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효종실록6권, 효종 2년 1651년 1월

싸라리리 2025. 12. 20. 1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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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일 기묘

상이 영사전(永思殿)에서 삭제(朔祭)를 거행하였다.

 

이경여(李敬輿)를 영중추부사로, 조익(趙翼)을 판중추부사로 삼았다.

 

상이 하교하였다.
"내가 즉위한 이후로 천재 지변과 물괴(物怪)·인요(人妖)를 비롯하여 강상 윤기의 변까지 다달이 발생하여 무사히 넘어가는 때가 없으니, 깊은 못과 골짜기에 떨어질 것 같은 두려움에 가슴이 떨린다. 그런데 이번에 또 금성이 하늘을 가로질러 가며 태양과 빛을 다투었으니, 이는 곧 인애로운 하늘이 혼매한 군주를 잊지 않고 이와 같이 친절하게 경계를 내리는 것이다. 그런데 과인이 부덕하여 몸을 닦고 잘못을 반성하는 도리와 나라를 꾸려나가는 계책을 몰라 조정이 바르지 못한데도 바루지 못하고 백성이 고통으로 허덕이는데도 구제하지 못하니, 백성의 부모라고 할 만한 점이 어디에 있으며 사방을 바르게 하는 책임이 또한 어디에 있는가. 조용히 생각하면 그 허물은 실로 나에게 있으니, 하늘이 노여워하고 백성이 원망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전전긍긍하는 마음이 더욱 간절하다보니 감히 하늘과 사람을 탓하지는 못하나 그렇다고 어찌 혼매한 것으로 치부하여 자포자기해서야 되겠는가.
승지는 나를 대신해서 교서를 초하여, 바른말로 나의 잘못을 구제하고 백성의 고통을 해소함으로써 재변을 그치게 할 방도를 널리 구해서 봉함하여 올리라. 설령 말에 잘못이 있더라도 치죄하지 않겠다."

 

1월 4일 임오

영중추부사 이경여가 물러가면서 상소하여 총재관(摠裁官)과 제조(提調) 등의 직임을 사직함과 동시에 권면하고 경계하는 뜻을 개진하였다. 그 소에 이르기를,
"학문을 강구하여 이치를 밝히고 엄숙한 자세로 본심을 보존하며, 어진이를 가까이하고 간사한 자를 멀리하며, 허물을 고치고 선을 따르며, 언로를 크게 열고 검소한 덕을 힘써 밝히며, 은덕을 앞세우고 형벌을 뒤로 하며, 의리를 귀히 여기고 재리를 천히 여기며, 좋아하고 미워함에 있어 어느 한쪽에 치우친 사심을 끊고 기뻐하고 노하는 것은 천리(天理)의 공정함을 따르며, 구족(九族)001)  을 친근히 하고 질서가 잡히게 하여 교화를 그 가운데에 행하고 뭇 신하들을 예우하여 작은 허물을 따지지 않는 등의 몇 가지를 힘써 강론하고 실행하여 태만히 하거나 소홀히 하지 말고 항상 잊지 아니함으로써 표리가 통일되어 언제까지나 쉬지 않고 상제(上帝)를 경건히 대하며 어린 백성을 품어 보전하도록 하십시오. 그렇게 한다면 하늘의 노여움을 돌려 민심을 얻고 나라의 근본을 세워 수많은 어려움을 타개할 것이니, 아무리 오늘날과 같은 위태로움이라 하더라도 어찌 태평으로 되돌릴 가망이 없겠습니까.
만약 그렇지 아니하여 하찮은 공리(功利)에 마음이 빠지고 순조롭지 않은 환경에 뜻이 매여 오로지 거부하고 꺼려하며 수없이 억측하고 의심하면서 자신의 총명을 과시하려는 생각으로 남이 잘 모르는 것을 꼬집어 내어 아랫사람을 제어하고 혼란을 그치게 하는 방도로 삼는다면, 마음이 수고롭고 날로 졸렬해져 공이 이루어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진실과 거짓이 뒤섞이고 온갖 병폐가 수없이 발생하며 임금의 마음이 제자리를 이탈함에 따라 부정한 길이 열려 간사한 자들이 그 틈을 엿보게 됩니다. 그리하여 뱃속에 가득한 의혹과 끊임없이 들어오는 참소가 마침내 국가를 어지럽히고 망하게 하고 말 것입니다. 경계해야 할 선례가 먼 곳에 있지 않으니 광해(光海)의 복철(覆轍)이 바로 그것이며002)  , 단주(丹朱)의 오만함은 또 어찌 순임금의 경계가 되지 않았겠습니까003)  . 성심으로 상대하여 간언을 받아들이고 좋아하고 미워하는 것을 백성들과 함께 해야 한다는 것은 당나라 재상 육지(陸贄)의 주의(奏議) 속에 자세히 나와 있는데, 전하께서 이미 열람하셨을 줄 압니다. 이 주의는 논의가 충분하고 뜻이 완비되었으므로 이를 취하여 익숙하게 완미하신다면 반드시 마음에 깨달아 정사를 베푸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니, 이 사람을 얻어 좌우에다 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하였는데, 답하기를,
"경의 소장(疏章)을 살펴보니 나도 모르게 목이 메이고 눈물이 흐른다. 서추(西樞)004)  의 벼슬이야 어찌 별다른 걱정이 있겠는가. 경은 사피하지 말라. 제조와 총재 등의 직은 묘당으로 하여금 의논하여 조처하게 하겠다. 소장 가운데 권하고 경계한 말은 모두가 지극한 정성에서 나온 것이니 내 어찌 차마 경의 말을 저버리겠는가. 항상 이 소장을 유심히 열람하여 경이 나의 좌우에 있는 것처럼 하겠다. 그리고 내가 상면하여 작별하고 싶으니, 경은 한번 들어오기 바란다. 붓을 들고 종이를 대하니 다시금 서글픈 마음이 들어 더욱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하고, 이어 하교하기를,
"이 소장을 한 통 써서 들이도록 하라."
하였다.

