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일 정축
상이 영사전(永思殿)에서 삭제(朔祭)를 거행하였다.
경상도에 얼음이 얼고 우박이 내렸다.
5월 2일 무인
이후원(李厚源)을 지경연으로, 민응형(閔應亨)을 동지경연으로, 윤겸(尹㻩)을 장령으로, 홍수(洪鐩)를 지평으로, 이천기(李天基)를 교리로 삼았다.
사간 김응조(金應祖)가 인피하기를,
"하늘이 우리 전하를 깨우치는 것이 또한 지극합니다. 안동(安東)과 예안(禮安) 지방에 흰눈이 온 산을 덮었습니다. 3월의 눈을 《한서(漢書)》에서는 오히려 두려운 마음으로 썼는데 더구나 5월의 눈이겠습니까. 신은 성상의 덕에 무슨 부족한 것이 있고 조정의 정사에 무슨 하자가 있어서 그런 것인 줄은 모르겠습니다만, 우선 한길가에서 본 것을 가지고 말씀드릴까 합니다. 지난해에 흉년이 들어 민간에서는 굶주림에 허덕이는데 부역이 어지럽게 일어나 시름의 탄식이 도처에 가득합니다. 도성의 각사가 포목을 징수하는 폐단이 날이 갈수록 심하여 수년 전에는 그래도 35, 36척으로 기준을 삼았으나 이제는 40여 척에 이르고 있으며, 심지어 삼분 모곡(三分耗穀)055) 을 포목으로 바꾸어 징수한다는 명이 나오기까지 하자 서민들의 원성이 끝이 없습니다.
또 듣건대 상평청(常平廳)이 별장(別將)을 각지로 나누어 보내 강압적으로 모곡의 값을 정하므로 민간에서 모두 머리를 흔들고 서로 말하기를 ‘혼조 때의 조도 별장(調度別將)이 다시 왔다.’고 한다 합니다. 성상께서 위에 계시는데도 이러한 일이 있단 말입니까. 어찌 충분히 화기(和氣)를 손상하여 재변을 초래하지 않겠습니까. 대체로 징수하는 포목의 척수는 법전에 실려 있는데도 법을 어기고 백성에게 화를 끼치는 일이 이렇게까지 심한데, 하물며 기타 각 고을에 바치는 재물이야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대체로 모곡이란 본디 국가가 정식으로 쓰는 것이 아니고 각읍의 수령이 쓰는 것이므로 이제 비록 그것을 빼앗아 백성의 부역을 도와줄 수는 없더라도 마땅히 각읍으로 하여금 한(漢)나라 때 값을 올려 백성을 이롭게 했던 뜻에 의하여 백성의 편의대로 바꾸어 바치게 해야 하니, 어찌 반드시 시정(市井)의 무뢰배로 하여금 각읍을 횡행하면서 강압적으로 값을 매기게 하여 백성의 원망을 가중시킨단 말입니까. 또 듣건대 가을경에 또 별장을 보내 토산물을 무역한다고 하므로 백성들이 더욱 당혹하여 어찌할 줄 모른다고 합니다. 대개 토산물을 무역하는 일은 마땅히 수령에게 책임지워야 하니, 어찌 별장을 보낼 것이 있겠습니까.
신은 일찍이 이 두 가지 일을 가지고 사리를 돌아보지 않고 진소하였으나 말이 거칠고 정성이 적어 채납되지 않았는데, 이제 또 상중에 계신 임금께 괴로움을 끼쳐드렸으니, 신의 죄가 큽니다. 신의 직을 체차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 인피한 내용을 보고 비로소 영남에 눈이 내린 변고를 알았으니, 놀랍고 두렵기 그지없다. 재이를 숨기고 계문하지 않았으니, 본읍의 수령과 방백을 모두 추고하라. 그리고 각사(各司)가 법령을 준수하지 않아 서민들이 이렇게까지 시름과 원망을 면치 못하고 있으니, 참으로 통탄할 일이다. 법사(法司)로 하여금 사정(私情)에 얽매이지 말고 십분 엄중히 조사하여 무거운 벌로 처단함으로써 일벌백계의 소지로 삼도록 하라. 상평청의 일도 매우 잘못된 일이니, 유사로 하여금 잘 헤아려 처치하여 외방의 민정을 달래주게 하라. 그대는 사직하지 말고 직무를 살피도록 하라."
하였는데, 얼마 후에 승지로 뛰어올려 제수하였다.
5월 3일 기묘
이해창(李海昌)을 사간으로 삼았다.
5월 8일 갑신
상이 영사전(永思殿)에서 대상제(大祥祭)를 행하였다.
5월 9일 을유
영돈녕부사 감상헌이 상소하기를,
"신은 국상의 날짜에 맞추어 죽을 힘을 다해 서울에 들어와 가까스로 곡반(哭班)에 참여하였는데, 정신이 이미 떨어져서 하루라도 더 머물러 남은 소원을 풀 수가 없으니, 구구한 정성을 바칠 길이 없습니다. 이제 장차 다시 강가로 나가 배를 빌려 타고 동쪽으로 돌아갈 예정인데, 신은 금년에 82세로서 이제 가면 영원히 대궐을 보지 못할 것입니다. 삼가 원컨대 성상께서는 더욱 하늘이 내린 경계를 삼가고 백성의 고통을 돌보시어 억만년토록 끝없는 우리 동방의 계책을 세우소서. 신은 눈물이 하염없이 흐릅니다."
하니, 답하기를,
"경의 소장을 살펴볼 때 이미 돌아갈 계획을 세웠으니 내 마음이 매우 섭섭하여 무어라고 형용할 말이 없다. 헤어진 지가 오래되어 한번 만나보고 싶은데 조금이라도 머물러 줄 수 없겠는가. 소장의 하단에 나를 경계하고 가르치는 말은 요긴하고 간략할 뿐만 아니라 나라를 잊지 못하는 정성이 언어의 밖에 넘쳐흐르니, 참으로 감탄스럽다. 더구나 군주의 직책은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니, 감히 마음속에 새기지 않겠는가."
하였다.
5월 11일 정해
상이 하교하였다.
"악역(惡逆)은 만년토록 강상에서 용납되지 않는 것으로서 남의 신하된 자는 그런 자와 하늘과 해를 함께할 수 없는 것인데, 이제는 그것을 하찮은 일로 보고 이상하게 여기지 않으니, 백성의 윤리와 나라의 기강이 어찌 이렇게 무너졌단 말인가. 이제 해창군(海昌君) 윤방의 시장을 조익(趙翼)이 손수 짓지 않았으면 자세히 살펴보고서 그의 이름을 썼어야 옳을 것인데 감히 역강(逆姜)을 빈궁이라 불렀으니, 나의 마음을 시험해 보려는 속셈이 그 속에 있는 것이 아닌가. 감옥에 가두어 모욕을 주고 싶지는 않으나 또한 다 용서하여 국법을 무너뜨릴 수 없으니, 조익을 삭탈 관작하여 문외 출송하라."
상이 하교하기를,
"조종이 법을 제정한 당초에 상벌을 적용하는 법이 이미 귀천의 구별이 있었으며 열성들께서는 이를 삼가 받들어 마침내 완전한 법이 되었으므로 비록 존귀한 군주로서도 감히 그것을 변동할 수 없는데 더구나 신하된 자의 처지이겠는가. 저번에 두세 대신(臺臣)이 한때의 격한 마음으로 인하여 함부로 왕자를 조율하여 태장(笞杖)으로 단죄하자고 청하여 끝까지 고집하였는데도 조정에 있는 신료들은 감히 그 잘못을 말하지 못하였다. 아, 신하된 자가 화복을 농단하고 국법을 무너뜨린다면 어찌 그대로 덮어둘 수 있겠는가. 나는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유사로 하여금 당해 관리를 적발하여 삭탈 관작하는 벌을 시행하게 함으로써 국법을 중하게 하라."
