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일 갑진
이일상(李一相)을 대사간으로, 원두표(元斗杓)를 형조 판서로 삼았다.
국청이, 죄인 예일(禮一)에게 실정을 알면서도 고하지 않은 율을 적용하였는데, 상이, 예일은 이미 역모에 참여하였으니 율을 적용한 것이 마땅치 않다고 하면서 특별히 엄한 전교를 내렸다. 대사헌 심지원(沈之源)과 헌납 홍중보(洪重普)가 의계할 때에 굳게 고집하지 못하였다는 이유로 인피하니, 모두 체직하였다.
홍문관이 또 차자를 올려 먼저 귀인 조씨의 작호를 삭탈할 것을 청하니, 답하였다.
"자전께서도 차마 하지 못할 바가 있기 때문에 감히 가벼이 허락하지 못하는 것이다."
영중추부사 이경여(李敬輿), 영의정 김육, 좌의정 이시백(李時白) 등이 차자를 올리기를,
"국가가 불행하여 전에 없던 불측한 변고가 가까이 선조(先朝)의 후궁 가운데서 나왔습니다. 다행히 종사(宗社)를 묵묵히 도우는 조종들과 하늘의 도움을 받아 죄인을 잡아내어 여러 역적들을 죄주었습니다. 그러나 죄를 줌에 있어서 미진한 점이 있습니다. 삼사의 올바른 논계를 속히 따라서 나라 사람들의 마음을 흔쾌하게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들이 왕부(王府)의 명을 받았으니, 임무가 국문하여 다스리는 데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작호를 삭제하고 죄를 의논하는 것은 차례 차례 행해야 할 일이기에 감히 이렇게 진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침전에서 가까운 곳에 흉한 물건을 파묻었다는 요무(妖巫)의 말이 몹시 흉악하고 참혹합니다. 이미 이런 말을 들었으니 어찌 잠시라도 그대로 임어하실 수 있겠습니까. 다른 전(殿)으로 옮기고 공조에 명해서 묵은 흙을 깎아내어 흉한 기운을 제거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언 땅을 깎아낼 수 없을 것이니 우선은 내년 봄이 되기를 기다리라."
하였다.
상이 하교하였다.
"요즈음 국청의 일을 보건대, 소루한 잘못이 많이 있으니 이는 반드시 판의금이 연로하여 살피지 못한 탓일 것이다. 체차하라."
12월 2일 을사
원두표를 판의금부사로, 이후원(李厚源)을 대사헌으로, 조한영(曺漢英)을 헌납으로 삼았다.
양사가 합계하기를,
"귀인 조씨는 선조(先朝)의 후궁으로서 성상께서 곡진히 감싸주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런데도 악함을 고쳐 우러러 성상의 덕에 보답할 것은 생각하지 않고 더욱 더 흉독을 부려 스스로 성상을 끊었습니다. 이에 온 집안의 아래 위가 모두 역적의 소굴이 되었으니, 생각건대 간사하고 흉측한 마음을 품은 것이 하루 이틀이 아닐 것입니다. 그리고 저주하는 물건을 파묻고 흩뿌리는 즈음에, 꾀이고 사주한 정상과 결탁하여 비밀을 감춘 일이, 전후 죄인들의 공초에 낭자합니다. 여러 역적들은 이미 국법을 받아 처형되었는데도 주모자는 지금도 오히려 편안히 누워 있어서 물정이 더욱 격렬해지고 중외 사람들이 분해하고 있습니다.
어제 대신들이 차자를 올리면서 차례차례 시행해야 한다고 한 말은, 실로 종사와 자전을 위한 계책에서 나온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마땅히 죄를 내리기에 겨를이 없어야 할 것이며, 또한 어찌 자기 마음대로 처리할 수가 있겠습니까. 왕법은 지엄한 것이고 여러 사람의 노여움은 막기 어려운 것입니다. 속히 귀인 조씨를 법을 적용하여 처치하라는 명을 내려 종사와 신민들의 분노를 씻어 주소서."
하니, 답하기를,
"국가가 불행하여 변고가 지친(至親)에게서 나왔으니, 이것은 모두가 나의 죄이다. 몹시도 부끄러워 신민들 앞에 얼굴을 들고 설 수가 없다. 매번 들어가서 자전을 모실 때마다 정성스럽고 간절한 전교가 말뜻 밖에서 피어오르니, 너희들도 반드시 감동할 것이다. 굳이 고집하지 말라."
하였다.
양사가 대신의 말대로 다른 전(殿)으로 옮길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12월 3일 병오
양사가 합계하기를,
"효명 옹주(孝明翁主)가 흉악한 짓을 행한 실상이 이미 여러 역적들이 승복한 공사에서 나왔습니다. 신들은 이말을 들은 이래로 모골이 섬뜩하였습니다. 난신 적자(亂臣賊子)가 어느 시대인들 없었겠습니까마는, 어찌 지금과 같이 흉악하고 참혹한 경우가 있었겠습니까. 일이 종사와 자전에 관계되니, 전하께서 어찌 사사로운 은혜로 대의를 가릴 수 있겠습니까.
낙성위(洛城尉) 김세룡(金世龍)은, 그의 처가 흉악한 짓을 행한 실상을 단연코 몰랐을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지금 편안하게 집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왕법은 지엄한 것이고 천토(天討)는 속히 내려야 하는 것입니다. 효명 옹주는 법을 적용하여 처치하고, 김세룡은 잡아다 국문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고 단지 김세룡을 잡아다 국문하는 것만 허락하였다.
12월 6일 기유
홍문관이 차자를 올리기를,
"지금 이 흉역(凶逆)의 변고는 사책(史冊)에도 드물게 실린 바인데, 주모자가 오히려 목숨을 부지하고 있습니다. 고금 천하에 어찌 이런 이치가 있겠습니까. 국법은 지엄한 것으로 법을 어겨서는 안 되며, 종사는 지극히 중한 것으로 사사로운 은혜를 돌아보아서도 안 됩니다. 대각의 신하들이 복합하였으며, 여론이 더욱 결렬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상께서 들어주시지 않으니 물정이 답답해 합니다. 어찌 전하께서는 법은 굽힐 수 있고 은혜는 펼 수 있다고 여기십니까.
무릇 법이란 것은 조종 만세의 상전(常典)인 것으로, 아낀다고 해서 조금도 가볍게 할 수 없는 것이며, 미워한다고 해서 전혀 중하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 일신의 사사로운 은혜로서 조종 만세의 상전을 폐하여서 떳떳한 윤리가 끊어지고 종묘 사직이 위태롭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아, 한집안의 아래 위 사람들이 합심해서 흉악하고 부도한 짓을 하여, 대내의 엄밀한 지역에 한 조각도 정결한 곳이 없게 하였습니다. 이에 모후(母后)께서 위에서 편안치 못하고 성상께서 편안히 처할 곳이 없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여러 신하들이 침식을 잊은 채 놀라고 통분해 하면서, 이 역적들과 더불어서는 잠깐 동안이라도 한 하늘을 같이 이고 살고자 하지 않는 이유입니다. 더욱더 차마 말하지 못할 것은, 효명 옹주가 악한 습성에 물들고 사특한 모의에 익숙해져서, 본인이 흉한 물건을 가지고 가서 몰래 침실 근처에 뿌린 것입니다. 하늘이 악독한 역적을 내어서 국가에 화를 끼침이 이와 같이 극도에 이를 줄은 생각조차 못했습니다.
아, 예로부터 제왕들 가운데 골육의 변고를 당한 자가 어찌 한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모두들 사사로운 은혜로서 의리를 가리지 못했던 것은, 종묘 사직을 위한 계책에서였던 것입니다.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대의가 어디에 있는지 깊이 인식하여, 일신의 사사로운 정을 끊고서 속히 윤허를 내려 물정에 답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따르지 않았다.
12월 7일 경술
정태화(鄭太和)를 영의정으로, 김육을 좌의정으로, 김신국을 판중추부사로 삼았다. 정태화가 상소를 올려 체직을 청하니, 답하였다.
"지금이 어떠한 때인데 경은 이와 같이 겸양하는가. 나의 부덕함으로 인하여 이런 참혹한 변고를 만났기에, 밤낮없이 가슴을 어루만지며 하늘을 우러르니 부끄럽고 통탄스러울 뿐이다. 경은 사양하지 말고 속히 나와 방법을 의논하여 나의 허물을 바로잡고 나의 부족한 점을 보충하라. 그리하여 선왕께서 알아주신 은혜에 보답하고 아래 위 사람들의 목마르는 듯한 바람에 부응하라."
