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일 병오
상이 영사전(永思殿)에서 삭제(朔祭)를 거행하였다.
윤순지(尹順之)를 대사헌 겸 예문관제학으로, 박서(朴遾)를 지의금부사로, 조석윤(趙錫胤)을 대사간으로, 민응형(閔應亨)을 예조 참판으로, 허적(許積)을 형조 참판으로, 남선(南翧)을 승지로, 이만영(李晩榮)을 집의로, 윤집(尹鏶)을 장령으로, 오정위(吳挺緯)를 지평으로, 정언벽(丁彦壁)을 문학으로, 채충원(蔡忠元)을 수찬으로, 조진석(趙晋錫)을 정언으로 삼았다.
간원이 【사간 이응시(李應蓍), 헌납 이정영(李正英).】 아뢰기를,
"삼가 조양(趙壤)을 칠원 현감(漆原縣監)으로 특별히 제수한다는 명을 보고 신들은 고개를 들어 탄식함을 금치 못했습니다. 지난날 전하께서 심양에 들어가셨을 때 조양 같은 무리가 사실 특기할 만한 공로가 많기는 했지만 오늘에 이르러 사적인 은혜를 베푼다면 어찌 성상의 크게 공정한 도리겠습니까. 옛날 당 태종(唐太宗)이 방상수(龐相壽)에게 말하기를 ‘그전에 내가 진왕(秦王)이 되었을 때는 한 부(府)를 위해 주인이 되었으나 이제는 천자가 되어 천하를 위해 주인이 되었으니, 유독 한 부에만 은택을 줄 수는 없다.’ 하였습니다. 전하께서는 여러 번 험난한 일을 겪으시고 오랫동안 잠저(潛邸)에 계시어 그 당시 전하께서 부리던 자들이 한 두 사람이 아닌데 만약 사람마다 모두 은택을 바라는 마음을 가진다면 어찌 일일이 그 소원을 들어줄 수 있겠습니까. 군왕은 사심이 없이 국법을 받들어 천하 사람을 부리더라도 오히려 정령(政令)이 혹시 전부 지극히 공정한 마음에서 나오지 못할까 염려되는 것인데, 사사로운 행동을 내보이면서 공정하게 하라고 권한다면 천하에 이러한 이치는 통하지 않습니다.
전하께서는 즉위하신 이후 항상 수령을 가려서 차임하라는 것으로 분부하셨으니, 이는 매우 성대한 뜻입니다. 그런데 어찌 이 점을 생각지 않고 이러한 사람에게 또 특별히 제수하라는 명을 내리셨습니까. 만약 조양이 과연 공로가 있다면 어찌 줄 만한 상이 없기에 반드시 지방 백성을 다스리는 벼슬로 그 공로를 보답하는 은전을 삼는단 말입니까. 요행을 바라는 문이 이로부터 크게 열리고 공정한 도는 이로부터 일어나지 않을 것이니, 어찌 크게 두려워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물정이 해괴하게 여겨 실망하지 않는 이가 없으니, 청컨대 조양에게 칠원 현감을 특별히 제수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니, 답하기를,
"너희들의 의논은 내 감히 옳지 않다고 말하지는 못하나 다만 일이 그렇지 않은 점이 있다. 이들은 진영에 출입하여 시석(矢石)을 돌아보지 않고 과인의 몸을 호위하느라 온갖 험난한 경우를 다 겪었는데, 오늘에 와서 구례가 아니라는 이유를 들어 끝내 공로를 보답하는 조처가 없다면 과연 옳겠는가. 그리고 이들에게 다 공로를 보상하였으나 이 사람만은 은전을 입지 못하였으니, 고르지 못한 듯하며 더구나 그 사람됨이 성실하고 순박한 점이 많으므로 또한 꼭 안 될 것도 없다."
하였다. 여러 번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6월 2일 정미
통제사(統制使) 유정익(柳廷益)이 본영(本營)에 저축한 곡식으로 은 2천 60냥을 교환하여 비변사와 상평청으로 나누어 보내 국가의 비용에 보태쓰라고 하므로 비변사가 이를 아뢰니, 말을 하사하라고 명하였다.
6월 3일 무신
상이 대신과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호조 판서 원두표(元斗杓)가 아뢰기를,
"봉황성의 장수 여덟 사람이 한꺼번에 청국에 구금되었다는 말을 들었는데, 무슨 일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요즈음 듣건대 우리 나라 사람으로서 비밀히 상거래를 하는 자들이 깔려 있다고 하니, 성의 장수들이 구금된 것은 이 때문이 아닌지 모르겠다. 의주 부윤으로 하여금 사실을 알아보게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두표가 아뢰기를,
"듣건대 손이(孫伊)라는 자가 청국에서 권력을 잡고 있다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른바 손이란 자는 그전 한(汗)의 심복으로서 지금의 한도 그를 신임하였으나 그 사람은 성질이 사나워 항상 남에게 굽히지 않기 때문에 면직되어 서인(庶人)이 되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이제 필시 다시 등용한 모양인데 매우 불길한 사람이다."
하자, 형조 판서 이시방이 아뢰기를,
"신이 최근 연경에 갔을 때 정명수의 기색을 보니 그전과는 전혀 달리 크게 근심하고 두려워하는 빛이 있었으며, 의주에 당도했을 때 별이 떨어진 변고가 발생하자 청사(淸使)들이 서로 돌아보고 깜짝 놀랐으니, 저들 나라에 반드시 우려할 만한 일이 있어서 그런 것일 것입니다."
하였다. 두표가 아뢰기를,
"의순 공주(義順公主)가 또 보로(甫老)에게 시집을 갔는데 그 사람이 동국의 일을 주관한다 하니, 마땅히 안부를 물어야 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차차 형세를 보아가며 하라."
하였다. 상이 또 이르기를,
"요즈음 나라의 기강이 해이해져서 사람들이 법을 무서워하지 않아 만약 힘든 자리를 제수하면 어떻게 해서라도 벗어나려고 한다. 전 제주 목사 정언황(丁彦璜)은 국상(國祥)에 와서 참여한 것으로 보면 결코 심각한 병이 아닐 듯한데, 대신(臺臣)이 체차하라고 아뢰었으니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으며, 불러도 태연스레 오지 않아 사태를 관망하는 뜻이 있는 듯하니 이것이 가증스럽다."
하니, 영의정 김육이 아뢰기를,
"그 날짜를 헤아려 볼 때 당연히 왔어야 하는데도 아직 오지 않으니, 그 죄를 물어야겠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전 제주 목사 정언황을 잡아다가 추고하라."
하였다. 김육이 아뢰기를,
"지금 상평청의 신하들이 때마침 다 입시하였으니, 민응형(閔應亨)이 진달한 바 양호(兩湖)에서 1결(結)에 쌀 세 말만 징수하는 법을 품정(稟定)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본청 신하들의 생각은 어떠한가?"
하자, 시방이 아뢰기를,
"신이 선조(先朝)에 호조 참판으로 있으면서 1결에 세 말을 징수하는 법을 시행할 것을 청하여 공안(貢案)을 헤아려 정하고 선왕(先王)께서 판서 민성휘(閔聖徽)에게 하문하여 일이 거의 성사되어 가다가 최명길이 차자를 올려 풍년이 들 때까지 기다리자고 청하여 일이 끝내 시행되지 않았습니다. 저번에 민응형이 진소하여 세 말을 거두는 법을 시행할 것을 청하였는데, 대체로 온갖 요역은 백성으로부터 나오지 않은 것이 없고 그 중에 공물은 가장 견뎌내기 어려운 역입니다. 만약 이 법을 시행한다면 백성의 역이 반드시 고르게 되어 수화(水火)속에 놓여있는 듯한 백성이 구제될 가망이 있을 것이니, 신은 시행하는 것이 편의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법을 시행하거나 하지 않는 것은 오직 지부(地部)에 달려 있습니다."
하고, 두표가 아뢰기를,
"이 법은 대동법과 달라서 한번 1결에 세 말을 거둔 뒤에 다시 더 거두지 않으면 과연 편의할 듯하지만, 혹시 부득이하여 더 거둘 일이 생긴다면 백성의 원망이 반드시 갑절로 불어날 것이니, 신은 시행하지 않는 것이 편의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들은 각자 의견을 말해 보라."
하니, 형조 참판 허적(許積)이 아뢰기를,
"이 의논은 완벽하지 못한 점이 있습니다. 내포(內浦)064) 는 부역이 유달리 무겁고 호남은 조금 가벼우니 양호의 백성은 똑같이 국가의 백성인데 한쪽은 무겁고 다른 한쪽은 가볍기 때문에 이와 같이 변통하고 옮겨 보내자는 의논이 있는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이 일은 호서의 부역을 변통하는 그것만이 아니란 말인가? 이른바 옮겨 보낸다는 것은 무엇인가?"
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이 법을 호서 한 도에서만 행하면 징수한 쌀의 수량이 적어 한 도 공물의 부역을 충당할 수 없는데다 역을 고르게 하는 길이 아니기 때문에 이 법을 논의하는 자가 호서에 편중된 역을 호남으로 옮겨 정하려고 하지만, 신의 생각에는 호서의 역은 비록 한 푼의 감소가 있더라도 호남은 도리어 다섯 되가 추가되는 폐해가 있을 것으로 보이니, 감소된 자는 기뻐하고 추가된 자는 원망하는 것은 필연적인 형세입니다. 만약 백성의 부역을 고르게 하려고 하면 시행하는 것이 좋고 백성의 원망을 초래할 것이 염려되면 시행하지 않는 것이 좋으니, 이것이 이른바 완벽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이익을 받는 자는 적고 피해를 보는 자는 많으며, 과거의 원망이 사라지지 않고 새로운 원망이 다시 일어나는 것이다. 세 말 이외에 더 이상 징수하지 않는다면 비록 한 때의 원망이 있더라도 시행하는 것이 마땅하지만, 세 말의 쌀로 어찌 허다한 역을 충당할 것인가. 만일 혹시 더 징수한다면 어찌 불편한 법이 아니겠는가."
하니, 두표가 아뢰기를,
"혹은 서울에 바치기도 하고 혹은 본읍에서 수납하기도 하고 혹은 기인(其人)의 값을 주는 등 곡절이 복잡한데 신의 천성이 본디 꼼꼼하지 못하므로 변통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세선(稅船)065) 이 침몰하는 것으로 보면 바다로 운송하는 것도 매우 어렵다. 내가 보건대 무지한 하민(下民)들은 일이 자기에게 편한 점이 있더라도 공가(公家)의 지시를 들으면 반드시 싫어한다. 가령 백성들이 각자 싣고 운송하다가 배가 침몰하면 원망하지 않을 것이지만, 공가의 명령으로 운송하다가 침몰하면 반드시 원망할 것이니, 이 또한 사세가 곤란한 점이다."
하니, 두표가 아뢰기를,
"조운(漕運)은 배가 침몰하는 애로가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배에다 쌀을 실은 채로 도망하는 자도 있으니 극히 놀랄 일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국가의 전례는 추고의 법이 매우 엄중하여 금부에서 추고하는 규례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요즘에는 추고를 받는 자가 이를 대수롭지 않게 보아 추고를 받는 상태에서 행공(行公)하여 조금도 반성하고 조심하는 마음이 없는데다 헌부의 장관이 오랫동안 개좌(開坐)하지 않음으로써 추고를 완료하기가 쉽지 않으니, 일이 매우 한심하다."
하니, 공조 판서 이후원(李厚源)이 아뢰기를,
"추고 전지(傳旨)에 ‘하(下)’자만 쓰고 그 아래는 비워두어 아무 아문이라는 글을 쓰지 않았다가 상께서 ‘금부’라는 글자를 써넣으시면 나추(拿推)에 응하는 것이 이른바 금부 추고입니다. 그리고 행공 추고(行公推考)와 구전 정사(口傳政事)는 【시급히 차제(差除)할 일이 있으면 미처 정석(政席)을 열지 못하고 정관(政官)이 회의하여 삼망(三望)을 갖추어 곧바로 정원(政院)으로 보내니, 이것을 구전 정사라 한다.】 옛법이 아니고 모두 임진 왜란 뒤에 생긴 일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추고 전지를 옛 규례에 따라 ‘행공(行公)’ 글자를 쓰지 말고 ‘하(下)’자만 쓰며 해당 아문은 비워두어 나의 재결을 기다리도록 하되, 지금부터 법식으로 정하여 추고를 받는 자로 하여금 반성하고 조심하는 일이 있게 하라. 외방의 관리는 직무에 공백이 생길까 염려되니 그전대로 행공하는 것이 좋겠다. 그리고 헌부로 하여금 매일 개좌(開坐)하게 하고 육조(六曹)의 규례대로 그 개좌의 여부를 기록하여 월말마다 서계하라."
하였다. 이시방이 아뢰기를,
"경외(京外)의 거친 무명베에 대한 금지를 엄중히 하지 않을 수 없으니, 그러한 베를 짜는 사람은 발견되는 대로 무겁게 다스리라는 뜻으로 각도에 신칙(申飭)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명을 잘 봉행하지 않은 수령과 방백은 조사하여 추고하도록 하라."
하였다. 시방이 아뢰기를,
"신이 관장하고 있는 수어청(守禦廳)에 예속된 군병으로서 먼 도에 있는 자는 마땅히 가까운 도로 바꾸어 정하여 다급할 때 조발해 쓰는 것이 좋은데 계속되는 객행(客行)으로 인하여 오랫동안 품정하지 못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저번에 충청 병사의 장계를 보니, 도내에 관장하고 있는 네 진(鎭)의 군병이 강도(江都)와 남한(南漢)으로 나누어 예속되어 병사는 일개 군사 없는 장수가 되었다고 하였다. 이 또한 염려하지 않을 수 없는데 총융사(摠戎使)가 관장하는 군병을 갈라 남한으로 예속시키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자, 시방이 아뢰기를,
"경기의 보병으로 갈라 예속시키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하고, 좌의정 이시백은 아뢰기를,
"신도 일찍이 이 직책을 맡은 적이 있습니다. 산성의 성가퀴는 2천 6백 군데로서 성가퀴를 지키는 군졸은 5만여 명을 써야 하는데, 현재 예속된 군병은 겨우 4만 명으로서 모자라는 수효가 1만 명이기 때문에 안동(安東)·대구(大丘) 등 진(鎭)의 군병 2천, 춘천진(春川鎭)의 군병 2천 5백, 광주(廣州) 등 다섯 고을의 군병 2천 3백을 나누어서 산성에 예속시켰는데, 병자년066) 뒤에 안동과 대구는 길이 멀다는 이유로 충주(忠州)·청주(淸州) 등 진과 강원도의 군병을 남한에다 예속시키고 공주(公州)·홍주(洪州)·전주(全州) 등의 진과 연안(延安)·배천(白川)의 군병을 강도에다 예속시켰습니다. 그러나 먼 지방의 군병은 반드시 제때에 산성으로 들어가 지키지 못할 것이니, 경기의 군병으로 이속시키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충청도의 군병은 본디 수효가 얼마인가?"
하니, 시백이 아뢰기를,
"4천∼5천 명에 지나지 않으니, 병사로 하여금 거느리고 강도로 들어가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후원은 아뢰기를,
"충청도의 군병은 1만 2천 명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남한산성의 성가퀴를 지키는 군병을 충청도의 군사로 바꾸어 예속시키는 것이 온당한지의 여부를 총융사와 상의하여 품처하라."
하였다.
도승지 조계원(趙啓遠)이 아뢰기를,
"추고 전지 가운데 ‘행공’ 두 자를 없애버리면 각사의 직무가 반드시 적체되는 일이 많을 것입니다. 헌부가 매일 개좌하는 문제는 신칙하여 거행하고, ‘행공’ 두 자는 가까운 규례를 그대로 적용하되 ‘하(下)’자 아래에 무슨 아문이라고 쓰지 않는 것이 아마도 의당할 듯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다시 생각해 보니 과연 직무에 공백이 생길 염려가 있다. ‘행공’은 그전대로 쓰도록 하라."
하였다.
6월 4일 기유
김익희(金益熙)를 대사간으로, 이경헌(李景憲)을 병조 참판으로, 이석(李晳)을 사간으로, 유도삼(柳道三)을 장령으로, 유준창(柳俊昌)을 헌납으로, 이정영(李正英)을 교리로, 이유석(李惟碩)을 정언으로, 이만(李曼)을 강화부 유수로 삼았다.
상이 주강에 나아가 《서전》 태갑(太甲)을 강독하였다. 동지경연 민응형(閔應亨)이 아뢰기를,
"임금은 머리이고 신하는 팔다리가 되니, 아무리 어진 신하가 있더라도 임금이 능히 스스로 몸을 닦지 못한다면 어찌 나라를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맞는 말이다. 주(紂)는 세 사람의 어진이[三仁]067) 가 있었지만 끝내 멸망하고 말았으니, 이것이 그 증험이 아닌가."
하였다. 응형이 아뢰기를,
"저번에 연석에서 전하께서 교동(喬桐)에 옮겨둔 아이를 서울로 데려오겠다는 뜻으로 신하들에게 하문하셨는데 이는 참으로 큰 덕에 관한 일이었습니다. 이미 이 분부를 받았으면 아래에 있는 사람의 도리로서는 그대로 받들었어야 할 일이었는데도 우선 후일을 기다리자고 대답한 자도 있었다 하니, 신은 삼가 한탄스럽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청인(淸人)이 반드시 다시 물어올 리는 없다고 봅니다. 소현 세자의 혈속은 이 아이만 남아 있는데 상처를 받은 것이 이미 많으니, 불행하여 갑자기 탈이라도 생긴다면 전하의 후회가 어찌 다함이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은 바로 내 뜻에 맞다. 소현의 딸아이는 많지만 남자는 이 아이뿐이니, 그를 그리는 일념이 어찌 조금이라도 늦춰진 적이 있었겠는가. 혹시라도 불행한 일이 있을까 염려되어 장차 서울로 데려오려고 하였었다. 그런데 저번에 여러 경들의 말을 들어보니, 그 또한 일리가 있는 말로서 경솔히 석방하여 데려오는 것은 좋지 않을 듯하기 때문에 우선 그대로 두기로 하였다."
하자, 응형이 아뢰기를,
"삼가 듣건대, 인평(麟坪)의 아이들도 모두 궁중에서 양육하여 그들을 사랑하고 보살피는 도리가 친자식이나 다름이 없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하는 말이 ‘우리 임금의 효성과 우애가 이 정도이니, 하늘이 복을 내리는 경사가 있을 것이다.’고 한다 합니다."
하였다.
안주(安州) 사람 김충일(金忠一)의 아비·아들·손자 세 사람은 효행이 뛰어난 데다가 충일의 아버지 김언수(金彦秀)는 정묘년 변란 때 장관(將官)으로 절사(節死)하는 등, 한 집안에 네 사람의 충신·효자가 있었다. 영변(寧邊)의 서민 이응남(李應男), 교생(校生) 오숙헌(吳淑獻), 선천 훈도(宣川訓導) 계천로(桂天老)의 아비·아들·손자 3대와 가산 병영(嘉山兵營)의 아전 김유기(金有起), 삼등(三登)의 평민 이을남(李乙男), 희천(熙川)의 교생(校生) 김신철(金信哲), 성천(成川)의 평민 김봉일(金奉日) 형제, 은산(殷山)의 평민 이승회(李承回)·김여철(金呂哲), 평양(平壤)의 진사 홍선(洪僎) 및 평민 박계용(朴繼用), 삼화(三和)의 교생 안처지(安處智)와 양녀(良女) 초향(楚香) 등은 효행을 천성적으로 타고나 지성으로 어버이를 섬기고 손가락을 잘라 병환을 구제하기도 하였다. 강서(江西) 정병(正兵) 김득려(金得麗)는 효행이 옛사람에 부끄러움이 없을 뿐만 아니라 3년간의 국휼(國恤)에 지성으로 복상하였고, 교생 김석진(金碩珍)은 5세의 어린 나이로 아비가 죽자 3년간의 복상을 어른이나 다름없이 하고 인조 국휼 때에도 3년간 복상하였다.
