"수원 부사 변사기(邊士紀)는 병세가 심중하지 않았는데 감사가 파출하였습니다. 비록 그가 의도한 바를 모르겠습니다만, 정승이 아뢰어 잉임을 청하였고 성상께서도 특별히 감사를 추고하도록 명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래지 않아 사기를 하등의 고과에 두었으니, 그가 임금의 명을 무시하고 조정을 깔본 죄를 다스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청컨대 경기 감사 김광욱(金光煜)을 우선 먼저 파직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따랐다. 특령으로 사기를 잉임시켰다.

 

우의정 이시백이 아뢰기를,
"수원 부사 변사기(邊士紀)는 병세가 심중하지 않았는데 감사가 파출하였습니다. 비록 그가 의도한 바를 모르겠습니다만, 정승이 아뢰어 잉임을 청하였고 성상께서도 특별히 감사를 추고하도록 명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래지 않아 사기를 하등의 고과에 두었으니, 그가 임금의 명을 무시하고 조정을 깔본 죄를 다스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청컨대 경기 감사 김광욱(金光煜)을 우선 먼저 파직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따랐다. 특령으로 사기를 잉임시켰다.

 

12월 26일 갑술

상이 하교하였다.
"전 서흥 부사(瑞興府使) 이유사(李幼泗)는 잘 다스린다는 것으로 여러 번 포상을 받아 내 매우 가상하게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갑자기 죽으니 매우 가엾고 측은하다. 지나가는 각읍으로 하여금 상구(喪柩)를 호송하여 특이한 은전을 보이도록 하라."

 

예조가 아뢰기를,
"왕대비의 증후가 지금 다행히 평상시로 회복되어 시약청을 파하였고, 세자의 편치 못한 증세도 이미 편안하게 되었으니, 온 나라 신민들의 경사로 이보다 큰 일이 없습니다. 일찍이 신미년119)  에 인목 왕후(仁穆王后)의 병세가 회복되자 하례를 올리고 과거를 베푼 적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이미 행한 규례이지만 지금은 국상이 끝나지 않았으니, 하례하는 한 가지 절차는 행할 수 없지만 전지를 팔방에 반포하여 다같이 경하하는 뜻을 보이고, 이어 과거를 베풀어 인재를 취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12월 28일 병자

동지사(冬至使) 인평 대군(麟坪大君) 이요(李㴭)가 북경에서 치계하였다.
"백마 산성(白馬山城)에 안치한 두 신하 이경석(李景奭)과 조경(趙絅)을 황제가 이미 방환하도록 허락하였는데, 영의정 이경여는 영원히 서용하지 말고 전리에 물러나 살게하라고 하였습니다."

 

12월 30일 무인

영의정 이경여가 상소하여 면직을 구하자, 답하기를,
"경의 소장을 살펴보니, 내 마음이 멍해져 할 말을 모르겠다. 국사의 어렵고 근심스러움이 이런 지극한 경지에 이르렀는데, 장차 큰 냇물을 건너려고 하면서 배와 노를 잃을 줄 어찌 생각이나 했겠는가. 근심과 기쁨이 남들에게서 말미암으니 어찌 분개를 이길 수 있겠는가. 한밤중에 잠을 못 이루고 혀만 끌끌 찼을 뿐이다. 상소한 말은 마땅히 묘당으로 하여금 의논해 처치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그 뒤에 비국이 의논해 아뢴 것에 따라 비로소 체직을 허락하였다.

 

