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효종실록8권, 효종 3년 1652년 2월

싸라리리 2025. 12. 21. 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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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일 계묘

선혜청이 아뢰기를,
"기전(畿甸)에서 봄에 받아들일 대동미(大同米)를 화폐로 대신 징수하는 편의 여부를 일찍이 의논하여 결정하도록 명하셨습니다.
현재 서울 시민(市民)들 모두가 화폐를 사용하고 싶어하여 상평전(常平錢)을 다투어 받아가고 있습니다만, 화폐를 사용하는 법은 백성들이 반드시 여유있게 소지하고 난 뒤에야 바야흐로 중외(中外)에 유행되어 막혀서 유통되지 않는 걱정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선 경기 지역 백성들이 땔나무나 채소·과일류를 서울 시장에 팔려고 내놓을 때, 시민들이 곧장 돈을 내고 사가게 하면, 쌀을 내야 되는 어려움이 없게 될 뿐더러 쌀을 운반하는 폐단도 덜게 됩니다. 여기에 본청(本廳)이 또 돈을 주고 쌀을 사들이면 공사(公私)간에 교역이 끝없이 순환될 것이니, 촌구석의 어리석은 백성들도 화폐 사용의 이점을 알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진정 돈을 써보려고 한다면 이것이야말로 좋은 방책이 될 것이니, 이번 봄부터 경기 백성에게 징수하는 쌀 가운데 8분의 1을 덜어내어 화폐로 대신 징수케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영상에게 의논하여 처리하게 하라."
하였다. 영의정 정태화(鄭太和)가 아뢰기를,
"화폐 사용법은 반드시 민간에서 여유있게 가지게 된 뒤에야 유행시킬 수 있으니, 이는 참으로 선혜청이 아뢴 그대로입니다. 그런데 현재는 화폐가 중외에 두루 퍼져 있지 못하고, 서울 시민이 상평청에서 받아간 돈의 원수(元數)도 많지 않습니다. 따라서 혹시라도 장사치들이 약간 개인적으로 돈을 비축해 놓고서 시기를 틈타 이익을 독점할 목적으로 일반 시세로는 물건을 팔려고 하지 않을 경우, 기전의 백성들로서는 봄에 납부하는 기한에 쫓겨 일시에 갑자기 마련해야만 되는 상황에 봉착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쌀을 내는 어려움을 제거하려다가 거꾸로 배나 허비하게 되는 폐단이 생겨날 듯싶고, 중간에서 방납(防納)하는 폐단마저 없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의 어리석은 생각에는, 이번 봄은 예전대로 쌀로 징수하고 오는 가을부터 시행하시되, 원수(元數) 가운데 돈으로 징수할 수량을 작정해서 미리 경기 백성들에게 알려 줌으로써 그들 각자가 준비하게 한 뒤 때가 되면 관에 납부토록 하는 것이 마땅하리라고 여깁니다."
하니, 따랐다.

 

2월 2일 갑진

상이 주강에 나아가 《서전》 목서(牧誓)편을 강하였다.

 

의금부가 아뢰기를,
"역적의 자매로서 출가한 자에 대해 연좌율을 면제해 주는 한 조목에 관해서는 이미 성상의 분부에 따라 계품(啓稟)하여 확정했습니다. 그런데 역적의 아들로서 15세 이하인 자에 대해서는 율문(律文)에 단지 ‘공신의 집에 노비로 급부(給付)하라.’고 되어 있을 뿐 본래 정배시킨다는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전례(前例)를 가져다 상고해 보면 모두 노비로 삼아 정배시키는 것으로 되어 있어 율문과는 같지 않은데, 그렇게 된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율문에는 ‘백부·숙부·형제의 아들은 유 삼천리(流三千里)에 안치(安置)시킨다.’는 글이 있는데, 나이를 구분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갑자년의 수교(受敎)027)  를 가지고 상고해 보건대 ‘「역적에 연좌되어 유배될 자 가운데 2, 3세 되는 아이는 정배시키지 말라.」고 한 것은 삼촌인 숙질에나 해당되는 말로 역적의 아들로서 노비가 될 자는 이 범주에 들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3세 이하 어린 숙질에게는 유배를 면제시켜 준다는 것은, 율문에는 실려 있지 않지만 이미 법이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역적의 아들에게 정배를 면제해 주는 것은 필시 법전의 뜻이 아니기에 전후의 등록(謄錄)을 가져다 상고해 보니, 갑신년에 심적(沈賊)028)  을 처치할 때에 처음 시작된 것으로서, 이는 역적 김자점(金自點)이 새로 만들어 낸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만약 율문에 의거한다면 역적의 아들은 2, 3세 이하는 물론이고 15세 이하는 노비로만 삼아야지 정배시키는 것은 부당하며, 만약 전례를 적용할 경우에는 ‘3세 이하 어린 숙질에게는 유배를 면제해 주라.’는 수교(受敎)를 역적의 아들에게까지 혼동해서 옮겨 적용해서는 부당합니다. 그러므로 율문에 의거하여 시행하든 아니면 전례를 따라 시행하든 확실하게 하나로 통일하는 조치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일단 율문대로 적용하지도 않고 또 전례를 준수하지도 않는다면 일이 매우 근거없이 되겠기에 신들이 어제 탑전(榻前)에서 이러한 뜻을 진달드렸더니, 상께서 분부하시기를 ‘역적의 아들로서 15세 이하인 자에게 정배를 시키는 것이 율문과 같지는 않으나, 이는 필시 수교(受敎)를 말미암았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일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전례가 있으니만큼 지금 거론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3세 이하라고 하여 만약 정배시키지 않는다면 장성한 후에도 서울에서 편히 살게 한단 말인가. 어찌 전규(前規)를 버리고 적신(賊臣)이 새로 만들어 낸 규정을 여전히 쓸 수 있겠는가. 고치도록 하라.’ 하셨습니다. 이 분부가 참으로 타당하니, 이를 영원한 법으로 삼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영의정 정태화(鄭太和), 좌의정 김육(金堉), 우의정 이시백(李時白)에게 각각 안구마(鞍具馬) 1필을 면급(面給)하였다. 영중추부사 이경여(李敬輿)에게 숙마(熟馬) 1필을 면급하였다. 판중추부사 조익(趙翼)에게 숙마 1필을 사급(賜給)하였다. 판의금부사 원두표(元斗杓), 대사헌 이후원(李厚源), 동지의금부사 허적(許積)·심지원(沈之源), 대사간 이일상(李一相), 형방 승지 이응시(李應蓍), 문사 낭청 오정위(吳挺緯)·홍처대(洪處大)·민정중(閔鼎重)에게 모두 가자(加資)하였다. 동지의금부사 홍무적(洪茂績)에게 숙마 1필을 사급하였다. 문사 낭청 김좌명(金佐明)·정익(鄭榏)에게 각각 숙마 1필을 면급하였다. 판의금부사 심액(沈詻), 사관 정석(鄭晳)·이단상(李端相), 친국(親鞫)할 때 입시했던 승지 윤강(尹絳)·엄정구(嚴鼎耉)·유경창(柳慶昌)·조형(趙珩)·정유(鄭攸), 사관 곽제화(郭齊華)·김우형(金宇亨)·목내선(睦來善)에게 각각 반숙마(半熟馬) 1필을, 헌납 홍중보(洪重普)에게 아마(兒馬) 1필을 사급하였다. 형방 도사 정선흥(鄭善興)·신숭구(申嵩耉)에게 준직(准職)을 제수하고, 윤유근(尹惟謹)은 6 품으로 천전(遷轉)시키되 이미 출륙(出六)하였으면 승서(陞叙)케 하고, 홍주후(洪柱後)에게 4품직을 제수하였다. 문서 도사 강홍익(姜弘益)·이수익(李壽益)은 6품으로 천전시키되 이미 출륙하였으면 승서케 하였다. 나머지 사람들에게도 차등있게 논상하였다. 이는 김자점의 역옥(逆獄)을 다스릴 때에 국청에 참여했던 자들에 대해 상전(賞典)을 베푼 것이다.

 

이조가 아뢰기를,
"일찍이 선조(先朝) 때에 대간이 아뢴 것에 따라 아직 준직(准職)029)  을 거치지 않은 자는 당상의 자급(資級)으로 승진시킬 수 없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봉표관(封標官) 송준길(宋浚吉), 옥책 서사관(玉冊書寫官) 이정영(李正英) 모두에게 준직을 거치지 않았다는 이유로 자급을 승진시키지 못하게 하였으니, 이것이야말로 이미 굳어진 규정입니다. 이번의 문사 낭청 3인에 대해서는 아직 준직을 거치지 않았으므로 가자(加資)하라는 명을 거행할 수가 없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그렇다면 준직을 제수하라."
하였다.