하였는데, 정원이 아뢰기를,
"삼가 상의 분부를 받드니 놀랍고 두렵기 그지없습니다. 당초에 경솔히 논계한 일은, 그것을 법문(法文)에 전혀 어둡고 사체를 모른다고 말하면 그럴 수 있으나 화복을 농단하고 국법을 무너뜨렸다고 말하여 이제 와서 허물을 따져 삭탈 관작으로 죄를 준다면 어찌 정도에 지나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시장을 잘 살피지 못한 죄는 어찌 거기에 맞게 시행할 벌이 없겠습니까. 그런데도 임금을 시험해 본 것이라는 구실로 갑자기 삭출의 벌을 가한다면 이 또한 너무 무거우니, 이는 대신을 너그러이 포용하고 죄상과 벌칙이 서로 맞는 도리가 아닐 듯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죄과가 이미 드러나 속일 수 없는데도 이와 같이 억지를 부리니, 내가 볼 때 남을 비호하느라 무진 애를 쓰는 것이라 여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헌부가 아뢰기를,
"종실 진성군(珍城君) 이해령(李海齡)056) 은 그의 첩자(妾子)와 함께 건장한 종을 많이 거느리고 전 현감 유흡(柳潝)의 집으로 달려들어가 그 첩을 결박하고서는 첩의 어미까지 함께 죽였습니다. 이른바 흡의 첩은 바로 해령의 여종으로 일찍이 흡에게 팔았던 자이고, 그 어미는 해령이 전일에 자기가 첩으로 두고 있으면서 자기의 자식을 낳기까지 하였는데, 사나운 첩의 질투로 인해 쫓아내어 흡의 집에 두었던 자입니다.
관아에 알리지 않고 노복을 제멋대로 죽이는 것도 그 죄가 있으며, 자신이 첩으로 데리고 있는 자도 오히려 함부로 죽일 수 없는데 더구나 이미 팔아버려 사부(士夫)의 첩이 된 자이겠습니까. 모녀를 다 죽인 것도 이미 차마 하지 못할 일인 데다 유흡의 첩은 임신하여 만삭인 몸인데 그 배를 때려 죽였습니다. 대체로 임신한 부인은 형을 가하지 않는다고 법전에 실려 있는 것은 곧 인명을 중시하기 때문입니다. 해령이 아무리 극도로 무상하더라도 국법을 두려워하였다면 어찌 감히 흉패한 짓을 자행하는 것이 이 정도에까지 이르렀겠습니까. 해령과 그의 첩을 모두 잡아다가 국문하여 율에 따라 정죄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5월 12일 무자
상이 주강에 나아가 《서전》 탕고(湯誥)를 강독하였다. 강독이 끝난 뒤에 동경연 민응형(閔應亨)이 아뢰기를,
"저번에 윤방의 시호를 의논할 때 신은 옥당의 장관으로서 잘 살펴보지 못하였으므로 신은 사실 죄가 가장 큰 사람인데 성상께서는 비호하여 그 죄를 용서하시고 도리어 승서(陞叙)의 은전을 입었으니, 신이 어찌 마음이 편안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한때의 과실은 큰 죄가 아닌데 경은 어찌 한결같이 인책하는가."
하였다. 응형이 아뢰기를,
"왕자를 조율해서는 안 된다는 분부는 사실 일리가 있으며 대신(臺臣)이 감히 이로써 청한 것은 사실 사체를 모르는 소치입니다마는, 상께서 화복을 마음대로 한다는 분부까지 내리시며 본심을 이해하지 않고 곧장 무거운 벌을 가하셨으니, 앞으로 감히 진언할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왕자가 죄가 없다고 하는 말은 아니다. 심광수(沈光洙)의 이른바 ‘비록 조율하지 않더라도 마땅히 시행할 벌이 있기 마련이다.’고 한 것이 옳은 말이다. 다른 사람은 조율하는 것이 미안한 것임을 전혀 모르면서도 유독 대신을 조율하는 것에 대해서는 벌떼처럼 일어나 힘껏 말리니, 왕자는 선왕의 골육인데 어찌 이처럼 짓밟는단 말인가. 여러 신하들이 늘 대간을 우대하는 것으로 말하지만 대간의 처사가 이와 같으니, 또한 어찌 우대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응형이 아뢰기를,
"조익이 당초에 잘 살피지 못한 일은 비록 고의가 아니었더라도 밖의 의논은 모두 그 죄가 없지 않다고 합니다마는, 임금을 떠보려고 했다는 분부까지 내리셨으니 조익이 어찌 다른 마음이 있었겠습니까. 군신간에는 성심으로 서로 믿는 것이 중요한데 갑자기 실정 밖의 분부를 내리셨으므로 뭇 신하들은 실망을 금치 못하고 있습니다. 마음을 떠본다는 뜻의 ‘상시(嘗試)’ 두 글자는 없애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이 이미 충고하였으니 고치는 것이 뭐가 어렵겠는가."
하고, 이어 승지에게 이르기를,
"‘상시’ 두 글자를 삭제하도록 하라."
하였다.
저녁에 상이 옥당의 강관을 소대하여 《대학연의(大學衍義)》를 강독하였다.
간원이 【사간 이해창(李海昌), 헌납 채충원(蔡忠元), 정언 정언벽(丁彦壁).】 상차하기를,
"요즈음 윤방 시장 안의 문자로 인하여 상께서 진노하시어 견책이 계속 내려지고 있습니다. 아, 천하의 악은 마찬가지입니다. 군부의 원수에 대해 모든 신하들이 그 누가 통분해 하지 않겠으며, 자기 이름을 시장의 아래에 쓰면서 자세히 살피지 않았으니 혼매하여 일을 그르친 과실을 진정 면하기 어렵습니다마는, 그렇다고 임금의 마음을 떠볼 심산에서 그런 것이라고 한다면 참으로 실정이 아닌 것입니다. 그리고 시장에 자세히 수정을 가한 것은 본가의 자제만한 경우가 없는데 특별히 너그럽게 용서하는 은전을 베푸셨으니, 이는 전하께서 벌을 중도에 맞지 않게 쓰신 것입니다.
왕실의 친족은 지위가 조정의 관료와 다르므로 존경하는 도리가 대신에 비해 더 무거우며 가볍지 않은 것은 분명합니다. 조감(照勘)을 해야 한다는 청은 법문(法文)에 어긋나더라도 다른 벌로 논죄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왕자와 대신은 예우와 존경하는 점에서는 다름이 없으나 조정의 사체로는 또한 같지 않으니, 아무리 높은 왕자의 신분이라도 법을 범한 일이 있으면 한두 대신(臺臣)이 탄핵할 수 있으나, 대신이 잘못이 있을 때는 반드시 양사(兩司)가 한자리에 다 모인 뒤에 비로소 논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찌 왕자가 대신보다 가벼워서 그러겠습니까. 대체로 왕실의 지친은 임금의 은총을 믿고 교만해지기 쉽기 때문에 예로부터 슬기로운 군주는 그에 대한 탄핵을 허용하였으니, 이는 두려워하고 꺼리는 데가 있어 감히 스스로 방자하게 행동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전하께서는 이점을 통촉하지 못하신 것이 아닐 터인데도 처음에 사관(史官)의 형추를 정지할 것을 청한 논계로 인하여 논계하지 말라는 분부를 내리시고 대비할 수 없는 일을 끌어대어 그것과 동일시하셨으니, 이는 위에서 아랫사람의 의논을 격화시킨 것이며, 대관이 법례를 상고하지 않고 곧장 조율할 것을 청하였는가 하면 대비할 수 없는 율로 논하여 태장(笞杖)으로 단죄하려 하였으니, 이는 아래에서 위의 노여움을 격화시킨 것입니다. 그리하여 위아래가 서로 맞부딪쳐 갈수록 틈이 벌어졌습니다.
