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효종실록7권, 효종 2년 1651년 9월

싸라리리 2025. 12. 20.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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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일 을해

최혜길(崔惠吉)을 동지경연으로, 채충원(蔡忠元)을 헌납으로 삼았다.

 

9월 2일 병자

상이 주강에 나아가 《서전(書傳)》의 열명(說命)을 강하였다. 지경연 이후원(李厚源)이 아뢰기를,
"귀에 거슬리는 말은 누구나 싫어하기 때문에 옛날 사람이 독한 약에다 비유해서 말하였습니다. 임금이 말을 하도록 유도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직간(直諫)을 들을 수 있겠습니까. 근래 경연에 납시어 강론하시는 일은 다만 외형적일 뿐이니, 성상께서는 유념하소서."
하니, 그렇다고 하였다.

 

상이 하교하였다.
"누차 대사령(大赦令)을 거쳤으므로 이치상 은택을 널리 펴야겠다. 김자점(金自點)과 유계(兪棨)를 모두 양이(量移)하라."

 

9월 3일 정축

양사(兩司)가 【대사헌 윤순지(尹順之), 집의 김홍옥(金弘郁), 장령 성하명(成夏明), 지평 목겸선(睦兼善), 대사간 조석윤(趙錫胤), 사간 이응시(李應蓍), 헌납 채충원(蔡忠元), 정언 홍수(洪鐩)·조사기(趙嗣基).】  합동으로 아뢰기를,
"김자점이 임금을 잊고 나라를 저버린 죄는 이미 전후 대간의 논핵에서 다 밝혀졌고, 외딴 섬에 안치하자는 청은 실로 거국적인 공론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도 윤허를 얻지 못한 채 논계를 정지한 것은 적용된 율법이 그 죄에 합당하다고 여겨서가 아니라, 다만 성상께서 훈구(勳舊)를 잊지 않으신 그 의리를 본받았기 때문이었는데 오늘날 갑자기 이배(移配)하라는 명이 여론을 무시한 채 내려질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하였습니다. 사면령이 반포되었다 하더라도 무거운 죄는 용서하기 어렵습니다. 전하께서는 왕법이 무너지고 인심이 울분하면 그 해가 나라 꼴이 말이 아닌 지경에까지 이른다는 것을 유독 생각하시지 않습니까. 청컨대 양이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니, 답하기를,
"사면은 죄가 있는 자를 사면하는 것이다. 이번 양이가 어찌 옳지 않을 리가 있겠는가. 번거롭게 논하지 말라."
하였다. 이후로 누차 아뢰니, 따랐다.

 

9월 4일 무인

상이 하교하였다.
"세자의 가례(嘉禮) 때에 올리는 방물(方物)·갑주(甲胄)와 진상하는 말은 매우 폐단이 있으니, 여러 도로 하여금 진상하지 말게 하라."

 

9월 5일 기묘

전 좌의정 조익(趙翼)을 서용하여 판중추부사로, 김좌명(金佐明)을 교리로, 윤집(尹鏶)을 수찬으로 삼았다.

 

9월 6일 경진

상이 주강에 나아가 《서전》의 열명편을 강하였다.

 