사노(私奴) 김막남(金莫男), 관군(館軍) 김득초(金得招)·김사남(金士男), 평양 평민 김기정(金起廷) 등은 형제가 함께 사는데 남들이 조금도 헐뜯는 말이 없고 개인의 재산을 따로 두지 않아 입고 먹는 것을 함께 하며, 영변(寧邊) 사람 김성락(金成洛)의 아내 박씨, 평양의 양녀 막진(莫眞), 김수택(金秀澤)의 아내 안씨, 정병(正兵) 이언력(李彦歷)의 아내 양녀 삼춘(三春) 등은 과부로서의 절행(節行)이 옛사람에 부끄러움이 없었다.
이상의 사항을 평안 감사가 초계(抄啓)하여 보고하였는데 예조의 복계(覆啓)로 인하여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하고 관직을 상으로 주며 급복(給復)068) 을 차등있게 하였다.
6월 5일 경술
상이 주강에 나아가 《서전》 태갑(太甲)을 강독하였다.
상이 석강에 나아가 《대학연의》를 강독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당 현종(唐玄宗)은 이임보(李林甫)를 모르고 덕종(德宗)은 노기(盧杞)를 몰랐으며, 한(漢)나라 애제(哀帝)와 평제(平帝) 때에는 왕망(王莽)을 몰랐으니, 큰 간인(奸人)은 겉으로 진실한 것 같은 법이어서 사람을 알아보기란 참으로 쉽지 않다."
하고, 또 이르기를,
"왕망이 겸손하고 공순할 때 스스로 제 소원대로 되었다고 여겼으니, 왕위를 찬탈한 뒤에 어찌 참모습을 수식하는 마음이 없었겠는가. 그런데도 능히 4만 명으로 하여금 관문을 지키게 하였으니, 이 어찌 그들을 모두 권유하여 그러하였겠는가. 그 계책이 매우 교활하였으나 종말을 고할 때는 어찌 그렇게도 어리석었는지 모르겠다."
하니, 검토관 이천기(李天基)가 대답하기를,
"거짓 명예로 천하를 빼앗아 제 소원이 이루어지자 본질이 드러났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왕망이 사람을 속이고 겸손한 체하다가 마침내 천하를 찬탈하였는데 그를 조조(曹操)와 비교하면 누가 더 나쁜가?"
하니, 천기가 대답하기를,
"조조의 일은 왕망과 다릅니다. 심술은 대략 같으나 왕망처럼 극도로 흉악하고 간사하지는 않습니다."
하고, 시독관 채충원(蔡忠元)은 아뢰기를,
"사마온공(司馬溫公)이 정통을 조조에게 돌린 것으로 보면 그 악이 왕망처럼 심하지는 않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이는 사마온공의 틀린 견해이다. 만고의 간흉인 점은 왕망과 조조가 다름이 없으나 왕망은 그 재주가 조조보다 훨씬 못하다."
하였다.
6월 6일 신해
상이 주강에 나아가 《서전》 태갑을 강독하였다.
대제학 조석윤(趙錫胤)의 응지(應旨) 상소에 말하기를,
"삼가 보건대, 전하께서는 영명(英明)하신 자질로 간대(艱大)한 왕업을 이어 정신을 가다듬고 지치(至治)를 구하시며 밤낮으로 노력하신 지가 이제 3년이 되었습니다마는, 국세는 날로 위태로워지고 인심은 날로 흩어지고 조정은 날로 분열되고 기강은 날로 어지러워지고 민생은 날로 곤란해지고 천변은 날로 겹겹이 일어나고 사기는 날로 위축되어가고 언로는 날로 막혀지는 등, 우려되는 형상이 수없이 많아 난망(亂亡)의 화가 조석간에 닥칠 판국이니, 이는 식견 있는 선비가 크게 한탄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다만 통곡하고 싶어하는 이유입니다. 전하께서 진실로 그 원인을 자신에게 돌이켜 찾아보신다면 성덕(聖德)의 소홀한 점과 정령(政令)의 잘못에 대해 반드시 시원하게 깨달으시겠지만 어리석고 얕은 신의 소견에도 또한 한두 가지 말씀드릴 만한 것이 있습니다.
신이 삼가 생각건대, 임금이 왕위에 앉아 세상을 다스리는 도는 사실 한 가지가 아니지만 그 중에서도 성실성과 명철함이 가장 긴요한 공부입니다. 대체로 성실하지 않으면 시행하는 모든 일들이 겉치레로 돌아가 끝내 실효가 없고, 명철하지 않으면 좋아하고 싫어하며 옳고 그른 것이 서로 뒤바뀌는 것을 면치 못하여 인심이 승복하지 않는 법이니, 이것이 치란 흥망이 갈려지는 소이입니다. 지금 우리 전하께서는 큰 덕과 지극하신 행실로 선대의 왕업을 계승하려는 뜻이 간절하시니, 어찌 일찍이 공업을 떨쳐 일으키고 기강을 크게 세워 지치(至治)를 이룩하시려고 하지 않겠습니까마는, 일이 마음대로 되지 않아 날로 어찌해 볼 수 없는 지경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신은 삼가 전하께서 정사를 하시는 도에 혹 그 성실성이 미진하고 아랫사람을 대하실 때 명철함이 부족하신 듯하다고 생각됩니다.
임금이 하늘을 대신하여 백성을 다스리면서 위로 하늘을 두려워하지 않고 아래로 백성을 돌보아 주지 않으면 하늘이 노여워하고 백성이 원망하여 나라가 따라서 망하는 법인데, 오늘날 하늘의 노여움은 그 또한 정도가 심합니다. 전고에 없는 놀라운 재변이 매일 생기고 있으니, 모르겠습니다마는 무슨 재앙이 보이지 않는 데에 도사리고 있기에 하늘이 경계를 보이는 것이 여기에까지 이른단 말입니까. 더구나 지난해의 기근은 근고(近古)에 없던 일인데 이제 또 여름철을 당하여 가뭄이 극심합니다. 삼가 듣건대, 양남(兩南)069) 의 모를 심은 곳은 이미 어찌 해볼 가망이 없고 근기(近畿) 지방에도 오히려 비가 흡족하지 못하니, 올해의 농사 형편은 이미 알 만합니다. 이처럼 부역이 많고 무거우며 백성이 궁하고 재물이 바닥난 날에 또 흉작의 재앙을 만났으니, 백성이 흩어지고 나라가 무너질 것은 지혜 있는 자가 아니라도 알 수 있습니다. 이 어찌 등골이 오싹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는 진정 전하께서 삼가고 두려운 마음으로 행실을 닦아 서둘러 일대 전환을 모색하셔야 할 때인데 정령(政令)과 행사가 평소에 비하여 크게 다른 것을 볼 수 없으니, 신은 상께서 분부를 내려 구언(求言)하시고 친히 거둥하여 비를 비시는 것도 하늘의 견책에 답하는 실상이 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원옥(冤獄)을 심리하는 일에 있어서는 반드시 그 죄명이 무겁더라도 인정과 도리로 보아 용서해 줄 만한 자를 살펴 특별히 석방한 뒤에야 억울함을 신설하였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인데, 저번에 의계(議啓)한 사항 가운데 유계(兪棨)와 정태제(鄭泰齊) 등은 용서를 받지 못하였으니, 어찌 일월의 밝은 빛이 두루 비추지 못해서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두 신하가 죄명이야 다르지만 억울한 사정은 마찬가지로서 온 조정의 사람이 모두 그들을 위해 불쌍하게 생각하니, 어찌 사람마다 두 신하에게 사사로운 정이 있어서 그런 것이겠습니까. 공론이 다 한결같습니다. 이 두 신하는 광망(狂妄)한 죄가 있다고 할 수 있으나 그 마음은 결코 별다른 속셈이 없고, 불측(不測)한 죄를 졌다고 할 수 있으나 사실인즉 조금도 증거가 없습니다. 만약 죄가 중대하다고 하여 더 이상 그 실정을 따져보지 않음으로써 마침내 원통함을 안고 본심을 밝게 드러내지 못하여 살아서는 성명한 세상의 죄인이 되고 죽어서는 머나먼 지방의 원귀가 되게 한다면, 어찌 불쌍한 이를 돌보시는 큰 덕에 손상이 가지 않겠습니까. 혹시라도 성상께서 특별히 호생지덕(好生之德)을 미루어 비록 완전히 풀어주지는 못하더라도 조금 내지(內地)로 옮겨주시는 은혜를 내리신다면 반드시 화기(和氣)를 감화시키는 데에 일조가 될 것입니다.
아, 사람은 혹시 속일 수 있지만 하늘은 거짓을 용납하지 않는다고 전하께서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만, 마음속에 지니고 계신 것이 과연 결백하여 하늘에 짝할 수 있겠으며, 국사를 행하시는 것도 또한 두려워하고 삼가하여 하늘의 명을 따른다고 보십니까. 신은 전하께서 하늘을 공경하시는 것이 어쩌면 그 실제를 다하지 못하신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오늘날 백성의 원망은 또한 이미 극도에 이르렀으니, 가렴 주구에 시달려 원망하고 기근에 병들어 원망하고 수령이 침해하여 원망하고 세력가가 약탈하여 원망합니다. 그리하여 굶어죽지 않으면 곧 본의 아니게 도적떼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으니, 적미(赤眉)와 황건(黃巾)070) 이 어찌 일찍이 생업을 잃은 백성에게서 일어난 것이 아닙니까. 신은 국가의 걱정거리가 나라 밖에 있지 않다고 봅니다. 백성의 임금이 되어 이 백성으로 하여금 이 지경에 이르게 하였으니, 우리 백성을 통하여 보고 듣는 하늘이 어찌 노여워하고 또 경고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는 즉위하신 이후 백성의 부담을 감면해 주는 분부를 여러 번 내리시어 비록 진공(進供)에 관계된 물품이라도 아까워하지 않으셨으니, 전하께서 백성을 돌보시는 마음이야 극진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작은 혜택이라서 두루 미치지 못하고 내실 있는 정사를 행하지 못하셨으니, 이 어찌 양 혜왕(梁惠王)이 국사에 대해 마음을 다한 경우071) 와 다르겠습니까.
근래에 백성들로부터 재물을 거두고 백성을 부리는 일이 우리 나라의 마음과는 관계없이 타의에서 나오는 일이 많으니, 이는 사실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마는, 우리가 힘을 쓸 만한 부분에도 오히려 백성의 원망을 사고 있습니다. 일이 내사(內司)에 관계된 것이면 덮어두고 궁척(宮戚)에 관계된 것이면 가로막아 언관이 간쟁한 일이 대부분 빈말이 되고 마니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시험삼아 그 중 한두 가지를 말씀드릴까 합니다. 산택(山澤)에 대한 금지가 날로 심해져서 백성이 도끼를 들고 산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낫을 차고 들녘에 나가지도 못하니, 무지한 평민들이 어찌 원망하지 않겠습니까. 도성에서 지척에 있는 지방도 그 폐해가 이와 같으니 더구나 먼 지방이야 그 침탈이 땔감을 채취하는 일에만 국한되지 않을 것은 당연합니다. 이는 인심을 잃는 일 중에서도 큰 것인데 끝내 금하여 혁파할 수 없겠습니까.
숨어 있는 내사(內司)의 노비를 고발하는 일은 비록 구례라고는 하나 주인을 배반하고 내사로 투입하는 길이 갈수록 넓어지고 있습니다. 아무리 송사를 걸 수 있도록 허용한다 해도 시골 마을의 한미한 그들의 신분으로 어찌 능히 그 억울함을 위세 있는 자와 맞서서 전부 밝힐 수 있겠으며, 유사(有司)가 된 자도 어찌 마음을 공정하게 잡아 오로지 곡직에 따라서 명쾌하게 처결할 수 있겠습니까. 이 때문에 사족(士族) 가운데 곤궁한 자는 한 사람도 선대의 업을 보전한 자가 없고 또 압공위사(壓公爲私)072) 의 율로 다스리며, 혹 공의(功議)073) 의 소지가 있더라도 경감의 혜택을 받지 못하고 멀리 변방으로 유배되어 굶주림과 추위로 쓰러져서 가슴을 두드리며 원통함을 부르짖어 원기(怨氣)가 하늘에까지 사무치니, 어찌 족히 재앙을 부르지 않겠습니까. 설사 그들이 그 사람이 공천(公賤)인 줄 알고 점유하였더라도 이미 그 사람을 되찾아가고 또 그 신공을 징수하고 거기다가 무거운 율을 가하기까지 하는 것은 이미 국가의 관대한 정사가 아닙니다. 그런데 더구나 자기 종의 양처(良妻)로 잘못 알았던 자가 자손을 낳고 오랫동안 복역(服役)하였다면 어찌 내사(內司)의 여종으로서 빠져나와 양인(良人)이 되었던 것임을 알겠으며, 또 더구나 진짜로 그들이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소유물인데도 미약한 주인을 배반하고 공가로 투입하는 자가 수없이 많은 상황임에야 더 말할 게 뭐가 있겠습니까. 신이 요즈음 듣건대 금천현(衿川縣) 사람들이 서로 뒤를 이어 이러한 곤경을 겪고 있다 하니, 이로써 팔도 가운데 자기의 처소를 잃고 원한을 품은 자가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비록 진고(陳告)의 법은 혁파하지 못하더라도 공물을 징수하고 압공위사하는 법을 시행하지 않는다면 다행히 죄를 면하는 자가 있고 불행히 원한을 품은 자는 없을 것입니다.
대체로 공물을 방납(防納)하고 이웃 사람과 친족을 침해하는 것은 실로 첫째가는 고질적인 폐단으로서 고치지 않으면 안 될 일입니다. 대동법(大同法)은 어찌 좋은 법이요 아름다운 뜻이 아니겠습니까마는, 어떤 사람은 백성에게 거두는 것이 너무 무겁다고 말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일이 애로점이 많다고 걱정하기도 하니, 그 사이의 이해는 실로 쉽게 알 수 없는 점이 있습니다. 만약 먼저 공안(貢案)을 가지고 경감할 수 있는 것을 조사하여 경감한 뒤에 대략 임토법(任土法)074) 을 모방하여 서로 조정해서 상정(詳定)하되 한결같이 대동법의 절가(折價)075) 를 준수한다면 경중이 고르지 못한 문제거리가 없을 것이고, 여기저기서 생산되는 산물을 한 곳으로 취합한다면 중간에 뇌물을 주는 낭비를 줄일 수 있을 것이며, 또 손쉽게 얻을 수 있는 토산물을 본색(本色)으로 수납하도록 허용하고 관리들이 농간을 부려 점퇴(點退)하는 것을 엄금한다면 그 또한 많은 값을 낭비하는 폐해를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면 대단한 변통이야 되지 않더라도 오히려 한푼의 도움은 있을 것입니다.
우리 나라는 군오(軍伍)가 정돈되지 않은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도망간 자와 죽은 자가 다 대오(隊伍)에 들어있기 때문에 불법으로 재산을 빼앗는 폐해가 친족과 이웃 사람에게 미치며, 끝내는 그 친족과 이웃 사람도 지탱하지 못하여 결국 백성이 죄다 없어진 뒤에야 말 지경입니다. 만약 먼저 물고(物故)로 인해 응당 역을 면제받을 자와 도망가고 없는 자로서 나이가 60이 된 사람을 군안(軍案)에 부표(付標)하여 그 역을 면제해 주고, 각읍으로 하여금 모자라는 액수를 연차적으로 차츰 채우게 하되 그 액수를 정해주어 행여 태만히 하는 일이 없도록 하며, 당분간 연례로 행하는 세초(歲抄)를 정지하여 이 일에다 온 힘을 쏟도록 하고, 나이가 60세가 되지 않았더라도 도망간 지가 오래되어 전혀 알아볼 데가 없는 자도 다른 사람으로 역을 대신 정할 수 있도록 허용하여 원안(元案)에서 이름을 삭제한다면 군안이 허술해지지 않고 이웃과 친족이 조금은 침해를 받지 않게 되어 백성을 내몰아 뿔뿔이 흩어지게 하는 염려가 없을 것입니다.
아, 백성은 지극히 어리석지만 그 마음은 신령하여 위엄으로 구속할 수 없고 실없는 말로 감동시킬 수도 없습니다. 오직 윗자리에 있는 사람이 진실한 마음으로 진실한 정사를 행하되 밤낮으로 꾸준히 하며, 오직 자기는 검소하고 남은 풍족하게 하며 위를 덜어내고 아래를 보태주는 것으로 마음을 갖되 말단의 사무에 철저히 하지 말고 겉치레에 얽매이지 말며, 반드시 혜택이 아래 백성에게까지 미치고 쌓인 폐단이 전부 제거되는 것을 목표로 삼은 뒤에야 비로소 백성을 실지로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전하께서 과연 이미 이와 같이 행하셨다면 어찌 온 나라 도처에서 시름과 원망이 날로 일어날 리가 있겠습니까. 신은 전하께서 백성을 사랑하시는 것이 어쩌면 그 실지를 다하지 못하신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전하께서 왕위를 이어받으신 초기에는 늙은이와 덕있는 이를 예우하여 초야에서 초빙하여다가 힘써 의지하고 응대가 메아리처럼 순조로웠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전하의 현인을 좋아하시는 정성은 천고에 으뜸이라고 말했는데, 얼마 가지 못하여 성의가 쇠퇴해지셨고 오늘에 이르러서는 전혀 관심이 없으시니, 처음과는 달라졌다는 시인(詩人)의 탄식076) 정도만이 아닙니다. 신은 산야의 선비는 논의가 과격하여 시의(時宜)에 맞지 않으므로 함께 일을 할 수 없어서인지, 아니면 곧고 진실한 말이 성상의 뜻에 거슬리어 처음에는 불쾌함을 참고 좋게 대하시다가 단호히 버리고 다시는 생각지 않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어찌 그렇게도 처음에는 서둘다가 나중에는 모른 체하십니까.
저번에 영돈녕부사 김상헌이 병든 몸을 부축하고 국상(國祥)에 와서 곡하고 소장을 올려 물러가겠다고 했을 때 흰 머리의 늙은 신하가 또다시 대궐문을 들어온다는 것은 점치기 어려운데도 인견하고 싶다는 뜻을 비답의 내용에만 언급하고 더 이상 인대(引對)하겠다는 명이 없었고, 사직소가 올라갔을 때도 미련을 두고 달래는 분부가 없으셨으니, 전하께서 원로 대신을 대하시는 것이 어찌 이와 같이 소홀하단 말입니까. 전 승지 신천익(愼天翊)을 특별히 자급을 뛰어올려 승정원의 관리에 제수하셨으니, 성명께서 명리에 욕심이 없는 절개를 가상히 여겨 장려하신 것을 충분히 알 만합니다만, 관작은 현인을 대우할 만한 것이 못 되고 반드시 예로써 접하고 성의로써 대하여야 비로소 현인을 대우하는 도라고 말할 수 있는데 그 벼슬만 올려주셨을 뿐 아직까지 한번도 소대(召對)하지 않으셨으니, 어찌 전하께서는 천익을 대우하시는 것이 이렇게도 박하십니까. 이 몇 가지 일로 말하면 전하께서 현인을 좋아하시는 것은 비록 그 실지가 없다고 말하더라도 안 될 것이 없습니다.
