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효종실록8권, 효종 3년 1652년 1월

싸라리리 2025. 12. 20. 2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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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일 갑술

사간        김좌명(金佐明)이 인피하기를,
"신이 외람되게도 지난해 경악에 몸을 담고서, 인심이 흉흉해 하며 두려워하는 것을 보고 조정이 분열될까 걱정한 나머지, 한밤중에 탑전(榻前)에서 성상을 모시고 있으면서, 그저 마음속에 있는 생각을 다 말씀드려야 한다는 것만 알았을 뿐 일에 앞서 그 기미를 제대로 밝혀드리지 못했습니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온몸이 두려워 떨리고 손가락을 깨물어도 이미 지나가버린 일로서 후회막급일 따름입니다. 현재 문사(問事)001)                  하는 반열에 있기에 감히 소소한 혐의를 스스로 드러내지 못한 채 아무 말 못하고 업무를 수행해 온 지 이미 오래 되었습니다만, 추국하는 일이 거의 완결되어 앞으로 물의가 비등해질 터이니 어떻게 감히 뻔뻔스럽게 대각(臺閣)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 신을 파직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물러가 물론(物論)을 기다렸다. 간원이 아뢰기를, "사간 김좌명이 인혐(引嫌)하고 물러났는데, 일이 발생하기 전에 분명히 그 기미를 아는 것은 사람의 능력으로는 어려운 일이고 지난날 진달드렸던 것이 아무뜻 없이 한 것이고 보면, 이를 이유로 지난날의 허물을 이제 와서 책망할 수는 없습니다. 출사하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1월 2일 을해

병조가 아뢰기를,
"창덕궁(昌德宮)과 창경궁(昌慶宮) 두 궁전을 수리하는 공사에 대하여, 호조·예조·공조 등 3사(司)가 함께 상의해 마련해서 아뢰라고 일찍이 분부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전부터 시급히 수리해야 할 공사가 있을 경우, 호조와 병조가 각각 미포(米布)를 내어 수리 도감(修理都監)에 수송하고 필요한 역군(役軍)의 수효에 따라 급가(給價)하여 모집해 왔습니다. 따라서 이번에도 이대로 거행해야 할텐데, 역군이 얼마나 필요할지 미리 정하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대충 예상해 보건대, 대지를 깎아내고 채워넣는 역사가 엄청나게 클 것이니 1천여 명을 1개월 동안 부역시킨다고만 하더라도 가포를 계산하면 1백여 동(同)이 넘습니다.
이런 중대한 공사를 당해서는 비용이 얼마가 들어가든지 간에 진정 비축된 물량이 있으면 다 쏟아내어야 하겠습니다만, 어떤 이는 말하기를 ‘군수품으로 비축한 목면(木綿)을 다 투입할 수는 없으니, 각 아문으로 하여금 능력껏 보조하도록 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고, 어떤 이는 말하기를 ‘각 아문에 비축된 물량도 풍부하지 못하니, 제도(諸道)에 역군을 배정하여 얼음이 풀리면 부역케 하는 것이 마땅하다.’ 합니다. 그러나 만약 시급히 개수해야 할 곳이 있으면 우선 역군을 모집하여 입역시키는 것도 무방할 듯하니, 묘당에게 품처하도록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군수용(軍需用)으로 비축한 물량을 탕진해서는 안 될 뿐만 아니라, 지금 인심이 좋지 못한 만큼 경중(京中)에 출입토록 해서도 안 될 것이다. 전적으로 제도의 승군(僧軍)을 쓰도록 하라. 그리고 얼음이 풀리기 전에는 공사를 시작할 수 없는데 어찌 역군을 모집하겠는가. 묘당에는 의논할 필요가 없을 듯하다."
하였다.

 

병조가 아뢰기를,
"금방 빈청(賓廳)에서 개좌(開坐)하고 있는 대신에게 의논한 결과, 전에 하교하신 대로 제도(諸道)에 승군을 배정하되 양계(兩界)와 해서(海西)는 제외하고 5도에 있는 승도(僧徒)의 원수(元數)를 참작하기로 하였습니다. 따라서 경기 50명, 강원도 1백 명, 홍청도(洪淸道) 2백 명, 전남도(全南道) 5백명, 경상도 3백50명으로 하여 기한에 맞춰 부역케 하는 것이 마땅하겠는데, 이런 내용으로 5도 감사에게 행문(行文)하소서."
하니, 따랐다. 그 뒤에 5도에 8백 명을 더 배정하였다.

 

죄인 이순민(李順民)이 김자점(金自點)과 친밀히 지냈던 군관으로서 역모를 미리 알고 있었다는 말이 변사기(邊士紀)의 공초(供招)에서 나왔다. 그래서 1차 형신(刑訊)한 뒤에, 정형(停刑)하고 그대로 수금(囚禁)하여 옥사가 결말되기를 기다려 처치하도록 명하였는데 며칠이 지나 죽었다. 상이 그의 죽음에 곡절이 있을 것으로 의심하여 한성부 판윤 김광욱(金光煜), 좌윤 안응형(安應亨), 우윤 김수현(金守玄)에게 특별히 명하여 시체를 직접 검사하도록 하였는데, 상해를 입은 흔적이 과연 낭자하였으므로 구료(救療)한 의관(醫官) 및 형리(刑吏)·나장(羅將)·수직인(守直人) 등을 붙잡아 국문하도록 명하였다.

 

금부가 아뢰기를,
"죄인 현성오(玄省吾)가 밖에 있어 체포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아비 현위(玄瑋)를 포도청으로 하여금 구속하여 대기하도록 했었는데, 지금은 성오가 형장을 맞고 이미 죽었습니다. 현위를 어떻게 처리해야 합니까?"
하니, 답하기를,
"성오가 아무리 승복(承服)하지 않고 죽었다고는 하지만 역모를 꾀한 정상이 여러 적들의 공초(供招)에 무수히 나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따라서 그 아비를 온전히 풀어 주기는 어려우니, 참작하여 처리하도록 하라. 그리고 김일(金逸)이 이미 죽었는데, 이 밖에 아직 체포하지 못한 죄인은 없는가?"
하였다. 【김일이 변사기(邊士紀)의 공초에 나왔는데 붙잡아 국문하라는 명이 떨어지기 전에 병으로 죽었으므로 이런 분부를 내린 것이다.】  금부가 아뢰기를,
"죄인 성오는 역적의 공초에 빈번하게 나왔으니, 그 아비를 온전히 풀어주기는 과연 어렵습니다. 그리고 아직 체포하지 못한 죄인으로는 김자점의 종 용내(龍乃)밖에 없는데, 현재 체포하려는 중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용내도 끝까지 잡으려고 하지는 말라."
하였다. 그 뒤에 현위를 대정현(大靜縣)에 정배(定配)하였다.

 

1월 3일 병자

영의정        정태화(鄭太和), 좌의정        김육(金堉)이 아뢰기를,
"숭선군(崇善君) 이징(李澂)은 역적의 초사(招辭)에 추대하기로 지목했다고 여러 차례 나왔으니 이런 죄명(罪名)을 입고서는 끝내 태연히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신들이 일찍이 탑전에서 모두 진달드렸습니다. 그런데 삼가 성유(聖諭)를 받들건대 ‘조용히 생각해 보겠다.’고 분부하셨기에 신들이 물러가 명을 기다렸는데, 10일이 지나도록 여태 처분이 없으시니 뭇 사람들의 심정이 더욱 답답해하고 공의(公議)가 갈수록 격렬해지고 있습니다. 만약 지금 일찌감치 선처하여 조치하지 않다가 후회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면, 그때는 전하께서 아무리 곡진하게 보호해 주시려 해도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낙선군(樂善君) 이숙(李潚)은 기상이 높다고 칭해진 사실이 이미 고변한 자의 초사에 나왔고, ‘천명을 논한다면 누가 더 우월한가.’ 하는 설이 또 성로(星老)가 승복한 초사에 나왔으니, 그까지 아울러 거론하여 의의(疑義)한 정상이 의심할 여지없이 명백합니다. 또한 어떻게 보통 사람과 같이 서울에서 편히 숨쉬며 지낼 수 있겠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성명께서는 다시 깊이 생각하시고 속히 결단을 내리시어 이들 모두를 도중(島中)에 안치시키소서. 그리하여 두 사람이 함께 한집에 거하며 서로 의지하고 살아가게 함으로써 끝까지 보전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주소서."
하니, 따르지 않았다.

 

우의정 이시백(李時白)이 세 차례나 정고(呈告)하였는데, 모두 윤허하지 않는 것으로 비답하라고 명하였다.

 

상이 대신 및 비국의 제신(諸臣)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대옥(大獄)이 이미 완결되었으니, 수감된 죄인들을 의처(議處)하라."
하니, 영의정 정태화(鄭太和)가 아뢰기를,
"여러 죄인 가운데 심지명(沈之溟)은 비록 역적의 공초에 두 번 나왔다고는 하지만 별로 중요하게 관련되었다는 말은 없으니 풀어주어야 할 듯싶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제신의 의견은 어떠한가?"
하니, 모두 아뢰기를,
"풀어주어야 합니다."
하고, 판의금 원두표(元斗杓)가 아뢰기를,
"완전히 풀어줄 수는 없습니다."
하니, 상이 중도 부처(中道付處)할 것을 명하였다. 나머지 죄인들에 대해서도 여러 의견을 채택하여 완전히 풀어주기도 하고 정배(定配)하기도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심기원(沈器遠) 및 이산(尼山)의 역옥(逆獄)의 예에 따라 이번에도 청나라에 알려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태화가 아뢰기를,
"이징과 이숙을 속히 선처하시라는 뜻을 지난번 상의 앞에서 진달드렸고 아침에도 진달하여 아뢰었습니다. 모두 해도(海島)에 내치시어 보전되도록 하소서."
하고, 대사헌 심지원(沈之源), 대사간 이시해(李時楷)가 징과 숙을 절도(絶島)에 안치시킬 것을 청하고, 교리 조한영(曺漢英)이 양사의 청을 쾌히 따를 것을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일이 마침내 이렇게까지 되고 보니 내가 마음을 진정할 수가 없다. 다만 훗날 후회스러운 점이 있게 되면, 옛 사람의 이른바 ‘선처하지 못했다.’는 비난을 면치못할 것이니, 이 점이 두려웠다. 지금 대신의 말을 듣고 깊이 보전할 방법을 터득하게 되었는데, 먼 지역에 유배하지 말고 강화(江華)에 두도록 하라."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역적을 소탕하고 나서 이미 종묘에 고하고 교서를 반포하였으니, 고변한 자를 논공(論功)하는 것이 마땅할텐데, 대신의 의견은 어떠한가?"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고변한 자에게 공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자기 목숨을 살리려는 데에서 나온 계책에 불과한데, 어떻게 녹공(錄功)할 수 있겠습니까. 전답과 노비나 후하게 주어 상전(賞典)을 보이면 될 것입니다."
하고, 대사헌 심지원도 아뢰기를,
"논공은 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안 될 것이 뭐가 있는가."
하고, 이어 승지 이응시에게 하문하기를,
"이번 옥사에 대해서는 그대가 전말을 자세히 알고 있는데, 고변한 자에게 과연 공이 없는가?"
하니, 응시가 아뢰기를,
"신의 생각에는 고변한 자에게 공이 없다고 할 수는 없을 듯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흉역을 꾸민 변사기(邊士紀)같은 경우는 끝내 실상을 완전히 자백하지 않았다. 만약 고변한 자가 없었다면 그 누가 역모를 들추어내어 심문할 수 있었겠는가. 고변한 자에게 공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야말로 인심을 맥빠지게 하는 말이다. 그래도 승지의 의견만은 사람들과 부화뇌동하고 있지 않으니, 내가 매우 아름답게 여긴다."
하였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일찍이 전 주부(主簿) 박산남(朴山男)의 상소를 인하여 전남 병사(全南兵使)로 하여금 먼저 귀거(龜車) 1, 2량(輛)을 만들어 사용할 수 있는지 시험해 보도록 하였습니다. 금방 병사 구인기(具仁墍)의 치보(馳報)를 접하건대 ‘산남에게 귀거를 감조(監造)케 하였더니 공사를 시작한 지 3개월만에야 겨우 1량을 만들었다. 그런데 70명이 있어야 운용(運用)할 수 있을 뿐더러 언덕에 구애받고 진창에 빠지고 하여 하루 종일 10리도 가지 못했다.’ 하였습니다. 귀거가 전투용으로는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이로써 알 수 있으니, 속히 중지하도록 하소서."
하니, 따랐다.