해원 부령(海原副令) 이영(李暎)과 진사 신호(申壕)가 상변하기를,
"저의 장인인 전 감목관(監牧官) 조인필(趙仁弼)이 김자점과 【당시에 김자점이 광양(光陽)에 유배되어 있었다.】 더불어 서로 통하여 왕래하는데, 종적이 비밀스러우니 반역의 정상이 있는가 의심스럽습니다. 그리고 이효성(李孝性)·이순성(李循性) 형제는 바로 자점의 가신(家臣)인데, 그 모의를 참여하여 알고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대신 이하를 명소하여 의논하게 하였다. 대신들이 김자점 등을 붙잡아다가 추고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조인필은 바로 조 귀인의 종형(從兄)으로 저주의 옥사에 연관되어서 이미 붙잡아다 국문하라는 명이 있었는데, 영 등이 화가 미칠까 두려워해서 드디어 그들의 음모를 고한 것이다.
국청이 김세룡을 국문할 것을 청하니, 대신들에게 의논하라고 명하였다. 대신들이 모두 국문할 것을 청하니, 따랐다.
양사가 다시 전에 아뢴 것을 아뢰어 속히 역적 조씨(趙氏) 모녀(母女)에 대해 율을 적용하라는 명을 내릴 것을 청하니, 답하였다.
"내가 옹주와는 선왕의 슬하에서 함께 자라 하루도 서로 떨어지지 않았었다. 시집간 뒤에도 끊임없이 서로 만나 잠시도 가슴속에서 잊지 않았다. 오늘날에 이르러 변고가 이와 같아 밤낮으로 마음이 편치 않아 선처하고자 하였다. 비복들이 운운한 말은 반드시 나이 어린 아이가 이 일이 흉역에 관계된다는 것을 모르고, 한갓 그의 어머니의 지시를 따른 것일 뿐이다. 그러니 그에게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이것을 이유로 갑자기 죄를 주는 것은, 내가 차마 하지 못할 바이다. 자전과 나의 지극한 뜻을 알아서 모름지기 번거롭게 하지 말라."
대신이 2품 이상을 거느리고 아뢰기를,
"궁액이 저주한 변고가 예전에도 혹 있었으나, 오늘날 주모한 자와 같이 흉악하고 참혹한 경우는 없었습니다. 삼사의 바른 논계가 함께 발하였는데도 전하께서는 오히려 흔쾌히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이 때문에 신들이 여러 재신들과 큰소리로 울부짖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신들의 말이 그르다고 여기신다면 속히 밝은 전교를 내려서 해명하시고, 옳다고 여기신다면 위로 자전께 아뢰어서 한마디로 결단하소서. 이 일은 상하가 서로 버틸 일이 아닙니다. 역적 조씨 모녀를 속히 안율(按律)하라고 명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내가 부덕해서 변고가 골육간에서 나온 것이 이처럼 참혹하니, 차마 무슨 말을 하겠는가. 비록 그러나, 선왕의 자식에게 어떻게 차마 법을 가하겠는가. 내가 일찍이 혼조(昏朝)168) 에 대해서 통한하게 여겼었으니, 어찌 이런 일을 오늘날에 다시 보게 될 줄을 생각이나 하였겠는가. 한밤중에도 눈물이 흘러 참으로 살고 싶은 마음이 없다. 이것 역시 자전의 뜻이다. 모름지기 지극한 뜻을 잘 인식해서 다시 번거롭게 논하지 말라."
하였다.
병조가 아뢰기를,
"정묘년 난 후에 공로가 있는 자에게 실직(實職)을 제수하도록 명한 자가 몹시 많았습니다. 그런데 서반직(西班職)은 수가 적어 형세상 일일이 수용하여 공로를 갚기가 곤란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정귀(李廷龜)가 본조의 판서가 되었을 때에 변통할 것을 계품하여, 동지(同知)·첨지·훈련 부정·판관·주부·도총·경력·도사 등의 관직을 더 설치한 다음, 망을 갖추어서 낙점을 받기를 한결같이 실직과 같이 하였고, 다만 행공(行公)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병자년과 정축년의 병란에 힘껏 싸우거나 성을 지켜 공로가 있는 자들을, 정묘년의 예에 의하여 서반직을 가설한 다음 차례대로 주의하여 공로에 보답하는 은전을 베풀어서, 그들이 실망하지 않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12월 10일 계축
추국 받을 죄인인 이주(李霌)·조인필(趙仁弼) 등이 지레 옥중에서 죽었다. 상이 여러 승지들을 불러보고는 이르기를,
"듣건대, 중한 죄수 4인이 하루 저녁 사이에 모두 죽었다고 하는데, 어찌 이런 이치가 있겠는가. 도사(都事) 송인식(宋仁植)이 반드시 그 사이에서 무슨 짓인가 한 것이다."
하고, 이어 송인식이 김자점에게 보낸 글을 【자점이 잡혀올 때에 수색하여 찾아낸 문서이다.】 보이면서 이르기를,
"송인식도 역시 여러 역적과 마찬가지로 추국하라. 지의금부사 이하를 모두 고쳐 차임하라."
하였다.
심지원(沈之源)·홍무적(洪茂績)·허적(許積)을 동지의금으로 삼았다.
12월 12일 을묘
상이 인정문(仁政門)에 나아가 친국하였다. 상이 여러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지레 죽은 죄인들을 검시(檢屍)한 서계(書啓)를 경들은 보았는가?"
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시체에 많은 상처가 있으니, 일이 매우 이상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이것은 바로 입을 막으려는 계책이다. 반드시 큰 괴수가 서울 안에 숨어 있으면서 몰래 사주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 추국에서는 기어이 죄인을 알아내야 한다."
하였다. 영중추부사 이경여(李敬輿)가 아뢰기를,
"신이 지난해에 수원 부사 변사기(邊士紀)를 잉임시킬 것을 청하였었는데, 지금 사기의 이름이 역적의 입에서 나왔으니, 신은 참으로 황공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때 나의 처치는 경보다 심한 점이 있었다. 경은 어찌 심하게 허물을 인책하는가."
하였다. 영의정 정태화가 아뢰기를,
"김자점의 문서 가운데에 김수(金燧)가 김정(金鋌)에게 보낸 서찰이 있는데, 거기에 ‘정 첨지(鄭僉知)·이 생원(李生員)이 석방되어 군흉(群兇)들이 낙담하여 간계를 부리지 못한다.’는 등의 말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을 잡아다 국문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12월 13일 병진
상이 인정문에 나아가 친국하였다. 추관들이 오랫동안 입시하지 않자, 정태화가, 승지 이응시가 검칙하지 못한 잘못을 추고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홍무적이 아뢰기를,
"김자점이 비록 역모는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의 방자하고 탐욕스러움에 대해서는 나라 사람들이 함께 분노하고 질시하는 바입니다. 그런데 상께서 일찌감치 그의 죄를 다스리지 않아서 이런 걱정을 끼쳤으니, 신은 몹시 개탄스럽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외간의 말을 나 역시 들었다. 그러나 처음에는 형적이 없는 듯했기 때문에 곧이듣지 않았다."
하자, 무적이 아뢰기를,
"신이 한흥일(韓興一)의 말을 듣건대, 성상께서 동궁에 계실 때 자점이 시강원의 하리(下吏)를 가두었다고 합니다. 이 죄는 주벌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과연 그런 일이 있었다. 그 당시에 선왕께서 조금 편찮으셨는데, 내가 마침 서연(書筵)을 열자, 자점이 나를 그르다고 여기고서 시강원의 하리를 가두었다고 한다."
하자, 무적이 아뢰기를,
"자점이 그 당시에 이미 임금을 무시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 후의 죄악도 역시 절도(絶島)에 찬축해야 하는데도 살기 좋은 광양(光陽)에다 유배하였으며, 또 두 아들을 주현(州縣)에다 배치하였습니다. 신은 전하께서 처치하신 것이 마땅함을 잃었다고 여깁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김식(金鉽)이 자점에게 보낸 서찰에 ‘홍무적은 노간(老奸)이고 조석윤(趙錫胤)은 조묘(趙猫)다.’라고 하는 말이 있었다. 어찌 감히 이러한 말을 사서(私書)에다 쓴단 말인가."
