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일 병오
천둥이 쳤다.
황해도 해주(海州) 등 여섯 고을에는 해일이 일었고, 봉산(鳳山) 등 일곱 고을에는 폭풍이 불고 큰물이 졌으며 황충(蝗虫)이 있었다.
8월 2일 정미
상이 하교하였다.
"왕대비(王大妃)에게 존호(尊號)를 올리는 일은 이 얼마나 경사스러운 예인가. 그런데 듣기로는 외명부(外命婦) 및 모든 옹주(翁主)와 왕자 부인 거의 모두가 병을 핑계하고 장차 참석하지 않으려 한다 하니 자못 진하(陳賀)할 의사가 없는 것이다. 인정과 예절로 헤아려 볼 때 어찌 이럴 수가 있겠는가. 해괴한 일이다. 이는 필시 해당 아문(衙門)의 관원이 그 즉시 알리지 않은 소치이니, 종친부(宗親府)·의빈부(儀賓府)의 낭청을 모두 파직하여 나라의 기강을 엄격하게 하라."
8월 3일 무신
채충원(蔡忠元)을 교리로, 민정중(閔鼎重)을 부수찬으로, 윤집(尹鏶)을 헌납으로, 이후(李垕)를 지평으로, 조사기(趙嗣基)를 정언으로 삼았다.
상이 대신과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김육(金堉)이 아뢰기를,
"호조 판서 원두표(元斗杓)는 본래 남을 이기기 좋아하는 병통이 있어 자기 마음에 싫은 것은 반드시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어찌 다른 사람이 없기에 이 사람으로 하여금 오래도록 재리의 권한을 전담하게 하십니까. 대동법(大同法)에 대한 의논이 있으면서부터 한번도 신을 직접 찾아와 의논한 적이 없었습니다. 체통이 이처럼 무너지고서야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사람이 자못 계려(計慮)가 있기 때문에 그 대임을 구하기 어려워서 오래도록 재임시킨 것이다."
하였다.
상이 주강에 나아가 《서전(書傳)》의 반경(盤庚)을 강하였다. 강이 끝나자, 시독관(侍讀官) 이정영(李正英)이 나아가 아뢰기를,
"부제학 이지항(李之恒)은 일찍이 홍산 현감(鴻山縣監)이 되었을 때 너무나 탐욕을 부렸습니다. 이와 같은 사람을 어찌 논사(論思)의 장관으로 둘 수 있겠습니까. 파직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런 말을 어찌 이처럼 갑자기 하는가."
하고, 상이 모든 신하들에게 묻기를,
"이 말이 옳은가?"
하니, 모두 아뢰기를,
"들은 바가 없습니다."
하자, 이정영이 아뢰기를,
"지금 비록 신하들에게 두루 물으셔도 필시 솔직하게 대답하지 않을 것입니다. 신이 그전부터 익히 들었기 때문에 항상 논핵하려 하였는데 지금 그가 신의 장관이 되자, 신이 수치스런 마음이 들었기 때문에 이에 감히 우러러 아뢰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만일 들은 바가 있다면 동료들과 상의해서 차자를 올려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갑작스레 말하니 나는 타당하지 않다고 여긴다."
하니, 이정영이 아뢰기를,
"그렇다면 신이 아뢴 것이 잘못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만일 그대의 말을 그르다고 하면 진실로 언로(言路)에 방해가 있겠으나 그대가 갑자기 말하였기 때문에 타당하지 않다고 한 것이다."
하였다. 동지경연(同知經筵) 민응형(閔應亨)이 아뢰기를,
"조석윤(趙錫胤)은 간할 만한 일은 그때마다 간언하니, 참으로 강직한 선비입니다. 그가 지난번에 상소로 이우빈(李友賓)의 일을 진달하였는데, 형조가 이 일을 복계하여 그 원통함을 바로 진술하였습니다. 이는 본래 조석윤의 말인데, 전하께서는 너무 심하게 꺾어 평온치 못한 하교까지 하셨습니다. 임금의 한 말씀, 한 행동에는 흥망이 달려 있습니다. 삼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형조의 복계에 대한 비답이 어찌 조석윤을 가리켜 한 것이겠는가."
하였다. 민응형이 또 아뢰기를,
"전하께서 모든 관사를 주의시켜 그 직무를 비우지 말도록 하셨으니, 그 뜻이 범연한 게 아닐 것입니다. 병조는 판서가 주로 사무를 결제하는데, 판서 구인후(具仁垕)는 늙은데다 사무가 번다하여 항상 시간이 딸리고 도시(都試)도 시행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판서가 일이 많으면 참판과 참의가 거행하여 직무를 비우는 폐단이 없게 하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하고, 이정영은 아뢰기를,
"구인후는 정순방(鄭順方)의 아들에게 사은(私恩)이 있어서 위장(衛將)을 임명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비판을 많이 하고 있는데, 지난번 구인후의 정고(呈告) 역시 그 일 때문이었습니다."
하니, 상이 답하지 않았다. 민응형이 아뢰기를,
"듣건대, 상방(尙方)에서 지금 비단을 짠다 하니, 듣기에 아름답지 못합니다. 그는 필시 왕대비의 옷감을 만들기 위해서일 터인데, 하필 그처럼 이익 없는 일을 합니까. 지난번에 사옹원의 사기(沙器)가 정교하지 못하다 하여 해당 낭관을 엄중 문책하니, 제조가 대죄(待罪)하고 있습니다. 전하께서는 어찌 세세한 일에는 살피고 큰 계책에는 소홀하십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이 오랫동안 입시하지 않아서 경계하는 말을 듣지 못하였는데, 오늘 이런 말을 듣게 되니 도움이 많다. 비단 짜는 일은 본래 대궐 안에서 알 바가 아니지만 들은 바가 있으면 반드시 아뢰는 성의가 가상하다."
하고, 이어서 입시한 승지 윤강에게 이르기를,
"이 뜻을 상방에 말하여 비단을 짜지 말게 하라."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정영이 술에 취해서 강석에 나올 수 없으니, 하번(下番)으로 하여금 대신 강하게 하라. 한가히 있을 때에는 술을 마실 수도 있겠지만, 경연에 나오는 날 어떻게 감히 이처럼 진탕 취할 수 있겠는가."
하자, 윤강이 아뢰기를,
"이정영을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술 마신 과실로 경연의 신하를 추고하는 것은 너그러이 포용하는 도리가 아닌 듯하니, 그대로 두라."
하였다.
동래 부사(東萊府使) 윤문거(尹文擧), 삼척 부사(三陟府使) 김종일(金宗一), 삼수 군수(三水郡守) 김익후(金益厚), 재령 현감(載寧縣監) 김시설(金時卨)이 임지로 떠나면서 하직 인사를 드리니, 직접 불러보고 유시하여 보냈다.
8월 4일 기유
영의정 김육(金堉)이 도감 제조를 거느리고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니, 상이 내시(內侍)에게 명하여 앞서 드렸던 책보(冊寶)를 내놓게 하였다. 김육이 책보를 받아 모시고 명정전(明政殿)에 나아가 왕대비에게 책보를 드리고 존호(尊號)를 올리니, 백관이 명정전 뜰에서 하례를 드렸다. 상은 인정전에 나가서 하례를 받았다. 옥책문(玉冊文)은 다음과 같다.
"국왕신(國王臣) 아무는 머리를 조아려 두 번 절하고 삼가 책(冊)을 받들고 말씀을 올립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어머니가 아니면 의지할 데 없는데 그 은혜 갚고자 하나 한량이 없고, 어버이를 높여드리는 것이 큰 효도인데 칭호를 드리고 싶었지만 아직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조그만 정성을 다하여 성대한 의전을 거행합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왕대비 전하께서는 일찍이 아름다운 재질을 타고나시어 좋은 덕음(德音)을 내셨습니다. 선조(先朝)가 탄생하신 그때에 천제의 소녀처럼 태어나셨고 중전의 자리가 빈 날에 중전의 자리에 오르셨습니다. 자인(慈仁)과 공검(恭儉)을 두루 갖추시니 도신(塗莘) 임사(姙姒)110) 와 그 아름다움을 견주었습니다. 12년 동안 내조함에 있어서는 시종 조심하고 경계하셨고, 3년 동안 슬피 사모하셨으나 다행히 신명의 도움이 있었습니다. 이어 생각하건대, 보잘것없는 제가 두터운 보살핌을 받았습니다. 음식이나 살피고 안부나 묻는 일쯤으로 어떻게 사랑하고 공경하는 마음을 폈다고 하겠습니까. 칭호를 높이여 덕행을 숭상하니 인정과 예절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신자(臣子)가 감히 사사로이 하는 것이 아니라, 곧 고금에 행하는 제도입니다. 삼가 존호를 ‘자의(慈懿)’로 올리니, 삼가 크게 천명을 받아 아름다운 칭호를 굽어 받으소서. 성선(聖善)의 풍도가 영원히 전하고 수복(壽福)의 거룩함이 무궁하게 될 것입니다. 참으로 기쁘고 참으로 흐뭇하기에 머리를 조아려 재배하고 말씀을 올립니다." 【대사성(大司成) 황감(黃㦿)이 지은 것이다.】 ○ 악장(樂章) 의여곡(猗歟曲)은 다음과 같다. "아, 훌륭하신 성모(聖母)께서는 덕이 천지에 합하셨도다. 탄생하신 달과 날이 서로 같아 하늘이 맺어준 듯이 배필이 되셨도다. 나라를 어거하는 교화는 곤전(壼殿)의 안으로부터 하였도다. 지위가 장락궁(長樂宮)111) 에 높으니 무궁한 사랑을 베푸시도다. 유순(柔順)으로 법을 삼는 아름다운 덕은 칭송하고 추대하는 데에 합당하도다. 아름다운 존호를 드디어 만대에 전하도다." 【부제학 채유후(蔡𥙿後)가 지은 것이다.】
【태백산사고본】 7책 7권 15장 A면【국편영인본】 35책 502면
【분류】왕실-의식(儀式) / 어문학-문학(文學) / 예술-음악(音樂)
[註 110] 도신(塗莘)임사(姙姒) : 도신은 하 우(夏禹)의 후비(后妃)인 도산씨(塗山氏)의 딸이다. 임사는 주 문왕(周文王)의 어머니이며 왕계(王季)의 아내이자 지임씨(摯任氏)의 중녀(仲女)인 태임(太姙)과, 주 문왕의 후비이며 무왕(武王)의 어머니이자 신국왕(莘國王)의 딸인 태사(太姒)인데, 모두 미덕이 있었다.[註 111] 장락궁(長樂宮) : 한대(漢代)의 궁전 이름. 혜제(惠帝) 이후로 장락궁에는 항상 모후(母后)를 모셨기 때문에 이렇게 쓴 것이다.
ⓒ 한국고전번역원
○ 악장(樂章) 의여곡(猗歟曲)은 다음과 같다.
"아, 훌륭하신 성모(聖母)께서는 덕이 천지에 합하셨도다. 탄생하신 달과 날이 서로 같아 하늘이 맺어준 듯이 배필이 되셨도다. 나라를 어거하는 교화는 곤전(壼殿)의 안으로부터 하였도다. 지위가 장락궁(長樂宮)111) 에 높으니 무궁한 사랑을 베푸시도다. 유순(柔順)으로 법을 삼는 아름다운 덕은 칭송하고 추대하는 데에 합당하도다. 아름다운 존호를 드디어 만대에 전하도다." 【부제학 채유후(蔡𥙿後)가 지은 것이다.】
【태백산사고본】 7책 7권 15장 A면【국편영인본】 35책 502면
【분류】왕실-의식(儀式) / 어문학-문학(文學) / 예술-음악(音樂)
[註 110] 도신(塗莘)임사(姙姒) : 도신은 하 우(夏禹)의 후비(后妃)인 도산씨(塗山氏)의 딸이다. 임사는 주 문왕(周文王)의 어머니이며 왕계(王季)의 아내이자 지임씨(摯任氏)의 중녀(仲女)인 태임(太姙)과, 주 문왕의 후비이며 무왕(武王)의 어머니이자 신국왕(莘國王)의 딸인 태사(太姒)인데, 모두 미덕이 있었다.[註 111] 장락궁(長樂宮) : 한대(漢代)의 궁전 이름. 혜제(惠帝) 이후로 장락궁에는 항상 모후(母后)를 모셨기 때문에 이렇게 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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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면령을 내리고 교문(敎文)을 반포하였는데, 그 교문은 다음과 같다.