 

1월 4일 정축

정언 서필원(徐必遠)이 인피(引避)하였다.
"대간의 고례(故例)를 보건대 동료에게 간통(簡通)을 띄웠을 경우에는 반드시 의견이 귀일되기를 기다린 연후에야 비로소 논계(論啓)할 수 있는 것으로서, 만약 귀일되지 않았을 때는 감히 먼저 아뢰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어제 장관(長官)이 이징과 이숙 모두 방치(放置)시킬 것을 청하자는 뜻으로 신에게 간통하였는데, 신은 생각하기를 ‘숙에 대한 말이 비록 역적의 공초에서 나왔지만 그것은 곧 성로(星老)의 공초 가운데 「천명에 비추어 우열을 논했다.」고 한 한 조목뿐이다. 따라서 여러 역적들이 이구동성으로 추대했다고 말한 징과 비교해 볼 때 또한 차이가 있지 않겠는가. 인신(人臣)으로서 이런 죄명을 얻게 되었다면 천지간에 용납될 수 없는 것이기는 하다. 그러나 사연(辭連)002)  된 범인(凡人)들에게도 오히려 용서하여 풀어주고 있는데, 어떻게 역적의 공초에 이름이 나왔다는 이유만으로 경중을 따지지 않은 채 뒤섞어 똑같은 벌을 적용할 수 있단 말인가. 옛날에 관숙(管叔)과 채숙(蔡叔)이 똑같이 모반했는데도 주공(周公)이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풀어 주었던 것은, 참으로 형제의 서열에 비추어 볼 때 수범(首犯)과 종범(從犯)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미루어 본다면 숙이 징과 똑같은 죄가 될 수 없다는 것이 어찌 근거가 없는 것이겠는가. 징이야 죽든 살든 본디 애석할 것이 없다. 그러나 숙은 어린 나이에 멀리 바다를 건너 안개와 이슬을 무릅쓰고 살아야 한다. 만약 회남 여왕(淮南厲王)이 죽었던 것과 같은 결과003)   면치 못하게 될 경우, 아무리 다시 식음을 전폐하고 그지없이 애통해 하더라도 어찌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리고 후세에 이 사실이 전해지면 아마도 성덕(聖德)에 누를 끼치는 일이 될 것이다. 요즈음 일종의 논의가 일어나 어떤 이는 말하기를 「똑같이 역적의 공초에 나온 이상 차이를 둘 수 없으니, 우선 함께 논하여 상의 재가를 기다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는데, 참으로 어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국가가 대신(臺臣)을 둔 것은 상의 이목(耳目) 노릇을 하라는 것이니, 오직 참작하고 상량해서 자기 직분만 다하면 그만이다. 어떻게 군상(君上)에게 맡기면서 먼저 과격하고 준엄한 주장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하였습니다.
신의 견해가 이와 같았기 때문에 간통에 답하면서 어렵게 여긴다는 뜻을 제시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뒤에 듣건대 장관이 탑전에서 아뢰면서 동료들의 의견이 귀일된 것처럼 했다고 합니다. 신이야 가볍게 여길 수 있다 하더라도 대석(臺席)의 구례(舊例)만은 돌아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도 삼사(三司)가 합계(合啓)하여 이미 윤허를 받았습니다. 신의 망령된 생각으로는 둘이 모두 같은 형장(刑章)을 적용받게 된 것은 신이 형편없기 때문이었다고 여깁니다. 또 옛 규례가 무시됨으로써 오늘부터 무궁한 폐단이 일어나게 되었으니, 신의 직을 파직하소서."

 

헌납 정언벽(丁彦璧)이 인피하였다.
"대체로 대각(臺閣)이 논사(論事)하는 체통은, 아무리 탑전에서 아뢰는 것이라 하더라도 일단 간통(簡通)을 띄운 이상에는 반드시 동료들의 의견이 귀일되기를 기다린 연후에야 비로소 논계할 수 있게 되어 있으니, 이는 그 일을 중히 여기는 까닭에서입니다.
신은 동료들의 회의에 참여하지 못했기 때문에 헌부가 대사간 이시해(李時楷)의 논을 전달받아 보여 주었는데, 그것은 숭선군(崇善君)과 낙선군(樂善君)이 모두 역적의 공초에 나왔으니 함께 절도(絶道)에 안치하지 않을 수 없다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신의 생각에는 ‘낙선군 이숙에 대한 이야기가 성로(星老)와 고변한 자의 공초에 나왔다고는 하지만, 그 사연(辭連)된 것은 이징과 차이가 있다. 그리고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 아이인만큼 비록 의친(議親)004)  의 법전에 따라 혹 논죄하는 대상에서 제외시킨다 하더라도 어찌 형률(刑律)을 잘못 적용했다고 할 수 있겠는가. 경중을 분간하지 않고 똑같이 그 죄를 논하는 것은 부당하다.’라고 여겼기에, 이러한 뜻으로 답변해 보냈습니다.
그런데 지녁에 소보(小報)를 보건대, 양사가 모두 절도(絶道)에 방치(放置)시킬 것을 청하였는데, 이에 근도(近島)에 옮겨 안치하도록 명했다고 되어 있었습니다. 그들 둘이 서로 의지하며 거주하게 한 이것이야 곡진히 보전해 주려는 성상의 지극한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왕자군(王子君)을 절도에 안치시키는 논은 작은 일이 아니고 간원이 헌부에 간통(簡通)한 것은 즉 합계(合啓)하자는 것입니다. 합계할 중론(重論)을 동료들의 의견이 귀일될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먼저 앞질러 진달하여 아뢰었으니, 이것은 신을 그 사이에서 무시한 것입니다. 이 모두가 신이 무기력한 나머지 경시를 받아 빚어진 결과이니, 신을 체직하소서."

 

대사헌 심지원(沈之源)이 인피하였다.
"이징과 이숙이 경중의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똑같이 역적의 공초에 나온 이상 끝까지 보전해 줄 수 있는 방법으로는 방치(放置)시키는 것이 가장 좋겠기에, 어제 대신과 함께 같은 목소리로 극력 진달하여 모두 윤허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서필원과 정언벽이 경중을 분간하지 않았다고 비난하고 심지어는 동료의 의견이 귀일되기를 기다리지도 않고 앞질러 진달하여 아뢰었다고 말하였습니다. 신이 어찌 감히 구차하게 자리에 있겠습니까. 신을 체직하소서."

 

대사간 이시해(李時楷)가 인피하였다.
"이징과 이숙이 역모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말하더라도 역적의 공초에 나온 것은 매일반입니다. 따라서 그들을 섬으로 내보내 안치시켜 보전하려고 했던 것은 조정의 역적을 응징하는 의리를 밝힘과 동시에 성상의 인애(仁愛)하신 마음을 본받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양사에 간통(簡通)을 띄웠는데, 집의 장응일(張應一)은 ‘잘 알았다.[謹悉]’고 써 보내었고, 정언 서필원(徐必遠)은 ‘낙선군은 어린 아이이니 숭선군과는 차이를 두어야 한다.’고 답하기에 재차 간통을 띄웠으며, 헌납 정언벽(丁彦璧)은 만나지 못했기에 집의 장응일로 하여금 전통(轉通)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미처 그들의 답변이 되돌아 오기 전에 대사헌 심지원(沈之源)과 입시하게 되어 탑전에서 진달해 아뢰어 윤허를 받았습니다.
그런데도 필원과 언벽은 그만 동료의 의견이 귀일되기를 기다리지도 않았다고 말을 하니, 참으로 이상하다 하겠습니다. 대신과 삼사가 충분히 토론을 하여 탑전에서 완전히 결정을 본 일에 대해 따로 의견을 내어 이러쿵 저러쿵하는데, 관숙·채숙의 이야기나 회남 여왕을 거론한 말은 더욱 황당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리고 ‘요즘 일종의 논의가 있어 상의 재가를 기다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한다.’ 하였는데, 이 말이 어디에서 나온 것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억지로 이상한 논을 끄집어내어 이렇듯 사태를 분분하게 만들고 있는데, 신만 어떻게 자신이 옳다고 여기고서 뻔뻔스럽게 그대로 자리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 신을 체직하소서."

 

집의 장응일(張應一)이 인피하기를,
"대사간 이시해가 간통(簡通)을 띄워 숭선군과 낙선군을 함께 논하는 일을 의논해 왔는데, 신의 생각으로는 ‘낙선군이 역적의 공초에 거론되었다 하더라도 숭선군에 비하면 어린 동생이다. 성상께서 마음속으로 우애하는 지극한 정을 막을 수 없어 그 형을 방치(放置)하는 것도 윤허하지 않고 계시는데, 어떻게 어린 동생까지 아울러 논하는 것이 온당하겠는가. 지난번 합계(合啓)할 적에도 일찍이 아울러 논하지 않았는데, 지금 와서 소급하여 논하는 것이 옳은지 모르겠다.’라고 여겼기에, 이런 내용으로 답변하였습니다. 그러자 곧바로 둘을 같이 거론하자는 뜻으로 또 간통을 보내 왔습니다. 이에 신이 돌이켜 생각하여, 예로부터 처변(處變)하는 도리를 제대로 한 경우는 드물고 제대로 못한 경우가 대부분인데 대체로 오늘날의 일은 보전시키는 것이 바로 최상의 방책이라고 여겼기에, ‘잘 알았다.[謹悉]’고 답변하였습니다. 정언 서필원과 헌납 정언벽은 아울러 논하는 것을 그르다고 하는데, 대신(臺臣)의 직절(直截)한 풍도는 본래 이와 같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신이 어떻게 감히 뻔뻔스럽게 자리에 그대로 있겠습니까. 신을 체직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서필원 등이 모두 물러나 물론(物論)을 기다렸다.

 

하교하였다.
"지금 서필원과 정언벽이 인피한 말의 내용을 보건대, 논리가 매우 정대하고 바르니 내가 가상하게 여기는 바이다. 이들의 말이 없었더라면 우리 집안의 일을 하마터면 그르칠 뻔하였다. 만약 안개와 이슬을 맞고 살아가다가 끝내 죽는 결과를 빚게 한다면 아무리 식음을 전폐하고 애통해 한들 과연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척포 두속(尺布斗粟)의 비난005)  을 오늘날 면하기 어려울까 두려운데, 더구나 아무 관계도 없는 숙이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이징과 이숙을 방치(放置)하라는 명을 모두 도로 거두어들이도록 하라."

 

정원이 아뢰기를,
"이징과 이숙을 방치하도록 한 일은 삼사가 충분히 토의하고 성상의 뜻을 진실로 본받아서 한 것인데, 서필원과 정언벽이 따로 의견을 내어 감히 망언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때문에 성상께서 거두어 들이라는 명을 내리기까지 하셨으니, 신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감히 성상의 분부를 받들어 따를 수 없기에 죽음을 무릅쓰고 봉환(封還)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어찌 이럴 수가 있는가. 경들은 염려하지 말고 속히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정원이 끝까지 감히 거행하지 못하겠다는 뜻으로 아뢰었다.

 

옥당이 차자를 올리기를,
"정언 서필원(徐必遠) 등이 모두 인혐하고 물러났습니다. 이징과 이숙이 역적의 공초에 나온 내용은 차이가 있는 듯합니다만, 섬에 내보내 안치시키려 한 것은 그저 보전시키려는 목적에서였습니다. 그런데 조정의 본의를 이해하지 못하고 따로 이론(異論)을 냈으니, 그 직에 그대로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불시에 등대(登對)하게 되어 대신(大臣)이 먼저 말을 꺼낸 상황에서 어떻게 상규(常規)만을 고집한 채 아무 말없이 침묵만 지키고 있을 수 있겠습니까. 또 처음에는 어렵게 여겼다 하더라도 끝내는 처변(處變)하는 본의를 알았으니, 피혐할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정언 서필원, 헌납 정언벽은 체차하고, 대사헌 심지원, 대사간 이시해, 집의 장응일은 출사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영중추부사 이경여(李敬輿), 영의정 정태화(鄭太和), 판중추부사 조익(趙翼), 좌의정 김육(金堉)이 아뢰기를,
"이징과 이숙의 일을 보건대, 만약 그들이 미리 흉모를 알고 있었다면 신들이 어떻게 방치(放置)하자고 청하기만 하고 그만두었겠습니까. 그저 역적의 공초에 여러 차례 나왔고 추대되었다는 이름이 붙여진 이상, 뒷날 흉도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될 것이라는 점 또한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에 그 형제를 한곳에 안치시킴으로써 의외의 환란을 막고 뒷날 있을지도 모를 후회를 없애려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어제 탑전(榻前)에서 대신과 삼사가 충분히 토의하여 결정했던 것인데, 이제 일개 대관(臺官)의 그릇되고 망령된 의견으로 인하여 갑자기 도로 거두어들이라는 명을 내리시니, 신들은 서로 돌아보며 놀라워 할 뿐입니다. 전에 청했던 것을 다시 품신합니다."
하니, 따르지 않았다.

 

1월 5일 무인

옥당이 차자를 올리기를,
"이징과 이숙을 방치하도록 청하는 일을 대신과 삼사가 같은 내용으로 극력 진달하여 이미 윤허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한두 대신(臺臣)이 그 사이에 그만 이론을 끄집어내자 뜻밖에도 갑자기 도로 거두어들이라는 명을 내리셨으므로, 신들은 서로 돌아보며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습니다. 전에 청했던 것을 다시 품신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아, 참으로 사람들의 말이 있겠구나. ‘오늘의 일은 실로 보전해 주려는 계책에서 나온 것이니, 몇 년 지난 뒤에 형세를 살펴 석방하는 것이 온당하다.’는 이 말을 경연에서 했을 그때는 입시했던 여러 신하들이 본의를 이해하는 듯했는데, 근시(近侍)들조차 이를 모르고 있으니, 어떻게 집집마다 다니며 깨우쳐 줄 수 있는 일이겠는가. 이렇게 미루어 보건대 두속(斗粟)의 풍요(風謠)를 끝내는 면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 생각이 이에 미치자 내가 가련하게 느껴져 뭐라고 말할 바를 모르겠다."
하였다.