헌부가 【대사헌 홍무적, 집의 심로, 장령 임의백.】  아뢰기를,
"수원 부사 변사기는 본래 먼 변방의 미미한 한 사람입니다. 따라서 마땅히 힘과 마음을 다해 나라의 은혜에 보답해야 하는데 도리어 본직을 깔보고 태연히 늙은 재상으로 자처하면서 병으로 사직하기까지 하였으니 이미 매우 통분하고 놀라운데, 잉임된 뒤에는 더욱 스스로 교만하여 완전히 직무를 폐하였습니다. 한 도의 방백이 된 자는 반드시 보고 들은 바가 있어 하등의 고과에 두었을 것인데, 어찌 조정에서 방백을 들어 탄핵하고 사기를 잉임시킬 줄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감사의 직임은 체면이 지극히 중합니다. 지금 한 수령을 하등의 고과에 두었다는 것으로 갑자기 파척하는 데까지 이르렀으니, 또한 어찌 방백을 설치하여 포폄하는 임무를 맡길 필요가 있겠습니까. 이는 반드시 근래 떠도는 의논으로 인해 진정시키는 계책을 삼고자 하여 이런 놀랍고 기이한 거조가 있었을 것입니다.
사기가 총애받는 정승에게 자취를 의탁하여 추악한 태도를 골고루 다해 나랏사람들이 모두 그를 얼자(孼子)라고 일컫습니다. 수원에 제수된 뒤로 소를 잡고 술을 빚어 날마다 장관(將官)들과 서로 마주 앉아 잔치를 베풀고 술을 마시며 장사들의 마음을 사니, 보는 사람치고 괴이하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습니다. 이것이 그가 사람들로부터 말을 듣게 된 까닭입니다. 더구나 지금은 천재와 시변이 끝이 없어 임금과 신하 상하가 겨를없이 근심하고 있는데, 사기는 무식한 무부로 서울 가까운 병사를 주관하는 중요한 자리에 있으면서 하는 짓이 또 이와 같으니, 식자들이 근심하는 것이 참으로 당연한 일입니다.
옛날 적청(狄靑)120)  이 추밀사(樞密使)가 되었을 때 사람들이 모두 훌륭한 장수라고 일컬었습니다. 그때 마침 유언 비어가 있자 구양수(歐陽修)가 차자를 올려 그의 직을 파직하도록 청했습니다. 당시 사람들이 모두 말하지 않았는데 구양수가 유독 그 점을 말하자, 인종(仁宗)이 가상하게 여겨 곧 적청을 추밀에서 체직하고 지진주(知陳州)로 내보냈습니다. 요즘 세상의 사람으로 드러나지 않은 화를 미리 근심하여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감히 군상에게 말하는 자치고 구양수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경기 감사 김광욱은 도신(道臣)으로서의 체통과 전례를 깊이 체득한 사람으로 별로 잘못한 점이 없습니다. 청컨대 변사기를 파출하고, 김광욱을 파직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문학 오정위(吳挺緯)가 상소하여, 북쪽으로 가는 사신 중에 서로(西路)의 역에 말을 맡기고 후한 값을 강제로 징수하는 자가 있다고 하자, 상이 평안 감사 정유성(鄭維城)에게 명하여 조사해 아뢰라고 하였다. 유성이 치계하기를,
"인흥군(仁興君) 이영(李瑛)이 사은사로 북경에 갈 적에 대동역(大同驛)에 그의 말을 강제로 팔았는데, 그 값이 가는 면포 2백 50필이었다고 합니다."
하였는데, 상이 비변사로 하여금 의논하게 하였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이런 길이 한번 열리면 여러 도의 각역이 반드시 지탱해 보전할 형세가 없을 것입니다. 왕이 법을 쓰는 데는 반드시 귀하고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시행을 한 뒤에야 명령이 행해질 수 있습니다. 왕자의 사체가 비록 중하기는 하지만 이미 조사하여 아뢰게 하였으니, 그대로 놔두고 묻지 않음으로써 나라의 법을 더욱 떨어뜨리게 해서는 안 됩니다. 청컨대 법관으로 하여금 조율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하교하기를,
"찰방이 보고한 것을 어찌 모두 다 믿을 수 있겠는가. 만약 인흥군 한 사람에 그치는 일이라면 어찌하여 전파해 소문나는 데까지 이르렀겠는가. 기타 다른 사람들은 전혀 묻어두고 단지 이 사람만 가지고 책임을 모면하려 하니, 나라의 법이 어디에 있는가. 매우 지극히 통탄스럽고 놀랍다. 양서(兩西)의 감사로 하여금 연로의 찰방을 엄히 문책하여 빠뜨리지 말고 찾아내도록 하라. 혹시라도 사실대로 아뢰지 않는 자가 있으면 그 죄로 죄를 줄 것이다."
하였다.

 

