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일 을해
상이 하교하였다.
"형조는 옥송(獄訟)이 번잡한데, 한 달에 한 차례 개좌(開坐)하니, 일이 몹시 태만스럽다. 당상을 모두 되도록 중한 쪽으로 추고하라."
11월 2일 병자
승지를 보내어, 전옥서(典獄署)의 죄수들을 살펴보고 죄가 가벼운 자를 석방하게 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오례의(五禮儀)》에 세자빈(世子嬪)을 친영(親迎)한 다음날에 대전(大殿)과 중전(中殿)에 조현(朝見)하는 예가 있으니, 왕대비전에도 조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먼저 대전과 중전에서 조율례(棗栗禮)를 행하고, 이어서 대왕 대비전에 나아가 들어가고 나올 때의 사배례(四拜禮)만 행하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11월 3일 정축
좌의정 이시백이 상차하기를,
"요즈음 조석윤(趙錫胤)·이경억(李慶億) 등의 일로 삼사가 이미 모두다 논열하였는데도 성상의 윤허가 아직 내리지 않았으니, 어찌 신하들의 성의가 부족하고 성상께서 이치를 살피심이 자세하지 못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대개 임금과 신하 사이에 정의(情意)가 두텁지 못함으로 인하여 위에서 신하들을 의심하기를 ‘위의 심중이 무엇인지를 헤아리지 못하고 한갓 번거롭게 다투기만 한다.’ 하고, 신하들은 임금을 의심하기를 ‘아랫사람들의 심정이 받아들일 만하다는 것을 통촉하지 못하고 한결같이 굳게 거부하기만 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간쟁함이 간절할수록 들어줌이 더욱 멀어지는 것입니다.
신 역시 스스로의 역량을 헤아리지 못한 채 성상께서 살피시어 받아들여 주시기를 기대하고서 속에 품은 생각을 피력하여 성상께 아뢰었습니다. 그러나 사리를 잘 지적하고 근원을 잘 추구하여 전하로 하여금 분명하게 알게 하지 못하였습니다. 간쟁하는 자들의 말은 임금을 위해서 하는 말이지 두세 신하들에게 사사로운 마음이 있어서가 아닌 것으로 신의 죄 역시 큽니다. 신은 아주 형편없는 사람으로서 외람되이 대신의 자리에 있습니다. 그런데 임금의 잘못된 점을 보고서도 끝내 바르게 구제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면, 신이 전하를 저버리는 것이 더욱 큰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한 차례 차자 올린 것을 가지고 책임을 다한 것처럼 할 수 있겠습니까.
유철(兪㯙)이 범한 것이 어찌 장속(杖贖)에 그칠 죄이겠습니까. 중한 죄를 주어야 마땅한데 가볍게 하여 사정(私情)을 따르는 것처럼 한 것이 전하께서 반드시 죄주고자 하는 이유입니다. 그러나 우리 나라에서 《대명률(大明律)》을 씀에 있어서는, 꼭 맞는 율이 드물어 대부분 비의(比擬)하고 있으며, 경중(輕重)이나 공사(公私)도 본디 일정한 조문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아래에서 가볍게 죄준 것을 위에서 혹 중하게 하기도 하고, 아래에서 중하게 죄준 것을 위에서 혹 가볍게 하여 고쳐 조율하라는 명이 전부터 종종 있어 왔습니다. 그러나 조율을 착오나게 한 대각의 신하가 인피하여 체차된 경우는 있으나, 일찍이 조율을 잘못하였다는 이유로 중한 죄를 받은 경우는 없었습니다. 이는 참으로 사람들의 의견이 장단이 없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금 조석윤 등에게 특별히 파직의 율을 시행한 것은 성상께서 참작하여 헤아린 데서 나온 것이니, 환수하라는 논의를 어찌 감히 발하겠습니까. 그러나 이경억은 나이 젊은 대관(臺官)으로서 단지 임금이 포용해 주는 것만 믿고 스스로 거리낌 없이 간언해야 한다는 의리에 의탁한 것이니, 그 정상이 용서해 줄 만합니다. 더구나 경억의 망언이 조석윤 등에게 무슨 상관이 있기에 다시 죄를 가하여 찬축하여 유배하기까지 한단 말입니까.
지금 조율한 것이 한번 틀렸다는 이유로 문득 유배시킨다면, 사람들이 조석윤이 율을 잘못 적용하였다는 것은 알지 못하고 도리어 이것으로 경계를 삼아, 율을 중하게 적용하기를 힘쓰고 죄를 범한 실상이 어떠한가는 살피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말을 한번 실수하였다는 이유로 문득 찬축한다면, 사람들이 이경억의 처사가 경솔하였다는 것은 알지 못하고 이것으로 경계를 삼아, 아무 말도 않하기를 힘쓰고 아부하며 따르기만 하는 풍조가 만연될 것입니다. 그럴 경우 그 폐해가 도리어 오늘날보다도 더 심해질 것입니다.