"왕은 이렇게 말하노라. 자전께 사랑을 펴서 뭇 사람에게 선을 베푸는 도리를 힘쓰고, 보책(寶冊)에 아름다움을 드러내어 자전에게 아름다움을 돌려드리는 성의를 다하였노라. 성대한 의식을 이미 치루었는데 빛난 칭호를 어찌 감출 수 있겠는가. 삼가 생각건대, 성모(聖母)께서는 일찍이 아름다운 덕음(德音)을 전파하셨다. 12년간 내조를 하시면서 부지런하고 검소하였으며 3년 동안 상을 치루시면서 예제와 윤기를 다하셨도다. 생각건대 나는 상중에 있으면서 장락궁(長樂宮)에서 얼굴을 뵈었으면 하였노라. 세월 덧없이 흘러 상로(霜露)의 감회112) 가 더욱 간절하였는데 제 때에 시중을 들게 되니 자나깨나 선왕을 사모하는 마음이 조금 위로되었노라. 담제(禫祭)와 부제(祔祭)의 큰 일을 이미 마쳤으니, 높이 받드는 성대한 예식을 감히 늦출 수 있겠는가. 무궁한 큰 은혜는 한 나라로써 봉양해도 오히려 부족하고, 전에 없는 아름다운 공렬은 두 글자의 칭호로 드러냄이 마땅하도다. 이에 옛 전장에 따라 조그만 정성을 펴노라. 이미 올해 8월 초4일 기유에 책보(冊寶)를 받들어 공경히 존호를 올렸으니, 이금 검옥(泥金檢玉)113) 은 백세에 길이 빛을 드리우고, 함이 농손(含飴弄孫)114) 은 만년의 장수를 영원히 누리리라. 조야(朝野)가 실로 이런 경사를 같이하였는데, 어찌 사면령을 사방에 내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아, 너희 범민들은 누군들 위에 부모가 없겠느냐. 오늘날 슬픔과 기쁨이 마음속에서 터져 나오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나의 심정을 양해할지어다. 각자 타고난 천성을 다하여 효도를 일으키는 일을 저버리지 말지어다. 그러므로 이에 교시(敎示)하노니, 잘 알 것으로 여기노라." 【대제학 조석윤(趙錫胤)이 지은 것이다.】
【태백산사고본】 7책 7권 15장 B면【국편영인본】 35책 502면
【분류】사법-행형(行刑) / 왕실-의식(儀式)
[註 112] 상로(霜露)의 감회 : 계절이 바뀜에 따라 돌아가신 부모 생각이 새로워짐을 뜻함. 《예기》 제의(祭義)편에 "서리와 이슬이 이미 내리면 군자는 이것을 밟고 반드시 슬픈 마음이 있다. 이것은 추워서 그런 것이 아니다.[霜露旣降 君子履之 必有悽愴之心 非其寒之謂也]"라는 말이 보인다.[註 113] 이금 검옥(泥金檢玉) : 규박가루와 옥으로 장식된 고서함(古書函)의 두껑.[註 114] 함이 농손(含飴弄孫) : 엿을 먹음으로써 감미로움을 맛보고, 손자를 데리고 노는 것으로 낙을 삼는 일. 후한(後漢) 때 마황후(馬皇后)가 연로하자 ‘나는 다만 엿이나 먹고 손자나 데리고 놀 뿐이지 다시는 정사에 관여하지 않겠다.’한 데 보인다.《후한서(後漢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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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李浣)을 특별히 서용하여 다시 어영 대장(御營大將)에 임명하였다.
상의원(尙衣院)이 아뢰기를,
"본원이 매년 짜는 사색 대단(四色大段) 12필은 현재 일을 시작하지 않고 있습니다. 지금 중궁의 책례(冊禮) 및 세자의 관례(冠禮)와 책례(冊禮) 때 적의 용포(翟衣龍袍)를 쓰는 것은 뺄 수 없는 법복(法服)이고, 가례(嘉禮) 때 쓸 금단(錦段)도 마땅히 《등록(謄錄)》에 의하여 차례로 짜야 할 것입니다. 전부터 전혀 시중에서 살 수 없어서 부득이 짜서 사용해 왔는데, 지금 그만두라는 분부를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는 모두 대례(大禮)에 쓰이는 것이기에 감히 이렇게 우러러 품의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바깥 사람들이, 궁중에서 본원을 시켜 사사로이 짠다고 더러 의심하고 있으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어찌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설명할 수 있겠는가. 상방의 관원 모두가 바깥 사람인데, 어찌 이처럼 전혀 모르고 있다는 말인가. 내가 알 바가 아니니, 도감에게 의논하여 처리하라."
하였다. 이에 대해 도감이 아뢰기를,
"대례의 날이 이미 가까워졌으니 법복을 짜는 일은 결코 그만두기 어렵습니다."
하니, 따랐다.
호조 판서 원두표(元斗杓)가 상소하여 면직을 청하니, 우대하는 뜻으로 비답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원두표가 대동법(大同法)을 불편하다고 하다가, 이권을 오래도록 잡고 있다는 지척을 영의정 김육(金堉)에게 거듭 입자, 이 때문에 사직하려 하였다.
8월 5일 경술
예조가 아뢰기를,
"《등록》을 가져다 상고해 보니 ‘왕대비에게 존호를 올린 뒤에 왕세자가 표리(表裡)를 【어복(御服)에 쓰이는 면주(綿紬)임.】 드린다’는 한 절목이 있었습니다. 왕비의 책례를 치른 후에 표리를 드리는 것은 인정과 예절로 볼 때 다를 게 없는데, 《오례의》에는 실리지 않았으므로 감히 여쭙니다."
하니, 답하기를,
"예로 보아 그럴 것도 같다. 본조가 의논해서 처리하라."
하였다. 이에 대해 예조가 복계하기를,
"왕비의 책례 때 표리를 드리는 조항이 《오례의》에 실리지 않았으니, 예문을 제작한 뜻은 신 등이 진실로 감히 가볍게 의논할 수 없습니다. 다만 인목 왕후(仁穆王后)에게 존호를 올린 일이 갑자년115) 에 있었으니, 이 때는 바로 반정 초라서 고로(故老)들이 조정에 가득 차 있었으므로 절문(節文)을 강정(講定)할 때 필시 상세히 살폈을 것이고, 왕세자가 표리를 드리는 일은 응당 고거한 바가 있었을 것으로 예상되는데, 유독 인열 왕후(仁烈王后)의 책봉 때만 이 일절이 없으니, 신 등은 실로 그 까닭을 모르겠습니다. 이어 생각건대, 존숭과 책례는 모두 막대한 경사이니, 하례하는 세자의 정성에 있어서 의당 다름이 없을 것입니다. 지금 중궁에게 표리를 드리는 일은 진실로 인정과 예절에 합당하나, 신 등은 모두 몽매하여 상전(常典)에 대해 잘 알지 못하니 대신에게 의논해 정하여 막중한 대례(大禮)가 미진하게 되었다는 후회가 없도록 하소서."
하니, 따랐다. 영중추부사 이경여(李敬輿), 영의정 김육(金堉), 좌의정 이시백(李時白)이 의논드리기를,
"예(禮)라는 것은 인정을 인하여 천리를 조절하는 것이므로 인정에 합하고 천리에 알맞으면 행할 수 있습니다. 왕대비에게 존호를 올린 뒤에 왕세자가 표리를 드리는 한 절목이 있고 보면 왕비의 책례 뒤에도 표리를 드리는 일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어찌 앞뒤를 다르게 할 수 있겠습니까. 《오례의》에 실리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많은 변론을 할 필요 없으니, 예관이 논한 바가 인정과 예절에 합한 것 같습니다."
하니, 따랐다.
예조가 아뢰기를,
"각전(各殿)에 진상되는 3명일(三名日)의 방물(方物)과 물선(物膳)은 국상(國喪)으로 인하여 3년 동안만 임시 감면하였습니다만, 지금은 3년상이 이미 끝났습니다. 앞으로 3명일의 방물과 물선은 동지(冬至)부터 전례에 의하여 올리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각도에 분부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금년도 풍년이 아니니, 방물은 잠시 정지시키라."
하였다.
예조 참판 민응형(閔應亨)이 대궐에 나아가 뵙기를 청하니, 상이 불러 보았다. 민응형이 앞으로 나아가 아뢰기를,
"신이 지난번 연석(筵席)에서 상방(尙方)이 비단 짜는 일을 그만두게 할 것을 청하자, 곧 그만두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듣건대 그것은 바로 왕대비의 적의(翟衣)에 쓸 옷감이었다 하니, 적의는 법복(法服)입니다. 신이 만일 일찍이 이 사실을 알았더라면 마땅히 ‘다시는 사사로이 비단을 짜지 마십시오.’라는 경계의 말씀을 드렸을 것인데, 미처 자세히 알지 못해서 그렇게 진달하였으니 신은 진실로 황공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자세히 알지 못하는 일도 들으면 꼭 말을 하니, 자세히 아는 일은 필시 숨김없이 다 말할 것이다. 나는 그 때문에 가상히 여긴다."
하였다. 민응형이 또 아뢰기를,
"우(禹)임금은 의복과 음식을 검소하게 하였고, 한 문제(漢文帝)의 신부인(愼夫人)은 옷이 땅에 끌리지 않을 정도로 짧게 입었으니, 비록 법복이라 하더라도 사치스럽게 해서는 아니됩니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호남좌도는 기근(饑饉)이 바야흐로 심하여 세미(稅米)도 마련하기가 어려운 형편입니다. 그런데 제전(諸殿)에의 종이 진상을 지금 다시 실시하려 한다고 들었습니다. 그 값은 매우 높고 그 쓰임은 긴급하지 않으니, 비록 전부를 감할 수는 없지만, 전례에 의하여 절반을 감한다면 백성들이 반드시 혜택을 받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진상되는 종이가 선조(先朝)에서는 그 수량이 본래 이보다 많았는데 전란 후에 견감하였기 때문에 지금 다시 실시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경의 말이 그와 같으니, 금년에는 다시 실시하지 않는 것이 옳을 것이다."
하였다. 민응형이 아뢰기를,
"장릉(長陵)116) 의 경우에는 전하께서 일찍이 참배하셨으니, 건원릉(健元陵)117) 과 목릉(穆陵)118) 을 예의상 먼저 참배해야 할 것입니다. 바깥 여론이 다 그와 같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옳다. 나의 뜻 역시 그러하였으나, 3년상이 끝난 뒤에 계절이 바뀜에 따라 사모하는 마음이 배나 간절하였으므로 먼저 장릉을 참배하고 싶었을 뿐이다."
하였다.
8월 6일 신해
윤순지(尹順之)를 대사헌으로, 홍명하(洪命夏)를 응교로, 홍중보(洪重普)를 부교리로, 홍수(洪鐩)를 정언으로 삼았다.
경상도 풍기군(豊基郡)에서 암소가 송아지를 낳았는데, 등 위에 발 하나가 있었다.
8월 7일 임자
평안도 의주(義州) 등 일곱 고을에 폭풍이 불어서 지붕의 기와가 모두 날아갔다.
전남도 무장현(茂長縣) 사람 박후생(朴厚生)이 국상 중 3년 동안 소복(素服)을 입고 상례를 행하였는데, 예조가 그에게 10년 동안 부역을 면해주자고 청하니, 따랐다.
간원이 아뢰기를,
"교리 이정영(李正英)은 술에 취해 경연에 나와서 하번(下番)으로 대신 강하게 하였고 옥당에는 본래 서로 탄핵하는 규정이 없는데 갑자기 장관을 탄핵하여 탐욕을 부렸다고 지칭하였으니, 매우 해괴한 일입니다. 먼저 파직한 다음 추고하소서. 그리고 부제학 이지항(李之恒)은 논사(論思)의 지위에 있으면서 탐욕을 부렸다는 비난을 거듭 받았으니 문초하지 않고 그대로 둘 수 없습니다. 중하게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8월 8일 계축
천둥이 쳤다.
영의정 김육, 좌의정 이시백, 우의정 한흥일이 차자를 올리기를,
"신 등은 모두 하찮은 인물로 정승의 자리에 있으므로 인심이 만족해하지 않으니, 하늘의 뜻을 알 만합니다. 우레가 걷힐 달에 우레 소리가 진동하였으니 마땅히 공경하고 두려운 마음을 다하여 하늘의 노여움에 답해야 할 것입니다. 옛날에는 재이(災異)의 대책으로 삼공(三公)을 면직시켰습니다. 하늘과 사람의 이치는 똑 같은데, 고금이 어찌 다르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속히 신 등의 직을 갈아 하늘이 보고 백성이 듣는 앞에 사죄하고, 어질고 덕이 있는 사람으로 다시 정하여 나라의 운명을 새롭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뇌성이 걷힐 달에 뇌성이 진동하니, 두려움을 금하지 못하겠다. 이것은 모두 내가 부족하고 어두운 죄이다. 경들이 무슨 잘못이 있기에 이렇게까지 허물을 자책하는가. 더구나 옛날에 재이 대비책으로 면직한 것은 역시 아름다운 일이 아니니, 경들은 안심하고 도를 논하라."
하였다.
호조 판서 원두표(元斗杓)가 누차 상소하여 굳이 사임하니, 허락하고 하교하였다.
"원평군(原平君) 원두표를 대동청 당상(大同廳堂上)에 차임하여 그로 하여금 직임을 살피게 하라."
예조가 아뢰기를,
"을축년 세자 관례의 《등록(謄錄)》을 가져다 상고하였더니, 본조가 ‘책례(冊禮)는 비록 행하지 못했으나 명호(名號)는 이미 정해졌다.’는 이유를 들어 동궁 의장(東宮儀仗)을 쓸 것을 청하고, 대신에게 의논하여 의장을 썼습니다. 지금 관례에서도 이 규례에 의하여 의장을 쓰소서."
하니, 따랐다.
예조가 아뢰기를,
"을축년 세자 관례의 《등록(謄錄)》을 가져다 상고하였더니, 본조가 ‘책례(冊禮)는 비록 행하지 못했으나 명호(名號)는 이미 정해졌다.’는 이유를 들어 동궁 의장(東宮儀仗)을 쓸 것을 청하고, 대신에게 의논하여 의장을 썼습니다. 지금 관례에서도 이 규례에 의하여 의장을 쓰소서."
하니, 따랐다.
예조가 아뢰기를,
"다가오는 왕세자의 책례에는 책례를 거행한 그 이튿날 백관이 전문(箋文)을 3전(殿)에 올리고 하례를 드려야 하겠습니다만, 경술년의 《등록》을 가져다 상고하였더니, 제도(諸道)에선 단지 전문을 전하에게만 올렸고, 을축년의 《책례등록》을 상고하였더니, 백관이 전하에게 전문을 올리고, 왕대비와 왕비의 두 전(殿)에는 단지 치사(致詞)하고 표리(表裡)를 드렸을 뿐입니다. 을축년의 규례에 의하여 거행하소서."
하니, 따랐다.
8월 9일 갑인
상이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조알(朝謁)을 받고 빈(賓)인 영의정 김육(金堉)과 찬(贊)인 예조 판서 박서(朴遾)에게 선교(宣敎)하여 세자의 관례를 행하도록 명하였다. 빈·찬 이하가 명을 받고 세자궁에 나아가 관례를 행하고 예가 끝나자 김육 등이 복명하였다.
