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일 무신
내시(內侍) 임우문(林友聞)이 말 한 필을 나라에 바쳐 서로(西路)의 피폐한 역을 보조하겠다고 자원하였는데, 비변사가 그를 가자(加資)하여 다른 사람들을 권장하자고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이로부터 말을 바치고 자급이 올라간 자가 자꾸 많아져 식자들이 한심해 하였다.
2월 2일 기유
도목정(都目政)을 하였다. 【판서 임담(林墰)은 원접사로 나가 돌아오지 않고 참의 조수익(趙壽益)은 고향에 가 있었기 때문에 뒤로 미루어 이날에 행한 것이다.】 김육을 총재관으로, 심액(沈詻)을 좌참찬으로, 이기조(李基祚)를 지경연(知經筵)으로, 전 수원 부사(水原府使) 변사기(邊士紀)를 특별히 제수하여 회령 부사(會寧府使)로 삼았다.
2월 3일 경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이만(李曼)을 황해 감사로, 신유(申濡)를 동지경연으로 삼았다.
이만(李曼)을 황해 감사로, 신유(申濡)를 동지경연으로 삼았다.
2월 5일 임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평안도에 전염병이 크게 유행하여 관원을 보내 본도의 중앙이 되는 곳에 여제(癘祭)를 베풀 것을 명하고, 또 의사(醫司)에 명하여 약물을 나누어 보내 구제하게 하였다.
2월 6일 계축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청사가 돌아갔는데, 상이 서교(西郊)에 행행하여 전송하였다.
영의정 김육이 상차하기를,
"지난번 청사가 들어오는데 수상이 자리를 떠난 것으로 인하여 성명께서 홀로 걱정하시어 마침내 늙고 병들어 이미 물러간 신으로 구차하게 충원하여 다급한 상황을 넘기고자 하셨습니다. 그런데 날짜는 임박하고 성상의 분부 또한 간절하셨으니, 신이 이러한 때에 어찌 감히 태연하게 있으면서 국가의 어려움에 달려가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신은, 나라를 위하는 계책은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일로(一路)에 나가 접대하는 관원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스스로 생각하고서 청사의 행차가 지나간 뒤에는 즉시 옛집으로 돌아가겠다는 뜻을 이미 천청(天聽)에 진달하였습니다마는, 칙사의 행차가 계속 들어오는데 나중에 오는 것이 더욱 염려스럽기 때문에 감히 단호히 떠나가지 못하였습니다. 하루라도 조정에 머물러 있으면 마땅히 하루의 책임을 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민생의 폐해를 조금이라도 없애기 위해 공주 산성의 일로 상의 앞에서 서로 의논하였더니, 그 일을 처음 시작했던 사람이 여러 말을 하며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신은 작은 일로 서로 다투어 크게 체면을 잃고 싶지 않아 진지하게 시비를 가리지 않고 물러났으니, 신이 어눌하고 무디어 쓸모 없다는 것을 여기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대체로 공주 산성은 곧 보통 방어하고 지키는 곳이지 방백이 그곳에 머물러 있으면서 굳게 지킬 성은 아닌데, 폐단이 매우 많아 고을 사람들이 괴롭게 여기고 있습니다. 이제 옛 영(營)으로 돌아가는 것은 그저 발걸음을 한 번 옮기는 정도의 수고가 될 뿐으로 관사(館舍)를 고쳐 지을 것도 없고 백성을 다시 번거롭게 부릴 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영(營)과 부(府)가 서로 나뉘어져 있더라도 실로 어려울 일이 없으니, 이는 다시 본도에 물어볼 필요도 없습니다. 잔약한 고을에 전선(戰船)을 부과하는 일은, 그전부터 그 법을 설립한 적이 없으니 마땅히 즉시 파기하여 그 폐해를 제거해야 할 것인데 성상께서는 곤란하게 생각하십니다.
신이 이곳에 와서 한 가지 일도 하지 못하는데 막중한 총재(摠裁)의 책임만 신에게 맡기시니, 이는 결코 노신(老臣)이 감히 감당할 일이 아닙니다. 삼가 성명께서는 먼저 이 직임을 체차하여 원임(原任)의 신하에게 맡기소서."