상이 하교하기를,
"근래 대관이 근신을 구원한 의논을 보건대, 그 뜻이 자못 좋았다. 지금 왕자군의 일도 의논하지 말게 하는 것이 좋겠다."
하니, 장령 임의백(任義伯)·곽지흠(郭之欽), 지평 임중(任重) 등이 인피하기를,
"삼가 듣건대, 왕자군의 일을 논하지 말라는 전교가 있었다고 합니다. 대체로 사관을 형추하는 것은 왕자의 일과 본래 상관이 없는데 전하께서 이런 전교를 하시니, 양사에서 논한 것이 근신을 우대하는 예에서 나온 것으로 근신을 형추할 수 없으니 왕자도 어떻게 벌을 시행할 수 있겠는가라고 생각한 데서 나온 것이 아닙니까. 이명익이 경연에서 한 말을 전파한 것은 실로 무심결에 나온 것으로 인정이나 법률로 참작을 하면 저절로 마땅히 시행해야 할 법률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왕자군의 일에 있어서는 도신의 장계와 비국의 회계에 모두 지극히 준절한 말이 있었으니 용서할 만한 정상이 보이지 않는데, 어찌 도리어 마땅히 비의하지 않아야 할 사람에게 비의하여 온편치 못한 전교가 있기까지 할 줄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이는 반드시 대간이 사정을 따른다고 의심하시어 불만의 뜻을 보이시는 것입니다. 신이 이미 이명익을 형추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하였으니, 어찌 감히 그대로 무릅쓰고 있겠습니까. 청컨대 신의 직을 체직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간원이 처치하여 출사를 청하자, 상이 따랐다.

 