임금의 한 마디 말이나 한 가지 행동은 모두다 사람들이 듣고 보는 데 관계되는 것으로, 신중히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원의 신하가 말하여서 허락받지 못하고, 삼사(三司)의 신하가 간쟁하여도 허락받지 못하고, 대신이 구제하고도 허락받지 못하였습니다. 가령 조석윤 등의 본심이 진실로 성상의 전교와 같다면, 전하께서 견고하게 고집하시는 것이 마땅하며, 신들 역시 구원하기를 도모한 죄를 면치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석윤 등의 본심이 그렇지 않은데 끝내 중한 벌을 내릴 경우, 국사(國史)에 쓰고 야사에 기록하여 온 나라에 전하고 후세에 전하기를 ‘모관(某官) 모신(某臣)이 아무 때 아무 일로 유배되고 찬축되었다.’라고 하게 되면, 성상의 덕에 허물됨이 과연 어떠하겠습니까.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신이 어리석다고 하여 소홀히 여기지 마시고, 다시 분명하게 살피소서."
하니, 답하기를,
"차자의 말은 깊이 대신의 체통을 얻었다. 내가 가상하게 여긴다."
하였다.
금부가, 전 감사 유철의 죄를 장 팔십 도삼년에 진탈 고신(盡奪告身)으로 고쳐 조율하여 아뢰니, 결장(決杖)은 제하라고 명하였다.
11월 4일 무인
민응협(閔應協)을 대사간으로, 윤이지(尹履之)를 형조 판서로, 윤순지(尹順之)를 대제학으로 삼았다. 순지는 문망(文望)이 본디 가벼웠으므로 사람들이 대부분 맞지 않는다고 기롱하였다.
문과 별시(別試)와 전시(殿試)를 베풀어 정시대(鄭始大) 등 17인을 뽑았다.
사은사 인평 대군 이요, 부사 황감, 서장관 권우가 청나라로 떠났다.
11월 5일 기묘
영의정 김육이 차자를 올리기를,
"신이 시원(試院)에 들어가던 날, 조석윤·이경억을 찬축하라는 명이 있자, 정원과 삼사의 신하들이 진달하여 용서해 주기를 청하였는데, 전하께서 윤허하지 않았다고 들었습니다. 이 말을 듣고는 신은 홀로 걱정스러워 밤에도 잠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시원에 꼭 매어 있어서 안팎이 격절되어 간담을 피력하여 논열하지 못하였습니다.
조석윤은 신의 옛 친구의 아들입니다. 신은 그가 효성스럽고 우애로운 행실이 있고 문학의 재주가 있는 것을 사랑하여 나이 차이가 서로 많이 났으나 어려서부터 나이 어린 벗으로 허여하였습니다. 다만 그는 성품이 꽉 막히고 자긍심이 지나친 것이 병통입니다. 이에 신이 일찍이 이조 판서 임담에게 이르기를 ‘조석윤을 대관의 망에 주의하지 말라. 그 사람이 대관이 되면 문득 소요를 야기시킬 것이다. 춘추관에도 출사하지 않은 채 걸핏하면 여러 날을 지나쳐버려 막중한 사사(史事)를 지연시키고 있다.’ 하였습니다. 그런데 임담은 필시 신의 말을 범연히 한 말이라 여기고서 신의 뜻을 헤아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지금 조석윤이 의율(擬律)을 잘못한 것은 아마도 다른 사람의 말을 듣지 않은 데서 나왔을 것입니다. 그의 생각에는 ‘수령은 친히 감독하여 점검하는 자이고 감사는 앉아 있으면서 지휘만 하는 자이다. 다리가 무너지고 횃불이 꺼진 것을 사죄(私罪)로 논하는 것은 마땅치 않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이는 실로 삼군(三軍)이 패하면 죄가 원수(元帥)에게 있다는 것을 모른 것입니다. 수령이 이미 도배(徒配)되었으니, 감사가 어떻게 홀로 죄를 면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그가 의율을 잘못한 죄는 참으로 면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 즉시 다른 요원(僚員)들과 같은 죄를 줄 것을 명하였다면 그만입니다. 전하께서 당초에는 그들과 함께 가두지 않았고, 또 그의 소장을 신들에게 내렸으니, 이것은 전하께서 본래 조석윤을 죄줄 마음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이경억의 망녕된 말로 인하여 죄줄 마음이 생겨나, 노여움을 옮기지 말아야 하는 성상의 덕에 허물이 있게 되었으니, 참으로 통탄스럽습니다.
이경억은 나이 젊고 재주가 있어서 사람들이 쓸 만하다고 하므로, 그의 제주 어사(濟州御使)의 임무는 바로 신이 천거하였던 것입니다. 그가 복명(復命)하면서 제주도의 일을 논하는 것이 모두 알맞기에 신이 몹시 칭찬하였으며, 회계할 때에도 그의 말을 따라줄 것을 청하였습니다. 그런데 어찌 오늘날에 이처럼 크게 잘못을 일으킬 줄을 생각이나 하였겠습니까. 조석윤을 파직한 것에 대해 어찌 감히 명을 환수하기를 청하며, 이미 마감한 박서(朴遾)의 일에 대해 또 어찌 감히 몇 달이 지난 뒤에 소급해 논한단 말입니까. 중신(重臣)을 출척하는 것을 오로지 자신의 마음대로 하여 동료들의 의견을 기다리지 않고 지레 먼저 혼자서 아뢰었으니, 그 죄가 아주 중하며, 그런 조짐을 자라나게 내버려둘 수 없습니다. 그러나 관직이 대관인데 말로 인해 죄를 받았습니다. 사방에서 이를 들으면 어찌 모두 그 실상을 알겠습니까. 더구나 죄가 종사(宗社)에 관계된 뒤에 안치(安置)하는 율을 시행하는 법입니다. 연소한 자가 망녕되이 저지른 죄는 다스리지 않는 것으로 다스리는 것이 옳습니다. 어찌 갑자기 중한 율을 적용하는 것이 가하겠습니까.