하였다. 김식이 형신을 받고는 즉시 승복하였는데, 그 공사에 이르기를,
"제가 변사기·안철(安澈)·이효성(李孝性)·이순성(李循性) 등과 역모하여, 원두표(元斗杓)와 산인(山人)169) 송준길(宋浚吉)·송시열(宋時烈)을 죽이고자 하였습니다. 경인년 3월에 거사하기로 기약하였었는데, 마침 저희 부자가 일시에 각자 흩어졌기 때문에 끝내 일으키지 못하였습니다. 저의 아비와 형인 김련(金鍊)도 모두 이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대개 산인(山人)들이 저의 아비를 죄에 얽어넣었으므로 제가 화가 나서 이런 짓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효명 옹주와는 서로 왕래하면서 모의를 통하여 자전과 대전·세자궁에 모두 흉한 물건을 묻고 저주하였습니다. 제가 서울에 있을 때 안철(安澈)이 찾아왔었는데, 제가 안철에게 말하기를 ‘영공께서 곤욕을 당함이 이와 같은데, 우리들 역시 산인들이 죽이고자 한다. 만약 산인들을 제거한다면 이 분함을 씻을 수 있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그러자 안철이 말하기를 ‘그대의 말이 참으로 옳다. 다만 이 일을 혼자서 주선하는 것은 불가하다. 변사기 등 여러 사람과 모의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때 사기가 마침 서울에 없었으므로 안철이 말하기를 ‘내가 마땅히 통보하겠다.’ 하였습니다.
그 후에 광주 부윤(廣州府尹) 기진흥(奇震興)도 역시 와서 말하기를 ‘요즈음 떠도는 말에 당신과 중군(中軍) 맹원빈(孟元賓)이 역모한다고들 하는데, 장차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하였습니다. 이에 제가 말하기를 ‘일이 이미 이 지경이 되었으니 먼저 일으키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서생(書生)이다. 단지 안철과만 더불어 상의하였으니, 아마도 일이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그러자 진흥이 말하기를 ‘나에게는 편비와 군졸이 있으며, 또 서울과의 거리가 멀지 않다. 밤을 틈타 곧바로 쳐들어가면 일이 어렵지 않을 것이다. 3월 10일 이후에 날짜를 가려 알려 달라.’ 하고, 또 말하기를 ‘심지명(沈之溟)·홍전(洪瑑)이 모두 재주가 있으니, 함께 일할 만하다.’ 하였습니다.
어느날 안철이 또 와서 말하기를 ‘이영달(李英達)·조유도(趙有道)·김응해(金應海)·변사기(邊士紀)·황헌(黃瀗)·이급(李圾)·맹원빈(孟元賓) 등이 만약 이 모의를 듣는다면 저들은 반드시 따를 것이다.’ 하고, 또 말하기를 ‘일이 이루어진 뒤에는 누구를 세울 것인가?’ 하기에, 제가 말하기를 ‘자네의 뜻은 어떠한가?’ 하니, 안철이 말하기를 ‘숭선군(崇善君)이 가하다.’ 하였습니다. 제가 이런 내용으로 기진흥에게 말하자 진흥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대개 바깥에서 역모하는 것은 기진흥과 안철이 주관하고, 안에서 저주하는 것은 조 귀인(趙貴人)이 주관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옹주가 은밀히 저에게 말하기를 ‘나의 어머니와 내가 대전(大殿)을 저주하였다. 일이 이루어진 후에는 숭선군을 세우고자 한다.’ 하였습니다. 금년 겨울에 또 옹주의 서찰을 보니 ‘기축년에 어머니가 대전을 저주하였으며, 이미 불상(佛像)을 주조하였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동지의금부사 허적, 승지 윤강·이응시, 문사 낭청 오정위(吳挺緯)·민정중(閔鼎重)·김좌명(金佐明) 등에게 명하여 뜰에 내려가서 상세히 캐물어 서계하게 하였다. 이에 여러 신하들이 황급히 내려가서 빙둘러서서 자세히 물은 다음, 김식이 말하는 바에 따라서 급히 나아가 아뢰었다. 김식이 끌어들인 바가 모두 병권을 주관하는 사람들이었다. 상이 승지에게 명하여 시위하는 제장(諸將)과 나졸들을 모두 장막 밖으로 내치게 하니, 단지 시신(侍臣)과 추관(推官)만 남아 있었다. 상이 이르기를,
"대신 이하는 아뢸 말이 있으면 곧바로 어탑에 올라와 아뢰라."
하였다. 이때 밤이 깊어 자정이 다되고 궐내가 놀라서 내외가 통하지 않았으므로, 승지와 사관이 명을 전하느라 황급히 뛰어다녔다. 정태화가 아뢰기를,
"국사가 위태롭고 의심스러우니 서울의 군병으로 궁성을 호위하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찌 놀라게 할 필요가 있겠는가."
하고, 훈련 대장 구인후를 불러 이르기를,
"대신이 궁성을 호위하게 하려고 하는데, 경의 뜻은 어떠한가?"
하자, 인후가 아뢰기를,
"단지 군사들로 하여금 궁궐문을 지키게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지난 가을에 배릉(拜陵)할 때 김세룡이 병이라 칭하고 수가(隨駕)하려고 하지 않았는데, 이것은 시기를 틈타 변란을 일으키려는 계획에서였는가? 김식에게 물어서 아뢰라."
하였다. 문사 낭청이 비밀히 물어서 서계하니, 상이 다 보고는 즉시 불태우도록 명하여서 시신들이 모두 보지 못하였다. 상이 이조 판서와 병조 판서에게 명하여 즉시 밤에 정청(政廳)을 열게 하고, 신경호(申景琥)를 김응해(金應海) 대신 총융사(摠戎使)로 삼고, 정치화(鄭致和)를 심지명(沈之溟) 대신 광주 부윤(廣州府尹)으로, 배시량(裵時亮)을 기진흥(奇震興) 대신 경기 수사로, 원숙(元䎘)을 황헌(黃瀗) 대신 경상 병사로, 신준(申埈)을 이급(李圾) 대신 홍청 수사(洪淸水使)로, 이완(李浣)을 포도 대장으로 삼았으며, 사련인(辭連人)을 모두 잡아오도록 명하였다. 상이 여러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김자점이 발호할 뜻이 있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았으나 반드시 곡진하게 보전해 주려고 하였다. 그런데 그는 나를 저버리고 반역하였다."
하니, 이경여가 아뢰기를,
"원두표가 항상 신이 자점을 준렬하게 공격하지 않는 것을 그르다고 하였습니다마는 신의 뜻은 매번 서로 융합하게 하여 진정시키고자 하였습니다. 어찌 오늘날 그가 직접 대역(大逆)을 저지를 줄 알았겠습니까."
하였다. 김세룡이 여러 차례 형신을 받고 승복하였는데, 그 공사(供辭)에 말하기를,
"옹주가 금년부터 그의 여종과 함께 모의하여 궁중에서 저주하였습니다. 아비 김식이 모역한 것은 위를 원망하는 데에서 나온 것입니다. 기축년 7월달 밤에 변사기(邊士紀)·안철(安澈)·신면(申冕) 등이 모두 아버지의 집에 도착하여 서로 모의하였습니다. 그런데 변사기가 당시에 수원 부사(水原府使)로 있었으므로 그의 군사를 써서 거사하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12월 14일 정사
삼사와 백관이 역적 조씨 모녀를 안율할 것을 청하니, 답하기를,
"아, 용서해 주고자 하나 일이 이미 분명하게 드러났고, 은혜를 온전히 하고자 하나 여러 사람의 노여움은 막기가 어렵다. 죄가 종묘 사직과 자전에 관계되니 내가 어찌 감히 마음대로 할 수 있겠는가. 부득이해서 공의를 따른다. 그러나 역시 차마 전형(典刑)을 가하지는 못하겠다. 귀인 조씨는 자진하게 하라. 옹주의 일은 결단코 따를 수 없다."