정언 조사기(趙嗣基)가 상소하기를,
"신이 무과 시소(武科試所)에 명을 받고 모화관(慕華館)에 있으면서 본 일입니다. 태복시(太僕寺)의 관원이 노마(路馬)159)  를 길들이고 씻기느라 앞길을 오가자, 사람들이 더러 그것을 가리키며 ‘저 흰 말은 중국산이다. 잘 달리는 재주는 있으나 성질이 온순하지 않아 때로는 놀라서 달아나면 몇 길씩 뛰는데, 능소에 참배할 때 어좌마(御坐馬)로 쓸 계획이다.’ 하였습니다. 신은 그 말을 듣고 믿지 않다가 또 외간에서 모두들 ‘성상은 동궁에 있을 때부터 더욱 말달리기를 좋아하였기 때문에 이 뛰어난 말을 사랑하여 장차 능소에 참배하는 날 시험하려 한다.’는 말을 듣고서야 신은 의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태복시의 아전을 불러서 물어보았더니, ‘누차 길들이라는 분부가 있었으나 그 성질이 온순하지 못하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아, 음악·여색·수레·말 등에 뜻을 두는 일은 한(漢)·당(唐)의 보통 임금들도 하지 않았는데, 하물며 우리 성상께서는 바야흐로 정신을 가다듬어 정치를 어떻게 하면 잘할까 연구하고 계시니 어찌 이러한 걱정거리가 있겠습니까. 다만 염려되는 것은 성상의 뜻이 만일 이 말에 연연하여 반드시 길들이려고 하시는 경우니, 그렇다면 외방에서 한 말들이 또한 참으로 옳습니다. 한 문제(漢文帝)가 가파른 언덕을 달려 내려가려고 하자 원앙(袁盎)이 굳이 간하였고, 성제(成帝)가 다리로 가지 않고 배를 타려고 하자, 설광덕(薛廣德)이 머리를 조아리며 간하였습니다. 지금은 이 말이 온순하지 못하니 성명께서 반드시 그 위험한 말을 타시지 않을 것이므로 신은 진실로 원앙과 광덕처럼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만, 삼가 원하건대 길들이지 말도록 명하시어 나라 사람들의 의심을 끊고 의장(儀仗)의 말 가운데서 제거하여 전복되는 걱정이 없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그대의 소장을 보니, 임금을 아끼는 그대의 성의는 지극하다만 의심을 너무하는 것은 역시 지나치다 하겠다. 그러나 그대의 숨김없이 걱정하고 사랑하는 성의를 볼 수 있으니 참으로 가상하다. 유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고, 이어서 마장(馬粧)을 하사하라 명하고 하교하기를,
"조사기의 상소 중에 이른바 ‘온순하지 않은 말’은 외시(外寺)로 내보내고 내구(內廐)에 두지 말라."
하였다.

 