전하께서 왕위를 이어받으신 초기에는 간언(諫言)을 따르시는 미덕이 거의 흠결이 없었으므로 사람마다 용기를 갖고 모두가 스스로 하고 싶은 말을 다하려고 생각하였으나, 그 뒤로 차츰 처음과 같지 않으셨고 요즘에 와서는 간언을 거부하시는 병이 고질이 되어 조금이라도 뜻에 거슬리면 곧장 꺾어버리시어 준엄하신 비답을 내리시는데 신자로서 차마 듣지 못할 내용이 있기까지 합니다. 이 때문에 곧은 기운이 없어져 대각이 쓸쓸하므로 사람들이 언관의 자리를 피하기를 마치 가시밭을 피하듯 합니다. 대체로 대신(臺臣)의 말이 반드시 하는 말마다 이치에 맞지는 않더라도 또한 어찌 전혀 채택할 만한 것이 없겠습니까. 그런데도 전하께서는 경시하여 꺾어버리기를 이와 같이 하시니, 이 어찌 이목의 관원을 두어 스스로 돕는 뜻이겠습니까. 이제 대간을 믿지 않으시면서 도리어 널리 바른말을 구하려고 하시니, 식견이 있는 자는 모두 전하의 기색이 바른말을 달갑게 여기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또한 어느 누가 앞에 나서서 쓸데없는 말을 올리려고 하겠습니까. 전하께서 간언을 따르시는 것은 비록 그 실지가 없다고 말하더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전하의 총명하고 영특하며 강인하신 자질은 그야말로 하늘이 낸 것이지만, 신이 감히 밝음과 슬기가 아랫사람을 굽어 살피기에 부족하다고 말하는 것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이른바 밝음이란 잘 살펴 안다거나 장래의 일을 잘 추리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대공 지정(大公至正)한 마음으로 위에서 아래를 굽어살피어 시비를 판단하는 나의 밝음이 항상 거울속과 수면처럼 트여있게 한다면, 사람의 사정(私正)과 말의 시비가 다 저절로 분명하게 참모습을 드러낼 것입니다. 삼가 보건대, 전하께서는 남의 말을 들으며 일을 처리하실 때 간혹 그 시비를 분명히 분별하지 않으시어, 갑이 스스로 옳다고 주장하면 갑을 편들고 을이 또 스스로 옳다고 주장하면 또한 을을 편드심으로써 뒤섞이어 청탁이 가려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른 것을 옳다고 하고 옳은 것을 그르다고 하여 거의 흑백이 자리를 뒤바꾸는 판이니, 진실로 전하께서 환하게 보고 분명히 아셨더라면 반드시 이와 같지는 않을 것입니다. 아마도 성상의 총명이 극진하지 못한 점이 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아, 오늘날의 조정은 대단히 바르지 못합니다. 당파를 짓는 풍조가 오늘날보다 심한 적이 없었으므로 그 화가 필시 나라가 망하는 지경에 이르고 말 것이니, 한탄스러움을 어찌 금할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이러한 풍조를 타파하시려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아마도 그 요체를 얻지 못하신 듯합니다. 성상의 뜻은 신하들이 편당을 짓는 것을 미워하면서도 그보다 앞서 한쪽으로 치우친 마음이 있기 때문에 추측이 혹 실정을 벗어나고 결정하여 조처하시는 것이 혹 당연한 법칙을 잃으십니다. 굽은 것을 지나치게 바로잡다보면 그 해로움이 도리어 심한 법이니, 마음을 비워가지고 일을 조처하고 자신의 몸을 먼저 바르게 하여 아랫사람들을 인도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습니다. 그리하여 진퇴 취사하는 모든 일을 오로지 지공(至公)으로 하고 사심이 없으시다면, 뭇 신하들이 아무리 형편이 없는 자들이라 하더라도 그 누가 마음을 씻고 생각을 고쳐먹어 우러러 성상의 뜻을 받들지 않겠습니까.
아, 당론의 분열이 요즘에 와서 한층 더 심해 각자 표방하는 것이 날로 더욱 선명해짐으로써 상대방을 노려보는 기색이 아름답지 못하고 어지럽게 떠도는 말들이 그치지 않고 있는데, 그 원인은 대체로 송준길(宋浚吉) 등이 탁류를 배격하는 의논이 너무 날카롭고 신면(申冕) 등이 반박하는 마음이 너무 각박하였기 때문이니, 서로 잘못을 범하였다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당초에 논할 때는 공론이 이미 지나친 것으로 여겼고 실제 말을 한 자도 반드시 스스로 옳다고 주장하지 않았으며 성상께서도 영원히 버릴 수는 없다고 생각하여 거두어서 쓰기를 평소 때와 다름없이 하셨으니, 스스로 처신할 도리로서는 진정 불평한 마음을 깨끗이 씻고 조심하고 삼가하여 과거의 허물을 만회함으로써 임금의 특별한 은혜에 보답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렇게 하지 않아 자신에 대한 용서는 지나치게 후하고 남을 책망하는 것은 지나치게 각박하며 시기와 의심과 원한이 어느 때 끝이 날 기약이 없으니, 그 잘못을 따져보면 일을 논하는 것이 적절하지 못한 정도만이 아닙니다.
신은 삼가 보건대, 전하께서 인자하신 덕이 없지 않으나 호령하고 행사하는 과정에서 드러난 것은 항상 준엄하고 각박한 기상이 있으신데, 이 어찌 쇠잔한 시대를 당하여 습속이 나빠지고 기율이 무너졌으므로 이러한 폐단을 바로잡는 정사를 이와 같이 하지 않을 수 없어서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신은 삼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군주는 만인의 위에 군림하여 천만 근의 무게가 있으므로 너그러움과 인자함이 모자랄까 염려스러운 것이지 위세와 무력이 세워지지 않을까 걱정될 것은 없으니, 전하께서 한번 옛날의 역사를 살펴보소서. 어찌 너그러움을 힘쓰다가 잘못되거나 위세를 앞세우다가 잘된 일이 있었습니까.
지난번 사관(史官)을 형추하고 재신(宰臣)을 나국하고 대신을 조율하라는 등의 명은 다 이상한 거조로서 성상의 덕에 누가 되고 기강을 세우는 데에 도움이 없으니, 어찌 삼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전 판부사 조익이 일생을 두고 충성과 신의로 남을 속이지 않은 것은 참으로 온 세상이 아는 일인데, 전하께서는 이 순수하고 진실하며 충직한 마음을 살피지 못하시고 억울한 하교로 너무 박하게 대하고 삭출(削黜)의 율로 너무 무겁게 죄를 주셨으며, 심광수(沈光洙)를 일과는 무관한 쓸데없는 말로 깊이 비난하고 배척하기까지 하셨으니077) , 너무 심하였습니다. 사서(四書)를 주해(註解)하는 일은 사실 후학이 함부로 손을 댈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소견을 기록하여 일설을 갖추는 것은 옛사람도 그렇게 한 적이 있습니다. 혹시 그것을 임금께 올린 것을 가지고 경솔한 짓이라고 한다면 옳지만, 사문에 죄를 얻는 일이라고 말한다면 또한 이상하지 않겠습니까. 옛날에 대신을 대할 때는 반드시 예로써 불러오고 의리로써 내보내었으니, 한번 잘못을 저질렀다고 하여 모욕을 주고 멀리 내쫓고서 위아래가 서로 뜻이 맞아 전혀 되돌아 보지 않기를 이와 같이 한 경우는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신이 전하께 바라는 바는 진실로 성의로써 마음을 다하고 명철로써 사물을 다스리는 데에 있는데, 이 두 가지의 근본은 또 학문을 강론하는 데에 있습니다. 그러나 간혹 장구와 글뜻의 말단에만 열심히 할 뿐, 도를 정밀하고 전일하게 닦으며 사심을 극복하고 예를 회복하는 공을 다하지 못하시니, 이 또한 한층 더 유의하셔야겠습니다.
현재의 일 가운데 말씀을 드릴 만한 일이 한이 없으니 궁금(宮禁)을 엄하게 하여 사사로운 경로를 막고, 인재의 선발을 밝게 하여 벼슬길을 맑게 하고, 검소함을 숭상하여 더러운 풍속을 변화시키고, 불필요한 경비를 줄여 나라의 재정을 여유있게 하는 일 등은 다 신이 말씀드리고 싶은 것들이나 마음은 길고 문장력이 짧아 감히 언급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신의 소장이 만들어진 뒤에 삼가 정태제(鄭泰齊)를 석방시키라는 명이 내린 것을 보았는데 성상께서 간하는 말을 흐르는 물 따르듯 하시는 도량은 더할 나위 없이 크다고 하겠습니다. 신은 더 이상 이 일을 개진해서는 안 될 일이나 이미 소장을 정서하여 다시 고치기가 불편하기 때문에 감히 그대로 올립니다."
하니, 답하기를,
"경의 소장을 읽어 보건대 전적으로 내 신상의 과실을 말하였으니, 감탄하는 마음이 실로 여느 경우보다 갑절이나 된다. 어찌 깊이 유념하지 않겠는가. 경은 더욱더 나를 깨우치고 인도하여 잘못을 바로잡아 달라. 경의 바르고 진실하여 아부하지 않는 충성을 내 어찌 모르겠는가. 비록 나의 자질이 함께 나라를 다스리기는 부족하더라도 부디 버리지 말라.
그리고 소장에서 이른바 심광수에 관한 말은 박절한 글은 아닌 듯하나 아래에서 상의 뜻에 맞추었다는 설은 너무 지나치지 않은가. 너그럽고 인자한 것은 사실 군주가 우선으로 삼아야 할 일이긴 하나, 한 원제(漢元帝)처럼 우유부단한 것은 또한 경계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 몇 가지 말은 무엇을 꼬집어 내어 흠을 잡자는 것이 아니라 가부를 상의하고 흉금을 서로 터보자는 뜻이니, 경은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라."
하고, 그 소를 비변사와 제사(諸司)에 내렸다. 비변사가 조사하여 아뢰기를,
"소장 속에 여러 가지 개진한 일은 다 채택해 시행할 만하며 유계(兪棨) 또한 양이(量移)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으나 유계에 대해서는 양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형조가 조사하여 아뢰기를,
"금천(衿川) 사람 이우빈(李友賓)은 당초에 자기 종 아내의 신원을 모른 채 양처(良妻)라는 그 종의 말만 믿고서 그 자손을 부리다가 내사(內司)가 수색하는 일이 있다는 말을 듣고 비로소 그 종의 아내가 양인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렇지만 한 마디도 시비를 다투는 말이 없이 그저 전혀 내사의 여종인 줄을 몰랐다는 사유로 본관(本官)에 납초(納招)하였으니, 이는 자기의 노비라고 우겨대면서 문권(文券)을 위조하여 공가(公家)와 송사를 벌이는 경우와는 크게 달라서 당연히 죄가 없을 듯합니다. 그런데도 그 당시 본조가 그 사실과 법을 참작하여 따져보지 않고 섣불리 율에 따라 정죄할 것을 청했으니, 참으로 억울한 일입니다.
지난번 우빈이 징을 쳐서 억울함을 호소한 것은 공감(功減)의 은전을 받고자 원한 것인데, 상께서는 ‘전가 사변(全家徙邊)의 무거운 율은 본디 공감하지 않는 것이다.’고 분부하셨습니다. 그러나 과거에는 마땅히 전가 사변할 죄라도 공감으로 도배(徒配)된 자가 한두 사람이 아닙니다. 그 억울한 사정을 알면서도 끝내 진달하지 않는 것은 대단히 법을 지켜 흔들리지 않는 뜻이 아니기 때문에 신들이 일찍이 이를 계품하려 하면서도 이제까지 망설이고 있었는데, 이제 이 소로 인하여 비로소 그 곡절을 진달하니, 이는 신들의 죄입니다. 우빈에게 사변하는 율을 특별히 감하여 상의 대공 무사(大公無私)하신 은덕을 보이신다면 구언(求言)을 채용하는 내실에 있어서 어찌 좋지 않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소장의 말뜻을 살펴보면 사실 그 뜻이 깊어 깊이 유념하지 않을 수 없으나, 대체로 내수사의 설치 운영은 건국 초기에서부터 이제까지 3백 년을 전해왔는데 그 사이에 명신 석보(名臣碩輔)와 홍유 정사(弘儒正士)가 많았고 명왕 성주(明王聖主) 또한 한두 분이 아니었으나 건백하여 혁파하지 않고 이제까지 존속되고 있으니, 어찌 우연한 일이겠는가. 그런데 오늘에 와서는 떠들썩하게 조사(朝士)들의 일개 혹붙이가 되어 이를 늘 염두에 두고 반드시 내사를 불의(不義)한 것으로 배척한 뒤에야 비로소 그를 명관(名官)이라 부르니, 어찌하여 오늘날의 조사는 옛날 사람보다 훌륭하고 옛사람은 오늘날 사람보다 못하단 말인가. 매우 이상한 일이다.
본조는 사천(私賤)으로서 내사에 투입된 자가 줄을 잇고 있다는 것만 말하는데, 공천으로서 부당하게 빼앗겨 사가(私家)에 부려지고 있는 자가 어찌 없겠는가. 이는 방자하여 기탄이 없는 말이다. 죄가 있어서 율에 해당되면 사형에 처하여 용서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며 만일 죄가 없다면 심의하여 처리할 것을 청하는 것이 옳을 것인데, 비통하고 궁색한 말을 많이 해가며 이로써 내 마음을 감동시키려고 하니, 이는 부녀자의 고식적인 자비심에 가까운 것으로서 나는 매우 못마땅하다. 이우빈의 일은 그 정상이 극히 간교하여 아무런 증거가 없다. 스스로 변명하는 말은 결코 믿기 어려운데 본조가 애써 감률(減律)을 청하니, 매우 부당하다. 그러나 구언에 따른 소장이라서 채용하지 않을 수 없다. 차라리 상례(常例)에 맞게 하지 않는 잘못을 범하는 것078) 도 안 될 것은 없다. 한 등급을 공감(功減)하라."
하였다.
부사과(副司果) 민정중(閔鼎重)이 상소하기를,
"신이 듣건대 천하의 일은 반드시 형세를 얻은 뒤에 이루어진다 합니다. 이제 형세를 얻은 초기를 당하였으니 마땅히 서둘러 그 성취를 구해야 하며 게으름을 피우다가 잃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그 형세는 세 가지가 있었는데, 그 중 하나는 이미 잃어버렸고 이제 또 두 형세가 눈앞에 당했습니다마는 이것까지 잃어버리게 되면 국가는 끝내 다스릴 수 없고 종사는 끝내 보전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른바 형세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국가가 불행하여 병란(兵亂)을 여러 차례 겪다보니 민생이 도탄에 빠진 것이 극에 이르렀습니다. 백성이 태평 성대를 고대하기를 마치 일상 생활에 필요한 물과 불을 찾듯이 하는데, 전하께서는 하늘이 내신 성군으로 아름다운 명망이 일찍부터 드러났기 때문에 왕위를 이어받으시자 사방의 만백성이 가슴이 부풀어 춤을 추며 밤낮으로 어진 정사를 고대하였습니다. 이러한 때에 전하께서 떨쳐 일어나 정사를 닦고 밝히어 지치(至治)를 도모하셨더라면 손바닥을 뒤집는다느니, 앉아서 천하사를 주무른다느니 하는 말보다 더 손쉽게 뜻을 이루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몇 해가 지난 뒤로는 시행하는 일이 적절하지 못하여 크게 중망(衆望)과 어긋나 수습할 수 없게 되었으니, 이는 참으로 나라를 다스릴 하나의 큰 형세였는데 전하께서 이미 그것을 잃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두 가지 형세가 눈앞에 다가와 있는데 이것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전하께서는 천성으로 타고나신 효성으로 스스로 자식의 도리를 다하는 예를 지키어 애통해 하시는 정성이 원근을 감동시켰으므로, 온 나라의 신민이 모두 눈물을 흘리고 우러러 보며 ‘우리 임금의 효성은 천고에 으뜸이다.’고 말합니다. 효도는 모든 행실의 근원이니 이 마음을 미루어나가 국사에다 적용한다면 이상적인 정치를 꾀할 수 있고 군왕의 덕화도 되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신민의 기대는 당초보다 더욱 간절한데 해와 달은 자꾸 가고 슬픔과 사모의 정은 끝이 없으실 것이며, 3년의 복제는 모든 군왕이 바꾸지 아니한 일로서 대례(大禮)를 장차 마치고 길례로 들어갈 시기가 다가옵니다. 이러한 때를 당하여 전하께서 일대 분발하시어 친히 국정을 잡고 크게 왕도 정치를 실현하고픈 뜻을 가지고 그러한 정사를 행하신다면 이는 신이 이른바 형세를 얻는 첫 번째의 일입니다.
하늘이 인애(仁愛)로워 재변으로 인한 경계를 자주 보이고 있으니 별들이 요기를 부리고 홍수와 가뭄이 정도에 지나쳐 우리 전하를 경계하는 것이 지극합니다. 옛날 상(商)나라의 중종(中宗)과 고종(高宗)은 뽕나무와 닥나무가 갑자기 크게 자라나고 꿩이 제물을 담은 솥 위에서 우는 이변을 만나 삼가고 두려워하여 정사를 닦고 덕을 행함으로써 마침내 왕도 정치가 다시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중종과 고종의 치화(治化)는 재변이 있기 이전에는 그에 관한 말이 없고 공구 수성한 뒤에야 크게 드러났으니, 전하의 오늘은 곧 상나라 군왕처럼 뜻을 새롭게 고칠 때입니다. 이러한 때를 당하여 전하께서 두려운 마음으로 경계하실 줄을 알고 이상 정치를 일으켜야겠다고 생각하시어 선왕(先王)의 진실됨을 거울로 삼고 후세 군주들의 허위를 물리치신다면 이는 신이 이른바 형세를 얻는 두 번째의 일입니다.
아, 이미 잃어버린 형세는 다시 말할 필요가 없고 앞으로 닥치는 형세는 또다시 놓칠 수 없습니다. 전하께서 이처럼 얻기 어려운 대세를 당하여 진정 떨쳐 일어나 뜻을 새롭게 고치지 않으신다면 다시 무엇을 기대하겠습니까. 이것이 곧 신이 안타까운 마음을 진정시키지 못하고 대략 몇 가지 조항을 진달하여 조그만 충성을 바치려는 이유이며, 한사코 그 형세를 얻는 방도를 먼저 밝힌 것은 일반 사람의 뜻은 혹시 형세를 얻어 가다듬지 않으면 사라져버리기 쉽고 나라를 꾸려가는 도는 혹시 형세를 얻어 떨쳐 일어나지 않으면 해이해지기 쉽기 때문이니, 이는 진실로 옛날의 어질고 슬기로운 이들이 모두 간파한 일입니다. 전하께서는 이를 잘 살피소서.
그 조목은 여덟 가지가 있는데, 그 첫째는 외임(外任)을 가리는 것으로 백성을 사랑하는 근본을 삼는 것입니다. 왕도 정치에서 큰 것은 백성을 사랑하는 것이 우선인데, 백성을 사랑하는 도는 먼저 수령과 감사를 가리는 일보다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삼대(三代)의 태평 성대 때는 순임금은 국정을 십이목(十二牧)에게 물었고, 주(周)나라는 육경(六卿)이 나누어 다스려 치화(治化)가 융성하고 원만하였으며, 그 이후로 치평(治平)한 세상은 한(漢)나라의 문제(文帝)와 선제(宣帝)만한 때가 없었는데 그 또한 순전히 순리(循吏)079) 를 썼을 뿐입니다. 그때에는 공경 대부(公卿大夫)가 나가서는 고을의 자사(刺史)가 되고 들어오면 보상(輔相)이 되었기 때문에, 조정은 민생의 고통을 알고 지방 고을은 조정의 정령(政令)을 알아 나라를 다스리기가 매우 손쉽고 교화와 은택이 빨리 미쳐가 마침내 국력이 풍부해지는 공을 이루었습니다. 그리하여 비록 당 태종(唐太宗)의 문교 정치로도 여기에는 미칠 수 없었으니, 이는 먼저 백성을 다스리는 도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은 그렇게 하지 않아 수령의 자리를 하찮은 벼슬로 간주하여 수령을 하는 자들은 음관(蔭官)이나 무부(武夫)가 아니면 반드시 문사(文士) 중에 명망이 없는 자이거나 청의(淸議)에 죄를 얻은 자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임금이 공로를 보답하거나 귀양보내는 소지로 삼을 경우일 뿐입니다. 이와 같은 무리는 처음 벼슬길에 들어설 때부터 손가락을 꼽아 달 수를 세어가면서 다른 자리로 옮겨 승진할 날만 기다리고, 겨우 자급이 뛰어오르면 동분 서주하며 요직을 간절히 구하다가 제 소원대로 되면 제 몸을 살찌게 할 것만 힘쓰면서 한번 그 자리를 잃으면 다시는 얻지 못할 것처럼 안절부절 못합니다. 그 사이에 혹시 명류(名流)로서 수령이 된 자가 있더라도 반드시 하는 말이 ‘잠시 한가한 고을에 부임하여 바람을 쏘이겠다.’고 하며, 부임한 뒤에는 호사스럽게 먹고 마시면서 안으로는 제 집의 재산을 챙기고 밖으로는 정사를 팽개치며, 이웃 고을을 능멸하여 누가 나를 감히 어찌하랴 합니다. 그러다가 며칠이 채 안 되어 흥미가 없어지고 싫증이 나면 곧 스스로 버리고 돌아가면서 말하기를 ‘안팎으로 미관 호작(美官好爵)은 내 마음대로 가질 수가 있으니 몇 년간 벼슬이 없더라고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합니다.