전하께서 등극하신 이후로 일찍이 이와 같이 잘못된 거조는 없었습니다. 신이 깊이 걱정하는 것이 어찌 두 신하만을 위해서 그러는 것이겠습니까. 임금은 공의(公議)에서 시비를 헤아려야지, 그 사이에 기뻐하고 화냄을 사사로이 하여서는 안 됩니다. 하늘이 만물을 봄에 생육시키고 가을에 죽이는 것과 같이 순리대로 한 다음에야 인심이 순종하고 천심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전하께서 매번 당파를 비호한다는 것으로 여러 신하들을 의심하고 계시는데, 신들은 진실로 그 죄를 면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 두 신하를 내쫓는 것에 대해, 안으로는 정원과 삼사, 밖으로는 공경 대부, 아래로는 시골 선비나 일반 백성들까지 모두들 지나친 거조로 여기고 있으니, 공론이 어떻다는 것을 단연코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어찌 당파를 비호하는 데서 나온 것이겠습니까. 전하께서 이미 죄명을 들어 배척하였으니, 벌을 이미 내린 것입니다. 그들의 정상을 살펴 용서해 주면 허물을 역시 고칠 것입니다. 일식과 월식이 그치면 사람들이 모두 그것을 알게 되는 법입니다. 천지의 보살핌에 만물이 자라납니다. 전하께서는 속히 성명을 거두시고 공론을 따르소서."
하니, 답하기를,
"경계시키고 교회시킴이 여기에 이르렀으니,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경억은 감형하여 부처(付處)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11월 6일 경진
경상 좌병사 정부현(鄭傅賢)이 사조(辭朝)하였다. 면대하여 유시하고 보냈다.
전 영의정 이경석(李景奭)이 말미를 청하여 영동(嶺東)으로 목욕하러 갔다가, 조정에 돌아와 상소하기를,
"신이 돌아올 때에 고성(高城)의 군민들 80, 90인이 일제히 경상(境上)에 모여서 신이 대신을 지냈던 적이 있었다 하여 글을 바치면서 성상께 진달해 주기를 바랐습니다. 그 대개의 내용은, 적곡(翟穀)과 포흠(逋欠)의 폐단이었으며, 또 기경(起耕)하는 데 따라서 세금을 내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일이 민정(民情)에 관계되니, 호조로 하여금 복계하게 하여, 시행할 것인지의 여부를 분명하게 이문(移文)해서, 궁벽한 시골에 사는 백성들로 하여금 가부를 알 수 있게 하소서.
그리고 신이 비록 관직에 있지는 않으나,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이 어찌 물러가 있다고 해서 차이가 있겠습니까. 오늘날의 국사는 우려할 만한 단서가 참으로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성상께서 위에 계시는 것으로, 이것이 신민들이 함께 믿고 있는 것입니다. 신이 서울에 있으면서도 국가의 일에 대해 상세하게 알지 못하는 일이 있었는데, 더구나 지금은 외방에서 들어왔으니 크고 작은 일에 대해서 어떻게 상세히 다 알 수 있겠습니까. 다만 길거리에서 듣고 사람들의 기색에서 본 것으로써 말씀드리겠습니다.
조석윤 등 두세 대신(臺臣)과 유철(兪㯙)·이경억(李慶億)의 일은, 이것이 무슨 처치이며, 무슨 기상(氣象)입니까. 조정의 기강이 엄숙하고 국가의 일이 다스려지는 것은, 오로지 임금의 거조가 마땅함을 얻고, 간언을 따름이 조금도 막힘이 없는 데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위세로 억누르고 형벌로 제압하고서도 능히 다른 사람을 복종시킨다는 말을 신은 듣지 못했습니다. 엄하고 급하게 독촉하는 것은 결단코 다스려진 세상의 기상이 아닙니다. 지난날의 서책에 쓰여진 득실을 어찌 감계로 삼지 않으십니까. 발하기는 쉽고 억제하기는 어려운 것 중에서 노여움이 가장 심한데, 이것은 예로부터 성현들이 정녕하게 경계를 내린 것입니다. 더구나 노하여서 격동되는 것이겠습니까. 격동되고서도 능히 중도에 지나치지 않는 경우는, 천하에 이런 이치는 없습니다.