 

전 감찰(監察) 홍부(洪溥)는 홍진도(洪進道)의 아들인데, 아비의 상을 당하여 아비가 총애하던 계집종을 장살(杖殺)하였다. 이에 대론(臺論)이 일어나 체포되어 금부에서 승복했는데, 그 뒤에 금부가 아뢰기를,
"‘노비를 함부로 죽인 율[擅殺奴婢之律]’만 적용하는 것은 온당하지 않으니, 등급을 높여 논죄함으로써 풍교(風敎)를 바로잡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그 아비가 그 계집종을 친근하게 대했는지 아직 실상이 드러나지도 않았는데, 사람들의 말만 듣고 중률(重律)을 무턱대고 가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노비를 함부로 죽인 죄로 조율(照律)하라."
하였다.

 

1월 6일 기묘

대사헌 심지원(沈之源), 대사간 이시해(李時楷), 지평 한진(韓縝)이 청대(請對)하니, 상이 불러서 보았다. 심지원이 나아가 아뢰기를,
"이징과 이숙을 방치(放置)하는 것이야말로 그들을 보전시키는 길이 되겠기에 진달해 아뢰어 윤허를 받았는데, 지금 대신(臺臣) 한두 명의 이론(異論)을 인하여 갑자기 성명(成命)을 정지시켰습니다. 앞으로 만약 흉도(兇徒)가 나오게 되면 필시 두 아이를 구실로 삼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신이 처음에 방치할 것을 청했을 때는 내가 차마 따르지 못했는데, 전일 영중추부사가 곡진하게 갖추어 아뢰었기 때문에 비로소 따랐던 것이다. 그러나 두아이에게 죄가 있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니고 이번 옥사(獄事)가 완전무결하게 다스려졌다고는 볼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즉 여러 역적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형장(刑杖)을 참아가면서 사리대로 전부 자백하지 않았으니 만큼 필시 그 뿌리를 모두 제거하지 못했을 것인데, 만약 뒷날 그 아이들을 또 구실삼는 일이 있기라도 하면 그때는 나도 사정(私情)을 용납할 수 없게 되겠기에 섬안에 안치시켜 외부와 단절시키려고 한 것일 뿐이었다. 그런데 장응일(張應一)이 불러도 오지 않는 것을 보면, 【장응일이 옥당에서 출사(出仕)를 청한 뒤에 소명(召命)을 받들었는데도 나아오지 않았으므로 이렇게 이른 것이다.】 외부 의논이 얼마나 준엄한지를 따라서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경의 말도 어찌 모두 옳겠는가."
하였다. 시해가 역시 잇따라 나아와 아뢰기를,
"서필원(徐必遠) 등이 논한 것을 보건대 준엄한 논이 아니고 괴이한 논이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징이야 죽어도 애석할 것이 없다고 한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방치(放置)하는 조치는 죽이려고 계획한 것이 아닌데도, ‘식음을 전폐하며 아무리 슬퍼하더라도 어찌할 길이 없을 것이다.’는 등의 말을 하였으니, 그 의미가 매우 깊다고 하겠다."
하였다. 지원이 아뢰기를,
"신들이 그 즉시 연계(連啓)하려고 했습니다마는, 이미 결정된 일을 한두 사람이 망령되이 논하는 바람에 갑자기 성명(成命)을 거두어 들이셨으므로 감히 관례대로 논계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에 감히 청대(請對)하여 다시 전계(前啓)를 품신하오니, 즉시 윤허해 주셔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사람들이 혹 ‘임금의 덕에 누를 끼치는 일이다.’고 말하면, 경들은 장차 어떻게 할 것인가."
하자, 지원이 아뢰기를,
"지금 일찍 조치하지 않았다가 끝내 난처한 결과에 이를 경우, 그것은 임금의 덕에 누를 끼치는 일이 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시해가 아뢰기를,
"사람의 죽고 사는 것이 어찌 풍토(風土)와 관련이 있는 것이겠습니까마는, 강도(江都)는 사지(死地)가 아니니 만큼 그 곳에 방치하는 것이야말로 보전해 주는 계책이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춘추(春秋)》를 보건대, 정장공(鄭莊公)이 처음에 그 아우의 의롭지 못한 행동을 제어하지 못했다가 끝내는 죽여야 하였다. 내가 처음에 생각한 것도 대체로는 바로 이 점을 염려했던 것인데,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말들을 하니, 난들 어떻게 하겠는가."
하였다. 지원과 시해 등이 속히 따르셔야 한다는 뜻을 다시 아뢰니,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시해가 아뢰기를,
"기축년 이후로 조정이 안정되지 못했는데, 김자점(金自點)이 그동안 권세를 휘둘렀기 때문에, 그때 아부하며 추종하던 무리들이 지금까지도 끼리끼리 모여 비방하고 있습니다. 만약 명백히 처치하여 조정에 청론(淸論)이 행해지게 할 경우, 이와 같은 괴이한 논을 또한 어떻게 감히 내놓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조정이 안정되지 못한 것이 참으로 아뢴 말과 같으므로 나도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요즘의 일도 그 자취를 추적하면 실상을 모두 알아낼 수 있을텐데, 다만 이 틈을 타서 애매한 자에게까지 해가 미칠까 두렵다. 그러나 만약 친하게 지내며 아부한 것을 사람들 모두가 훤히 아는 자가 있다면, 어찌 논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시해가 아뢰기를,
"지금 성상의 분부를 받들건대 지나치게 염려하시는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의 말은 지나친 염려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하였다. 지원이 아뢰기를,
"나라에 기강이 없어 시비가 분명하게 가려지지 않기 때문에 이런 괴이한 논이 나오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 입장에서 보면 경들도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
하였다. 지원과 시해가 즉시 나아와 아뢰기를,
"서필원과 정언벽이 감히 괴이한 논을 내어 천청(天聽)을 현혹하여 국시(國是)를 안정되지 못하게 하였는데, 이런 자를 죄주지 않으면 국론을 안정시킬 방법이 없으니, 파직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렇게까지 논하니,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지원과 시해가 또 징과 숙을 속히 방치하도록 명할 것을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일이 대사(大事)인만큼 쉽게 허락할 수는 없다만, 양사가 이렇게 논하고 대신의 뜻도 그러하니, 억지로라도 따라야 하겠다."
하였다.

 

상이 주강(晝講)에 나아가 《서전》 미자편을 강하였다. 강이 끝나자 검토관 김시진(金始振)이 아뢰기를,
"정자(程子)나 주자(朱子)같은 현인도 끝내 시대를 만나지 못했으니, 이것이야말로 천추의 한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임금이 성의를 가지고 구한다면 어찌 현재(賢才)를 얻지 못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현인이 없다고 걱정할 것이 아니라 단지 현인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을 걱정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 나라에서 인재를 등용하는 규정을 보면 전적으로 양전(兩銓)006)  에 그 책임을 맡기고 있는데, 위에 있는 사람은 그 사람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른 채 그저 의망한 차례만 보고 제수할 따름이니, 웃음이 나올 일이다."
하자, 시독관 김좌명(金佐明)이 아뢰기를,
"기(夔)같은 인물이 하나만 있으면 충분합니다.007)   임금이 어느 겨를에 그 인물됨을 두루 보고서 가려 등용하겠습니까. 그 책임은 진정 전형(銓衡)을 맡은 자가 얼마나 공명정대하게 업무를 수행하느냐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하였다. 상이 승지 윤강에게 하문하기를,
"서필원 등이 논한 것에 대해 바깥 의논은 어떻게들 생각하는가?"
하니, 윤강이 아뢰기를,
"이징과 이숙을 방치(放置)하기로 한 것이야말로 그들을 보전하는 길이니, 누군들 필원 등이 논한 것을 망령되게 여기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김자점(金自點)과 다른 적(賊)들을 보건대, 자신들이 꼭 죽게 될 줄을 알고 나서도 사실을 자백하지 않았다. 이는 흡사 남쪽의 토적(土賊)들이 죽을 때 입을 열지 않고 오히려 뭔가 기대하는 것이 있는 것처럼 취했던 행동과 같았다. 그러니 이번의 일도 후환이 없으리라고 어떻게 보장하겠는가."
하니, 윤강이 아뢰기를,
"군부(君父)가 말[馬]을 하사했는데도 김자점이 내팽개치고 받지 않았으니, 이것만 보아도 임금을 무시한 일단(一端)을 알 수 있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말을 하사한 뒤에도 끝내 응답이 없기에 내가 이미 괴이하게 여겼다."
하였다. 시진이 아뢰기를,
"서필원 등이 말한 것 때문에 죄를 얻은 것은 실로 아름다운 일이 못 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시비(是非)는 양립(兩立)할 수는 없다."
하였다. 좌명이 아뢰기를,
"시진의 생각은 대체로 그 사람이 언관(言官)의 신분으로 죄를 얻었다고 여겼기 때문에 감히 진달드린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아무리 언관이라 하더라도 그가 일을 논한 시비만을 살펴야 할 것이다. 그저 언관이라는 것만 가지고 논한다면, 혼조 때 폐모론(廢母論)을 주장한 언관들도 언관이라 해서 죄줄 수 없단 말인가."
하고, 또 이르기를,
"지난해 능에 거둥할 때 김세룡(金世龍)이 아무 이유 없이 병을 핑계대고 끝내 어가를 수행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날 밤 세워둔 횃불이 교외로 나가자마자 즉시 꺼졌는데, 한 사나이만 반역을 도모했어도 필시 일이 예측할 수 없게 되었을 것이다. 그때 방백으로 있던 자가 전혀 직무를 수행할 줄 몰라 시동(尸童)처럼 우두커니 서 있기만 하였는데, 뭇 의논들이 모두 유철(兪㯙)을 죄준 것을 지나치다고 하니,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하였다.

 

상이 하교하였다.
"숭선군(崇善君)의 부인을 특별히 섬으로 따라가도록 하라."

 

정원이 이징과 이숙을 강화(江華)에 내보내 안치시킬 때에 인성군(仁城君) 이공(李珙)의 예대로 군사를 보내 호송할 것을 청하니, 답하였다.
"지금 아이들이 가는 길에 그 예를 쓸 필요가 뭐가 있겠는가. 분부하지 말도록 하라."

 

1월 7일 경진

판중추부사 조익(趙翼)이 여러 차례 상소를 올려 고향에 돌아가게 해 줄 것을 청하니, 부드러운 말로 비답하며 윤허하지 않았다.

 

상이 주강에 나아가 《서전》 미자편을 강하였다. 강이 끝나자 상이 특진관 정세규(鄭世規)에게 하문하기를,
"경이 금방 북방에서 체임(遞任)되어 돌아왔는데, 북방의 사정은 어떻던가?"
하니, 세규가 대답하기를,
"북방은 해마다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어떻게 살아 갈 수가 없는데다가 옷감도 없으므로, 추위에 떨며 곤궁하게 지내는 백성들이 자식을 낳으면 기를 수가 없어 버리는 자도 있습니다."
하자, 상이 측은하게 여겨 승지에게 이르기를,
"북방 백성들의 일이 가련하기 그지없다. 묘당으로 하여금 도신(道臣)에게 분부하여 적절히 조처해 구제토록 하라."
하였다. 윤대(輪對)한 무신(武臣) 황헌(黃瀗)이 아뢰기를,
"신이 금방 영남에서 올라 왔는데, 영남에서 적(賊)을 잡을 때 힘쓴 장사(將士)들의 공을 조정에서 끝내 조사하여 조치해 주지 않았으므로, 남방 사람들이 낙심하고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외방의 인정이 이러하니, 해조에 분부하라."
하였다.

 

1월 9일 임오

헌부가 【대사헌 심지원, 장령 이형, 지평 한진.】  아뢰기를,
"역적의 괴수 김자점(金自點)이 오래도록 조정의 권세를 잡아 그 위세가 하늘을 찌를 듯했으므로 화복과 영욕을 내리는 권한이 그의 손아귀 안에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 당시 무신이나 음관(蔭官)으로서 노비처럼 굽실거리며 그 문에 드나든 자들이야 본래 이야기할 것도 못 됩니다만, 이지항(李之恒)·이시만(李時萬)·황감(黃㦿) 같은 무리들까지 모두 명류(名流)로서 자점에게 아부하여 아침 저녁으로 모여서는 그가 지시하는 대로 따르면서도 부끄러워할 줄을 몰랐습니다. 자점이 흉악한 인간이라는 것을 본래 알고 있었을텐데, 도대체 그에게서 취할 만한 것이 뭐가 있기에 그토록 친밀하게 굴었단 말입니까. 그런가 하면 신면(申冕)과 한 몸이 되어 은밀히 모함하는 계책을 꾸밈으로써 하마터면 사류(士類)에 화를 끼칠 뻔하였으니, 이지항·이시만·황감을 모두 중도 부처(中道付處)하소서.
배천 현감(白川縣監) 이해창(李海昌), 좌승지 엄정구(嚴鼎耉)는 모두 자점의 문객(門客)으로서 일찍이 전부(銓部)에 있었는데, 역적 김식(金鉽)을 전랑(銓郞)으로 천거해 진출시키는 일에 있어서 해창이 실질적으로 주도했고, 본조 당상 가운데 【바로 조경(趙絅)이다.】  저지하는 자가 있자 정구가 그를 은근히 설득하였습니다. 두 사람이 자점에게 아첨하고 역적 식을 잘못 천거한 죄를 다스리지 않을 수 없으니, 이해창·엄정구를 모두 관작을 삭탈하고 문외 출송(門外黜送)하소서.
판결사 이한(李)은 사람됨이 무식한데다 음험한 짓을 잘 부렸는데, 자점의 문에 드나들면서 아들과 다름없이 지냈습니다. 또 신면(申冕)과 서로 표리관계를 이루어 부형(父兄)을 속이고 의롭지 못한 짓을 자행하였으니, 중도 부처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이지항 등에 대해서는 세 번째 아뢰니 따랐으나, 이한에 대해서는 여러 번 아뢰었어도 파직만을 허락하였다.

