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효종실록6권, 효종 2년 1651년 3월

싸라리리 2025. 12. 20. 1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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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일 무인

상이 영사전(永思殿)에서 삭제(朔祭)를 거행하였다.

 

3월 2일 기묘

진향사(進香使) 유정량(柳廷亮) 등이 우가장(牛家庄)에 당도하여 치계하기를,
"섭정왕이 모역으로 태묘(太廟)에서 축출된 것은 정명수가 말한 그대로이며 섭정왕의 장지(葬地)에 묻은 금은(金銀)의 기물 등을 파내고 질그릇으로 대체하였다고 합니다."
하였다. 그리하여 상이 승지를 불러 이르기를,
"저쪽 나라가 섭정왕에 대하여 이미 모역으로 단죄하였으니 그 초상을 위해 진향(進香)하는 행차를 어찌 그대로 보낼 수 있는가."
하니, 승지들이 급히 비국으로 하여금 사신에게 통보하여 행차를 중지하게 하였다.

 

3월 4일 신사

상이 서교(西郊)에 행행하여 용포(龍袍) 옥대(玉帶)를 갖추어 입고 청사를 맞은 뒤에 인정전(仁政殿)에서 접견하였다. 이 당시 청사가 홍제원(弘濟院)에 당도하였을 때, 정역(鄭譯)이 원접사에게 말하기를,
"이번에 사행(使行)이 예부(禮部)의 왕공면복의주(王公冕服儀註)를 등사하고 황제의 명으로 또 화복(華服)을 가지고 왔으니, 국왕은 마땅히 곤면(袞冕)을 입어야 하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는 가지고 온 장복(章服)을 버려 두고 갈 것이오."
하였는데, 상이 대신과 예관(禮官)에게 수의할 것을 명하였고 여러 번 근신을 보내 따를 수 없다는 뜻을 알리자, 청사가 크게 노하여 곧바로 경성(京城)으로 들어오려고 하였다. 상은 부득이 서교로 나가면서 갑자기 길복(吉服)으로 바꿔 입었는데, 눈물이 용포를 적시자 좌우 신하들이 오열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반사(頒赦)하였다. 【청국이 존호를 올리고 조칙을 반포하였기 때문이다.】  그 조칙은 다음과 같다.
"제왕이 천하를 다스리고 억조창생을 돌볼 때는 모두가 명분을 바루고 덕을 드러내어 자신의 소생 부모에게 존숭하는 예를 올렸으니, 이는 곧 인효(仁孝)의 지극한 정이며 높여 봉양하는 떳떳한 법이다. 생각건대 나의 성모(聖母)께서는 황고(皇考)를 도와 내범(內範)을 부지런히 닦고 능히 궁중을 화합시켜 나라를 다스리셨으며, 내 이 몸을 낳으시고 길러 수고롭게 인도해 주셨다. 나는 대통을 이어받아 천하를 통일하였으니, 그 근본을 헤아려 보면 참으로 모친의 은덕이었다. 왕공(王公)과 신민(臣民)들이 하는 말이 ‘마땅히 높여 존호를 올리고 아울러 아름다운 칭호를 바쳐 중외의 마음을 신복시키고 고금의 예에 어울리게 해야 한다.’ 하였는데, 이 공론을 살펴볼 때 실로 짐의 마음에 맞다. 삼가 순치(順治) 8년 2월 10일에 【곧 본국의 정월 10일이다.】  천지·종묘·사직에 고하고서 제왕(諸王)·패륵(貝勒)·문무 군신(文武群臣)들을 거느리고 공손히 책보(冊寶)를 받들어 존호를 올리기를 ‘소성자수황태후(昭聖慈壽皇太后)’라고 하였다. 존숭하는 의식을 이제 거행하여 큰 혜택을 멀리 베풀어야겠기에 시행할 만한 구제 사정을 뒷부분에 조목별로 예시하였다. 【조선이 세액(歲額)으로 진공(進貢)하는 면주(綿紬) 5백 필과 면포(綿布) 5천 필에 대하여 앞으로 면주는 1백 필, 면포는 6백 필을 영원히 감면한다고 하였다.】 아, 사랑을 세우되 내 어버이로부터 하며 부모에 대한 효심은 끝이 없는 법이다. 나의 성모께서 드높은 명예와 수명을 만년토록 누리시길 바라노니, 왕공과 백성들은 이 큰 경사를 함께 하여 각자 행동을 삼가고 마음을 너그럽게 가지며 일을 부지런히 함으로써 삼가 하늘의 복을 맞아 다같이 태평한 세상을 이루도록 하라. 이를 천하에 포고하여 모두 들어 알게 하라."

【태백산사고본】 6책 6권 10장 A면【국편영인본】 35책 470면
【분류】외교-야(野) / 사법-행형(行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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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사랑을 세우되 내 어버이로부터 하며 부모에 대한 효심은 끝이 없는 법이다. 나의 성모께서 드높은 명예와 수명을 만년토록 누리시길 바라노니, 왕공과 백성들은 이 큰 경사를 함께 하여 각자 행동을 삼가고 마음을 너그럽게 가지며 일을 부지런히 함으로써 삼가 하늘의 복을 맞아 다같이 태평한 세상을 이루도록 하라. 이를 천하에 포고하여 모두 들어 알게 하라."

 

3월 5일 임오

정양필(鄭良弼)을 황해 감사로 삼았다.

 

상이 남별궁(南別宮)에 행행하여 청사를 만나보았다.

 

청국이 세폐(歲幣)로 진공하는 것 중에 면포(綿布)는 6백 필, 면주(綿紬)는 1백 필을 감면하였는데, 호조가, 감면한 수량 중에서 면포 6백 필은 백성에게 징수하지 말고 면주 1백 필 값으로 징수하는 면포 4백 필은 우선 그대로 존속하여 나라의 경비에 보태게 하자고 청하니, 상이 모두 없앨 것을 명하였다.

 

3월 8일 을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3월 9일 병술

정사(正使) 인평 대군 이요에게는 노비(奴婢)와 안마(鞍馬)032)  를 하사하고, 부사 이기조(李基祚)는 가자하고, 서장관 사인(舍人) 정지화(鄭知和)도 가자할 것을 명하였다. 요 등의 행차에서 세폐(歲幣)를 줄여줄 것을 청하였는데, 청국이 이를 허락하였기 때문에 상을 내린 것이다.

 

간원이 아뢰기를,
"요즈음 세도(世道)가 날로 나빠지고 인심이 착하지 못하여 주인을 배반한 종으로서 권세가에 투신해 들어간 자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고(故) 남양군(南陽君) 홍진도(洪振道)는 선조(先朝)의 사패(賜牌)를 구실로 삼아 박준(朴濬)의 노비를 빼앗아 차지하였는데, 박준이 해조에 송사를 일으키자 해원(該院)이 문적(文籍)을 상고하여 법대로 처결하였습니다. 그런데 진도의 진소(陳疏)로 인하여 상의 엄지(嚴旨)가 여러 번 내려 다시 형조로 하여금 처결하게 하니, 형조는 성상의 뜻을 받드는 것만 생각할 뿐 사리의 곡직을 돌아보지 않고 선조(先朝)의 수교(受敎)가 있다는 것으로 이유를 붙여 진도에게 결급(決給)하였고, 심지어 참판이 그것이 불법인 줄 알고 연대 서명(署名)을 하려고 하지 않자 판서가 혼자서 스스로 서명하여 조금도 기탄이 없었으니, 공론을 아랑곳하지 않고 사심을 따라 법을 무시한 정황이 극히 놀랍습니다. 청컨대 형조 판서 윤이지(尹履之)를 먼저 파직하고 뒤에 추고하소서."
하니, 따르지 않았다.