아무리 큰 허물이라도 용서해 주는 것은 성인이 법을 쓰는 요령이고, 광망(狂妄)한 것을 너그럽게 포용하는 것은 현명한 임금이 말을 듣는 요령입니다. 성군인 요와 현신인 순이 한 조정에 있으면서도 오히려 옳고 그름을 따졌으며, 한나라와 당나라의 군신간에도 오히려 가부를 따졌습니다. 감히 잘못된 것을 교정하지 못했던 것이 위(衛)나라가 날로 잘못되어진 이유인 것입니다. 성상께서는 어찌하여 노여움을 잊고서 이치를 살피지 않으십니까. 지금 여러 신하들이 이 일을 다투어 간쟁하는 것이, 과연 몇 사람의 신하를 위해서입니까, 임금을 위해서입니까. 군신간에 화목하면 적들이 감히 틈을 엿보지 못하고, 상하간에 서로 막혀 있으면 만사가 무너져 끝내 난망에 이르고 마는 법입니다. 이 일이 어찌 크게 걱정스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나라 일은 역시 크게 다행스러운 점이 있습니다. 부제(祔祭)가 이미 지나 경사가 겹쳐 있고, 삼전(三殿)이 만복하여 예전의 병환이 이제 쾌유하였으며, 왕세자가 안길(安吉)하여 차례로 예를 행하였습니다. 그러니 지금은 바로 더욱더 덕을 닦고 크게 화기(和氣)를 펴서 천명(天命)을 맞이하고 자전(慈殿)을 받들 때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이와 같이 분분해 사람마다 의기가 저상되어 기색이 걱정스럽고 참혹하단 말입니까. 신은 걱정스럽고 개탄스러움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신이 만약 임금의 위엄을 저촉하는 것을 두려워하여 입 다물고 아무 말 않는다면, 이것은 전하를 저버리는 것입니다. 이에 감히 저의 정성을 대략 진달합니다. 전하께서 고치시기를 신은 간절히 빕니다."
하니, 답하기를,
"경이 무사히 다녀왔으니, 내가 몹시 기쁘다. 백성들의 고통에 대해 아뢴 것은 마땅히 호조로 하여금 의논하여 처리하게 하겠다."
하였다. 호조가 복계하기를,
"기경(起耕)하는 데 따라서 세금을 내는 법은, 다른 도에는 없고 단지 영서(嶺西)의 여러 읍에서만 시행하는데, 이는 필시 토지가 척박하여 모두 산전(山田)이기 때문에 그러는 것입니다. 영동 지방은 토지가 자못 비옥하여 백성들의 생업이 영서와 같이 피폐되지는 않았습니다. 조종조에서 법을 제정한 것을 가볍게 의논하기는 곤란합니다. 포흠된 각종 곡식에 대해서는, 병자년 전란에 산실(散失)되어 징봉(徵捧)할 곳이 없는 경우에는 뽑아내어 감면해 주어 조금이나마 은혜를 베푸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따랐다.
11월 7일 신사
정언 오핵(吳翮)이 상소하기를,
"신이 길에 떠도는 말을 듣건대, 요즈음 전하께서 자주 위엄을 보이시어 지평 남중회(南重晦)와 유거(柳椐)가 하옥되었고, 대사헌 조석윤이 파척되었으며, 정언 이경억이 안치(安置)되었다고 합니다. 신은 병중에서 이 말을 듣고는 자신도 모르게 두렵고 떨렸습니다. 신은 소식이 두절된 시골에 있어서 일의 곡절이 어떠한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대간이 옥에 갇히는 것은 예전에 없던 일입니다. 성세에 이러한 일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하였습니다. 조종조로부터 대간을 중하게 여긴 뜻이 전하에 이르러 땅을 쓴 듯이 없어졌습니다.
조석윤은 사람됨이 풍치가 있고 아담하며 일생 동안 청렴하고 깨끗하게 지냈으니, 오늘날 조정에 있는 신하 중에 누가 조석윤만한 자가 있겠습니까. 아, 신하를 알아보는 데는 임금만한 분이 없습니다. 그러니 전하께서는 반드시 조석윤이 어질다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그런데도 엄하게 꾸짖고 준열하게 책하시어 그로 하여금 조정에서 용납되지 못하게 하시니, 경연에서 누구와 더불어 강론하며 대간들 가운데 누가 다시 할 말을 다하겠습니까. 신은 전하를 위하여 몹시 애석하게 여깁니다.
이경억은 성품과 행실이 꼿꼿하며, 또 거리낌 없이 간언하는 풍도가 있습니다. 진퇴하는 즈음에 마땅함을 얻었는지의 여부는 비록 모르겠으나, 그를 먼 변방에 안치시키기까지 하는 것은 역시 자나친 것이 아니겠습니까. 경억은 까마득한 신진(新進)으로써 홀로 서서 정쟁(廷爭)하였으니, 그 마음이 가상합니다. 그런데 차마 죄를 가하겠습니까. 더구나 사명을 받들고 제주도에 다녀와 복명한 지도 얼마 안 되었습니다. 노모가 남쪽에 있는데 미처 가보지도 못하였으니, 경억의 이번 걸음은 바로 모자가 영원히 이별하는 날입니다. 그의 사정을 생각해보면 참으로 애처롭습니다. 아랫사람의 심정을 헤아리는 성인의 어진 마음으로서 여기에 대해 측은한 생각을 갖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아, 개과 천선하여 머지 않아 회복하는 것이 《주역》의 상(象)입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유념하소서.