 

2월 3일 을사

상이 주강에 나아가 《서전》 목서(牧誓)편을 강하였다. 강이 끝나자 지경연 박서가 아뢰기를,
"근래에 전하께서 잇따라 옛날 성인들이 용병(用兵)하던 도를 익히고 계시는데, 신이 우리 나라 군정(軍政)의 허술한 점을 말씀드릴까 합니다.
요즘 융사(戎事)가 구애를 받는 점이 있는데, 양서(兩西)는 완전히 포기 상태이고, 오직 삼남(三南)만이 연습을 시키고 있습니다만 그 또한 착실치 못합니다. 그 이유는 영장(營將)을 혁파한 뒤로 수령이 겸임하게 되어 전적으로 그 일에 신경을 쓸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군정을 다시 밝히려 한다면 무엇보다도 다시 영장을 설치하여 그들로 하여금 전심전력 거행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만약 그들에게 물자를 지급하여 편히 살도록 하는 일을 어렵게 여긴다면, 그 또한 각 고을의 모곡(耗穀)을 덜어내어 지급함으로써 물자를 수송하는 데 따른 폐단을 없게 하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꼭 무변(武弁) 당상만을 차출해 보낼 것이 아니라, 당하관 가운데에서도 장령(將領)에 합당한 자를 가려 오래도록 임무를 부여해 성과를 거두도록 책임지운다면, 필시 그 직책을 제대로 수행하는 자가 나오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과연 직책을 잘 수행하는 사람이 있으면 발탁해서 곤수를 제수해도 될 것입니다. 대신에게 의논하여 결정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옳다. 묘당으로 하여금 의논하게 하라."
하였다. 상이 특진관인 형조 참판 김여옥(金汝鈺)에게 하문하기를,
"경이 방금 호서(湖西)에서 방백을 하다가 돌아왔는데, 그 지방의 수령들도 역시 군정(軍政)을 거행하지 못하던가?"
하니, 여옥이 대답하기를,
"신이 호서에 있으면서 여러 고을의 군병을 점검해 본 결과, 형편없는 지경에까지 이르지는 않은 듯합니다만, 대체로 듣건대 수령이 영장을 겸임하게 된 이후로는 군정을 수행하는 것이 영장이 설치되었던 때보다 못하기 때문에 여러 고을의 군액(軍額)이 날이 갈수록 감축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여옥이 또 아뢰기를,
"신이 듣건대 익평위(益平尉)의 궁노(宮奴)와 형조의 아전이 서로 싸운 죄목으로 현재 내옥(內獄)에 갇혀 있다 하니, 유사에게 내주어 법대로 다스리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질시켜 분별할 일이 있었기 때문에 과연 내옥으로 하여금 가두고 다스리게 하였다마는, 지금부터는 형조로 하여금 다스리도록 하라."
하였다.

 

동래 부사(東萊府使) 윤문거(尹文擧)가 치계하였다.
"방금 역관이 왜관에 머물러 있는 왜인에게서 들었는데, 그가 말하기를 ‘지난 가을에 강호(江戶)의 왜(倭)030)  가 모반하다가 일이 발각되어 처형된 자가 1천 인이고 자살한 자가 수백 인이며 도주한 자 또한 많은데, 지금은 이미 평정되었다.’라고 합니다."

 

간원이 【헌납 윤집(尹鏶), 정언 심유행(沈儒行).】  아뢰기를,
"대옥(大獄)을 이제 막 마무리하였으니 인심을 진정시키는 것이 오늘날의 급선무인데도, 전 대사간 이시해(李時楷)는 혐의쩍은 형적(形跡)을 피하지도 않은 채 지나치게 솎아내려는 계획을 세운 나머지 조정에 있는 인사들로 하여금 대부분 불안감을 느끼게 하였고, 전후에 걸쳐 보여준 행동도 장황하고 뒤바뀐 결과를 면치 못하였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실로 여론이 그를 인정하지 않는 바로서 성명께서도 통촉하고 계실 것입니다.
그리고 이시방의 일에 있어서는 이를 과연 논하지 않고 그만둘 수는 없겠으나, 무턱대고 멀리 유배보내기를 청한 것이야말로 상당히 과중한 처사였다고 하겠으니, 아무리 언관이라 하더라도 어떻게 죄를 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대신이 진달해 아뢰고 성상께서 엄하게 분부를 내려 배척해 축출한 것이야말로 바르게 조정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시방을 멀리 귀양보내도록 이시해가 논한 것을 이미 너무 심했다고 말하고 있다면, 이시해를 증도 부처(中道付處)시키는 것 또한 어찌 율에 합당한 것이라고 하겠습니까. 더구나 이시해는 말할 책임이 있는 자인데이겠습니까. 만약 율을 적용하려는 것이 과중했다는 이유로 도리어 편배(編配)031)  까지 한다면, 인심이 만족스럽게 여기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성명한 조정의 지나친 조처가 될 듯싶습니다. 이시해를 증도 부처시키도록 내린 명을 도로 거두시고 그에 상당한 율을 헤아려 시행케 하소서.
전 판서 이시방이 김자점과 서로 친하게 지냈던 사실은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는 일로서 형세상 반드시 친하게끔 되어 있으니 본래 괴이하게 여길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김자점이 역모를 한 흉계에 대해서는 그가 헤아려 알 수 없었다 하더라도, 김자점이 포악한 행동을 제멋대로 한 것에 대해 온 나라 사람이 미워했는데도 이시방은 너무도 유별나게 절친하게 지냈고, 김자점이 축출되어 유배를 당하자 온 나라 사람이 통쾌하게 여겼는데도 시방만은 유독 탄식하고 애석하게 여겨서, 시종일관 그를 연연하며 혼미한 정신상태로 깨닫지 못했으니, 오늘날 그에 대해 논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선견지명이 없었다는 이유로 무턱대고 멀리 유배보내는 것은 과중한 조치일 듯하니, 율을 참작해 적용함으로써 그 죄에 맞게 하자는 것이 실로 공공(公共)의 여론으로 되고 있습니다. 이시방을 삭탈 관작하고 문외 출송(門外黜送)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사람들의 소견이 앞뒤가 이렇듯 같지 않다니, 참으로 탄식할 일이다."
하였다. 여러 차례 아뢰니, 이시방은 먼저 파직한 뒤에 추고하라고만 윤허하였다.

 

지평 이무(李袤)가 상소하였는데, 그 소의 대략에,
"신이 지난번 듣건대, 역조(逆趙)032)  와 김자점이 안으로는 고독(蠱毒)033)  을 자행하고 밖으로 역모를 꾀하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정형(正刑)에 처해졌는데, 천지와 종묘 사직과 백성의 분노를 크게 풀게 되었으므로 원근의 인민(人民)들이 서로 춤추며 축하하고는 이구동성으로 말하기를 ‘두 역적이 이토록까지 악행을 저지르고 화를 일으키지 않았다면, 한 달 사이에 하늘이 내린 재앙이 필시 이렇게까지 급박하게 일어나지는 않았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합니다.
다만 오늘날 역적 조의 흉모를 보건대, 어쩌면 그렇게 신생(辛生)의 일034)  과 비슷합니까. 신생이 아직도 그 흉측한 목숨을 보전하고 있고 보면, 서로 내통하지 않았으리라고 어떻게 보장하겠습니까. 앞뒤로 일어난 고독 사건이 마치 한 사람의 솜씨에서 나온 것 같으니, 처음 인형을 만든 자는 신생이고 그 법을 전해 받은 자가 역적 조라고 해도 괜찮을 것입니다. 그런데 더구나 앵무(鸚鵡)035)  의 공초(供招)에 다 발굴하지 못한 곳이 있다고 했는데이겠습니까. 만약 제 때에 신생을 잡아들여 엄히 국문해서 사실을 알아낸 뒤 중외(中外)에 널리 알려 그 죄를 분명하게 바로잡지 않는다면, 신은 어리석은 백성들의 의혹을 풀지 못함은 물론 영원히 그 뿌리를 근절시키지 못하게 될까 염려됩니다.
그리고 역적을 토벌하는 일이야말로 인신(人臣)이 행해야 할 대의이니, 괴수를 잡아 죽인 뒤에 그 나머지 무리들을 다스리는 일을 급히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역당(逆黨)이라는 죄명이 얼마나 엄청난 것입니까. 조금이라도 함부로 잘못 처리함으로써 드러내기 어려운 지극한 원한을 품게 하는 것 또한 신중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니, 이것이 바로 한 사람도 억울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논리인 것입니다. 이처럼 다 함께 경하해야 할 날을 당하여 어디까지나 국가의 일이라는 차원에서 처리해야지 일가(一家)의 일에 구애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동심 협력하여 가부(可否)를 공평하게 하고 정상을 참작해서 정죄(定罪)한 뒤 경중에 따라 율을 의논하면서 과(過)와 불급(不及)의 차이가 없게끔 각각 그 중(中)에 맞게 한다면, 인심이 모두 복종하고 공론을 진정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쩌면 이토록 한결같이 소견들이 모순되어 분분하게 소요를 일으킨단 말입니까. 어떤 사람은 축출하고 어떤 사람은 외방에 보임한 것이 아무리 진정시키려는 계책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지라도, 가면 갈수록 서로들 격화되어 거꾸로 한층 풍파를 일으키는 결과가 되고 만다면, 신은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그대가 말해 준 정성을 대단히 가상하게 생각한다. 그런데 어찌하여 암시만 하고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는가."
하였다.

 

