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일 임신
일식이 있었다.
3월 2일 계유
이형장(李馨長)이 복주(伏誅)되었다.
이에 앞서 역적 김식(金鉽)이 공초(供招)하면서 이형장이 역모에 관련된 상황을 장황하게 끌어당겨 진술하였는데, 청나라를 빙자하여 우리 나라를 위협하는 계책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에 상이 일이 번다하게 되어 누설될까 염려하여 문사 낭청(問事郞廳)에게 명하여 별록(別錄)으로 올리게 하였는데, 사설(辭說)이 매우 많았다. 상이 이를 열람한 뒤에 즉시 불태워 없애도록 하였다.
김세룡(金世龍)이 취복(就服)057) 할 때, 그 아비 김식이 신면(申冕) 등과 함께 회합을 갖고 역모를 하였다고 말하였으므로 이것을 가지고 김식을 심문하도록 명하니, 김식이 대답하기를,
"신면이 나에게 권하기를 ‘이형장으로 하여금 은밀히 청나라와 내통하여 군대를 청한 뒤 용만(龍灣)에 와 주둔하게 하면서 산인(山人)을 【송준길(宋浚吉)과 송시열(宋時烈)이다.】 잡아가도록 하게 하라.’ 하기에 내가 그만 그 계책을 따랐습니다. 그런데 그 뒤 북사(北使)가 일을 조사할 목적으로 나오자 일의 기미가 먼저 누설되어 사람들이 많이 손가락질하며 의심하니, 신면이 일이 발각될까 두려워하여 또 나로 하여금 이형장에게 통지하여 중지하도록 하였습니다."
하였다.
대개 이형장은 기축년 이후부터 김식·신면 등과 은밀히 모의하면서 ‘금상이 즉위한 초기에 오로지 제멋대로 의논하는 사람들만을 등용하고 무턱대고 원훈(元勳) 대신을 죄주었다.’는 것으로 조정의 죄안(罪案)을 삼아 청나라의 위세를빌려 개인적인 원한을 풀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이형장이 사행(使行)을 따라 연경(燕京)에 가 은밀히 정명수(鄭命守)에게 고하여 그를 부추겼다. 이에 청나라 사신 6인이 잇따라 왔는데 ‘조정이 김자점(金自點)을 논죄한 일을 사문(査問)한다.’는 것으로 명분을 삼았다. 이때 원접사(遠接使) 원두표(元斗杓)가 그 모의를 알고 의주(義州)에 도착해서 이형장을 보고 먼저 힐문하였는데, 이형장이 이미 일이 탄로난 줄 알고는 거꾸로 김자점이 임금을 업신여긴 죄를 가지고 정명수에게 극력 말하자, 청나라 사신의 노여움이 마침내 풀려 결국 묻지 않고 돌아갔었다.
이에 이르러 이형장이 오랑캐와 내통한 실상이 비로소 발각되었는데, 이형장이 바야흐로 연경에 가는 인평 대군(麟坪大君)의 행차를 수행 중으로 아직 압록강을 건너지 않은 상태였다. 조정에서는 이형장이 정명수의 심복인만큼 거듭 그의 노여움을 촉발시킬까 염려하여 그가 서울에 돌아올 때를 기다려 국문하려 하자, 영의정 정태화가 비밀히 차자를 올려 금오랑(金五郞)을 파견해서 법대로 잡아들일 것을 청하였다. 상이 정태화와 좌의정 김육을 인견하고 이형장을 처리할 방도를 하문하니, 김육은 정배시키는 것이 마땅하다고 대답하고 정태화는 이번 기회에 제거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는데, 상이 이르기를,
"나의 뜻도 이와 같다"
하고, 금부 도사를 서로(西路)에 파견하여 붙잡아 국문하도록 하였다. 이형장이 바로 취복(就服)하면서 말하기를,
"김자점과는 이미 오래 전부터 친밀하게 지내 왔습니다. 지난번 김자점이 대론(臺論)을 입어 문외 출송(門外黜送)을 당했던 날에 그의 두 아들 김련(金鍊)·김식(金鉽) 및 이인달(李仁達)과 함께 모의한 적이 있었는데, 바로 나라를 원망하면서 역모를 꾀하는 말로 나도 이 자리에 참여하여 들었습니다. 김자점의 부자가 서로 나에게 말하기를 ‘경기 지역 4개 진(鎭)의 수령은 모두 우리와 친밀하게 지내는 사람들이니 일을 이룰 수 있다. 너는 정리상 일가(一家)나 마찬가지이니 오늘의 일을 또한 알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는데, 마침내 복주되었다.
이형장의 처 승녀(勝女)도 역적 조 귀인(趙貴人)의 모녀와 가장 친밀하게 지내며 저주와 흉역의 모의에 동참하지 않은 적이 없었는데, 마침내 승복하지 않고 장(杖)을 맞다 죽었다. 그 아들 이정윤(李廷尹)은 연좌율을 적용하여 교수형에 처하였다. 이정열은 도주했으나 뒤쫓아 가서 붙잡아 죽였다. 그의 딸 및 친속은 모두 사변(徙邊)하고 그 가산을 몰수하였으며 공사(供辭)에 연루된 자들은 장을 맞다가 죽기도 하고 정배되기도 하였다.
상이 하교하였다.
"지금 홍청도(洪淸道) 암행 어사 채충원(蔡忠元)의 서계(書啓)를 보건대, 이 사람이 염찰(廉察)한 것이 모호하기 짝이 없으니, 직접 대면해서 단속해 보낸 뜻이 어디에 있는가. 여덟 고을 수령 중에 한 사람도 범법자가 없다면 수령의 적임자를 얻기가 어렵다고 늘 말하던 것이 모두 빈 말이다. 근신(近臣)이 사명(使命)을 받들었는데도 이처럼 형편없으니, 다른 이들이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그의 이른바 다스려졌다느니 다스려지지 않았다느니 하는 말도 모두 믿을 것이 못 된다. 채충원을 먼저 파직한 다음 추고하여 사정(私情)을 따르고 공도(公道)를 무시하여 임금의 명을 가볍게 여기는 풍조를 징계하도록 하라."
3월 3일 갑술
경상도 의령현(宜寧縣)에서 암소가 송아지를 낳았는데, 목덜미 위에 꼬리가 있었다.
임담(林墰)을 수어사(守禦使)로 삼았다.
대제학 채유후(蔡𥙿後)와 승지를 명소(命召)하여 성균관에서 유생을 시험케 하였는데, 진사 정박(鄭樸)이 수석을 차지하였으므로 직부 전시(直赴殿試)토록 특명을 내리고 나머지에게는 차등있게 점수를 내렸다.
상이 하교하기를,
"사명(使命)을 형편없이 받든 죄는 파직과 추고만 하고 말 수 없다. 전 교리 채충원(蔡忠元)을 붙잡아 추문(推問)하라."
하니, 정원이 붙잡아 추문하는 명을 정지할 것을 청하였는데, 답하기를,
"채충원은 경악에서 가까이 모시는 신분이면서도 내가 직접 대면해서 단속해 보낸 뜻을 전혀 체득하지 못했으니, 그 죄가 진정 다른 사람들보다 배나 된다. 경들은 염려하지 말라."
하였다.
상이 하교하기를,
"형조 참의 이척연이 대신을 능멸한 죄는 징계하지 않을 수 없으니, 먼저 파직한 다음에 추고하여 사체(事體)를 중히 하도록 하라."
하였다. 영중추부사 이경여(李敬輿)가 군기시(軍器寺)를 겸관(兼管)하면서 본시(本寺)의 일로 형조에 공문을 보냈는데, 해리(該吏)가 허위로 보고하자 해랑(該郞)이 노하여 차인(差人)에게 곤장을 쳤다. 이에 이경여가 대신을 능멸했다고 하면서 해리에게 죄줄 것을 청하니, 상이 본조(本曹)의 판서 이하를 추고하도록 특명을 내렸다. 이때 참의 이척연의 함답(緘答)058) 가운데에 공격하는 말이 많았는데, 이경여가 마침내 차자를 올려 겸관하는 임무를 굳이 사양하자, 상이 부드러운 말로 비답을 내리며 윤허하지 않고 이어 특별히 이척연을 파직시키도록 명하였다.
상이 옥당의 강관(講官)을 야대(夜對)하여 《심경(心經)》을 강하고, 술을 내리도록 명하였다.
3월 4일 을해
상이 사예(司藝) 윤선도(尹善道)를 불러 보았다.
상평청(常平廳)이 아뢰기를,
"본청은 용도는 많은데 저축이 적습니다. 만약 통정첩(通政帖)을 얻어 곡식과 돈을 모금하면 그런대로 본청에 도움이 될 것인데, 만 60세가 된 자부터 통정첩을 받도록 허락하면 군액(軍額)이 감축될 염려도 없을 것입니다."
하니, 따랐다.
이때 역적을 토벌하는 일이 일단락되었으나 청나라가 의심하는 단서가 될까 염려하여 전후에 걸친 옥사(獄事)의 상황을 모두 주문(奏文)하였는데, 그 주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소방이 불행하여 변란이 근친들 사이에서 일어났으므로 그 전말(顚末)을 두루 진달하겠습니다. 다음은 의정부의 장계(狀啓) 내용입니다.
신들이 조 소원(趙昭媛)의 시비(侍婢)인 겸선(兼先)의 고발장을 접수하였는데, 거기에 말하기를 ‘소원 조씨가 안으로는 여복(女僕)과 결탁하고 밖으로는 승니(僧尼)와 교통하며 왕의 처소에 저주를 하여 왕의 몸을 해치려 꾀하고 있다.’ 하였습니다. 사건의 진상을 조사해 본 결과 역모의 정상이 모두 구비되었으므로 소원을 별소(別所)에 안치시킴과 동시에 내외(內外)의 흉당(兇黨)을 잡아들여 그 정황을 추궁하였습니다.