감사의 경우에 있어서는 그 책임이 한층 더 무거운데 한갓 그 기세만 믿고 각 고을을 유람삼아 돌면서 기생을 곁에 끼고 술을 실컷 마시며 멀고 가까운 관계에 따라 제 사심을 자행하니, 이와 같이 하고서도 정화(政化)가 흘러갈 수 있고 민생이 보전될 수 있겠습니까. 이러므로 조정의 신하들은 다 민사(民事)가 어떠한지를 모르고, 혹시 근시(近侍)의 직에 있는 신하가 폐막을 진달하는 일이 있더라도 그것은 통상적으로 풍문에 의해 들은 그대로 진달한 것이므로 나중에 사실을 조사해 보면 대체로 사실이 아닌 경우가 많습니다. 백성을 어루만져 돌보는 책임은 오로지 무식하고 수탈을 일삼는 손에 맡기며 조정에서 국정을 설계하는 선비는 농사를 모르는 사람이니, 어찌 능히 백성이 임금의 은택을 입고 관리가 그 직무를 수행하겠습니까.
신의 어리석은 소견은 이렇습니다. 문사(文士)의 출신으로서 처음 6품으로 승진한 자와 무사나 음관으로서 재주와 명망이 있는 사람은 모두 현(縣)의 수령으로 제수하여 선정(善政)을 책임지우고, 천성이 강인하고 확실한 자는 대간(臺諫)·시종으로 뽑아들이며, 교육과 훈도를 잘하는 자는 성균관 직책으로 발탁하여 제수하고, 현의 수령으로서 백성을 다스리는 강령을 아는 자는 차츰 주(州)·부(府)로 올리고, 주·부에서 올려 감사로 삼고, 다시 감사에서 조정으로 들여와 경상(卿相)으로 삼으며, 혹시 고을은 잘 다스리지 못하더라도 문재(文才)·기절(氣節)·유학(儒學)이 있는 자는 각기 그 소장에 따라 임용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뽑아들이는 법은 반드시 먼저 백성을 다스리는 것으로 시험을 한 다음에 재주를 헤아려 수용(收用)하여 침체된 자를 소통시키고 흐린 길을 맑게 하는 계제로 삼아야 합니다.
감사의 경우는 반드시 2품 이상으로서 방정하고 엄중하며 바르고 곧아 공보(公輔)의 명망을 지닌 자를 가려서 삼되, 선정신(先正臣) 이이(李珥)가 아뢴 것처럼 그 기한을 늘리고 가족을 인솔하게 하여 오랫동안 맡겨 공을 이루도록 책임지우고 관하 수령에 대한 출척(黜陟)을 분명히 하고 고과(考課)의 법을 엄중히 하게 하며 수시로 어사를 보내 아(阿)·묵(墨)080) 을 염탐하여 그 상벌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전관(銓官)이 사람을 쓸 때도 감사가 보고한 고과(考課)에 따라 오르내리고 조정한다면, 10년이 넘기 전에 군읍(郡邑)에 제수되는 것을 세상 사람이 중요시하고 그 직을 맡은 자도 모두 스스로 힘써야겠다고 생각하게 됨으로써 각 고을의 수령들은 다 재능이 있는 관리이고 경연과 대각(臺閣)의 직에 있는 신하들도 다 지방관을 역임하여 민생의 사정을 잘 알아 위로는 임금의 자문에 도움이 되고 아래로는 국정을 다스리는 데에 힘이 있을 것이니, 이는 나라를 다스리는 도에 있어서 참으로 제일가는 문제입니다.
둘째는 인재를 헤아리는 것으로 책임을 맡기는 방도를 삼는 것입니다. 나라를 꾸려나가는 도는 오직 적격자를 얻는 것에 있는데, 오늘날을 위하여 말하는 자는 반드시 ‘인물이 없다. 세상에는 너무도 인재가 부족하다.’고 하지만 이는 한 세상을 그르치는 말로서 신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재주가 있고 없고를 막론하고 제각기 장점이 있는 법으로서, 다만 인재를 쓰는 자가 장점은 취하고 단점은 버리는 데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인재를 쓰는 것이 그 법도를 잃어 한 가지 재주가 있다고 소문이 난 자는 그 힘에 벅찰지의 여부를 가리지 않고 무턱대고 부리며 발탁하여 쓰는 것이 분수를 넘어 사람과 벼슬이 서로 걸맞지 않습니다. 그 능하지 못한 것을 억지로 맡겨 마침내 일을 그르치면 또 으레 말하기를 ‘인재가 옛날과 같지 않다.’고 하는데, 이는 사람은 제각기 능한 것도 있고 능하지 못한 것도 있다는 것을 몰라서일 뿐입니다. 그 능하지 못한 것은 사실 능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곧 재주를 헤아려서 쓰지 못한 것입니다.
당(唐)·우(虞) 시대에는 고요(皐陶)·직(稷)·설(契)과 같은 어진 사람은 의당 능하지 못한 것이 없을 것이지만, 사도(司徒)니 사구(司寇)니 하는 직을 제각기 따로 맡겨주었으니 이는 요(堯)임금이 인재의 임용을 잘한 것입니다. 이제 비록 직·설과 같은 사람은 얻을 수 없더라도 모든 관직을 비워둘 수는 없으니, 전하께서 사람을 골라 직책을 주고 그 재주를 시험하여 일을 맡기며 일을 감당할 만한 자는 거두어 쓰고 감당하지 못할 자는 물리치신다면, 사람마다 각기 있는 재주를 다하여 수많은 시책이 전부 성과를 거두고 사방에서 재주를 갈고 다듬어 인재가 성대하게 일어날 것입니다.
옛날 전국 시대의 유협(游俠), 서한(西漢)의 순리(循吏), 삼국(三國)의 장사(將士), 이당(李唐)의 문재(文才)는 어찌 천운에 의해 어느 한 시대에 우연하게 배출된 것이었겠습니까. 각기 그 시대의 숭상한 것에 따라 사람들이 다 스스로 힘을 다한 것일 뿐입니다. 임금은 풍화(風化)를 좌우할 만한 권한을 잡고 있으니,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무엇을 이루지 못하겠습니까. 오직 취사와 배양을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재주가 있는 사람은 어지러운 세상을 만나면 장수 노릇을 잘하고 태평한 세상을 만나면 재상 노릇을 잘하는 등 자신이 만난 경우에 따라 적응하지 못하는 바가 없지만, 만약 때를 만나지 못하면 그저 평범한 사람에 불과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선조조(宣祖朝)의 인재로 말한다면 이항복(李恒福)·이덕형(李德馨)·이원익(李元翼)·유성룡(柳成龍)과 같은 신하들은 평소에 문장가로 이름났을 뿐이니, 이들로써 위급한 난리를 안정시키고 중흥의 공을 세울 수 있다고 말하는 자가 있으면 온 나라 사람이 모두 그렇지 않다고 여기다가 그들이 큰 공로를 세운 다음에야 비로소 그 재주와 공이 한(漢)나라의 등우(鄧禹)와 마원(馬援)에게 뒤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순신(李舜臣)의 경우는 본디 미관 말직이었고 권율(權慄)은 명망이 없었으니, 혹시 때를 만나지 못하고 하급 관직에서 늙어 죽었더라면 사람들은 그들이 뛰어난 재주를 지닌 줄을 몰라 오늘날 그 이름이 소멸된 지 오래되었을 것입니다. 지금 세상에 또 얼마나 많은 권율과 이순신 같은 인재가 늙어 죽어가고 있는지 어찌 알겠습니까. 신의 생각에는 비록 그 재주를 지녔더라도 관직으로 시험해 보지 않으면 또한 그런 사람을 얻을 수 없다고 봅니다.
세째는 신하들을 접견하여 아랫사람의 뜻을 소통시키는 일입니다. 오늘날의 폐단은 신하들을 드물게 접견하여 아랫사람의 뜻이 소통되지 않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습니다. 조종조에는 임금이 경연에 자주 납시었을 뿐만 아니라 대체로 공사(公事)가 있을 때는 승지가 반드시 들어가 품의하여 직접 성지(聖旨)를 받았기 때문에 군신 사이에 정분과 의리가 서로 단단해지고 꾀하는 일이 올바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연산군(燕山君) 때부터 이 법이 영원히 폐지되었고, 요즘에는 경연에서 신하를 접견할 때에도 입대(入對)하는 관원이 따로 있기 때문에 비록 대관(臺官)과 시종(侍從) 벼슬을 여러 번 지낸 사람이라도 한번도 용안을 뵙지 못한 자가 있으며, 혹시 소견이 있을 때는 그저 약간의 문자로 아뢸 말을 얽어 만들 뿐이므로 말이 명백하지 않고 뜻을 전부 표출하지 못합니다. 이 때문에 임금의 마음을 되돌리지 못하고 그럭저럭 낡은 습관을 답습하여 오랫동안 서로 버티다가 혹시 위에 신용을 얻지 못하여 성상의 뜻을 거슬리는 일이 있을 때는 엄중한 분부가 거듭 내려 기상이 아름답지 못합니다. 그리하여 뭇 신하들이 임금 앞에서 지닌 뜻을 다 드러내지 못할 뿐만 아니라 전하께서도 구중궁궐에 깊이 계시면서 해당된 사람을 접해보지 않고 다만 직무 가운데 사소한 일을 가지고 그 사람됨을 단정하시는데, 사람이 요순이 아니고서 어찌 모든 것을 다 잘할 수 있겠습니까. 혹시 잘못된 일이 있으면 본인의 본심과 행위가 어떠한가는 따지지 않고 다짜고짜 물리쳐서 아깝게 생각하지 않으시니, 또한 간하는 말을 받아들이시는 도에 어긋나는 듯합니다.
신의 생각에는 전하께서 날마다 법전(法殿)081) 에 납시지는 못하시더라도 편전(便殿)에서 시사(視事)할 때 크고 작은 모든 일을 승지가 다 직접 품의하게 하여 재결하시고, 간관(諫官)이 아뢰는 것도 직접 아뢰게 하여 간신(諫臣)과 더불어 옳고 그름을 면전에서 따지며 비록 중대한 일이라도 그와 같이 면담하는 속에서 결정하고 글로 아뢰지 말게 해야 한다고 여깁니다. 요컨대 군신 상하가 서로 성의가 통하여 모든 일이 올바른 사리대로 진행된다면 저절로 의사가 막히고 어긋난다는 탄식이 없고 뭇 신하들의 간사하고 올바른 것, 재주있고 용렬한 것도 또한 성상의 안목에서 그 본색을 숨기지 못할 것입니다. 이밖에도 시사를 말하고 싶어하는 자가 있으면 대궐에 들어와 아뢸 수 있도록 허락하여 사방 멀리 있는 사람들까지도 다 자신의 본심을 숨기는 일이 없게 하신다면 나라를 다스리는 일에 있어서 절반은 넘어간 것입니다.
신이 옛 역사를 살펴보니, 한(漢)·당(唐) 시대의 군주라도 나라가 태평한 세상에는 군신이 서로 접촉하여 구애를 받는 일이 없었으며 신희(愼姬)가 원앙(袁盎)의 배척을 받기까지 하였으나082) , 군자(君子)는 아름다운 일로 여기고 내외의 구별이 엄하지 않다고 보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후세에는 그러한 법이 쇠퇴하여 예법이 엄하지 않으면서도 절차는 극히 까다롭고 스스로 높고 크게 처신하지만 실제적으로 차츰 낮아집니다. 일반 가정에서 밭을 갈고 베를 짜는 자는 반드시 미천한 노비에게도 그 법을 물어 반드시 실수없이 일을 해내는데, 하물며 크나큰 한 나라를 다스리면서 깊숙한 궁중에 거처하여 부인과 내시로 하여금 임금의 분부를 전달하게 하고서도 성공하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진실로 능히 조종의 옛법을 회복하고 혼조(昏朝)의 나쁜 습성을 개혁하신다면 사람들이 다 충성을 바쳐 나라가 다스려질 수 있을 것입니다.
네째는 인륜을 밝혀 교화를 여는 일입니다. 신은 삼가 보건대, 요즈음 천재와 시변이 끊임없이 나타나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을 정도이지만 크게 우려할 만한 점은 없습니다. 다만 강상의 변과 윤기의 악이 일어나지 않은 해가 없고 도성 안에까지도 그러한 일이 있으니, 신은 아마도 1백 년이 되기 전에 오랑캐와 금수의 지역으로 차츰 빠져들어 구제할 수 없게 될 것으로 봅니다. 말을 하자니 매우 추잡하여 실로 가슴이 아픕니다. 그러나 이렇게 된 이유를 따져보면 모두가 교화가 행해지지 않고 인륜이 밝혀지지 못해서입니다. 이 때문에 반역이 자주 일어나 난신(亂臣)이 꼬리를 물고 강상이 두절되어 적자(賊子)가 나오고 있으니, 만약 시급히 바로잡아 오륜의 가르침을 다시 밝히지 않는다면 반드시 임금을 임금으로 대하지 않고 아비를 아비로 대하지 않는 상황에 이를 것입니다. 진정으로 원컨대 전하께서는 서글픈 마음으로 분발하시어 인륜을 밝히고 교화를 열어 이 세상을 망해가는 상황에서 구하고 이 백성을 물 속에서 구제하신다면 그런대로 인륜이 사라지지 않아 왕도가 행해질 것입니다. 그러나 그 가르침을 실시하는 법은 서책에 실린 성현의 법이 있으므로 신이 감히 지리하게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다섯째는 명분을 엄하게 하여 예모(禮貌)를 높이는 일입니다. 명분은 성인이 중시하는 것으로서 만약 그것을 먼저 바로잡지 않으면 상하의 질서가 어지러워지는 것입니다. 요즈음 나라의 기강이 서지 않고 조정의 위신이 높지 않아 군상(君上)의 명이 조정에 행해지지 않고 조정의 지시가 주군(州郡)에 행해지지 않으며, 심지어 하급 관리가 상관을 능멸하고 서리배가 장관을 무시하여 관아에서 공식적으로 모인 좌석이라도 미관 말직들이 조심하여 복종하려 하지 않고, 그저 서로 겨루려는 생각에서 거만한 빛이 얼굴에 역력하고 건방진 말이 입에서 터져나와 존경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은 조금도 없으며 그 자리에서 물러나면 서슴없이 비방합니다. 그 마음속에는 ‘저자가 비록 자급이 뛰어올라 벼슬이 나의 위에 있긴 하지만 내가 어찌 저자를 두려워할소냐.’라고 생각하는데, 그 아랫사람도 그에게 그와 같이 하고 하민(下民)에 이르기까지 모두 윗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으니, 습속이 아름답지 않은 이유는 실로 이로 말미암은 것이며 그 폐단은 장차 군상(君上)이 있는 줄을 모르는 지경에까지 이르고 말 것입니다. 신의 생각에는 먼저 조정에서부터 그 명분을 바르게 하여 삼공(三公)은 육경(六卿)을 총괄하고 육경은 이경(貳卿)083) 을 총괄하고 이경은 또 그 아래를 총괄하여 서리 무리들까지도 각기 통할하는 곳이 있어 모두 살피고 경계하기를 한결같이 조종조의 제도처럼 한다면, 그런대로 사람들이 다 명의(名義)를 두려워하고 분수에 만족하여 한계를 벗어나는 풍조가 저절로 없어질 것입니다.
여섯째는 기강을 일으켜 염치를 권장하는 일입니다. 대체로 기강이 무너져 염치가 완전히 없어진 뒤로는 사람들이 법을 무서워하지 않고 세상이 모두 사욕에 빠져서 스스로 명사(名士)니 정인(正人)이니 하는 자도 그 속에 흘러들어감을 면치 못한 지가 오래입니다. 예를 들어 한두 가지 폐습으로 말씀드릴까 합니다. 고위직에 있는 자는 누구나 세력으로 사람들을 협박하여 구차하게 제 집을 이롭게 할 계산을 하고 있으며, 대간(臺諫) 등 법을 집행하는 관리의 경우 밖에 나갈 때는 도로에서 호창(呼唱)을 행하고 집에 들어오면 그 전도(前導)를 맡은 군졸에게 법사(法司)의 권위를 빌려주어 남에게 준 빚을 징수할 계산을 하는데, 그 과정에 불법을 자행하는 폐단은 형언할 수 없을 정도이며 그것이 상습화되고 있습니다. 그들의 친족과 친지들까지도 빚을 징수하고 싶으면 모두 전도 군졸을 빌려달라고 청하기를 마치 남의 집의 기물빌리듯 하고 그러면 또 즉시 빌려주어 조금도 어려워하는 빛이 없으니, 전도를 설치한 목적이 어찌 이들을 위하여 남에게 완력을 행사하라는 것이겠습니까. 공물(貢物)을 방납(防納)하는 문제에 있어서도 이미 나쁜 풍조가 이루어져서 겉으로는 모리배의 짓이라고 칭탁하여 세상의 비방을 피하고 속으로는 청탁하는 권한을 쥐어 그 이익을 나눠먹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하기 때문에 시정의 무리와 연줄을 맺어 그들과 친밀하게 지내고, 심지어 역관(譯官) 무리의 장례에도 호상(護喪)하는 관리를 정하는 일까지 있어 그 하리(下吏)된 자는 죽고 싶을 정도로 부끄럽고 분하게 생각하여 그 관원을 무식한 촌사람보다 못하게 보니, 무슨 이유로 그 지시를 따르고 직무를 받들어 행하겠습니까.
아, 온 세상이 한 모양으로 함께 목욕하는 마당에 누가 발가벗었다고 비난할 수도 없게 되어 한번 벼슬길이 트이면 마침내 서로 붕당을 짓습니다. 그리하여 이익을 함께하는 사이에는 감싸주는 것을 일삼고 자기와 뜻을 달리한 자를 보면 곧 싫어하여 비방을 가하니, 조금이라도 그 속에서 빠져나오려 하면 이미 형세가 고립되어 뭇사람들이 시기하고 배척하므로 피차간에 용납이 안 됩니다. 이러한 나쁜 풍조가 이미 습관이 되어 감히 서로 경계를 해주지 못하니 참으로 한심스럽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만약 기강을 일으켜 염치를 권장하지 않는다면 국가의 멸망은 머지 않은 장래에 있을 것이라고 봅니다.
일곱째는 억울함을 풀어주는 일입니다. 왕자(王者)가 인정(仁政)을 베풀 때는 억울함을 풀어주는 일을 우선으로 해야 하는 것인데, 현재 성명(聖明)께서 위에 계시므로 뭇생령이 제각기 뜻을 성취하여 애초에 억울함을 품는 일이 없고 억울한 자가 생기면 풀어주지 않는 일이 없습니다. 신이 한편으로 염려하는 바가 있으니, 그 억울한 자가 혹시 천지의 화기(和氣)를 손상하는 일이 있는데도 그 사실을 숨기고 말을 하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대체로 정태제(鄭泰齊)를 귀양보낸 사건은 당초에 그의 이름이 난적(亂賊)084) 의 입에서 나왔으나 별다른 증거가 없고, 그 무리들 몇 사람 가운데 혼자서만 무거운 벌을 받은 것은 벌이 공평하지 못한 듯하며, 또 폐역(廢逆)085) 과 비록 인척관계이긴 하나 역시 죄를 범한 일이 없는데 벌을 받았고 그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다 벌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 전후 사실을 살펴볼 때 사실 물을 만한 죄가 없으니, 태제의 경우 국법상 용서해 줄 만한 자로서 혹 억울한 점이 없겠습니까.