신이 보건대, 전하의 총명과 예지는 여러 왕들 가운데 가장 뛰어납니다. 즉위하신 처음에는 지성으로 다스림을 구하시어 물이 흐르듯 간언을 따랐습니다. 이에 온 나라 사람들이 목을 빼고 눈을 씻고서 태평 시대가 올 것을 바랐습니다. 그런데 몇 년 이래로 점차 처음 같지 않아, 말을 하는 사이에 성내고 기뻐함이 맞지 않고, 정령을 낼 즈음에는 전도됨을 면치 못합니다. 생각건대, 아마도 심학(心學)의 공부에 있어서 미진한 점이 있는 듯합니다. 대개 학문을 하는 요체는 기질을 변화시키는 것보다 더 절실한 것이 없습니다. 반드시 먼저 병의 뿌리를 다스린 다음에야 기질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아, 전하의 속마음은 엿보아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다만 말과 정령에 드러난 것만 가지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전하의 병의 뿌리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영특한 기운을 지나치게 드러내는 것은, 성상의 도량이 넓지 못한 것입니다. 말이 지나친 것은, 성상의 마음이 평온치 않은 것입니다. 기쁨과 노여움을 쉽게 발하는 것은, 성상의 학문이 꽉 차지 못한 것입니다. 신은 듣건대, 노여움을 다스리는 것이 어려우니, 자신을 이겨내야만 노여움을 다스릴 수 있다고 합니다. 이른바 자신을 이겨낸다는 것은, 모름지기 성품이 편벽되어 이겨내기 어려운 곳을 능히 제거하는 것으로, 이것이 바로 전하의 병통을 치료하는 약석(藥石)입니다. 《근사록(近思錄)》에 말하기를 ‘사숙(思叔)이 종들을 꾸짖자, 이천(伊川)이 「어찌하여 마음을 동하고 성질을 참지 못하는가.」라고 하니, 사숙이 부끄러워하며 사과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학문을 함에 있어서 경각(警覺)할 바입니다.
전하께서 한번 시험삼아 고요한 가운데에서 희로애락이 발하지 않았을 때의 기상을 살펴 보십시오. 그러면 본연의 선(善)을 볼 수 있을 것이고 중화(中和)의 기운이 무성하게 피어오를 것입니다. 전하께서 참으로 의리에 잠심(潛心)하고 본원(本原)을 함양하며, 기질을 변화시키고 천리(天理)를 묵중하게 하면, 희로애락이 발함에 모두 절도에 맞을 것이고, 동정운위(動靜云爲)가 모두 이치에 합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야 성상의 도량이 넓어지고, 성상의 마음이 화평해지고, 성상의 학문이 고명해질 것입니다. 전하께서 비록 강학(講學)한다고는 하지만 진실로 실천하는 실상이 없다면, 이른바 조강이니, 주강이니, 석강이니, 야대니 하는 것에 날마다 나아간다 하더라도 아마도 형식적인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지금 이 쇠란하고 판탕된 때를 당하여서 천재(天災)와 시변(時變)이 달마다 생기고 있으니, 지금은 바로 전하께서 두려워하며 경계하여야 할 때입니다. 군신 사이에 마땅히 화평하기를 힘쓰고 크고 작은 정사에 있어서 성심으로 자문을 구하며, 밤낮없이 근심하면서 함께 어려움을 헤쳐나가기에 겨를이 없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고 미세한 일에 대해서 문득 실정 밖의 전교를 내리시며, 점점 더 격앙되어서 신하들을 억누르십니다. 이것이 어찌 국가의 복이겠으며, 성대한 조정의 아름다운 일이겠습니까. 신은 한밤중에도 국사에 생각이 미치면 눈물을 흘릴 뿐입니다. 전하께서 참으로 신의 말을 채용하여 특별히 엄명을 거두시고, 신의 직을 체직시켜 주어 신으로 하여금 분수에 편하게 하신다면, 전하의 은혜에 대해 더욱더 보답할 바를 몰라할 것입니다."
하였는데, 상이 그 상소를 이조에 내렸다. 이조가 복계하기를,
"상소의 말은 실로 품은 생각이 있을 경우 반드시 아뢴다는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비록 병이 있더라도, 그로 하여금 병을 치료하고서 조정으로 돌아오게 하소서."
하니, 하교하기를,
"간원은 병을 요양하는 곳이 아니다. 체차하라."
하였다.
11월 8일 임오
호조가 아뢰기를,
"객사(客使)를 책응(責應)하는 폐단이 끝이 없습니다. 으레 주는 백금이 4천 1백여 냥이며, 별도로 주는 수도 역시 1천 1백여 냥이나 됩니다. 본조에 저축해 둔 것은 남김없이 다 써버렸습니다. 그리고 팔 때에는 작게 주고 많이 취하며 여러 가지 물품을 강제로 사게 하므로, 시장 백성들이 잃는 것을 그 원가를 계산해 보면 역시 5천 5백여 냥이나 됩니다. 원통함을 호소하는 소리가 여염에서 들리고 있으니, 속히 요리하여 그 값을 보상해 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묘당으로 하여금 전례를 참고하여 경외의 아문에 저축하여 둔 것으로 값을 계산하여 주게 하소서."
하였다. 비국이 평안도 병영(兵營)에 저축해 둔 면포 3천 5백 필을 시장 백성들에게 나누어 줄 것을 청하니, 따랐다.