하였다. 역적 조씨를 사사(賜死)한 교서에,
"역적 조씨가 저주한 변고는 극히 흉악하고도 참혹하다. 그 딸과 함께 역모를 꾸며 흉측한 뜻을 부렸다. 이에 안으로는 궁액의 은밀한 곳과 밖으로는 대군(大君)과 부마(駙馬)의 집에 아침 저녁으로 출입하면서, 세수하고 머리 빗을 때 쓰는 도구라고 칭하고서 몰래 흉하고 더러운 물건을 감추었으며, 옷소매 속에 넣어 스스로 가지고 다니기도 하였다. 심지어는 흰 이가 있는 두골(頭骨)과 누린내나는 뼈가루를 밀봉하여 몰래 가지고 가서는, 자전과 대전에 흩뿌리게도 하고 파묻게도 하였다는 설이 요사스런 무당인 앵무(鸚鵡)의 공초에서 나왔다. 그리고 대궐을 나간 뒤에 요괴스런 일을 많이 행하여 우물물을 길어놓고는 몸소 기도하였으며, 흉한 물건을 많이 구해서 궤짝에다 넣어 가지고 들어갔다는 말이 영이(英伊) 등의 공초에서 나왔다. 또 옛 무덤의 관(棺) 조각을 구해주었다는 말이 앙진(仰眞) 등의 공초에서 나왔다. 그리고 몰래 자전의 수명의 길고 짧음을 묻는, 차마 들을 수 없고 차마 말할 수 없는 설이 있었으며, 자전의 침실을 파서 얻은바, 묻어두었던 흉한 물건이 몹시 낭자하였다. 이는 임금을 무시하고 나라를 무시한 계책으로, 끝내는 반드시 왕가(王家)의 지친을 모두 해친 다음에야 그만두었을 것이다.
다행히 종묘 사직의 신령들께서 아득한 가운데서 말없이 도와주시는 데 힘입어 드디어 역모한 정상이 발각되게 되었다. 죄가 종묘 사직과 자전에게 관계되니 내가 어찌 감히 마음대로 할 수 있겠는가. 억지로나마 공의를 따른다. 그러나 차마 전형(典刑)에 처하지는 못하겠기에, 그로 하여금 자진하게 한다."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역적 조씨가 이미 복죄(伏罪)되었다. 특별히 예장(禮葬)하게 하여, 이로써 나의 뜻을 표하고자 한다."
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역적 조씨의 극도로 흉악한 짓은, 예전에 없던 바로서, 귀신과 사람이 함께 분노하여 온 조정이 죄를 주기를 청하였습니다. 그런데도 단지 자진하게만 하였으니, 왕법이 이미 시행되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장하라는 명이 또 뜻밖에 나왔으니, 나라의 사체에 어찌 이런 이치가 있겠습니까. 신들은 봉행하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일이 이미 전례가 있다. 나만 어찌 홀로 그렇게 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조성노(趙星老)가 여러 날 형신을 받고서 승복하였다. 그 공사는 다음과 같다.
"역적 조씨가 그의 남동생을 시켜서 여동생인, 해원령(海原令)의 처에게 글을 보내기를 ‘일찍이 듣건대, 너희 집 종이 인육(人肉)을 얻을 수 있다고 하였다. 네가 만약 어린 아이의 두골과 양 손을 구해 보낸다면 마땅히 만금(萬金)으로 갚겠다.’ 하였습니다. 또 그로 하여금 새끼 고양이와 어린 흰 닭을 구해 보내되, 털 하나 깃 하나 상하지 말고 죽여서 햇볕에 말리게 하였으며, 아울러 벼락 맞은 나무와 무덤 위의 나무 및 생후 7일이 안 된 어린 아이에게 입혔던 옷을 구해 보내게 하였습니다. 이에 저의 누이 동생이 구하여서 재차 조씨에게 보내어 흉악한 짓을 하는 데 쓰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저의 아비 조인필(趙仁弼)이 고향으로 내려갈 때에 역적 조씨가 글을 보내기를 ‘숭선군과 낙선군(樂善君)의 명(命) 중 어느 명이 더 좋은지 광양(光陽)에 가서 점쳐보라’고 하였습니다."
12월 15일 무오
상이 인정문에 나아가 친국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김세룡이 승복한 뒤에 정형(正刑)에 처하라는 청을, 비록 이미 억지로 뭇 의논을 따르기는 하였으나, 차마 그렇게 하지 못할 바가 있어서 우선은 중지하게 하였다. 그가 비록 흉악한 역적이기는 하지만 나의 지친이다. 차율(次律)을 써서 그의 형체를 보전해 주고 싶다."
하니, 영의정 정태화가 아뢰기를,
"세룡의 처에 대해서도 정형에 처해야 마땅한데, 세룡에 대해서 어찌 차율을 쓸 수 있겠습니까. 신들은 결단코 따를 수 없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여러 신하들은 각자 자신의 의견을 말하라."
하니, 동지의금부사 홍무적이 아뢰기를,
"옹주는 부녀자이고 혈족이니 그에게는 은혜를 내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룡에 대해서는 정형에 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고, 대사헌 이후원(李厚源), 대사간 이일상(李一相)은 아뢰기를,
"법대로 할 뿐입니다. 다시 다른 의논은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여러 경들의 법대로 하자는 의논을 옳지 않다고 여기는 것은 아니다. 다만 정(情)과 법(法)은 차이가 있는 것이기에 내가 사약을 내리고자 하는 것이다."
하자, 판의금부사 원두표가 아뢰기를,
"안으로는 그의 아내가 흉악한 짓을 행하였고 밖으로는 부자가 역모를 꾸몄습니다. 한(漢)·당(唐) 이래로 부마로서 모반한 자 치고 어찌 국법을 면한 자가 있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의 뜻에는 죽는 것은 마찬가지라고 여겨진다."
하자, 태화가 아뢰기를,
"세룡의 처를 안율하는 것에 대해 모든 신하가 정청(庭請)하는데도 오히려 윤허하지 않으므로 조정 신하들이 모두들 답답해 합니다."
하고, 양사 역시 같은 말로 아뢰니, 상이 이르기를,
"번거롭게 논할 필요는 없다."
하였다. 양사가 또 아뢰기를,
"역적 조씨를 예장하게 할 수 없습니다. 성명을 거두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일찍이 선조 때 역적 강씨(姜氏)를 역시 예장하였다.170) 어찌 나만 유독 그렇게 하지 말라는 말인가."
하였다. 도승지 윤강이 아뢰기를,
"장례지내는 물품은 지급해도 좋지만 예장하는 것은 불가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인성군(仁城君)이 죽었을 때 역시 이 예를 썼다."
하니, 윤강이 아뢰기를,
"인성군은 골육의 지친입니다. 역적 조씨를 인성군에게 비교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양사가 아뢰기를,
"김자점의 아들과 손자가 이미 모두 승복하였는데, 아직까지 자점을 형신하지 않았습니다. 어찌 역적의 괴수가 형신을 받지 않는 이치가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신에게 의논하라."
하였다. 여러 대신들이 모두 아뢰기를,
"형신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우선은 옥정(獄情)을 지켜보라고 하였다. 상이 윤강에게 이르기를,
"역적 조씨를 예장하는 것에 대해서 대간이 논집하기를 그치지 않고 있으니, 단지 장례 물품만 주게 하라."
하고, 여러 대신들에게 이르기를,
"일찍이 선조(先朝) 때 이시백과 자점을 어수대(魚水臺)에서 불러보았는데, 그 때 나도 곁에서 모시고 있었다. 선왕께서 두 신하를 잘 대우하라는 뜻으로 간절하게 나에게 명하셨는데, 이시백은 감격의 눈물을 그치지 않았으나 자점은 끝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파한 뒤에 선왕께서 대내로 들어가셔서는 나에게 교시하기를 ‘김자점은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신하의 의리가 어찌 감히 이와 같은가.’ 하시고는 이어 좋지 않은 기색을 지으셨다. 지금 와서 생각하니, 자점이 이미 그때부터 신하될 마음이 없었던 것이다."
하고, 또 시백에게 묻기를,
"그 때 자점이 끝내 감동하는 뜻이 없던가?"
