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1일 병자
부묘 도감(祔廟都監)이 아뢰기를,
"배향할 여러 신하의 위차는 이미 강론해서 정하였습니다. 그런데 중론이 더러 ‘원훈의 차례로 말한다면 연평 부원군(延平府院君) 이귀가 평성 부원군(平城府院君) 신경진의 위에 있어야 하지만 신경진의 관직은 정승이므로 이귀의 밑에 있어서는 안 된다.’ 합니다. 고사를 상고해보면 태종조(太宗朝)에 배향된 여러 신하 중에 한산 부원군(漢山府院君) 조영무(趙英茂)의 위차가 정탁(鄭擢)의 위에 놓였으니, 이는 필시 공에 따라 차례를 정한 것이고 직위의 순서로 차서를 정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 두 신하의 위차를 어떻게 정해야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우의정 정탁 역시 공신이었는가? 상고해서 아뢰라."
하였다. 부묘 도감이 아뢰기를,
"《충훈부공신안(忠勳府功臣案)》을 가져다가 상고해 보았더니, 청성 부원군(淸城府院君) 정탁은 개국 공신 1등에 참여되었고 또 공정조 정사공신(恭靖朝定社功臣) 2등에도 참여되었는데, 태종 묘정의 배향 위차는 《고사촬요(攷事撮要)》098) 를 상고해 보았더니, 한산 부원군(漢山府院君) 조영무의 아래에 있었습니다."
하니, 대신에게 의논하라고 명하였다. 영의정 김육(金堉)이 의논드리기를,
"조영무의 위차가 정탁의 위에 있는 것은 과연 《고사촬요》에 그런 근거가 있는데 조영무의 관직으로 의정(議政)을 쓰지 않고 단지 부원군만 쓰여져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신 역시 그때 위차를 정하는 데는 필시 공에 따라 하였지 작위를 가지고 한 것은 아니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의정부선생안(議政府先生案)》을 상고하였더니, 조영무 역시 일찍이 우의정을 지냈는데 정탁보다 그 시기가 먼저였습니다. 이 때문에 《고사촬요》에 관직이 누락되었을 것입니다. 이번에 배향할 여러 신하도 각기 직품에 따라서 그 위차를 정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의논대로 하라고 명하였다.
간원이 【대사간 김익희(金益熙), 사간 이석(李晳), 정언 조진석(趙晋錫).】 아뢰기를,
"신 등이 삼가 듣건대, 배향 공신 위차에 있어서 연평 부원군 이귀가 평성 부원군 신경진의 다음에 놓여졌다 합니다. 삼가 생각건대, 이귀의 훈업(勳業)과 인망(人望)이 모두 신경진의 위에 있고 그가 죽자 특별히 영의정에 추증하였으니, 실지로 정승에 제수된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러니 지금에 와서 위차를 정함에 있어서 정승을 지냈는지의 여부를 따져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옛날 명(明)나라 고황제(高皇帝)가 친히 서달(徐達)·상우춘(常遇春) 등의 배향에 대한 의논을 정할 때에 공의 높낮이에 따라 차례로 배향하였는데 그 뒤로 준행하여 고치지 않았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우리 선왕의 평소 생각이나 지금 하늘에 계신 영혼이 이귀와 신경진 등의 위차에 대해서도 필시 본래부터 선후를 정하고 계실 것으로 여겨집니다. 다시 대신과 의논하여 모든 질서가 있어야 할 의전(儀典)이 마땅한 바를 얻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영중추부사 이경여(李敬輿), 영의정 김육, 우의정 한흥일(韓興一)이 의논드리기를,
"정사(靖社)의 공을 정하고 관작을 봉할 때 신경진의 이름을 이귀의 아래에다 둔 것은 선왕께서 실로 뜻한 바가 계셨을 터이므로 이귀가 죽자 특별히 영의정에 추증하였을 것입니다. 또 태조의 배향 공신에 영의정 조준(趙浚)의 위차가 의안 대군(義安大君)의 위에 있었으니, 공훈을 중하게 여기고 관직의 품계 유무를 가지고 선후를 삼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는 또한 오늘날의 법이 될 만한 것이니, 간원이 아뢴 대로 위차를 고치소서."
하니, 의논대로 하라고 명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삼가 《예조부묘의주(禮曹祔廟儀註)》를 보았더니, 대왕 신위(大王神位)와 왕후 신위(王后神位)를 태묘에 모실 때에 내시(內侍)는 궤(几)를 받들고 대축(大祝)은 신주를 받든다고 되어 있고 선후의 절차는 자못 명백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오례의(五禮儀)》를 가져다 상고하였더니 ‘대축(大祝)과 궁위령(宮闈令)은 각각 신주독(神主櫝)을 받든다.’ 하였는데 그 주(註)에 ‘나갈 때는 대왕 신주가 먼저 나가고 들어올 때는 왕후 신주가 먼저 들어온다.’하였고, 또 경술년의 《부묘등록(祔廟謄錄)》을 상고하였더니, 역시 이와 같았습니다. 봉안하는 순서가 분명하게 근거할 만한 글이 있으니, 예관으로 하여금 이에 의해 행하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7월 2일 정축
상이 인조 대왕의 담제(禫祭)를 영사전(永思殿)에서 행하였다.
7월 3일 무인
간원이 【대사간 김익희(金益熙), 사간 이석(李晳), 정언 조진석(趙晋錫).】 아뢰기를,
"선왕과 선후의 신주를 태묘에 모시었고 사군(嗣君)은 3년상을 마쳤으니, 모두 신민의 막대한 경사입니다. 신주를 태묘에 모신 뒤에 진하례(陳賀禮)를 행하는 것은 실로 인정과 예문에 맞는 것이며 우리 열성(列聖)들께서 행하지 않은 분이 없었습니다. 하물며 인조 대왕의 신실(神室)은 바로 백세토록 조묘(祧廟)로 옮기지 않을 것인데 말할 게 있겠습니까. 경사가 더욱 종묘에 관계되고 우리 성상께서는 상중에 슬퍼하시다 다행히도 옥후(玉候)가 강녕하시어 몸에 곤면(袞冕)을 착용하고 정전(正殿)에 임어하시니, 한편으로는 슬프고 한편으로는 기쁜 뭇 신하들의 심정이 어찌 한량이 있겠습니까. 예(禮)는 본래 인정에 따라 알맞게 절제하여 꾸민 것입니다. 비록 옛날에는 이런 예가 없다 하더라도 뭇 사람의 심정이 이와 같으면 또한 의리로 미루어 만들 수 있는데, 하물며 조종이 이미 행하신 예가 어찌 전하의 가법(家法)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성상께서는 오히려 선왕의 미덕으로 돌리는 축하를 차마 드리진 못하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계시니, 이는 맹무자(孟武子)가 보통 사람보다 한층 더 우월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마는 또한 너무 지나친 듯싶습니다.
대저 왕위에 올라 그 예제를 행하는 것은 바로 성왕(聖王)의 공통된 효도입니다. 오늘날 신하들이 전하에게 바라는 바가 어찌 여기에 있지 않겠습니까. 신 등이 처음에는 전하의 지극한 뜻에 순종하려고 굳이 논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태묘에 신주를 모실 날짜가 임박하자 만백성이 우러러 보고 있는데 진하하는 큰 예를 빠뜨리고 행하지 않으니, 만백성이 모두 탄식하면서 열성(列聖)의 성대한 의전을 폐지하여 일국의 큰 기대를 잃게 한다 하니, 작은 일이 아닙니다. 그러니 조종의 옛 전장(典章)에 의거하여 하례받는 일을 허락하소서."
하고, 헌부와 옥당도 번갈아 간청하자 비로소 허락하였다.
7월 4일 기묘
예조가 아뢰기를,
"왕대비의 보전문(寶篆文)은 ‘자의대비지보(慈懿大妃之寶)’ 여섯 글자로 하기로 의논하여 정하였습니다. 그런데 다시 갑자년099) 인목 왕후(仁穆王后)에게 존호(尊號)를 올릴 때의 보전(寶篆)을 상고해 보니 ‘소성 정의 명렬 대왕 대비 보(昭聖貞懿明烈大王大妃寶)’로 쓰여져 있었습니다. 지금 보전의 대(大)자 위에도 왕(王)자를 놓아야 하겠으니, 이에 의하여 쓰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예조가 아뢰기를,
"무릇 진하할 때에 왕세자가 으레 백관을 거느리고 진하하는 의절이 있습니다만 지금 나이가 어리어 미처 관례(冠禮)를 행하지 못하였으니, 왕세자가 진하하는 한 절차는 정지하소서."
하니, 따랐다.
7월 5일 경진
간원이 【대사간 김익희(金益熙), 사간 이석(李晳), 정언 조진석(趙晋錫).】 아뢰기를,
"무릇 종묘에 일이 있으면 크고 작은 일을 막론하고 조종에게 경건히 고하고 신민에게 교서를 내리는 것이 예입니다. 지금 중종 대왕(中宗大王)을 높여 세실(世室)에다 모시는 것이야말로 어떤 대사인데 사당에 고하지도 않고 또 교서를 반포하지도 않으신단 말입니까. 지난번 성묘(成廟)를 높여 세실에다 모실 때에는 사당에 고하고 교서를 반포한 후에, 그때 의논하는 신하들이 오히려 별도의 축문에다 공덕을 자세히 기술하여 성종의 감실에 고할 것을 청하여 즉시 윤허를 얻어 시행하였습니다. 이로 본다면 오늘날 사당에 고하지도, 교서를 반포하지도, 별도로 축문을 짓지도 않은 것이야말로 너무 소략하다고 하겠습니다. 대신과 예관으로 하여금 속히 강정하여 전례에 의해 거행하여 하자가 없게 하소서. 신 등이 삼가 듣건대, 명종 대왕(明宗大王)의 감실에 고한 축문 중에, 전하의 호칭을 ‘효증질손(孝曾姪孫)’으로 첫머리에 써 넣었다 하는데, ‘질손’이란 호칭은 방친(旁親)에게 사용하는 것이어서 명묘(明廟)에는 사용할 수 없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모르겠습니다만, 어디에 근거하여 이런 칭호를 썼는지 놀라움을 금하지 못하겠습니다. 예관으로 하여금 빨리 정정하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예조가 아뢰기를,
"효증 질손의 질(姪)자는 과연 미안한 것 같습니다만 그 당시 예관이 강론해 정한 것도 필시 의거한 바가 있었을 것입니다. 중대한 일이니, 대신과 의논해서 정정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사당에 고하고 교서를 반포하고 별도로 축문을 짓는 등의 예는 회의할 때에 일괄 의논해서 정하는 것이 옳겠다."
하였다. 전 영의정 이경석(李景奭), 영중추부사 이경여(李敬輿), 영의정 김육(金堉), 우의정 한흥일(韓興一)이 의논드리기를,
"중묘(中廟)의 신위는 이미 영구히 옮기지 않게 되었으니, 별도로 사당에 고하고 교서를 반포하는 일이 없어도 될 듯합니다만 이번 부향 대제(祔享大祭)에서는 각 감실의 축문 가운데다 대략 몇 구절의 문자를 첨가하여 옮기지 않는다는 뜻을 고하고, 또한 교서 가운데 이런 뜻을 써 넣어 중앙과 지방에 반포하여 알려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명묘(明廟)의 축문 가운데 ‘질손’으로 칭한 것은 인묘(仁廟)와 함께 중묘(中廟)의 소(昭)100) 가 되기 때문에 이 질(姪)자를 넣은 것이니 대간의 논한 바가 과연 옳은 것 같습니다. 이에 의하여 정정하소서."
하니, 의논대로 하라고 명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무릇 큰 제사 때에는 제물의 진설을 으레 하루 전에 하게 되는데, 지금 새로 부향하려는 감실은 부향하기도 전에 먼저 제찬을 진설하는 것이 미안할 듯합니다. 그러나 전하께서 제사지내는 자리에 나가시고 신주 또한 독(櫝)을 열어 놓은 뒤에 태복(太僕)의 태묘(太廟)를 맡아 지키는 사람 무리가 감히 드나들며 진설을 할 수 없으니, 형편상 모든 신위와 함께 일시에 먼저 진설을 해야 되겠습니다. 원종 대왕(元宗大王)을 종묘에 붙여 모실 때에도 이런 예가 있었으니, 이에 의하여 행하소서."