11월 10일 갑신
채유후(蔡𥙿後)를 이조 참의로, 조수익(趙壽益)을 대사간으로, 이형(李逈)을 정언으로, 이수인(李壽仁)을 장령으로, 민응형(閔應亨)을 대사성으로 삼았다. 특별히 원두표(元斗杓)를 제수하여 좌참찬으로 삼고, 이기조(李基祚)를 제수하여 함경 감사로 삼았다. 이기조가 김육(金堉)에게 미움을 받았는데, 김육이 상소하여 불충 불효(不忠不孝)로 배척하자, 이에 외방으로 내보낸 것이다.
전남도(全南道)에 기근이 들었다. 본도의 월과 군기(月課軍器) 및 삼명일 방물(三名日方物)·갑주(甲胄)를 다음해 가을까지를 기한으로 하여 정파하였다.
전남도 전주(全州)의 생원 유시헌(柳時憲) 등 1백여 인이 상소하여 선정신(先正臣) 이언적(李彦迪)의 서원(書院)에 액호(額號)를 내려줄 것을 청하였는데 예조에 계하하였다. 예조가 허락해 줄 것을 청하니, 하교하였다.
"이미 문묘(文廟)에 종사하였으니, 우선은 사액(賜額)하지 말라."
11월 13일 정해
영의정 김육이 면대를 청하니, 상이 불러보았다. 김육이 아뢰기를,
"서로(西路)에서는 돈[錢]으로 형벌을 속(贖)바치게 하므로 돈이 상당히 쓰여지고 있습니다. 서울에서도 이에 의거해 시행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법부(法府)에서 수속(收贖)할 때 감찰(監察) 한 사람이 그 돈을 주관해서 상평청(常平廳)으로 옮기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김육이 아뢰기를,
"호서와 영남 사이에 토적(土賊)이 아주 치성하여 여기저기 출몰하면서 도적질하는데, 도당이 자못 많다고 합니다. 그런데 호서의 병사와 수사가 모두 해변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식자들이 혹 청주(淸州)에다 병영(兵營)을 설치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합니다. 이는 대개 청주가 호서와 영남의 교차점에 있어서 제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목사 홍전(洪瑑)은 본디 재주와 국량이 있으니, 병영을 옮기고 홍전을 병사로 삼으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솔히 변통할 수 없다. 비국의 여러 신하들과 서로 의논하여 다시 품의하라."
하였다. 김육이 아뢰기를,
"병사가 본주의 목사를 겸하게 하여 그 고을의 세금을 받아쓰게 해서 지공(支供)의 폐단을 줄이는 것이 마땅합니다. 보령 현감(保寧縣監)도 수사가 겸임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병사와 수사가 그 고을 수령을 겸임한다면, 일이 참으로 편하고 좋을 것이다. 그런데 전부터 별도로 수령을 둔 것은, 무인이 백성들을 잘 다스리지 못해서가 아닌가?"
하자, 김육이 아뢰기를,
"내지의 병사와 수사는 문신도 할 수가 있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경기의 장초군(壯抄軍) 중 북영(北營)에 다시 번드는 자들은, 한갓 군량만 축낼 뿐 숙위하는 데는 도움이 안 됩니다. 그러니 다시 총융사(摠戎使)에게 소속시켜 기보(圻輔)의 형세를 웅장하게 하느니만 못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완(李浣)과 더불어 의논하라."
하였다. 김육이 또 이경억과 조석윤의 죄를 풀어줄 것을 청하니, 상이 답하지 않았다.
경상 감사 유심(柳淰)이 치계하여 경차관(敬差官) 이인(李𡐔)이 기생을 끼고 술에 취해 방종한 죄를 다스릴 것을 청하였다. 상이 나추(拿推)하라고 명하였다. 도승지 윤강이 아뢰기를,
"이인이 범법한 것은 모두가 놀랄 만한 일이니, 감사가 사실에 의거하여 계문하기만 하였다면 불가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특별히 처치하여 다른 사람을 경계시키라는 뜻으로 죄를 줄 것을 청하는 말을 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이인이 비록 잘못한 바가 있다고는 하지만, 그가 맡은 임무는 봉명(奉命)하는 신하입니다. 그러니 외방 신하의 사체에 있어서는 아주 마땅치 않습니다. 유심을 추고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 일이 참으로 마땅치 않다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러한 짓을 하는 길도 막지 않을 수 없다. 이인이 한 짓에 무슨 사람의 도리가 있는가. 조정에 치욕을 끼친 것이 심하다."
하였다. 헌부가 아뢰기를,
"경상 감사 유심이 봉명 사신을 죄줄 것을 청한 것에 대해서, 정원이 추고할 것을 청하였습니다. 그런데 성상께서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신들은 비록 성상의 뜻이 무엇인지는 모릅니다만, 외방의 신하로 있으면서 봉명하는 신하를 죄줄 것을 청하는 것은 예전에 없던 일입니다. 그러니 어찌 이인이 범한 죄가 중하다는 이유로 끝내 바로잡는 거조가 없을 수 있겠습니까. 사체에 관계되는 바이며, 또 뒤폐단도 있습니다. 유심을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이인은 끝내 죄를 받아 도배(徒配)되었다.
정원이 아뢰기를,
"영돈녕부사 김상헌(金尙憲)이 병이 갑자기 심해져 의관(醫官)에게 보이고 싶다고 합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급히 유후성(柳後聖)을 보내어 구호하게 하라."