진선(進善) 송시열(宋時烈)이 상소하기를,
"삼가 생각건대 근래에 국운이 불행하여 저주(詛呪) 사건이 안에서 일어나고 역모의 씨앗이 밖에서 싹텄는데, 다행히도 상제께서 보우하시어 원악(元惡)이 주륙(誅戮)되고 위협에 못이겨 따른 자들은 모두 용서받았습니다. 그리하여 참혹한 음기(陰氣)가 태양 아래 녹아버리고 지극히 인자스런 덕화가 펴지게 되어 온 나라의 백성들이 모두 성덕(聖德)을 기리고 있으니, 이는 참으로 전하께서 전화위복하신 융성한 때라 할 것입니다.
지난번에 조정의 신하들이 김세룡(金世龍)036)  의 처(妻)037)  를 논했을 때, 성상께서 유시하신 것이 간절하여 우애하는 정이 언외(言外)에 흘러 넘쳤으니, 아무리 완악하고 어리석은 하천배라도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백성의 덕성이 도타워지고 이를 인하여 천리(天理)가 밝아져 불궤(不軌)를 도모하는 불량한 싹이 멀고 가까운 곳을 막론하고 자취를 감추게 되었으니, 이 어찌 성대한 일이 아니며 이 어찌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번에 공의(公議)를 존중해 따르시면서 단지 안치(安置)시키는 법전만 적용하도록 하신 이 일이야말로 삼대(三代) 이후로는 볼 수 없었던 성대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신은 또한 전하의 지극한 정에 비추어 볼 때 역시 이렇게는 차마 하지 못하실 점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신이 삼가 생각건대, 그녀의 나이가 아직 상년(殤年)038)  이고 보면, 예(禮)에서 이야기하는 미성년자(未成年者)에 해당됩니다. 또 그 어미의 흉악하고 사특한 음모가 강보(襁褓)에 있을 적부터 귀에 젖어들고 눈을 오염시킨 나머지 마침내는 그 일을 당연시했을 것이고, 그 결과 천륜(天倫)의 지친(至親)을 외경해야 한다는 것과 반역의 악행은 따르지 말아야 한다는 것도 모른 채 끝내 이런 지경에까지 이르고 말았으니, 그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 따진다면 그 죄가 실로 그 어미에게 있다 할 것입니다. 아, 문왕(文王)의 인후(仁厚)한 한 정기(精氣)가 사악한 문강(文姜)의 몸에 의탁하여039)   우리 인지(麟趾)의 교화를 이토록까지 더럽히게 될 줄이야 누가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다만 생각건대 그녀는 깊은 궁궐에서 성장하여 거처와 음식 등에 있어 지극히 안락한 생활을 해 왔는데, 하루아침에 폐쇄된 공간 속에서 암울하게 지내야 되는 운명에 처해졌습니다. 따라서 혹시라도 그 목숨을 끊기라도 한다면, 그녀가 죽는 것이야 애석해 할 것이 없다 하더라도 전하께서 온전히 살려주려고 했던 마음에는 손상이 있게 될까 두렵습니다. 옛날 한(漢)나라 유장(劉長)의 모반 사건이 발각되었을 때에 문제(文帝)가 그를 촉(蜀)으로 옮기면서 말하기를 ‘나는 단지 그에게 고생을 맛보게 하려는 것일 뿐이니, 장차 복귀시킬 것이다.’ 하였는데, 끝내는 길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이에 대해 주자(朱子)가 논하기를 ‘문제가 회남왕(淮南王)을 옮긴 것은 생각을 조금 잘못한 결과인데 척포 두속(尺布斗粟)의 풍요(風謠)로 종신토록 괴로움을 당한 것은 형으로서 아우를 제대로 포용하지 못한 이상 아무리 현주(賢主)라도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였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시종일관 보호하고 살려 주시어 조만간 은혜를 입게 하소서. 그리하여 그녀가 얼굴 가득 부끄러운 기색을 띠고 궁에 들어와 옛날 순(舜)임금의 동생 상(象)이 했던 것처럼 계면쩍은 말로나마 사과를 한다면, 전하께서도 기뻐하시는 마음이 일어나 필시 화기애애하게 될 것입니다.
신은 또 삼가 듣건대 정신(庭臣)들이 징과 숙을 선처할 도리를 잇따라 논하면서 심지어는 안치(安置)시켜야 한다는 의논까지 드렸다 합니다. 이것이 아무리 화근을 미리 막아 보전시키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라 할지라도, 외방 사람들의 눈으로 볼 때에는 그 누군들 추방하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겠습니까.
대체로 생각건대, 오늘날 정신들이 청하는 것 또한 어찌 이징 등에게 죄가 있다고 여겨 법으로 다스리려고 하는 것이겠습니까. 그들의 생각은 단지 ‘화근이 이미 싹텄으니, 만약 미리 방지하지 못하여 간사한 자들로 하여금 뒷날 구실을 삼을 수 있는 자료가 되게 한다면 성상께서 아무리 시종일관 보전해 주려고 하시더라도 안 될 것이다. 따라서 차라리 멀리 절도(絶島)에 안치시켜 간사한 자들이 엿볼 수 없도록 미리 근절시키는 것이 나을 것이니, 이것이야말로 그를 보전시키는 방법이 될 것이다.’ 하고 여긴 것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러나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그렇지 않은 점이 있습니다. 한 문제가 회남왕을 촉(蜀)으로 옮길 때에 그의 의도는 단지 그를 좀 고생시켜서 보전해 주고 곧 복귀시키려고 한 것이었으니, 그 마음은 지극했다고 일컬을 만합니다. 그러나 미처 복귀시키기도 전에 수레 속에서 이미 죽고 말았으니, 그를 고생시켜 보전해 주려고 한 그 의도가 무슨 소용이 있었겠습니까. 대체로 사변(事變)이 일어나는 단서는 항상 생각하지도 못했던 곳에서 기인합니다. 원앙(袁盎)040)  은 회남왕에 대해서 단지 생활하기 불편하리라는 점만 염려했습니다만, 정작 회남왕이 죽은 것은 분노가 가슴속에 쌓인 결과였습니다. 한 번 일에 차질이 생기면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더구나 소인의 마음이란 늘 사심을 가지고 임금의 마음을 망령되이 헤아리는 법이니, 이는 지난날 정항(鄭沆)의 일에서도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041)  어떤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그의 어미가 이미 죽음을 당했으니 필시 참기 어려울 것이다.’고 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이는 또 그렇지 않은 점이 있습니다. 그의 어미가 신인(神人)에게 죄를 얻어 주륙(誅戮)을 자초하였으니, 이는 전하가 주륙한 것이 아니라 곧 천지(天地)가 주륙한 것이며 종묘 사직이 주륙한 것이며 온 나라 사람들이 공동으로 주륙한 것입니다. 따라서 그가 아무리 우매하다 하더라도 어떻게 성상을 원망할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천주(天誅)로 그의 어미를 죽이고 천륜(天倫)으로 그의 몸을 어루만져 주면서 선왕(先王)의 슬하에 같이 있을 때와 아무런 차이 없이 사랑해 준다면, 그가 마음속으로 감격하는 것이 평소보다 더욱 깊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 조정의 신하들이 지나치게 염려한 나머지 무턱대고 꼼짝 못하게 막아버릴 경우, 그는 장차 경황없이 근심하고 두려워하며 어떻게 할지를 모를 것입니다. 이때 간사한 자들이 망령되이 서로 헤아리며 일을 저지른다면, 이렇게 된 뒤에는 전하께서 아무리 돈독히 사랑하는 정을 베푸시려 하더라도 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비록 일이 일어나기도 전에 방정맞게 생각하는 것일지는 모르나, 전하의 충성된 신하의 입장에서야 어찌 속으로 걱정하며 길이 염려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이것은 그래도 지나치게 염려한 것일지 모르나, 유배하고 옮기는 과정에서 그의 몸이 손상될 걱정은 꼭 없으리라고 보장하기 어렵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 심사 숙고하시어 한 문제와 같은 후회가 없도록 하신다면, 그런 다행이 없겠습니다.
신은 또 듣건대 조정의 신하가 대내(大內)에 저주하는 변고가 있었다는 이유로 거처를 옮길 것을 강력히 청했다 합니다. 임금을 사랑하는 신하의 정성으로서는 염려하지 않는 구석이 없어야 하는 까닭에 이렇듯 부득이한 의논을 드린 것이라고 하겠는데, 전하께서도 자전(慈殿)을 염려하시어 따르지 않을 수 없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신은 듣건대, 천지의 본성을 밝게 아는 자에게는 신괴(神怪)를 가지고 미혹시킬 수 없고, 만물의 실상을 환히 아는 자에게는 얼토당토 않은 말로 속일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더구나 제왕이야말로 천지의 명(命)을 품부받고 태어나 종묘와 사직의 주인이 되신 분으로서 온갖 신(神)이 호위하고 만 백성의 정성이 그 한 몸에 모여 있는데, 저 보잘것없는 사얼(邪孽)이 어떻게 감히 그 사이를 범접하겠습니까. 태양은 뭇 양(陽)의 종주가 되는 까닭에 햇무리나 무지개가 일어난다 하더라도 그 양덕(陽德)은 아무런 손상도 입지 않는 법입니다. 만약 이 마음을 환히 밝게 하시어 그런 현상이 있을 때는 있다가도 없어질 때는 바로 없어지는 것으로 여기게끔 하신다면, 두려워하는 것이 아무 근거도 없다는 것을 아시게 될 것입니다.
다만 후세에 인심이 상당히 편벽스럽게 되었고 보면 인귀(人鬼)가 침범하는 걱정이 없지 않기 때문에,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눈 깜짝할 사이에 그림자가 비치는 듯 소리가 들리는 듯하는 것은 곧 마음에 확고한 주견이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요망한 귀신이 그 틈새를 뚫고 들어와 못할 짓 없이 간교를 부리면서 화란을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그러나 소자(邵子)042)  의 말을 빌리면 ‘귀신이 사람을 무서워하는 것은 또 사람이 귀신을 무서워하는 것과 같다. 적선(積善)을 많이 하면 양(陽)이 점점 많아져서 귀신이 더욱 무서워한다.’고 하였습니다. 보통 인간들도 제대로 적선하기만 하면 귀물(鬼物)이 자연 범접하지 못하는 법인데, 더구나 인군(人君)이겠습니까. 덕을 닦아 인을 행하고 신실함이 몸에 배어 순리대로 해 나간다면 요망하고 사특한 기운이 구름이나 안개처럼 저절로 사라질 것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더욱 성학을 밝히시고 성덕에 한층 힘을 쓰소서. 그리하여 양도(陽道)를 붙잡아 간특한 귀신들을 사라지게 하고, 경솔하게 의혹에 휘말려 청명하고 정대한 기운이 다치지 않게 하신다면 더없는 다행이겠습니다.
신은 또 생각건대, 역도들의 악행이 지극히 흉악하여 진정 하지 못하는 짓이 없었으나, 그 추악한 종자들이 하고 싶은 대로 활개치고 다닌 배후에는 또한 궁위가 엄숙치 못했던 탓도 있지 않았나 여깁니다. 당(唐)나라 현종(玄宗)이 송왕(宋王) 성기(成器) 등과 함께 며칠 밤을 계속 같은 이불을 덮고 잤으니, 그야말로 제왕의 미행(美行)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자는 오히려 이에 대해 ‘다시 제한을 두지 않았으니 우애하는 도리가 미진하였다.’고 하였으니, 그 은미한 뜻을 알 수 있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우애의 정과 군신(君臣)간의 분수가 어긋나지 않게 병행된 뒤에야 길이 화목하게 지내는 즐거움을 보전할 수 있게 되리라고 여깁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다시 유의해 주소서.
그리고 경연에서 강설(講說)하는 것도 한갓 형식적으로만 응하시어 성학(聖學)에 날로 새로워지는 효과가 나타나지 않고, 직언은 듣기 싫어하고 충현(忠賢)은 모두 쫓아내어 위아래가 화기애애하게 통하는 때가 없습니다. 그리하여 중흥하는 대업이 날로 멀어져 가고 달마다 시들해지니, 이것이야말로 식자들이 장탄식을 스스로 금하지 못하는 일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이 모두에 대해 유념해 주소서.
이상의 내용을 정사(淨寫)하여 바치려고 할 때에, 삼가 듣건대 이징 등을 이미 섬에 안치시켰고 온건론을 주장한 간신(諫臣)이 또 배척당해 파직되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신의 이런 주장은 이제 잘못되고 망령된 것이 되었음을 너무나도 잘 알겠습니다. 그러나 일단 마음속에서 생각이 발동하여 문장으로 작성까지 하였는데, 모른 채 덮어둠으로써 죄를 면하기를 바란다는 것도 신으로서는 마음 편한 일이 되지 못하겠기에, 마침내 감히 무릅쓰고 진달드리면서 중한 벌이 내리기를 기다립니다. 그런데 구구한 신의 정성으로도 오히려 염려하여 마지 못하겠는데, 근일 이래로 거리와 마을에서는 이야기하고 의논하며 눈물을 흘리는 자까지 있게 되었습니다. 모르겠습니다만 성명께서는 어떻게 스스로 해명하시겠습니까. 이 일에 대해 만에 하나라도 차질이 없도록 하시어 끝내 뭇 백성들의 의혹을 풀어 주신다면, 신은 당장 복주(伏誅)되더라도 지극히 만족스럽게 여기며 조금의 여한도 없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소장을 살펴 보건대 정성껏 걱정하며 사랑하는 충성심이 끝없이 간절하게 펼쳐 있었다. 여러 가지로 경계하고 깨우쳐 준 말들이야말로 약석(藥石)이라고 할 것인데, 진정 지극한 정성이 아니라면 어떻게 이렇게까지 하겠는가. 내가 불민하기는 하나 어찌 가슴에 새기지 않겠는가. 설령 질병 때문에 바로 올라오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때때로 덕음(德音)을 들려 주어 나의 잘못을 보완해 준다면, 곁에 있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앞으로 날씨가 화창해지면 부디 나의 지극한 뜻을 체득하여 몸조리해서 올라 오도록 하라."
하였다.