그 결과 조씨의 시비 영이(英伊)는 공초하기를 ‘나는 소원이 친히 믿는 시비이기 때문에 소원의 행동에 대해서는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모르는 것이 없다. 소원은 늘 가슴에 불만을 품고 항상 원망하는 발언을 하였는데, 그 어미와 서로 얼굴을 맞대고 밀어(密語)를 나누면서 옆에 있는 사람이 듣지 못하도록 금하였다. 하루는 소비(小婢) 및 반비(班婢)인 가음춘(加音春)·덕향(德香) 등을 불러 술과 음식을 내주고는 등을 두드리면서 말하기를 「나에게 한 계책이 있다. 장차 국왕 부자를 모해하고 낙성위(洛城尉) 김세룡(金世龍)을 임금으로 추대하려 하는데, 너희들 말고 누구와 일을 이루어 나가겠는가. 다행히 성사가 되면 나만 크게 이롭게 될 뿐 아니라 너희들도 장차 안락한 생활을 향유할 것이며 족당(族黨)에 이르기까지 부귀를 누리지 않는 자가 없게 될 것이다. 너희들은 기꺼이 따르겠는가.」 하였다. 우리들이 목숨을 걸고 명을 따르겠다고 대답하자, 나의 귀에 입을 대고 말하기를 「수고하지 않고 성공하는 길로는 저주하는 것이 최상이다. 여무(女巫) 가운데에 필시 이 술법에 능한 자가 있을 것이니, 네가 그녀와 깊이 관계를 맺어 두어라.」 하면서 백금(白金)과 문수(文繡) 등의 물건을 내 주었다. 이에 따라 우리들이 요무(妖巫)인 앵무(鸚鵡)에게 후하게 선물을 주고 그와 함께 소원의 모녀를 보러 갔더니 소원이 술잔을 받들어 축수(祝壽)하고는 같이 일을 해 나가기로 약조하였다. 이 뒤로 그 무당이 늘 후문으로 은밀히 드나들면서 방술(方術)을 가르쳐 주었는데 이루 기억할 수조차 없다. 이에 소원이 친히 믿는 하천배들을 시켜 죽은 사람의 두골·수족·치아·손톱·발톱·머리카락 및 벼락맞은 나무·무덤 위에 있는 나무 등의 물건을 몰래 구해 오게 하고, 또 다른 사람의 무덤을 파헤쳐 시체의 살점을 떼어 오고 관목(棺木)의 조각을 찾아 오게 하였으며, 시체에서 흘러나온 즙을 적신 솜, 마른 뼈다귀를 갈아 만든 가루, 심지어는 햇빛에 바짝 말린 닭·개·고양이·쥐 등등의 저주하고 기도하는 용도에 필요한 물건이라면 모아들이지 않는 것이 없었다. 그리고는 늘 덕향 등으로 하여금 상자 속에 숨겨 가지고 왕의 처소에 들어가 야음을 틈타 왕대비 및 국왕이 거처하는 방과 거치게 되어 있는 길에 두루 파묻게 하였으며, 그 딸 효명 옹주(孝明翁主)로 하여금 치아를 속옷띠에 매달거나 뼛가루를 화장품 상자에 넣어 두었다가 왕의 처소에 드나들면서 살짝 넣어두거나 몰래 뿌리게 하여 방과 문지방 사이의 구역에 거의 빠진 곳이 없었다. 그리고 승니(僧尼)로 하여금 절을 창건하고 불상을 만들게 하여 자신의 복을 기원하게 하였는데, 국가에 화를 끼치려고 흉악한 행동을 자행하면서 못하는 짓이 없었다.
우리들이 「저주를 한 효과가 나타난 뒤에라도 의빈(儀賓)059) 을 옹립(擁立)하는 일이 쉽지 않을 듯한데, 무슨 계책이 있습니까?」고 물으니, 소원은 웃으면서 말하기를 「이런 것은 너희들이 알 바가 아니다. 자연히 이 일을 이룰 자가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하였습니다.
가음춘과 덕향의 공초도 영이의 공초와 서로 부합됩니다. 여무(女巫) 앵무를 추궁하여 신문하니, 공초하기를 ‘저주하는 일을 일찍이 배운 적이 있었으나 군상(君上)을 모해하려는 것이야 어찌 나의 본심이었겠는가. 그러나 처음에 영이의 무리에게 잘못 이끌려 들어갔다가 나중에는 소원 모녀의 후한 대접에 감격하여 온갖 방법을 지시해 가르쳐 주었으니 실로 모주(謀主)가 된 셈이다.’ 하였습니다. 소원의 노비로서 같이 악행을 하여 역모를 한 무리는 통틀어 수십 명에 달하였습니다. 모두들 자복하여 빠짐없이 털어놓았는데 추악하고 더러운 여러 물건들을 구해 온 정황이 각 공초에 한없이 낭자하게 열거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각 범죄자들에 대해 율(律)대로 처치하려고 할 즈음에, 조인필(趙仁弼)의 사위인 종실(宗室) 해원령(海原令) 이영(李暎)과 진사 신호(申壕) 등이 상변(上變)하여 알리기를 ‘장인 조인필은 곧 조 소원(趙昭媛)의 사촌 오빠이다. 전 영의정 김자점과는 본래 서로 친하게 지냈는데 김자점의 손자 김세룡이 소원의 딸인 효명 옹주(孝明翁主)에게 장가들어 의빈(儀賓)이 되자 두 사람의 관계는 더욱 친밀해졌다. 김자점이 일찍이 조인필을 흥양(興陽)의 감목관(監牧官)으로 삼았는데, 김자점이 제멋대로 탐학(貪虐)을 일삼다가 온 나라 사람들의 분노를 사 전라남도 광양현(光陽縣)에 유배되자, 조인필도 파직되어 순창군(淳昌郡) 지역에 우거하였다. 대체로 순창에서는 광양이 먼 거리가 아니었기 때문에 인필이 늘 필마(匹馬)로 몰래 갔다가 머무르다 오곤 하였는데, 꼭 밤에 출입하는 등 그 동안의 정적(情迹)이 은밀하기 짝이 없었다. 그리고는 때때로 서울에 와서 김세룡의 집에 머물러 숙식(宿食)을 하곤 했는데, 옛날의 편비(褊裨)들을 보면 꼭 말하기를 「너는 상공(相公)의 은혜를 잊었느냐. 상공이 지금 어려운 처지에 있다고 해서 남쪽 변방에서 끝내 늙어 죽으리라고 너는 생각하느냐.」라고 하면서 편비들과 회동하지 않는 날이 없었으며, 편지로 끊임없이 김자점 부자와 통하며 의논하였다. 또 일찍이 우리들에게 말하기를 「낙성위(洛城尉)는 보통 분이 아니니 너희들은 잘 대우하도록 하라. 훗날 필시 이 분을 인하여 복을 받게 될 것이다.」라고 하는 등 행동이나 말 하나하나가 역적 모의와 관련되지 않은 것이 없었으니, 김자점과 조인필의 반역하려는 정상은 명백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저주 사건으로 구금된 죄인인 김세룡의 여종 업이(業伊)도 공초하기를 ‘조인필이 일찍이 순창에서 김세룡의 집에 와서는 바로 김세창(金世昌) 및 도사(都事) 이두일(李斗一) 별장 정계립(鄭繼立), 진사 이주(李霌), 감목관 이언표(李彦縹)와 함께 김자점의 편지를 뜯어 보고 머리를 맞대 은밀히 모의하면서 아침에서 저녁까지 보냈는데, 문밖으로 들리는 소리가 모두 「계책을 합해 군사를 일으켜 김세룡이 스스로 점거하게 해야 한다.」는 일이었다. 그리고 소원(昭媛)의 모녀도 모든 음모에 대해서 반드시 여인 승례(勝禮)와 서로 통하여 야음을 틈타 와서 모여 새벽이 되는 줄도 몰랐으며, 늘 보화(寶貨)를 서로 주면서 불상을 세우는 데 필요한 시주라고 하는가 하면, 작은 함에 뼛가루를 담아 보낸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즉시 김자점·조인필 및 자점의 아들인 한산 군수(韓山郡守) 김련(金鍊)과 곡성 현감(谷城縣監) 김식(金鉽)과 진사 김정(金鋌), 그리고 그 손자인 낙성위(洛城尉) 김세룡과 진사 김세창(金世昌) 및 이 사건과 관련된 일체의 인물을 붙잡아 추궁하여 신문하였습니다. 김식은 공초하기를 ‘나의 아들 세룡이 조 소원의 사위가 된데다가 소원 역시 큰 뜻이 있었기 때문에, 일찍이 기축년 겨울과 경인년 봄에 수원 방어사 변사기(邊士紀), 광주 방어사 기진흥(奇震興), 전 절도사 안철(安澈), 지사(知事) 이형장(李馨長), 전 현감 이순성(李循性), 전 군수 이효성(李孝性) 등과 대사(大事)를 일으키기로 모의하여 부서(部署)도 이미 정하였는데 대장은 변사기, 책사(策士)는 기진흥이고 금백(金帛)을 뿌려 무리배들을 결집시키는 일은 이형장이 맡았다. 그리하여 약조하기를 「수원과 광주(廣州)의 병력으로 밤을 틈타 곧바로 경성을 침범하고 우리들 부자와 형제는 불러 모집한 무사들을 데리고 안에서 일어나 숭선군(崇善君)을 임금으로 추대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날짜까지 정하고서 아직 일을 벌이지 못하고 있는 때에 변사기가 파직당하고 기진흥도 체직되었으며 나의 아비가 멀리 광양으로 유배되었는가 하면 우리 형제도 모두 남쪽 고을로 제수되었으므로 계책이 마음과는 어긋나 지금까지 지체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자주 변사기와 기진흥 등에게 글을 보내 사기가 저하되지 않도록 북돋우면서 기회를 기다리도록 하는 동시에 세룡의 처로 하여금 더욱 무고(巫蠱)에 대한 일을 힘쓰도록 하였으니, 처음부터 끝까지 흉계는 내가 실제로 담당하였다.’ 하였습니다.