하니, 시백이 아뢰기를,
"선왕의 하교는 신하로서는 차마 들을 수 없는 말이었는데도 물러나온 뒤에도 감격하는 뜻이 없었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내가 처음부터 끝까지 보전해 주고자 하는 것은 실로 선왕께서 남기신 뜻을 본받고자 해서이다. 그러나 지금은 역모한 상황이 분명하게 드러났으니, 나 역시 어쩔 수가 없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신면(申冕)이 비록 스스로는 김식과 서로 친하지 않다고 하나, 내가 김식이 그 아비에게 보낸 편지를 보건대, 서로 친하지 않았다면 이와 같이 하겠는가."
하고, 이어 승지에게 명해서 신면에게 묻기를,
"너와 김식이 서로 대질한다면 스스로를 밝힐 수 있겠는가?"
하니, 신면이 아뢰기를,
"본래 김식과는 혐의진 일이 있었습니다. 그로 하여금 대질하게 한다면 다행이겠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참으로 혐의진 것이 있었다면 스스로 밝히기에 겨를이 없었을 것인데, 어찌하여 나의 전교를 기다렸는가."
하였다. 이어 김식의 쪽지를 국청에다 내렸는데, 그 쪽지에 말하기를 "홍(洪)은 체직당하고 신(申)이 간장(諫長)이 되었으니 다행이다." 하였다. 정태화가 아뢰기를,
"이른바 홍은 바로 중보(重普)이고 신은 신면입니다."
하였다.
12월 16일 기미
이해를 형조 판서로, 홍중보를 수원 부사로 삼았다.
양사가 전에 아뢴 것을 다시 아뢰면서 김자점을 엄히 국문하고 김식과 김세룡을 정형(正刑)에 처할 것을 청하니, 답하였다.
"김식은 우선은 행형(行刑)하지 말라. 세룡은 공의와 왕법이 지엄하여 내가 마음대로 하지 못하겠으니, 아뢴 대로 하라. 그러나 정형한 뒤에 팔방에 조리돌리지 말고 잡안 사람들로 하여금 시신을 거두게 하라. 자점 역시 국문하라."
상이 인정문에 나아가 친국하였다. 영의정 정태화가 아뢰기를,
"신면을 국문하는 것이 합당한지의 여부를 여러 신하들에게 의논하라고 명하셨는데, 여러 신하들이 모두 다른 의견이 없었습니다. 오직 성상께서 결정하시기에 달려 있습니다."
하고, 동지의금부사 허적(許積)이 아뢰기를,
"김세룡이 공초한 것으로 보건대, 그 때 변사기는 서울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김식의 공사와는 날짜가 서로 어긋납니다. 이것은 의심스러운 바입니다."
하였다. 기진흥(奇震興)과 안철(安澈)이 국문에 임하여 원통하다고 하자, 김식과 대질시키도록 명하였다. 김식이 함께 모의한 실상을 역력히 말하자, 기진흥과 안철이 말을 못하였다. 또 김식에게 묻기를,
"신면이 과연 너와 함께 모역하였는가?"
하니, 김식이 아뢰기를,
"일찍이 역모한다고는 신면에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신면이 나를 시켜서 이형장(李馨長)을 통해 청나라에 통보해서, 그들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와 변경을 압박하며 산인(山人)들을 묶어가게 하였는데, 제가 그 계책대로 하였습니다. 그 후에 청나라 사신이 나와 사기가 전과 달라졌으므로, 제가 또 형장을 시켜서 저지하게 하였습니다."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이름이 김식의 입에서 나온 자들은, 지금 마땅히 역적 김식의 공사에다 성명을 모두 기록해서 팔도에 전시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만약 뒤에 분변되어 풀려나는 자가 있을 경우, 끝내 억울한 죄명을 지고 사는 자가 될 뿐만 아니라 원통함 역시 어떠하겠습니까. 단지 역적의 무리 중에 분명하게 드러난 자만 써서 전시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충후하니 이에 의거해 시행하라."
하였다. 태화가 또 아뢰기를,
"금부에 죄인들이 옥에 가득한데, 그 가운데 죄가 가벼운 죄수는 속히 처결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갇힌 군사들을 풀어주라. 기타 죄가 가벼운 죄수들도 서계하여 처리하라."
하였다. 대사헌 이후원(李厚源)이 아뢰기를,
"죄인들 가운데 중요한 자들이 하루밤에 모두 죽었습니다. 군사들이 그 실정을 알지도 모르니 완전히 석방해서는 안 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정배(定配)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자, 후원이 아뢰기를,
"모두 형신한 뒤에 풀어주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옥석(玉石)을 구분하지 않고 형신을 가한다면 반드시 원통함을 품은 자가 있게 될 것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형신한 후에 석방하라."
하였다. 판중추부사 조익(趙翼)이 아뢰기를,
"신은 본디 기진흥의 얼굴을 몰랐습니다. 그런데 일찍이 광주(廣州)를 다스릴 때 자못 치적이 있었다고 들었으므로, 주민들의 청원을 인하여 잉임시키도록 청하였습니다. 지금 와서 생각하니 황공함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은 안심하라."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김련(金鍊) 역시 형신해야 하는가?"
하니, 영중추부사 이경여가 아뢰기를,
"김련은 역적 괴수의 아들이고 형입니다. 어찌 다른 의논이 있겠습니까."
하자, 상이 따랐다. 판의금부사 원두표가 아뢰기를,
"전에 대간이 변사기를 중하게 탄핵했는데도 대신이 잉임시키기를 청했습니다. 조정이 존엄하다면 그 당시의 대신이 어찌 감히 태연히 국문에 참여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판의금은 어찌 감히 직분을 뛰어넘어 대신을 면박하는가. 두표는 속히 나가라."
하였다. 두표가 종종걸음으로 나가자, 양사가 아뢰기를,
"원두표가 감히 대신을 배척하였으니,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품고 있는 생각을 진술하는 것은 괜찮으나, 직책이 대간이 아니면서 말이 이와 같으니, 어찌 그리도 무례한가. 되도록 중하게 추고하라."
하고, 혼자 탄식하기를,
"조정이 이로부터 반드시 시끄럽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내가 있는데 그들이 어찌 감히 그러겠는가."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두표의 병통을 성상께서 이미 통촉하시었습니다. 그러나 여러 대신들이 모두 불안해 하니 누구와 함께 대옥(大獄)을 다스리겠습니까. 현재의 상황을 신과 같은 자가 능히 진정시킬 수 있다고 보십니까?"
하였다. 이때 이경여·조익·김육이 모두 허물을 인책하고 물러가기를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들은 안심하고 국문에 참여하라."
하였다.
여러 종실들이 김세룡의 처를 속히 왕법대로 처리할 것을 청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김정(金鋌)이 여러 차례 형신을 받고서 승복하였다. 그 공사는 다음과 같다.
"낙성위(洛城尉)가 과연 변사기·안철과 함께 반역을 모의하여 항상 서신을 통하였는데, 내용이 몹시 간절하였습니다. 김식이 처음에는 경인년 봄에 거사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런데 마침 김식이 곡성(谷城)에 보임되었고, 아비인 김자점이 배소(配所)로 갔으므로 실행하지 못하고, 변사기 등이 주병관(主兵官)이 된 다음에 다시 거사를 모의하기로 하였습니다."
12월 17일 경신
달이 헌원성(軒轅星)을 범하였다.
상이 인정문에 나아가 친국하였다. 영의정 정태화가 아뢰기를,
"이경여와 조익이 오지 않았는데, 반드시 어제 대죄(待罪)하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성상께서 이미 안심하고 국문에 참여하라고 면유하시었으니, 명소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우의정 이시백이 아뢰기를,
"어제 여러 대신들이 태연히 국문에 참여할 수 없다는 이유로 모두 대죄하였는데, 신은 마침 대궐 바깥에 있어서 오늘에야 비로소 그 말을 들었습니다. 신이 어찌 감히 태연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신들이 말한 바가 앞뒤가 똑같다. 경은 어찌 혼자만 불안해 하는가."
하였다. 판의금부사 원두표가 아뢰기를,
"당초 변사기를 처치한 것에 대해서 신은 일찍이 마땅함을 잃었다고 생각하였으므로, 어제 우연히 말한 것입니다. 여러 대신들이 모두 불안한 마음을 품고 있으니, 신은 몹시 황공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은 안심하라."