 

2월 4일 병오

김신국(金藎國)을 판의금부사로, 이정영(李正英)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상이 하교하였다.
"전 정언 서필원(徐必遠)을 서용(叙用)하라."

 

운산 군수(雲山郡守) 이증(李憕), 익산 군수(益山郡守) 김수창(金壽昌), 배천 군수(白川郡守) 정륜(鄭錀), 안동 판관(安東判官) 이예남(李禮男), 무안 현감(務安縣監) 이선(李䆄), 해미 현감(海美縣監) 이필형(李必馨), 봉산 현감(鳳山縣監) 이문주(李文柱)가 사조(辭朝)하니, 면유(面諭)하여 보냈다.

 

2월 6일 무신

병조가 아뢰기를,
"각도(各道) 수군의 역(役)은 다른 역에 비해서 배나 과중합니다. 우선 홍청도 수영(水營)을 예로 들어 그 큰 것만 뽑아내어 말하건대, 1년에 번포(番布)043)  로 3필을 내는 외에 역가(役價)·찬가(饌價)·육물가(陸物價)를 또 목면(木綿)으로 갖추어 바쳐야 합니다.
이른바 육물이란 즉 생갈(生葛)·생마(生麻)·백석(白席)·초둔(草芚)044)   등의 물건을 말하는데, 매년 1인당 거두는 것을 계산하면 그 수가 엄청나게 많습니다. 또 삼질(三秩)의 역(役)이 있습니다. 이른바 삼질이란 바로 영속(營屬)의 진무(鎭撫)·사령(使令)·등패(等牌)를 말하는데, 종마(從馬)라고 일컬으면서 수군이 입번(入番)할 때마다 개인별로 징수하는 포목의 숫자가 또한 많습 니다. 이 밖에 교초(郊草)045)  를 무명으로 환산하여 내게 하고 어물(魚物)을 무역해 팔게 하는 등 과외(科外)로 마구 징수하는 폐단이 한정이 없습니다. 또 이른바 미리 배정해주는[豫定] 폐단이 있습니다. 당사자의 신역(身役)을 면제해 주는 대신 미곡·견사(繭絲)·목화·지지(紙地)·철물(鐵物)·과일 같은 일체 소용되는 잡물(雜物)들을 미리 배정하는 것인데, 번포에 비해 배나 되는 숫자를 강제로 징수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1년에 징수하는 것이 무려 목면 수십 단(端)이 되기 때문에, 불쌍한 군졸들의 원성이 하늘을 찌르고 있습니다.
지난 무인년 사이에 영의정 정태화(鄭太和)가 본도의 감사로 있을 때에 본영(本營)에 분부하여 이런 폐단을 개혁해 없애도록 하였는데, 그 뒤로 폐단이 전일과 마찬가지로 되었으니, 참으로 가슴 아프고 놀랍기 짝이 없습니다. 병영(兵營)은 수영만큼 심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이런 폐단이 없지 않은데, 이 도만 그런 것이 아니라 다른 도도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현재 홍청 수사(洪淸水使)가 보령 부사(保寧府使)를 겸하게 하고 병사가 청주 목사(淸州牧使)를 겸하게 하였는데, 이런 제도를 신설한 초기에 반드시 고질적인 폐단을 제거하여 군졸들을 보존시킬 발판을 마련해야 하리라고 여깁니다. 그런데 조정에서도 이에 힘쓰도록 신칙하는 조처가 없어서는 안 될 것이니, 묘당으로 하여금 참작해서 분부하도록 하소서."
하니, 따랐다. 비변사가 복계(覆啓)하기를,
"병사와 수사가 교묘하게 명목을 만들어 군졸들을 착취하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래서 조정에서 그전부터 경계시키고 단속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폐습이 이미 고질화하여 따르려고 하지를 않고 있습니다. 지금 병사와 수사가 수령을 겸하도록 새로 규례를 창립한 때에, 만약 옛날의 폐단을 모두 개혁하지 않는다면 군졸들이 소생하게 될 기약이 없을 것이니, 병조가 아뢴 의도는 실로 이에 있습니다.
병사와 수사의 경우는 수령을 겸하게 되어 이미 대동미(大同米)를 제급(題給)받을 뿐 아니라 장사(將士)의 지공(支供)도 그 안에 포함되었으니, 이 뒤로 만약 조금이라도 군졸을 침해하는 일이 있으면 일이 발생되는 대로 적발해 내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어사(御史)가 염찰(廉察)046)  할 때에도 반드시 군병의 질고(疾苦)를 두루 물어 본 뒤, 만약 여전히 침해하는 자가 있으면 중률(重律)로 다스려야 마땅합니다. 이런 내용으로 홍청도의 병사와 수사에게 분부하시는 동시에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각별히 신칙하도록 하소서. 그리고 다른 도의 병사와 수사는 수령을 겸하지는 않지만 과외로 가렴 주구하는 자는 역시 엄금해야 마땅하니, 다른 도의 감사와 병사·수사에게도 아울러 공문을 보내도록 하소서." 하니, 따랐다.

 

2월 7일 기유

상이 주강(晝講)에 나아가 《서전》 목서(牧誓)편을 강하였다. 강이 끝나자 상이 특진관 허적(許積)에게 하문하기를,
"근래 경중(京中)에 화폐를 유통시켰는데, 이해 관계가 어떠한가?"
하니, 허적이 막혀서 유통되지 않아 발생하는 폐단을 극언하자, 상이 이르기를,
"나도 이 점을 염려하였다."
하였다. 상이 또 동지경연 윤순지(尹順之)에게 하문하니, 순지는 매우 편리하다고 아뢰었다. 상이 허적에게 이르기를,
"지금 돈을 주조(鑄造)하느라 들어간 비용이 매우 많다. 모름지기 민정(民情)을 살펴 과연 막혀서 유통되지 않는 일이 있거든, 강행하지 말고 다시 품하여 정하도록 하라."
하였다.

 

2월 8일 경술

심지원(沈之源)을 이조 참판으로, 심광수(沈光洙)를 장령으로, 이태연(李泰淵)을 교리로, 김휘(金徽)를 부수찬으로, 서필원(徐必遠)을 정언으로 삼았다.

 

상이 하교하였다.
"나라에 대사령(大赦令)을 내려 온 나라가 기쁨을 같이 나누고 있으니, 이치상 유신(維新)에 모두 참여케 하는 것이 온당하다. 조석윤(趙錫胤)·남중회(南重晦)·이경억(李慶億)을 모두 석방하라."

 

2월 9일 신해

상이 암행 어사 채충원(蔡忠元)·민정중(閔鼎重)·남용익(南龍翼)을 불러서 보고, 이어 유시하기를,
"한 고을의 행·불행은 전적으로 수령에게 달려 있는데, 해조가 사정(私情)을 따라 의차(擬差)한 결과 대부분 적임자를 가려 보내지 못해 백성의 고달픔이 아직도 해소되지 못하고 있다. 지금 그대들을 보내 두루 그들의 현부(賢否)를 살펴 보게 하는 목적은 그들을 출척(黜陟)하고 상벌을 내리려고 하는 뜻에서이다. 일찍이 초야에서 올린 소장을 보건대, 모두들 어사가 염찰(廉察)하는 것이 불공정하고 엄격하지 못하다고 하였다. 그대들은 모두 경악에 몸담고 있는 신하이니, 만약 탐욕을 부리면서 백성을 학대하는 자가 있거든 친소(親疏)에 구애받지 말고 사실대로 보고하라. 그리고 민간의 폐단도 자세히 살피도록 하고, 종전의 어사들처럼 돌아오기에 급급한 나머지 허둥지둥 보고 들은 것을 가지고 보고하여 책임만 메꾸려고 하지 말라."
하였다. 이어 특별히 양찬(粮饌)을 내리도록 명하였다.