김자점은 공초하기를 ‘내가 비록 조정에 죄를 지어 멀리 외방에 쫓겨났지만, 나의 손자가 일단 옹주에게 장가들었고 나의 두 아들이 각자 교우관계를 맺고 있는 이상, 안과 밖에서 서로 호응하면 일이 쉽게 이루어지리라 여겼다. 그리고 변사기·기진흥·안철 등은 혹은 족친(族親)이거나 혹은 편비로서 평소의 정분으로 볼 때 부자(父子)와 같았고 이형장은 일찍부터 친밀하게 지내면서 목숨까지도 버리겠다고 결심을 하였으므로, 이에 자식으로 하여금 같이 일을 하자고 타이르도록 하였더니, 모두들 즉시 기꺼이 따랐다. 그리하여 기일을 정해 군사를 일으키기로 하였는데, 마침 분산되었기 때문에 즉시 계획대로 행하지 못한 것이다. 항상 생각기에 시간을 오래 끌면 모의가 누설되고 말 터이니 차라리 한번 결판을 내야겠다고 여겨 맏아들 연(鍊)은 한산(韓山)의 병력을 출동시키고 둘째 아들 식(鉽)은 곡성(谷城)의 병력을 출동시키고, 기진흥은 마침 경기 수사(京畿水使)에 임명되었으므로 본진(本鎭)의 병력을 유인해 출동시켜 세 길로 일제히 진격케 하고 안철과 이형장 등은 서울 안에서 호응하도록 일을 꾸미고 싶었으나, 다만 변사기가 북쪽 변방의 임무를 맡아 대장이 없었던 관계로 어쩔 수 없이 주저하다가 마침내 낭패를 당하고 말았다.’ 하였습니다.
조인필은 공초하기를 ‘나는 소원(昭媛)의 사촌 오빠로서 김자점의 심복이 된 이상 길흉과 화복을 그와 함께 해야 할 운명이었다. 그리하여 양쪽 사이를 왕래하며 계책과 의논을 서로 통했으니 안과 밖의 역모를 모두 참여하여 알고 있다.’ 하였습니다.
김세룡·김세창·김정(金鋌)·변사기·기진흥·안철·이효성(李孝性)·조성로(趙星老)·이두일(李斗一)·정계립(鄭繼立) 등의 공초를 보건대 한입에서 나온 것처럼 모두들 김세룡을 장차 추대하기로 하였다고 한데 반해 김세룡 부자의 공초만은 숭선군(崇善君)을 추대하기로 하였다고 말하였습니다. 이어 각 범죄자들을 대질신문토록 한 결과, 각 범죄자들이 낱낱이 굴복해 반역하려던 정상이 모두 드러났습니다. 또 왕대비 및 국왕께서 거처하는 방을 철저히 수색하여 저주의 형적에 대해 확인하게 하였더니 굴뚝과 문지방 사이나 섬돌과 뜰의 벽돌틈에 묻어 둔 흉물(凶物)들이 형형색색으로 잡다하게 튀어나와, 심장이 뛰고 보기에 참혹하여 차마 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습니다.
조역(趙逆)060) 은 이미 옹주와 더불어 저주하고 흉악한 행동을 자행하여 국모(國母)와 국군(國君)을 모해하면서 안과 밖으로 서로 호응한 역모의 정상이 뚜렷이 드러났으니, 아무리 선왕(先王)의 시희(侍姬)였다 할지라도 이야말로 종묘와 사직의 죄인으로서 이치상 용서할 수가 없는데, 더구나 대비께서 위에 계시어 왕이 자유로 할 수 없는 처지이겠습니까. 옹주도 율대로 처치하는 것이 합당하겠기에 신들이 여러 차례 정법(正法)061) 의 시행을 청하였으나 끝내 윤허를 받지 못했으므로 은혜로 의리를 덮는 지극한 뜻을 곡진히 체득하여 경률(輕律)로 낮추어 적용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조역(趙逆)은 자살하게 하고 옹주는 중도(中途)에 안치시키도록 하였습니다.
숭선군 이징(李澂)은 관작을 삭탈하여 근도(近島)에 안치하여 권도(權道)에 맞게 임기응변하시는 국왕의 도리를 극진히 하게 하고, 수복(首服) 김자점·김식·김세룡·변사기·기진흥·조인필·안철·김정·김세창·이효성·이두일·조성호·정계립 등 및 저주하는 일에 동참한 여무(女巫) 앵무와 조역(趙逆)의 여종 덕향·영이·덕이(德伊)·예춘(禮春)·업이(業伊)·막금(莫金)·예일(禮一)·가음춘·앙진(仰眞)·점향(點香)·이례(二禮)와 남종 파회(破回)·무응송(無應松)·말금(末金)·귀생(貴生)과 늙은 비구니(比丘尼) 설명(雪明)과 승려 법행(法幸)·보상(普祥)·자운(慈運) 등은 전형(典刑)대로 분명히 바르게 시행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김자점의 아들 김련(金鍊)과 함께 모의한 각인(各人)들 및 저주를 같이 모의한 약간 인이 옥중에서 죽었는데, 기타 각 범죄에 한결같이 관련된 자들은 경중에 따라 의논하여 처단할 생각입니다.
이형장은 사신을 수행하여 의주로 돌아왔을 때 붙잡아다 심문하였는데, 공초하기를 ‘김자점이 탄핵을 받은 뒤에 성 밖에 있는 그를 찾아가 보았더니, 김자점이 그 아들 식 및 장서기(掌書記) 이인달(李仁達)과 밀실에 같이 앉아 있었다. 처음에 나라를 원망하는 말을 꺼내자 김식이 그 아비에게 눈짓을 하면서 만류하였는데, 김자점이 식에게 말하기를 「이 사람은 우리와 정분으로 볼 때 한집안이나 마찬가지이고 너와는 의리상 형제나 매 한가지인데, 어떻게 겉으로만 대하여 숨길 수 있겠는가.」하였다. 그리고는 변사기·기진흥·안철 등과 역모를 약정하였다고 말하면서 군자(軍資)와 호상(犒賞)을 내가 주관하도록 하였다. 나도 옛날의 은혜를 감사하게 여기고 있었으므로 마침내 그의 말을 따랐으니, 역모에 동참한 것이 사실이다.’ 하였으므로 즉시 이형장을 법대로 적용하여 정형(正刑)에 처했습니다.
이상 의정부가 아뢴 내용의 전말을 응당 알려야 하겠기에 주문하는 바입니다." 【병조 참판 허적(許積)이 지었다.】
【태백산사고본】 8책 8권 27장 A면【국편영인본】 35책 535면
【분류】외교-야(野) / 사법-행형(行刑) / 변란-정변(政變) / 왕실-종친(宗親) / 왕실-비빈(妃嬪) /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 / 사상-불교(佛敎)
[註 059] 의빈(儀賓) : 왕이나 세자의 사위. 여기선 김세룡을 가리킴.[註 060] 조역(趙逆) : 조 소원을 말함.[註 061] 정법(正法) : 사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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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5일 병자
상이 하교하였다.
"내시(內侍) 김언겸(金彦謙)과 고예남(高禮男)은 내사(內司)에서 저주 죄안을 추국할 때에 많이 수고하였으니, 각기 한 등급씩 가자(加資)하라."
3월 6일 정축
상이 주강에 나아가 《서전》 홍범편을 강하였다. 검토관 이정영(李正英)이 아뢰기를,
"일단 녹봉을 넉넉하게 준 뒤에야 선한 일을 하도록 할 수 있다[旣富方穀]는 등의 말이야말로 사람의 마음을 세밀히 안 것이라 할 것입니다. 일찍이 조종조 때에는 사대부의 녹봉을 풍족하게 주었기 때문에 모두 염치를 지키려고 스스로들 힘썼던데 반해, 지금은 사부(士夫)들이 궁핍하여 염치에 대한 절조를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데, 이는 대체로 나라의 저축이 여유가 없어 그런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잇따라 흉년을 만나 늘 재감(裁減)하는 조치만 취했으므로 나의 마음이 실로 편치 못하다."
하였다. 지경연 이후원(李厚源)이 아뢰기를,
"우리 나라는 공신에게 봉역(封域)을 나누어 주는 규정이 없기 때문에, 생존한 공신의 자손은 모두 녹봉을 받습니다만, 시대가 멀리 떨어진 공신은 단지 충의위(忠義衛)에 입번(入番)하는 적장자(嫡長子)만 녹봉을 받을 뿐 기타 자손들은 녹봉을 받지 못해 혹 제사가 이미 끊겨 혼령을 굶주리게 하는 경우마저 있습니다. 경비가 아무리 고갈되었다고는 하나 이런 경우는 규례에 의거하여 녹봉을 지급해 주어야 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참으로 옳다. 녹봉을 의당 지급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3월 7일 무인
상이 주강에 나아가 《서전》 홍범편을 강하였다.
좌의정 김육이 세 차례나 정고(呈告)하니, 모두 윤허하지 않는 것으로 비답하라고 명하였다.
도승지 이응시가 아뢰기를,
"신이 삼가 사복시의 계사(啓辭)를 보건대, 연경(燕京)에 가는 역관에게 2백 금(金)을 주어 준마(駿馬) 1필을 사 오도록 하였습니다. 신은 이를 보고 놀라움과 탄식을 금치 못하였는데, 반복해서 생각해 볼 때 명철하신 전하께서 필시 이렇게 했을 리가 없으리라고 여겼습니다. 사복시의 관리를 불러다 물어보니 대답하기를 ‘현재 어승(御乘)에 적합한 말이 없기 때문에 이번 사신 행차에 본시(本寺)의 제조(提調)가 역관으로 하여금 청나라 말을 사 오도록 한 것이다.’ 하였습니다. 제조가 직무를 수행하려는 극진한 마음에서 이런 일을 하였다고는 하나, 어찌 이것이 임금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의리라 하겠습니까. 가령 임금이 혹시라도 이런 분부를 내렸다 하더라도 신자(臣子)된 입장에서는 간절히 깨우쳐 드리어 완물(玩物)을 경계하라고 했어야 할 것인데, 어떻게 먼저 이런 의견을 꺼내어 막기 어려운 심지(心志)를 유도한단 말입니까.
우리 나라에 양마(良馬)가 없다고 하더라도 조종조 이래로 제릉(諸陵)을 행할 적에 한 번도 기주(冀州) 북쪽 지방에서 나오는 명마를 구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에 와서 어찌 꼭 다른 나라에서 말을 사들인단 말입니까. 더구나 1백 금은 열 집의 재산과 맞먹으니 명철한 임금이라면 이 금액을 허비하는 것도 아깝게 여길 것인데, 어떻게 스무 집의 재산과 맞먹는 돈을 허비해 가며 멀리 수 천리나 떨어진 외국에서 말을 사올 수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말 1필의 값이 무려 2백 금이나 나간다는 것도 신은 일찍이 듣지 못했던 일입니다. 사방에서 이를 듣는다면 누군들 실망하지 않겠습니까.