하였다. 다음날 또 어의 조징규(趙徵奎)를 보내어 진찰하게 하고, 내국(內局)으로 하여금 약물(藥物)을 보내게 하였다.
11월 16일 경인
판중추부사 한흥일(韓興一)이 졸하였다. 흥일은 한백겸(韓伯謙)의 아들이다. 백겸은 예를 좋아한다는 것으로 이름이 났었는데, 바로 국구(國舅) 한준겸(韓浚謙)의 형이다. 흥일은 순박하고 꾸밈이 없었으며, 효행이 있어서 사람들이 모두 선량하다고 칭하였다. 화려한 관직을 두루 거쳤으며, 관이 우의정에까지 이르렀다. 졸함에 미쳐서는 상이 외척이라는 이유로 은수와 예모를 특별히 넉넉하게 하였다.
11월 19일 계사
오준(吳竣)을 동지경연사로 삼았다. 특별히 회령 부사(會寧府使) 변사기(邊士紀)를 제수하여 남병사(南兵使)로 삼고, 홍전(洪瑑)을 제수하여 홍청 병사(洪淸兵使)로 삼고 청주 목사를 겸임하게 하였다.
11월 20일 갑오
형조가 수도 단자(囚徒單子)를 올리니, 하교하였다.
"이 엄동 설한을 당한데다가 옥중에 역질까지 있으니 체옥(滯獄)된 1백여 인이 매우 불쌍하다. 되도록 빨리 처결하라."
11월 21일 을미
달이 태미원(太微垣)으로 들어갔다.
상이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세자빈(世子嬪)을 책봉하였는데, 바로 영의정 김육의 손녀로, 세마(洗馬) 김우명(金佑明)의 딸이다.
상이 하교하기를,
"세자가 가례(嘉禮)한 뒤에는 각도에서 마땅히 방물(方物)을 진상해야 하나, 전남도(全南道)는 단지 대비전에만 봉진하게 하라."
하였다. 본도에 흉년이 들었기 때문이다.
11월 22일 병신
승지를 보내어 전옥서에서 죄수들을 살펴보게 하고, 죄가 가벼운 자를 석방하게 하였다.
11월 23일 정유
심지원(沈之源)을 대사헌으로 삼았다.
상이 대신과 비국의 여러 신하, 금부 당상, 양사 장관을 명소하였다. 빈청에 모이니 봉서(封書)를 내려 보여주었는데, 바로 선조(先朝)167) 의 후궁인 조 귀인(趙貴人)이 저주(咀呪)한 일이었다. 대신 등이 속히 조 귀인의 비복들과 사련인(辭連人)인 영이(英伊)·가음춘(加音春)·앙진(仰眞)·예춘(禮春)·점향(點香)·가야지(加也之)·선례(善禮)·예일(禮一)·막금(莫今)·영이(永伊)·제열(悌烈)·덕향(德香)·예춘(禮春)·덕이(德伊)·업이(業伊)·경옥(京玉)·이례(二禮)·앵무(鸚鵡)·파회(破回)·응송(應松)·승운(承雲)·숭현(崇賢) 등을 국문하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금부에다 국청을 설치하였다. 국청이 아뢰기를,
"판의금부사 원두표(元斗杓)가 사명(使命)을 받들고 외방에 가 있으니, 고쳐 차임하소서."
하니, 속히 소환하라고 명하였다. 국청이 또 아뢰기를,
"판의금이 없으면 국문하지 못하는 것이 전례입니다. 감히 여쭙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지금 우선 국문하라."
하였다.
영이(英伊)란 자는 효명 옹주(孝明翁主)의 【바로 조씨가 낳은 옹주이다.】 여종이다. 나이가 어리고 자색이 있었으며, 또 자수를 잘 놓아 조씨가 사랑하였다. 이에 일찍이 말하기를 "이 아이가 영특하니 나의 며느리로 삼아야겠다." 하고는, 숭선군과 【역시 조씨가 낳았다.】 함께 살게 하였는데, 숭선군의 부인 신씨(申氏)를 몹시 미워하였다. 신씨는 바로 자전의 여동생의 딸이다. 자전이 이 말을 듣고는 몹시 노하여 영이를 불러 꾸짖었다. 영이가 이에 조씨가 음해(陰害)한 일에 대해 고하기를,
"조씨가 매번 ‘자전이 나를 구박하기를 어찌 이리도 심하게 하는가.’하고 말하면서, 아침 저녁으로 우물물을 길어 놓고는 사람들을 모두 물리고 몰래 기도하였으며, 심복인 두세 시비(侍婢)와 모의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앵무(鸚鵡)는 여자 무당입니다. 서로 통하여 오가는데, 종적이 괴이하고 비밀스럽습니다."
하였다. 얼마 후에 일이 발각되어 상이 영이 등을 내옥(內獄)에다 가두고 내관으로 하여금 국문하게 하였다. 실상을 알아내고는 왕옥(王獄)에 내어주어 죄를 다스리게 하였다. 이에 죄인들이 혹 승복하고서 복주되기도 하고, 불복한 채 그대로 죽기도 하였다. 앵무가 이미 승복한 뒤에 그로 하여금 대궐 안으로 들어가서 땅을 파게 해서 뼈가루를 얻었는데, 색이 재와 같았다.