 

영의정 정태화(鄭太和)가 세 차례째 정고(呈告)하니, 모두 윤허하지 않는다고 비답하라고 명하였다.

 

2월 10일 임자

상이 주강에 나아가 《서전》 무성편을 강하였다.

 

2월 11일 계축

상이 주강에 나아가 《서전》 무성편을 강하였다.

 

정언 서필원(徐必遠)이 인피(引避)하기를,
"신은 이시해(李時楷)를 논하는 것에 대해 동료와 의견이 같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대옥(大獄)이 마무리된 뒤에 이시해가 ‘솎아내어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한 것을 그의 죄안(罪案)으로 삼고 있습니다만, 그것은 글을 작성할 때 저지른 작은 실수에 불과하니, 이것을 죄로 삼는 것은 본래 아름다운 일이 못 됩니다. 그리고 이시방의 일로 말하건대, 이시방은 백옥처럼 아무런 하자가 없고 이시해가 그를 논한 것이 전적으로 얽어 모함하기 위한 의도에서 나온 것이라면, 이시해에게 반좌율(反坐律)을 적용한다 하더라도 결코 애석해 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시방을 삭탈 관작하여 문외 출송(門外黜送)시켜야 한다는 논이 한 시대에서 공공연히 일어난 주장이었고 보면, 이시해가 잘못한 것은 그저 그에게 적용한 율(律)이 1, 2등(等)을 초과했다는 것일 뿐입니다. 그런데 하나의 율을 조금 지나치게 적용했다고 해서 어찌 증도 부처(中道付處)하는 죄로 삼을 수 있겠습니까.
이시해가 이시방을 논한 것이 이미 중도(中道)를 벗어난 실수라 하겠는데, 국가가 이시해를 논하면서 또 중도를 벗어난 실수를 빚었습니다. 이렇듯 서로 돌아가며 중도를 벗어난다면, 모르겠습니다만 어느 때나 중도에 맞는 행동을 할 수 있겠습니까. 대체로 언관(言官)이 잘못을 범했을 때에는 그것이 용서할 여지가 없는 과오만 아니면 실로 너그럽게 포용하여 다른 사람들을 권장해야 마땅합니다. 설혹 이시해에게 죄가 있다 하더라도 지난번 특별히 체직시킨 것으로 충분히 일단락 지을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대관(臺官)된 자의 도리로서는 그저 성명(成命)을 환수하시도록 청하기만 하면 될 것이니, 이 밖에 거기에 상당한 율이 있는지는 신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신은 감히 구차하게 동의할 수 없으니, 신을 체직하소서."
하고, 헌납 윤집(尹鏶)이 인피하기를,
"신의 어리석은 생각은 이렇습니다. 이시해가 대옥을 마무리짓고 진정시켜야 할 때에 간곡한 분부를 체득하지 못한 채 감히 ‘솎아내어 다스려야 한다.’는 설을 꺼냄으로써 조정에 있는 인사들로 하여금 불안감을 많이 갖게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글을 작성할 때 조금 잘못한 것이라고만 하겠습니까. 따라서 대신이 진달하여 아뢰고 성상께서 배척하여 축출하신 것이 단지 이시방이 율을 과중하게 적용했다는 이유만은 아니라는 것을 신은 진정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조정을 바르게 조정하고 진정시키는 뜻으로 말하건대, 이시방을 멀리 유배보내도록 청한 것이 이미 과중하게 처리한 실수였다면, 이시해를 증도 부처토록 한 것 역시 어찌 율에 합당한 것이라 하겠습니까. 더구나 일을 말하는 대각(臺閣)의 신하에게 느닷없이 편배(編配)의 형벌을 가한 것이야말로 아름다운 일이 못 되는 것으로서 후일의 폐단 또한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신은 시종일관 모두 이런 의도에서 논집(論執)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이시해는 전연 잘못이 없으니 그저 성명(成命)을 환수하시도록 청하기만 해야 한다고 한다면, 이에 대해서는 신의 소견에 그렇지 않은 점이 있습니다. 당초 동료들과 논계하면서 합당한 율을 헤아려 시행할 것을 청한 것은, 신도 군의(群議)에 비난받을 줄 알았습니다만, 대체로 이것이 원래 아래에서 논하여 청했던 죄가 아니고 특별한 유지로 율을 결단해서 나왔기 때문이었으며, 짐짓 감히 정안(定案)으로 진달하여 아뢰지 않은 것은 성명께서 여러 모로 참작하고 절충하시어 끝내는 무편무당(無偏無黨)한 도리로 귀결지어 주시기를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동료가 재량껏 시행하도록 청한 것은 잘못이라고 지적하면서 인피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나 모르겠습니다만, 이시해의 잘못이 과연 특별히 체직시키고 그만두면 될 성질의 것이겠습니까? 아, 조정의 논의가 한 번 어긋나자 돌아가며 서로들 격렬해지기만 하고 한 번 틈이 벌어지자 다시는 합치되는 때가 없습니다. 안정되지 못할 단서가 이로부터 날로 심화되고 있으니, 뒷날의 폐단이 이루 말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신의 소견은 동료와 서로 배치되니, 신을 체직하소서."
하고, 대사간 민응협(閔應協)이 인피하기를,
"이시해가 지난번에 처리했던 일은 원래 공의(公議)에 의해 비난받았습니다만, 편배(編配)까지 시킨 것은 또한 뒷날의 폐단이 없지 않을 일이었습니다. 따라서 본원이 아뢰었던 것은 공도(公道)에 입각하여 시비를 분간하고 대각의 체통을 일으켜 세울 수 있도록 함으로써 이 두 가지 모두 어긋나지 않고 병행케 하려는 목적에서였습니다.
최근 들어 전파되는 이야기들을 진정 다 믿을 수는 없지만, ‘솎아내어 다스려야 한다.’는 주장을 이런 때에 발언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대부분 의혹에 휩싸이게 하였으니, 공의가 이시해를 비난하는 것이 어찌 다만 그가 이시방을 유배시키도록 청한 하나의 일 때문만이라고 하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원에서 논한 것은 오히려 증도 부처시킨 것을 과중하게 생각하여 성명을 환수하시도록 청했고 보면, 서필원이 허다하게 이야기를 늘어놓은 의도가 있다고 여깁니다. 그저 성명을 환수하시도록 청하기만 했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신의 의견과는 같지 않으니, 어떻게 구차하게 동의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신의 생각에는 이시해에 대해 파직이나 삭직(削職)으로 논한다 해도 안 될 것이 없다고 여기는데, 양사의 동료들이 그 율명(律名)을 정하지 않은 채 해당되는 율을 헤아려 시행하라고 막연하게 청했으니, 이는 느슨하게 조어(措語)한 것에 비교될 성질이 아닙니다. 그런데 신은 그것이 합당하다고 속으로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그대로 따라 연계(連啓)했다가 이렇듯 동료의 배척을 받았으니, 어떻게 감히 태연히 그대로 있을 수 있겠습니까. 신을 체직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서필원 등이 모두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헌부가 【집의 박길응, 지평 한진·이무이다.】  아뢰기를,
"저주하고 역모를 꾀하는 것이 천하의 악이라는 점에서는 한가지입니다. 그런데 조역(趙逆)047)  도 이미 그 죄로 복주(伏誅)되었는데, 신생(辛生)처럼 엄청난 원악(元惡)이 어떻게 해서 지금까지 목숨을 보전하고 있단 말입니까. 왕법(王法)이 오래도록 시행되지 않고 있어 신인(神人)의 분노가 극에 달했습니다.
더구나 지금 궁금(宮禁)의 안을 한창 수리하고 있는데, 국청의 전말에 대해서는 삼엄하여 자세히 알 수는 없습니다만, 앵무(鸚鵡)의 공초(供招)에 ‘아직 다 발굴되지 않은 곳이 있다.’고 하였다 합니다. 그런데 앵무는 이미 차열형(車裂刑)을 당했으니, 신생이 아니고서는 아직 발굴되지 않은 곳을 알 길이 없는데, 허다한 틈새를 어떻게 다 파내어 터럭 하나 티끌 하나라도 더럽고 흉악한 찌꺼기가 남아 있지 않도록 함으로써 다시 청정한 지역을 만들 수 있겠습니까. 신생을 붙잡아 신문하여 일일이 발굴하게 한 뒤에 그 죄악을 분명히 밝혀 왕법을 바르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신생은 이 옥사에 조금도 간여되지 않았는데, 이렇듯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말을 꺼내다니, 그 의도를 정말 알기 어려울 뿐더러 매우 해괴한 듯하다."
하였다.