또 대신을 조율하라는 명을 환수하시라는 계청으로 인하여 이미 지난일을 새삼 문책하여 반드시 단단히 죄를 다스리고야 말겠다 하시니, 대신(臺臣)이 사실 잘못이 있긴 합니다마는 오랜 시일이 지난 뒤에 과거사를 제기하신 것도 과연 옳은지 모르겠습니다. 두세 대관이 죄를 입는 것은 애석해 할 것이 없으나 전하의 사랑과 미움이 공정하지 못한 사심을 차츰 극복하지 못하고 공평 광대한 도를 차츰 확대해 나가지 못하시어 말류의 폐단이 이루 말할 수 없게 될까 매우 염려스럽습니다. 삼가 원컨대 전하께서는 중화(中和)의 덕을 힘써 다하신다면 다행하기 그지없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어찌 깊이 유념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장령 심광수(沈光洙)가 상소하기를,
"대신(臺臣)이 왕자를 조율할 것을 청한 것은 참으로 망발이므로 신이 지난번 계사 중에서 대략 그 잘못을 진술하였습니다마는 그 죄를 청하지 않았던 것은, 왕실의 지친은 임금의 은총과 세력을 믿고 교만 방자해지기 쉬워서 반드시 두려워하고 꺼리는 데가 있어야만 감히 함부로 못한다는 것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입니다.
송(宋)나라 허왕(許王)은 곧 태종(太宗)의 아들인데 중승(中丞)의 탄핵을 받고 분개하여 호소하니, 황제가 말씀하기를 ‘조정의 법을 누가 감히 어길 것이냐. 짐이 잘못이 있으면 신하들이 마땅히 지적할 것이다. 너는 개봉윤(開封尹)일 뿐인데 어찌 잘못을 들어 탄핵하지 않겠느냐.’ 하고, 마침내 죄를 받게 하였으며, 후한(後漢)의 동선(蕫宣)은 공주와 한 수레에 같이 탄 종을 때려죽였으나 강항령(强項令)이란 칭호를 내려 포상하였으니, 옛날의 제왕이 어찌 유독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이 없어서 그러하였겠습니까. 대개 교만 방자한 마음을 틀어막아 죄를 짓지 못하게 하여 친한 자를 친애하는 의를 보전하기 위한 것입니다. 저번에 대신(臺臣)의 의논은 사실 잘못된 것이지만 왕자의 과실 또한 큽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왕자는 문책하지 않고 대관만 죄를 주셨으니, 또한 공정치 못한 혐의가 있지 않겠습니까. 현재 궁가의 폐해가 상당히 많다고 할 수 있는데 대신(臺臣)이 말을 하기만 하면 푸대접을 받으므로 거의 함구하는 것으로 경계를 삼고 있는데 또다시 중율(重律)을 가하였으니, 앞으로 어느 누가 제몸의 안전을 잊고 쟁론하려 하겠습니까. 이 때문에 신이 두려워하는 것은 대간의 의논이 적절하지 못한 데에 있지 않고 폐습을 막기 어려운 데에 있습니다.
더구나 위복을 마음대로 한다는 뜻은 임금의 총애를 등에 엎고 조정을 근거지로 삼아 자기의 마음에 드는 자는 복을 주고 자기의 뜻을 거스리는 자는 빼앗는 것을 말합니다. 조익(趙翼)은 본디 일개 오활하여 사리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신이 무엇으로 그런 줄을 아는가 하면, 주자의 《사서훈고(四書訓誥)》057) 의 글은 비록 성인이 다시 나오더라도 능히 바꿀 수 없는 것인데 조익은 감히 그것을 고쳐 지어 책으로 만들어서 임금께 올렸습니다. 가령 주자의 문도가 그것을 본다면 어찌 모두 놀라 다같이 공격하지 않겠습니까. 온 세상 사람이 모두 비난하고 비웃는데도 유독 스스로 사문에 죄를 얻는 속에 빠진 것을 모르니, 그 소견이 혼미하다는 것을 이 한가지 일을 근거로 기타 모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만 간사하고 부정한 마음이 없는 것이 그 장점이므로 아무리 그를 미워하는 자라도 반드시 선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사람을 논할 때는 단점을 가지고 장점을 덮어버려서는 안 되고 법을 쓸 때는 형적을 들어 그 본심을 무시해서도 안 됩니다. 임금의 마음을 떠보려는 심산을 갖는다는 것은 그 천성이 그렇게 할 수 없는 자인데 이로써 죄안을 삼는 것은 참으로 가혹한 법으로서 신은 또한 상대방의 본심을 이해해 주는 성인의 도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전하께서 주장하시는 것이 비록 공정한 마음에서 나왔다 하더라도 명을 내리고 조치를 행하는 과정에서 그 경중을 살피지 못하고 간혹 중도를 잃는 점이 있으셔서 후세에 기준을 삼을 수 없으니, 이 때문에 신은 전하를 위하여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사람은 각기 소견이 있는 법이고 소견이 있을 때 반드시 위에 진달하는 것은 곧 숨김이 없는 도리이므로 가상하게 여긴다."
하였다.
5월 13일 기축
조계원(趙啓遠)을 도승지로, 정언황(丁彦璜)을 제주 목사로, 신천익(愼天翊)을 승지로 삼았다.
상이 형조에 하교하였다.
"들으니, 전옥서(典獄署)의 죄인 중에 옥중에서 죽은 자가 있다고 한다. 옥사가 오랫동안 적체되어 억울하게 죽게 만들었으니, 내 마음이 매우 놀랍고 슬프다. 앞으로는 신속히 처결하여 이러한 폐단이 없도록 하라."
상이 조강에 나아가 《서전》 중훼지고(仲虺之誥)를 강독하였다. 강독이 끝난 뒤에 영경연 이시백(李時白)이 아뢰기를,
"신이 듣건대, 상주(尙州)와 충주(忠州)에 토적(土賊)이 크게 성하여 산골짜기에 떼 지어 모여 있는데 그 뜻이 오로지 남의 재물을 훔치고 인명을 살해하는 데에만 있지 않다고 하니, 매우 염려스럽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중원(中原)의 유적(流賊)은 일조일석에 생긴 것이 아니라 여러 해를 두고 형성되어 마침내 제압하기 어렵게 되었으니, 이 또한 걱정되는 일 가운데 큰 것이다."
하고, 이어 시백에게 이르기를,
"경은 여러 대신들과 묘당에서 의논하여 계책을 펴 때려잡도록 하라."
하였다.
상이 대신과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전폐(錢幣)를 이미 사왔으니 우선 서로(西路)에서 시험해 보는 것이 좋겠다. 미포(米布)는 쉽게 바닥이 나니 두루 유통하더라도 바닥이 나지 않는 전폐만 못하다."
하니, 영의정 김육이 아뢰기를,
"앞으로 전문(錢文)을 반드시 사행(使行)을 통하여 사온다면 계속 수요를 충당하기 어려운 문제가 있을 듯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주조하여 쓰면 될 것이다."