 

3월 10일 정해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헌부가 해서(海西)의 쌀 1만 4백여 석과 피곡(皮穀) 8만 2천 5백여 석을 각 역참(驛站)과 각 고을에 나누어 주되 무상으로 지급하거나 혹은 유상으로 대출해 주어서 굶주린 백성들의 당장 위급한 형편을 구제할 것을 청하니, 묘당으로 하여금 참작하여 조처하게 하라고 답하였다. 비국이 의주(義州)·안주(安州)·평양(平壤) 등지에 각각 관향곡(管餉穀) 1천여 석을 내주어 그것으로 동전(銅錢)을 사서 화폐를 통행시키는 계기가 되게 할 것을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또 5두(斗)의 쌀을 거둘 때 그 절반은 동전으로 대신하게 할 것을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3월 11일 무자

간원이 아뢰기를,
"금년은 기근이 더욱 심하여 백성들이 많이 사망하니, 참으로 애처롭습니다. 청컨대 도성과 기전(畿甸)·양서(兩西)에 각각 진제청을 설치하소서. 도성은 으레 담당 관원이 있으니 그만두고 외방은 본도의 도사(都事)로 하여금 일을 맡아 고을을 순회하면서 살펴보게 하되, 길거리에 방문(榜文)을 내걸거나 혹은 마을에다 통지함으로써 길바닥에 떠돌아 다니는 사람들로 하여금 때를 놓치지 말고 찾아가도록 하여 앉아서 죽을 때만 기다리는 일을 면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그 후에 비국의 복계(覆啓)로 인하여 진제청을 설치하였다.

 

헌부가 아뢰기를,
"진주(陳奏)하여 세폐를 줄인다는 허락을 받아온 것은 그 기미가 이미 드러난 것을 뒤따라 성사시킨 일에 지나지 않는 것인데 받는 상이 너무 무거우니, 사신 이하 인원들에게 시상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황해 감사 정양필(鄭良弼)이 사조하니, 면유하여 내보냈다.

 

3월 12일 기축

상이 하교하였다.
"전 황해 감사 남선(南翧)은 조정의 깊은 뜻을 도외시한 채 그 직에서 이미 체직되었다는 것을 이유로 직책을 다하지 않고 떠돌며 곤란을 겪는 적자(赤子)를 태연하게 방치하였으니, 매우 놀랍다. 먼저 파직하고 뒤에 추고하여 다른 사람들을 경계토록 하라."

 

좌의정 이시백(李時白), 우의정 한흥일(韓興一)이 아뢰기를,
"정부(政府)가 홍문록(弘文錄)에 권점(圈點)을 칠 때 당하 문관을 이조가 으레 있는 대로 전부 써서 올리는 것인데, 오늘 회좌(會坐)에는 병술년 정시(庭試)와 무자년 식년방(式年榜)을 누락시키고 쓰지 않았으니, 매우 세심하지 못한 처사입니다. 당해 관리를 추고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이날 권점을 치기는 하였으나 결국 임용하지 않았다.】

【태백산사고본】 6책 6권 11장 A면【국편영인본】 35책 471면
【분류】인사-관리(管理) / 사법-탄핵(彈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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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3일 경인

헌부가 사신 이하의 상전(賞典)을 도로 거둘 것을 거듭 청하니, 답하였다.
"대군(大君)의 직책은 본디 국정에 관여하지 않는 것이나 부득이 망극한 국사로 인하여 상중에 있는 자식의 정을 무시하고 최복(衰服)을 벗어던진 채 찌는 더위와 매서운 추위를 무릅쓰고 재차 연산(燕山)에 가서 온갖 고초를 다 겪고 비로소 우리의 청을 얻어냈다. 더구나 그 사이에 우리 나라와 불편한 문제가 거듭 발생하여 일이 장차 어찌될지 모를 처지에, 있는 힘을 다해 주선하여 무사하게 만들었는데 이제 그를 공이 없다고 하면 되겠는가. 그리고 직분상 당연한 일이라고 평계댄다면 안마(鞍馬)와 자급을 또한 내릴 것이 뭐가 있겠는가. 그대들의 논의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른다고 이를 만하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서로(西路)에 동전을 유통시킬 것이라는 것을 이미 통지하여 알렸으나 다만 전문(錢文)의 수량이 적어 널리 통용하기가 어려워 호조 판서 원두표(元斗杓)와 상의하였더니, 동전을 주조하는 것이 차라리 사들이는 것만 못하다고 하였습니다. 이제 듣건대 한인(漢人)이 우리 나라가 동전을 쓴다는 말을 듣고 많이 싣고 나와 요동에다 두고 역관(譯官)과 서로 그 값을 약정하였다고 하는데, 대체로 그 동전의 분량은 80칭(稱)이며 1칭은 70관(貫)으로 1만 7천 문(文)이니, 80칭의 총량은 1백 30여만 문에 이르고 그 값은 은으로 1천 6백 냥이라 하였습니다. 이번 사은사(謝恩使)의 행차에 그 값을 보내 방물(方物)을 싣고 갔다가 돌아오는 말로 실어오면 일이 매우 온편하겠으니, 호조로 하여금 그 값을 부쳐 보내게 하되 만약에 부족하면 상평청(常平廳)으로 하여금 그중 3분의 1을 보조하도록 하여 무역해 오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이와 같이 한다면 일이 매우 편하고 좋겠으나 다만 호조의 물력이 지금 고갈되어 1천여 냥의 은을 갑자기 마련하기가 어려울 듯하니, 먼저 해조에 물어 조처하라."
하였다. 호조가 회계하기를,
"본조에 저축해 둔 것은 지금 바닥이 났고 또 동전 값인 은 1천여 냥은 실로 갑자기 마련하기는 어려우나 어차피 부득이하다면 본조에서 우선 8백 냥을 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안주(安州)와 정주(定州) 등지에서 지금 곡식을 방출하여 동전을 사고 있으니, 점차 통용해 보아 시행할 만하다는 것을 안 다음에 사오는 것도 늦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3월 14일 신묘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조익(趙翼)이 지은 해창군(海昌君) 윤방의 시장(諡狀) 중에 역적 강씨(姜氏)를 버젓이 빈궁이라 일컫고 또 글자를 잇대어 쓰지 않고 칸을 띄웠으니, 이는 무슨 의도인가? 승지는 살펴서 아뢰어라."
하였는데, 승지 이일상(李一相) 등이 아뢰기를,
"삼가 하문을 받들고 본 시장을 자세히 살펴보니 역적 강씨를 빈궁이라 일컫고 또 글자를 잇대어 쓰지 않았습니다. 이는 비록 말을 구사하고 글자를 쓸 때 세심히 하지 못한 데에서 나온 것이긴 하나 매우 놀라운 일이니, 시장을 도로 내주어 그로 하여금 고쳐 짓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군부(君父)의 원수를 염두에 두지 않고 사사로이 악역(惡逆)을 존숭한 일은 과거 어느 서책에서 찾아보더라도 듣지 못한 일이다. 어찌 인심과 나라의 기강이 갑자기 이 지경에 이를 줄이야 생각이나 했겠는가. 소름이 끼쳐 그 글을 차마 똑바로 보지 못하겠다. 그것을 받아들인 담당 당상과 낭청 또한 그 처사가 매우 놀라우니, 모두 나추하여 국법을 바루도록 하라."
하였다. 【태상(太常)이 옥당과 시호를 의논하여 이조와 예조에 보내면 거기서 도당(都堂)으로 보내 입계하는 것이 규례이다. 이른바 해조는 곧 예조이다. 그 당시의 참의 이시해(李時楷)는 이때 외방으로 나가 전주 부윤(全州府尹)으로 있었는데 상이 잡아올 것을 명하였고, 좌랑 채지연(蔡之沇)은 이때 연서 찰방(延曙察訪)으로 있었는데 즉시 수금되고, 마침내 도배(徒配)되기에 이르렀다.】

【태백산사고본】 6책 6권 11장 B면【국편영인본】 35책 471면
【분류】인사-관리(管理) / 사법-탄핵(彈劾) / 변란-정변(政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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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의정 김육, 좌의정 이시백, 우의정 한흥일이 상차하기를,
"저번에 정부(政府)가 합좌(合坐)하였을 때 예조가 해창군(海昌君) 윤방과 서천군(西川君) 정곤수(鄭崑壽)의 시장을 올렸는데, 신들은 임금께 계달할 문자라서 반드시 이미 신중하게 살펴보고 왔을 것으로 생각하였고, 또 오후 늦게 개좌(開坐)하여 여러 가지 일이 바빠 미처 읽어보지 못하고 조심스레 종이 말단에 서명하였을 뿐입니다. 어찌 그 속에 이와 같이 큰 착오가 있을 줄이야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삼가 정원에 내리신 분부를 보고 깜짝 놀라 황공한 마음으로 대죄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경들은 안심하고 대죄하지 말라."
하였다.