 

지평 이무가 인피하기를,
"신이 외람되이 소장(疎章)을 진달하였으나 글이 제대로 뜻을 표현하지 못한 나머지 ‘암시만 하고 구체적으로 지적하지 않았다.’는 분부를 삼가 받들게 되었으므로 황공하고 감격스러워 몸둘 바를 몰랐습니다. 따라서 그때 즉시 사피(辭避)했어야 마땅한데, 일이 외람될까봐 억지로 참으며 날을 보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아침에는 신생(辛生)을 잡아다 신문할 일로 동료들과 상의하여 논계하였는데, 이는 신의 말이 아니라 바로 나라 사람들의 말인 것입니다. 예로부터 어느 시대이고 난역(亂逆)이 없었겠습니까마는, 오늘날과 같은 고독(蠱毒) 사건이나 흉모는 아직 없었고 보면, 나라 사람들이 신생을 의심하여 반드시 국문하게 하려는 것이야말로 사람이면 똑같이 갖고 있는 마음이라 할 것입니다. 앵무(鸚鵡)의 공초에 이미 아직 다 발굴되지 않았다는 말이 나왔다면, 파묻은 자는 누구이며 모두 발굴하지 못하게 한 것은 또한 무슨 이유란 말입니까.
신이 붙잡아 자세히 신문하기를 청한 것은 결단코 다른 이유가 없었는데, 또 뜻밖에도 엄한 비답을 받들게 되었으니, 결코 구차하게 그대로 있기가 어렵습니다. 신을 체직하소서."
하고, 집의 박길응, 지평 한진도 이를 이유로 인피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이무 등이 모두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헌부가 【대사헌 윤순지(尹順之)이다.】  아뢰기를,
"양사가 모두 인혐(引嫌)하고 물러갔습니다. 일을 말한 신하에게 죄를 더 줘야 할 필요가 없을 경우 어떤 율을 적용해야 한다는 말을 생략하려고 하는 것은 원래 쟁신(諍臣)의 도리이고, 환수하시기를 청한 것은 이미 여론을 따른 것이고, 마땅히 적용해야 될 율이 있다고 생각한 것도 실로 진정시키려는 계책에서 나온 것이며, 고독하기 위해 파묻은 곳을 빠뜨릴 염려가 있다고 생각하여 발굴해 낼 방도를 극진히 강구하려 했고 보면 이제 와서 붙잡아 신문할 것을 청한 것은 임금을 사랑하는 마음 아닌 것이 없습니다. 이런 이유들로 가벼이 많은 관원을 체직시킬 수 없으니, 정언 서필원, 헌납 윤집, 대사간 민응협, 지평 이무, 집의 박길응, 지평 한진을 모두 출사케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서필원이 거리낌없이 당파를 두둔한 것과 이무가 상소하여 임금의 뜻을 먼저 시험한 것은 모두가 놀랍기 그지없는 일인데, 어찌 대각에 그대로 있게 하는 것이 온당하겠는가. 모두 체차하라."
하였다.

 

대사헌 윤순지가 처치를 타당하게 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인피하고, 집의 박길응, 지평 한진이 같이 일을 처리한 다른 동료만 특별히 체직되었다는 이유로 인피하고, 대사간 민응협도 윤순지가 바로 자신을 처치한 사람이고 보면 어떻게 그 처치한 잘못을 논열(論列)할 수 있겠는가라는 이유로 인피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윤순지 등이 모두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옥당이 【응교 김좌명(金佐明), 부교리 홍처대(洪處大), 수찬 김시진(金始振).】  차자를 올리기를,
"처치하여 출사를 청한 것은 처음부터 마땅함을 잃은 일이 아니고, 흉얼을 신문하려고 한 의도는 환란을 방지하려고 염려한 것인데 특별히 언관을 체직시키신 것은 넉넉하게 포용하는 도량을 자못 잃으신 것이고, 헌부의 관원이 곧바로 또 인피했고 보면 그를 처치하는 데 혐의를 가지는 것은 형세상 본디 당연한 일이니, 모두 체직시킬 만한 일이 없습니다. 대사헌 윤순지, 집의 박길응, 지평 한진, 대사간 민응협을 모두 출사케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좌의정 김육(金堉)이 아뢰기를,
"역옥(逆獄)이 아직 완결되지 않았는데 수상(首相)이 정고(呈告) 중이어서 참석치 않고 있으니, 일의 모양을 헤아려 보건대 신이 독자적으로 의논을 드릴 수는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특별히 영의정 정태화(鄭太和)에게 승지를 보내 속히 출사하여 국청에 참여하도록 유시하였는데, 정태화가 상소하여 사직하니, 답하기를,
"경은 재덕(才德)이 있어 세상에서 중히 여기고 있다. 국가가 다사다난한 이때에 겸양하는 태도만 고집하고 나오려 하지 않는다면, 백성은 어떻게 하고 국사는 어떻게 하겠는가. 과인이야 정성과 예우가 부족하니 볼 것이 없다 하더라도 선왕으로부터 특별히 받은 은총만은 생각해야 되지 않겠는가. 바라건대 경은 지극한 이 뜻을 체득하여 속히 나와 도를 논함으로써 간절한 소망에 부응하도록 하라."
하였다.

 

지평 안방준(安邦俊)이 상소하기를,
"신자(臣子)로서 모반을 꾀한 역적이 어느 시대인들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은밀한 모의와 계책으로 안팎이 서로 호응하면서 궁궐에서 망측한 변을 일으킨 것은 고금을 통틀어 이번 역적과 같이 심한 경우는 아직 없었습니다. 그런데 다행히 종묘 사직의 위령(威靈)과 천지 신령의 돌보아 주심을 힘입어 흉악한 괴수와 그 일당이 일시에 주륙(誅戮)되었으니, 이 어찌 진정 국가의 큰 경사가 아니겠습니까.
바야흐로 이제 적이 이미 토벌되었으니 다시 우려할 것은 없습니다마는, 인심을 진정시키는 것이 실로 급선무라 할 것인데, 신이 선조(先朝)의 일로 말씀드릴까 합니다. 옛날 선조조(宣祖朝) 당시 기축 역변(己丑逆變)이 일어났을 때, 호남 유생 정암수(丁巖壽) 등이 토역(討逆)에 관해 상소하면서 중도(中道)에 어긋난 말을 많이 하였으므로 선조께서 진노하시어 주동자 이하 10인을 모두 붙잡아 국문하도록 명하시고 장차 중률(重律)을 가하려 하셨습니다. 이에 대간이 여러 차례 아뢰어 신구(伸救)하고 관학(館學)의 유생들이 글을 올려 청원하였는데, 그런 뒤에야 정암수 등이 간신히 죄를 면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당시에 옥사(獄事)가 마구 번져 무고한 자들까지 걸려들었으므로, 김천일(金千鎰)이 상소하여 진달드리기를 ‘이 무리들이 무지몽매하여 그의 술수에 빠진 나머지 서로 추대하여 심지어는 역적으로 하여금 형세를 석권하고 위세를 떨치게 함으로써 반역의 난을 선동시킨 결과가 되었으니, 이 점에 대한 죄는 진정 면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그들을 역모에 같이 참여했다고 여겨 극형(極刑)을 적용하기까지 하는 것은 정상을 참작하여 처벌하는 것이 되지 못할 듯싶다.’ 하니 선조께서 이에 아름답게 받아들이셨는데, 이에 대해서는 전하께서 일찍이 들어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리고 인조조(仁祖朝)에 괄적(适賊)048)  이 난을 일으켜 상이 공주(公州)로 피했다가 장차 환도(還都)하려 하실 때, 먼저 윤방을 보내 정세를 살피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윤방이 괄적이 이민(吏民)들과 서로 통한 문서를 획득하자 이를 모두 불태워 버렸습니다. 이에 인조께서 윤방에게 이르기를 ‘내가 경을 보낸 것은 경이 이렇게 조처할 줄 알았기 때문이다.’ 하고 크게 칭찬하셨습니다. 그러다가 심역(沈逆)049)  의 변이 일어났을 때에도 의심이 가는 자들은 모두 놔두고 묻지 않았으므로 인심이 이에 안정되었습니다. 이에 대해서도 전하께서 일찍이 들어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런데 신은 김자점(金自點)과 서로 알고 지내는 교분이 있었는데, 김자점이 광양(光陽)에 유배된 뒤로 여러 번 편지를 보내 왔기에 신이 그와 편지를 왕복하였습니다. 따라서 신이 그를 증오한 것은 원두표(元斗杓)보다도 못하고 선견지명은 홍무적(洪茂績)보다도 못하니, 원컨대 신의 죄를 다스려 조정의 기강을 엄숙히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진달한 말이 실로 근심하고 사랑하는 지극한 정성에서 나왔으니, 어찌 잊지 않도록 마음에 새기지 않겠는가."
하였다.

 

2월 12일 갑인

상이 주강에 나아가 《서전》 홍범편을 강하였다. 참찬관 홍명하(洪命夏)가 나아가 아뢰기를,
"홍범의 글 뜻을 가지고 미루어 논하건대, 국가의 법령은 반드시 민심을 따르는 것으로 근본을 삼아야 합니다. 그런데 근일 실시한 화폐 유통법이 아무리 백성에게 편한 것이라 하더라도, 이를 받들어 시행하는 사람들이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나머지 억지로 교역(交易)케 하면서 낭자하게 치고 때리므로 상행위는 이루어지지 않고 원성만 길에 가득합니다. 이와 같이 하고서도 백성을 편케 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참으로 개탄할 일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모든 일은 점진적으로 해 나가야 하니, 반드시 오래 참고 기다린 뒤에야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 급박하게 독촉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홍명하가 조정의 논의가 둘로 나뉘어졌다고 아뢰니, 상이 이르기를,
"조정의 논의가 둘로 나뉘어졌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하였다. 홍명하가 대답하기를,
"과거에 어떤 이는 김자점을 구하려 하고, 어떤 이는 김자점을 공격하였습니다. 그러나 구하려 한 자도 어찌 그가 역모를 꾸밀 줄이야 알았겠습니까. 그런데도 스스로들 서로 의심하고 두려워한 나머지 헛소문이 날로 퍼지게 하는 결과를 빚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이러한 때에 이시해(李時楷)가 또 ‘솎아서 제거해야 한다.’는 주장을 꺼냈으므로 논의가 분분하고 시비가 서로 엇갈려 점차 둘로 나뉘어지게끔 된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이시해를 미워해서 증도 부처(中道付處)하는 벌을 시행한 것이 아니고, 진정시키려는 의도에서 그렇게 한 것이다. 그런데 어떤 이는 ‘체차하는 것만으로도 그 벌에 충분하다.’ 하니, 이는 참으로 놀랍다."
하였다. 홍명하가 아뢰기를,
"합당한 율을 헤아려 시행하시도록 청한 논도 어찌 중도에 맞다 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 생각에는 안 될 것도 없을 듯싶다. 조종조의 일로 말하건대 태종 대왕께서 ‘대관(臺官)이 곧바로 율명(律名)을 의정(擬定)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고 분부하셨으니, 이것을 가지고 보더라도 헤아려 시행하라고 한 논이 어찌 안 될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2월 13일 을묘

상이 옥당의 강관을 소대(召對)하여 《서전》 홍범편을 강하였다.