하니, 따랐다.
7월 6일 신사
태묘에 행사가 있었다. 인조 대왕의 부묘례(祔廟禮)를 행하려고 태묘에서 재계하였다. 이날 먼동이 틀 무렵에 상이 영사전(永思殿)에 나아가 신주를 태묘로 옮김을 고하는 제사를 행하고, 사시(巳時)에 인조 대왕의 신주를 봉안한 수레를 모시고 태묘에 나아갔다. 우의정 한흥일을 숙녕전(肅寧殿)에 보내 신주 옮김을 고하는 제사를 행하고 인열 왕후(仁烈王后)의 신주를 봉안한 수레를 모시고 태묘로 나오게 명하고서, 상은 태묘의 문 안에서 경건히 맞이하였다.
7월 7일 임오
인조 대왕과 인열 왕후의 신주를 태묘에 붙여 모셨다. 상이 예를 마치고 궁궐에 돌아와서 백관의 하례를 받았다. 사면령을 내리고 교문(敎文)을 반포하였는데, 그 교문은 다음과 같다.
"왕은 이렇게 말하노라. 열조(列祖)의 사당에 올려 배향하니, 성대한 예식이 비로소 이루어졌고, 사방에 휘호가 빛나니, 떳떳한 전장이 이에 거행되었도다. 이일은 실로 다같이 즐기는 경사이지만 마음에 남은 슬픔을 잊을 수 있겠는가. 한없이 염려되는 것은 부족하고 어두운 이 몸이 외람되이 어렵고 큰 서업을 이음이도다. 이 왕위에 올라 이 예를 행하지만 가업을 무너뜨리지는 않을까 두렵고 밥먹을 때나 앉아 있을 때나 음성과 용모를 살아 계실 때처럼 사모하노라. 세월은 자꾸만 흘러 어느새 담제(禫祭)를 넘겼으나, 서리와 이슬이 내리자 슬픔만 더해지니, 종신의 애통을 어떻게 견디겠는가. 이에 선왕의 제도를 상고해 보니 본디 합향(合饗)의 의식을 소중히 여겼도다. 하물며 우리 중묘의 빛난 공은 세실의 높은 보답을 받는 것이 마땅하도다. 신주를 번갈아 옮기는 이 날을 당하여 선왕의 미덕으로 돌리어 찬양하는 일이 없을 수 있겠는가. 이에 감히 중종 공희 휘문 소무 흠인 성효 대왕(中宗恭僖徽文昭武欽仁誠孝大王)을 추존하여 세실로 삼고, 이어 올해 7월 초7일 임오(壬午)에 황고(皇考) 인조 헌문 열무 명숙 순효 대왕(仁祖憲文烈武明肅純孝大王)과 황비(皇妃) 명덕 정순 인열 왕후(明德貞順仁烈王后)의 신주를 삼가 받들어 태묘에 붙여 배향하였도다. 조용히 여기에 오르내리시니 이에 덕을 볼 수 있고, 양양한 종고(鍾鼓) 소리 속에 흠향하시니 우리를 편하케 하셨도다. 법전(法殿)에 곤의(袞衣)를 입고 나왔지만 어찌 임어의 존귀함에 편안하겠는가. 많은 어려움이 걱정될 땐 오직 신하들에게 자문을 받고자 하노라. 조상을 받드는 아름다운 전례를 이미 다 끝마쳤으니 백성들에게 큰 은혜를 베풀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아아, 비길 데 없는 그 공은 세상을 떠나도 잊지 못하고 모두 봄 일을 위해 참여하니 지금부터 모든 일을 새롭게 하게 되었도다. 전국에 혜택을 베풀기 위하여 이에 나의 충심을 고하노라. 아아, 자손을 위해 좋은 계책을 물려 주셨으니, 계통을 잇는 일에 허물이 없기를 기약하겠노라. 점괘에 복을 받는다 하였으니, 다 함께 아름답고 밝은 세상을 보게 되었다." 【대제학(大提學) 조석윤(趙錫胤)이 지은 것이다.】
【태백산사고본】 7책 7권 3장 A면【국편영인본】 35책 496면
【분류】왕실-의식(儀式) / 사법-행형(行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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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8일 계미
예조가 아뢰기를,
"인조 대왕을 태묘에 배향하고, 중종 대왕을 높여 세실로 삼고, 인열 왕후에게 휘호를 올리고, 왕대비에게 존호를 올리고, 왕비를 책봉하는 예를 행하고, 왕세자에게 관례(冠禮)와 책봉의 예를 행하였으니, 통틀어 일곱 가지 경사가 됩니다. 뭇 사람의 의논 중에 혹자는 증광시(增廣試)를 베풀어야 한다 하고, 혹자는 별시(別試)를 베풀어야 한다 하니, 대신에게 의논하소서."
하니, 따랐다. 영의정 김육(金堉), 우의정 한흥일(韓興一)이 의논드리기를,
"마땅히 별시를 베풀어야 합니다."
하고, 좌의정 이시백(李時白)이 의논드리기를,
"을해년과 계유년의 옛 규례에 의하여 증광시를 베푸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김육과 한흥일의 의논을 따르라고 명하였다.
7월 9일 갑신
예조가 아뢰기를,
"3년 복제가 끝나고 태묘에 배향하는 예가 이루어진 뒤에는 전하께서 마땅히 문묘(文廟)를 배알하고 이어서 인재를 취하는 과거를 실시해야 하니, 병조로 하여금 먼저 무과 초시(武科初試)를 베풀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우의정 한흥일이 차자를 올리어 양서(兩西)에 먼저 화폐 사용에 대한 법을 행하여 백성에게 사사로 돈을 주조하게 허락할 것을 청하고, 또 삼남(三南)에 대동법(大同法)을 시행할 것을 청하니, 비변사로 하여금 의논하게 하였다. 이에 비변사가 모두 한흥일의 차자에 따라 행하기를 청하니, 답하기를,
"대동법의 경우 삼남에까지 시행할 수는 없다. 삼두법(三斗法)101) 은 이미 호서(湖西)에 먼저 시행하도록 하였으니, 그 이해를 살펴보고 나서 다른 도에 행해야 할 것이다. 백성에게 사사로이 돈을 주조하게 하는 데 대해서는 좌상과 영중추부사에게 의논하라."
하니, 좌의정 이시백은 허락하기를 청하고, 영중추부사 이경여(李敬輿)는 널리 뭇 사람의 의논을 채취하여 가장 알맞은 방법을 쓰는 데 힘쓸 것을 청하니, 이시백의 의논을 따르도록 명하였다.
7월 10일 을유
상이 하교하였다.
"존호를 올리고 책례를 할 때에 각도의 방물(方物)·물선(物膳)·진상마(進上馬) 및 병조 진상마를 모두 진상하지 말게 하여 약간이나마 민폐를 덜어주게 하라."
파주(坡州)에 사는 전 사평(司評) 이원(李源)이 파주에 은혈(銀穴)이 있다고 상소하여 시험삼아 캐낼 것을 청하니 조정에서 파주로 하여금 병졸을 보내 채굴하도록 하였다. 의논하는 자들이 모두 은혈이 장릉(長陵)의 산맥을 침범한다고 말하자, 상이 관상감 제조(觀象監提調) 여이징(呂爾徵)을 보내어 상지관(相地官)을 거느리고 가서 살펴보게 하였다. 여이징이 형상을 그려서 바치니, 상이 "파들어가는 구멍이 점점 넓어지면 필시 능(陵) 뒤 산맥을 손상할 것이다." 하고, 그 공사를 그만두도록 명하였다. 이어서 파주로 하여금 흙을 메우고 나무를 심어서 영구히 금지하는 지역으로 하게 하였다.
7월 11일 병술
오준(吳竣)을 우참찬으로, 박서(朴遾)를 지경연으로, 유심(柳淰)을 경상 감사로, 조형(趙珩)을 보덕(輔德)으로, 정유(鄭攸)를 부응교로, 장응일(張應一)을 수찬으로 삼았다.
전경 문신(專經文臣)을 인정전(仁政殿)에서 시강(試講)하였는데, 수석을 차지한 주서(注書) 노형하(盧亨夏), 학유(學諭) 남천택(南天澤)에게 모두 말[馬]을 하사하였다.
7월 12일 정해
괴산 군수(槐山郡守) 윤안기(尹安基)가 임지로 떠나면서 하직 인사를 드리니 직접 불러보고 유시하여 보냈다.
옥당이 【응교 이해창(李海昌), 교리 이응시(李應蓍), 부교리 채충원(蔡忠元), 수찬 오정위(吳挺緯), 부수찬 정언벽(丁彦璧).】 차자를 올리기를,
"시호(諡號)란 평소의 행실을 나타내는 것이니, 지나치게 포양해도 안 되고, 지나치게 폄억해도 아니되므로 반드시 당시의 사실대로 기록하여 영원히 바뀌지 않을 이름을 전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고도(古道)가 회복되지 않고 공의(公議)가 땅을 쓴듯이 없어져서 도리어 사실을 기록하는 법식을 가지고 한갓 지나치게 찬양하는 도구로 삼고 있으니 식자층에서 탄식한 지 이미 오래입니다. 고 상신(相臣) 윤방(尹昉)은 선조(先朝)의 명망 높은 사람으로 계해년 반정 초에 맨 먼저 공보(公輔)의 직임을 받았으나 말년에 있었던 강도(江都)의 일102) 로 죄가 종묘 사직에 관계되었으므로 지금까지 국중 여론이 모두 분개하고 있는데 윤방이 문익(文翼)이란 시호를 얻었으니, 이것이 신 등이 이해하지 못할 바입니다. 마땅히 폄억되어야 할 것이 도리어 포양되어서 분수넘게 아름다운 시호를 얻은 것에 대해 공론이 이미 해괴히 여기고 있으니, 시법(諡法)이 과연 어디 있습니까. 시장(諡狀) 중에는 해괴스럽게 여길 만한 문자가 이미 많았고, 시호를 의논하던 유신(儒臣)들도 모두 척축(斥逐)을 당하였고 보면, 그 시장을 본가의 자제에게 되돌려 주어서 그들로 하여금 고쳐 찬술하게 하고 다시 유사에게 명하여 사실대로 시호를 의논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부표(付標)한 글을 그대로 두고 지나치게 찬미한 시호를 고치지 않는다면, 그것이 후세에 전해질 때 공론이 지극히 엄하다는 것을 누가 알겠습니까.
또한 우리 나라에서 문익의 시호를 받은 자는 겨우 몇 사람 뿐이니, 고 상신 정광필(鄭光弼), 이덕형(李德馨) 등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전하께서 만일 이 몇 신하로써 비교해 보신다면 문익이란 시호가 윤방에게 주어지지 않아야 한다는 것은 변론을 듣지 않아도 아실 것입니다.
옛날 소우(蕭瑀)는 당 태종(唐太宗)의 명신이었으나 고집이 매우 세어 남과 잘 어울리지 않는다 해서 시호를 정편(貞褊)으로 하였고, 하증(何曾) 역시 진(晋)나라의 훌륭한 보필의 신하였으나 날마다 만 냥에 상당한 음식을 먹었다 하여 시호를 목추(繆醜)로 하였으니, 옛날엔 시법이 이처럼 엄격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공론이 있는 바에는 삼가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시호를 낼 때 반드시 양사(兩司)의 서경(署經)을 거치는 것은 그 일을 중시하기 때문인데 예에 따라 서경하여 마치 의당 아름다운 시호를 얻어야 할 자처럼 보아넘기니, 또한 한심하기만 합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속히 명하여 전의 시호를 도로 거두고 다시 의논하게 하여 이름과 사실이 어긋나지 않게 하신다면 공론이 펴지고 시법이 바르게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따르지 않았다.