하였다. 상이 또 이르기를,
"아침에 좌상의 말을 들었는 데 남쪽 지방의 토적은 작은 문제가 아니다. 만일 재국이 있는 자를 얻어 그들을 토벌하는 임무를 맡긴다면 섬멸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니, 김육이 아뢰기를,
"홍전(洪瑑)은 문무의 재주를 겸하고 지모도 있으니, 제주 목사를 체차하고 청주에 잉임시키소서."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홍전을 잉임시키도록 하라."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나는 친족과 화목하는 기풍으로 아랫사람들을 거느리려고 교동(喬桐)의 아이를 【곧 소현 세자의 세째 아들이다.】 오래전부터 데려오고 싶었으나 혹시 저쪽 청인이 들을 때 문제가 생길까 염려스러워 아직까지 실행하지 못하고 있다. 그렇지만 어찌 섬안에 오랫동안 놓아둘 수 있겠는가."
하니, 좌우 사람들이 다 아무런 말이 없다가 육이 아뢰기를,
"궁중에서 양육하는 것도 안 될 것이 없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들의 뜻은 어떠한가?"
하니, 좌의정 이시백이 아뢰기를,
"우리 나라의 조그만 일까지도 저쪽 사람이 모두 들어서 알기 때문에 혹시 따져 묻는 일이 있을까 염려되니, 차라리 교동에 그대로 두고 의식을 후하게 주면서 앞으로 사세를 보아가며 조처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내 마땅히 후일을 기다리겠다."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이시백은 진실하고 후덕하다고 이름났는데 임금의 물음에 그 뜻을 잘 받들지 못하고 마침내 골육을 사랑하고 아끼는 성상의 아름다운 뜻을 저지하였으니, 애석하기 그지없다.
【태백산사고본】 6책 6권 31장 B면【국편영인본】 35책 481면
【분류】금융-화폐(貨幣) / 외교-야(野) / 사법-치안(治安) / 인사-임면(任免) / 왕실-종친(宗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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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은 논한다. 이시백은 진실하고 후덕하다고 이름났는데 임금의 물음에 그 뜻을 잘 받들지 못하고 마침내 골육을 사랑하고 아끼는 성상의 아름다운 뜻을 저지하였으니, 애석하기 그지없다.
5월 15일 신묘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간원이 아뢰기를,
"음관(蔭官)이 삼조(三曹)058) 의 당상이 되는 것은 곧 최고의 선발로서 실로 재주와 학식을 겸비한 선비가 아니면 함부로 제수할 수 없으니, 그 직임을 중시하기 때문입니다. 호조 참의 이한(李)은 훈벌(勳閥)이 있긴 하지만 새로 당상에 올라 경력이 없는데 이조가 사체를 돌아보지 않고 경솔히 의망하여 물론이 모두 의아해 하니, 체차할 것을 명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사람을 쓰는 도는 마땅히 그 재주의 유무를 보아야 하니 어찌 반드시 음관이라는 이유로 금방 체차할 것인가."
하였다. 그후로 여러 번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장령 윤겸(尹㻩)이 상소하기를,
"예로부터 제왕의 아들은 지위가 존귀하여 특별한 은총을 믿고 행동을 삼가지 않습니다. 한때 법을 지키는 신하가 사마문(司馬門) 앞에서 말을 내리지 않은 왕자를 논하기도 하고 혹은 공주와 같은 수레에 탄 공주의 종을 때려 죽이기도 하였는데, 이를 당시의 임금은 가상하게 여겼고 후세에서는 찬미하였습니다. 우리 태종 대왕조(太宗大王朝)에는 한 부마가 불법을 자행하자 헌부가 부(府)의 뜨락에 잡아다가 형장을 가하였는데 공주가 울면서 임금께 호소하니, 태종 대왕께서 처음에는 진노하셨지만 결국 문책하지 않았으며, 선조 대왕조에는 대간이 수차 왕자의 죄를 논핵하여 순화군(順和君)을 교외(郊外)에 안치하기까지 하였는데, 이러한 조종의 거룩한 덕은 오늘날까지 칭송되고 있습니다. 인흥군(仁興君)은 서로(西路)의 피폐한 역에서 말을 바꾸면서 몇 갑절의 값을 요구하였으니, 국법으로 보아 마땅히 그 죄를 받아야 할 일입니다. 사실에 따라 논핵하는 것은 본디 대각의 사체인데도 곧장 조율할 것을 청하기까지 하였는데, 이는 소견이 어둡고 잘못된 소치에 지나지 않습니다. 어찌 왕자를 업신여기고 위복을 마음대로 할 뜻이 있겠습니까.
그리고 조익의 사람됨은 전하께서 그를 인접하는 과정에서 그 언어를 듣고 그 행동거지를 살펴보실 때 과연 바르지 못하고 불충하며 임금의 마음을 떠볼 자였습니까. 윤방의 시장은 당초에 이식(李植)의 손에서 지어졌고 식이 죽은 뒤에 조익에게 그 글을 부탁하니, 익은 말하기를 ‘이 문장은 매우 잘되어 나는 윤색할 수가 없다. 기어코 내 이름을 시장 끝에 써넣으려고 한다면 본가에서 스스로 그렇게 하라.’ 하였습니다. 그 ‘빈궁(嬪宮)’이란 한 구절의 문자를 고쳤는가 안 고쳤는가 하는 책임은 본가의 자제(子弟)에게 있는데 무턱대고 중율을 대신에게 가했으니, 옛사람의 이른바 ‘형벌을 함부로 쓰면 선한 사람에게 미칠까 두렵다.’고 한 경우에 거의 가깝습니다.
시호를 의논한 제신들은 다 같이 잘 살피지 못한 죄가 있는데, 옥당의 6원(員) 가운데 장관은 노병(老病)으로 용서받고 동벽(東壁)은 수령으로 면죄되고 정두경(鄭斗卿)은 눈병으로 면죄되고 조한영(曺漢英)과 홍처대(洪處大)는 도배(徒配)되고 조복양(趙復陽)은 도배 이외에 특별히 결장(決杖)을 명하셨으니, 조복양은 한영 등과 죄가 똑같은데도 아비의 이유 때문에 유독 징벌을 가하였습니다. 김시번(金始蕃)은 태상(太常)의 장관으로서 파직되고 오성몽(吳聖蒙)은 색관(色官)으로 도배되었습니다. 일반적으로 태상에서 시호를 의논할 때는 옥당의 동벽이 시장을 가지고 가면 그 시(寺)의 장관도 오히려 그에 대한 시비를 한 마디도 못하는데 더구나 그 말석에 있는 자로서는 이름이야 색관이지만 어찌 시장을 헤쳐보고 지적하여 함께 가부를 논할 수 있겠습니까. 이는 성몽의 죄가 아니니 어느 누가 그를 억울하게 생각지 않겠습니까. 전하께서는 천지같은 도량을 확충하시어 일체 용서하고 묻지 않으신다면 더 이상 좋을 수 없겠습니다."
하고, 아울러 체직시켜 줄 것을 빌었는데, 상이 사직하지 말라고만 대답하였다.
5월 16일 임진
헌부가 【집의 장응일(張應一), 지평 심유행(沈儒行).】 아뢰기를,
"정언 이후선(李厚先)은 그 위인의 용렬함이야 말할 것도 없고 그의 조부 이정표(李廷彪)는 일찍이 혼조(昏朝) 때 강화 별장(江華別將)으로 있으면서 부사(府使) 정항(鄭沆)과 함께 악행을 저질러 영창 대군(永昌大君)을 혹독하게 죽였으므로 이제까지도 그 일을 말하는 자는 목이 메이니, 이는 참으로 온 나라 사람이 다 가슴아파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후선은 요행히 과거에 급제하여 함부로 벼슬길에 들어섰으며 이제는 요직에 있는 자에게 빌붙어 분수넘게 미원(微垣)의 관원이 되었으므로 물의가 떠들썩하게 일어나 욕을 하지 않은 이가 없습니다. 이후선을 사판에서 삭제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5월 19일 을미
박서(朴遾)를 대사헌으로, 민응형(閔應亨)을 대사간으로, 채유후(蔡𥙿後)를 부제학으로, 유철(兪㯙)을 경기 감사로 삼았다.