교명문(敎命文)은 다음과 같다.
"왕은 이렇게 말한다. 장자(長子)가 제기(祭器)를 주관하는 것은 민심을 잡아매기 위함이요, 성왕(聖王)이 관례(冠禮)를 중히 여긴 것은 국본(國本)119) 을 삼기 위함이었다. 이에 아름다운 일을 당하여 마땅히 명사(命辭)가 있어야 하리라. 아, 너 세자 이원(李棩)은 성품이 총명하여 날 때부터 충효(忠孝)를 알았다. 열성(列聖)께서 도와 주신 경사요, 영고(寧考)120) 께서 교훈에 힘써 주신 결과이다. 옷을 이길 만큼 자랐을 때 이미 원손(元孫)의 이름을 정하셨고 내가 왕위를 계승하자 이에 부군(副君)121) 의 명칭을 바르게 하였다. 관례를 행할 기일을 기다렸더니, 주 문왕(周文王)의 나이에 이르렀다. 사람의 도리가 이루어지니 실로 부모의 기쁨이 깊고, 왕의 교화가 시작되는 바이니 어린 생각을 힘써 버리라. 훌륭하도다, 몸을 가리우는 옷의 문채여. 아름답도다, 머리를 꾸미는 갓의 제도여. 너의 용모와 말씨를 삼가서 태만하지 않으면 수구(壽耉)와 복록(福祿)을 무궁히 주리라. 아, 오직 어진이를 가까이하고 몸을 공경하여야 덕이 진취될 수 있고, 오직 조종을 본받고 학문을 전념하여야 거의 뜻만 크고 실천이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을 면하리라. 이것은 오로지 나의 자애(慈愛)하는 지극한 정리에서 나온 것만이 아니라, 또한 온나라 신민(臣民)들의 크나큰 바람이다. 그래서 교시(敎示)하노니, 자세히 알 것이라 생각하노라." 【대사성 황감(黃㦿)이 지은 것이다.】
【태백산사고본】 7책 7권 17장 B면【국편영인본】 35책 503면
【분류】왕실-의식(儀式)
[註 119] 국본(國本) : 세자.[註 120] 영고(寧考) : 아버지, 즉 인조.[註 121] 부군(副君) : 세자의 별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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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당(玉堂)이 【응교 홍명하(洪命夏), 교리 이석(李晳), 수찬 오정위(吳挺緯), 부수찬 정언벽(丁彦璧)과 민정중(閔鼎重).】 차자를 올리기를,
"신 등이 삼가 듣건대, 저번에 기전(畿甸), 호서(湖西), 해서(海西)의 바닷가에 있는 여러 고을은 해일이 너무도 심하여 전답의 곡식이 남김없이 손상되었다 하고, 또 들으니, 호남에는 가뭄과 홍수가 겹쳐서 겨우 남아 있는 곡식이 7월 20일 후에야 이삭이 패기 시작하였는데, 시중의 쌀값은 한 필의 목면(木綿)으로 겨우 6, 7승(升)을 살 수 있으므로 백성들이 모두 굶주리고 있으며, 그중 영하(嶺下)가 더욱 심하고 영남도 같은 상황이라 합니다. 그런데다 또 이 달에 무서리가 내렸으니, 아, 하늘이 장차 우리 백성의 목숨을 끊으려 하는 것입니까. 어제는 천둥이 치고 소나기가 내렸으니, 잘못된 하늘의 도수가 또한 어찌 그리도 심히 이상합니까. 무릇 이 몇 가지의 변괴는 실로 위망(危亡)의 조짐인데 그것들이 우리 성상께서 정력을 쏟아 성세(聖世)를 도모하는 날에 집중된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신 등은 머리를 맞대고 매우 놀랐는데, 이렇게 되는 이유를 진실로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덕(聖德)의 헛점과 시정(時政)의 잘잘못은 한두 가지 지적하여 진언할 만한 것이 있으니,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너그러이 살펴 주소서.
신 등이 삼가 보건대, 전하께서 즉위하신 이래로 지성껏 정치를 도모하신 지 지금 3년이 되었으나 실효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조정을 바로잡으려 하면 조정이 날로 혼탁해지고, 기강을 진작시키려 하면 기강이 날로 해이해지고 있으며, 민생을 보호하고 싶지만 갈수록 더욱 흩어지고, 법령을 정돈하고 싶지만 문란하여 질서가 없으며, 공도(公道)를 확정하려 하면 사의(私意)가 침탈하고 명실(名實)을 상부하게 하려면 허무한 것이 풍습을 이루며 심지어는 천도(天道)를 공순하게 받드는데도 천재(天災)가 극심하고 있습니다. 이에 신 등은 전하께서 자신에게 절실한 공부에 미진한 바가 있는가 삼가 의심해 봅니다.
왜냐하면, 《주역(周易)》에서는 건괘(乾卦)의 항구적인 도를 논하면서 그치지 않는 것을 크게 여겼고, 《대학(大學)》에서는 나라 다스리는 순서를 말하면서 몸닦는 것을 근본으로 삼고 있습니다. 진실로 전하께서 그 큰 근본을 세워 일을 하는 사이에 미루어 나가고, 그 실지의 덕을 잡아 이야기를 주고받을 때 나타내신다면, 마치 바람이 불면 풀이 눕듯이 백성들에게 미치는 교화를 금방 이르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삼가 보건대, 근래에는 실심(實心)으로 서로가 믿지 못하고 허명(虛名)을 숭상하십니다. 날마다 경연(經筵)에 납시되 긴요한 공부를 하지 않고 의리를 강설하시나 존심 양성(存心養成)하는 노력을 보이지 않으며, 남의 말을 널리 들으면서도 시비를 더러 가리지 못하고 사람을 살펴서 쓰고 있지만 어짊과 간사함을 더러 판단하지 못하며, 선을 착하게 여기면서도 실시한 바가 없고 악을 싫어하면서도 단절하는 바가 없습니다. 비록 다스리는 방법을 찾는다는 이름은 있지만 다스린 실효를 얻기는 어렵습니다.
전하께서 경연에서 하교하기를 ‘대간이 대동법(大同法)을 논한 것은 다만 소견을 진술하는 데에 불과하다.’ 하고는, 비국 계사의 답에는 ‘사람들의 말이 교묘하지만 내가 어찌 동요되겠는가.’ 하였습니다. 대저 교묘한 말이란 거짓말을 하여 현혹함을 이르는 것입니다. 전후에 걸쳐 대동법을 논하는 자들의 의견이 더러 같지 않았다 하더라도 각자 이해 득실을 설명한 것이니, 요컨대 그 본심은 나라를 위한 것이지 다른 뜻은 없습니다. 만일 모두를 교묘한 말로 돌려 버린다면, 그 논하는 자가 반드시 자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성교(聖敎)의 본의도 어찌 전후가 다릅니까.
또 듣건대, 경연에서 내사(內司)의 일로 재신(宰臣)에게 직접 말씀하셨던 분부는 마치 한 일반 가정의 부자간에 서로 권면함과 다름이 없으니, 성상의 넓으신 도량이 마치 천지와 같습니다. 신 등은 이런 분부가 계신 것을 들은 뒤로부터 너무도 기뻐하면서도 걱정하기를 ‘이와 같은 임금이 계시는데 올바른 길로 인도하여 당우(唐虞)와 같은 시대를 만들지 못하고 있으니 실로 뭇 신하들의 죄다.’ 하였습니다. 그런데 얼마 안 가서 상방(尙方)에 대해 답하신 전교가 갑자기 불평한 데에까지 이를 줄을 어찌 생각이나 하였겠습니까. 가령 전일에 연신(筵臣)이 비단 짜는 곡절을 잘 알지 못하고 진달했다 하더라도 이는 본디 잘못 알려진 것이니 성덕(聖德)에 무슨 손상이 있겠습니까. 전하께서는 오직 외인이 자세히 알지 못한 소치라고만 말씀하셨어야 할 것인데 ‘집집마다 설득시킬 수 있겠는가.’, ‘내가 알 바 아니다.’라는 등의 전교를 하였으니, 혹 성상의 도량이 모자라 넉넉하지 못함을 스스로 보인 것은 아닙니까. 이러한 일들은 비록 극히 미세한 것이지만 혹시 성덕에 손상이 있을까 두렵습니다.
또한 기강이 해이하거나 신장되는 것은 본래 인군의 하는 일이 사리에 마땅하고 상벌(賞罰)이 이치에 맞아 인심이 기꺼이 따르게 하는 데 달려 있을 뿐입니다. 형벌로 위협하고 힘으로 제재하는 일은 매양 역대의 혼란 시기에 나타나 한갓 패망의 화에 이르고 말았을 뿐입니다.
무릇 국가가 장차 쇠퇴하려면 정령(政令)과 기율(紀律)이 날로 점점 해이해집니다. 왕위를 계승한 임금이 그러한 것을 보고 법으로 구제하려 해도 인심이 이미 달아빠져 명령을 또한 따르지 않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상하가 서로 격돌하여 정의(情義)가 믿음을 주지 못하는가 하면, 시기, 의심, 원망하여 다시는 아끼지 않고 가혹한 형벌을 사용하여 끝내는 궤란되고 마는 것이 이치입니다. 명철한 임금은 이와 같은 것을 알기 때문에 인의(仁義)로써 인도하고 예양(禮讓)으로써 거느리고 형벌로써 권면하여, 백성으로 하여금 날로 착한 데로 옮겨 가 저절로 간범(干犯)하는 데에 이르지 않게 합니다.
이제 원하건대, 전하께서 밝게 사물을 살피고 단호하게 일을 처리하며, 죄지은 사람에게 벌을 주고 공이 있는 사람에게 상을 주신다면, 기강을 진작하려고 하지 않아도 저절로 진작될 것입니다. 삼가 보건대, 전하께서는 근래에 자못 위엄을 숭상하여 심지어 추고(推考)와 같은 경미한 죄까지도 금부(禁府)에 하옥시키십니다. 믿는 데가 있어 죄를 지은 자와 재범인 자는 진실로 용서하기 어렵지마는, 비록 우연한 과실이어서 파직이나 체직될 지경에 이르지 않은 자도 하옥을 면치 못하니, 실로 성인의 너그럽고 인자스러운 덕이 아닐 뿐더러, 도리어 신하를 예로써 부린다는 도리에 손상이 있습니다.
아, 사치(奢侈)의 해는 천재(天災)보다 심하므로 옛날의 성현들이 이를 경계하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지금 전하께서도 백성을 다스림에 있어서는 경건하고 조심하며 가정에 있어서는 검소한 생활을 하여, 복식(服飾)이나 기용(器用)은 간소하고 절약하기를 힘쓰고 심지어는 명일(名日)의 방물(方物)이나 대례(大禮)의 복식과 같은 것까지도 모두 감손(減損)하니, 신 등은 성상의 절약하고 검소하는 성대한 덕을 공경히 우러러 봅니다.
만일 전하께서 이런 마음을 시종 변하지 않고 조금도 해이해지지 않으신다면, 우(禹)임금이 검소한 옷을 입고 세상을 다스린 치화(治化)와 문왕(文王)이 누추한 옷을 입고 백성을 편안케 한 공을 머지않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시경(詩經)》에 말하지 않았습니까. ‘누구나 시작은 잘 하지만 유종의 미를 거둔 이는 적다.’고 말입니다. 이 때문에 신 등이 성상에게 간곡히 부탁드리는 것입니다.
아, 아랫사람의 실정이 위로 통하지 못한 지 오래입니다. 지난번에 있었던 상참(常參)의 거행은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었으나 뜰에 있는 신하들이 단지 배례(拜禮)만 행하고 물러나 마치 의식을 한 차례 익히는 것처럼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조정에 임하여 정사를 듣는 본의이겠습니까. 신 등이 삼가 듣건대, 우리 세조조(世祖朝)에서는 아침내내 정사를 보면서 친히 물으시고 크고 작은 공사에 대해서는 해당 관사가 모두 품의해서 결정할 수 있게 하였다 합니다. 이제 옛 예식을 다시 실시하기로 한 바에는 각사(各司)에서 아뢸 만한 일을 모두 면전에서 여쭈어 성상의 재가에 대비해야 하겠습니다. 또 상참을 파하고 물러간 뒤에는 모든 관사의 관원들이 각각 본사(本司)에서 개좌(開坐)하여 그 품지(稟旨)한 일을 곧바로 거행해야 할 것입니다.
무릇 경연(經筵)의 법은 본디 세 때의 강론과 소대(召對), 야대(夜對)의 규정이 있으니, 이 밖에는 다시 의논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군신의 사이에 엄숙함이 너무 지나치고 성실함이 부족하여 상하가 서로 믿는 의리가 있지 않습니다. 그러니 만일 정무를 보시는 여가에 요식에 구애받지 말고 언제든지 정원(政院), 옥당(玉堂) 및 기타 궐내의 직소(直所)에 있는 여러 신하들을 불러보고 전하께서 생각하고 계신 계책에 대해서 그 가부를 물어보아 모두 옳다고 하면 단연코 행하여 백성의 이익이 되게 하시고, 또 신료들이 품고 있는 계책을 물으셔서 그들의 말이 공을 이룰 수 있으면 가납하소서. 이것이 진실로 요(堯) 순(舜) 시대에 임금과 신하가 서로 허심 탄회하게 정사를 토론하던 방법입니다.