하였다. 대신들이 합사(合辭)하여 아뢰기를,
"숭선군을 추대하기로 했다는 설이 여러 역적들의 입에서 나왔기에 의외의 변이 있을까 염려되어 도감군(都監軍)을 시켜서 그의 집을 포위하여 지키게 하였습니다. 지금 듣건대, 철수하라는 명이 있었다고 하는데, 숭선군이 비록 모의에 참가하지는 않았지만 어찌 평상시와 같이 대우할 수 있겠습니까. 신들의 말 역시 처음부터 끝까지 보전해 주려는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린 아이라 반드시 역모를 알지 못했을 것이다. 어찌 그 집을 포위해 지킬 필요가 있겠는가. 단지 잡인만 엄히 금하도록 하라."
하였다. 태화가 그대로 포위하여 지키도록 명하기를 힘껏 청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역적 김식의 공사에, 역적 조씨가 불상을 만들고 대전을 저주했다는 말이 있는데, 안에서 캐어물으려는 기미가 있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마땅히 캐어물으실 것이다."
하였다. 김자점이 형신을 받고는 승복하였는데, 그 공사에,
"제 아들 김식이 역모의 상황에 대해 저에게 말하기를 ‘변사기·안철·기진흥 등이 주관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제가 말하기를 ‘숭선군의 일로 인해서 이렇게까지 여러 사람들이 의심하고 있으니, 되도록 속히 거사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니, 식이 말하기를 ‘재상 몇 명을 제거하기만 하면 이 분함을 풀 수 있을 것이다. 군사는 광주 부윤 기진흥과 수원 부사 변사기가 거느린 군사를 쓰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제가 말하기를 ‘사세를 살펴보고서 사기(師期)를 정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 후에 저희 집 부자가 각각 외방으로 흩어졌으므로 미처 거사하지 못했습니다."
하였다. 자점을 정형(正刑)하였는데, 상이 팔도에 전시(傳示)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양사와 옥당이 간쟁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김세창(金世昌)이 형신을 받고 승복하였는데, 그 공사에,
"과연 김세룡과 이두일(李斗一)이 모역하였으며, 실로 역적 김식을 추대하려는 계획이 있었습니다. 대개 변사기와 기진흥이 중병(重兵)을 거느리고 가까운 지역에 있음을 믿고서 한 것이며, 함께 모의한 자는 안철입니다. 이효성(李孝性)·이순성(李循性)·조인필(趙仁弼)·이정웅(李挺雄)·현성오(玄省吾)·정계립(鄭繼立)·이언표(李彦縹) 등은 모두 수하들입니다."
하였다. 안철이 여러 차례 형신을 받고서 승복하였는데, 그 공사에,
"과연 김식과 모역하기는 했으나, 저는 같이 참여하기만 했을 뿐으로, 그 괴수는 변사기입니다. 그간의 모의는 역적 김식이 주관하였습니다."
하였다.
우의정 이시백이 상소하기를,
"역적 김세창(金世昌)이 이미 승복하였는데, 신은 마음이 떨리고 등골이 서늘하여 어찌할 줄을 모르겠습니다. 곧바로 대궐 밖에 나와 땅에 엎드려 대죄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내 뜻을 이미 앞서 다 말했다. 대의(大義)가 있는 바이니 무슨 불안할 것이 있겠는가. 경은 안심하고 국문에 참여하라."
하였다. 【김세창은 김련(金鍊)의 아들로 이시백의 외손자이다.】
【태백산사고본】 7책 7권 51장 B면【국편영인본】 35책 520면
【분류】사법-행형(行刑) / 변란-정변(政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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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8일 신유
달이 태미원(太微垣)으로 들어갔다.
예조가 아뢰기를,
"역적의 괴수 김자점 등을 이미 정형에 처하였습니다. 전례에 의하여 종묘에 고하고 중외에 교서를 반포하며, 전문(箋文)을 올려 진하하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상이 영의정 정태화, 좌의정 김육을 인견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신면(申冕)이 어제 가형할 때 원통함을 호소하기를 ‘김세룡의 공초에 「기축년 7월에 신면과 변사기·안철이 김식의 집에서 모역하였다.」고 하였는데, 그 당시에 변사기와 안철 두 사람은 모두 서울에 없었습니다. 지금 허실도 조사하지 않고 오로지 형신만 가하니, 몹시 원통합니다.’ 하였습니다. 국청이 현재 역적 김식이 공초한 바, 청나라에 몰래 통한 죄에 대해 추국하고 있는데, 신면은 죄목을 알지 못한 채 형신을 받고 있습니다. 곧바로 그 죄목을 들어서 국문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사체로 보면 그렇다. 그러나 여러 사람이 들으면 번거로울 듯하니, 문사 낭청을 시켜서 뜰에 내려가 비밀히 묻게 하라."
하였다. 신면이 대답하기를,
"지금 그 일을 들어보니 바로 지난해에 이계(李烓)가 한 짓입니다. 저의 아비가 이계의 모함에 빠져 거의 죽다 살아났기에 제가 항상 절치부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찌 스스로 그 자취를 다시 밟을 리가 있겠습니까. 역적 김식이 8월, 9월 사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그 당시에 안철은 평안 병사로서 아직 체직되어 돌아오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제가 비록 몹시 형편없기는 하나, 논박을 입기 전에 결코 이런 마음을 먹지 않았으며, 논박을 받은 후에도 평구(平丘)에 있는 시골 집으로 갔다가 그대로 배소(配所)로 갔습니다. 그러니 김식과 더불어 만나 의논하였다는 말은 전혀 그럴 리가 없습니다."
하였다. 국청이 자신을 변명한 말이라 취신할 수가 없다는 이유로 그대로 형신하기를 청하니, 하교하기를,
"원통함을 품을 염려가 없지 않으니 비밀리에 의논하여 아뢰라."
하였다. 국청이 아뢰기를,
"그해 8월에 안철이 과연 평안도의 임소(任所)에 있었습니다. 신면이 부제학으로 있다가 논박을 받은 것은 9월에 있었으며, 논박을 받은 후 즉시 평구로 간 것은 대신 중에도 들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배소에 가기 전에 절대로 서울에 오지 않았다고 한 것에 대해서는 상고할 만한 흔적이 없습니다. 억울한지의 여부는 억측하여 가볍게 의논하지 못하겠습니다. 오로지 성상께서 결정하시기에 달렸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비단 두 역적의 입에서 이름이 나왔을 뿐만 아니라, 이 일은 또 뒤폐단에 관계가 있어서 되도록 가볍게 죄를 준다는 법을 쓰기가 어려울 듯하다. 전대로 형신하라."
하였다. 신면이 형신을 받다가 얼마 후에 갑작스레 자살하였다. 상이 또 이르기를,
"갇힌 자 가운데 조유도(趙有道)는 역적 김식이 끝까지 잘못 고하였다고 하고 있으니, 풀어주는 것이 마땅할 듯하다. 김응해(金應海)는 충신 김응하(金應河)의 동생으로 병자년 난리 때 적에게 핍박당하게 되자 집안의 명예를 떨어뜨릴까 염려하여 스스로 목을 찌르기까지 하였다. 그 뜻이 가상하여 이 두 사람의 아들들을 먼저 풀어주고자 한다."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이와 같은 특은(特恩)은 마땅히 성상의 마음에서 나와야 합니다. 신들이 비록 품고 있는 생각이 있더라도 감히 먼저 진달하지 못하겠습니다. 이미 직접 전교를 받들었으니 전유(傳諭)한 다음에 석방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였다.
국문을 받던 죄인 기진흥이 승복하지 않고 지레 자살하였다. 상이 역모한 상황이 이미 드러났다는 이유로 연좌시키고 적몰하는 법을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상이 인정문에 나아가 친국하였다. 영의정 정태화가 아뢰기를,
"숭선군을 지금 잘 처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여러 역적들이 모두 승복하였으나 다시 추대하였다는 말이 없다. 이것은 반드시 김식이 스스로 임금이 되고 싶었으나 감히 말하지 못하고 이와 같이 말한 것이다."