주(周)나라 때에는 팔준마(八駿馬)를 얻었어도 일컬을 만한 덕이 없었고 한(漢)나라 때에는 사마(四馬)를 고루 갖추지 못했어도 끝내는 부강하게 되었는데, 과거의 일을 잊지 않고 후대에서 귀감으로 삼는 일은 실로 전하에게 달려 있으니 원하건대 살펴 주소서. 더구나 지금은 공사(公私) 간에 물력(物力)이 완전히 고갈된 때이니만큼, 전하 자신부터 더욱 절약하시어 모두가 따라오도록 모범을 보이셔야 마땅할 것입니다. 지금부터 다시는 청나라 말을 사 오도록 하지 마시고, 준마를 사려는 마음을 바꿔 현인을 구하는 실지로 삼으신다면, 정말 다행이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계사의 뜻이 지극하니 매우 가상하게 여긴다. 어찌 가슴에 새기지 않겠는가."
하였다.
3월 8일 기묘
심액(沈詻)을 좌참찬으로, 임담(林墰)을 우참찬으로 삼고 해원령(海原令) 이영(李暎)을 초자(超資)하여 해원군(海原君)으로, 신호(申壕)를 가의 대부(嘉義大夫)의 자계(資階)로 뛰어 승진시켰다.
헌부가 아뢰기를,
"상으로 가자(加資)하는 규정에는 본래 제한이 있으니, 일등 공신이 아닌한 3등급을 뛰어 넘어 가자하지 못하게 한 것은 곧 명기(名器)를 중히 여기기 위해서입니다. 이번에 해원령 이영은 준직(准職)062) 에 있었던 부류도 아닌데, 갑자기 당상 3 등급이나 뛰어올렸으니, 이는 아무리 일등 공신의 예를 적용한 것이라 하더라도 시행해서는 안 될 규정인 것입니다. 더구나 신호는 원래 자계(資階)도 없는 사람인데, 가의 대부까지 제수하였으니, 어쩌면 이토록까지 지나치게 논상한단 말입니까. 일찍이 선조(先祖) 때에는 정사 공신(靖社功臣) 중에 비록 일등에 참여된 자가 있어도 원래 자계가 없는 자는 4, 5품의 직질(職秩)을 주는 데에 불과하였습니다. 옛 제도를 준수하고 명기를 아끼는 그 훌륭한 뜻이야말로 어찌 성명께서 본받을 일이 아니겠습니까. 신호가 이미 직명(職名)도 없는데 영과 나란히 재신(宰臣)의 반열에 오른 것 또한 상을 균등히 내리는 전범이 못 되니, 신호에게 내린 2품의 자계를 적당히 개정한 뒤에야 그런대로 지나치게 남발한 다는 비평이 없게 될 것입니다. 해조로 하여금 분부를 여쭈어 시행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재차 아뢰니 비로소 윤허하여 신호에게 내린 가의 대부에서 한 등급의 자계만 개정토록 하였다.
3월 9일 경진
상이 주강에 나아가 《서전》 홍범편을 강하였다.
3월 10일 신사
상이 주강에 나아가 《서전》 홍범편을 강하였다.
암행 어사 심세정(沈世鼎)·조한영(曺漢英)·유준창(柳俊昌)을 불러서 봉서(封書)를 주어 보냈다.
우의정 이시백(李時白)이 성묘하고 조정에 돌아 왔다. 상이 불러 보고, 이어서 호서(湖西)의 농사를 하문하니, 시백이 대답하기를,
"신이 보기에는 꽤나 풍년들 징조가 있었습니다. 원하건대 성상께서 특별히 어찰(御札)를 내리시어 권농(勸農)의 정사를 신칙하시고, 감사와 수령으로 하여금 단기(單騎)로 돌아다니며 진심으로 농삿일을 권장하게 하소서. 이것이야말로 현재의 급선무라 할 것입니다."
하자, 상이 입시한 승지에게 이르기를,
"백성은 먹을 것을 하늘로 삼고 나라는 백성을 하늘로 삼는데, 백성이 만약 추수를 못하게 되면 어떻게 나랏일이 되겠는가. 대신의 말이 이와 같으니, 이 뜻으로 특별히 제도(諸道)의 감사에게 유시하라. 옛날 대명 태조(大明太祖)께서 순수(巡狩)하실 때에 태자로 하여금 직접 민간을 돌아보며 그 질고(疾苦)를 묻게 하였던 것이 참으로 이유가 있다."
하였다.
3월 11일 임오
관상감이 아뢰기를,
"본감(本監)의 천문학관(天文學官) 김상범(金尙范)이 연경에 들어가 시헌 역법(時憲曆法)을 배워 왔는데, 바로 오늘 밤부터 그 방식대로 추산하여 속히 지어 올리게 하는 한편, 많은 관원을 뽑아 그에게 배워 익히도록 하였습니다.
다만 생각건대 반복해서 추탐(推探)하려면 필시 몇 개월이 소요될 것이고, 또 우리 나라의 일출 시각은 중국과 차이가 있는만큼 우리 나라의 옛 역법을 또한 참고해서 자세히 정해야 할 것인데, 책력을 간행할 시기가 이미 박두하여 제때에 이루지 못할 형편입니다. 그리고 역법을 개정하려면 충분히 세밀하게 살펴야 할 것인데, 아직 징험을 거치지 않아 반신 반의하여 결정을 짓기 어려운데 갑자기 반포하여 시행할 수도 없습니다. 따라서 계사년의 책력은 예전대로 간행해 내도록 하고, 새로운 책력이 완성되면 정서(淨書)하여 바치게 한 다음 연경에서 역서가 오기를 기다려 서로 맞추어 대조하는 한편, 측후(測候)하는 기구들을 정비하여 하늘의 운행과 징험해 본 다음에, 갑오년부터 새로운 책력을 간행하여 반포하는 것이 온당하겠습니다."
하니, 따랐다.
3월 12일 계미
김좌명(金佐明)을 승지로 삼았다.
3월 13일 갑신
상이 대신 및 비국의 제신(諸臣)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정태화(鄭太和)가 아뢰기를,
"영장(營將)을 다시 설치하는 데 따른 편리 여부를 좌의정 김육(金堉)과 우의정 이시백(李時白)에게 의논하였더니, 김육의 소견은 신과 서로 부합되었습니다만, 이시백은 말하기를 ‘이미 혁파한 것을 다시 설치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 진관(鎭管)의 수령은 장령(將領)에 합당한 자를 가려 보내는 것이 타당하다.’ 하였습니다. 그러나 각 고을 진관의 수령을 어떻게 모두 적임자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두 정승이 나오기를 기다려 다시 의논하여 처리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다만 생각건대 병력을 장악한 사람이 형세가 불편한 데 구애되어 그의 손과 발을 묶어 놓은 채 임의대로 직무를 수행하지 못하고 있으니, 아무리 재주가 있는 자에게 임무를 맡기더라도, 그 뜻을 펴기 어려울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비록 번거로운 일이 있다고 하지만, 어찌 편의에 따라 직무를 수행하는 일이 없겠는가. 이 때문에 관직을 폐지하다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하였다. 병조 참판 허적(許積)이 아뢰기를,
"훈국(訓局)의 군병들에게 종이와 꿀을 수납하면서 군수 물자를 보충한다고 핑계대어 생기(省記)에서까지 제외해 주기 때문에 항오(行伍)가 텅텅 비어서 습진(習陣)하는 날마다 그 숫자가 매우 부족하니 이 또한 놀랍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군수 물자를 보충한다는 명목으로 둔(屯)을 설치하고 무역하면서 생기에서까지 제외해 주고 거두어 들인다면, 둔곡(屯穀)과 무역해서 번 돈은 어디에 쓴다는 말인가. 자못 해괴하기 짝이 없다. 엄히 도감을 단속하여 다시 전날의 습관을 답습하지 않도록 하라."
하였다.
상이 주강에 나아가 《서전》 홍범편을 강하였다.
3월 16일 정해
상이 하교하였다.
"훈국(訓局)의 둔전(屯田)이 팔도의 주현(州縣) 어느 곳에도 없는 곳이 없어 백성들이 상당히 고달파하는데도 지금까지 없애지 않고 있는 것은 오로지 군수(軍需)를 충당할 목적에서였다. 그런데 도감은 도리어 쓰기에 부족하다고 하니, 이는필시 대부분 부실하게 운영하기 때문일 것이다. 앞으로는 둔전을 감독하는 사람을 가려 보내 실질적인 효과를 이루도록 하고, 부족한 군수를 채우려고 군사를 내보내 보충하는 폐단을 없애서 오늘 이후로는 영원히 이런 일이 없도록 하라.
그리고 도성의 친위병의 원수(元數)가 많지 않은데, 도감이 또 갖가지 방법으로 사역을 시키면서 헛되이 장부에 이름만을 끼워넣고 있으니 이보다 부실할 수가 없다. 항오(行伍) 중에서 노약자를 도태시키지 않는 것도 안 될 일인데, 더구나 헛된 장부를 작성한단 말인가. 도감군병의 원수가 얼마나 되는지 내가 아직 모르는데 앞으로는 제색(諸色) 군병의 총 숫자를 장부로 작성하여 계삭(季朔) 때마다 가감된 숫자를 수정(修正)하여 아뢰도록 하라."
간원이 아뢰기를
"전 부사(府使) 윤창구(尹昌耉)는 전에 수원(水原)에 재직할 때 탐욕스러운 짓을 자행하여 관고(官庫)가 바닥났는데, 원곡(元穀) 중에 축낸 숫자가 무려 수백 석에 이르므로 지금까지도 사람들의 말이 자자하여 끊이지 않고 있으니 이야말로 말할 수 없는 장오죄(贓汚罪)를 범한 자라 할 것입니다.