장령 윤집(尹鏶)이 인피하기를,
"고 상신 윤방의 시호를 서경할 때에 신도 동참하였었습니다. 윤방은 본래 세신(世臣)으로서 돈후한 이름을 얻었습니다. 비록 그의 말년에 책잡힐 만한 자취가 많이 있기는 하지만 태상(太常)이 이미 의논을 하였고 유신(儒臣)이 완전히 정하고 간원이 이미 서경하여 내주었으므로, 신은 공론이 이미 인정했다고 생각하여 예에 따라 서명하였습니다. 논박이 다시 옥당에서 나올 줄을 어찌 생각이나 하였겠습니까. 시호에 대해 의논이 많은 것은 그 유래가 이미 오래입니다. 공숙(公叔)이 정혜(貞惠)란 시호를 얻고 공어(孔圉)가 문자(文子)라는 시호를 얻고 이동양(李東陽)이 문정(文正)이란 시호를 얻게 된 데 대해 그 당시 개탄하기도 하고 너무 폄억하였다고 혐의하기도 하였고 보면 그 시비를 정하기 어려움이 어찌 오늘날에만 그러하겠습니까. 이것으로 본다면 진실로 청명하고 강직한 인물이 아니면 시호의 대상에 넣기 어려운 것입니다. 하물며 세도가 여러 갈래로 나뉘고 논의가 통일되지 않은 지금이야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신이 이미 유신의 지척을 입었으니, 신의 직을 갈아주소서."
하고, 대사간 김익희(金益熙)는 인피하기를,
"대저 시호를 내는 법은 유신이 의논해 정하고 묘당(廟堂)이 심사하고 나서 몇 곳의 관사(官司)를 거쳐 양사에 보내는 것이므로 쉽게 시비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닙니다. 게다가 이미 정해진 시호를 논박하여 바로잡고자 하는 일 또한 계해년 이후로는 듣지 못하였기 때문에 신 등의 의견이 거기까지 미치지 못한 것인데, 이래서 유독 ‘한심하다’는 지척을 받게 되었는가 봅니다. 신의 직을 갈아주소서."
하고, 사간 이석(李晳), 헌납 유준창(柳俊昌), 정언 조진석(趙晋錫), 집의 권우(權堣), 지평 홍수(洪鐩)와 홍중보(洪重普)가 모두 이 때문에 인피하였으며, 장령 유도삼(柳道三) 역시 인피하기를,
"마침 사가의 기제사로 인하여 비록 시호를 서경하는 자리에 동참하지는 못했습니다마는, 시호를 반박하는 의논이 이미 유신에게서 나왔으니, 신이 언책(言責)의 직에 있으므로 오직 스스로 탄핵하기에 급급해야 할 것인데, 어떻게 감히 이 일에 대해 처치하겠습니까. 신의 직을 갈아주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으나, 윤집 등은 물러가서 물론을 기다렸다. 옥당이 【부응교 정유(鄭攸), 교리 이정영(李正英)·이응시(李應蓍), 부교리 이천기(李天基)·채충원(蔡忠元), 수찬 오정위(吳挺緯).】 차자를 올리기를,
"양사가 모두 인혐하고 물러났습니다. 무릇 시호를 낼 때 반드시 양사의 서경을 거치게 하는 것은 그 뜻이 실로 범연한 것이 아니니, 이미 여러 관사를 거쳤다 해서 그저 의례적으로 서경해 낼 수 없음이 분명합니다. 시법은 지극히 엄한 것이고 공의는 막기 어려운 것이고 보면 이미 정해진 의논이라고 핑계하는 것은 매우 구차스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윤집이 장황스럽게 늘어놓은 문자에 있어서는, 이끌어 비유한 사례가 맞지 않고 사체로써 논해 볼 때 더욱 근거가 없습니다. 동참하지 않은 바에야 마땅히 처치해야 할 것인데, 억지로 끌어다 혐의를 삼으니, 이는 책임을 회피하는 처사입니다. 장령 윤집, 대사간 김익희, 사간 이석, 헌납 유준창, 정언 조진석, 집의 권우, 지평 홍수·홍중보, 장령 유도삼을 모두 체차하라 명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양사는 별로 잘못이 없으니 모두 체차하지 말라."
하였다. 대사간 김익희, 사간 이석, 헌납 유준창이 인피하기를,
"신 등은 옥당의 지척을 거듭 받았으니, 비록 성상께서 특별히 출사하라 명하시었지만 어찌 탄핵을 견디며 공무를 수행할 수가 있겠습니까. 또 논의할 때에 시비와 완급이 들쭉날쭉 일치하지 않는 것은 정상적인 일의 이치입니다. 남이 나의 의견과 같지 않은 것은 내가 남의 의견과 같지 않음이나 마찬가지인데, 또한 성낼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윤집은 윤방과 멀리 사이가 났으므로 분명 서로 아부하지 않는다는 것은 사람들이 모두 아는 사실입니다. 그가 시법을 논한 것은 고금을 인증하여 시호에 대한 의논이 많음을 밝힌 데 지나지 않은 것으로 각자의 소견을 진술한 것이니 해로울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름을 들추어 지척하고 문사(文辭)에서도 모두 업신여기어 조금도 체면을 세워주지 않으니, 유신이 대간을 어찌 이렇게도 박하게 대한단 말입니까. 시호를 의논하는 일은 옥당이 실로 주관하고 있는데, 왜 시장(諡狀)이 들어왔을 때 즉시 논박하지 않고 제멋대로 드나들게 놓아두어 마치 다른 관사의 일인 것처럼 보아 넘기고서는 한 달이 지난 뒤에서야 비로소 양사가 서경해 주었다고 논한단 말입니까. 이미 체직된 관원은 일각도 구차하게 그대로 있기가 결코 어려우니, 신들의 직을 가소서."
하고, 집의 권우, 지평 홍수·홍중보, 정언 조진석, 장령 윤집·유도삼도 이를 이유로 인피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으나, 김익희 등은 모두 물러가서 물론을 기다렸다. 옥당이 차자를 올리기를,
"양사가 모두 인혐하고 물러났습니다. 일을 논하는 대체는 마땅히 옳고 그름의 여하를 보아야 하는데, 시호를 모호하게 서경한 실수를 감추기 위하여 도리어 옥당이 발론을 일찍 했느니 늦게 했느니 지척하는가 하면, 성명을 들추어 지척하고 문사를 꾸미며 능멸하였다고 하면서 남을 대신해 송사를 벌려 기고 만장하게 논쟁하여 마치 한바탕 논란을 한 것처럼 하니, 간신(諫臣)의 피혐하는 이유 또한 이상합니다. 소견의 잘못을 끝내 어떻게 면할 수 있겠습니까. 공론이 존재한 마당에 이미 체직을 청하였으니, 비록 특별한 분부가 계시더라도 형편상 재직하기 어렵습니다. 양사의 여러 관원을 체차하라 명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대신(臺臣)의 분노한 말은 타당하지 못한 것 같으나, 그대들이 논집(論執)한 뜻도 실로 이해하지 못하겠다. 오늘의 처치가 합당한 것인지 내 모르겠으나 대간은 여느 관원과 다르므로 잠시 체차를 허락하여 옛 규범을 보존토록 하겠다."
하였다.
대사헌 윤순지(尹順之)가, 옥당에서 그의 백부(伯父) 윤방(尹昉)의 시호를 논박하고 있기 때문에 감히 대간의 직위에 있지 못하겠다고 여러 번 상소하여 면직을 청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상이 주강에 나아가 《서전(書傳)》의 함유일덕(咸有一德)을 강하였다. 강이 끝나자 동지경연 조석윤(趙錫胤)이 아뢰기를,
"요즘 사치 풍조가 매우 성행하고 있는데, 모든 물건이 분수에 넘쳐 가지런하지 못하고 물가가 앙등하는 것은 모두 여기에서 연유한 것입니다. 전하께서 반드시 몸소 검소함을 행하여 모범을 보여야 폐단을 바로잡을 수 있을 것인데, 듣자오니, 도감(都監) 군사의 두건(頭巾)을 또한 화려하게 꾸미도록 하여 모단(毛段)까지 쓰게 하셨다 하니, 과연 그런 하교를 하셨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것은 내가 모르는 일이다. 복식을 남루하게 하지 말도록 하였을 뿐이지 어찌 사치를 숭상하도록 할 수 있었겠는가."
하였는데, 조석윤이 아뢰기를,
"전하께서 만일 먼저 검소한 덕에 힘쓰신다면 아래에 반드시 풍화(風化)의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가납하였다.
상이 석강에 나아가 《대학연의(大學衍義)》를 강하였다.
7월 13일 무자
상이 대신과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삼두미법(三斗米法)에 대한 사람들의 의논은 어떠한가?"
하니, 영의정 김육(金堉)이 대답하기를,
"어떤 사람은 ‘호남과 호서는 처지가 다른데 지금 만일 일률적으로 시행하면 호서의 백성이 반드시 원망할 것이다.’ 합니다. 그러나 대동법(大同法)은 비록 시행하지 않더라도 먼저 이 법을 시행한다면 어찌 편리하고 좋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시방에게 물으니, 대답하기를,
"충청도에만 시행한다면 삼두가(三斗價)가 부족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공물(貢物)의 경우, 백성이 바치는 바가 많으면 사주인(私主人)의 바치는 바가 적어지고, 사주인이 바치는 바가 많으면 백성의 바치는 바가 적어지기 때문에 형편상 불편한 바가 있으니, 호서에만 먼저 시험해 보아야지 호남에까지 한꺼번에 시행해서는 안 될 것이다."
하였다. 이시방이 아뢰기를,
"강원도의 백성도 대동법의 혜택을 받고 있습니다. 호서에도 본도에서 헤아려 변통한다면 행하지 못할 형세가 없을 것 같습니다."
하였다. 상이 또 허적(許積)에게 물으니, 대답하기를,
"전결(田結)로 논하면 호서는 14만 결이고, 호남은 19만 결입니다. 그러나 호서의 부역이 오히려 호남보다 무거우므로 균역의 청이 대개 이 때문에 나오게 되었는데, 호서 우도의 부역을 좌도로 옮겨 분담시키면 좌도의 백성이 장차 감당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 일을 만일 호서에만 시행하려 한다면 도리어 대동법만 못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도리어 대동법만 못하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하자, 허적이 아뢰기를,
"대동법은 일시에 모든 것을 세미(稅米)로 바친 뒤에는 여러 가지의 잡역(雜役)이 없기 때문에 모두 편리하게 여깁니다."
하였다. 좌의정 이시백(李時白)이 아뢰기를,
"삼두미법을 호남에 통행하여도 본래 불가할 것이 없는데 이 일을 의논해 정하는데 어찌 뭇 사람의 뜻에 합하기를 구할 필요가 있습니까. 이는 이른바 우유부단한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삼두미를 이미 징수한 뒤에 또 만일 부득이한 역이 있게 된다면, 두 도에 한꺼번에 시행하는 것보다 먼저 한 도에 시행하여 그 편리 여부를 관찰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하였다. 이시백이 아뢰기를,
"감사에게 임무를 장기간 맡겨야 수령의 잘 다스리고 못 다스림을 알 수 있을 것이며, 대동법에 있어서도 반드시 임무를 장기간 맡긴 다음에 바야흐로 성과를 책임지울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기는 하다만 일시에 가벼이 병행할 수는 없다."
하였다. 김육이 아뢰기를,
"삼두미법을 이시방과 허적으로 하여금 전적으로 관장하여 임무를 살피게 하소서."
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상이 대신과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삼두미법(三斗米法)에 대한 사람들의 의논은 어떠한가?"
하니, 영의정 김육(金堉)이 대답하기를,
"어떤 사람은 ‘호남과 호서는 처지가 다른데 지금 만일 일률적으로 시행하면 호서의 백성이 반드시 원망할 것이다.’ 합니다. 그러나 대동법(大同法)은 비록 시행하지 않더라도 먼저 이 법을 시행한다면 어찌 편리하고 좋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시방에게 물으니, 대답하기를,
"충청도에만 시행한다면 삼두가(三斗價)가 부족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공물(貢物)의 경우, 백성이 바치는 바가 많으면 사주인(私主人)의 바치는 바가 적어지고, 사주인이 바치는 바가 많으면 백성의 바치는 바가 적어지기 때문에 형편상 불편한 바가 있으니, 호서에만 먼저 시험해 보아야지 호남에까지 한꺼번에 시행해서는 안 될 것이다."