헌부가 아뢰기를,
"왕자군은 비록 존중해야 한다고 하지만 그 또한 신하입니다. 자신이 왕법을 범해 도신이 조사해 아뢰고 비국이 회계하여 이미 법부(法府)에 판하하였으니, 마땅히 조율하여 그 죄를 정해야 합니다. 상께서 이 일로 인해 감정이 격해지셔서 의논하지 말라는 전교를 갑자기 내리시니, 이는 전에 없던 일입니다. 전하께서 비록 친한 이를 친히 하는 어짊으로 너그러이 용서하심이 있더라도 왕법을 어찌 하겠으며, 공공의 의논을 어찌 하시겠습니까. 청컨대 의논하지 말라는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우의정 이시백이 상소하기를,
"신이 지난번에 국가의 체통과 전례를 가지고 말한 것이 있었습니다. 삼가 헌부가 아뢴 말을 보건대, 두렵고 떨려 마땅히 물러나 엎드려 공의를 기다려야 하겠습니다만 구구한 제 소견을 또한 진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근일 이른바 떠도는 의논이라는 것이 어디서 나왔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마는 유언 비어가 여기저기서 난무하여 인심이 동요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인심이 경박하고 분열된 날을 당해서 만약 형체도 없는 일을 가지고 이런 의심을 두게 되면 사람마다 스스로 위태롭게 느끼고 나라는 나라꼴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묘당의 진정시키는 계책은 참으로 부득이한 데서 나온 것입니다. 이는 영상이 아뢴 것으로 성상께서 특별히 감사를 추고하고 사기를 잉임시키도록 명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감사가 바로 하등의 고과를 한 것은 번신(藩臣)의 체모를 매우 잃은 것입니다. 그가 임금의 명을 무시하고 조정을 깔본 죄는 면하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신이 스스로를 헤아리지 않고 감히 의견을 진달했습니다. 신이 애석하게 여기는 것은 단지 조정의 사체일 뿐입니다. 대신의 배척이 여기까지 이를 줄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사기가 참으로 그런 죄가 있다면 어찌 파출하는 데 그칠 뿐이겠습니까. 신이 한 번신의 잘못을 의논하다가 도리어 대신(臺臣)의 지척을 받았으니, 어찌 감히 부끄러움을 참고 구차하게 무릅쓰고서 거듭 명기를 욕되게 하겠습니까. 청컨대 빨리 면직을 허락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 근래 국사를 보니, 어떻게 할 수가 없어 인주와 대신도 조처할 수가 없구나. 말을 하려고 하면 너무 번거로우니 차라리 묵묵히 있을 뿐이다. 경은 국가와 존망을 함께 하는 사람이다. 어찌 남의 말 때문에 사피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겠는가. 모름지기 서로 다투지 말고 속히 출사하라."
하였다. 대사헌 홍무적이 인피하기를,
"예로부터 숨어있는 화와 드러나지 않은 기미가 있지만 그 형체가 드러나지 않고 그 자취가 나타나지 않으면 지적하여 아뢰기 어려우므로 뭇사람이 몰래 서로 말을 전했는데, 이를 뜬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밝은 임금과 훌륭한 정승들은 뜬소문이라고 하여 그것을 소홀이 하지 않고, 진정시키고 가라앉게 하는 계책을 생각하였습니다. 송 태조(宋太祖)가 술자리에서 병권(兵權)을 풀어버린 것121)  과 구양수(歐陽修)가 적청(狄靑)을 외직으로 내보내자고 청한 것이 바로 이런 뜻입니다.
신이 일찍이 선왕조 때에 대각에 있으면서 심역(沈逆)122)  이 임금을 무시하는 마음이 있다고 억측으로 생각했었지만 막상 논핵할 적에는 단지 그의 탐욕스럽고 방종한 죄만 거론했던 것은 그 형상을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에 만약 다투어 서로 용납하고 비호해주는 태도가 없어서 미리 병권을 파하고 폄출해 한가한 자리로 물리쳤다면 나라에서 대신을 죽이는 거조가 없었을 것이고, 그도 혹 대역의 죄를 면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날 뜬소문이 변사기(邊士紀)에게 미친 것은 그의 본성이 흉악하여 화를 일으킬 마음을 품고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먼 변방의 미천한 사람으로 본디 국가에 조그만 공로도 없고, 또 동료들보다 뛰어난 것도 아닌데 단지 욕심이 많고 윗사람을 잘 섬김으로써 몇 년 사이에 관직이 곤수에 이르고, 웅번(雄藩)과 중진(重鎭)을 차례로 거치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권세있는 신하에게 은혜를 받음이 이와 같으니, 혹 그가 목숨을 바쳐 그 은혜에 보답할 마음을 품고 있을지 의심하는 것도 전 시대의 역사에서 경계할 만한 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일원(李一元)이 70살이나 먹은 무부로서 관직이 곤수에까지 이르렀으니 다시 무슨 바람이 있었겠습니까마는 끝내 심적(沈賊)과 역모를 함께 하기에 이르렀던 것은 또한 그가 발탁해준 은혜에 감격했기 때문입니다. 뭇사람들이 변사기의 본심을 알지 못해 이리저리 의심만 하면서 시끄럽게 서로 전파한 것도 혹 이와 같을 듯싶습니다.