따라서 그 후임자는 사실대로 조사하고 보고한 뒤 도신(道臣)이 아뢰어 처리하기를 기다렸어야 마땅한데, 부사 홍중보(洪重普)는 후임자로서 인계받았다는 혐의에 구애된 나머지 흐리멍덩하게 덮어 두었으니, 그 또한 사심(私心) 때문에 공도(公道)를 폐기한 죄를 면하기 어렵습니다. 윤창구는 잡아다 국문하고, 홍중보는 추고하소서."
하니, 본도(本道)로 하여금 조사해서 보고하도록 하였다.
3월 17일 무자
당시 오랜 가뭄 끝에 비가 내렸으므로, 상이 희우(喜雨)라는 제목으로 입직(入直) 중인 은대(銀臺)063) ·옥당·춘방(春坊)064) ·한주(翰注)065) 의 관원에게 5언과 7언 율시(律詩)를 지어 올리게 하였는데, 압운(押韻)은 풍(豊)과 민(民) 두 자(字)였다. 대제학을 불러 등수를 매기게 하였다. 그 결과 수석을 차지한 수찬 김휘(金徽)에게 표피(豹皮)와 호초(胡椒)를 내리고, 사서 이상진(李尙眞), 주서 정석(鄭晳), 도승지 이응시, 승지 이홍연(李弘淵)·김좌명(金佐明)·변시익(卞時益),필선 이형(李逈), 교리 이태연(李泰淵), 겸춘추 서변(徐忭), 가주서 신규(申圭), 권론(權碖) 승지 정유(鄭攸)에게 각각 차등있게 물건을 내렸다.
3월 18일 기축
채유후(蔡𥙿後)를 대사간으로 삼았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제도(諸道)의 감사를 모두 양계(兩界)의 예대로 오래 재직시켜 효과를 이루도록 요구하자는 의논이 있었는데도 아직까지 단안을 내려 결정하지 못했던 이유는 변통하기가 어려워서였을 뿐 아니라 인재를 구하기 어려운 점을 염려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전남 감사 심택(沈澤)은 1년을 재직하는 동안 그 다스린 효과가 이미 드러나 민심이 흡족하게 여기어 그가 떠날까 걱정하고 있으니, 그대로 전주 부윤의 직책까지 겸임시켜 3년의 임기를 마치게 하면, 실로 편리하고 이익될 것입니다. 우선 전남 일도(一道)에서부터 시험해 보도록 하소서."
하니, 따랐다.
3월 20일 신묘
허적(許積)을 대사헌으로, 권우(權堣)를 집의로, 원만석(元萬石)·정익(鄭榏)을 지평으로 삼았다.
3월 21일 임진
상이 숭정문(崇政門)에 거둥하여 조참(朝參)하는 예를 행하였다.
죄인 정사준(鄭士俊)이 복주(伏誅)되었다.
정사준은 장례원의 관리로서 이형장(李馨長)의 처남이었는데, 양민을 억눌러 천민으로 만든 죄 때문에 온 가족이 황주(黃州) 정방 산성(正方山城)에 정배되었다. 그러다가 이형장이 정명수(鄭命守)와 결탁하여 가슴 속에 품고 있던 바를 자행하자, 정사준이 그의 위세를 빙자하여 버젓이 서울 안을 드나들었으므로 이를 듣고 놀라며 분개하지 않은 자가 없었다. 이에 영의정 정태화(鄭太和)가 상에게 아뢰니, 포도청에 명하여 체포하도록 하였다. 이때는 이형장의 역모가 이미 탄로났으므로 포도청이 군사를 풀어 이형장의 아들 이정윤(李廷尹)의 집을 포위하고 지키게 하였는데, 정사준도 그 안에 있다가 함께 체포되었다. 금부에 명하여 유배지에서 도망한 율로 논죄하게 하였는데, 의금부가 아뢰기를,
"정사준의 정상을 보면 놀랍고 분하기 짝이 없으나, 유배지에서 도망한 율을 적용하는 것은 법문(法文)의 본의와는 조금 다르니, 대신에게 의논하여 절충해서 정하소서."
하니, 따랐다. 영의정 정태화, 우의정 이시백이 의논드리기를,
"아무리 악역(惡逆)을 저지른 대죄(大罪)라 하더라도 반드시 모두 승복(承服)을 받은 뒤에 법을 시행해야 하는 법이니, 승복하기를 기다리지도 않은 채 처형하는 일을 지금 새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하고, 좌의정 김육(金堉), 전 영의정 이경석(李景奭), 영중추부사 이경여(李敬輿)가 의논드리기를,
"만약 그 죄대로 죄를 주지 않으면 화기를 해치고 폐단을 여는 일이 도리어 커지게 될 것인데, 그 정위(情僞)를 따져 볼 때 사형에서 1등(等)을 감하여 절도(絶島)에 유배하는 것이 온당하겠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여러 대신이 의논드린 것은 모두가 상도(常道)를 고수하려는 것이다. 인신(人臣)의 입장에서 진언(進言)하자면 원래 이렇게 밖에 할 수 없겠으나, 다만 생각건대 나라의 형세가 이렇게까지 된 뒤인데도 굳게 상도를 지키기만 하고 변통할 줄 몰라서야 되겠는가. ‘나라가 혼란된 상황에서 형벌을 시행할 때에는 중전(重典)을 적용한다.’는 것이 어찌 《주관(周官)》에 있는 말이 아니던가. 부화뇌동하여 남에게 칭찬받기만을 좋아하고 나라일을 어떻게 할 수도 없는 지경에 놔두는 짓은 내가 할 수 없는 바이다."
하였다. 이에 정사준이 결국 처형되었다.
3월 23일 갑오
판의금부사 심액(沈詻), 지의금부사 홍무적(洪茂績)·정세규(鄭世規)가 면직되었다. 처음에 도배(徒配)된 죄인 김신충(金信忠)이 몰래 서울에 들어와 도감의 아전에게 투속(投屬)했다가 일이 발각되어 형률(刑律)을 적용받고 섬으로 이배(移配)되었다. 이때에 이르러 정사준이 복주(伏誅)되었는데, 상이 ‘김신충의 죄도 정사준과 다름이 없으니, 이배만 시키고 그치는 것은 온당치 않다.’는 이유로 잡아들여 다시 신문하고, 곧바로 유배지에서 도망한 율로 논하도록 금부에 명하였다. 이에 심액 등이 아뢰기를,
"자복(自服)하기를 기다리지도 않고 앞질러 먼저 조율(照律)하는 것부터가 이미 고례(古例)가 아닌데다가, 한 등급을 올려 김신충을 이배시킨 것이야말로 법의 본의에 합당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만 정사준과 똑같이 조치하라는 명이 계시니, 정말 억울하게 되는 일인 듯싶습니다."
하니, 상이 크게 노하여 본부(本府)의 낭청과 아전을 가두도록 명하고, 하교하기를,
"심액 등의 계사(啓辭) 가운데에 나오는 ‘억울하다[冤枉]’는 두 글자는 무슨 뜻인가? 독촉하여 복계하도록 하라."
하였다. 심액 등이 황공하여 궐하(闕下)에 대죄(待罪)하였는데, 대신 및 비국의 제신(諸臣)에게 명하여 심액 등의 죄를 의논하여 정하도록 하였다. 영의정 정태화 등이 아뢰기를,
"김신충이 이미 사변(徙邊)의 율을 적용받았는데, 지금 정사준의 일 때문에 중벽(重辟)에 처하는 것은 실로 과중한 처사일 듯싶습니다. 그리고 유사(有司)가 법에 의거하여 미리 헤아려 보는 것은 직무상 당연한 일인데, 다만 ‘억울하다’고 한 두 글자는 과연 잘못 표현했으니, 모두 금오(金吾)의 직책을 체차하소서."
하니, 따랐다. 그 뒤에 김신충을 결국 중벽에 처하였다.
구인후(具仁垕)를 판의금부사로, 오준(吳竣)·임담(林墰)을 지의금부사로, 윤강(尹絳)을 동지의금부사로, 전남 감사 심택(沈澤)을 겸 전주 부윤(兼全州府尹)으로, 정익(鄭榏)을 정언으로, 이온(李溫)을 지평으로 삼았다. 이온은 이숭원(李崇元)의 아들이다. 이숭원은 일찍이 광해군 때에 모후(母后)를 폐하려는 적신(賊臣)의 상소에 동참하여 강상(綱常)에 죄를 얻었다. 이때 이온이 이숭원의 족자(族子)로서 그의 악행을 이미 알고서도 재물을 탐낸 나머지 그의 양자로 나갔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비루하게 여겼다. 또 일찍이 권적(權蹟)의 논에 부화뇌동하여 선현(先賢)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을 무고하며 배척하였으므로 사림(士林)으로부터 버림을 받았는데, 이때에 이르러 갑자기 대직(臺職)에 임명되자 식자들이 놀랐다.
구인후(具仁垕)를 판의금부사로, 오준(吳竣)·임담(林墰)을 지의금부사로, 윤강(尹絳)을 동지의금부사로, 전남 감사 심택(沈澤)을 겸 전주 부윤(兼全州府尹)으로, 정익(鄭榏)을 정언으로, 이온(李溫)을 지평으로 삼았다. 이온은 이숭원(李崇元)의 아들이다. 이숭원은 일찍이 광해군 때에 모후(母后)를 폐하려는 적신(賊臣)의 상소에 동참하여 강상(綱常)에 죄를 얻었다. 이때 이온이 이숭원의 족자(族子)로서 그의 악행을 이미 알고서도 재물을 탐낸 나머지 그의 양자로 나갔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비루하게 여겼다. 또 일찍이 권적(權蹟)의 논에 부화뇌동하여 선현(先賢)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을 무고하며 배척하였으므로 사림(士林)으로부터 버림을 받았는데, 이때에 이르러 갑자기 대직(臺職)에 임명되자 식자들이 놀랐다.
구인후(具仁垕)를 판의금부사로, 오준(吳竣)·임담(林墰)을 지의금부사로, 윤강(尹絳)을 동지의금부사로, 전남 감사 심택(沈澤)을 겸 전주 부윤(兼全州府尹)으로, 정익(鄭榏)을 정언으로, 이온(李溫)을 지평으로 삼았다. 이온은 이숭원(李崇元)의 아들이다. 이숭원은 일찍이 광해군 때에 모후(母后)를 폐하려는 적신(賊臣)의 상소에 동참하여 강상(綱常)에 죄를 얻었다. 이때 이온이 이숭원의 족자(族子)로서 그의 악행을 이미 알고서도 재물을 탐낸 나머지 그의 양자로 나갔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비루하게 여겼다. 또 일찍이 권적(權蹟)의 논에 부화뇌동하여 선현(先賢)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을 무고하며 배척하였으므로 사림(士林)으로부터 버림을 받았는데, 이때에 이르러 갑자기 대직(臺職)에 임명되자 식자들이 놀랐다.