 

상이 하교하였다.
"김세룡(金世龍)의 처가에 내린 노비를 본 아문에 환속시키라."

 

상이 하교하기를,
"세자빈(世子嬪)의 죽책(竹冊)을 흉사인(兇死人)이 【신면(申冕)이 쓴 것이다.】  쓴 것이라 하여 이미 개정한 이상, 이밖에 이 사람이 쓴 책문(冊文)도 그대로 둘 수 없으니 다시 쓰도록 하라."
하였다. 좌의정 김육(金堉)이 아뢰기를,
"신이 일찍이 부묘 도감(祔廟都監)에 있을 때 글을 잘 쓰는 사람을 널리 선발하여 책문을 써서 올렸는데, 이런 망측한 변이 있을 줄이야 어찌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이 사람이 쓴 것을 결코 그대로 둘 수 없으니, 해조로 하여금 도감을 설치하여 고쳐 써서 판각(版刻)하게 한 뒤, 제사를 지내 고하고 보존토록 하소서."
하니, 따랐다.

 

1월 10일 계미

상이 하교하기를,
"역적의 괴수 김자점 등이 궁척(宮戚)과 결탁하고 곤수(閫帥)를 얼러서 안에서 저주를 행하고 밖에서 역모를 획책하여, 혹은 가을로 기일을 잡기도 하고 봄철로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다. 가슴속에 흉모를 품은 채 틈을 살피면서 못하는 짓이 없어서 조금만 잘못되었으면 종묘 사직이 위태로울 뻔했는데, 군신(君臣) 상하는 이런 일을 의심하거나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그런데 다행히도 이영(李暎)과 신호(申壕) 등이 개인적인 정을 돌아보지 않고 충의심을 일으켜 역모를 고발해 준 덕택으로, 죄인을 붙잡고 흉도를 주륙(誅戮)하게 되었다. 이야말로 종묘 사직이 위태롭게 되었다가 다시 안정된 것이니, 어찌 그 공을 기려 후세에까지 드리우는 상전(賞典)을 베풀지 않을 수 있겠는가. 유사로 하여금 영 등을 모두 녹훈(錄勳)하도록 하라."
하니, 정원이 묘당으로 하여금 의논하게 할 것을 청하였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영과 신호는 끝내 죽음을 면치 못하리라는 것을 스스로 알고, 그의 장인 조인필(趙仁弼)이 붙잡힌 뒤에 고발하였습니다. 이는 죽을 상황에서 목숨을 구해 보려는 계책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그 죄를 용서받고 죽음을 면하게 된 것만도 그들 무리에게는 다행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자점 등의 흉모가 환히 드러나 잇따라 법에 처형된 것은 또한 영 등이 도와준 점이 없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지금 벼슬과 상을 후하게 주어 그 공에 보답하는 것은 무방할 듯합니다. 그들을 녹훈해 주는 것은 너무 지나친 일이 될 것 같은데, 이에 대해서는 신들만 불가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여론도 그러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영 등이 죽을 상황에서 목숨을 구하려고 꾀한 것이라 하더라도 이들이 없었던들 경들이 무엇을 근거로 그 역모의 정상을 국문할 수 있었겠는가. 오늘날 여론에 대해서는 내가 실로 이해하지 못하겠다. 도대체 죄를 용서해 주고 죽음을 면케 하는 것으로 그 공을 보답하라는 것인가. 대신(大臣)은 소관(小官)과는 다르니 국가의 대계를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 된다. 여론에 휩쓸려 가벼이 행동하지 말고 원대한 생각으로 뜻을 굳게 정해 속히 거행토록 하라."
하였다.

 

우의정 이시백(李時白)이 상소하여 면직을 청하였는데, 그 대략에,
"신의 집안이 불행히도 역적의 괴수와 혼인 관계를 맺었는데, 난신 적자(亂臣賊子)가 외손 가운데에서 나오기까지 하였으니, 어찌 감히 뻔뻔스럽게 행공(行公)하겠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속히 삭직(削職)을 명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과인의 간절한 심정을 이미 전후에 걸쳐 모두 토로했는데, 경이 불안하게 느끼는 것이 가면 갈수록 더 그러하니, 어쩌면 이렇게도 정의(情意)가 도탑지 못하단 말인가. 대체로 사안(事案)의 중대함에 비추어 생각해 보건대, 경의 겸양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이 속에서 풀어지지 않아 그만둘 수 없기 때문일텐데, 이것이 내가 못내 잊지 못하여 말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이다.
아무리 흉적이 가까운 친족 가운데에서 나왔다 하더라도, 그것은 선견지명으로 유명한 제갈량(諸葛亮)이나 무홍(茂弘)008)   같은 지혜와 생각을 가지고도 미리 알 수 없는 일이다. 그것이 어찌 지혜가 미치지 못하고 충성심이 부족해서 빚어진 일이겠는가. 경과는 아무 상관없는 일이다. 경은 사직하지 말고 속히 나와서 도를 논하여 나의 목이 타는 듯한 기대에 부응하도록 하라."
하고, 승지를 보내 유시(諭示)하였다.

 

헌납 유도삼(柳道三), 정언 조사기(趙嗣基)·오정원(吳挺垣)이 인피(引避)하기를,
"적괴(賊魁)의 흉악은 마음대로 권세를 휘두르던 당시에 이미 드러났으므로 궁벽한 시골 초가에 사는 백성들까지도 모두 절치 부심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거론되고 있는 이 몇 사람들이 어떻게 진신(搢紳)들 사이에서 이런 이름을 얻을 수 있단 말입니까. 오늘 장관이 헌부가 논한 여러 사람을 차례로 거론하면서 전일 불미스럽게 행동한 죄를 바로잡으려고 하였습니다만, 신들이 어떻게 그들이 친밀하게 지냈던 자취에 대해서 알 수 있겠습니까. 신들이 잘 알고 있는 사실을 가지고 말씀드리겠습니다.
황감(黃㦿)은 적괴에 대해서 관계가 몹시 소원한데, 몇 년 동안 우연히 같은 마을에 살아서 면식은 있습니다. 그러나 일찍이 황감이 간장(諫長)으로서 적괴와 함께 연석(筵席)에 등대(登對)하여 집이 법제(法制)를 초과했다고 극력 말했는데, 자리를 파하고 나온 뒤에 적괴가 자기 자신을 두고 한 말이라는 것을 알고는 공공연히 중상 모략하는 계책을 썼으므로 황감이 이사하여 피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이번에 죄를 받아야 할 대상에 섞여 들어갔으므로 물의가 원통하게 여깁니다. 그런데 초안을 작성할 때, 장관도 이에 관한 사항은 제쳐두고 ‘신면(申冕)과 절친하게 지냈다.’는 것으로 황감의 죄안(罪案)을 삼았습니다. 그러나 황감은 신면과 생각이 달라 정의(情意)가 통하지 않았으므로 신면으로부터 수십년 동안이나 씹힘을 당하였습니다.
그리고 엄정구(嚴鼎耉)에 대해서는 역적 김식(金鉽)을 전랑(銓郞)으로 추천한 것을 죄로 삼고 있는데, 그 당시에 여러 차례나 어렵게 여기는 뜻을 견지하였습니다. 고 상신(相臣) 한흥일(韓興一)이 그 실상을 알고 연중(筵中)에서 진달함으로써 다시 조사하라는 명이 내리기까지 하였던 것입니다. 신들의 아는 바가 이와 같았기에 논죄할 때에 감히 구차하게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신들을 체직하소서."
하고, 대사간 이시해(李時楷)가 인피하기를,
"적괴 김자점(金自點)이 하늘을 찌를 듯 위세를 부리자 사람들이 다투어 달려가 아부를 하여 마치 칡넝쿨이 얽히듯 이리저리 결탁해서 뻔질나게 그 문을 드나들었는데, 명관(名官)의 무리들까지 처신을 제대로 하지 못해 그 몸에 오점을 남겼습니다. 그리고 역적 식과 교제하며 밤낮으로 쫓아다니는 등 조정이 날로 혼탁해졌으므로 청의(淸議)가 모두 분하게 여겼습니다. 따라서 자점이 복주(伏誅)되고 난 지금, 과거에 서로 절친하게 지냈던 자들을 역당(逆黨)이라고 할 수는 없을지 몰라도, 그들이야말로 권간(權奸)에 빌붙어 스스로 폭군 걸(桀)을 도와준 결과에 빠졌으니, 어떻게 대로(大路)에 그들의 몸을 용납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도 이 세상에 한 가닥 청론(淸論)이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는 이상 그들을 제거하는 일을 어찌 그만둘 수 있겠습니까.
어제 동료와 본원에서 모두 모여 이지항(李之恒) 등 5인을 아울러 논죄하지 않을 수 없다는 뜻을 완석(完席)에 내놓았더니, 조사기(趙嗣基)와 오정원(吳挺垣)이 황감(黃㦿)과 엄정구(嚴鼎耉)를 극력 구제하여 마지 않았습니다. 이에 신의 생각에 ‘동료와 함께 있는 자리에서는 가능한 한 상의하여 확정해야 한다.’고 여겨서 적용하는 율을 낮출 것을 다시 의논했더니, 사기와 정원이 따를까 말까 망설이는 사이에 유도삼(柳道三)이 말하기를 ‘일단 차율(次律)을 적용하기로 했으니 다시 이견(異見)을 내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애석해하는 뜻이 시종일관 그의 기색에 감돌았으며, 계사를 작성할 즈음에도 단지 삭직(削職)이나 파직에서 끝내려고 하였습니다. 신이 두렵게 여겨야 할 공의(公議) 석상에서 자신의 견해를 완전히 바꿔 구차한 논에 억지로라도 동의한 것은 의리로 볼 때 감히 하지 못할 짓입니다. 신을 체직하소서."
하고, 사간 서상리(徐祥履)가 인피하기를,
"이지항 등을 논죄할 즈음에 황감과 엄정구에 대해서는 2, 3인의 동료가 기필코 율을 낮추려고 하였는가 하면 그들을 빼내려고 하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구제하여 인피까지 하였으니, 신이 어찌 홀로 뻔뻔스럽게 있겠습니까. 신을 체직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유도삼 등이 모두 물러가 물론(物論)을 기다렸다. 헌부가 【대사헌 심지원, 장령 이형, 지평 한진.】  아뢰기를,
"간원이 모두 인혐(引嫌)하고 물러갔습니다. 이지항·이시만·황감·이해창·엄정구 등은 자점에게 아첨하며 빌붙어 스스로 처신을 그르쳤으니, 공의(公議)가 분개하는 것을 막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견해가 아무리 차이가 난다 하더라도 어떻게 이토록 한결같이 공의를 무시하고 사정을 따른단 말입니까. 그들의 죄안(罪案)을 논하건대 경중의 차이가 없는 것은 아니나, 대체로 볼 때 처신을 잘못한 것은 마찬가지라 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황감과 엄정구 두 사람을 뽑아내어 ‘관계가 몹시 소원할 뿐만이 아니어서 조금도 드러낼 만한 죄가 없다.’고까지 하면서 그들을 구원하려고 떠맡고 나서서 무죄로 만들려 하였으니, 공의(公議)로 볼 때 이럴 수는 없는 일입니다. 대각(臺閣)이 일을 논할 때는 공의에 일임해야 하는 만큼 병론(並論)하는 것은 진정 그만둘 수 없는 일입니다. 동료의 의논이 모순된 책임은 자연 질 사람이 있습니다. 대사간 이시해, 사간 서상리는 출사케 하고, 헌납 유도삼, 정언 조사기·오정원은 체차시키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1월 12일 을유

이조 판서 임담(林墰)이 상소하여 면직을 청하니, 허락하고, 심액(沈詻)을 후임자로 삼았다.