 

1월 5일 계미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1월 7일 을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오준(吳竣)을 대사헌으로, 강여재(姜與載)·유도삼(柳道三)을 장령으로, 이후(李垕)를 정언으로, 장차주(張次周)를 수찬으로 삼았다.

 

왕대비(王大妃)가 건강을 회복한 것으로 인하여 중외에 교서(敎書)를 반포할 것을 명하였는데, 그 교서는 다음과 같다.
"왕은 아래와 같이 말하노라. 자전의 체후가 화기(和氣)를 잃으시어 병이 깊어지실까 크게 걱정했는데, 하늘이 굽어 도와서 마침내 완쾌되는 기쁨을 보게 되었다. 이는 종사의 큰 복에 관계되므로 신민과 함께 경하드린다.
생각건대, 부덕한 내가 부황의 상을 당한 이후 이 몸에 안겨진 크나큰 왕업을 감당하지 못한 채 덧없이 흐르는 세월 속에 생전의 모습을 그리워해도 미쳐갈 수가 없고 시세는 매우 험난하여 선왕들께서 이루어 놓은 업적을 무너뜨릴까 두려웠다.
그래도 다행하게 여긴 것은 장락(長樂)005)  의 모습을 뵙고 삼조(三朝)의 유완(愉婉)006)  을 행하는 일이며, 믿는 것은 원량(元良)007)  이 장차 왕위를 계승하여 한 나라의 태평을 이룰 것이라는 점이었는데, 어찌 질병이 열흘 안에 겹겹으로 발생할지 생각이나 했겠는가. 침문(寢門)008)  에 문안하자니 어느 겨를에 신발을 바르게 신고 다니겠으며, 총사(冢嗣)009)  에게 정이 쏠리니 자연 밤새도록 잠을 자지 못하였다.
위아래 사람들의 애타는 마음이 간절하다가 곧 약석(藥石)의 효험을 보았다. 조종(祖宗)들께서 돌보셨기에 삼단(三壇)010)  의 기도를 기다릴 것이 없었고 신명이 보호하시는데 어찌 이수(二竪)011)  의 침범을 용납하랴. 기거가 평안하시니 장차 강릉(岡陵)의 수명012)  을 누리실 것이고 본손과 지손이 빼어나고 성하니 거의 성해(星海)의 노래013)  를 징험할 것이다. 이러한 경사는 실로 전고에 없는 일이니 그 예를 어찌 평범하게 할 것인가. 이미 삼가 태묘(太廟)에 고하고 이에 사방에다 널리 선포하노라.
아, 길흉은 사람에게 달렸으니 마땅히 더욱 덕과 선을 힘써야 하고 근심과 즐거움은 대중과 함께 하는 법이라서 형통한 시운을 함께 누리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와 같이 교시(敎示)하니 잘 알 줄로 안다."  【대제학 조석윤(趙錫胤)이 지은 것이다. ○앞서 왕세자가 병이 들었다가 이때에 회복되었으므로 교문이 이와 같았다.】

【태백산사고본】 6책 6권 1장 B면【국편영인본】 35책 466면
【분류】왕실-비빈(妃嬪) / 어문학-문학(文學)


[註 005] 장락(長樂) : 한(漢)나라 때 태후가 살던 궁으로 왕대비를 말함.[註 006] 삼조(三朝)의 유완(愉婉) : 《예기(禮記)》 문왕세자(文王世子)에 "문왕이 세자로 있을 때 아버지인 왕계(王季)에게 조알하기를 하루에 세 번씩 하였다." 하였고, 《예기(禮記)》 제의(祭儀)에 "효자로서 깊은 사랑이 있는 자는 반드시 화기가 있고…… 부드러운 얼굴빛이 있다." 하였는데, 이는 곧 자식이 하루 세 때 밝고 부드러운 얼굴로 부모를 찾아 뵙는 것을 말한다.[註 007] 원량(元良) : 왕세자.[註 008] 침문(寢門) : 내실(內室)의 문.[註 009] 총사(冢嗣) : 맏아들로 곧 왕세자.[註 010] 삼단(三壇) : 세 왕의 신단(神壇)으로, 주 무왕(周武王)이 상나라를 정벌한 후 2년 만에 병이 들자 그의 아우 주공(周公)이 태왕(太王)·왕계(王季)·문왕(文王)의 세 신단을 쌓고 무왕 대신 자기를 데려가 달라고 하며 무왕의 회복을 간절히 축원하였던 곳이다. 《서경(書經)》 금등(金縢).[註 011] 이수(二竪) : 고황(膏肓)으로서 고칠 수 없는 중한 병. 《춘추좌전(春秋左傳)》 성공(成公) 10년에 "병을 치료할 수 없습니다. 격막의 위[肓]에 있고 심장의 아래[膏]에 들어 있어 폄석(砭石)을 쓸 수도 없고 침도 닿지 않고 약물도 이르지 못하니, 치료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註 012] 강릉(岡陵)의 수명 : 강릉은 산등성이와 언덕으로 장수하는 것을 말함. 《시경(詩經)》 소아 천보(小雅天保)에 신하들이 군주를 축복하는 뜻으로 "높은 산과 큰 언덕처럼 산등성이와 구릉처럼 흥성하리." 하였다.[註 013] 성해(星海)의 노래 : 태자의 높은 덕을 칭송하여 부른 노래로 성(星)은 《한서(漢書)》 오행지(五行志)에 "심성(心星)의 큰 별은 천왕(天王)이며 앞 별은 태자(太子)이고 뒷 별은 서자(庶子)이다." 하였고, 해(海)는 《해록쇄사(海錄碎事)》에 "천자는 대해에 비하고 태자는 소해에 비한다." 하였다.