부묘 도감 도제조(祔廟都監都提調) 영의정 김육(金堉)에게는 안구마(鞍具馬) 1필(匹)을 하사하고, 제조 원두표(元斗杓)·심액(沈詻)과 도청(都廳) 김홍욱(金弘郁)·이응시(李應蓍)에게는 모두 자급을 올려 주고, 제조 홍주원(洪柱元)·이기조(李基祚)에게는 각각 숙마(熟馬) 1필을 하사하고, 제조 오준(吳竣)에게는 반숙마(半熟馬) 1필을 하사하고, 제조 박서(朴遾)와 도청 홍처량(洪處亮)에게는 각각 아마(兒馬) 1필을 하사하고, 낭청 5인은 모두 벼슬을 올려 주고, 감조관(監造官) 6인은 모두 6품(品)으로 옮겨 주었다.
존호(尊號)를 올릴 때의 정사 김육(金堉)에게는 안구마 1필을 하사하고, 부사 임담(林墰), 옥책문 제술관(玉冊文製述官) 황감(黃㦿), 서사관(書寫官) 이정영(李正英)에게는 각각 자급을 올려 주고, 보전 서사관(寶篆書寫官) 여이징(呂爾徵)에게는 숙마 1필을 하사하고, 악장 제술관(樂章製述官) 채유후(蔡𥙿後)에게는 반숙마 1필을 하사하고, 봉책관(奉冊官) 오이규(吳以奎) 등 4인에게는 각각 아마 1필을 하사하고, 모든 집사 17인에게는 각각 한 자급씩을 올려 주고, 자급을 더 이상 올려 줄 수 없는 자에게는 그들의 친속에게 가자하였다.
부묘 친제(祔廟親祭) 때의 아헌관(亞獻官) 인평 대군(麟坪大君) 이요(李㴭)에게는 안구마 1필을 하사하고, 종헌관(終獻官) 이해(李澥), 진폐 찬작관(進幣瓚爵官) 임담, 천조관(薦俎官) 원두표(元斗杓), 전폐 찬작관(奠幣瓚爵官) 조수익(趙壽益), 예의사(禮儀使) 박서, 당상 집례(堂上執禮) 채유후(蔡𥙿後)에게는 각각 숙마 1필씩을 하사하고, 도승지 조계원(趙啓遠), 예방 승지(禮房承旨) 오정일(吳挺一), 11실 대축(十一室大祝) 정유(鄭攸)에게는 모두 자급을 올려 주고, 입시 승지 4인과 당하 집례(堂下執禮)·각실 대축(各室大祝) 10인에게는 각각 반숙마 1필씩을 하사하고, 사관(史官) 4인에게는 각각 한 자급씩을 올려 주고, 자급을 더 이상 올려 줄 수 없는 자에게는 아마 1필씩을 하사하고, 모든 집사 63인에게는 각각 한 자급씩을 하사하고, 감찰(監察) 2인에게는 상현궁(上絃弓) 1장(張)씩을 하사하였다.