하였다. 좌의정 김육이 아뢰기를,
"숭선군이 비록 나이가 어리나 역적 조씨의 아들입니다. 그가 어른이 되면 혹 간사한 자들이 핑계를 댈 걱정이 없지 않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럴 리는 없을 듯하다. 그러나 경들의 말이 이와 같으니 내가 조용히 생각해 보겠다. 또한 자전께 여쭈어서 처리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변사기가 형신을 받고는 즉시 승복하였는데, 그 공사에,
"지난해 겨울에 자점이 저에게 말하기를 ‘내가 이미 이에 이르렀으니 네가 전남 병사(全南兵使)가 되면 우익을 삼을 수 있겠다.’고 하고, 또 말하기를 ‘네가 수원 군사를 거느리고 있고 기진흥이 광주 군사를 거느리고 있으니, 날짜를 정하여 거사하면 너를 대장으로 삼겠다.’고 하였습니다. 그 후에 이효성(李孝性) 형제와 안철이 와서는 ‘숭선군을 추대하여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처음에는 8월에 군사를 일으키기로 약속하였는데 마침 저희들이 모두 외관(外官)이 되었으므로 실행하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다시 동당(同黨)을 물으라고 명하였다. 사기가 말하기를,
"이미 사실대로 실토하였는데, 어찌해서 즉시 나를 죽이지 않고 다시 다른 일을 묻습니까."
하니, 상이 노하여 낙형(烙刑)을 실시하라고 명하였다. 이에 사기가 비로소 김시성(金是聲)·김일(金逸)·심지명(沈之溟) 등이 같이 모의하였다고 하였다. 상이 이들 모두를 잡아다 국문하라고 명하였는데, 김일은 이미 북병영(北兵營)의 임소(任所)에서 죽었다.
12월 19일 임술
비변사가 아뢰기를,
"변방에서 수자리살고 있는 무과 신출신(新出身)들에게 동전 10관(貫)을 바치고 수역(戍役)을 면제받도록 허락하소서."
하니, 따랐다. 【좌의정 김육의 의논이다.】
【태백산사고본】 7책 7권 52장 B면【국편영인본】 35책 521면
【분류】군사-군역(軍役) / 재정-잡세(雜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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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조가 아뢰기를,
"역적의 괴수인 김자점의 죄는 심기원(沈器遠)의 죄171) 보다 큽니다. 안팎이 체결하여 역모를 꾸며 흉악한 짓을 했으니, 이는 실로 예전에 없던 일입니다. 그러므로 예조에서 전문(箋文)을 올려 진하할 것을 청하였는데, 이제 정지하라는 전교가 있었습니다. 이미 종묘에 고하였으니 진하하는 일 역시 빠뜨릴 수 없습니다. 전례대로 거행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골육 지친과 원훈 대신이 바로 곁에서 변고를 일으켜 부끄러워하고 두려워하기에 겨를이 없는데, 무슨 진하를 하는가."
하였다.
12월 20일 계해
사면하고 교서를 반포하였는데, 교문은 다음과 같다.
"왕은 이르노라. 뱃속에 고질병이 있는 근심이 있다는 말을 예전에 들었는데, 바로 곁에서 국가의 변란이 일어나니 이제 내가 그런 경우를 당하였다. 이에 간곡하게 고하여 나의 걱정스러운 뜻을 보인다. 아, 덕스럽지 못한 나이기에 크나큰 기업을 무너뜨릴까 두려워하였다. 이에 비록 곤충이나 초목 같은 미물에 대해서도 사납게 대하지 않고자 경계하였다. 형벌을 내리고 찬축할 즈음에는 되도록 너그럽게 처리하고자 하였다. 더구나 선조(先朝)에서 종사(從仕)하였던 신하는 오로지 오늘날에 잘 보전하고자 하였다. 이에 아주 흉악한 죄를 지어 스스로 천명(天命)을 끊은 자가 아니면 모두 잘못을 용서하고 허물을 따지지 않아 곡진히 위하였다.
역적의 괴수 김자점(金自點)은 악독한 것이 본래의 성품으로 거간꾼이나 백정 같은 자이다. 그런데 단서(丹書)·철권(鐵券)에 기록되어 외람되이 봉작(封爵)을 받은 신하가 되었으며, 사원(師垣)과 태부(台府)에 들어가 장상(將相)의 권한을 겸하였다. 기세가 치성해지자 온 세상을 오만하게 깔보았으며, 탐장(貪贓)이 낭자하여 팔도에 두루 미쳤다. 한(漢)나라 상관걸(上官傑) 같이 궁중 및 대신과 인척 관계를 맺었으며, 후한의 양기(梁冀)와 같이 발호를 자행하였다. 이는 신하로서는 극도에 이른 것으로 스스로 도모하더라도 여기에서 무엇을 더 가하겠는가. 그런데 어찌하여 나를 저버리고 반역을 하였는가. 늙은 역적의 끝없는 욕심이 통탄스러울 뿐이다.
위세를 등에 업고 사특한 짓을 하였으며, 안팎이 연결하여 간사한 꾀를 길렀다. 대궐 뜰에서 저주를 행하였으니, 아, 역시 사특하며, 서울 가까운 곳에서 군병을 빌리려 하였으니 장차 무슨 짓을 하려던 것이었겠는가. 조정의 신하들을 모조리 죽이려 하였으며, 많은 무인들과 당파를 지어 약속하였다. 죄는 머리털을 뽑아 헤아려도 속죄하기 어려우며, 화가 실로 눈썹이 타는 것보다도 급박하였다. 그런데도 나는 오히려 공이 의심스러우면 상을 주고 죄가 의심스러우면 용서한다는 생각으로 이에 오랫동안 마땅히 단죄해야 하는데도 단죄하지 못하였다. 인정이 분노하여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사형에 처하는 것이 마땅한데도 외방으로 찬축하는 가벼운 벌만 주었다. 그러자 오히려 잠시 동안 목숨을 늘여서 더욱더 반측(反側)하는 형상을 드러내었다. 물여우 같이 화살을 깊이 감추고 있었으니 그림자를 쏨을 면치 못할 뻔하였다. 시랑의 이빨을 몰래 갈았으니 끝내는 필시 사람을 물고야 말았을 것이다.
하늘의 법망은 높이 걸려 있어서 착하지 못한 짓을 하면 용서하지 않는 법이다. 죄인을 잡았을 경우에는 풀을 뽑으면서 뿌리까지 제거하듯이 해야 마땅한 법이다. 그의 아들과 손자가 두억시니 같은 짓을 한 상황을 모두 불었다. 반역을 한 요사스런 허리와 목이 도끼에 잘려졌다. 아, 난적(亂賊)이 어느 시대인들 없었겠는가. 그러나 이들보다 더 심한 흉악한 역적은 없었다.
역적 조씨의 악독함에 이르러서는 이는 실로 화태(禍胎)가 모인 것이다. 역적들과 서로 결탁하였고 딸을 사주하였다. 이에 산천에서 기도하고 축원한 것이 모두가 임금을 저주하는 말이었으며, 무덤의 나무와 해골 가루가 모두 저주하는 도구가 되었다. 자전을 원수로 보았으며 나를 음해하고자 하였다. 자전께서 거처하시는 붉은 궁전에 고독(蠱毒)의 물건을 묻었으며 동궁이 있는 붉은 집에 연탁(燕啄)172) 의 흉한 짓을 하였다. 다행히 삼령(三靈)173) 께서 도와주심에 힘입어 반역의 싹이 일찌감치 드러나게 되었다. 그러나 차마 드러내놓고 죽일 수는 없어서 그로 하여금 그의 집에서 자진(自盡)하게 하였다.
이미 역적 자점 등을 법에 의거하여 정형(正刑)에 처하였다. 거듭 종묘 사직의 위태로움을 건졌기에 교서를 반포하는 바이다. 아, 바라서는 안 될 것을 바랐기에 법을 거행하여 위세를 떨치었다. 형벌이 다시는 없기를 기약하면서 형벌을 내려 온 백성과 더불어 경시(更始)하고자 하는 바이다." 【대제학 윤순지(尹順之)가 지었다.】
【태백산사고본】 7책 7권 52장 B면【국편영인본】 35책 521면
【분류】변란-정변(政變) / 왕실-의식(儀式) / 사법-행형(行刑)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註 172] 연탁(燕啄) : 후비(后妃)가 황손(皇孫)을 살해하였다는 뜻으로, 여기서는 조 귀인이 왕세자를 죽이고자 저주하였다는 뜻임. 《한서(漢書)》 권97 하 외척 효성 조황후전(外戚孝成趙皇后傳)에 "이보다 앞서 동요가 있었는데 그 동요에 ‘제비들의 꼬리가 반짝거리니 장공자가 수시로 가서 만나보았다. 궁성문의 동완(銅緩)에 제비가 날아와서 황손을 쪼았다. 황손이 죽자 제비가 화살을 쪼았다.[燕燕尾涎涎 張公子時相見 木門倉琅根 燕飛來啄皇孫 皇孫死燕啄矢]’ 하였다." 하였는데, 제비는 효성 황후 조비연(趙飛燕)을 가리키고, 장공자는 성제(成帝)를 가리키며, 황손은 애제(哀帝)를 가리킨다.[註 173] 삼령(三靈) : 천·지·인의 신령을 말함.