유계(兪棨)에 대해서는 전후에 걸쳐 대신과 재신(宰臣)이 그의 근본 마음을 여러 번 아뢰었으므로 신이 다시 진달할 일이 아니고, 또 신하들 중에 유계의 일을 말한 자는 모두 사적인 일을 도모했다는 것으로 공격하고 엄중한 벌로 단죄하였으므로 신의 한 마디 말로 능히 성상의 마음을 돌릴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신이 생각건대 인정은 누구나 비슷한 것이니 유계가 아무리 형편없는 자라 하더라도 반드시 전하의 하교처럼 그런 자는 아닐 것인데, 처음에 이미 석방하고서 나중에 다시 귀양보내는 등 매번 아랫사람들이 들고 일어난 것으로 인하여 석방하기도 하고 귀양보내기도 하였으니, 어찌 한 사람의 죄가 말하는 사람에 따라 깊어지고 얕아지고 한단 말입니까. 당초에 상소한 신하는 세 사람으로서 근본 마음은 똑같이 그저 어리석고 망령된 데서 나왔을 뿐인데, 유독 유계에게 대해서만은 임금의 노여움이 한층 더 크셨습니다. 이는 대체로 전조(銓曹)의 끌어댄 말이 임금의 뜻을 거슬렀고 여러 신하의 구제해 주는 말이 지리한 것으로 인하여 마침내 유계가 시론(時論)을 조종하고 요로에 친분을 맺은 것으로 의심하셨기 때문인데, 신자로서는 차마 듣지 못할 말로 배척하기까지 하셨으니, 이는 사물을 각기 사물 그 본연에 맡기는 성인의 도가 아닌 듯합니다.
조익(趙翼)을 삭탈 관직하여 문외 출송한 것도 성명의 흠결이 되지 않는가 생각합니다. 만약 조익이 임금의 마음을 시험해 보려는 계산을 하였다면 그 죄는 여지없이 주살하여야 하고 이와 같이 너무 박하게 해서는 안 될 것이며, 만약 노병(老病)으로 인해 잘 살피지 못한 것이라고 한다면 그 죄는 고의성이 없는 것으로서 이와 같이 너무 무겁게 죄를 줘서는 안 됩니다. 신은 ‘조익이 아닌 다른 사람이라 하더라도 신하가 어찌 임금을 떠보려는 마음을 가질 수 있겠는가.’라고 생각되니, 이는 필시 잘 살펴보지 못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잘 살펴보지 못한 죄는 본가의 사람과 크게 서로 다를 것이 없는데, 윤이지(尹履之)는 이미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귀양을 면제하고 그 관직만 삭탈하였으니 조익이 문외 출송된 것은 이미 과중한 것이며 본심 밖의 하교가 어찌 억울하지 않겠습니까. 이밖에 죄적(罪籍)에 올라 있는 죄인 중에도 혹시 억울한 자가 있을 수 있으니 전하께서 한두 대신과 그 경중을 상의하여 그 억울함을 씻어주신다면, 이는 참으로 인정(仁政) 중에서도 큰 것입니다.
요즈음 억울하다고 하는 것으로는 김익진(金益振)을 삭과(削科)한 일보다 더한 것이 없습니다. 신은 실로 개탄하고 있으니, 익진이 만약 사심을 행한 자취가 있다면 삭과만 할 것이 아니라 마땅히 중한 벌을 받아야 하고 그 당시 고관(考官)도 그와 함께 같은 벌을 받아야 할 것이며, 만약 사심을 행한 자취가 없다면 삭과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름을 봉한 부분이 넓다 하더라도 본디 정식(定式)이 없었으니, 만약 앞으로 정식을 엄격하게 세워 그것을 범하는 자가 있으면 삭제하는 것이 옳겠으나 이제 그와 같이 하지 아니하고 갑자기 봉한 부분이 넓다고 하여 과목(科目)을 삭제하였으니, 실로 매우 억울한 일입니다. 전하께서도 그 억울함을 알아 직명(職名)을 제수하기까지 하셨으니, 비록 아름다운 일이긴 하나 신은 그 조치를 온당하다고 보지 않습니다. 만약 억울하다고 생각하셨으면 직명을 제수할 것이 아니라 마땅히 그 과목을 복구시켜야 하고, 마땅히 삭제해야 한다면 또한 직명을 제수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죄를 줘야 할 것입니다.
일찍이 선조(先朝) 때 어떤 거자(擧子)가 국휘(國諱)를 잘못 썼다가 삭과된 일이 있었는데, 과장(科場)의 규칙상 국휘를 쓴 자는 삭과한다고 법전에 분명히 실려 있어 봉함한 부분이 넓은 익진의 경우와는 비할 바가 아닌데도 그 당시 연신(筵臣) 중에 애석하다고 말하는 자가 있자 선왕(先王)께서는 즉시 복과(復科)를 허락하셨습니다. 이는 실로 과거의 법이 생긴 뒤로 유능한 자나 어리석은 자가 함께 응시하여 합격을 하고 못하는 것에 따라 영광과 몰락이 판가름되며 비록 세상에 도를 행해보려는 뜻을 지닌 자라도 반드시 이 길로 말미암아 나아가는데, 궁벽한 시골의 미천한 선비가 흰머리가 되도록 각고의 노력을 한 끝에 다행히 합격한 것을 가지고 또 죄를 진 일도 없이 억울하게 삭제된다면 그 억울함이란 더 이상 심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군주가 인재를 만드는 도리로서도 마땅히 이 점을 우선 살펴보아야 하니, 성명께서는 유념하소서.
여덟째는 전례(典禮)를 중시하는 일입니다. 종묘 세실(世室)에 관한 의절은 신과 사람의 거룩한 예이자 국가의 큰 전례로서 조종(祖宗)을 존숭하고 그 은택이 만대에까지 미쳐가는 것이니, 옛 예절 3천 가지 중에 이보다 중대한 것은 없습니다. 이러므로 성묘(成廟)를 세실에 모시자는 논의가 처음 승하하시자마자 일어났는데 그 당시에 대신·예관(禮官)과 간신(諫臣) 김극뉵(金克忸)·김일손(金馹孫) 등이 헌의한 글이 있습니다. 그 당시 대신·예관·대각(臺閣)으로 하여금 다 의논에 참여하게 하였는지의 여부는 알 수 없으나 그 예를 중시했던 경향은 이와 같았으며, 그 후 선조(先朝)에 헌의할 때에는 그때의 헌의를 상고해 낸 다음에 뭇사람의 의논이 비로소 결정되었습니다. 대체로 열성(列聖)의 세실은 자손의 입장으로 그 조종을 사사로이 위하는 것이 아니라, 성스러운 조종의 공덕이 인심에 흠뻑 젖어들어 한 평생 잊지 못함으로써 그러한 예를 자연적으로 그만두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 중종 대왕께서는 어지러운 조정을 쓸어내고 새로운 세상을 열어 깊고 후하신 은택이 이제까지 사람들의 마음속에 남아 있으니, 신민의 추모하는 정성으로서는 마땅히 만세토록 흠향하실 성대한 예를 올려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신은 삼가 들으니 조정이 처음에 예관(禮官)이 아뢴 것으로 인해 대신에게 문의하여 그렇게 하는 것으로 결정하였다고 했는데, 뭇사람의 마음이야 말할 수 없이 기쁘더라도 예문(禮文)으로 보아서는 소홀하지 않습니까. 대체로 예를 중하게 하지 않으면 일에 정성이 들어가지 않는 법입니다. 신의 어리석은 소견은 조정에 있는 2품 이상의 중신에게 한자리에 모여 의논하게 하거나 혹은 성묘 세실에 관해 당초 헌의한 절목을 상고하여 강정(講定)하게 한 다음에 중외의 인민에게 널리 고하여 그들과 이 경사스러운 예를 함께하는 것이 실로 사리에 합당하다고 봅니다.
그리고 신은 삼가 보건대 전하께서는 효성을 천성적으로 타고나 3년간의 복제(服制)가 이미 끝났는데도 슬퍼하고 사모하는 정이 시들지 않아 삭망(朔望)의 제의(祭儀)까지도 다 몸소 행하시니, 이는 죽은 이 섬기기를 살아 있는 사람처럼 하는 지극한 뜻으로서 신민들이 매우 감동하고 기뻐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절을 하며 곡하는 예가 옛 예경(禮經)의 강쇄(降殺)하는 법에 어긋남이 있습니다. 요즈음 예관과 대신들의 계사로 인해 전하께서도 그것이 지나친 예라는 것을 아시고서도 오히려 ‘나는 정에 따라 무턱대고 행한다.’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너무도 생각없이 하신 말씀입니다. 그와 같이 하시는 것은 아무리 끝없이 슬퍼하고 사모하는 정에서 나왔다 하더라도 전하께서는 어찌 선왕(先王)이 예를 제정할 때 도리에 꼭 맞게 하였다는 가르침을 생각지 않으십니까. 정이야 끝이 없더라도 예는 반드시 절제하는 법인데 이미 최복(衰服)을 벗은 뒤에도 계속 상례(喪禮)를 따르는 것은 예에 있어서 과연 옳은지 모르겠습니다. 이제 만약 상사(祥事)를 마친 뒤에도 강쇄하지 않다가 담제(禫祭) 때에 가서야 갑자기 전부 복을 제한다면, 정을 단계적으로 절제하는 일이 없어 근엄한 뜻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리고 어찌 뒷사람이 본받을 만한 도리이겠습니까.
예가 비록 정에 따라 생긴 것이라 하지만 옛날 성인이 정을 참작하여 예를 정해 법으로 만들었으니 거기에 지나치거나 미치지 못한 것은 모두 잘못된 것입니다. 큰 효자는 나이 50세가 되어도 부모를 사모하는데 만약 정에 따라 무턱대고 행하기로 한다면 곡하며 슬퍼하는 것을 어찌 3년만 하고서 그만두겠습니까. 성인의 생각에는 3년 뒤에 갑자기 길례로 돌아간다면 효자의 슬프고 그리는 정이 아직 쇠해지지 않은 점이 있기 때문에 결국 한 달을 건너뛰어 지내는 담제의 법을 둠으로써 정과 예문이 완전하게 갖춰졌던 것입니다.
이제 상사를 마친 뒤에 마땅히 어떠한 예를 써서 이 정을 강쇄해야겠습니다. 신의 망령된 소견으로는, 이미 대상이 지났으면 그 후 담제 사이의 삭제(朔祭)에는 마땅히 배례(拜禮)만을 써야 할 듯합니다. 어찌 담제에 곡례(哭禮)가 있다고 하여 담제 이전의 삭망 제사에도 곡례를 쓴단 말입니까. 그 강쇄로 말한다면 담제와 대상의 절목 역시 한 등급의 강쇄만 있을 뿐입니다. 대체로 담제 때 곡례가 있는 것은 3년의 복제가 그날로 전부 끝나므로 효자의 마음에 슬픔과 그리움이 반드시 갑절이나 되어 저절로 곡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니, 또한 이 예를 끌어다가 삭망제에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예문(禮文)에 ‘정에 지나친 것은 예가 아니다.’고 하여 옛 성인의 훈계가 준엄하니 빨리 예관으로 하여금 예문을 자세히 고찰하게 하여 다시 의논해서 정하는 것이 예를 중시하는 뜻에 부합할 듯합니다. 그러나 신은 예를 아는 자가 아니고 다만 개인의 견해를 진달한 것일 뿐이니, 성명께서는 살펴보소서.
아, 오늘날의 폐단은 이것만이 아닙니다. 큰 관리는 우유 부단하고 작은 관리는 일을 다잡아 하지 않아 국사에 관한 모든 것을 서리에게 일임하면서 서리가 문서를 안고 와 이렇게 이렇게 해야 한다고 말하면 그 내용을 살펴보지도 않고 종이 말미에다 서명만 하여 내보내고 주위 사람이 혹시 그 곡절에 대해 말해주더라도 전혀 돌아보지 않습니다. 그러고는 다만 농지거리를 맑은 멋으로 삼고 한가롭게 지내는 것을 고상한 버릇으로 삼아 국가가 날로 위망(危亡)으로 치닫고 있는 줄을 모르니, 이는 참으로 가슴아픈 일입니다. 이에 감히 우선 절실하고 시급히 해야 할 일을 위와 같이 조목별로 거론하였습니다마는, 그 추진하는 방도는 오직 전하의 입지(立志)가 어떠한가에 달려 있습니다. 이른바 입지란 것은 지성 한 가지 마음으로 성인의 가르침을 반드시 따라야 할 것으로 생각하고 선왕(先王)의 정치를 반드시 본받을 만하다고 생각하며, 후세의 어수선한 정사에 구애되지 않고 세속의 그럭저럭 넘어가는 의논에 흔들리지 아니하면서 반드시 삼대(三代)의 융성했던 시대처럼 나라를 다스려야겠다고 마음을 가지는 것을 말합니다. 대체로 한 개인의 몸이라도 입지가 독실하지 않으면 제 몸을 스스로 닦지 못하는 법인데, 하물며 크나큰 한 나라를 가지고서 먼저 성상의 뜻을 정하지 않는다면 어찌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예로부터 군주라면 어느 누가 그 나라가 다스려지길 원치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혹은 그와 같이 하고 싶어도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고, 혹은 처음에는 마음을 가다듬고 하다가도 끝을 맺지 못하고, 혹은 오랫동안 쌓인 폐단에 안주하여 개혁하지 못하고, 혹은 이러니저러니하는 많은 의논에 정신이 팔려 어느 것을 취택해야 할 지 모르는데, 이는 다 군주의 뜻이 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전하께서 참으로 먼저 뜻을 정하여 표준을 세우고 아랫사람들을 권장하고 격려하신다면, 바람에 쓸려가듯 그림자가 따라가듯 호응하지 않는 자가 없게 되어 비록 백에 하나도 남에게 미치지 못하는 신 같은 자도 마땅히 노둔한 힘을 다하여 만분의 일이나마 성상의 뜻에 보답해야겠다고 생각을 할 것인데, 하물며 유능하고 뛰어난 선비로서 세상을 다스리는 데에 뜻이 있는 자들이야 어떻겠습니까. 하지만 비록 뜻을 세웠다 하더라도 반드시 배우고 물어 사물의 이치를 궁구하는 힘과 본연의 천성을 보존하고 과실을 살펴보는 공이 있는 다음에 그 뜻을 성사시킬 수 있습니다. 천하의 일은 정성이 아니면 확실하게 되지 않는 법이니, 삼가 원컨대 성상께서는 스스로 반성하여 노력하소서.
옛날 소공(召公)이 무왕(武王)을 훈계하기를 ‘좋아하는 사물에 빠지면 의지를 잃어버린다.’ 하였고 대우(大禹)는 대성인임에도 맛있는 술을 싫어하였으니, 성상께서는 스스로 힘쓰소서. 신은 듣건대 잠저(潛邸)에 계실 때 이따금 술잔을 가까이하여 실컷 마시는 것을 통쾌하게 여기셨다가 세자로 책봉된 뒤로는 이미 술맛을 끊으시고 경연에서 누누이 술을 경계하셨다고 하니, 신민의 기쁜 마음은 끝이 없습니다. 그러나 신의 간절한 마음은 정자(程子)의 사냥을 좋아한 데 대한 경계086) 가 없을 수 없어 함부로 진달한 말이 여기에까지 미쳤습니다. 삼가 원컨대 성명께서는 그 망령되고 참람됨을 벌주시고 어리석은 충정을 받아들이소서."
하였는데, 답하기를,
"그대의 소장을 보고 가상히 여겨 마지 않았다. 그대는 나이 어린 학사로서 사무를 통달하고 세태를 알고 있는 것이 어찌 이렇게도 해박한가. 사안에 따라 할 말을 다하고 숨기는 것이 없으니, 내 마음에 더욱 가상하게 여겨진다. 어찌 깊이 유념하지 않겠는가. 그대도 또한 나쁜 세속에 물들지 말고 이 충직한 기개를 잘 길러나가 원대한 성취를 기약하도록 하라. 그리고 소장에 이른바 ‘세속에서는 다만 농지거리하는 것을 맑은 멋으로 삼고 한가롭게 지내는 것을 고상한 버릇으로 삼아 국가가 날로 위망으로 치닫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정곡을 찌른 말로서 재삼 경탄하고 이어 한숨을 쉬었다. 국가가 날로 위망의 길로 나가는데도 수습하지 못하는 것은 바로 이 병에 걸렸기 때문이니, 아, 동진(東晋)의 풍조와 불행히도 비슷하도다. 우리 신하들은 마땅히 이로써 경계를 삼아야 할 것이며, 말단에 사냥을 좋아한 것으로 비유한 것은 그 뜻이 더욱 깊으니 어찌 경계로 삼지 않겠는가."
하였다. 이어 하교하기를,
"사과(司果) 민정중(閔鼎重)은 나이 어린 하급 관리로 글을 올려 국사를 말하였는데 말이 시의에 절실한 것이 많았다. 그 충직함은 참으로 가상하니 특별히 호피(虎皮)를 하사하여 나의 가상히 여기고 권장하는 뜻을 보이도록 하라."
하고, 그 소를 비변사에 내렸다. 비변사에서 복계하기를,
"민정중은 나이 어린 신진으로서 국사에 마음을 다할 뿐만 아니라 시무(時務)에 능한 것이 그보다 뛰어난 자가 없으니, 참으로 가상한 일입니다. 시세의 득실을 논하면서 수령을 가려 제수하고 감사를 오랜 기간 유임시키는 것으로 말하였는데, 이는 실로 오늘날의 급선무입니다. 백성과 가까운 관리는 수령만한 자가 없고 수령을 통섭하는 것은 감사만한 자가 없으니, 처음에 수령을 가려서 맡겨 먼저 백성을 사랑하는 정사를 행하고 감사를 오랫동안 유임시켜 그의 재주를 전개하는 방도로 삼는다면, 백성이 이미 잘 다스려지는 마당에 나라가 어찌 다스려지지 않을 리가 있겠습니까. 백리의 땅에도 수령은 오히려 3년 혹은 6년 동안 유임시키는 일이 있는데, 천리의 땅을 관할하는 감사가 어찌 1년만에 그 재주를 펼 수 있겠습니까. 다스리는 법을 논한 선유(先儒)는 모두 오랫동안 맡겨 성공을 책임지우는 것으로 말했습니다. 앞으로 6도의 감사는 모두 양계(兩界)087) 처럼 본영(本營)을 겸하여 관장하게 하고 병사도 그와 마찬가지로 시행한다면 반드시 성과를 이룰 가망이 있고 영접과 전송을 자주하는 폐단이 없을 것이니, 이는 변통해야 할 일 중에서도 우선으로 해야 할 일입니다.
재주를 헤아려 벼슬을 맡기며 단점은 버리고 장점을 취하는 것은 사람을 쓰는 방도입니다. 과연 이 방도를 잘 이행한다면 인재가 반드시 배양되고 성취되는 실적이 있을 것입니다. 매일 경연에 납시어 아침과 낮으로 강독하는 기회를 갖으시면 아랫사람의 뜻이 위에까지 통하게 될 것이고, 엄중한 분부를 자주 내리심과 아울러 자신을 반성하여 스스로 책망하신다면 교화를 이룰 수 있을 것인데, 이는 다 성상께서 스스로 힘쓰실 일로서 신하들이 다함께 기대하는 바이니, 시종 태만히 하지 마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명분을 엄중히 하는 것은 기강을 일으키는 데에 있고 예모를 높이는 것은 염치를 가다듬는 데에 있으므로 이 조목은 두 가지이나 실은 하나입니다. 원통함을 품고 억울한 처분을 받는 것은 성왕들께서 민망히 여기고 측은해 하는 일입니다. 요즈음 죄를 입은 사람은 그 경중을 막론하고 거의 다 풀어줬으며 이제까지 억울한 처지 그대로 있는 자는 유계(兪棨) 한 사람 뿐인데, 구언(求言)한 뒤로 진언한 자는 이것을 가지고 말하지 않은 이가 없으니, 공론이 다 같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조석윤(趙錫胤)의 상소에 대해 회계할 때 신들의 생각은 양이(量移)의 명을 내리시길 청하고 싶었으나 서로의 말이 통일되지 않아 며칠간 지연되었으니, 이는 신들의 죄입니다. 근도(近道)로 옮길 것을 명하여 특별히 억울함을 씻어주는 은택을 베푸시길 진심으로 원합니다.