더구나 지금은 가을 날씨가 서늘하고 맑은데다 밤은 점점 깊어가니, 혹시 주무시고 남은 시간에 시신(侍臣)을 침실 안에서 접견하고 당세의 일을 물으시어 그들의 말이 쓸 만하면 채택해 쓰고 쓸 만하지 않은 것은 채용하지 않는다면 모두 성덕(聖德)에 도움이 있을 것이며, 한문전석(漢文前席)122) 의 아름다운 일을 다시 오늘날에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아, 민생의 곤궁이 요즘보다 심한 적이 없었습니다. 백성들의 희망은 단지 올가을의 수확에만 있는데, 큰 비가 여러 달 계속 내리고 천둥까지 쳐 남은 농작물이 거의 다 없어지고 목화의 열매가 떨어져서, 팔도의 민생에게 이미 먹고 입는 것의 근원이 끊어졌으니, 모르겠습니다만 전하께서는 장차 어떻게 구제하시겠습니까.
아, 우리 선왕(先王)께서 어렵고 큰 서업(緖業)을 우리 전하에게 물려 주셨으니, 전하의 오늘날은 무궁한 경사이며, 또한 무궁한 근심이기도 합니다. 일반 가문에서 백금(百金)의 재산을 자손이 지키지 못하면, 사람들은 반드시 불효라고 할 것인데, 하물며 우리 전하께서는 선왕의 자리에 앉아 선왕의 정사를 행하시면서 선왕의 민생을 보호하지 못하고 선왕의 서업을 지키지 못한다면 장차 어떻게 효도의 길을 넓히며 천하 후세에 변명하시겠습니까. 전하께서는 유념하소서."
하니, 상이 가납하였다.
8월 10일 을묘
상이 선정전(宣政殿)에 나아가 왕세자의 관례(冠禮) 뒤에 행하는 조알(朝謁)을 받았다. 왕세자가 이어서 왕대비와 왕비에게 조알을 행하였다.
병조 판서 구인후(具仁垕)가 면직되었다. 민응형(閔應亨)이 일찍이 경연에서 ‘구인후는 늙어서 직무를 맡을 수 없다.’고 말하자, 구인후가 이를 이유로 굳이 사직하니 허락하였다.
8월 11일 병진
황해도 연해안의 여러 읍에 해일이 있었다.
이시방(李時昉)을 호조 판서로, 박서(朴遾)를 병조 판서로, 이해(李澥)를 형조 판서로, 오준(吳竣)을 예조 판서로 삼았다.
상이 하교하기를,
"세자가 비록 관례는 행하였으나 현재 책봉하지 않았으니, 서연(書筵)에서 무슨 관복(冠服)을 쓸 것인가? 예관에게 물어보라."
하니, 예관이 복계하기를,
"비록 왕세자를 미처 책봉하지는 못했으나 명위(名位)를 이미 정하였고 관례를 이미 행하였습니다. 익선관(翼善冠)과 곤룡포(袞龍袍)는 바로 평상시의 복장이니, 서연에서 이 관복을 쓰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알았다고 답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중궁(中宮)의 책례(冊禮) 뒤에 왕세자가 백관을 거느리고 하례드리는 것이 예의상 알맞겠습니다."
하니, 우선 거행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8월 12일 정사
함경도 함흥부(咸興府)에 홍수가 져서 20여 호가 떠내려 갔거나 가라앉았고, 문천군(文川郡)에 천둥이 크게 치고 우박이 왔다.
8월 13일 무오
상이 하교하기를,
"들으니, 내전(內殿)의 책례 때에 봉진하는 여러 물품을 비단 보자기로 싼다고도 하는데,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어찌 이처럼 사치스럽게 비용을 남용할 수 있겠는가. 만일 《등록(謄錄)》에 실려 있다고 하여 그대로 따라 행한다고 한다면 지금부터 개정하여 이런 폐단이 없게 하라."
하니, 책례 도감(冊禮都監)이 아뢰기를,
"상의 분부가 여기에 이르니, 검소함을 숭상하고 비용을 절약하시는 뜻을 누가 존경하지 않겠습니까. 단, 전후 책례에 쓰일 모든 기구가 이미 다 준비되었고 기일이 또 임박하였는데, 만일 개조하려고 한다면 형편상 할 수 없고 낭비도 많을 것이니, 하교하신 깊은 뜻을 어기게 될까 염려스럽습니다. 지금은 이대로 쓰고 이후로는 한결같이 성교에 따라 《등록》에 재정(裁定)하여 후일의 법을 삼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였는데, 따랐다.
8월 14일 기미
상이 주강에 나아가 《서전》의 반경편을 강하였다. 강이 끝나자 동지경연 조석윤(趙錫胤)이 아뢰기를,
"지금 재용(財用)이 고갈된 것은 모두 사치 풍조에 기인한 것입니다. 전하께서 몸소 절약과 검소의 덕으로 솔선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보고 느끼게 하는 것이, 바로 선행해야 할 정사입니다. 가례(嘉禮) 때에도 만일 모든 물자를 간략하게 쓰기를 힘쓴다면, 어찌 성덕(聖德)의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고, 시강관 홍명하(洪命夏)가 아뢰기를,
"신이 가례 도감(嘉禮都監)에서 재정한 숫자를 보았더니, 성상께서 견감하신 것이 많은데, 단, 《등록》 가운데 ‘빈궁(嬪宮)의 부모에게도 비단옷을 특별히 준다.’는 규정이 있으니, 이도 견감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한 벌은 이미 줄였다."
하였다. 조석윤이 아뢰기를,
"신이 저번에 한성부의 공사를 보았더니, 세자궁에 연못을 수축하는 공사가 있었는데, 이때에 어찌 이런 일이 있어서야 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세자는 나이가 어린데, 어찌 그로 하여금 연못을 구경하며 뜻을 잃게 할 수 있겠는가. 마침 무너진 돌이 있었기 때문에 개축하도록 하였을 뿐이다."
하였다. 조석윤이 아뢰기를,
"성상께서는 검소함을 숭상하시는 때에 세자에게 이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되는데 하물며 지금 어린 나이이니 말 할 것이 있겠습니까. 전하께서는 더욱 검약의 덕을 보이셔야 할 것입니다."
하고, 홍명하가 아뢰기를,
"여염의 사대부 집에 사치가 날로 심하여 부녀자가 출입할 때 봉잠(鳳簪)과 용차(龍釵)가 없으면 부끄러워서 감히 나가지 못한다 합니다. 반경(盤庚)편에 이른바 ‘패옥을 모으기만 한다.’는 것은 아마 이같은 폐습을 가리켰을 겁니다. 성상께서 먼저 검소한 덕을 행하여 아랫사람들을 경각시킨다면, 어찌 보고 느끼는 효과가 없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선조(先朝) 때부터 분부가 계시어 궐내 사람은 감히 중국의 기용(器用)과 서화(書畵)를 쓰지 못하고, 복식(服飾)에 이르러서도 무늬 있는 비단은 감히 입지 못하였으므로 대궐 안에 사치를 숭상하는 일이 별로 없는데, 여염의 폐습이 이와 같으니, 참으로 개탄스럽다."
하였다. 홍명하가 아뢰기를,
"사치를 숭상하는 사대부는 사람들이 모두 비루하게 여겼는데, 지금은 모두 사치를 숭상하여 하천배까지도 명주 바지와 비단 저고리를 입지 않은 자가 없습니다. 금리(禁吏)가 잡아서 법부(法府)에 고발하는 자는 피폐하여 세력이 없는 자에 불과할 뿐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일찍이 듣건대 유식한 사대부는 감히 이런 일을 하지 않았다는데, 오늘날의 폐습이 어찌 이렇게도 심하단 말인가. 비록 치세를 원하는 성의가 있더라도 아랫사람들이 이와 같으니, 임금이 어떻게 혼자 해낼 수 있겠는가."
하였다. 조석윤이 아뢰기를,
"왕세자가 지금 어린 나이이므로 보양(輔養)하는 일이 정말 급하니, 회강(會講)과 조강(朝講)을 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진선(進善)과 찬선(贊善) 등의 관원도 차출하여 그들로 하여금 도와 이끌게 해야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조에 거듭 일러라."
하였다. 홍명하가 아뢰기를,
"신과 이지항(李之恒)은 어렸을 때부터 서로 친한 처지이온데 ‘탐욕을 부렸다.’는 비평은 실로 애매한 것이니, 간원의 아룀이 사실 옳은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부제학은 얼마나 중요한 직책입니까. 이지항이 지금 그 직책에 있는 중인데 ‘탐욕을 부렸다.’는 것을 가지고 서한을 발송해 탐문하니, 신하를 예로써 부린다는 도리에 실로 어긋남이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말이 참으로 옳다. 그를 체직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상이 이어서 여러 신하들에게 묻기를,
"경들은 이지항이 탐욕을 부렸다는 것을 일찍이 들었는가?"
하니, 특진관 허적(許積)이 아뢰기를,
"신은 이지항이 백성을 잘 다스렸다는 말만 들었을 뿐, 탐욕을 부렸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정영(李正英)이 비록 술에 취했다 하더라도 필시 들은 바가 있어서 말한 것이지, 어찌 꾸며서 한 말이겠습니까."
하고, 조석윤은 아뢰기를,
"이지항이 비록 청고(淸苦)하고 염개(廉介)한 지조는 없으나 탐욕을 부렸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하고, 참찬관 목행선(睦行善)은 아뢰기를,
"신이 일찍이 내포 수령(內浦守令)으로 있을 때 들었는데, 이지항은 오히려 홍산(鴻山)의 백성들이 사모하여 비를 세웠다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공론이 이와 같은데, 이정영은 술에 취하여 경연에 나와 목이 잠겼다고 말하고는 끝내 진강(進講)은 하지 않고 갑자기 장관(長官)을 논박하였다. 옥당 유신(玉堂儒臣)도 오히려 이와 같으니, 정말 매우 한심하다."
하였다. 조석윤이 아뢰기를,
"대동법(大同法)을 선조(先朝)에서는 백성들이 불편하게 여긴다는 이유로 행하지 못하였습니다. 결수(結數)가 가장 많은 백성은 일시에 마련해 내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공안(貢案)을 자세히 정하면 백성들이 반드시 편리하게 여길 것입니다. 양호(兩湖)의 전결(田結)은 경중(輕重)이 현격하게 다르니, 일시에 융통해서 행한다면 무거운 곳은 가볍게 되고 가벼운 곳은 무겁게 될 것이므로 신이 일시에 행하되 먼저 공안을 바르게 정하기를 청하였습니다. 그렇게 하면 비록 대동법을 행하지 않더라도 부역을 고르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의 의견은 이와 같으나, 신은 본래 사무에 어둡기 때문에 대동청(大同廳)의 임무를 사면하였던 것입니다. 상소 중에 진달한 것은 말의 뜻이 제대로 전달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감히 우러러 아뢰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전일 경의 상소 중에 의견이 이와 같았는데 내가 이해하지 못했을 뿐이다."
하였다.
수안 군수(遂安郡守) 이욱(李旭)이 공차(公差)로 서울에 올라왔다가 이때 떠나면서 하직 인사를 드리니, 상이 불러 보고 백성들에게 끼쳐지는 폐단에 대해서 물어 보았다.
8월 15일 경신
영의정 김육(金堉)이 책례 도감 제조(冊禮都監提調) 이하를 거느리고 중궁(中宮)의 책보(冊寶)를 올렸다.
통천 군수(通川郡守) 안정섭(安廷燮), 문의 현령(文義縣令) 황전(黃琠), 남평 현감(南平縣監) 윤종지(尹宗之), 이성 현감(利城縣監) 최정해(崔挺海), 양덕 현감(陽德縣監) 윤해(尹垓)가 공차로 서울에 올라오니, 상이 불러 보고 각각 백성들에게 끼쳐지는 폐단을 물어보고 이어 주의시켜 보냈다.
정언 조사기(趙嗣基)가 인피하기를,
"옥당의 신하가 술을 마시고 입시하여 진강(進講)을 하지 못하고 갑자기 장관에 대하여 규정 밖의 논핵을 하였다는 말을 듣고 너나없이 놀랐는데, 한번쯤 서로 규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지항 역시 한때의 사류(士流)로서 대대로 그 명망을 이루어 왔으니, 그가 관직에 있으면서 청렴하지 못했다는 말은 신이 미처 들어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를 사모하여 세운 비(碑)를 본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탐욕을 부렸다.’는 논핵이 이미 그의 몸에 미쳤으니, 다만 실정 밖의 일이라고 하여 그냥 둘 수는 없습니다. 말한 자도 필시 들은 바가 있을 것이고, 비방을 입은 자도 반드시 비방받을 꼬투리가 있을 것이니, 모두 추고하여 시비가 가려지면 경중에 맞게 나름대로 처치할 방도가 있을 것이므로 반복하여 상의해서 아뢰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듣자니, 경연석상에서 옥당의 신하가 신 등이 논한 것을 그릇된 일이라 하였다니, 신의 직을 갈아주소서."
하고, 사간 이응시도 이 일로 인피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조사기 등은 모두 물러가서 공론을 기다렸다. 간원이 【정언 홍수(洪鐩).】 아뢰기를,
"조사기와 이응시는 모두 인혐하고 물러갔습니다. 경악(經幄)의 장관으로서 연신(筵臣)의 논핵을 입었으니, 아울러 추감(推勘)하기를 청한 것은 대개 그 사실을 자세히 들으려고 한 것으로서 신중을 기하려는 뜻에서 나온 것인데, 무슨 피할 만한 혐의가 있겠습니까. 모두 출사하라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8월 16일 신유
상이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왕비 장씨(張氏)를 책봉하니, 백관이 하례를 드렸다.
교명문(敎命文)은 다음과 같다.