하였다. 이시방이 아뢰기를,
"강원도의 백성도 대동법의 혜택을 받고 있습니다. 호서에도 본도에서 헤아려 변통한다면 행하지 못할 형세가 없을 것 같습니다."
하였다. 상이 또 허적(許積)에게 물으니, 대답하기를,
"전결(田結)로 논하면 호서는 14만 결이고, 호남은 19만 결입니다. 그러나 호서의 부역이 오히려 호남보다 무거우므로 균역의 청이 대개 이 때문에 나오게 되었는데, 호서 우도의 부역을 좌도로 옮겨 분담시키면 좌도의 백성이 장차 감당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 일을 만일 호서에만 시행하려 한다면 도리어 대동법만 못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도리어 대동법만 못하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하자, 허적이 아뢰기를,
"대동법은 일시에 모든 것을 세미(稅米)로 바친 뒤에는 여러 가지의 잡역(雜役)이 없기 때문에 모두 편리하게 여깁니다."
하였다. 좌의정 이시백(李時白)이 아뢰기를,
"삼두미법을 호남에 통행하여도 본래 불가할 것이 없는데 이 일을 의논해 정하는데 어찌 뭇 사람의 뜻에 합하기를 구할 필요가 있습니까. 이는 이른바 우유부단한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삼두미를 이미 징수한 뒤에 또 만일 부득이한 역이 있게 된다면, 두 도에 한꺼번에 시행하는 것보다 먼저 한 도에 시행하여 그 편리 여부를 관찰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하였다. 이시백이 아뢰기를,
"감사에게 임무를 장기간 맡겨야 수령의 잘 다스리고 못 다스림을 알 수 있을 것이며, 대동법에 있어서도 반드시 임무를 장기간 맡긴 다음에 바야흐로 성과를 책임지울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기는 하다만 일시에 가벼이 병행할 수는 없다."
하였다. 김육이 아뢰기를,
"삼두미법을 이시방과 허적으로 하여금 전적으로 관장하여 임무를 살피게 하소서."
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울산 부사(蔚山府使) 김하량(金廈樑)이 임지로 떠나면서 하직 인사를 드리니, 그를 직접 만나보고 유시하여 보냈다.
상이 주강에 나아가 《서전》의 함유일덕편을 강하였다. 강이 끝나자 상이 지의금(知義禁) 박서(朴遾)에게 일렀다.
"형벌이란 부득이 쓰는 것이다. 형벌을 써서는 안 될 경우에는 형벌을 애초에 쓰지 않아야 할 것이고, 이미 형벌을 쓰게 했을 때는 한갓 형식만을 일삼아서는 안 될 것이다. 그 중에 장죄(贓罪)를 지은 관리는 사형시켜야 하는데 형장(刑杖)이 이처럼 가볍기 때문에 정범자(正犯者)에게 자복을 받아낼 수 없고 억울한 자도 해명할 도리가 없다. 내가 지금 이와 같이 말하면 사람들은 필시 ‘임금이 엄하고 혹독하게 정치를 한다.’고 하겠지만 그 중에 정범자는 엄한 형벌을 주어 자복을 받아내지 않을 수 없으며, 억울한 자는 금오 법관(金吾法官)이 품의하여 처리해야 할 것이다. 왕옥(王獄)의 중대한 자리에서 형장을 가지고 서로 장난하듯 하고 있으니, 어찌 한심스럽지 않겠는가. 장오(贓汚)를 수없이 저지른 사람을 가벼운 형벌로 그 죄를 징계하여 수치심을 갖게 할 수 있겠는가. 중국에서는 장죄를 지은 관리가 자복한 경우가 많이 있는데, 우리 나라는 비록 장오율(贓汚律)이 있으나 잘못을 시인하고 처벌을 받은 자가 드무니, 그 누가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질 사람이 있겠는가."
상이 주강에 나아가 《서전》의 함유일덕편을 강하였다. 강이 끝나자 상이 지의금(知義禁) 박서(朴遾)에게 일렀다.
"형벌이란 부득이 쓰는 것이다. 형벌을 써서는 안 될 경우에는 형벌을 애초에 쓰지 않아야 할 것이고, 이미 형벌을 쓰게 했을 때는 한갓 형식만을 일삼아서는 안 될 것이다. 그 중에 장죄(贓罪)를 지은 관리는 사형시켜야 하는데 형장(刑杖)이 이처럼 가볍기 때문에 정범자(正犯者)에게 자복을 받아낼 수 없고 억울한 자도 해명할 도리가 없다. 내가 지금 이와 같이 말하면 사람들은 필시 ‘임금이 엄하고 혹독하게 정치를 한다.’고 하겠지만 그 중에 정범자는 엄한 형벌을 주어 자복을 받아내지 않을 수 없으며, 억울한 자는 금오 법관(金吾法官)이 품의하여 처리해야 할 것이다. 왕옥(王獄)의 중대한 자리에서 형장을 가지고 서로 장난하듯 하고 있으니, 어찌 한심스럽지 않겠는가. 장오(贓汚)를 수없이 저지른 사람을 가벼운 형벌로 그 죄를 징계하여 수치심을 갖게 할 수 있겠는가. 중국에서는 장죄를 지은 관리가 자복한 경우가 많이 있는데, 우리 나라는 비록 장오율(贓汚律)이 있으나 잘못을 시인하고 처벌을 받은 자가 드무니, 그 누가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질 사람이 있겠는가."
상이 석강에 나아가 《대학연의》를 강하였다. 강이 끝나자 참찬관 김응조(金應祖)가 아뢰기를,
"근래에 문교(文敎)가 전폐되고 있으니 신은 은근히 개탄하는 바입니다. 조정에는 공부를 권장하는 방법이 없고 외방의 사자(士子)들 중에도 학문을 독실하게 하는 자가 있다는 것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교수(敎授)와 제독(提督)103) 을 설립하는 것은 본디 조종조의 옛 규범이니 지금부터 팔도의 감사에게 신칙하여 공부를 권장하는 정사를 수행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해조로 하여금 팔도에 신칙하게 하였다.
7월 14일 기축
예조가 아뢰기를,
"대비전에 존호를 올리는 옥책문(玉冊文)의 첫머리에 이왕 ‘국왕신(國王臣) 아무개가 옥책을 받들고 말씀올립니다.’하였으니, 전하께서 친히 정부사(正副使)에게 전하는 것은 인정과 예절로 헤아려 볼 때 역시 의당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오례의(五禮儀)》를 상고해 보았으나, 존호를 올리는 그 절차에 대해서 원래 기재된 곳이 없고, 또 갑자년104) 인목 왕후(仁穆王后)에게 존호를 올릴 때의 《등록(謄錄)》을 상고해 보아도 전하께서 친히 책보(冊寶)를 전하는 예는 없고 단지 ‘정부사가 대비전 합문(閤門) 밖에 가서 드린다.’고만 하였고, 또 갑자년 7월 초7일의 《정원일기(政院日記)》를 보았더니, 단지 ‘자전(慈殿)께 존호를 올리고 백관이 진하하였다.’는 말만 있을 뿐, 전하께서 친히 임하여 책보를 올렸다는 절목은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정부사가 어느 곳에서 책보를 받아서 대비전에 드려야 하겠습니까? 이 한 절차는 《오례의》와 《등록》에 의거할 만한 예가 없으니, 대신에게 의논해서 정하소서."
하니, 따랐다. 영의정 김육(金堉)과 좌의정 이시백(李時白)이 육경(六卿)·삼사(三司)·관각(館閣)의 신하들을 거느리고 아뢰기를,
"오늘 많은 관원들이 빈청(賓廳)에 일제히 모여서 갑자년의 《등록》을 상고해 보았더니, ‘책보를 올리기 전 상께서 어람하실 때에 도감·예조의 당상과 낭청이 모두 조복 차림으로 모시고 궐내로 들어갔으며, 책보를 올리는 날에 이르러서는 왕대비가 자리에 오르면 상기(尙記)105) 가 책보를 받들어 책상에 놓고 사알(司謁)이 상기를 이끌고 사자(使者)의 앞에 나가면 정사가 「아무 벼슬 신(臣) 아무개가 분부를 받들고 삼가 왕대비의 존호 책보를 받들어 올린다.」고 말하면, 상전(尙傳)106) 은 고개를 숙이고 엎드렸다가 일어나서 전언(典言)107) 에게 전해 고하고, 전언은 들어가서 상전에게 아뢰고는 도로 나와서 제자리로 돌아간다. 책보를 받든 관원이 꿇어앉아 부사에게 올리면 부사는 꿇어앉아 받아서 정사에게 주고 정사는 꿇어앉아 받아서 상전(尙傳)에게 주고 상전은 꿇어앉아 받아서 합문 밖에 나아가 여관(女官)에게 주고 여관은 받들어서 책보안(冊寶案)에 놓는다.’ 하였고, 이 밖에 다른 절목은 없습니다. 이것으로 본다면, 전하께서 친히 임하여 책보를 올리는 의식은 없는 것 같습니다."
하니, 알았다고 답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왕대비에게 존호를 올리고 내·외 명부(內外命婦)에게 하례를 받을 때 왕대비의 복색(服色)에 대해서 갑자년의 《등록》에는 적의(翟衣)를 갖추고 머리를 장식한다고만 하였고 어떤 색의 적의를 사용한다고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담제(禫祭) 뒤에 왕대비의 적의도 평상복에 의하여 간색인 자색(紫色)을 사용해야겠습니다. 상의원(尙衣院)으로 하여금 거행하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7월 15일 경인
윤강(尹絳)을 승지로, 이응시(李應蓍)를 사인(舍人)으로 삼았다.
상이 하교하였다.
"요즘 남쪽 지방의 토적(土賊)을 보건대 그들의 형세가 점점 성해지고 그들의 뜻이 적지 않으며 매우 견고하게 결속되어 있으니, 국가가 깊이 걱정해야 할 바이다. 저번에 개령 현감(開寧縣監) 이익로(李翼老)가 은밀히 적과 내통하여 제 마음대로 풀어주고 일부러 옥사(獄事)를 느슨하게 하였으니, 지금도 생각하면 통탄과 놀라움을 금하지 못하겠다. 비록 다시 무거운 형벌을 줄 수는 없지만, 해부(該府)로 하여금 먼 변방으로 정배(定配)하고 사면령이 내려도 무기한으로 용서하지 않게 하여 후일의 폐단을 막으라."
7월 16일 신묘
감시 시지(監試試紙)의 잘린 피봉(皮封)에 글자를 써서 표시하는 제도를 개정하였다. 이에 앞서 유생(儒生) 김익진(金益振)이 과거에 급제한 뒤에 그 시권(試券)의 피봉(皮封)이 넓고 커서 그의 이름이 쉽게 눈에 띠었다는 이유로 방(榜) 가운데서 제명하였다. 그 뒤에 조정에서 피봉의 격식을 개정하여 죽통(竹筒)처럼 좁게 하였는데, 감시의 시지도 동당(東堂)의 제도에 의하여 피봉을 잘라내게 하여 비리의 폐단을 막았다.
7월 17일 임진
김집(金集)을 대사헌으로, 채유후(蔡𥙿後)를 대사간으로, 김홍욱(金弘郁)을 집의로, 이응시(李應蓍)를 사간으로, 김휘(金徽)를 헌납으로, 정인경(鄭麟卿)을 장령으로, 이수인(李壽仁)과 목겸선(睦兼善)을 지평으로, 민정중(閔鼎重)과 서필원(徐必遠)을 정언으로 삼았다.
우의정 한흥일(韓興一)이 세 번까지 정고(呈告)하였으나, 모두 윤허하지 않는다고 비답하라 명하였다.
7월 18일 계사
전남도(全南道) 남원(南原)에 홍수가 져서 산기슭이 무너졌다.