ⓒ 한국고전번역원
12월 21일 갑자
원두표를 좌참찬으로 삼았다.
남병사(南兵使) 조필달(趙必達)이 사조(辭朝)하였다. 면대하여 유시하고 보내었다.
남병사(南兵使) 조필달(趙必達)이 사조(辭朝)하였다. 면대하여 유시하고 보내었다.
남병사(南兵使) 조필달(趙必達)이 사조(辭朝)하였다. 면대하여 유시하고 보내었다.
12월 22일 을축
상이 인정전에 납시어 세자의 초례(醮禮)174) 를 행하였다.
12월 23일 병인
세자빈이 삼전(三殿)에 조견(朝見)하였다.
12월 24일 정묘
김응해(金應海)를 북병사(北兵使)로 삼았다.
수원 부사 홍중보(洪重普)와 양주 목사(楊州牧使) 원두추(元斗樞)가 사조하였다. 면대하여 유시하고 보냈다.
12월 25일 무진
양사가 합계하기를,
"지난번에 탑전에서 대신이 숭선군을 잘 처리할 것을 힘껏 청하였습니다. 그런데 성상의 마음에 차마 그렇게 하지 못하여서 흔쾌하게 따르는 명을 내리지 않으셨습니다. 신들은 감히 온 나라의 여론을 가지고 합사하여 거듭 청합니다. 숭선군 이징(李澂)은 여러 차례 역적의 입에서 나왔습니다. 비록 참여하여 안 자취는 없더라도, 예로부터 지금까지 신하로서 어찌 이러한 죄명을 지고서 서울에 편안히 있었던 자가 있었겠습니까. 대신들이 잘 처리하라고 청한 것은, 실로 성상께서 종시토록 보전해 주고자 하는 뜻을 잘 인식한 것입니다. 숭선군 징을 절도(絶島)에 안치하여, 한편으로는 사은(私恩)을 온전히 하고 한편으로는 국법을 보존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이미 대신에게 유시하였다. 다시 번거롭게 논하지 말라."
하였다.
사면하였다. 왕세자의 가례(嘉禮) 때문이다. 반포한 교서는 다음과 같다.
"왕은 이르노라. 원자(元子)를 세워 왕통을 잇는 것은 온 나라의 바람이 매인 바이며, 숙녀(淑女)를 구하여 짝을 이루는 것은 만복의 근원을 크게 여는 것이다. 지금 내가 무엇을 걱정하겠는가. 나라가 영원히 이에 힘입을 것이다. 왕화(王化)의 근본을 상고해 보면 왕비가 어진 것보다 더 중한 것은 없다. 하늘의 명이 새로워짐에 세자의 상(象)이 이미 밝다. 인륜(人倫)이 시작되는 바이니, 대혼(大婚)을 때에 맞추어 거행하는 것이 마땅하다. 덕성을 보고 선발하는 예전 규례를 따라 아름다운 짝을 명문가에서 간택하였다.
얌전한 천부적인 자질은 사대부 집안에 예쁘게 맺혔고, 온순하다는 좋은 평판은 존장(尊章)의 기쁨이 되기에 진실로 맞는다. 좋은 길일을 가려 예를 갖춤에 군자의 좋은 짝이 이루어졌다. 반드시 먼저 집안을 잘 다스리는 것이 실로 종사를 위한 계책이다. 한 가정을 이루기를 바라는 것이 어찌 다만 부자의 정에서만 이겠는가. 11월 28일에 술을 따르며 규계(規戒)하고 세자가 친히 맞이하였다.
성스러운 태사(太姒)가 주(周)나라의 왕비가 되었으니 왕조가 오래 갈 것을 점칠 수 있겠고, 아황(娥皇)과 여영(女英)이 순임금을 도우니 그윽한 덕이 더욱더 성해지겠다. 전대(前代)의 임금보다 많은 아들을 낳을 것이니 큰 아름다움이 뒷날까지 뻗칠 것이다. 아, 하루에 세 번 문안함에 부부가 함께 따르는 것을 볼 수 있게 되었다. 팔도가 모두 기뻐함에 이에 교서를 반포하는 바이다."
하였다. 【대제학 윤순지(尹順之)가 지었다.】
【태백산사고본】 7책 7권 53장 B면【국편영인본】 35책 521면
【분류】사법-행형(行刑) / 왕실-의식(儀式) / 어문학-문학(文學)
ⓒ 한국고전번역원
여러 역적들에게서 적몰한 노비를 각사에 나누어 주라고 명하였다.
12월 26일 기사
홍문관이 상차하기를,
"숭선군(崇善君) 이징(李澂)은 여러 차례 역적들의 입에서 나왔습니다. 비록 참여하여 안 흔적은 없지만 이미 추대하였다는 말이 있었으니, 인신으로서 이러한 이름을 지고 있는 자를 서울 안에다 편안하게 놓아둘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성인이 변란에 대처하는 도리에 있어서도 마땅히 보전해 줄 방도를 생각해야 합니다. 대신과 대간들의 청이 어찌 우연한 것이겠습니까. 재삼 다시 생각하시어 속히 양사의 청을 따르소서."
하니, 답하기를,
"생각하여 처리하겠다. 다시는 번거롭게 논하지 말라."
하였다.
상이 하교하였다.
"황헌(黃瀗)·김시성(金是聲)·이급(李圾)·홍전(洪瑑) 등은, 내가 그들의 공초한 말을 보고 억울하다는 것을 알았다. 어찌 차마 오래도록 옥에 가두어 둘 수 있겠는가. 더구나 지금은 봄이 돌아와 북두성(北斗星)이 위치를 바꾸었으니, 때에 맞추어서 영(令)을 행하는 것을 그만둘 수 있겠는가. 유사로 하여금 모두 풀어 주게 하라.
그리고 이영달(李英達)의 노병(老病)은 더욱 이치에 가깝지 않고, 정선(鄭善)과 이조(李稠)·이춘양(李春陽) 등은 모두 억울한 듯하다. 역시 풀어주게 하라."
예조가 아뢰기를,
"전부터 왕세자의 가례(嘉禮) 뒤에는 으레 인재를 뽑아 경사를 함께 하는 거조가 있었습니다. 더구나 지금은 대역(大逆)을 모두 죽였으니, 이것은 종사(宗社)의 큰 경사입니다. 별과(別科)를 베풀어 모두 경사(京師)에 모아 3소(所)로 나누어 각각 2백 명씩 뽑되, 강경(講經)은 면제하소서."
하니, 따랐다.
북병사(北兵使) 김응해(金應海)가 사조(辭朝)하니, 면대하여 유시하고 보냈다.
12월 27일 경오
상이 왕대비를 받들고 경덕궁(慶德宮)으로 이어하였다.
상이 정원에 하교하였다.
"지금 이미 이어하였다. 내년 봄에 해동(解冬)하기를 기다려 옛 궁의 더러운 흙을 모두 긁어내고 깨끗한 흙으로 채우는 것이 마땅하다. 정원은 미리 각사에 분부하라."
12월 30일 계유
세자빈 책례 도감 제조(世子嬪冊禮都監提調) 이하에게 차등 있게 논상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역적 김자점이 오랫동안 훈귀(勳貴)의 세력을 끼고 있으면서 다른 사람의 토지와 노비를 빼앗은 것이 끝이 없어서, 원통해 하는 소리가 팔도에 가득합니다. 지금 적몰하는 날에 이르러 뒤섞어서 속공(屬公)하여, 억울함을 품은 채 호소할 데 없는 사람들로 하여금 신리(伸理)할 수 없게 한다면, 여러 사람들의 원망이 끝내는 국가로 돌아올 것입니다. 유사로 하여금 사람들이 정소(呈訴)하는 것을 허락하게 한 다음 일일이 조사하여 처리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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