 

해숭위(海崇尉) 윤신지(尹新之)가 상소하기를,
"신은 삼가 듣건대, 선신(先臣) 시장 가운데 잘못 쓴 문자로 인하여 성지(聖旨)가 준엄하여 그것을 받아들인 담당 관리를 잡아다가 추고하라는 명을 내리기까지 하였다 하니, 신은 이 소식을 듣고 황송하고 떨리어 어찌할 바를 모른 나머지 감히 죽을 죄를 무릅쓰고 그 일의 줄거리를 대강 진달할까 합니다.
신이 경진년033)  에 선신의 상을 만나 상중에서 선신의 평소 행적을 대강 기록하여 대제학 이식(李植)에게 시장을 지어달라고 청하여 지어낸 문자로 이미 정본(正本)을 써 두었으나 계속 국가에 일이 많아 미처 시호를 청하지 못하고 있던 중 이식이 죽어버렸습니다. 시호를 청하는 규정에 시장을 지은 사람의 성명은 이미 죽은 사람으로 쓸 수 없으므로 다시 시장을 판중추부사 신 조익(趙翼)에게 청했더니, 그는 ‘이식의 문장이 뛰어나니 이 글을 고쳐 지을 것이 없다. 그 글을 그대로 쓰고 성명만 고쳐 쓰는 것이 무방하다.’ 하고 한두 군데만 수정하여 보내왔기에 그에 따라 다시 써서 태상(太常)으로 보냈던 것입니다. 어찌 그 안에 있는 문자가 이와 같은 오류가 있어 성상의 엄한 분부가 내리는 이런 일까지 있을 줄이야 알았겠습니까.
대체로 이 글이 지어진 때는 강역(姜逆)의 옥사가 일어나기 이전이었으니, 지난해에 다시 쓸 때 만약 잘 살펴보았더라면 반드시 그대로 놓아두어 착오를 범할 일은 없었을 것인데, 당초의 원본대로 그대로 썼기 때문에 범범하게 넘어가고 만 것이며, 강빈이란 글자를 잇대어 쓰지 않은 것은 이 또한 글씨를 쓴 사람이 그전 원본대로만 따라 잘못 베낀 것입니다. 이는 참으로 전혀 의식이 없는 가운데 그 사정을 깨닫지 못한 소치이니, 그 병으로 혼매하여 잘못을 저지른 죄는 실로 만번 죽어 마땅합니다. 강적(姜賊)의 흉역(凶逆)한 정상은 신과 사람이 함께 분개하고 천지가 용납하지 못하는 바인데, 신하된 자로서 아무리 극히 어리석어 형편없다 하더라도 어찌 사사로이 악역을 존숭하여 스스로 불칙한 형벌에 빠져들 자가 있겠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신을 사패(司敗)에 내려 먼저 신의 죄를 바루소서."
하니, 상이 그 소장을 금부에 내리며 이르기를,
"늙고 병든 사람을 하옥하여 다스릴 수는 없으나 이 상소를 유사로 하여금 의논하여 아뢰게 하라."
하였다. 금부가 아뢰기를,
"역적 강씨는 죄안이 이미 결정되고 명호(名號)도 이미 삭탈되었는데 계속 빈궁이라 일컫고 또 잇대어 쓰지 않은 것은 실로 극히 놀라운 일로서 시장을 받아들인 관리가 이미 잡아들이라는 명을 받았으니, 이것이 비록 그전의 오래된 글이라 하더라도 한 집안 자제로서 이 일을 주관한 자만 그 죄를 면하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하니, 상이 법에 비추어 처단하게 하였다. 금부가 또 아뢰기를,
"죄를 부과하는 규례는 조율(照律)하는 것 이외에 달리 법을 논의한 규례가 없으므로 부득이 비율(比律)로 조율하여 들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인심과 나라의 기강이 날이 갈수록 무너져서 이미 극도에 이르렀다. 윤기(倫紀)·강상(綱常)과 궁흉(窮凶)·극악(極惡)의 변을 보더라도 태연히 이상하게 여기지 않아 이와 같이 해괴한 일이 생긴 것이니, 이는 윤가의 죄가 아니라 사실은 그것을 온 세상이 예사롭게 보는 죄이다. 인심이 이와 같기 때문에 혹시 그의 임금을 폄하여 논의하는 자가 있더라도 의심을 하지 않고 스스로 그 말을 믿어 그런 일이 당연한 것처럼 여기니, 이러한 풍조를 끝내 다스리지 않아 모르는 사이에 자꾸 불어나게 한다면 장차 금수가 되지 않을 자가 드물 것이다. 전후에 내린 분부는 실로 깊은 뜻이 있는데 본부(本府)는 이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감히 애매하게 비율하여 상례에 따라 책임만 메꾸었으니, 더욱 놀랍다. 당해 당상과 낭청을 추고하고, 이 공사(公事)는 그들로 하여금 고쳐서 들여오게 하라."
하였다. 금부가 ‘결장구십(決杖九十)·도 이년반(徒二年半)으로 하되 나이가 70인 자는 수속(收贖)하고, 고신(告身)을 전부 추탈(追奪)한다.’는 것으로 의율(擬律)하여 아뢰니, 하교하기를,
"해숭위 윤신지는 왕실의 지친(至親)이니 어찌 별다른 뜻이 있었겠는가. 그저 자세히 살피지 못한 소치인 듯하나 국법이 지엄하여 감히 사사로운 정을 따라 법을 폐할 수는 없다. 그러나 또한 어찌 친족을 친근히 하고 관대히 용서하는 도리가 없을 수 있겠는가. 다만 파직만 하라."
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청사(淸使)가 관소에 있는데도 연서 찰방(延曙察訪)을 즉시 차출하지 않고 있으니, 이조 낭청을 추고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어제 보니 이조의 낭관 세 사람이 동시에 병을 칭탁하여 극히 놀라웠는데, 제때에 응당 해야 할 일을 가관(假官)으로 하여금 대행하게 하여 일이 지연되게까지 하였으니, 더욱 놀랍다. 그 동시에 정병(呈病)한 데에는 반드시 그만한 까닭이 있을 것이므로 매우 해괴하다. 모두 추고하라."
하였다. 정랑 홍처량(洪處亮), 좌랑 김휘(金徽)·김좌명(金佐明)이 다 조사를 받고서 사직소를 내고 들어가 버리자, 잡아다가 가둘 것을 명하였고, 마침내 처량과 김휘는 파직하고 좌명은 속죄(贖罪)하였다.

 

3월 15일 임진

청사가 돌아가자, 상이 서교(西郊)에 행행하여 전송하였다.

 

상이 하교하였다.
"이제 보건대 이조 낭관들의 태만한 정상 중에서도 저번 홍문록(弘文錄)을 써서 올릴 때 방목(榜目)을 누락한 것은 더욱 해괴한 일이다. 이런 일을 그대로 두면 반드시 뒤폐단이 있을 것이니, 전일 홍문록의 권점(圈點)은 삭제하고 그 누락했던 방목을 모두 써서 올리게 하여 다시 권점을 치는 것이 공정할 듯하다. 이러한 뜻을 정부에 말하라."

 

3월 16일 계사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정지화(鄭知和)를 승지로 삼았다.

 

부제학 민응형(閔應亨)이 아뢰기를,
"신은 지난 겨울 옥당의 관원으로 있으면서 해창군 윤방의 시장에 대해 문자가 많아 두루 살피지 못하고 상례에 따라 시호를 논의했을 따름이었는데, 이제 삼가 정원에 내리신 분부를 받들고 보니 황공하여 대죄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이미 두루 살펴보지 않았으면 어떻게 알 것인가. 경은 대죄하지 말라."
하였다.