"왕은 이렇게 말하노라. 나라를 다스릴 때 가정에서부터 하는 것은 인륜(人倫)의 근본을 펴기 위해서이고, 임어하여 왕후를 책봉하는 것은 왕화(王化)의 기반을 밝히기 위해서이다. 대개 부덕(婦德)의 어짊은 안으로 말미암아 밖으로 미쳐 가고, 곤원(坤元)의 상(象)은 건(乾)을 본받아 가운데 처하였도다. 상법(常法)을 상고하니, 고금의 중한 일이로다. 아, 그대 왕비 장씨는 명문에서 태어나서 과인의 배필이 되었도다. 성모(聖母)에게 훈계를 받아 부드럽고 아름다운 덕을 계승하고 이방(異方)에서 세월을 보내면서 어렵고 고달픈 생활을 함께 겪었도다.123) 드디어 갑관(甲觀)124) 에서 왕위에 오르니, 따라서 초위(椒闈)125) 에서 지존(至尊)과 짝이 되었도다.
풍화가 이남(二南)126) 에 확대되니, 관저(關雎)127) 의 시가를 크게 전파하였고, 경사가 일색(一索)128) 에 맞으니 장발(長發)의 상서129) 를 성대하게 맞이하였도다. 그래서 상복을 벗는 때를 당하여 정시(正始)130) 의 명을 밝히노라. 삼가 신하인 의정부 영의정 김육(金堉)과 호조 판서 이시방(李時昉)을 보내어 절(節)을 가지고 예(禮)를 갖추어 옥책 보장(玉冊寶章)을 주노라. 어헌 적불(魚軒翟茀)131) 은 예경(禮經)을 모방하여 알맞은 것을 나타내고, 옥검 금서(玉檢金書)는 헌장(憲章)에 따라 물자를 갖추노라. 아, 정성으로 종석(宗祏)132) 을 받들고, 검약으로 궁정(宮庭)에 모범을 보였도다. 더욱 휘음(徽音)을 발휘하여 수신 제가의 내조를 침체하지 말고, 힘써 음교(陰敎)133) 를 베풀어서 창치(昌熾)의 시기를 연장할지어다. 그래서 이에 교시하노니, 잘 알 줄로 생각하노라." 【예문관 제학 윤순지(尹順之)가 지은 것이다.】 악장(樂章) 양휘곡(敭徽曲)은 다음과 같다. "현추(玄樞)에 광채가 엉기고 황뉴(黃紐)에 서광이 깃들었도다. 경사는 봉기(鳳紀)134) 에 휩싸이고, 예제가 적위(翟褘)135) 에 집중되었도다. 이에 육침(六寢)이 화합하고 중위(中闈)가 화목하도다. 곤원(坤元)이 화합하고 월망(月望)이 함께 빛나도다. 천추(千秋)토록 장구하고, 백록(百祿)이 집중되리로다. 옥송(玉頌)136) 이 열렬하고 금약(金籥)137) 이 빛나도다." 【 공조 참판 여이징(呂爾徵)이 지은 것이다.】
【태백산사고본】 7책 7권 21장 A면【국편영인본】 35책 505면
【분류】왕실-비빈(妃嬪) / 왕실-의식(儀式) / 어문학-문학(文學)
[註 123] 이방(異方)에서 세월을 보내면서 어렵고 고달픈 생활을 함께 겪었도다. : 인조 14년(1636)의 병자호란으로 이듬해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가 8년 동안 있었던 것을 가리킨다.[註 124] 갑관(甲觀) : 세자의 궁.[註 125] 초위(椒闈) : 왕비의 궁.[註 126] 이남(二南) : 《시경(詩經)》의 주남(周南)·소남(召南).[註 127] 관저(關雎) : 《시경》 국풍(國風) 주남(周南)의 첫 장(章). 《집전(集傳)》에 의하면, 후비(后妃)의 덕을 노래한 것이라 한다.[註 128] 일색(一索) : 처음 구한다는 뜻인데, 여기서는 아마 장남(長男) 곧 현종(顯宗)의 출산을 나타낸 듯하다. 《주역》 설괘전(說卦傳)에, "건괘는 하늘이므로 아버지라 일컫고, 곤괘는 땅이므로 어머니라 일컫는다. 진괘는 첫번으로 구하여 남자를 얻으므로 장남이라 하고, 손괘는 첫번으로 구하여 여자를 얻으므로 장녀라 한다.[乾天也 故稱平父 坤地也 故稱平母 震一索而得女 故謂之長女]"라는 말이 보인다.[註 129] 장발(長發)의 상서 : 장발은 《서경》 상송(商頌)의 편명이기도 하거니와, 장발편에, "예지있고 명철한 상나라 임금에게 오래도록 상서가 나타났네[濬哲維商長發其祥]"라는 말이 보인다.[註 130] 정시(正始) : 시초를 바르게 함. 여기서는 인륜의 시초인 곧 부부관계를 바르게 함을 뜻한다.[註 131] 어헌 적불(魚軒翟茀) : 제후 부인(諸侯夫人)이 타는 수레인데, 물고기 가죽과 꿩깃으로 장식을 한다.[註 132] 종석(宗祏) : 종묘안의 신주(神主)를 안치하는 석실(祏室).[註 133] 음교(陰敎) : 여교(女敎).[註 134] 봉기(鳳紀) : 제왕의 기록.[註 135] 적위(翟褘) : 꿩무늬를 수놓은 왕후의 제복(祭服).[註 136] 옥송(玉頌) : 시가(詩歌).[註 137] 금약(金籥) : 금으로 만 든 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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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장(樂章) 양휘곡(敭徽曲)은 다음과 같다.
"현추(玄樞)에 광채가 엉기고 황뉴(黃紐)에 서광이 깃들었도다. 경사는 봉기(鳳紀)134) 에 휩싸이고, 예제가 적위(翟褘)135) 에 집중되었도다. 이에 육침(六寢)이 화합하고 중위(中闈)가 화목하도다. 곤원(坤元)이 화합하고 월망(月望)이 함께 빛나도다. 천추(千秋)토록 장구하고, 백록(百祿)이 집중되리로다. 옥송(玉頌)136) 이 열렬하고 금약(金籥)137) 이 빛나도다." 【 공조 참판 여이징(呂爾徵)이 지은 것이다.】
【태백산사고본】 7책 7권 21장 A면【국편영인본】 35책 505면
【분류】왕실-비빈(妃嬪) / 왕실-의식(儀式) / 어문학-문학(文學)
[註 123] 이방(異方)에서 세월을 보내면서 어렵고 고달픈 생활을 함께 겪었도다. : 인조 14년(1636)의 병자호란으로 이듬해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가 8년 동안 있었던 것을 가리킨다.[註 124] 갑관(甲觀) : 세자의 궁.[註 125] 초위(椒闈) : 왕비의 궁.[註 126] 이남(二南) : 《시경(詩經)》의 주남(周南)·소남(召南).[註 127] 관저(關雎) : 《시경》 국풍(國風) 주남(周南)의 첫 장(章). 《집전(集傳)》에 의하면, 후비(后妃)의 덕을 노래한 것이라 한다.[註 128] 일색(一索) : 처음 구한다는 뜻인데, 여기서는 아마 장남(長男) 곧 현종(顯宗)의 출산을 나타낸 듯하다. 《주역》 설괘전(說卦傳)에, "건괘는 하늘이므로 아버지라 일컫고, 곤괘는 땅이므로 어머니라 일컫는다. 진괘는 첫번으로 구하여 남자를 얻으므로 장남이라 하고, 손괘는 첫번으로 구하여 여자를 얻으므로 장녀라 한다.[乾天也 故稱平父 坤地也 故稱平母 震一索而得女 故謂之長女]"라는 말이 보인다.[註 129] 장발(長發)의 상서 : 장발은 《서경》 상송(商頌)의 편명이기도 하거니와, 장발편에, "예지있고 명철한 상나라 임금에게 오래도록 상서가 나타났네[濬哲維商長發其祥]"라는 말이 보인다.[註 130] 정시(正始) : 시초를 바르게 함. 여기서는 인륜의 시초인 곧 부부관계를 바르게 함을 뜻한다.[註 131] 어헌 적불(魚軒翟茀) : 제후 부인(諸侯夫人)이 타는 수레인데, 물고기 가죽과 꿩깃으로 장식을 한다.[註 132] 종석(宗祏) : 종묘안의 신주(神主)를 안치하는 석실(祏室).[註 133] 음교(陰敎) : 여교(女敎).[註 134] 봉기(鳳紀) : 제왕의 기록.[註 135] 적위(翟褘) : 꿩무늬를 수놓은 왕후의 제복(祭服).[註 136] 옥송(玉頌) : 시가(詩歌).[註 137] 금약(金籥) : 금으로 만 든 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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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면명(赦免命)을 내리고 교문(敎文)을 반포하였는데, 그 교문은 다음과 같다.
"왕은 이렇게 말하노라. 건원(乾元)이 처음 창조되는 것은 본래 순승(順承)의 공훈에 의지하고, 군도(君道)가 비로소 시작되는 것은 반드시 상성(相成)의 교화를 힘입는다. 그러므로 제왕(帝王)이 배필을 세우는 전례는 곧 고금에서 다스림에 이르게 하는 근원이었다. 이미 성대한 의식을 거행하고, 따라서 환한(渙汗)138) 의 명령을 내리노라. 과덕(寡德)한 내가 외람되이 크나큰 기업(基業)을 지키며 왕업을 계승하는 어려움을 생각하니 영인(寧人)139) 의 큰 업을 떨어뜨릴까 두렵노라. 종묘 사직의 주인이 되어 다행히 군자의 좋은 짝을 두었노라. 충효는 본디 명문에서 드러나고 아름다운 덕성은 일찍이 하늘의 품부에서 얻었노라. 북녘 지방에서 온갖 험난을 겪을 때 내조의 정성을 거의 다하였고, 동위(東闈)140) 에서 영귀(榮貴)를 누릴 때에 가서는 더욱 경계하는 뜻을 아끼지 않았다. 삼조(三朝)에 사랑을 베풀어 능히 장락(長樂)의 승안(承顔)을 화평히 하고, 일색(一索)이 상서를 열어 진실로 원량(元良)을 기다림에 맞추었노라. 그래서 왕위에 오르는 날에 곤위(壼位)를 주관하여 다스릴 책임을 주었노라. 궁검(弓劍)141) 을 더위잡지 못하여 종천(終天)의 애모(哀慕)를 함께 절실히 느꼈노라. 제수(祭需)의 일에 반드시 공경을 하여 어느새 중월(中月)142) 의 명인(明禋)143) 을 지냈노라. 이에 구장(舊章)에 따라서 현책(顯冊)을 가하노라. 내외간의 지위가 정해지니, 삼궁(三宮)이 여극(儷極)의 존귀함을 우러러보고, 집안과 나라에 모범을 보이니, 만백성이 정시(正始)의 도리를 송축하노라. 이는 오직 조야(朝野)의 큰 경사이거늘, 어찌 사유(赦宥)의 특수한 은혜가 없겠느냐. 아, 관저 인지(關雎麟趾)144) 의 풍화를 추구하노니, 어찌 검근(儉勤)의 미덕을 떨어뜨리느냐. 홍범 구주(洪範龜疇)145) 의 복록을 받았으니 거의 형가(亨嘉)의 아름다움을 같이하리로다. 그러므로 이에 교시하노니, 잘 알 줄로 생각하노라." 【대제학 조석윤이 지은 것이다.】
【태백산사고본】 7책 7권 21장 B면【국편영인본】 35책 505면
【분류】왕실-비빈(妃嬪) / 왕실-의식(儀式) / 사법-행형(行刑) / 어문학-문학(文學)
[註 138] 환한(渙汗) : 왕의 명령. 왕의 명령이 한번 나가면 다시 거둘 수 없음은 마치 땀이 한번 나면 다시 돌이킬 수 없음과 같기 때문이다. 《주역(周易)》 환괘(渙卦).[註 139] 영인(寧人) : 선대의 임금.[註 140] 동위(東闈) : 동궁, 즉 세자를 말한다.[註 141] 궁검(弓劍) : 여기서는 사람의 죽음을 가리킴. 옛날 황제(黃帝)가 용을 타고 하늘에 오를 때 신하들이 따라 오르려 하니 활을 떨어뜨렸다 하고 《사기(史記)》 봉선서(封禪書), 헌원(軒轅)이 죽은 뒤에 교산(橋山)에 장사지냈는데 산이 무너져서 보니 관(棺)에는 시체가 없고 칼과 신만이 있었다 한다. 《열선전(列仙傳)》.[註 142] 중월(中月) : 격월(隔月).[註 143] 명인(明禋) : 담제(禫祭).[註 144] 관저 인지(關雎麟趾) : 《시경》의 두 편명. 관저시는 후비(后妃)의 덕을 노래한 내용이고, 인지시는 후비의 덕에 감화된 어진 자손을 기린 내용이다.[註 145] 홍범 구주(洪範龜疇) : 홍범은 《서경》의 편명이다. 구주는 구주(九疇)와 같다. 《서경》 홍범편의 아홉 번째 항목에 다섯 가지 복(福)을 서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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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7일 임술
교하 현감(交河縣監) 김광찬(金光燦), 양양 부사(襄陽府使) 정기풍(鄭基豊), 함평 현감(咸平縣監) 이유석(李惟碩), 석성 현감(石城縣監) 이돈림(李惇臨), 송화 현감(松禾縣監) 임대직(林大樴)이 임지로 떠나면서 하직 인사를 드리니 직접 불러보고 유시하여 보냈다.
일본국의 관백(關白) 원가광(源家光)이 죽었다.
8월 18일 계해
상이 하교하기를,
"시비를 밝히고 참소를 제거하는 일은 나라의 급무이다. 그런데 만일 참소하는 말이 연석(筵席)에서 나오고 시비가 끝내 정해지지 않는다면 어떻게 나라를 다스릴 수 있겠느냐. 전 교리 이정영(李正英)이 술에 취한 채 경연에 나와서 갑자기 그의 장관이 재물과 뇌물을 탐했다고 논박하자, 좌우의 재신(宰臣)들과 옛고을의 백성들이 이지항(李之恒)이 억울하다고 말하지 않는 자가 없는데, 그에 대한 시비를 정하여 형벌을 주는 조치가 없어서야 되겠는가. 이정영을 의금부로 하여금 잡아다 문초하게 하라."