ⓒ 한국고전번역원

 

내의원 제조(內醫院提調) 한흥일(韓興一)과 부제조 윤순지(尹順之)를 모두 가자(加資)하였는데, 시약청(侍藥廳)에 내린 상전(賞典)이었다.

 

1월 8일 병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상이 주강에 나아가 《서전》 우공(禹貢)을 강독하였다. 강이 끝난 뒤에 동지경연사 조석윤(趙錫胤)이 나아가 아뢰기를,
"천재와 시변이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습니다. 재변은 이유가 없이 생기는 것이 아닌데 장차 무슨 일이 있으려고 이러한 재변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전하께서 전후에 걸쳐 구언(求言)하신 것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마는 다만 성실함이 모자라 겉치레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구언하신다는 분부를 이제 또 내리셨지만 반드시 그 말을 채용하여야 하니, 그런 뒤에야 비로소 구언하는 보람이 있게 될 것입니다. 요즈음 성명께서는 기뻐하고 노여워하며 형벌을 가하고 상을 내리는 사이에 상당히 중도에 맞지 않는 일이 있으셨습니다. 임금이 언동과 정사가 의리에 부합하고 인심에 흡족하며 한 마음으로 조심하고 닦아 시종 태만히 하는 일이 없다면 천심을 돌릴 수 있고 재변을 중지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경연을 여는 때에도 아랫사람들의 의견을 은대(銀臺)와 옥당의 관원에서 물어 그들로 하여금 각기 소견을 진술하게 하고 마음을 비워 귀담아 들어보아 그 말이 쓸 만할 경우 즉시 시행하신다면 어찌 구언하는 실상이 되지 않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참으로 맞다. 나는 오직 마땅히 하여야 할 것을 다해야겠지만 천심에 부합되지 못할까 염려스럽다."
하였다. 석윤이 아뢰기를,
"임금은 말씀할 때의 억양을 삼가지 않으면 안 되고 대관(臺官)을 대우하는 도는 더욱 너그럽게 포용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번에 임의백(任義伯)이 사피한 것에 대한 비답은 그를 노예처럼 간주하였으며, 또 홍무적(洪茂績)에게 전혀 인사(人事)를 모른다고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아랫사람들이 기대하는 것이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이 말은 나에게 허물이 없게 하려고 한 것이니, 나는 참으로 즐거운 마음으로 듣겠다."
하였다. 석윤이 아뢰기를,
"전하께서 대신을 대우하는 도리도 약간 박해졌습니다. 저번에 판부사 조익(趙翼)이 진소하여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할 때 비답하신 교지의 말씀이 적절하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선조(先朝)의 대신을 예우하는 도리이겠습니까. 마땅히 곧 간절히 불러 조정으로 돌아오게 하여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게 하겠다. 영중추부사 이경여(李敬輿)의 재학과 지모는 오늘날 제일가는 사람이므로 내가 그에게 의지하여 나라를 함께 꾸려가려고 하였는데, 이제 갑자기 벼슬을 떠나니, 옛사람이 이른바 ‘좌우의 손을 잃어버린 것 같다.’는 말은 진정 오늘을 두고 한 말일 것이다. 국사의 불행을 어찌 형언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1월 9일 정해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상이 주강에 나아가 《서전》의 우공을 강독하였다.

 

판중추부사 조익(趙翼)이 상소하여 또다시 치사하겠다는 뜻을 피력하니, 답하였다.
"경의 상소를 살펴보건대, 모두 나의 정성과 예우가 부족한 소치가 아닌 것이 없으니 참으로 부끄럽다. 경은 선조(先朝)의 은총을 생각해서라도 부디 사직하지 말고 선뜻 마음을 바꾸어 올라와 간절한 기대에 부응하라."

 