 

헌부가 【대사헌 심지원, 장령 이형.】  아뢰기를,
"이영(李暎)과 신호(申壕)가, 만약 조인필(趙仁弼)이 관련된 사실이 역적의 초사(招辭)에 나오기 전에 상변(上變)했다면, 진정 국가에 모든 충성을 다 바쳤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인필이 붙잡힌 뒤에야 그들이 인필의 사위로서 면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그때 비로소 상변했으니, 무슨 기록할 만한 공이 있겠습니까. 녹훈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간원이 【대사간 이시해(李時楷), 사간 서상리(徐祥履).】  아뢰기를,
"호조 판서 이시방은 일찍이 심기원(沈器遠)에게 빌붙어 한통속이 되었는데, 수어사(守禦使)로 나가기를 꺼려 계책을 써서 피하고는 충청 감사로 부임했다가 그대로 머물게 해 줄 것을 계청하기까지 하였습니다. 또 김자점(金自點)에게도 빌붙었는데 그가 방출된 후에 조정을 떠난 것을 애석하게 여겨 혀를 끌끌 차는 소리가 입에서 끊이지 않았으며, 합계하던 날을 당하여 낙흥 부원군(洛興府院君)을 원임(原任)으로 그대로 두는 것이 마땅하다는 설을 여러 사람이 개좌(開坐)한 곳에서 공공연히 발언하였습니다. 이렇게까지 전후에 걸쳐 처신을 잘못했는데도 외람되이 중요한 직책을 맡고 있는데, 전곡 출납에 대한 일도 전혀 모르는데다가 욕심만 가득한 이런 보잘것없는 인간을 어떻게 청명한 조정에 다시 용납할 수 있겠습니까. 멀리 유배보내소서.
이조 참판 최혜길(崔惠吉)은 참판 자리에 오래도록 있으면서 정사(政事)009)  를 잘못한 실수가 많습니다. 지난번 무과의 시관으로 차출되었을 때에는 역적 안철(安澈)의 집 부근에서 놀면서 철의 집으로부터 처음부터 끝까지 얻어 먹었습니다. 그러고는 감히 역적 안철을 장흥 부사(長興府使)에 제수하도록 의망하였다가 뻔뻔스럽게 탑전(榻前)에서 대죄(待罪)하였으니, 일이 놀랍기 그지없습니다. 파직하소서.
조인필(趙仁弼)을 붙잡아 오라는 명이 떨어지자 이영(李暎)과 신호(申壕) 등은 두려운 마음에 간담이 다 떨어졌을 것입니다. 그의 처 경현(敬賢)이 또 저주(詛呪)하는 모의에 가담했고 보면, 단서가 탄로날 경우 똑같이 역적으로 몰릴 것이기 때문에 감히 죽을 상황에서 목숨을 구해 보려는 계책을 내어 어쩔 수 없이 고했던 것입니다. 이를 어찌 녹훈(錄勳)할 수가 있겠습니까. 성명(成命)을 도로 거두소서."
하니, 답하기를,
"고관 명사들이 각자 파벌을 형성하여 사당(私黨)을 세우면 이미 완전한 조정이 못 된다는 것을 내가 진실로 통촉했기 때문에, 지난번 인대(引對)할 때에 간절하게 경계시키고 단속하면서 지나치게들 처리하지 말라고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이시방을 논한 것을 보건대, 그가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 바친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는 무턱대고 멀리 유배보내는 율을 적용하여 반드시 밀어낸 뒤에야 그만두려고 하니, 이것이 도대체 무슨 심보인가. 내가 매우 놀랍고 괴이하게 여긴다. 더구나 고변한 자를 녹훈하는 것이 그대들에게 무슨 손해가 있기에 꼭 저지하고 억제하여 국가의 대계를 방해하려 하는가."
하였다. 최혜길의 일은 여러 차례 아뢰니 따랐고, 영과 신호에 대한 일은 양사가 수개월에 걸쳐 논집(論執)하고서야 비로소 따랐다.

 

형조가 아뢰기를,
"익평위(益平尉) 홍득기(洪得箕)의 궁노(宮奴)가 우금(牛禁)010)  을 범해 놓고도 이를 단속한 관리를 마구 때렸는가 하면, 또 궁노를 이끌고 본조 참의 이척연(李惕然)의 집에 가서 난동을 부렸으니, 이는 예나 지금이나 없던 변고입니다. 궁노를 엄하게 다스려 법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풍조를 징계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난동을 부린 궁노를 색출하여 죄를 다스리라."
하였다.

 

1월 13일 병술

대사간 이시해(李時楷)가 인피하기를,
"아, 지난날 흉적에 관한 일을 어찌 다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까. 권간(權奸)이 국권을 장악하여 위세가 하늘을 찌를 듯할 때, 염치심도 잃어버리고 이익을 탐내 그쪽으로들 달려가 빌붙었습니다. 오염이 될까 자신의 몸을 단속하는 인사를 보면, 혹시라도 자기들의 썩은 쥐고기를 뺏길까 겁내면서011)   자기들을 문제삼을까 두려워한 나머지 스스로 시기하고 의심하는 마음을 내었습니다. 얼음이 숯불과 떨어지고 향초가 악초를 멀리하는 것은 그럴 수 밖에 없는 일로서 이치상 필연적인 귀결이라 할 것입니다.
지금은 적신(賊臣)이 이미 죄를 받았고 조정의 논의가 새롭게 섰습니다. 그러나 봄철이 돌아왔어도 아직 쌀쌀한 것은 음기(陰氣)가 아직 남아 위세를 부리기 때문이요, 가을철 물이 아직 맑지 못한 것은 쌓인 흙탕물의 여파(餘波) 때문이니, 탁류를 흘려 보내고 뜬구름들을 일소하여 태양이 따스히 비추도록 하고 연못이 명경지수처럼 맑도록 해야 마땅한 것입니다.
자점이 위세를 부리며 포악한 짓을 자행할 때 온 나라 사람들이 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곁눈질을 하였습니다만, 추악한 인물들이 그의 문에 달려가는 것은 많이 봤어도 청류(淸流)가 자신의 행적에 오점을 남기는 것은 보지 못했습니다.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시비를 가리지 못하게 한다면 모르지만, 시비를 가리게 하고 군군신신(君君臣臣)012)  의 도리를 알게끔 할진대, 차례대로 제거해 내는 일을 어찌 그만둘 수 있겠습니까.
지위를 얻지 못했을 땐 얻으려고 안달하고 일단 얻고 난 뒤에는 잃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것이 소인들의 일반적인 태도입니다. 그런데도 그런 태도를 보이지 않도록 스스로 감추고 감히 욕심대로 행하지 못하는 것은, 실로 군자에게 벌을 받을까 두려워해서이고 물의가 일어나 죄를 받을까 무서워하기 때문입니다. 악인을 징계하지 않고 선인을 격려하지 않을 경우, 어떻게 선과 악이 구분될 것이며 정숙함과 간특함이 분별되겠습니까. 이렇게 하면서도 국가를 안정시키고 조정을 맑게 할 수 있다면, 요(堯)·순(舜)도 사흉(四凶)을 죄줄 필요가 없었을 것이고 공자(孔子)도 정묘(正卯)를 죽일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이시방은 간흉에 빌붙어 아첨하다가 여론에 버림을 받았으니, 지난 과오야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앞으로의 일은 잘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심기원(沈器遠)에게 빌붙었다가는 또 김자점에게 빌붙어 죽고 못살듯 친밀하게 지내어, 그 사실을 모든 사람이 직접 눈으로 보았습니다. 기름때가 엉겨붙은 그 더러운 육신은 강한(江漢)에 씻어도 다 지울 수 없을 것이니, 지금 그를 거론해 탄핵하여 죄를 바로잡더라도 늦은 일이라 할 것입니다.
신들이 논한 것은 물의를 따른 것이고 물의가 일어난 것은 실상에 근거한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성상께서는 ‘문호를 분할한다.’느니 ‘배척하고서야 그만두려고 한다.’느니 하시면서 ‘그가 나라를 위해 정성을 다 바친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비답을 내리셨으니, 신은 성상의 평가에 대하여 개연(慨然)한 느낌이 없지 않습니다. 대저 나라를 위해 정성을 다 바쳤다고 하는 것은 충신에게나 어울리는 말입니다. 어떻게 충신이 흉적과 취향을 같이 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리고 문호를 분할한다는 분부는 논리에 닿지 않습니다. 심기원과 친했고 보면 그 문호가 무너져 버렸을 것이고 김자점에게 빌붙었고 보면 그 문호가 부서지고 말았을 것인데, 나누려고 한들 나눌 문호가 어디 있을 것이며 가르려고 한들 가를 문호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사(邪)와 정(正)을 구별하는 것을 가리켜 문호를 각각 세운다고 하셨으니, 뭇 사람들이 듣고 수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위대하게 여김을 받아야 할 임금의 말씀이 날랜 수레를 타고도 쫓아갈 수 없을 정도로 가볍게 말했다는 비평을 받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지난번 전석(前席)에서 우러러 옥음(玉音)을 받들었을 때, 신이 아무리 우둔하기 짝이 없다 하더라도 성상께서 의도하시는 바를 어찌 몰랐겠습니까. 그러나 매나 독수리가 참새떼를 쫓는 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공통된 이치입니다. 마찬가지로 죄인을 다스려 조정을 맑고 엄숙하게 하는 것이 오늘날의 급선무이고 보면, 공론이 일어난다고 해서 파급을 염려할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옛사람이 이르기를 ‘조정을 바로잡아 사방을 바로잡는 것이니, 그 사이에 사기(邪氣)가 개입하도록 해서는 안 된다.’ 하였는데, 성상께서는 어찌 이러한 점을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그리고 고변한 자를 녹공(錄功)해서는 안 된다는 뜻은 이미 계사(啓辭) 가운데에서 진달하였습니다만, 이런 무리에게 천금(千金)이나 만호(萬戶)가 돌아간다 한들 신들이 배아플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단지 너무 참람되게 상전(賞典)을 베풀어 정사를 문란시키는 것은 큰 문제이기 때문에 한결같이 공의(公議)에 따라 논열(論列)하며 계속 간쟁했던 것인데, ‘해괴하다.’는 등의 말씀까지 하시면서 도리어 부당한 비답을 내리셨습니다. 이 모두가 신처럼 미미하고 인망이 없는 자가 간원의 직무를 외람되이 수행하면서, 제대로 왕의 마음을 바로잡지 못하고 일을 바르게 처리하지 못한 소치입니다. 신을 체직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물러가 물론을 기다리지 않았다.

 

1월 14일 정해

상이 하교하였다.
"듣건대 이숙(李潚)이 병들었다 하니, 내의(內醫)로 하여금 약을 가지고 가서 치료하게 하라."

 

1월 15일 무자

홍청 병사(洪淸兵使) 구의준(具義俊)이 치계하기를,
"구영(舊營)의 군기(軍器)는 우선 신영(新營)의 무고(武庫) 공사가 끝난 뒤에 운반할 수 있겠지만, 월과미(月課米)013)   6백 30여 석을 한꺼번에 운송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우니, 구영의 인근 고을에 나눠 보내어 회록(會錄)014)  케 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우후(虞候)015)  는 군기를 모두 옮길 때까지 그대로 구영에 머물러 있게 하고 영속(營屬)의 진무(鎭撫) 등은 번(番)을 나눠 교대로 신영에 오게 하고, 노비는 한꺼번에 옮겨 올 경우 폐단이 적지 않을 테니 약간 명씩 번을 나누어 교대로 왕래하게 하되 성중(城中)의 공한지(空閑地)를 나눠 주어 차츰 옮겨와 살게 하는 한편 본주(本州)의 둔전(屯田)을 해변의 사전(私田)과 바꿔 생활할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영속 신선(新選)016)  은 노약자·폐질자·자원해서 포(布)를 납부하는 자 외에는 호보(戶保)017)  를 막론하고 연소한 자들을 가려 뽑아 한 달에 얼마씩 몇 달에 걸쳐 들어와 지키게 하여 늘 연습을 시키면 기예를 이루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비국의 공문을 접하건대, 병영(兵營) 자신이 중영(中營)이 되라고 하였는데, 그럴 경우 중영에 소속된 군사가 멀리 내포(內浦)에 있으므로 위급한 사태가 발생했을 때 필시 제때에 오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좌영(左營)의 군병은 중영에 소속시키고 중영의 군병은 좌영에 소속시킨 뒤, 영장(營將)은 중영에 소속된 내포의 수령으로 겸차(兼差)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묘당으로 하여금 아울러 지휘하게 하소서. 그리고 본주 판관도 해조에 명하여 속히 차송(差送)토록 하소서."
하였는데, 비변사가 복계하기를,
"구영의 군기는 우선 쓸 만한 것들을 취하여 주고(州庫)에 옮겨 보관하는 것이 무방할 듯합니다. 그리고 본주의 노비도 불러내야 할 판인데 영속 이졸(吏卒)들을 어떻게 한꺼번에 이사시킬 수 있겠습니까. 또 월과미는 곧 영(營)의 물품인데, 하필 여러 고을에 분산 배치하여 회록케 하겠습니까. 청주(淸州)도 서울에 바칠 미곡이 있으니 이 편에 구영의 미곡도 배로 운반해 올려 보내도록 하고, 본주의 미곡으로 월과미를 계산해서 채워 주도록 하는 것이 온당하겠습니다.
대개 병사(兵使)와 수사(水使)는 애초에 관공(官供)이 없이 군포(軍布)로 생활해 왔으므로 군졸들이 매우 고달팠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병사를 목사(牧使)와 겸임시켜 자연 관수(官需)가 있게끔 하였으므로 군정(軍情)이 지극히 편하게 여기고 있는데, 수사의 군졸만은 아직도 이런 걱정을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신 김육(金堉)이 일찍이 탑전(榻前)에서 이미 진달하였습니다. 만약 보령 현감(保寧縣監) 권흥익(權興益)을 청주 판관(淸州判官)으로 삼고 수사로 하여금 보령을 다스리게 한다면, 마침 기회를 맞아 마땅하게 변통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영(營)을 나누는 문제는 청주를 중영으로 삼아 우후가 영장(營將)이 되게 하고 그저 영의 명칭만 바꿔 명명하면 옛날 그대로가 될 것이니, 실로 온당함을 얻게 될 것입니다. 이런 뜻을 신임 병사에게 분부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보령을 수영(水營)에 병합하는 것은 변통하는 일에 관계되니, 여러 대신과 다시 의논하여 품처(稟處)하라. 수사로 하여금 백성 다스리는 일을 겸하게 할 경우, 판관 없이도 해낼 수 있겠는가?"
하였다. 비국이 복계하기를,
"보령은 지극히 조그마한 읍이니, 판관이 없더라도 수사가 충분히 아울러 다스릴 수 있습니다. 전에 의논드린 대로 시행하소서."
하니, 따랐다.