하니, 답하기를,
"경이 들어왔으므로 주석(柱石)처럼 의지하여 바야흐로 책임을 완수하기를 간절히 기대하는데 이처럼 한두 가지 작은 일을 끌어다 자신의 허물로 삼으니, 이것이 어찌 내가 경에게 바라는 것이겠는가. 더구나 선왕의 실록은 사체가 극히 중대하여 총재의 직임은 경이 아니면 안 되는데, 경은 또 어찌 감히 사피하는가. 이는 곧 신하로서 마땅히 성심을 다 바쳐야 할 곳이니, 빨리 직무를 살펴 큰일을 완수하도록 하라."
하였다.
2월 7일 갑인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2월 8일 을묘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상이 옥당의 강관을 소대(召對)하여 《서전》의 우공을 강독하였다.
2월 9일 병진
해에 겹햇무리가 있고 흰무지개가 햇무리를 꿰었다.
상이 옥당의 강관을 소대하여 《서전》의 우공을 강독하였다.
간원이 아뢰기를,
"강화 유수(江華留守) 신준(申埈)은 천성이 본디 탐욕스러워 오로지 자기 몸을 살찌게 하는 것만 일삼으므로 가는 곳마다 수탈하는 것이 한정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이 부(府)의 책임을 맡고는 더욱 탐욕을 부려 겨우 몇 달을 겪고 나자 온 섬이 떠들썩하였고 물의가 비등하여 마침내 쫓겨나고 말았는데, 원성이 지금까지도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나라의 보호벽인 막중한 지방을 이미 시험해 본 이 사람의 손에 맡길 수 없으니, 파직하소서."
하였는데, 누차 아뢴 뒤에 체직하였다.
2월 10일 정사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상이 옥당의 강관을 소대하여 《서전》의 우공을 강독하였다. 연신(筵臣)이 각기 기근에 시달리는 양서(兩西)의 정상을 진달하니, 상이 관향미(官餉米) 9만 2천 9백 석을 풀어 구제할 것을 명하였다.
양주 목사(楊州牧使) 이민수(李敏樹), 풍기 군수(豊基郡守) 김옥현(金玉鉉), 거제 현령(巨濟縣令) 유성(柳檉), 당진 현감(唐津縣監) 이창원(李昌源), 홍원 현감(洪原縣監) 최진명(崔振溟), 지례 현감(知禮縣監) 윤세헌(尹世獻)이 사조하니, 모두 면유하여 내보내고, 이어 하교하였다.
"요즈음 수령들이 인견할 때는 다 칠사(七事)023) 에 마음을 다하겠다고 대답하지만 부임한 뒤에는 법을 범하는 자가 많다. 앞으로 직접 면칙(面飭)을 받고서도 끝내 깊이 유념하지 않는 자를 정원(政院)은 듣는 대로 아뢰라."
2월 11일 무오
상이 서교(西郊)에 행행하여 청사를 맞이하고 인정전(仁政殿)에서 접견하였다.
반사(頒赦)하여【청국이 섭정왕(攝政王)을 추봉(追封)하여 제(帝)로 삼고, 그의 생모에게 존호를 올리고서 사신을 보내 반사024) 하였다.】 교문(敎文)을 반포하였는데, 다음과 같다.
"왕은 다음과 같이 이르노라. 효도는 받들고 높이는 것을 귀히 여기는 법인데 성대한 의식을 거듭 거행했다는 말은 들었고, 어진 마음은 용서해 주는 것이 으뜸인데 조서가 멀리 이곳까지 선포됨을 보았다. 이에 방방곡곡에 고하여 크게 황제의 명을 선포한다.