이산 군수(理山郡守) 이만(李晩)과 경주 판관(慶州判官) 이정옥(李廷沃)이 임지로 떠나려고 하직 인사를 드리니 직접 불러보고 유시하여 보냈다.
전 첨사(僉使) 정대취(鄭大鷲), 하양(河陽)의 사인(士人) 장한신(張漢信), 비안(比安) 백성 이명호(李明好) 등이 자원하여 능(陵)을 지키고 3년 동안 최복(衰服)을 입었으므로 차등 있게 급복(給復)하도록 명하였다. 정대취가 병으로 능 아래에서 죽으니, 특별히 증직(贈職)하라 명하고 이어 그의 처자를 도와주도록 하였다.
7월 19일 갑오
간원이 아뢰기를,
"장령 정인경(鄭麟卿)이 일찍이 정언으로 있을 때, 빚을 징수하기 위하여 그의 안내인으로 하여금 호남의 선상(船商)을 잡아오게 하여 사사로이 형장(刑杖)을 가하고 협박하여 그의 배를 빼앗았습니다. 그 당시 헌부의 관원이 의논을 제기하였으나 논박하여 바로잡기도 전에 어떤 사건으로 인하여 곧 체직되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정인경이 대간의 평론이 있었음을 듣고 도리어 분노하여 욕설을 퍼부었으니 진신에게 부끄러움을 크게 끼치었습니다. 파직시키고 서용하지 말도록 명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먼저 파직시키고 뒤에 추고하라."
하였다.
7월 20일 을미
상이 주강에 나아가 《서전》 반경(盤庚)편을 강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대가 세족(大家世族)이 고향떠나기를 싫어하는 것은 예로부터 그러하였다. 지금 대동법으로 말하면 백성들의 찬반이 일치되지 않고 있는데, 더러는 거짓말을 퍼뜨려 인심을 선동하고 있다. 세력 있는 자들이 이처럼 싫어하고 있으니, 지금 대동법을 행하려고 한다면 또한 고문(誥文)을 지어서 유시해야 되겠는가?"
하니, 참찬관 이지항(李之恒)이 대답하기를,
"대동법을 세력 있는 자는 불편하게 여기고 잔약한 백성은 편리하게 여깁니다. 정치를 하는 방법은 비록 교화(敎化)로써 제일의 의무를 삼아야 하나, 말세에 만일 형벌이 없다면 명령이 행해질 수 없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교화가 주가 되고 형벌이 그 다음이다. 형벌이란 것은 정치를 보조하는 도구이니, 만일 사나운 백성이 없다면 형벌을 쓰지 않아도 될 것이다."
하였다. 정언 민정중(閔鼎重)이 입시하여 아뢰기를,
"호군(護軍) 한필원(韓必遠)이 자기 집 종으로 하여금 소를 도살하여 팔게 하였습니다. 한성부(漢城府)에서 그 종을 잡아다 가두니, 그 종이 인평 대군(麟坪大君)의 집 종이라 핑계하고 금리(禁吏)를 구타하며 갖가지로 공갈을 하였고 판윤(判尹) 윤경(尹絅)은 그의 사사로운 부탁을 들어 놓아주고 즉시 그의 죄를 다스리지 않았습니다. 호군 이완(李浣)도 자기 집 종으로 하여금 소를 도살하게 하였으나, 금리가 감히 금단하지 못하였습니다. 한필원은 파직하고 서용치 말며, 이완은 파직하고, 판윤 윤경은 엄중하게 추고하며, 좌윤(左尹) 조흡(趙潝)은 지나치게 겁을 내어 금법을 범한 사람을 가두어 다스리지 못하였으니, 체차하여 징계하는 소지로 삼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런 탄핵은 근래에 들어보지 못한 것이다. 대각의 풍채는 진실로 숭상할 만하다만 재신(宰臣)이 어찌 그 같은 짓을 할 리 있겠는가. 다시 자세히 알아보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조정 신하들의 정고(呈告)는 오늘날의 큰 폐단이 되고 있습니다. 지난 선조조(宣祖朝)에 있어서 정사(呈辭)는 제1차 이후 10일만에 제2차로 정사를 하고 제2차로 정사를 한 10일만에 제3차로 정사를 하였었으니, 이는 바로 선정신(先正臣) 이이(李珥)가 건의한 방법이었습니다. 지금은 비록 그 규법을 준행할 수는 없으나, 5일로 한정을 하였으면 합니다. 저번에 대교(待敎) 이단상(李端相)의 정사가 채 입계되지 않았는데, 문신 전강(文臣殿講) 때 그것으로 전강을 면하였으니, 해방 승지(該房承旨)가 그 책임을 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해방 승지는 추고하고 전경(專經)에서 통하지 못한 자도 아울러 적어서 아뢰도록 하라. 이 뒤로는 제1차 정사한 뒤에 제2차 정사는 1, 2일 내에 입계하는 것을 허락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병조는 여(輿)를 타고 각사(各司)의 당상과 낭청은 으레 역마(驛馬)를 타는데 판서가 일마(馹馬)를 타는 것은 이미 규정 밖의 일입니다. 군영(軍營)의 말까지도 사람들이 모두 빌려 타고 있으니, 그들을 조사하여 가려내 죄를 다스리고 판서도 일마를 타지 못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같은 잗단 일은 마땅히 헤아려서 처리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제도의 도사는 반드시 일찍이 대관과 시종을 거친 사람으로 차출해 보내라는 성명(成命)이 이미 계셨는데, 해조가 봉행하지 않고 있으니, 일이 매우 태만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해조로 하여금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옥책문 서사관(玉冊文書寫官)을 글씨에 서투른 사람으로 구차하게 채워 초계(招啓)하니, 참으로 극히 잘못된 일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도감으로 하여금 처리하게 하라."
하였다.
7월 21일 병신
목행선(睦行善)을 승지로, 이해창(李海昌)을 집의로, 유준창(柳俊昌)을 장령으로, 김휘(金徽)를 사서(司書)로, 정익(鄭榏)을 평안 병사(平安兵使)로, 정선(鄭善)을 백령 첨사(白翎僉使)로 삼았다. 정선은 바로 정명수(鄭命守)의 양아들인데, 조정에서 명수의 청에 못 이겨서 이 제수가 있게 된 것이다.
상이 주강에 나아가 《서전》의 반경편을 강하였다. 강이 끝난 뒤에 전 승지 신천익(愼天翊)을 불러 보았다. 상이 천익에게 이르기를,
"저번에 승지를 제수한 것은 내가 머물려두고 싶은 뜻에서였는데 병으로 직무를 보지 못하였으니, 내 서운하였었다. 요즘은 병이 나았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아직도 아픈 데가 있습니다. 신이 국휼(國恤) 초에 한 소장을 올려서 맨 앞에 마음을 바르게 하는 공부에 대해서 진술하면서 시작은 있고 결과가 없는 것으로 경계의 말씀을 드렸었는데, 즉위하신 지 3년 만에 시사(時事)가 이와 같고 천재(天災)가 거듭 나타나니, 전하의 정령(政令)에 미진한 바가 있는가 신은 염려됩니다. 임금이 희노(喜怒)를 너무 드러내면 천지의 포용하는 덕에 손상이 있으니 전하께서 화평한 정치를 하시면 조야(朝野)가 모두 화평한 복을 받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금 들은 이 말들은 지론(至論)이 아닌 것이 없으니 유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천익이 아뢰기를,
"오륜(五倫)이 밝지 않으면 어떻게 나라가 제대로 되겠습니까. 또 과거를 보러간 사자(士子)에 대하여 평소에 그들을 미리 교훈하지 못하고는 법을 범하면 죄를 줍니다. 시지(試紙)의 피봉(皮封)까지도 그 규격을 세 번씩이나 고치고 있으니 참으로 한심합니다. 고관(考官)이 만일 공명 정대하다면 비록 피봉을 열어보았다 하더라도 그 지은 글을 고시할 때 어찌 사사로움을 따를 리가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시지의 피봉은 여러 번 그 규격을 고친 폐단이 과연 경의 말과 같다. 지금부터 고관은 두려워하고 삼가는 마음으로 시험을 보이지 않아서는 아니될 것이다. 오륜이 밝지 못함은 모두 내가 부덕하여 제대로 인솔하지 못한 소치이다만 윤기(倫紀)의 변괴가 매월 생기고 있으므로 나는 밤낮으로 걱정하고 두려워하여 담당자를 신칙(申飭)할 대로 신칙하고 있는데도 그 효과를 보지 못하였다."
하였다. 천익이 갑자기 물러가자 상이 입시 승지 조계원(趙啓遠)에게 이르기를,
"신천익이 왜 그리 갑자기 물러가는가. 내가 또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었는데 미처 말하지 못했다. 이 사람은 행동거지가 심상하지 않고 언어가 꾸밈없이 바르며 문채를 숭상하지 않으니, 유속(流俗)과 다름이 있다."
하였다. 정언 서필원(徐必遠)이 입시하여 아뢰기를,
"한필원(韓必遠) 등의 일에 대해서 ‘다시 자세히 알아보라.’는 분부를 하셨으나, 이는 음침한 곳에 숨겨진 것이 아니고 드러난 지 이미 오래여서 온 나라 사람들이 끊임없이 말하고 있는 일입니다. 이완(李浣)은 일찍이 우윤(右尹)을 지냈기 때문에 금리(禁吏)를 꾸짖어 손을 쓰지 못하게 하는 등 더욱 방자하였으니, 다시 알아볼 만한 일이 없습니다. 한필원은 파직하고 서용치 말며, 이완은 파직하고, 조흡(趙潝)은 체차하고, 윤경(尹絅)은 무겁게 추고하소서."
하니, 따랐다. 또 아뢰기를,
"신하가 죽은 뒤에 시호를 얻는 것은 지극한 성전(盛典)이므로 오로지 사실만을 기록해야 할 것인데, 윤방에게 내린 시호는 사실과 걸맞지 않습니다. 공론이 있고 옥당이 차자를 올려 논박하였으니 개정하소서."
하였다. 여러 번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7월 23일 무술
봉산(鳳山) 사람 정득(鄭得)이 객사(客使)가 있을 당시 쇄마(刷馬) 3백 33필의 값을 스스로 준비하여 관에 알려 왔었으므로, 감사가 상을 논할 일로 계청하니, 가자(加資)하도록 명하였다.
충홍도(忠洪道) 은산(恩山) 등 여덟 고을에 홍수가 졌다.
비변사가 조석윤(趙錫胤)으로 대동청 당상(大同廳堂上)에 차임할 것을 아뢰었는데 조석윤이 누차 상소하여 굳이 사양하였다. 그의 상소 대략에,
"대동법(大同法)을 단지 호서(湖西)에만 시행한다면 융통하여 고루 구제하는 의미가 자못 없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만일 대동법을 시행한다면 호서와 호남 그 어느 곳도 폐지할 수 없겠으나, 오히려 공안(貢案)을 먼저 바로잡는 일이 시행하기 쉽고 백성이 동요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일은 커다란 시행에 관계되니, 만일 사세에 장애가 많고 백성들이 불편을 느끼게 된다면 도리어 백성과 편안히 지내면서 복잡하게 개정하는 일을 하지 않은 것만 못할 것입니다. 신은 감히 이미 정해진 의논을 뒤흔들려는 것이 아닙니다. 신의 좁은 소견은 전에 이미 탑전에서 진달하였으니, 삼가 원하건대, 대동청 당상의 직임을 속히 갈아주소서."
하니, 답하기를,
"대동청 당상의 직임을 이렇게 굳이 사양하여 억지로 일을 보게 하기는 어려울 듯하니, 해당 관사로 하여금 의논해서 처리하도록 해야겠다. 그리고 호서에서는 오히려 백성들이 대동법을 불편하게 여긴다고 하면서 무엇 때문에 호서·호남 그 어느 한 곳만 폐지할 수는 없다고 하며, 대동법이 이와 같이 행하기 어려운 것인데 어찌 꼭 공안을 바로잡으려 하는가? 나는 실로 이해하지 못하겠다."