장령 강여재(姜與載)가 상소하기를,
"신이 삼가 구언(求言)하시는 수교(受敎)를 보건대 간절하고 지성스러운 말씀으로 시폐를 바로잡고 구제할 계획을 들으려고 하시니, 이는 참으로 충신 의사가 하고 싶은 말을 다할 때입니다.
신이 삼가 보건대, 성명께서는 타고나신 자품이 아름답지 않은 것도 아니고 학문이 독실하지 않은 것도 아니며, 백성을 사랑하지 않은 것도 아니고 정사를 부지런히 하지 않은 것도 아니며, 간쟁하는 말을 칭찬하지 않은 것도 아니고 산야의 어진이를 대우해 주지 않은 것도 아니었습니다마는, 즉위하신 이후 지금까지 몇 년 동안 만기(萬機)를 응대하시는 것이 천심에 부합하지 못하고 명령을 내리심에 하자와 허물이 있어 공사(公私)와 시비의 사이에 갈피를 잡지 못해 의리로써 이를 처결하신다는 말이 들리지 않으므로 백성의 기대를 충분히 위로하지 못하였습니다. 이 어찌 전하께서 대업을 이룩하실 때를 당하여 이렇게까지 무사안일할 수 있단 말입니까. 현재 일어나는 천재 시변과 물괴와 인요(人妖) 등의 놀라운 일들은 다 전하께서 이미 알고 계시는 것이므로 신은 자세히 말씀드릴 것이 없고 근본을 돌아보는 것에 대한 내용으로 전하를 위하여 진술할까 합니다.
대체로 군주가 간언을 듣는 도는 단지 그 말을 칭찬하고 가상하게 여길 뿐이 아니라 그 실제를 살펴보고 그 중요한 것을 채용하는 데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즐겁게 듣기만 하고 참뜻을 찾지 않으며 따르기만 하고 잘못을 고치지 않는다면, 날마다 앞에서 충직한 말을 개진하더라도 나라를 다스리는 데에는 보탬이 없어 세도는 날로 낮아지고 인재의 수준은 날로 격하될 것입니다. 작록만 유지하고 구차스레 지내는 자들이 너나없이 같은 모양이니, 전하께서 신하들을 경시하는 것은 사실 신하들 스스로가 취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농사꾼의 말이라도 반드시 채용하라는 옛사람의 말도 있고 보면, 중외에서 올린 상소 중에 어찌 하나라도 옳은 말이 없겠습니까. 신이 항상 길거리에서 들은 말로 서로 이야기해 보면, 모두들 ‘주상께서 분부를 내려 구언하시는 것은 한갓 형식에 지나지 않아 비록 칭찬이야 하지만 조금도 채납하는 실상이 없다.’고 하며, 심지어 ‘선한 이를 선하게 보지만 그를 쓰지 못하고 악한 이를 미워하지만 그를 버리지 못한다.’는 말로 비유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이것이 비록 항간의 망령된 말에서 나온 것이긴 하나 전하께서 스스로 반성하실 일이 어찌 여기에 있지 않겠습니까.
전하께서 부지런히 경연에 나아가 날마다 신료들을 대하시니 학문을 강마하시는 공이 진지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들은 바에 의하면 책을 펴고 토론할 때 주석에만 의존할 뿐, 본연의 마음을 보존하여 정치를 하고 정밀히 살피고 전일하게 지켜 중도를 잡는 왕도 정치의 뜻에 대해서, 아래에서는 임금의 마음을 열어 깨우쳐 주는 일이 없고 위에서는 체득하여 인식하는 실효가 없다고 하니, 이는 예악(禮樂)을 옥백(玉帛)과 종고(鍾鼓)의 말단에서 찾는 것과 같습니다. 다스리는 공을 놓고 헤아려 볼 때 어찌 거리가 멀지 않겠습니까. 신이 또 듣건대, 아름다운 꾀와 계책이 임금에게 잘 받아들여지고 순조롭게 시행되면 백성이 천리 밖에서도 그에 순응하고, 그렇지 못하면 천리 밖에서도 뜻을 어긴다고 하였습니다. 전하께서는 최근에 경연에서 나온 말을 누설한 죄로 사관을 잡아 가두고 형신하라는 명까지 내리셨는데, 전하의 이일은 과연 법을 공정하게 쓰신 것입니까? 한 때에 크게 노하면 일이 지난 뒤에 후회를 면치 못하는 법이니, 일이 지나가기 전에 먼저 뉘우치는 것이 더 낫지 않겠습니까. 왕자(王子)014)  를 논핵한 계사가 과격하긴 하였으나 전하께서는 일찍이 대신(臺臣)이 인피하는 것에 대한 비답에서 자신을 반성하여 자책하신다는 뜻으로 어감이 정중하였으니, 대신의 입장에서는 또한 어찌 마음이 편안하였겠습니까. 그런데 뒤이어 다른 일을 끌어대어 엄한 분부를 내리셔서 반드시 사기를 꺾어버리겠다는 뜻을 보였으니, 이는 결코 일이 발생하면 그에 순응하는 대성인의 도리가 아닙니다. 이로써 보면 전하의 사심에 따라 한쪽으로 치우친 고집이 어떤 경우이건 일에 해롭지 않음이 없습니다.
전하께서 즉위하신 초기에는 초야의 선비를 예우하여 여러 번 너그러운 분부를 내리셨습니다. 맹자가 ‘선을 좋아한다면 천하를 다스림에 여유만만하다.’ 하였습니다. 대체로 선을 좋아하는 마음으로 온 나라에서 구하면 어찌 외(隗)보다 어진 자가 천리 먼 곳에서 찾아오는 일이 없겠습니까015)  . 그런데 당초의 그 마음을 이어가지 못해 성의가 차츰 박해졌고 오늘에 와서는 그 마음이 너무도 시들해졌습니다. 훌륭한 인재가 있더라도 어려울 판인데 명리(名利)만을 분주히 쫓아다니며 전하의 지시대로만 움직이는 자들이 어찌 임금의 잘못을 고치고 국사를 올바르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대신(大臣)을 존경하는 것은 《중용(中庸)》의 구경(九經)016)   가운데 하나로서, 옛날의 제왕들은 비록 물러가 여생을 편히 보내는 것을 허락하더라도 후한 예로 대하였으며 겉치레로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저번에 영부사 조익(趙翼)이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청한 상소에 대하여 ‘아침에는 오(吳)나라를, 저녁에는 초(楚)나라를 섬겼으나 이따금 오히려 생각이 난다.’는 등의 말로 비답하시어 밖으로는 만류하는 뜻을 보이고 속으로는 비난하는 뜻을 내포하였으니, 전하께서 평소에 이른바 지성으로 대하신다는 뜻이 어디에 있습니까. 보통 사람을 대할 때에도 이와 같이 해서는 안 되는 것인데 더구나 대신을 대하는 경우이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신이 한탄하는 바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참으로 좋은 말이다. 나의 병에 잘 맞고 또 시사의 병에도 잘 맞으니, 내 마땅히 유념하여 잊지 않겠다. 경은 사직하지 말고 직무를 살피도록 하라."
하였다.