 

상이 대신 및 비국의 신료들을 인견하였다. 좌의정 김육이 아뢰기를,
"요즈음 대론(臺論)을 살피건대 신은 두렵기만 합니다. 이시해(李時楷)의 죄가 ‘솎아서 제거해야 한다.’고 한 말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군부(君父)를 조롱한 죄를 징계하지 않을 수 없겠기에, 신이 멀리 유배보내도록 청한 것인데, 전하께서는 부처(付處)하도록 특별히 명하셨습니다. 그런데 대신(臺臣)은 언관(言官)을 죄준 것을 성덕(聖德)의 허물이라고까지 하여, 신의 죄로 상께 허물이 돌아갔으니, 염치가 있다면 재직(在職)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듣건대 영상도 소견이 같지 않다는 이유로 인혐(引嫌)하고 들어가기까지 하였다 하니, 신이 어떻게 태연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파직시켜 물러나게 하도록 허락해 주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렇듯 뜬소문이 분분하게 일어나 인심이 의심하고 두려워하는 날을 당하여 이시해가 또 ‘솎아서 제거해야 한다.’는 주장을 꺼내었고 보면, 대신이 된 자의 입장에서 어찌 사람들의 말이 있을 것만 염려하고 국사를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모든 원망을 짊어지더라도 진정시키는 것이 대신의 도리이다. 경이 만약 인혐을 하고 물러나기만을 구한다면 장차 국가가 어떤 지경이 되겠는가.
내가 이시해를 죄준 것은 그가 이시방을 논한 한 가지 일 때문만이 아니다. 그리고 ‘체차하는 것만으로도 그를 충분히 죄주는 것이다.’고 하는 주장같은 것은 더욱 해괴하기 짝이 없다. 어떻게 그들이 감히 이런 말을 꺼낸단 말인가. 그리고 서필원(徐必遠)이 분수를 모르는 어리석은 견해를 가지고 그만 감히 목을 쳐들고 말하기를 ‘내가 한마디 하는데 누가 감히 뭐라 하겠는가.’ 하였는데도, 옥당은 또 포용하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런 자들을 등이라도 어루만져 주면서 포용해야 된단 말인가.
그리고 신생(辛生)의 경우는 이번의 옥사(獄事)와는 관계가 없는데, 꼭 엄히 국문하여 그의 말을 들으려고 하니, 그 마음속의 의도를 헤아리기 어렵지 않다. 또 상소를 하여 먼저 나의 마음을 시험해 본 뒤 잇따라 또 논계를 하다니, 이무(李袤)는 단지 일개 간인(奸人)일 뿐이다. 그런데 영상이 또 인혐하고 이미 들어갔으니, 장차 나 혼자서 나라를 다스리란 말인가.
우리 조정은 조정의 인사를 죽이지 않는 것으로 덕을 삼고 있다. 그러나 죄가 있는 인사에 대해서 어떻게 그들 마음대로 행동하도록 맡겨둔 채 죄를 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시해의 죄는 만번 죽어도 아까울 것이 없으니, 목을 베는 극형에 처한다 해도 또한 괜찮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못나서 아직까지 시행을 하지 못하고 있으니, 부처(付處)의 율을 적용한 것이 어찌 과중한 것이겠는가."
하였다. 김육이 아뢰기를,
"사람들은 언관을 죄준 것을 비난합니다만, 아무리 언관이라 하더라도 죄줄 만한 일이 있으면 어떻게 죄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만약 언관이라고 해서 죄를 줄 수 없다고 한다면, 폐조(廢朝) 때 폐모론(廢母論)을 주장한 언관의 경우도 언관이니 죄를 주지 말아아 했겠는가. 이런 점은 생각하지도 않고 늘 너그럽게 포용하라고만 말을 하는데, 계속 이런 식이 된다면 필시 권간(權奸)이 그 사이에서 나오게 될 것이다. 아무리 영상이 소견이 같지 않다는 이유로 인혐하고 들어갔다고 하지만, 이것은 어쩌면 그 사이에서 말하는 사람을 믿어서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하고, 상이 서서히 또 위유(慰諭)하여 이르기를,
"양서(兩西)에 이미 화폐를 유통시키는 데 따른 폐단이 없다 하니, 자연히 온 나라에 대대적으로 시행할 수 있을 것이다. 내 생각에도 원래 화폐를 사용하고 싶었는데, 이미 시험해 보도록 하였으니 지금 중도에 그만둘 수는 없다. 그러나 옛 성인들이 새로운 법을 행할 때에도 반드시 장구하게 기일을 잡았으니, 오랜 기간 조용히 참고 기다리면 행해지지 않을 이치가 어디에 있겠는가. 이 뒤로 추고(推考)하여 수속(收贖)할 경우에는 반드시 화폐를 사용하도록 하라."
하였다. 김육이 기뻐하는 기색으로 대답하기를,
"신도 허적(許積)에게 의논하여 반드시 서서히 도모하려고 할 뿐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것은 단지 조처할 일 중의 하나일 뿐이다. 다만 조정의 의논이 이렇듯 분분하니, 이 점이 매우 염려된다. 정고(呈告)하고 사직하는 것 또한 우리 나라의 고질적인 폐습인데, 요즘 들어 더욱 심해졌다. 입시한 여러 경들은 각자 근무에 충실하고 알맹이 없는 껍질만을 본받지는 말도록 하라."
하였다.

 

2월 14일 병진

이일상(李一相)을 부제학으로, 이응시를 대사성으로, 김좌명(金佐明)을 집의로, 심지한(沈之漢)을 교리로, 심유행(沈儒行)을 지평으로, 오정위(吳挺緯)를 헌납으로, 이만웅(李萬雄)을 정언으로, 이정영(李正英)을 겸사서로, 홍위(洪葳)를 설서로 삼았다.

 

상이 옥당의 강관(講官)을 소대(召對)하여 《서전》 홍범편을 강하였다.

 

김세룡(金世龍)의 처(妻)050)  가 통천(通川)에 위리 안치(圍籬安置)되어 있었는데, 공급(供給)되는 물량이 매우 적다고 통곡하여 그 소리가 밖에까지 들렸다. 상이 이를 듣고 군수 이익한(李翊漢)의 파직을 명하고, 도신(道臣)에게 엄히 신칙하여 넉넉히 미찬(米饌)을 내리게 함으로써 물량이 부족하여 어렵게 되는 근심이 없도록 하였으며, 이어서 봄·여름 옷감을 특별히 하사하였다.

 

2월 15일 정사

관학(館學)의 유생을 인정전(仁政殿)에서 시강(試講)하였다. 수석을 한 3인에게는 각각 점수 2분(分)을 내리고, 그 나머지에게는 필·묵·종이를 차등있게 내렸다.

 

2월 18일 경신

사복시가 아뢰기를,
"본시(本寺)에 내구마와 외구마를 설치한 의도는 평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장부를 조사하고 점검해 본 결과, 어승(御乘) 8필과 좌마(坐馬)051)   4필 가운데 그런대로 쓸 만한 것은 겨우 2, 3필에 불과했습니다. 이를 미루어 보면 그 나머지를 알 수 있는데, 마정(馬政)이 소홀하게 된 것이 진실로 한심하기 그지없습니다.
내사복시에서 50필을 머물려두고 기르는 것이 오래된 전례이기는 하지만, 쓸모없는 것까지 꼭 구차하게 충당할 것은 없으니, 그 중에 더욱 심한 말은 가려 제읍(諸邑)에 내려 보내고 다른 말로 대치하게 하소서. 그리고 내사복시의 어승과 좌마는 의당 내승(內乘)으로 하여금 보고 듣는 대로 사들이게 하소서. 심지어는 외사복시의 가교(駕轎)052)  에 소용되는 말까지도 모두 구차하게 숫자만 채우고 있는데, 가교에 합당한 말로는 역마(驛馬)가 제일이니, 각역에 행회(行會)하여 가려 살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그러나 만약 본시 관리들의 태만한 습성을 고치지 않으면, 아무리 천마(天馬)나 용마(龍馬)의 종자라도 마굿간에서 기를 경우 끝내는 일개 병든 망아지밖에 되지 않을 것이니, 나라에 무슨 보탬이 되겠는가. 지금 이후로는 태만한 관리들을 중하게 다스려 지난날의 습성을 답습하지 않게 하라."
하였다.

 

2월 19일 신유

창경궁(昌慶宮)을 수리할 때에 흉악하고 더러운 물건들을 헤아릴 수도 없을 만큼 숱하게 발굴해 내었는데, 도감이 열록(列錄)하여 아뢰었다.

 

간원이 아뢰기를,
"역모를 꾀하는 악인이 어느 시대이고 없었겠습니까마는 역조(逆趙)053)   처럼 못할 짓 없이 제 마음껏 흉측한 일을 저지른 자는 없었습니다. 그의 심복 노릇을 하던 제적(諸賊)은 차례로 형벌에 복주(伏誅)되었습니다마는, 안에서 서로 응했던 자가 몰래 법망에서 빠져 나와 아직도 궁중에 잠복해 있으면서 앞에서 심부름하고 있는지 또한 어찌 알겠습니까. 일체 축출하여 궁금(宮禁)을 엄숙히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그대들의 생각이 주도면밀하니 정말 가상하다. 어찌 가슴에 새기지 않겠는가. 그러나 만약 의심스러운 사람이라는 것을 알기만 한다면 어찌 축출하기만 하고 그만두겠는가. 밝게 살펴 볼 수 없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하였다.