더구나 지금은 천재와 시변이 끝이 없어서 이런 뜬소문이 더욱더 일어나 자자하게 그치지 않는데, 오직 전하께서만 듣지 못하고 계십니다. 도신이 된 자가 이런 말을 듣고서 처치하는 바가 있었던 것은 실로 나라를 위하고 변고에 대처하는 공정한 마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임금의 명을 무시하고 조정을 깔보는 것이라고 하니, 신은 그 말이 옳은지 모르겠습니다. 대신이 만약 사기의 마음이 다른 의도가 없는데 단지 떠도는 의논에 핍박되었음을 보장할 수 있다면 빨리 기보(畿輔)에 있는 심복의 권한을 파하고 변방을 맡도록 내보내 뜬소문이 가라앉기를 기다려도 불가하게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송 태조가 술자리에서 병권을 풀어버리고 구양수가 적청을 외직으로 내보내자고 의논한 뜻입니다. 어찌 발끈 성을 내면서 큰소리로 사납게 ‘우선 먼저 파출하라.’고 한단 말입니까. 이른바 ‘우선[姑]’ 이란 글자에는 또 죄를 더한다는 뜻이 들어 있으니, 또한 너무 심한 것이 아닙니까. 한 도의 방백이 되어 탐욕스럽고 야비하며 윗사람을 잘 섬기는 한 수령을 폄출한 것이 어찌 죄를 줄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그를 파척하고 그의 수족을 묶어놓고 있으니, 이는 신의 말이 아니라 곧 나랏사람들의 말입니다.
삼가 듣건대, 혼조(昏朝) 때에 임길후(任吉後)가 광주 목사(光州牧使)가 되었을 때 당시 방백이 하등의 고과에 두었다가 이어 꾸지람과 벌을 받고 길후는 잉임되자, 당시 사대부들이 모두 나라에 법이 없으니 망함을 기다릴 수 있겠다고 하였답니다. 오늘날의 일이 불행하게도 그때와 근사하여 신은 사사로운 근심과 지나친 생각이 없을 수 없습니다.
형체가 없고 자취도 없어 남들이 감히 말하지 못하는 바의 일로써 위로는 성상의 일월과 같은 밝음을 더럽혔고, 아래로는 대신의 노여움을 촉발하였으니 신의 죄가 참으로 큽니다. 그러나 지나친 생각이 반드시 깊은 계책을 이루지 못하리라는 것과 뜬소문이 반드시 실제의 일이 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어찌 알겠습니까. 뒷날 혹 만에 하나 불행한 일이 있더라도 성명께서는 노신이 오늘 말하지 않았다고 이르지 마십시오. 신이 대각에 있은 지 벌써 몇 달이 되었는데, 말을 하면 믿음을 받지 못하고 여러 차례 거절만 당했으니, 참으로 어려움을 알고 물러나야 마땅합니다. 하물며 오늘 대신의 상소에 답하신 비답을 보니, 등골에 땀이 흐르고 낯이 뜨거워 황공하여 조심조심 삼갈 겨를도 없었는데, 어찌 감히 머리를 들고 다시 시비를 논하겠습니까. 어리석게도 망령된 말을 한 죄는 참으로 마땅히 달게 받겠습니다. 청컨대 신의 직을 삭탈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집의 심로가 인피하기를,
"신이 어제 장관에게 말하기를 ‘변사기의 죄악이 참으로 계사와 같다면 어찌 단지 파직시키는 데서 그칠 뿐이겠는가. 계사의 조어에 온당하지 못한 점이 있는 듯하다.’ 하니, 마땅히 삭제해 고치겠다고 하여, 이로써 상의해 확정하였는데 정녕할 뿐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삼가 우상의 상소에 답하신 비답을 보건대, 두려움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한번의 논계로 인하여 엎치락뒤치락 이 지경에까지 이르러 마침내 성상으로 하여금 위에서 심려하시게 하고, 대신으로 하여금 아래에서 편치 못하게 하였으니 신이 어찌 그 책임을 모면할 수 있겠습니까. 청컨대 신을 파직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그대가 주장한 뜻이 공평하고 선함을 매우 가상하게 생각한다.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장령 임의백이 인피하기를,