하니, 승지 남선(南翧)과 목행선(睦行善)이 아뢰기를,
"방금 전 교리 이정영을 잡아다 문초하라는 분부를 보고 신들은 성명께서 지나쳤다고 여깁니다. 이정영이 갑자기 장관을 논핵한 것은 비록 경솔한 실수임은 면치 못하겠으나 그 본의를 추구해 보면 터무니 없는 말을 만들어 내어 참소한 일은 절대 아닙니다. 이미 대간의 평론으로 인하여 그의 직책을 파면하였으니, 그의 망령된 죄를 징계하기에 족합니다. 만일 그를 하옥시켜 문초까지 한다면, 성조(聖朝에서 유신(儒臣)을 대우하는 도리가 그와 같이 해서는 안될 것 같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우레같은 위엄을 조금 멈추고 속히 성명(成命)을 회수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만일 이 사람이 터무니 없는 말을 만들어 내어 참소한 것이 아니라면, 이지항이 어찌 편안할 수 있겠느냐. 시비가 함께 존재할 수 없음은 고금의 공통된 이치이다. 파직한 것으로 그의 죄를 충분히 징계했다고 여기어 그 일을 규명하지 않고 희미하게 덮어두란 말인가. 그대들의 말을 나는 실로 취하지 않겠다."
하였다.
8월 19일 갑자
상이 주강에 나아가 《서전(書傳)》 반경(盤庚)편을 강하였다. 강이 끝나자, 동지경연 조석윤(趙錫胤)이 아뢰기를,
"삼가 듣건대, 이정영을 잡아다 문초하라는 일이 있고 심지어 참소한 자에게는 벌을 주지 않을 수 없다는 등의 분부까지 하셨다 하니, 신은 매우 놀랍습니다. 성상께서 너무도 생각을 아니하신 것 같습니다. 그의 본의가 만일 터무니 없는 말을 만들어 내는 것이었다면 비록 용서하지 않아도 좋겠습니다마는, 이 경우는 절대 그렇지가 않습니다. 참소란 간사한 사람이 애매한 말을 가지고 반드시 함정을 파놓고서 말을 꺼내는 법인데, 이는 갑자기 경연에 나올 때 말하였으니 어찌 참소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연소한 유신이 술을 마시고 경연에 나왔으니, 이는 참으로 실수한 것입니다. 또 이지항이 지금 장관이 되었으니 비록 평일에 들은 바가 있었다 하더라도 논핵까지 한 것은 사체로 보아 부당합니다. 이 두 가지의 죄로 그 직위를 파면한다면 충분한 징계가 될 것입니다. 성상께서 만일 그 곡절을 알려고 하셨다면 당초 추고할 때 그 죄명을 없애지 말도록 하고 그 함사(緘辭)를 보셔도 되었을 것인데, 경악(經幄)의 신하를 갑자기 하옥시킨 것은 너무한 일이 아닙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이 이른바 ‘참소란 애매한 데서 나온 것이다.’는 말은 참으로 옳다. 그러나 지금 들은 바로는 이지항에게 별로 탐욕을 부린 흔적이 없으니, 명백히 조사하지 않을 수 없다. 그가 만일 애매한 누명을 썼다면 한없이 원한을 품을 것이다. 이 조치가 과격한 줄을 모르는 바 아니나 부득불 그렇게 한 것이다."
하자, 조석윤이 아뢰기를,
"이지항과 이정영은 별로 사이가 나쁜 일이 없었는데, 이 어찌 터무니없이 꾸며 낸 말이겠습니까. 필시 들은 바가 있어서 말하였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더욱 자세하게 조사하여 처리해야겠다."
하였다. 조석윤이 아뢰기를,
"일찍이 선조(先朝)에서 조경(趙絅)이, 고 상신(相臣) 홍서봉(洪瑞鳳)이 재물과 뇌물을 탐했다고 논핵하자, 선왕께서 특명으로 조경을 잡아오게 하였는데, 그때 연신(筵臣)이 그 불가함을 역설하니, 즉시 석방하도록 명하셨습니다. 지금 성상께서 비록 지나치셨지만, 속히 고쳐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미 잡아다 가두었으니, 그의 공사(供辭)를 보고 나서 석방해도 늦지 않다."
하였다. 장령 유준창(柳俊昌)이 입시하여 아뢰기를,
"전 교리 이정영이 대간과 시종으로 드나든 지 이미 오래이니 만일 이지항이 재물과 뇌물을 탐한 일을 알았더라면 일찍이 논핵했어야 할 것인데 갑자기 장관을 논박하였으니, 참으로 실수한 바는 있습니다. 그런데 잡아다 문초까지 하면 언로(言路)에 해가 있을 것이니, 이정영을 잡아다 문초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니, 답하기를,
"시비가 구분되지 않으면 후일의 폐단이 이보다 심할 것이다. 이미 잡아다 가두었으니, 그의 공사를 보아서 조사하여 처리하는 것이 옳다. 술에 취해 경연에 나와서 남을 시켜 대신 강하게 한 것도 어찌 작은 실수이겠는가."
하였다.
8월 20일 을축
상이 선정전(宣政殿)에 나아가 상참(常參)을 행하였다. 장령 성하명(成夏明)이 입시하여 이정영을 잡아다 문초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기를 청하니, 상이 일렀다.
"논하는 바가 여기까지 이르렀으니, 석방하라."
상이 주강에 나아가 《서전》 반경편 강하였다. 강이 끝나자, 특진관 이해가 아뢰기를,
"신이 호좌(湖左)에 있을 때 듣기로는 이지항이 백성을 잘 다스렸다는 칭찬은 있었으나 재물을 탐했다는 이름은 별로 없었습니다. 단지 이지항은 위인이 잗달아서 처자의 말만 듣고 절구나 절굿공이 등의 물건까지도 취해 오고, 또 장사를 하는 등의 일로 사람들의 말이 없지 않습니다. 전하께서 유신을 잡아다 가두고 심지어 형벌까지 실시하려고 하니, 참으로 지나친 일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일은 비록 이와 같으나 어찌 단서없이 갑자기 말할 수 있는가."
하였다. 참찬관 조계원(趙啓遠)이 아뢰기를,
"이정영과 이지항과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설은 여염 사이에 더러 있습니다마는, 이정영은 반드시 혐의나 원망으로 인하여 갑자기 공격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 일은 확실치 않아 밝히기 어렵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술에 취해 경연에 나와서 급급히 논핵하였으니, 그 뜻이 필시 공평한 마음에서 나온 것은 아닐 것이다. 지금의 형세는 건국 초기와 달라서 인심이 아름답지 못하다. 군상(君上)이 만일 사람의 잘못한 행동을 들어 주는 것으로 언로(言路)를 여는 일이라 이른다면 조정에는 반드시 완전한 사람이 없을 것이다. 이정영의 공사(供辭)에는 명백히 증거할 만한 말이 별로 없으니 두 사람의 곡직(曲直)을 이것으로는 분별하기 어려울 것 같다."
하였다. 동지경연 민응형(閔應亨)이 아뢰기를,
"지난번에 옥당의 차자에 대한 비답을 보니, 그 책려(策勵)하신 뜻은 실로 지성스럽고 걱정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므로 보는 사람으로서는 감탄하지 않는 자가 없었습니다. 이것으로 보면 위험과 패망의 재변이 이렇게까지 이르지 않아야 할 것인데, 낙뢰의 재변이 그 뒤에 금방 생겼습니다.
옛날 송(宋)나라 경공(景公)은 중간 정도 가는 임금이었는데 말 한마디 착하게 하자 화성이 물러갔고, 주(周)나라 성왕(成王)은 어진 임금이었는데 금등(金縢)의 글을 보고 주공(周公)의 뜻에 감읍하자 그 해에 풍년이 들었습니다. 지금 재이의 참상이 이처럼 극도에 이르고 있으니, 신의 생각에는 성명께서 하늘을 받드시는 정성이 혹시 중단되는 바가 있어서 그런가 염려됩니다.
무릇 임금이 하늘에 대한 것은 마치 자식과 아버지의 사이와 같습니다. 아버지가 노여워하면 아들은 부득불 두려워하고 고민하게 되는 것입니다. 대개 하늘은 단순한 하늘일 뿐만이 아니고 바로 사람인 것이며, 사람은 단순한 사람일 뿐만이 아니고 곧 하늘인 것입니다. 하늘과 사람은 한 이치이므로 서로 감응함이 매우 분명한데, 위망의 재변이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으니 지금이야 말로 성상께서 더욱 근신하여 조금도 중단함이 없어야 할 때입니다.
또 임금의 역량은 각자 동일하지 않아서, 창업(創業)할 역량도 있고, 혹은 중흥(中興)할 역량도 있고, 혹은 수성(守成)할 역량도 있는 것이니, 성명의 역량으로 만일 진작(振作)하신다면 창업과 중흥을 한다 해도 무엇이 어렵겠습니까.
지난번 신주를 태묘에다 붙여 모시는 예에 미처 태묘를 수리하지 못하여 열성 신위(列聖神位)를 천막의 노천에다 모셔 놓게 되자, 전하께서 침전(寢殿)에 납시지 않고 예관(禮官)을 가두도록 명하셨습니다. 미처 깨닫지 못한 중에 이런 깜짝 놀랄 조치가 있었으나, 실은 사리에 부합된 것이었습니다. 신은 그때에 비록 잡혀 갇혔지만 도리어 기쁘게 생각한 것은 아랫사람들이 이로 인하여 두려워 경계하지 않을 자가 없을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니, 실로 성상께서 진작하신 것입니다."
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을유년 《등록(謄錄)》을 가져다 상고하였더니, 왕세자가 책봉을 받은 뒤에 3전(殿)에 하례를 드리고, 이어서 면복(冕服) 차림으로 시민당(時敏堂)에 나아가 백관의 하례를 받고 나서 명정전(明政殿)에 나아가 3전에 사례의 전문을 올렸습니다. 지금도 이에 의하여 예를 행하는 것이 온당하겠습니다."
하니, 알았다고 답하였다.
예조가 해서(海西)·기전(畿甸)으로 하여금 새로 생산되는 물선(物膳)의 봉진(封進)하는 일을 옛 규례대로 할 것을 청하니, 그전대로 견감하라고 명하였다.
8월 23일 무진
예조가 왕세자가 어리므로 알묘(謁廟)하고 입학(入學)하는 예를 명년으로 물려서 행할 것을 청하자, 시강원(侍講院)이 아뢰기를,
"왕세자의 관례(冠禮)와 책례(冊禮)를 거행한 뒤에 3전에 하례를 드리고 전문을 올리는 등등의 예도 이미 행하였는데, 알묘하는 한 절목만 아직도 행하지 않았으니 인정과 예절에 흠결이 있습니다. 또 알묘와 입학은 완급의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을유년 일기(日記)를 가져다 상고하였더니, 책봉을 받고 하례를 드린 후 이틀이 되어서 곧 태묘(太廟)에 알현하였습니다. 지금 알묘하는 예를 조금도 늦추어서는 아니되니, 예관으로 하여금 다시 품의해서 처리하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8월 24일 기사
송시열(宋時烈)을 진선(進善)으로 삼고, 조석윤(趙錫胤)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금천군(金川郡)을 새로 설치하고 이회(李禬)를 군수로 삼았다. 황해 감사 정양필(鄭良弼)이 치계하기를,
"금천역(金川驛)은 본도(本道)로 막 들어오는 큰 길목에 있습니다. 우봉(牛峰)과 강음(江陰) 고을의 소재지가 모두 멀어 그 백성들이 역참 부역의 괴로움을 받고 있으니, 두 고을을 합하여 금천에다 옮겨 설치하여 백성의 힘이 펴지게 비변사로 하여금 의논하게 하소서."
하였다. 이에 대해 비변사가 아뢰기를,
"두 고을을 합하여 한 고을로 만들면 지역이 크고 인민이 많으므로 군(郡)으로 격을 올려 만들어야겠고, 또 두 고을의 관속으로서 옮겨 사는 자들에게는 5년 동안 부역을 면제해 주어 정착시키는 초기의 밑바탕으로 삼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호서의 대동법(大同法)을 비로소 정하였다. 우리 나라의 공법(貢法)은 너무나도 무너졌다. 서울에 있는 호탕하고 간교한 무리들이 경주인(京主人)이라고 하면서 제도(諸道)에서 공납하는 물품을 방납(防納)하고 그 값을 본읍(本邑)에서 배로 징수하였다. 그 물품의 값이 단지 1필(匹)·1두(斗)라 할 때 교활한 방법을 써 수십 필, 수십 석에 이르게 한다. 탐관 오리들이 그들에게 빌붙어 이익을 꾀하는데, 마치 구렁텅이로 물이 몰려드는 것 같아 그 폐단이 점점 불어났다.