 

2월 22일 갑자

헌부가 아뢰기를,
"예로부터 역신(逆臣)의 집을 부수고 못을 파는 것은 이미 죽은 간인(奸人)을 다시 주벌(誅罰)하고 미래에 징계를 보이기 위한 목적에서입니다. 지난날 이이첨(李爾瞻)이 윤기(倫紀)를 극도로 어지럽히고 종묘 사직을 거의 위태롭게 한 것은 천만년이 지나도 용서할 수 없는 죄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 자부가 감히 사당을 세워 제사를 지내는데 그 건물을 높다랗게 세웠으므로 보는 자들의 눈을 놀라게 합니다. 오늘날 나라의 기강이 아무리 떨어졌다 하더라도 임금이 계신 도성 아래에서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입니까. 물정(物情)이 분개하며 모두들 한심하게 여기고 있으니, 유사(有司)로 하여금 오늘 당장 철거시키게 하여 악인을 징계하는 본보기를 엄하게 하소서.
인군이 명기(名器)를 아끼는 것은 상을 신중히 내리는 것으로부터 시작되기 마련입니다. 작상(爵賞)을 남발하여 명기가 문란하게 되면, 정치에 커다란 피해를 끼치게 됩니다. 의금부 형방 도사(刑房都事) 정선흥(鄭善興)은 근무 일수가 많지 않은데도, 처음부터 끝까지 국청에 참여하여 사건을 신문한 신하와 비등하게 준직(准職)054)  을 상으로 내렸고, 신숭구(申嵩耉)·홍주후(洪柱後)는 모두 참하관(參下官)055)  으로서 근무 일수가 같지 않은데도 똑같이 4품의 상을 받았고, 심지어 사옹원 직장 김자남(金自南)은 가례(嘉禮) 때에 집사(執事)였다는 이유로 또한 준직의 명을 받았으니 참하관으로서 준직을 받은 것은 참람되기 그지없는 일이라 할 것입니다. 각기 해당되는 상을 참작하여 시행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정선흥·신숭구·홍주후·김자남은 의당 근무 태도를 살펴 상을 주어야 할 것인데, 어찌 근무 일수를 문제삼는가."
하였다.

 

2월 23일 을축

윤강을 대사헌으로, 이응시를 도승지로, 심액을 판의금부사로, 목행선(睦行善)을 대사성으로, 심노(沈𢋡)를 집의로, 김좌명(金佐明)을 응교로, 이형(李逈)을 장령으로 삼았다.

 

2월 27일 기사

간원이 【대사간 민응협(閔應協), 헌납 오정위(吳挺緯)이다.】  아뢰기를,
"역적 조 귀인(趙貴人)이 화를 꾸밀 계획을 속에 감추고 음험하며 교활하게도 궁금(宮禁) 여기저기에 낭자하게 흉악한 물건들을 묻어 두었는데, 그 천태만상의 모양들이 보기에도 참혹하여 가슴이 떨립니다. 이것들이 전적으로 그 어미 한옥(漢玉)이 만든 것이고 보면, 그 죄야말로 딸보다도 중한 점이 있는데, 불행히도 일이 발각되기 전에 먼저 죽었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모두들 드러내어 죽이기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선조(先朝) 때에 광해군이 극형(劇刑)을 시행했던 것을 거울삼아 추형(追刑)하는 형전(刑典)을 폐지시켰으니, 이는 실로 억만년토록 끝없는 혜택을 내리신 것입니다. 그러나 역적 이괄(李适)의 큰 역변이 일어났을 때는 그의 처와 첩을 죽이고 자부에게까지 형을 가했으니, 이는 또한 대성인께서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때에 따라 임기응변한 조치였다고 할 것입니다. 오늘날 한옥의 추악한 역모가 역적 이괄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해부(該府)로 하여금 속히 추형을 행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재차 아뢰니, 따랐다.

 

2월 29일 신미

해의 색깔이 피처럼 붉었다.

 

정지화(鄭知和)를 황해 감사로, 박길응(朴吉應)을 보덕으로, 심세정(沈世鼎)을 장령으로 삼았다.

 

상이 주강에 나아가 《서전》 홍범편을 강하였다. 강이 끝나자 동지경연 심지원(沈之源)이 아뢰기를,
"근래에 듣건대 호남의 기근이 더욱 심하여 사망자가 속출한다 하니, 특별히 하유하시어 도신(道臣)을 신칙하소서."
하니, 따랐다. 특진관 민응형(閔應亨)이 아뢰기를,
"올해의 흉년은 예전에 듣지 못했던 일이니, 백성을 보전시키는 일이야말로 오늘날의 급선무입니다. 성상께서 만약 백성을 보호하시려거든 요역(徭役)을 가볍게 하고 부세(賦稅)를 줄이는 것이 최상인데, 현재 부세와 요역이 무겁고 번다하니 백성이 어떻게 고달프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공물(貢物)을 상정(詳定)056)  한 것이 곧 2백 년 동안 내려온 일이라고는 하지만, 그 폐단을 어찌 말로 다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 폐단이 생기게 된 원인은 대체로 헛된 비용을 줄이지 못해 그렇게 된 것입니다. 자전께 공진(供進)하는 물건이야 줄일 수 없다 하더라도 어용(御用)의 물품같은 것은 줄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듣건대 현재 내전(內殿)의 의장(儀仗)을 만들고 있다 하는데, 이 일도 정지시키는 것이 온당합니다. 흉적이 복주(伏誅)된 뒤인데도 하늘의 재변이 아직까지 극심하니, 반드시 크게 일을 변통시킨 뒤에야 비로소 나라를 다스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근래 여러 도감에서 비용을 허비한 나머지 호조와 병조의 물력(物力)이 점차 바닥이 나고 있는데, 공상지(供上紙) 같은 경우는 가미(價米)가 매우 많으니, 이것도 줄여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모두 옳긴 하다만, 일이 있을 때마다 줄이는 것도 폐단이 있을 것이다."
하고, 또 이르기를,
"지금 듣건대 호남에 기근이 크게 들었다 하니, 달마다 새로 생산된 것을 봉진(封進)하는 물건이 사소한 것이기는 하지만, 추수 때까지 정지시키도록 하라."
하였다.

 

의금부가 아뢰기를,
"정형(正刑)에 처한 죄인 예일(禮一)의 남편 귀동(貴同)은 처음부터 흉모에 참여한 흔적이 없는데, 일단 정형에 처한 죄인의 남편이고 보면 가벼이 풀어주기도 어렵습니다. 어떻게 처리해야 합니까?"
하니, 답하기를,
"그 남편을 연좌(緣坐)시키는 법은 없는가? 율(律)을 상고하여 처리하라."
하였다. 금부가 회계(回啓)하기를,
"《대명률(大明律)》을 상고해 보건대, 부모·자녀·조손·형제·자매에게는 모두 연좌시키는 율이 있는데, 남편에게는 연좌율이 없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법전의 본의(本意)가 어떤 것인지는 모르겠다만, 부모·자녀·조손·자매에게 모두 연좌율이 적용되는데 남편만은 연좌시키지 않다니, 그럴 리가 없을 듯하다. 사리를 가지고 말하더라도 그 아내가 한 일을 남편이 모를 리는 만무하니, 어찌 그만 홀로 죄벌을 면할 수 있겠는가. 여러 대신에게 의논하여 처리하라."
하였다. 좌의정 김육(金堉)이 아뢰기를,
"남편을 연좌시키는 율문(律文)이 없는 이상 전에 없던 법을 새로 만들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처가 악행을 저질렀을 경우 그것이 아무리 적은 일이라 하더라도 그 남편에게는 제가(齊家)하지 못한 죄가 있는 법인데, 더구나 대역(大逆)을 승복(承服)한 이번의 경우이겠습니까. 귀동이 비록 역모에 참여하지 않았다고는 하지만, 내노(內奴)로써 역적 조 귀인(趙貴人)의 집에서 일을 하였고 또 역적인 여종을 처로 두었으니, 어찌 죄가 없을 수 있겠습니까. 가벼운 형벌을 적용하여 편배(編配)시키는 것이 혹 마땅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고, 영중추부사 이경여(李敬輿)가 아뢰기를,
"예전에 없던 법을 새로 만들어 뒷날의 폐단을 야기시키는 것은 금석(金石)처럼 법을 지켜야 한다는 뜻이 아닐 듯합니다. 그러나 그만둘 수 없다면, 그가 일단 역적 조 귀인의 종이었고, 역적인 여종의 남편인 이상 그 처의 역모 상황을 꼭 미리 알지 못했으리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왕자(王者)가 형벌을 시행할 때는 죄가 의심스러울 경우 가벼운 쪽으로 적용시킨다는 면에 비추어, 연좌율에 저촉되는지의 여부를 막론하고 가벼운 쪽으로 형벌을 베풀어 먼 변방에 정배시키는 것이 온당할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좌상의 말이 옳다. 그러나 이것은 필시 율문이 빠뜨린 것일텐데, 어찌 잘못된 것을 알고서도 일부러 오류를 답습할 수야 있겠는가. 영상에게 의논하여 처리하도록 하라."
하였다. 영의정 정태화(鄭太和)가 아뢰기를,
"임신년 겨울철 무렵에 나인(內人)의 여종 중에 승복(承服)한 자가 있었는데, 그 남편 문정립(文正立)을 국청의 품계(稟啓)에 따라 종으로 만들어 먼 변방에 정배시켰습니다. 지금 귀동의 일도 이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귀동을 종으로 만들어 변방 고을에 정배하고 지금부터 이를 영구히 법으로 삼아 준행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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