존숭 도감 도제조(尊崇都監都提調) 김육(金堉)과 제조 홍주원(洪柱元)에게는 모두 안구마 1필씩을 하사하고, 제조 원두표·박서·오준에게는 각각 숙마 1필씩을 하사하고, 도청 이응시·김홍욱에게는 모두 자급을 올려 주고, 낭청 6인은 모두 벼슬을 올려 주고, 감조관 5인은 모두 6품으로 옮겨 주고, 이미 6품에 오른 자는 벼슬을 올려 주었다.
중궁 책례(中宮冊禮) 때 정사 김육과 부사 이시방에게는 각각 안구마 1필씩을 하사하고, 전교관(傳敎官) 좌승지 윤강(尹絳)에게는 벼슬을 올려 주고, 교명문 제술관(敎命文製述官) 조석윤, 서사관(書寫官) 오준, 옥책 제술관(玉冊製述官) 윤순지(尹順之), 서사관 오정일에게는 각각 숙마 1필씩을 하사하고, 악장 제술관 여이징에게는 반숙마 1필을 하사하고, 모든 집사 9인에게는 각각 아마 1필씩을 하사하고, 가인의(假引儀) 6인과 부장(部將) 15인에게는 각각 상현궁(上弦弓) 1장씩을 하사하였다.
세자 책례(世子冊禮) 때의 교명문 제술관 김익희(金益熙), 서사관 이천기(李天基), 죽책문 제술관(竹冊文製述官) 이일상(李一相), 서사관 오준(吳竣)에게는 각각 숙마 1필씩을 하사하고, 독책관(讀冊官) 좌승지 윤강(尹絳), 보덕(輔德) 조형(趙珩), 상례(相禮) 이후천(李後天)에게는 모두 자급을 올려 주고, 필선(弼善) 이후산(李後山), 겸보덕(兼輔德) 김홍욱(金弘郁), 봉교명상(奉敎命床)인 위솔(衛率) 이정(李晸) 등 8인에게는 아마 1필씩을 하사하고, 배종(陪從)한 시강원(侍講院)·익위사(翊衛司)의 관원 등에게는 각각 상현궁 1장씩을 하사하고, 모든 집사에게는 각각 한 자급씩을 올려 주었다.
세자 관례(世子冠禮) 때의 주인(主人) 인평 대군 이요와 빈(賓) 영의정 김육(金堉)에게는 모두 안구마 1필씩을 하사하고, 찬(贊) 박서에게는 숙마 1필을 하사하고, 작례 부제조(酌禮副提調) 영은 도정(靈恩都正) 이함(李涵)과 전교관 좌승지 윤강에게는 모두 자급을 올려 주고 초포(焦脯) 이후걸(李後傑)에게는 반숙마 1필을 하사하고, 빈객(賓客) 4인과 찬례(贊禮) 조형(趙珩), 찬인(贊人) 이후산(李後山), 집관(執冠) 박수문(朴守文), 교서 제술관 황감(黃㦿), 서사관 이응시(李應蓍), 시강원·익위사의 관원 등에게는 각각 아마 1필씩을 하사하였다. 【중궁·세자 책례의 두 도감은 부묘·존숭 도감(祔廟尊崇都監)의 여러 관원들이 그대로 맡았기 때문에 상전(賞典)을 겹치게 주지 않았다.】

