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효종실록8권, 효종 3년 1652년 4월

싸라리리 2025. 12. 21.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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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일 임인

상이 하교하였다.
"전 판의금부사 심액 등의 죄에 대해 대신과 중신의 의견에 애써 따라 우선 추고만 하라는 명을 내렸었는데, 해방 승지 변시익(卞時益)이 여러 날 동안 덮어두고 전지(傳旨)를 헌부에 전달하지 않았으니, 임금의 명을 공경하지 아니한 그의 죄가 매우 크다. 실로 매우 놀라운 일이니 먼저 파직하고 뒤에 추고하도록 하라."

 

정언 이만웅(李萬雄)이 상소하기를,
"오늘날 국사가 극도로 위태로워서 비록 임금과 신하 사이에 성의가 미덥게 되고 대소의 관리가 협심하여 함께 구제하더라도 오히려 이 어려움을 헤쳐나가지 못할까 염려되는데, 더구나 상하의 정은 막혀서 통하지 않고 조정의 의논은 괴리되어 한결같지 않아 날이 갈수록 심하여 이미 극도에 달하였으니 결국 패망하고야 말 것입니다. 말이 여기에 이르자 저도 모르게 마음이 꺾이고 기운이 빠집니다. 신은 보잘것없는 신진으로 아는 것도 없는데, 잘못 상에게 발탁되어 별안간 언관의 자리에 있게 되었으나 부끄러움과 두려움만 쌓일 뿐이며 조금도 도움을 드리지 못했으니, 성은을 저버린 죄가 또한 많고 스스로 헤아려 보아도 은혜를 갚을 길이 아득합니다. 그러나 하나라도 생각나는 바가 있으면 의당 말씀드려야 할 처지이므로 말씀드리는 것이니 성명께서는 살펴 주소서.
아, 오늘날 조정에서 내린 가장 큰 거조는 전화(錢貨)와 대동법(大同法)이 아니겠으며, 오늘날 조정이 의탁하는 바는 대신과 일을 맡고 있는 신하가 아니겠습니까. 전화와 대동법에 대한 이해와 편리의 여부에 대해 신같이 어리석은 자로서는 진실로 감히 알지 못할 부분도 있겠고 말하지 못할 부분도 있겠습니다만, 이 일을 잘 아는 자들은 이 법에 대하여 오래 전부터 논의해 왔습니다. 지난 선조(先祖) 때 역시 논의하였다가 바로 파하였고 성상이 즉위하신 초기에 이르러 상신(相臣)이 가장 먼저 이 일에 대하여 건의하였는데 지난해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성상이 윤허하심으로 말미암아 한두 신하가 동의하여 과감하게 실시하였으니, 이는 실로 국가의 비용을 넉넉하게 하고 백성의 부역을 고르게 하자는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백성들은 곡식만이 먹을 것인 줄 알고 포백(布帛)만이 입을 것인 줄 알 뿐, 돈이 옷과 음식의 근본이 된다는 사실을 모르고서 말하기를 ‘돈이란 물건은 배고플 때 먹을 수도 없고 추울 때 옷으로 입을 수도 없는데, 어찌하여 기필코 사용토록 하려 하는가. 유행하는 재화라고 할 경우 추포(麁布)도 돈과 같은 종류이지만 입거나 먹을 수 없는 것은 같다. 그런데 하필 얻기 어려운 것을 행하도록 하고 얻기 쉬은 것을 금지한단 말인가.’ 하면서, 서로 말을 주고받으며 의심을 하여 시장에서 대부분 교역이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잠시 동안 추포의 금지를 완화하여 돈과 함께 사용토록 하자, 백성들은 모두 돈을 사용하지 않고 추포를 사용하면서 말하기를 ‘속담에 「고려의 정령(政令)은 3일을 넘기지 못한다.」하였는데, 과연 그렇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대개 점차적으로 하지 않고 빠르게만 실시하려 하였고 종전의 정령도 신용을 얻지 못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만약 호령을 실시하여 백성들에게 신용을 얻은 뒤에 실행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여 시간을 두고 연마한다면 아마 이룰 수 있을 것인데, 사람들이 더러 말하기를 ‘영상이 돈을 사용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알고 말하지 않았다.’하고 일을 맡은 신하들도 말하기를 ‘돈을 사용하는 일은 그전부터 행하기 어렵다고 생각했다.’고 하면서 그 허물을 좌상에게 돌리고 있습니다.
대동법에 있어서도 이미 이루어질 승산인데, 신이 들으니, 호서 지방 백성이 대부분 떠들며 말하기를 ‘이 법이 과연 좋다면 어찌하여 다른 도에도 두루 사용하지 않고 단지 이곳에만 실시하여 우리들 자신을 보호하지 못하게 하는가.’라고 한다 합니다. 실지로 혜택을 받기 전에 원망이 먼저 일어나게 되었으니, 이는 대개 감사가 잘 처리하지 못한 때문입니다. 당초에 김홍욱(金弘郁)이 여기에 뽑혀 제수된 것은 특별히 법을 설치한 본의를 그가 잘 알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홍욱의 입장에서는 마땅히 백성들의 실정에 맞는지와 법조문이 정당한지의 여부를 잘 살펴서 모두 계품하여 결재를 기다렸어야 합니다. 그런데 듣기로는, 홍욱이 확실한 소견이 없어 조처할 바를 몰라 한 도내 백성들의 실정을 조정에 전달하지 못하였고 조정의 덕의를 백성들에게 선포하지 못하여 시행하는 사이에 실책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도리어 싫어서 피하려는 마음을 먹고 대간의 평을 기다리겠다는 말을 공공연히 사람들에게 발설하여 심지어 조정에까지 들리게 했으니, 당초에 선출하여 보낸 뜻이 과연 어디에 있습니까. 그리고 세 말의 쌀을 처음에 잘못 징수하고서 열 말의 쌀을 뒤에 또 징수하여 마치 일정한 부세 외에 또 추가한 것이 있는 것처럼 하였으며, 시기적으로 양곡을 내주어 백성들을 구제해야 할 때인데 전세(田稅)와 함께 일시에 독촉하면서 명령은 느슨하게 하고서 기한은 다그쳐 각박하게 하니 본래는 백성들을 편리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백성들이 도리어 원망을 하고, 본래는 부역을 고르게 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부역이 도리어 무겁게 되었습니다. 부자도 오히려 감당하지 못할 판이니 피폐한 백성들은 결국에 유망(流亡)하고 말 것입니다. 어찌 대단히 민망하고 불쌍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조정에 있는 신하들이 누구나 이것을 염려하였으나, 또한 이러한 사실을 상에게 감히 알리지 못했습니다.
대체로 이 법의 본래 목적은 부역을 고르게 하고 백성을 편리하게 하자는 것이었지만 세세한 절목 사이에 작은 병통이 없지 않았으니, 일을 맡은 신하는 이해 관계를 깊이 연구하여 상신과 함께 반복 강마해서 끝까지 구제할 것을 도모했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들은 바에 의하면 대사헌 허적(許積)은 이 법을 의논할 당시 전석(前席)에서 질문을 받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도 그 일이 불가하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하지 않았고, 일을 맡고 난 뒤에도 실지로 연구해 보지도 않은 채 오직 받들어 시행할 뿐이라고 말을 하며, 짐짓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는 계책으로 지내오다가, 오늘날에 이르러 호서(湖西)의 일이 저 지경이 된 것을 알고는 말하기를 ‘나는 진실로 이 법이 결국에는 필시 폐단이 있을 줄 알았으므로 일찍이 상소를 올렸었다. 지금 다시 무슨 말을 하겠는가.’ 하면서, 마치 자기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처럼 여기니 그 일을 맡고서 그 책임을 다한다는 뜻이 어디에 있습니까. 신은 또 들으니 우상(右相)이 호서 지방에 갔을 때 많은 호서 지방의 백성들이 글을 올려 그들의 실정이 조정에 전달되기를 바랐다고 합니다. 진실로 이런 일이 있었다면 우상은 조정으로 돌아오던 날 역시 갖추어 진달했어야 하는데, 아직도 그 일에 대한 사실을 듣지 못하겠으니, 우상 역시 실정을 그대로 말씀드리지 않은 바가 있습니다. 신이 일찍이 영상의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의 뜻은 대체로 이 법과는 맞지 않았는데, 미루기를 ‘동료 정승이 이미 스스로 맡았는데, 법의 이해 관계를 내가 어찌 관여하겠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영상이 처음에는 비록 이 법의 논의에 참여하지 않았더라도, 이 법의 실행 여부가 국가의 대계이니, 또한 마땅히 가부간에 서로 조절하여 지극히 마땅한 데로 귀결시켜야 한다고 여겨집니다. 어떻게 수수방관하여 그 일이 성공하든 말든 그냥 두어서야 되겠습니까.
아, 대체로 이 두 가지 법은 국가의 큰 계획인데, 대신이 뜻에 맞지 않은 것이 있는데도 말을 하지 않고, 안으로는 유사의 일을 맡고 있는 자와 밖으로는 방백의 책임을 받은 자가 또 저 모양입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조정의 대소 신료들이 들어가서는 나름대로 논하면서도 나와서는 감히 분명하게 말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혹 ‘생각한 바가 있으면 어찌 곧바로 진달하지 않는가.’라고 책망하면, 말하기를 ‘이것은 좌상이 평소에 경륜(經綸)하던 것이다. 어떻게 하루아침의 소견으로 망령스레 논의할 수 있겠는가. 오직 그 일이 어떻게 되어가는가를 서서히 관찰할 뿐이다.’라고 하니, 아, 어찌 이런 이치가 있을 수 있습니까. 좌상이 이 법을 실시하자고 청한 것은 국가를 위하고백성을 위한 것이었지 본래 사심을 가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실시하여 폐단이 생기지 않으면 진실로 아름다운 일이거니와 만약 이 법이 폐단이 있어 백성들이 끝내 기뻐하지 않는다면, 일을 주관했던 사람은 당연히 그 잘못을 책임진다 하더라도, 방관만하고 있던 자들 역시 어찌 그 책임을 모면하겠으며 국사를 장차 어느 곳에다 두겠습니까.
신은 들으니, 선조(先祖) 때 대동법(大同法)을 삼도(三道)에다 시행하려 할 때 상신 이원익(李元翼)이 실로 그 논의를 주장하였는데 관아를 설치하여 마련한 뒤에 그것이 불가하다는 많은 논의가 일어나자 이원익이 그 법을 취소하자고 아뢰려 하였으나, 그때는 이미 해직되었기 때문에 여러 재상에게 서찰을 보내 정파할 것을 극구 권장하였다 합니다. 이 법이 편리한지의 여부는 신이 비록 자세히는 모릅니다만 오늘날 높은 지위에 있는 자들은 대부분 일을 겪어 경험이 풍부한 사람들이므로 필시 그 이해 관계가 어떻다는 것을 알고 있을텐데 아직까지 한 사람도 분명하게 말하거나 현저하게 논의하지 않고 있으니, 선조의 여러 신하들에게 비추어 보면 부끄러운 일입니다. 국가의 계책은 지극히 중대하여 사사로운 일과 같지 아니하므로, 이해가 있는 곳을 정확하게 보고 분명하게 안다면 가하지만,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한번 주장했다가 한번 혁파하는 것을 이원익으로 법을 삼더라도 또한 무슨 지장이 있겠습니까.
아, 오늘날 임금과 신하의 사이에 성의가 미덥다고 할 수 있겠으며, 대소의 관리들이 협력하여 함께 구제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가까운 곳의 백성들의 실정도 오히려 진달하지 못한 바가 있는데, 더구나 저 먼 곳의 백성들이겠습니까. 처음에 참여하여 일을 같이 했던 자도 오히려 물러나서는 뒷말을 하는데, 더구나 그 논의에 참여하지 아니한 자이겠습니까.
아, 전하께서도 이러한 사실을 통찰(洞察)하고 계십니까? 전하께서 신하들을 인접하시는 것이 하루에도 세 번 뿐만이 아니니 할 말이 있는 자들은 숨기지 않았을 것이고 생각한 바가 있으면필시 진달하였을텐데, 오늘날의 일이 이 지경이 된 것은 도대체 무슨 까닭입니까?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조촐한 자리에서 삼공과 일을 맡은 신하 및 관직에 있는 모든 재상을 함께 불러서 신이 올린 상소를 보여 주시고 조용히 자문하여, 그들의 소견을 각자 진달해서 그 법의 이해와 편리한지의 여부를 논의케 하소서. 그런 다음 성상의 뜻을 참작하시어 좋은 점만을 골라 신속하게 처리하신다면 종묘 사직의 다행이며 백성들의 다행이겠습니다."
하였는데, 상이 비답하지 않았다.

 

4월 2일 계묘

임담(林墰)을 대사헌으로, 안헌징(安獻徵)을 승지로 삼았다.

 

승지를 보내어 전옥서(典獄署)의 죄수를 살펴보고, 죄가 가벼운 자들을 석방하게 하였다.

 

동지중추 민응형(閔應亨)이 청대(請對)하니, 상이 소견(召見)하였다. 민응형이 아뢰기를,
"사치의 피해는 천재지변보다 심합니다. 지난 혼조 때부터 세상이 모두 화려한 것만 숭상하여 고질적인 폐습이 이루어져 오랜 세월을 지내 왔습니다. 선왕께서 반정한 초기에 오히려 모두 다 변화시키지 못하였으므로 오늘날에 와서는 그 폐단이 자라나 장복(章服)의 제도가 문란하고, 귀천이 구분이 없습니다. 원컨대 전하께서는 마음을 맑게 하여 욕심을 줄이시고 검소한 덕을 애써 닦으시어 대우(大禹)가 옷과 음식을 거칠게 하고, 문왕(文王)이 궁실을 낮게 하고, 한 문제(漢文帝)가 신부인(愼夫人)의 옷을 땅에 끌지 않도록 했던 것처럼 하소서. 전하께서 비록 날마다 경연에 납시어 성인의 훈계를 강론하시지만 항상 갑(甲)한테서 화난 것을 을(乙)에게 돌리시는 병통이 있으시며 말씨가 너무 노골적이고 형벌이 중도를 잃었으므로 언로(言路)가 이미 막혔으니, 그 피해가 어찌 작겠습니까.
지난날 조석윤(趙錫胤)은 실지로 죄가 없었는데, 이경억(李慶億)을 신구(伸救)한 것으로 인하여 유배를 보내기까지 하였으니, 이것이 갑한테서 화난 것을 을에게로 옮긴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 후에 사면해 주라는 명을 특별히 내리셨으니, 신하로서 어느 누가 성상의 넓으신 도량을 모르겠습니까마는, 다만 신의 소견으로는, 조석윤은 진정한 사류(士流)이므로 조정에 있는 여러 신하들 중에 그보다 뛰어난 자는 없다고 봅니다. 세상이 점점 낮아져 인물이 잗달아 나라에는 믿을 만한 신하가 없으니 원컨대 조석윤을 속히 수용하여 언로를 열어 주소서.
지난번에 흰 무지개가 해를 가로지르는 이변이 있었는데도 일관(日官)이 사실대로 아뢰지 않았으며, 근래에는 또 큰 바람이 불어 피해가 있었으니, 앞날의 걱정을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근일 전하께서 겨우 약간의 비가 왔다고 하여 문득 만족해 하시고 근신에게 명하여 시를 지어 기쁨을 기록하게 하셨으며 또 빈번한 하사가 있으셨으니, 이는 실로 상제(上帝)를 대하는 정성이 계속되지 못하여 그러한 것으로, 이날 비가 멈추고 바람이 크게 불었습니다. 대체로 공구 수성은 재앙을 늦추는 방법이며, 한번 찡그리는 것과 한번 웃는 것은 현명한 임금이 아꼈던 바인데, 어찌 시를 지으라는 분부를 하시어 하늘을 공경하는 마음을 소홀히 하십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이 정성을 다해 진달한 것이 모두 지성에서 나온 것이니, 비단 듣기에만 좋을 뿐 아니라 마음에도 매우 기쁘다."
하고, 입시 승지 박장원(朴長遠)에게 이르기를,
"진달한 내용이 이렇듯 간절하니, 빈말로 너그러운 대답만 하는 것은 자못 성실한 도리가 아니다."
하고, 조석윤을 서용토록 하였다.

 

상이 주강에 나아가 《서전》 금등편을 강하였다. 강을 마치고 나서 지경연 이후원(李厚源)이 아뢰기를,
"삼가 듣건대, 숙안 공주(淑安公主)의 전장(田庄)을 조사하는 데 있어 내사(內司)의 차관을 홍청도(洪淸道)에 특별히 파견하였다고 합니다. 대체로 조신(朝臣)이 명을 받고 외지에 나갔을 때에도 국법을 잘 따르지 않는 자가 있는데, 더구나 이 내사의 관리는 본래 천박한 사람이니, 어찌 이러한 자들로 하여금 수령을 조사하게 하여 방자한 그들의 습성을 길러 주려 하십니까. 수령에게 그와 같은 죄가 과연 있다면 감사로 하여금 조사하여 아뢰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것은 군과 현을 신문하려는 거조가 아니라 하리들의 거짓된 현상을 살피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마땅히 그대의 말대로 처리하겠다."
하였다.

 

상이 석강에 나아가 《대학연의》를 강하였다. 강을 마치고 나서 상이 입시한 승지 김좌명(金佐明)에게 이르기를,
"형조에 갇혀 있는 죄수가 이미 많다. 산음(山陰)의 죄인도 해조로 하여금 참작하여 속히 판결해 주어 재앙을 늦추는 일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게 하라."
하였다. 당시 산음현(山陰縣)의 아전이 그 고을의 수령을 독살하였다. 도신(道臣)이 보고하자, 경옥(京獄)으로 잡아오도록 명하여 형조로 하여금 다스리게 하였는데, 연루된 사람이 점점 많아져 여러 달 동안 체류시켜 왔으므로 이러한 하교를 내린 것이다.

 

영의정 정태화가 차자를 올려 사직을 청하였다. 그 차자의 대략에,
"신은 시무(時務)를 아는 슬기도 없고 변통할 줄 아는 재주도 없는데, 잘못 발탁이 되어 내외의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습니다. 관직에서 일을 보면서 고례를 조심스럽게 지켜왔고 자신의 의견을 내어 새로 실시한 일이 한번도 없었습니다. 더구나 돈을 사용하여 재화를 통용하게 하고 대동법을 실시하여 부역을 고르게 하는 일은 모두 국가의 대단한 거조입니다. 그런데 그 일이 결과적으로 편리할지의 여부와 실행해야 할지의 여부에 대하여 어떻게 신같이 생각이 얕은 자가 헤아려서 먼저 알 수 있겠습니까. 조정에서 이 명령을 내린 지가 벌써 해를 넘겼으니 신은 매번 생각하기에 이 법이 혹시라도 장애되는 부분이 있어서 결과적으로 이익을 보지 못하게 되면 백성들은 혜택을 받지 못하고 반대로 피해를 받게 될 것이라는 걱정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지난번 병고(病告) 중에 있을 때, 좌상이 찾아왔기에 이러한 뜻을 언급했더니, 좌상도 그렇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사람들과 마주 대할 때 가부에 대하여 언급한 적이 없고 입시했을 때 역시 한 마디도 하지 않았던 것은 의도한 바가 있었던 것입니다. 대체로 좌상은 나라를 걱정하는 성심으로 생각을 자아내어 이 두 가지 일을 아뢰어 겨우 시행하기에 이르렀으나 결과가 어떻게 될지에 대해서는 오히려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중외의 시민들 중에 논의하는 자들이 다같이 떠들어대며 신더러 묵묵히 말하지 않고 있다고 기롱하면서 비방하는 말이 빗발쳤습니다. 신이 영의정 자리에 있으면서 외부의 논의에 동요되어 따라서 맞장구를 쳤다면 사람들이 필시 신의 말을 끌어 대어 그 일을 저지하려는 발판으로 삼았을 것입니다. 신이 이미 스스로 계획을 세워 이익을 도모하지 못하였는데 어떻게 경솔하게 왈가왈부하여 일을 망칠 수 있겠습니까.
이번에 정언 이만웅(李萬雄)의 상소 중에 신의 말을 항상 들어왔다고 하였는데, 신은 만웅과 서로 대화한 적이 없었으므로 처음에는 의아하게 여겼다가 끝에 가서 생각해 보니 삼성이 회좌(會坐)한 자리에서 호서 지방 백성들이 원망하고 있다고 말하는 자가 있어 대신이 말하지 않는 것을 한스럽게 여긴다고 하기에, 신이 몇 마디 말로 대답하여 신의 뜻을 알게 하였는데, 만웅이 마침 이날 참석했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신의 뜻을 미루어 많은 말을 연역(演繹)하고는 결국 수수방관했다는 이유로 신의 죄를 삼았습니다. 신이 비록 염치를 불구하고 태연하게 버티고 있고 싶다 하더라도 그럴 수가 없습니다. 엄하게 면직시키라는 명을 내리시어 물의에 답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쓸데없이 떠들어대는 말세의 논의를 따질 것이 뭐가 있겠는가. 더구나 마음 속의 시비를 저들이 어떻게 알겠는가. 경은 괘념하지 말고 내일 내아(內衙)의 모임에 참석토록 하라."
하였다. 좌의정 김육(金堉)도 이 일로 차자를 올려 면직해 줄 것을 청하였으나, 너그러운 비답을 내리고 윤허하지 않았다.

 

영돈녕부사 김상헌(金尙憲)이 양주(楊州)에서 상소를 올려 치사할 것을 청하고, 인하여 녹(祿)을 사양하니, 상이 위로하는 유시를 내리고 허락하지 않았다.

 

동부승지 윤선도(尹善道)가 상소하여 면직을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윤선도에게 특명으로 이 관직에 제수할 때에 물의가 놀라자 간원이 이 일을 들어 논핵하려고 논의를 제기했다가 그만두었으므로 윤선도가 부득이 상소를 올려 체직해 줄 것을 청한 것이다. 답하기를,
"인심(人心)과 세도(世道)가 비록 아름답지는 못하다고 하나 오히려 국법이 엄연히 있는데 저 시기하고 질투하는 무리들이 어찌 감히 우리 조정에서 간사한 꾀를 부릴 수 있겠는가."
하였다. 윤선도는 자신의 마음 씀씀이와 일 처리가 공의(公議)에 용납되지 못한 줄을 알고 상의 마음을 묶어 두어서 사람들의 비난하는 말을 막게 하려고 상소를 올려 자신을 변명하고 세상을 공격하였는데, 말이 매우 음험하여 사람들이 모두 놀라고 통분하였다.

 

4월 3일 갑진

민응형(閔應亨)을 부제학으로, 심노(沈𢋡)를 부교리로, 이천기(李天基)를 부수찬으로 삼고, 전 판서 김집(金集)에게 정헌의 품계를 가자하였다. 그 전에 교리 이태연(李泰淵)이 상에게 아뢰기를,
"김집은 이 시대의 유종(儒宗)으로서 나이가 팔십이 되었습니다. 원컨대 노인을 우대하는 은전을 베풀어, 사림들로 하여금 의지하여 존중할 바를 알게 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받아들였으므로 이때에 와서 이와 같은 명을 내린 것이다.