하고, 그 상소를 비변사에 내렸다. 비변사가 복계(覆啓)하기를,
"대동법은 봄·가을로 쌀과 베를 받아들이고 그 외에는 1년내내 편안히 누워 지내어 마치 영주(永州)의 뱀잡이와 다를 게 없고 보면 백성과 더불어 편안히 지내는 것이 이보다 더 나은 것이 없는데, 조석윤의 상소 사연은 불편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혹시 부역을 고르게 하여 백성을 휴식시킬 만한 다른 계책이 특별히 있어서인지는 모르겠으나, 그의 소견이 신 등과 상반되므로 형편상 함께 일할 수 없으니 대동청 당상을 고쳐 차임하소서."
하니, 따랐다.
7월 24일 기해
상이 주강에 나아가 《서전》의 반경편을 강하였다. 강이 끝나자, 지경연(知經筵) 이후원(李厚源)이 아뢰기를,
"신이 가례 도감(嘉禮都監)에 있으면서 행사 날짜가 급박하여 미처 갖추지 못한 물품들이 너무도 많은데 《을유책례등록(乙酉冊禮謄錄)》을 가져다가 상고하였더니, 거기에 삭감된 것이 이번 경우와는 판이하게 달랐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모름지기 더욱 참작하여 혹시라도 남용되는 일이 없게 해야 옳을 것이다. 근일에는 큰 예식이 겹쳤는데 지금 도감(都監)으로 이름을 하여 풍성하고 사치스러운 듯한 감이 있으니, 나는 그 때문에 염려스럽다. 도제조와 경 등도 절약하게 하기를 힘써야 할 것이다."
하였다. 또 이르기를,
"사람들은 남쪽 지방의 토적(土賊)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하니, 이후원이 대답하기를,
"사람들이 모두 걱정을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는 좀도둑과 비교가 안 되니, 필시 지휘하는 큰 괴수가 있을 것이다."
하였다. 이후원이 아뢰기를,
"지금 만일 그 무리를 모조리 제거하려고 하면 백성이 장차 남아나지 못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러나 명(明)나라가 끝내는 유적(流賊)에게 망하였으니, 이 또한 두려워할 만한 존재이다."
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본조(本曹) 정유년 《등록》을 가져다가 상고하였더니, 세자빈(世子嬪)을 세 차례에 걸쳐 간택할 때에 대신과 예관을 불러서 물어본 예가 있었습니다. 또 세자빈을 골라 정한 뒤에 응당 행해야 할 절목 중에는 사당에 고하는 예가 있습니다. 《오례의(五禮儀)》 가례조(嘉禮條)에 ‘기일을 고한 뒤 빈을 책봉하기 전에 길일을 택하여 사당에 고한다.[告期後冊嬪前擇吉告廟]’는 조문이 있으니, 이제 세자빈을 세 차례에 걸쳐 간택한 후 사당에 고하는 일은 이에 의하여 거행하는 것이 마땅할 것 같습니다. 세자의 가례 때 진하(陳賀)·반교(頒敎)·반사(頒赦)의 절목은 조종조의 옛 규례가 세대마다 각각 다릅니다. 일찍이 정묘년에 본조가 계품하자 인조 대왕이 중종조의 옛 규례에 따라 행하도록 명하였으므로, 그때에는 가례를 행한 그 이튿날 하례와 반교·반사를 행하였습니다. 이에 의하여 거행하소서."
하니, 따랐다.
상이 하교하기를,
"지금 세 차례의 경례(慶禮)에 각전(各殿)마다 모두 방물(方物)을 봉진(封進)하는 일이 있게 되는데, 공사간에 물력이 고갈된 이 때에 4전(殿)에 봉진될 세 차례의 방물을 통계하면 열 두 차례가 된다. 설사 물력이 풍부할 때라 하더라도 어찌 한 달 내에 모두 마련하도록 독책할 수 있겠으며 또한 어찌 내 마음에 편할 리가 있겠는가. 제도(諸道)로 하여금 단지 각전에 한 차례의 방물만 봉진하게 하라."
하니, 예조가 아뢰기를,
"지금 막중한 경사를 당하여 신하가 윗전을 대접하는 의식에 부족함이 있을 수 없으니, 세 차례의 경례(慶禮)에 모두 방물을 봉진하게 하소서."
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예조가 아뢰기를,
"왕대비의 존호 올리는 의식의 예행 연습은 마땅히 통명전(通明殿)에서 행해야 하는데 《오례의》에 ‘무릇 경례의 진하 때에는 중전은 내정전에 납시고 대전은 정전에 납시어 하례를 받는다.[凡慶禮陳賀時 中殿御內正殿 大殿御正殿受賀]’는 조문이 있으니, 이번 존호를 올릴 때 전하께서는 인정전(仁政殿)에 납시고 백관은 인정전의 뜨락에서 진하해야겠지만 왕대비께서는 어느 전에 납시고 백관은 어느 뜰에서 진하해야 하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그때에 가서 내전으로부터 품의하여 처리해야겠지만 백관은 바깥 뜰에서 진하하는 것이 마땅할 듯하다."
하였다.
7월 25일 경자
홍청도(洪淸道) 대흥현(大興縣)에 홍수가 져서 사석(沙石)이 무너져 민가를 덮쳐서 사상자를 냈는데, 특별히 휼전(恤典)을 베풀도록 명하였다.
식년 감시 복시(式年監試覆試)를 실시하여 생원(生員) 이원록(李元祿)·진사(進士) 이익상(李翊相) 등 2백 인을 뽑았다.
상이 주강에 나아가 《서전》 반경편을 강하였다.
강화부 유수(江華府留守) 이만(李曼)과 남양 현감(南陽縣監) 심구(沈玖)가 임지로 떠나면서 하직 인사를 드리니 직접 불러보고 유시하여 보냈다.
예조가 아뢰기를,
"왕대비에게 존호를 올리는 데 대한 책보(冊寶)를 어람(御覽)하는 예를 내일 신시(申時)에 행하려 하는데, 《갑자년상존호등록》을 상고하였더니, ‘책보를 어람하는 날, 도감 도제조(都監都提調) 이하가 흑단령(黑團領) 차림으로 모셔 갔으며, 또 책보가 담긴 요채여(腰綵輿)가 궁궐에 들어갈 때 의장(儀仗)으로 고훤 군사 부장(考喧軍士部將)만을 늘어 세우고 당부관(當部官)이 앞에서 책보를 인도하여 융정전(隆政殿)에 봉안한 다음에 정원이 승전색(承傳色)에게 청하여 올리고, 어람이 끝나면 도로 도감에다 봉안하는데 도청(都廳) 이하가 모시고 갔다.’ 하였습니다. 이것으로 보면, 책보를 어람한 뒤에는 도로 도감에다 봉안하였다가 존호를 올리는 날에 가서 다시 모시고 가는 것이 마땅할 듯한데 저번에 대신과 삼사가 빈청(貧廳)에 모여서 이미 강론해 정하였습니다. 내일 책보를 어람하는 예도 인열 왕후(仁烈王后)의 책보를 어람할 때의 전례에 의하여 내별전(內別殿)에 봉안하였다가 존호를 올리는 날 모시고 나와서 바치는 것이 마땅하겠으니, 도감으로 하여금 이에 의하여 거행케 하소서. 또 백관이 전문(箋文)을 올릴 때에는 앞에서 인도하며 고취(鼓吹)하는 절목이 있고, 책보를 올릴 때에는 의장만 있고 고취가 없으니 자못 흠결된 것 같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이미 《등록》이 있으니 모두 전례에 의하여 거행하라."
하였다.
7월 25일 경자
정언 민정중(閔鼎重)이 인피하기를,
"신이 삼가 전 장령 정인경(鄭麟卿)의 함사(緘辭)를 보고 몹시 놀라움을 금하지 못하였습니다. 대개 그 선상(船商)은 태안(泰安) 사는 박대충(朴大忠)입니다. 박대충이 일찍이 서울 사람 김묵선(金墨善)에게 빚을 지고 여러 해 동안 갚지 못하였습니다. 김묵선이 박대충의 배를 빼앗을 심산으로 ‘이익을 함께 보자.’는 말로 인경의 형 정익경(鄭翼卿)을 유혹하고 이어서 그 아우 인경에게 부탁하여 그의 갈도인(喝導人)으로 하여금 그 위력을 빙자해 박대충을 포박해 오게 한 다음, 수일 간 형장을 쳐 협박하여 강제로 문서를 작성하여 그 상환 기한을 물려서 결국은 그 배를 빼앗았습니다.
지금 인경의 함사에 말한 전 세마(洗馬) 신승(申昇)은 바로 신 전처(前妻)의 아비인데, 신이 장인의 말을 사적으로 들어준 것처럼 만들고, 또 박대충을 신 처가의 여종 남편이라고 거짓 꾸며 남을 모함하고 스스로 변명할 소지로 삼았으니, 신은 그 위인의 망령됨을 개탄하는 바입니다. 시비 내막은 막론하고라도 이미 갈도인을 보냈고 또 선원을 구타하여 상해를 입히기까지 하였으니, 매우 놀랄 만한 일입니다. 이는 실로 인경이 탄핵을 입게 된 원인인데, 이제 도리어 허물을 그 형 익경에게 돌리고 있으니 과연 어떠한 사람입니까. 신은 나이가 젊고 뜻이 경망한 탓으로 망령되이 한번 논계했다가 남에게 무함을 당하였으니 재직할 수 없습니다. 신의 직을 갈아주소서."
하고, 대사간 채유후(蔡𥙿後)와 사간 이응시(李應蓍)도 이 일로 인피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으나, 민정중 등은 모두 물러나 물론을 기다렸다. 헌부가 아뢰기를,
"민정중 등이 모두 인혐하고 물러났습니다만, 일에 따라 논열(論列)하는 것은 서로 바로잡아주는 도리에 지나지 않고 스스로 밝힌 말들도 비방하는 뜻이 아닙니다. 가부를 논할 때에 이미 의논을 제기한 사람이 있어서 규례에 따라 참석하였으므로 별로 피할 만한 혐의가 없으니, 정언 민정중, 대사간 채유후, 사간 이응시를 모두 출사하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7월 26일 신축
상이 선정전(宣政殿)에 나아가 상참(常參)을 행하였다.
상이 조강에 나아가 《서전》의 반경편을 강하였다. 강이 끝나자 영경연(領經筵) 이시백(李時白)이 아뢰기를,
"남한산성(南漢山城)의 수첩군(守堞軍)을 바꾸어 정하는 일에 대하여 일찍이 계품(啓稟)하였는데, 오늘 마침 총융사(摠戎使)와 수어사(守禦使)가 다 입시하였으니, 탑전에서 의논해 정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그러라고 하였다. 이시백이 아뢰기를,
"영의정 김육(金堉)의 말을 들어보니 죽산(竹山)의 군사를 남한산성에 이속(移屬)시키려 한다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수어사 이시방이 아뢰기를,
"그렇다면 홍청도(洪淸道) 두 영(營)의 군사는 본도에 환속시킬 것입니까?"
하니, 상이 그렇다고 하였다. 이시방이 아뢰기를,
"죽산영(竹山營)을 남한 산성에 이속시킨다면 용인(龍仁)·양지(陽智)의 연습군(鍊習軍) 3백여 명은 불가불 총융사에게 예속시켜야 할 것입니다."
하고, 이시백이 아뢰기를,
"이 군사는 총융사가 연습시킨 지 이미 오래니, 만일 이 군사가 없다면 대장으로서의 면모가 없게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사세가 그와 같다면 다만 그 군사를 총융사에게 예속시키고, 또 죽산의 군사와 충주(忠州)의 군사를 서로 바꾸어야 옳을 것이다."
하였다.
영의정 김육이 존숭 도감(尊崇都監)의 제조(提調)·낭청(郞廳)을 거느리고 존숭 책보(尊崇冊寶)를 받들어 올렸다.