우리 제후국의 사대(事大)를 생각할 때 실로 복과 경사를 함께 나누게 되었다. 몸소 만기(萬機)를 잡으시니 이미 새로이 시작하는 교화를 흠앙하였고, 칠묘(七廟)에 올려 부묘하시니 다시금 선대를 받드는 정성을 보았다. 황부(皇父)의 큰 공을 소급하여 높이시니 은혜와 도의가 아울러 지극하고, 성모(聖母)의 존호를 공손히 올리시니 정리와 예문(禮文)이 실로 흡족하였다. 좋은 음식으로 제향을 올리시고는 곧 단비 같은 은택을 뿌리셔서 험난한 먼 길에 사절을 수고롭게 보내 빛나는 조서를 내리셨다. 주신 선물 풍성하니 상자 속의 귀한 보물 나누어 주신 것이요, 죄와 허물 탕척하여 만물에 봄을 안겨 주셨다. 이처럼 세상에 보기드문 총애를 입었으므로 사방에 사면을 내리노라.
이달 12일 새벽 이전을 시한으로 하여 모반 대역(謀反大逆)·모반(謀叛)·자손모살구매조부모부모(子孫謀殺毆罵祖父母父母)·처첩모살부(妻妾謀殺夫)·노비모살주(奴婢謀殺主)·모고살인(謀故殺人)·염매고독(魘魅蠱毒)·관계국가강상(關係國家綱常)·장오(贓汚)·강절도(强竊盜)를 제외한 잡범 사죄(雜犯死罪) 이하 도류(徒流)·부처(付處)·안치(安置)·충군(充軍)에까지 이미 배소(配所)에 당도했거나 당도하지 않았거나, 이미 발각되었거나 발각되지 않았거나, 이미 죄가 결정되었거나 결정되지 않았거나를 막론하고 모두 그 죄를 사면한다. 만약 사면한 교지가 내린 이전의 일로 서로 고하는 자는 그 죄를 그대로 적용한다. 관직에 있는 자는 각기 한 자급씩 가자하고, 자궁(資窮)한 자는 대가(代加)한다.
아, 천지가 낳아주고 길러주는 덕이 있으니 어찌 더욱 힘써 마음을 새롭게 가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온 세상이 태평을 기대하게 되었으니 모두 영세도록 복을 누리기를 바라노라. 그러므로 교시하니 잘 알아들을 줄로 안다." 【대제학 조석윤(趙錫胤)이 지은 글이다.】
【태백산사고본】 6책 6권 7장 A면【국편영인본】 35책 469면
【분류】외교-야(野) / 사법-행형(行刑) / 인사-관리(管理) / 어문학-문학(文學)
[註 024] 섭정왕(攝政王)을 추봉(追封)하여 제(帝)로 삼고, 그의 생모에게 존호를 올리고서 사신을 보내 반사 : 청 세조가 즉위한 지 8년 째인 1651년 1월에 섭정왕을 성종 의황제(成宗義皇帝)로 추존하여 태묘에 부묘하고 2월에는 생모인 효장문황후(孝莊文皇后)에게 소성자수황태후(昭聖慈壽皇太后)라는 존호를 올리고서 대사령을 선포하고 사신을 보내왔다. 《청사고(淸史稿)》 권5 세조본기(世祖本紀).
ⓒ 한국고전번역원
2월 13일 경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상이 남별궁(南別宮)에 행행하여 청사를 접견하였다.
2월 16일 계해
상이 영사전(永思殿)에서 한식제(寒食祭)를 거행하였다.
2월 18일 을축
청사가 돌아가는데, 상이 서교(西郊)에 행행하여 전송하였다.
전 영의정 이경석(李景奭)이 백마 산성(白馬山城)에서 돌아와025) 상소하기를,
"어리석은 신이 스스로 함정에 빠져 거듭 대단한 질책을 받았는데, 하늘 같으신 성은(聖恩)이 도마 위에 놓인 듯한 이 몸을 곡진하게 구제하시어 함양(涵養) 하시는 속으로 받아들이시니, 이는 참으로 천년에 한 번 있는 기회인 것입니다. 게다가 전후에 걸쳐 거듭된 위문과 빈번한 하사품 같은 것도 너무나 파격적인 것이니 그 은혜를 보답하려 해도 방도가 없어 죽어서 결초보은(結草報恩)하고 싶을 뿐입니다. 이제 다행히 험난한 지역을 떠나 서울로 돌아왔는데, 종남(終南)026) 은 가깝지만 북궐(北闕)이 막혀 충정 어린 붉은 마음을 지니고만 있을 뿐 토로하지 못하니, 하늘을 우러러보며 눈물만 흘리고 있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지난날 국운이 위태로워 일이 장차 어찌될지 헤아리지 못하게 되어 밤낮으로 애를 태우며 묵묵히 하늘에 빌었더니, 다행히 굽어살피시는 선왕의 음덕을 입어 오늘이 있게 되었다. 과인의 기쁨은 물론 한량이 없고 국가의 복도 어찌 이루 형언할 수 있겠는가. 경은 잘 조섭하고 요양하여 내 마음을 위로하도록 하라."