 

좌참찬 심액(沈詻)이 시장을 살펴보지 못했다는 것으로 상차하여 대죄하니, 대죄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이조 참의 조수익(趙壽益)과 예조 참의 이지항(李之恒) 등이 또한 시장을 살펴보지 못했다는 것으로 상소하여 자책하니, 상이 그 소를 금부에 내렸다. 금부가 ‘장 일백에 고신을 박탈한다.’는 것으로 조율하니, 상이 일렀다.
"직책이 중요 임무를 담당하지 않고 또 그 시장이 다른 관사를 거쳐 왔으므로 상고해 열람하지 않았다는 말은 사실인 듯하다. 속전(贖錢)만 바치게 하라."

 

해은군(海恩君) 윤이지(尹履之)가 진소하여 대죄하니, 상이 그 소를 금부에 내렸다. 금부가 ‘장 일백 도 이년반으로 하되 나이 70인 자는 수속(收贖)하고, 고신을 전부 추탈(追奪)한다.’는 것으로 조율하니, 공으로 1등 감할 것을 명하였다.

 

교리 조한영(曺漢英)과 홍처대(洪處大) 등이 윤방 시장의 해괴한 문자를 끝내 살펴보지 못했다는 것으로 상소하여 자책하니, 상이 그 소를 금부에 내렸다. 금부가 아뢰기를,
"시호를 논의할 때 이미 참여하여 상고했으면 아무리 범범하게 지나쳤다 하더라도 그 과실은 예관(禮官)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전 부제학 민응형(閔應亨)은 늙고 병든 사람으로서 일이 많은 탓으로 바쁜 가운데 미처 두루 살펴보지 못했다고 하였는데, 이미 두루 살펴보지 못하였으면 그 조어(措語)가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는 것은 형세상 그럴 수도 있기 때문에 분간(分揀)034)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비록 범범하게 지나쳤다고 하더라도 일단 한 번 보았으면 어찌 몰랐을 리가 있겠는가. 한(漢)나라 법으로 논죄하면 그 죄는 복주를 용서받을 수 없으니, 어찌 가볍게 처단해서야 되겠는가. 다시 조율하라."
하였다. 금부가 ‘장 일백’으로 조율하니, 상이 물리치며 이르기를,
"국가의 일을 하지 않으면 그만이지만 한다면 어찌 이렇게 할 수 있는가. 매우 한심한 일이다."
하였다.

 

연접 도감(延接都監)이 아뢰기를,
"대통관(大通官) 한보룡(韓甫龍)이 말하기를 ‘섭정왕의 죽음을 알린 부음(訃音)과 그를 추숭(追崇)한 칙서를 북경에서 도로 환수하라는 명이 있으니, 즉시 관소로 들여보내라.’ 하였습니다."
하니, 그렇게 할 것을 허락하였다.

 

3월 17일 갑오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이후원(李厚源)을 대사헌으로 삼았다.

 

상이 서교에 행행하여 칙사를 마중하고 인정전(仁政殿)에서 접견하였다. 칙서는 다음과 같다.
"정친왕(鄭親王)·손친왕(巽親王)·단중친왕(端重親王)·경근친왕(敬謹親王)이 시위 대신(侍衛大臣)과 함께 이구동성으로 아뢰기를 ‘태종문황제(太宗文皇帝)께서 승하하셨을 때 제왕(諸王)·패륵(貝勒)·대신(大臣) 등이 한 마음으로 나라를 굳게 지키자고 목숨을 걸어 명세하고 황상을 붙들어 세웠습니다. 그 당시 신들은 모두 섭정왕을 세우려고 한 의논은 없었고 오직 그의 아우 예군왕(豫郡王)이 선동하여 권해 올렸습니다. 그때는 황상께서 아직 어리셨기 때문에 일찍이 국정을 그와 정친왕(鄭親王)에게 맡겨 함께 다스리도록 하였으나 그뒤에 혼자서 권력을 독차지하여 정친왕은 국정에 간여하지 못하게 하고 마침내 자기의 친아우 예군왕으로 보정(輔政)을 삼았습니다. 숙왕(叔王)으로서 맹세를 어기고 권력을 자행하며 스스로 황부섭정왕(皇父攝政王)이라 부르면서 황상을 붙들어 세운 공을 전부 자기의 공으로 삼는가 하면, 또 태종문황제께서 평소에 은혜로 보살핀 제왕(諸王)·대신(大臣)·관병(官兵) 들이 우리 황상을 위해 목숨을 돌보지 않고 있는 힘을 다하여 성을 공격하고 적을 깨뜨려 적구(賊寇)를 초멸한 공을 조정에 돌리지 않고 전부 자기의 공으로 삼았습니다. 그 의장(儀仗)·음악·시위(侍衛)하는 사람을 다 황상과 똑같이 하고 저택을 만든 것도 황상의 궁전과 다름이 없었으며, 관아 창고의 재물을 제 마음대로 소비하여 나라에서 짠 비단과 은냥(銀兩) 등 보물을 황상에게 주지 않고 그가 임의대로 썼습니다.
또 황상(皇上)의 시신(侍臣)인 의이등(宜而登)·진태(陳泰) 일족 및 우록(牛彔)035)  에 소속한 강림(剛林) 일족, 파이달칠(把爾達七) 일족을 전부 자기의 기(旗) 아래로 거두어 들였으며, 또 황궁(皇宮)의 원내(院內)로 직접 가서 ‘태종문황제의 자리는 원래 찬탈하여 들어선 것이다.’라는 말로 황상의 시신들을 을러대고 억눌렀습니다. 또 결점을 꼬치꼬치 찾아내어 숙친왕(肅親王)을 몰아서 죽이고 또 그의 비(妃)를 차지하였는가 하면, 관병(官兵)의 호구(戶口)와 재산 등을 이미 황상께 주었다가 도로 회수하여 스스로 제몸을 풍부하게 하였습니다. 또 황상의 시신 액이극알청(厄而克歹靑)을 자기편으로 돌리기 위하여 오배(吳拜)·노십(勞什)·강림(剛林)·기충격(祈充格)을 그에게 보내 후작(侯爵)으로 봉했다가 알청이 자기를 따르지 않자 다시 후작의 봉호를 파기하였습니다. 또 노십(勞什)을 보내 황상의 시신 십락복고(什諾卜庫)에게 말을 전하고 꾀이기를 ‘나는 너를 몹시 아끼는데 너는 알고 있는가?’ 하여 일체의 정사(政事)와 비표(批票)를 쓰지 않고 일률적으로 황부섭정왕지(皇父攝政王旨)를 썼는가 하면, 또 도리를 거스르고 생모(生母)를 태묘(太廟)에 들여넣었습니다.
대체로 그가 좋아하는 사람은 관직에 적합하지 않은 자라도 턱없이 올려주고 그의 마음에 맞지 않은 자는 턱없이 강등시키며, 또 그의 아내를 스스로 추봉(追封)하였습니다. 또 제왕·패륵(貝勒)·패자(貝子)·공(公) 등에게 황상을 사후(伺候)하지 못하게 하고 마침내 조정을 자기가 차지하여 그들로 하여금 매일 자기의 관아 앞에서 사후하게 하였습니다. 어제는 그의 근시(近侍) 액극심(額克沁)·오배(吳拜)·속배(速拜)·노십(勞什)·발라회(鉢羅會)가 망왕(亡王)의 유지(遺旨)라고 하며 국정을 어지럽히려다가 단중친왕(端重親王)·경근친왕(敬謹親王) 및 시위 대신들의 공동 고발을 당했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노십과 발라회는 법에 따라 처결하고 액극심·오배·속배는 무겁게 치죄하였는데, 이러한 일로 생각해 볼 때 분명히 황제의 자리를 찬탈할 마음이 있었습니다. 신들은 모두 그 세력이 두려워 소리를 삼키고 감히 말을 꺼내지 못하였으나 이와 같은 실상은 황상께서 모르시기 때문에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아룁니다. 이제 그의 공이 크다는 이유로 태묘에 부향(祔享)하였는데 이러한 일체 어긋나고 잘못된 일들은 다 신들이 그 세력을 두려워하여 순종한 까닭으로 이렇게 된 것입니다. 삼가 원컨대 황상께서는 무겁게 처치하여 그들 모자(母子)의 묘향(廟享)을 파기하소서.’ 하였다.
짐은 그에 따라 조정에 있는 대신에게 명하여 자세히 회의하게 하였는데 모든 사람의 말이 다 같았다. 반복하여 생각해 볼 때 제왕과 대신들이 어찌 헛소리를 하겠는가. 그런데 뜻밖에 그의 근시 소사합점대목궤륵(蘇沙哈占代木几勒)이 자수하기를 ‘주인이 비밀히 황제의 의복을 만들고 황제가 쓰는 주옥 등 보물을 숨겨 두었으며, 일찍이 하라회(何羅會)·오배(吳拜)·속배(速拜)·노십(勞什)·발라회(鉢羅會)에게 상의하고 황상을 배반하기 위해 그가 관장하는 두 고산(固山)을 영평부(永平府)로 이주시켰습니다.’ 하고, 또 자수하기를 ‘하라회가 일찍이 옛 주인 숙친왕(肅親王)의 아들을 만나 「마땅히 죽일 놈」이라는 등의 말로 욕을 하였습니다.’ 하였다. 짐은 그 말을 듣고서 즉시 제왕·대신으로 하여금 상세히 심문하게 하였더니 하나하나가 모두 사실이었기 때문에 하라회를 법에 따라 처하였다.
이와 같은 사적을 근거로 볼 때 찬탈을 모의한 일은 과연 진실이었으므로 삼가 이를 천지·종묘·사직에 고하고 그들 모자와 아내에 대한 추봉(追封)을 파기하고 묘향(廟享)을 철회하며 그에 따른 은사(恩赦)를 중지한다. 이상의 일을 천하에 포고하여 모두 들어 알도록 하노라."