또 임진 왜란 이후로 공안이 더욱 문란해져서 계해년146) 에 강정(講定)하였으나 다과가 균등하지 않았으므로 백성들이 매우 원망하였다. 그래서 60년 이래로 의논한 자들이 대부분 속히 개정해야 된다고 말하였다. 혹자는 "선왕이 토지를 맡겨 준 뜻에 따라 공안을 개정하여 그 생산물을 징수해야 한다." 하기도 하고, 혹자는 "공안은 갑자기 개정하기 어려우니, 우선 양세(兩稅)의 제도에 의하여 1년 잡색(雜色)의 공물(貢物)을 통틀어 계산한 다음, 그 많고 적음에 따라 그 값을 공평하게 정하고 쌀이든 베든 바로 서울로 실어 올려 물건을 무역해서 공물을 마련하게 하여 중간에서 이익을 꾀하는 폐단이 없게 해야 한다." 하는 등등의 의논이 분분하여 정해지지 않았다. 영의정 김육(金堉)이 대동법을 극력 주장하였고, 또 충청도는 공법이 더욱 고르지 못하다고 하여 먼저 시험할 것을 청하였다. 상이 누차 여러 신하들에게 물으니, 혹자는 그것이 편리하다고 말하고 혹자는 그것이 불편하다고 말하였다. 이에 와서 상이 김육 등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고 그것이 편리한지의 여부를 익히 강론하여 비로소 호서(湖西)에 먼저 행하기로 정하였다. 【한 도를 통틀어서 1결(結)마다 쌀 10두(斗)씩을 징수하되, 봄·가을로 등분하여 각각 5두씩을 징수하였다. 그리고 산중에 있는 고을은 매 5두마다 대신 무명 1필(匹)씩을 공납하였다. 대읍(大邑)·중읍(中邑)·소읍(小邑)으로 나누어 관청의 수요를 제하여 주고, 또 남은 쌀을 각 고을에 맡겨 헤아려 주어서 한 도의 역(役)에 응하게 하고, 그 나머지는 선혜청(宣惠廳)에 실어 올려서 각사(各司)의 역(役)에 응하게 하였다.】 김육이 아뢰기를, "각 고을에서 제사에 쓰이는 생 노루를 공물로 바치는 것은 옛 규례인데, 상처가 없이 잡아서 먼 길에 실어다 바치는 것은 그 형세상 쉽지 않으며, 부득이 서울에서 사서 바치게 되면 노루 한 마리 값이 무려 목면(木綿) 60단(端)에 이르니, 그 폐단이 큽니다. 《예기(禮記)》에 1년 된 송아지니, 2년 된 송아지니 하는 설이 있으니, 지금부터는 생 노루 대신에 송아지를 쓰는 것이 타당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조종조의 옛 규례는 경솔하게 고칠 수 없으니, 다른 대신에게 의논해서 처리하겠다." 하였다. 영중추부사 이경여(李敬輿)가 의논드리기를, "국가의 큰 제사에 쓰이는 희생은 소를 귀중히 여기며 노루를 쓰는 규정은 없습니다. 소로 노루를 대신하는 것은 가벼운 것에서 무거운 것으로 옮겨가고 큰 것으로 작은 것을 바꾸는 것이니, 조상을 받드는 도리에 혐의가 없을 듯합니다. 단, 옛 사람이 예를 제정하는 데 각각 그 의의가 있어서 대사(大祀)에는 황소를 쓰고 교천제(郊天祭)에는 송아지를 쓰고 그 밖에는 혹 양과 돼지를 쓰기도 하여 경중을 알맞게 하였는데, 지금 만일 노루와 송아지를 바꾼다면 무분별한 데 가깝지 않겠습니까. 반드시 상처난 곳이 없는 것을 쓰는 것은 제향(祭享)에서나 진상(進上)에서나 동일합니다. 그 폐단을 제거하기 위하여 제향에 송아지를 쓰되 어공(御供)에만 노루를 놔두어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어공에도 장차 송아지를 쓰려는 것입니까? 어공에는 결코 송아지를 쓸 수 없으니, 이 한 가지 점이 더욱 곤란합니다." 하였고, 영돈녕부사 김상헌(金尙憲)과 전 영의정 이경석(李景奭)에게 의논하도록 명하니, 김상헌이 의논드리기를, "선조(先朝)에서 예절을 제정할 때 지극히 경건하고 엄중하게 하였습니다. 삼가 듣건대, 문소전(文昭殿)과 연은전(延恩殿) 같은 경우, 여느 때 제향의 제물은 더러 때아닌 천신(薦新)의 물건을 쓰는 일도 있었지만, 사직과 종묘의 제사만은 반드시 미리 길러 놓은 희생을 썼지 폐단이 있다고 해서 다른 고기로 대신 썼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하였습니다. 다른 것을 대신 써서 폐단을 제거하는 것은 제 선왕(齊宣王)의 흔종(釁鍾)이나 송 인종(宋仁宗)의 소양인기(燒羊忍飢)147) 와 같은 일이니, 조종의 일정한 제사의 예에 관계되는 것은 감히 다른 물건으로 대용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예(禮)에 ‘이미 거행한 것은 감히 폐지하지 못한다.’ 하였습니다." 하고, 이경석이 의논드리기를, "제향에 쓰이는 수륙(水陸)의 물품은 이미 조종조에서 정해 놓은 품식(品式)이 있으니, 큰 흉년이나 대단한 재난과 같은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지 않으면 그 사이에 가벼이 논의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만일 민폐를 염려한다면, 제사에 쓰이는 짐승은 반드시 상하지 않은 것을 취한다 하지만 《예경(禮經)》과 《춘추(春秋)》에 약간 상처난 짐승을 쓰지 않는다는 조문은 따로 없으니, 상처난 정도가 대단하지 않으면 제물로 쓰는 것이 혹 무방할 듯도 합니다." 하니, 김상헌의 의논에 따르도록 명하였다.
【태백산사고본】 7책 7권 23장 B면【국편영인본】 35책 506면
【분류】재정-공물(貢物) / 재정-전세(田稅) / 재정-진상(進上)
[註 146] 계해년 : 1623 인조 원년.[註 147] 제 선왕(齊宣王)의 흔종(釁鍾)이나 송 인종(宋仁宗)의 소양인기(燒羊忍飢) : 제 선왕 때 소의 피로 종(鍾)의 틈을 메꿔 단단하게 하는 의례가 있었다. 하루는 그것을 위해 소를 끌고 가는 것을 제 선왕이 보고 불쌍하다고 하여 양으로 대신하게 하였다. 《맹자(孟子)》 양혜왕장구(梁惠王章句) 상(上). 한편 송 인종은 야밤에 출출하여 구운 양고기가 먹고 싶어도 후일에 정례(定禮)가 되는 폐단이 생길까 보아 참았다 한다. 《연감유함(淵鑑類函)》 권436 양(羊).
ⓒ 한국고전번역원
김육이 아뢰기를,
"각 고을에서 제사에 쓰이는 생 노루를 공물로 바치는 것은 옛 규례인데, 상처가 없이 잡아서 먼 길에 실어다 바치는 것은 그 형세상 쉽지 않으며, 부득이 서울에서 사서 바치게 되면 노루 한 마리 값이 무려 목면(木綿) 60단(端)에 이르니, 그 폐단이 큽니다. 《예기(禮記)》에 1년 된 송아지니, 2년 된 송아지니 하는 설이 있으니, 지금부터는 생 노루 대신에 송아지를 쓰는 것이 타당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조종조의 옛 규례는 경솔하게 고칠 수 없으니, 다른 대신에게 의논해서 처리하겠다."
하였다. 영중추부사 이경여(李敬輿)가 의논드리기를,
"국가의 큰 제사에 쓰이는 희생은 소를 귀중히 여기며 노루를 쓰는 규정은 없습니다. 소로 노루를 대신하는 것은 가벼운 것에서 무거운 것으로 옮겨가고 큰 것으로 작은 것을 바꾸는 것이니, 조상을 받드는 도리에 혐의가 없을 듯합니다. 단, 옛 사람이 예를 제정하는 데 각각 그 의의가 있어서 대사(大祀)에는 황소를 쓰고 교천제(郊天祭)에는 송아지를 쓰고 그 밖에는 혹 양과 돼지를 쓰기도 하여 경중을 알맞게 하였는데, 지금 만일 노루와 송아지를 바꾼다면 무분별한 데 가깝지 않겠습니까. 반드시 상처난 곳이 없는 것을 쓰는 것은 제향(祭享)에서나 진상(進上)에서나 동일합니다. 그 폐단을 제거하기 위하여 제향에 송아지를 쓰되 어공(御供)에만 노루를 놔두어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어공에도 장차 송아지를 쓰려는 것입니까? 어공에는 결코 송아지를 쓸 수 없으니, 이 한 가지 점이 더욱 곤란합니다."
하였고, 영돈녕부사 김상헌(金尙憲)과 전 영의정 이경석(李景奭)에게 의논하도록 명하니, 김상헌이 의논드리기를,
"선조(先朝)에서 예절을 제정할 때 지극히 경건하고 엄중하게 하였습니다. 삼가 듣건대, 문소전(文昭殿)과 연은전(延恩殿) 같은 경우, 여느 때 제향의 제물은 더러 때아닌 천신(薦新)의 물건을 쓰는 일도 있었지만, 사직과 종묘의 제사만은 반드시 미리 길러 놓은 희생을 썼지 폐단이 있다고 해서 다른 고기로 대신 썼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하였습니다. 다른 것을 대신 써서 폐단을 제거하는 것은 제 선왕(齊宣王)의 흔종(釁鍾)이나 송 인종(宋仁宗)의 소양인기(燒羊忍飢)147) 와 같은 일이니, 조종의 일정한 제사의 예에 관계되는 것은 감히 다른 물건으로 대용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예(禮)에 ‘이미 거행한 것은 감히 폐지하지 못한다.’ 하였습니다."
하고, 이경석이 의논드리기를,
"제향에 쓰이는 수륙(水陸)의 물품은 이미 조종조에서 정해 놓은 품식(品式)이 있으니, 큰 흉년이나 대단한 재난과 같은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지 않으면 그 사이에 가벼이 논의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만일 민폐를 염려한다면, 제사에 쓰이는 짐승은 반드시 상하지 않은 것을 취한다 하지만 《예경(禮經)》과 《춘추(春秋)》에 약간 상처난 짐승을 쓰지 않는다는 조문은 따로 없으니, 상처난 정도가 대단하지 않으면 제물로 쓰는 것이 혹 무방할 듯도 합니다."
하니, 김상헌의 의논에 따르도록 명하였다.
8월 25일 경오
상이 인정문(仁政門)에 나아가 조참(朝參)을 행하였다.
상이 주강에 나아가 《서전》의 반경편을 강하였다. 시독관 홍명하(洪命夏)가 앞으로 나아가 아뢰기를,
"성상께서 날마다 경연을 열어 경학을 강론하고 계시나 마음을 간직하는 공부가 혹 끊기는 염려가 없지 않습니다. 옛날의 제왕은 반드시 성현이 경계한 말씀을 그릇에 새겨 보면서 몸을 닦고 반성하는 소지로 삼았습니다. 선묘조(宣廟朝)와 선왕조(先王朝)에서도 숙흥야매잠(夙興夜寐箴)이나 혹은 《성학십도(聖學十圖)》의 글을 써서 병풍을 만들어 올리라고 명하였었습니다. 성상께서는 즉위하신 지 지금 3년이 되었으나 본관(本館)이 미처 계품하지 못하였습니다. 숙흥야매잠이 공부하는 데 가장 절실하고 비근하니, 선조 고사에 의하여 병풍에 써서 좌우에 두고서 관람에 대비케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말이 참으로 옳다. 실로 서책에서 심상하게 보아넘기는 것과는 다름이 있으니, 상방(尙方)이 병풍을 만들고 옥당 유신이 써서 올리게 하라."
하였다.
8월 26일 신미
상이 옥당의 강관(講官)과 야대(夜對)하여 《심경(心經)》을 강하고 술을 하사하였다.
8월 27일 임신
김홍욱(金弘郁)을 집의로, 이해창(李海昌)을 부응교로, 송준길(宋浚吉)을 진선(進善)으로 삼았다.
상이 병조에 하교하였다.
"지난번 능소에 참배하던 날, 수원 부사(水原府使)가 군사를 거느리고 들어와 호위하였는데, 모두 소매 폭이 넓으니 그것은 바로 한가로운 자나 입는 옷이다. 어찌 창을 베개 삼아 계엄하는 정신이겠는가. 또한 군중(軍中)의 예에 갑옷 입은 군사는 본래 몸을 굽혀 절하는 예가 없으니, 어가(御駕)가 지날 때 두 손을 마주 잡고 몸을 편 채 꿇어앉아서 단지 경건하게 대기하는 예만을 행하게 해야 할 것이다. 앞으로 능소에 나갈 때에는 이에 의해 거행하라."
8월 28일 계유
상이 인정전에 나아가 세자 책례(世子冊禮)를 하였다. 교명문(敎命文)은 다음과 같다.
