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효종실록6권, 효종 2년 1651년 4월

싸라리리 2025. 12. 20. 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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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일 정미

상이 영사전(永思殿)에서 삭제(朔祭)를 거행하였다.

 

좌의정 이시백(李時白)이 또 상소하여 면직을 청하였는데, 그 대략에,
"신은 듣건대, 덕이 그 지위에 맞지 않고 재능이 그 임무에 맞지 않으며 그릇이 가득찼는데도 덜어낼 줄을 모르고 일의 낌새가 위태로운데도 피할 줄을 모르면 재앙이 반드시 몸에 닥쳐 상서롭지 못함이 이보다 큰 것은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제 신은 전혀 형편없는 사람으로 전혀 걸맞지 않은 관직에 앉았으니, 맞지 않다는 비난을 어찌 면할 수 있겠습니까. 공적으로는 존재 가치가 없고 사적으로는 큰 위기가 있어 나라에 이익은 없고 몸에 피해만 있으니, 공사(公私) 경중의 한계를 헤아려 보고 시종 길흉의 기미를 살펴 스스로 처신할 바를 생각해 볼 때 빨리 물러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으므로 위급한 사정을 호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은 본디 무디고 어리석어 전혀 대체를 몰라 생각나는 대로 행동하므로 한번 국사를 논한 것으로 인하여 스스로 함정에 빠져들었으니, 세상살이의 험난하기가 이렇게도 심하단 말입니까. 그들이 이미 변사기(邊士紀)를 이일원(李一元)에다 견주고서 신이 변사기를 비호한다고 말하여 올렸다 내렸다 잡았다 놓았다 하며 협박이 너무 심하므로 사람들이 신을 볼 때 모두 신을 위태롭게 여기는데 신이 당한 입장에서 어찌 두려움을 모르겠습니까. 신이 당초에 감사를 죄주자고 청한 것은 그저 조정을 높이고 임금의 명을 중히 하자는 뜻일 뿐이었는데, 사람들의 하는 말이 어찌 차마 이에 이른단 말입니까. 혹시 전하께서 그 사정을 분명히 살피지 못하셨더라면 역적을 비호한 벌을 어찌 벗어날 수 있었겠습니까.
신이 그 당시에 황급히 석고 대죄할 줄을 모른 것은 아니었으나 사신의 행차가 곧 들어올 것인데 삼정승은 다 비어 있고 그에 대비해야 할 일들이 쌓여 있어 눈에 보이는 건 온통 걱정스러운 일이며, 너그러운 하유가 진지하시어 일반적인 예를 크게 벗어나시니, 어찌 한몸의 이해만 돌아보고 국사를 생각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리하여 수치를 무릅쓰고 뻔뻔하게 행공(行公)하여 사람들의 비웃음을 받은 것이 진실로 많았습니다. 이제는 요석(僚席)이 이미 갖추어지고 객사(客使)도 돌아갔는데 신이 어찌 감히 직명을 계속 지녀 남들의 비난을 거듭 받겠습니까. 신의 나이는 널 속에 들어갈 때가 가까워 남은 여생이 많지 않으므로 충성을 바치고 싶은 구구한 마음을 이루지 못할 듯합니다. 생각이 이에 이르면 자신도 모르게 목이 메이지만 깊은 함정이 바로 눈앞에 놓여 있으니, 신의 마음과 형편은 슬프기 한이 없습니다. 삼가 원컨대 빨리 체직을 허락하시어 공사(公私)가 다 편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경의 차자 내용을 보니 매우 놀랍다. 지난날의 일은 온 나라 사람이 다 그들의 무상(無狀)함을 알 뿐만 아니라 시비가 이미 판가름 나 책임이 돌아갈 데가 있으며, 다만 그 죄를 다스리지 않았을 뿐이다. 경에게 무슨 관계가 있는가. 그런데도 이렇게까지 허물을 인정하니, 도리어 사체에 손상을 끼치는 것이다. 경은 몸가짐을 신중히 하여 조정을 진정시키라. 나도 참소하는 말이 군자의 행실을 가로막는 것을 미워하고 있으니, 경은 부디 국사를 염려하여 사직하지 말고 빨리 출사하여 국사를 논하라."
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이제 도감의 관원과 숙녕전(肅寧殿)을 봉심(奉審)하였더니, 옥책(玉冊)·옥보(玉寶)·시책·시보가 모두 변란 때에 유실되어 없어졌습니다. 도감으로 하여금 그 일을 품정(稟定)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4월 3일 기유

헌부가 아뢰기를,
"정시(庭試)의 시권(試券)은 그 피봉을 가져다 보니, 과연 넓고 커서 안쪽에 쓰여 있는 글자를 옆으로 볼 수 있어 이름을 숨겨 풀로 바르며 신중하고 은밀히 봉함하는 규례에 어긋났으므로 신들은 이를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습니다. 대체로 과장(科場)의 규례는 격식을 어긴 것이거나 무슨 표를 한 것이 있을 때는 시비를 따지지 않고 모두 다 뽑아버리는 것이 곧 전례로서 그 법을 무겁게 하였는데, 이제 이 피봉을 신중하고 은밀히 하지 않아 글자 모양이 밖으로 드러난 것은 격식을 어기고 표를 한 것보다 위법이 더 심하니, 구차하게 그대로 둘 수 없습니다. 정시 문과를 파방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정시의 피봉에 대해 분부한 것은 후일에 삼가하지 않을까 염려한 것에 불과하다. 파방까지 하는 것은 옳지 않다."
하였다.

 

상이 하교하기를,
"요즈음 활인서(活人署)의 환자는 그 수효가 얼마나 되는가?"
하니, 정원이 아뢰기를,
"동서 활인서의 관원을 불러 물어보니, 동서 활인서의 환자는 각각 50여 인이라고 하였으며, 또 구료(救療)하는 상황을 물으니, 약은 의사(醫司)에서 가져다 쓰지만 식량은 스스로 준비한다고 하였습니다."
하자, 답하기를,
"선혜청(宣惠廳)으로 하여금 식량을 지급하게 하라."
하였다.

 

4월 4일 경술

영의정 김육이 상차하기를,
"신은 지난번 정시를 보여 사람을 뽑을 때, 노혼(老昏)이 특별히 심하고 기력이 또 허약하여 감히 우열을 감별하는 책임을 감당하지 못하겠다고 스스로 생각하였으나 부득이 명을 받고 시장(試場)에 들어가 참여하였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재주가 미치지 못하는 줄을 알고 또 신의 자손이 응시한 것을 피혐하여 혼자 한쪽 구석에 앉아 여러 시관으로 하여금 나누어 고사(考査)하게 하고 날이 저문 뒤에야 비로소 한 자리에 모여 상의하여 고정(考定)하였다가 밤이 되어 출방(出榜)하였으며, 피봉의 제도에 대해서는 본디 전례가 있기 때문에 더러 넓은 것도 있고 좁은 것도 있어 일정하지는 않았으나 이는 미처 생각하지 못하였습니다. 이제 삼가 성상의 분부를 보니 극히 온당치 못한 일이었고 대간의 논박이 또 일어나 파방할 것을 청하기까지 하였으니, 이는 모두 신이 고관의 우두머리로 있으면서 엄격하고 신중히 하지 못한 소치입니다. 청컨대 신의 죄를 다스려 공론에 답하고 과거의 법을 중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피봉의 제도는 본디 옛 규례가 있는 것으로 경들이 알 바가 아니며 더구나 이번 감시(監試)도 시일이 촉박하여 미처 변통하지 못하였다. 그전부터 넓고 크게 피봉을 만든 것이며 이번 처음으로 그렇게 한 것은 아니다. 경은 잘못한 것이 없으니 대죄하지 말라."
하였다.

 

좌의정 이시백이 상차하기를,
"신은 사람들의 배척을 거듭 입어 악명이 몸에 씌워졌으므로 정상이 위급하여 죽을 죄를 무릅쓰고 상소하였는데, 성상의 도량이 하늘 같아 너그러운 유지가 간절하였습니다. 다만 신을 배척하는 논박은 우선 잠잠하다 하더라도 독기를 품고 노려보는 자가 오히려 여기저기 도사리고 있으니, 신이 하루라도 관직에 있으면 신의 몸이 위태롭고 조정이 편치 못합니다. 신이 오늘날 다급한 사정을 청하는 것은 어찌 개인만을 위하는 뜻이겠습니까. 대체로 대신의 직에 있는 자는 한때 협박하는 말 때문에 꺾이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마는 신의 사정과 형편은 오직 스스로 물러나야 하니, 조정을 진정시키는 책임은 어찌 신이 감당할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삼가 빌건대 빨리 체직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내 이미 통촉하고 있으므로 여러 말을 하지 않는다. 경은 어찌하여 반드시 그와 같이 하는가. 사직하지 말고 빨리 출사하라."
하였다.