 

1월 10일 무자

상이 영중추부사 이경여(李敬輿)를 인견하였다. 【경여가 한강 밖으로 나가려면서 대궐에 들어와 하직하므로 인견할 것을 명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걱정과 기쁨이 다른 사람으로부터 나오고 주고 빼앗는 것이 저들의 손에 달려 있는데, 경이 이제 조정을 떠나가니017)   국사를 누가 꾸려갈 것인가."
하고, 이어 탄식하며 오열하니, 경여도 또한 눈물을 흘리며 대답하기를,
"신은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오직 성명만을 믿어 왔는데 이제 하직하고 멀리 떠나게 되었으니, 무슨 말을 진달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홍무적(洪茂績)이 논한 것은 참으로 하나의 실수입니다. 어찌 조금이라도 다른 뜻이 있었겠습니까. 임의백(任義伯)이 사피한 말은 비록 극히 거칠고 잡스럽지만 전하께서 너무 심하게 꺾어 버리셨습니다."
한 뒤에, 또 이명익(李溟翼)을 형신해서는 안 된다는 뜻을 진달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이 사퇴하는 마당에 진달한 것이 이와 같으니 내 어찌 마음을 바꾸지 않겠는가. 경의 상소 가운데 이른바 은덕을 앞세우고 형벌을 뒤로 하라는 말은 내가 이미 유념하고 있다."
하고, 이어 승지에게 이르기를,
"이명익은 해부(該府)로 하여금 형추(刑推)를 면제하는 일을 의논하여 조처하게 하라."
하였다.

 

상이 주강에 나아가 《서전》 우공을 강독하였다.

 

1월 11일 기축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김육(金堉)을 영의정으로, 이시백(李時白)을 좌의정으로, 한흥일(韓興一)을 우의정으로, 임담(林墰)을 이조 판서로, 이기조(李基祚)를 우빈객(右賓客)으로, 조석윤(趙錫胤)을 우부빈객(右副賓客)으로 삼았다.

 

상이 제사(諸司)의 윤대관(輪對官)을 불러 접견하였다.

 

수원 부사(水原府使) 윤창구(尹昌耉)가 사조(辭朝)하니, 면유(面諭)하여 내보냈다.

 

상이 옥당의 강관(講官)을 야대(夜對)하여 《심경(心經)》을 강독하였다. 강독이 끝난 뒤에 시독관(侍讀官) 김좌명(金佐明)이 나아가 아뢰기를,
"요즈음 조정의 논의가 극도로 분열되고 있는데 이 또한 하나의 변고입니다. 김자점(金自點)의 위인은 본디 조금도 볼 만한 것은 없는데 다만 훈구(勳舊) 대신으로 여러 해 동안 정권을 잡았기 때문에 비록 권력을 탐하고 위세를 좋아하는 자가 아니더라도 또한 그에게 붙어 의탁한 무리가 있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식견이 있는 사람은 그가 정권을 잡은 때에도 모두 그를 비열하게 여겼습니다. 더구나 이제는 이미 찬출되었는데 어느 누가 자점을 위하여 다시 연연한 마음이 있겠습니까. 요즈음 재변이 거듭 발생하고 시사가 어려운 것으로 인하여 제 스스로 나라를 걱정한다고 하는 자들은 모두 김자점에게 의심을 두고 있으나 그 마음이 반드시 공심에서 나왔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이른바 원당(原黨)이니 낙당(洛黨)이니 하는 것에 대해 사실 천청(天聽)에 진달하는 것은 옳지 않으나 소장(疏章) 사이에서 매우 많이 나왔으므로 감히 진달드릴까 합니다. 지금 사람들은 변사기(邊士紀)를 자점의 심복으로 여겨 사기가 장차 모반할 것이라고 하면서 그의 형적을 가지고 의심하고 있는데, 이는 자점을 의심하는 것입니다. 당초에 산림에 있는 사람들이 자점을 축출하고 당인(黨人)을 죄줘야 한다고 한 논의에 대하여 세상 사람들이 이를 격양(激揚)018)  이라 하였고 신도 또한 그 일을 훌륭하게 여겼는데 일단의 사람들이 기어코 일망타진한 뒤에야 그만두려고 하니, 이로써 보면 격양의 논의가 반드시 온전한 공심에서 나온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어찌 대계(臺啓)로써 고변(告變)한 때가 있었습니까. 저번에 대계에 대한 비답 속에 대간의 이름을 빌렸다고 하신 분부는 비록 온당치 못한 것 같기는 하나 이 또한 그들이 다 자초한 것입니다. 그 뒤에 처치하신 비답은 성상의 분부가 극히 명백하여 바깥 사람들이 흠앙하지 않은 자가 없습니다."
하고, 검토관(檢討官) 이천기(李天基)도 또한 당론(黨論)이 걱정스럽다고 아뢰니, 상이 이르기를,
"그대들은 참으로 경연의 근신이다. 근일에 한 사람도 당론의 폐해를 염려하는 자가 없어 나로 하여금 위에서 고립되게 하였는데, 이제 그대들이 이것을 언급하니, 생각이 깊다고 하겠다. 이는 모두 내가 표준을 세워서 인도하지 못한 소치이니 한스럽기 그지없다. 조정이 날이 갈수록 사분오열되어 수년 전보다도 훨씬 못하지만, 대신과 뭇 관원들이 함께 경외(敬畏)하는 마음을 가지고 각자 심력을 다한다면 무슨 걱정이 있겠는가."
하였다. 좌명이 아뢰기를,
"당초에 낙당(洛黨)을 공격한 것은 정당한 논의인 듯하였으나 낙당으로 지목된 사람들을 이제 조금씩 거두어 쓰기 때문에 다른 한쪽 사람들이 모두 ‘저쪽이 쓰여지면 우리들은 용납되지 못할 것이다.’고 생각하여 각기 창칼을 들고 기어코 일망타진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사람들이 다 스스로는 나라를 걱정한다고 말하지만 그 걱정이 각기 다르니 참으로 나라를 걱정하는 자가 아닌 듯하다. 만약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당론을 하지 않게만 할 수 있다면 어찌 다행스런 일이 아니겠는가."
하자, 천기가 아뢰기를,
"반드시 조정이 화합을 이룬 다음에야 외국의 침범을 막을 수 있는데, 지금은 한 방안에서 치고 박고 싸우니 어떻게 국외의 일을 논하겠습니까."
하고, 좌명은 아뢰기를,
"이일상(李一相)이 상소하여 홍무적(洪茂績)을 신변(伸辨)하였는데, 무적은 전부터 바르게 말하고 과감히 간하는 기풍이 있어 남들이 말하기 어려워하는 것을 말하였으므로 실로 취할 만한 점이 많았으나 이번의 일은 참으로 극히 아름답지 못했습니다. 어제 일상을 인견하셨을 때의 성교(聖敎)는 저번에 처치하신 비답과 다른 점이 많았는데, 전하께서 만약 잘잘못을 분명히 가리지 않고 그럭저럭 넘어가 혹시 간신의 참소가 끼어들어 가는 일이 생긴다면, 신은 아무 관련이 없는 사람도 억울하게 당하는 화가 있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하였다. 좌명이 자꾸 진달한 것은 모두가 신면(申冕)을 위해서였다.  【좌명의 아내는 곧 신면의 누이이다.】