 

사서        이상진(李尙眞)이 상소하기를,
"원자(元子)가 입학하는 것은 큰 예이며, 박사(博士)가 강설하는 것은 사도(師道)입니다. 큰 예를 행하여 사도를 엄하게 하고 부군(副君)의 존귀함을 굽혀 속수(束脩)의 예의를 펴는 것은 학기(學記)에 이른바 ‘그 신하를 신하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박사의 직책이 가벼운 것이 아니라 막중한 것이 분명하니, 그 직책에 맞는 사람을 신중하게 뽑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대제학        윤순지(尹順之)는 사람됨이 본래 취할 것이 없고 일 처리도 대부분 제대로 못하므로 사론(士論)이 그를 오래 전부터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전에 역녀(逆女) 앙진(仰眞)은 본래 역적 조(趙)068)                  의 심복이었는데, 옛날 종의 아내라 하여 그의 집에 있게 하고서 피차간에 왕래하는 것을 혐의하지 않았으니, 이는 사대부로서 할 일이 아닙니다. 더구나 앙진 등 두세 사람을 모두 그의 집으로 잡아와서 형벌을 가한 경우이겠습니까. 심지어 그가 지은 역적을 토벌하고 북(北)에 보고한다는 글에 ‘당시를 위하여 논척한다.’ 했고, 또 ‘2, 3재신을 제거하여 방축(放逐)한 원한을 풀겠다.’고 하였으니, 아, 김자점(金自點)의 흉악한 역적 모의가 2, 3재신을 제거하려는 데만 그쳤을 뿐이었습니까. 이것이 도대체 무슨 말이며, 또한 무슨 뜻입니까. 물정이 모두 놀라고 여론이 들끊는데도 일찍이 인혐하고 들어가지 않고 버젓이 공무를 행하였으니, 이것만 보더라도 그가 염치가 없는 자라는 것을 더욱 알 수 있습니다. 그가 하는 행동을 보면 재신의 반열에 있는 것도 이미 진신(搢紳)의 수치인데, 지금 또 사유(師儒)의 장(長)으로 버젓이 박사(博士)의 일을 맡게 하여 우리 조선의 태학(太學)의 예를 욕되게 해서야 되겠습니까.
예로부터 원자(元子)를 가르쳐 인도하는 방법은 반드시 전후 좌우에다 정직한 사람을 두게 하였는데, 이는 원자로 하여금 올바른 일을 보게 하고 올바른 도리를 행하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원자가 입학하는 날을 당하여 이 사람으로 하여금 스승의 자리를 더럽히게 한다면 올바른 일을 보고 올바른 도리를 행하게 하는 의의가 어디에 있습니까. 오늘날 조정에 비록 인재가 모자란다고는 하나 어찌 이러한 사람을 기어이 채용하여 스승으로 모셔놓고 도(道)를 묻는 성대한 예를 그르치려 하신단 말입니까. 삼가 원하건대, 성상께서는 속히 명하시어 하자가 전혀 없는 자를 가려 뽑아서 박사의 직책을 중히 하시고 입학하는 예를 분명하게 하소서.
신이 비록 보잘것은 없으나 이미 사서(司書)의 관직을 맡고 있으므로 세자궁에 관계되는 모든 일을 직책상 마땅히 담당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세자가 제자의 예를 갖추고서 이 사람에게 절하는 것을 보게 되었으니 신도 사실 부끄러운 일인데, 더구나 세자는 얼마나 모욕적이겠습니까. 신이 분개한 마음을 가진 지가 이미 오래지만 대례(大禮)가 앞에 닥쳐 관계되는 바가 더욱 막중하므로, 삼사(三司)에서 마땅히 논핵하여야 할 일이므로 시강원 관원들은 먼저 진달할필요가 없다고 여기고서 발설하려다 그만 두었던 것입니다. 그후 12일 동안이나 기다렸는데도 서로 말만 할 뿐 한 마디도 아뢰는 자가 없어서 결국은 조용하게 습의(習儀)를 마쳤습니다. 시비의 판가름은 오늘날 볼 수 없다고 하더라도 부군(副君)을 높이는 도에 있어서 이래서야 되겠습니까. 어리석은 충성심에 북받쳐 주책없이 아뢰는 것이니 성상께서는 살펴 주소서."
하였는데, 상소를 들이자 상이 물리쳤다. 이어 정원에 하교하기를,
"이와 같이 치우치고 바르지 못한 상소를 어떤 승지가 입계하였는가. 일이 매우 놀랍다."
하였다. 윤순지가 갑자기 문형(文衡)을 주관하여 당시의 기대를 크게 무너뜨렸다. 게다가 세자가 입학하는 큰 예를 당하여 오히려 사피하지 않자 물의가 더욱 놀라워하였다. 이상진(李尙眞)이 분개하여 상소를 올렸는데, 도리어 바르지 못하다는 조목으로 상에게 배척을 받으니, 사론(士論)이 애석하게 여겼다.

 

상이 대신과 비국의 여러 신하를 인견하였다. 좌의정 김육(金堉)이 아뢰기를,
"부처한 죄인 황감이 현재 적소(謫所)에 있는데, 그의 아비가 서울에서 죽었으므로 분상(奔喪)을 할 수 없다 하니, 처지가 매우 딱합니다. 그리고 황감이, 김자점(金自點)이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르던 날 그의 저택이 법제를 넘었다는 말로 경연에서 감히 진달하니 사람들이 이 때문에 훌륭하게 여긴 자도 있었는데, 오늘날 죄를 받게 되자 사람들이 모두 원통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사면하여 주소서."
하자, 상이 영의정 정태화(鄭太和), 우의정 이시백(李時白) 및 여러 신하에게 물었으나 모두 다른 말이 없었는데, 유독 교리 이태연(李泰淵)만이 법은 사사로운 일 때문에 흔들릴 수가 없다고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아버지가 죽었는데 분상할 수 없다는 것은 인정상 매우 딱한 일이다. 해당 부서에 명하여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라."
하고, 또 대신 및 여러 신하에게 묻기를,
"경들은 이상진(李尙眞)의 상소를 보았는가. 직책상 간관(諫官)이 아니면서 월권하여 말을 하였다. 자기와 같은 편은 끌어들이고 자기와 다른 편은 공격을 하는 습성이 여기에까지 이르다니 실로 매우 한심스럽다."
하자, 정태화가 아뢰기를,
"신이 이상진을 한번 본 적이 있는데, 그 사람됨이 소박하고 정직하였습니다. 이번에 논의한 바는필시 사심을 품고 공적인 일인 양하여 상대를 공격하려는 데에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닐 것입니다. 새로 시골에서 와서 그 일의 곡절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하고 단지 조정 진신들의 여론(餘論)만 듣고서 분개한 나머지 상소하여 자기 지위를 벗어나는 말을 하고 있는 줄을 살피지 않은 것입니다. 만일 대간(大奸)이 조정에 숨어 있는데도 월권이라 하여 말을 하지 않아야 합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상진의 상소 내용이 상당히 의심스럽다. 양사(兩司)는 그에게 벌을 주어야 한다고 여기는가, 마땅히 벌을 주어야 한다면 어떤 법률을 적용해야 하는가?"
하자, 대사헌 임담과 대사간 채유후가 아뢰기를,
"신들이 상소의 원본을 직접 보지 못하였으므로 가볍게 논의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말을 비록 지나치게 하였다 하더라도 어떻게 갑자기 무거운 형벌을 내릴 수 있겠습니까."
하였는데, 다시 그의 죄를 의논하라고 명하였다. 임담 등이 아뢰기를,
"대각의 체례상 단독으로 처결할 수 없고 반드시 동료들과 함께 가부를 서로 논의하여 처리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청컨대, 물러가서 의논하여 아뢰도록 하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주강에 나아가 《서전》 금등편을 강하였다. 상이 연신(筵臣)에게 이르기를,
"성왕(成王)은 관숙(管叔)과 채숙(蔡叔)의 유언 비어를 살피지 못하였는데, 한 소제(漢昭帝)는 곽광(霍光)이 참소를 당한 것을 분변할 줄 알았다. 그렇다면 소제의 총명함이 성왕보다 훌륭하단 말인가?"
하니, 검토관 김휘(金徽)가 아뢰기를,
"선유(先儒)의 말에 의하면 ‘한 소제의 자질로 주공(周公) 소공(召公)과 같은 신하의 보좌를 받았더라면 그의 덕업의 성취한 정도가 필시 성왕보다 못하지는 않았을 것이다.’라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석강에 나아가 《대학연의》를 강하였는데, 연신이 가충(賈充)의 간사하게 막고 가리는 데 대하여 글 뜻을 인하여 진달하였다. 검토관 김휘가 아뢰기를,
"요즈음 세상에도 이와 같은 사람이 있으니, 지난날 상소를 올린 대관이 【원만석이다.】  바로 그 사람입니다. 그 상소 내용에 재국(才局)과 청로(淸路)는 섞이게 할 수 없다는 말이 있는데, 그 말이 만약 실행된다면 재주 있는 자 어느 누가 국가를 위하여 충성을 다하겠습니까. 오직 대열을 쫓아 수행하면서 청요직을 차지하려고 할 것이니, 국가에 장차 큰 해가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과연 그대 말과 같다. 그러나 그 상소 내용이 대부분 나의 실책을 지적한 것이었으므로 너그러운 비답을 내린 것이다."
하였다.

 

정언 이만웅(李萬雄)이 인피하여 아뢰기를,
"삼가 윤선도(尹善道)가 올린 상소에 비답하신 것을 보니, 시기하고 질투하는 죄를 언급하셨는데, 신이 실로 그 죄에 해당합니다. 어떻게 미처 발론하지 못했다고 해명하여 구차하게 죄를 면할 수 있겠습니까. 지난날 윤선도가 관직에 제수되어 부름을 받던 날 은혜와 예우가 각별하였으니, 이는 진실로 옛날에 글을 배웠던 스승의 은혜를 저버리지 아니한 성대한 뜻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특별히 가자를 뛰어넘어 은대(銀臺)에 있게 하신 것은 실로 여러 사람들의 기대 밖에서 나온 것이므로 이 사실에 대하여 보고 들은 자 그 어느 누가 놀라지 않았겠습니까. 대체로 명기(名器)란 지극히 중한 것이어서 사사로운 은혜 때문에 적임자가 아닌 사람에게 함부로 줄 수 없는 것입니다. 더구나 중대한 후설의 자리는 임금의 분부를 출납하는 곳이니, 더욱 신중을 기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래서 신이 동료들과 함께 개정할 뜻을 언급했었는데, 윤선도가 그때 마침 스스로 먼저 인혐하여 들어갔으므로 중간에 그만 두고 말았습니다.
지금 듣건대, 윤선도 상소 내용 중에 미원(薇垣)을 지척한 말이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신의 말로 인하여 이와 같은 말을 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선도의 전후 잘못은 거론할 필요가 없겠지만 전일 올린 상소에 장황하게 늘어놓은 말이 모두가 자기를 변명한 말이었으니, 매우 외람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가 국상(國喪)에 달려와 곡하지 아니한 일에 대해서 그 역시 변명을 하고자 했으나 할 수 없게 되자 《오례의》에 ‘외지에 나가 있는 모든 신하는 공해(公廨)에서 거애(擧哀)한다.’는 말을 인용하여 자신을 옳다고 하였으니, 어찌 이렇게까지 심하게 꾸며댄다는 말입니까.
천자는 7개월 만에 장례를 치르므로 온 천하에서 모두 참여하고, 제후는 5개월 만에 장례를 치르므로 동맹국이 모두 참여합니다. 온 천하와 모든 동맹국도 오히려 참석하는데, 어찌 국가의 두터운 은혜를 입어 일찍이 대간과 시종의 직책을 받았으면서 군부의 삼년상이 끝나도록 달려와 곡하지 않는단 말입니까. 임금과 신하 간의 대의가 여기에 이르러 땅을 쓸어버린 듯 말끔히 없어졌습니다. 대체로 그 마음 씀씀이와 일처리가 이러한데 전하께서는 이 사람에게 무엇이 취할 것이 있기에 이렇게까지 총애하시어 발탁하십니까. 신에게 이미 곧바로 논계하지 아니한 실책이 있고 또 간사한 꾀를 써서 시기와 질투를 부린 죄가 있으니, 그대로 버티고 있을 수 없습니다. 신의 관직을 삭탈하소서."
하고, 집의 권우가 인피하여 아뢰기를,
"삼가 윤선도가 올린 상소를 보니, 전후 논핵당한 일을 낱낱이 진달하여 대간을 공척하기에 안간힘을 다 쓰고 있습니다. 신 역시 기축년 논핵할 당시 대관(臺官)이었으니 어찌 감히 그대로 버티고 있겠습니까. 신의 관직을 체차하소서."
하고, 헌납 오정위, 정언 정익이 인피하여 아뢰기를,
"윤선도를 승선(承宣)에 제수하라는 특명은 실로 사부(師傅)를 총우(寵遇)한 뜻에서 나온 것이므로 더욱 관작을 사사로이 친한 자에게 내린 것과 다릅니다. 윤선도는 혼조 때 절의를 세웠으며 본래부터 재주와 식견이 있었습니다. 비록 비방이 있으나 이 때문에 이미 20여 년이란 오랜 세월 동안 폐치되었는데, 지금 와서 또 다시 논한다는 것은 너무 심한 일입니다. 동료들이 이미 인피하였는데 어떻게 홀로 버젓이 있겠습니까. 신들을 체직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이만웅 등이 모두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상이 하교하기를,
"윤선도는 세상 사람들이 청탁하고 끌어주고 하는 꼴을 본받지 아니하고 시골로 내려가 글을 읽으며 본분을 지켰다. 비록 운운한 일이 있기는 하나, 허물을 씻어주고 거두어 서용한 자가 진실로 한두 사람이 아닌데, 어찌하여 유독 이 사람에게만 굳이 너무 심한 논의를 하는가. 그 마음 씀씀이가 공정하지 못하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더구나 사부를 우대하는 예는 비단 사리에만 마땅할 뿐만 아니라 이것은 바로 조정의 옛 법인데, 승지에 특별히 제수하는 것이 무엇이 불가하기에 감히 음성적으로 견제하는 꾀를 내어 이렇게까지 장황하게 꾸며대는가. 정언 이만웅을 체차하라."
하였다. 정원이 논쟁하니, 상이, 일단 대간의 처치를 보겠다고 하교하였다.

 

대사헌 임담이 인피하여 아뢰기를,
"어제 등대했을 때 사서 이상진의 상소 때문에 엄한 분부를 누차 내려 양사로 하여금 죄를 의논토록 하셨습니다. 짧은 시간에 대신(臺臣)의 규례상 미처 살피지 못했으므로, 상소 원본을 보지 못하였다는 것과 동료들과 상의해 보겠다는 것으로 말씀드리고 물러나왔었습니다. 명을 받고 죄를 논의하는 것은 예로부터 대각에 본래 이러한 법규가 없었으므로 물의가 모두 신들이 즉시 아뢰지 않은 것을 잘못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신이 대각(臺閣)을 맡고 있는 책임자로서 그 법을 집행하거나 임금을 섬기는 도리에 있어 이렇게 몽매하게 처리하였으니 직책을 완수하지 못한 책임이 현저합니다. 결코 태연하게 있을 수 없으니 신의 관직을 파척하소서."
하고, 대사간 채유후(蔡𥙿後) 역시 이 일로 인피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임담 등이 모두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옥당이 차자를 올리기를,
"정언 이만웅 등이 모두 인혐하고 물러갔습니다. 대각이 일을 논의하는 데는 곧고 강직한 것을 귀하게 여기는 것인데, 이미 발설하고서 바로 정지하였으니 그 체모에 흠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변명하는 상소도 말에 노기가 다분히 서려 있습니다. 기왕의 일을 혐의로 삼지 말고 반복하여 생각해 보아도 불가한 일이 아닐텐데 논의가 이미 나왔는데도 끝내 따르지 않았습니다. 탑전에서 하교를 받는 것이 비록 창졸간에 당한 일이라 하더라도 곧바로 쟁집하지 않았으니, 체모와 관례에 어긋남이 있습니다. 청컨대 정언 이만웅·정익, 헌납 오정위, 대사헌 임담, 대사간 채유후를 체차하고, 집의 권우를 출사시키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오정위와 정익을 특명으로 출사토록 하였다. 다음날 오정위와 정익이 특명으로 출사토록 하는 것은 미안한 일이라 하여 인피하고, 권우도 미처 논계하지 못한 일이 이만웅과 차이가 없다 하여 역시 인피하였는데, 체직되었다.

 

4월 4일 을사

대제학 윤순지가 상소하여 면직을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재차 상소하자, 윤허하였다.

 

동부승지 윤선도가 여러 번 상소하여 면직을 청하니, 윤허하였다.

 

수찬 민정중(閔鼎重)이 상소하기를,
"대제학 윤순지가 청론(淸論)에 용납되지 못하는 것은 신도 알고 있습니다. 동료들이 모인 자리에서도 탄핵하자는 의논이 있었는데, 사람이 무른 탓으로 일찍이 발론하지 못하여 결국 궁관(宮官)의 기척(譏斥)을 받았으니, 오직 부끄러움만 더할 뿐, 무슨 말로 변명하겠습니까.
승지 윤선도는 몸을 삼가지도 않고 집안에서는 조행도 없으며 아무렇게나 처신하여 의리를 멸시하고 처지에 걸맞지 않는 제도를 행한 일이 많으니, 이는 명교(名敎)에 용서받기 어려운 바이며, 온 나라 사람들이 함께 버리는 바입니다. 처음에 불러 올리는 명을 내리자 식자들은 성상이 실수를 하셨다고 했었는데, 승선(承宣)에 발탁되자 여정에 크게 어긋났습니다. 어찌 옛날 사부라고 하여 진신의 대열과 근밀한 자리를 욕되게 할 수 있겠습니까. 신이 지난번 국청에서, 일을 함께 맡았던 신하들에게 언급했으나, 우선 양사의 논의를 기다리기로 하고 논핵을 하지 않았었는데, 윤선도가 항거하는 말로 감히 자기 자신을 이렇게까지 변명할 줄 어찌 알았겠습니까.
신이 공론을 맡고 있는 중대한 자리에 있으면서 이미 전에는 바로잡는 말씀을 드리지 못했고 또 뒤에도 논핵하여 바루지 못했는데, 성상의 분부가 매우 엄하여 시기하고 질투한다는 하교를 내려 발론한 대간을 특명으로 체직하셨으니, 신이 어떻게 감히 그 책임을 간관에게 돌리고 혼자만 태연하게 있겠습니까. 아, 시기하고 미워한다는 말은 본래 소인이 군자를 침해하는 경우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이번에 행실도 없고 의리도 없는 윤선도 한 사람을 논핵하려다 도리어 군부(君父)에게 이런 말을 듣게 될 줄을 어찌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신을 파직하시어 말하지 아니한 죄를 다스리소서.
그리고 신이 삼가 대신이 사피한 글을 보니, 장관이 경연에서 분부를 받들어 사서 이상진에게 죄 줄 것에 대하여 논의하는 것이었습니다. 대체로 상진에게 과연 벌을 주어야 한다면 상이 분부를 내리기 전에 마땅히 준행했어야 하고, 형벌을 내리지 않아야 한다면 비록 상이 하교를 내렸다 하더라도 역시 따를 수 없는 것입니다. 아, 국가에서 대간을 둔 것이 단지 분부를 받들어 법률을 의논하는 곳으로 삼기 위해서였습니까. 이런 일은 법을 맡은 관리 한 사람만 해도 충분합니다. 성명이 위에 계시는데 고분고분하는 습성이 여기까지 이를 줄은 예측하지 못했습니다. 신이 현재 법을 위배한 중에 있으므로 공정한 것으로 서로 규제할 수는 없습니다만 구구한 저의 생각을 감히 진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고, 수찬 김시진(金始振)이 역시 상소하기를,
"삼가 듣건대, 사서(司書) 이상진(李尙眞)의 상소에 삼사가 말하지 아니한 것을 배척하였다 하니, 신은 정말 너무도 놀랍습니다. 대체로 윤순지가 청론에 죄를 얻은 것과 문형(文衡)에 맞지 않다는 것은 온 나라 사람 어느 누가 모르겠습니까. 궁액에 있던 사람을 받아들여 사대부의 염치를 모두 망가뜨렸고 자문(咨文)과 주문(奏文)을 지어 올려 역괴(逆魁)의 죄악을 모두 없앴으니, 그 위인의 비루함과 문학이 거친 것은 족히 말할 것도 없습니다. 조정과 초야의 의논이 사실상 들끊고 있으나 논핵하는 거조를 감히 내지 않고 있으며, 어리석은 신도 누차 동료들에게 의논하였으나 오늘날까지 머뭇거려 왔는데, 장차 이 사람으로 하여금 외람하게도 박사의 임무를 맡겨 우리 세자가 수모를 당함이 과연 이상진이 말한 것처럼 되었으니, 이것은 모두 신들의 죄입니다.
신이 또 듣건대, 윤선도가 상소를 올려 자신을 해명하였는데, 그 뜻이 비밀스럽고 말씨가 험악하였다 합니다. 아, 윤선도는 집에 있으면서 음란하고 사치스런 행실을 멋대로 하였고 관직에 있으면서 이끗을 탐하는 욕심을 부리다가 잇달아 무거운 논핵을 입었으므로 세상에 버림을 받은 지가 오래입니다. 지난날 그를 불러 올리는 명이 비록 옛 스승을 잊지 못한 뜻에서 나왔다고는 하나, 승선(承宣)으로 발탁한 데 미쳐서는 사람들이 모두 놀라면서 서로 말하였습니다. 대체로 관작은 하늘이 내려 준 것이므로 임금이 사사로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 특히 사부로서 옛 은혜가 있다 하여 그 사람이 어떠한지 따져보지도 않고 후설의 중책을 주었으니, 물정이 진실로 만족해 하지 않을 만합니다. 그런데 윤선도는 버젓이 글을 올려 자기를 논의한 사람들을 모함했으니 위험스런 그의 마음을 마땅히 야무지게 단속해야 할 텐데, 전하께서는 도리어 시기하고 미워한다는 명목을 공론을 편 사람들에게 선뜻 가하시니 신은 삼가 애석하게 여깁니다. 신이 이미 윤선도가 청선(淸選)에 걸맞지 않다는 말로 여러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언급하고서 아직까지 발론하지 않았으니 간관(諫官)과 다를 바 없으며, 시기하고 미워한 죄는 신에게도 있으니, 어떻게 감히 그 실정을 숨기고 구차스럽게 그 죄를 면하기를 바라겠습니까.
그리고 또 신이 들으니, 어제 경연에서 사서 이상진의 죄를 논의하라는 하교가 있었는데, 양사의 장관이 면전에서 쟁론을 펴지 못한 채 수긍하고 그대로 물러나왔다 합니다. 아, 대관을 둔 것이 어찌 오로지 상의 분부를 받들어 바른 말을 한 사람의 죄를 논하라고 한 것이겠습니까. 상진에게 죄가 있다고 논한다면 신이 아뢴 바도 같은 벌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신의 관직을 삭탈하시어 일에 대하여 일찍이 말하지 아니한 죄를 다스리소서."
하고, 교리 이태연(李泰淵)도 이상진의 상소 중에 삼사가 말하지 아니했다고 배척한 것으로 상소를 올려 자신을 논핵하니, 모두 사직하지 말고 직무를 보라고 답하였다.

 

4월 5일 병오

윤강을 대사헌으로, 신천익(愼天翊)을 대사간으로, 채유후(蔡𥙿後)를 승지로, 남용익(南龍翼)을 정언으로 삼았다.

 

4월 6일 정미

심로를 집의로, 권령(權坽)을 장령으로, 오핵을 지평으로, 홍처대(洪處大)를 헌납으로, 정수(鄭脩)를 정언으로 삼았다.

 

상평청(常平廳)에 있는 곡식 1백 석으로 남한산성(南漢山城)에 있는 굶주린 백성들을 구제하였다.

 

4월 8일 기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상이 태묘에서 여름 제사를 지냈다.

 

김집(金集)을 이조 판서로, 김신국을 공조 판서로, 임담을 좌참찬으로, 오정원(吳挺垣)을 지평으로, 오정위(吳挺緯)를 부교리로 삼았다. 오정원과 오정위는 고 참의 오단(吳端)의 아들이며, 경기 감사 오정일(吳挺一)의 아우이다. 형제가 모두 현요직을 맡고 있었으며, 그 누이 동생은 곧 상의 아우인 인평 대군(麟坪大君)의 부인이다.

 

상이 하교하였다.
"지금 비를 비는 제문(祭文)의 내용을 보니, 자신을 자책하는 말이 없다. 그래 가지고서야 어떻게 신명을 감격시킬 수 있겠는가. 사신(詞臣)으로 하여금 고쳐 짓게 하라."

 

4월 9일 경술

채유후를 가선(嘉善) 수 대제학(守大提學)으로 삼고, 가선(嘉善)의 품계를 주었는데, 옛 법전에 의한 것이다. 민광훈(閔光勳)을 승지로, 심지한(沈之漢)을 사간으로, 박길응(朴吉應)을 보덕으로 삼았다.

 

해서 지방의 결손된 조곡(糶穀) 3천 5백 석을 견감하였다. 이에 앞서 조정이 강화도의 창곡을 풀어 해서 지방의 여러 고을에 옮겨다가 백성들에게 나눠주고 이자를 받게 하였는데, 해가 갈수록 더욱 불어나 백성들이 갚을 수 없게 되자, 감사 정지화(鄭知和)가 흉년이 들어백성들의 생활이 곤란하다 하여 그 결손분을 견감해 줄 것을 청하였으므로 따른 것이다.

 

4월 10일 신해

교리 이태연이 상소하기를,
"이조 판서 김집이 나이가 아직 팔십이 못 되었는데, 신이 잘못 진달하여 가자하라는 명을 내리게 하였으니, 매우 황공합니다."
하니, 상이 그 상소를 이조에 내렸다가 이조가 계품한 것을 인하여 하교하기를,
"팔십이 멀지 않으면 그대로 그 가자를 주도록 하라."
하였다.