【태백산사고본】 7책 7권 27장 A면【국편영인본】 35책 508면
【분류】인사-관리(管理) / 왕실-사급(賜給) / 왕실-의식(儀式)

ⓒ 한국고전번역원

 

간원이 대사간 조석윤(趙錫胤), 사간 이응시(李應蓍), 헌납 채충원(蔡忠元), 정언 홍수(洪鐩)·조사기(趙嗣基) 아뢰기를,
"형조 판서 이해(李澥)가 차지하고자 한 구사(丘史)는 바로 악공(樂工)입니다. 장악원(掌樂院)이 여러 날 동안 결정하지 못하고 미루자 이해가 형조의 위세를 의지하여 장악원의 관원을 다스리면서 거듭 형신하였습니다. 세력을 믿고 망령된 행동을 한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닙니다마는 어찌 묘악 공인(廟樂工人)을 차지하여 구사로 만들려고 한 자가 있었습니까. 형조 판서 이해를 먼저 파직하고 뒤에 추고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해의 일은 사리에 맞지 않는 것 같으니, 다시 자세하게 물어서 처리하라."
하였다. 그후 누차 아뢰니, 따랐다. 【구사는 바로 공신에게 상으로 주는 노비를 말한다.】

【태백산사고본】 7책 7권 27장 B면【국편영인본】 35책 508면
【분류】사법-탄핵(彈劾) / 인사-관리(管理) / 신분-천인(賤人)

ⓒ 한국고전번역원

 

9월 7일 신사

달이 남두 괴성(南斗魁星) 가운데로 들어갔다.

 

남노성(南老星)을 이조 참의로, 이석(李晳)을 집의로, 이해창(李海昌)을 사간으로, 이홍연(李弘淵)을 보덕(輔德)으로, 홍명하(洪命夏)를 겸보덕(兼輔德)으로, 서상리(徐祥履)를 필선(弼善)으로, 권우(權堣)를 겸필선(兼弼善)으로, 김좌명(金佐明)을 겸문학(兼文學)으로 삼았다.

 

9월 9일 계미

상이 장릉(長陵)에 거둥하였다.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횃불이 밝지 않았다. 본원은 경기 감사 유철(兪㯙)을 불러다가 신문하라."
하였다. 정원이 추고하기를 청하니, 따랐다. 응교 홍명하(洪命夏), 교리 홍중보(洪重普), 수찬 오정위(吳挺緯)가, 감사와 수령이 교량(橋梁)을 수리하지 않아 위사(衛士)의 말이 빠져 엎어지게 한 죄를 다스릴 것을 청하였다. 이에 유철이, 거화 차사원(炬火差使員) 고양 군수(高陽郡守) 유여해(兪汝諧), 적성 현감(積城縣監) 최극녕(崔克寧)을 파직할 것을 아뢰었다. 상이 "유철은 처벌을 기다리는 중에 있으므로 수령을 처벌할 것을 청해서는 안 된다." 하고 이어 하교하기를,
"유철은 직무 수행이 형편없고 불경스러운 일이 많으므로 잡아다가 곤장을 치려고 하는데, 그 점에 대하여 승지들은 의논해 아뢰라."
하니, 회계하기를,
"유철이 직무 수행을 잘못한 데 대해서는 진실로 죄가 있사오나 곤장의 벌을 재신(宰臣)에게 주는 것은 과중한 듯하오니 환궁하셔서 의논해 처리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는 무너진 기강을 바로잡으려는 뜻인데 뭇 사람의 의논이 이와 같으니,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그 뒤에 최극녕과 유여해를 잡아다가 문초하도록 명하였는데 금부가 고신(告身)을 빼앗을 것으로 법을 적용하니, 상이 화를 내며 이르기를,
"대관(大官)이 군부(君父)를 경시하기 때문에 소관(小官)의 불경이 이에 이른 것이다. 크게 불경한[大不敬] 죄는 법으로 볼 때 사형에 해당된다. 그런데 법적용을 어찌 이렇게까지 가볍게 하는가. 만일 위사의 말이 빠지는 정도로 그치지 않았더라면 마땅히 어떤 법을 적용해야 하겠느냐."
하고, 드디어 도배(徒配)하도록 명하였다.