 

부묘 도감이 아뢰기를,
"숙녕전(肅寧殿)의 옥책(玉冊)·금보(金寶)·시책·시보를 이제 모두 다시 만드는 것이 마땅하겠으나 여러 번 자꾸 만드는 것은 사체에 미안한 일입니다. 임진 왜란 이후로 종묘에 소장한 책보(冊寶)가 없어진 것이 많으나 감히 경솔히 다시 만들지 못하는 것은 이 또한 그 일을 중대하게 여겨서 그런 것입니다. 예관으로 하여 품정(稟定)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예조가 아뢰기를,
"열성(列聖)의 시책보가 변란을 겪은 뒤로 태반이 유실되었는데, 정축년039)   초에 종묘 도제조(宗廟都提調)의 계사로 인하여 영녕전(永寧殿)과 종묘 각실(各室)에 유실된 책보는 시사가 조금 안정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국(局)을 설치하여 다시 만들 것으로 이미 성명(成命)이 있었습니다. 현재 물력(物力)이 탕진된 것은 그 당시보다 갑절이나 되므로 열성의 책보를 전부 다시 만들기는 어려운 형편입니다.
그러니 전부 만드는 것은 감히 쉽게 의논할 수 없으나 인열 왕후(仁烈王后)의 책보에 있어서는 그 수효가 많지 않아 공역(功役)이 그다지 크지 않으며, 게다가 부묘할 때 이러한 의물(儀物)을 모두 빠뜨린다면 인정과 예의로 헤아려 볼 때 실로 매우 미안한 일입니다. 인열 왕후의 책보와 시책보는 도감을 설국(設局)하는 날까지 모두 다시 만들게 하여 부묘할 때 봉안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유실된 열성의 책보를 정축년 이후 아직까지 다시 만들지 못한 것은 비록 물력이 탕진되었기 때문이긴 하나 예사롭게 보고 지나쳐버린 잘못이 없지 않다. 앞으로는 물력이 조금 완전해지거든 유념하여 거행하라."
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국휼(國恤)040)  이 지나 부묘한 뒤에는 으레 조천하는 예가 있습니다. 이번에 인조 대왕을 올려 부묘하면 중종 대왕은 마땅히 조천을 하여야 하나 중종 대왕께서 천심과 인심에 순응하여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잡아 정상을 회복하신 거룩한 업적은 마땅히 백대를 옮기지 않는 신위(神位)가 될 만합니다. 영녕전(永寧殿)을 추가로 짓는 등의 일을 거론하는 것은 부당할 듯하지만 이 일은 국가의 막중 막대한 일이니, 대신에게 의논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예조가 아뢰기를,
"인조 대왕을 부묘할 때 마땅히 공신을 배향하는 일이 있어야 하니, 대신으로 하여금 응당 배향될 사람을 의논해 정하여 아뢰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영의정 김육이 아뢰기를,
"조천하는 예는 위로 위차(位次)를 따져보면 마땅히 중종 대왕이 해당되지만 중종께서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잡아 정상을 회복하신 공은 응당 백대를 옮기지 않는 신위가 될 만합니다. 해조의 이른바 영녕전을 추가로 짓는 일은 부당하다는 것은 이미 결정된 의논입니다. 배향할 신하들에 대해서는 마땅히 한 시대에 공적과 덕망이 있었던 사람을 취하여 묘정(廟庭)에 들여넣어야 하는 것으로 이는 신들이 독자적으로 뽑아 아뢸 일이 아닙니다. 육경과 삼사(三司)의 장관으로 하여금 한 장소에서 회의하여 널리 물어 정하게 하소서."
하니, 의논대로 하라고 명하였다.

 

4월 5일 신해

행 부호군 조석윤(趙錫胤)이 상소하기를,
"신은 삼가 전일의 성상의 분부를 보건대, 정시(庭試) 시권의 피봉이 넓고 큰 것으로 인하여 신중히 하지 않은 것이라 하시어 분부가 준엄하셨습니다. 신은 바로 그 당시 고관(考官)의 한 사람이므로 진정 황공해 하던 차에 대간의 논핵이 뒤이어 일어나 파방할 것을 청하기까지 하였으니, 더욱 놀랍고 두려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국가가 인재를 뽑는 것은 오로지 과거에 달려 있는데 세도(世道)가 낮아지고 풍속이 퇴폐해져 사사로운 뜻이 행해지기 쉬우니, 과장(科場)의 일을 신중하고 치밀히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신의 어리석은 뜻으로는 삼가 이번 일에 석연치 못한 점이 있습니다. 피봉이 넓거나 좁은 것이 설사 일정치 않다 하더라도 어찌 대단히 이상할 것이 있겠습니까. 그 안에 쓰여진 성명이 저절로 밖으로 드러난다는 것은 그럴 리가 없을 듯합니다. 성상의 염려가 비록 부정을 엄하게 막자는 뜻에서 나온 것이긴 하나 성상의 분부가 한번 내려오자 뭇사람들의 의혹이 한꺼번에 일어나니, 오늘날 일을 담당했던 신하가 아무리 떳떳함을 스스로 밝히고 싶더라도 어찌 집안에 대변해 주는 사람을 둘 수 있겠습니까041)  . 신은 불초한 사람으로 외람되이 문형(文衡)의 자리에 앉아 흐리터분하게 일을 잘 살피지 못하여 위로 성상의 분부를 번거롭게 하고 아래로 물의를 초래하였으니,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먼저 신의 직을 삭탈하고 아울러 그 죄를 바루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처럼 말썽이 난 것은 나의 허물이다. 경은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4월 8일 갑인

신천익(愼天翊)을 집의로, 이시방(李時昉)을 형조 판서로 삼았다.

 

병조가 아뢰기를,
"강화(江華)의 충의위(忠義衛) 황류(黃瑠)의 상언(上言)에 의하면, 그의 아비 황선신(黃善身)이 본부(本府)의 중군(中軍)으로 강도가 함몰될 때에 전사하였으나 포록(褒錄)의 반열에 참여되지 않았으므로 진소(陳訴)한다고 하였습니다. 그의 아들이 억울함을 호소하는 것은 실로 당연한 일인데, 이는 충절을 기리는 중대한 전례이니 예조로 하여금 품의하여 조처하게 하소서."
하니, 즉시 품의하여 조처하라고 답하였다. 예조가 회계하기를,
"홍살문과 정문을 세우는 일은 곧 중대한 전례이니, 병조로 하여금 문적(文籍)을 상고해 만약 상직(賞職)을 내리지 않았으면 다시 품의하여 조처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벼슬이 높은 주장(主將)은 모두 도망갔는데도 이 사람만은 몸을 돌보지 않고 힘껏 싸우다가 끝내 죽었으니, 진영이 함몰되어 전사한 것과 어찌 차이가 있지 않겠는가. 다시 의논하여 조처하라."
하였다.

 

4월 9일 을묘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좌의정 이시백이 세 번에 걸쳐 정고(呈告)하였는데, 다 불윤 비답을 내릴 것을 명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부묘할 때는 먼저 인열 왕후(仁烈王后)에 휘호(徽號)를 추상(追上)하는 일을 조종조의 구례에 따라 거행해야 하며, 그런 다음에 책보(冊寶)를 때에 맞추어 만들어야 하니, 대신 및 정부와 육조 참판 이상과 관각(館閣)의 당상으로 하여금 빈청으로 모여 의논하여 아뢰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헌부가 전계(前啓)를 다시 아뢰어 정시 문과를 파방할 것을 청하니, 답하기를,
"그 가운데에서 피봉이 가장 넓고 큰 것을 뽑아버리도록 하라."
하였는데, 예조가 시권의 피봉이 크다는 것을 이유로 방목 속에서 뽑아버리는 것은 새로운 규례에 관계되는 일이라고 하여 대신에게 수의할 것을 청하였다. 영의정 김육이 의논드리기를,
"옛날 선조(先朝) 때는 파방의 폐단을 깊이 염려하여 죄가 시관에게 있으면 시관을 죄주고 죄가 응시자에게 있으면 응시자를 죄주는 것이 이미 관례가 되어 있습니다. 피봉이 지나치게 넓은 것은 비록 응시자의 죄이긴 하나 잘 살피지 못한 과실을 시관이 어찌 면할 수 있겠습니까. 신의 죄는 응시자와 마찬가지이므로 감히 무어라고 의논드릴 수 없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영상의 수의는 겸손하고 인혐하는 뜻 아닌 것이 없으나 짧은 시간에다 복잡한 때에 수많은 문자도 오히려 자세히 살피기 어려울 판인데 정신이 미치치 못하는 데까지 어느 틈에 점검할 것인가. 참으로 지나치게 겸손해 하는 것이다."
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문과 네 사람의 시권을 가져다 보니, 김익진(金益振)의 피봉이 가장 넓었고 민광소(閔光熽)가 그 다음이었으나 종이가 매우 두꺼워 엿보기가 어려운 것이 다른 사람의 것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옆으로 볼 수 있다는 설은 확실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이처럼 무리한 일을 가지고 이미 급제한 사람을 삭제하기까지 하는 것은 적절한 정령(政令)이 아닐 듯합니다. 해조에서는 감히 쉽게 봉행할 수 없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저번에 하교한 대로 지나치게 심한 사람은 뽑아버리도록 하라."
하였다.