 

선원록청(璿源錄廳)이 아뢰기를,
"어첩(御帖)과 선원록에서 역적 조(趙)018)  의 【이징(李澂)과 이숙(李潚)의 어미이다.】  모녀(母女)를 【딸은 김세룡(金世龍)의 처이다.】  삭제하는 일은 일찍이 대신과 의논하여 품정(稟定)했습니다. 그러니 이제 이징과 이숙 형제도 【   역적 강(姜)의【소현 세자(昭顯世子)의 폐빈(廢嬪)이다.】019) 】  아들 이석철(李石鐵) 등의 예 하니, 답하기를, "이들은 바로 선왕의 아들들이니 앞서 말한 일과는 차이가 있다. 더구나 죄를 지은 사실이 없으니, 삭제하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본청이 아뢰기를,
"이징과 이숙 자신들이 범한 죄는 없다 하더라도 일단 추대되었다는 이름을 얻은 이상 그대로 작명을 띠고서 선원록에 수록될 수는 없습니다. 다시 대신에게 의논하소서."
하니, 따랐다. 영의정 정태화(鄭太和), 좌의정 김육(金堉)이 의논드리기를,
"징과 숙은 선왕의 아들들이니, 오늘날 처리하는 도에 있어 한결같이 선조(先朝) 때 이석철(李石鐵) 등의 예에 의거할 수는 없을 듯합니다. 그 작호(爵號)를 삭제하여 이름만 기록하고, 동시에 그 어미가 흉악하게 역모를 도모하다가 죽게 된 이유를 주(註)로 기록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의논대로 하라고 명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왕세자의 가례(嘉禮) 및 토역(討逆)한 두 경사를 합쳐, 모두 서울에 모이게 한 뒤 별시(別試) 초시(初試)를 거행하는 것이 마땅하겠기에, 일찍이 이를 아뢰어 확정했습니다. 그런데 이어 생각건대, 왕세자가 입학하면 으레 별시를 보여 인재를 뽑는 규정이 있으니, 세 경사를 합쳐서 증광 별시(增廣別試)를 거행하는 것이 합당할 듯합니다. 대신의 의견도 모두 이와 같습니다." 하니, 따랐다.

 

우의정 이시백(李時白)이 상소하여 사직하였는데, 그 소의 대략에,
"신은 역적의 외조(外祖)인 이상 이미 태연하게 재직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더구나 지금 신의 아들과 신의 동생이 모두 중한 탄핵을 받고 있으니, 흠집 투성이로 그대로 자리에 있을 수는 결코 없습니다. 파직하시어 끝까지 보전하게 해 주소서."
하니, 부드러운 말로 비답을 내리며 윤허하지 않고, 승지를 보내 타일렀다.

 

1월 16일 기축

비변사가 아뢰기를,
"경기 감사의 계문을 보건대, 통진현(通津縣)의 송도(松島) 어장이 병술년부터 인평 대군(麟坪大君)의 집에 소속되었기 때문에, 본현은 한 군데도 물고기를 잡을 곳이 없다 하니, 참으로 한심하기 그지없습니다. 지금부터는 본현에 도로 소속시키도록 하소서.
가평군(加平郡)은 험한 산골짜기로 이루어져 있는데, 시장(柴場)으로 일컬어지는 곳을 나누어 점유하여 성안(成案)한 곳이 네 군데나 됩니다. 내수사에 소속된 곳이야 가벼이 의논할 수 없다 하더라도 여러 궁가(宮家)에서 입안(立案)한 곳은 모두 혁파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통진은 해변 마을인데 고기잡을 곳이 없다고 하는 이야기는 얼토당토 않은 말이니, 혁파하지 말라. 가평의 시장도 갑자기 혁파하기 어렵다. 본군에 있는 김세룡(金世龍)의 처의 시장은 도로 본군에 소속시키도록 하라."
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차왜(差倭)의 이 서계(書契)를 보건대, 대군(大君)이 【대군은 곧 관백(關伯)이니, 그 나라에서 존칭하는 호이다.】  죽었다는 말은 하지 않고, 그저 ‘대를 이어 즉위하여 선조의 유업을 떨어뜨리지 않았다.’는 등의 말만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접위관(接慰官)과 서로 만나던 날에도 조문에 관한 한 사항은 꺼내지도 않았으니, 우리 쪽에서 먼저 꺼낼 필요는 없습니다. 도주(島主)가 강호(江戶)020)  에서 돌아오기를 기다려 형편을 살핀 뒤 의논하여 처리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묘당에 의논하소서."
하니, 따랐다. 비변사가 복계(覆啓)하기를,
"차왜가 그런 말을 꺼내지 않았다 하더라도, 통역하는 무리로 하여금 조문하고 싶다는 뜻을 차왜에게 언급하게 한 뒤, 그가 답하는 것을 살펴 상의해서 처리하소서."
하니, 따랐다.

 

영의정 정태화, 좌의정 김육이 아뢰기를,
"이러한 때에 탁지(度支)021)  의 장관 자리를 잠시라도 비워 둘 수 없는데, 이시방이 대론(臺論)을 중하게 받고 있으니, 체차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대옥(大獄)이 있고 나면 그 기회를 틈타 과중하게 논하는 일이 꼭 있었다. 그래서 지난번 역적을 국문하던 날에 진정 이렇게 될 것을 염려하면서 대신에게 언급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뒤에 양사를 인대(引對)하던 날에도 간곡하게 경계시키며 단속시켰을 뿐만이 아니었는데, 간원이 나라의 일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감히 개인적으로 반목하는 마음을 내어 억지로 죄명(罪名)을 덮어 씌우면서 멀리 유배보내는 율을 적용하자고까지 하였다. 그러다가 특별히 엄한 분부를 내리자 책임을 메울 의도로 인피하면서도 물러나 물론을 기다리지도 않은 채 그대로 눌러 앉아 잇따라 상소를 하고 있으니, 이것이 무슨 짓인가.
선조(先朝)의 공신이 몇 사람 남지도 않았는데 본 마음을 헤아리지도 않고 이토록 마음대로 치고 때리고 한단 말인가. 만약 이시방을 체직시키면 이는 곧 그를 끊어버리는 것이다. 정계(停啓)하기를 기다려 간곡히 출사(出仕)하도록 권유하여 상하가 한 마음으로 협력해 나라의 일을 처리해 나가도록 하라."
하였다.

 

헌납 홍처대(洪處大)가 인피하기를,
"삼가 대신의 계사에 대한 비답을 보건대, 두려운 마음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이시방이 김자점과 친밀하게 지냈다면 한 번 탄핵을 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율을 적용한 것이 과중한 듯싶었기 때문에 신이 장관과 함께 논하는 글을 고치려 했는데, 율을 감하게 할 수도 없었던 판에 이렇게 성상의 비답을 받고 보니, 낭패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신을 체직하소서."
하고, 대사간 이시해(李時楷)가 인피하기를,
"이시방이 전후에 걸쳐 흉적에게 아첨하며 빌붙었다는 것은 온 나라 사람들이 아는 일로서, 헌부가 논한 여러 사람들에 비해 더욱 심한 점이 있다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죄상에 대해서는 이미 계사 가운데에 진달하였으니 다시 귀찮게 되풀이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금방 대신의 계사에 대한 비답을 삼가 보건대, 두려운 마음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신이 아무리 변변치 못하다 하더라도 어떻게 감히 개인적으로 반목하는 마음을 내어 억지로 죄를 덮어 씌웠겠습니까. 그리고 홍처대가 피혐한 내용을 보건대, 이미 일을 같이 하고서는 물러나 딴소리를 하고 있습니다. 간관의 풍채가 이쯤되면 모두 없어졌다 할 것인데, 이 또한 신의 죄입니다. 신을 체직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홍처대 등이 모두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간원이 【정언 정수(鄭脩).】  아뢰기를,
"홍처대와 이시해가 모두 인혐하고 물러갔습니다. 탄핵하는 일을 그만둘 수 없는 상황에서 서로 상의하여 고치려고 했던 것은 신중히 처리하려는 의도에서였고, 대론(臺論)은 반드시 물의(物議)를 따라야 하는 것이며 물러가 물론을 기다리지 않을 수도 있는 일입니다. 그러니 어찌 엄지(嚴旨)가 내렸다고 해서 경솔하게 대관을 체직시킬 수 있겠습니까. 모두 출사시키소서."
하니, 모두 체차하라고 답하였다.

 

1월 18일 신묘

민응형(閔應亨)을 대사간으로, 이홍연(李弘淵)을 승지로, 김좌명(金佐明)을 사간으로, 윤집(尹鏶)을 헌납으로, 민정중(閔鼎重)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상이 하교하였다.
"고변한 자들에게 녹훈(錄勳)하는 일을 끝내는 거행하게 될텐데 오래도록 상을 내리지 않았으니 일의 모양으로 볼 때 타당하지 않다. 역적의 가옥과 전민(田民)을 그들이 원하는 대로 넉넉히 주도록 하라."

 

상이 주강에 나아가 《서전》 태서(泰誓)편을 강하였다. 강이 끝나자 특진관 이완(李浣)이 아뢰기를,
"안산(安山)에 덕물도(德物島)가 있는데 토질이 비옥하고 지형이 험준합니다. 백성을 모집하고 둔(屯)을 설치하여 강도(江都)의 문호로 삼으소서."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상이 입시한 승지 홍명하(洪命夏)에게 이르기를,
"윤선도(尹善道)는 곧 내가 처음 배울 때의 사부(師傅)이다. 이 사람이 설명을 잘했기 때문에 선왕께서 가상하게 여겨 특별히 3년 동안이나 사부로 있게 하였다. 내가 글자를 깨우친 것은 실로 그 사람이 공들인 덕택이므로, 항상 내가 마음속으로 잊지 못했다. 정조(政曹)로 하여금 자리를 주게 하고, 따로 하유하여 올라오도록 하라."
하였다.

 

1월 20일 계사

상평청(常平廳)이 아뢰기를,
"금년 봄에 조곡(糶穀)022)  을 배정하여 진구(賑救)할 때에 시급히 행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호서(湖西) 각읍은 원곡(元穀)이 많지 않아 잔읍(殘邑)은 1백 석이 채 못 되고 조금 여유있는 읍이라 하더라도 겨우 2, 3백 석 밖에 안 되어서, 빈민들이 관의 조곡을 얻지 못할까 걱정하는 반면, 대읍(大邑)은 1만여 석이나 되고 있습니다. 만약 충주(忠州)의 원곡 2만 2천 석 중에서 2천여 석을 덜어내어 단양(丹陽)·연풍(延豐) 등 7개 읍에 나누어 준 뒤 추수 때에 7개 읍으로 하여금 각자 거두어들이게 하고, 청주(淸州)와 홍주(洪州)도 이 법을 쓰게 할 경우, 1년이 지나지 않아서 아무리 작은 읍이라 하더라도 모두 1천 석 정도는 저축하게 되어, 곤궁한 백성들을 기아에서 구출할 수 있게 될 것이며 나라에 비축된 곡식의 수도 증가할 것입니다. 그리고 대읍에서 덜어낸 곡식 역시 몇 년이 지나지 않아 모곡(耗穀)을 수대로 채워놓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호남에서 조곡을 나누어 줄 때에도 이렇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런 뜻을 양호(兩湖)의 감사에게 분부하소서."
하니, 따랐다. 【좌의정 김육(金堉)이 아뢴 것이다.】

【태백산사고본】 8책 8권 11장 A면【국편영인본】 35책 527면


[註 022] 조곡(糶穀) : 봄에 관에서 백성에게 꾸어주는 곡식.

ⓒ 한국고전번역원

 

우의정 이시백(李時白)이 열한 번째 정사(呈辭)하니, 부드러운 말로 비답하며 윤허하지 않았는데, 비답하는 말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었다.
"청백(淸白)한 그 지조와 충성어린 그 심정은 어찌 나라 사람만 알겠는가. 실로 신명(神明)에게도 보장받을 수 있을 것이다."