김익진(金益振)의 삭과(削科)에 대해 바깥 사람들이 모두 억울하다고 말합니다. 만약 사심을 행사한 자취가 있다면 고관(考官)이 마땅히 그 죄를 받아야 하니 어찌 익진이 관계될 일이겠습니까. 그전부터 삭과되었다가 도로 원상 회복된 자가 한두 사람만이 아니니, 바라건대 억울함을 씻어주어 그 과목(科目)을 복구하소서. 중종 대왕께서는 혼란한 조정을 혁파하고 새로운 정치를 꾀하셨으므로 당연히 백대토록 신주를 옮기지 않는 제향을 누려야 하는데, 그 이른바 예를 중하게 하지 않으면 일이 정성스럽지 못하다고 한 것은 신들이 그 뜻을 모르겠습니다. 혼전(魂殿)의 삭망 제사에 곡례(哭禮)가 있어서는 안 된다고 한 것은 이미 결정된 예로서 이제 새삼 거론할 것은 없습니다. 그 아래 이른바 먼저 성상의 뜻을 정하여 아랫사람을 격려하시라는 것과 좋아하는 사물에 빠지면 의지를 잃어버린다느니, 우임금은 맛있는 술을 싫어했다느니 하는 경계는 그 마음이 성상을 더 노력하시게 하자는 데 있는 것으로, 정자처럼 사냥을 좋아하는 마음이 혹시라도 싹틀까 염려해서 그런 것입니다. 성상께서는 한층 더 유의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시종 태만히 하지 말고 사냥을 좋아하는 마음이 혹시 싹틀지 모른다는 경계는 내 마땅히 깊이 유념하겠다. 수령을 가려 맡기고 재주를 헤아려 벼슬을 제수하는 일은 해조에 엄중히 당부하여 그로 하여금 마음을 다해 거행하게 하라. 감·병사를 오래 유임시키는 일은 국조(國朝) 이후로 없었던 법일 뿐만 아니라 만약 적임자가 아닐 경우에는 도리어 반드시 폐단이 있을 것이다. 고굉(股肱)의 대신과 이목(耳目)의 대관(臺官)에 대해서도 그 유능 여부를 살펴 만약 유능하다면 비록 여러해를 넘어가는 일이 있더라도 체차하지 말고 잉임시켜 그 성과를 거두도록 해야 하고 유능하지 못하다면 1년이 채 되지 않았더라도 빨리 제거해야 할 것이니, 굳이 이 법을 새로이 만들 것은 없다. 유계와 김익진 등의 일은 이미 결정된 일로서 이제 와서 고칠 수는 없으니, 그대로 두는 것이 옳다."
하였다.
6월 7일 임자
영의정 김육(金堉), 좌의정 이시백(李時白)과 정부의 동서벽(東西壁), 관각(館閣)의 당상, 육조의 판서와 참판을 명소(命召)해 빈청(賓廳)에 모이게 하여 왕대비의 존호는 자의(慈懿), 왕세자의 표자(表字)는 경직(景直)이라고 의정(議定)하였다.
상이 하교하였다.
"이미 구언(求言)하는 분부를 내려 사람들에게 말을 하라고 권하고서 결국 채용하지 않는다면 구언한 뜻이 어디에 있겠는가. 어제 여러 응지소(應旨疏)를 보니 정태제(鄭泰齊)의 죄는 용서해 줄 만하다고 대부분 말하였다. 특별히 해부(該府)로 하여금 석방하게 하라."
6월 9일 갑인
이지항(李之恒)을 부제학으로, 박서(朴遾)를 우참찬으로, 이해창(李海昌)을 응교로, 권우(權堣)를 보덕으로 삼았다.
상이 주강에 나아가 《서전》 태갑(太甲)을 강독하였다. 강독이 끝난 뒤에 동지경연 조석윤이 아뢰기를,
"임금은 인자하고 명철하고 과감한 세 가지 덕이 겸비된 뒤에 나라를 다스릴 수 있는 것으로서 신은 부드럽고 나약한 것을 좋다고 보지는 않습니다마는, 요즈음 보건대 성상께서 모든 행동 거지에 엄중하고 강렬하신 듯하기 때문에 감히 소장에 언급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소장에 진술한 말은 다 옳은 것이다. 신천익(愼天翊)을 승지로 발탁하여 제수한 것은 늘 서로 만나보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이미 고향으로 돌아갔는가?"
하자, 석윤이 아뢰기를,
"아직 도성 안에 있습니다. 전하께서 그 위인을 가상하게 보신다면 한번 사대(賜對)하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서울에 있는 기간이라도 근시(近侍)의 일원으로 있으면 서로 볼 수 있을 것인데, 천익이 공직(供職)을 하려고 하지 않으니 어찌하겠는가."
하니, 석윤이 아뢰기를,
"승지 벼슬은 병중이므로 공직하기 어려우니, 수시로 불러서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김 영부사(金領府事)가 떠날 때 서로 보지 못한 것은 내가 무심코 지나쳐버린 것은 아니었으나 경의 소장을 보고 비로소 섬뜩한 생각이 들었다. 내가 어찌 원로에게 성의가 없어서 그랬겠는가."
하니, 석윤이 아뢰기를,
"노병한 신하가 며칠 동안 기다리고 있는데도 끝내 인견하겠다는 명이 없었으니 어찌 섭섭하지 않았겠습니까."
하였다.
헌부가 【대사헌 윤순지(尹順之), 장령 윤집(尹鏶), 지평 오정위(吳挺緯)·홍수(洪鐩).】 응지(應旨)하여 상차하기를,
"군주는 높은 자리에 처하고 구중 궁궐에 깊이 계시어 경연을 열어 학문을 강론하는 것 이외에 일이 없이 혼자 계실 때 함께 어울리는 자는 궁첩(宮妾)과 환시(宦寺)일 뿐인데 그들이 좌우에서 가까이 모시며 아첨하고 즐겁게 해주는 것만을 일삼고 있으니, 상성(上聖)의 자질이 아니면 그 속에 차츰 빠져들지 않을 사람이 적습니다. 사치하고 싶은 생각이 이로 인해 싹터서 임금의 덕이 병들고 놀고 싶은 마음이 이로 인해 생겨나 임금의 덕이 상실되며, 노래가락이 귀에 들어와 정사에 게을러지고 채색이 눈에 현란하여 학문에 태만해지는 것입니다. 옛날 당 태종(唐太宗)이 한재로 인해 구언(求言)하자 위징(魏徵)은 차츰 끝맺음을 잘못한다는 말로 경계한 일이 있습니다088) . 삼가 원컨대 전하께서는 이러한 일은 반드시 없다고 하시어 소홀히 하지 마소서.
각사의 관리를 돌아가며 소대(召對)하시는 것은 해사(該司)의 폐단을 알아보기 위해서인데, 요즈음 각사의 관리들은 하는 일이 없이 날짜만 보내 직무가 어떻게 되어가는지 전혀 모르다가 윤대(輪對) 낙점을 받았다는 말을 들은 뒤에야 비로소 담당 하급 관리에게 물어서 겨우 몇 가지 일을 문자로 얽어 관례에 따라 들어와서 고합니다. 맡은 바 직무를 유기하고 태만히 하기가 이보다 심할 수 없으니, 참으로 한심하기 그지없습니다. 앞으로는 차례를 따지지 말고 불시에 소대하시어 만약 위인이 용렬하고 잗달아 일을 맡기기에 합당치 못한 자가 있을 때는 즉시 도태를 명하시고 적임자를 가려 제수한다면 모든 관리가 적임자로 채워지고 관사의 일이 제대로 성사될 것입니다.
신료(臣僚)를 접견하여 다스리는 도를 강론하는 것은 낮이며 저녁으로 여는 경연에만 국한할 일이 아닙니다. 조참(朝參)과 상참(常參)은 곧 임금께서 납시어 시사(視事)하는 것으로서 군주가 친히 정사를 청취하고 백관이 직접 일을 상주하는 것이니, 이는 실로 조종조 때 항상 행하던 아름다운 법입니다. 삼가 원컨대 전하께서는 한결같이 옛 규례를 준수하여 다시 거행하도록 하되 항상 부지런히 하여 유종의 미를 거두시고 ‘무일(無逸)’ 두 글자로 귀감을 삼으신다면 종사와 생민의 복이 될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힘쓰소서."
하였는데, 상이 가납(嘉納)하였다.
6월 10일 을묘
상이 조강에 나아가 《서전》 태갑(太甲)을 강독하였다.
이천 현감(利川縣監) 홍유일(洪有一)이 사조하니, 면유하여 내보냈다.
상이 석강에 나아가 《대학연의》를 강독하였다.
상이 하교하였다.
"대소 각 유사들이 그렁저렁 날짜만 보내고 맡은 바 직책을 다하려 하지 않는데, 이는 오로지 금방 제수했다가 금방 체직하는 이유 때문이다. 앞으로는 절대로 자리를 옮기지 말아서 그들로 하여금 책임을 지고 일을 수행하도록 해야 하며 육경과 법관의 경우는 더욱 자주 바꿔서는 안 된다. 담당 아문으로 하여금 나의 이 뜻을 알아 삼가 받들어 시행하여 어기는 일이 없게 하며, 만일 시행하다 말다 하는 등 법을 무시하는 일이 있을 때는 법사(法司)에 넘겨 엄중히 처단하게 하라."
상이 하교하였다.
"요즈음 응지소(應旨疏)를 보건대 조익(趙翼)이 죄를 받은 것이 유별나게 무겁다는 점을 대부분 말하고 있으니 채용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해부(該府)로 하여금 문외 출송은 용서해 주도록 하라."
6월 12일 정사
예조 판서 이기조(李基祚), 참판 민응형(閔應亨), 참의 민응협(閔應協), 호조 정랑 이영발(李英發), 예조 좌랑 이성시(李聖時), 장흥고 봉사(長興庫奉事) 유계(兪棨)를 금부에 내렸다. 이 당시 장차 인조 대왕의 부묘례(祔廟禮)를 행하기 위해 예조가 제사(諸司)의 관원을 인솔하고 태묘(太廟)를 수리하면서 열성(列聖)의 신위를 옮겨 행랑 아래 막차(幕次)에다 임시로 모셨는데, 사당 안에 바르는 능화지(綾花紙)를 해사(該司)가 즉시 올리지 않아 일을 미처 끝내지 못했으므로 열성의 신위가 막차에서 밤을 넘기게 되었다. 밤이 깊은 뒤에 예조가 비로소 해관을 죄줄 것을 청하니, 상이 크게 노하여 하교하기를,
"군신 상하가 종묘 사직을 받드는 것 이외에 달리 무슨 일이 있겠는가. 몇 장의 종이를 미처 준비하지 못해 열성의 신위가 행랑 아래 바깥에서 빗속에 밤을 넘기게 되었으니, 두렵고 불안한 내 마음이 과연 어떻겠는가. 감히 따뜻한 방에서 편히 누울 수 없으므로 즉시 행랑 아래로 옮겨 앉은 채로 아침을 기다려 이 두려운 마음을 표시할까 한다. 정원은 해조에 엄중히 당부하여 밤새도록 일을 감독해 완료해서 동틀 무렵에는 도로 사당 안으로 모실 수 있게 하라.
국가의 큰 일은 이보다 중한 것이 없으니, 해조는 의당 일찌감치 잘 살펴 때가 닥쳤을 때 일이 잘못되는 문제가 없도록 했어야 하는데도 밤이 깊은 뒤에야 느긋하게 해관을 죄줄 것을 청하였다. 대소 모든 집사(執事)가 맡은 바 직무를 잘 수행하지 못하는 상황에 대해 내가 누누이 말하였는데 오히려 이와 같은 놀라운 일이 일어났으니, 경계하고 당부했던 뜻이 과연 어디에 있단 말인가. 우선 장흥고의 종이를 담당한 관원과 호조와 예조의 담당 낭관을 모두 잡아다가 추고하고, 예조의 당상도 아울러 무겁게 추고하라."
하고, 추고 전지를 금부에 내려 차등을 두어 논죄하도록 명하였다.
정원이, 대제(大祭)가 바로 앞에 닥친 때에 혹시 옥체가 손상되는 문제가 있을까 염려되어 도로 침전(寢殿)으로 납실 것을 청하니, 답하였다.
"구묘(九廟)의 신령이 편안한 다음에 과인의 몸이 편안할 수 있다. 이제 사당의 신주가 노천에 계시는데 내가 어찌 감히 마음을 놓고 편안히 있을 수 있겠는가."
영의정 김육과 좌의정 이시백이 육경(六卿)과 백사(百司)를 미리 단속하지 못해 태묘의 신위가 행랑에서 밤을 지내게 되었다는 이유로 입궐하여 대죄하니, 답하였다.
"국사가 이렇게 된 것은 일조일석의 일이 아니니, 이 모두 과인이 종묘 사직을 공경히 받들지 못한 소치이다. 경들은 안심하고 대죄하지 말라. 앞으로는 과거의 습성을 답습하지 말고 육경을 통솔하여 각기 맡은 바 직책을 다해 우리 국가를 돕도록 한다면, 어찌 만백성의 다행이 아니겠는가. 경들은 깊이 유념하기 바란다."
정원이 아뢰기를,
"종묘를 수리하는 일은 사체가 지극히 중한데도 제사(諸司)의 관원들이 직접 들어와 일을 보지 않으니, 실로 매우 온당치 못합니다. 앞으로는 종묘를 수리하는 날 예조·호조·공조의 당상과 낭청이 각기 그 소속 각사(各司)를 인솔하고 대내(大內)를 수리할 때의 규례에 따라 직접 나와서 일을 보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청컨대 이로써 법식을 정해 거행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종묘 사직을 개수하는 일은 대내에 비해 한층 더 중하니, 본서(本署)의 제조 한 사람도 직접 나와서 각 해사를 감독하게 하여 정성을 다해 거행할 것이며 이번처럼 불경스럽게 하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정언 조진석(趙晋錫)이 상소하기를,
"현재 천재가 거듭 발생하고 민원이 날로 일어나며, 기강은 더욱더 무너지고 풍속은 차츰 망가지며, 조정은 분열되고 사론은 서로 일치되지 않으니, 오늘날 통곡하고 눈물을 흘릴 만한 국사가 어찌 한두 가지 뿐이겠습니까. 요즈음 보건대 신하들 중에 진언을 한 자가 많이 있어도 전하께서 그것을 채용한 내실이 있다는 말을 듣지 못하여 신은 삼가 전하께서 그저 형식만 숭상하시는 것으로 의심했었습니다. 그러다가 전하께서 민정중(閔鼎重)의 소장으로 인해 특별히 정태제(鄭泰齊)의 귀양살이를 석방하시고, 또 신하들의 말로 인해 특별히 조익의 문외 출송을 용서하셨다는 말을 들었으니, 그와 같은 명이 한번 내려짐에 그 누가 감격하여 떨쳐 일어나 서로 다투어 한 가지 의견이나마 올리고 전하를 위해 하고 싶은 말을 다하려 하지 않겠습니까.
신은 삼가 보건대 전하께서는 효성을 천성적으로 타고나셨고 너그러움과 인자함으로 사물을 다스리시며, 미적지근하고 게으른 생각은 적고 개혁하고 분발하는 뜻이 있으시니, 신은 전하께서 크게 중흥을 이룰 만한 자질을 지닌 것을 압니다. 그리고 날마다 경연에 납시어 여러 방면으로 나라를 다스릴 방도를 찾으시며, 뭇 유사들을 독촉하고 격려하는 것이 간절하고 민생을 돌보고 감싸는 것이 지극하시니, 신은 오늘날 크게 중흥을 이룰 기회가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도 큰 근본이 서지 않고 내면의 공부가 지극하지 않으시어 정령(政令)을 펴는 과정에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고 가려진 사심이 작용함을 면치 못하며, 잘못인 줄 알면서도 고치지 않고 이기는 것을 좋아하고 고집대로 행하는 병이 많이 있으십니다. 대신에 대한 조율을 대론(臺論)이 이미 정지된 뒤에 분간(分揀)089) 하고 유계(兪棨)를 귀양보내라는 명이 죄를 입었다가 일단 풀려난 뒤에 다시 나오기도 했는데, 이미 조율을 한 것이 잘못인 줄 아셨으면 대론이 정지될 때까지 기다릴 게 뭐가 있으며, 일단 함부로 말한 죄를 용서하셨으면 그 사람에 대한 감정 때문에 다시 노여워하실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유계의 일에 대해서는 말을 하는 자가 한층 더 많은데, 이는 다 임금을 사랑하여 허물이 없게 하려는 뜻에서 나온 것임에도 불구하고 죄를 용서해 주시는 은택이 이 사람에게만 미치지 않은 것은 무슨 이유에서입니까. 원컨대 전하께서는 익히 생각하고 헤아려 조처하소서.
내사(內司)의 일에 대해서는 전후에 걸쳐 나온 여러 신하의 말을 하나도 가납하는 뜻이 없으셨으니, 이 또한 대성인의 지극히 공정하고 정대한 덕에 흠이 있지 않겠습니까. 신이 일찍이 수령의 직을 맡고 있을 때에도 이러한 일로 인하여 전하의 마음을 엿본 일이 있는데, 오늘 또한 올바로 진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김제(金堤) 지방에 본디 순천(順天) 사람의 노비로서 내사에 투속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일이 전후에 걸쳐 송사에 부쳐져서 잘잘못이 이미 밝혀졌는데도, 김제 사람은 상언(上言)으로 허위 사실을 날조하기까지 하여 다시 송관(訟官)을 차정해 조사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신은 임실 현감(任實縣監)으로 뜻밖에 송관으로 차정되어 갑을(甲乙)의 문안(文案)과 각자의 원정(原情)을 참고해 보니, 김제 사람이 주인을 배반하고 함부로 내사에 투속한 정상이 불을 보듯 분명하였기 때문에 신은 노비를 순천 사람에게 결급(決給)하고 김제 사람은 주인을 배반한 율로 결단하여 감사에게 보고해 조정에 계문하였더니, 전하께서는 주인을 배반한 죄를 특별히 용서하여 다스리지 말라는 분부를 내리셨습니다.
신은 이 일을 듣고 가슴속에 개탄하는 마음이 없지 않았습니다. 대체로 노비로서 주인을 배반한 것은 그 죄가 강상을 범한 것이니, 만약 다른 일로 인하여 이런 일이 일어났다면 전하께서는 반드시 용서하지 않고 엄하게 다스리셨을 것인데, 유독 이 일에 대해서만은 특별히 용서하여 다스리지 말라는 분부를 내리셨으니 그 이유는 이 사람을 죄준다면 내사에 진고(陳告)하는 길이 막혀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전하께서 이 일이 옳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오히려 그와 같이 하신 것은 사심에 가려진 점이 없지 않아서이니, 성덕(聖德)의 누가 됨이 과연 어떻겠습니까.
신이 알고 있는 일은 이 한 가지 뿐이지만, 팔도 안에 이와 같은 사례가 얼마나 많겠습니까. 전하께서 만약 내사에 진고하는 폐단을 금하지 않는다면 이는 주인을 배반하는 길을 열어놓는 것입니다. 세상에 어찌 백성에게 주인을 배반하라고 가르치고서 능히 그 나라를 다스릴 자가 있겠습니까. 원컨대 전하께서는 많은 사람의 말을 채납하여 대공(大公)의 도를 확충하소서.
전하께서는 즉위하신 이후 나라를 다스리는 도에 대해 강구하지 않은 것이 없으셨으나, 유독 선비를 만들어 내는 방도에는 무슨 시행 조처가 있었다는 말을 듣지 못했습니다. 《소학(小學)》을 권장하여 강독시키는 법이 온 나라에 행해지기는 하나 열읍에는 태만히 하는 폐단이 있고 유생은 성취하는 공이 없으니, 이 한 가지를 가지고 선비를 만들어내는 방도를 얻었다고 한다면 되겠습니까.