 

4월 10일 병진

유철(兪㯙)을 도승지로, 윤문거(尹文擧)를 승지로 삼았다.

 

유철(兪㯙)을 도승지로, 윤문거(尹文擧)를 승지로 삼았다.

 

4월 11일 정사

인정전(仁政殿)에서 전경 문신(專經文臣)을 시강(試講)하였다. 학정(學正) 정석(鄭晳)이 수석을 차지하여 말을 하사할 것을 명하였다.

 

인정전(仁政殿)에서 전경 문신(專經文臣)을 시강(試講)하였다. 학정(學正) 정석(鄭晳)이 수석을 차지하여 말을 하사할 것을 명하였다.

 

상이 주강에 나아가 《서전》 탕서(湯誓)를 강독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하늘이 생민(生民)을 위해 임금을 만들었는데 걸(桀)은 생민을 못살게 굴었으니, 탕(湯)이 걸을 정벌한 것이다. 임금으로서 믿을 수 없는 것은 높은 자리인데 걸이 하는 말이 ‘나는 천하를 가졌으니 태양이 없어져야 망할 것이다.’ 했으니, 어찌 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니, 시독관 이해창(李海昌)이 아뢰기를,
"탕의 덕이 지극하고 걸의 악이 극에 이르렀는데도 오히려 그 정벌하는 일을 꺼려하였으니, 민심을 헤아리기 어렵기가 이와 같은 것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걸의 포악한 기세가 박(亳)에까지는 미치지 않아 박의 백성들은 그 생업에 편안하고 그 땅에 즐거움을 누렸기 때문에 수고로운 정벌의 일을 꺼려했을 뿐이다."
하였다. 지경연(知經筵) 이기조(李基祚)가 아뢰기를,
"어제 대간의 논계로 인하여 정시의 피봉이 넓은 자를 뽑아버리라는 명이 계셨는데, 신의 의견은 분명치 않은 일로 이미 급제한 사람을 삭제하기까지 하는 것은 실로 과중하다고 봅니다. 이것이 비록 대간이 논계한 것이긴 하나 신 또한 담당 관리이기 때문에 감히 이와 같이 진달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미 소견이 있으면 진달하는 것이야 무슨 관계가 있는가."
하고, 검토관 이정영(李正英)이 아뢰기를,
"당초에 성상의 분부는 뒤폐단을 막기 위한 것에 지나지 않았는데 대간의 그와 같은 논계에 있어서는 신은 옳다고 보지 않습니다. 예조가 아뢴 것이 옳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저번 대제학 상소의 비답에서 이미 나의 뜻을 유시하였다. 명관(命官) 이하 여러 시관은 다 나의 팔다리이며 이목인데 내가 어찌 의심을 두겠는가. 다만 사자(士子)가 발신하는 처음은 마땅히 삼가해야 할 것인데 이번의 피봉은 마치 아이들의 장난과 같았으므로 매우 놀라웠다. 그러나 사정(私情)을 쓴 일이 아닌 듯하기 때문에 대간의 파방하라는 청을 따르지 않았다. 다만 근래에 소장을 보면 대부분 과거의 폐단을 말하고 있으니 나는 항상 그것이 문란한 것을 염려하였다. 반드시 엄격하고 단호하게 시정해야 한다. 이제 만약 그대로 둔다면 앞으로의 폐단이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해조가 피봉이 넓은 자 두 사람을 서계하였으나 나의 견해로는 그 중에 정도가 더 심한 자 한 사람을 뽑아버리는 것이 좋겠다."
하고, 이어 제사(諸司)의 윤대관(輪對官)을 소견하였다.

 

지평 홍수(洪鐩)와 강호(姜鎬)가 인피하기를,
"문과 정시의 시권 피봉이 예전에 비해 넓고 커 속에 쓰여진 글자 모양이 밖으로 드러나 쉽게 알아볼 수 있어서 이름을 숨기며 신중하고 은밀히 하는 뜻에 어긋나기 때문에 신들이 감히 공론에 따라 그 일을 논계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삼가 예조의 계사를 보니 ‘옆으로 볼 수 있다는 설은 확실하다고 할 수 없다.’ 하고, 또 ‘무리한 일을 가지고 이미 급제한 사람을 삭제하기까지 한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신들은 함부로 폐단을 막자는 논의를 아뢰었다가 도리어 마음에 없는 배척을 받았으니, 어찌 그대로 자리에 눌러 있을 수 있겠습니까. 신들의 직을 체차하소서"
하고, 장령 정기풍(鄭基豊)도 이와 같은 뜻으로 인피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는데 홍수 등이 모두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대사간 채유후(蔡𥙿後)가 아뢰기를,
"피봉이 넓고 좁은 것이 일정하지 않은 것은 대체로 일찍이 그에 대한 정식(定式)이 없는 데서 기인한 것이고 또 이미 사정을 부린 일이 없는데 이로써 삭과(削科)한다면 사자(士子)로서는 실로 억울한 일입니다. 다만 대신(臺臣)의 논의는 본디 다른 뜻이 없고 그저 그 과거의 법을 엄격하게 하자는 것이니, 특별히 체차할 만한 과실이 없습니다. 청컨대 지평 홍수·강호와 장령 정기풍을 모두 출사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예조가 아뢰기를,
"시권 중에서 김익진(金益振)의 피봉이 가장 넓고 크므로 방목에서 뽑아버렸습니다."
하니, 알았다고 답하였다.

 

4월 12일 무오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상이 주강에 나아가 《서전》 중훼지고(仲虺之誥)를 강독하였다. 시독관 이해창(李海昌)이 아뢰기를,
"탕(湯)은 자만하는 마음이 없으면서도 ‘나는 후세에 나를 가지고 구실로 삼을까 두렵다.’고 하였으니, 이 말은 지극한 말로서 성인이 후세를 걱정하는 뜻이 깊은 것입니다."
하고, 동지경연 조석윤(趙錫胤)은 아뢰기를,
"요즈음 성변(星變)이 비상하니, 성상께서는 더욱 더 공구 수성하고 조심하여 태만히 하지 마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한번 경계를 보이더라도 오히려 두려워할 줄 알 일인데 더구나 이제 계속 출현하니, 어찌 크게 두려워할 일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상이 석강에 나아가 《대학연의(大學衍義)》를 강독하였다. 강독이 끝난 뒤에 동지경연 조석윤이 아뢰기를,
"요즈음 삼가 보건대, 성상께서 형벌이 정도에 지나쳐 뭇 신하들이 울적해 합니다. 시호를 의논한 일로 말하자면, 옥당은 비록 잘못한 일이 있더라도 성급하게 견책을 가해서는 안 되는 것이며, 대신을 결장(決杖)하는 것은 전고에도 없는 일인데 성상께서는 그것을 고집하셨습니다. 신유(申濡)에 있어서는 상의 명을 즉시 봉행하지 않아 잘못이 없지는 않으나 재상의 반열에 있는 사람이 오랫동안 옥에 계류되어 있으니, 일의 체모가 온당치 못합니다. 만약 판의금(判義禁)이 출사할 때까지 기다린다면 언제 처결할지 기약이 없습니다. 옥에 갇혀 있는 일반 죄수도 오히려 임금의 보살핌을 받는데 더구나 재상의 반열에 있는 신하이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판의금을 반드시 기다릴 것 없이 즉시 의논하여 처결하게 하라."
하였다. 【앞서 교리 조복양(趙復陽)이 윤방의 시장 문자를 잘 살펴보지 못한 죄로 금부에 조율할 것을 명하였으나 신유가 동지의금부사로서 그 명을 즉시 봉행하지 않아 상이 엄지(嚴旨)를 내려 잡아다가 추고하라고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6책 6권 22장 B면【국편영인본】 35책 476면
【분류】왕실-경연(經筵) / 정론-간쟁(諫諍) / 사법-탄핵(彈劾)