하였다.
원접사 이시방(李時昉)과 평안 감사 정유성(鄭維城)이 치계하였다.
"신들이 정명수(鄭命壽)에게 묻기를 ‘청사 네 사람이 띠고 온 일은 무엇인가?’ 하니, 대답하기를 ‘청주(淸主)의 생모를 존봉(尊封)하여 태후로 하고 또 본국의 세폐(歲幣)를 견감하였으므로 이 때문에 조서를 반포하는 것이다.’ 하고, 또 비밀히 말하기를 ‘섭정왕이 살았을 때 은밀히 황제의 자리를 찬탈할 뜻을 품고 황포(黃袍)027) 를 미리 준비하여 반역의 형상이 이미 드러난 데다가 또 그 사실을 고한 자가 있어서 청주가 크게 노하여 존호를 삭탈하고 태묘에서 축출하였으며 그 가산(家産)을 관아에 적몰하고 그 여인들은 제왕(諸王)에게 나눠줬는데, 의순 공주(義順公主)028) 도 백양왕(百陽王)의 아들에게로 돌아갔다.’ 하였습니다."
2월 19일 병인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2월 20일 정묘
상이 주강에 나아가 《서전》의 우공을 강독하였다.
황해 감사 이만(李曼)이 상소하기를,
"지난날 사문(査問) 당시의 일029) 은 신이 감히 여러 말로 스스로 변명할 수는 없으나 남이 모르는 억울한 사정을 드러내지 못했으니, 또한 어찌 답답한 마음으로 잠자코 잊을 수 있겠습니까. 당초 주문(奏聞) 가운데 여덟 가지가 있었는데, 그중 두 가지는 변신(邊臣)이 보고한 것이라 했고 여섯 가지는 바로 정부(政府)의 장계(狀啓)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문답할 때 그들이 치중한 것은 그러한 것들을 주문(奏文)으로 올렸다는 것에 있었습니다. 신은 사문에 응하기 전에 그 당시 상신(相臣)과 상의하여 대답할 말을 결정하였고, 또 비국(備局)의 신하들에게 두루 알려 모두 이의가 없은 뒤에 서청(西廳)에서의 대답을 전부 주본(奏本)에 있는 대로 하였습니다. 이른바 변신이 보고했다는 두 가지 일은 신이 먼저 스스로 책임을 졌고 정부가 장계하였다는 여섯 가지 일 가운데 표류한 한인(漢人)의 일도 신은 그들의 물음에 따라 자세히 대답하였습니다. 이어 주문을 올린 이유는 후환을 염려하는 뜻에서 나온 것이라고 언급하였는데, 그 말이 끝나자 그만 나가라고 재촉하여 자리에 남아 있을 수 없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신이 왜의 사정을 잘 말하여 저들의 의심을 풀지 못했다고 탈을 잡았는데 이는 형세상 그와 같이 할 틈이 없었던 것이고, 어떤 사람은 신이 대신과 죄를 나누어 지겠다고 청하지 않은 것을 가지고 그르다고 하였는데 이 또한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대체로 신을 내보낼 때 저들이 만약 변신은 죄가 없다고 말하였다면 무엇이라도 말할 수 있었겠으나, 죄가 있느니 없느니를 말하지 않고 다만 나가라고만 하였으니, 신의 죄가 가벼운지 무거운지 아니면 풀려날 것인지를 전혀 측량하기 어려웠습니다. 제 자신도 어찌될지 모르는 판인데 곧장 죄를 나눠 지겠다고 청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사문이 끝난 다음에야 신 혼자서만 죄를 면했다는 말을 들었으나 그때는 또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신에게, 죽기 싫어 위급한 상황을 보고도 목숨을 바치지 못했다고 말한다면 신은 또 그에 대해 할 말이 있습니다. 사실 사는 것이 의리에 해롭다면 생명도 버릴 수 있고 죽는 것이 도리에 맞는 것이면 죽음을 피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금번 신이 대답한 것은 위로는 주본의 뜻에 위배하지 않았고 아래로는 묘당에 다 책임을 떠넘기지 않았으며 신에게 죄가 없다고 한 것은 그쪽에서 한 말이지 우리측이 한 말이 아니니, 이러한 사정으로 풀려나게 된 것을 어찌 의리에 해롭고 도리를 거스린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진정 의리에 해롭거나 도리를 거스린 것이 아니라면 옛사람도 또한 죽지 않았는데 신이 무엇 때문에 꼭 죽어야겠습니까.