과거에 두 신하를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자는 소장은 참으로 현인을 높이고 도를 중히 여기는 뜻에서 나왔으니, 아무리 그것이 중대한 예라서 함부로 거행하지 못하고 그들이 한 말을 섣불리 따라줄 수는 없더라도 현인을 존중하는 도리로서는 마땅히 그들을 너그럽게 포용하는 뜻을 보였어야 합니다. 그런데 북유(北儒)의 소장에 대해 도리어 준엄한 비답을 내려 그 죄는 주벌을 면치 못할 것이라는 등의 말씀으로 호되게 책망하기까지 하셨으며, 또 정원으로 하여금 다시는 이러한 소장을 받지 말게 하셨습니다. 그런 뒤로는 사기(士氣)가 꺾이고 원근의 사람들이 다 두려워서 감히 다시는 말을 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옛날 역사를 살펴 볼 때 형벌로 선비를 대하고서도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경우는 보지 못했습니다. 군주의 한 마디 말은 실로 나라의 흥망에 관계가 있는 법이니, 어찌 지나간 과거의 일이라 하여 뉘우치고 조심하는 도를 생각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군주의 직책은 사정(邪正)을 가려내는 일보다 더 큰 것이 없는데, 색목(色目)이 한번 갈라진 뒤로는 각기 주장을 내세우고 서로 비난하여 군주로 하여금 시비의 판단을 흐리게 하고 취사하는 기준을 어둡게 만들었으니, 만약 임금의 마음이 거울처럼 맑고 물처럼 잔잔하여 슬기롭게 간파하지 못한다면 어찌 능히 정사를 시행하는 과정에서 가려낼 수 있겠습니까. 신은 요즘 보건대 전하께서는 공평하고 정대한 마음으로 편당을 짓고 반복무상한 풍조를 미워하신 나머지 내심 화평을 유지하여 두 쪽을 다 보전하려고 하십니다. 그러나 모든 일의 시비는 사리의 곡직에 있는 것인데, 그 시비와 곡직이 어떠한가를 먼저 가려낼 것은 생각지 않고 오로지 서로를 조정하는 것만을 위주로 한다면, 그 조정하는 것은 도리어 시끄러움을 일으키는 단서만 만들어내는 것이니, 이는 버릇을 바로잡고 풍습을 후하게 하며 뿌리를 뽑고 원천을 막는 도가 아닙니다. 사람이란 사실 진실한 것 같지만 거짓된 자가 있고 말도 옳은 것 같지만 그른 것이 있으니, 이는 군주로서 더욱 살피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원컨대 전하께서는 밝게 듣고 두루 살피며 사람을 제대로 알아 국사를 잘 맡기소서.
장법(贓法)이 행해지지 않은 지 오래되어 요즈음 염치의 도는 없고 탐욕을 부리는 풍조가 날로 성해지고 있습니다. 그 죄는 엄한 법으로 다스리더라도 오히려 쉽게 범하여 경계할 줄을 모를 것인데, 하물며 법을 쓰는 것이 일관성이 없어 처음에는 철저히 하다가 나중에는 해이해지고 마니, 그러고서 어찌 사람들이 경계하고 두려워하길 바라겠습니까. 즉위하신 초기에 어사를 나누어 보내 팔도를 염찰(廉察)하여 불법을 자행한 정도가 심한 자는 사형에 처하고 나머지는 다 그 정도에 따라 도형(徒刑)과 유형(流刑)에 처하였으니, 전하께서 장죄를 다스리신 것이 엄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얼마 되지 않아 도로 그들을 풀어주라는 명이 나오고 염찰하는 일이 다시는 없었으니, 어찌하여 전하께서는 시작은 있고 끝은 없으십니까. 혹시 염찰을 무익한 일로 보아 보낼 필요가 없다고 해서 그러신 것은 아닙니까. 신은 호남 고을에 있을 때 어사의 행차를 두 번 보았는데, 처음에 어사가 나온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경계하고 조심하는 마음이 저절로 평소보다 더 들어 사적이며 부정한 생각을 감히 하지 못하다가 어사가 돌아간 뒤에는 처음 그 마음이 지켜지지 않고 시일이 오래갈수록 더욱 해이해졌습니다. 신의 한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미루어 헤아려보면 어찌 크게 차이가 있겠습니까. 신의 생각으로는 어사를 자주 보내 염찰하는 것은 도움이 되고 별다른 해는 없다고 봅니다. 민생의 고락은 참으로 수령에게 달렸으니, 삼가 원컨대 전하께서는 어사를 자주 보내 그 상벌을 밝혀 그들로 하여금 더 힘쓰고 경계할 줄을 알게 하소서.
사대부의 기풍이 날로 비루하고 낮은 데로 흘러가 조정의 관리들이 유순하고 완곡하게 말하는 것이 풍속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소장에는 덕을 칭송하는 말이 많고 연석(筵席)에서는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하는 말이 적어, 말이 금기를 범하는 것을 위태롭게 생각하고 일이 흐리멍덩하여 시비가 분명치 않은 것을 잘한 것이라 여기며, 임금의 잘못을 바로잡고 자기 직책을 다하는 도리는 생각하지 않고 제 몸이 안전하고 녹을 보전할 계책만 일삼고 있으니, 참으로 한탄스럽습니다. 지난날 혼조 때 온 나라가 다 말을 하는 것을 경계로 삼아 부형이 자제를 가르치는 것이나 벗끼리 서로 권하는 일이 모두 입을 다무는 것을 좋은 계책으로 삼다가 끝내는 제 몸이 죽고 나라가 망하여 구제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고 말았는데, 불행하게도 오늘날 사대부의 풍습이 그와 비슷합니다. 그런데 이는 다름이 아니라 위에서 그들을 인도하는 것이 그렇게 하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말을 하라고 하고서 그 말을 채용하지 않으며, 더 나아가 채용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또 죄까지 주고 있으니, 어느 누가 천둥 벼락과 서슬이 시퍼런 도끼를 범하여 제 목숨을 돌아보지 않고 아무런 소용도 없는 말을 올리려 하겠습니까. 원컨대 전하께서는 마음을 비우고서 바른말을 기쁘게 들으시고 곧은 선비를 죄주지 마소서.
신이 삼가 보건대 비망기(備忘記)에 육경(六卿)과 법관(法官)을 자주 바꾸게 하지 말라는 분부가 있었으니, 이는 실로 태평 정치를 일으킬 중요한 일이므로 성상께서 신하들을 권장하고 진작시키시는 성대한 뜻을 엿볼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관직이란 반드시 오래 맡겨야 성취가 있는 것은 아니고 문제는 적임자를 얻는 데에 달렸습니다. 만약 그 적임자가 아니라면 오래 맡기면 맡길수록 일에 해로운 법이니, 전하께서는 먼저 육조의 장관을 잘 가려 위임하여 성공을 책임지우소서.
그리고 신은 말하는 책임이 있는 중한 자리를 결코 감당할 수 없습니다. 바라건대 빨리 체직을 허락하여 관작을 중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답하기를,
"그대가 임금을 사랑하여 진언한 정성은 매우 가상하다. 어찌 유념하지 않겠는가. 모든 관원을 오래 유임시키는 문제는 그대의 말이 사실 맞는 말이며, 만약 적임자가 아니면서도 그 관직에 오래 있는 경우가 있더라도 들은 대로 탄핵을 하는 그대들과 같은 이목의 관원이 따로 있으니, 내가 무엇을 걱정하겠는가. 관직을 오래 맡겨 실효를 거두는 것은 반드시 대관으로부터 시작해야 하니, 그대 또한 사직을 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소장의 말은 내가 다 가납하지만 다만 종사(從祀)에 관한 문제를 은연중 제기한 것은 내가 받아들일 수 없으며, 따라서 매우 애석하게 여긴다."
하였다.
정언 조진석(趙晋錫)이 인피하기를,
"신이 함부로 소장 하나를 올린 것으로 인해 특별히 칭찬해 주셨습니다마는, 다만 종사 문제를 은연중 제기하였다고 분부하시어 신이 성상의 뜻을 시험해 보려는 생각이 있는 것처럼 여기셨으니, 신은 실로 두려운 나머지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소장 안에 거론한 북유(北儒)의 일은 그저 전하에게 선비를 관대하게 대하고 기색을 매정하게 드러내지 마시길 바란 것일 뿐입니다. 어찌 감히 이로 인해 종사 문제를 제기할 뜻이 있었겠습니까. 신하가 어떤 일을 하고서 본의 아니게 군주로 하여금 의심하게 했다면 사실 불충의 죄를 면하기 어려우니, 신의 관직을 체차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그대의 말이 본의를 정확히 전달하지 못하고 내가 미처 자세히 살피지 못했는데, 이제는 의심이 다 깨끗이 풀렸으니 무슨 문제될 것이 있는가. 그대는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6월 13일 무오
홍문록(弘文錄)에 권점(圈點)을 찍었는데, 8점을 받은 자는 이응시(李應蓍)·이경휘(李慶徽)·김시진(金始振)·홍중보(洪重普)·신최(申最)·이단상(李端相)이고, 7점을 받은 자는 장응일(張應一)·이석(李晳)·이재(李梓)·정언벽(丁彦璧)·오정위(吳挺緯)·이정기(李廷夔)·민정중(閔鼎重)이었다.
6월 14일 기미
상이 하교하기를,
"선왕(先王)의 묘정(廟庭)에 배향할 신하들을 이미 의정(議定)하긴 하였으나, 한편 생각하면 지난날 어지러움을 다스려 반정할 당시 두세 명의 무장(武將)의 공이 어찌 한두 원훈(元勳)에 미치지 못했겠는가. 그런데도 모두 참여되지 못했으니, 내 마음에 미안할 뿐만 아니라 하늘에 계시는 선왕의 혼령도 반드시 섭섭해 하실 것이다. 마땅히 변통하는 길이 있어야겠으니 해조로 하여금 다시 여러 대신과 의논하게 하여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하니, 영중추부사 이경여(李敬輿)가 헌의하기를,
"평성 부원군(平城府院君) 신경진(申景禛)은 거사를 계획할 당시 맨 먼저 큰 계책을 정하여 공이 그와 견줄 만한 사람이 없고, 완풍 부원군(完豊府院君) 이서(李曙) 또한 일을 성사시킨 공로가 어찌 경진보다 크게 못하겠습니까. 다만 성명께서 여러 의논을 물어서 취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살펴 정하시기에 달렸습니다."
하고, 영의정 김육과 좌의정 이시백은 헌의하기를,
"당초 의정할 때 두 신하는 점수가 많지 않은 이유로 인해 참여되지 못하였으나 바깥의 말들이 다 성조(聖朝)의 흠전(欠典)이라고 거론하였는데, 이번에 성상의 분부가 이와 같아 실로 뭇사람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였습니다. 두 신하를 다 배향하는 열에 넣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는데, 김육과 시백의 헌의대로 따를 것을 명하였다.
상이 하교하기를,
"부묘(祔廟)하는 날 제사를 모시는 백관은 무슨 모양의 복색을 착용할 것인가?"
하니, 예조가 아뢰기를,
"방금 《오례의》의 부묘의(祔廟儀)를 상고해 보니, 전하께서는 면복(冕服)을 갖추고 문무 백관은 조복(朝服)을 갖추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마는, 난리를 겪은 뒤로 사대부의 집에 가지고 있던 조복 등 물품이 전부 없어지고 부묘할 날짜가 멀지 않기 때문에 저번에 임시 방편으로 흑단령(黑團領)을 착용하고 예를 행하기로 이미 의정하였습니다. 이제 성상의 분부를 받들었으니 사실 그대로 받들어 시행하는 것이 마땅하지만 사세가 이처럼 급박합니다. 의복을 준비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양관(梁冠)은 더욱 갑자기 준비하기 어렵습니다."
하자, 하교하기를,
"막중한 대례(大禮)이므로 평상복으로 구차하게 행할 수는 없는데, 본조는 어찌하여 미리 그 대책을 강구하여 아뢰지 않았는가. 이 또한 그때그때 미봉하여 넘어가는 폐단 가운데 하나이다. 양관은 풀먹인 종이에다 금물을 바르면 날짜에 맞춰 착용할 수 있을 것이다. 정원과 옥당의 한림(翰林)·주서(注書) 등 관원이 착용할 것은 특별히 상방(尙方)으로 하여금 만들어 지급하게 하라. 패옥(珮玉)은 사옹원으로 하여금 저축해 둔 미포(米布)를 내어 각 1부(部)씩 구워 만들어 백관에게 나누어 주게 하되, 도성에 있는 장수(匠手)만 사역하고 외방에 거주하는 자를 불러모아 폐단이 백성에게 미치는 일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조복으로 예를 행하라는 분부가 특별히 부묘례를 행할 날짜에 임박하여 내렸으므로 사세를 참작해 볼 때 변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과거 선조(宣祖)와 인조(仁祖) 두 조정에서 일반적으로 대례를 행할 때, 4품 이상은 조복, 5품 이하는 흑단령, 근시(近侍)로서 참하(參下) 이상은 모두 조복을 착용하였으니, 이에 따라 거행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6월 15일 경신
인정전(仁政殿)에서 관학 유생(館學儒生)에 대한 강경시(講經試)를 보여 수석을 차지한 생원 권론(權碖)에게는 직부회시(直赴會試) 자격을 주고, 그 다음 차석에게는 2분(分)을 주었으며, 【제술시(製述試)에서 삼하(三下)는 1분이 되고 삼중(三中)은 2분이 되어 강경시의 통(通)·약(略)과 그 분(分)의 수효가 같은데 식년(式年) 강경 초시(講經初試)에 응시하는 것을 허락하였으며, 이것을 은사획(恩賜畵)이라 부른다.】 그 다음은 지필묵(紙筆墨)을 차등을 두어 하사하였다.
6월 16일 신유
신익전(申翊全)을 개성부 유수로, 홍처량(洪處亮)을 이조 정랑으로, 이응시(李應蓍)를 교리로, 홍중보(洪重普)를 부수찬으로, 김휘(金徽)를 이조 좌랑으로 삼았다.
상이 하교하였다.
"선왕께서 인평 대군(麟坪大君) 이요(李㴭)의 아들 이유(李栯)를 보살펴 길러 늘 슬하에다 두었으며, 일찍이 분부하시기를 ‘이 아이가 장성하여 혼인을 할 때가 되면 봉작(封爵)할 연한이 차지 않았더라도 특별히 작호를 주어 은총을 드러내도록 하라.’ 하셨다. 이 분부가 귓가에 쟁쟁한데 지금 내가 어찌 감히 잊을 수 있겠는가. 그리하여 나는 그를 궁중에서 계속 기르고 있으니, 선왕을 생각할 때 슬픈 감회를 어찌 말로 형용하겠는가. 특별히 해조로 하여금 일반적인 격식을 무시하고 이번 대정(大政)에서 적당한 관직을 봉해 주도록 하라."
6월 17일 임술
제주 목사(濟州牧使) 이원진(李元鎭)과 삭녕 군수(朔寧郡守) 이회(李瀤)가 사조하니, 면유하여 내보냈다.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인견했던 수령 중에 중하(中下)에 매겨진 자를 일찍이 본원으로 하여금 품의하여 조처하게 하였는데, 이번에 각도의 전최(殿最) 이후 본원은 어찌하여 거행하지 않는가."
하자, 정원이 비로소 박천 군수(博川郡守) 임국한(任國翰)과 강진 현감(康津縣監) 이유원(李惟源)을 초계(抄啓)하니, 【사조(辭朝)할 당시 인견했던 수령 중에 중하에 매겨진 자들이다.】 모두 추고할 것을 명하였다.
좌의정 이시백이 상차하여 완성 부원군(完城府院君) 최명길(崔鳴吉)도 배향하는 줄에 넣자고 청하자, 대신에게 수의할 것을 명하였다. 영중추부사 이경여는 헌의하기를,
"이 일은 문제가 중대하므로 사리상 신중히 하는 것이 마땅하니, 많은 사람의 의견을 널리 채집하여 취사 여부를 정하소서."
하고, 영의정 김육은 헌의하기를,
"두 무신(武臣)을 나중에 함께 넣은 것은 처음에 특별히 분부를 내리시고 또한 공론이 함께 허락한 일이지만, 이제 차자의 말로 인하여 또다시 추가한다면 그와 똑같은 공이 있는 사람이 어느 누가 위로 임금의 심려를 끼쳐가며 소청하려 하지 않겠습니까. 나라의 사체로 보아 섣불리 시행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영돈녕부사 김상헌에게 수의할 것을 명하였으나 상헌이 병이 들어 헌의하지 못하자, 김육의 헌의대로 따를 것을 명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태묘에 배향하는 일은 이 얼마나 큰 예인가. 최명길은 선왕의 총애를 받아 국사를 헌신적으로 도운 공로는 있지만 병자년 이후로는 선류(善類)를 해치고 국법을 어지럽혀 사론(士論)에 죄를 얻은 지 오래이다. 그는 공적만을 논하는 무장(武將)의 경우와는 다른데 시백은 공론을 돌아보지 않고 감히 이런 말을 꺼냈으니, 식견이 매우 밝지 못한 소치로서 애석한 일이다.
6월 18일 계해
상이 하교하였다.
"부묘례를 마치고 환궁할 때 고취(鼓吹)와 헌가(軒架) 등 악기를 모두 진열하되 울리지는 말라."
상이 하교하였다.
"부묘례를 마치고 환궁할 때 고취(鼓吹)와 헌가(軒架) 등 악기를 모두 진열하되 울리지는 말라."
상이 주강에 나아가 《서전》 태갑(太甲)을 강독하였다.
6월 19일 갑자
평안도 안주(安州) 등 24개 고을에 홍수로 인해 빠져 죽은 사람이 많았는데, 특별히 휼전(恤典)을 베풀 것을 명하였다.
상이 주강에 나아가 《서전》 태갑을 강독하였다. 강독이 끝난 뒤에 상이 병조 판서 구인후(具仁垕)에게 이르기를,
"국가가 무비(武備)를 아예 잊고 있으니 한탄스럽기 그지없다. 요즈음 무사들이 시사(試射)할 때 화살 하나만 맞으면 이것으로 책임을 때우고 물러가니, 참으로 한심하다."
하니, 인후가 아뢰기를,
"그들은 점수가 없는 것만 면하기를 바라기 때문에 이렇게 된 것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요즈음 무사들이 전혀 무예를 익히지 않는다. 경은 영수로 있으니 몸소 솔선수범하여 그들을 권장하는 것이 좋겠다. 지금 시대는 활쏘기로 그 사람의 덕을 살펴보는 것은 중요치 않고 기사(騎射)를 잘하는 것만 취하면 되는데, 오늘날의 무사는 크고 긴 옷소매 차림으로 활쏘는 자세만 일삼고 있다. 그리고 과녁판은 실용에 도움이 되지 않으니 오로지 기사를 익히게 하는 것이 좋겠다. 기사의 법은 가까운 데서 쏘지 말고 반드시 기추(騎蒭)를 멀리 세워놓고서 강한 활로 쏘게 해야 한다. 앞으로는 시사하는 날 평소에 기예를 익히지 않은 자에 대해서는 특별히 벌을 주어 그 자를 깨우치게 하라."
하였다.
6월 20일 을축
도목정(都目政)을 실시하여 인평 대군의 아들 이유(李栯)를 복녕군(福寧君)으로 삼고, 고 영의정 이원익(李元翼)에게 문충(文忠)의 시호를 내렸으며, 정언벽(丁彦璧)을 부수찬으로, 이후(李垕)를 문학으로, 채충원(蔡忠元)을 교리로, 오정위(吳挺緯)를 수찬으로, 홍중보(洪重普)를 지평으로 삼았다.
헌부가 아뢰기를,
"내수사가 이제까지 그대로 존속되고 있는 것은 실로 성조(聖朝)의 아름다운 일이 아닙니다마는, 요즈음 듣건대 원통함을 품은 백성 중에 간혹 신원된 자가 있다 하니, 이는 다행한 일입니다. 그런데 신들이 지난번 본부(本府)에 개좌(開坐)한 날, 한 사람이 와서 소청하기를 ‘해묵은 억울한 사정을 이제 다행히 풀기는 하였으나, 난폭한 반노(叛奴)가 내수사의 관리에게 부탁하여 선두안(宣頭案)에 【내수사의 노비를 기록한 문서를 선두안이라 한다.】 그대로 실어놓고 있다.’ 하였습니다. 이 송사의 처결에 대한 시비는 신들이 관여하여 알 바가 아니긴 하나, 다만 생각건대 번신(藩臣)090) 과 유사가 이미 품의하여 처결하였으면 내수사의 입장으로서는 그대로 받들어 행하면 그만일 것인데, 이제 다시 문안을 조사하여 조정이 이미 처결한 일을 참여하여 새로 처결하였으니, 나라의 사체를 크게 손상했다고 하겠습니다. 청컨대 앞으로는 한결같이 조정이 처결한 명령대로 따르게 하여 내수사가 거부하는 폐단을 엄중히 막으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 일은 지금 처음으로 한 것이 아니다. 그들이 어찌 감히 마음대로 거부하겠는가. 염려하지 말라."
하였다가, 여러 번 아뢴 뒤에 따랐다.