 

대제학 채유후가 상소하여 사직하니, 답하기를,
"공론이 있기 마련이니, 고사할 것은 없다. 속히 출사하여 직무를 보고 대례를 그르치지 말라."
하였다. 재차 상소하였으나 역시 윤허하지 않았다. 【대례는 곧 세자의 입학을 말한다.】

【태백산사고본】 8책 8권 43장 B면【국편영인본】 35책 543면
【분류】인사-임면(任免)

ⓒ 한국고전번역원

 

수찬 김시진이 상소하기를,
"윤순지의 상소 중에 ‘헤아릴 수 없는 무함이 있다.’ 하고, 또 ‘곁에서 엿보며 교묘하게 꾸짖고 날카로운 말을 하여 용맹을 팔았다.’고 하고, 또 ‘역적의 무리에게 적용하는 법률에 몰아넣었다.’고 하니, 아, 어쩌면 그렇게도 생각하지 않고 말하였단 말입니까. 궁중 노비를 받아들인 일과 주문(奏文)의 어긋난 말투는 온 나라 사람이 다 같이 말을 하는 바입니다. 그가 염치를 잃은 것과 식견이 어두운 것은 애당초 애매하여 규명하기 어려운 죄가 아니었으니, 어떻게 헤아릴 수 없는 무함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흉악한 역적인 것을 알고도 끊지 아니하고 은밀히 비호하려 했다고 하니, 어찌 인정상 할 수 있는 바이겠습니까. 이것은 사람들이 순지를 무함한 것이 아니고 순지가 사람들을 무함한 것입니다. 신이 이미 곁에서 엿보고 용맹을 팔았다는 죄명을 받았으니, 청컨대 신의 직명을 삭탈하여 무함하고 꾸짖었다는 죄를 바루소서."
하니, 답하기를,
"윤순지가 탄핵을 받은 것이 얼마나 큰 일인가. 그런데도 그가 황공하여 몸둘 바를 몰라 하지 않는단 말인가. 왜곡되게 생각하고 지나치게 염려할 만도 하다. 지금 굳이 그의 상소를 보고 괴이하게 여길 것이 있겠는가. 그대는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동지중추부사 허적(許積)이 상소하기를,
"삼가 정언 이만웅의 상소를 보니, 있는 힘을 다하여 신을 공격하였습니다. 신이 비록 그와 따지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어떻게 편안히 받고만 있겠습니까. 당초에 대동법(大同法)을 강정(講定)하던 날, 신이 비국의 여러 재상을 따라 경연에 입시했었는데, 성명께서 신들에게 대동법이 편리한지 여부에 대해 두루 물었습니다. 여러 대신들은 대부분 그 일에 대해 잘 모른다고 대답했지만, 신은 감히 이 법의 설치는 비록 백성을 편리하게 하자는 데 그 의도가 있으나 시행하는 즈음에 장애되고 불편한 점이 많을 것이라고 진달했었고, 이어 호서 지방 선비들이 올린 상소로 인해 고 상신 한흥일(韓興一)이 그 법을 시행하자고 강력히 청하였습니다. 성명께서 여러 재상에게 다시 물었는데, 신도 처음 의견에 변함이 없었고 여러 재신도 불가하다고 말하지 아니하자 드디어 결정을 했었습니다.
신은 생각을 숨긴 적이 없는데, 이만웅은 성상의 질문을 받은 자리에서 그 법이 불가하다고 말하지 않았다고 하니, 경연에서 주고받았던 대화를 들어보지 못한 것입니까, 아니면 집요하게 말하여 강력히 주장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신의 죄안을 삼은 것입니까. 우연히 상신이 잘못 천거함으로 인하여 성명께서 신의 무상함을 모르시고 드디어 유사의 임무를 맡기셨습니다. 재주는 빈약하고 임무는 중대하다는 것을 신이 어찌 몰랐겠습니까마는 성상의 하교가 정녕하니 감히 받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게다가 신하가 되어 일을 맡는 도리는 반드시 뜻에 합당한 것을 가려서 따르고 그렇지 않으면 따르지 않는 법인데, 오늘날 정사를 맡은 자 중에 위로는 낭묘(廊廟)로부터 아래로 백집사(百執事)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받들어 행하는 일이 어찌 모두 자기들 뜻에 맞는 일이겠습니까.
신은 또 어리석게도 스스로의 능력은 헤아리지 않고 여러모로 잘 생각하면 혹시라도 조그마한 보탬이 될까 해서 명을 받고 사직하지 않은 채 생각해 보지 않은 일이 없이 7, 8개월을 지내 왔습니다. 비록 정사에 대단한 도움은 주지 못했지만 또한 스스로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합니다. 오직 임금의 명령을 받들어 시행만 했다는 말은 어찌 신의 실정 밖의 일이 아니겠습니까. 진상물의 종류를 자세히 결정하여 그 절목을 강구한 경우에 있어서는 대신에게 상의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만, 삭선(朔膳)과 방물(方物)만은 서울에서 봉진해야 한다는 일에 대해서 재차 탑전에서 진달하였는데 상신과 동료의 의견이 신의 견해와 다른 면이 없지 않아서 신은 저의 견해를 접어두고 그들을 따랐는데 그것은 역시 자신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른바 생각하는 실상이 없다는 것은 이것을 지적하여 말한 것입니까? 돈을 무역하는 법은 본래 한흥일이 건의한 데서 나온 것인데, 강구하던 초기에 신이 마침 병으로 누워 있었으므로 결국 그 논의에 참여하지 못했고, 그 영이 반포된 후에도 그 법이 유해하다는 것을 논의하지 못했습니다. 다만 상을 모신 자리에서 먼저 서울에만 시험해 보고 서서히 지방에까지 확대하자는 뜻을 대략 진달하고 또 돈을 주조(鑄造)하는 것이 돈을 무역하는 것보다 편리하지 않다는 것을 진달했습니다. 그 후에 신이 좌상에게 말하기를 ‘돈을 사용하는 법은 마땅히 미곡전(米穀廛)에서부터 비롯해야 한다.’고 하자, 좌상이 상당히 어렵다는 뜻을 보였지만 신이 그 법을 시행하자고 강력히 청하였습니다.
시민들의 원망이 신 때문에 일어난 것인데 신이 비록 변변찮지만 어찌 감히 나의 죄를 어렵게 여겼던 상신에게 돌리겠습니까. 설령 신이 사람들의 비방을 모면할 꾀를 엉뚱하게 내었다고 한다면 어찌 당초 경연에서 장애 요인이 많아 편리하게 여기기 어렵다는 등의 말로 자신을 변명할 소지로 삼지 않았겠습니까. 설령 신이 짐짓 대충 넘길 생각을 하였다면 마땅히 명을 받기 전에 했을 것이고 책임을 맡은 후에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른바 물러가서 뒷말을 하였다는 말은 모르겠습니다만, 신의 어떠한 말을 지적한 것이며, 누구에게 들은 것입니까?
지난번에 홍청 감사(洪淸監司) 김홍욱(金弘郁)이 여러 번 신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하나는 큰 일이 성과를 거두려 하는데 중간에 그만 둘 수 없다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스스로 백성들의 원망을 책임질 것을 기약하여 비방하는 말에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말로 신을 격려해 주기에 신 역시 내외가 한 마음이 되어야만 일을 할 수 있다는 답서를 보내 격려해 주었습니다. 김홍욱이 설혹 절목 사이에 실책을 범하였다고 하나, 도리어 귀찮다는 생각이 들어 대간의 평을 기다리고자 한다는 말에 있어서는 실상이 아닙니다. 끝까지 원망에 대한 책임을 지고 흔들리지 않겠다는 자가 오히려 대간의 논박을 받았는데, 신이야 어찌 한할 것이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신의 본직과 상평창(常平倉) 그리고 비국의 임무를 삭탈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경이 맡고 있는 직명이 긴요하지 아니한 것이 없으니, 잠시라도 비워 둘 수 없다. 사직하지 말고 직무를 보라."
하였다.

 

장령 권령이 인피하기를,
"전 승지 윤선도는 패악스럽고 탐학하여 세상의 버림을 받았습니다. 정축년 난리에 처녀를 겁탈하여 섬으로 데리고 들어가 음란과 사치로운 생활을 즐겼으며, 기축년 국상(國喪)에는 달려와 조상도 하지 않는 등, 전후에 걸쳐 저지른 잘못을 입에 담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준직(准職)도 거치지 않은 자에게 너무 갑자기 초탁(超擢)하여 사사로운 은혜를 지나치게 베푸시니 물의가 들끓고 있습니다. 윤선도는 마땅히 황공해 하며 허물을 살피기에 겨를이 없어야 할텐데 망령스레 성상의 은총을 믿고서 지레 먼저 상소를 올려 일러 바치는 작태를 현저하게 드러냈으니, 그의 관직을 파척하고 그의 가자를 개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호군 이완(李浣)이 큰 집을 새로 지으면서 주위의 터를 침탈하다 지난날 송사가 일어났는데, 판결이 전도된 것은 사실 강약이 같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공론에 있어서 불가불 규정을 하여 다시 확실하게 결정을 해야 되겠기에 신이 이 두 가지 일로 동료들에게 간통(簡通)을 하였더니 이완의 일은 모두 잘 알았다고 썼지만 윤선도에 관한 논의는 처음엔 문자가 너무 준엄하다고 하고, 후에는 혼조 때 절의를 세웠다고 하는 등 끝내 합의점을 찾지 못했으니, 이는 모두 신이 사람들에게 경시를 당하기 때문에 생긴 일입니다. 청컨대 신의 관직을 체차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이때 이완이 집을 크게 지으면서 편비로 하여금 소속된 군졸을 거느리고 집짓는 일을 감독하게 하였으며, 또 이웃에 사는 사인(士人) 이진강(李振綱)의 집터를 빼앗으니 진강이 한성부에 고소를 하였다. 한성부 관원이 사실을 검증하러 나오자 이완이 그와 사사로운 약속을 하고 사실대로 측량을 하지 않아 결국 그 집터를 빼앗고 말았다. 진강이 소를 올려 원통함을 호소하니, 하리(下吏)에게 명하여 안핵토록 하였다. 형조 참판 허적 등이 재상을 모함하였다는 죄로 논하니, 사람들이 모두 원통해 하였다.

 

정원이 대관을 특별히 체차하라는 명을 환수할 것을 청하니, 답하기를,
"나는 결코 군소들에게 제재를 받을 수 없다. 그대들은 잘 생각하라."
하자, 정원이 또 아뢰기를,
"대각이 논의한 일은 단지 일시의 공의를 따른 것뿐인데, 오늘날 윤선도를 논한 자들이 어찌 지나치게 치우친 군소의 무리이겠습니까. 제재를 받는다는 하교는 신하로서 듣지 못할 바입니다. 대단히 간특한 자가 아니면 이 죄명에 해당될 수 없는데 어찌 일을 논의한 대신에게 갑자기 내릴 수 있겠습니까. 원컨대 성상께서는 다시 더 마음을 맑게 하시고 반성하소서."
하니, 알았다고 답하였다.

 

상이 하교하기를,
"세자가 입학할 때 책상을 설치하지 않았는데, 이는 비단 머리를 숙이고 구부린 채 글을 읽어야 하는 불편함이 있을 뿐만 아니라 비록 스승과 제자가 서로 존경하는 예로 말하더라도 일반 백성들 사이에는 본래 집에 책상을 폐기하는 규례가 없다. 더구나 책이 책상 위에 있어야만 경전을 높이게 되는 것이다. 어찌 스스로 낮추는 예를 인하여 도리어 경전을 땅에다 놓는다는 말인가. 예관으로 하여금 의논하여 처리하게 하라."
하니, 예조가 복계하기를,
"자리를 펴 놓고 경을 받는 것이 스승과 제자의 예이므로 별도로 책상을 설치할 것은 없습니다."
하니, 따랐다.

 

4월 11일 임자

숭정전(崇政殿)에서 전경 문신(專經文臣)을 시강하였는데, 승문 정자(承文正字) 이세익(李世翊)이 가장 우수했으므로 말을 하사하라고 명하였다.

 

대사헌 윤강이 인피하여 아뢰기를,
"신이, 윤선도가 준직을 거치지 않고 건너뛰어 승선에 제수되더니 장황한 말로 상소를 올리는 등 마음 씀씀이가 아름답지 못하기에 그를 논핵하려고 했습니다. 이에 동료와 함께 상의하여 상소문을 대강 엮어 놓았는데, 집의 심노(沈𢋡)가 처음에는 말이 너무 지나치다고 하더니, 그것을 고치기에 이르러서는 다시 혼조 때 절의를 세웠으므로 가상한 면이 있다는 것으로 말을 하였습니다. 이른바 윤선도가 절의를 세웠다는 상소 내용은 대개 유희분(柳希奮)에게 빌붙어 이이첨(李爾瞻)을 공격한 것입니다. 그 당시 비록 이 일 때문에 죄를 받았으나, 상소 내용 중에 ‘김제남(金悌男) 등이 역적 모의를 한 자취가 분명하여 숨길 수 없으므로 천지 신명과 사람이 함께 주벌할 자인데, 이원익(李元翼)의 무리가 풍병이 들어 실성한 사람이 아니라면 하필 대역 죄인을 극진히 보호하여 우리 성상을 저버린다는 말인가.’ 하였습니다. 이러한데도 절의를 세웠다고 하니, 신은 도저히 이해가 안 가는 일입니다. 선비들 사이에 이미 오래 전부터 시비에 대해 분명하지 못했으니 괴이하게 여길 것은 없습니다만 성명께서는 이 사람에게 무엇을 취할 것이 있다고 미안한 하교를 자주 내리십니까. 그리고 삼가 정원이 아뢴 말에 내리신 비답을 보니 신의 죄는 만번 죽어도 면하기 어렵습니다. 신의 관직을 파척하소서."
하였다. 집의 심로가 인피하기를,
"윤선도가, 옛날 혼조 때 역적 이이첨이 모후(母后)를 폐하자는 논의를 전적으로 주장하여 윤리가 끊어질 상황에 놓였는데도 온 나라 사람이 감히 발언하지 못했는데, 일개 포의(布衣)의 신분으로 단독으로 자신을 잊고 항의하여 이이첨을 참형에 처해야 한다고 청하였으니, 그 당시의 곧은 절의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모두 칭찬하던 바입니다. 신은 이러한 것만 알고 그 원소(元疏)는 직접 보지 못했으므로 말씨가 너무 지나치다는 말을 했었는데, 동료가 이 일 때문에 인피하였으니 혼매한 신이야 면하기 어려운 바가 있습니다. 그리고 논의가 같지 않다 하여 대관을 특별히 체직시키라는 분부를 내리시고 이어 미안한 하교를 내리셨습니다. 신의 관직을 체차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윤강 등이 모두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수찬 민정중이 상소하기를,
"신이 삼가 윤순지의 상소를 보니, 논핵했던 사람을 못할 말이 없이 지척하였습니다. 수찬 김시진(金始振)이 이미 이 일 때문에 상소를 하였으니, 신이 감히 그대로 있을 수 없는 점은 김시진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대체로 사대부가 처신하는 데는 염치가 귀중합니다. 저 멀리 옛 사람의 경우를 인용할 필요도 없이 우선 우리 나라의 고사만 가지고 말하더라도, 논핵을 받은 사람들이 대부분 물러가서 스스로를 반성하고 감히 변명을 하려 들지 않았던 것은 조정을 높이고 공론(公論)을 중히 여겼기 때문입니다. 비록 그 논핵한 바가 사실보다 지나친 경우가 있다 하더라도 세월이 지나다 보면 자연스럽게 안정이 되어 피차가 아무런 손해가 없었습니다. 어찌 오늘날과 같이 위험을 무릅쓰고 서로 겨루어 마치 여항 간에서 다투듯 했겠습니까. 이런 풍습은 전에도 들어보지 못했던 것인데 전하께서 즉위하신 뒤에 보게 되었으니, 신은 세도(世道)가 더욱 낮아졌음을 한탄합니다. 인주(人主)께서도 마땅히 이런 사실을 알고 염치를 가다듬어야 할 것입니다.
윤선도에 있어서는 신이 그 사람됨을 미워하여 처음에 논핵하려 하였으나, 그가 이미 체직되었으므로 너무 심한 조처는 할 필요가 없다고 여겼던 것이 신의 본의였습니다. 대간의 평이 재차 제기되자 엄한 분부가 계속 내려와 심지어 신하로서 차마 듣지 못할 말이 있었으니, 신이 이 때문에 더욱 황공하고 위축되었습니다. 대체로 윤선도가 전후에 걸쳐 논박을 입은 것에 대해 신이 직접 보지는 못했습니다만 그가 의리도 없고 아름다운 행실도 없다는 책망에 대해서는 윤선도 자신도 필시 사양할 수 없는 일인데, 재차 올린 상소를 보면 말 뜻이 음험하였으니 그의 심술을 살펴볼 때 더욱 야무지게 끊어버려야 할 일인데 윤선도 한 사람으로 인하여 미안한 하교를 잇달아 내리셨습니다. 신이 외람되게 경악에서 모시고 있으면서 성덕을 제대로 보필하지 못하고 군부를 충동질하여 잘못을 저지르게 하였으니, 이 모두가 신들의 죄입니다. 신도 이미 논핵하려는 뜻이 있었으니, 지금 모든 것을 대간에게 떠 맡기고 죄를 면하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신의 관직을 파척하라고 명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수찬 김시진이 상소하기를,
"신이 삼가 윤선도의 일로 정원에 비답하신 내용을 듣건대, 신하로서 차마 들을 수 없는 말씀을 하셨다 하니, 신은 대단히 황공하여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윤선도의 행실이 무상하다는 것을 신이 평소에 들어왔으며, 마음 씀씀이가 아름답지 못하다는 것을 신이 또한 상소 내용 중에서 보고 알았습니다. 신이 지난날 상소에 그 사람됨이 가증스럽다는 것을 힘껏 변론하였으니 무함한 죄와 군소(羣小)라는 이름에 신 역시 해당됩니다. 신이 어떻게 감히 얼굴을 들고 버티고 있겠습니까. 신이 경악에 가까이 모시고 있으면서 조그마한 도움도 드리지 못하고 열흘 사이에 세 번이나 대죄하는 상소를 올렸으니, 신의 죄가 여기에 이르러 더욱 큽니다. 성상께서는 신을 엄하게 파직하여 영원히 물리치소서."
하였는데, 상이 답하는 말이 없이 계(啓) 자만 찍어서 내리니, 정원이 계품하여 체차할 일로 전지를 받들었다.

 

헌부가 【장령 심세정(沈世鼎).】  아뢰기를,
"대사헌 윤강 등이 모두 인혐하고 물러갔습니다. 윤선도는 하자가 있어 청론에 버림을 받았는데, 총애로 발탁하는 거조가 뜻밖에 나왔고 자신을 논열하는 상소의 의도는 남을 현혹시키려는 데에 있으니, 대간이 어떻게 바루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설령 혼조 때 한번 올린 상소가 공적인 마음에서 나왔다 하더라도 진실로 한 가지 잘한 일을 가지고 그의 평생 허물을 덮을 수는 없습니다. 더구나 권간(權奸)에게 아부하여 그 의도가 이미 잘못되었던 자이겠습니까. 옳고 그름 사이에 공과 사, 득과 실을 분명하게 구분할 수 있습니다. 대사헌 윤강은 출사토록 하고 집의 심로는 체차토록 하소서."
하니, 모두 체차하라고 답하였다. 또 아뢰기를,
"대각의 관원은 상의 이목(耳目)을 담당하고 경악의 신하는 보도(輔導)의 직책을 맡고 있으므로, 일에 따라 바로잡고 생각한 바가 있으면 반드시 진달하는 것이 그들의 직책입니다. 윤선도는 뜻밖에 발탁되어 물의가 들끓자 상소하여 따져서 음험한 뜻을 세웠으니, 법관이 논열하고 연신이 분변하여 배척하는 것은 공의로서 그만 둘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인피하는 상소에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시고, 자신을 탄핵하는 상소에 단지 계자만 찍어 내리시니, 보고 듣는 자들이 모두 놀라고 성덕에 누가 있게 되었습니다. 장령 권령과 수찬 김시진에게 내렸던 체차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였는데, 상이 따르지 않았다.

 

사간 심지한(沈之漢)과 헌납 홍처대(洪處大)가 인피하여 아뢰기를,
"윤선도에게 평소 하자가 많다는 것은 사람들이 모두 아는 바인데, 뜻밖에 품계를 뛰어넘어 발탁하시므로 해서 많은 물의가 일었습니다. 그래서 신들이 지난번 대죄하는 상소에 이러한 뜻을 대략 진달했던 것입니다. 어찌 원망하고 미워하는 사심이 있어서 감히 무함하고 헐뜯는 꾀를 내어 스스로 군소의 행동에 빠져들려 했겠습니까. 엄한 하교를 받은 이상 결코 얼굴을 들고 있기가 어렵습니다. 신들을 체직하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심지한 등이 모두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간원이 【정언 남용익(南龍翼).】  아뢰기를,
"사간 심지한 등이 인혐하고 물러갔습니다. 공적인 논의를 상소 중에 약간 언급하였는데, 군소라고 지목하신 비답은 실로 뜻밖입니다. 이미 잘못이 없으니 어찌 피해야 할 혐의가 있겠습니까. 모두 출사토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상이 하교하였다.
"약간의 비가 오기는 했으나 가뭄이 이렇게 심하니 걱정스러움에 마음이 타는 듯하다. 해조로 하여금 중신을 별도로 보내 정성을 다하여 기우제를 지내도록 하라."

 

4월 12일 계축

왕세자가 문묘에 배알하고 입학하는 예를 행하였다.

 

간원이, 권령·김시진·윤강 등에게 특별히 내렸던 체차하라는 명을 환수하도록 청하였는데, 상이 따르지 않았다.

 

4월 14일 을묘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4월 15일 병진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이때에 가뭄이 매우 심하였는데, 상이 수찰(手札)로 하교하였다.
"부덕한 내가 외람되게 대통을 이어 백성들의 위에 있으면서, 일찍이 백성을 보살펴 주는 정치를 하지 못하고, 한갓 물난리와 가뭄으로 인한 재앙을 끼치게 하였으니, 그저 부끄럽고 두려울 뿐이다. 오늘날에 이르러 겪고 있는 가뭄의 참상은 근고(近古)에 없던 일로 애처로운 우리 백성들이 목숨을 잃을 지경이다. 아, 하늘이여, 죄는 나에게 있으니 나 한 사람에게 벌을 내리는 것이 떳떳한 이치인데, 어찌하여 차마 무고한 백성들에게 내리는가. 그 허물에 대해 조용히 살펴보니, 진실로 나 한 사람 탓이다. 오늘부터 정전(正殿)을 피하여 더욱 자신을 책망하고 허물을 반성할 터이니, 물선(物膳)을 줄이고 술을 금하는 등의 일을 유사에게 명하여 거행토록 하라. 승지는 나를 대신해서 교서를 지어 바른 말을 널리 구해서 나의 부족한 점을 보필하도록 하라. 인하여 생각건대, 상하가 서로 수신하는 것은 고금의 통상적인 의리이다. 재앙을 불러온 것이 비록 우매한 나의 부덕 한 소치로 말미암은 것이지만 신하들에게 있어서도 어찌 실책한 바가 없겠는가. 안팎의 관리들에게 칙령(勅令)을 내려 제각기 맡은 바 직책을 충실히 하면서 조심하고 반성하여 하늘의 노여움에 답하도록 하라."

 

4월 16일 정사

임담(林墰)을 예조 판서로, 조석윤(趙錫胤)을 동지중추부사로, 오준(吳竣)을 대사헌으로, 심지한(沈之漢)을 집의로, 이형(李逈)을 장령으로, 민정중(閔鼎重)을 교리로, 이정기(李廷夔)·정두경(鄭斗卿)을 수찬으로 삼았다.

 

상이 주강에 나아가 《서전》 금등편을 강하였다. 검토관 김휘(金徽)가 아뢰기를,
"성왕(成王)이 들에 나아가자 하늘에서 비를 내렸다고 하니, 지성에 감동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번에 가뭄이 매우 참담하여 전하께서 걱정하시느라 편치 못하신데 하늘은 아득하여 비를 내리지 않으니, 신이 생각하기에 하늘에 대한 정성이 미진한 바가 있는 듯합니다. 하늘을 감격시키려면 마땅히 성왕으로 법을 삼아야 합니다."
하니, 상이 옳겠다고 하였다. 참찬관 민응형(閔應亨)이 아뢰기를,
"신이 삼가 성상의 하교를 보건대, 말씀이 간절합니다. 지금 전하께서 하신 말씀이 어찌 성왕이 금등의 글을 보고 울었던 정성스런 마음보다 못하겠습니까. 그러나 빈말은 실용에 보탬을 주지 못하므로 반드시 백성들의 괴로움을 불쌍히 여기시고 정사의 잘못을 구원하여, 자신을 반성하여 하늘을 감격시키는 도리를 다해야 합니다. 사치의 풍조가 오늘날과 같은 때가 없었으니, 신은 삼가 탄식하는 바입니다. 예로부터 나라가 망하려고 하면 사치가 풍속을 이루고, 나라가 흥하려고 하면 검소한 덕을 숭상했습니다. 전하께서 만약 습속을 변혁하지 않으시면 이는 전하께서 직접 사치를 숭상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게 될 것입니다. 신은 가뭄의 재앙이 어떤 일 때문인지 감히 알지 못하겠습니다만 아마 사치의 풍조가 원인이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원컨대 전하께서는 화려하게 꾸미는 일을 버리시고 검소한 덕을 쌓도록 힘쓰소서. 신이 일찍이 상방(尙方)069)  에서 비단을 짜는 일에 대하여 아뢰었는데, 전하께서 즉시 특명으로 그 일을 혁파하도록 하셨으니, 신은 진실로 감격하여 눈물이 나왔습니다. 만약 신같이 노망한 자가 자세하게 진달하지 않으면 전하께서 누구를 통하여 들으시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이 만일 말해 주지 않으면 내가 누구한테서 그런 말을 듣겠는가."
하였다. 민응형이 아뢰기를,
"전하께서 비단 짜는 일을 특명으로 혁파하셨으니, 백관이 어찌 감히 비단옷을 입겠으며, 백관이 비단옷을 입지 않는데 백성들이 어떻게 감히 명주 옷을 입겠습니까. 듣자니, 대궐에 있는 사람이 한강(漢江)에서 뱃놀이를 하였는데, 그들이 모두 비단옷을 입었더라고 합니다. 이는 위에 있는 사람이 솔선수범하지 아니한 까닭에 아래에 있는 자들이 법을 어긴 것입니다. 그리고 모여서 술 마시는 풍습이 요즈음 세상의 고질적인 병폐가 되었으니, 단단히 금지시키지 아니해서는 안 됩니다. 호남 지방에 심한 기근이 들어 백성들이 살아가기가 어렵습니다. 원컨대 그들을 구휼하여 국가의 기반을 튼튼히 하소서. 봄날이 바야흐로 화창한데 옥에는 갇힌 죄수가 가득합니다. 속히 판결하여 하늘의 마음을 돌리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이 숨김 없이 모두 아뢰는데 내 어찌 마음을 비우고 받아들이지 않겠는가. 마땅히 대신과 의논토록 하겠다. 비단을 짠다는 거조에 대해서는 경도 마땅히 그 곡절에 대해서 알고 있을 것이다. 궁중의 일은 반드시 모두다 나에게 품달하는데 어찌 사사로움과 거짓이 있겠는가."
하고, 인하여 입시 승지 민광훈(閔光勳)에게 이르기를,
"호남 지방의 백성을 구제하는 정책을 비국으로 하여금 속히 거행토록 하고, 사치를 숭상하고 술을 마시는 풍습을 법사(法司)에게 신칙하여 엄금토록 하라."
하였다. 민응형이 아뢰기를,
"진실로 제왕이 지성으로 하늘을 대하여 끝까지 게을리하지 않는다면 이밖에 다시 무슨 일이 있겠습니까. 혹시라도 마음 속에 나태함이 조금이라도 싹트게 되면 그것이 바로 정성스럽지 못한 곳이 됩니다. 한층 더 힘쓰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정치를 잘하는 것은 기대하기 어렵겠지만 국사가 점점 위태로운 곳으로 들어 가니 내 매우 두렵다."
하였다. 상이 인하여 평안도 암행 어사 조한영(曺漢英)을 불러서 그 지방의 토속과 백성들의 질병에 대하여 물었다.