ⓒ 한국고전번역원

 

4월 13일 기미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상이 조강에 나아가 《서전》 중훼지고를 강독하였다. 대사간 채유후(蔡𥙿後)가 아뢰기를,
"상고 때에는 공이 많으면 힘써 상을 주었는데 오늘날에는 공이 많으면 힘써 벼슬을 줍니다. 약간의 공이 있는 자에게도 무턱대고 벼슬을 주니 근래에 벼슬로 상을 주는 것이 정도에 지나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라에 상으로 줄 만한 물건이 없기 때문에 간혹 벼슬로 상을 주는 일이 있었다만, 그대가 한 말은 옳다."
하였다. 영경연(領經筵) 김육이 아뢰기를,
"이른바 ‘음악과 여색을 가까이하지 않았다.’는 것은 탕(湯)의 큰 덕에 있어서 거론할 만한 것은 아니지만 이는 모든 것의 근원이 되는 문제이기 때문에 이것으로 선양한 것이니, 실로 소홀히 여길 수 없는 말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예로부터 나라를 무너뜨리고 몸을 망치는 것은 다 음악과 여색과 재리(財利)로 인하였는데, 그것을 알기는 쉽지만 실행하기는 실로 어려운 것이다."
하였다. 동지경연 조석윤이 아뢰기를,
"군주의 도는 관대함과 인자함이 큰 것입니다. 진정 관대함과 인자함으로 근본을 삼는다면 저절로 공효가 있기 마련인데 반드시 한때의 천근한 공효를 얻으려고 한다면 관대함과 인자함의 도에 상반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관대함과 인자함에 상반되면 반드시 각박하게 될 것이다. 관대함과 인자함으로 근본을 삼되 또한 관대함과 엄격한 것으로 서로 조화를 이루어야 할 것이다."
하였다.

 

상이 주강에 나아가 《서전》 중훼지고를 강독하였다. 강독이 끝난 뒤에 특진관 원두표(元斗杓)가 아뢰기를,
"전 영상 이경석(李景奭)은 본디 본국에 죄를 얻은 자가 아닌데 지금 도하(都下)에 있으면서 궁핍하게 살고 있으니, 마땅히 식량을 지급하는 은전이 있어야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녹미(祿米)를 반사(頒賜)하는 규례에 구애받지 말고 특별히 월봉(月俸)을 주도록 하라."
하였다.

 

상이 석강에 나아가 《대학연의》를 강독하였다.

 

좌의정 이시백(李時白)이 상차하기를,
"신의 병세에 대해 이미 전후에 걸쳐 진달하여 삼가 체차해 주시길 기다리고 있는데 잇달아 불윤 비답을 내리시니, 황공하고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삼가 원컨대 특별히 체면을 내리시어 공사(公私)가 다 편하게 하소서.
신은 바야흐로 정고(呈告)중이므로 감히 조정의 정사에 간여할 수 없을 듯하나 이번에 이 이미 급제한 사람을 뽑아버리는 일은 관계되는 바가 작지 않으니, 신이 어찌 다급한 사정을 청하였다고 하여 말을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정초(正草) 피봉의 넓고 좁기가 일정하지 않은 것은 그 유래가 이미 오래된 일로서 앞으로 법식을 정해 후일을 경계하는 것은 옳지만, 사정을 부린 흔적이 없는데 뽑아버리기까지 하는 것은 의혹을 야기시키는 결과를 면치 못할 것입니다.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유의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나의 뜻은 이미 여태까지 다 말하였으므로 지금은 더 이상 유시할 것이 없다. 군신간에는 서로 마음을 아는 것이 귀한 일인데 어찌 꼭 그와 같이 하는가. 경은 부디 더 이상 사피하지 말고 빨리 나와서 국사를 논의함으로써 나의 간절한 소망에 부응하라.
차자 가운데 논한 방목에서 빼내버리라는 일에 대해서는 선비들의 풍습이 잘못되어 식자들이 한심해 한 지 오래이다. 그렁저렁 넘어가고 다스리지 않으면 장래의 폐단이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므로 실로 부득이해서 그런 것이다. 이른바 의혹을 야기한다는 말은 나의 본뜻을 잘 몰라서 한 말이다."
하였다.

 

인열 왕후(仁烈王后)의 휘호(徽號)를 ‘명덕정순(明德貞順)’이라고 추상(追上)하였다. 【사려가 과감하고 깊은 것을 ‘명(明)’이라 하고 의를 견지하고 선을 선양하는 것을 ‘덕(德)’이라 하며, 큰 생각을 능히 해내는 것을 ‘정(貞)’이라 하고, 사랑과 부드러움으로 널리 감복시키는 것을 ‘순(順)’이라 한다.】

【태백산사고본】 6책 6권 23장 A면【국편영인본】 35책 477면
【분류】왕실-비빈(妃嬪) / 왕실-궁관(宮官)

ⓒ 한국고전번역원

 

대신·육경·삼사로 하여금 빈청에 모여 인조 대왕의 묘정에 배향할 신하들을 의정할 것을 명하였는데, 영의정 완평 부원군(完平府院君) 이원익(李元翼), 영의정 신흠(申欽), 영의정 승평 부원군(昇平府院君) 김류, 연평 부원군(延平府院君) 이귀(李貴)를 권점(圈點)하여 아뢰었다.

 

4월 14일 경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4월 16일 임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충청도 청주(淸州)에 지진이 있었다.

 

예조가, 대상(大祥) 이후에는 영사전(永思殿)의 삭망제(朔望祭)를 종묘의 규례에 따라 행하고 산릉(山陵)의 삭망제도 각릉(各陵)의 규례에 따라 분향하는 식만 행할 것을 청하니, 답하기를,
"담제(禫祭)가 넘어가지 않았는데 분향의 예만 행하는 것은 마음에 불안하다. 대신에게 의논하여 조처하라."
하였다. 영의정 김육이 헌의하기를,
"혼전(魂殿)과 산릉은 예법이 각기 달라서 혼전은 종묘의 규례를 따르고 산릉은 각릉의 규례를 따르는 것이 이미 전례가 있습니다. 예조의 계사는 이를 참작하여 사리에 합당하게 한 것으로 감히 달리 의논할 것이 없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전 영의정 이경석이 상소하여 월봉(月俸)을 사양하니, 상이 안심하고 받으라고 답하였다. 【이경석이 백마 산성(白馬山城)에서 돌아와 그 관직을 회복하지 못했으므로 특별히 월봉을 내렸다.】

【태백산사고본】 6책 6권 23장 B면【국편영인본】 35책 477면
【분류】인사-관리(管理) / 재정-국용(國用)

ⓒ 한국고전번역원

 