"변사기는 본래 일개 용렬한 사람으로 취할 만한 재주도 없고 기록할 만한 공적도 없는데, 단지 권귀에게 아첨해 섬김으로써 곤수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이른바 의심할 만한 일이란 비록 그 진실은 알 수 없지만, 자신이 수령이 되었으면서 관직의 일을 폐기하였으니 방백이 된 자가 소문에 따라 벌을 시행하는 것이 조금도 불가함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찌 반드시 전에 없던 규례를 새로 열어 반드시 그의 직을 잉임시킨 뒤에 그만둔단 말입니까. 대각의 논계가 비록 혹 과격하더라도 또한 공정한 데서 나온 것일 뿐입니다. 황희(黃喜)는 국조의 이름있는 정승인데 대각의 평으로 노여움을 삼지 않았습니다. 신의 소견으로는, 대신도 또한 마땅히 공평한 마음으로 공경히 협력하여 함께 시대의 어려움을 구제하는 것으로 급무를 삼아야 옳다고 생각합니다. 신의 의견이 이와 같으니, 세속의 의논에 따라 이랬다저랬다 할 수는 없습니다. 더구나 온편치 못하다는 전교가 계셨으니, 어찌 감히 그대로 무릅쓰고 있겠습니까. 청컨대 신의 직을 파직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도 하라. 내가 성의를 미루어 만물을 다스림으로써 기필코 천심을 감화시키려고 하는데, 너는 무엇하는 자이길래 감히 나를 동요시키고 사람마다 불안하게 하는가. 너와 같이 취할 만한 것도 없는 자가 시론에 편승하여 뜻을 얻었으면서 어찌 그리도 유독 무부를 공격하는 데는 남은 힘을 아끼지 아니하는가. 대신도 또한 네가 천히 여기고 없신여길 바가 아닌데 또한 어찌 감히 그렇게 하는가. 내 매우 통탄스럽고 놀랍다. 어찌 대각에 이름을 빌리고 있다 하여 너그러이 용서하는 바가 있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홍무적과 심로가 모두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헌부가 아뢰기를,
"홍무적 등이 모두 인피하여 물러갔습니다. 방백이 수령에 대해 출척하고 전최하는 권한은 그의 손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김광욱(金光煜)이 변사기를 파직시키고자 아뢴 것은 참으로 불가함이 없는데, 광욱을 파직하고 사기를 잉임시키기에 이르렀습니다. 수백 년 전해 내려온 나라의 법을 무너뜨려 뒷날의 무궁한 폐단을 열어놓았으니, 대관이 오늘날 아뢰는 것은 일을 논하는 체모를 깊이 얻은 것입니다. 어찌 조어가 과격하다는 것으로 갑자기 엄한 전지를 더해 꺾어버릴 수 있겠습니까. 체모와 전례로 헤아려 보더라도 별로 체직할 만한 잘못이 없습니다. 이미 연명으로 논계하였는데 지금 와서 인피하여 말을 허비하면서 변론을 진달하니, 매우 대관의 체모에 흠이 있습니다. 임의백이 인피한 것에 대한 비답에 모욕적이고 업신여기심이 이런 극한에까지 이르렀으니, 실로 이는 같은 조정에 있는 사람으로서 함께 부끄럽고 송구스러운 바이고, 대각에서 감히 얼굴을 들지 못할 바입니다. 또한 어찌 성명의 허물있는 거조가 아니겠습니까. 홍무적은 출사하게 하고 심로는 체차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지금 이 처치는 몽롱함이 막심하다. 홍무적의 일에 대해서 전적으로 주된 뜻을 없애고 단지 김광욱의 일만 논해 출사를 청하였으니, 정직한 데 매우 흠이 있어 내가 심히 취하지 않는다. 시험삼아 그의 논계를 말해 보건대, 임금을 의롭지 않은 데로 이끌어 무궁한 난망(亂亡)의 화를 열어놓았다. 이것이 그 큰 잘못으로 다른 것은 말할 것도 못된다. 이미 헤아릴 수 없는 죄를 더해놓고는 단지 파직시키는 율로 의율한 것도 또한 매우 근거가 없다. 사기가 병으로 사직한 데는 반드시 떠도는 의논에 핍박되어 두려워한 소치일 것이다. 어찌 그리도 인정을 살피지 못하는가. 방백의 체면이 지극히 중대해 그의 수족을 묶을 수 없다면 대신은 어찌 그의 수족을 묶을 수 있겠는가. 만약 사사로운 근심과 지나친 생각이 있어 그 의견을 진달했다면 대신의 충성스런 적심(赤心)이 반드시 대관보다 못하지 않을 것이니, 공평한 마음으로 의논하는 것이 옳다. 그런데도 바로 혼조의 임길후(任吉後)의 일로 비의를 하니, 이 무슨 마음인가. 심역(沈逆)과 이일원(李一元) 등의 일은 더욱 이끌어 비유하는 데 타당하지 않은 것인데 억지로 비유하였으니, 이는 그가 늙고 혼미함이 심해서이다. 또한 대신이 사기를 비호했다고 하니, 대신이 국가를 잊고 사사로운 정을 돌아보았단 말인가. 만약 구양수가 적청을 외직으로 내보내자고 청한 것으로 거울을 삼을 만하다고 한다면 옛 성왕이 지성으로 사람들을 대했던 것은 본받을 수 없겠는가.
아, 나랏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상하가 공경히 협력하여 성의를 미루어 남을 대우함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각자 마음과 힘을 다하게 하더라도 오히려 천심을 기쁘게 하여 화평한 시대로 당겨 돌릴 수 없을까 염려스러운데, 바야흐로 의심하는 데 겨를이 없는가. 임금이 진실로 덕을 잃음이 있어 백성들이 사랑하고 추대하지 않는다면 비록 날마다 의심스러운 사람을 죽이더라도 무슨 보탬이 있겠는가. 옛날 제왕들이 의심을 하여 남을 해친 것을 내 일찍이 비루하게 여겼으니, 어찌 허물을 본받을 수 있겠는가. 무적의 의논을 내 심히 취하지 않으니, 체차하라. 심로는 그 마음이 공평하고 착하니, 출사하도록 하라."
하였다. 심로가 이미 체직된 뒤에 그대로 무릅쓰고 있을 수 없다고 다시 인피하자, 상이 다시 출사하라고 명하였다.