 

왕세자가 입학할 때, 사부(師傅) 이하에게 물건을 차등 있게 주었다.

 

4월 17일 무오

원옥(冤獄)을 심리(審理)하도록 명하였다.

 

상이 주강에 나아가 《서전》 대고편을 강하였다. 강을 마치고 나서 지경연사 박서(朴遾)가 아뢰기를,
"심리하는 것은 대단히 성대한 은전입니다. 이시만(李時萬)과 같은 죄인도 오히려 관대하게 석방되었는데, 모르겠습니만 유계(兪棨)는 무슨 죄가 있기에 넓게 베풀어 주는 은전을 혼자만 받지 못하는 것입니까. 지난번에 민정중의 상소에 이미 그가 무죄하다는 것을 변론하였으나, 신 역시 생각한 바를 감히 모두 다 진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제 겨우 북쪽 변방에서 내지(內地)로 양이(量移)해 왔는데 어찌 그리 급히 서두르는가."
하였다. 박서가 아뢰기를,
"이시해(李時楷)에게 비록 과격한 잘못이 있더라도 언관이 죄를 받는 것은 진실로 아름다운 일이 아닙니다. 신 역시 사면해 주어야 마땅하다고 여깁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깊이 유념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하였다. 참찬관 박장원(朴長遠)이 아뢰기를,
"사람들이 아래에서 잘못을 저지르면 하늘이 위에서 반응을 보입니다. 오늘날의 가뭄이 어찌 그 까닭이 없겠습니까. 임금과 신하사이에 성의가 미덥지 못하므로 하늘과 땅이 교감하지 않아 비가 내리지 않는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더욱 힘쓰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사실 그렇다. 그러나 임금의 도가 단독으로 이루어지는 이치는 없다. 위 아래가 다 같이 노력해야만 서로가 미덥게 되는 것이다."
하였다.

 

상이 하교하였다.
"이시해(李時楷)는 석방하고, 전 판의금 심액(沈詻)과 지의금 정세규(鄭世規)와 홍무적(洪茂績)을 서용하라."

 

금부와 형조에 명하여 날마다 개좌(開坐)해서 죄수를 심리(審理)하도록 하였다.

 

4월 18일 기미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상이 주강에 나아가 《서전》 대고편을 강하였다. 강을 마치고 나서 시독관 오정위(吳挺緯)가 아뢰기를,
"형조에 잡혀 있는 죄수가 6백여 명이나 되니, 화기를 손상시키고 재앙을 불러들일 리가 어찌 없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찌 그리 많은가?"
하자, 특진관 김여옥(金汝鈺)이 형조 참판이다. 아뢰기를,
"서울과 지방의 죄수를 모두 합하여 말하면, 형조에서 조사하여 다스려야 할 죄수가 과연 그 정도 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형조는 오늘 개좌하여 의결하였는가?"
하니, 김여옥이 아뢰기를,
"신은 현재 입시하였고 판서는 병이 있으므로 개좌하지 못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특진관이 어찌 다른 사람이 없겠는가? 옥사를 판결하는 일이 매우 다급한 이 마당에 경은 어찌하여 본조 회의에 참석하지 않고 바로 경연에 나왔는가?"
하자, 김여옥이 아뢰기를,
"판서는 노병(老病)으로 관아에 나오려 하지 않고, 신은 또한 총부(摠府)에 숙직이었는데, 마침 경연이 열려서 이에 감히 입시하였습니다. 신이 비록 회좌에 참석하지는 못했습니다만, 누군들 형옥을 심리하지 못하겠습니까."
하였다. 오정위(吳挺緯)가 아뢰기를,
"형관(刑官)은 중요한 직임이고 심리하는 것은 중대한 일입니다. 김여옥이 본조의 회좌에 참석하지 않고 이에 특진관으로 입시하여 성상의 하문을 받고서 대답하는 것이 저 모양이니, 그가 임금의 명을 제대로 봉행할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지성으로 백성을 보살피지 않는 일이 없는데, 신하들이 직책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므로 형식적인 것이 되고 맙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형옥을 심리하라는 하교를 내린 일이 한두 번이 아니니, 마땅히 두려워하는 마음을 갖고 받들어 행하여 나의 뜻을 몸받아야 할텐데, 오늘도 개좌(開坐)를 하지 않고 있으니, 태만함이 너무 심하다. 비록 하교를 내리지 않았더라도 가뭄의 참혹한 상황을 보고서 어찌 차마 마음 편히 있는단 말인가. 명(明)나라 태조는 진휼을 늦게 하였다는 죄로 호부 상서(戶部尙書)를 참형에 처하였는데, 이번 형관의 죄가 이 일과 무엇이 다른가. 그러나 나는 일단 중한 형벌을 내리지는 않겠다. 형조의 세 당상을 모두 추고하라."
하고, 인하여 김여옥에게 물러가서 속히 본조의 회좌에 참석하라고 명하였다. 검토관 김휘가 아뢰기를,
"명나라 태조가 오랑캐인 원(元)나라의 비루한 풍속을 개혁하기 위하여 형법(刑法)을 엄중히 해서 퇴폐한 풍속을 쓸어버렸으니, 그 일은 형편상 부득이한 것이었습니다. 어찌 후세의 상법(常法)이 될 수 있겠습니다. 전하께서 이 일을 인용하여 하교를 하신 것은 신의 생각에는 지나친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비록 하고 싶은 일이 있더라도 아래에 있는 신하들이 받들어 시행하지 않으니 장차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늘 교칙(敎飭)한 지가 이미 오래인데도 태연히 전혀 관심이 없으므로 특별히 대명률(大明律)을 들어 말한 것은, 그들로 하여금 엄한 법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해서이다."
하였다. 상이 참찬관 민광훈(閔光勳)에게 이르기를,
"지난번에 부제학 민응형의 말을 들으니, 대궐 안 사람들이 비단옷을 입고 뱃놀이를 하였다고 하기에, 심히 괴이한 생각이 들어서 궁인을 조사해 봤더니, 지난해 가을에 다른 궁전 나인이 과연 뱃놀이를 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 내가 이미 그 사실을 몰라서 곧바로 금단시키지 못한 채 사람들을 번거롭게 하여, 이런 상황에 이르게 하였으니, 매우 부끄럽다."
하였다.

 

형조 참판 김여옥을 금부에 내리라고 명하였다. 이는 여옥을 추고하라는 전지를 금부에 내렸기 때문이다.

 

순안 현령(順安縣令) 김진종(金晉宗)을 충원(忠原)에 유배하였다. 처음에 역적 조(趙)070)  와 김세룡(金世龍)071)   등이 경산(京山)의 중과 은밀히 결탁하여 사사로이 금백(金帛)과 주패(珠貝)를 주어 불상(佛像)을 만들어 상을 저주하였는데, 역적 조가 복주될 때 그 일이 발각되었다. 일찍이 서로 모의했던 역적인 중 법행(法行)과 보상(普尙) 등이 잇달아 처형되었는데, 연류된 자가 상당히 많아 급히 서둘러 잡아들이자 가까운 절에 있던 중들이 모두 도망가 숨으니 조정에서 지방에 명을 내려 유인하여 잡아들이게 하였다. 순안 현령 김진종이 그 경내에서 변복을 하고 구걸을 하는 인섬(印暹)이라는 승려 한 사람을 관아로 잡아와서 어디로 가는지 물었는데, 경산에 있는 봉은사(奉恩寺)로부터 고향으로 돌아가는 자였다. 김진종이 속이는 말로 묻기를,
"그대가 경산에 있을 때에 부처를 만든 일이 있는가?"
하니, 인섬이 답하기를,
"지난 해에 불상 하나를 만든 일이 있습니다."
하였다. 또 묻기를,
"불상을 만든 화주(化主)와 그 일을 주관한 여러 승려는 누구인가?"
하자, 인섬이 그들의 이름을 일러주었다. 또 묻기를,
"부처를 만들 때에 조 소원(趙昭媛)과 낙성위(洛城尉)가 모두 불상 만드는 자금을 보내 주었는가?"
하니, 인섬이 답하기를,
"부처를 만든 모든 기구는 화주(化主)들이 전부 스스로 수합하였으므로 나는 모른다."
하였다. 김진종이 그를 고문하며 위협하였으나, 끝까지 승복하지 않았다.
드디어 법행과 보상의 승복한 공사가 조보(朝報)에 나온 것을 취하여 문자로 엮어, 불상을 만들어 저주했다는 글을 만들어 놓고 그가 이른바 화주와 여러 승려들은 같은 패거리라고 하면서 인섬을 협박해서 그 죄안에 서명토록 한 다음, 곧바로 옥(獄)에 가두고서, 역적 모의를 자백했다는 것으로 말을 만들어 감사에게 보고하니, 감사 정유성(鄭維城)이 계문하였다. 금부에 명하여 잡아와 국문하도록 하니, 인섬의 공초가 김진종이 보고한 것과 서로 틀리고 화주와 여러 승려의 공초도 의심할 만한 단서가 없었다. 국청이 청하여 김진종을 잡아다 문초하게 하니, 과연 허위로 꾸민 흔적이 많았다. 또 인섬과 대면하여 증언토록 하니, 인섬이 김진종을 꾸짖기를,
"그대가 정옥(頂玉)072)  의 발판을 얻기 위하여 이런 터무니없는 꾀를 내었는가?"
하였다. 국청이 김진종을 무고죄로 조율할 것을 청하니, 하교하기를,
"김진종이 비록 지극히 무상하나, 필시 그가 본현에서 바로 죽이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을 터인데, 전혀 근거도 없는 말을 어떻게 날조했겠는가. 이것이 의심스럽다. 인섬이 이른바 정옥을 얻으려 했다는 말은, 그가 알 바가 아닌데도 이런 말을 하였으니, 역시 의심스럽다. 이것으로 추측해 볼 때, 진종을 전적으로 무함했다고 한다면 원통할 것이고, 인섬이 남의 사주를 받아 그 말을 변조했다고 보는 것도 상당히 그럴듯하여 완전히 석방시킬 수 없다. 모두 정배하라."
하였다. 이에 금부가 김진종은 충원(忠原)에, 인섬은 칠곡(漆谷)에 유배시켰다.

 

4월 19일 경신

박수문(朴守文)을 장령으로, 이온(李溫)·권대운(權大運)을 지평으로, 오정위(吳挺緯)를 헌납으로, 이연년(李延年)·이정기(李廷夔)를 정언으로 삼았다.

 

상이 하교하였다.
"날이 갈수록 가뭄이 극심하니, 나는 마땅히 내몸으로 희생(犧牲)을 대신하겠다. 예관으로 하여금 친히 제사지내는 의식을 거행토록 하라."

 

상이 주강에 나아가 《서전》 대고편을 강하였다. 강을 마치고 나서 지경연 박서가 아뢰기를,
"김여옥(金汝鈺)은 사람됨이 솔직하고 국가를 위하여 직무를 제대로 수행한 것을 사람들이 모두 칭찬하는 바인데, 응대할 때 실책을 범했다 하여 어찌 무거운 죄를 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오늘날 국사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재앙이 생긴 것이 실로 나 때문이다만 백관마저 태만하여 그들이 맡은 일을 충실히 하지 않고 있는데, 김여옥의 말도 동료들에게 미루는 데서 빚어진 것이다. 임금이 혼자서 국가를 운영하는 이치가 없는데, 누구와 더불어 함께 일을 하란 말인가. 그러나 경의 말이 이러하니, 반드시 무거운 죄를 줄 것은 없다. 유사로 하여금 석방하도록 하라."
하였다. 상이 참찬관 이홍연(李弘淵)에게 이르기를,
"너무도 참혹한 가뭄이 날이 갈수록 더욱 심하다. 대신을 보내어 기우제를 지냈지만 비가 오지를 않으니, 걱정스런 마음이 지극한 나머지 친히 기우제를 지내보고 싶다. 하늘에 대한 정성은 오직 나에게 달려 있으므로 신하들을 책망할 수는 없다. 그러나 아래에 있는 자들이 나의 뜻을 몸받지 않았으니, 이는 상하가 정성과 공경을 다한 도가 아니다. 제관(祭官)에게 칙령을 내려서 정성껏 재계하여 술도 마시지 말고 냄새 나는 채소도 먹지 말게 하라. 그리고 헌부의 관원을 불러 이 교지의 뜻을 전하여 제관과 제사에 참여할 사람 중에 만약 재계를 제대로 하지 않는 자가 있으면 모두 적발하도록 하라. 대궐 안에 입직하는 관원은 더욱 공경을 다하여 그전처럼 서로 술을 마시는 일이 없도록 하라. 병조로 하여금 다시 수문장(守門將)에게 칙령을 내려 잡인의 출입을 엄금토록 하라. 승지는 이미 나의 뜻을 충분히 알았으니 혹시라도 받들어 시행하는 데 미진한 부분이 있을 경우에는 그 허물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하였다.

 

4월 20일 신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이일상(李一相)을 도승지로 삼았다.

 

이일상(李一相)을 도승지로 삼았다.

 

 

 

상이 기우제를 지내기 위하여 재전(齋殿)에 있으면서 삼공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오늘날의 극심한 가뭄은 고금에 없던 바이며 하늘이 견책을 보이는 것은 실로 내가 부덕한 때문이니 몹시 부끄럽다."
하니, 영의정 정태화(鄭太和)가 아뢰기를,
"나라에 재변이 있으면 삼공은 자신의 허물로 삼아 사면하는 것이 옛 규례입니다만, 형식적인 일이기 때문에 신들은 묵묵히 일을 수행해 왔습니다. 전하께서도 반드시 스스로 노력하셨을 것입니다만, 그 허물을 가만히 생각해 보면 모두가 신들이 성상의 마음을 체득하여 덕화(德和)를 돕지 못했기 때문에 재앙이 거듭 이르게 된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대신이 비록 정성을 다하여 비를 빈다 하더라도, 내가 실지로 하늘에 죄를 지었는데 감히 하늘을 감동시키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 이에 재계하는 집에서 경들을 인견하여 도움되는 말을 들어서 그 실책을 보완하고자 한다."
하니, 정태화가 아뢰기를,
"하교하시어 사람들의 말을 듣고자 하신 지가 이미 여러 날이 되었는데, 한 사람도 진언(進言)하는 자가 없습니다. 이는 지난날 전교에 대응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모두 채용하시는 실상이 없었으므로 잠자코 있는 풍습이 이미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이것은 내가 그들의 말을 받아들이는 정성이 미진해서이다."
하였다. 좌의정 김육(金堉)이 아뢰기를,
"심지명(沈之溟)은 처음 역적의 공초에 언급되었을 때에는 홍전(洪瑑)과 차이가 없었는데, 재차 변사기(邊士紀)의 공초에 언급되었기 때문에 홍전은 사면했으나 심지명은 유배한 것입니다. 대체로 그가 광주(廣州)에서 병사를 빌렸다는 말은 날짜와 달수를 따져보니 심지명이 광주에 제수되기 전에 있었던 일이므로 조금도 의심할 만한 흔적이 없습니다. 사면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유계(兪棨)는 비록 양이(量移)하라는 은명(恩命)을 입었으나 정상을 참작해 볼 때 용서해 주어도 되겠기에 이에 감히 심리하는 가운데 넣어 의계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유계의 죄는 심대부(沈大孚)와 처음에는 차이가 없었으나, 유계가 대관이 되고 나서는 반드시 자기의 뜻을 펼치고야 말려고 했으니 진실로 국법이 있다면 어떻게 심상하게 보아 넘기겠는가. 심지명의 일에 대하여 영상과 우상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니, 정태화 등이 아뢰기를,
"이미 서로 알고 있었던 흔적이 없고 제배(除拜)한 날짜도 역시 서로 틀리니, 용서해 주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정배한 지가 오래되지 않았는데, 완전히 풀어주기는 어려울 듯하니, 등급을 감면해 주는 것이 좋겠다."
하고, 상이 삼공에게 이르기를,
"교동(喬桐)에 유치해 둔 아이는 【소현 세자의 아들이다.】  어리고 병이 많은데, 오랫동안 섬에다 유치했다가 혹시라도 불행한 일이 생기면 그 참담한 일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항상 서울에다 두고 싶었으나 북쪽 사람들이 소문을 들을까 염려하여 그 때문에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이후로는 북쪽 사람들이 힐문하는 단서가 없겠는가?"
하니, 정태화가 아뢰기를,
"교동에 유치해 두면 본현에 폐를 끼치게 되고 서울에 있게 하면 북쪽 사람들이 소식을 들을까 염려되니 이징(李澂)073)  ·이숙(李潚)074)  과 함께 있게 하는 것이 보다 편리하겠습니다."
하고, 김육과 우의정 이시백(李時白)이 아뢰기를,
"신들이 일찍이 서울로 옮겨 오자고 청하였는데, 지금 어찌 다른 말을 하겠습니까. 북쪽 사람들이 물어오지 않은 지가 이미 오래되었는데, 어찌 힐문받을 염려가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여기까지 하문하시니, 이 얼마나 성덕에 빛나는 일입니까."
하였다. 정태화가 아뢰기를,
"저들이 현재 틈을 엿보고 있으니 힐책해 올 걱정에 대하여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김육이 아뢰기를,
"구왕(九王)이 이미 죽었는데, 어찌 그러한 걱정이 있겠습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청나라 사람이 어떻게 우리 나라 일에 대해 다 알 수 있겠는가. 대체로 전후에 걸쳐 힐책했던 일은 모두 정명수(鄭命守)가 조종했기 때문이다. 이때를 당하여 이 아이를 서울로 옮겨 온다면 힐문해 올 걱정이 전혀 없을지 어떻게 보장하겠는가."
하였다. 정태화가 아뢰기를,
"서쪽 지방에 사는 사람 중에는 정명수와 친밀한 자가 꽤 많으므로 우리 나라에서 발생하는 미세한 일까지도 서로 통하지 않은 일이 없으니, 저들이 끝까지 이 일에 대하여 소문을 듣지 않을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저들이 만약 이 일을 가지고 트집을 잡으면 무슨 말을 못하겠는가마는 나는 이 때문에 염려하고 있다."
하였다. 정태화가 아뢰기를,
"신이 성상의 아름다운 뜻을 따르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지금 이러한 상황에 이르러 마음대로 할 수 없으므로 후환을 일으킬까 염려되어 감히 받들어 따르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자, 김육이 아뢰기를,
"그렇다면 재자관(䝴咨官)이 오래지 않아 돌아올 터이니 저들의 형편을 상세히 알아본 후에 처리하는 것이 타당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잠시 재자관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잘 헤아려 처리해도 늦지 않겠다."
하였다. 정태화가 아뢰기를,
"열네 살 난 변사기(邊士紀)의 아들이 경원(慶源)에 정배되었는데, 듣자니 용기와 담력이 있다고 합니다. 이 사람은 필시 국가를 염두에 두고 있지 않을 것이므로 북쪽 변방에 있게 하면 후환이 있을까 염려됩니다. 남쪽 변방 절도(絶島)에 이배(移配)하소서."
하니, 따랐다. 상이 이르기를,
"국가가 불행하여 역적의 변란이 잇따라 일어났으므로 역적과 연좌된 사람으로 숙질(叔姪)간의 친분이 있는 자까지도 이미 관노(官奴)로 삼았으니 비록 사면하라는 영이 있더라도 이들은 용납할 수 없는데, 여러 도에서 품계하는 것을 매번 보면 이런 자들이 섞여 있으니 일이 매우 부당하다. 이후부터는 다시는 거론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 처음에 강옥(姜獄)075)  이 이미 완결된 뒤에 소현 세자의 세 아들을 모두 제주(濟州)에 유배보냈는데, 둘은 일찍 죽고 단지 셋째 아들만 살아 있으므로 상이 특별히 불쌍히 여겨 함양(咸陽)에 양이(量移)토록 하였다. 이윽고 교동으로 옮겨 놓고 때로 옷과 음식물을 하사하여 보살펴 주는 뜻을 보였는데, 청나라 사신이 우리 나라에 왔을 때 소현의 아들들이 살아 있는지에 대하여 묻자 조정에서 이미 죽었다고 답하였다. 이 뒤로는 청나라 사신이 와도 다시 제기하지 않았다. 이때에 이르러 상이 지나치게 가뭄에 대한 걱정을 한 나머지 심리하는 법전을 들어 죄인을 관대하게 풀어 주고, 또 소현 세자의 셋째 아들을 서울로 데려와서 보살펴 주기에 편리하도록 하고자 해서 대신들을 불러 의논하였다.

 

4월 21일 임술

여러 도에서 진상하는 물선(物膳)을 그만두라고 명하고, 왕대비전에만 봉진하도록 명하였다. 【가뭄으로 인하여 이와 같은 명을 내린 것이다.】

【태백산사고본】 8책 8권 50장 B면【국편영인본】 35책 547면
【분류】과학-천기(天氣) / 재정-진상(進上)

ⓒ 한국고전번역원

 

4월 22일 계해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상이 사직단(社稷壇)에서 기우제를 지냈다.

 

전 정언 조사기(趙嗣基)를 하옥하였다. 조사기는 일찍이 사관(史官)을 지냈는데, 시정기(時政記)를 여러 달이 되도록 수정하지 않았다. 대신이 직무를 태만히 한다는 일로 경연에서 진달하자, 잡아다가 추문하라고 명하였다.

 

이조 판서 김집(金集)이 연산(連山)에서 상소하여, 나이가 아직 팔십이 못 되었으므로 가자하라는 명을 거두어 줄 것을 청하고, 인하여 총재(冢宰)의 직임을 사직하니,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
"경이 비록 나이는 팔십이 못 되었으나 나이 많은 사람과 덕망이 있는 자를 예우하는 도리는 마땅히 이와 같이 해야 하는 것이니, 하필 1, 2년의 연한(年限)에 구애받을 것이 있는가. 경은 사직하지 말고 상경하여 지극한 나의 뜻에 부응하라."

 

4월 23일 갑자

승지를 파견하여 전옥서(典獄署)의 죄수를 조사한 다음, 그 죄가 가벼운 자는 석방하도록 하였다.