4월 17일 계해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예조가 아뢰기를,
"갑술년042)  에 있었던 인목 왕후(仁穆王后)043)   상제(祥祭) 뒤의 복제조(服制條)를 가져다 상고해 보니 전하께서는 백립(白笠)을 계속 쓰셨다고 하였습니다. 해원(該院)으로 하여금 이에 따라 거행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유학(幼學) 안적(安績) 등이 상소하기를,
"신들이 삼가 금산(錦山) 사람 박정(朴珽)의 아들 박취문(朴就文)의 상언(上言)을 보니, 전 좌랑 이유태(李惟泰)를 모함함에 있어 별의별 말을 다하였습니다. 신들은 유태와 다 사제간의 의가 있어 유태의 사람됨을 익히 알고 있습니다. 유태는 어릴 때부터 학문에 뜻을 두어 품행을 잘 갖추었으며 실제의 덕을 안으로 닦아 명성이 밖으로 드러났으니, 성상의 후하신 예우를 받고 사림의 무거운 촉망을 진 것이 어찌 우연한 일이겠습니까.
금산 고을은 궁벽한 산중에 위치하여 풍속이 고루하고 상스러워 문헌(文獻)044)  이 없는 곳인데, 유태가 옮겨와서 산 지 오랜 시일이 지나자 성묘(聖廟)를 존숭하고 현사(賢祀)를 수리하며 의재(義齋)를 세우고 향숙(鄕塾)을 짓는가 하면, 초하루와 보름으로 학문을 강론하여 그 과정(課程)을 엄격하게 하고 봄가을로 법전을 읽어 그 의절(儀節)을 익히게 하였습니다. 여러 유생들에게 마음을 세우는 근본과 행실을 바르게 하는 방도를 가르침에 있어서는 그 또한 언제나 염치를 숭상하며 선을 권장하고 악을 미워하는 의리에 치중하였습니다. 이러므로 한 고을의 풍속이 차츰 아름다워지면서 박정의 악이 차츰 드러나니, 박정이 울분과 유감을 품고 은연중 그것을 터뜨릴 기회를 엿보던 것이 하루이틀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다가 유태의 종형(從兄) 이유항(李惟恒)을 장사지낼 때 그 무덤이 박정의 아내가 묻힌 곳과는 거리가 상당히 떨어져 있는데도 박정은 감히 논쟁을 일으킬 심산으로 관아에서 술에 만취하여 유태에게 욕설을 퍼부었으며, 또 가명으로 감사에게 정소(呈訴)하여 유태가 남의 전답을 빼앗았다고 하였는데, 대체로 그 뜻은 감사에게 유태가 의롭지 못하다는 것을 주지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뒤에 박정은 스스로 자기의 정상을 가리기 어렵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 본심이 드러난 것을 알고는 사악하고 도리에 어긋난 짓을 자행하여 더욱 기탄이 없으므로 온 경내가 다 미워하여 노소가 이구동성으로 죄를 성토해 관가에 고발하여 말감(末減)으로 벌을 가했습니다. 이는 곧 한 고을의 공통된 의논으로서 사실 유태가 거기에 간여하여 알 바가 아니었습니다.
아, 박정의 사악함을 낱낱이 들추자면 말이 길기 때문에 우선 유태를 모함한 일을 가지고 대략 그 정상을 밝힐까 합니다. 이른바 ‘유태의 형제가 한 고을의 권세를 함께 쥐었다.’고 한 것은, 유태의 형제가 사실 다섯 사람이 있기는 하지만 그 어미의 성품이 엄하고 법도가 있어 여러 아들을 가르칠 때 반드시 의로운 방도로 하였기 때문에 여러 아들이 다 선사(善士)로 불리웠으니, 어찌 고을의 권세에 간섭할 리가 있겠습니까. 이른바 ‘유태는 본성이 이사다니기를 좋아한다.’고 한 것은, 이는 그러한 사실이 있습니다. 대체로 몇 해 전부터 다른 데로 옮겨갈 뜻이 있었으나 적당한 곳을 잡지 못하다가 지난 겨울에 비로소 이웃 경내에 넓은 땅을 잡았는데, 곧 벗 전 진선(進善) 송준길(宋浚吉)의 밭이었습니다. 그 주인이 이미 허락하였으면 가령 보리를 베어 버리고 짓는다 하더라도 사실 박정이 제지할 일이 아닌데 더구나 집을 건축한 것은 추수한 뒤에 있었으니, 무슨 관계가 있겠습니까.
신들의 동문(同門)과 고을 사람 1백여 인이 한번 억울한 사정을 밝히기 위해 이구동성으로 함께 서명하여 감히 상언을 하였으니, 어찌 거짓 이름을 빌려 성상을 기망할 리가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승정원의 승지는 한 사람의 필치로 서명한 것이라고 하여 시행하지 말 것을 계청하였습니다. 대체로 이미 예람(睿覽)을 거쳤는데도 감히 한 개인의 견해로 물리쳐버렸으니, 왕명의 출납을 올바르게 하는 뜻이 과연 이와 같단 말입니까. 분명히 조사하여 계문하라는 분부까지 내렸으면 도신(道臣)045)  으로 있는 자는 빨리 봉행해야 할 것인데도 한달 두달 끌어가며 조사해 볼 생각을 하지 않아 박정이 정장(呈狀)하여 대질하여 시비를 가리고 싶지 않다고 하면 좋을 대로 하라고 허락을 하며, 금산 사람이 정장하여 빨리 처결해 달라고 청하면 자질구레한 말로 물리쳐버립니다. 이는 승정원의 소행과 동일한 법으로서 사실 깊이 이상하게 여길 것은 못 되지만 전하께서 승선(承宣)046)  의 책임을 부여하신 데에는 어찌 이렇게만 하기를 바란 것이겠습니까.
신들은 진실로 사문(師門)이 부당하게 모함을 받는 것을 차마 무심히 보아넘길 수 없어 소장을 봉해 놓고 여러 날을 올리려다가 그만두곤 하였는데, 이는 실로 고을 사람들이 억울함을 호소한 글이 방금 올라갔고 도신(道臣)이 조사한 계사가 오래지 않아 올라갈 것이라는 생각에서였습니다마는, 이제는 그 정장이 이미 퇴각당했고 조사하는 것도 또한 언제나 할지 기약이 없고 보니, 신들이 어찌 감히 한번 호소하여 유태의 억울한 사정을 밝히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아, 이유태는 성상께서 왕위를 이으신 초기에 현사(賢士)로 초빙하여 특별한 예로 대우하였는데, 한번 김자점(金自點)의 당을 배척한 뒤로 세상 사람들의 큰 악인이 되어 비난과 욕설이 사방에서 모여들어 장차 몸을 용납할 데가 없이 만들었습니다. 향초와 악초가 같은 그릇을 함께할 수 없고 얼음과 숫불이 서로 맞지 않은 것은 이치가 사실 그렇다고는 하지만 인심과 세도(世道)가 한결같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신들은 삼가 가슴 아프게 생각합니다. 옛날에 공문중(孔文仲)은 정자(程子)를 ‘비루하고 간사하여 본디 행검이 없다.’고 무함하고, 심계조(沈繼祖)는 주자(朱子)를 ‘대간인(大奸人)이며 대악인이다.’고 무함하여 소정묘(少正卯)의 주벌047)  을 가하자고 청하였습니다. 아, 옛날의 대현들도 오히려 시기하고 미워하는 자의 모욕을 면치 못하였으니 유태가 오늘날 무함을 받는 것이 또한 어찌 이상할 것이 있겠습니까. 삼가 성상께서는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는 마음을 분명히 보이고 빨리 그 죄를 바루어 사문(斯文)의 기대하는 마음을 달래어 주소서."
하였는데, 소가 들어가자 하교하기를,
"안적(安績)의 상소에 이른바, 거절당한 상언(上言)은 수많은 사람이 서명했다는 것에 대해 과연 각자의 필적인가를 승지는 자세히 살펴 아뢰어라."
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이만영(李萬榮) 등의 상언에 서명한 것을 다시 자세히 보니, 그 필적의 숙련도와 글자 획의 굵기가 조금도 다름이 없어 한 사람의 손에서 나온 듯하였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당초에 나는 이미 한 붓으로 서명한 것인 줄을 알았고 외방 사람의 상언은 으레 사실이 아닌 경우가 많기 때문에 상례에 따라 계하하였었다. 그런데 안적의 소를 대강 보니 그의 스승 유태를 정(程) 주(朱)에 견주었는데 이 또한 괴이한 일이 아닌가. 분노의 파장이 미쳐가지 않은 데가 없고 관원들을 침해하고 모욕하여 조금도 기탄함이 없으니, 이 무슨 도리인가."
하였다. 이에 앞서 금산 사람 박정(朴珽)이 유태에게 원한을 품고 갖은 모욕과 비난을 자행하므로 고을 사람이 관아에 고발하여 그 죄를 다스리자, 정의 아들 취문(就文)이 상언하여 또 유태를 무함하니, 상이 본도로 하여금 조사하여 아뢸 것을 명하였다. 그러자 유태의 문인 이만영 등이 또 상언하여 유태의 억울한 사정을 논쟁하였는데, 승지 오정일(吳挺一)이 상언 가운데 여러 사람의 서명이 한 사람의 솜씨인 듯하다고 방계(防啓)하여 시행하지 말라고 하였기 때문에 안적 등이 또 진소(陳疏)하여 쟁변하면서 정원을 오로지 공격하였다. 정일이 이 때문에 진소하여 면직을 청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4월 18일 갑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조석윤(趙錫胤)을 예조 참판으로, 민응형(閔應亨)을 병조 참판으로, 송시열(宋時烈)을 진선으로, 윤순지(尹順之)를 동지경연으로 삼았다.

 

형조가 아뢰기를,
"전남도(全南道) 강진현(康津縣)에서 감시(監試)의 과장을 설치했을 때 장옥(場屋)에서 소란이 일어났으니, 이는 전고에 없던 변입니다. 그 가운데 주동자를 이미 적발하였으니, 그를 효시하여 많은 사람을 깨우치는 소지로 삼으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이어 하교하기를,
"이들은 반드시 까닭없이 변을 일으켰을 리가 없으니, 변을 일으키게 된 이유를 또한 조사하여 아뢰게 하라."
하였다.

 

병조가 아뢰기를,
"지금 평안 감사의 장계를 받아보았는데, 내관(內官) 임우문(林友聞)은 지난번 청사(淸使)의 행차 때 말 4백 필을 세내어 민역(民役)을 도왔고, 그 뒤에 전 사과(司果) 변기남(邊起楠), 판관(判官) 김무정(金武鼎)·김운룡(金雲龍) 등이 서로 앞다투어 그 일을 본받아 힘을 모아 말을 세낸 것이 1천 1백 43필이나 되었는데, 이는 다 임우문이 처음에 제창한 것으로 인한 것이니, 포상하는 은전이 없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하니, 상이 모두 가자(加資)할 것을 명하였다.