청주 목사(淸州牧使) 홍전(洪瑑)이 사조(辭朝)하니, 상이 그를 소견하고 일렀다.
"그대의 해외(海外)의 직임을 체차하고 본주에 잉임시키는 것은 그 뜻이 범연하지 않은데 그대는 그런 줄 아는가? 호령(湖嶺)059) 지방에 적당(賊黨)이 도사리고 있는 지가 오래이니, 그대는 각별히 계책을 세워 기어코 모조리 잡도록 하라."
상이 주강에 나아가 《서전》 이훈(伊訓)을 강독하였다.
동부승지 신천익(愼天翊)이 상소하여 체직해 줄 것을 비니, 상이 달래는 말로 유시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전남도(全南道) 함열현(咸悅縣)을 혁파하고 용안(龍安)에다 합쳤는데, 어미를 죽인 죄인 유현일(柳玄逸)이 살던 곳이기 때문이다.
5월 20일 병신
헌부가 【집의 장응일(張應一), 장령 윤겸(尹㻩), 지평 심유행(沈儒行).】 아뢰기를,
"새로 제주 목사에 제수된 정언황(丁彦璜)은 주벽이 있어 한번 마셨다 하면 곤드레만드레 취하고 처사가 두서가 없으므로 일찍이 성천 부사(成川府使)로 있을 때 이 때문에 실패하였고, 안동(安東)과 회양(淮陽)의 수령이 되었을 때는 모두 군정(軍政)을 폐기하였다는 이유로 쫓겨났으니 이는 온 나라 사람이 다 아는 일입니다. 바다를 방비하는 중책을 결코 이 사람에게 맡길 수 없으니, 체차할 것을 명하소서."
하니, 【이 논계는 대개 언황의 입장을 위한 것이다.】 상이 따랐다.
상이 주강에 나아가 《서전》 이훈(伊訓)을 강독하였다. 강독이 끝난 뒤에 상이 이르기를,
"재변은 모두 걱정되는 것이지만 현재 급박한 재앙은 한재보다 더 큰 것이 뭐가 있겠는가."
하니, 시독관 권우(權堣)가 아뢰기를,
"그전부터 임금이 기우제를 친히 행하시면 비를 얻은 때가 많았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대신으로 하여금 먼저 행하게 하라."
하였다. 검토관 김종일(金宗一)이 아뢰기를,
"친히 비를 빌으시라고 청하였는데 즉시 따르지 않으시니 신은 전하께서 하늘을 섬기는 정성이 극진하지 못한 점이 있지 않은가 염려됩니다. 옛날 송 인종(宋仁宗) 때 왕소(王素)가 이와 같이 청하자 인종이 그대로 따라 마침내 단비를 얻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신은 나와 한몸이기 때문에 대신으로 하여금 먼저 행하게 하려고 한 것일 뿐이다. 이런 절박한 재앙을 만나 어찌 고생을 꺼릴 뜻이 있겠는가."
하였다.
저녁에 옥당의 강관을 소대(召對)하여 《대학연의》를 강독하였다.
5월 21일 정유
이원진(李元鎭)을 제주 목사로 삼았다.
간원이 【사간 이해창(李海昌), 헌납 채충원(蔡忠元).】 아뢰기를,
"전 제주 목사 정언황은 술을 즐겨 마셔 일을 폐할 뿐만 아니라 본디 풍병(風病)이 있으니, 바다를 건너가 부임할 수 없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사체로 말하면 조정에서 그 실상을 알아서 조처하는 것이 옳은데, 헌부의 관원이 체차할 것을 청하기까지 하였으니, 아무리 사람을 가려 맡기자는 뜻이긴 하나 함부로 행동한 잘못이 없지 않습니다. 헌부의 관원들을 체차할 것을 명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대관(臺官)이 수령을 체차할 것을 청하는 것은 본디 예삿일이다. 만약 그 사이에 일부러 고된 자리를 피하기 위해 사심을 따른 흔적이 있다면 명백하게 공척해야 옳을 것인데, 어찌 이처럼 몽롱하고 모호한 말로 그 뜻을 알아보지 못하게 한단 말인가. 나는 매우 인정할 수 없다. 분명하게 다시 아뢰어 처치할 수 있도록 하라."
하였는데, 해창 등이 모두 이로 인해 인피하여 체직되었으며 그 뒤에 장응일(張應一) 등을 추고할 것을 특별히 명하였다. 옥당이 상차하여 응일 등을 파직할 것을 청하니, 상이 이미 추고를 명하였다는 이유로 허락하지 않았다.
상이 주강에 나아가 《서전》 이훈을 강독하였다.
제사(諸司)의 윤대관(輪對官)을 소견하였다.
제사(諸司)의 윤대관(輪對官)을 소견하였다.
영의정 김육이 한재로 인하여 상차하여 면직을 빌고 아울러 진도(珍島)의 죄인 이천곤(李天鵾)이 환천(還賤)된 억울한 사정을 말하였는데,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천곤은 일찍이 곡식을 바치고 면천(免賤)되어 무과에 오르기까지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죄를 지어 환천되었기 때문에 김육이 차자 속에서 이를 언급하였다.
5월 22일 무술
상이 하교하기를,
"가뭄 속의 무더위가 활활 불이 붙은 것 같은데 감옥이 다 가득차서 숨을 헐떡거리는 자가 필시 많을 것이니, 매우 불쌍하다. 형조로 하여금 감옥의 죄수를 소방(疏放)하게 하고 의금부의 죄인도 또한 서계(書啓)하게 하라."
하였는데, 형조가 오늘은 국기(國忌)의 재계하는 날이라 아문(衙門)에 좌기하여 죄수를 논의할 수 없다고 아뢰니, 하교하기를,
"소방과 형신(刑訊)은 다르다. 국기에 구애하지 말고 빨리 의논하여 소방하라."
하였다.
의금부의 가벼운 죄수 16인을 석방하였다.
수릉관(守陵官) 이해(李澥) 등은 가자(加資)하고 그 나머지는 차등을 두어 논상할 것을 명하였다. 【국상의 대상(大祥) 뒤에 수릉관 이하에게 논상하는 것은 전례이다.】
【태백산사고본】 6책 6권 33장 B면【국편영인본】 35책 482면
【분류】인사-관리(管理) / 왕실-궁관(宮官)
ⓒ 한국고전번역원
5월 23일 기해
상이 하교하였다.
"내가 임금답지 못하기 때문에 재변이 계속되므로 자나깨나 두려운 마음은 깊은 못이나 골짜기 속으로 떨어지는 듯하다. 이제 한창 농사철인데 비가 내리지 않은 지가 거의 40여일이나 되어 추수할 가망이 전혀 없다. 나라는 백성에게 의지하고 백성은 먹을 것으로 하늘을 삼으니, 먹을 것이 없어서 백성이 없게 되면 나라가 어찌 나라꼴이 되겠는가. 그 허물을 곰곰이 생각하면 오로지 나에게 있다. 아, 하늘은 어찌 내 한 몸에 재앙을 내리지 않고 백성으로 하여금 대신 받게 한단 말인가. 걱정스러운 마음에 가슴 타는 것 같아 차라리 금방 죽어서 아무것도 몰랐으면 좋겠다.
승지는 내 대신 교서를 초해 널리 직언을 구하여 중외의 대소 신민으로 하여금 잘못된 정사를 숨김없이 지적해 아뢰도록 하라. 오늘부터 상선(常膳)을 줄이도록 하고 법사(法司)로 하여금 술을 금하게 하라."