 

전 영암 군수(靈巖郡守) 조응립(趙應立)을 경성(鏡城)에 유배하고, 이행원(李行源)을 안악(安岳)에 유배하였다. 처음에 영암 지방의 전세(田稅)를 수령한 관리 김운(金雲)이 배가 침몰되자 그 죄를 모면하기 위하여 거짓으로 꾸며서 사람으로 하여금 저와 함께 배를 탔던 사람이 모두 빠져 죽었다고 헛소문을 퍼뜨리게 하였다. 그 후 김운은 남몰래 본군으로 돌아와 좌수 최신(崔紳)과 은밀히 모의하여 운(雲)이라는 그의 이름을 바꾸어 웅일(雄鎰)로 위조한 다음 본군의 이적(吏籍)에 다시 기록했었는데, 일이 발각되자 법에 따라 처형되었다. 전후 군수 조응립과 이행원 등은 실정을 숨기고 발설하지 않은 채 끝까지 허위로 보고하였으므로 모두 신문하여 정배토록 하고 또 최신을 잡아다 조사하도록 하였는데, 금부가 ‘살아 있는 사람을 죽은 사람으로 위조한 것에 대한 율[以生爲死之律]’로 논하여 전가 사변할 것을 청하자, 하교하기를,
"이 일은 모호하게 사기를 친 것과 비교할 수 없다. 그들을 수범(首犯)과 종범(從犯)으로 구분하여 수범은 참형에 처하고 종범은 전가 사변의 벌로 논하라."
하였는데, 정원이 아뢰기를,
"최신의 범행은 참으로 매우 놀라운 것이니 중한 형벌에 처하여도 진실로 아까울 것이 없겠습니다만, 법에는 죄에 해당하는 율이 있으니 그 율은 감해도 안 되며 더해도 역시 안 됩니다. 옛 사람이 이른바 ‘법을 이와 같이 하면 만족하다.’고 한 것이 진실로 정확한 의논입니다. 이번에 징계하기 위한 거조로 문득 과중한 법률을 시행하시니, 왕자(王者)가 형벌을 적용하는 데 있어서 한번 경중이 있게 되면 후일에는 말로 다할 수 없는 폐단이 발생하게 될 것입니다. 기강을 세우는 일은 법을 지켜 동요되지 않는 데 있고, 실정에 맞지 않게 과중한 형벌을 적용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경들의 뜻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만 관계되는 바가 적지 않으므로, 경솔하게 의논하기는 어렵다."
하였다.

 

4월 24일 을축

권우를 부응교로, 이정기를 부교리로, 남용익(南龍翼)을 정언으로, 이지형(李枝馨)을 전남 병사로 삼았다.

 

예조가 중신을 파견하여 지방 산천에 기우제를 지낼 것을 청하자, 하교하기를,
"어리석은 내가 덕이 없고 정성이 부족하여 하늘의 뜻을 감격시키지 못해서 가뭄이 더욱 참혹하니, 매우 부끄럽고 두렵다. 그러나 어떻게 덕이 없고 정성이 부족하다는 구실로 어찌할 수 없다고 내버려 두겠는가. 나는 또 자책하는 의미에서 남쪽 들에 나아가 삼가 기우제를 지내려 하니 그 계획을 즉시 거행토록 하라."
하고, 이어 하교하기를,
"어제, 내린 분부에 답한 상소를 보니, 임금 행차의 위의가 너무 성대하여 백성을 고달프게 하고 대중을 이동시켜야 하는 일에 대해 지적하였는데, 이 말이 일리가 있다. 이번에 교단(郊壇)에서 기우제를 지낼 때에는 여연(輿輦)과 의물(儀物)을 되도록이면 간략하게 하여서 실지로 하늘에 대응하는 뜻을 보이도록 하라."
하였다.

 

상이 삼공, 원임 대신, 육경, 삼사 장관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가뭄의 참혹함이 날이 갈수록 심하니 이는 실로 과인이 부덕하여 하늘의 죄를 받은 것이다. 내가 직접 기우제를 지내던 날 비가 쏟아질 희망이 있었는데 바로 구름이 걷히고 맑게 개었으니 타는 듯한 나의 생각이 어찌 한이 있겠는가. 그래서 경들을 만나 나의 잘못에 대해서 듣고자 한다."
하니, 영의정 정태화가 아뢰기를,
"상이 직접 사직단에 제사를 지내고 나자 가랑비가 뿌리기에 지극한 정성에 감동되어 하늘의 보살핌이 있는 것인가 하고 여겼더니 순식간에 구름이 걷히고 뜨거운 해가 다시 비추니 신들은 직정이 되고 민망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이제는 죄수들을 석방하여 경죄인과 중죄인을 따지지 말고 옥문을 활짝 열어 준 뒤에야 원망과 사나운 기운이 해소될 것입니다. 만약 문안(文案)만을 가지고 논단(論斷)을 하게 되면 확실하게 분변하여 실정을 얻어내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그리고 전교에 대응한 상소에 혹 계복한 죄인도 심리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는데, 이 말이 진실로 옳은 말입니다. 마땅히 형관으로 하여금 다시 분명하게 심리하소서."
하자, 상이 이르기를,
"나의 뜻도 진실로 이와 같다. 국가에 일이 많아서 사형수를 계복하지 못한 지가 지금 십여 년이 되었다. 이 죄수들이 비록 복죄하였다고 하나 그 가운데 원한을 품은 채 분명하게 밝히지 못한 자가 없었겠는가. 여러 해를 옥에 가두어 두었으니 필시 억울한 기운이 있었을 것이다. 화기(和氣)를 손상시키고 재해를 불러들인 것이 아마 이 일 때문인가 보다."
하였다. 좌의정 김육이 아뢰기를,
"심리(審理)는 단지 원한을 풀어주기 위한 것인데 만일 죄가 있는 자까지 모두 사면을 받는다면 어찌 심리라고 하겠습니까."
하고, 대사헌 오준(吳竣)이 아뢰기를,
"계복한 죄인은 법률상 마땅히 사형을 해야하므로 경솔하게 논의할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사헌의 말은 법률대로 집행하자는 뜻이다. 그러나 사형수 중에 혹시라도 실정을 따져서 사형을 면할 자가 있을지 모르니 지금 일체로 심리하는 것이 마땅하겠다."
하였다. 정태화가 아뢰기를,
"선왕조 때는 계복한 죄인이 혹 그들의 처자(妻子)가 상소를 하여 억울함을 호소하므로 인해 사형을 감하여 정배된 일이 있습니다."
하고, 우의정 이시백(李時白)이 아뢰기를,
"선왕이 일찍이 가뭄을 만나 신하들을 인접하고 형옥에 대하여 묻기에, 신이 대답하기를 ‘죄인은 단지 문안(文案)만으로 논단(論斷)할 수 없습니다. 죄는 가벼운데 정상이 가증스런 자가 있으며, 죄는 무거운데 정상이 용서해 줄 자가 있습니다.’ 하니, 선왕이 그날 바로 금부와 형조의 당상을 불러들이도록 하여 죄수를 탑전에서 의결토록 했는데, 며칠이 지나자 많은 비가 왔습니다. 신은 여기에서 형옥의 실정에 대하여 자세히 살피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더욱 알게 되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여러 대신들의 말이 옳다. 재차 심리하는 것은 비록 상례가 아니지만 지금 가뭄은 이미 이상한 재변이니, 내가 친히 죄수를 논핵하여 그들의 원통함을 심리하고자 한다. 유사로 하여금 오늘 당장 거행토록 하되 역적과 연좌된 자는 제외하고 일반 죄인들은 경중을 따지지 말고 일체로 심리하라."
하였다. 정태화가 아뢰기를,
"선조 때도 탑전에서 심리했던 거조가 있었는데, 상세하게 의논하여 품결하느라 늦은 밤까지 있었으니, 이번에도 이와 같은 규례에 따라 금부와 형조의 당상으로 하여금 각각 문안을 가지고 입시하여 품재(稟裁)토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영부사 이경여(李敬輿)가 아뢰기를,
"신이 삼가 생각건대, 한재를 불러온 이유는 건강(乾剛)한 기운이 유달리 강하여서 위아래가 서로 통하지 못한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높다랗게 위에 있는 것은 하늘입니다. 전하께서 두려워하는 정성으로 제사를 지냈건만 아직도 비가 오지 않으니, 전하의 마음이 지금 이 시점에서 더욱 어떠하시겠습니까. 전하는 또한 백성들의 하늘입니다. 대체로 전하의 허물과 시정(時政)의 잘못에 대하여 혹 숨기지 않고 직언을 하는 자가 있으면 도리어 뜻밖의 전교를 내려 엄한 말로 지척하시니 이러한 거조가 언로를 막는 것입니다. 전하께서도 마땅히 스스로 반성하시어 천심(天心)을 감격시키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구언(求言)을 하는 것은 직언을 들어서 착한 일을 하고 허물을 고치고 싶어서이다. 경의 말이 지극히 간절하니, 어찌 감격하여 두려운 마음을 갖지 않겠는가. 사실 불민한 내가 일을 해내지 못할까 염려되니 공경(公卿)과 여러 신하들이 제각기 품은 생각을 진달하라."
하였다. 이경여가 아뢰기를,
"구언한다는 전교를 내렸는데, 아직까지 전교에 대응하는 상소를 올리는 사람이 없으니, 여기에서 아랫사람들의 심정이 막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일을 해결할 수 있는 대책에 대하여 듣고 싶다."
하자, 이경여가 아뢰기를,
"덕을 먼저 베풀고 형벌을 뒤에 쓰는 것이 임금이 국가를 다스리는 도입니다. 전하께서 엄하게 다스리고 세밀하게 살피시는 실책은 비록 없었다 하더라도 정령(政令)을 시행함에 있어 서두르는 거조가 많으셨습니다. 생각건대 전하께서 형법(刑法)을 가지고 말세를 경동시키고 무너진 기강을 진작시키려는 도구로 삼으려는 듯합니다만, 신의 소견으로는 그 대원칙을 세우지 않고 구구하게 형정의 말단만 추구한다면 폐단은 날이 갈수록 더욱 발생하여 다스릴 수가 없을 것이라고 봅니다. 대체로 의원이 병을 치료할 때 약을 썼다가 효과가 없으면 다시 다른 약을 쓰는 법입니다. 전하께서 이미 형법으로 아랫사람들을 다스렸는데도 오히려 그 효과가 없었으니, 이제는 그 법을 바꾸어 덕(德)으로 다스리는 정치를 숭상해야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에는 원대한 생각이 있다. 그 말을 듣고 나니 마치 순주(醇酒)를 마신 듯하다. 감히 마음에 새기지 않겠는가. 대체로 백집사(百執司)가 한 관아의 책임을 맡는 데에도 오히려 맡은 직분을 다하지 못할까 염려하는데 더구나 조종(祖宗)이 물려 주신 중대한 책임을 맡고서백성들의 위에 있는 자이겠는가. 세도(世道)가 미약하여 날이 갈수록 더욱 무너져서 아랫사람이 상전을 능멸하고 천한 자가 귀한 자를 업신여기니, 밤낮으로 생각해 보아도 도무지 이렇다할 대책이 없다. 차라리 법령과 기강을 엄숙히 하여 세상을 격려시키고 말지언정 힘 없이 쓰러져 진작하지 못하는 처지가 되고 싶지는 않다. 또 지금 여러 신하들이 계품한 일을 보면 사심을 따른 자가 항상 열에 두셋은 되므로 비록 대신이 헌의한 것이지만 자신을 굽혀 따르지 못하겠다. 이는 진실로 아래에 주공(周公)·소공(召公)과 같은 보필하는 신하가 없어서 일마다 따르면 불가한 점이 있기 때문이다."
하였다. 이경여가 아뢰기를,
"두세 명의 신하들이 비록 제대로 하지 못한 실책이 있으나 어찌 감히 전하를 저버리기야 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난번에 정사준(鄭士俊)의 죄를 결정하던 날, 내가 여러 대신이 헌의한 것을 가지고 사사로운 뜻이 있었다고 한 것이 아니라 세상 풍습이 어떤 일에 논의를 하게 되면 그 일에 대한 곡절은 알지 못한 채 망녕스레 옳으니 그르니 하므로, 대신도 필시 자유롭게 하지는 못했을 것으로 여긴 것이다."
하였다. 이경여가 아뢰기를,
"신이 말한 것은 임금이 친히 정사를 관여하지 말고 전적으로 신하에게 맡긴 뒤에야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대체로 신료(臣僚)들이 말한 것을 절충해서 쓰는 것이 가하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신하가 그 책임을 제대로 완수하지 못하므로 임금에게 신뢰를 받지 못하는 것이다. 내가 그래서 매번 그들이 하는 일을 보면 문득 그것이 사심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을 하게 된다."
하였다. 정태화가 아뢰기를,
"붕당이 있고 나서부터 조정의 논의가 엇갈리므로 바로잡는 거조가 비록 공적인 논의에서 나왔다 하더라도, 전하께서는 필시 선입견을 가지고 상대방을 치려는 것이 아닌가 의심을 합니다. 그러므로 선비들 사이에 감히 서로 규율하지 못하고 잠자코 있곤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난번에 민정중이 재신 한 사람을 【이완(李浣).】  논핵하면서 말하기를 ‘한 가지 우연히 잘못한 허물이 있다 하여 그 사람을 영원히 폐기할 수는 없습니다. 진실로 실책이 있으면 들은 대로 규핵을 하고 뒤에 다시 수용하는 것이 진실로 서로 규율하는 도입니다.’ 하기에, 내가 그 말을 아름답게 여겨 곧바로 파척했던 것을 다시 기용하도록 윤허하였다. 지난번에 정사준(鄭士俊)의 죄가 관계되는 바가 매우 중대하므로 내가 독단으로 처치하였는데, 여러 신하들이 후일에 형벌을 숭상하는 조짐이 될까 염려하여 분분하게 간쟁하였으나 나는 끝까지 따르지 않았다. 이것은 비단 신하가 임금에게 신뢰받지 못해서일 뿐만 아니라 임금이 신하에게 신뢰를 받지 못해서인 것이다."
하였다. 부제학 민응형이 아뢰기를,
"호남은 흉년이 다른 도보다 심하니 마땅히 휼전을 내려 백성들로 하여금 안정을 되찾게 해야 합니다. 전세(田稅)는 개정하기는 어렵다 하더라도 무릇 공물에 관계되는 물품은 모두 감면해 준 다음에야 백성들의 목숨을 어느 정도 보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어공(御供)으로 쓰는 건숭어[乾秀魚]를 반드시 머리와 꼬리를 빼고 한 자[尺]가 되는 것으로 봉진하게 하였기 때문에 한 마리의 값이 쌀 열 말에 이릅니다. 어향(御享)이 막중하기는 하나 어찌 반드시 크기가 한 자가 되어야만 하겠습니까. 비록 한 자가 못 되더라도 두어 말의 쌀로 살 수 있는 신선한 고기로 진공하기에 합당한 것을 쓰더라도 불가하지는 않을 듯합니다. 대체로 열 말의 쌀이면 사실상 열 사람이 열흘 동안을 연명할 수 있습니다. 지금 만약 이 쌀을 덜어내어 백성들의 부세(賦稅)를 도와 준다면 혜택이 매우 클 것입니다. 장흥고(長興庫)와 사재감(司宰監)의 공물과 사옹원(司饔院)의 진상물 중에서 긴요하지 않은 것이 꽤 많은데 역시 줄여야겠습니다."
하니, 상이 입시 승지 안헌징(安獻徵)에게 이르기를,
"부제학의 말을 모두 해조로 하여금 의계토록 하라."
하였다. 상이 이어 금부와 형조의 여러 신하들을 입시하라고 명하여 금부의 죄인들을 심리하도록 하였는데, 윤창구(尹昌耉)는 기한을 두고 정배토록 하고, 이유원(李有源)도 정배하였으며, 심지명(沈之溟)은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형조의 죄인은 계복하여 사형을 받아야 할 자 중에 사형을 감면한 자가 두 사람이고, 유배가야 할 자 중에 등수를 감한 자가 90여 인이며, 사면을 받은 자 역시 90여 인이었다.

 

창덕궁(昌德宮) 수리 도감 제조 이하를 차등 있게 논상하였다.

 

4월 25일 병인

상이 하교하기를,
"지금 가뭄의 재해가 너무 엄청나므로 다시 친히 기우제를 지내게 되었다. 내가 말하지 않더라도 우리 대신들과 제관 집사 어느 누가 두려운 마음을 갖고 정성을 다하지 않겠는가. 다만 생각건대 서로 수신하는 도리는 마땅히 힘써야 할 것이니, 승지는 나의 지극한 뜻을 체득하여 더욱 더 경계하도록 하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교외에 친행할 때에 만약 곡식들을 밟아 피해를 주게 되면 기우제를 지내는 본래의 의도가 전혀 없는 것이니 크고 작은 여러 관사와 시위하는 장사들은 다같이 조심하도록 하라. 만일 어기는 자가 있을 경우 마땅히 무거운 율로 다스릴 것이다."
하고, 인하여 병조에 명하여 시위하는 군졸을 줄여 곡식을 밟아서 생기는 피해를 줄이도록 하였다.

 

사복시 정 이회보(李回寶)가 전지에 응하여 상소하기를,
"오(吳)나라 시장에서의 애초의 마음으로 곧바로 초나라에 들어간 것이 어찌 단지 직명(職名)만을 위해서였겠습니까.076)   큰 경사가 있고난 후에 조금이라도 임금을 가까이 모시고 싶어하는 것은 신하의 다 같은 심정이며 왕도(王道)를 시행하여 훌륭한 사람을 부르고 백성들을 양육하는 것 역시 어리석은 신의 소원입니다. 서울에 온 지 이미 한 달이 지났는데, 성상의 거조와 말씀에 한번도 성의(誠意)·정심(正心)·격물(格物)·치지(致知)의 공효는 보이지 않고 도리어 어지러운 세상의 현상들이 어찌 그리도 많아 사람들을 놀라게 한단 말입니까. 인도하는 말을 하기 전에는 월권 행위를 한다고 벌을 주고 인도하는 말을 한 후에는 말만 잘하는 것을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하니, 뜻있는 선비와 충신들이 그 누가 기가 막히지 않겠습니까. 아, 일에 대한 실책이 하나뿐이 아니니 낱낱이 들어서 논할 수 없으며, 비오기를 비는 일도 그 근본을 잃었으니 말단적인 것만 가지고 간할 수 없습니다. 신이 제왕(帝王)이 천명을 길이 누리는 훈계077)  와 공자가 내가 기도한 지가 오래다라고 한 말078)  을 가지고 그 뜻을 유추하여 전하께 진달하겠습니다.
아, 고립된 구중 궁궐에서 수년 동안에 걸쳐 발생한 갖가지 변란을 겪으셨습니다만, 그 가운데 큰 것만을 들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전하의 맑은 마음이 처음엔 세파에 손상을 받으시더니 조제(調劑)의 편협스러움에 추가로 손상을 받으셨으며, 처음엔 많고 많은 정사에 손상을 받으시더니 좋아하고 싫어하는 사사로움에 추가로 손상을 받으셨으며, 처음엔 효도와 우애에 손상을 받으시더니 참담한 변란을 만난 데에서 추가로 손상을 받으셨습니다. 이렇듯 엄청난 손상을 이미 받으셨는데, 마음이 어찌 바르겠습니까. 그리하여 노(魯)나라를 작게 여겼던 국량079)  이 도리어 깊고 얕음을 엿볼 수 있게 되었으며 태산같이 무겁던 기상이 끝내는 외물에 따라 움직이게 되었으니, 이것은 청명하신 심덕이 도에 점점 멀리 떨어져서 하늘에 부끄러움이 있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정직한 말을 모두 배척하여 총명이 미치지 못하게 되면 전하의 이목을 출입하는 자에게 의탁하지 않을 수 없는데, 혹은 영립하는 사사로움과 희로(喜怒)의 불씨가 또 뒤따라 현란하게 하면 전하의 마음이 더욱 크게 병이 들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정치를 하는 근본이 결국에는 가망이 없게 될 것이니 이것이 천덕(天德)과 왕도에 있어서 처음엔 지척이던 것이 결국에는 만리로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무 지나치거나 정도에 못 미치는 거조와 중립적이 아니거나 정당하지 못한 기쁨과 노여움이 처음엔 달마다 해마다 다르던 것이 이제는 날마다 시간마다 차이가 나고 다릅니다.
신의 말이 지나치다고 하신다면 신이 청컨대 한두 가지를 대략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옛날의 명왕(明王)은 자신을 더 책망하고 남을 덜 책망하였는데, 지금 전하께서는 남을 책망하는 데 밝으시므로 금부(禁府)의 조정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옛날의 명왕은 숨김없이 모두 개방해 놓았으므로 궁중과 부중이 일체가 되었는데, 지금 전하께서는 궁중과 부중에 간격을 두므로 집안 일과 나라 일이 다릅니다. 옛날의 명왕은 하늘을 두려워하고 백성을 두려워하여 한결같이 공론을 들었는데, 지금 전하께서는 스스로 옳다고 여기시고 관계에 치우치시므로 그런 것들이 모여 병이 되었습니다. 옛날 명왕의 방비하는 도리에 사물의 상태를 살피는 법도가 있었는데, 지금 전하께서는 국론을 따르지 않아 먼저 친족을 정리하지 않으시어 결국 ‘정장공(鄭莊公)이 공숙단(公叔段)을 방어하지 못했다080)  ’는 기롱을 면치 못하십니다. 옛날의 명왕은 따뜻하게 길러주는 명령을 충간(忠諫)하고 직언(直言)을 하는 사람에게 항상 베풀고 차갑게 죽이는 명령을 험하고 공교로운 말을 하는 사람에게 더하였는데, 전하께서는 따뜻한 명령과 엄한 명령을 매번 반대로 행하십니다. 그래서 간교하고 보잘것없는 자들이 날마다 집에 들어와 뱃속까지 파고들고 충성스럽고 청렴한 신하들은 날마다 줄지어 빠져 나가니 조정은 텅 비어 그 싸늘함이 마치 가을과 같습니다.
신의 말이 지나치다고 하신다면 어찌 물증(物證)을 보지 않으십니까. 양목(陽木)이 장차 왕성할 달에 금철(金鐵)의 기운이 용사하여 가을 보리가 2월에 패면 보리 거두기는 반드시 3, 4월에 하게 됩니다. 대체로 가을이란 금기(金氣)를 말합니다. 전하께서 숙살의 분부를 내리시는 것이 이처럼 매일 전도되시니, 신은 금철의 기운이 결국 양목에 이롭지 않으리라고 봅니다. 이것을 징험이 없다고 하신다면 어찌 옛날의 증거를 보지 않으십니까. 후주(後周) 보정(保定) 3년에 음부가 등 뒤에 꼬리처럼 붙어 있는 요물이 있었는데 옛 사람이 이것을 임금과 신하가 전도될 형상이라고 하였는데 더구나 오늘날 목과 뿔 사이에 꼬리가 붙은 괴물이 나타난 경우이겠습니까. 목은 명(命)을 상징하는 것이고 머리는 존귀함을 상징하는 것인데, 하체인 꼬리가 두 달 사이에 명을 상징하는 위치에 있기도 하고 존엄을 상징하는 곳에 있기도 하였습니다. 뿔은 또 군대를 상징합니다. 존귀함을 상징하는 자리와 군대를 상징하는 곳은 결코 하체가 있을 곳이 아닙니다. 신은 생각건대, 아랫사람이 국가의 운명을 휘어잡을 징조가 머지않은 가까운 시일 내에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후제(後齊) 천보(天保)081)   중에 한 몸통에 머리가 둘인 괴물이 있었는데, 옛사람은 이것을 정사가 간사하고 아첨한 자들에게서 나오고 상하의 질서가 없는데 대한 응험이라고 하였습니다. 당(唐)나라 의종(懿宗) 13년에 머리가 둘이고 귀가 넷인 괴물이 있었고, 후위(後魏) 태화(太和)082)   연간에는 귀가 셋이고 발이 여섯 개인 요물이 있었는데, 옛 사람은 머리가 둘이고 귀가 넷인 것은 천하가 통일되지 못한 응험이라고 하고 또 세 개의 귀와 여섯 개의 발이 달린 괴물은 육보(六輔)가 정사를 마음대로 한 응험이라고 하였습니다. 전(傳)에 이르기를 ‘사람의 기운이 치성하면 외물이 따라서 감동한다.’ 하였는데, 이것은 전하께서 오늘날 치성한 기운을 가지심으로써 외물이 서로 반응하는 것이 아닙니까. 기필코 혼란을 부를 현상이 이러한데 전하께서 끝내 깨닫지 못하시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아, 대역 죄인은 비록 제거하였지만 위태함은 배가 되었습니다. 나라의 형세가 마치 심장부에 큰 종기가 있어 이제 한 번 물러터진 것과 같아서 원기가 극히 허약해졌으니, 그 원기를 건장하게 하는 방법은 정직한 자를 진출시키고 사악한 자를 물리쳐 조정을 바르게 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그 장벽을 헐어놓고 복구하기를 생각하지 않으며 국가의 법을 멀리하고서 수습하지 않아서 나라는 호랑이 없는 산이 되었고 조정에는 낮에도 설치는 여우가 있는데083)  , 전하의 살피지 못하심은 어찌 이렇게도 심하십니까. 하늘이 해괴한 물상(物象)으로 전하께 보여주는데도 전하께서 고치지 않으시므로 또 무기의 형상으로 보여주었습니다. 세상에 말하는 자가 없는 것입니까. 아니면 전하께서 듣고도 소홀히 여기시는 것입니까.
무성(武星)이 낮에 나타난 것은 요즈음 들어 흔히 보는 변고이니 어찌 전하를 크게 경계하고 두려워하게 하겠습니까마는, 2월 초에 아침 해가 떠오를 때 동쪽과 서쪽에서 흰 기운이 일어나 해를 가로질렀습니다. 흰 기운은 무기의 상징이므로 식자들은 모두 난리가 일어날 징조라고 말합니다. 안에 걱정은 백성들이 산속으로 숨어드는 것이며 밖에 걱정은 섬 오랑캐가 오래 전부터 병력을 양성하고 있는 것이니, 국가의 근본인 백성들이 흩어져버릴 내란과 섬 오랑캐가 길을 빌려달라고 할 걱정이 불을 보듯 뻔합니다. 변란에 대비할 방법을 조용히 생각해 보건대, 부세를 박하게 하여 백성을 편안케 함으로써 국가의 기반을 견고하게 하고, 장수를 뽑아 병사를 훈련시켜서 국가의 형세를 막강하게 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전하께서는 청명한 기운을 타고 나셨는데 모르겠습니다만 무엇에 가리워져서 살피지 못하십니까.
가뭄에는 세 가지 큰 것이 있는데 세 가지 가뭄 중에 나라의 가뭄과 사람의 가뭄이 하늘의 가뭄을 초래한다고 보기 때문에 신의 가뭄에 대한 논의는 세속의 말과 다릅니다. 두 가지 가뭄의 요점에 대하여 그에 관한 말을 구하려 하신다면, 가뭄을 이르게 한 근본을 어찌 스스로 반성해 보지 않으십니까. 전하가 기도하신 것은 상림(桑林)084)  을 얻기 위한 기도였고, 어리석은 신의 기도는 전하의 마음을 얻기 위한 기도였습니다. 전하의 마음에 진실로 신명에게 빈 지가 오래였다는 공자의 마음과 오랜 세월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하늘에 빌라는 소공(召公)의 뜻을 다하셨다면 현부(賢否)와 사정(邪正)이 절로 마음의 거울에 구분될 것이며 경중(輕重)과 이병(利病)이 절로 마음의 저울에 구분되어서 정치하는 방법은 논할 것도 없이 상림(桑林)을 기다리지 않아도 음과 양이 자연적으로 조화를 이루고 사시의 계절이 자연히 순행하며 구름끼고 맑아지는 기후가 제때에 알맞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제왕의 성의(誠意)·정심(正心)·격물(格物)·치지(致至)에서 오는 크나큰 효과가 아니겠으며, 천덕(天德)과 왕도(王道)의 지극한 거조가 아니겠습니까.
전하께서 뭔가 하고 싶으시다는 대단한 마음으로 하필 이름을 좋아하십니까. 이름이란 실상의 객체입니다. 이름과 실상의 차이에서 성인(聖人)과 광인(狂人)이 판가름납니다. 너무 세밀하게 살피려 하지 마소서. 너무 세밀하게 살피는 것은 대도(大道)를 해칩니다. 너무 친근한 자들의 말을 듣지 마소서. 친근한 자들의 말은 대공(大公)을 어지럽힙니다. 원한을 살 거조를 시행하지 마소서. 원한을 살 때가 아닙니다. 일을 미봉책으로 하는 사안(私案)을 고수하지 마소서. 미봉책으로 하는 일은 균일하지가 못합니다. 필부들이 하는 효도를 하지 마소서. 필부는 제왕이 법으로 삼을 만한 대상이 못 됩니다. 입에 쓴 약을 싫어하지 마소서. 입에 쓴 것이 병에는 유익합니다. 법을 집행하면서 사사로운 은혜를 정당하지 못하게 베풀지 마소서. 정당하지 못하게 베풀게 되면 사람들이 승복하지 않습니다. 엄격한 것을 숭상하여 법을 굽혀가며 지나치게 엄하게 하지 마소서. 지나치게 엄하게 하면 사람들이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게 됩니다.
현인을 구하시려면 초야에 있는 사람을 먼저 찾으소서. 정성을 다하여 찾으신다면 여러 군자들이 흥기할 것입니다. 붕당에 대해서는 그 공(公)과 사(私)를 살피소서. 명확하게 분변하시면 공론(公論)을 하던 자들이 분발할 것입니다. 이것이 어찌 마음의 기준과 마음의 형평에서 오는 효과가 아니겠습니까. 진실로 이렇게 하신다면 모두가 유신(維新)의 깃발 아래 참여하여, 아첨하던 자들이 변하여 충신이 되고 간사한 자들이 변화하여 바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그 순리대로 일을 행한다고 하는 것으로서, 하늘에 대한 경건한 기도가 이미 깊은 궁궐 안 임금의 훌륭한 덕에서 극진하게 된 것을 볼 수 있는 것이니, 우리 성상께서는 무엇 때문에 상림에서 기우제를 지낼 것이 있겠습니까. 상림의 기도란 바로 성탕이 다만 하늘을 가리켜 맹세한 말입니다. 지금 우리 전하의 기도가 과연 하늘을 가리켜 맹세하기에 부끄러움이 없겠습니까. 진실로 조그마한 부끄러움이라도 있다면, 기도하여 비가 온다 하더라도 그 비는필시 가을에 장마가 질 것이니 금년에 비록 비를 얻었다손 치더라도 명년에는 필시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스스로 마음에 있는 하늘에 돌이켜 그러한 부끄러움이 있는지 없는지 살펴보시고 만일 그것이 혹시라도 있다면 마땅히 자신을 송사하는 뇌우침으로 하늘에 스스로 새로워질 것을 맹세하고 하늘에 맹세한 후에 실천하는 공력을 쏟게 되면 하늘의 요망한 현상과 괴이한 물건도 잠깐 사이에 하나의 마른 뽕나무와 물러가는 형혹성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방법은 훌륭한 정치를 하는 데도 넉넉할 것입니다. 어찌 단지 비만 오고 말겠습니까. 이렇게 했는데도 비가 내리지 않고 이렇게 했는데도 다스려지지 않는다면 청컨대 신을 참형에 처하여 망언을 한 죄로 다스리소서."
하였는데, 답하기를,
"그대의 걱정과 사랑이 깃든 정성으로 지금 또 이렇게 간절하게 말하니, 실로 나의 병통에 꼭 맞는다. 어찌 명심하지 않겠는가. 그대의 선견지명과 나라를 위하는 혈성을 나는 잊지 않고 있었다. 언제든지 생각한 바가 있거든 그대는 마땅히 낱낱히 상소하여 내 뜻에 부응토록 하라."
하였다.