【태백산사고본】 6책 6권 3장 B면【국편영인본】 35책 467면
【분류】왕실-경연(經筵) / 정론-간쟁(諫諍)


[註 018] 격양(激揚) : 악을 배격하고 선을 권장함.

ⓒ 한국고전번역원

 

1월 13일 신묘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1월 14일 임진

영의정 김육이 양주(楊州)에 있으면서 조정에 나오지 않자, 상이 사관을 보내 특별히 유시하였다. 김육이 상소하여 면직을 청하니, 답하였다.
"오늘날의 나라 형편은 위태롭기 그지없어 존망의 관계가 머리털 하나도 끼어들 수 없을 정도로 긴급하니, 유능한 보필자가 없으면 어떻게 헤쳐나가겠는가. 경은 선조(先朝)의 노신으로 덕과 인망이 다 뛰어난데 나라가 장차 망해가는 것을 보고 무심히 산속에 들어앉아 나몰라라 한다면 이 어찌 분의(分義)로 보아 편안할 일인가. 부디 빨리 올라와 간절한 소망에 부응하라."

 

우의정 한흥일(韓興一)이 상소하여 면직을 청하니, 너그러이 비답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1월 15일 계사

이조 참판 이후원(李厚源)을 원접사(遠接使)로 삼았다. 이때 청사가 나온다는 소식이 있어 원접사를 차출해야 할 형편이었으나 정경(正卿) 이상에서는 합당한 사람이 없었다. 이에 해조가 이 문제를 가지고 계품하니, 후원의 품계를 올려 차견할 것을 특별히 명하였다.

 

1월 16일 갑오

구인기(具仁墍)를 전남 병사(全南兵使)로 삼고 전 정(正) 엄정구(嚴鼎耉)를 통정의 품계로 올렸는데, 숙안 공주(淑安公主)019)  의 길례 도청(吉禮都廳)에 대한 상전(賞典)이었다.

 

1월 17일 을미

전남 감사(全南監司) 심택(沈澤)이 사조하니, 면유하여 보냈다.

 

영의정 김육이 재차 상소하여 면직을 청하니, 특별히 승지를 보내 유시하였다.

 

영중추부사 이경여가 한강 밖에 물러가 있으면서 상차하여 총재관 등의 직임을 사직하니, 답하였다.
"경의 차자 사연을 살펴보고 경이 강가에 나간 것을 알았으니 내 마음이 더욱 서글프다. 본래 총재의 직임을 체직하지 않고 경으로 하여금 편사(編史)의 일을 완료하게 하려고 했었는데, 이제 경의 간청이 이에 이르고 형세에 구애를 받아 나도 또한 어찌할 도리가 없으니, 경을 위하여 부득이 따라 주겠다. 그러나 무고(武庫)의 제조(提調)만은 본디 한국(閑局)이니 부디 고사하지 말라. 봄날이 아직 추워 강가의 풍설이 노인에게 이롭지 않을 듯하니, 조섭에 유의하여 나의 지극한 마음에 부응하라."

 

영중추부사 이경여가 한강 밖에 물러가 있으면서 상차하여 총재관 등의 직임을 사직하니, 답하였다.
"경의 차자 사연을 살펴보고 경이 강가에 나간 것을 알았으니 내 마음이 더욱 서글프다. 본래 총재의 직임을 체직하지 않고 경으로 하여금 편사(編史)의 일을 완료하게 하려고 했었는데, 이제 경의 간청이 이에 이르고 형세에 구애를 받아 나도 또한 어찌할 도리가 없으니, 경을 위하여 부득이 따라 주겠다. 그러나 무고(武庫)의 제조(提調)만은 본디 한국(閑局)이니 부디 고사하지 말라. 봄날이 아직 추워 강가의 풍설이 노인에게 이롭지 않을 듯하니, 조섭에 유의하여 나의 지극한 마음에 부응하라."