인열 왕후(仁烈王后)의 시책(諡冊)을 고쳐 썼다. 처음에 신면(申冕)이 써서 올렸는데, 그 뒤에 신면이 흉역죄로 사형을 당하자 오준에게 명하여 다시 써서 올리도록 한 것이다.
삼가 살피건대 신면은 사람됨이 음흉한 생각을 품고서 권세를 좋아하여, 김자점(金自點)의 당으로 빌붙어 누구보다도 친하게 지내면서 조정의 논의를 마음대로 주도하는 등 일체를 자기의 생각대로 꾸며 나갔다. 상이 즉위하여 유자(儒者)를 진출시켜 등용하고 청의(淸議)를 널리 펴게 하였는데, 송준길(宋浚吉)이 집의가 되어 신면을 권간(權奸)의 당여(黨與)라고 탄핵하자, 상이 이에 신면을 축출하여 아산(牙山)에 유배하였다.
그 뒤에 용서를 받고 돌아와 다시 청요직(淸要職)을 차지하고는 거리낌없이 행동하였는데, 마음 속으로 앙앙불락하며 날이 갈수록 더욱 틈이 벌어지게끔 하였다. 당시 김자점은 적소(謫所)에 있었지만 그의 아들 김식(金鉽)과 함께 몰래 통하였는데, 늘 사람들을 대하면 말하기를 ‘낙당(洛黨)이라는 이름도 사양치 않겠다.’고 하면서 기필코 산림(山林)의 인사들을 모두 제거하려 하였다. 그리고는 은밀히 김식 및 이형장(李馨長)과 비밀리에 모의하여 오랑캐에게 유언 비어를 퍼뜨렸는데, 조정이 현재 산림의 인사들을 등용하여 화의(和議)를 배척해 끊으려 한다고 칭탁하면서 사류(士類)를 해치고 국가에 화를 끼치려 한 것이다. 이렇게 한 것은 대체로 김자점이 오랑캐에게 사사로이 뇌물을 매우 후하게 준 관계로 그의 말이라면 모두 들어 주었기 때문에 이런 간악한 모의를 이루려 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경인년 봄에 청나라 사신이 와서 사문(査問)하겠다고 큰 소리를 치는 일이 있게 되었는데, 먼저 공갈부터 쳐서 장차 위급한 사태가 발생하려 하였으므로 조야(朝野)가 흉흉해지며 모두들 사림을 걱정하였다. 그뒤 청나라 사신이 왔으나 끝내 힐책하는 일이 없었는데, 이는 대체로 신면 등이 모의가 누설되는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다시 정명수(鄭命守)에게 통지하여 도로 그만두게 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김자점의 옥사(獄事)가 일어나자 신면은 스스로 벗어나지 못할 줄을 알고 며칠 동안 음식을 들지 않고 술만 먹었는데, 과연 김식과 김세룡(金世龍)이 공초하며 실토하는 과정에서 비로소 신면이 오랑캐와 내통한 실상의 전모를 파악하게 되었다. 이에 상이 대궐 뜰에서 직접 국문하였는데, 신면은 말이 꿀려 감히 변명도 하지 못한 채 장(杖)을 참고 맞다가 그냥 죽고 말았다. 그런데 어떤 이는 그가 음독하고 죽은 것이 아닌가 의심하기도 하였다.
3월 24일 을미
전남 감사 심택(沈澤)이, 새로 산출된 토산품은 백성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이유로 그 수를 견감하지 말고 그전대로 봉진(封進)하게 함으로써 상을 받드는 예를 중히 할 것을 청하니, 상이 하교하였다.
"풀 한 포기 쌀 한 톨이라도 백성에게서 나오지 않고 어떻게 마련할 수 있겠는가. 전에 하교한 대로 정파(停罷)하도록 하라."
병조가 아뢰기를,
"전남도 어사 민정중(閔鼎重)의 서계(書啓) 가운데 이른바 ‘각도의 병영과 수영(水營)에 있는 우후(虞候)의 호를 평사(評事)로 고치고 시종신(侍從臣)을 차견(差遣)할 것’을 청한 것은 참으로 뜻이 아름답습니다. 만약 이대로 변통시켜 그들에게 순검(巡檢)의 책임을 맡기는 한편 압력을 가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고, 또 주장(主將)과 치병(治兵)에 관한 일을 상의하며 군무(軍務)에 숙달토록 한다면, 현재의 일이나 뒷날의 쓰임에 어찌 보탬이 되는 점이 없겠습니까.
다만 각도의 도사(都事) 역시 가려 선발해야 하는데도 일일이 적임자를 택하는 걸 일찍이 보지 못했는데, 더구나 병사나 수사의 막하 관원은 도사에 비해 자못 가벼우므로 한갓 문관을 차송(差送)했다는 이름만 있을 뿐 끝내는 실제로 압력을 가하며 계책을 세우는 효과는 없게 될까 염려됩니다.
그리고 ‘첨사(僉使)나 만호(萬戶)를 문신으로 뽑아 보내야 한다.’는 것도 조종조(祖宗朝)의 고사(故事)가 있긴 합니다만, 그것은 혹 일시적인 특명에서 나온 것이므로 후세에 정상적으로 행할 법은 못 됩니다. 백성을 무마하며 결딴난 고을을 소생시키는 것이야 문관에게 책임지울 수 있을지 몰라도, 위급하게 되었을 때 힘을 얻는 면에서는 필시 무사(武士)보다 못할 것인데, 문신으로 무신을 바꾸는 일이 과연 사리에 합당한지 모르겠습니다.
근래에 병사와 수사로 있는 자들이 자신이 직접 각 고을의 군기(軍器)를 점검하지 않고 그저 군관으로 하여금 검열하게 하고 있는 것은 한심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그래서 지난번에 이미 이를 이유로 추고를 청했습니다만, 지금 다시 단속하여 옛날의 전철을 밟지 않도록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그리고 군정(軍政)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는 수령과 변장(邊將)은 파직하여 축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만, 그중에 치적(治績)이 아깝고 중한 죄에 해당하지 않는 자라면, 감사 및 주장으로 하여금 곤장을 치는 벌을 시행하게 함으로써 그들을 바꾸는 데 따른 폐단이 없게 하는 것이 온당할 듯싶습니다. 민정중이 추천한 사람들은 다시 한 번 확인하신 뒤 재능에 따라 뽑아 쓰소서."
하니, 답하기를,
"병사와 수사가 순력(巡歷)할 때에 직접 점검하지 않고 단지 군관의 말만 믿는다고 하니, 정말 너무나도 형편이 없다. 지금부터는 어사가 염찰(廉察)할 때, 군병과 기계가 잘 정비되지 않았으면 그 수령과 변장만 죄줄 것이 아니라 병사와 수사도 똑같이 그 벌을 논해야 마땅하니, 미리 거듭 경계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문관을 우후로 뽑아 보내자는 의논은 그저 슬쩍 보면 합당한 계책인 것 같지만 한갓 주장을 능멸하다가 낭패만 당할 것이니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추천한 사람들은 먼저 위사(衛士)에 차임(差任)한 다음 그 사람됨을 살펴 다른 곳으로 임용하도록 하라."
하였다.
3월 25일 병신
바람이 크게 불어 후릉의 【공정 대왕(恭靖大王)의 능이다.】 나무가 뽑혔으므로 나무를 세우고 예관(禮官)을 보내 위안제(慰安祭)를 거행하였다.
옥당이 【부제학 이일상(李一相) 등이다.】 차자를 올리기를,
"《서전(書傳)》 이훈(伊訓)에 이르기를 ‘생각건대 상제(上帝)께서는 일정치 않으시어 선을 행하면 온갖 복을 내려 주시고 선하지 못한 일을 행하면 갖가지 재앙을 내리신다.’고 하였습니다. 하늘과 인간이 서로 호응하는 이치는 조금도 간격이 없는만큼 재이(災異)가 발생한 것은 곧 그것을 초래한 원인이 있어서이니, 어찌 두려워하고 삼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 봄의 시기를 당하여 초목이 영화로움을 뽐내려 하고 대옥(大獄)이 이제 막 청산되어 더욱 새롭게 덕화(德化)를 펼치게 되었으니, 그야말로 일대 화기(和氣)가 두루 펴져 만물과 봄을 함께 해야 마땅한 때입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하늘이 그만 위세를 부려 며칠을 두고 계속 바람이 크게 불고 서리가 내려 마치 가을과 겨울의 환절기마냥 기상(氣象)이 쌀쌀하기만 하니, 어쩌면 상제께서 자비로운 마음으로 우리 전하에게 경고해 주시는 것은 아니겠습니까. 지금이야말로 전하께서 자신을 돌아보고 빨리 덕을 경건히 가지실 때입니다.
《서전》 강고편에 이르기를 ‘옛날의 법이라도 그 시대에 맞는가필히 살펴 형벌을 시행하고 죽이도록 하라.[義刑義殺]’고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덕을 밝게 하고 벌을 신중히 주도록 하라.[明德愼罰]’고 하였으니 형벌에 대한 생각을 철왕(哲王)들이 신중히 한 것인데, 희로(喜怒)를 발동하는 것은 더더욱 신중히 해야 합니다.