 

사간 김좌명(金佐明)이 인피하기를,
"이시방의 일에 대해 지금 연계(連啓)해야 하는데, 신의 의견에는 구차하게 동조할 수 없는 점이 있습니다. 만약 양적(兩賊)023)  과 친밀하게 지냈다는 것으로 시방의 죄안(罪案)을 삼는다면, 그에게 적용할 율이 어찌 단지 삭직(削職)하고 멀리 유배보내는 데 그칠 뿐이겠습니까. 그저 시방이 옛날 춘추 시대 때 조(趙)나라의 염파(廉頗)나 인상여(藺相如)처럼 국가의 위급함을 먼저 생각해서 개인적인 원한을 뒤로 돌리지 못했다는 것으로 죄안을 삼는다면, 그도 필시 할 말이 없게 되어 자복(自服)할 것이고 사람들도 흔쾌하게 여길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를 죄줄 만한 실상을 분명히 하지 않는 상황에서, 감히 다른 의견도 제기하지 못한 채 남을 따라 처신한다는 것은 바른 도로 임금을 섬기는 신하의 의리가 되지 못합니다. 신을 체직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좌명이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간원이 아뢰기를,
"김좌명이 인혐하고 물러갔습니다. 사람의 의견은 각자 다른 법이니, 전일 과격했던 논에 꼭 구차하게 동조할 필요는 없습니다. 김좌명을 출사케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상이 주강에 나아가 《서전》 태서(泰誓)편을 강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지금 금부에서 역적과 연좌(緣坐)된 사람에 대해 올린 서계를 보건대, 역적의 딸로서 출가한 자들은 모두 연좌 대상에서 제외시켜 개록(開錄)한 반면, 역적의 자매들은 출가 여부를 막론하고 모두 연좌시켜 등급별로 기록하였습니다. 신의 망령된 생각으로는 ‘딸과 자매가 모두 지친(至親)이긴 하지만 혈육과 동기간은 차이가 있을 듯한데, 자매에 대해 적용한 율이 오히려 딸보다 무겁다는 것은 정리로 보나 법으로 볼 때 그렇게 해서는 안 될 듯하다.’고 여깁니다.
그리고 《대명률(大明律)》을 상고해 보건대 ‘대역(大逆) 죄인은 그 모녀·처첩·조손·형제·자매 및 그 자(子)의 처·첩을 공신(功臣)의 집에 주어 노비로 삼는다.’ 하고, 또 ‘만약 여(女)의 허가(許嫁)가 이미 정해졌으면 그 부(夫)에게 돌려 보낸다.’ 하였는데, 여기서 말하는 여(女)는 혹시 자매를 통틀어 일컫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만, 역시 해명이 되지 않은 상태여서 법을 집행하는 자로서는 본래 변통하기가 어렵겠습니다. 그러나 선왕조에서 이미 시행한 일을 가지고 보건대, 승복(承服)한 역적의 자매로서 출가한 자가 연좌율을 적용받았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역적의 연좌에 대한 것이야말로 국가의 막중한 율에 관계되는 것인만큼, 해부(該府)로 하여금 대신에게 의논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나도 이 점을 염려했다. 본부의 복계(覆啓)를 보고 나서 처리하겠다."
하였다.

 

의금부가 아뢰기를,
"역적의 연좌인에 대해 경조(京兆)가 보고해 온 것을 가지고 그 율문(律文)을 상세히 조사하여, 역적의 부·자로서 이미 교수형에 처해진 자와 도망하여 아직 교수형에 처해지지 아니한 자, 역적의 아들 가운데 16세가 되지 않은 자로서 노비로 정배될 자와 나이가 4세로서 노비가 될 자, 역적의 삼촌인 숙질 등으로써 유 삼천리(流三千里)에 안치(安置)시킬 자, 모녀·처첩·조손·형제·자매 그리고 아들의 처첩 및 아직 시집 안 간 여자로서 노비가 될 자, 나이 60이 넘은 여인으로서 연좌에서 제외될 자, 여자가 출가하여 연좌에서 제외될 자 등을 일일이 구별하고 등급을 나누어 개록(開錄)해서 아룁니다. 그런데 노비가 되어야 할 자 중에 시골에 있거나 도망쳐서 이름이나 나이를 알지 못하는 자가 있는데, 이것은 각 고을에서 조사해 보고해 오는 것을 기다려 등급을 나눈 가운데 기록하겠습니다.
변사기(邊士紀)의 아들의 첩은 바로 공천(公賤)이기 때문에 그대로 구역(舊役)에 복무하도록 하였습니다. 사기의 아들 및 동생은 체포하라는 뜻을 또한 전국에 이미 하유하였습니다만, 앵무(鸚鵡)의 아들로서 교수형의 율에 해당되는 자가 역시 자기 처와 도피 중이니 각도로 하여금 수색해서 체포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이 밖에 연좌에 해당되는 자로서 외방에 있는 자는 각도의 조사 보고서를 기다려 율대로 처리하기를 청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역적 기진흥(奇震興)은 친자(親子)나 양자가 모두 없는가? 조성로(趙星老)의 여동생 조경현(趙敬賢)은 이미 출가했는데, 어째서 노비가 될 대상으로 기록하였는가?"
하였다. 의금부가 복계하기를,
"진흥에게 자녀가 없었고 또 양자도 없는 것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모두 인정하고 있습니다. 경현의 일에 있어서는, 경현 한 사람 뿐만이 아니라 경현의 언니인 조일례(趙一禮)가 바로 신호(申壕)의 처입니다. 이 외에 여러 역적의 자매로서 이미 출가한 자가 한두 사람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런데 율문을 상고해 보건대 ‘모녀와 자매는 공신의 집에 주어 노비로 삼는다.’고 한 그 아래 대목에 ‘여(女)의 허가(許嫁)가 이미 정해졌으면 그 부(夫)에게 돌려 보내고 소급하여 연좌시키지 않는다.’는 글만 있을 뿐, 자매에 대해서는 출가 여부를 거론하지 않고 있습니다. 자매에게 적용하는 율이 오히려 딸자식보다 중하다는 것은 정리로 보나 법으로 볼 때 그럴 리가 없을 듯한데, 신들도 율문의 본의를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신들은 유사(有司)이니만큼 율문 외에 감히 변통하지 못하겠기에, 여러 역적의 자매로서 출가한 자들도 모두 율문에 의거하여 노비로 삼는 등급에 기록한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자매에게 적용하는 율이 오히려 딸보다 중하다니, 필시 그럴 리가 없다. 율문에서 말하는 여(女)라는 것은 넓은 의미의 여인을 일컫는 것이 아닌가? 정원의 계사대로 처리하라."
하였다. 좌의정 김육이 의논드리기를,
"율문의 본의에 대해서는 자세히 모르겠습니다만, 옛 말에 ‘예(禮)는 인정에 따르는 것이다.’ 하였으니, 율문 역시 인정을 벗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참으로 성상의 분부와 같이 자매에게 적용하는 율이 도리어 딸보다 중할 리는 반드시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성인께서 예(禮)와 율을 제정하신 본의도 이렇지는 않을 듯합니다만, 신의 입장에서는 감히 억지로 억견(臆見)을 내어 실정 밖의 이치를 구하지는 못하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대신의 의견을 들어 보아도 그 말이 명쾌하지 않다. 선조(先朝)에서 역적을 국문한 뒤에 그들을 연좌했는지의 여부를 상세히 상고하여 아뢰라."
하였다. 금부가 복계하기를,
"선조에서는 역적의 자매로서 출가한 자에게 연좌율을 적용한 예가 없었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근거해야 할 선조의 예가 이미 이러하니, 역적의 자매로서 출가한 자는 모두 연좌시키지 말라."
하였다.

 

1월 21일 갑오

영의정 정태화(鄭太和)가 휴가를 얻어 수원(水原)에 있는 아비 묘소를 성묘하게 해 줄 것을 청하니, 말[馬]을 지급하도록 명하고 본도로 하여금 식물(食物)을 넉넉히 주도록 하였다.

 

상이 주강에 나아가 《서전》 태서(泰誓)편을 강하였다. 강이 끝나자, 지경연 이후원(李厚源)이 아뢰기를,
"이회보(李回寶)는 사람됨이 단정하다고까지는 할 수 없으나 재차 상소하여 김자점의 죄를 과감히 말하였으니, 이런 사람은 지금 거두어 써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옳다."
하였다. 후원이 아뢰기를,
"이상진(李尙眞)도 신면(申冕)을 논핵했던 사람입니다. 그 당시 민응형(閔應亨)의 피사(避辭)로 말미암아 외직에 보임되기는 하였지만, 지금은 역시 불러다 써야 할 것입니다. 신면이 착한 무리를 모함하려 했던 사실을 그 누군들 몰랐겠습니까. 그런데도 민응형이 늙어 혼미한 나머지 남의 말만 듣고는 그만 피사 가운데에 ‘자기들끼리 분열되었다.’는 말을 하였으니, 또한 이상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만약 신면의 뜻대로 되었더라면 회보나 상진 같은 이는 필시 화를 면치 못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변사기(邊士紀)가 수원(水原)에 잉임(仍任)되자 홍무적(洪茂績)과 임의백(任義伯)이 역시 그 일을 논했는데, 그 당시 사람들이 혹 고변 대간(告變臺諫)이라고까지 일컬었으니, 의백 또한 불러다 써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홍무적의 말은 진심에서 우러나온 듯하다."
하였다. 강을 마치고, 제사(諸司)의 윤대관(輪對官)을 불러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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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찬 민정중(閔鼎重)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국운이 불행하여 역신(逆臣)이라는 싹이 돋아나왔는데, 다행히도 종묘 사직의 위령(威靈)을 힘입어 죄인을 붙잡아 정형(正刑)에 처하였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국가의 형세는 비유컨대 큰 종기가 터져 나와 기혈(氣血)이 탈진된 상태와 같다 할 것인데, 오늘날의 계책으로는 무엇보다도 훌륭한 인재를 수습하여 공론을 배양해야 하리라고 여깁니다. 그런데 이른바 수습하고 배양한다는 것은 전하께서 한 번 조치하기만 하면 되는 일일 뿐입니다.
과거에 송시열(宋時烈) 등이 마침 크게 잘못된 사세를 만나 낭패만 당하고 떠났는데, 그 뒤로 나랏일이 더욱 지리멸렬되기만 하였습니다. 신은 전하께서 이 사람들을 초치하여 좌우에 두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심대부와 유계 등이 이미 망언했다는 이유로 견책을 받았습니다만, 신 나름대로 생각하건대 대부 등은 그저 충의심을 다 발휘하여 신하된 직분을 극진히 수행하려고 했던 것에 불과했을 뿐입니다. 전하께서는 그 사람됨을 이해하시어 그들의 본심을 헤아려 주셔야 할 것입니다. 또 조석윤(趙錫胤)의 실수는 애당초 고의적으로 저질렀던 것이 아니고, 이경억(李慶億)이 소박하게도 직선적으로만 행동한 것 또한 사의(私意)가 개재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모두 엄한 견책을 받았으니, 이 또한 성조(聖朝)의 선비 대접하는 도리가 아닙니다. 그리고 서필원(徐必遠)과 정언벽(丁彦璧)의 논이 보전해 주려는 조정의 본뜻을 모른 것이기는 하지만, 역시 마음속에 있는 생각은 반드시 임금에게 아뢴다는 의리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살펴 가려 주소서."
하니, 답하기를,
"상소의 내용은 잘 알았다."
하였다.

 

1월 22일 을미

달이 심대성(心大星)을 침범하였다.

 

1월 23일 병신

정세규(鄭世規)를 이조 판서로, 이후원(李厚源)을 호조 판서로, 윤순지(尹順之)를 대사헌으로, 심지원(沈之源)을 병조 참판으로, 박길응(朴吉應)을 집의로, 조속(趙涑)을 장령으로, 박승건(朴承健)을 정언으로 삼았다.