 

1월 19일 정유

최혜길(崔惠吉)을 이조 참판으로, 이기조(李基祚)를 예조 판서로, 윤이지(尹履之)를 형조 판서로, 한흥일(韓興一)을 사은사(謝恩使)로, 신유(申濡)를 부사(副使)로, 조형(趙珩)을 서장관으로 삼았다. 【부사는 나중에 오준(吳埈)으로 대신하였다.】  이때 이조 판서 임담(林墰)은 원접사로 나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고 참의 조수익(趙壽益)은 외방에 있고 참판은 오랫동안 결원이었는데, 좌의정 이시백(李時白)과 우의정 한흥일(韓興一)이 "전관(銓官)이 전부 유고(有故)여서 정사(政事)가 많이 적체되었으므로 빨리 변통해야 한다." 하고서 청대(請對)하고 이를 대면하여 진달하니, 특별히 상규(常規)를 무시하고 도승지로 하여금 전조(銓曹)의 낭관과 함께 대신에게 가서 물어 의망하여 아뢸 것을 명하였다. 시백 등이 또 김육을 총재관으로 삼을 것을 청하니, 허락하였다.

 

상이 주강에 나아가 《서전》 우공을 강독하였다.

 

1월 20일 무술

상이 주강에 나아가 《서전》 우공을 강독하였다.

 

경상 우병사 황헌(黃瀗)이 사조하니 면유하여 내보내고, 이어 입시한 승지에게 하교하였다.
"어제 서쪽에서 온 내관(內官)의 말을 듣건대, 서쪽 백성들의 기근에 허덕이는 정상이 극히 참담하다 하니 내 마음이 매우 측은하다. 승지는 이 뜻으로 특별히 양서(兩西)의 감사와 병사에게 유시하여 그들로 하여금 조정이 크게 염려하는 뜻을 유념하여 있는 마음을 다해 구휼하게 하라."

 

상이 하교하였다.
"청사가 서울에 들어올 날이 며칠 밖에 남지 않았는데 영상이 아직도 출사하지 않고 있으니, 내가 목마르게 바라는 마음이 어찌 다함이 있겠는가. 다시 승지를 보내 이러한 뜻을 유시하라."

 

1월 21일 기해

진향사(進香使) 유정량(柳廷亮), 부사 박서(朴遾), 서장관 이만영(李晩榮) 등이 북경으로 떠나니, 상이 그들을 불러 접견하였다.

 

영의정 김육이 세 번째 상소하여 면직을 청하였는데, 상이 너그러운 비답으로 허락하지 않는다고 사관을 보내 유시하니, 김육이 대답하였다.
"이번 성상의 하유에, 청사가 서울에 들어오는 날에는 수상이 없으면 안 된다고 분부하셨으므로 홍제원(弘濟院)의 행차에는 【전례에 청사가 홍제원에 당도하면 영의정이 나가서 맞이하였으므로 한 말이다.】  감히 나가지 않을 수 없으나 이 행차가 지난 뒤에는 즉시 물러나 돌아가겠습니다."

 

1월 22일 경자

신준(申埈)을 강화부 유수(江華府留守)로 삼았다.

 

1월 23일 신축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영의정 김육이 양주(楊州)에서 필마로 달려와 홍제원으로 가서 청사를 맞이하였다.

 

1월 24일 임인

상이 서교(西郊)에 행행하여 청사를 맞이하고 인정전에서 접견하였다.

 

왕대비가 병이 나서 번침(燔鍼)을 맞았다.

 

1월 25일 계묘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반사(頒赦)하였다. 【섭정왕(攝政王)이 죽은 뒤에 청주(淸主)가 비로소 친정(親政)하면서 사신을 보내 반사하였다.】020)  "태양이 빛을 더하니 만기(萬機)를 친히 잡은 소식을 들었고 퍼지는 혜택이 멀리 미치니 십항(十行)021)  의 반포를 보게 되었다. 이에 널리 고하는 법을 선양하여 함께 경하하는 뜻을 보이노라. 우리 나라가 안정된 것을 길이 생각하면 실로 대국의 보호에 힘입었다. 선제(先帝)께서 끊긴 대를 이어주고 망한 나라를 보존해 준 일을 돌아볼 때 그 후한 덕을 감히 잊을 수 있겠는가. 한편 새 황제께서 어린 나이에 선제의 공을 잇고 뜻을 계승하신 것을 우러러 보며 크나큰 복을 더욱 송축하였다. 오직 부축하고 도와주는 의친(懿親)022)  이 계시어 이 때문에 여러 해를 거치는 동안 태평한 정치를 이루었다. 은혜와 의로움이 다 지극하여 황제의 마음은 돌아가신 이에 대한 존숭을 극진히 하셨고, 총명은 아래를 살피시기에 충분하여 서정(庶政)을 손에 잡고 새로이 시작하였다. 이에 나라를 다스리는 방도를 중외에 진지하게 자문하고 다시 원근의 지방에 죄를 용서하는 은혜를 내리셨다. 말씀이 한번 나오면 그 효과는 한없이 큰데 고유(誥諭)가 순후하고 간절하시며 고이 간직한 진귀한 물품을 내려주신 것이 많았다. 지난날의 허물을 생각지 않고 넓은 도량으로 함께 생육하도록 하였고, 아울러 훗날의 공로를 책임지워 종신토록 함께 올바르게 되기를 기대하셨다. 이미 내 한 사람이 특별한 은혜를 입었으니 팔방에 사유(赦宥)를 베푸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 이달 25일 새벽 이전을 시한으로 잡범 사죄(雜犯死罪) 이하는 모두 용서하여 벌을 면제하며, 관작에 있는 자는 각기 한 자급을 가자하고 자궁(資窮)한 자는 대가(代加)한다.
아, 흠결과 오점을 탕척해야 모두 천지의 생성(生成)하는 은혜를 입을 것이고, 세월이 오래되더라도 오직 새로운 마음을 지녀야 거의 천하가 태평함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에 교시(敎示)하니 마땅히 잘 알 줄로 아노라." 【대제학 조석윤(趙錫胤)이 지은 글이다.】