 

9월 11일 을유

비변사가 서얼 허통법(庶孽許通法)을 범하는 자는 무거운 법으로 논죄할 것을 거듭 밝히자고 청하니, 따랐다.

 

9월 13일 정해

달무리가 겹으로 지고 흰 무지개가 양이(兩珥)를 꿰뚫었다.

 

9월 14일 무자

윤강(尹絳)을 도승지로, 정윤(鄭錀)과 남중회(南重晦)를 지평으로 삼았다.

 

9월 15일 기축

영의정 김육이 정고(呈告)를 세 번까지 하였으나, 모두 윤허하지 않는다고 비답하라 명하였다.

 

9월 16일 경인

장악원 정(掌樂院正) 권우(權堣)가 상소하기를,
"삼가 생각하건대, 신의 직책은 음악을 관장하는 것인데, 음률(音律)에 전연 어두우므로 뭇 음악을 시험할 때 곡조가 무엇인지도 모릅니다만 종묘 악장 가사책(宗廟樂章歌詞冊)을 가져다 보았더니, 언문으로 해석한 인본(印本)에 그릇된 음(音)이 많았습니다. 수리(受釐)의 리(釐)자는 《시전(詩傳)》의 소아편제(小雅篇題) 및 《강목(綱目)》에는 모두 ‘희’로 음을 달았는데, 중광곡(重光曲)에 있는 수리계후(受釐啓後)의 리(釐)자는 ‘니’로 음을 달았으니, ‘희’와 ‘니’ 두 음은 뜻이 현격하게 다릅니다. 이는 필시 간행할 때 잘못된 것을 지나쳐 버린 소치일 것입니다. 그밖의 그릇된 음도 이것뿐만이 아닙니다. 악사(樂師)들이 단지 언문으로 해석한 것에만 의거해 외우고 익히고 있으므로 잘못된 것을 그대로 답습하여 그 글자의 음이 그릇 전해진 것을 모르고 있다가 이제 비로소 깨달았다 합니다. 태묘 악장(太廟樂章)은 매우 중요한 것인데 이처럼 잘못되었으니 참으로 이상합니다.
또 신이, 병인년160)  에 예조가 태묘 악장에 대해 논한 계사(啓辭)를 고 상신(相臣) 이정귀(李廷龜)의 문집 속에서 보았는데, 아마 이정귀가 예조 판서로 있을 때의 일일 것입니다. 선조 대왕(宣祖大王)의 사당에 처음엔 악장이 없었다가 병인년에 와서 비로소 의논해 지었던 것입니다. 예로부터 공덕이 있는 제왕에게는 모두 묘악(廟樂)이 있었는데, 우리 나라의 제도 역시 그와 같았기 때문에 병인년 예조의 계사에 ‘선묘(宣廟)에게는 나라를 빛내어 중흥시킨 위대한 공렬이 있으니, 별도로 묘악이 있어야 할 것 같은데 다만 미처 거행하지 못했을 뿐이다.’ 하였고, 대신의 수의(收議)에서도 ‘전대의 제왕은 비록 창업주가 아니더라도 백성에게 공덕이 있으면 묘악에도 별장(別章)이 있었다. 선조 대왕에게도 이미 나라를 빛내어 중흥시킨 위대한 공렬이 있으니, 별도로 악장을 지어 쓸 뜻을 이미 다 진달하였다.’ 하였습니다. 이것으로 보면 인조 대왕의 사당에도 별도로 악장을 두어야 할 것인데 빠뜨리고 거행하지 않았으니, 어찌 예절의 큰 흠이 아니겠습니까.
병인년의 일은 본원 악사의 무리 중에 지금 아는 자가 없으므로 예조가 전례에 의거하여 품정(稟定)하지 못하였고 또한 문적의 유실로 인하여 상고해 알 데가 없어 궐전(闕典)이 있게 되었으니, 참으로 개탄할 일입니다. 국가의 막중한 예는 신과 같은 미관 말직이 이러쿵저러쿵 할 수 있는 바가 아니오나 이미 근거할 만한 고사가 있으니, 예관으로 하여금 상의해서 정하게 하소서."
하니, 대신에게 의논하도록 명하였다. 영의정 김육(金堉)과 좌의정 이시백(李時白)이 의논드리기를,
"지난번 부묘할 때 악장을 지어 쓰자는 논의가 있어서 신 등은 ‘감히 용이하게 변경할 수 없다.’는 뜻으로 의논을 드렸으니, 지금 감히 다시 의논하지 못하겠습니다."
하고, 영중추부사 이경여(李敬輿)가 의논드리기를,
"신이, 고 상신 이정구가 예조 판서로 있을 때 선조 묘실 악장(宣祖廟室樂章)에 대한 의논으로 본조의 복계(覆啓) 및 대신의 수의(收議) 전후의 것들을 남김없이 문집에 아주 자세하게 싣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그러니 오직 예관이 그것을 상고하여 강정(講定)한 다음 품지(稟旨)하여 처리하는 데 달려 있을 뿐입니다."
하고, 영 돈령 부사 김상헌(金尙憲)이 의논드리기를,
"신이 인조 대왕의 묘실(廟室)에 별도로 악장을 두자는 논의에 대하여 감히 용이하게 의논드릴 수 없음은, 김육과 이경여의 의견과 다름이 없습니다."
하고, 전 영의정 이경석(李景奭)이 의논드리기를,
"인조의 묘실에 별도로 악장을 쓰는 데 대해서 공덕으로 말하면 이의를 제기할 수 없지만 종묘의 예는 중대한 일입니다. 전에 고 상신 이정귀가 예조 판서로 있을 때 자세히 진계한 일이 있고, 지금 대신들이 또 드린 의논이 있으니, 오직 참작해서 정하는 데 달려 있을 뿐입니다."
하니, 의논에 따르라고 명하였다.