시종 곡절이 이와 같을 뿐이어서 어느 모로 살펴보아도 뉘우칠 것이 없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털끝만큼도 잘못을 범한 것이 없는데 사세는 헤아리지 아니하고 서로 어울려 떠들썩하게 맞장구를 치며, 신이 참으로 범한 잘못이 있어 왜국의 사정을 말하지 않은 것이라고 말하니 신은 어찌해야 좋겠습니까. 신을 논핵하는 자는 처음에 죄를 분담했어야 한다는 것으로 명목을 삼았고 신을 죄주는 자는 마침내 나라를 배반했다는 것으로 죄안을 삼았습니다. 신을 동정하는 자는 아무리 그 실정을 용서해 주고 싶더라도 신을 미워하는 자가 도리어 그 행적을 비난하려고 하니, 삼가 생각건대 오늘날의 조정은 신을 용서하는 자는 적고 비난하는 자가 많으므로 죄를 분담했어야 한다는 논박은 그저 사소한 것일 뿐이고 나라를 배반했다는 비난은 끝내 멈추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아, 너무도 불행한 일입니다. 신이 비록 보잘것은 없지만 전혀 염치가 없는 정도는 아닙니다. 그래서 자살하려고 해도 그러면 명기(名器)를 욕되게 하는 것이 되니 어찌하겠습니까.
방백은 풍기(風紀)를 맡는 것인데 사람들이 천시하고 미워하는 자로 자리만 차지하고 있게 하면 어찌 각읍을 통제하고 백성을 인도하겠습니까. 삼가 원컨대 성상께서는 특별히 체직하시어 신으로 하여금 살아서는 자연에 순응하고 죽을 때는 천명에 편안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경의 소장을 보니 원한을 품은 사정이 애처롭다. 어찌 감동되지 않겠는가. 그 당시의 일을 내가 모른 것은 아니었으나 다만 사정이 어찌할 수 없었다. 수많은 말들을 그와 같이 할 것이 뭐가 있겠는가. 현재 서로(西路)가 피폐해졌는데 적임자를 얻기가 실로 어렵기 때문에 경의 재간을 쓰려고 하는 것일 뿐이다. 경을 잠시 수고롭게 할까 하니 굶어 죽어가는 우리 백성을 구원하라."
하였다. 이만이 또 상소하여 굳이 사직하니, 허락하였다.
2월 21일 무진
상이 전 영의정 이경석(李景奭)과 전 예조 판서 조경을 인견하였다. 경석 등이 나아가 아뢰기를,
"성상의 전후에 걸친 진지하고 간절하신 회유로 저들을 감동하게 하였고 또 대군(大君)030) 의 행차를 통하여 조정에서 극력 주선해 주신 은덕으로 이제 두 번 사는 사람이 되어 다시 지척의 천안을 뵙게 되었으니, 살리고 보살피신 은택은 죽을 때까지도 갚기 어려워 감사하는 눈물만 날 뿐입니다."
하니, 상이 경석에게 이르기를,
"경이 국사에 마음을 다하려 하였으나 마침내 그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나 하늘이 그들의 마음을 돌려 드디어 오늘을 보게 되었으니 나의 기쁨이 어찌 한이 있겠는가."