 

3월 18일 을미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행 판중추부사 조익(趙翼)이 상소하기를,
"삼가 들으니, 고 상신 윤방의 시장 가운데 말로 인하여 성상의 분부가 극히 준엄하시어 그 글을 받아들인 담당 관원을 잡아다가 추고하라는 명이 있기까지 하였다 하는데, 그 시장을 지은 사람을 신의 이름으로 썼기 때문에 신은 삼가 놀라움과 두려움을 이기지 못해 스스로 몸둘 곳이 없습니다. 신은 이 자세히 살피지 못한 죄에 대해 진정 할 말이 없습니다마는 그 시장의 내용은 사실 신이 지은 것이 아닙니다. 지난 가을경에 판서 윤이지(尹履之) 형제가 이식(李植)이 전일에 지은 선신(先臣) 윤방의 시장을 가지고 와 신에게 보이고 그것을 고쳐 지어달라고 요구하기에 신이 사양하기를 ‘이식은 문장의 큰 솜씨로서 그의 글은 누가 감히 흠잡을 수가 없는데 어찌 감히 고쳐 지을 것인가.’ 하니, 하는 말이 ‘그 문장이 만족스럽지 못해서가 아니고 다만 글을 지은 사람의 성명을 이미 죽은 자의 것으로 쓸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하므로, 신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그 문장은 그대로 쓰고 글을 지은 사람만 신의 이름으로 쓰는 것이 좋겠다.’ 하고, 그저 대강대강 보아가며 한두 군데 글귀만 수정하여 보냈으니, 그 곡절은 이런 정도에 지나지 않습니다.
신은 정신력이 본디 약한데다 여러 차례 참혹한 일을 당하여 심신(心神)이 손상되었고 또 노병(老病)으로 흐리멍덩해져 일반적으로 문자를 볼 때는 반드시 자세히 살펴보아야 그 뜻을 알며 만약 거칠게 보아넘기면 전혀 무슨 말인지 모르니, 비록 보통 서찰을 보더라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때에 재직하여 직무에 쫓겨 한가한 틈이 없으므로 언제나 공무를 끝내고 물러가면 하루 종일 피곤하니, 이 때에 문자를 보면 어찌 자세히 살필 수 있겠습니까. 게다가 이 글은 문장가의 솜씨로 지은 것이기에 미진한 데가 있을 것을 전혀 의심하지 않았으므로 더욱 깊이 살피지 않았습니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볼 때 그 시장 속의 내용을 전혀 기억할 수 없으니, 정신이 혼매한 정도가 이와 같이 심합니다.
역적 강씨의 죄악은 천지가 용납하지 않고 신인(神人)이 다 분개하는 바인데, 더구나 신은 타고난 본성이 유달리 악을 미워하여 실로 평소에 그를 깊이 미워한 경우이겠습니까. 그리고 신처럼 유달리 악을 미워하지 않더라도 천지간에 어찌 이 악역(惡逆)을 높이는 자가 있겠습니까. 이는 인정상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또 더구나 신은 평생에 선왕(先王)의 깊은 은총을 분수에 넘게 입었으므로 늘 생각할 때마다 슬픈 정이 끝이 없었으니, 참으로 이른바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한다는 경우입니다. 어찌 군부(君父)의 원수를 용납하고 감쌀 리가 있겠습니까. 만일 신이 역적 강씨에게 털끝만큼이라도 용납하고 감사하는 마음이 있고 선왕에게 털끝만큼이라도 소홀한 뜻이 있다고 말한다면 천지의 신명이 머리 위에 굽어보고 있습니다마는 실로 전혀 이 마음은 없습니다. 다만 신이 정신이 혼매하고 또 다른 사람의 저술이므로 사양하고 고쳐 짓는 일을 감당하지 않았기 때문에 깊이 살펴보지 않아 그 속에 이와 같은 어긋나고 잘못된 말이 있는 줄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으로 말하면 참으로 전혀 그 마음이 없었으나 그 일로 말하면 혼매하여 잘 살피지 못한 죄는 도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비록 이로써 무겁게 죄율은 받더라도 사실 마음에 달게 여기는 바입니다.
신이 잘 살피지 못한 일로 인하여 임금의 노여움이 준엄하시고 여러 신하들이 죄를 입었으므로 신의 송구하고 떨리는 마음의 어찌 한이 있겠습니까마는, 군신간은 부자간과 같으므로 이에 감히 그 곡절을 대략 진술하니, 더욱 두려운 마음 그지없습니다. 신은 감히 먼 곳에 물러가 있을 수 없어 강 건너에 당도하여 거적자리를 깔고 대죄합니다."
하니, 그 소를 금부에 내려 조율하여 아뢰게 할 것을 명하였다. 금부가 복계(覆啓)하기를,
"대신의 죄를 논하는 것은 뭇 관원의 경우와 다르니, 비록 대각(臺閣)의 사체로 말하더라도 대신에 대해서는 범한 죄가 무겁더라도 쉽게 논핵하지 못하는 것은 곧 나라의 체모를 높이고 대신을 존경하기 때문이며, 또 대신에게 장률(杖律)을 적용하는 것도 전례가 없습니다. 신들은 유사(有司)로 있으면서 사체와 규례가 어떠한가는 돌아보지 않고 힘써 임금의 뜻만 받들어 행할 줄 안다면 신들의 죄가 더욱 클 것이므로 이에 감히 곧바로 조율하여 단죄하지 못했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왕자와 대신은 본디 동등한 것인데 저번에 대관(臺官)의 계사를 보니, 곧바로 왕자에 대해 조율할 것을 청하였으므로 나는 법례가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의심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이제 이 계사를 살펴 보니 대관이 아뢴 것과는 서로 다르다."
하였다.