 

헌부가 연달아 아뢰어 수원 부사 변사기를 파직시키고, 김광욱을 파직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어 달라고 청하니, 답하였다.
"가령 김광욱이, 조정의 심원한 뜻을 체득하고 번신(藩臣)이 자기 멋대로 방자한 죄를 염두에 두어 조정에 청해서 처치하여 감히 자기 멋대로 하지 않는다는 뜻을 보여주었다면 사체를 얻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생각은 하지 않고 발끈 노여움을 품고서 무단히 하등의 고과를 썼으니, 번신의 도리가 어디에 있는가. 이로써 논한다면 곧바로 크게 불경했다는 것으로 논핵하더라도 불가하지 않을 것이다. 어찌 감히 대신이 파직을 청한 것을 허물한단 말인가. 또한 너희들이 이기기만을 좋아하는 것이 지극하다고 할 만하다. 외국 사신이 곧 서울에 도착할 것인데, 대신 한 사람을 곤욕스럽게 몰아붙이니 장차 국가를 어느 곳에 두려 하는가. 조정의 어긋남이 이와 같으니 나랏일을 어떻게 할 수가 없다. 나도 모르게 길이 탄식이 나온다."

 

대사간 김익희(金益熙)가 상소하기를,
"신이 삼가 보건대, 전하께서 요즈음 언자(言者)를 억압하고 박대하는 것이 너무 지나치십니다. 그들이 진달한 바는 대소를 막론하고 일체 파직하는 것으로 답을 하시고, 한마디 잘못하는 말이 있으면 바로 지적해 찾아내어 꾸짖으십니다. 대각이 쓸쓸히 기상을 잃어 사람들이 대각의 자리 보기를 마치 가시덤불을 피하듯이 합니다. 이것이 어찌 성스러운 세상의 큰 기상이겠습니까.
임의백이 인피한 말은 조잡하고 긴절치 못해 허다한 갈등을 불러일으키니, 참으로 일을 논하는 체모를 잃었습니다. 그러나 근래 대간으로서 남과 더불어 일을 함께 하다가 바로 나뉘어지고, 의논을 제기할 적에 따라 참여했다가 스스로 적료한 말로 책임이나 모면하기 위해 인피하는 자에 비하면 오히려 취할 만한 점이 있습니다. 전하께서 천위를 지나치게 진동하여 속박하시며 사대부로서 대우하지 않으시니, 어찌 단지 의백만이 몸둘 곳이 없겠습니까. 전하의 언관이 된 자치고, 누가 대각에서 얼굴을 똑바로 쳐드는 것으로 수오(羞惡)의 일을 삼지 않겠습니까.
무릇 남의 신하된 몸으로 세력에 붙어 의탁하는 바가 있다면 그 죄를 용서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권신이 이익과 세력을 쥐고 파는 짓을 한 뒤에야 그곳으로 달려가는 자를 붙어 의탁한다고 하는 것인데, 오늘날 조정에는 다행히 권신이 없습니다. 전하께서 친히 잡아당겨 다시 교화해서 두서너 대간에게 이목을 맡기고 계신데, 한마디 말이 성상의 마음에 들지 않으시면 바로 시론에 붙었다는 것으로 배척하십니다. 이른바 시론이란 것은 임금과 정승이 만드는 것이니, 전하께서는 누구를 나무라려고 하십니까.
성인은 말을 박절하게 하지 않는다는 것이 예전의 교훈입니다. 전하께서 한번 공평한 마음으로 성상의 비답 가운데 말을 생각해 보십시오. 과연 박절하여 대체를 손상시키지 않았습니까. 근밀한 신하가 친밀히 지척의 가까운 자리에서 모시면서 나아가 아뢰어 개오(開悟)시키지 못하면 오직 진실되게 한다는 도를 매우 잃은 것으로 참으로 애석해 할 만한 일입니다. 신이 감히 의백을 위해 좌우하는 바가 있지 아니하니, 실로 의백이 비록 소활하고 어리석으며 지리하게 부연한 잘못이 있지만 그의 마음이 나라를 위하는 데서 나와 절대로 다른 의도가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전하께서 말씀하시는 기색은 매우 사나움을 면치 못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국가에서 대관을 대우하는 체모가 하루아침에 땅을 쓴듯이 없어졌으니, 신은 실로 근심스럽습니다. 구차한 말을 여기까지 한 것은 성상께서 거울처럼 받아들여 다시 너그러운 답을 내리시길 바라서일 뿐입니다.
또한 신이 삼가 오늘날 이른바 나라를 걱정한다는 자들을 보건대 엎치락뒤치락 격동하는 폐단이 있으며, 이른바 진정시킨다는 자들을 보아도 또한 굽은 것을 바로잡다 곧음을 지나치는 병폐가 있습니다. 둘 다 공평하지 못한 마음으로 힘써 서로 반대하려고만 하니, 요컨대 모두 잘못입니다. 신의 어리석은 소견으로는, 비록 송나라 인종(仁宗) 때의 태평함으로도 간신(諫臣) 범진(范鎭)은 성변(星變)을 말하면서 병사를 급무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국란에 죽기보다는 차라리 간쟁하다가 죽는 것이 낫다고 하였는데, 하물며 오늘날에 있어서 그가 지나치게 생각한 것을 나무랄 수 있겠습니까. 다만 억측한 것이 너무 심하고 비의한 것이 맞지 않아 사람들로 하여금 불안하게 하였으니, 이 점은 옳지 못합니다. 옛 제왕은 적심(赤心)을 미루어 사람들의 뱃속에다가 두어 엎치락뒤치락하는 자들로 하여금 스스로 편안하게 하였으니, 어찌 떠도는 의논으로 바로 사람들을 불측하다고 의심할 수 있었겠습니까. 다만, 하는 일 없이 그 직을 차지하고만 있는 죄는 무부가 대오를 잃은 죄에 그칠 뿐만이 아니니 바로 개차해야 할 것인데, 굳이 연연해하면서 버리려고 하지 않았으니, 이것은 옳지 못합니다. 이 두 가지가 비록 과불급이 있지만 대개 국가를 위해 계책한 것입니다. 참으로 원컨대, 전하께서 진정시키는 것을 주로 하시더라도 또한 나라를 위한 의논을 굽히게 해서는 안 되니, 그들로 하여금 함께 조제하여 크게 공정한 데로 돌아가게 하소서. 신이 듣건대, 장수와 정승이 화합하면 선비들이 참여하여 따르고, 선비들이 참여하여 따르면 화란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하니, 어찌 오늘날 마땅히 본받아야 할 바가 아니겠습니까. 신은 은택을 받음이 깊고도 무거워 보답할 길이 없기에 감히 급함을 청하는 소장에 평소 마음속에 숨기고 있던 생각을 아울러 진달합니다. 이 의논이 한번 나가면 시끄럽게 헐뜯는 말이 또 운집하고, 우직하고 충성스러운 사람들이 격발하는 바가 스스로 그치지 않으리라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닙니다. 오직 성명께서 재량하시면 다행이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너는 사양하지 말고 직책을 살피도록 하라."
하였다.