하고, 이어 중관(中官)에게 각각 황감(黃柑) 한 그릇씩 하사할 것을 명한 뒤에, 또 경석에게 이르기를,
"경은 부디 나를 멀리 버리지 말라. 나는 국가의 대사를 자문하고 싶을 뿐이다."
하였다. 경석은 배사(拜謝)하고 물러갔다.
상이 주강에 나아가 《서전》 우공을 강독하였다. 강독이 끝나자 지경연(知經筵) 이기조(李基祚)가 아뢰기를,
"신은 이제 막 북경에서 돌아왔으므로 감히 듣고 본 사실을 진달할까 합니다. 청주(淸主)의 나이는 이제 14세인데 전상(殿上)에 앉아 제장(諸將)을 거만하게 지휘하였습니다. 그리고 청장(淸將) 중에는 파흘내(巴訖乃)만 현재 우리 나라를 돌보아 주는 빛이 있을 뿐 명조(明朝) 사람으로 청국에 벼슬한 홍승주(洪承疇)·풍전(馮烇)·유수환(劉守渙) 등은 모두 우리 나라를 해치려는 뜻을 품고 있습니다. 승주는 대릉하(大陵河) 패전의 책임을 오로지 우리쪽에 돌리고 풍전은 수차 글을 올려 조선에게 청국과 마찬가지로 머리를 깎게 할 것을 청하고 있으니, 우리로서는 금백(金帛)을 출연하여 이들과 사귀어 두어야만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한왕(漢王)에게 4만 근의 황금이 있었지만 오직 한 사람 진평(陳平)이 능히 그것을 사용하였다031) . 비록 금백이 있더라도 누가 능히 그것을 사용하겠는가."
하였다.
2월 22일 기사
상이 주강에 나아가 《서전》 우공을 강독하였다.
호조가 강도(江都)의 쌀 1천 석을 송도(松都)의 굶주린 백성에게 나누어 주어 구제할 것을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2월 23일 경오
통영(統營)의 첨방군(添防軍)을 혁파하였다. 임진년 왜변 이후 조정이, 통영은 수로(水路)의 요충지에 위치했는데도 소속된 수졸(水卒)이 빈약하다는 이유로 호남 연해의 각읍으로 하여금 수졸을 뽑아 보내게 하여 해변의 방비군을 더 배치하였는데, 바람이 잔잔해지는 봄이 되면 본영(本營)에서 입방(入防)하여 사태에 대비하고 바람이 거세지는 철이 되면 비로소 파하여 내보내되 해마다 이를 상례로 하고 첨방군이라 불렀다. 호남의 백성들이 식량을 싸가지고 멀리까지 와서 수자리를 살고 항상 본영의 침해를 받아 그 고통을 견디지 못하였으므로 의논하는 자들이 그 일을 혁파해야 한다고 많이 말하였으나, 조정에서는 방수(防戍)를 이유로 곤란하게 여겼다. 그러다가 이때에 이르러 영의정 김육이 빨리 혁파하여 호남 백성들의 원망을 풀어주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하여 대신에게 수의할 것을 명하였는데, 영중추부사 이경여가 그 폐해를 극력 말하고 김육의 말대로 따를 것을 청하였다. 상이 대신과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고 이를 물으니, 김육이 아뢰기를,
"일찍이 통영의 지형을 보니 대마도와 마주 대하는 곳과는 달라서 왜선(倭船)이 올 때는 반드시 통영의 앞바다를 경유하지 않았으며, 첨방의 폐해는 오늘에 와서 극에 이르렀습니다."
하고, 신하들이 다 혁파하는 것이 온편하다고 말하니, 마침내 혁파할 것을 명하였다. 김육이 또 아뢰기를,
"평안 감사 정유성(鄭維城)이 안주 판관(安州判官)을 혁파할 것을 청하였으나 병사가 지위를 낮추어 하관(下官)의 직무를 행하는 것은 부당하니, 판관을 혁파해서는 안 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미 병사가 있으면 우후(虞候)의 직임은 긴요하지 않을 듯하니, 우선 우후를 혁파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통영의 첨방 제도는 조종조의 바다의 방수를 중시하는 뜻에서 나온 것인데, 이제 호남 백성들이 원망을 호소한 것으로 인하여 갑자기 혁파하자, 변방의 수비가 소홀해진 것을 걱정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2월 25일 임신
상이 주강에 나아가 《서전》 우공을 강독하였다.