 

3월 19일 병신

금부가 조한영(曺漢英) 등에 대하여 적당한 율문이 없기 때문에 비율(比律)을 적용하여 ‘장 일백·도 이년반’으로 조감(照勘)하여 아뢰니, 상이 장형(杖刑)을 가하지 말 것을 명하고 다만 공으로 1등을 감하게 한 뒤에 이어 하교하였다.
"이것은 사람을 해치는 것이 즐거워서 하는 것이 아니다. 이와 같이 놀라운 문자가 서너 군데의 아문과 수많은 관원을 거쳤는데도 전혀 깜짝 놀라는 일이 없이 마침내 입계하는 데까지 이르렀으니, 나라의 기강이 과연 어떠한가. 더구나 태상(太常)과 홍문관은 시호를 의논하는 과정에서 반드시 평생의 행적을 자세히 살폈을 것인데 어찌 살피지 못했다고 핑계댈 수 있는가. 나는 왕위를 지키고 있으면서 선조(先朝)의 떳떳한 법을 무너뜨릴까 두렵기 때문에 이와 같이 하지 않을 수 없다. 또 이는 특별한 일이 아니지만 기강이 한번 무너진 뒤로는 인심이 대체(大體)에 어두우니, 이 때문에 놀라워서 또한 말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태상의 관원도 사리상 그들만 죄를 면하기는 어려우니, 함사(緘辭)를 보내 추문한 뒤에 조율하여 처치하라."

 

영의정 김육이 상차하기를,
"중신(重臣)과 근신이 서로 이어 견책당하고 상신(相臣)의 소가 또한 왕부(王府)에 내려지기까지 하였으니, 이를 보고 들은 자들은 크게 두려워하고 조야가 놀라 어수선합니다. 만약 그날 많은 관원이 서로 모였을 때 다른 일을 다 제쳐두고 침착하게 자세히 살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반송하여 그것을 고쳐 지어서 들여오게 하였더라면 이러한 일은 아예 없었을 것인데, 그것을 펴보지도 않고 그대로 입계하였으니, 이는 오로지 신이 수석(首席)에 있으면서 면밀하게 살펴서 신중을 기하지 못한 데서 나온 것입니다. 이로써 말한다면 여러 신하들의 죄는 오로지 신의 몸에 있습니다.
방금 삼가 태상(太常)을 추감(推勘)하라는 분부를 보았는데 신은 현재 본시(本寺)에 제조로 있습니다. 이제야 비로소 기억해 보니, 교외(郊外)에서 병으로 누워 있을 때 본시의 하인이 시장을 가져 와 보이기에 신은 ‘병으로 물러나 있는 몸이 어찌 감히 중대한 일에 간여할 수 있는가. 오직 여러 신하들이 규례에 따라 상의하면 될 것이다.’고 말하고 그에게 도로 가지고 가게 하였으니, 이는 신에게도 잘 살피지 못한 잘못이 있는 것입니다. 전후에 걸쳐 잘못이 있는데 어찌 감히 신만이 형장(刑章)을 면할 수 있겠습니까. 삼가 원컨대 전하께서는 신의 몸에 죄를 돌려 일벌백계의 조치로 삼아 조정으로 하여금 조금 안정되게 하신다면 신의 한 몸이 고향으로 돌아가 죽더라도 달갑게 눈을 감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내 성의가 독실하지 못한 것을 스스로 탄식할 뿐, 무어라고 하유할 바를 모르겠다. 여러 사람이 모여 앉아 떠들썩한 때 잘 살펴보지 못하는 것은 사리상 그럴 수 있는 일이므로 나는 일찍이 괘념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법문(法文)으로 말하더라도 어찌 모르는 것에 대한 책임이 있겠는가. 더구나 참여하여 들은 일이 없이 도로 보낸 경우이겠는가. 또 어찌 제사(諸司)가 삼가지 않아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을 미리 염려하여 잗단 사무를 깊이 살필 것인가. 경에게는 조금도 잘못한 바가 없으니, 안심하고 국사를 논하라. 그리고 말을 할 때마다 늘 서둘러 물러가려는 뜻이 있으므로 나는 실망하여 한탄하지 않은 적이 없다. 바라건대 경은 다급한 국사를 생각하여 물러갈 생각일랑 하지 말고 내가 짊어진 짐을 도와 어려운 시사를 구제하라."
하였다.

 

대사간 조석윤(趙錫胤)이 상소하기를,
"삼가 보건대 요즈음 고 상신 윤방의 시장 가운데 문자가 잘못된 일로 인하여 성상께서 조신(朝臣)들이 악역(惡逆)을 사사로이 존중한 것으로 의심하시어 전후에 걸쳐 내리신 비지(批旨)가 신하로서 감히 듣지 못할 것이 많이 있었으니, 삼가 잘못을 이해하고 용서하는 성상의 도에 어긋남이 있지 않은가 염려됩니다. 오늘날 조정 신하는 어느 누구든지 선왕(先王)의 두터운 은혜를 받지 않은 사람이 없으니, 만일 미쳐서 이성을 잃지 않았다면 누가 감히 군부의 원수를 잊고 이미 죽은 역적을 감싸겠습니까. 인정과 천리(天理)로 따져 보더라도 절대로 이럴 리는 없습니다.
성상의 하교에 ‘윤신지(尹新之)는 왕실의 지친(至親)이니 어찌 별다른 뜻이 있겠는가. 그저 잘 살피지 못한 소치일 뿐이다.’라는 말씀이 계셨는데, 이는 성상께서 이미 아무런 의도없이 과오를 범한 실상을 살피신 것입니다. 그런데 유독 담당 낭청과 옥당의 관원에 대해서만 너그럽게 살펴주시지 않으니, 신은 진실로 이상하여 그 까닭을 모르겠습니다. 대체로 신하로서 임금을 사랑하는 마음은 어찌 관계의 멀고 가까움과 신분의 높고 낮은 것으로 차이가 있겠습니까. 임금도 또한 그것을 가지고 달리 보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더구나 일개 가정에서 일을 맡은 자도 오히려 잘 살펴보지 못하는 잘못을 범하는 법인데, 해조가 상례에 따라 받아들이고 옥당이 범범하게 보아 넘긴 것이 어찌 특별히 그 사이에 깊은 뜻이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만일 능히 차분한 마음으로 헤아려 보신다면 반드시 개운하게 풀려 의심이 없을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이번에 율에 따라 단죄하는 조처는 내 어찌 그만둘 수 있겠는가. 감히 국법을 폐기할 수 없다."
하였다. 석윤이 또 상소하기를,
"이번에 시장 문자가 패려한 것은 국법으로 말하면 사사로이 악역을 존숭한 일이니, 막대한 죄명이 되겠으나 사정으로 미루어 보면 흐리멍덩하여 잘 살피지 못한 것으로 마땅히 용서할 일입니다. 그전의 문장을 그대로 쓴 것도 아무런 의도가 없는 것이며 더구나 범범하게 훑어본 것은 잘 살피지 못한 과실에 지나지 않는데, 유배하라는 명이 유사가 올린 조율(照律) 밖에서 나왔으니, 이 어찌 성상께서 아랫사람의 본심을 헤아려 용서하는 도리이겠습니까. 앞으로는 상하가 서로 막히고 사람마다 두려워하여 모두 인혐하고 물러나 스스로 몸을 보전하려고 할 것이니, 어찌 성덕(聖德)의 흠결과 국가의 걱정이 되지 않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경의 말이 아무리 이와 같더라도 법은 폐기할 수 없다."
하였다.

 

3월 20일 정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신면(申冕)을 부제학으로, 권시(權諰)를 공조 정랑으로, 이한(李)을 호조 참의로 삼았다. 이한은 이시백(李時白)의 아들인데 김자점(金自點)의 집과 혼인을 맺고 그의 문에 출입하였으므로 진신에게 버림받고 사람들의 욕을 먹은 지가 오래되었다. 최혜길(崔惠吉)을 아전(亞銓)036)  으로 삼았는데 공론을 돌아보지 않고 갑자기 이 벼슬을 제수하였으므로 제목(除目)이 내려오자 중외가 놀라워하였다.