호군(護軍) 김응조(金應祖)가 상소하기를,
"지금 제독(提督)과 교수(敎授)를 설치한 것은 공부를 권장하는 도리를 다하려는 것이니, 전하께서 해조와 여러 도의 감사를 신칙하여 《대전(大典)》에 의해 전최(殿最)의 법을 엄격하게 하도록 하고, 수시로 암행 어사를 파견하여 그 중에서 더욱 태만한 자를 찾아내어 중법으로 다스린다면 머지 않아 나라 안에 현송(絃誦)의 소리가 들릴 것입니다. 인열 왕후(仁烈王后)의 시책문(諡冊文)이 병화(兵火)에 유실되어 거의 없어져 전할 수 없게 되었으니, 어찌 한심하지 않습니까. 신의 어리석은 생각에는 열성(列聖)의 행장(行狀)·책문(冊文)·지문(誌文)은 사기(史記)에 비할 바가 아니니 만일 찬수청(纂修廳)으로 하여금 모아서 권질(卷秩)을 이룬 다음, 인쇄하여 사고(史庫)에 간직하고, 또 사대부들로 하여금 모두 인출할 수 있게 하여 널리 배포하도록 하신다면 영구히 전할 수 있을 것으로 여깁니다.
신이 일찍이 춘궁(春宮)에서 모시고 있을 때 전하께서 북경(北京)에서 보낸 예폐(禮幣)를 호조로 보내신 일을 보았는데, 그때 일국의 신민들이 너나없이 기뻐하여 진주나 황금을 귀히 여기지 않는 옛날의 치화를 볼 수 있으리라 기대하였습니다. 그런데 저번에 신이 정원에 있을 때 가만히 뵙건대, 전하께서 공주의 집에 소속된 서산(瑞山)의 염분(鹽盆)과 어전(漁箭)의 일로 심지어 엄한 분부를 내리어 어조가 자못 화평함이 결여되었으니, 신이 그날 크게 실망하여 밤새도록 뜬눈으로 지새웠습니다. 전하께서 공주를 자신보다 더 아껴서 그렇게 하신 것 같습니다만 장차 어떻게 왕자나 조정 벼슬아치들에 의해 시작되는 폐단을 금하시겠습니까. 이는 전하께서 자신의 사욕을 억제하고 수양하는 실천에 있어 미진한 바가 있어서 그런 것입니다. 삼가 원하옵건대 전하께서는 다시 심사 숙고하소서."
하니, 상이 너그러이 비답하고, 그 상소를 예조에 내렸다. 예조가 열성의 행장·책문·지문을 인출할 일에 대해 대신들에게 의논할 것을 청하니, 따랐다. 영중추부사 이경여(李敬輿)가 의논드리기를,
"열성의 성덕 신공(盛德神功) 및 선후(先后)의 휘음 의범(徽音懿範)은 사책(史冊)에 실려 있어 영원히 후세에 교훈으로 전하고 지문과 행장도 아울러 기록되어 있으니, 별도로 모아서 편집할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단, 우리 나라는 문헌을 징빙할 수 없고 사실의 기록이 미비하므로 각대(各代)의 지문과 행장이 실록에 누락됨이 없지 않을 듯싶습니다. 그러니 사국(史局)으로 하여금 태조(太祖) 이하 대왕·왕비의 지문과 행장을 상고하고 열람하여 과연 실리지 않은 것이 있으면 보고 듣는 대로 수집하여 사책에 실린 것과 합쳐서 별책을 만들어 사고에 간직하게 한다면 후세에 전하는 데에 보탬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사대부들로 하여금 인출하여 널리 배포하도록 하는 일의 경우, 혹시 근대의 문자 가운데 오늘날에 드러내 서는 안 될 것도 있다고 생각되는데, 이는 비록 지나친 염려이긴 합니다마는 역시 소홀히 해서는 아니될 것입니다."
하고, 영의정 김육과 좌의정 이시백은 의논드리기를,
"우리 나라 열성들의 행장·책문·지문은 대대로 각각 있었으나 간행한 적이 있었다는 것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누구나 성덕(聖德)을 선양하여 후세에 보이고 싶지마는 일에 반드시 예(禮)에 해당되지 않는 것이 있으니, 그 의도가 있어서 그런 것입니다. 제왕의 공덕은 일월처럼 밝아 사해에 넘치고 만세에 전하기 때문에 요(堯)·순(舜) 이래로 사책 이외에 공덕을 기록하여 찬양한 일이 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국조의 여러 능(陵) 중에서 건원릉(乾元陵)에만 신도비(神道碑)가 있을 뿐입니다. 그 뒤에 신도비 세우는 것을 부당한 일로 여기었기 때문에 각 능에는 다시금 신도비가 없게 되었으니, 그 뜻을 또한 볼 수 있습니다. 행장·책문·지문은 이미 간행된 적이 없고 여러 능에도 신도비를 세운 규례가 없으니, 조종을 본받으려 한다면 이것이 그 중 가장 큰 일입니다. 신 등은 감히 별도로 다른 의논이 없습니다."
하니, 이경여의 의논에 따르도록 명하였다.
7월 27일 임인
영의정 김육, 좌의정 이시백, 예조 판서 박서, 참판 민응형(閔應亨)·참의 민응협(閔應協)을 불러 빈청(賓廳)에 모아 놓고 하교하기를,
"오늘은 바로 세자빈을 세 번째 간택하는 날이다. 세마(洗馬) 김우명(金佑明)의 딸로 정하고 싶은데 어떻겠는가?"
하니, 이시백 등이 아뢰기를,
"삼가 성교를 받고 보니 진실로 신민의 바람에 부합됩니다. 실로 종사의 무궁한 복이므로 신 등은 매우 기쁜 마음을 금하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알았다고 답하였다. 영의정 김육은 바로 우명의 아버지였기 때문에 참여하지 않았다.
세 번째 간택하여 빈(嬪)을 정한 뒤에 세자빈이 별궁(別宮)에 나아갔다.
정언 민정중(閔鼎重)이 인피하기를,
"저번에 신이 이완(李浣)을 논핵한 것은 이완더러 소를 도살하여 이익을 꾀했다고 한 것이 아닙니다. 이완은 재상의 반열에 있으면서 국가의 금법(禁法)을 범하였으므로 규탄, 징계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이를 논계하여 윤허를 받았던 것입니다. 삼가 듣건대 근자에 무신(武臣) 엄황(嚴愰)이 대론(臺論)을 무시한 채 이완을 위하여 경연 석상에서 신구(伸救)하였다 하니, 그 외람됨이 그지없습니다. 그래서 바야흐로 논핵하려고 하는데 계속 들리는 바에 의하면 어제 조강 때 좌의정 이시백이 또 이완의 일에 대해 진언하면서 조사하여 밝힐 것을 청하기까지 하였다 하니, 신은 그 소식을 듣고는 경악을 금하지 못하였습니다. 고금 천하에 대론을 조사하여 밝히는 나라가 어디 있겠습니까. 이완은 유명한 아버지의 아들로 세상에서 기리는 바 되어 근시(近侍)의 직위에 임명되기까지 하였으니, 이완의 분의(分義)에 있어서는 삼가고 자제하여 나라의 은혜에 보답할 길을 생각하여야 할 것인데, 교만 방자하고 꺼리는 바가 없어 집터를 널리 차지하여 새로 거대한 집을 지었으므로 남들의 말이 자자하고 여론이 분노하고 있습니다. 이 어찌 청렴하고 근신하는 자가 할 바이겠습니까. 신이 논하였다가 도리어 남의 기롱을 받은 것은 신이 가볍게 여겨졌기 때문이니, 신의 직을 갈아주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헌부가 아뢰기를,
"사대부 사이에서는 염치가 중요한데 정인경은 대간과 시종으로 드나들던 사람으로서 이미 불법에 걸려 탄핵을 입었으니, 함답(緘答)할 때에 대략 실상만을 진술하여야 할 것인데, 감히 장황하게 늘어놓은 말들은 마치 소송을 벌린 자처럼 하였고, 맺는 말에 가서는 잘못을 그의 형에게로 돌리었으니, 염치가 땅을 쓴듯이 없어 맑은 조정을 욕되게 하였습니다. 사판(仕版)에서 제명하소서."
하니, 단지 삭직만을 허락하였다.
간원이 아뢰기를,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엄황은 대론을 무시한 채 감히 이완을 위하여 신구하였으니, 외람되기 그지없습니다. 추고하소서."
하였는데, 여러 번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7월 28일 계묘
전남도 여산(礪山) 등 24읍과 강원도 삼척(三陟) 등 16읍에 홍수가 졌다.
대사성 황감(黃㦿)이 상소하기를,
"삼가 듣건대, 요즘 외방의 주부(州府)에 다시 제독(提督)·교수(敎授) 등의 벼슬을 설치하였다 하니, 이는 정사의 큰 것으로 매우 성대한 일입니다. 이것이 잘 행해지면 다른 일도 이룰 수 있고 이것이 폐지되면 호령이 장차 시행되지 않을 것이니, 절목을 살펴 정하고 사람을 신중하게 선택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사람을 선택하는 책임은 이조에 있고 절목에 관한 책임은 예부에 있어 각각 맡은 바가 있으므로 진실로 사람마다 관여할 바가 아니지만, 향교(鄕校)의 폐단과 같은 일은 여러 해가 되었으니, 반드시 잘못된 규례를 대략 변경한 다음에야 교도(敎導)하는 관원을 설치하여 훈육하는 법을 실시할 수 있을 것입니다.
향교도 역시 선성(先聖)과 선유(先儒)를 존숭하기 위한 곳으로 태학(太學)의 제도와 한결같은데, 지금의 선비들은 교적(校籍)에 속하는 것을 싫어하지 않은 자가 없으므로 제도(諸道)의 교생(校生)들이 모두 평민과 서얼의 지류이고 세벌(世閥)·사족(士族)은 전혀 없습니다. 일찍이 듣기로는 양남(兩南)의 교적(校籍)에 사족이 꽤 많았다고 하는데, 근년에 와서는 점점 전만 못하여 혹 잡류(雜流)의 입교도 허락하므로 선비의 기풍이 날로 무너지고 나쁜 폐습이 더욱 고질이 되어, 교생(校生)이라 하면 사람들이 모두 천시하여 선비로 대접하지 않고 있으니, 이것이 어찌 선비의 수치가 아니겠습니까.
사족은 통속된 바가 없으므로 도사가 시강(試講)하지 못하고 감사도 고문(考問)할 수 없으며, 단지 과거에만 응할 뿐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에 와서 그 누가 기꺼이 제독이나 교수의 부림에 따라 사제의 예의를 닦으려고 하겠습니까. 그것이 잘 시행되지 못할 것은 필연적인 일입니다. 국가가 권장하는 방법은 진실로 문벌(門閥)에 차이를 두어서는 아니되지만, 장차 이 법을 시행하려 하면서 사족에게 먼저 실시하지 않는다면 실로 옛 법의 아름다운 뜻이 아닐 것입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지금의 절목 중에서 먼저 이 한 조문을 들어서 제도(諸道)에 신칙하되, 무릇 유학에 종사하면서 교적(校籍)에 올라 있지 않은 자는 과거에 응하는 것을 허락치 말고 이를 범하는 경우에는 난입률(闌入律)처럼 관사(官司)도 함께 죄줄 것이며, 지금부터 그 기한을 정하여 신적(新籍)에 드는 것을 허락하고 고과(考課)하는 법에 신구(新舊)의 차이를 두지 않게 한다면, 그 일이 행해질 수 있을 것으로 여깁니다. 의론자들은 ‘주(州)·부(府)·군(郡)·현(縣)에 각각 정원이 있는데, 그 정원 이외의 사람들은 앞으로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라고 하고, 또 ‘사족(士族)과 한족(寒族)이 함께 있으면 다투는 일이 없겠는가.’ 하지만, 신의 어리석은 생각에는, 제도(諸道)의 요즘 규례에 액내(額內)와 액외(額外)라는 것이 이미 있으니 아무리 많다 하더라도 아무런 해로움이 없다고 봅니다. 또 스승된 자들이 모두 흐뭇하게 교육하여 오직 성취시키기만을 힘쓴다면 반드시 일시의 원망이 없을 것이니, 1기(紀) 내에 교적(校籍)이 저절로 깨끗해 질 수 있을 것입니다. 수십 년 이래로 마땅히 행해져야 할 일이 중지된 것은 모두 곁에서 동요시켰기 때문이니, 동요시키지 않는다면 끝내는 성사될 것입니다. 그러나 외부의 일을 우선으로 하고 내부의 일을 우선으로 하지 않는다면 또한 반드시 성사하지 못할 것입니다.