좌의정 이시백이 아뢰기를,
"신은 종묘서 도제조(宗廟署都提調)의 임무를 겸하여 맡아 이번 춘·하등(春夏等)의 포폄 때 본서(本署)의 영(令) 이후천(李後天), 직장(直長) 이도(李蒤), 부봉사(副奉事) 심윤(沈玧)을 상고(上考)로 감정(勘定)하여 보냈습니다. 그런데 예조가, 전일 태묘(太廟)를 수리할 때에 재직했던 본서의 관원들은 마땅히 벌칙이 있어야 한다 하고 이들을 모두 제멋대로 중하고(中下考)에다 두었으니, 이는 참으로 과거에 없던 일입니다. 수리하는 일은 다른 관사(官司)의 담당하는 사람이 따로 있는데 본서의 수직하는 관리가 무슨 관계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번에 예조는 체통이 중한 것을 생각지 않고 임의대로 벌칙을 시행하였으니, 예조 판서 이기조(李基祚)를 죄를 줄 것을 명하소서."
하니, 따랐다.
예조 참판 민응형(閔應亨)이 응지하여 상소하였는데, 그 소에 대략 아뢰기를,
"아, 동서로 당이 갈린 것은 참으로 망국의 화가 되었는데, 이제 또 하나의 당이 생겨나 서로 명목을 내걸어서 겉으로는 친밀한 것처럼 보이지만 속으로는 각기 딴 마음을 품고 있습니다. 이는 마치 한 집에 있는 사람이 싸우는데도 그 곁에 있는 사람이 그들을 마을 사람처럼 보아 황급해 하는 뜻은 조금도 없이 구경만 하며 속으로 웃고 있는 것과 다름없으니, 오늘날의 일을 어찌 한심하다고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삼가 원컨대 전하께서는 먼저 나라를 다스리는 준칙을 세워 사심에 따라 좋아하고 미워하는 일을 하지 마시고 편당을 짓지 말으시어 조정부터 바로잡으소서.
오늘날 개혁할 방도는 부세를 경감하고 비용을 절약하는 것보다 급한 것이 없습니다. 안으로 도성에서부터 밖으로 주군(州郡)에 이르기까지, 위로 궁궐에서부터 아래로 서리에 이르기까지 명목이 없는 비용으로서 경감하고 절약할 만한 것들이 반드시 한두 가지가 아닐 것이며, 각사 공물의 경우에도 용도에는 보탬이 없고 민폐만 끼치는 것이 많으니, 모두 바로잡아 빠짐없이 혁파한다면 위에서 덜어내 아래를 보태주는 격이어서 민력이 조금이나마 여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호서(湖西)는 공물이 삼남(三南) 가운데서 가장 무겁고 한 도 안에서도 좌우도(左右道)가 균형이 서로 크게 맞지 않아 역을 고르게 하는 계책을 강구하는 중인데 조정의 의논이 서로 틀리고 성상도 어렵게 여기시니, 신은 삼가 한탄하는 바입니다. 원컨대 전하께서는 묘당으로 하여금 상의하여 공안(貢案)을 개정하게 함으로써, 어느 한 쪽에서만 힘겨워 하는 원성이 없게 하소서.
아, 도성은 왕화(王化)의 근본인데 사치가 여느 곳보다 더 심하여 상하 귀천이 서로 시새워 본받아 시정(市井)의 천인이 비단옷을 입고 서리의 천첩(賤妾)이 주옥으로 몸을 단장하는데, 이는 모두 위에 있는 사람 자신이 먼저 검소한 덕을 지녀 뭇 아랫사람을 거느리지 못한 소치입니다. 삼가 원컨대 전하께서는 스스로 무명옷과 비단갓을 착용했던 위 문공(衛文公)의 검소함을 밝히시고 또 공주를 시집보낼 때 수레를 구리로 장식한 당 선종(唐宣宗)의 제도를 따르시어 국혼(國婚)에 관한 물품들을 간략하게 하소서.
신은 듣건대, 정사와 형벌은 군주의 큰 권한이지만 조금이라도 중도를 잃게 되면 인심이 승복하지 않아 나라의 정사에 해롭기가 이루 말할 수 없다고 합니다. 전하께서는 일을 조처할 때 독단하여 임의대로 하시는 병이 있고, 사람들을 대할 때 억측하여 한 쪽에 집착하시는 하자가 있습니다. 그리하여 내사와 궁가에 관계되는 일은 간하는 말을 물 흐르듯 받아들이는 미덕이 없고 고의성이 없는 과실범까지도 모두 구속되고 유배되는 벌을 받게 하여 호령과 형상(刑賞)이 공론과 맞지 않으시니, 신은 삼가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상벌과 포폄은 기준이 다르게 해서는 안 되니, 전하께서는 유념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전하께서는 마음을 다스리는 공이 오히려 미진한 점이 있으시어 공(公)이 사를 이기지 못하고 시(是)가 비를 이기지 못하기 때문에, 내사와 궁척(宮戚)의 일에 대해 한편으로 쏠리는 사심을 면치 못하십니다. 또 지방의 교활한 백성이 남의 전답을 빼앗아 내사에 바친 것은 죄를 주지 않고 용서하여 받아들이며, 벼슬이 높은 훈척(勳戚)이 남의 노비를 빼앗은 일이 해조에 송사를 당하고 대론(臺論)이 나오기까지 하였는데도 사실을 더 조사하라 하셨으니, 전하께서 처심하시는 공(公)이 이미 사를 이기지 못하고 처사하시는 시(是)가 또 비를 이기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니 무엇으로 아랫사람이 사를 하고 비를 하는 행위를 금하겠습니까. 삼가 전하께서는 학문을 힘쓰되 바른 마음을 보존하는 것을 근본으로 삼고 항상 정밀하고 전일하고 사심을 이기고 예를 복구하는 노력을 경주하소서."
하니, 상이 가납하고 그 소를 비변사에 내렸다. 비변사가 복계하기를,
"호서의 공물을 변통하는 조처는 실로 조금이라도 늦출 수 없으니, 다시 더 상의하여 신중히 선처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 일은 참으로 쉽게 결정할 수 없는 점이 있다. 한 도내에서도 그 제도를 편하게 여기는 자는 적고 불편하게 여기는 자가 많으며, 서울 각사(各司)의 공물 주인의 경우는 더욱더 변경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나중에 신중히 선처하는 과정에 이와 같은 장애 요소가 없도록 하라."
하였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호서의 백성에게만 부역이 편중되어 이를 변통하여 부역을 고르게 하는 조처를 시급히 하지 않으면 안 되겠는데, 어떤 사람은 세 말씩 쌀을 거두어 한 도 공물의 역을 대신하면 민력이 조금 풀릴 것이라고 하지만, 다른 명목의 역이 많이 남아 있어 이중으로 징수하는 폐단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이 두 가지 중에 하나를 선택한다면 대동법(大同法)이 마땅히 선행되어야 할 것인데, 일찍이 이 법을 양호(兩湖)에 병행하려고 했기 때문에 논의가 서로 틀려 쉽게 합의되지 않았습니다. 이번에 한 도에만 시행한다면 이론이 없을 듯하니, 나중에 직접 뵙고 품의하여 결정하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이미 역을 고르게 하여 백성을 편하게 한다고 말한다면 내외의 백성이 다 같은 입장이니, 서울 각사의 사주인(私主人)들이 원통해 하는 폐단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
승지를 보내 전옥서(典獄署)에서 죄수를 사열하고 죄가 가벼운 자는 석방하였다.
6월 21일 병인
의주 부윤 강유(姜瑜)가 계문(啓聞)하여, 화살대와 서책을 보내 무사와 유생으로 하여금 활쏘기를 익히고 학문을 강론하게 함으로써 문무를 권장하는 뜻을 보일 것을 청하니, 하교하였다.
"이는 조정이 마땅히 권장하고 수령이 우선적으로 힘써야 할 일이긴 하나, 시세가 곤란하여 뜻대로 할 수가 없는데, 하물며 의주 지방이야 어찌 하겠는가. 화살대를 보내는 것은 남이 들을 때 곤란한 점이 있을 듯하니, 아직 내려보내지 말고 서책은 충분하게 찍어 보내주도록 하라."
6월 22일 정묘
병조 참의 안헌징(安獻徵)이 정심(正心)·무학(懋學)·경천(敬天)·휼민(恤民)·용현(用賢)·종간(從諫)·숭검(崇儉)·신상(愼賞)·휼형(恤刑)·유비(有備) 등 열 가지 잠(箴)을 올리니, 상이 가납하고 특별히 호피(虎皮)를 하사하였다.
우승지 오정일(吳挺一)이 아뢰기를,
"삼가 듣건대 역대 임금들을 부묘할 때 다 악장(樂章)이 있었다 하고, 아조 명신들의 문집에도 그 글이 많이 실려 있으니, 이로 미루어 보면 부묘하는 날에 악장이 있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청컨대 예관으로 하여금 근거로 삼을 만한 글을 널리 상고해 대신에게 수의하여 품지(稟旨)해서 정하게 함으로써 막중한 대례로 하여금 흠결된 예식이 없도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영의정 김육과 좌의정 이시백이 헌의하기를,
"옛날 제왕들은 모두 종묘 악장이 있어 춘하 추동 사철의 종묘 제향 때 그 악을 연주하여 제사를 지냈습니다. 그러므로 은(殷)나라는 성탕(成湯)과 고종(高宗)을 제사지내는 시가 있고, 주(周)나라는 태왕(太王)·문왕(文王)·무왕(武王)·성왕(成王)·강왕(康王)을 제사지내는 시가 있는데, 삼대(三代)의 예로서는 이외에 더 들어본 것이 없습니다. 양한(兩漢)091) 의 제도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선제(宣帝) 때 문무(文武)의 묘악을 논의한 것을 보면 한나라 때도 있었으며, 당나라는 고조(高祖)에서부터 소종(昭宗)까지 다 악장이 있었습니다. 우리 나라는 《오례의(五禮儀)》에 희문(熙文)·소무(昭武) 등의 악장이 있는데, 그 악장들을 가지고 보태평(保太平)과 정대업(定大業 각 11성(聲)을 삼고 있으며, 보태평은 초헌(初獻)에 연주하고 정대업은 아헌(亞獻)과 종헌(終獻)에 연주합니다. 그 시는 다 네 왕092) 과 태조의 공덕을 칭송하는 것으로 종묘와 영녕전(永寧殿)에 연주하며, 조종의 공덕을 노래하고 읊어 흥을 돋굼으로써 그 공덕을 자손 만대에까지 전하는 것이지만 각묘(各廟)의 악장은 없습니다. 다만 대왕(大王)과 왕비의 존호를 올릴 때 악장이 있는데 이는 제사에 쓰는 악장이 아닙니다. 선묘조(宣廟朝)에 중광(重光) 악장이 있고 인목 왕후(仁穆王后)의 존호를 올릴 때도 악장이 있어 그 악장이 다 등록(謄錄)에 실려 있습니다마는, 기타의 등록에는 모두 악장이 없습니다. 신들의 생각에는 아조의 예악은 옛날의 제도를 따르지 않은 듯합니다.
근대 사신(詞臣)들의 문집을 신들이 전부 보지는 못했습니다마는, 고 해평 부원군(海平府院君) 윤근수(尹根壽)의 문집에 선묘조 악장이 있었습니다. 어떤 자는 이것이 곧 중광 악장이라 했는데, 그 당시 윤근수와 이호민(李好閔)이 다 악장을 지어 올렸으며 호민이 지은 것을 채택하여 썼기 때문에 그 악장이 정대업 11성의 아래에 실려 그것을 제사에 썼으니, 이는 존호를 올리는 일로 인해 묘악으로 삼은 것입니다. 고 상신(相臣) 이정귀(李廷龜)의 문집에는 광해군이 생모(生母)를 추존하는 악장이 있고 또 폐비(廢妃)093) 악장이 있었는데 이는 혼조 때의 일입니다. 선묘조에 예조 판서 황정욱(黃廷彧)이 건의하기를 ‘종묘에 제향하는 악장은 국초에 사신(詞臣)이 지은 것만 가지고 역대 임금들의 신위에 연주하고 있는데, 그 행사와 업적이 각기 달라 서로 맞지 않으므로 혼령을 강림하게 할 수 없습니다. 1실(室)마다 각각 한 악장을 지어 혼령을 편안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선조께서 신하들에게 미처 수의하지 못하셨으니, 이는 한 문제(漢文帝)가 가의(賈誼)의 말을 미처 따르지 못한 경우와 같습니다.
이와 같은 큰 예는 어찌 쉽게 고칠 수 있겠습니까. 아조는 태조 이하 임금 가운데 덕은 세종과 성종보다 높은 분이 없고 공은 세조와 중종보다 큰 분이 없으나 따로 악장이 있다는 말을 듣지 못했고 다만 보태평과 정대업으로 제향에 연주하고 있으니, 이번 부묘하는 예에 악장을 지어 쓴다는 것은 예에 합당하다고 볼 수 없습니다."
하니, 헌의대로 따를 것을 명하였다.
책례 도감(冊禮都監)이 아뢰기를,
"계해년과 무인년의 전후 책례 등록을 상고해 보니, 중전(中殿)의 법복(法服)인 적의(翟衣)와 석(舃)·말(襪)을 계해년에는 흑색을 쓰고 무인년에는 홍색을 썼는데, 이번에는 무슨 색을 써야겠습니까. 청컨대 상의원으로 하여금 미리 품의해서 만들어 곤란을 겪는 일이 없도록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전례는 대홍색(大紅色)을 썼다."
하였다.
책례 도감이 아뢰기를,
"인열 왕후(仁烈王后)094) 의 책례 등록을 상고해 보니, 책보(冊寶)를 은에다가 도금한 것을 썼으니 이번 중전 책례 때의 책보도 전례대로 주조해야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지난번 휘호(徽號) 책보(冊寶)에도 다 황동(黃銅)을 썼는데, 어찌 감히 그와 다르게 할 수 있겠는가. 이번에도 황동으로 주조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6월 24일 기사
예조 판서 이기조(李基祚)가 파직되었다. 기조가 태묘의 수리를 태만히 하였다는 벌로 탄핵을 받은 지가 오래되지 않은데다 또 종묘서 관리들의 전최(殿最)를 제 마음대로 행한 일로 인하여 상신(相臣)이 죄를 주자고 청하였다. 부묘 때 친제(親祭)의 찬례(贊禮)는 종백(宗伯)095) 이 마땅히 행해야 하는데 기조가 감히 마음을 편히 갖지 못해 오랫동안 직무를 보지 않자, 부묘 도감 도제조 김육이 기조의 관직을 파면하고 빨리 해조로 하여금 종백을 차출하게 하여 대례를 완전하게 할 것을 청하니, 따랐다.
상이 하교하였다.
"종묘서의 관원들에 대한 예조의 전최는 모두 시행하지 말라."
6월 25일 경오
함경도 안변(安邊) 등 고을에 큰물이 졌다.
상이 하교하기를,
"부묘하는 날에 왕후의 신연(神輦)이 태묘 문밖에 이르러 소여(小轝)로 바꿔 타고 묘문(廟門)의 악차(幄次)에 들어가는 것으로 해조의 의주(儀注) 절목에 되어 있으나, 다시 생각해 보면 세자는 궐문 밖에 이르러 연에서 내려 교자(轎子)를 타고 들어가지만 빈(嬪)은 소교(小轎)로 바꾸는 법이 없이 그대로 연을 타고 대문 안으로 들어가 비로소 땅에 내린다. 이로 말하면 왕후의 신위는 소여로 바꿔 타는 것이 옳지 않을 듯하니, 다시 의논하여 조처하라."
하였는데, 부묘 도감 도제조 김육이 아뢰기를,
"당초 예조의 의주는 《오례의》를 준용한 것으로서 이제 갑자기 의문을 제기하여 고칠 수는 없습니다. 종묘의 대문 안은 열성의 신위가 계신 곳과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으며, 게다가 영사전(永思殿)의 신위도 연에서 내려 들어가 신문(神門) 밖의 악차에 임시로 안치되어 있는데, 서로 바라보이는 지척의 지점에서 연을 타고 지나가는 것은 엄숙하고 존경하는 뜻이 부족할 듯합니다. 이제 세자빈이 여를 타고 대문을 들어가는 것으로 그 예와 견주어 함께 보셨는데 이는 그렇지 않은 듯합니다. 신도(神道)를 존경하고 삼가는 예의는 인도(人道)와 다릅니다. 그에 대한 성현의 가르침이 서책에 있으니, 대궐을 지날 때는 수레에서 내리고 종묘를 지날 때는 종종걸음으로 걷는다는 말로 보더라도 다른 점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당초에 의정한 의주대로 거행하소서."
하니, 따랐다.
6월 26일 신미
상이 숙녕전(肅寧殿)에서 친제(親祭)하였다. 휘호(徽號) 책보(冊寶)를 명덕정순인열왕후(明德貞順仁烈王后)로 올리고 신주를 고쳐 썼다. 옥책문(玉冊文)에 이르기를,
"효자(孝子) 사왕(嗣王) 신(臣) 모(某)는 삼가 재배 계수(再拜稽首)하고 말씀을 올립니다.
인자하신 얼굴이 길이 멀어지니 존경하는 마음을 이길 수 없고, 아름다운 규범을 환히 남겼으니 감히 덕을 선양하는 예를 빠뜨릴 수 있겠습니까. 삼가 휘호를 바쳐 하찮은 정성을 폅니다.
삼가 생각건대 황비(皇妃) 인열 왕후께서는 덕은 우빈(虞嬪)096) 에 짝하고 도는 주사(周姒)097) 와 어울릴 만하며, 어지러움을 다스려 정도로 돌리는 때를 당하여 면밀히 신묘한 공을 도왔고, 왕비가 되어 높은 자리에 앉아서는 크게 음(陰)의 교화를 펴셨으니, 마땅히 큰 복을 누리실 터인데 어진 자는 장수한다는 말이 마침내 헛말이 되었습니다.
생각건대 하찮은 이 몸이 왕위를 이은 것은 오로지 선조의 신령이 도우신 은덕입니다. 효도는 끝까지 봉양함을 미치지 못했으니, 온 나라의 부유함을 지녔으나 어찌 마음이 편하겠습니까. 애통함은 그 큰 상처가 채 낫지 않았는데 삼년의 복제가 이미 끝났습니다. 드디어 부향(祔饗)하는 날이 이르러 휘호를 더 올리는 예식을 거행하게 되었습니다. 호호망망하여 무엇이라 이름할 수 없으니 어찌 능히 완벽하게 본뜰 수 있겠습니까마는, 그 덕을 보답하려면 인정과 예문에 미진함이 없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에 떳떳한 법에 따라 문채(文采)를 갖추고 삼가 신 의정부 영의정 김육을 보내 옥책을 받들어 존호를 더 올리기를 명덕정순인열왕후라 하였으니, 바라건대 영명하신 혼령은 휘호를 굽어 받으소서. 사책에 이 아름다운 휘호가 전해져 큰 빛이 억만년에 빛나고 사직에 경사가 뻗어 자손을 위한 심오한 계책이 자자손손에 끼쳐질 것입니다. 아, 애통하오이다. 근언(謹言)."
하였다. 【대제학 조석윤(趙錫胤)이 지은 글이다.】
【태백산사고본】 6책 6권 59장 A면【국편영인본】 35책 495면
【분류】왕실-의식(儀式) / 어문학-문학(文學)
[註 096] 우빈(虞嬪) : 순인금의 아내 아황(娥皇)을 말함.[註 097] 주사(周姒) : 문왕(文王)의 아내 태사(太姒)를 말함.
ⓒ 한국고전번역원
감사가, 청인(淸人)이 회령(會寧)에 개시(開市)하여 소 58두, 무명 37필, 포(布) 45필, 흰 종이 9백 34권(卷), 솥 1백 60좌(坐), 쟁기 2백 31개, 소금 4백 26곡(斛)을 무역해 돌아갔다고 계문하였다.
6월 29일 갑술
함경도 함흥(咸興)에 천둥치고 우박이 떨어져 새들이 많이 맞아서 죽고 벼곡식이 매몰되었다.
고 영의정 신경진은 충익(忠翼), 완풍 부원군(完豊府院君) 이서(李曙)는 충정(忠定), 영의정 윤방은 문익(文翼)을 증시하고, 박서(朴遾)를 예조 판서로, 권우(權堣)를 집의로 삼았다.
6월 30일 을해
하교하였다.
"중궁(中宮)을 책례(冊禮)하는 날에 외명부(外命婦) 가운데 조정 사대부의 명부는 들어와 참여할 것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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