 

간원이 【사간 이응시(李應蓍), 헌납 이정영(李正英), 정언 홍중보(洪重普)·이후(李垕).】  아뢰기를,
"신들이 삼가 보건대 고 해창군(海昌君) 윤방의 시장으로 인하여 임금의 노여움이 거듭되고 준엄한 비지가 누차 내려오니, 대소의 신료들이 어느 누군들 소스라치게 놀라지 않겠습니까. 삼가 생각건대 성상께서 크게 노여워하시는 이유가 어찌 범연한 것이겠습니까. 역적 강씨를 빈궁이라고 칭한 것은 참으로 매우 도리에 어긋난 일이며 악역(惡逆)은 사람이면 다함께 미워하는 바인데 그 시장 속에 강빈이라고 칭하였으니, 본가의 자제로서는 아무리 불찰에서 나왔다고 하더라도 어찌 죄가 없을 수 있겠습니까.
듣건대, 그 시장은 곧 이식(李植)이 지은 것으로서 그 사람이 이미 죽어서 입계하는 문자에 이름을 쓸 수 없기 때문에 본가에서 이미 이루어진 그 초고를 조익(趙翼)에게 보내 대략 수정하여 그 이름을 빌렸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늙어 병든 신하가 내용이 긴 문자에 주의를 기울여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하게 보지 못하는 것은 사실 그럴 수도 있는 일이며, 더구나 이식이 글을 지은 시기가 혹시 역적 강씨의 죄악이 드러나기 전이었다면 범범하게 보아 넘길 수 있는 일이니, 어찌 이와 같이 도리에 어긋난 말이 있을 줄을 생각이나 하였겠습니까. 이 때문에 상소하여 대죄하였는데도 상께서 그 소를 해부(該府)에 내릴 것을 명하여 조율하게까지 하셨으니, 신들은 이 소식을 듣고 놀라움과 한탄을 금치 못했습니다. 삼가 이로 인하여 성상께서 대신을 대함에 있어서 혹 그 도리를 얻지 못하실까 염려스럽습니다.
대신이 허물이 있어 상소하여 자책할 경우, 만일 용서할 수 없는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면 상께서는 너그럽게 용서하거나 물리치거나 해야 할 것입니다. 어찌 하급 관원의 소장과 함께 사패(司敗)에 내리고 또 유사로 하여금 조율하게 할 수 있습니까. 윤신지(尹新之)가 이미 왕실의 지친으로서 용서받았는데 늙고 병든 대신만이 홀로 용서받을 만한 길이 없겠습니까. 유신(儒臣)이 유배되는 일에 있어서는 더욱 뜻밖이니, 그것을 불찰이라고 말한다면 사실 그것이 죄가 되겠습니다마는 신들은 불찰의 죄가 과연 유배될 정도로 무거운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대신은 성문 밖에서 석고 대죄하고 유신은 기전(畿甸)에서 쫓겨나므로 조야가 어수선하여 상황이 어떻게 전개될지 알 수 없으며 두려움에 가슴이 떨려 기상이 참담하니, 관계되는 바가 간단하지 않습니다. 빨리 대신을 조율하고 유신을 유배하라는 명을 환수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논한 말이 매우 사리에 맞지 않으므로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번거롭게 논의함으로써 후세에 웃음거리를 남기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사간 이응시, 헌납 이정영, 정언 홍중보·이후가 인피하기를,
"신들은 삼가 성상의 지나친 거조를 보고 나라를 걱정하고 임금을 사랑하는 정성이 솟구쳐 감히 명을 환수하시라는 청을 올렸는데, 마침내 사리에 맞지 않는다는 말씀으로 분부하셨으니, 이는 모두 신들이 군부에게 신임을 받지 못한 소치입니다. 어찌 감히 태연스레 이 벼슬에 눌러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사마공(司馬公)이 말하기를 ‘쇠란한 시대의 임금은 대부분 나약하고 범상하고 우매한 신하들은 임시방편만 구하려 든다. 이러므로 기강이 서지 않는 것이다.’ 하였는데, 참으로 오늘날을 두고 한 말이다. 조율이란 자연 전례가 있는 법이며 더구나 은명(恩命)이란 신하들이 청할 수 있는 것이 아닌데도 어거지로 주장하고 있으니, 나는 그것을 인정할 수 없다."
하였다. 대사간 조석윤(趙錫胤)이 인피하기를,
"요즈음 성상의 중도를 넘어선 거조는 실로 뭇 신하들이 평소에 바라던 것이 아닙니다. 신은 이미 구구한 소견을 여러 차례 소장으로 올렸는데, 이번에는 본원의 동료들이 명을 환수하시라고 청한 계사로 인하여 갑자기 준엄한 비답을 받고 모두 이미 인피하였습니다. 신이 어찌 감히 이 논계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하여 태연하게 처치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사피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응시 등은 모두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헌부가 아뢰기를,
"다소 위엄을 풀으시고 차분한 마음으로 살펴보시어 대신을 조율하라는 명과 유신을 도배(徒配)하라는 명을 환수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전일에 왕자를 조율할 것을 청한 자도 대간이고 대신을 조율하지 말라고 청한 자도 바로 대간이다. 그대들이 만약 깊이 생각했다면 반드시 이 중에 하나를 택해야 할 것인데 어찌하여 그 마음을 이랬다저랬다하는가."
하였다.

 

집의 심노(沈𢋡), 장령 변시익(卞時益)·강여재(姜與載), 지평 정언벽(丁彦壁)이 인피하기를,
"왕자와 대신에 대하여 조율하라는 청은 한 사람의 손에서 나오지 않았는데 어찌 그 마음을 이랬다저랬다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제 전하께서는 전일의 일을 억지로 들추어서 오늘에다 맞추어 대각(臺閣)을 억압하고 언로를 막아버리려고 하시니, 삼가 전하를 위해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이미 준엄하신 비지를 받았으므로 결코 자리에 눌러 있기 어려우니 신들의 직을 체차하소서."
하였는데, 사피하지 말라고 답하니, 심로 등이 모두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헌부가 아뢰기를,
"양사가 모두 인혐하고 물러갔습니다. 대신을 조율하는 것은 체면에 손상이 되고 유신을 유배하는 것도 또한 중도에 지나치니, 그 명을 환수하시라는 청을 어찌 그만둘 수 있겠습니까. 계속 세 통의 소장을 올려 이미 그 직분을 다했다면 더욱 노력하면 그만일 것인데 무슨 미안한 일이 있기에 일마다 쟁론하겠습니까. 결코 다른 마음은 없다고 봅니다. 전후에 논계한 것은 각기 다른 점이 있으나 국사를 위하는 진심이야 어찌 다르겠습니까. 이응시·이정영·홍중보·이후·조석윤·심로·변시익·강여재·정언벽을 모두 출사할 것을 명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고금에 어찌 법을 폐하고 용서를 베풀기를 청한 대관이 있겠는가. 나는 국사를 위하여 자신도 모르게 서글퍼진다. 왕자와 대신은 똑같이 존중하는 것인데 다르게 대하기를 하늘과 땅처럼 현격한 정도만이 아니니, 권세가 돌아간 데를 대강 짐작할 수 있겠다. 논한 말은 사리에 어긋나니, 모두 체차하라. 조석윤이 누차 올린 소장은 생각한 것이 있으면 반드시 진달한다는 뜻에 매우 부합하여 대간의 소장과는 같지 않으니, 출사하도록 하라."
하였다. 석윤이 패소(牌召)에 응하지 않자, 정원이 상례에 따라 파직할 것을 청하니, 파직하지 말 것을 명하였는데, 석윤이 여러 번 상소하여 극력 사피한 뒤에 비로소 허락하였다.

 

우부승지 엄정구(嚴鼎耉)가 시장을 받아들였다는 것으로 진소하여 대죄하니, 하교하기를,
"엄정구는 이미 살펴보지 않았으면 그 죄가 없는 것 같기는 하나 왕명의 출납을 올바르게 하는 도리로서는 어찌 이처럼 불찰을 범할 수 있는가. 추고하라."
하였다. 전 수찬 정두경(鄭斗卿)도 시호를 논의하는 자리에 같이 참여하였다는 것으로 진소하여 대죄하고 또 안질을 앓아 문자를 살펴보지 못하는 정상을 진달하였는데, 그 소를 금부에 내렸다. 금부가 혼자서만 죄를 면할 수는 없다고 하니, 상이 이르기를,
"두경이 항상 안질을 앓고 있다는 것은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 일이지만 다만 시호를 논의할 때 자세히 살피지 못했으니, 추고하라."
하였다. 예조 참판 민응형(閔應亨)이 상소하기를,
"윤방의 행적은 시장을 보지 않고도 아는 일이기 때문에 신은 수석(首席)으로 있으면서도 또한 훑어보지 않아 한 자리에 참여한 사람들이 준엄한 견책을 받게 하였으니, 신은 장관으로서 사리상 홀로 죄를 면하기 어렵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미 훑어보지 않았다면 모르는 것은 당연하겠으나 다만 자세히 살펴 시호를 논의하지 못한 잘못은 면하기 어렵다. 추고하라."
하였다. 그 뒤에 모두 속죄(贖罪)할 것을 명하였다.