대신을 보내 기우제를 지냈다.
5월 24일 경자
비가 조금 내렸다.
영의정 김육이 상차하기를,
"삼가 아룁니다. 지금 이 가뭄은 무엇 때문에 이렇게 혹독한지 모르겠습니다. 성상께서는 위에서 걱정하고 수고하시며 백관은 아래에서 직무를 받들어 행하니, 마땅히 재앙은 저절로 소멸될 것인데도 천지의 괴변과 강상(綱常)의 변이 어찌 그리도 계속된단 말입니까. 재변이 일어나는 뜻은 어떤 일에 대한 조짐인지 알 수 없으나 백성의 목숨에 절박하기가 한재처럼 참혹한 것은 없습니다. 열 줄의 어찰(御札)이 진정으로 자신에게 허물을 돌리시고, 술을 금하고 반찬 가짓수를 줄이며 언로를 활짝 열어놓기까지 하셨으니, 전하께서 자신을 책망하신 것은 성탕(成湯)도 그보다는 못할 것입니다.
삼가 보건대 전하께서는 효성을 타고나 수많은 군왕 가운데 으뜸이시며 뭇 신하를 예우하고 백성들을 사랑으로 기르시지만 형정(刑政)의 사이에 잘못이 없지 않습니다. 지은 죄는 다 같은데 벌을 적용하는 기준이 간혹 달라서 모면한 자는 다행한 일이지만 벌을 받는 자는 너무도 억울하니, 공정한 대도가 아닌 듯합니다. 우선 요즘의 일로 말하더라도 불찰한 실수에서 나온 것으로 모두가 고의성이 없는 일인데 신만이 유독 엄중하신 문책을 면하였으며, 그 본가의 한 집안 사람은 혹 파면하는 정도에 그쳤으나 옥당과 태상의 관리는 거개가 도배(徒配)되었습니다. 동이를 엎어놓은 그 속에 하늘의 해가 비치지 않은 격이니, 이 어찌 용서해 줄 만한 억울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진도(珍島) 사람에 대해서도 신이 두 번 세 번 계속 진계하여 임금께 번거롭게 고한 죄를 면하기는 어렵습니다마는 신이 어찌 바다 밖의 사람에게 털끝만큼이라도 사사로운 뜻이 있어서 그러했겠습니까.
아, 하늘과 인간과는 그 사이가 밀접하여 성상의 분부가 한번 내리자 단비가 뒤따라 뿌리니, 감응하는 효험은 그림자나 메아리보다도 빠릅니다. 신의 무식한 말을 다시 올릴 필요가 없으나 삼가 염려스러운 것은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이 혹시 이로 인하여 조금이라도 해이해지신다면 하룻밤의 비로서 반드시 천리 강토에 두루 흡족해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삼가 전하께서는 잘 살피소서."
하니, 답하기를,
"오랜 가뭄 끝에 이 단비를 얻은 것은 참으로 경들이 지성껏 기도한 공에 힘입은 것이다. 언급한 바 진도 사람의 일은 지극히 공평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니 어찌 다른 뜻이 있겠는가. 다만 사체가 그렇지 못한 점이 있으므로 왕법(王法)으로 단죄하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5월 25일 신축
이응시(李應蓍)를 사간으로 삼고, 조양(趙壤)을 특별히 칠원 현감(漆原縣監)으로 제수하였다. 【상이 심양에 있을 때 조양이 군관으로 모시고 따라다녔기 때문에 이 제수가 있었다.】
【태백산사고본】 6책 6권 34장 A면【국편영인본】 35책 482면
【분류】인사-임면(任免)
ⓒ 한국고전번역원
상이 하교하기를,
"비가 조금 내려 흡족하지 못하니 더욱 가슴이 조인다. 형조와 금부로 하여금 원옥을 심리하게 하라."
하였는데, 금부가 조복양(趙復陽)·홍처대(洪處大)·이시해(李時楷)·조한영(曺漢英) 등을 석방할 것을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상이 장차 사직단(社稷壇)에서 기우제를 지내려 하는데, 예조가 아뢰기를,
"지난해 7월에 사직단에서 기우제를 지낼 때 상께서 흑단령(黑團領)과 오서대(烏犀帶) 차림으로 예를 행하셨으나 그 당시 대신이, 이미 악을 사용하며 제사를 지내니 길복을 입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제는 제사를 지내는 것이 대상(大祥)이 지난 뒤로서 지난해와는 다르니, 청컨대 궁을 나설 때는 흑단령과 오서대를 착용하고 제사를 지낼 때는 면복(冕服)을 입으소서."
하니, 상이 대신에게 의논할 것을 명하였다. 영의정 김육과 좌의정 이시백이 예조의 계사대로 따라야 한다고 하니, 그대로 따랐다.
예조가 아뢰기를,
"영사전(永思殿) 망제(望祭)를 몸소 행하신다는 명이 계시어, 신들의 생각에는 담제(禫祭)에 이미 입곡(入哭)하는 의절이 있으니 대상과 담제의 중간에 곡례(哭禮)가 없어서는 안 될 듯하였기 때문에 감히 입곡의 한 의절을 의주(儀註) 속에 써 넣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들으니 물의가 대부분 ‘상제가 이미 지났으니 예에 있어서도 마땅히 강쇄(降殺)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곡례가 마땅한지 여부를 대신에게 의논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영의정 김육과 좌의정 이시백이 헌의하기를,
"대상 이후 담제 이전의 삭망제(朔望祭)에 곡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은 강쇄하여 길례로 나아가는 예에 입각하여 한 말입니다. 다만 미처 부묘하지 않아 영좌(靈座)가 아직 있는데, 혼전(魂殿)의 문에 들어가서 두 달이 지나 담제를 지낸 뒤에는 다시 곡하지 못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끝없는 효심이 어찌 성상의 마음에 움직이지 않겠습니까. 삭망제에 입곡하는 예에 대해 신들은 감히 반드시 그르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하니, 상이 하교하기를,
"담제일에 곡례가 있는데 그 사이에 곡을 철회하는 것은 어찌 그럴 리가 있겠으며 더구나 예는 사람의 정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가. 대신의 의논이 옳다. 그러나 널리 의논하여 행하지 않을 수 없으니, 또한 원임 대신(原任大臣)에게도 의논하라."
하였다. 영돈녕부사 이경여가 헌의하기를,
"상례(喪禮)와 제례(祭禮)는 오직 예법대로만 따라서 하면 그만입니다. 대상 뒤에 곡림(哭臨)하는 일은 예경(禮經)에 나오지 않고 또 《오례의(五禮儀)》에도 실리지 않았으니, 당초에 예조가 아뢴 것이 무엇을 근거로 하였는지 알 수 없습니다. 다만 부모의 기일(忌日)에 제사할 때 반드시 곡하는 것은 슬픈 마음이 죽을 때까지 오래될수록 변하지 않기 때문이며, 상을 치른 뒤로 가시지 않은 슬픔에 성상의 그리는 마음은 더욱 두터울 것이니, 예조가 아뢴 것은 또한 겉치레의 예법보다는 차라리 슬퍼하는 쪽을 취한다는 뜻에서 나온 것이라고 봅니다.
성인이 제정한 예는 감히 미치지 못해서는 안 되고 또한 감히 너무 지나쳐도 안 되는 것인데 삭망에 곡전(哭奠)하는 것은 예가 정도에 지나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미처 부묘하지 않아 선침(仙寢)060) 이 그대로 있으니, 궁정에서 알현할 때 위차(位次)에 나아가 곡림하는 것은 자연 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비록 예경에 나오지는 않았더라도 슬픈 울음을 억지로 억제하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조정의 백관이 흑립(黑笠)에다 천담복(淺淡服) 차림으로 대궐 뜰에서 함께 곡하기를 삼년 이내처럼 하는 것은 변화에 순응하는 예절이 아닐 듯하고 길례로 나아가는 뜻에 어긋납니다마는, 오직 예관이 예문(禮文)을 상고하여 헤아려 정하기에 달렸을 뿐입니다."