죄인들이 승복한 초사(招辭)는 대략 모두 같았는데, 앙진(仰眞)과 가음춘(加音春) 등의 공사에는,
"우리들이 옛 무덤에서 썩은 관의 조각을 구하여 조 귀인에게 바쳤습니다. 그리고 불상(佛像)을 주조하고 부도(不道)한 내용으로 기도한 등의 일에 대해서도 모두 참여하여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귀인이 작은 궤짝에다 사람의 뼈가루를 담아서 우리를 시켜 옹주에게 전해주게 하여 저주하는 데 쓰게 하였습니다."
하였다. 예일(禮一)과 업이(業伊) 등의 공사에는,
"옹주가 옷소매 속에다 사람의 뼈가루를 담아서 대내(大內) 및 인평 대군(麟坪大君)의 집에다 뿌렸습니다. 그리고 다른 더럽고 흉한 물건도 많이 묻었습니다."
하였다.
훈련 대장 구인후(具仁垕)와 좌·우포도 대장을 명소하여 엄히 경계하고 순찰하게 하였다.
11월 24일 무술
심액(沈詻)을 판의금부사로 삼았다. 대신이 여러 차례 국청에 금부의 장관이 없어서는 안 된다고 아뢰자, 원두표(元斗杓)를 체직하라고 명하고 심액으로 대신하게 한 것이다.
대사간 조수익(趙壽翼)이 체직시켜달라고 진소하였다. 간원에 장관이 없어서 국문을 하지 못하였다. 이에 대신이 아뢰기를,
"이것이 어떠한 옥사인데 신하된 자가 감히 신병(身病)으로 정소하고서 나오지 않는단 말입니까. 이것은 참으로 신들이 물러터진 소치입니다. 황공하여 대죄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경들은 안심하라. 조수익은 먼저 파직한 뒤에 추고하라."
하였다. 조수익은 끝내 하옥되었다가 정배(定配)되었다.
11월 25일 기해
인흥군(仁興君) 이영(李瑛)이 졸하였다. 영은 바로 선조(宣祖)의 아들이다.
11월 26일 경자
세자의 가례(嘉禮)를 뒤로 물려 행하기로 하였다. 인흥군의 상(喪) 때문이다. 상이 당초에 예조에 명하여 길일(吉日)을 고쳐 택일하게 하였는데, 예조가 아뢰기를,
"일관(日官)이 12월은 모두 구기(拘忌)가 있다고 합니다. 막중한 대례(大禮)를 해를 넘길 수 없습니다. 제왕가의 혼례는 일반 백성들과는 같지 않습니다. 내일 그대로 행하여도 무방할 듯합니다. 대신에게 의논하소서."
하였다. 대신이, 정으로 보나 예로 보나 그대로 행하는 것은 불가하다고 하니, 상이 따랐다.
11월 27일 신축
양사가 【대사헌 심지원(沈之源), 집의 박길응(朴吉應), 사간 심노(沈𢋡), 지평 심유행(沈儒行)·정륜(鄭錀), 헌납 홍중보(洪重普), 정언 이형(李逈)·오정원(吳挺垣).】 합계하기를,
"오늘날 저주한 변고는 몹시 흉악하고도 참혹하니, 이것은 실로 전고에 없던 바입니다. 자취가 이미 드러났으니 은혜로 의리를 가릴 수 없습니다. 더구나 일이 자전에 관계된 것이니 전하께서도 어찌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겠습니까. 흉하고 더러운 물건을 밀봉하여 몰래 던져 넣고 대비전과 대전에 혹 뿌리거나 묻었다는 말과, 물을 길어놓고 기도하고 궤를 봉해 출납한 상황이 여러 사람의 공사에서 모두 나왔으며, 어제 대비전 침실에 묻어두었던 흉한 물건을 파낸 것이 아주 많다고 합니다. 신들은 이말을 들은 뒤로는 마음이 떨리고 등골이 서늘합니다. 예로부터 난적(亂賊)이 어느 시대인들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흉역(凶逆)의 참혹함이 이보다 심한 경우는 없었습니다. 왕법(王法)에 있어서 결단코 용서하기 어려우니, 먼저 귀인의 작호를 삭탈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홍문관이 【응교 김좌명(金佐明), 교리 조한영(曺漢英), 수찬 윤집(尹鏶).】 상차하기를,
"국가가 불행하여 변고가 궁액(宮掖)에서 나왔으니, 신하와 백성들의 통분과 놀라움이 어떠하겠습니까. 국청의 일은 엄한 것이어서 신들이 자세한 내용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귀인 조씨가 사주하여 흉악한 짓을 행한 자취가 여러 역적들의 공사에 낭자하며, 부도한 내용으로 기도한 말이 위로 존귀한 모후에게까지 미쳤습니다. 그가 한 짓을 추적한다면 장차 이르지 않는 바가 없을 것입니다. 흉하고 더러운 물건을 파내 얻었으니, 역모한 정상이 이미 드러난 것입니다. 왕법은 지엄한 것으로 주모한 자의 작호를 그대로 놔둘 수 없습니다. 귀인 조씨의 작호를 먼저 삭제하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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