 

4월 26일 정묘

부교리 민정중(閔鼎重)이 상소하기를,
"삼가 성상의 하교를 보건대, 성상께서 하늘을 두려워하시고 재해를 경계하시어 몸이 편치 못하도록 반성하시는 한편 전교를 내리시어 방안을 찾으시는데 말뜻이 하도 간절하여 신은 감격한 나머지 감히 생각한 바를 아룁니다. 다만 드리고 싶은 말씀이 기밀(機密)에 관계되는 일이어서 감히 글을 드러낼 수가 없기에 삼가 이 첩황(貼黃)으로써 올립니다."
하였는데, 그 첩황에,
"하늘의 조화가 불행하여 나라가 어려움을 겪게 되자 상하가 걱정에 쌓여 항시 구제하지 못할까 염려해 왔는데 더군다나 하늘의 뜻이 좋지 않아 재앙이 거듭 이르니 국가의 형세가 전도되어서 마치 물이 더욱 깊어진 듯한데, 올해 가뭄이 또 이렇게까지 극심하니 백성들이 불안 속에 다 죽어갑니다. 아, 진실로 크게 한숨 짓고 눈물 질 만한 때라 하겠습니다.
신이 삼가 보건대, 성명께서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밤낮으로 애태우시면서 자책하시기를 매우 간절히 하시고 허물 찾기를 매우 급하게 하시면서 널리 바른 말을 찾으시는 등 윤음(綸音)이 간절하시니 백성들도 감격하여 눈을 씻고 우러러 보면서 만분의 일이라도 정성을 바치고자 하는데 더구나 신같이 노둔한 자가 오랫동안 경악에서 모시면서 매우 두터운 은혜를 받았는데, 망언을 할까 경계하고 죄를 받을까 두려워하여 한마디도 진달하지 않은 채 성명을 저버려서야 되겠습니까. 인하여 생각건대, 신이 성대한 시대를 만나 외람되게 크나큰 은혜를 입어 시종(侍從)의 자리에 있으면서 이미 몇 년을 지냈는데도 한번도 조그마한 도움을 드려 은혜에 보답하지 못했으나 성상께서는 매번 잘 보살펴 주시고 물리치지 않으셨습니다. 모르겠습니다만 성상께서는 어리석은 신이 취할 것이 뭐가 있다고 이렇게 하셨습니까. 혹시 성상께서 신의 어리석음을 가련하게 여기시고 신이 딴 마음이 아닌 염려와 애착이었다는 것을 살피시어 너그럽게 포용해 주셔서 일 맡길 것에 대비하신 것이라면, 신 역시 어찌 감히 청반(淸班)에 버티고 있으면서 헛되이 성상의 총명(寵命)을 욕되게 하여 마음에 품고 있는 생각을 현명하신 전하 앞에 모두 말씀드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신은 청컨대, 먼저 신이 평소에 품고 있었던 뜻을 진달하고 그 다음에는 요즘 사정에 대하여 말씀드려서 성상으로 하여금 신의 어리석은 마음을 통찰하시도록 하고, 신 역시 성상께서 품고 있는 뜻이 과연 어떠한 것인가를 알고 싶습니다. 신이 처음에 벼슬을 할 때 외람하게 급제하였는데 통적(通籍)한 이래로 누차 근열에 제수되었습니다. 전후 임명에 대하여 감히 굳이 사직하지 않았던 것은 신의 재주와 능력이 감당할 수 있다고 여겨서가 아니라 다행히 성상께서 임어하시어 탄식을 하며 장차 크게 한번 무엇인가를 해 보시려고 한 때를 당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조정에 있는 신료들은 종종걸음을 치지만 계획이 하루를 미치지 못하고 꾀가 멀리 가지 못하여 위에서는 의지할 바가 없고 아래에서는 명을 받들어 실행한 바도 없이 그럭저럭 세월만 보내다가 결국 성상의 의지는 점점 나태해지고 시세는 더욱 떨어지기에 이르렀습니다. 오랜 국사가 마치 물이 골짜기를 달리듯, 해가 서산에 떨어지듯 하여 이미 쇠잔함이 심하고 어지러움이 형상으로 나타나고 있어서, 장차 우리 성상께서 무엇인가를 하시려는 뜻에 부응하여 천하 후세에 할 말을 남기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신이 삼가 자신을 헤아려 보지도 않고 허물을 참고 무릅쓴 채 나아가 성상을 가까이 모시고 생각한 바를 모두 진달하고 물러나오려 하였습니다. 그런데 경연에 나아가 또 감히 말씀을 다 드리지 못했던 것은 진실로 사람이 미미하고 계획이 천박하여 아무런 도움을 드리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큰 뜻을 세워 표준을 삼고, 인재를 모아 원기를 왕성하게 하고, 언로(言路)를 넓게 열어 백성들의 실정을 통하게 하고, 사공(事功)을 분발하여 대업을 넓히라는 소청을 드렸는데, 신의 정성은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의가 천박하고 말이 졸렬하다 보니 마음을 털어놓고 있는 대로 드린 말씀이지만 진부한 얘기거나 망령스런 말이 되어, 마침내 위로는 성상을 감동시키지 못하고 아래로는 저의 어리석은 생각을 전달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신의 죄입니다.
그러나 신이 감히 의혹된 마음을 품고 스스로 움츠러들지 않은 것은, 진실로 임금과 신하 사이엔 성의가 곁들여 있어야 하는데 어리석은 신의 본래의 의도를 전하께서 혹 깊이 살피지 못하셨거나 성상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가를 여러 신하들이 헤아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전하께서 위로는 하늘의 위엄을 엄중히 하시고 아래로는 백성의 사정을 가엽게 여기시어 두려운 생각으로 도모하지 아니한 것이 없으시니, 바로 이 때가 신하로써 충성을 바칠 날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이 죄를 무릅쓰고 정성을 다하여 간곡한 저의 심정을 모두 진달하여 전하께서 거두어 주시거나 물리치시기를 바라는 이유입니다. 삼가 생각건대, 성상의 뜻이 굳게 결정되셨으므로 신이 감히 번독스럽게 청하지는 않겠습니다만, 인재(人材)를 수습하라는 말에 대해서는 또 다시 반복하여 말씀드리겠으니, 전하께서는 살펴 주소서.
신이 삼가 요즈음의 실태를 보니, 인물이 대단치 않아 조정에 인재가 모자라고 세상 일에 마음을 쏟는 자가 드물어 단지 일을 맡고 있는 한두 사람의 신하만이 날로 생활하는 사이에 대처해 나갈 뿐입니다. 천리마를 놓아두고 천리를 가는 일과 뗏목을 타고 큰 바다를 건너는 일은 지혜로운 사람이 아니라도 그 어려움을 알 수 있습니다. 고종(高宗)이 도를 생각하자 부열(傅說)이 일어났고, 선왕(宣王)이 난리를 평정하려 하자 신보(申甫)가 나왔으니 성상께서도 지성으로 구하면 됩니다. 어찌 요즘 세상이라 하여 훌륭한 사람이 없겠습니까. 그러나 여자는 자신을 지키는 것을 정조로 삼고, 선비는 재주를 팔지 않는 것을 귀하게 여깁니다. 비록 훌륭한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진실로 성의와 예의가 없다면 전하께서 어떻게 그를 쓰실 수 있겠습니까. 심지어 지난해에 유신들을 후한 예로 발탁할 때에 사람들이 모두 진용되는 것을 기뻐했는데, 신은 홀로 이 사람들이 혹시라도 차질을 빚어 성상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서 ‘선비들이 일의 실정에 어두워 국가에는 도움이 없다.’고 여기시게 되어 문득 후일 훌륭한 사람을 구하는 뜻에 장애가 될까 염려했었는데, 며칠이 못 가서 이 생각이 과연 들어맞아 일이 시기와 더불어 서로 어긋나 결국엔 낭패를 겪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전하에게 말씀을 드리는 자들이 진실로 유도(儒道)로 말씀드리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재능이란 반드시 양성한 뒤에 이루어지는 것이며, 찾은 다음에 이르러 오는 것입니다. 옛날 성왕(聖王)이 인재를 널리 구하고 예로 초빙하되 조정을 대상으로 하지 아니하고 초야를 대상으로 했으며, 훌륭한 신하와 명철한 선비들이 시대에 호응하여 세상에 나온 자들은 현달한 자가 아니고 한미한 자들이었으니, 오늘날도 초야에 은거하면서 전하의 요구에 응하여 전하의 뜻을 이루어줄 사람이 있을지 모르는 일이 아닙니까. 신이 지난번 경연에서 이러한 뜻을 대략 진달하였으나 감히 두루 지적하여 말씀드리지 않았던 것은 사실 사람이 못나고 직책이 낮아서 천거하지 않았던 것으로, 한번 신의 입에서 나오게 되면 문득 많은 사람들의 기대에 경시되어 피차가 손해만 있고 아무런 이익이 없기 때문입니다. 전하께서 진실로 성심을 갖고 구하신다면 그 사람을 모를까 걱정할 것이 있겠습니까.
그리고 또 오늘날 전하께서 사람을 구하시고 말을 채용하시는 데 있어서 마음에 거스리는 데서 찾지 않고 뜻에 영합한 말이나 사람만 구하고 들으시므로, 조금 두각(頭角)을 드러낸 자는 조정에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이는 시사(時事)의 그릇된 것 중에서 가장 크게 그릇된 것으로 여겨집니다. 백성들의 실정이 누구를 말미암아 통하겠으며, 일이 누구를 말미암아 수립되겠습니까. 이것이야말로 신이 한밤에 잠을 못 이루고 탄식하며 매번 말을 아니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아, 바야흐로 지금 나라의 형편은 자주 위축되고 하늘의 경계는 기세가 대단하므로 말할 만한 일도 신이 다 할 수 없는데, 어떻게 또 신의 마음에 서려 있는 것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아, 바다에 표류한 한인(漢人)은 어찌 우리가 옛날에 섬겼던 명나라의 백성이 아니겠습니까. 설령 국가가 불행하여 이 지경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어찌 차마 모두 그들을 포박하여 조금도 거리낌 없이 원수에게 몰아 보낼 수 있겠습니까. 이는 진실로 인정상 답답한 일이며 성상의 마음에도 슬픈 일입니다. 더구나 지난날 보냈던 자들이 모두 사형을 당했는데, 지금 이들이 죽음을 면치 못할 줄을 알면서 또 죽을 곳으로 강제로 보내는 것은 어찌 우리 나라가 차마 할 일이겠습니까. 이들이 거친 파도에 표류하여 가까스로 살아나 하늘이 내려준 도움으로 우리 나라에 도착한 것이므로 그들은 옛날을 생각하며 살아갈 수 있을 곳으로 여겼을 터인데, 도리어 천 리 밖으로 보내어 모두 북쪽으로 보낸다면 그들의 불쌍한 처지를 설명하기에 어찌 많은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인정상 차마 못할 일이며 하늘의 뜻도 반드시 편치 못할 것입니다. 옳지 못한 일을 행하여 죄없는 자를 죽이는 일이 어찌 하늘의 화기(和氣)를 손상시켜 흉재(凶災)를 일으키기에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제주(濟州)는 본래 바다 가운데 있는 절도(絶島)이므로 피차의 소식이 누설되지 않을 만큼 비밀스런 곳입니다. 지금 만약 배를 마련하여 보내 가고 싶은 대로 가도록 맡겨 둔다면 뜻밖에 발생할지도 모를 환란에 대하여 염려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만일 그들을 섬에 있게 하고 늠료(廩料)를 약간 지급하여 죽지 않게 해주어 여생을 마치게 한다면 은혜와 의리를 펼 수 있고 조처하기도 편리할 것입니다. 비록 다시 간사한 적들이 은밀히 내통하여 오랑캐들이 책망을 한다 하더라도 가서 확인해 보기는 어려울 것이므로 빈말로만 위협을 할 것이니 사세를 미루어 헤아려 볼 때필시 큰 염려는 없을 것입니다. 더구나 지난날 그들을 잡아보낼 때에 정적(鄭賊)이 오히려 ‘너희 나라에 쇄마(刷馬)가 얼마나 많은가?’ 하였는데, 그 마음에는 우리 나라에 계획이 없다는 것을 가소롭게 여겼던 것입니다.
지금 어찌 이 일을 거울 삼아서 전에 했던 일을 징계로 삼지 않으십니까. 만에 하나 끝까지 비밀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우리가 장차 바른 말로 말하기를 ‘명나라는 지난날 우리 부모 나라가 아닙니까. 지난번에 대국(大國)이 사람들을 죽이는 것을 보았는데 진실로 그러한 줄을 알면서 차마 죽을 곳으로 몰아보내지 못해서이지 딴 뜻이 있어서가 아니다.’고 하면, 저들이 비록 짐승과 같은 자들이라 하더라도 진실로 이 일 때문에 한나라의 화친을 잃으려고 하지는 않을 것이 분명합니다. 신이 붓을 들고 여기까지 쓰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하염없이 흐릅니다. 모르겠습니다만 성상께서는 어떻게 여기십니까. 지난날 이무(李袤)가 신생(辛生)을 국문하자고 청한 것은 이무의 말이 아니라 사실은 온 나라 사람들의 공통된 말이었습니다. 이무가 위엄 아래 감히 말을 다하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만, 신은 임금과 신하는 아비와 자식과 같은데 생각한 바가 있으면 어찌 감히 모두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고 생각됩니다. 신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강역(姜逆)의 옥사가 처음에 나인들 사이에서 나오자, 사람들이 조역(趙逆)과 김적(金賊)이 실지로 그 일에 참여하였다고 하니, 온 세상이 듣고서 놀라움과 당혹을 금치 못했습니다. 지난번에 두 역적이 이미 패하여 간사한 꾀가 모두 드러났는데 지금 여항간 대중들의 말에 더러 두 역적의 간교함이 위로 성상의 귀를 가리울 수도 있다 합니다. 그러나 신은 이것이 외인들이 알 수 있는 바가 아니라고 여기는데 전하께서 반드시 모두 통촉하시어 두루 살피셨으리라 생각됩니다만, 만일 혹시라도 그 사이에 한 가지라도 의심할 단서가 있으면, 형제의 인륜은 하늘에서 근본한 것이니 속히 신설하여 구천에 있는 영령을 위로하고 재앙(災殃)과 여기(戾氣)를 이완시키소서. 다만 생각건대, 이 일이 선조(先朝)에 관계되므로 전하께서 필시 이 때문에 어렵게 여기시겠지만 그럴 듯한 방법으로 속이면 현명한 사람도 면하기 어려운 것이니 어찌 선왕의 큰 덕에 누가 되겠습니까. 오늘날 잘 계승하고 잘 기술한다면 선왕에게 빛이 날 것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하늘에 있는 선왕의 영령이 어찌 이 일을 전하에게 기대하지 않겠습니까. 설혹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옳고 그름에 관하여 흔쾌히 결정하시어 백성들의 의혹을 제거하는 것이 또한 가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이 자녀들은 왕가의 혈속인데, 어린 아이로서 아직도 섬에 갇혀서 그 목숨이 실낱같이 위태롭습니다. 만에 하나 하루아침에 안개와 이슬에 병을 얻어 제 명대로 다 살지 못하고 죽게 되면 비록 다시 소급하여 불쌍히 여긴다 하더라도 이미 때는 늦습니다. 성상께서도 이를 염려하시어 누차 자비로운 말씀을 하셨으나 그때마다 대신은 매번 오랑캐 사신이 와서 물을지도 모른다는 혐의를 두었습니다. 형편상 어려운 점이 비록 이와 같다고는 하나 알맞게 처치하는 것이 실지로 우리에게 있으니, 어찌 성상의 뜻을 받들어 실행하여 우리 성덕을 넓히지 않는단 말입니까. 더구나 그 딸이 성장하여 이미 오래 전에 시집을 갔으니, 마땅히 추은(推恩)하여 관직과 급료를 주어 속적(屬籍)토록 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어찌 우리 임금의 혈속으로 하여금 시골에 파묻혀 한 고을의 평범한 사람이 되어 살게 해서야 되겠습니까.
유계(兪棨)의 경우는, 신이 용서해 주어도 되겠다는 글을 두 번이나 올렸는데 지금 듣자니 심리하는 문안에 그의 성명을 지우고 황지(黃紙)를 붙여 내렸다고 합니다. 이는 전하께서 윤기(倫紀)의 밖으로 내치시어 심하게 끊어버린 것입니다. 신은 그지없이 두렵고 황송하여 비로소 전에 드린 말씀이 망령된 것으로서 스스로 큰 죄인을 옹호하는 처지에 빠져들게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므로 신은 감히 죄를 지고 안이하게 혼자만이 형벌을 면할 수가 없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먼저 벌을 내리시어 신의 죄를 밝히소서. 그러나 어리석은 신이 감히 목숨을 걸고 한 말씀 드리겠으니 성상께서는 더욱 유의하소서. 신이 듣건대, 까마귀와 솔개의 알을 깨뜨리지 아니해야만 봉황새가 찾아오고 비방한 죄를 벌주지 않아야만 아름다운 말을 해주는 자가 온다고 하였습니다. 설사 유계의 광망(狂妄)함이 만일 비방에서 나왔다 하더라도 오히려 성세(盛世)에 가두어 두지 말아서 허물을 감싸주는 덕을 드러내야 합니다. 유계는 선조(先朝) 때 시종(侍從)하던 신하일 뿐만 아니라 전하께서 일찍이 관대하게 여겼던 자가 아닙니까. 어찌 감히 선왕을 비방하여 스스로 막대한 죄를 지었겠습니까. 당초에 유계가 유신으로서 국가의 큰 일을 당하여 단지 전례(典禮)를 토론하여 성상의 참고로 드리려고 했던 것뿐입니다. 그러한 유계를 만약 비방한 죄로 꾸짖는다면 온 나라가 모두 그의 원통함을 인정할 것입니다. 유계는 본래 충성심이 강한데다 소박하고 우직한 자로서 말주변이 없는데 거듭되는 참소에 성상께서 속으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또한 성상께서는 마음을 풀고 기운을 평이하게 가지시어 다시 더욱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한 사람이 원한을 품게 되면 하늘의 기운도 어긋나게 되는 것인데 유계만 드넓은 은전의 혜택을 받지 못하였으니 하늘이 공평하게 감싸주는 뜻이 아닌 듯합니다.
신이 성상의 자애로움을 믿고서 죽음을 무릅쓰고 번독스럽게 하였으니, 신의 죄는 만 번 죽어야 할 만큼 큽니다. 생각건대 신이 진달한 바가 말하지 않아야 할 말을 한데다, 또 극히 망령됩니다만 이미 생각한 바를 모두 말하라는 분부를 받고는 저의 직분을 헤아려 보건대, 또한 마땅히 정성을 다하여 솔직한 심정을 말씀드려야 하겠기에 감히 죽음을 무릅쓰고 상소를 올리오니, 혹시라도 채납되어 전하께서 하늘을 두려워하여 재해를 이완시키려는 실상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신이 말씀드리는 것은 모두 국가의 기밀이므로 쉽게 누설이 되어 뜻밖의 환란을 초래해서 그들의 노여움만 사 위로 성덕(盛德)에 누가 될까 염려되었습니다. 구구한 저의 어리석은 충성심이 이것을 보았기 때문에 감히 이와 같은 사실을 손수 써서 밀봉하여 진달하오니, 삼가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조금이나마 살펴 주소서."
하였다. 상소를 들이자, 상이 즉시 그를 불러들여 대면하고 이르기를,
"그대의 상소를 보니, 대체로 전지에 응하여 상소한 말이었다. 역강(逆姜)의 일에 대하여 언급하였는데, 그대가 어떻게 들어서 알고 이 말을 하였는가?"
하니, 민정중(閔鼎重)이 대답하기를,
"신이 오랫동안 가까운 반열에서 모시고 있었으나 도움을 드린 바가 없던 차에, 마침 하늘이 재해를 내려 경계를 보여 가뭄이 매우 참혹한 시기를 만나 성상의 심기가 걱정과 두려움에 쌓여 밤낮으로 편치 못해 하시다가 전지를 내리시어 해결책을 구하시는 등 정성이 지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신은 직분상 끝까지 잠자코 있을 수 없어 감히 생각한 바를 진달하였던 것입니다. 역강(逆姜)의 옥사에 대해서는, 신은 나이 젊은 신진이므로 그 옥사가 처음 발생했을 당시의 실정을 자세히 모릅니다. 대체로 이 옥사가 궁중에서 나온 것이므로 그 사이의 실상에 대해서 외인들로서는 알기도 어려운 바이며 말하기도 어려운 일입니다. 변란이 지친에게서 발생하였으므로 사람들은 모두 당혹해 하였는데 그 당시 어떤 사람은 조역(趙逆)과 김적(金賊)이 실지로 그 일에 참여하였다고 하자, 여항(閭巷) 간에서는 서로 의아해 하며 지금까지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두 역적이 법의 심판을 받아 간사한 꾀가 모두 드러나니 사람들은 더욱 당혹해 하며 모두가 두 역적이 속여가지고 그 옥사를 일으킨 것이라고 합니다. 삼가 생각건대, 성상께서는필시 그들의 정상을 통찰하셨을 것입니다. 진실로 의혹스러운 단서가 조금이라도 있다면 천륜(天倫)의 지극한 정에 필시 애처로움이 배나 될 것이니, 신생(辛生)을 엄하게 국문하여 그들로 하여금 즉시 원한을 풀게 하고, 만일 역모한 사실이 명백하다면 역시 빠른 시일 내에 시비를 결정하여 온 나라 사람들의 의혹을 말끔히 제거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상법(常法)으로 말하면 그대는 중죄를 면하기 어려우나 내가 이미 구언(求言)을 하였고, 그대가 진달한 것도 생각한 바를 반드시 진달하겠다는 뜻에서 나왔으므로 직접 대면하여 말하고자 한 것이다."