【태백산사고본】 6책 6권 5장 A면【국편영인본】 35책 468면
【분류】외교-야(野) / 사법-행형(行刑) / 인사-관리(管理) / 어문학-문학(文學)


[註 020] 【섭정왕(攝政王)이 죽은 뒤에 청주(淸主)가 비로소 친정(親政)하면서 사신을 보내 반사하였다.】 : 섭정왕은 청 태조(淸太祖)의 열네째 아들 화석 예친왕(和碩睿親王) 다이곤(多而袞)으로, 1644년에 태종(太宗)의 뒤를 이어 6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한 세조(世祖)를 보좌하여 숙부섭정왕(叔父攝政王), 또는 황부섭정왕(皇父攝政王)의 칭호를 가지고 국정을 독점하였음. 1650년 12월에 그가 죽자, 이듬해 1월 12일에 세조가 태화전(太和殿)에 나아가 백관의 하례를 받고 친정(親政)에 들어갔다. 이에 따라 대사(大赦)를 선포하고 우리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서를 반포하였다. 《청사고(淸史稿)》 권5 세조 본기(世祖本紀).[註 021] 십항(十行) : 조서를 말함.[註 022] 의친(懿親) : 황실의 종친으로 구왕(九王)을 말함.

ⓒ 한국고전번역원

 

상이 남별궁(南別宮)에 행행하여 청사를 접견하였다.

 

소현 세자(昭顯世子)의 셋째 아들이 함양(咸陽)에서 병이 나니, 특별히 내의(內醫)를 보내 치료토록 하였다.

 

1월 26일 갑진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상이 하교하기를,
"왕대비의 증세가 차츰 위급해지고 있어 침의(鍼醫) 이형익(李馨益)을 특별히 석방하니 말을 지급하여 들어오게 하라. 일이 다급한데 길은 멀어 마음이 초조하기 그지없다. 즉시 거행하고 잠시라도 지체하지 말라."
하였는데, 헌부가, 형익은 죄명이 무거워 결코 용서할 수 없고 의술이 괴상하여 오늘날 또다시 시험할 수 없으니 석방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라고 청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1월 27일 을사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상이 하교하기를,
"어제 진주사(陳奏使)의 장본(狀本)을 보았는데, 가져간 표문(表文) 가운데 ‘하늘은 맑고 땅은 골라졌다.[乾淸坤夷]’는 문구를 가지고 따져 물은 일이 있었다고 하니, 참으로 한심하다. 이번 진향사(進香使)의 문서 중에도 혹시 이와 같은 문자가 있는지 해방(該房) 승지는 자세히 살펴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이때 진주사 인평 대군 이요 등이 치계하기를 "한인(漢人)으로서 청국에 벼슬살이하는 자들이 갖가지로 헛점을 엿보아 기어코 우리 나라에 불화를 만들어 내기 위하여 사신이 가져간 표문 중에 있는 ‘하늘은 맑고 땅은 골라졌다.[乾淸坤夷]’는 말을 한인이 청어(淸語)로 번역하여 청주(淸主)에게 고하기를 ‘이는 하늘은 청(淸)이요 땅은 호(胡)라고 한 말로서 우리를 청이(淸夷)라고 하여 비난하는 뜻이 뚜렷하다.’ 하자, 청주가 서장관 정지화(鄭知和)에게 따져 묻게 하기를 ‘무슨 이유로 하늘은 맑고 땅은 평안하다[乾淸坤寧]고 하지 않고 굳이 ‘청이’라고 말하여 감히 위를 비난했느냐?’ 하여, 지화가 처음에는 우연히 쓴 것이라고 대답하였다가 겁을 먹고 마침내 두 글자를 잘못 쓴 것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청역(淸譯) 정명수(鄭命壽)가 사신에게 개인적으로 말하기를 ‘지금은 상황이 예전과 다르니 이와 같은 문자는 절대로 자세히 살펴야 한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1월 28일 병오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상이 하교하였다.
"이제 듣건대, 인평 대군이 연경(燕京)에 가던 날 내관(內官) 나업(羅嶪)이 버젓이 가교(駕轎)를 타고 있었다 하니, 매우 놀랍다. 이러한 풍조를 더 이상 만연시킬 수 없으니, 잡아다가 추고하라."

 

1월 29일 정미

상이 대신과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상이 영의정 김육 등에게 이르기를,
"객사(客使)가 아직 관중(館中)에 머물러 있는데 이어 또 나오는 자가 있다는 소문이 들리니, 이처럼 나라의 재정이 바닥난 때에 장차 무슨 수로 지탱해 나갈 것인가. 새벽에 의주 부윤의 계본(啓本)을 보고 마음이 진정되지 않아 오늘이 국기일(國忌日)인데도 특별히 인대(引對)하였다."
하니, 김육 등이 각기 서쪽 백성들을 구제할 계책을 진달하였다. 김육이 또, 공주(公州)의 병영을 도로 본 고을로 옮겨 민폐를 제거해야 한다고 말하자, 이조 판서 임담(林墰)이 그것은 불가하다고 극력 아뢰었다. 【당초에 병영을 산성(山城)으로 옮기자는 의논을 임담이 방백으로 있을 때 주장하였기 때문이다.】  상이 또, 안주 판관(安州判官)을 혁파하는 것이 좋은가의 여부를 물었는데, 임담이 또 혁파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말하니, 상이 그 말을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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