 

상이 하교하기를,
"대간은 아무리 풍문으로도 일을 아뢸 수 있다 하더라도 살아 있는 사람을 죽었다 하고 있는 일을 없다고 한다면 진위가 서로 섞이고 시비가 엇갈려 신빙을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임금의 이목을 장차 어찌 믿겠는가. 대각(臺閣)의 수치와 모욕이 이보다 심한 일은 없으며 뒤폐단도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이번에 노윤달(盧潤達)의 일에 대해 발론을 주장한 사람을 파직하도록 하라."
하였는데, 정원이 아뢰기를,
"자세히 살펴보지 않고 경솔히 논계한 것은 그 잘못이 없지 않은데, 상께서 책망하시고 뒤폐단을 염려하셨으니, 성상께서 지니신 뜻이 실로 범연하지는 않으나 파직의 벌을 가하는 것은 이 또한 성상께서 대간을 우대하는 뜻이 아닌 것으로 혹 언로에 지장이 있을까 염려됩니다."
하니, 답하기를,
"근밀지신(近密之臣)048)  이 이와 같이 논계하니, 어찌 유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무겁게 추고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에 앞서 지평 허열(許悅)이, 전남 수사(全南水使) 민인량(閔寅亮)이 술에 취해 전 만호(萬戶) 노윤달을 때려 죽인 죄를 논계하였는데, 나중에 인량이 하옥되어 윤달은 살아 있다고 공초하므로 상이 잡아올 것을 명하니, 윤달이 과연 죽지 않았으므로 이 분부가 내린 것이다.

 

예조가 아뢰기를,
"종묘에 배향할 제신을 이미 의정하였으나 전례를 상고해 보니, 봉상시가 위판(位版)을 만들어 본가에 보내고 관원을 보내 교서(敎書)를 낭독하고 제사를 지낸 다음, 대왕의 신주가 종묘로 나아갈 때 신연(神輦)의 뒤에서 모시고 간다고 하였습니다. 제신에 대한 교서와 위판을 부묘 도감으로 하여금 규례에 비추어 거행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4월 19일 을축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왜차(倭差) 평성부(平成扶)가 우리 나라가 연례로 주는 면포(綿布) 1만 5천 필을 쌀 1만 5천 곡으로 바꾸어 달라고 청하자 조정이 허락하지 않으니, 성부는 반드시 그 요청을 얻어내기 위해 공갈 협박을 마지 않았다. 비국이, 우선 그 요청을 따라 주되 5년간으로 기한을 정할 것을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4월 20일 병인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평안도에 우박이 내렸다.

 

4월 21일 정묘

남로성(南老星)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감옥 안에 전염병이 크게 성하자 상이 승지에게 죄수를 조사하여 그 중 죄가 가벼운 자를 석방할 것을 명하였는데, 승지가 죄인 가운데 석방할 자와 석방하지 않을 자를 기록하여 아뢰니, 하교하였다.
"이제 형조의 수안(囚案)을 보건대, 이미 석방하였는데 아직도 옥중에 있는 자도 있고 이미 가두었는데 죄수 명부에 기록되지 않은 자도 있으니, 무슨 이유인가. 당상은 추고하고 낭청은 파직하라."

 

예조가 부묘례가 끝난 뒤에 백관은 전(箋)을 올려 진하(陳賀)하고 팔방에 교서를 반포하며 또 음복례(飮福禮)를 거행할 것을 청하니, 상이 정지할 것을 명하였다.

 

4월 24일 경오

심광수(沈光洙)를 장령으로, 이기조(李基祚)를 좌빈객으로, 임담(林墰)을 우빈객으로, 강유(姜瑜)를 의주 부윤으로 삼았다.

 

상평청(常平廳)이 아뢰기를,
"굵은 무명베를 금하고 전폐(錢幣)를 통행하는 것은 곧 오늘날 백성의 생활을 편리하게 하기 위한 조치인데 굵은 무명베를 금지할 책임을 맡은 관리가 하리(下吏)를 엄중히 단속하지 못하여 폐단을 짓는 일이 있었으니, 형조와 한성부의 관리를 추고할 것을 명하소서. 양서(兩西)에 전화(錢貨)를 이제 통행할 예정으로 있으며 서울의 시민들도 그것을 쓰길 원하는 자가 있는데, 구리가 충분치 않아 전문(錢文)을 만들기 어려우니, 동래(東萊)에 있는 구리를 가져다 쓰고 또 훈국(訓局)049)  의 군기(軍器)를 제조하는 역사를 중지하여 전폐를 주조하는 소지로 삼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이어 하교하기를,
"일을 시행할 때는 점차적으로 하는 것이 중요하다. 서울에는 아직 전폐를 통용하지 말라."
하였다.

 

상평청(常平廳)이 아뢰기를,
"굵은 무명베를 금하고 전폐(錢幣)를 통행하는 것은 곧 오늘날 백성의 생활을 편리하게 하기 위한 조치인데 굵은 무명베를 금지할 책임을 맡은 관리가 하리(下吏)를 엄중히 단속하지 못하여 폐단을 짓는 일이 있었으니, 형조와 한성부의 관리를 추고할 것을 명하소서. 양서(兩西)에 전화(錢貨)를 이제 통행할 예정으로 있으며 서울의 시민들도 그것을 쓰길 원하는 자가 있는데, 구리가 충분치 않아 전문(錢文)을 만들기 어려우니, 동래(東萊)에 있는 구리를 가져다 쓰고 또 훈국(訓局)049)  의 군기(軍器)를 제조하는 역사를 중지하여 전폐를 주조하는 소지로 삼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이어 하교하기를,
"일을 시행할 때는 점차적으로 하는 것이 중요하다. 서울에는 아직 전폐를 통용하지 말라."
하였다.

 

4월 26일 임신

형조가 아뢰기를,
"전남도(全南道) 함열현(咸悅縣) 사람 유현일(柳玄逸)이 몽둥이로 제 어미를 때려 죽였습니다. 강상(綱常)의 변이 어느 시대인들 없겠습니까마는 이놈처럼 흉악한 자는 없었는데 벌을 받기 전에 자살하였으니, 일이 매우 통분합니다. 그의 아우 세룡(世龍)은 이미 실상을 알고서도 처음에 바른 대로 고하지 않아 그 죄가 그의 형과 다름이 없는데, 본도의 감사는 한 차례 형신을 가하고 도로 곧 내보냈으니, 매우 옥사를 처결하는 사체를 잃었습니다. 마땅히 도로 세룡을 구금하여 다시 엄형을 가해 기어코 실정을 얻어내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이어 하교하기를,
"현일은 죄가 대역(大逆)에 관계되니, 이미 죽었다고 하여 그대로 둘 수는 없다. 소급하여 법을 가하는 것도 안 될 것은 없으니, 대신에게 물어서 조처하라."
하였는데, 영의정 김육이 헌의하기를,
"자식으로서 손수 제 어미를 죽였으니, 흉역(凶逆)의 정상이 반적(反賊)과 뭐가 다르겠습니까. 마땅히 법에 의해 정형할 일인데 미처 하옥되기 전에 자살해 버렸으니 법을 제대로 집행하지 못한 정도가 심하다고 하겠습니다. 다만 소급하여 벌을 가하는 법은 율문에 실려 있지 않은 것으로서 국가가 혹 역적의 괴수에게 시행하기는 해도 강상의 변에 있어서는 비록 미처 정형하지 못한 자가 있더라도 소급해 벌을 가한 일이 있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으니, 신은 불가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예로부터 흉역들 가운데 이놈처럼 제 손으로 제 어미를 죽인 자는 없었다. 만일 특별히 처치하는 일이 없으면 어떻게 이 나쁜 풍속을 깨우치겠는가. 이는 교화가 밝지 못한 데에서 나온 것으로서 진실로 과인의 죄이다. 한 가정의 역자(逆子)는 한 나라의 역신(逆臣)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다시 영중추부사 이경여(李敬輿)에게 의논하라."
하였는데, 경여가 헌의하기를,
"천하의 악은 마찬가지이니 시역(弑逆)의 변은 가정이나 국가가 뭐가 다르겠습니까. 옛날 왕돈(王敦)이 죽은 뒤에 무릎을 꿇리고 목을 베자050)   당시 사람들이 통쾌하게 여겼으며, 주온(朱溫)051)  이 추후의 주륙을 면하자 후세에서는 유감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이제 현일(玄逸)이 손수 제 어미를 죽였는데도 정형(正刑)을 하지 못하여 죄에 걸맞는 벌을 주지 못했으니, 소급하여 주륙을 가하는 것이 무방할 듯합니다. 다만 추후에 형을 가하는 율은 법문(法文)에 없으므로 상례를 벗어나 특별히 벌을 주는 것은 신이 감히 함부로 의논할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하교하기를,
"율문에 없다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의 변은 새짐승도 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실로 부득이해서 그러는 것이다. 특별히 상례 이외의 무거운 율을 써서 그 죄를 바룰 것이며, 앞으로는 이를 끌어다가 규례로 삼지 말라."
하였다.