"왕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생각하건대, 하(夏)·은(殷)·주(周)가 오랫동안 나라를 보유한 것은 모두 어진 세자를 두었기 때문이며 열성(列聖)들께서 점차로 쌓아 올린 기업(基業)은 더욱 동궁에게 인망이 집중되는 것을 중히 여겼다. 더구나 위호(位號)가 이미 정해졌으니, 책명을 속히 선포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래서 상전(常典)에 따라 물채(物采)를 갖추노라. 아, 너 세자 이원(李棩)은 타고난 자질이 훌륭하여 날로 온화(溫和)하고 문아(文雅)해졌다. 왕세자 한 사람을 모두들 사직의 복이라 일컬었고, 선왕께서 사랑하여 일찍이 적사(嫡嗣)의 이름을 정하셨다. 그래서 내가 왕위에 오른 벽두에 주창(主鬯)148) 의 중책을 맡기었다. 옷을 겨우 이길 만한 어린 나이에 나의 음식상을 살피니, 어질고 효성스럽다는 칭찬이 더욱 퍼졌고 예를 익히고 시를 외우되 스승의 훈계를 번거롭게 하지 않았다. 인심이 쏠리고 신기(神器)149) 가 귀속되었다. 돌아보건대, 이 성대한 의식을 베푸는 것은 대개 관례(冠禮)의 끝남을 기다린 것이고 삼가(三加)150) 로 덕을 이루니 수고(壽考)의 복을 맞았고, 세자의 자리를 이어받으니 아름다운 예찬에 합할 만하다. 이에 너를 명하여 왕세자를 삼으니 너는 빛나게 보전(寶典)을 받고 경건히 가르친 말을 명심하라. 왕업의 어려움을 생각하여 공순하고 검소함으로써 몸을 신칙하고, 막대한 일의 부탁임을 생각하여 공경하고 두려움으로써 마음을 간직하라. 어진이를 친히 하고 간언을 받아들이며 혹시라도 아첨하는 사람을 가까이하지 말라. 덕을 닦고 학문을 주력하되 태만하고 황음함을 가장 경계하라. 밤낮으로 잘못하는 일이 없게 하고 잠시라도 반드시 근신하라. 그리하여 나의 뜻을 몸받아 하늘의 아름다운 명을 길이 보전할 것을 기약하라. 그래서 이에 교시하노니, 잘 알 줄로 생각하노라." 【지제교 김익희(金益熙)가 지은 것이다.】 죽책문(竹冊文)은 다음과 같다. "왕은 이렇게 말한다. 맏아들을 세워 세자에 봉하는 것은 대개 국가의 근본을 삼기 위함이고, 이름을 바르게 하고 지위를 정하는 것은 억조 창생의 마음을 붙잡아매기 위함이다. 이에 떳떳한 법칙을 따라 크게 아름다운 전장(典章)을 선양하노라. 아, 너 세자 이원(李棩)은 천성이 인자하고 효성스러우며 자질이 총명하고 준수하였다. 전후 좌우 사람들이 비록 바르게 보필하여 길렀다고 하겠으나, 점점 쌓아 광명한 학문은 열심히 가르치지 않아도 되었다. 그래서 명성이 일찍이 드러나고 기쁘게도 덕기(德器)가 이미 성취되었다. 선왕께서는 독실하게 사랑하셨고, 과인은 날로 장성하기를 바랐다. 원(院)을 개설하고 글을 강론시키어 세상에 드문 성대한 일을 드러내고, 정사를 보시며 명을 내리어 세손에 책봉하셨다. 이왕 당시에 기대가 대단하였는데 내 어찌 부탁하는 일에 걱정을 하겠는가. 오늘날 누구나 우러러 기대하는 마음이 간절하니, 너는 진실로 왕세자의 지위에 어울리도다. 1년이 끝나갈 무렵에 노궁(魯宮)의 관례를 행하고, 3년의 복제를 마치고서 한정(漢庭)의 책의(冊儀)를 거행한다. 이에 너를 책봉하여 왕세자를 삼으니, 아, 그 자리는 편안하지 않고 천명을 보전하기는 쉽지 않은 것이다. 조정이 어렵게 이룬 크나큰 기업을 생각하여 제왕(帝王)의 원대한 계획에 힘쓰라. 한가하게 있을 때에는 혹시라도 방심하여 태만하지 말고, 첫닭이 울면 일어나서 반드시 몸을 신칙하여 온화하고 공순할 것을 생각하라. 선(善)의 도움을 받는 데는 어진이를 친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게 없고, 일을 처리하는 것은 도의를 지키는 데 달려 있다. 위에서 법을 취하되 옛날 성현의 아름다운 교훈에 더욱 힘쓰고, 진실로 그 중도를 지키어 우리 집의 전수하는 유훈(遺訓)을 떨어뜨리지 말라. 그래서 이에 교시하노니, 잘 알 줄로 생각하노라." 【지제교 이일상(李一相)이 지은 것이다.】
【태백산사고본】 7책 7권 25장 A면【국편영인본】 35책 507면
【분류】왕실-종친(宗親) / 어문학-문학(文學)
[註 148] 주창(主鬯) : 맏아들을 뜻함. 맏아들은 종묘(宗廟)의 제사를 받들어 제사에 쓰는 울창주(鬱鬯酒)를 주관한다. 주기(主器) 즉 제기(祭器)를 주관한다는 말과 같다.[註 149] 신기(神器) : 왕위(王位).[註 150] 삼가(三加) : 관례(冠禮)를 행할 때에 세 번 관을 갈아 씌우는 의식. 초가(初加)에는 입자(笠子), 재가(再加)에는 사모(紗帽), 삼가(三加)에는 복두(幞頭)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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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책문(竹冊文)은 다음과 같다.
"왕은 이렇게 말한다. 맏아들을 세워 세자에 봉하는 것은 대개 국가의 근본을 삼기 위함이고, 이름을 바르게 하고 지위를 정하는 것은 억조 창생의 마음을 붙잡아매기 위함이다. 이에 떳떳한 법칙을 따라 크게 아름다운 전장(典章)을 선양하노라. 아, 너 세자 이원(李棩)은 천성이 인자하고 효성스러우며 자질이 총명하고 준수하였다. 전후 좌우 사람들이 비록 바르게 보필하여 길렀다고 하겠으나, 점점 쌓아 광명한 학문은 열심히 가르치지 않아도 되었다. 그래서 명성이 일찍이 드러나고 기쁘게도 덕기(德器)가 이미 성취되었다. 선왕께서는 독실하게 사랑하셨고, 과인은 날로 장성하기를 바랐다. 원(院)을 개설하고 글을 강론시키어 세상에 드문 성대한 일을 드러내고, 정사를 보시며 명을 내리어 세손에 책봉하셨다. 이왕 당시에 기대가 대단하였는데 내 어찌 부탁하는 일에 걱정을 하겠는가. 오늘날 누구나 우러러 기대하는 마음이 간절하니, 너는 진실로 왕세자의 지위에 어울리도다. 1년이 끝나갈 무렵에 노궁(魯宮)의 관례를 행하고, 3년의 복제를 마치고서 한정(漢庭)의 책의(冊儀)를 거행한다. 이에 너를 책봉하여 왕세자를 삼으니, 아, 그 자리는 편안하지 않고 천명을 보전하기는 쉽지 않은 것이다. 조정이 어렵게 이룬 크나큰 기업을 생각하여 제왕(帝王)의 원대한 계획에 힘쓰라. 한가하게 있을 때에는 혹시라도 방심하여 태만하지 말고, 첫닭이 울면 일어나서 반드시 몸을 신칙하여 온화하고 공순할 것을 생각하라. 선(善)의 도움을 받는 데는 어진이를 친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게 없고, 일을 처리하는 것은 도의를 지키는 데 달려 있다. 위에서 법을 취하되 옛날 성현의 아름다운 교훈에 더욱 힘쓰고, 진실로 그 중도를 지키어 우리 집의 전수하는 유훈(遺訓)을 떨어뜨리지 말라. 그래서 이에 교시하노니, 잘 알 줄로 생각하노라." 【지제교 이일상(李一相)이 지은 것이다.】
【태백산사고본】 7책 7권 25장 A면【국편영인본】 35책 507면
【분류】왕실-종친(宗親) / 어문학-문학(文學)
[註 148] 주창(主鬯) : 맏아들을 뜻함. 맏아들은 종묘(宗廟)의 제사를 받들어 제사에 쓰는 울창주(鬱鬯酒)를 주관한다. 주기(主器) 즉 제기(祭器)를 주관한다는 말과 같다.[註 149] 신기(神器) : 왕위(王位).[註 150] 삼가(三加) : 관례(冠禮)를 행할 때에 세 번 관을 갈아 씌우는 의식. 초가(初加)에는 입자(笠子), 재가(再加)에는 사모(紗帽), 삼가(三加)에는 복두(幞頭)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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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9일 갑술
백관이 하례를 드렸다. 사면령을 내리고 교문을 반포하였는데, 그 교문은 다음과 같다.
"왕은 이렇게 말한다. 제사 그릇의 주관에는 맏아들만한 이가 없으므로 이미 부탁하는 걱정을 잊었고 세자를 세우는 일은 초년에 해야 하므로 이에 고명(誥命)의 전례를 거행하노라. 종묘가 더욱 견고하니 신민들이 서로 기뻐한다. 국운(國運)의 연장은 모두 국본(國本)151) 이 일찍 정해지는 데서 연유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손을 위해 세운 계획의 찬양은 주나라 시(詩)에 실려 있고, 세자를 미리 세우자는 좋은 계책은 한나라 글에 나타나 있다. 부덕한 이 사람이 혹시 어렵고 커다란 기업을 무너뜨릴까 항시 두려워하였는데, 오히려 선인의 아름다운 덕에 힘입어 성대한 경사를 열게 되었다. 아, 나의 맏아들은 훌륭한 자질을 가졌다. 효도와 우애가 마음에서 우러나오니 행실이 올바른 교훈에 어긋나지 않았고, 총명이 뭇 사람 속에서 뛰어나니 학문은 스승의 도움을 기다리지 않았다. 일찍이 할아버지의 사랑을 받아 세손의 위호(位號)가 바로잡혔고 내가 왕위에 오른 초두에 곧 출진(出震)152) 의 상서로움에 응하였다. 어질다는 소문에 목을 늘여 바라보고 있으니 참으로 전성(前星)153) 의 명망에 합한다. 계체(繼體)154) 의 책례를 행함은 대개 중월(中月)155) 의 시기를 기다렸다. 관(冠)을 세 번 씌우는 데 잘못이 없이 예를 치루었으니 천성적으로 지덕(智德)이 뛰어났고, 동궁보다 더 높은 이름이 없으니 원량(元良)에 올바른 사람을 얻었다. 실로 국가의 안락(安樂)에 관계된 일인데, 어찌 다만 부모의 사적인 기쁨이 될 뿐이겠는가 이에 패택(霈澤)156) 을 크게 베풀고 빈번하게 알림도 피하지 않노라. 이 달 29일 먼동이 트기 이전 반역을 꾀한 큰 역적이나, 자손으로서 조부모·부모를 죽이고 또는 때리고 욕하였거나, 아내와 첩으로서 남편을 죽였거나, 노비로서 주인을 죽였거나, 고의로 사람을 죽였거나, 염매(魘魅)157) ·고독(蠱毒)158) 하였거나, 국가의 강상(綱常)에 관계된 것이나 장오(贓汚)와 강·절도(强竊盜)를 제외하고는, 잡범(雜犯), 사죄(死罪) 이하의 도류(徒流)·부처(付處)·안치(安置)·충군(充軍) 및 이미 배소(配所)에 이르렀건 아직 배소에 이르지 않았건 이미 발각되었건 아직 발각되지 않았건, 이미 결정(決正)되었건 아직 결정되지 않았건, 모두 사면하겠노라. 감히 사면 이전의 일로써 고발하는 자는 그 고발한 죄로 죄줄 것이다. 벼슬에 있는 자는 각각 한 자급을 올려주고, 자급을 더 이상 올려 줄 수 없는 자는 그의 친속에게 대신 가자하라. 아, 크게 밝고 크게 계승하였는데 한 생각인들 감히 책임에 게을리하겠는가. 거듭 빛나고 윤택하였으니, 백대토록 온 겨레붙이를 이어갈 수 있으리라. 어찌 함께 생성(生成)의 은혜에 용서받아 길이 태평을 누리기를 기하지 아니하랴." 【대제학 조석윤(趙錫胤)이 지은 것이다.】
【태백산사고본】 7책 7권 25장 B면【국편영인본】 35책 507면
【분류】왕실-종친(宗親) / 왕실-의식(儀式) / 사법-행형(行刑) / 인사-관리(管理) / 어문학-문학(文學)
[註 151] 국본(國本) : 세자.[註 152] 출진(出震) : 후사(後嗣)를 이음.[註 153] 전성(前星) : 세자의 별칭.[註 154] 계체(繼體) : 세자의 별칭.[註 155] 중월(中月) : 담제(禫祭).[註 156] 패택(霈澤) : 죄수를 크게 사면하는 은전(恩典).[註 157] 염매(魘魅) : 남을 해치기 위하여 부적 등으로 저주함.[註 158] 고독(蠱毒) : 독충의 독으로 사람을 해침.
ⓒ 한국고전번역원
영의정 김육(金堉) 등이 아뢰기를,
"성주(聖主)의 은혜는 고루 입히는 것이 귀중하고, 임금의 말씀은 믿음으로 중요함을 삼습니다. 하늘은 사사로이 덮지 않고 백성은 속일 수 없습니다. 사면하지 않으려면 말을 하지 않아야 하고, 이미 말을 했으면 마땅히 사면해야 합니다. 어찌 살리고 죽이는 것이 서로 엇갈리어 한결같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신들은 삼가 보건대, 사면령을 반포할 때에 ‘잡범(雜犯)과 사죄(死罪)를 모두 사면하겠다.’고 분부를 하셨었는데, 범행이 사죄에 이르지 않은 자도 은혜를 입지 못하였습니다. 지나간 일이야 말할 것 없거니와 앞으로 닥쳐오는 일은 잘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 성상께서는 효행으로써 나라를 다스려 3년상을 이미 마치셨습니다. 위로는 종묘에 부향(祔享)하고 왕대비를 존숭(尊崇)하는 예를 다하였고, 아래로는 왕비를 책봉하고 세자를 세우는 의식을 갖추었습니다. 조정의 신하들이 왕세자가 예를 행할 때 눈을 씻고 바라보면서 흠모하고 기뻐하여 모두들 덕기(德器)가 천연적으로 이루어졌다고 하였으니, 이는 종사와 신민의 복입니다. 일국에 이보다 더한 경사가 있겠습니까. 전하께서는 한꺼번에 겹친 세 경사로 인하여 한 번 큰 은덕을 베풀어 크게 세척하여 모두 새로운 범주에 참여시키셨습니다. 마치 양(陽)이 열리고 음(陰)이 닫히면서 비가 적시고 해가 비치는 것처럼 하시어, 위로는 하늘에 본받고 아래로는 백성에게 믿음을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비록 선인(善人)이 침묵하더라도 반드시 필부(匹夫)의 원통함은 없을 것입니다. 신들은 너무나 기쁜 나머지 애긍(哀矜)한 마음을 참지 못하여 감히 이렇게 진계(陳啓)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내 마땅히 유념하리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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