 

9월 18일 임진

상이 문묘(文廟)에 배알하여 작헌례(酌獻禮)를 행하고 이어서 선비들에게 시험을 보여 김수항(金壽恒) 등 7인을 뽑고, 방방(放榜)할 때에 특별히 어촉(御燭)을 문·무 장원(文武狀元)에게 하사하였다.

 

9월 19일 계사

홍명하(洪命夏)를 집의로, 남용익(南龍翼)을 정언으로 삼았다.

 

9월 20일 갑오

가례(嘉禮) 때 회례연(會禮宴)을 행하기 앞서 도감이 광해군 때의 《신해등록(辛亥謄錄)》을 가지고 품계(稟啓)하니, 상이 내·외 명부(內外命婦)의 음식상에 꽃송이 1백 가지를 감하도록 명하였다.

 

경상 감사 유심(柳淰), 정주 목사(定州牧使) 박경지(朴敬祉), 금천 군수(金川郡守) 이회(李禬), 삼등 현령(三登縣令) 한복일(韓復一)이 임지로 떠나면서 하직 인사를 드리니, 직접 불러 보고 유시하여 보냈다.

 

전남도 남원(南原)의 진사 김지명(金之鳴) 등이 상소하기를,
"임진란에 순절한 사람 증찬성(贈贊成) 황진(黃進)과 증판서(贈判書) 이복남(李福男)에 대하여 이미 사당을 세웠으니, 사당의 이름을 내려 주소서. 구례 현감(求禮縣監) 이원춘(李元春)은 유독 포증(褒贈)의 은전을 받지 못하였으니, 증전(贈典)을 내려 주소서."
하니, 상이 대신에게 의논하도록 명하였다. 대신들이 모두 아뢰기를,
"황진과 이복남의 사당은 김천일(金千鎰)·최경회(崔慶會)의 예에 의하여 해조로 하여금 사당의 이름을 내려 주게 하는 것이 합당하겠고, 이원춘은 본래 미관(微官)인데다가 또 자손도 없어서 유독 포록(褒錄)의 명을 받지 못하였으니, 참으로 성세의 흠전(欠典)입니다. 이제 마땅히 격려하여 권장하는 일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니, 따랐다.

 

9월 21일 을미

진선(進善) 송준길(宋浚吉)이 고향에 있으면서 상소하여 사직하니, 상이 사직하지 말고 올라 오라고 답하였다.

 

9월 24일 무술

신면(申冕)을 대사간으로, 장응일(張應一)을 사간으로, 정언벽(丁彦璧)을 헌납으로, 윤성(尹珹)을 장령으로, 신혼(申混)·서필원(徐必遠)을 정언으로 삼았다.

 

예조가 아뢰기를,
"기축년 10월에 제도의 삭선(朔膳)을 정파(停罷)하라는 하교를 하셨습니다만 지금은 국상(國祥)이 이미 지났는데, 막중한 어공(御供)을 아직도 정파하는 것은 참으로 매우 미안한 일입니다. 오는 11월 초하루에 제전(諸殿)에 진상하는 삭선을 구례(舊例)에 의하여 올리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금년도 오히려 풍년이 들지 않았는데 내가 어떻게 편히 그것을 받을 수 있겠는가. 다시 내년 봄을 보아서 처리하겠다."
하였다.

 

9월 26일 경자

상이 주강에 나아가 《서전》의 열명편을 강하였다.

 

상이 주강에 나아가 《서전》의 열명편을 강하였다.

 

9월 27일 신축

상이 주강에 나아가 《서전》의 열명편을 강하였다.

 

고양 군수(高陽郡守) 유경소(柳景紹)가 임지로 떠나면서 하직 인사를 드리니 직접 불러보고 유시하여 보냈다.

 

9월 28일 임인

상이 인정전에 나아가 세자 납채례(納采禮)를 행하였다.

 

9월 29일 계묘

유도삼(柳道三)을 장령으로, 이해창(李海昌)을 부응교로, 오정위(吳挺緯)를 교리로, 권우(權堣)를 부수찬으로, 홍처량(洪處亮)을 이조 정랑으로 삼았다.

 

고 유신(儒臣) 이황(李滉)의 춘천 서원(春川書院)에 대한 액호(額號)를 하사하였는데 예조의 청에 따른 것이다.

 

영의정 김육이 차자를 올려 사직하니, 답하였다.
"아, 하늘의 노여움과 백성의 원망은 날로 더욱 심하고 인심과 국사는 날로 더욱 흔들려서 수습할 수 없으므로 나 소자는 밤낮으로 두려워하여 경에게 의지하여 성공을 기대함이 바야흐로 간절한데 마음의 성의가 어찌 얕겠는가. 경의 건의와 계획은 내 불가하다고 여긴 적이 없었다. 실로 일 분의 효과라도 보려고 하였는데, 일이 미처 실시되기도 전에 물러나 쉬겠다는 말이 갑자기 뜻밖에 나오니, 이 어찌 나를 이처럼 매정하게 버리는가. 더구나 지금은 중국 사신이 압록강을 건널 날도 머지 않았는데 수상(首相)이 없이 그들을 접대할 수 있겠는가. 경은 나의 지극한 심정을 몸받아, 속히 나와서 도(道)를 논하여 나의 목마르듯이 바라는 마음에 부응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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