하니, 상이 하교하기를,
"예조가 예문을 상고하여 다시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삭망에 곡례를 행하는 것이 옳은지의 여부는 대신들의 헌의가 서로 다름이 없지 않고 예문을 상고해 보아도 분명히 근거삼을 만한 데가 없습니다. 다만 주자의 《가례(家禮)》에, 대상 뒤에는 곡례가 아예 없고 담제에 이르러 비로서 참신(參神)과 사신(辭神) 때에 곡하는 예가 있습니다. 대체로 사대부 집의 상제(喪制)는 대상 뒤에 바로 조묘(祖廟)에 부묘하므로 곡전이 없으나 지금은 혼전(魂殿)에서 제례를 행하는 것으로서 태묘(太廟)에 올려 부묘한 이후와는 다르니, 지극한 정의 발로에 따라 비록 예문에 없는 예를 행하더라도 겉치레보다는 차라리 슬퍼하는 것이 낫다는 뜻에 무난하겠습니다. 그러나 전후의 곡림을 삼년 이내처럼 똑같이 한다면 그 또한 변화에 순응하는 예절에 어긋나니, 다만 혼전에 들어가 위차에 나아갈 때 곡례를 행하고 삼헌(三獻) 이후에는 곡을 하지 않음으로써 강쇄하는 뜻을 보이는 것이 적절할 듯합니다. 외정(外庭)의 백관이 일제히 모여 곡하는 일은 예법에 지나친 듯하지만 상께서 이미 곡례를 행하시는데 신료들이 곡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사실 또한 미안합니다. 이로써 강정(講定)하는 것이 정례(情禮)에 합당할 듯하나 일이 변례(變禮)에 관계되어 신의 조(曹)에서 감히 단정할 바가 아니므로 삼가 상의 재결을 바랍니다."
하니, 답하기를,
"비록 지극한 정의 발로에 의한 것이라 해도 예문에 없는 예를 행한다면 감손하는 일이 없어서는 안 되니, 조신(朝臣)들은 모두 곡하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신하와 임금의 관계는 자식과 아비의 관계와 같아서 삼년의 상제와 변화에 순응하는 예절은 다 마찬가지입니다. 예경(禮經)에 ‘사람은 세 가지로 인해 살아가므로 이를 섬기기를 한결같이 하며 거상(居喪)을 똑같이 하여 삼년복을 입는다061) .’하였는데, ‘방(方)’이란 ‘똑같이 한다[比]’는 뜻이니 뭇 신하들의 상례가 전하와 다르지 않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어찌 전하께서는 곡례를 행하시는데 신하들은 곡을 하지 않는 도리가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곡을 하셔야 할지 마셔야 할지는 신들이 감히 의논할 수 없지만 신하들이 거상을 아비와 똑같이 하는 예로 볼 때 전하와 다르게 해서는 안 됩니다. 한번 잘못한 뒤에는 후회하더라도 소용이 없을 것이니, 신중히 재량하여 곡을 하든 하지 않든 똑같이 행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미 헤아려 조처하였으니, 경들은 안심하도록 하라."
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선왕(先王)과 선후(先后)를 태묘에 올려 부묘하고 뭇 신하들을 조정에서 방락(訪落)062) 하는 것은 곧 선왕의 뒤를 잇고 잊지 않는다는 뜻이며 이를 중외에 교유(敎諭)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상께서도 진하(陳賀)의 예를 사양하시어 예를 망가뜨리는 일을 초래하지 마소서. 진하와 음복(飮福) 등의 예는 감히 다시 여쭙지는 못하지만 부묘한 다음날 백관을 불러모아 중외에 교서를 반포하는 일은 그만둘 수 없겠습니다. 대신에게 의논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영중추부사 이경여가 헌의하기를,
"대체로 국가의 전례(典禮)는 반드시 천하에 법이 되고 후세에 전할 만한 뒤에야 오래도록 시행되어도 폐단이 없는 것입니다. 옛날 역대로부터 우리 조종조에 이르기까지 모두 태묘에 올려 부묘하는 것을 막대한 경례(慶禮)로 삼아 번잡한 예문과 의식을 거행하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아조(我朝)는 성자 신손(聖子神孫)이 서로 뒤를 이어 앞장서서 효성으로 천하를 다스리신 것이 전고에 뛰어났는데, 어찌 상사(喪事)를 마친 뒤에 갑자기 풍성하고 즐거운 행사를 벌여 쓸데없는 예식을 강행하였겠습니까. 그 이유는 바로, 새로 태묘에 올라가신 선왕의 혼령이 길이 의탁할 곳이 생기고 열성(列聖)과 함께 제물을 흠향하면서 임금의 좌우에 오르내리는 점으로 볼 때 후사(後嗣)로서 감히 자기 자신의 끝없는 아픔 때문에 그러한 예를 사양하여 신령의 돌보심을 저버리고 세상 사람의 기대를 섭섭하게 할 수 없으며, 신민들이 삼가 경축하는 것이 삼년 동안 거상하는 가운데 행여 병환이 나시지 않기를 기대하던 기쁨에서 나온 것이긴 하나 종묘의 막대한 경사는 또한 태묘에 올려 부묘하는 성대한 예처럼 경하스러운 일이 또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므로 송조(宋朝)에서는 태묘에 일이 있을 경우 그때마다 신료로부터 하례를 받고 온 나라에 은혜를 반사하는 조처가 있었는데, 그 당시 조정의 신하들이며 경학(經學)을 닦은 진유(眞儒)들 가운데 이를 그르다고 한 자가 없었습니다. 정자(程子)가 ‘하(賀)’자를 ‘위(慰)’자로 고칠 것을 청하고 주자가 상차하여 하례를 중지하라고 한 것은 다 삼년 이내를 가리키는 것으로서 오늘날 상제를 마친 이후의 경우와는 또한 차이가 있을 듯합니다.
그러나 삼년상이 겨우 끝나고 부묘의 예를 막 거행한 뒤라서 부왕의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리는 그리움이 더욱 사무치시어 응당 거행할 전례(典禮)도 모두 중지하고 행하지 않으시는데 더구나 신하들을 방락(訪落)하자마자 먼저 연례(宴禮)를 베푼다는 것은 정례(情禮)로 헤아려 볼 때 무엇보다도 미안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선유(先儒)가 한 말에 ‘삼년이 지난 뒤에 혹시 무슨 일로 인하여 악(樂)을 쓰는 것은 좋으나 일부러 베푸는 것은 옳지 않다.’ 하였는데, 악을 쓰는 것과 연례를 베푸는 것이 뭐가 다르겠습니까. 그렇다면 음복하는 연례를 정지하는 것은 매우 훌륭한 뜻이니 행하는 것이 그만두는 것보다 못합니다.