 

4월 27일 계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청주 목사(淸州牧使) 홍전(洪瑑)을 제주 목사(濟州牧使)로 삼고 양성 현감(陽城縣監) 조윤석(趙胤錫)을 공조 정랑으로 특별히 제수하였으며, 이경억(李慶億)을 제주 안핵 어사(濟州按覈御史)로 삼았다. 이에 앞서 정의 현감(旌義縣監) 안즙(安緝)이 제주 목사 김수익(金壽翼)이 거느리고 있는 군관(軍官)과 사사로운 원한이 있어, 수익이 관아에 앉아 있는데 안즙이 장칼을 들고 달려들어와 수익에게 욕설을 퍼붓자, 수익이 서장으로 치계하면서 아울러 안즙이 관곡을 함부로 소비한 죄를 말하니, 상이 안즙을 잡아와 국문할 것을 명하였다. 안즙이 공초에서 수익을 많이 욕하고 청렴하지 못한 형적이 있었다고 말하니, 상이 금부로 하여금 의논하여 아뢸 것을 명하였는데, 금부가 아뢰기를,
"안즙의 수많은 말들은 다 무함하려는 데에서 나온 것이므로 비록 이것을 가지고 수익을 죄줄 수는 없다 하더라도 수익이 거느린 군관은 모두 시정(市井)의 장사치들이니, 남들의 비난을 받는 것은 스스로 초래한 것입니다. 안즙의 죄상에 대해서는 삼가 상의 재결을 바랍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탐라(耽羅)의 한 지역은 멀리 바다 밖에 위치하여 임금의 교화가 미치지 못하는 곳이므로 탐관오리가 제 하고 싶은 대로 부도한 짓을 자행하며, 억울한 일이 있어도 풀지 못하고 폐단이 있어도 바로잡지 못하니, 아, 이 지역의 백성은 유독 내 백성이 아니란 말인가. 나는 이러한 폐단을 염려하여 즉위한 초기에 특별히 문관을 가려서 보냈던 것이다. 안즙이 죄수로서 날조하는 말은 충분히 믿을 것이 못 되지만 그 대체적인 것을 생각해 보면 시정배를 거느리고 이익의 소굴에 처한 일은 이미 괴이한 일이며, 전후에 걸쳐 올린 문보(文報)는 분한 마음에서 나온 듯하므로 그것을 공정한 말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은 분명하다. 안즙의 죄상이야 족히 말할 것이 없지만 김수익의 일도 매우 놀라우니, 분명히 조사하여 무겁게 처단하지 않을 수 없다. 강인하고 슬기로운 어사를 충분히 가려 차견하여 그로 하여금 엄중히 조사하고 아울러 민폐를 살피게 하라. 김수익은 체차하고 그 후임을 가려서 차출하여 서둘러 출발시킬 것이며, 안즙은 우선 그대로 가두어 두었다가 다시 조사하여 조처하라."
하였다. 그리하여 홍전을 김수익 대신 목사로 삼고 이경억을 어사로 삼은 것이다.

 

4월 28일 갑술

함흥부(咸興府)에 큰바람이 불어 덕릉(德陵)052)  과 안릉(安陵)053)  의 소나무가 많이 뽑혀 예조 참의 민응협(閔應協)을 보내 봉심하였다.

 

진선(進善) 송시열(宋時烈)이 병으로 사직하고 오지 않자 상이 우선 체직할 것을 명하고 아울러 본도 감사로 하여금 약물을 충분히 주게 하였다.

 

당초에 인열 왕후(仁烈王后)의 시책문을 병자년 병란에 잃어버렸는데, 이때에 이르러 부묘 도감이 아뢰기를,
"부묘할 때는 마땅히 시책을 써야 하는데 이미 소급하여 지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예를 생략할 수도 없으므로 이 때문에 계품합니다."
하니, 상이 대신에 의논할 것을 명하였다. 영의정 김육이 헌의하기를,
"시책의 글은 미리 제술하여 옥책(玉冊)에 써 두었다가 대행왕(大行王)의 발인 이전에 종묘에 고하고 혼전(魂殿)에 봉안하며, 부묘할 때 묘실(廟室)로 들여가는 것이 예입니다. 이제 숙녕전(肅寧殿)의 시책을 불행하게도 병란 속에 유실하였으나 이미 종묘에 고한 글이라서 고쳐 지을 수 없으니, 이제 다시 의논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리고 휘호(徽號)를 추상(追上)할 때 보(寶)도 있고 책(冊)도 있었는데 이 또한 시책이니, 반드시 고쳐 지을 것은 없습니다."
하고, 영중추부사 이경여는 헌의하기를,
"종묘에 올려 부묘하는 예는 극히 엄격하고 중대하니, 비록 하찮은 의장(儀章)에 관한 예법이라 하더라도 감히 흠결이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인데, 더구나 이처럼 시책을 각실(各室)에 봉안하는 일은 곧 열성(列聖)이 준행하신 규례이니, 병란으로 인하여 유실한 것이 이미 전고에 없던 변이고 보면 오늘에 와서 참작하여 조처하는 것 또한 마땅히 전고에 없던 변례(變禮)가 있어야 합니다. 변례가 중도를 얻으면 이것이 곧 예입니다. 신처럼 얕은 소견으로는 감히 함부로 의논드릴 수 없으나 대체로 어버이를 섬기고 신을 섬기는 도리는 오직 성실에 달려 있을 뿐이니, 사실을 들어 정성껏 고하고 책문을 고쳐 지어 쓰는 것이 전혀 휘장(徽章)을 생략하는 것보다는 나을 듯합니다. 그러나 근거없는 무식한 설을 어찌 감히 스스로 옳다고 주장하겠습니까."
하였는데, 상이 경여의 의논대로 따를 것을 명하였다. 영의정 김육이 아뢰기를,
"시책을 고쳐 짓는 일은 이경여의 헌의대로 할 것을 명하셨으니 도감으로서는 즉시 봉행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만 인열(仁烈) 두 글자는 곧 선조(先朝)에서 정하신 시호이고, 책문을 지어 올린 것도 또한 선왕의 명에 따라 제체(齊體)의 예054)  를 행한 것으로서 이미 선왕의 어람(御覽)을 거친 뒤에 종묘에 고하는 예를 행하였으며, 이를 받들어 올린 상신(相臣) 또한 선왕의 명을 받들어 거행한 것입니다. 이제 책문을 고쳐 지으면서 선왕의 명이라고 가탁한다면 틀린 것이고 전하의 분부를 받든 것이라고 한다면 안 되는 일이니, 이는 극히 난처한 예절입니다. 더구나 길례(吉禮)와 흉례는 서로 겹쳐서는 안 되는 법인데 상제(祥祭)가 이미 지나고 부묘하는 예를 곧 행해야 하는 지금, 길례로 나가는 때를 당하여 초상 때의 예로 다시 종묘에 고하는 것은 어찌 매우 온당치 못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맹자가 말씀하기를 ‘천하의 재물을 아까워하여 그 부모에 대하여 절약하지 않는다.’ 하였습니다. 만약 그 비용을 아껴서 혹시 흠결된 일이 있게 된다면 비록 하찮은 의장(儀章)에 관한 예법이라도 거행하지 않을 수 없으나 사세가 불행히도 유실된 것이고 보면 있는 것은 있다 하고 없는 것은 없다고 해야 하니, 이것이 곧 정성입니다. 어찌 소급하여 고치는 것을 정성이라 하고 고치지 않는 것을 정성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난리 속에 유실되어 예물을 갖추지 못했다는 뜻으로 영사전(永思殿)과 숙녕전(肅寧殿) 두 곳에 치제하고 고한다면 옳을 것입니다. 책문을 고쳐 지으면서 유실한 이유만을 실으면 이는 사유를 고하는 말이지 시책의 본디 모양이 아닙니다.
신은 도감에 재직하고 있고 또 책문을 받들어 올리려고 하다 보니 삼가 마음에 불안한 바가 있어 그 소견을 다 아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니, 다시 이경여에게 수의할 것을 명하였다. 경여가 헌의하기를,
"대체로 천하의 일이란 일반적인 것도 있고 특별한 것도 있으며 거기에 대처하는 것 또한 상도(常道)와 권도의 구별이 있는 것입니다. 특별한 일을 만나 권도로 대처하되 그 적절한 법을 잃지 않는다는 것은 의리에 정밀하고 식견이 밝은 이가 아니면 섣불리 의논할 수 없는 것입니다. 더구나 종묘의 예는 극히 엄중한 것으로서 변에 대처하는 방도는 신의 얕은 소견으로 감히 그 사이에 간여할 바가 아니지만 전하께서 하문하신 상황에서 감히 침묵을 지킬 수 없기에 함부로 무리한 말을 진달하여 헤아려 선택하실 소지로 삼으시게 하였는데, 방금 영의정 김육의 전후 장계를 보니 명백하게 일리가 있어 신은 감히 시비를 무리하게 논하지 못하겠습니다.
다만, 사람은 저마다 소견이 있기 마련인데 터무니없는 신의 구구한 의견은 이렇습니다. 열성(列聖)의 책보(冊寶)가 변란을 만나 유실되어 남아 있는 것이 얼마 되지 않기 때문에 추후에 고쳐 만들 것으로 이미 선조(先朝)의 성명(成命)이 계셨습니다. 다만 시사에 쫓겨 착수하지 못하였을 뿐, 조만간에 고쳐 만들 조처가 있을 예정이었으니, 각실(各室)의 교서와 시책이 모두 그 글이 있을 것이라고 어찌 보장하겠습니까. 그 가운데 만약 본문이 없다면 장차 빼버리고 고쳐 짓지 않겠습니까, 아니면 부득이 사당에 그 사유를 갖추어 고하고 고쳐 지어서 사용하겠습니까. 선조의 책명(冊命)에 이미 제체(齊體)의 예가 있었으므로 오늘에 와서 소급해 올리는 것도 어버이를 드러내는 도리에 방해로울 것이 없을 듯하니, 오직 실상을 누누이 개진하여 조어를 잘 꾸미면 될 것입니다. 비록 혹시 곤란한 곡절이 있다 하더라도 정례(情禮)가 제대로 되어 흠이 없으면 크게 구애될 것은 없을 듯합니다마는, 신처럼 범상하고 고루한 사람이 어찌 감히 제 소견을 옳다고 주장하겠습니까. 큰 예를 절충하는 것은 오직 성상의 재량에 달려 있습니다."
하니, 상이 하교하기를,
"두 대신의 소견은 각기 일리가 있어 모두 상도와 권도에 부합되는데, 어버이를 끝없이 추모하는 나의 정으로서는 어버이를 드러내는 예절을 갖추지 않을 수 없다. 영중추부사의 의논이 정례에 합당할 듯하니 이에 따라 익히 강론하여 거행하라."
하였다. 시책문은 판중추 조익(趙翼)이 지은 것인데, 조익도 본 초고를 잃어버렸었다. 마침 그 글을 베껴 써 놓은 자가 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도감에서 그것을 구해 마침내 새겨서 사용하였다.