상이 주강에 나아가 《서전》 우공을 강독하였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국가의 금령은 민심에 거슬리지 않은 다음에 행해질 수 있으니 만약 일체의 법으로 잡아매어 몰고 간다면 소요만 일어나 끝내 시행할 수 없게 됩니다. 우리 나라에는 본디 통용하는 화폐가 없고 쌀과 무명베만 사용하는데 이는 곧 백성들이 몸에 걸치고 입에 풀칠하는 것으로서 하루라도 없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즈음 발이 굵고 길이가 짧은 면포는 사실 사용할 데가 없고, 물가는 비등하고 장사꾼들이 생업을 잃기 때문에 국가가 금법을 제정하여 금년 정월부터 더 이상 사용하지 못하게 하였으나 민간에 저축하고 있는 것이라고는 오직 이것일 뿐입니다. 그것을 시장에서 판매하여 조석거리를 마련하는데 획일적으로 사용을 금지한다면 이는 백성의 목숨을 끊어버리는 것이며, 그렇다고 그들이 하는 대로 맡겨두면 법이 시행되지 않을 것입니다.
어리석은 신의 생각으로는 이와 같은 흉년을 당하여 진휼하는 정사를 소홀히 할 수 없고 이미 나온 법령도 중지할 수 없으니, 만약 해조와 상평청(常平廳)으로 하여금 공동으로 쌀 3 천 석을 내어 값을 올려서 면포를 사들이게 하면 5만여 필은 얻을 수 있을 것이니 서울에 남아 있는 굵은 포목은 얼마 되지 않을 것입니다. 본래부터 있던 포목은 제외하고 새로 사들인 베를 값을 주고 다시 짜두게 하였다가 가을이 되어 그것으로 곡식을 사들인다면 이미 흩어진 쌀을 도로 충당할 수 있고 굵고 짧은 면포를 영원히 없앨 수 있게 될 것이니, 한 가지 조치로서 굶주린 백성도 구제하고 법령도 시행하고 폐단도 제거하는 세 가지 일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데도 불구하고 금령을 범하는 자가 있으면 중벌로 다스리고 결코 용서하지 마소서. 청컨대 이러한 뜻으로 중외에 효유하소서."
하였는데, 그대로 따랐다.
2월 26일 계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상이 주강에 나아가 《서전》 감서(甘誓)를 강독하였다.
2월 27일 갑술
조석윤(趙錫胤)을 대사간으로, 이시매(李時楳)를 강화부 유수(江華府留守)로 삼고, 부호군(副護軍) 민응형(閔應亨)을 특별히 제수하여 예조 판서로 삼았다.
상이 주강에 나아가 《서전》 윤정(胤征)을 강독하였다.
면천 군수(沔川郡守) 서형리(徐亨履)가 사조하니, 면유하여 내보냈다.
간원이 아뢰기를,
"기내(畿內)의 역참(驛站)은 오가는 사행을 뒷바라지 하기가 극도로 어려운 형편입니다. 여섯 역의 잔패(殘敗)는 예전부터 어느 역보다도 심하였는데 이제는 장차 궤멸하게 되었으니, 청컨대 각읍이 나누어 기르고 있는 우마(牛馬)를 각역과 각참에 나누어 주어 약간의 혜택이라도 베푸소서."
하니, 따랐다.
2월 28일 을해
전 장령 임의백(任義伯)을 안주 판관(安州判官)으로, 김좌명(金佐明)을 전랑(銓郞)으로 삼았는데, 임의백은 이전의 일로 인하여 외방으로 내보낸 것이다.
2월 30일 정축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인조 대왕의 부묘 도감을 설치하였다. 영의정 김육을 도제조로 삼고, 영안위(永安尉) 홍주원(洪柱元), 호조 판서 원두표(元斗杓), 좌참찬 심액(沈詻), 예조 참판 이기조(李基祚), 행 대사헌 오준(吳竣)을 제조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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