하자, 민정중이 아뢰기를,
"신이 이미 생각한 바가 있어서 죽음을 각오하고 소를 올렸는데, 너무 너그럽게 용서하시어 죄를 주지 않으시고 사대(賜對)까지 받게 하셨으니, 황공하고 감격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미 결정난 옥사를 다시 언급할 것이 없다만, 외부 사람이 이 일 때문에 시끄럽게 했던 것은 선왕(先王)께서도 일찍이 아셨던 일이다. 대체로 이른바 조역(趙逆)과 김적(金賊)를 의심하게 된 것은 아마 맨 처음에 의혹을 풀지 못해서 그런 것일 것이다. 이 옥사는 심상한 사변이 아니었는데 어찌 한두 흉도가 선왕을 속일 수 있었겠는가. 설사 소현 세자(昭顯世子)가 살아 있을 때에 이러한 사변이 있었다 하더라도 지금 두 역적의 흉계로 본다면 혹 의혹할 만한 일이 없지 않을 것인데, 소현 세자가 이미 죽었고 하나 밖에 없는 아들도 결코 기업(基業)을 부탁할 만한 위인이 못 된다는 것을 외부 사람도 다 같이 아는 바이므로 두 역적이 실로 꺼릴 바가 없는데, 어찌 계획을 세워 속임수를 썼을 리가 있겠는가. 역강(逆姜)이 신임했던 의정(義貞)이라고 하는 계집종이 취복(就服)한 공사에, ‘강씨가 황금 3, 4냥을 자주 본가에 보내왔다.’고 하니, 이점으로 보아 많은 돈을 나누어 주어 수많은 무리를 결속한 것이 반드시 이것으로 말미암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체로 이러했기 때문에 불량배들이 그 실상을 감추고 근거없는 말을 주장한 것인데, 세속 사람들은 원래 주된 견해가 없는데다가 시비를 잘 알지 못하므로 와전된 말에 선동되어 국시(國是)가 정해지지 못하게 하고 말았으니, 필경 아름답지 못한 말이 생겨서 과인에게까지 미칠 줄을 나는 알고 있다.
지난날 신생(辛生)을 국문하자고 청한 말은 진실로 매우 한심하다. 외부 사람이 이렇게 의심을 하므로 선왕이 매번 이것을 염려하였으며 예옥(禮玉)이 【강씨의 어미이다.】  승복한 것에 대하여, 혹자는 김자점(金自點)이 위협하여 억지로 단안(斷案)을 만들었다 하니, 어찌 그럴 리가 있겠는가. 강문성(姜文星)의 【강씨의 생질이다.】  첩이 저주하는 묘기가 있어 문성의 후처가 그의 저주를 받고 죽었다 한다. 대개 그의 흉악한 모의가 처음엔 그 집에서 비롯되어 결국엔 안팎에서 서로 호응하여 같은 처지에 있는 자들이 서로 구제하였던 것이다. 만약 근거가 없는 일이라면 저주한 그 일의 진상을 어떻게 그가 승복한 공사에 명백하게 언급하였겠는가. 이 일은 위협해서 이루어질 일이 아닌데도 세상 사람들은 아는 자나 모르는 자 모두가 한결같이 의심을 하고 있으니, 애석하게도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신생(辛生)을 국문하자고 청한 것은 김진종(金晉宗)이 이른바 승려를 엄하게 국문하면 자연 승복할 것이라는 말과 서로 같으니, 매우 무리한 말이다. 그대는 나이가 젊은 사람이므로 그 당시 옥사의 실정에 대하여 필시 다 알지는 못할 것이다."
하니, 민정중이 아뢰기를,
"신이 일찍이 그 일의 실상에 대하여 자세히 들어보지 못했었는데, 지금 성상의 하교를 받고 나니 그 전의 의혹이 깨끗이 풀렸습니다. 지난날 이무가 그 일의 단서에 대하여 약간 언급하였으나, 감히 분명하게 말하지 못했는데 신의 생각에는 임금과 신하는 아비와 자식 같으므로 진실로 들은 일이 있으면 마땅히 숨김없이 말씀드려야 한다고 여겨졌기 때문에 감히 상소하였던 것입니다."
하였다. 승지 이홍연(李弘淵)이 아뢰기를,
"지금 매우 자상하신 성상의 하교를 받고 나니, 신하들의 의혹이 이젠 풀리게 되었으며, 여항 간에 떠도는 실없는 말도 이제는 그치게 되었습니다. 다만 무리를 결속지었다는 하교에 대해서는 실로 매우 미안합니다. 오늘날 전하의 신하 중에 어느 누가 역강의 무리란 말입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당초에 떠도는 말이 그 반역의 실상을 숨겼으므로 내가 이것을 지적하여 말한 것이지 오늘날 그러한 사람이 있다고 말한 것은 아니다."
하였다. 상이 또 이르기를,
"이미 말의 실마리를 끄집어냈으니 모두 말을 하겠다. 국가가 불행하여 대역 부도한 사람이 궁중에 들어왔으니 그 일을 말로 다 할 수 있겠는가. 소현(昭顯)은 본래 착한 사람이었으나 다만 마음 속에 주장이 없는 병통이 있었다. 그래서 비할 데 없는 험악한 역강(逆姜)이 오직 애써 임금의 총명을 가리고 흉패한 일을 자행하였지만, 소현 역시 제재를 가하지 못했던 것이다. 예로부터 왕가(王家)의 형제들이 어렸을 때부터 각각 스승에게 나아가 배우다가 어느 정도 성장하면 또 각기 다른 곳에 거처하므로 실지로 서로 모여서 지내는 즐거움이 없고 동궁(東宮)에 있어서는 명분이 존엄하므로 또 자주 서로 만나볼 수가 없다. 선왕(先王)께서 일찍이, 친한 동기간에 각기 다른 곳에 거처해서는 안 된다고 여기시고 이 법규를 과감하게 없애버린 다음 나의 형제에게 명하여 어릴 때부터 성장할 때까지 한 집에서 거처하기를 마치 평범한 사대부 집에서처럼 하였으므로, 높고 낮은 구분이 있다는 것을 모른 채 서로 우애하는 정이 다분하였다.
그런데 변란 후 내가 심양에 잡혀 갔을 때 강씨가 하는 행위를 눈여겨 보니 비할 데 없이 흉험하였는데, 소현은 끝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므로 선왕이 일찍이 소현이 현명하지 못한 것을 한탄하였다. 지난날 심양에 갔을 때 강씨가 평소에 탁자를 받쳐 놓았던 나무 조각을 다락 위에 두었다가 돌아올 때에 소리쳐 말하기를 ‘나무 조각에서 가지와 잎사귀가 돋았다.’고 하면서, 감춰두고 사람들에게 보여주지 않더니, 소현의 상을 당해서는 또 곡하면서 말하기를 ‘내가 처음에 이것을 신기한 상서라고 여겼는데 지금 도리어 재앙이 되었다.’ 하였는데, 대체로 세자의 자리에 있으면서 상서를 바란다는 것은 이것이 과연 무슨 마음이란 말인가.
옛날 허 세자 지(許世子止)가 약을 맛보지 않은 것에 대하여 옛 사람은 오히려 임금을 시해했다085)  고 하였는데, 이 일 또한 어떠한가. 소현(昭顯)이 병이 나자 의원이 진찰을 해 보고 조심하여 조섭하지 아니한 때문이라고 하였는데, 강씨가 싫어하여 이 사실을 숨겼으며, 소현의 상을 당한 뒤에 유복자(遺腹子)마저 살해하여 그 병을 숨긴 흔적을 엄폐하였으니, 이런 일을 차마 하는데 무엇을 차마 못하겠는가. 사람의 아비로서 미혹한 마음에 가리워져서 심지어 자식까지 죽이는 경우가 옛날에도 간혹 있었으나 어미로서 자식을 죽이는 경우는 무조(武曌)086)   말고는 들어보지 못했으니 사람의 도리로 책망할 수조차 없다. 내가 효성이 없어 남에게 신용을 받지 못하므로 세상에 떠도는 실없는 이야기가 오래까지 그치지 않고 있으니, 내 매우 통탄해 마지 않는다."
하니, 민정중이 아뢰기를,
"신이 이미 성상의 하교를 듣고 나니 모든 의혹이 환하게 풀렸습니다. 이후부터는 신민들도 마땅히 의혹을 풀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진실로 의심할 만한 단서가 있었다면 내가 어찌 지금까지 그대로 두었겠는가. 그 아이는 바로 소현의 혈속이며, 그들의 죄가 아니다. 그리고 그 아이가 본래 질병이 많으므로 항상 서울로 데려오고 싶었으나 마침 구애되는 일이 많아서 뜻대로 하지 못했다. 재자관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곳 형편을 들어본 다음에 천천히 처리하려고 한다."
하니, 민정중이 아뢰기를,
"들은 바에 의하면 그 아이 역시 건강하지 않다고 하는데, 만일 어느날 갑자기 기후(氣候)에 몸을 상하여 섬에서 죽게 되면 아마도 전하께서 은혜를 베푸시는 도리가 아닐 듯 싶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나 역시 염려하고 있었다. 마땅히 잘 처리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민정중이 아뢰기를,
"그 사위는 지금 아무 직명이 없어 보통 사람과 같습니다. 국법에 의친(儀親)의 자손이라 하더라도 으레 보관(補官)을 주는 규정이 있는데, 이 사람은 바로 소현(昭顯)의 사위입니다. 왕가(王家)의 혈속을 향리에 사는 보통 사람과 비등하게 할 수 없으니, 관직을 제수하고 녹봉을 주는 것이 타당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러한 일은 조정에서 마땅히 잘 헤아려 처리할 것이다."
하였다. 상이 또 이르기를,
"탐라(耽羅)로 표류해 온 한인(漢人)은 비록 그대가 말하지 않았더라도 나 역시 불쌍히 여기고 있었다. 대의(大義)는 말할 것도 없이 사람의 도리로만 따져봐도 사실 차마 못할 일이다. 지난날 우리 나라 사람이 잘 처리하지 못하고 명나라의 백성을 묶어서 호랑이 입에다 던져 넣어 마침내 모두 참사를 당하게 하였으니, 내 항시 통한을 금치 못한다. 그런데 지금 또 이자들을 저들에게 몰아 보내다니 내가 어찌 차마 이런 일을 하겠는가. 다만 생각해 보면 이미 잘 처리하지 못했으니, 비록 따뜻한 약간의 인정을 베풀어 숨겨주고 보내지 않는다 하더라도 국가의 계획으로 보면 비밀이 누설될 염려가 없지 않고, 누설된 뒤에 저들이 비록 우리 나라에게 책망한다 하더라도 그 염려가 반드시 국가가 멸망하는 데까지 이르지는 않을 것이니 염려할 것이 없다. 그런데 매번 이러한 일로 그 허물을 일을 맡고 있는 신하에게 돌려 으르고 놀리며 만 가지로 욕을 보이고 있다. 이경석(李景奭)과 이경여(李敬輿)는 모두 일을 맡았던 대신으로 거의 불측한 지경에 빠져 아직도 버려진 가운데 있는데, 나로 하여금 임의로 쓰지 못하게 하니 실지로 다시 이와 같은 염려가 있을까 염려된다. 지금 나라를 원망하는 간사한 무리가 기회를 틈타 꾀를 부리려고 하는 자가 없지 않을 것인데, 국가에서 진실로 살펴 분변하기가 어려우므로 비록 의심스럽다 하더라도 어찌 감히 ‘너는 필시 음흉한 역적일 것이다.’ 하고서 죄를 줄 수 있겠는가. 이러한 상황에서는 미봉책을 쓰는 것만 못하므로 한갓 스스로 개탄만 하고 있다. 내 이미 재주가 없는데다 조정에 있는 여러 신하들도 의지할 만한 사람이 없어 시세(時勢)가 여기에 이르니 일이 구차하고 소략한 경우가 많다. 옛 사람이 이르기를 ‘천 리나 되는 넓은 땅을 소유하고서 사람을 두려워한다는 말을 들어 보지 못했다.’ 했는데, 지금 수천 리나 되는 강토를 가지고서 움추린 채 활기를 되찾지 못하고 있으니 더욱 한스럽다."
하였다. 민정중이 아뢰기를,
"시운이 불행하여 이 어려움을 당했는데, 기밀이 사전에 드러나 비밀스러운 계획이 없으니 어찌 크게 걱정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표류해 온 한인(漢人)을 지금 만약 배를 마련해서 돌려보내면 뜻밖에 생길지도 모르는 화를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주(濟州)는 절도이므로 모든 일을 비밀리에 할 수 있으니, 그들을 섬 안에 있게 하고 관에서 늠료(廩料)를 지급하여 여생을 마치도록 하는 것이 어찌 불가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대의 말은 잘 생각해 보고 한 말이라고 하겠다. 다만 만약 비밀을 지키지 못하게 되면 결국 저들의 힐책을 받을 것이니, 당초에 곧바로 보내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그대 말을 시행하기 어렵다마는, 이 다음부터는 비국에 말하여 변신(邊臣)에게 분부하기를 ‘혹시라도 다시 이와 같은 일이 있을 경우 수신(帥臣)에게 번거롭게 보고할 것 없이 바로 비국에 알려 품처토록 하되, 만일 타고 있는 배가 견고하여 실을 만하다면 그곳에서 잘 보호하여 보내도록 하고 배가 부서진 경우에도 즉시 치계하여 조정의 처치를 기다리고 시끄럽게 소문이 나지 않게 하라.’고 하라."
하였다. 상이 또 이르기를,
"지난해에 불러 쓴 신하들은 모두 시골에서 글을 읽던 사람으로 돈독하게 수양을 한 공이 있으니, 만약 그들을 조정에 있게 했다면 어찌 세상의 모범이 되어 사람들로 하여금 공경하고 꺼려하는 바가 되지 않았겠는가. 그 당시 흉적의 무리들이 저희들에게 이롭지 않다고 여기고서 오랑캐에게 유언 비어를 퍼뜨려 그들로 하여금, 척화(斥和)하는 거조가 다시 재야 선비들한테서 나올 것이라고 의심을 하게 하여, 마침내 위협하는 일이 있게 되었다. 시세가 이렇게 되어 그들을 다시 쓰지 못한 것이지 내가 어찌 그들을 잊어버려서 그러했겠는가. 실지로 이 두세 명의 신하에게 화를 끼치게 될까 두렵다."
하니, 민정중이 아뢰기를,
"그 당시에 송시열(宋時烈) 등이 일을 세밀하게 하지 못하여 마침내 낭패되고 말았는데 신은 실로 한스럽게 생각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무릇 사람의 재주에 대하여 어떻게 두어 달 만에 능력이 있는가의 여부를 판단할 수 있겠는가. 사람들이 송시열을 재주가 없다고 말하는데, 나는 그가 재주가 있는지 없는지 아직 시험해 보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지난번에 송시열의 상소에 대하여 내가 비답하기를 ‘비록 시골에 있다 하더라도 생각한 바가 있으면 숨기지 말고 모두 진달하여 나의 헛점과 실책을 보완토록 하되 마치 좌우에 있는 것처럼 하라.’고 했던 것은 사실 뜻한 바가 있어서였다. 다만 형편에 구애되어 지금은 채용할 수 없기 때문에 그 말을 들어보려고 한 것이다."
하니, 민정중이 아뢰기를,
"성상의 하교가 이에 이르렀으니 실로 이는 신민의 다행입니다. 선비가 세상의 실정에 대하여 어두운 점은 있다 하더라도, 성상의 좌우에 두어 드나들며 바른말을 하게 하여 위로는 성상의 덕을 보필하고 아래로는 세상의 본보기가 되게 하는 데 있어서는 선비가 아니면 할 수가 없습니다. 지난날 불러 쓴 신하는 비록 청나라 사람에게 말을 들을까 혐의스러우나 이밖에 어찌 또 채용할 만한 훌륭한 인재가 없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비록 시골에 있는 사람이라도 구애되는 바가 없는 자라면 내가 채용할 수 있다. 과연 누구를 지목하겠는가?"
하니, 민정중이 아뢰기를,
"현재 윤휴·윤선거와 같은 사람들은 모두 유학(儒學)으로 당대의 촉망을 받고 있습니다. 전하께서 특명으로 백의(白衣)를 소견하시기를 고사(古事)처럼 하시어 제각기 갖고 있는 생각을 진달하게 하여 그들의 재주가 쓸만하면 채용하고 그렇지 않으면 돌려보내는 것이 가합니다. 윤휴와 윤선거는 모두 세신(世臣)인데, 만약 그들의 인품을 논한다면 윤휴는 재주와 식견이 탁월하고 윤선거는 국량이 견고하고 확실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선비를 채용하는 방법은 조용히 순서에 따라 해야 하는데, 매양 서둘러 진용하려 하고 세상 사람들도 또 따라서 지나치게 책망을 하여 낭패를 사게 하니, 이야말로 탄식할 일이다."
하니, 민정중이 아뢰기를,
"요즈음 사람들 가운데 세상 일에 전혀 마음을 쓰지 않는 자는 실로 쓸만한 재주가 없습니다만, 이 사람들은 비록 시골에 있다고 하더라도 세상을 잊지 않은 자들이니, 전하께서 정성을 다하여 부르시면 어찌 나와서 전하의 쓰임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 사람의 재주와 학문은 세상에서 추대하는 바이니 여러 신하들에게 물어보아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자, 상이 승지에게 명하여 그들의 성명(姓名)을 써서 올리게 하였다. 상이 또 이르기를,
"그대의 상소 중에 유계의 일을 논하면서 ‘별도로 참소가 자주 있었던게 아니냐.’고 한 것은 까닭이 있다. 그대만 이 말을 한 것이 아니라 그전부터 이런 말이 있었다. 이른바 관용을 베풀었다는 말은 당초에 옥당이 차자를 올렸을 때 너그럽게 답한 것을 지적한 듯한데, 이는 많은 관원에게 답한 것이지 어찌 유계를 위한 것이겠는가. 유계가 상소를 올린 뒤에 곧바로 그의 죄를 다스리지 않은 것은 졸곡(卒哭) 때까지 기다렸다가 조용히 처리하고자 해서였다. 내가 어찌 사람들이 참소하는 말을 듣고서 죄를 주겠는가."
하니, 민정중이 아뢰기를,
"신이 이른바 너그럽게 용서를 했다는 것은 상소를 한 후에도 여러번 근반(近班)에 제수되었기 때문이었고, 이른바 참소가 자주 있었다는 것은 신이 반드시 이러한 일이 있었다는 것이 아니라 처음에 실정이 아닌 일로 성상의 노여움이 갈수록 격렬했으므로 그 이유를 찾지 못하여 혹시 이러한 일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한 것이니, 가상적으로 한 말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유계가 당초에 단지 상소만 했었다면 어찌 노여워할 것이 있었겠는가. 논계(論啓)하여 기필코 자기의 뜻을 펼치려고 했기 때문에 그것이 미웠던 것이다."
하였다. 민정중이 아뢰기를,
"이 일에 대하여 신이 상세히 알고 있으므로 그를 용서해 주는 것이 가하다는 상소를 누차 올렸었습니다만, 지금 마땅히 그 말씀에 대하여 마무리를 짓겠습니다. 그 당시에 전하께서 새로 즉위하셔서 언관을 너그럽게 대하셨으므로 단지 종조(宗祖)와 시호가 겹치는 것을 미안하게 여겼으므로 전례에 합당하지 않은 점을 진달하려 했던 것입니다. 부제학 여이징(呂爾徵)이 최초로 그 논의를 제기하여 두 번이나 회의를 하였지만 결국 차자를 올리지 못했습니다. 심대부가 예를 논의한 거조를 중간에 그만 둘 수 없다 하고 먼저 상소를 올렸는데, 유계도 상소를 잇따라 올렸습니다. 유계가 간관(諫官)이 되었을 때 사피한 말이 실책이 많았으므로 이 일로 죄를 삼으면 저도 달갑게 여기겠지만 이는 언어의 실수에 불과합니다. 그가 선왕을 폄하하고 박대했다는 하교에 대해서는 신은 그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그 뒤에 조빈(趙贇)은 사간이 되고 유계는 헌납이 되었는데, 조빈은 말하기를 ‘이 일은 막대한 전례이므로 다시 논의하지 않을 수 없다.’ 하고 유계도 말하기를 ‘대간이 아뢴 말은 사체가 자못 달라 임금을 의논한 일에 가까우므로 차자를 올려 논쟁하는 것만 못하다.’ 하니 조빈도 그럴 듯하게 여겨 연명(聯名)하여 차자를 올리려고 이미 상소를 초해 놓았는데, 다른 일로 인하여 체직되는 바람에 그 일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유계 등의 본정이 다른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옛 사람은 충후(忠厚)한 기풍이 있었다. 송 인종(宋仁宗)이, 미세한 잘못이 있다 하여 상미인(尙美人)과 여이간(呂夷簡)의 참소를 받아들여 후비를 폐치하는 행위를 하였는데도 당시에 심히 잘못되었다고 하지 않고 묘호(廟號)를 인종(仁宗)이라고 하였었다. 모르겠다만 요즈음 사람의 논의가 송나라 선비보다 얼마나 뛰어나기에 기필코 자기의 뜻을 펼치려 하는가."
하였다. 민정중이 아뢰기를,
"신이 진달하는 것은 그 본정이 사실 다른 뜻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드린 것입니다. 설령 유계 등이 비방한 죄가 있다 하더라도 어찌 성명의 세상에서 금고를 당하게 하여 허물을 덮어주는 덕성을 보여주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비록 구언하는 전교를 내리지 않았더라도 가까이 모시는 신하들은 마땅히 생각한 바가 있으면 반드시 진달하여야 할 것인데 하물며 내가 이미 구언하였고 그대가 또한 숨김없이 모두 진달하였으니, 내가 과실로 여기지 않는다. 비답을 내리지 않은 것은 번거롭게 소문이 날까 염려되었기 때문에 그대를 불러보고 하유하는 것이다."
하였다.

 

4월 27일 무진

상이 남교(南郊)에서 기우제를 지냈다.