전일 채충원(蔡忠元)에게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잘못이 있었다 하더라도 시종(侍從)의 반열에 있는 신하를 옥에 가두기까지 하셨는데, 전후에 걸쳐 성지(聖旨)가 크게 화평함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금오(金吾)의 복계(覆啓)에 표현상의 실수가 있긴 하였습니다만 그 본래의 의도를 헤아려 보건대 의논을 신중하게 드리려는 것이었는데, 성상께서 갑자기 진노하시며 비답을 엄하고 급하게 내리시어 백발의 늙은 신하가 허둥대며 궐하에 대죄하였으므로 보고 듣는 자가 모두들 송구스럽게 여겼습니다. 이는 모두가 전하의 평소 함양하는 공부에 미진한 점이 있기 때문에 한 번 성려(聖慮)를 벗어나면 끝내 용납하지 못하신 결과 정령(政令)을 차분하게 처리하지 못하게 된 것이니, 신들은 삼가 애석하게 생각합니다. 아, ‘나라가 혼란된 상황에서 형벌을 내릴 때는 중전(重典)을 적용한다.’고 한 것은 진실로 인군이 세상을 통치하는 하나의 방법입니다. 성상께서 이 점에 뜻을 두고 계시지마는 신들은 단지 전하의 입지(立志)가 굳건하지 못하고 취사(取舍)가 명확하지 못하고 호오(好惡)가 편파적이고 모든 조치에 성실성이 부족한 나머지 말하는 사이에 너무도 기색이 드러나고 성의가 도탑지 못해 언로(言路)가 막히고 공론이 행해지지 못하게 되는 결과만 초래하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전하께서 만약 재이(災異)를 그치게 하고 화기(和氣)를 불러들여 나라를 회복시키려 하신다면, 그 근본은 형벌을 중하게 내리는 데에 있지 않고 입지를 굳건히 하며 취사를 분명히 하며 호오를 공평히 하며 성의를 도탑게 하는 데에 있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이렇게까지 차자를 올려 아뢰는데, 가슴에 새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3월 26일 정유
상이 주강에 나아가 《서전》 여오편을 강하였다.
상이 석강(夕講)에 나아가 《대학연의(大學衍義)》를 강하였다. 시독관 홍처대(洪處大)가 아뢰기를,
"선유(先儒)가 조고(趙高)의 일을 격치(格致)편에 편입시킨 것은, 대체로 인군이 격물 치지에 대한 공부를 극진히 한 다음에야 현사(賢邪)를 판별하여 소인으로 하여금 감히 간계를 이루지 못하도록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2세 황제가 어리석어 사슴과 말도 구별하지 못했으니, 다른 것이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옛말에 이르기를 ‘크게 간악한 자는 충성스럽게 보인다.’고 하였으니, 아무리 명철한 임금이라도 그에게 현혹되는 결과를 면하기가 어렵다. 당(唐)나라 시대에 환관들이 임금을 꾀어 신하들을 자주 접하지 못하게 하고 성현의 책을 멀리 하게 한 것 역시 조고의 술책을 이어받은 것이다."
하자, 홍처대가 아뢰기를,
"2세 황제가 어찌 사슴이 사슴이고 말이 말인 줄 몰랐겠습니까마는, 일단 그의 술책에 빠져 자신할 수 없었기 때문에 태사(太史)로 하여금 점을 치게까지 한 것인데, 설령 사슴과 말을 제대로 구분했다 하더라도 그의 간계는필시 깨닫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였다. 검토관 민정중(閔鼎重)이 아뢰기를,
"신이 전후에 걸쳐 장소(章疏)를 올리면서 모두 큰 뜻을 세울 것, 성학(聖學)을 닦을 것, 현능(賢能)한 이들을 임명하실 것으로 말씀드렸습니다. 이는 대체로 인군이 먼저 그 뜻을 굳게 정해야만 부지런히 학업을 닦아 자신의 덕을 이룰 수 있음과 동시에 현량(賢良)들을 등용하여 각종 정사를 나누어 다스리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잘 다스리려는 성의가 있더라도 진정 큰 뜻이 세워지지 않은 채 그저 말단에 속하는 일들만 경영한다면 끝내 효과를 보는 날이 없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의 세상에 처하여 설령 일조 일석에 삼대(三代)와 같은 정치를 이룰 수는 없다 하더라도, 진실로 큰 일을 해 보겠다는 뜻을 먼저 세운 뒤 그것을 표준으로 삼아 힘껏 노력해 가신다면, 성덕이 성취되어 저절로 의탁할 곳이 있게 될 것이고 신민들도 당우(唐虞)의 융성한 시대를 기대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위와 아래가 서로들 권면하여 원대한 사업을 기약한다면 그에 따른 모든 일들이 반드시 거행되어서 뜻대로 되지 않은 일이 없게 될 것인데, 신은 성상의 뜻이 어디에 계신지 감히 모르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좋은 정치를 펼쳐 보려는 성의야 절실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마는, 재주와 덕성이 형편없어 어떻게 해 볼 수가 없으니, 내 부끄럽기 그지없다."
하였다. 민정중이 아뢰기를,
"먼저 큰 뜻을 세워 세상에 드문 큰 업적을 이루는 것이야말로 현재의 첫째가는 목표로서 아랫사람들이 전하에게 기대하는 바입니다. 신이 늘 인재의 등용을 말씀드리는데, 그 뜻이 어찌 이 밖에 있는 것이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 훌륭한 인재가 없이 어떻게 나라를 다스리겠는가."
하였다. 민정중이 아뢰기를,
"전하께서 상황에 구애된 나머지 송시열(宋時烈) 등을 다시 불러 쓰지 못하고 계시는데, 신도 성상의 의도가 어디에 계신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선왕께서 30년 동안 인재를 배양하셨는데, 오늘날 어찌 쓸 만한 인재가 한두 사람도 없겠습니까. 참으로 원하건대 널리 준걸들을 불러모아 함께 나랏일을 다스리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말이 옳다."
하였다.
지평 원만석(元萬石)이 상소하기를,
"대체로 발동하기는 쉬워도 제어하기는 어려운 것이 있는데, 화를 내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치닫는 번갯불처럼 급하기 짝이 없고 거센 천둥처럼 격렬하기 그지없으니, 밝은 자가 아니면 스스로 돌이키지 못하고 용기있는 자가 아니면 스스로 끊어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저 항간의백성들이 별안간 서로 싸우다가 갑자기 사람을 죽여 일을 망치는 데에 이르기까지도 하는데, 이는 모두 분노심이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더구나 인주(人主)는 하늘처럼 높은 지위에 계신 분으로서 죽이고 살리는 권한을 마음대로 행사하실 수 있으니, 진정 하루라도 이 점을 신중하게 생각하시지 않는다면 그 피해를 어찌 다 말로 할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는 즉위하신 이래로 정령(政令)과 조처를 취하시는 과정에서 가끔 중도에 지나친 일을 하신 적이 없지 않았습니다. 김신충(金信忠)의 죄를 율문(律文)에 상고해 볼 때 참형(斬刑)에 처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않는 이상, 해부가 상도(常道)를 지키며 간쟁한 것은 진정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아무리 표현상에 지나친 점이 있고 회계(回啓)를 지체한 잘못이 있다 하더라도 어찌 크게 노하시어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의혹스럽게 해서야 되겠습니까. 저 한두 신하들은 모두 선조(先朝)의 원로들로서 숭반(崇班)의 지위에 있는 자들인데, 지금 전하께서 대접하는 것이 너무도 야박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작상(爵賞)이란 것은 세상을 격려시켜 더욱 힘써 닦게 하는 도구로서, 그것의 시행을 합당하게 하느냐의 여부에 따라 명기(名器)가 중하고 가볍게 되니, 어찌 신중하게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근일 등급을 뛰어넘어 제수된 자들은 대부분 뭇 사람의 마음을 만족시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 역괴(逆魁)가 아직 복주(伏誅)되기 전에도 이미 그의 죄악이 드러나 온 나라가 다 함께 분노하면서도 사람들은 모두 눈치만 볼 뿐 감히 공공연히 배척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이회보(李回寶)는 멀리 외방에 있는 외로운 신분으로서 잇따라 소장을 올리며 맞서 논하여 보고 듣는 이들을 크게 놀라게 하였는데, 모두가 시기하고 매도하는 바람에 불우한 생활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원흉이 복주되어 그 대역(大逆)의 정상이 훤히 드러나서 전에 했던 말들이 무고한 것이 아니고 하나하나 모두 들어맞았고 보면, 그의 선견지명은 훌륭하게 여기기에 충분한 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태복(太僕)066) 의 정(正)이라는 직책은 본디 현반(顯班)에 속하는데, 평소 아무 이름도 없고 행동도 가소로운 자를 갑자기 그 자리에 앉히는 것은 너무 지나치지 않습니까. 또 국청에 참여한 사람을 논상한 것은 구례(舊例)가 그렇습니다만, 금오(金吾)의 낭청을 너무 갑작스럽게 등급을 뛰어넘어 직위를 옮겨 주었습니다. 그 당사자의 현부(賢否)는 따지지 않은 채 단지 일시적인 공로가 있다는 이유로 아름다운 관직과 후한 녹봉을 그들에게 주니, 관직의 기강이 어 떻게 어지럽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외직에 보임된 사람을 대각(臺閣)에 불러 앉힌 것은 참으로 세상에 드문 은전이었습니다. 전하께서 이 사람을 취한 이유가 대체로 전일 말하기 어려운 것을 말했다는 점 때문이라면, 이 사람이 전하의 은혜에 보답하는 길도 말씀을 드리는 데에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소명(召命)을 받들고 도성에 들어 온 지도 벌써 몇 개월이 지났으나, 중외(中外)가 귀를 기울여 봐도 말 한마디 없이 적막하기만 했습니다. 이는 어쩌면 성조(聖朝)에 말할 만한 일이 없어서 그러는 것입니까, 아니면 전의 일에 놀라 지금 조심해서입니까. 신은 삼가 탄식을 합니다.