 

3월 21일 무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영의정 김육, 좌의정 이시백, 우의정 한흥일이 상차하기를,
"윤이지(尹履之) 등이 그의 아비를 위해 시호의 은전을 얻으려고 마음을 가졌다면 정서(正書)할 때에 십분 삼가하여 한 글자의 착오도 없게 했어야 옳을 것인데, 작자(作者)의 글을 고치지 않아 그 두 글자037)  를 그대로 두고 글자를 건너뛰어 쓰기까지 하였으니, 이는 죄 중에서도 큰 죄입니다. 그러나 그 본심은 사실 아무런 의도가 없었던 것이니, 어찌 아비를 위해 시호를 청하면서 어긋나고 잘못된 말을 그대로 두어 그 청하는 일까지 그르칠 리가 있겠습니까. 만일 이 글을 성상의 때에 지은 것이라면 그 죄는 복주를 용서받을 수 없을 것입니다마는, 이식이 그 글을 지은 때는 강옥(姜獄)이 일어나기 전이었으니, 역강(逆姜)이 죽은 뒤에는 비록 삼척 동자라도 강빈이란 칭호를 들먹이지 않을 줄 압니다. 각사의 많은 관원들이 세밀하게 헤아리지 못하고 예사로이 보아넘겨서 당시의 일은 당시 호칭을 쓰는 것으로 생각하고 오늘날에는 마땅히 삭제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여 한 사람도 발언하여 고치자고 한 자가 없었습니다. 어찌 털끝만큼이라도 다른 뜻이 있었겠습니까. 사사로이 악역(惡逆)을 존숭하는 것은 이 또한 역적입니다. 예관(禮官)과 유신들이 어찌 다 악역을 동조하여 사사로이 존숭하는 자들이겠습니까. 군부의 원수는 하늘을 함께 하지 않는 법으로서 성상의 원수는 곧 뭇 신하들의 공동 원수입니다. 하늘과 태양이 굽어보고 귀신이 곁에 있는데 어찌 이미 죽은 난역(亂逆)을 위해 사사로이 존숭하는 마음을 갖는 자가 있겠습니까. 이는 천리와 인정상 반드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만약 사사로이 존숭한 것으로 죄를 준다면 다 가장 큰 죄이며 불찰로써 말한다면 모두 의도가 없는 것인데, 어찌 의도가 없는 일을 가지고 죄망(罪網) 속으로 몰아넣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중용》의 구경(九經)에 이른바 ‘대신을 존경한다[敬大臣]’는 것은 그 사람을 존경하는 것이 아니라, 왕위를 함께하고 천직(天職)을 다스리는 것을 존경하는 것이니, 가의(賈誼)가 말한 ‘임금은 궁전이요 신하들은 섬돌이다.’는 비유는 참으로 옳은 말입니다. 판부사(判府事) 조익(趙翼)에 대해 이제 불찰의 일로 인하여 그 소를 금부에 내려 하급 관원들과 함께 조율한 것은 신들은 삼가 온당치 않다고 생각합니다. 저번에 왕자와 대신은 일체라고 분부하셨는데, 만약 그 일을 그르다고 여기신다면 어찌 재차 오류를 범해 앞으로의 무궁한 폐단을 열어놓을 수 있겠습니까. 삼가 원컨대 성상께서는 천둥 같은 위엄을 풀고 단비 같은 은택을 내리실 것이며, 신들을 면직시키고 어질고 덕 있는 이를 고쳐 뽑아 조정의 기강을 바로잡는 소지로 삼으소서."
하니, 답하기를,
"경들의 차자 내용이 이 정도에까지 이르니, 나는 뭐라고 유시해야 할지 모르겠다. 사직하지 말고 편안한 마음으로 직무를 살피도록 하라."
하였다.

 

전 교리 조복양(趙復陽)이, 일찍이 관직(館職)으로 있을 때 윤방의 시호를 같이 참여하여 논의하였다는 것으로 진소하여 대죄하니, 그 소를 금부에 내릴 것을 명하였다. 금부가 ‘장 일백·도 이년반’으로 조율하였는데, 상이 속죄를 허락하지 않고 장형을 가하였다. 조복양은 조한영 등과 같은 죄이면서 혼자서만 장형을 받은 것은 그의 아버지 조익(趙翼)이 시장을 지은 것에 좌죄(坐罪)된 것이라고 하였다.

 

3월 22일 기해

상이 하교하였다.
"이제 대간의 계사를 보니 문자간에 살피지 못한 일이라고 말하였는데, 이것이 어떠한 일이기에 감히 허술한 문자로 말을 놓아 죄를 누그러뜨릴 계책을 한단 말인가. 일이 매우 놀랍지만 대간이기 때문에 용서하여 그대로 두니, 정원은 이를 알라."

 

3월 25일 임인

김집(金集)을 대사헌으로, 이후원(李厚源)을 형조 판서로, 권우(權堣)를 집의로, 정기풍(鄭基豊)을 장령으로, 홍수(洪鐩)를 지평으로 삼았다.

 

3월 26일 계묘

호조가 아뢰기를,
"지난해에 흉년이 들어 세입이 크게 줄었고 사신의 행차가 거듭되어 비용이 날로 불어났기 때문에 지난 가을에 정해년038)  의 관례에 따라 백관의 녹봉을 7품 이상은 각기 쌀 1석을 감하고 8품은 쌀 1석을 감하는 대신 콩으로 주고 있습니다. 현재 사대부들이 혹 굶주림을 면치 못하고 있는데, 쌀은 부족하더라도 콩은 그래도 이어 댈 수 있으니, 7품 이상에게 감한 쌀을 또한 콩으로 대신 지급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3월 27일 갑진

채유후(蔡𥙿後)를 대사간으로, 이후산(李後山)을 장령으로, 이천기(李天基)를 헌납으로, 강호(姜鎬)를 지평으로, 심구(沈玖)를 정언으로 삼았다.

 

청사(淸使)가 돌아가니, 상이 서교(西郊)에 행행하여 전송하였다.

 

상이 대신과 비국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상이 승지 엄정구(嚴鼎耉)에게 이르기를,
"전 대사간 조석윤(趙錫胤)은 어찌 그리도 병이 많은가?"
하니, 정구가 대답하기를,
"석윤은 사실 병이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병세가 이러하면 내일 정시(庭試)에 시관으로 나가는 것이 몸을 더 손상하지 않겠는가. 이제 만약 시관을 다른 사람으로 바꾸고 병을 전념하여 조섭하게 하면 어떻겠는가?"
하니, 정구가 아뢰기를,
"병세가 비록 이렇더라도 주문(主文)을 하는 사람은 마땅히 시소(試所)에 들어가야 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내국(內局)으로 하여금 특별히 약물을 내려주게 하라."
하였다.

 

3월 28일 을사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인정전(仁政殿)에서 정시(庭試)를 실시하여 이창현(李昌炫) 등 4인을 뽑았다.

 

상이 하교하였다.
"이 시권(試券)을 보건대, 피봉이 넓고 커서 그 안에 쓰여 있는 글자 모양이 자연히 드러나 일부러 보려고 하지 않아도 절로 보이니, 매우 놀라운 일이다. 과장에서 삼가고 비밀히 하는 뜻이 어디에 있는가. 앞으로는 피봉의 모양을 둥글게 대나무 통처럼 만들되 매우 좁고 비밀스럽게 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엿보지 못하게 하는 것이 좋겠다. 이러한 뜻을 해조에 말하여 착실히 거행하게 하라. 만일 명을 따르지 않는 자가 있을 때에는 그 거자(擧子)는 가차없이 과장에서 사정(私情)을 부린 율로 처단할 것이고 당상과 낭청도 또한 죄벌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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