 

간원이 차자를 올리기를,
"아, 하늘과 사람이 서로 참여하는 데 있어 조금도 간격이 없으므로 아래에 있는 사람들이 실책을 범하면 하늘에서 재앙이 나타납니다. 천재(天災)와 시변(時變)은 모두 두려운 것이지만 가뭄의 재해는 백성들의 생명에 관계되는 바이니 어찌 더더욱 두려운 것이 아니겠습니까. 예로부터 어진 임금과 올바른 임금들이 공경하고 두려워했던 것은 모두 이 때문이었습니다. 신들이 삼가 살피건대, 전하께서 하루에 세 번씩 경연을 열어 아랫사람들을 예우하시면서 토론과 강마(講磨)를 하시는 등 아랫사람들에게 묻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마음을 간직하는 공부가 계속되지 못하고 실천하는 실상이 극진하지 못하여 기뻐하시거나 노여워하실 때 간혹 정도에 지나치는 경우가 있으며 말씀하시는 사이에도 너무 지나칠 때가 있으니, 삼가 전하께서 학문에 힘쓰시는 실상이 오히려 그 도리를 다하지 못한 바가 있는지 염려됩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끝까지 힘쓰소서.
인재를 나오게 하고 물러가게 하는 것은 국가의 흥망이 달려 있으니 중대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근래에 전형을 맡고 있는 관리들을 보건대, 취사(取舍)할 즈음에 모두 의향에 따라 사람을 위하여 관직을 선택하는 등 대부분 편협적인 정사를 하여 사사로운 일로 공적인 일을 도외시하므로 인재를 선발한 일이 있었다는 말을 듣지 못했으니, 벼슬길이 깨끗하지 못하고 관청이 점점 문란해지는 것은 이상하게 여길 것조차도 없습니다. 옛날 우리 선왕(先王)께서 반정(反正)했을 당시 때로 직접 정사를 맡으셔서 명실이 어떤가를 규핵하고 공로를 고찰하여 상하의 가부를 매우 공정하게 하도록 힘쓰셨습니다. 붕당(朋黨)에 대한 말에 있어서도 항상 엄하게 배척하셨으므로 상신(相臣) 김류(金瑬)가 전장(銓長)이 되었을 때 직접 계칙을 내려 이르기를 ‘경이 인재를 택하는 데 있어서 혹시라도 사정을 따를 경우에는 나에게 상방검(尙方劍)이 있으니 경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하였으니, 사사로움을 버리시고 공적인 일을 넓히신 도가 어찌 위대하지 않습니까.
언로가 통하느냐 막히느냐에 국가의 존망이 달려 있습니다. 삼가 보건대, 전하께서 마음을 비우고 신하들의 간언(諫言)을 받아들이는 성의가 처음과 같이 계속되지 못하고, 으쓱거리는 안색이 혹 천리밖에 오는 사람을 막기도 합니다. 심지어 말 한 마디가 귀에 거슬리면 싫어하는 빛이 얼굴에 나타나고, 한 가지 일만 잘못해도 너무 심하게 꺾어버리시니, 조정에는 바른말 하는 기풍이 없어지고 성상에게는 너그럽게 받아들이시는 미덕이 적습니다. 삼가 전하께서 받아들이시는 정도가 점점 처음만 못한 듯싶습니다.
형벌이란 정치를 보조하는 도구입니다. 형벌이 남용되면 죄없는 백성들에게 벌이 미칠까 두렵고, 형벌이 죄에 맞지 않으면 백성들이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됩니다. 말세(末世)에 거짓과 간사함이 온갖 형태로 나타나므로 어지러운 나라를 다스리는 데는 마땅히 엄중한 법을 사용해야 하겠으나, 국가의 법은 한쪽으로 치우쳐서는 안 됩니다. 당연히 엄중하게 해야할 때 엄중하게 하면 백성들을 죽이더라도 백성들이 감히 원망하지 않겠지만 마땅히 엄하게 하지 않아야 할 때에 엄하게 하면 죽은 자는 다시 살아날 수가 없습니다.
근래에 형벌이 간혹 죄에 맞지 않은 경우가 있습니다. 이미 실시한 형벌은 어쩔 수 없지만 김운(金雲)이 【영암(靈岩)의 아전이다.】  살아 있는 것을 죽은 것처럼 꾸민 것은 정상은 비록 밉지만 사형하지 않는다는 율문으로 논한 것은 그의 죄가 대체로 혹 그럴 수도 있다는 것이겠으나 무거운 쪽으로 죄를 적용해도 불가한 일이 아닙니다만, 최신(崔紳)의 경우는 김운보다 한 등급 아래인데 똑같이 형벌을 적용하는 것은 너무 지나치지 않습니까. 임금이 신하를 부리는 데 있어서는 마땅히 예로 대우해야 하므로 죄가 있을 경우 파직을 하거나 내쫓기만 해야 됩니다. 그런데 약간의 과실을 추문하여 으레 금부(禁府)에 내려서 서리(胥吏)들 처럼 묶어두니, 이것이 어찌 염치를 장려하고 신하를 대우하는 도리이겠습니까.
사치의 피해는 하늘이 내린 재해보다 심한데 쌓여 온 습성이 이미 고질병이 되었으므로 갑자기 고치기 어렵습니다. 여염집에 천박한 아낙네들도 옥(玉)이 아니면 장식품으로 쓰지 아니하고 비단옷이 아니면 입지를 않으니, 그밖의 분수에 넘는 풍습은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신들이 삼가 예조의 길례(吉禮) 때 《등록》을 보건대, 사용한 의복은 면주(綿紬)에 불과하고 기구는 놋쇠 그릇에 불과하니 조종조에 검소하고 절약한 것을 후세에 보여준 덕이 어떠합니까. 지금 공주(公主)의 길례를 행할 때에 궁궐 내에서 장만한 혼수에 대해 외부 사람으로서는 비록 어떠한지 모르겠습니다만, 큰 난리를 겪고 난 지금 백성의 궁핍과 재정의 고갈이 극도에 달했고 게다가 가뭄이 이렇게까지 심한 경우이겠습니까. 그러므로 번거로운 형식을 절감하고 사치와 화려함을 제거하여 중외의 사람들로 하여금 성상께서 재해를 만나 검소하게 하시는 뜻을 알게 한다면, 어찌 국가에 커다란 이익이 있지 않겠습니까."
하니, 상이 너그럽게 답하였다.

 

예조 정랑 서변(徐抃)이 상소하기를,
"주시(周詩)에 이르기를 ‘세 임금이 하늘에 있다.’ 하였으니, 이것은 세 임금의 혼령이 하늘과 더불어 하나가 되어 뒤의 왕과 뒤의 백성에게 복도 주고 재앙도 준다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신은 삼가 생각건대, 인조 대왕의 하늘에 있는 혼령이 하늘과 한몸이 되었으니 하늘의 노여움은 바로 선왕의 노여움입니다. 아비가 자식에게 대해서 사실은 노여워하는 것이 아니라 가르치는 것이니 그렇다면 어찌 노여움을 사랑으로 바꿀 도리가 없겠습니까. 오직 전하께서 마음을 안정하고 하늘을 대하여 선왕의 마음을 내 마음으로 삼아 공경하고 효도할 뿐입니다.
아, 국가가 불행하여 측근에서 변란이 발생하였습니다. 역조(逆趙)는 비록 선왕(先王)의 후궁(後宮)이지만 죄가 크고 악이 극에 달하여 신인(神人)이 모두 함께 분개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용납받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하늘에 있는 선왕의 혼령도 벌을 주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징(李澂)과 이숙(李潚)의 경우는 선왕이 만년에 사랑을 쏟던 자식들입니다. 숙은 물을 것도 없고 징 역시 무슨 죄가 있습니까. 당시에 말하는 자들이 꼬투리를 잡으려다 안 되자, 단지 비록 미리 알았던 흔적이 없기는 하지만 누차 적이 언급하였다는 것으로써 트집을 잡았습니다. 신자(臣子)들이 역적을 토벌하는 의리는 조금도 늦출 수 없으나, 이미 미리 알았던 흔적이 없고 나이도 어리니 실지로 왕자에게는 죄가 없습니다. 왕자에게 죄가 없는데 어머니 때문에, 정신(廷臣)들이 모두 벌을 받아야 한다고 말을 하므로 전하께서 부득이 섬에다 안치하셨습니다. 아, 이것이 어찌 전하의 본심이겠습니까. 아비와 자식의 정리는 저승이나 이승의 간격이 없는 것이니, 하늘에 있는 선왕의 혼령 역시 어찌 어두운 가운데서 생각이 없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신이 전하께서 하늘의 노여움을 공경히 하고 공구 수성하여 미진한 것이 없게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지금 역적의 무리가 이미 평정되었으니 무엇을 의심할 것이 있겠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순임금이 상(象)을 처치했던 방법으로 징과 숙을 처리하소서.
신이 삼가 보건대, 전하의 효성과 우애심은 하늘에서 타고나 은혜가 하찮은 물건에까지 흡족하게 하시며 때를 기다려 잘 처리하시는 것은 신이 모르는 바가 아닙니다. 그러나 오히려 구구하게 언급하여 마지 않는 것은 진실로 전하께서 전에 없던 재해를 만나시어 애태우며 나날을 보내시면서 어떻게 하면 재앙을 그치게 할 수 있을까 생각하여 최선을 다하지 않는 것이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교동(喬桐)의 셋째 아들은 어린 나이에 무엇을 알겠습니까. 전하께서 기어이 잘 처리하려 하신 것은 실로 국가의 성대한 덕업입니다. 청나라에서 물었을 때에 이미 말을 잘 하였으니 밖에 있어서나 안에 있어서 이러쿵 저러쿵 논할 것이 없는데도 신하들이 지나치게 염려하고 있으니, 신은 옳은지 모르겠습니다.
아, 하늘의 노여움이 날로 심해지고 백성들이 거의 죽게 되자, 상하 군신이 허둥지둥 죄수를 심리(審理)하는 일로 오늘날의 재해를 구제하는 방법으로 삼고 있으니 제대로 한 일입니다. 다만 왕자와 왕손이 아직도 갇혀 있으니, 신은 생각건대 전하께서 이 일에 대하여 큰 것은 놓치고 작은 것만 살피는 듯싶습니다. 이렇게 하여 하늘에 대응하면 하늘의 마음을 돌릴 수가 없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 여러 재신들을 조정으로 불러 의논하여 처리하도록 속히 명하소서. 사람들은 모두 형제가 있으니, 누가 감격하지 않겠습니까. 하늘에 대응하는 실상은 여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임금을 사랑하여 숨김이 없는 그대의 정성을 가상하게 여긴다. 어찌 유념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이달 22일에 평안도와 함경도에 많은 비가 와서 곡식들이 모두 깨어났다. 이날은 바로 상이 직접 사직(社稷)에 기도한 날이었으므로 사람들은 지극한 정성에 감동한 것이라고 하였다.

 

인열 왕후(仁烈王后)의 시책 개조 도감 제조(諡冊改造都監提調) 이하를 차등있게 논상하였다.

 

4월 28일 기사

전남도(全南道) 금산군(錦山郡) 임실현(任實縣)과 경상도 문경현(聞慶縣)에 서리가 내렸는데, 도신(道臣)이 이 사실을 알리자 상이 하교하기를,
"지금 남도 지방 두 곳의 도신이 보낸 계본을 보건대, 초여름에 이렇게 서리가 내린 재변이 있다고 하니, 보고는 대단히 놀랍고 두려워하였다. 실로 과인이 정치를 제대로 하지 못하여 친화를 무너뜨리고 질서를 잃은 소치다. 재변은 까닭없이 생기지 않고 반드시 이유가 있는 것이니, 어떻게 빈말로만 자기 허물인 양하고는 실상없는 행위를 해서야 되겠는가. 도신으로 하여금 수행인을 줄여 형식적인 겉치레는 버리고 직접 해읍(該邑)에 가서 수령들이 훌륭한지의 여부, 백성들의 억울한 실정, 의심할 만한 옥사 및 재앙을 불러 일으킬 소지가 있는 일들을 공정하게 채방(採訪)하고 명확하게 규찰하여 보고해서, 백성들의 억울함을 씻어주고 무고한 자들을 위로해 줄 수 있는 터전으로 삼게 하라."
하였다.

 

옥당이 【부응교 권우(權堣), 교리 이태연(李泰淵), 부교리 민정중(閔鼎重)·이정기(李廷夔), 부수찬 김휘(金徽).】  상차하기를,
"삼가 보건대, 전하께서 재변을 겪으신 뒤로 공구 수성하시어 최선을 다하셨으며, 심리(審理)를 드넓게 하고 직접 두 번이나 기도를 하시니, 하늘이 감응하여 단비를 내려주었습니다. 아, 하늘을 멀리 있다 할 수 있겠습니까. 하늘은 정성을 다하면 흠향할 따름입니다. 만약 전하께서 일찍이 이와 같이 성심으로 공구하셨더라면 어찌 오늘날 같은 참혹한 재변이 발생했겠습니까. 전하께서 왕위에 오른 이후로 해마다 가뭄이 들었고 기도한 때만 번번이 비가 내렸으니, 이는 전하의 공구하는 정성이 단지 재변을 당할 때만 절실하고 평소에는 태만했던 소치가 아닙니까. 오직 그 성심이 계속되지 못한 바가 있으므로 결국 영원토록 하늘의 뜻을 누리며 재변을 제거하지 못하는 것이니 이 역시 매우 두려운 일입니다. 아, 강과 바다가 모든 냇물의 장(長)이 된 것은 강과 바다가 아래에 있기 때문이니, 인군이 신하를 다스리는 도 역시 이와 같습니다. 전하께서 사령을 내리실 때에 마음을 비우고 받아들이는 역량이 부족하신 듯하니 이는 아랫사람들에게 잘 대우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조정에 사람다운 사람이 있다고 하겠습니까. 붕당을 지어 아부하는 것이 습성이 되어 시비가 분명하지 못하고 용렬한 자가 높은 자리에 있으므로 염치가 모두 없어졌으니, 전하께서 조정에 임하시어 개연히 조정에 사람이 없다고 탄식하실 만도 합니다.
예로부터 어질고 밝은 제왕들이 신하들을 예우하는 데 있어서 어찌 그들의 훌륭하고 어리석은 것을 가려서 대하는 자세를 높이거나 낮춘 적이 있었습니까. 대체로 인군이 지극히 높은 지위에 있으면서 아랫사람을 예로 대우하지 않으면, 아랫사람이 웃 사람에게 뜻을 전달할 수 없으며 웃 사람이 아랫사람과 교류하지 못하여 결국 막혀 아무 일도 못하게 되고 맙니다. 오늘날 조정에 있는 신하가 혹시 스스로 실수를 범하는 죄가 잇더라도 전하께서는 너무 박하게 대우하지 말아야 합니다. 전하께서 만일 정신(廷臣)을 모두 함께 일할 수 없는 자들이라 하여 싫어하고 박대한다면 군도(君道)는 날마다 오만해지고 아랫사람들의 실정은 날마다 저상(沮喪)될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서 화평한 시대를 찾고 재변을 느슨하게 하는 방도를 강구한다면 뒤로 물러가면서 앞으로 가려 하는 일과 비슷하지 않습니까.
기쁨과 노여움은 비록 필부라 하더라도 오히려 가볍게 나타내지 않습니다. 더구나 인군에게 있어서는 더욱 조심해야 합니다. 그런데 요사이 전하께서는 기뻐해야 할 때에 절도에 맞지 않고 노여워해야 할 때에 간혹 그 정도에 지나칠 때가 있습니다. 조금만 마음에 들어도 포장하는 하교를 걸맞는가 생각지도 않고 내리며, 뜻에 거스리기만 하면 좌천하는 형벌을 내리되 경중을 구분하지 않는 등 사대부가 조금만 잘못해도 문득 옥에 가두고 말하는 자가 대답을 제대로 못하면 매번 견책을 가하시니, 대성인이 너그럽게 용서하고 아랫사람을 이해하는 도리가 어찌 이런 것이겠습니까.
대체로 형벌이란 난리를 다스리는 약석(藥石)입니다. 기강이 무너지고 백성의 심지가 기회만 보아 속이는 이 때를 당하여, 진실로 하루라도 형벌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기강이 수립되고 못 되는 것과 백성의 심지가 안정되고 못 되는 것은 형벌이 엄격한지의 여부에 달린 것이 아니라, 임금의 마음이 정직한가의 여부와 교화가 분명한가의 여부에 달려 있는 문제입니다.
공자가 이르기를 ‘정치를 하는 데 있어서 사형 제도를 쓸 것이 있겠는가. 그대가 【계강자를 지칭함.】  선한 일을 하려들면 백성도 선해질 것이다.’ 하였습니다. 지금 우리 전하께서 기강이 무너진 것을 항시 염려하시고 엄한 형벌로 정돈하고자 하시는데 그 뜻이 실로 어쩔 수 없는 데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기강이 날이 갈수록 더욱 무너져서 수습하여 유지할 수 없게 되었으니, 전하께서 그 일의 근본적인 것은 해결하지 않고 말단적인 것만 치유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당(唐)나라 헌종(憲宗)은 쇠퇴한 세상의 중간쯤 가는 임금이었으나 오히려 덕화를 먼저 베풀어야지 형법(刑法)으로만 다스려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서, 형벌을 사용하여 위력을 과시해야 한다는 우적(于頔)087)  의 말을 채납하지 않고 이에 재상에게 이르기를 ‘우적이 짐(朕)으로 하여금 인심을 잃게 한다.’ 하였습니다. 아, 총명하고 인무(仁武)하신 자질을 가진 전하께서 어찌 헌종보다 낮은 위치에 거하려 하십니까. 근대의 제왕 중에 형벌을 엄하게 실시한 임금이 명나라 고황제(高皇帝)보다 심한 사람이 없는데, 그 조훈(祖訓)에 이르기를 ‘짐이 호원(胡元)의 폐단을 받아서 묵은 오염을 개혁하고자 형법을 준엄하게 한 것이니, 선조의 덕업을 이어받아 지킬 후세의 자손들은 짐을 본받지 말라.’ 하였으니, 아, 이것이야말로 전하께서 마땅히 경계로 삼을 일입니다. 요사이 비록 심리하는 거조를 시행하였지만 간혹 원망을 품은 채 사면되지 못한 자가 있으며 죄는 무거운데 잘못 놓아준 자도 있으니, 이러고서야 원망의 기운을 없애고 화기를 돌릴 수 있겠습니까.
작상(爵賞)은 임금의 큰 권한으로서 관작(官爵)을 나쁜 사람에게 줘도 안 되며, 사사로운 측근에 베풀어도 안 된다는 것이 옛 성인의 분명한 훈계가 아닙니까. 백성을 친히 하고 함께 다스리는 일을 하는 자는 수령만한 자가 없는데 전조(銓曹)가 비의(備擬)할 때 대부분 적합한 사람을 선출하지 아니하고, 열심히 직무를 수행하는 것은 신하의 직분인데 품질을 승급해주는 은혜가 잘못 공이 없는 자에게 주어집니다. 그리고 크고 작은 제배(除拜)가 관직에 맞는지를 따지지 않고 사람을 보고 주며 대각(臺閣)이 사람을 논할 때도 공정하게 하지 않고 사사로이 하니, 정사(政事)가 날마다 문란해지고 국사(國事)가 날마다 잘못되어가는 것을 이상하게 여길 것이 없습니다.
무릇 이러한 폐단은 모두 신하들이 성명을 저버리고 직무를 포기한 잘못에서 나온 것이나, 전하께서 백성들을 가르쳐 인도하는 방법에도 미진한 바가 있어서 그러한 것입니다.
아, 인군은 온 나라의 부(富)가 자기의 부이고 만민이 자기의 백성이므로 별도로 쌓아 사사로이 저장해 두는 것은 원래 사사로움이 없는 천지(天地)의 도(道)가 아닌데, 내수사(內需司)가 백성에게 해를 끼친다는 것은 전하께서 이미 들은 지가 오래되셨을 것입니다. 지난 선조(先朝) 때부터 혁파할 것을 많이 청했지만 그 사이의 형편이 부득이한 경우가 있었으니, 오늘날 비록 영원히 혁파할 수는 없겠지만 사가(私家)에 거느리고 있는 하인들이 주인을 배반코자하여 간혹 그전 문적에 따라 이름을 써 넣어 소속시키기도 하고 어떤 자는 누락되었다고 하여 연줄을 타고 투입하는 등 그 폐단이 엄청난데 팔도가 다 그렇습니다. 이미 다시 조사할 것을 결정하자 송사가 분분하여 백성들의 원망은 갈수록 심해지고 쟁변의 단서는 그칠 때가 없습니다. 어떤 경우는 또 본주(本主)를 유배시켜 내노(內奴)를 차지한 죄로 다스리기도 하므로 궁벽한 시골에 세력 없는 사람은 선조(先朝)의 세업(世業)을 가만히 앉아서 잃게 되어도 감히 항변하지 못하고 단지 초라한 집에서 원망만 할 뿐입니다. 전하께서 이러한 상황을 만약 아신다면 필시 불쌍하게 여기실 것입니다. 투속(投屬)에 관한 한 가지 일에 대해서는 더욱 살펴서 단단히 금지시키지 않아서는 안 되겠습니다.
제궁가(諸宮家)의 농장(農庄)과 어전(漁箭)에 있어서는 연해 지방의 백성들에게 대단한 폐해가 되고 있는데, 지난해에 행한 사핵(査覈)은 이름만 있고 실상이 없어서 더러 굽히지 않고 법대로 시행하는 관원이 있으면 비단 궁노의 참소와 비방이 크게 일 뿐만 아니라 비록 현명한 전하께서도 사정에 따라 처리한 것이 아닌가 의심을 하시니, 신들은 성명의 정치에 대하여 개탄하는 바입니다.
사치하는 폐단이 날이 갈수록 치성하고 달이 갈수록 확대되어 사대부의 복식(服飾)이 화려한 것만 힘쓰고 있으며 배우와 미천한 자들도 오히려 비단옷을 입고 있습니다. 금지령이 비록 시행된다 하더라도 유식한 자들이 오히려 징계하여 두렵게 여기지 않는다면 무지한 백성들이 장차 무엇을 보고 감동을 받아 경계하겠습니까. 신들이 삼가 듣건대, 선조 대왕이 평소에 입는 옷을 면포(綿布)로 지었는데 입시(入侍)한 근시(近侍)들이 그러한 모습을 목격한 자가 많았다고 합니다. 그 당시에는 신하들이 아름다운 옷을 입어서 기롱을 받은 자도 없었으며 모든 물가가 오늘날 같이 심하게 오르지도 않았었습니다. 그러므로 신들은 예모(禮貌)만 갖추고 있어도 이루어진다는 교화의 영향력이 가져온 성과라고 여깁니다. 신들이 또 듣건대, 세종 대왕 때에 양령 대군(讓寧大君)의 첩이 자주빛 옷을 입었다가 금리(禁吏)에게 잡히자 대사헌 오승(吳陞)에게 연줄을 대어 석방시켜줄 것을 청하였는데, 오승이 금리에게 말하여 고하지 말게 하자, 집의 이하가 오승의 잘못을 기록하여 그에게 벌을 내릴 것을 청하니, 상이 오승의 관직을 파척하라고 명하였다 합니다. 당시 법관이 법을 집행한 것과 성조(聖祖)가 법을 이행한 것이 이와 같았는데, 오늘날은 비록 법을 어긴 사람일지라도 궁가에 관계된 자이면 비단 법관(法官)만 감히 손을 쓰지 못할 뿐만 아니라 혹 적발해 낸 자가 있으면 성상의 노여움이 진동하여 누차 견책을 가하곤 합니다. 이러고서야 법이 어떻게 법이 되겠습니까.
아, 오늘날의 폐정(弊政)은 낱낱이 거론할 수도 없으니 오직 전하께서 상황에 따라 처리하시는 데 달렸습니다. 마땅히 처리해야 할 일을 마땅히 처리하는 그 요점은 뜻을 성실하게 하고 마음을 바르게 하는 데 있을 뿐입니다. 《주역》에 이르기를 ‘말과 행실은 군자가 천지를 움직이는 것이다.’하였으니, 전하께서 멀리 지나간 일을 이끌어 올 필요없이 요즈음 가뭄으로 본다면 전하의 언행을 소홀히 할 수 있겠습니까. 천지(天地)가 은연중에 보응하는 것을 어찌 속일 수 있겠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비를 얻었다고 해서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조금도 소홀히 하지 마시고 전전 긍긍하며 비를 얻지 못했을 때처럼 겸손한 마음으로 스스로를 배양하소서. 아, 오늘날의 재변(災變)을 말로 다할 수 있겠습니까. 태음(太陰)이 낮에 빛나고 금성이 하늘에 나타나며 가축이 상도(常道)에 어긋나고 서리가 제때가 아닌데 내렸으니, 전하께서 두려워하시고 조심하여야 할 일이 특히 한재에 관한 것만이 아니니, 오늘 비온 것을 가지고 이젠 되었다고 여기지 마소서."
하니, 답하기를,
"걱정과 사랑을 아끼지 않는 지극한 정성이 여기에 이르렀다. 진실로 나의 경악(經幄)의 신하가 아니었다면 내가 어떻게 과실에 대한 충고를 들을 수 있었겠는가. 매우 감탄하는 바이다. 유념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헌부가 차자를 올려 당시의 폐단을 진달하고, 이어 최신(崔紳)을 과중하게 의율(擬律)한 실책을 말하니, 상이 하교하였다.
"양사(兩司)의 신하들이 대부분 최신을 과중한 형벌을 적용하였다고 말하니, 내가 하필 여러 사람의 뜻을 억지로 뿌리치고서 내 마음대로 행하려 하겠는가. 해부(該府)로 하여금 사형을 감면하여 조율토록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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