진하(陳賀)에 있어서는 실로 경솔히 폐하기는 어렵습니다. 대체로 즉위 때는 새로이 시작되는 것을 하례하고 부묘하는 것은 체협(禘祫)063) 과 같습니다. 태묘에 올려 부묘한 경사는 감히 하늘에 계신 혼령에게 하례드리지 못하고 그 뒤를 이은 왕에게 대신 하례하는 것입니다. 즉위에 대한 하례를 이미 거상의 초기에 행하였으니 태묘에 올려 부묘한 것을 경하하는 것이 또 어찌 길례로 들어선 뒤의 시점에서 의심할 것이 있겠습니까. 만약 오늘날 하례를 청하는 것이 오로지 임금에게만 아름다움을 돌리는 뜻에 있지 않다는 것을 깊이 생각해 보면 의심이 밝혀지기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하고, 영의정 김육은 헌의하기를,
"저번에 예조가 진하와 음복을 하자고 청하자 성상께서 윤허하지 않으셨는데, 바깥의 의논은 모두가, 상께서 비록 윤허하지 않으셨지만 대신이 잠자코 한 마디도 한 것이 없었다는 것으로 신들을 비난하였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이 예가 비록 법전에 실려 있고 그전부터 이미 행했던 예라 하더라도 성상께서 윤허하지 않으신 뜻은 특별히 슬픈 마음과 선왕의 뒤를 잇는다는 효심에서 나온 것이므로 신자로서는 마땅히 그 뜻을 따라야 할 일인데, 어찌 감히 반대하여 청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사람은, 삼년이 지난 뒤에 태묘에 부묘하고 길복으로 조정에 임하셨으므로 이는 임금이 새로운 정사를 펴는 막대한 경사인데 어찌 진하하고 음복하는 성대한 예가 없을 수 있느냐고 합니다마는, 신의 생각에는 뭇 신하들이 상을 받드는 정성으로는 사실 당연한 일이나 성상의 입장에서는 스물 다섯 달이 지난 뒤에 아직도 슬픔이 가시지 않고 선왕의 뒤를 잇는다는 걱정으로 차마 조정에 임하여 하례를 받지 못하시니 이는 큰 효자의 거룩한 덕이라고 여겨집니다.
처음 상을 당해 망극한 가운데 보좌에 올라 하례를 받는 것은 폐할 수 없는 큰 예이니, 《맹자》에 이른바 ‘궤연에 나아가 곡을 하니 감히 슬퍼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는 것이 이를 두고 한 말인데, 삼년이 지난 뒤에 반드시 재차 하례를 받을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신의 생각은 이와 같았기 때문에 예관의 뜻에 따라 계청하지 못했으니, 바깥 사람들이 이를 지적하여 잘못하였다고 하는 것은 신이 그 책임을 감히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교서를 반포하는 일은 참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부묘하는 예는 이 얼마나 큰 일인데 중외에 널리 고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 뜻은 신이 이미 예관(禮官)에게 말해줬습니다."
하고, 좌의정 이시백은 헌의하기를,
"부묘한 뒤에 음복과 진하를 행하고 중외에 교서를 반포하는 일은 고례(古禮)로서 그전부터 열성들께서 행하지 않은 적이 없었던 것은 그 예를 중시하였기 때문입니다. 진하하는 일이 담제를 지낸 뒤에 있으면 상제(喪祭)를 금방 마친 시점에서 바로 하례를 받는 것이므로 정례(情禮)로 헤아려 볼 때 미안한 듯하며, 백관이 곡읍(哭泣)한 끝에 곧 진하하는 것은 노래와 곡을 동시에 하는 경우와 비슷하기도 하기 때문에 일찍이 명묘(明廟)의 담제 뒤에 즉시 구례에 따라 진하례를 행하려 하였으나, 선정신(先正臣) 이이(李珥)가 옥당에 있으면서 이상과 같은 뜻으로 상차하여 논열하자 대신에게 의논하여 그 예를 정지하고 부묘한 뒤에 백관의 하례만 받았으니, 그 당시의 일은 이제까지도 칭송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제 방락을 끝내자마자 연회를 베풀어 음복하는 것은 혹 미안하긴 하나, 진하하는 문제는 곧 선왕과 선후를 태묘에 올려 부묘함으로써 종사의 막대한 경사가 되는데 어찌 성상의 남은 슬픔이 사라지지 않은 사적인 감정 때문에 그것을 사양하여 조종들께서 대를 이어 행해오신 거룩한 전례(典禮)를 폐지할 수 있겠습니까. 상을 당하신 초기에도 오히려 하례를 받았던 것은 곧 새 임금이 즉위하여 새롭게 시작되는 때에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교서를 반포하는 일의 경우는 비록 보통 때라도 국가에 새로운 전례(典禮)가 있으면 또한 반드시 중외에 효유하는 법인데 더구나 부묘한 뒤에 어찌 널리 고하는 조치가 없을 수 있겠습니까. 어리석은 생각에는 진하를 정지해서는 안 되고 교서를 반포하는 것도 폐할 수 없다고 봅니다. 옛말에 ‘요순을 본받으려고 한다면 마땅히 조종을 본받아야 한다.’ 하였으니, 성명께서는 다시 신중히 생각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영의정의 의논에 따를 것을 명하였다.
5월 26일 임인
사직단에 나아가 하교하였다.
"아, 나 소자(小子)는 덕이 박하고 정성이 얕아 매우 참혹한 재앙을 초래하였으나 감히 하늘에 단비를 내려줄 것을 빌고자 하니, 만약 신하들의 정성에 도움을 받지 않으면 어떻게 하늘을 감동시킬 것인가. 모든 나의 제관과 집사는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각기 존경하고 경외하는 마음을 다하고 너희의 심력을 한곳으로 모아 나의 큰 일을 돕도록 하라. 그렇게 하면 천심을 감동시켜 창생을 구제할 수 있을 것이니, 너희 백관들은 나의 지극한 뜻을 알아달라."
전 진선(進善) 송시열(宋時烈)이 상소하여 하사한 약물을 사양하고 또 말하기를,
"삼가 원컨대, 전하께서는 이 지극하신 어진 마음을 확충하여 왕도 정치로 마음을 가지시고 생민을 염두에 두심으로써 한 사람이라도 은택을 입지 못한 자가 없게 하소서. 옛날 어느 임금이 굶주린 자를 보고 그에게 먹을 것을 주자, 굶주린 자의 말이 ‘원컨대 이것을 천하의 굶주리는 자에게 주소서.’ 하였고, 정 부자(程夫子)는 지성(至誠)을 백성을 장수하게 만드는 약으로 삼았으니, 신은 감히 전하를 위하여 이 말을 바칩니다."
하였는데, 답하기를,
"경계하고 가르쳐 준 말은 내 비록 불민하지만 어찌 가슴 깊이 새기지 않겠는가. 병세가 조금 나아지면 즉시 올라오도록 하라. 나는 날마다 기다리고 있겠다."
하였다.
5월 28일 갑진
상이 사직단에서 비를 빌었는데, 이날 큰 비가 내렸다.
영돈녕부사 김상헌이 양주(楊州)에서 상소하기를,
"삼가 아룁니다. 신은 숨이 가물가물한 지가 이제 한 달 남짓하여 조석간에 곧 죽을 형편이니, 대궐을 향해 바라볼 때 슬픈 눈물이 하염없이 흐릅니다. 신은 조정에 들어선 이후 이제 56년이 되었는데 조그만 은혜도 보답하지 못하고 허물만 쌓였으니, 이는 온 조정 신하들이 다 아는 바입니다. 다만 음험한 생각을 가슴에 두고 사사로운 원한으로 남을 해치지는 않았으니, 이 점에 대해 신이 감히 추호라도 스스로 꾸며 임금을 속이겠습니까. 신은 향리에 물러나 있으면서 헛되이 직함만 띠고 있으니, 바라건대 면직하시어 공사간에 다 편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너그럽게 비답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5월 29일 을사
청차(淸差)가 함경도에 이르러 개시(開市)하여 소 1백 50두, 소금 1천 석, 백지(白紙) 1만 권(卷), 쇠남비 2천 5백 개, 솥 2백 50개와 면포(綿布) 등 물품을 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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