 

우승지 이일상(李一相)이 상소하여, 홍무적의 논계에 비록 과격한 말이 있지만 실로 지성으로 나라를 근심하는 데서 나온 것으로 털끝만큼도 다른 뜻이 없는데 늙고 혼매한 소치라는 전교가 있기까지 하였으니 신은 삼가 온편치 못하다고 생각한다 하였는데, 상이 일상을 불러 보고 이르기를,
"승지의 상소는 논의가 매우 좋다. 그러므로 내가 면대해 유시하려고 하였다. 홍무적이 지난날 말한 바는 참으로 과격한 잘못이 있었다. 그래서 내가 비답한 말 또한 맞지 않는 곳이 있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어찌 이로 인해 이 사람을 버릴 수 있겠는가."
하니, 일상이 아뢰기를,
"신의 상소의 뜻은 단지 무적의 본심을 말한 것일 따름입니다."
하였다.

 

좌의정 이시백이 출사하였다. 상이 시백을 인견하자, 아뢰기를,
"신은 참으로 출사할 수가 없는데 외국 사신이 장차 이를 것이기에 부득불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나왔습니다. 지금 나랏일을 어떻게 할 수가 없으니, 오직 성상께서 일찍이 시비를 정하시길 바랄 뿐입니다. 지난날 영상이 탑전에서 아뢰어 사기를 잉임시키도록 청했던 것은, 대체로 진정시키기 위한 계책이었습니다. 그런데 김광욱이 번신으로서 어찌 감히 하등의 고과를 갑자기 쓸 수 있겠습니까. 신이 그러므로 법에 따라 파직시킬 것을 아뢰었던 것입니다. 그 뒤에 신을 논하는 자들이 심지어 사기가 반역을 모의했다고 하고 신이 그들 비호했다고까지 하였습니다. 신이 어찌 역적을 비호하는 사람이겠습니까. 지난 갑자년123)   역적 이괄(李适)의 변란 때, 선왕께서 신에게 명하여 가서 토벌하게 하시고, 신에게 하교하시기를 ‘역적 이괄이 오랫동안 신하노릇 하지 않겠다는 뜻을 쌓아 두었다가 감히 임금을 거역하는 계책을 폈다. 그러나 그의 부하 장졸 중에는 또한 반드시 왕실을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경이 보루를 마주 대할 때 반드시 그 기색을 살펴 귀순할 뜻이 없음을 확인한 뒤에 비로소 합전하여, 죄없는 사람들로 하여금 무기에 피를 바르게 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하였습니다. 선왕의 이런 전교는 적을 천리나 물러나게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이 때문에 끝내 뭇 흉악한 자들을 섬멸할 수 있었습니다. 지난날 성상의 전교에 이른바 날마다 의심스러운 자를 죽이더라도 끝내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라고 하신 것은 참으로 국가의 무궁한 복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이 어찌 누누이 논변할 필요가 있겠는가. 홍무적은 형체가 없는 의심으로 심역(沈逆)의 일을 거론하기까지 하면서 환히 선견지명이 있는 자인 체하였으니, 이 점이 가소롭다. 여러 신하들이 만약 이런 습관을 고치지 않는다면 마땅히 양관(兩觀)의 주벌을 시행할 것이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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