신이 삼가 보건대, 성균관(成均館)내의 생원(生員)·진사(進士)로서 거재(居齋)하는 자는 겨우 수십 명인데 이들은 대비 원점(大比圓點)108) 을 위해서이고, 하재생(下齋生) 20명과 사학생(四學生) 각 5명은 모두 가난한 선비로서 대부분 지방에서 온 자들입니다. 일찍이 경사(京師)는 인구가 많고 관학(館學)도 규모가 성대하다고 일컬어져 왔는데, 양성하는 바가 고작 이 정도이니, 그것을 교육이라 말할 수 있으며 그것을 권장이라 이를 수 있겠습니까. 이러 유생들은 오히려 통속된 바가 있어서 더러는 시제(試製)를 하기도 하고 더러는 고강(考講)을 하기도 하여 대충 옛 규법을 폐지하지 않았습니다마는, 허다한 생원과 진사, 허다한 유학(幼學), 명문 세족의 자제들은 일찍이 한 사람도 거재하는 자가 있는 것을 보지 못하였고, 단지 승보시(陞補試)를 차례로 보이는 날에만 금방 모였다 금방 흩어지는데, 그러한 폐습이 쌓인 지 이미 오래이니, 그것은 대개 통속된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경사에 있는 유학들을 지금부터 사학(四學)에 나누어 예속시켜 신적(新籍)을 만들고, 학문의 과정을 제정하여 매월 며칠씩 모여서 강학하게 하고 사유 제관(師儒諸官)을 나누어 보내서 고시(考試)하게 하며, 이 적(籍)에 올라 있지 않은 자는 과거 응시를 허락하지 말고 여러 번 회강(會講)에 참여하지 않은 자도 역시 허락하지 말 것이며, 그 시지(試紙)에는 반드시 ‘어디 학생’ 이라고 쓰고 관사(官司)가 그것을 규찰(糾察)하며, 그렇게 하지 않는 자는 죄를 줄 것이며, 생원과 진사는 매월 며칠씩 성균관에 모여서 학업을 강론케 하고 그 과거에 응하는 방식도 역시 같게 하면 거의 통속이 있어서 교육이 행해질 수 있을 것이라 여겨집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그들이 강할 책은 먼저 《소학(小學)》과 《가례(家禮)》 중에서 배운 것을 외우게 하고, 그 스승된 자는 그들이 아직 배우지 않은 글을 말로 가르쳐 주고 논란을 펼 것이며, 이미 그 과업을 다 마치면 그 책을 두루 읽고 나서 처음으로 돌아와 다시 읽어가되, 비록 수십 번을 반복해 읽었더라도 오히려 중지하지 않아야 바야흐로 착실한 공부가 될 수 있을 것으로 여깁니다. 대개 경서(經書)의 경우에는 강시(講試)가 있고 제술(製述)의 경우에는 과정(科程)이 있는데, 오직 이 두 책만은 선비들이 항상 공부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 진실로 사람들마다 강습을 한다면 그것이 풍화(風化)의 근본이 됨이 어찌 얕다고 하겠습니까. 이로 말미암아 또 《근사록(近思錄)》과 《심경(心經)》 등 여러 책을 강독하는 것도 역시 순서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명망과 실력이 다 훌륭한 자를 얻어 스승으로 삼아야 생도들의 마음을 따르게 할 수 있고 국법(國法)을 시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과 같은 자는 감히 감당할 바 아니니, 성명께서는 적임자를 얻어 쓰소서."
하니, 그 상소를 예조에 내렸다. 이에 대해 예조가 복계하기를,
"상소 중에서 말한 ‘무릇 유학에 종사하면서 교적에 이름이 올라 있지 않은 자는 과거에 응하는 것을 허락치 말게 해야 한다.’고 한 것은 의견이 없지 않고 여러 사람의 의논도 그러합니다. 다만 법전에 주·부·군·현에 각각 정원이 있으니 당초에 헤아려 정한 본의가 어떠한지는 비록 알 수 없으나, 지금 만일 그 인원의 수를 정하지 않고 모두를 받아들인다면 이는 대단한 변통이니, 경솔하게 마음대로 정하기 어렵습니다. 교수를 다시 설치한 것은 오랫동안 폐지된 뒤에 나온 의논이니, 절목을 살펴 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일찍이 병자년 무렵에 해조가 정한 절목이 자못 상세하였는데, 본조에 징빙할 만한 문적이 없어서 지금 외방에서 가져오려 하니, 잠시 그것이 오기를 기다려서 참고하여 정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사학(四學)의 《청금록(靑衿錄)》은 본래 정해진 숫자가 없으니 서울에 있는 유학(幼學)들을 사학에 나누어 예속시키고, 이름이 유안(儒案)에 빠진 자에 대해 과거 응시를 허락치 않는 것은 착실한 일이므로 역시 방애됨이 없으니, 지금부터 행하는 것도 마땅할 듯합니다. 매월 며칠씩 모여서 학업을 강구하게 하고 사유(師儒)를 나누어 보내서 그들이 학업을 부지런히 했는가의 여부를 점검해 나가도록 하는 것은 실로 권장하는 방법에 적합합니다. 단, 사서(四書)와 삼경(三經)은 바로 선비가 경서를 규명하는 근본이거니와, 이 밖의 《소학》·《가례》·《심경》·《근사록》과 같은 것을 모두 외우게 한다는 것은 힘이 미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또한 혹시 침잠(沈潛)하고 완색(玩索)하는 공부에 해가 있기도 할 것입니다. 만일 익숙하게 읽고 자세하게 음미하였다가 선생의 앞에서 강론하면서 논란하도록 한다면, 한갓 장구(章句)만을 익히고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와는 비교해서 논할 수 없을 것이니, 사유(師儒)의 우두머리가 그 공정(功程)을 헤아려 알맞게 실시하는 데 달려 있습니다. 본관(本館)으로 하여금 익히 강론한 다음 품처(稟處)하여 서울과 지방이 일체로 거행할 소지로 삼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7월 29일 갑진
예조가 아뢰기를,
"능소에 참배할 때 입는 복색에 대해서 《오례의(五禮儀)》에 실린 것은, 전하는 익선관(翼善冠)에 곤룡포(袞龍袍)를 입고, 백관(百官)은 흑단령(黑團領)의 차림으로 어가(御駕)를 호종(扈從)한다고 하였으니, 이것은 대개 친히 제사에 임할 때 재계하는 뜻을 취한 것입니다. 또 신해년에 능소를 참배할 때의 절목을 상고해 보니 대궐을 나갈 때 전례에 의하여 백관은 융복(戎服) 차림으로 모립(帽笠)에 깃털을 꽂지 않고 어가를 호종, 시위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주상의 복장을 따른 것 같은데 전하의 복색에 대해서는 기록된 책이 없으니, 지금 능소에 가실 때 무슨 복색을 써야 하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선조(先朝)에서 능소에 참배할 때의 전례를 상고해 내어 품처하라."
하였다. 예조가 복계하기를,
"선조에서 능소에 참배할 때의 복색에 대해 등록을 상고해 보았더니, 기사년 육경원(毓慶園)에 참배할 때 어가를 따른 백관들은 모두 융복 차림으로 모립에 깃털을 꽂지 않고 환궁할 때는 모립에 깃털을 꽂았으니, 이 예에 의거하는 것이 마땅할 것 같습니다. 전하께서 융복을 입으시므로 백관들도 성상의 복장에 따라 융복 차림으로 모립에 깃털만 꽂지 않고 어가를 호종하는 것이니, 이런 식으로 거행하소서."
하니, 따랐다.
7월 30일 을사
오준(吳竣)을 좌빈객(左賓客)으로, 채충원(蔡忠元)을 헌납으로, 이석(李晳)을 부교리로, 김휘(金徽)와 이천기(李天基)를 이조 좌랑으로 삼았다.
훈련 도감이 아뢰기를,
"강계(江界)와 갑산(甲山) 사이에 옛날 여연(閭延)·무창(茂昌) 등의 고을이 있었는데, 토질이 기름져서 오곡(五穀)의 재배에 알맞습니다. 그런데 그 땅이 파저 야인(波狙野人)과 가까이 있기 때문에 폐허가 된 지 백여 년이 되어가니, 진실로 매우 애석합니다. 지금은 파저 부락이 철거된 지 이미 오래입니다. 지난해에 그 고을 백성 전순민(田舜民) 등이 상소하여 옛 고을을 복구할 것을 청하였는데, 비국이 연혁을 이유로 어렵게 여겼기 때문에 감히 가벼이 의논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근자에 출신(出身) 이의(李嶬)라는 자가 일찍이 강계 부사(江界府使)의 부장이 되어 그 지방의 사정을 잘 알고 도감에다 글을 올리기를 ‘만일 백성을 모집하여 둔전(屯田)을 설치하는 일을 허락해 준다면 백여 호를 얻을 수 있고, 그 땅을 개간하면 해마다 수천 석의 곡식을 수확할 수 있으며, 또 쇳가루를 가려내고 납을 캐는 이익이 있으니, 둔전 별장(屯田別將)이 되어 전적으로 그 일을 감독하였으면 한다. 이는 현읍(縣邑)을 다시 설치하는 일과 다르니, 공한지에서 농사를 짓고 쇳가루를 가려내어 도감의 수용에 보조한다면 반드시 이익이 있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이 사람은 성실하고 부지런하니, 공문을 작성해 주고, 본부(本府)와 상의하여 둔전을 설치케 하고 그 성과를 책임지우소서."
하니, 답하기를,
"조종조에서 그 땅을 폐기한 의도는 필시 범연한 게 아닐 것이니, 한때 이득을 노리는 무리의 감언 이설로 인하여 경거 망동할 수는 없다."
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오례의(五禮儀)》에 ‘왕세자의 관례(冠禮) 때 빈(賓)은 단술을 왕세자에게 올리고 빈찬관(賓贊冠)109) 은 반찬을 자리 앞에 진설하며 예가 끝난 뒤에는 회소문(會所門) 안에서 빈객(賓客)을 모아놓고 주찬(酒饌)을 베풀어 회례(會禮)를 행한다.’고 하였습니다. 이 기록으로 본다면 단술과 반찬은 마땅히 예문에 의거하여 사옹원이 갖추어 올려야 할 것입니다만 찬품(饌品)을 어떻게 갖추는지는 의거할 글이 없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단술을 올리는 일은 연례(宴禮)와 다른데, 이미 ‘찬반(饌盤)을 빈찬관이 받들어 차려 놓는다.’ 하였고 보면 한 그릇의 포찬(脯饌)에 불과한 것이지 연례처럼 성대하게 과반(果盤)을 갖추지 않는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또 빈객을 모으는 날 준비하는 술과 찬품도 《오례의》에 실려 있지 않았습니다. 을축년 세자의 관례를 거행한 《등록(謄錄)》을 상고해 보았더니, 술은 내섬시(內贍寺)에서 진상하고 반찬은 예빈시(禮賓寺)에서 진상하였으며, 찬품의 종류도 의거할 수 있는데, 책례 도감(冊禮都監)이 감독하여 거행하였으니 지금도 도감 및 각 해사로 하여금 미리 갖추어서 거행케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다만 회례를 행하는 처소에 있어서는 《오례의》로 본다면, 빈(賓)·찬(贊)이 회소문 밖에 나가 섰다가 읍양(揖讓)하고 들어와서 회례를 행하였으니, 지금은 시민당(時敏堂) 뜰에서 회례를 행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세자가 회례에 참여하지 않는 바에야 뜰에서 회례를 행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였다. 예조가, 집영문(集英門) 밖에 장막을 치고 회례를 행할 것을 청하니,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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