 

평안도 성천부(成川府)에 큰비가 내리면서 천둥 번개가 심하게 쳤는데, 민간에서 벼락을 맞아 죽은 자도 있었다.

 

4월 29일 을해

장령 심광수(沈光洙)가 상소하기를,
"오늘날 대각(臺閣)에서 재직하기란 어렵습니다. 위로는 양이 극도로 성한 경향이 있고 아래로는 위를 의심하고 뜻이 막힌 혐의가 있어 하늘과 땅이 서로 어울리지 않고 마루와 섬돌은 날로 멀어져만 가니, 이는 태평한 세상의 광경이 아니므로 신은 삼가 괴로운 마음으로 한탄하지만 이렇게 된 까닭을 모르겠습니다. 대신을 조율한 한 가지 일로 위아래가 이렇게까지 서로의 주장을 고집하고 있으니, 대신을 대우하는 체모로 헤아려 볼 때 진실로 미안한 점이 있습니다. 슬기롭고 성스러운 전하께서 어찌 이것이 중도에 지나친 일임을 모르시겠습니까마는 대각의 의론이 일어나자 성상의 위엄이 거듭 가해져 양사의 많은 관원이 일시에 특명으로 체직되니, 어찌 너그럽게 포용하는 큰 도량에 손상이 있지 않겠습니까. 이로부터 대각이 사기가 꺾여 모두 서성거리며 물러나려고 하는데, 전하의 마음 속에 ‘저들은 잘못하고 나는 잘하며 저들은 끝내 나를 이기지 못할 것이다.’ 하신다면 전하의 남에게 이기기를 좋아하고 자기의 주장을 고집하는 마음이 그 정도가 깊다고 하겠습니다.
대체로 뇌시(誄諡)를 짓는 일은 이 얼마만한 중대사입니까. 그런데도 다른 사람을 대신하여 시장(諡狀)에 이름을 쓰고 문자상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으니, 이 또한 그릇되지 않았습니까. 그것을 다른 사람이 지었다고 핑계대는 것은 매우 구차한 일이며, 더구나 윤방의 강도(江都)의 일은 사람들의 이목에 남아 있어 이제까지도 그에 관한 말이 사라지지 않고 있는데 감히 지나치게 추켜 올려 마치 공을 이루고 절개를 세운 자처럼 하였으니, 이는 위로 성상의 총명을 가리고 아래로는 공론을 무시한 것입니다. 그 놀랄 만한 허물이 어찌 불찰한 정도에서 그치겠습니까. 당연히 전하의 공정하신 시비 판단에서 빠져나가지 못할 것입니다. 오늘날 논계하는 자들은 이점은 생각하지 못하고 조율만 가지고 논쟁하고 있으니, 상의 노여움을 격발시킨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간하는 말을 좋아하며 주관을 버리고 남의 의견을 포용해야 할 전하의 도리로서는 진실로 묻혀진 의리를 밝혀 앞길을 인도하고 가부를 서로 조정하여 마침내 극히 옳은 데로 돌아가게 해야 할 것이니, 어찌 반드시 목소리와 안색에다 노여움을 나타내어 사기를 꺾어서야 되겠습니까."
하니, 상이 너그럽게 답하였다.

 

남원(南原)의 유학(幼學) 정협(丁浹)이 상소하여 시정(時政)의 잘잘못을 극구 진술하고 또 향약(鄕約)을 시행하여 민간의 풍속을 쇄신시킬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그 상소를 비국에 내려 의논하게 하였다. 비국이 아뢰기를,
"향약의 일은 옛날 시골 개인 학당에서 실시하던 법으로 마땅히 중외에 실시하여 백성을 가르치고 기르는 방도를 다하여야 할 일입니다마는, 굳이 향약이라는 이름을 붙일 것은 없고 목민관(牧民官)이 학교의 정사를 잘 닦아 거행하면 될 것입니다. 각도의 수령으로 하여금 이끌어 바로잡아주고 가르쳐서 인재가 이루어지고 풍속이 달라지게 하며 혹시 행실이 완전하고 재주가 높은 사람이 있으면 조정에 보고하여 시험삼아 쓰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마는, 법제의 존폐와 손익은 갑자기 의정(議定)할 수 없습니다. 신들은 지금 있는 마음을 다해 강구하고 있지만 성상께서도 유념하여 채납하소서."
하니, 상이 하교하기를,
"요즈음 윤리 도덕이 크게 무너져 흉악한 변고가 다달이 생기고 제 손으로 어버이를 때려 죽인 자까지 있으니, 이를 생각하면 소름이 끼친다. 윤리 도덕이 무너져서 자식은 자식의 도리를 못하고 신하는 신하의 도리를 못하고 아내는 아내의 도리를 못하면 아무리 좋은 법과 아름다운 정치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어디에다 쓸 것인가. 향약은 굳이 그 명칭을 특별히 세울 것이 없고 목민관으로 하여금 무너진 풍속을 바로잡게 하자고 한 것은 매우 범연한 말이다. 오늘날 해야 할 일은 풍속을 교화시키는 것보다 급한 일이 없는데 일찍이 조종조 때 경외의 백성에게 모두 「삼강행실(三綱行實)」을 외워 익히게 했던 것은 범상한 뜻이 아니었다. 지금 비록 단기간에 효과가 나타나는 것을 기대할 수는 없더라도 오륜(五倫)을 닦아 밝혀서 시골의 무식한 백성들로 하여금 다 느끼어 선한 마음이 일어나게 한다면 세도(世道)를 만회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4월 30일 병자

평안도에 서리가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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