 

상이 대신 및 비국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좌의정 김육(金堉)이 아뢰기를,
"이시방(李時昉)에게 멀리 유배보내는 율을 적용하자는 것은 참으로 지나쳤습니다. 지난번에 송준길(宋浚吉) 등이 김자점(金自點) 및 원두표(元斗杓)의 집에 친밀하게 빌붙었던 사람들을 논했는데, 이시해(李時楷)는 논박을 받은 인물 중에 포함되었으니 이번의 논을 주장할 수는 없을 듯합니다. 그런데 그가 감히 성상께서 분부하신 이른바 ‘진신(搢紳) 명류(名流)들이 문호를 분할했다.’는 것을 가지고 심기원(沈器遠)과 김자점 양 역적의 문호를 가리키는 것으로 치부하였으니, 이야말로 군부(君父)를 농락한 것으로서 어찌 난정 대부(亂政大夫)024)  라고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중률(重律)로 다스려 그 죄를 징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염파(廉頗)나 인상여(藺相如)의 일이야 본래 그에게 바랄 수 없다 하더라도 구순(寇恂)과 가복(賈復)의 일025)  마저도 염두에 두지 않다니, 도대체 이것이 무슨 심보란 말입니까. 이런 종류의 사람들은 안에 있게 할 수 없기 때문에 지난번 이기조(李基祚)를 외방에 보임시킬 때에도 신이 진달드렸습니다만, 지금 이런 무리도 축출하여 진정시키는 하나의 방법으로 삼아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른바 낙당(洛黨)이라고 하는 사람들 중에 남아 있는 자가 거의 없는데, 저들 무리가 시기를 틈타서 반드시 제거해버린 뒤에야 그만두려고 합니다. 그 역시 ‘차례로 솎아내어 다스리겠다.’고 말하였는데, 만약 이시해의 죄를 다스리지 않는다면 조정이 장차 편안할 날이 없게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말한 ‘문호를 분할했다.’는 것에 대해, 그는 ‘날랜 수레를 타고도 쫓아갈 수 없을 정도로 가볍게 말했다.’고 비평하였다. 나는 이 말이 과연 망발인지 예전엔 미처 몰랐다."
하였다. 김육이 아뢰기를,
"신은 이런 말을 하면 화가 뒤따른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만, 진정 국가에 이로움이 되는 일일진대 어떻게 감히 신의 몸만 돌아보고 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원두표와 이시방은 모두 외직에 보임해야 할 것인데, 원두표는 먼저 송도 유수(松都留守)에 제수하고, 이시방은 우선 정론(停論)이 되기를 기다려 외직에 보임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시해는 변방으로 유배보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좌·우에게 하문하기를,
"각자 소견을 말하라."
하였다. 좌우에서 한 사람도 분명히 말하는 자가 없자, 상이 이르기를,
"좌상은 자기 몸을 돌아보지 않고 가슴속의 생각을 모두 진달하니 내가 매우 가상하게 여긴다. 그런데 여러 경들은 다른 사람이 이미 발론(發論)했는데도 모두 망설이기만 하면서 명확히 말하려 하지 않으니, 내가 매우 못마땅하게 여긴다."
하였다. 김육이 아뢰기를,
"시해가 한 일은 실로 임금을 농락한 일에 관계됩니다. 그저 자기의 당파만 세울 줄 알았지 군부가 있다는 것은 모르고 있으니, 아무리 대간이라는 명분이 있다 하더라도 중률(重律)을 적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속담에 ‘양 손에 떡을 쥐었다.’라는 말이 있는데, 원두표와 이시방 모두 중신인만큼 이번 일에 있어서 나의 처지야말로 양 손에 떡을 쥔 격과 정말로 같다 하겠다."
하였다. 김육이 아뢰기를,
"탁지(度支)를 담당하는 자리는 하루도 비워둘 수 없는데, 시방이 이미 중론(重論)을 받고 있는 이상 그대로 직책을 수행할 수는 없으니, 속히 체차하여 바꾸도록 명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당초 체차를 허락하지 않았던 의도가 실로 있었으나, 참으로 경의 말처럼 탁지의 자리를 오래 비워둘 수는 없으니, 우선 체차하도록 하라. 이시해의 일에 대해서는 뭇 의논들이 모두 그르게 여기고 있는데, 대신의 말이 또 이러하니, 우선 증도 부처(中道付處)하라."
하였다.

 

상이 주강에 나아가 《서전》 태서편을 강하였다. 강이 끝나자 시독관 채충원(蔡忠元)이 아뢰기를,
"이시해를 논죄한 일은 조정하는 방법이 못 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미 정해진 논이니, 고칠 수 없다."
하였다. 검토관 김시진(金始振)이 아뢰기를,
"불가하다는 것을 알았다면, 어찌 이미 정해진 논이라고 하여 고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각(臺閣)의 직책을 수행하면서 그 논한 것이 공정치 못했다면, 어찌 벌이 없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의금부가 아뢰기를,
"역적에 연좌된 사람들을 개록(開錄)하여 아룁니다. 노비가 될 자들은 해원(該院)026)  으로 하여금 처리하도록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역적의 아들 가운데 나이가 아직 차지 않아 교수형을 면하고 노비로 정배된 자들 및 역적의 삼촌 숙질로서 유 삼천리(流三千里)에 안치(安置)될 자들은 그 배소(配所)를 정해서 아룁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변사기(邊士紀)의 아들 변철추(邊鐵椎)·변철장(邊鐵章) 및 안철(安澈)의 조카인 안흥문(安興文) 등은 함경 감사·황해 감사로 하여금 붙잡아 치계하게 한 뒤에 율대로 정배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역적 김식(金鉽) 부자가 집에 수만 금(金)을 쌓아놓았다는 것은 온 나라 사람들이 아는 일인데, 하나도 관가에서 몰수해 들인 것이 없으니, 참으로 놀랍기 그지없다. 재화와 보물만 쌓느라고 본분을 잃는 것이야말로 악인의 일반적 태도인데, 더구나 이런 흉적의 여얼(餘孽)들이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김자점의 첩 및 식의 처를 특별히 먼 변방에 안치토록 하라."
하였다.

 

1월 24일 정유

상이 주강에 나아가 《서전》 태서편을 강하였다. 강이 끝나자 지경연 박서가 아뢰기를,
"근래 유배된 사람 가운데, 유거(柳椐)는 현재 적소(謫所)에서 모친상을 당하였으니 사정이 매우 측은하고, 조수익(趙壽益)·유철(兪㯙)·이경억(李慶億)도 모두 노친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조수익은 당초 국문에 참여하는 일을 꺼려 피하다가 유배까지 당했으니 지극히 원통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유거의 사정은 정말로 측은하기 그지없고, 조수익은 일찍이 시종(侍從)의 반열에 있던 사람으로서 여론이 모두 원통하게 여기고 있으니, 모두 먼저 석방하도록 하라."
하였다. 시독관 홍명하(洪命夏)가 아뢰기를,
"이시해를 논죄한 일은 아무리 진정시키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라 할지라도, 신은 진정시키는 일이 더욱 어려워지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시해가 논계할 때 어휘를 구사한 것이 참으로 지나친 것이긴 합니다만, 형적(形迹)이 혐의쩍다고 하여 갑자기 증도 부처(中道付處)하는 율을 적용하기까지 한 것은 너무도 지나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찌 어휘 구사에만 잘못이 있겠는가. 모두들 대간을 죄주는 것은 잘못이라고 하는데, 내 생각에는 대간의 직책에 있는 신분으로서 사적인 의도를 개입시키는 것이야말로 그 죄가 중하다고 여긴다."
하였다. 명하가 아뢰기를,
"일찍이 선조(先朝) 때에 유백증(兪伯曾)과 민응형(閔應亨)이 탑전(榻前)에서 김류와 이경증(李景曾)을 탄핵하였는데, 하나는 대신이고 하나는 중신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을 한꺼번에 싸잡아 논하였으니, 어찌 놀랄 일이 아니었겠습니까. 그런데도 선왕께서는 역시 죄를 주지 않으시고 좌우에 자문을 구하셨는데, 대신 이하 사람도 감히 말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그 뒤에 특별히 민응형을 순천 부사(順天府使)로 내려 보냈습니다. 이번에 이시해가 처벌된 것은 정말로 과중한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런 식으로 논하지 말라. 그와 같이 한다면 끝내 시비가 정해질 날이 없을 것이다."
하였다.

 

1월 25일 무술

정언 박승건(朴承健)이 인피(引避)하기를,
"이시해를 증도 부처하도록 명하신 것은 실로 진정시키는 방법이 아니기에, 신이 명을 환수하시도록 아뢰자고 동료에게 의논하였으나 끝내 의견이 통일되지 못하였습니다. 이것은 신의 말이 존중되지 못한 소치이니, 신을 체직하소서."
하고, 정언 심유행(沈儒行)이 인피하기를,
"동료가 이시해를 증도 부처시킨 명을 환수시키도록 하자는 뜻으로 논계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신의 생각에는 ‘대신이 진달한 것과 성상께서 특별히 명하신 것이 모두 조정하려는 뜻에서 나온 것인만큼 다시 이를 제기하여 논계하는 것은 불가할 듯하다.’고 여겼기에, 신이 감히 다른 사람이 하는 대로 구차하게 동조하지 않았는데, 이미 동료의 배척을 받았으니, 신을 체직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승건 등이 모두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간원이 아뢰기를,
"정언 박승건과 심유행이 모두 인혐하고 물러갔습니다. 과중하게 죄를 주어서는 안 된다는 의견은 그 뜻이 진정시키려는 데 있고, 환수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은 가능한 한 상확(商確)하려고 한 것이니, 체직할 만한 잘못이 뭐가 있겠습니까. 모두 출사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좌의정 김육(金堉)이 아뢰기를,
"신이 인대(引對)하던 날, 당론(黨論)이 너무 치성하여 조정이 분열되는 것을 진심으로 염려한 나머지 ‘이시해가 피혐한 계사(啓辭)를 보건대, 말을 뒤집으며 제멋대로 어휘를 구사하였는데, 직절(直截)하면서도 부드럽게 순종하는 태도는 보이지 않고 성상의 분부를 조롱하는 뜻이 엿보인다. 임금을 섬기는 신하의 도리로 볼 때 어찌 감히 이럴 수 있는가. 또 「차례로 솎아내어 다스리겠다.」고 하여 위협하면서 자기 당파를 수립할 계책을 세움으로써 조정에 있는 인사들로 하여금 각자 위기의식을 느끼게 하였다. 이자야말로 거리낌없이 화를 만들어내기 좋아하는 난정 대부(亂政大夫)라 할 것이니, 먼 지역으로 축출해 보내지 않으면 안 된다.’고 여겼기에, 간절하게 진달드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입시한 주서(注書)가 일을 기록하는 가운데 그 내용은 모두 빼버리고 간략하게 몇 구절만 써 내서 책임을 메꾸었기 때문에, 보고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이시해의 죄상을 알지 못하게 하였으니, 참으로 부당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리고 해서(海西)와 관동(關東) 지방도 중도(中道)인데, 정배된 사람들이 모두 호서(湖西)로 몰렸기 때문에 호서의 백성들만 그 피해를 받고 있으니, 사정(事情)을 좇느라 공도(公道)를 무시한 뜻을 더욱 알 수가 있습니다. 이러고서야 무슨 수로 기강이 확립될 것이며, 어떻게 죄지은 자를 징계할 수 있겠습니까. 주서와 금부 당상을 모두 추고하소서."
하니, 따랐다.

 

상이 주강에 나아가 《서전》 태서편을 강하였다.

 

1월 26일 기해

금부가 아뢰기를,
"호서에 정배한 죄인 14명을 하교하신 대로 황해와 강원 양도에 이배(移配)하였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최극령(崔克寧)·유여해(兪汝諧) 등은, 여러 역적의 초사(招辭)를 보건대 이두일(李斗一)이 지난해 가을로 군사행동 시기를 잡았다는 주장이 있었고 보면 김세룡(金世龍)이 병을 핑계대고 어가(御駕)를 수행하지 않았던 그 상황이야말로 일촉즉발의 위기였다고 할 것인데도, 깜깜한 밤중에 불켜는 관원 하나 준비시키지 않았다. 어찌 심상하게 논죄할 수 있겠는가. 북쪽 변방에 이배하여 유철과 함께 3년의 기한을 채우도록 함으로써 형편없이 행동하는 신하의 본보기가 되도록 하라."
하였다.

 

1월 28일 신축

심액(沈詻)을 우참찬으로, 구인후(具仁垕)를 판의금으로, 서상리(徐祥履)를 승지로, 이석(李晳)을 보덕으로, 김좌명(金佐明)을 응교로, 유준창(柳俊昌)을 장령으로 삼았다.

 

상이 하교하기를,
"홍무적(洪茂績)과 임의백(任義伯) 등은 일찍이 대간으로서 선견지명이 있었으니, 지극히 가상하다. 홍무적은 공조 판서를, 임의백은 사간을 제수하라. 이회보(李回寶)는 소원한 신하로서 번거롭게 구는 자가 되는 것을 피하지 않고 누차 충성스러운 뜻으로 간절히 진달하여 마지않았으니, 나라를 위하는 그의 정상과 선견지명이 모두 가상하기 그지없다. 사복시 정을 제수하라. 의흥 현감(義興縣監) 이상진(李尙眞)은 사서(司書)를 제수하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원두표(元斗杓)는 개성 유수(開城留守)를 제수하라."
하였다.

 

삭주 부사(朔州府使) 홍우익(洪宇翼), 초계 군수(草溪郡守) 허도(許道), 옥과 현감(玉果縣監) 신혼(申混)이 사조(辭朝)하니, 면유(面諭)하여 보냈다.

 

상이 주강에 나아가 《서전》 태서편을 강하였다.

 

상이 하교하였다.
"이렇듯 일이 많은 날에 영상이 오래도록 외방에 있으니, 속히 조정으로 돌아오도록 특별히 사관을 보내 유시하라."

 

병조가 아뢰기를,
"시위(侍衛)하는 장사(將士)와 훈국(訓局)의 장관(將官)들을 대상으로 매월 활쏘기 시합을 벌이도록 한 그 뜻은 평범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중(中)의 점수에 미달되는 자는 도태시키면서 수석을 차지한 자에게는 유독 상이 없으니, 권장하는 도리에 미흡합니다. 매월 수석을 차지한 자에게 일일이 푸짐한 상을 내리지는 못하더라도 궁전(弓箭)이나 옷감을 하사하여 격려하는 뜻을 보이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새로운 규정인만큼 묘당으로 하여금 참작하여 처리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비변사가 복계(覆啓)하기를,
"해조에서 아뢴 것이 실로 일리가 있습니다. 앞으로 수석을 차지한 사람에게는 특별히 여정포(餘丁布) 【여정포는 비국에서 관장하였다.】  5단(端)을 하사하여 격려하도록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면포(綿布)로 상을 주는 것은 일의 모양으로 볼 경우 마땅치 않으니, 말을 하사하도록 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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