국가의 치란(治亂)은 인재에 달려 있고 인재를 진퇴(進退)시키는 권한은 전형(銓衡)에게 있습니다. 참으로 공평하고도 밝으며 재와 덕 모두를 갖춘 사람이 아니면 사람을 심복시키고 관리들의 비방을 면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을 쓰는 방법은 길이 원래부터 뚜렷이 구별되어 재국(才局)과 청로(淸路)를 뒤섞이게 할 수 없는데, 지금 전조(銓曹)가 과연 제대로 이것을 구별하고 있습니까? 취사(取舍)하는 과정에서 편벽됨을 면치 못하고 주의(注擬)할 즈음에도 많은 비평을 받고 있습니다. 보통 관직을 임명할 때는 공의(公議)에 어긋날 수도 있겠으나 높은 직질(職秩)에 통청(通淸)된 자도 여론으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으니, 식자들이 한심하게 여기는 것이 당연하다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너그럽게 답하였다. 처음에 이회보가 자주 상소하면서 김자점(金自點)이 역모를 도모하는 조짐이 보인다고 말하였고, 임의백(任義伯)은 대관(臺官)으로 있을 적에 변사기(邊士紀)가 모반하는 정상을 논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회보는 전 좌랑으로서 사복시 정에 등급을 뛰어올라 임명되고 의백은 영천 군수(榮川郡守)로 있다가 들어 와 사간이 되었다. 그리고 정선흥(鄭善興)은 금부 도사로서 단지 친국할 때 심부름한 수고밖에 없는데도 마침내 상의원 정에 임명되었다. 원만석이 상소한 뜻은 바로 이 3인을 지칭한 것이었다. 그리고 재국(才局)과 청로(淸路)가 뒤섞이게 해서는 안 된다는 등의 말은 허적(許積)을 비난한 것이었다. 허적은 젊어서 청요직(淸要職)을 역임하다가 재간(才幹)이 있다고 발탁되었는데, 외방에 나가서는 제도(諸道)를 안찰(按察)하고 들어와서는 형옥(刑獄)과 전곡(錢穀)을 관장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갑자기 헌장(憲長)에 임명되었으므로 만석이 상소에서 언급한 것이다.
3월 27일 무술
특별히 윤선도(尹善道)를 승지에 제수하였다. 윤선도는 사람됨이 바르지 못하고 가정 생활이 볼 만한 것이 없었으며, 부귀와 사치가 도를 넘고 방종한 행실이 짝이 없었으므로 젊어서 청요직을 역임한 뒤 조정에 용납되지 못해 해남(海南)에 물러가 살았다. 그리고 병자호란 때에 끝내 어려움을 같이하기 위해 달려오지 않았으므로 난이 끝난 뒤 대간으로부터 중하게 탄핵을 받았다. 그 뒤 인조가 승하(昇遐)하셨을 때 시골로 물러나 어렵게 지내던 사대부들이 모두들 달려와 곡(哭)했으나 윤선도만은 시골 집에 버젓이 누워 있었으므로 대신(臺臣)이 붙잡아다 국문할 것을 청했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었다. 이때에 이르러 상이 사부(師傅)의 옛날 은혜가 있다고 하여 이조에 명하여 수용(收用)하게 하였는데 사예(司藝)에 제수되자 또 역마(驛馬)를 타고 조정에 오도록 하였고, 얼마 후에 이렇게 특별히 제수하였다.
상이 조강에 나아가 《서전》 여오편을 강하였다. 영경연 정태화(鄭太和)가 아뢰기를,
"이목(耳目)에 사역되지 않는 것이야말로 덕행을 삼가는 공부에 속합니다. 요즈음 항간의 말을 들어 보면 모두들 전하께서 이목에 사역될 조짐이 있다고 합니다."
하고, 검토관 김시진(金始振)이 아뢰기를,
"이목에 사역되어 그칠 줄을 모르면 끝내는 마음과 뜻이 좋아하는 바를 끝까지 하게 되고 이목이 하고자 하는 바를 다하게끔 될 터이니,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시독관 홍처대가 아뢰기를,
"무익한 일을 하면 반드시 유익한 일을 해치게 되는 것은 이치상 당연한 것입니다. 정령(政令)에도 자연 유익한 일과 무익한 일의 구별이 있으니, 인주가 살피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하고, 김시진이 아뢰기를,
"어찌 유독 정령뿐이겠습니까. 강학(講學)에 비유해도 그렇습니다. 그저 장구(章句)를 외우거나 익힐 줄만 알고 의리를 정밀하게 생각하여 독실한 뜻으로 실천에 옮기지 못한다면 역시 무익한 일이 될 것입니다. ‘사람을 가지고 논한다.[玩人]’는 말은 사람을 사람답지 않게 보고 무시한다는 말입니다. 인군이 사람을 경시하는 뜻을 갖게 된 뒤에 그런 마음이 생겨나는 법인데, 그 마음이 한 번 생기면 공경스럽게 두려워해야 할 인사는 멀리 하게 되고 아첨하는 무리들만 가까이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한 무제(漢武帝)가 관을 쓰지 않은 상태에서는 급암(汲黯)을 보지 않은 것이나 대장군 위청(衛靑)을 침상 가에 앉아서 보았던 것들이 완인(玩人)하는 류입니다."
하였다.
상이 주강에 나아가 《대학연의(大學衍義)》를 강하였다.
상이 석강에 나아가 《대학연의》를 강하였다.
3월 28일 기해
상이 주강에 나아가 《서전》 금등편을 강하였다.
상이 석강에 나아가 《대학연의》를 강하였다.
3월 30일 신축
전남도 보성현(寶城縣)에서 소가 새끼를 낳았는데, 두 뿔 사이에 살로 된 꼬리가 있었다.
중국 상인이 정의현(旌義縣)에 표류해 왔으므로 현감 이탁남(李卓男)이 가서 살펴 보니 28 인이 모두 삭발하고 모자를 썼는데 그 옆에 화려한 비단으로 감싼 시체들이 쌓여 있었다. 온곳을 물어 보니, 대답하기를,
"우리는 모두 남경(南京) 소주(蘇州) 백성들로서 일본에 무역하러 갔다가 이제 막 돌아가는 길에 갑자기 태풍을 만나 바다 가운데에서 배가 부서졌다. 그 결과 1백 85인이 빠져 죽고 다행히 살아남은 자는 겨우 28인인데, 침몰된 재화가 엄청나게 많다."
하기에, 헤엄을 잘 치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10분의 1이나마 채취하게 하였더니, 여우·수달·표범·쥐 가죽과 인삼·동철(銅鐵)·향랍(香蠟)·증백(繒帛)·의상·장석(帳席)·도검·기물 등이 각각 수천 수백이나 되었다. 그 가운데 묘진실(苗珍實)이라는 자가 꽤 문자를 해득하기에, 대명(大明)의 존부(存否)와 중국의 형세를 탐문해 보니, 대답하기를,
"수년 전 숭정 황제(崇禎皇帝)가 이자성(李子成)에게 시해되고 북경(北京)은 마침내 청나라 사람들에게 함락되었다. 홍광(弘光)067) 이후로 또 노왕선(魯王先)이 장주(漳州)와 복건(福建) 사이에 있다가 다시 청나라 군대의 침략을 받아 광동(廣東)으로 옮기고는 연호를 영력(永曆)이라고 하였다. 이에 광서(廣西)에 있던 이자성의 아들이 노왕을 추대하여 청나라 군사를 막았는데, 정승은 산서(山西) 굴옥현(屈沃縣) 사람 노진비(路鎭飛)이고 장수는 학성(郝姓)을 가진 사람이었다.
청나라 사람들이 남경·섬서(陝西)·산동(山東) 등 지역을 모두 차지했는데, 과거에 명나라의 총병(總兵) 강상(姜祥)이 대동부(大同府)에 웅거하고 6부(府)의 군사를 조발(調發)하여 여러 차례 청나라 군대 수십 만을 죽이면서 2년이나 버티었으나 양식이 떨어지고 군사가 굶주린 끝에 부하에게 살해당하였으므로 산서 지방도 청나라 사람의 소유가 되었다. 사천(泗川)은 장현충(張顯忠)이 이미 죽고 무대정(武大定)이 점거하였으며, 운남(雲南)은 목영(沐英)의 후예가 아직도 그 지역에 있기 때문에 청나라 군대가 감히 침입을 못하고 있다."
하였다. 또 유구(琉球)와 일본 양국의 일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유구는 일본에 소속되었는데, 남경과 복건 사람들이 또한 양국과 서로 왕래하고 있다."
하였다. 묘진실이 이어 스스로 공사(供辭)를 써서 이탁남에게 간청하기를,
"소상(小商) 등은 남경 소주부 오현(吳縣) 사람들로서 홍광 원년에 성지를 받들고 바다를 건너 일본에 무역하러 갔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이자성의 난을 만난데다가 청조(淸朝)가 남경을 쳐 홍광 천자가 해를 입어 천하가 소란스러웠기 때문에, 소상 등이 감히 돌아가지 못하고 교지(交趾)로 들어가 행상으로 업을 삼아 온 지 이제 7년이 됩니다.
삼가 듣건대 청조가 백성을 자식처럼 사랑한다 하기에 본토에 돌아가려고 1월 22일 일본에서 배를 띄워 2월 9일에 귀국의 지방에 이르렀는데, 바람을 만나 배가 부서져 같이 왔던 2백 13인이 모두 익사하고 살아남은 자는 겨우 28인입니다. 간절히 기원하건대 노야(老爺)께서 크게 자비심을 베풀어 소상들을 곧바로 일본에 보내 주신다면 그런 대로 살아날 가망이 있겠습니다. 만약 북경으로 보내실 경우에는 길이 더욱 멀어 2, 3년은 걸려야 본토에 도착할텐데, 생명을 온전히 하여 도착할 수 있을지 보장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 일본까지는 겨우 며칠 거리밖에 안 되고 일본에서 남경까지도 수개월 거리인데, 부모와 처자를 다시 서로 만날 수 있게만 해 주신다면 이보다 큰 은혜는 없을 것입니다. 삼가 청하건대 국왕 전하께 품하여 시행해 주소서…."
하였다.
이탁남이 확인한 사실을 모두 기록하여 그의 공사와 함께 제주 목사 이원진(李元鎭)에게 보고하니, 이원진이 치계하여 알렸다. 상이 묘당으로 하여금 의논하여 처리하게 하였는데, 영의정 정태화(鄭太和)가 상에게 아뢰기를,
"표류해 온 중국인을 덮어두기는 어려우니, 전례(前例)에 따라 그 재물도 실어서 북경에 보내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 힐문하는 단서를 주게 될까 염려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전일 우리 나라에서 잡아 보낸 자들이 모두 도륙(屠戮)되었는데, 내 또 차마 박절하게 죽을 곳으로 보내지는 못하겠다. 그러나 상황이 이러하니, 장차 어떻게 한단 말인가."
하고, 마침내 정태화의 의논을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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